"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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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갈등: 쿠바위기와 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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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정세의 변화와 독일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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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g>[https://www.klett.de/produkt/isbn/978-3-12-411590-4?searchQuery=978-3-12-411590-4 교과서 서지사항]</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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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정세의 변화와 독일의 변화==
 
2차 세계대전과 함께 시작된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강대국 사이의 냉전은 1960년대와 그 이후에도 세계 정치를 좌우했다. 그 결과 경쟁적 핵무장, 쿠바 사태, 베트남 전쟁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물론 그 와중에도 긴장완화를 위한 노력 또한 계속해서 시도되었지만, 1980년대 말이 되어서야 동서갈등의 종식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동서갈등의 종식에는 이러한 긴장완화 노력이 기여한 점도 있지만, 세계 정세 변화도 기여하였다. 특히 중국의 부상으로 양극화 되어 있었던 세계 정치권력 구조의 변화가 기여하였다.
 
2차 세계대전과 함께 시작된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강대국 사이의 냉전은 1960년대와 그 이후에도 세계 정치를 좌우했다. 그 결과 경쟁적 핵무장, 쿠바 사태, 베트남 전쟁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물론 그 와중에도 긴장완화를 위한 노력 또한 계속해서 시도되었지만, 1980년대 말이 되어서야 동서갈등의 종식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동서갈등의 종식에는 이러한 긴장완화 노력이 기여한 점도 있지만, 세계 정세 변화도 기여하였다. 특히 중국의 부상으로 양극화 되어 있었던 세계 정치권력 구조의 변화가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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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_Total_1. Le monde au lendemain de la guerre |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갈등: 쿠바위기와 베트남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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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갈등: 쿠바위기와 베트남 전쟁]]
  
1961/1962 쿠바에 소련의 중거리미사일이 배치되면서 세계는 핵전쟁 발발 위험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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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긴장완화와 재경직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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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1973 미국은 북베트남과 베트콩과 전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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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갈등이 세계 정치를 좌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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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국 - 새로운 강대국?]]
미국과 소비에트연방을 중심으로 한 두 진영 사이에 1945년 이래 심화된 적대감으로 세계는 정치적으로 양분화되었다. 미국과 NATO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동맹국들과 소비에트연방과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결성한 소비에트연방의 위성국가들이 양대 진영으로 서로 대치하였다. 양대 진영을 주도한 미국과 소비에트연방은 각기 핵무기로 무장을 하고 세계를 통째로 파멸시킬 수도 있었기 때문에, 두 체제 간 대치 상황은 직접적인 "뜨거운" 전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냉전" 상태를 유지하였다. 양대 강대국은 상대의 영역을 존중해주었고, 기존상태(현상황)를 유지를 유지하였다. 한 쪽이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면 분쟁이 일어났다. 그 분쟁의 강도는 영향력 확대 시도를 통해 상대방의 이해라 얼마나 위협을 받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양대 진영 간 대표적인 분쟁 사례는 쿠바 사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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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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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접근을 통한 변화 - 신동방정책 및 신독일정책]]
1959년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의 주도로 일어난 혁명으로 쿠바에서는 미국의 지원 하에 독재정치를 펼쳤었던 바티스타(Batista) 정권이 무너졌다. 1961년 초 쿠바망명자들은 미국의 도움으로 피그만을 통해 쿠바에 침공하려고 시도 했지만 실패했다. 그 이후 소비에트연방이 쿠바를 침공으로부터 지켜줄 것과 미국을 상대로 경제적 보이코트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카스트로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 되었다. 흐루시초프는 미국과 가까운 곳에 확실한 거점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1962년 쿠바에는 소련의 중거리 미사일이 조용히 배치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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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새로운 도전과제 극복하기]]
  
M1 쿠바와 터키에 배치된 미사일의 사정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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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동독: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삶]]
  
  
p. 11
 
그 결과 소비에트연방은 미국 거의 전역을 핵무기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첩보기관이 미사일 발사대를 발견한 이후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10월 22일 TV 연설 중 소비에트연방에게 미사일 철수를 요구하였다. 핵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전세계는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케네디 대통령은 군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즉각 쿠바에 대해 군사적 대응을 하도록 해상봉쇄를 지시했다. 그 사이 군사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비밀협상이 진행되었다. 10월 24일 해전 발발 직전 상황에서 소련의 함대들이 돌아섰다. 그러나 10월 27일 쿠바 상공에서 미국의 한 정찰비행기가 격추 당하면서 또 다시 핵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미소 간 비밀 협상을 통해 결국 소련은 쿠바에 배치한 미사일을 철수하고,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동시에 미국이 소비에트연방을 위협하기 위해 1959년 터키에 배치한 중거리 미사일도 철수되었다.
 
결과적으로 양국은 각자의 세력범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전세계 앞에서 체면을 유지하면서 갈등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세계는 (이번 사태에도 그랬지만, 미래에도) 강대국들의 상호이해와 양보만이 핵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소비에트연방과 미국은 직접적인 전화연결을 가능케 하는 일명 핫라인을 설치하고 위기사태 시 즉각적으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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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블록의 몰락과 독일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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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스트 하이칭거(Horst Haitzinger)의 캐리커처에서 축제로 표현된 "냉전의 장례식"은 소비에트연방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 때문에 가능했고, 전후 시대 진영 간 대치 상황의 종식을 의미했다. 진영 간 대치 상황에 상황을 더 경직되게 했던 것은 독일의 분단이었다. 분단의 가시적이고 잔인한 상징은 독일을 관통한 경계였다. 감시탑과 철조망 그리고 지뢰밭으로 무장한 경계는 독일의 한복판을 지났고 베를린 장벽은 베를린 시내를 관통했다. 수 미터 달하는 높은 콘크리트 장벽 곳곳에는 조명과 전자보안 장치가 설치된 감시탑들이 있었다. 독일과 베를린을 관통하는 이 경계에서는 사람을 향해 총알이 발사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M2 쿠바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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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 냉전의 장례식
"바로 대문 앞에 미사일을 배치하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캐리커처,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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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 동독과 서베를린 사이의 경계
  
  
베트남 전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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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39
중국과 한반도 일부가 공산화된 후에 미국은 일명 "도미노 이론"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도미노 이론이란 세계 나라들을 도미노에 빗대어 설명하는 이론을 말한다. 이 이론은 도미노 조각이 하나 넘어지게 되면 차례대로 나머지 조각들도 모두 넘어지게 되는 원리가 세계 정치에도 적용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한 나라가 공산화 되면 결국 그 주변에 위치한 이웃국가들까지 모두 공산화된다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1950년대 이후 공산주의의 확산을 적극적으로 막기 위해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훗날 베트남이 된 인도차이나에서 미국은 그곳을 식민지배하고 있던 프랑스가 1954년 철수 한 이후 CIA-요원들을 통해 반공정부를 지원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곳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이 커졌고 결국 1964년 공산화된 북베트남과 미국에 의존하던 남베트남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공산주의 진영을 이끌었던 호치민(Ho Chi Minh)은 미국과 경쟁관계에 놓여 있던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그 결과 북베트남과 베트남 남부에서 활약하던 게릴라(베트콩)들은 미국의 군사 개입에 계속 저항할 수 있었다. 1967년 기준으로 베트남에 파견된 미군의 수는 50만 명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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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트라우마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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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늦여름과 가을 동독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회주의통일당(SED)의 지도부에 대한 불만이 공개적 시위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시위는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플랜카드와 촛불을 손에 들고 정권에 대항하였다. 설치된 지 26년만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동서독 사람들은 서로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1990년 10월 3일은 독일의 역사적 날이 되었다. 독일은 이날 통일을 이루었다.
베트남 정글에서 치러진 전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미군은 주로 눈에 보이지 않은 적군을 이기지 못한 채 군력이 소진되었다. 전쟁은 점점 잔인해졌고, 화학무기 투입과 융단폭격으로 민간 희생자가 점점 늘어났다. 남베트남에서 미국은 동맹국이라기 보다 또 다른 지배국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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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2
 
또한 국제사회는 미국의 참전을 비난하였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미국의 참전을 반대하는 운동이 확산되었다. 결국 닉슨(Nixon) 미국 대통령은 전임자였던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이 시작한 베트남 전쟁을 끝내기로 결심하였다. 1973년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에 휴전협약이 체결되었다. 1975년에는 북베트남 군대가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을 점령하고 호치민시로 개명하였다. 공산화된 통일 베트남은 소비에트연방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겠다는 미국의 목표는 실패로 돌아갔다. 동시에 미국은 사상 처음으로 전쟁에서 지는 실패도 맛보아야 했고, 자유의 수호자로서 미국이 쌓은 명성을 잃었다는 좌절감을 느껴야만 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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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 국가 권력에 대항한 촛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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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 베를린 장벽 위에서 행복해 하는 사람들
  
M3 동남아시아 1945-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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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진영으로 나뉘었던 시대의 종결과 동블록의 해체]]
  
M4 버클리(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난 반전쟁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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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가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 - 동독에서 일어난 혁명]]
양측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자 미국과 서방의 여러 나라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특히 미국의 전쟁 주도를 반대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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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독일 전체를 위한 "화합, 정의, 자유"]]
  
p.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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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원래 하나였던 것이라도 다시 하나가 되려면 시간이 걸린다: 1990년 이후 독일]]
  
M5 케네디와 미사일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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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시대 이후 세계==
1962년 10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은 TV를 통해 방송연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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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한 증거들이 일련의 공격용 미사일발사대가 감옥섬으로 개조된 이 섬에 설치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입증해주었습니다. 모든 발사대는 워싱턴, 파나마 운하 또는 멕시코를 조준하고 있스빈다 (…) 쿠바가 미사일의 대대적인 배치를 통해 이렇게 중요한 전략기지로 갑자기 변신하게 된 것은 미국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치명적인 위협입니다. (…) 이러한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해상로로 쿠바로 운반되는 모든 군사장비에 대한 철저한 봉쇄가 실시될 것입니다. (…) 미국은 쿠바로부터 서방의 그 어떤 국가에 대한 미사일 발사도 모두 미국에 대한 소비에트연방의 공격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그리고 포괄적인 보복공격을 할 것입니다. 자유이 대가는 여전히 높지만, 우리 미국인들은 항상 그 대가를 지불하였습니다. 우리가 결코 선택하지 않을 것은 항복이나 굴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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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ropa-Archiv, Folge 23/1962, D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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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58
  
M6 흐루시초프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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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91년 동서갈등의 종식은 유럽과 세계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지만, 동시에 세계 정치, 경제, 사회 발전을 위한 다양한 위험들을 수반하기도 하였다. 미국과 러시아는 더 이상 적대시 하지 않았고 유럽의 통합은 동블록 해체로 적극적으로 진행되어 유럽연합이 결성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중동지역에서는 여전히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오래 전 사라진 듯 했던 민족갈등(예를 들어 유고슬라비아)이 다시 발생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는 냉전 이후 세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세계화 물결로 개별 국가들은 거대한 세계경제의 흐름에 좌우되는 세계경제의 일부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2001년 9월 11일 사태 이후 서방세계는 테러행위를 일삼는 이슬람 단체들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
1962년 10월 27일 흐루시초프가 케네디에게 보낸 2번 째 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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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해안으로부터 150km 떨어져 있는 쿠바 때문에 불안하다고 하시는데, 사실 터키야 말로 바로 우리 이웃구가입니다. (…) 대통령께서 우리에게 동일한 권리를 인정해주지 않으면서, 미국의 안전과 공격용 무기라고 표현한 미사일들을 철수하라고 요구할 수 있나요?  - 저는 이러한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미국이 공격용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미사일을 쿠바에서 철거하겠습니다.  (…) 그리고 국제연합 앞에서 약속을 하겠습니다. 대신 미국의 대표도 미국이 터키에서 미사일을 철수하겠다고 약속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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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 Department of Stat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1-1963, Volume Xi, Cuban Misslie Crisis and Atermath, nach: Geschichte Lernen Nr. 94 (2003): Kalter Krieg, p.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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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Boris Los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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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tholyoke.edu/acad/intrel/nikita3.h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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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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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7 잘못된 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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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그림)
1992년 쿠바사태에 관한 소비에트의 문서들이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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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상승세를 타는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는 포스터(상단)와 27개 유럽연합회원국 국기(하단)
소비에트의 간부들은 훗날 위기 당시 36개의 핵탄두 중거리 미사일과 (…)  미국의 공격에 대비해 마련한 9개의 단거리 핵미사일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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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맥나마라는 1992년,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이렇게 말했다. "끔찍하다. 미국이 공격했을 경우 () 99% 핵전쟁이 일어날 뻔 했다." 미국, 소련, 쿠바는 서로에 대해 잘못된 예상과 계산과 정보를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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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ter La Feber: America, Russia and the Cold War. New York 1993, p. 228, nach: Geschichte lernen Nr. 94 (2003): Kalter Krieg, p. 39 (번역: Boris Los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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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8 베트남에서 "아군의 포격" - 전세계로 퍼져나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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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그림)
1972년 7월 8일 네이팜폭탄이 투하 된 이후 트랑방이라는 불에 타기 시작한 마을에서 뛰어나오는 장면이다. 이 마을은 마을 주민들을 베트콩으로 오인한 남베트남 비행기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다시 말해 "아군의 포격"을 당한 마을인 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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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스트 하이칭거(Horst Haitzinger)의 2004년 9월 4일 캐리커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벌거벗은 채 뛰어가는 킴 푹라는 소녀의 사진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이 사진은 다양하게 해석되기 시작했다. 이 사진은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 찬반의 근거로 또는 미군이 이 사진이 공개되던 시점 이미 철군을 한 상태였지만, 미국의 전쟁을 주도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하는 근거로 이용되었다.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준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하였다. 네이팜은 끈적거리는 가연성 액체로 대형 화재를 발생시킨다. 네이팜폭탄의 희생자들은 생존 확률이 매우 낮았다. 사진기자 닉 우트는 베트남에 남아 있던 약 55명의 외국 기자 중 하나로 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킴 푹이라는 소녀는 훗날 UNESCO의 평화사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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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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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59
  
M9 사이공에서의 총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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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상단)
사이공의 경찰청장이 길거리에서 베트콩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총으로 쏘았다. 이 그림은 사이공 정권을 지원한 미국에 대한 전세계의 비판을 더욱 촉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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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반도에서 또 다시 일어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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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바니아 소년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족들
  
[?] 쿠바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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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상단)
1962년 10월 소비에트연방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므로써 소비에트연방과 미국 간에 대치하게 되었다. 미국의 해상봉쇄와 미국의 미사일을 터키에서 철수하라는 제안으로 결국 쿠바에 배치된 미사일이 철거되었다. 케네디와 흐루시초프 사이의 신경전은, 핵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계속되는 군비확대로 인해 양대 초강대국 사이에 상호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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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 사이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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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계는 베들레헴의 일반 주택가 사이를 통과한다.
  
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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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
미국은 1964년이래 공산화된 북베트남과의 전쟁을 공식 선언하고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으려고 시도했다. 현대적 살상무기들까지 동원되었지만 미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게다가 미국의 장인한 전쟁방식에 대해 세계는 매우 비판적인 목소리를 높였다. 1973년에는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1975년에는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이는 사실상 북베트남의 승리를 의미했다. 베트남 전쟁의 경험으로 미국은 일명 "베트남 트라우마"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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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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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개 국가의 기업이 분업을 통해 하나의 칫솔을 생산한다.
  
프로젝트 팁
 
"동서갈등 개괄"
 
1945-1975년 동서갈등의 원인과 추이를 정리한 목록을 만들되, 두 개의 열을 만들어 하나에는 유럽에서의 갈등, 또 하나에는 전세계에서 일어난 갈등을 기입하라. 또한 각 갈등 및 사건 간의 연관성을 표시해 일종의 흐름도를 만들어 보라. 새롭게 배운 전문용어 및 이론을 정리해 목록을 만들고 흐름도 내 필요한 곳에 각 개념을 적어 넣어라.
 
(정보학 과목과 연계)
 
  
질문과 심화 탐구 제안
 
(1) 본 장에서 소개된 사건 중 하나를 선택하여 사건에 대한 신문기사를 작성하라. 이때 헤드라인과 사설도 작성하고 당시 사회적 분위기로 설명하라.
 
(2) 케네디와 흐루시초프의 서로 다른 입장을 M5, M6을 토대로 찾아내고 M1에 언급된 것처럼 전술적 위치도 반드시 고려하라.
 
(3) 자신만의 표현방식으로 M7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리하고 세계정치 상황에 어떠한 우협을 줄 수 있는지르 설명하라.
 
(4) M2의 캐리커처를 설명하라
 
(5) M4, M8, M9를 토대로 베트남 전쟁에 과한 청소년들의 태도와 입장을 조사해보라(노래가사, 신문기사, 인터뷰 등).
 
(6) "베트남 트라우마"라는 표현을 설명하라.
 
  
=== [[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Total_2. Le monde au lendemain de la guerre | 긴장완화와 재경직 사이에서]] ===
 
=== [[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_Total_3. Le monde au lendemain de la guerre | 중국 - 새로운 강대국?]] ===
 
=== [[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_Total_4. Le monde au lendemain de la guerre | 접근을 통한 변화 - 신동방정책 및 신독일정책]] ===
 
=== [[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_Total_5. Le monde au lendemain de la guerre | 새로운 도전과제 극복하기]] ===
 
=== [[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_Total_6. Le monde au lendemain de la guerre | 동독: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삶]] ===
 
  
==동블록의 몰락과 독일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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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0년 이후 미국과 소련]]
=== [[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_Total_1. Le monde au lendemain de la guerre |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갈등: 쿠바위기와 베트남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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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_Total_2. Le monde au lendemain de la guerre | 긴장완화와 재경직 사이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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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_Total_3. Le monde au lendemain de la guerre | 중국 - 새로운 강대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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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_Total_4. Le monde au lendemain de la guerre | 접근을 통한 변화 - 신동방정책 및 신독일정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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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블록의 몰락과 독일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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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합된 유럽은 어디까지인가?]]
=== [[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_Total_1. Le monde au lendemain de la guerre | 1990년 이후 미국과 소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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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Total_2. Le monde au lendemain de la guerre | 통합된 유럽은 어디까지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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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국가동맹 형태와 연방국가 형태 사이의 유럽]]
=== [[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_Total_3. Le monde au lendemain de la guerre | 중국 - 국가동맹 형태와 연방국가 형태 사이의 유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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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_Total_4. Le monde au lendemain de la guerre | 인종과 국가 간 갈등 - 유고슬라비아의 내전]] ===
+
[[4. 인종과 국가 간 갈등 - 유고슬라비아의 내전]]
=== [[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_Total_5. Le monde au lendemain de la guerre | 분쟁지역 중동]] ===
+
 
=== [[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_Total_6. Le monde au lendemain de la guerre | 세계는 하나가 되는가? 세계화의 여러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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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분쟁지역 중동]]
=== [[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_Total_7. Le monde au lendemain de la guerre | 911사태의 충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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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세계는 하나가 되는가? 세계화의 여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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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911사태의 충격]]
  
 
==문화적 흔적을 찾아서==
 
==문화적 흔적을 찾아서==
=== [[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_Total_1. Le monde au lendemain de la guerre | 자유주 바이에른과 바이에른을 구성하는 지역들]] ===
+
 
=== [[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Total_2. Le monde au lendemain de la guerre | 바이에른 지역의 변화 - 사례: 에어랑겐(Erlangen), 대도시가 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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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발전은 경험을 다음 세대에 전수해줄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때문에 가능하다. 이 능력은 이 지구상에 발달한 모든 문화의 토대를 이룬다. 물론 이러한 능력은 언어, 문자, 관습 등과 같은 도구를 이용해 인간 사이에 소통이 가능해야만 발휘될 수 있다. 이러한 소통가능성이 보장되어야만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주변환경 즉, 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과 더 넓은 의미에서의 주변 환경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 [[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_Total_3. Le monde au lendemain de la guerre | 바이에른의 이민실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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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장에서는 바이에른주의 역사 상 중요했던 순간들을 정리해보면서, 바이에른주가 어떻게 해서 계속 변해왔는지 살펴보겠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다시 말해 미래를 위한 "문화적 흔적"을 어떻게 남겨야 할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 [[교과서:독일:Geschichte und Geschehen Band 5 - Bayern(Klett 2013)_Total_4. Le monde au lendemain de la guerre | 시민사회와 시민들의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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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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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트 예팅엔(Markt Jettin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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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서쪽에서 촬영한 장면 (약 19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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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서쪽에서 촬영한 장면 (약 19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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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상단 배경에는 당시 아직 독립된 게마인데(Gemeinde)였던 셰파흐(Scheppach)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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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통합된 예팅엔-셰파흐(Jettingen- Schepp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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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쪽이 건설 및 산업 지대가 집중되어 있는 예팅엔이고, 뒤쪽이 셰파흐 지역이다. (남쪽에서 촬영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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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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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내 기독교와 이슬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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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하임(Mannheim)의 야부스 술탄 젤림(Yavus Sultan Selim) 사원과 립프라우엔 교회(Liebfrauenkir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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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CEF 봉사자 회의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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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는 UNICEF 자원봉사자 그룹이 수백 개가 넘는다. 이들 단체는 아이들이 당하는 차별과 아동착취에 대해 알리는 홍보활동을 하면서 전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UNICEF 프로젝트들의 성공적인 실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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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 - 여러 가지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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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보호와 재난구호 연방청의 홍보 팜플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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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보호 및 재난구호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단체를 통해 참여할 수 있다. 독일적십자사, 말테저(Malteser) 구호단체, 소방자원봉사협회, 노동자/사마리아인연맹(Arbeiter und Samariter Bund), 기술구호단체(Technisches Hilfswerk), 요하니터 사고구호(Johanniter Unfallhilfe), 독일생명구호단체(Deutsche Lebens-Rettungs-Gesellschaft)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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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유주 바이에른과 바이에른을 구성하는 지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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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이에른 지역의 변화 - 사례: 에어랑겐(Erlangen), 대도시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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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이에른의 이민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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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시민사회와 시민들의 참여]]

2015년 12월 30일 (수) 14:57 기준 최신판

세계 정세의 변화와 독일의 변화

2차 세계대전과 함께 시작된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강대국 사이의 냉전은 1960년대와 그 이후에도 세계 정치를 좌우했다. 그 결과 경쟁적 핵무장, 쿠바 사태, 베트남 전쟁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물론 그 와중에도 긴장완화를 위한 노력 또한 계속해서 시도되었지만, 1980년대 말이 되어서야 동서갈등의 종식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동서갈등의 종식에는 이러한 긴장완화 노력이 기여한 점도 있지만, 세계 정세 변화도 기여하였다. 특히 중국의 부상으로 양극화 되어 있었던 세계 정치권력 구조의 변화가 기여하였다.

<그림 캡션: 상> 중국의 경제 위엔다(Yuand)라는 중국의 에어컨생산업체의 아침 조회

<그림 캡션: 하> 베트남 전쟁 워싱턴 소재 "베트남 전쟁 재향군인 기념관" 앞에서 베트남 전쟁 용사와 그의 아들

p. 9 세계 강대국들의 긴장완화 노력을 통해 독일에게도 새로운 기회들이 열렸다. 1969-1982년 독일연방공화국의 정권을 잡고 있던 사민당/자민당 연정은 새로운 동방정책(Ostpolitik) 및 독일정책(Deutschlandpolitik)을 추진했는데, "접근을 통한 변화"를 통해 동유럽 이웃국가들과의 긴장이 완화될 수 있었다. 국내정치적으로는 1968년 대학생들의 시위와 이후 발생한 수많은 테러로 인해 독일은 어려움을 겪었다. 반면 동독은 이 시기 생존과 일상생활 유지라는 전혀 다른 문제들을 극복해야만 했다.

<그림 : 좌> "건강한 뿌리의 힘으로 모든 장벽이 무너질 것이다." (1972년 체결된 기본조약(Grundlagenvertrag)에 관한 볼프강 힉스(Wolfgang Hicks)의 캐리커처)

<그림 : 우> 1968년 뮌헨에서의 대학생 시위 시위 참가자들이 칼 막스(Karl Marx), 체 게바라(Che Guevara),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호 치민(Ho Chi Minh)의 사진을 들고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림 : 하 1> 동독에서의 일상 - 여성 속옷과 이데올로기 동독의 한 쇼윈도우의 모습이다.

<그림 : 하 2> 동서갈등의 완화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쵸프 소련 대통령의 협상을 통해 군비축소와 세계정치의 긴장완화 시대가 열렸다.

1.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갈등: 쿠바위기와 베트남 전쟁

2. 긴장완화와 재경직 사이에서

3. 중국 - 새로운 강대국?

4. 접근을 통한 변화 - 신동방정책 및 신독일정책

5. 새로운 도전과제 극복하기

6. 동독: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삶


동블록의 몰락과 독일통일

호르스트 하이칭거(Horst Haitzinger)의 캐리커처에서 축제로 표현된 "냉전의 장례식"은 소비에트연방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 때문에 가능했고, 전후 시대 진영 간 대치 상황의 종식을 의미했다. 진영 간 대치 상황에 상황을 더 경직되게 했던 것은 독일의 분단이었다. 분단의 가시적이고 잔인한 상징은 독일을 관통한 경계였다. 감시탑과 철조망 그리고 지뢰밭으로 무장한 경계는 독일의 한복판을 지났고 베를린 장벽은 베를린 시내를 관통했다. 수 미터 달하는 높은 콘크리트 장벽 곳곳에는 조명과 전자보안 장치가 설치된 감시탑들이 있었다. 독일과 베를린을 관통하는 이 경계에서는 사람을 향해 총알이 발사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상단:) 냉전의 장례식 (하단:) 동독과 서베를린 사이의 경계


p. 39

1989년 늦여름과 가을 동독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회주의통일당(SED)의 지도부에 대한 불만이 공개적 시위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시위는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플랜카드와 촛불을 손에 들고 정권에 대항하였다. 설치된 지 26년만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동서독 사람들은 서로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1990년 10월 3일은 독일의 역사적 날이 되었다. 독일은 이날 통일을 이루었다.


(상단:) 국가 권력에 대항한 촛불들 (하단:) 베를린 장벽 위에서 행복해 하는 사람들


1. 두 진영으로 나뉘었던 시대의 종결과 동블록의 해체

2. "우리가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 - 동독에서 일어난 혁명

3. 독일 전체를 위한 "화합, 정의, 자유"

4. 원래 하나였던 것이라도 다시 하나가 되려면 시간이 걸린다: 1990년 이후 독일

냉전 시대 이후 세계

p. 58

1990/91년 동서갈등의 종식은 유럽과 세계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지만, 동시에 세계 정치, 경제, 사회 발전을 위한 다양한 위험들을 수반하기도 하였다. 미국과 러시아는 더 이상 적대시 하지 않았고 유럽의 통합은 동블록 해체로 적극적으로 진행되어 유럽연합이 결성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중동지역에서는 여전히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오래 전 사라진 듯 했던 민족갈등(예를 들어 유고슬라비아)이 다시 발생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는 냉전 이후 세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세계화 물결로 개별 국가들은 거대한 세계경제의 흐름에 좌우되는 세계경제의 일부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2001년 9월 11일 사태 이후 서방세계는 테러행위를 일삼는 이슬람 단체들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


(좌측 그림) 1948년 상승세를 타는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는 포스터(상단)와 27개 유럽연합회원국 국기(하단)


(우측 그림) 호르스트 하이칭거(Horst Haitzinger)의 2004년 9월 4일 캐리커처)


p. 59

(좌측 상단) 발칸반도에서 또 다시 일어난 전쟁 한 알바니아 소년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족들

(우측 상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 사이의 경계 이 경계는 베들레헴의 일반 주택가 사이를 통과한다.

(하단) 글로벌화 11개 국가의 기업이 분업을 통해 하나의 칫솔을 생산한다.



1. 1990년 이후 미국과 소련

2. 통합된 유럽은 어디까지인가?

3. 국가동맹 형태와 연방국가 형태 사이의 유럽

4. 인종과 국가 간 갈등 - 유고슬라비아의 내전

5. 분쟁지역 중동

6. 세계는 하나가 되는가? 세계화의 여러 모습

7. 911사태의 충격

문화적 흔적을 찾아서

문화의 발전은 경험을 다음 세대에 전수해줄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때문에 가능하다. 이 능력은 이 지구상에 발달한 모든 문화의 토대를 이룬다. 물론 이러한 능력은 언어, 문자, 관습 등과 같은 도구를 이용해 인간 사이에 소통이 가능해야만 발휘될 수 있다. 이러한 소통가능성이 보장되어야만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주변환경 즉, 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과 더 넓은 의미에서의 주변 환경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본 장에서는 바이에른주의 역사 상 중요했던 순간들을 정리해보면서, 바이에른주가 어떻게 해서 계속 변해왔는지 살펴보겠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다시 말해 미래를 위한 "문화적 흔적"을 어떻게 남겨야 할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상-하 순서) 마르크트 예팅엔(Markt Jettingen) 좌: 북서쪽에서 촬영한 장면 (약 1955년) 우: 남서쪽에서 촬영한 장면 (약 1960년) 왼쪽 상단 배경에는 당시 아직 독립된 게마인데(Gemeinde)였던 셰파흐(Scheppach)가 보인다.

2006년 통합된 예팅엔-셰파흐(Jettingen- Scheppach) 앞쪽이 건설 및 산업 지대가 집중되어 있는 예팅엔이고, 뒤쪽이 셰파흐 지역이다. (남쪽에서 촬영한 장면)


p. 89 유럽 내 기독교와 이슬람교 만하임(Mannheim)의 야부스 술탄 젤림(Yavus Sultan Selim) 사원과 립프라우엔 교회(Liebfrauenkirche)


UNICEF 봉사자 회의 2005년 독일에는 UNICEF 자원봉사자 그룹이 수백 개가 넘는다. 이들 단체는 아이들이 당하는 차별과 아동착취에 대해 알리는 홍보활동을 하면서 전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UNICEF 프로젝트들의 성공적인 실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구호 - 여러 가지 도전 (주민보호와 재난구호 연방청의 홍보 팜플렛) 주민보호 및 재난구호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단체를 통해 참여할 수 있다. 독일적십자사, 말테저(Malteser) 구호단체, 소방자원봉사협회, 노동자/사마리아인연맹(Arbeiter und Samariter Bund), 기술구호단체(Technisches Hilfswerk), 요하니터 사고구호(Johanniter Unfallhilfe), 독일생명구호단체(Deutsche Lebens-Rettungs-Gesellschaft) 등이 있다.


1. 자유주 바이에른과 바이에른을 구성하는 지역들

2. 바이에른 지역의 변화 - 사례: 에어랑겐(Erlangen), 대도시가 되다

3. 바이에른의 이민실태

4. 시민사회와 시민들의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