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미국:America, Past and present 2,since 1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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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hee924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6년 2월 22일 (월) 10:48 판 (4. 검토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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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차

  • 16장. 재건 시대의 어려움
  • 17장. 서부: 제국 개척
  • 18장. 산업사회
  • 19장. 도시 사회를 향하여, 1877-1900년
  • 20장. 1890년대의 정치적 재편성
  • 21장. 제국을 향하여
  • 22장. 진보주의 시대
  • 23장. 진보주의 시대의 루즈벨트부터 윌슨까지
  • 24장. 교전국
  • 25장. 근대 미국 전환기
  • 26장.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뉴딜정책
  • 27장. 미국과 세계, 1921-1945년
  • 28장. 냉전의 시작
  • 29장. 풍요와 불안감
  • 30장. 격동의 시대, 1960년대
  • 31장. 신보수주의의 등장, 1969-1988년
  • 32장. 21세기의 시작, 1989-2012년

2. 한국 관련 내용

p. 566 (4-5번째 문단)
1905년 8월 루즈벨트 대통령은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평화회의를 개최했다. 평화회의의 결과로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일본이 극동 지역의 지배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정책 조정을 위해 루즈벨트 대통령은 태프트 육군 장관을 동경에 파견하여 필리핀을 침략하지 않는 조건으로 한국에 대한 일본의 통치를 인정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을 협상하게 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자유재량 허가는 문호개방정책을 위배했지만 루즈벨트 대통령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미일관계는 1906년 샌프란시스코 교육청이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학생을 분리하여 별도의 동양 학교에 보내도록 명령했을 때 다시 한 번 위기에 부딪쳤다.


p. 641 (2번째 문단)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일본은 태평양 지역에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발전하는 자국 산업 경제 유지에 필요한 원자재가 부족했던 일본은 아시아 본토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기로 결정했다. 일본은 1905년 한국을 점령하고 제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국 북동 지방의 산업 지역인 만주의 광산, 항구, 철도까지 지배력을 확장해나갔다. 결국 미국은 중국을 포기하거나 무력으로 일본의 확장을 반대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p. 650 지도

지도에 “한국”이 표기되어 있음.


p. 673-674 지도

  • 지도 내용

6.25 전쟁(1950-1953년) 중국 – 압록강 – 평양 – 판문점 – 서울 -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15일 - 남한 황해 – 부산 - 부산 경계, 북한군 진출 최남단, 1950년 9월 – 38선 - 휴전선 1953년 북한 – 일본해 - UN 진출 최북단, 1950년 11월

  • 소련
    • 국제국경, 1950년
    • 북한 침략, 1950년 6-9월
    • UN 공격, 1950년 9-11월
    • 공산주의 중국 공격, 1950년 11월-1951년 1월
  • 6.25전쟁, 1950-1953년

1년간 한반도 남북을 오간 전투 끝에 38선 북쪽에서 전쟁이 중단되었다. 1953년 7월 휴전 이후, 휴전선을 기준으로 북한과 남한이 분단되었다.

(본문)

  • 6.25 전쟁

아시아에서 한국은 미국과 소련의 최후 결전지였다. 오랜 기간 동안 동북아시아 국제경쟁의 중심에 있었던 한국은 1945년 38선을 기준으로 분단되었다. 러시아는 산업지대 북한을 점령하고 김일성의 집권 하에 공산주의 국가를 설립했다. 농업지대 남한에서는 보수파 민족주의자 이승만이 미국의 후원을 받는 통치자가 되었다. 양측 정권 모두 국가 통일을 위한 유엔의 선거 요청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은 1949년이 되자 대부분의 점령군을 철수시켰다. 하지만 러시아는 북한의 군사 훈련을 지원했고 미국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승만이 무력 정복으로 통일을 시도할까 우려하여 더욱 제한적인 군사적 지원을 남한에 제공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엄청난 위력으로 갑작스럽게 38선을 넘어왔다. 스탈린은 사전에 북한 침략을 승인했다. 1950년 1월 소련 지도자는 마오쩌둥에게 극동 지역에 위치한 얄타 지역을 무너뜨릴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다(그리고 “될 대로 되라지”라고 말했다). 4월 스탈린은 김일성이 남한 공격 승인을 받기 위해 모스코바를 방문하자 미국이 이승만을 버릴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기꺼이 승인했다. 하지만 언제나 신중을 기하는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만약 북한이 크게 공격을 받더라도 나는 손 끝 하나 까닥하지 않을 것이다. 마오쩌둥에게 도움을 요청해라"라고 말하며 소련의 지원은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마오쩌둥 역시 조금의 망설임을 보였지만 북한의 침략 계획을 5월에 승인하였다.

미국의 반응에 대한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의 침략을 1930년대 소련의 공격을 연상시키는 명백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 “히틀러, 무솔리니, 일본군이 10년, 15년, 20년 전에 했던 것과 동일하게 공산주의가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었다"라고 기록했다. 애치슨의 조언에 따라 트루먼 대통령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했고 소련의 임시 참여 거부를 기회로 삼아 북한을 침략국으로 규탄하고 회원국의 집단 안보 활동 동참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며칠 후, 일본을 통해 한반도에 도착한 미군은 남한에서 전투를 시작했다. 3년 이상 지속된 분쟁은 엄밀히 말하면 유엔의 원조 하에 진행된 국지적 군사 행동이었다. 사실상 미국이 소련의 위성 국가와 아시아에서 전쟁을 벌인 것이다. 전쟁 초반에는 북한군이 한반도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면서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8월 미군은 부산 근처에서 북한군의 전진을 중단시켰고, 9월 맥아더 장군이 한반도 허리 부분에 위치한 인천에서 탁월한 상륙 작전을 펼치면서 북한군을 차단하고 대부분 괴멸시킴으로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다. 트루먼은 승리에 힘입어 본래 목적인 38선 재건을 넘어 군사력을 통한 한반도 통일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미 행정부는 북한을 침략하지 말라는 중국의 계속되는 경고를 무시했다. 애치슨은 “중국이 개입하는 것은 완전히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대응했다. 대규모 중국군이 만주에 모이고 있다는 CIA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트루먼 대통령과 자문단은 총력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소련이 중국을 저지할 것이라고 계속해서 믿었다. 맥아더 장군 역시 중국이 한국에 있는 미군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맥아더 장군은 10월 트루먼에게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의 개입이 두렵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만약 그들이 압록강을 건너 한국으로 온다면 “최악의 학살이 벌어질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미 대통령 중 이와 같이 어리석은 조언을 받아들인 사람은 드물다. 중국은 소련의 꼭두각시 인형이 아니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압록강을 향해 당당하게 전진하자 중국군은 11월 말에 매우 파괴적인 역습을 했다. 이는 맥아더 장군을 놀라게 했으며 그해 말 미군을 북한에서 몰아냈다. 맥아더 장군은 38선 근처에서 전쟁을 안정화시켰으며, 트루먼이 한반도 통일 포기를 결정하자 미 의회에서 “승리는 대체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새로운 공격과 선전포고를 주장했다. 트루먼은 1951년 4월 11일 태평양의 유명한 영웅을 사령관 지위에서 해임시켰다. 처음에는 맥아더가 해임 명령을 철회하도록 대통령을 설득하는 것처럼 보였다. 많은 관중들이 맥아더의 귀환을 환영하고 아시아에서의 반공산주의 승리 외침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미 행정부는 특별국회청문회에서 맥아더의 전략은 유럽 전체를 소련의 공격에 노출시킬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효과적인 반격을 가했다. 트루먼의 합창의장인 오마 브래들리 장군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와의 “최후의 결전”은 “잘못된 전쟁이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적”과 하는 것이라고 간결하게 말했다.

미 의회와 국민들은 맥아더 장군의 귀환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6.25 전쟁은 공산당과의 휴전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38선 근처에서 마무리되었다. 미 대통령은 초기의 목적인 남한 방어와 집단 안보 원칙을 달성했다. 하지만 무력을 사용하여 한반도를 통일시키려는 모험은 미국 국민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위상을 떨어트렸다. 최종 분석에 따르면 6.25 전쟁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전쟁으로 인한 대규모 미군 재무장이었다. 6.25 전쟁으로 NSC-68이 이행되면서, 미군 수는 350만 명으로 확대되었고, 방어 예산이 500억 달러로 증가했으며,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모로코까지 장거리 지역에 미군 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비로써 미국은 세계 경쟁 구도에서 무기와 발언의 힘으로 소련과 대결할 수 있게 되었다.


p. 690 (5번째 문단)
냉전은 제 2차 세계대전 종식 후 확장 속도가 더디어진 시기에 경제가 필요로 하는 추가 동력을 제공하였다. 마셜플랜과 그 외의 대외원조계획은 대규모 수출에 대한 자금을 제공했다. 6.25 전쟁은 짧은 침체기를 뒤엎는데 도움을 주었고, 미 정부의 총, 비행기, 군수품에 대한 상당한 지출은 계속되는 번영을 보장했다. 1952년 미국은 연방 정부 예산의 2/3인 440억 달러를 국방에 지출했다.


p. 777 (2번째 문단)
아시아계 미국인 중에는 중국이 가장 큰 단일 집단을 형성했고, 필리핀, 일본, 인도, 한국, 베트남이 그 뒤를 이었다. 일본을 제외하고 아시아계 미국인구의 빠른 성장 주요인은 이민이었다. 1980년대 아시아인은 미국 전체 이민자의 절반가량을 차지하였다. 아시아인의 유입은 점차적으로 줄어들었지만 이민자 자녀들이 아시아 인구에 추가되었다.

3. 간략 분석

중등학생 대상의 미국 역사 교과서로서 미국 과거와 현재 1권에 이어 1865년 이후의 자국 역사를 다루고 있다. 재건 시대의 어려움, 서부: 제국 개척, 산업사회, 도시 사회를 향하여(1877-1900), 1890년대의 정치적 재편성, 제국을 향하여, 진보주의 시대, 진보주의 시대의 루즈벨트부터 윌슨까지, 교전국, 근대 미국 전환기,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뉴딜정책, 미국과 세계(1921-1945), 냉전의 시작, 풍요와 불안감, 격동의 시대(1960년대), 신보수주의의 등장(1969-1988), 21세기의 시작(1989-2012)을 소제목으로 총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 자국의 역사적 흐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국관련 내용으로는 냉전의 시대 부분에서 한국전쟁을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다.

4. 검토 의견

페이지 한국 관련 기술 내용 검토 의견 개선 과제 코드
p. 673-674 ① <지도>공산주의 중국 공격, 1950년 11월-1951년 1월, ②<본문>중국은 소련의 꼭두각시 인형이 아니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압록강을 향해 당당하게 전진하자 중국군은 11월 말에 매우 파괴적인 역습을 했다. 이는 맥아더 장군을 놀라게 했으며 그해 말 미군을 북한에서 몰아냈다. 맥아더 장군은 38선 근처에서 전쟁을 안정화시켰으며, 트루먼이 한반도 통일 포기를 결정하자 미 의회에서 “승리는 대체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새로운 공격과 선전포고를 주장했다. 중공군(중국군)의 한국전쟁 개입은 10월임. C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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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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