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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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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에서의 영향권이 그려져 있다. 한국은 일본의 영향권으로 표시되어 있다.]<br>
 
지도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에서의 영향권이 그려져 있다. 한국은 일본의 영향권으로 표시되어 있다.]<br>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음<br>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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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97) [10. 1200년도 이전의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미술: 남아시아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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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10-1: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 한반도를 ‘한국’으로 표시.
  
심화학습: 세계사적 사건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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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301) [10. 1200년도 이전의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미술]
청일전쟁: 1868년의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개혁과 근대화의 시기에 들어섰고 제국주의 세력의 하나로 성장했다. (아래 좌측의 지도 참조) 일분은 서구의 군사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선진적인 산업경제를 발전시켰으며 심지어 그들이 정치체제를 서구화하기 까지 하였다. 일본이 경제적, 사회적, 군사적으로 팽0창하면서 민족주의의 부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1894년 8월, 조선에 대한 청과 일본의 갈등은 청일전쟁으로 비화하였다. 일본의 더 현대적인 군대는 쉽게 청의 대규모 군사력을 격퇴시켰다. 그 결과로 청은 타이완과 다른 지역을 일본에 할양했고 이로인해 일본이 세계 주요 열강의 지위를 얻게 되는 신호가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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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속 문맥읽기: 불교 (싯달타 왕자의 출가, 부처의 가르침과 ‘부처’ 개념에 이은 4번째 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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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바다(소승불교)’ 또는 ‘니카야’로 알려진 초기 불교에서는 ‘열반’에 이르러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인의 수양을 강조했다. 소승불교는 주로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 지역에 남아 있다. 소승불교만큼 오래된 마하나야(대승불교)라는 또 다른 형태의 불교는 주로 북인도에서 각광을 받았고 중국과 한국, 일본, 티베트(밀교)에 번성했다. 대승불교의 기초는 모든 중생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개인의 열반 뿐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는 것이 목표이다. 많은 불교학파에서 석가모니 외의 다른 부처들이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미륵은 지상에 나타날 다음 부처라고 알려진 인물이다. 몇몇 분파에서는 부처가 되기 직전 단계인 보살(지혜로운 자) 개념을 받아들이며, 보살은 열반에 이르기 직전에 있는 인물로 다른 이들도 부처가 될 수 있도록 돕는 이들이라고 믿는다. 미술에서 보살과 부처는 의복과 장식으로 뚜렷하게 구분된다. 보살은 인도 왕자와 같은 옷을 입고, 부처는 승려복을 입는다.
  
'''p. 362'''<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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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331) [11. 1279년도 이전의 중국과 한국 미술]
미국의 해외 개입<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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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미술 개관을 설명한 뒤 마지막 단락) 중국 문명은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 중국 학문은 계속 한국 문화의 발전을 촉진했고, 그 다음으로 한국이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
[미국이 해외 문제에 개입한 내용 들이 연도와 함께 간단히 언급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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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11.1 초기 중국과 한국 미술의 발전기와 지역적 양식을 찾아보고, 중국 전통과 한국 전통 간의 관계를 알아보자.
1950 북한이 남한을 침입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미군에게 남한을 방어하도록 명령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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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신석기 시대부터 13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한국이 다양한 예술 작품에서 주로 다룬 주제와 소재들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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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중국, 한국의 예술 역사와 유, 불, 도교 전통 간의 관계를 조사해 보자.
  
'''pp. 368-369'''<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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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333)
평화중재자 루즈벨트<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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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11-1 중국과 한국>  
아시아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의 주요 관심은 중국의 무역개방을 지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과 러시아간의 점증하는 갈등은 아시아의 안보에 위협이 되었다. 이런 분쟁은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일본의 군사력이 러시아를 능가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침내 결정적인 해전에서의 승리 후에 일본은 평화회담을 요청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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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에는 현재 중국과 한국의 국경을 표시했다. 밝은 색깔로 칠한 부분은 중국 한 왕조(기원전 206~기원후 220)의 확장을 보여준다.
그러는 동안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의 팽창하는 군사력에 대해 점점 더 염려하게 되었다. 일분은 청일전쟁에서 십 년 전에 중국을 물리쳤고, 그 후로 더 강력하게 성장했다. 그는 또한 캘리포니아에서 제안되고 있던 정책들의 결과가 빚어낼 잠재적인 문제들을 인식하고 있었는데 그 정책들은 일본의 이민자들을 차별하여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친구인 상원의원 헨리 캐벗 롯지(Henry Cabot Lodge)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즈벨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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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를 ‘한국’으로 표기.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 명칭과 함께 개성, 서울, 경주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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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는 일본해(Sea of Japan)로 표기됨.
  
“나는 우리가 우리 국민들을 한편으로는 관재한 정의와 진정한 예의를 가지고 일본을 대하도록,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군력을 숫자에 있어서나 부대의 효율성에 있어서 상당한 수준으로 유지하도록 설득하기를 희망한다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일본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일세.”<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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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356~359)
씨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1905년 6월<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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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279년도 이전의 중국과 한국 미술: 한국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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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 사이에 자리 잡은 한국은 아시아 북동지역의 반도를 차지했다. 한반도에는 수천 년간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삼국시대에 독특한 한국 문화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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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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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기원전 57~기원후 668년으로 추정되는 이 시기에 한반도 남동 지역 신라, 남서 지역 백제, 북쪽 고구려의 세 왕국이 독자적인 국가 형태를 수립했다. 5, 6세기에 지은 거대한 고분에서 삼국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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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 고분에서 출토된 가장 화려한 물품은 왕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유물들이다(사진 11-26). 이 정교한 왕관은 매장용으로 제작된 제품이 분명하며, 얇게 자른 금판들을 금실로 엮어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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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표 모양으로 생긴 녹색과 흰색 비취 장식과 금장식이 왕관에 달려 있다. 비취는 중국에서 귀하게 여겼던 연옥과는 광물학적으로 다른 종류다. 왕관 둘레에 가지 모양으로 높게 뻗은 형상은 나뭇가지와 사슴뿔을 닮았다. 왕관 안에는 날개나 깃털 모양의 부속품을 달고 얇은 금판을 엮어서 짠 원뿔 모양 모자를 쓴다.
  
2개월 후, 1905년에 루즈벨트는 러일전쟁의 평화조약을 중재했다. 그는 두 나라의 사절단을 뉴햄프셔주의 포츠머스로 초청해서 막대한 금액의 지불보다 소규모 영토의 할양과 한국에 대한 통제권에 만족하도록 설득했다. 그는 또한 러시아로부터 만주에서 철수하도록 약속을 받아내었는데 당시 만주는 중국의 영토의 일부로 남아있었다. 루즈벨트는 중국의 무역이 모든 나라에 개방된 상태로 유지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중재자로서의 역할로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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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6) 사진 11-26: 왕관 - 한국 경상북도 경주 금령총에서 발견. 6세기 경 삼국시대 신라. 비취로 장식, 높이 약 44.5cm. 대한민국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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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화 도자기: 고분 안에는 도자기도 많이 발견된다. 대부분 망자의 영혼이 먹을 음식을 담는 그릇이었다. 이런 그릇은 대부분 유약 처리를 하지 않고 열을 가해 유약 없이도 액체의 영향을 받지 않게 만든 도자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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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적인 자기는 높은 받침대(사진 11-27)로, 아래쪽이 넓적한 이 원통형 받침대는 바닥이 둥근 단지를 지지할 때 사용했다. [357] 다소 육중해 보였을 수 있으나, 고화 처리 전 흙이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구멍을 내 형태가 산뜻해졌다. 종종 나타나는 물결무늬나 원, v자 무늬를 제외하고 삼국시대 도자기에서 외부 장식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거의 없으나, 이 작품에서는 뱀이 받침대 손잡이 쪽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p. 581'''<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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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6) 사진 11-27: 뱀 무늬, 추상 무늬, 투조로 장식한 예식용 받침대 - 한국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된 것으로 추정. 5~6세기경 삼국시대 신라. 회색 자기에 무늬와 투조를 내 장식, 천연 유약의 흔적. 높이 약 58.7cm.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 하버드 대학교 새클러 박물관 소장. 마리아 C. 헨더슨 기증, 어니스트 B. 데인과 헬렌 프랫 데인 동양미술품구입기금을 통해 구매.
중국과 전쟁을 벌이고(1894-95) 러시아와도 싸워(1904-1905) 일본은 동아시아에서의 그 영향권을 확대했다. 일본은 조선(Korea)을 병합하고 중국 북부 만주지역에 군대를 주둔시켜 상당한 세력을 확보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일본은 동아시아의 최강국이었고 세계열강의 하나로 성장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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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사유상: 중국에서 건너온 불교는 372년 고구려, 384년 백제에 들어왔다. 불교가 5세기 후반 신라에도 소개되었을지 모르나, 공식적으로는 527년에야 인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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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불교 미술은 중국을 모방한 형태였다. 그러나 6세기 후반 한국 조각은 독특한 양식을 드러냈고, 전형적인 예로 (미륵보살로 추정되는) 금동 반가사유상이 있다(사진 11-28). 보살의 자세는 6세기 후반 중국 조각을 따랐지만 날씬한 몸매와 타원형 얼굴, 우아한 옷주름, 세 갈래의 관은 한국 조각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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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일본에 불교를 소개했다. 실제로, 수많은 한국 조각가들이 6~7세기에 일본에서 활약했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 일본 불교미술 초기 작품에는 한국의 영향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사진 12-6 참고)
  
'''p. 634'''<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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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7) 사진 11-28: 반가사유상 - 삼국시대 7세기 초, 신라로 추정. 금동, 높이 약 91cm. 대한민국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서울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전).
미국의 사건/ 세계의 사건 연표<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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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신라시대
1950 한국전쟁이 시작되다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가 반공 운동을 시작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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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660년 백제를 정복하고, 668년 중국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격파해 삼국을 통일했다. 통일신라는 935년까지 지속되었다. 불교는 통일신라시대에 번영했고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안팎으로 많은 큰 규모의 중요 사찰이 건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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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큰 유물인 석굴암은 신라 왕실의 후원으로 경주 근처의 토함산 꼭대기에 지어진 인공 석굴사찰이다. 인도 석굴사찰이 중국에 영향을 미쳤고, 5~7세기에 지어진 중국의 석굴사찰 형식을 한국에서 본떠 석굴암을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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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중반에 화강암을 깎아 만든 석굴암은 사각의 작은 전실과 천장이 둥근 원형 주실이 좁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높이 3.4m가 넘는 거대한 부처가 주실을 차지하고 있다(사진 11-29). 연꽃에 앉은 불상의 모습은 지면을 만지는 자세(촉지(觸指) 동작)에서 알 수 있듯 부처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역사적인 순간을 나타낸다. 부처의 풍만하고 팽팽한 형태, 얇은 옷자락, 해부학적으로 상세하게 묘사된 가슴팍은 8세기 중국 조각과 연관이 있다. 얕은 돋을새김으로 정교하게 새긴 보살과 하위 신들은 부실과 연결 통로, 주실을 아름답게 장식한다.
  
'''p. 638'''<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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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8) 사진 11-29: 석가모니 불상 - 한국 경상북도 경주 근처의 석굴암. 통일신라시대 751년경. 화강암, 불상 높이 약 3.42m.
주목할 만한 대통령들 – 해리 S. 트루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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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상의 땅을 만지는 손 모양은 촉지 동작으로, 깨달음을 의미한다.
부통령이었던 트루먼이 FDR의 죽음으로 1945년 갑자기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을 때 그는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기자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의 책상에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라고 쓴 팻말을 책상위에 올려놓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낸 일본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 트루먼 독트린, 베를린 공수, 한국 파병, 군대 통합, 인권 개혁안 입법 등에 책임을 졌다. 그가 재선에 성공한 것은 당시 정치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고 공정정책(Fair Deal)를 통한 개혁은 양당 모두로부터 결국 지지를 받게 되었다. 오늘날 트루먼은 평범하지 않았던 도전에 상당히 성공적으로 맞섰던 평범한 사람이라고 불려진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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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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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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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년 건국된 고려는 935년에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통일신라의 통치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 1392년까지 지속된 고려의 수도는 개성으로, 오늘날 서울의 북서쪽이자 북한에 있는 도시이다. 고려 왕조 시대의 미술은 품위가 넘쳤으며 유약을 바른 청자가 가장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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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셀러던(celadon)’이라는 용어는 고화 처리된 자기의 유약이 띠는 투명하고 엷은 청록색을 의미하며, 보통 회백색 자기에 발랐다. 중국 도자기 장인들은 1세기에 이미 청색 유약을 발명해 꾸준히 청자를 제작했다. 한국 장인들은 8~9세기에 청색 유약을 시험해보기 시작했고, 곧 중국의 최상급 도자기에 견줄 만한 세련된 고려청자가 탄생했다. 고려 시대에 이런 청자는 다양한 계층이 두루 사용했지만, 가장 우수한 자기들은 왕족과 귀족, 유력한 승려들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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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고려청자는 고전적인 단순미를 자랑하며 장식을 지양했지만 12세기 장인들은 동시대의 중국 자기를 모방하거나 새로운 장식 기법을 찾아내기 위해 무늬를 새기거나 장식을 넣었다. 장인들의 발명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상감 기법으로, 자기 표면에 음각으로 새긴 무늬에 백토나 흑토를 발라 대조적인 색깔을 배치해 세 가지의 다른 장면을 흑토와 백토로 나타냈다(그림 11-30). [359] 이 자기에는 호숫가에 꽃이 핀 매화나무(늦겨울에 잎이 돋기 전에 꽃이 피는 나무) 가지와 한데 얽힌 대나무 숲을 묘사하고 있다. 호수에 거위가 헤엄치고 나비가 나무 위로 날아다니면서 도자기의 장면을 연결한다. 윗부분이 넓은 이 ‘매병’은 포도주, 식초 등의 액체를 담는 용기로 사용했다. 원래는 종 모양의 조그만 뚜껑으로 주둥이를 덮어 내용물을 보관하고 도자기의 곡선을 보완했다.
  
'''p. 652'''<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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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8) 그림 11-30: 대나무와 매화나무로 장식된 매병 - 한국 고려시대, 12~13세기. 상감청자: 유약 처리 전의 회백색 자기에 흑토와 백토로 무늬를 넣음. 높이 33.7cm.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
3과 한국전쟁<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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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는 왕가의 후원을 받아, 많은 사찰이 당대 최고의 건축가, 조각가, 화가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고려 시대에 가장 호화로웠던 불교 예술품은 회화였다. 비단 족자에 먹과 물감으로 그린 14세기 수월관음도는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중국식으로는 ‘관인’)을 묘사하고 있다(사진 11-31). 풍성한 색감과 금색 물감은 당대의 화려한 취향을 반영한다. 같은 유형의 수많은 회화가 일본에 수출되어 일본 불교 회화에 영향을 미쳤다.
학습목표<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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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9) 사진 11-31: 수월관음도 - 한국 고려시대, 14세기 후반. 비단 족자에 먹, 물감, 금색 물감. 높이 159.6cm.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 하버드 대학교 새클러 박물관 소장. 그렌빌 L. 윈스롭 기증.
-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팽창이 어떻게 한국전쟁의 배경이 되었는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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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 한국전쟁의 참전국은 어디인가, 그리고 전쟁의 삼 단계는 어떻게 되는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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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초기 중국과 한국 미술의 역사 발전에 있어 자연주의(자연 세계의 시각적 외관을 재현하는 경향)는 어느 범위까지 원동력으로 작용했는가?
- 한국전쟁의 영향은 무엇인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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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중국의 관음보살상(사진 11-20)과 한국의 반가사유상(사진 11-28)을 비교, 대조해 보자. 보살의 의미를 정의하고 신의 속성이 외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조사해 보자.
  
요점<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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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362) [12. 1333년도 이전의 일본 미술: 선사시대 일본]
남한을 침공한 북한군을 물어내기 위해 미국과 유엔군은 3년간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해 싸웠다. 그 결과로 전쟁 전의 남북한의 경계선이 회복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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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요이 시대: 야요이 시대(기원전 400년~기원후 300년경)에 한국 이주민들을 통해 논농사를 도입해 일본이 농경 국가로 전환하는 계기를 맞았다. 세계 모든 지역이 그렇듯, 이러한 전환으로 노동은 농사와 밖의 활동으로 나뉘고 사회 구조가 계층적으로 형성되어, 정착지 확대와 계급구조 형성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인 정착민들은 금속 기술도 보급했다. 청동은 종과 같은 의례용 도구뿐 아니라 무기를 만드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 철기 제작도 발달해 결국 일상생활에 사용하던 석기를 대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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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12-1: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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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동해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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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는 일본해로 표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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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15,000년 전 빙하기 말에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높아져 일본 땅은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큐슈의 4개 섬이 되었다.
  
핵심용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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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364) [12. 1333년도 이전의 일본 미술: 선사시대 일본]
38도선, 한국전쟁,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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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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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동안의 아스카 시대(554~645년)에 한국과 중국에서 새로운 철학, 의술, 음악, 음식, 복식, 농업, 도시 계획, 종교, 시각 예술, 건축 형태가 일본에 급속도로 밀려들어왔다. 그중 불교, 중앙 집권적 구조, 문자 체계가 가장 중요하며, 각각 일본의 상황에 맞게 변형, 융화되어 오랜 유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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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367) [12. 1333년도 이전의 일본 미술: 선사시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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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 시대 계속) 석가삼존상: 일본 불교 미술 초기의 국제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는 토리 부시가 만들었다고 전통적으로 알려진 호류사 석가삼존상이다(사진 12-6). (일본어 ‘샤카’는 전설적인 부처인 석가모니를 뜻한다.) 토리 부시(‘부시’는 불상 제작자라는 뜻)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밀려들어온 승려 및 장인들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해 온 한국 장인의 후손으로도 추정된다. 석가삼존상에는 중국 북위시대 미술의 막대한 영향이 드러난다(사진 11-12 참고). 정면을 향한 자세, 커다란 얼굴과 손, 선으로 처리된 휘장은 이 불상을 만든 장인이 대륙의 초기 불상 형태를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암시하는 한편, 세련된 청동 주물 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장인의 숙련된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학습주안점<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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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369) [12. 1333년도 이전의 일본 미술: 선사시대 일본]
- 원인과 결과를 찾아내기: 아래 표를 옮겨 그리고. 이번 과를 학습하면서 한국 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채워 넣으시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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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시대
- 원인: 중국이 공산주의에 넘어가다;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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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헤이안 시대(794~1185년)에 중국과 한국에서 차용한 문물을 완전히 흡수하고 변형시켰다. 전반적으로 평화로운 시대였기에 자립의 분위기가 새롭게 조성됐고, 귀족 가문의 세력이 증가한 9세기에 일본 왕실은 중국과의 유대를 단절했다. 일본어를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도구가 발달했고, 토속 문학의 부상으로 여류작가 무라사키의 <겐지 이야기>와 같은 산문 작품이 등장했다. 화려하고 세련된 4세기 동안 불교는 크게 두 가지 주류로 나타났다. 하나는 밀교이고, 다른 하나는 정토 극락세계의 구원을 믿는 정토종이다.
- 결과: 트루먼이 공산주의의 팽창을 끝내기로 결심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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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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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371) [12. 1333년도 이전의 일본 미술: 선사시대 일본]
한국전쟁은 때때로 미국의 잊힌 전쟁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한국에서 싸운 군인들은 한국전쟁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1950년 6월 미군은 대규모로 침략한 공산군을 다시 밀어붙이기 위해 싸웠다. 하니 미군 해병대원은 치열했던 전투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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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시대의 불교) 정토종 미술: 군국주의의 부상, 정치적 격변, 궁중의 방종이 11세기 초 일본의 특징이다. 불안정한 이 시기에 많은 이들이 말법(末法), 즉 부처의 바른 가르침이 끊어진 어두운 시대가 닥쳤다고 믿었다. 각계의 일본인들은 신성한 꽃과 음악으로 가득한 눈부신 ‘서방극락정토’를 믿고 내세의 구원을 갈망하게 되었다. 극락에는 아미타(산스크리트 어로 ‘아미타바’)와 그를 수행하는 보살들이 있어, 이들의 자비에 전심으로 복종하는 사람들을 축복의 땅으로 기꺼이 맞아들이고 보호한다. 정토 신앙은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큰 인기를 누렸고, 한국을 통해 일본에도 전해졌다. 밀교의 복잡한 종교 의식에 비해 정토종은 즉각적이고 쉬운 수단으로 구원을 약속한다. 정토종에서는 신실한 신자가 ‘나무아미타불’을 암송하기만 하면 서방 세계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강 건너 편으로 북한군을 밀어내기 위해 우리는 능선 너머로 그들을 몰아붙여야 했다. 오르막길을 바로 올라가야 했다. 우리를 가려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관총, 박격포, 수류탄이 쏟아지고 있었다. 뿜어져 나오는 화염은 너무나 끔찍했다. 적들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쏟아 부었다. 전우들이 사방에서 욕을 하며 비명을 지르며 쓰려져 가고 있었다.” - 아놀드 윈터(Arnold Winte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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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772) [남아시아와 동아시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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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우측 상단에 한국 표시.
  
1950년 말에 양 진영은 밀리지 않기 위해 참호를 팠다. 보병이었던 톰 클로슨(Tom Clawson)은 훗날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잘 깨닫지 못했지만 내가 한국에 도착해보니 더 이상 전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진지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진지전”이 어떤 것인지 설명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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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793) [25. 1279년도 이후의 중국과 한국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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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화풍 특징과 과거제를 소개한 뒤, 5번째 단락) 송나라 때(960~1279) 과거제는 확장되고 체계화되었다. 관직의 절반은 학자들이 차지했다. 뒤이은 원나라와 명나라 때는 문인화(식자층의 취향을 반영한 회화 양식)의 전통이 더욱 발달했다. 외세의 지배를 받았던 원나라의 시대가 끝나고, 명나라 때는 송대의 궁중 전통을 부활시켰다. 명나라는 한국 조선 왕조의 본보기가 되었고, 한국에서도 독특하고 꾸밈없는 미술 양식이 조선 왕조의 지지 아래 발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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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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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중국과 한국 미술에서 나타나는 문인화 양식을 연구하고 문인화와 문인들의 삶의 관계를 탐구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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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중국과 한국 회화의 풍경화 소재의 발전과 중요성을 이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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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중국과 한국의 궁중 생활과 후원이 각 나라의 미술에 미친 영향을 평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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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13세기에서 현재까지 중국과 한국에서 중요한 예술 양상으로 나타난 특징들을 분석하고 학습해 보자.
  
“당신은 매일 여러 시간 당신의 진지를 강화하기 위해 개인호와 참호와 벙커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너무 잘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만간 다른 진지로 옮겨가게 되기 때문이다. 매번 순찰을 하고 나서 다시 처음 있던 곳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날이 온다. 되돌아 와서 새로운 진지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모든 진지가 결국은 같은 능선 위에 있다.” - 톰 클로슨(Tom Clawson)<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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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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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25-1: 중국과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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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에는 현재 중국과 한국의 국경을 표시했다. 색칠한 부분은 중국 청 왕조(1644~1911년)와 청의 조공국들을 포함한 범위로, 당대의 역사적인 확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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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북한, 남한으로 나누어 표시. 개성과 서울을 표기, 남한의 금강산 표시. 동해와 황해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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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는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음.
  
한국에서의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영광도 베트남 전쟁과 같은 시련도 없었지만 미국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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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797) [25. 1279년도 이후의 중국과 한국 미술]
미군 병사들이 한국 전쟁 기간 중 참호를 파고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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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화원과 직업화가에 대한 내용)이 시기에는 궁중 회화와 연관되면서도 더욱 대담하고 제약에서 벗어난 풍경화가 인기를 끌었다. 이 회화 양식은 절강 양식이라고도 하는데, 이 양식이 남송 수도가 있었던 절강성 항저우에 기원을 두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표작으로 <춘유만귀도>가 있다(사진 25-5). 서명은 없으나 대진(戴進, 1388~1462)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같은 절강 양식은 안견(사진 25-18 참고)이나 셋슈(사진 26-13 참고) 등의 한국, 일본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p. 653'''<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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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808~813) [25. 1279년도 이후의 중국과 한국 미술]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팽창<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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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술: 조선 왕조에서 현대까지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유럽에서의 공산주의 위협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을 때 냉전을 “뜨거운” 군사적인 대치로 타오르게 하는 중요한 사건들이 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무장 충돌의 기원은 중국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전개된 중국과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에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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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이성계 장군(1335~1408)고려 왕조(918~1392)를 전복시켜 조선 왕조(1392~1910), 또는 이씨 왕조를 건립했다. 처음에 이성계는 옛 고려의 수도 개성을 그대로 수도로 삼았다가 1394년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수도는 다시 바뀌지 않았다. 조선은 불교를 배척하고 국가 철학으로 성리학을 옹호했다. 중국 명나라를 본받은 조선은 명의 관료제를 본떴고, 심지어 명나라 황실의 상징이었던 백청색 자기를 그대로 차용하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는 문화와 과학 발전을 이루어, 측우기와 천문관측대, 혼천의, 해시계, 물시계뿐 아니라 한국 문자인 한글도 창조했다.
  
중국 내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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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자기
이미 학습한바 있듯이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해외 열강들은 중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중국 영토의 일부를 차지했다. 일본도 그러한 열강 중 하나였다. 또 다른 세력은 독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 연합국은 이전에 독일의 영토였던 곳을 일본에게 넘겨주었다. 1919년 중국인들이 중국이 더 강력하고 더 독립적인 나라가 되기를 바라며 시위를 벌였다. 어떤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요구했다. 다른 사람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결과에 깊은 인상을 받고 공산주의가 강력한 나라를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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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11과 참고) 조선 도자기 장인들도 뛰어난 자기를 제작했는데, 동시대의 중국 작품에서 영감을 얻기는 했지만 그대로 베끼는 일은 드물었다.
1920년대 중반에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은 중국 북부에서 세력을 얻었고 베이징을 점령했다. 그러는 동안 공산당은 상해 인근 지역을 장악했다. 1927년 장제스는 공산당과 그들의 지지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하고 중국 내전이 시작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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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은 마오쩌둥이 이끌었다. 그는 동국 남동부지역에서 땅을 농민들에게 재분배하고 교육과 의료혜택을 제공해서 공산주의의 대의명분에 대한 지지를 얻었다. 1934년 마오쩌둥과 그의 지지자들은 장제스의 공격 때문에 후퇴하게 되었다. 대장정을 마치고 마오쩌둥은 중국 북부에서 그의 세력을 재구축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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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과에서 학습했듯이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협력해야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중국 내전은 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국민당은 강압적인 통치와 고율의 세금과 부패 때문에 지지를 잃었다. 마오쩌둥은 군사적인 승리 뿐 만 아니라 토지개혁과 평등한 사회에 대한 약속으로 지지를 얻어 1949년 중국을 장악했다.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패주했고 거기서 그들이 여전히 중국의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라고 주장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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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분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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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고려청자의 전통을 물려받은 조선 자기는 ‘분청’사기라고 불리며, 한반도 전역에서 널리 사용했다. 값비싼 흰 자기와 비슷하게 백토를 많이 사용하면 장식적인 효과가 더욱 높아졌다. 15세기 작품에는 도자기에 백토로 반복적인 무늬를 넣은 작품도 종종 보인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일본은 중국에서 영토를 얻고 영향력을 확보하는 전략을 추진했고 또한 한반도를 병합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통치는 가혹했고 한국인들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에 그들의 나라를 다시 회복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을 위한 세부적인 계획이 수립되기 전에 전쟁이 끝났다. 1945년 연합국은 일시적인 해법에 동의했다. 소련군은 한반도의 대략 중간지점을 가로지르는 위도 38도선 이북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고 미군은 38도선의 남쪽에서 항복을 받았다. 분할선은 결코 영속적인 것으로 의도된 것은 아니었고 한국은 일시적으로 소련의 점령지역과 미국의 점령지역으로 나뉘었다. 곧 친미정부가 남한에 세워졌고 북한에는 공산주의 체제가 수립되었다. 점령군은 양측에서 1948년과 1949년 철수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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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분청사기의 특징은 흰 바탕에 회갈색을 바른 자기에 붓으로 흐르는 듯한 무늬 장식이다. 분청사기는 대부분 꽃무늬가 많았지만, 사진 25-16의 술병처럼 드물게 장면을 묘사한 병도 있다. 신선하고 힘찬 붓질로 그린 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발톱으로 물고기를 낚아 올린다. 그 아래로 파도가 치고 커다란 연꽃 두 송이가 가장자리를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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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159년에 일본군이 계속 한반도를 침입해 분청 가마가 많이 파괴되었고, 아예 도자기 제작이 중단될 정도였다. 일본인들이 많은 분청자기 제작자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분청식 자기를 만들게 했고, 이들의 자기는 다도 전문가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았다. 사실 한국 분청사기의 자연스러운 성격이 오늘날까지 일본 자기에 영향을 주었다.
  
심화학습: 세계적 사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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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5-16: 물고기를 잡은 새가 그려진 술병
- 대장정: 1934년 가을 8만5천명의 공산군은 중국 남동부에서 국민당 군대에 포위되었다. 그들은 국민당의 포위선을 뚫고 소련과의 국경 가까이 북서부 중국으로 향해 일 년에 걸쳐 6천 마일에 달하는 고된 행군을 시작했다. 국민당 군에 의해 공중과 지상의 공격을 당하며 그들은 24개의 강을 건너고 18개의 산맥을 넘었다. 첫 3개월 동안 공산당은 절반이상의 병력을 잃었고 겨우 8천 명 정도가 살아남아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 대장정 기간 동안 마오쩌둥의 지도력이 확립되어 중국 공산당의 확고한 우두머리가 되었다. 절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공산군은 농민들을 존중하고 그들이 필요로 한 물자들에 비용을 지불하고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이런 행동과 대장정에서 보여준 영웅적인 시련은 많은 젊은 중국인들이 공산주의의 이상에 동조하도록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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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선시대, 16세기. 분청사기: 연회색 바탕에 백토, 회갈색 무늬. 15.5x24.1cm. 일본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 소장. 스미토모 그룹 기증.
학습이해도 확인: 한국은 어떻게 분단국이 되었는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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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색된 자기: 한국 장인들은 15세기부터 중국 명나라 자기의 영향으로(사진 25-7 참고) 도자기에 청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 넣었다. 조정에서는 궁궐의 장인들을 한양에서 남동쪽으로 50km정도 떨어진 도자기 가마로 보내 도자기 화가들을 훈련시켰다. 그 결과 15세기부터 최고급 한국 자기에 그려지는 그림은 종이나 비단에 그린 그림과 거의 흡사해졌고, 이는 회화적 전통을 거의 참고하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밟은 중국 도자기의 장식과 사뭇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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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독특한 점은 16~17세기 한국 자기가 청색 물감을 사용하는 명나라 자기의 전통보다 회갈색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17세기에 상부가 넓고, 몸체는 가늘며, 목은 세로로 좁은 독특한 형태를 띤 도자기가 나타났고, 조선 후기에 가장 특징적인 도자기 형태가 되었다. 사진 25-17의 17세기 도자기는 유약 처리 전 회갈색으로 포도나무 가지 그림을 그려 넣었다. 경계에 구애받지 않은 그림을 그려 넣어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비대칭적인 디자인은 여백의 미를 선호하는 한국인들의 취향을 반영한 전형적인 한국 양식이다.
  
'''p. 654'''<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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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5-17: 백자철화 포도무늬 항아리
한국에서의 충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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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선시대, 17세기. 유약 처리 전 회갈색으로 그림. 높이 53.8cm. 대한민국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분할선 양측의 한국인들은 모두 그들의 나라를 통일하기를 원했다. 1950년 6월 북한군이 무력으로 한국을 통일하기 위해 38도선을 넘어 밀려오면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북한군의 침략은 미국을 놀라게 했다. 또한 미국인들은 소련이 뒤에서 조정하고 있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안해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중국이 공산당에게 넘어간 것도 미국에 큰 충격을 안겼었는데 이제 공산주의는 다시 진격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것이 그는 명백한 침략행위라고 보았기 때문에 분명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강자가 약자를 침략했던” 이전 사례들을 떠올렸다. 트루먼은 민주주의가 절적한 대응에 실패하면 결국 침략자들을 부추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트루먼은 “만일 남한에 대한 침략에 저항하지 않으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어났던 유사한 상황들처럼 결국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다.”고 말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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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남은 고려자기는 별로 없지만 한국 장인들은 약 11~12세기부터 고려의 도자기 제작법을 배웠다. 몇 세기 동안 중국과 한국에서만 도자기 제작법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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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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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세속화는 조선 시대에 진가를 발휘했다. 고려의 전통을 물려받아 조선 초기 회화는 중국식 전형을 따랐고, 식물부터 풍경, 인물, 다양한 동물에 이르기까지 그림의 주제를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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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견(1418년 출생)이 1447년에 그린 몽유도원도(사진 25-18)는 현존하는 조선 세속화 중에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몽유도원도에는 중국에서 숭앙받는 자연시인 도겸(365~427)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묘사했고, 세상과 동떨어진 도원을 거닐었던 꿈을 떠올려 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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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마찬가지로, 15세기 한국화에 나타나는 거대한 산맥과 광대한 경치는 북송 회화 양식을 반영한다. 중국 남송(1127~1279)과 명나라(1368~1644)도 15~17세기 한국 회화에 영향을 미쳤으나 북송 대가들의 흔적을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국제 치안 유지를 위한 유엔의 행동<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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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5-18: 안견<몽유도원도>
1949년 중국 국민당이 패배한 후에 미국은 중국 공산당이 유엔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트루먼 대통령이 북한의 침략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을 때 소련 대표는 항의의 표시로 퇴장했기 때문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미국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안에 대한 만장일치의 승인을 얻었고 회원국들이 남한을 방어하고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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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선시대, 1447년. 비단 두루마리에 먹과 엷은 채색. 36.7x106.1cm. 일본 덴리(나라 근처)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트루먼 대통령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 제7함대에게 타이완을 방어하게 했고 남한에 대한 공군과 해군의 지원을 명령했다. 이어서 그는 지상군도 파견했다. 트루먼이 헌법에서 요구하는 대로 선전포고를 의회에 요청하지 않았지만 민주당과 공화당은 그의 단호한 조치를 환영했다. 하원의원들은 트루먼의 조치에 대해 듣게 되었을 때에 일어나 환호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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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운동: 18세기, 중국 고전뿐 아니라 한국 연구도 강조한 실학(실용적인 학문)의 영향으로 진정한 한국적인 양식이 등장했다. 실학 운동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화가는 정선(1676~1759)으로, 선대 화가들이 선호했던 중국 풍경이 아닌 자신에게 친숙한 한국 경치를 그렸다. 정선의 회화에는 한국 동쪽 해안의 울퉁불퉁한 금강산이 자주 등장한다. 1734년에 그린 작품(사진 25-19)에는 바늘처럼 생긴 금강산의 봉우리들을 절묘하게 묘사했다. 주제가 한국이니만큼 작품에 드러난 역동적인 기상과 강한 개성, 수정처럼 생긴 산맥, 묽은 먹으로 섬세하게 표현한 구름, 독자적인 붓놀림도 한국적이다.
유엔은 유엔군사령부를 구성하고 미국에게 유엔군 사령관을 선택해 줄 것을 요청했다. 16개국이 군대와 무기를 보냈지만 미군이 한국에서 유엔의 국제 치안활동에 참여하는 군대의 대략 80퍼센트를 차지고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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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한국전쟁, 1950-1953><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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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5-19: 정선 <금강전도>
- 1950년 6월 북한이 남한의 수도를 점령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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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선시대, 1734년. 종이 족자에 먹과 물감. 130.1x94cm. 대한민국 서울 삼성 리움미술관 소장.
- 1950년 9월 유엔군이 부산 방어선을 지켜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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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화가 중 신윤복(1758년 출생)은 실학 정신의 중요한 본보기이다. 18세기 말~19세기 초에 활동한 신윤복은 주로 한복 차림의 양반 계층을 그렸다. <상춘야흥>(사진 25-20)은 어느 가을날 한국 양반들이 기생을 데리고 전원을 즐기는 장면을 담았다. 풍성한 머리와 짧은 상의, 폭넓은 치마를 입은 여자들과, 수염을 기르고 흰 두루마기에 상투를 틀고 챙이 넓은 갓을 쓴 남자들은 누가 보아도 한국인이다. 우측 하단의 남성이 연주하는 현악기는 한국 악기들 중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가야금(한국의 치터)이다.
-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해방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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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1월 유엔군이 최대로 진격<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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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1월 유엔군을 몰아내기 위해 중국이 참전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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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1월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을 다시 침공하고자 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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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7월 휴전선이 처음 남한과 북한의 분단선 가까이에 확정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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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읽기: 이 지도들은 한국전쟁의 밀고 밀리는 특징을 보여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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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5-20: 신윤복 <상춘야흥>
움직임 이해: 지도에서 유엔군의 움직임을 살펴보시오. 중국이 왜 참전했다고 생각하는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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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전신첩에서 발췌. 한국 조선시대, 18세기 후반. 30장짜리 화첩, 종이에 먹과 물감. 28.3x35.2cm. 대한민국 서울 간송미술관.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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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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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은자의 왕국’으로 알려졌던 조선왕조는 쇄국정책을 실시해 1876년까지 중국을 제외한 모든 세계에 국경을 열지 않았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왕조는 막을 내렸으나 외부 세계와 차단되어 은둔 기간은 더욱 연장되었다. 자발적 고립의 유산에 식민통치(1910~1945)--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의 혹독한 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뒤이은 더 끔찍한 한국전쟁(1950~1953) 상황--까지 더해짐으로써 한국의 예술, 문화적 발전은 20세기 전반에 방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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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대화가: 이러한 빈곤한 상황에도 중국과 일본을 통해 한국은 간접적으로나마 현대의 영향을 받았고, 1920년대 초~1930년대에 몇몇 한국 화가들이 서구식 현대 미술을 시도했다. 흔히 세잔이나 고갱을 따랐지만 일부는 비구상적 추상미술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중 김환기(1913~1974)는 구성파와 기하학적 추상화의 영향을 받아 20세기 한국의 영향력 있는 화가가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의 많은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김환기도 서구 모더니즘을 연구하고 싶어 했다. 그는 1956년에 파리를 방문했고 1964~74년에는 뉴욕에 거주, 작업하면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들을 이때 제작했다. 그의 작품 <5-IV-71>은 파랑, 검정, 회색을 띤 점과 사각형으로 구성된 한 쌍의 거대한 원형 패턴을 보여준다(사진 25-21). 방식과 재료, 발상, 심지어 제목으로 쓴 날짜까지도 완전히 서구식이지만, 이 작품은 동아시아의 전통인 단일색상의 수묵화와도 연관성이 보이고 도교나 불교적인 초월성도 제시하는 듯하다. 작가가 한국인이며 어릴 적에 중국 고전을 공부했다는 점, 파리에서 공부했고 뉴욕에서 작업했다는 점에 미루어 볼 때 그의 회화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른다고 볼 수도 있다. 김환기의 작품은 분명하고 개성적인 스타일을 찾는 많은 현대 예술가들이 겪는 딜레마를 표현한다. 전통 양식의 가장 최근 스타일, 철저히 세계적인 스타일, 지역적 특색이 분명하지만 세계적인 스타일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토속적인 성분과 다양한 예술 전통에서 유래된 성분을 통합하는 절충적이고 혼합적인 스타일을 택할 것인가? 김환기는 이런 의문을 제기하면서 유명한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 등 후배 한국인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백남준은 33과에서 다룰 것이다.
  
'''p. 655'''<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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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5-21: 김환기 <5-IV-71>
전쟁을 수행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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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971년. 캔버스에 유화. 100x100cm. 대한민국 서울 환기미술관 소장.  
트루먼은 유엔군 사령관으로 두 번의 세계대전의 영웅이며 강력한 반공주의자인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을 택했다. 맥아더는 일본에서 미군정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 서구 민주주의제도를 수립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헌법을 만드는 일에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는 남한에서도 미군정을 지휘했는데 남한에 민주주의를 이식하는 데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맥아더는 한국 대통령 이승만이 그의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했지만 그를 지지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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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815) [26. 1333년도 이후의 일본 미술]
맥아더는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탁월한 군사 전략가였고 남한으로부터 침략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대담한 전략을 구상했다. 소련제 탱크와 전투기로 북한 국은 단 몇 주 만에 남한 전역을 휩쓸었다. 항구도시인 부산에 가까운 작은 지역만이 아직 점령되지 않은 상태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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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년대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 국민의 출국을 금지하고 외국인들의 입국을 제한했다. 나가사키는 유일한 국제 항구로 한국인, 중국인, 네덜란드인만이 출입할 있었고, 그들도 일본 땅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없었다. 기독교 선교사를 막고 외세에 권위를 세우기 위한 일본 정부의 조치였다. 1853년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강제로 다른 항구를 개방한 뒤에야 정책이 바뀌었다. 그 전에도 작품(사진 26-1)에 나타나는 담뱃대와 망원경이 증명하듯, 외국의 영향과 물품 유입은 막을 수 없었다.
맥아더는 북한군의 급속한 진격 때문에 그들의 공급선이 길게 늘어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산을 방어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후 1950년 9월 그는 남한의 북서부에 있는 인천에 군대를 상륙시켜서 적군의 공급선을 뒤에서부터 공격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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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작전은 적중했다. 남북에서 유엔군의 협공을 받고 공급선이 끊어지자 침략자들은 38도선 뒤로 물러갔다. 유엔군은 그들을 쫓아 북쪽으로 진격했다. 미국과 남한의 지도자들은 한국을 남한의 통제 아래 다시 통일할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중국 공산당을 불안하게 했다. 그들은 이제 권력을 잡은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고 친서방 국가가 바로 옆에 세워지기를 원치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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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에 북한과 중국의 국경으로 다가오자 중국은 더 이상 진격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맥아더는 이 경고를 무시했다. 1950년 112월 24일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을 압록강 넘어 중국으로 몰아내고 전쟁을 끝내기 위한 크리스마스 공세를 선언했다. 그러나 중국 군대가 압록강을 넘어 밀려오며 공세를 시작했다. 중국과 북한군은 유엔군을 남한으로 다시 몰아내었다. 전선은 교착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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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교착된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제2의 전선을 형성하고자 했다. 그는 타이완 섬에 있는 장제스의 중국 저항군이 대륙으로 돌아와 중국 공산당을 공격하기를 원했다. 트루먼은 작전이 아시아에서 전쟁을 확산시킬 것을 염려하여 반대했다. 트루먼의 결심을 흔들 수 없게 되자 맥아더는 하원의 소수파 지도자인 조셉 마틴(Joseph Martin)에게 1951년 편지를 보내서 대통령의 정책을 비판했다. 마틴은 이 편지를 공개했다. 4월 11일 트루먼은 불복종의 이유로 맥아더를 해임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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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고국으로 돌아와 영웅으로 환영을 받았다. 양하원 합동회의에서 행한 4월 19일 연설에서 그는 감정이 섞인 작별인사를 고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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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웨스트 포인트에서 서약한 이래 가져왔던 젊은 날의 희망과 꿈은 이제 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당시 막사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군가의 후렴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가사는 매우 자랑스럽게 ‘노병은 죽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사라질 뿐’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군가의 노병처럼 이제 나는 군생활을 마치고 사라지려 합니다. 신이 그에게 부여한 빛으로 깨닫게 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했던 노병으로서. 안녕히 계십시오.” -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1951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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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의 일생<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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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816) [26. 1333년도 이후의 일본 미술]
- 더글러스 맥아더 1880-1964: 육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더글러스 맥아더는 동기들 중 수석으로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를 졸업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보여준 용맹한 활약으로 그는 38세에 장성이 되었고 1930년에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맥아더는 아시아의 미군을 지휘했다. 그는 필리핀 방어선을 구축하고 태평양에서 일본군에 대한 섬건너뛰기 작전을 수행했다. 일본과 남한의 미 점령군을 지휘한 후 그는 한국 전쟁에서 유엔군을 이끌었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어 대통령은 불복종의 사유로 그를 해임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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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시대: 선불교 수묵화
그가 지휘한 사람들과 많은 미국인들에게는 영웅이었지만 지나치게 야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많은 정치지도자들은 맥아더를 싫어했다. 맥아더도 루즈벨트와 트루먼을 별로 존경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모두 공산주의에 대해 너무 유화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태도는 맥아더를 반공주의자들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위에 권위를 갖는 사람들에 대해 경멸하는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그의 탁월한 경력을 손상하는 조치가 취해지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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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시대에도 밝게 채색된 일본 고유의 두루마리 책은 계속 제작되었으나, (가마쿠라 시대(1185~1333년) 말에 대륙에서 일본으로 전래된) 먹의 검은색과 먹을 묽힌 회색을 사용한 회화가 절대적이었다. 무로마치 수묵화는 선불교 미학의 영향을 깊게 받았지만, 선불교의 중요 인물에 치중했던 초기 선불교 수묵화와 달리 많은 화가들이 중국식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승려이자 화가인 슈분(약 1418~1463년에 활동)을 일본 수묵 풍경화의 첫 대가로 인정한다. 모두가 인정하는 슈분의 작품은 애석하게도 모두 소실되었다. 그러나 슈분의 제자 분세이(약 1450~1460년에 활동)의 풍경화 2점은 남아 있다. 사진 26-2의 작품은 명나라(사진 25-5 참고)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수묵 풍경화와 매우 비슷하다. 전경의 바위투성이 지면에는 잎이 뾰족한 소나무, 험준한 바위, 은둔한 시인, 암자의 조그만 정원을 둘러싼 싸리나무 울타리 등 여러 가지 모티프가 겹쳐져 있다. 중간은 여백으로 비워 놓았다. 이 공간은 물이 채워져 있다고 ‘읽어야’ 한다. 빈 공간 위에는 미묘한 회색으로 아득히 떨어진 해변에 놓인 고기잡이배, 작은 오두막, 서 있는 사람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이 작품에 그려진 두 장면은 넓은 공간을 사이에 놓고 서로를 향해 메아리치는 듯하다. 선불교의 영향을 받은 이 그림은 시적인 장면으로 순수하고 고즈넉하며 평화로운 영혼을 훌륭하게 묘사했다.
  
당시의 소리를 들어보기: 맥아더의 의회 연설과 그밖에 다른 냉전 시기의 소리를 들어보시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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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816) <지도 26-1: 일본>  
[656]<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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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좌측 하단에 한국 표시.  
맥아더는 말 그대로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졌고 트루먼은 확전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될 때까지 2년을 끌었다. 평화회담이 교착되자 아이젠하워는 원자탄을 사용하겠다고 협박해서 다시 평화회담이 진행되도록 했다. 마침내 1953년 정전협정이 서명되어 한국은 전쟁 전의 분할선인 38도선과 거의 같은 상태에서 분단된 채 남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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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는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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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의 영향<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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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미국을 크게 낙심시켰다. 미국인들은 왜 5만4천명의 군인이 전사하고 10만3천명이 부상하고도 그 정도의 결과 밖에 얻지 못했는지 의아해했다. 미국인들은 그들의 정부가 공산주의의 진격을 멈추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공산군을 38도선으로 다시 물리친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봉쇄작전은 핵전쟁의 발발 없이 이루어졌다. 미국인들은 더 제한적인 전쟁과 더 제한적인 승리에 익숙해져야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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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은 또 다른 변화들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한 가지 변화는 군대 자체였다. 트루먼 대통령이 1948년 통합을 명령했지만 한국 전쟁은 백인 병사들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병사들이 같은 부대에 소속되어 싸운 첫 번째 전쟁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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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또한 군비 지출의 큰 증가를 가져왔다. 1950년에 군비는 연방 예산의 3분의 1에 못 미쳤지만 십년 후에 군사 지출은 연방 지출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동시에 미국은 상시 동원체제(permanent mobilization)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100만명이상의 미군이 전 세계에 주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군부세력은 기업과 과학계와의 연계를 발전시켜서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연계는 강력한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를 만들어내어 1960년에는 350만명의 미국인들이 고용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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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또한 아시아에서의 미국 정책의 미래를 형성하였다. 일본이 태평양지역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돕기를 희망하면서 미국은 1951년 일본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게다가 한국전쟁은 공산주의 중국과 관계를 더 악화시켜서 이후 20년간 외교적인 대결이 이어지게 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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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프를 이해하기: 세계의 지도력을 향한 경쟁 때문에 미국과 소련은 군비경쟁을 벌이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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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819) [26. 1333년도 이후의 일본 미술]
- 원인과 결과를 인식하기: 제2차 세계대전 후 시기에 미국의 국방비 지출이 다시 급격하게 증가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왜 증가한 지출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처럼 다시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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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속 문맥읽기: 일본 문화의 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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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번째 단락)야요이 시대(기원전 400년~기원후 300년경)에 위계적인 사회 구조와 함께 완전히 정착한 농경 사회가 출현했다. 사람들은 청동과 철을 제조하는 법을 배웠고 이 금속들을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초가지붕에 색칠하지 않은 야요이 건축은 이미 자연에 대한 친밀함과 명료한 선을 보여주며, 특히 야요이의 곡창 지대는 이후 시대에 사당의 디자인을 거부했다. 사회 조직을 향한 경향은 고훈 시대(300~552년경)까지 지속되어, 한국 관습을 따른 거대한 왕릉이 이 시대의 특징이다. 지도자 숭배 사상에서 왕정 체계가 시작되었고 현재까지 이 제도가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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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 시대(552~645년)에는 한국을 통해 중국 문명이 일본으로 밀려들어오면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 문화를 발전시킨 중국의 세 가지 주요 문명은 불교(와 불교 미술 및 건축), 문자 체계, 중앙집권 체제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찰인 호류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보존된 목조 건물을 보유하고 있다.
  
3과 평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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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819) [26. 1333년도 이후의 일본 미술 - 모모야마 시대]
단원 이해도 평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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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시대가 끝나면서 세 명의 강력한 일본 지도자가 등장한다.)첫 번째는 오다 노부나가(1534~1582)로, 1568년 군대를 끌고 교토로 들어와 1573년에 아시카가 쇼군을 몰아내고 일본 정치에 새 시대를 이끌었다. 노부나가는 승려들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교 사원을 파괴할 정도로 무자비한 전사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상하고 세련된 예술을 적극 후원하기도 했다. 군사작전 중에 적에게 굴복하지 않으려고 노부나가가 자살한 뒤, 그의 가신 중 하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가 뒤를 이었고, 곧 일본의 권력을 장악했다. 히데요시 역시 통치에 있어 문화가 필수적인 부가요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군대를 지휘할 때가 아니면 예술을 지지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야심이 지나쳤다. 한국과 중국을 모두 점령할 수 있다고 믿은 그는 차례의 불운한 침략 전쟁에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낭비했다. 1600년 직후에야 세 번째 지도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의 승리로 견고한 무신정권이 지속될 수 있었다. 노부나가의 전 동맹이자 히데요시의 심복인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사망한 뒤에야 권력을 잡았다. 굴곡진 시대였지만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통치기는 모모야마 시대(1573~1615년)로 알려져 일본 역사에서 가장 창의적인 시대 중 하나로 꼽힌다.
1. 38도선의 중요성은 무엇이었는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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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 한국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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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양측에 어떤 나라가 참전했는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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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해임했는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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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쟁의 영향 가지를 쓰시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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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인 사고와 글쓰기<br>
+
5. 결론을 작성하기: 봉쇄정책과 트루먼 독트린을 고려해 볼 때 한국전쟁은 성공이었는가 실패였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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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연표를 만들기: 한국전쟁의 중요한 사건들의 연표를 작성하시오<br>
+
  
'''p. 657'''<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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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823) [26. 1333년도 이후의 일본 미술 - 모모야마 시대]
4과 냉전의 지속<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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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기: (2번째 단락)자연스럽고 비대칭적인 사물에 대한 일본인들의 오랜 사랑은 다기에 그대로 표현되었다. 소작농들이 쓰는 한국식 밥그릇이 갑자기 고상한 취향의 전형으로 추앙받았고, 장인들에게 그 불완전한 형태를 모방하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기형적이라고 모두 각광받지는 않았다. 찻잔 크기가 손에 잘 맞는지, 형태와 질감이 보기 좋은지, 이전에 누가 사용했는지 등이 찻잔의 미를 평가하는 기준이었다. 이런 목적으로 다기 상자가 그 안에 딱 들어맞는 다기만큼이나 중요해졌고, 유명한 차 전문가가 이름을 붙인 다기는 특히 후배들에게 보물처럼 여겨졌다.
배경<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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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일어난 공산주의자들의 침공은 위스콘신 주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Joseph McCarthy)의 발언으로 유발된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매카시는 한 장의 종이를 들고 나와 이렇게 말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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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659'''<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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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832) [26. 1333년도 이후의 일본 미술 - 에도 시대]
동남아시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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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자기: 일본에서는 역사적으로 문명 초기부터 도자기를 꾸준히 제작해 왔지만, 유약을 바른 고화 도자기는 16세기에야 일본에 확산되었다. 일본 남부에서 특히 번영한 도자기 사업은 1600년에는 숙련된 한국 도자기 장인들이 한꺼번에 들어와 일본 내 장인들이 대륙의 기술을 배울 수 있게 도왔고, 처음으로 자기를 제작하게 되었다. 아리타라는 마을은 자기 제작의 중심지가 되었고, 국내용뿐 아니라 서양 수출용 자기까지 제작했다. 다도에서는 여전히 초지로의 다기(사진 26-9 참고)와 같은 질박한 그릇을 선호했으나, 중국 예술이 유행하면서 일상생활에서는 자기를 많이 사용했다. 아리타에서 만든 자기는 제작일과 장식에 따라 이름이 모두 다르다. 사진 26-17의 자기는 1628년 나베시마 사무라이 집안에서 만든 나베시마 자기로 아리타 가마에서 구운 작품이다. 처음에는 이런 자기를 집안에서 쓰거나 도쿠가와 쇼군에 선사했지만, 결국 다른 유력한 귀족 가문에 선물로 주어지기도 했다. 그릇 장식으로는 자연스럽고 불규칙적인 무늬(사진의 등나무꽃)와 추상적이고 견고한 형태(사진의 등나무를 지탱하는 격자)가 나란히 묘사되곤 한다. (최신 유행의 패턴을 담은 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현대적인 디자인은 나부시마 자기의 장식에 자주 영감을 준다.
1953년 7월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 공약을 지켰다. 1953년 3월 스탈린의 급작스러운 사망과 더 온건한 소련 지도자들의 신속한 등장이 한국전쟁의 해결에 기여했다. 한편 미국은 프랑스가 식민지인 베트남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지지하며 상당한 군사적 지원을 계속해서 제공했다. 국제회의를 통해 베트남이 한국처럼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는 북부와 반공주의자들의 남부로 분단되자 미국은 남부를 지원했지만 당분간은 깊이 관여하는 것을 자제했다. (24장을 보라)<br>
+
  
'''p. 662'''<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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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128) [33. 1950년대 이후 세계 미술의 동향 - 미술, 행동주의, 논쟁: 1990년대]
19장 복습과 평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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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와 필름 - 백남준: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한국인 백남준(1931~2006)은 존 케이지의 영향으로 1950년대 후반~60년대 초반에 실험적인 음악을 작곡했다. 1963년부터 텔레비전을 변형해 작업했고, 소니(SONY)에서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를 만든 해인 1965년 비디오 아트를 만들었다. 백남준은 ‘콜라주 기법이 유화를 대체했듯, 브라운관(텔레비전)이 캔버스를 대체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후 그는 여러 크기의 비디오 모니터에 나타나는 실시간 영상, 녹화 영상, 컴퓨터로 제작한 영상을 가지고 작업을 했고, 그 결과물 중 하나로 뉴욕 홀리 솔로몬 갤러리에 전시했던 <전자 초고속도로:미국 대륙>(사진 33-61)이 있다. 이 작품에는 미 대륙 지도의 윤곽을 네온사인으로 만들어 비디오 모니터 벽 위에 설치했고, 컴퓨터로 조종되는 모니터에서는 각 주의 문화와 역사에 맞게 녹음된 영상이 재빠르게 바뀐다. 알래스카와 하와이는 옆 벽에 붙였다. 이 작품은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복합적인 메시지의 보급과 위력을 나타낸다. 뉴욕 주를 나타내는 모니터에는 갤러리 방문객들을 실시간으로 담아내 작품을 관람자가 미디어를 통해 갖게 된 새 정체성을 스크린에 보여주어, 관람자는 피동적인 관객에서 작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참여자로 바뀐다.
요점 복습<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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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한국전쟁이 전개된 세 가지 단계를 서술하시오.(3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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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문제를 분명하게 표현하기: 맥아더 장군은 한국 전쟁을 더 공격적으로 수행하기를 원했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더 조심스러웠다. 각 입장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의견을 설명하시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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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682'''<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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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출신들이 의회 각 위원회의 주요 자리를 장악하고 있었고 의사진행을 방해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에 의회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948년 7월 트루먼은 연방 공무원 임용에서 인종차별을 금지했다. 그는 또한 군대에서의 격리와 차별을 폐지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느리게 이루어졌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서야 군대는 격리를 폐지하는데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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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684'''<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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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와 공화당의 정책<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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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에 전국의 미국인들은 “나는 아이크를 좋아해요.(I like Ike)”라고 노래했다. 공화당은 승리를 위한 공식으로 K1C2를 고안했다. 이 공식은 세 가지 문제에 초점을 맞춘 것인데 바로 한국(Korea), 공산주의(communism)와 부패(corruption)였다.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을 끝내겠다고 약속했고 공화당은 공산주의의 도전에 강력하게 대응하겠다는 것을 보장했다. 아이젠하워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는 캘리포니아 출신인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이었는데 그는 공직자로 재직 시에 부패에 연루되었다고 두들겨 맞았다.<br>
+
  
 
==3. 간략분석==
 
==3. 간략분석==

2015년 4월 14일 (화) 16:14 판

1. 목차

-저자의 말
-5판에서 달라진 점
-ArtsLab 사용하기
-추천 자료
-감사의 말
-도움말
-초보자를 위한 기본 지식
-들어가는 말

1. 선사시대 미술
석기시대
구석기시대
피난처? 건축?
유물? 예술품?
동굴 벽화
동굴 부조
신석기시대
건축
조각과 토기
금속의 사용
청동기시대
암석 조각술
이름의 위력
고의적인 방화
선사시대의 남녀
차탈회위크의 가옥
건축의 구성요소
초기 시공법
선사시대 벽화
도예
유적 발굴
연대 추정하기

2. 고대 근동지역 미술
초승달 지대와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아카드
우르, 라가시
바빌론
아나톨리아 히타이트
아시리아
칼후
두르샤루킨
니느웨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전쟁 전리품으로서의 예술품: 보존? 약탈?
함무라비 법전
우르 왕릉에서 발견된 리라
아시리아 궁수를 피해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온 침입자들
설형 문자

3. 고대 이집트 미술
나일강의 선물
초기 이집트 왕조 (기원전 2950~2575년경)
신격화된 군주
예술적인 관례
무덤 건축
고왕국 (기원전 2575~2150년경)
기자 피라미드
조각
무덤 내 부조
중고왕국 (기원전 1975~1640년경)
세누스레트 3세
암석묘
묘비
도시 계획
신왕국 (기원전 1539~1075년경)
신전 단지
하트셉수트
라모세의 묘
아크헤나텐과 아마르나 시대 미술
전통의 부활: 투탕카멘과 람세스 2세
사자의 서
제3중간기 (기원전 1075~715년경)
후기 이집트 예술 (기원전 715~332년경)
이집트 상징
아부심벨의 람세스 2세 신전
나르메르의 팔레트
마스타바에서 피라미드로
시신의 보존
이집트 부조
유리공예
연대 추정하기

4. 고대 에게해 미술
에게해 청동기시대
키클라데스 제도
크레테의 미노아 문명
구궁전시대 (기원전 1900~1700년경)
신궁전시대 (기원전 1700~1450년경)
미노아 문화의 전파
미케네(헬라) 문명
헬라 건축
미케네 무덤
도예 기술
사자의 문
아크로티리에서 발견된 ‘플로틸라 프레스코’
에게해 금속 가공기술
에게해 고고학의 선구자들

5. 고대 그리스 미술
그리스 문명의 발생
역사적 배경
신앙과 성지
그리스 미술 (기원전 900~600년경)
그리스 기하학
근동의 영향
그리스 상고기 (기원전 600~480년경)
델포이 신전
신전
조각상
항아리 그림
고전기 초기 (기원전 480~450년경)
대리석 조각
청동 조각
도자기 그림
고전기 전성기 (기원전 450~400년경)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프로필라이아, 에레크테이온
아테나 니케 신전
아테네의 아고라
도시 계획
묘비
회화
고전기 후기 (기원전 400~323년경)
조각
금세공인의 기술
회화와 모자이크
헬레니즘 (기원전 323~31/30)
헬레니즘 건축의 코린트 양식
조각
그리스 로마의 신
‘고전’인가 ‘고전적’인가
작품의 주인은 누구? 엘긴 대리석 조각과 유프로니오스 크라테르
분수에 모인 여인들
그리스 극장
켈트 미술
잠수부의 묘
사르페돈의 죽음
그리스식 기둥
그리스 조각의 색상
붉은색과 검은색폴리클레이토스의 ‘표준율’
리아체의 전사들

6. 에트루리아와 로마 미술
에트루리아인
에트루리아 건축
에트루리아 신전
묘실
청동 작품
로마인
로마 공화정 (기원전 509~27년)
인물 조각
로마 신전
로마 제국 초기 (기원전 27년~기원후 96)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예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로마의 도시와 주택
벽화
플라비우스 왕조
트라이누스와 하드리아누스 황제
건축
인물 조각
3~4세기 로마제국 말기
세베루스 왕조
군인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
콘스탄티누스 이후 로마 미술
미술에 대한 로마 기록
로마의 인물 조각상
아우구스트 마우의 ‘폼페이 벽화 4가지 양식’
작업 중인 화가
평화의 제단
석관에 새겨진 ‘인도에서 승리를 거둔 디오니소스’
로마식 기둥
아치
볼트
콘크리트
로마 모자이크
카피톨리나 늑대상
밀덴홀의 유보

7. 유대와 초기 기독교 미술
유대인, 그리스도인, 무슬림
로마 제국 후반기의 유대교와 기독교
초기 유대 미술
초기 기독교 미술
제국의 기독교 건축과 미술
로마
라벤나와 테살로니키
예수의 생애
라벤나 갈라플라키디아의 웅변술
베스 알파 회당의 모자이크 바닥
일자형 교회와 원형 교회
두라 에우로포스

8. 비잔틴 미술
비잔티움
초기 비잔틴 미술
유스티아누스의 황금기
숭배와 헌신의 대상
성상과 성상파괴령
중기 비잔틴 미술
모자이크와 프레스코 양식의 건축과 벽화
기념, 숭배, 헌신의 중요한 대상
후기 비잔틴 미술
콘스탄티노플: 코라 성당
성상
기독교 교회 명칭: 설계 + 숭배 대상 + 장소
두루마리와 고문서
성상파괴령
테오도레 메토키데스의 추도 성당
성 미카엘 대천사의 성상
펜던티브와 스퀸치

9. 이슬람 미술
이슬람과 초기 이슬람 사회
초기: 9~12세기
건축
서예
도자기
후기: 13~15세기
건축
사치품
제책술
후기 왕조의 미술과 건축
오스만 제국
사파비 왕조
현대
이슬람의 다섯 기둥
코르도바 대 모스크
맘루크 유리 등잔
아치
장식
양탄자 제작

10. 1200년도 이전의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미술
지리학
남아시아의 미술
인더스 문명
베다 시대
마우리아 왕조
슌가와 초기 샤타바하나 왕조
쿠샨 왕조
굽타 왕조와 후예들
그 밖의 지역 (4~6세기)
팔라바 왕조
7~12세기
촐라 제국
동남아시아 미술
초기 동남아시아
6~9세기
10~12세기
불교
무드라
힌두교
촐라 제국의 나타라야 시바
석가출가도
사리탑과 사원

11. 1279년도 이전의 중국과 한국 미술
중국
신석기시대
도자기 그림
양저문화
중국의 청동기시대
은나라
주나라
중국의 제국: 진나라
한나라
철학과 미술
건축
6조 시대
회화
서예
불교 미술과 건축
수나라와 당나라
불교 미술과 건축
인물화
송나라
북송 회화
남송 회화와 도자기
한국의 미술
삼국시대
통일신라 시대
고려 왕조
한자
도교
공자와 유교
당나라 시대의 비단길
왕궁의 연회

주형주물

12. 1333년도 이전의 일본 미술
선사시대 일본
죠몽 시대
야요이 시대
고훈 시대
아스카 시대
호류지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
밀교 미술
정토종 미술
세속 미술과 서예
가마쿠라 시대
정토종 미술
선불교 미술
글과 언어, 문화
불교의 상징
무기와 갑옷
달마대사: 선불교 창시자
겐지 이야기
일본의 목공술
대웅전

13. 1300년도 이전의 아메리카 미술
새로운 세계
메소아메리카
올메크 문화
테오티우아칸
마야 문명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중앙안데스
차빈데우완타르
파라카스, 나즈카 문화
북아메리카
동쪽
북아메리카 남서쪽
마야 문자
의식을 위한 공놀이
암각화
방패 표범과 쏙 부인
안데스 직물

14. 초기 아프리카 미술
고대 아프리카의 매력
아프리카: 미술과 문명의 요람
아프리카 암각화
사하라 암각화
사하라사막 남부 문명
노크
이그보 우크부
이페
베냉
그 밖의 중심지
젠네
그레이트 짐바브웨
악숨, 랄리벨라
콩고 제국
서양으로의 수출
‘원시’ 미술의 신화
남아프리카 암각화
충성을 맹세하는 사령관
끈을 감은 항아리
납형주조법

15. 유럽의 중세 초기 미술
중세 초기
유럽의 ‘야만인’ 미술
메로빙 왕조
스칸디나비아
영국의 켈트족과 앵글로색슨족
영국의 초기 기독교 미술
책의 삽화
스페인 모사라베 미술
베아투스 본
바이킹 시대
오세베르그호
옐링의 비석
목조건축
카롤링거 왕조
카롤링거 건축
책의 삽화
금속 가공술
오스만 왕조
오스만 건축
오스만 조각
책의 삽화
중세의 정의
중세의 기록실
린디스판 복음서
위트레흐트 시편집의 시편 23편
서튼후

16. 로마네스크 미술
로마네스크 시대의 유럽
정치와 경제, 사회
교회
로마네스크 미술
건축
‘최초의 로마네스크’
순례 교회
클뤼니
시토
로마네스크 건축의 지역적 양식
세속 건축물: 영국 도버 성
건축에 새겨진 조각
모데나 대성당의 빌리겔무스
무아사크의 성 베드로 성당
오탕의 성 라자로 성당
목조, 청동 조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상지의 옥좌에 앉은 마리아
슈바벤 루돌프의 무덤
르니에 데 위
직물과 책
연대기적 역사
신성한 책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자
유물과 성유물
성 베르나르도와 테오필루스: 시각 예술에 대한 수도사들의 논쟁
타우의 산트클리멘트 성당 회화: 모사라베와 비잔틴의 만남
힐데가르트 폰 빙엔
바이외 자수
오탕의 팀파눔에 새겨진 최후의 심판
로마네스크 교회 정문

17. 12, 13세기 고딕 양식
고딕양식의 출현
도시와 지성의 발달
대성당의 시대
프랑스 고딕 미술
생드니 대성당, 고딕의 탄생
고딕 대성당
성 루이 시대의 미술
영국 고딕 미술
그림 성경
건축
독일과 신성로마제국 고딕 미술
건축
조각
이탈리아 고딕 미술
조각: 피사노 가
회화
쉬제르, 수도원 미술의 가치에 대하여
숙련된 석공들
비야르 옹느쿠르
파리의 생트 샤펠
윈드밀 시편집의 시편 1편
리브 볼트
고딕 교회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18. 14세기의 유럽 미술
14세기 유럽
이탈리아
피렌체 건축과 금속 가공술
피렌체 회화
시에나 회화
프랑스
그림 성경
금속 가공술과 상아
잉글랜드
자수: 오푸스 앙글리카눔
건축
신성로마제국
신비주의와 고행
프라하의 부상
14세기 문학의 새로운 바람
흑사병
연애 장면을 담은 상아 궤짝
잔 데브뢰의 시간
부온 프레스코
첸니니의 ‘예술의 서’

19. 15세기의 북유럽 미술
북유럽 르네상스
프랑스 공작 저택
샤르트뢰즈 드 샹무아의 회화와 조각
그림 성경
직물
플랑드르 회화
플랑드르파의 창립
15세기 중반 회화: 제2세대
플랑드르 너머의 유럽
프랑스
독일, 스위스
그래픽 아트
낱장 인쇄
책 출판과 보급
제단과 제단화
중세와 르네상스의 여류화가
헨트 제단화
가게에 있는 금세공인
유화
목판화와 금속판화

20. 15세기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
인본주의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피렌체
건축
조각
회화
마사초 이후의 피렌체 회화
15세기 전반 이탈리아 미술
우르비노
만투아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조각 경연대회
모렐리-네를리 부부의 함
고아원
보티첼리의 ‘봄’
르네상스 원근법

21. 16세기의 이탈리아 미술
16세기 유럽
16세기 초반의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
16세기 초반의 거장 3인
로마와 바티칸 건축
이탈리아 북부 건축, 회화, 조각
베네치아와 베네토
매너리즘
회화
조각
미술과 가톨릭개혁
로마와 바티칸의 미술, 건축
16세기 후반의 베네치아와 베네토
유화
건축: 팔라디오
비트루비안 맨
성 베드로 대성당
여성들의 예술 후원
심문을 받은 베로네세
시스티나 성당의 태피스트리를 위한 라파엘로의 습작
아테네 학당

22. 16세기의 북유럽과 이베리아 반도 미술
종교개혁과 예술
독일
조각
회화
프랑스
프랑수아 1세 시대의 프랑스 르네상스
스페인과 포르투갈
건축
회화
네덜란드
귀족 후원자를 위한 예술
안트베르펜
영국
튜더 왕가의 예술가들
건축
귀부인들의 성
투마르 수도원
왕실 경기용 갑옷
브뢰헬의 ‘계절 연작’
프랑스 사절들
독일 금속 가공술: 금속 합작회사

23. 17세기의 유럽 미술
바로크
이탈리아
로마의 건축과 조각
회화
스페인
스페인 황금기의 회화
스페인의 건축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플랑드르
네덜란드 공화국
프랑스
베르사유 건축물과 장식
회화
영국
건축
과학과 세계관의 변화
거장들의 등급
콘타렐리 성당의 카라바조
포박된 프로메테우스
정원 설계
에칭과 드라이포인트

24. 1200년도 이후의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미술
1200년도 이후의 남아시아
종교와 미술의 변화
무굴 제국
영국 식민지 시대와 독립운동
1200년도 이후의 동남아시아
불교 미술과 왕위
이슬람 미술과 동남아시아
현대
현대 남아시아
현대 동남아시아
인도 문화의 기반
동남아시아 도자기
자한기르와 샤 압바스
수코타이 불상
인도 회화

25. 1279년도 이후의 중국과 한국 미술
몽골의 침략
원나라
명나라
화원과 직업화가
공예
건축과 도시계획
문인화
청나라
정통 회화
개성적인 문인화
현대
한국의 미술: 조선 왕조에서 현대까지
조선 자기
조선 회화
한국의 현대
중국 문화의 기반
마르코 폴로
산꼭대기에 선 시인
한궁춘효
중국 회화의 구성
자기의 비밀

26. 1333년도 이후의 일본 미술
무로마치 시대
선불교 수묵화
적막한 정원
모모야마 시대
건축
서원 장식을 위한 회화
다도
에도 시대
린파 화파
자연주의적 회화
문인화
우키요에: 덧없는 세상을 그리다
선불교 회화: 촌부를 위한 불교 예술
복식과 자기
현대
메이지 시대의 자연주의적 화풍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
일본 문화의 기반
인간문화재
옻칠한 필통
여성의 복식 코소데
서원의 설계
필통 내부
일본 목판화

27. 1300년도 이후의 아메리카 미술
아즈텍 제국
테노치티틀란
조각
깃털장식
문서
잉카 제국
쿠스코
마추픽추
직물
금속 가공술
스페인 점령의 여파
북아메리카
동부 삼림지대
대평원
북서부 해안지대
남서부
새로운 시작
기술? 예술?
하마차 탈
아즈텍 돌 달력
잉카의 공사
바구니 세공품

28. 태평양 지역 미술
태평양 지역의 인구
오스트레일리아
멜라네시아
뉴기니
뉴아일랜드
뉴브리튼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
마르케사스 제도
하와이
라파누이의 모아이 석상
사모아
오세아니아의 현대 미술
태평양 예술 축제
중앙사막 회화
시게유키 키하라
테하누키 투랑가
남자의 사랑이야기

29. 근대 아프리카 미술
전통, 현대 아프리카
아프리카 건축
어린이와 삶의 지속성
입문
영적 세계
리더십
죽음과 조상
현대미술
아프리카 문화의 기반
초크웨의 점술
쿠바의 장례용 탈
콩고의 엔키시 엔콘디 주술상

30. 18세기와 19세기 초반 유럽과 북아메리카 미술
산업, 지성, 정치적 혁명
로코코
로코코 살롱
로코코 회화와 조각
로코코 교회 장식
이탈리아: 유럽여행과 신고전주의
유럽여행 회화와 경치
로마의 신고전주의
영국의 신고전주의와 초기 낭만주의
건축과 설계에서 고전주의 부활
건축과 설계에서 고딕 양식 부활
영국 회화의 경향
18세기 후반 프랑스 미술
건축
회화와 조각
스페인과 중남미 지역 미술
스페인의 초상화와 저항: 고야
중남미 지역의 미술
19세기 초반 미술: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프랑스에서의 발전
낭만주의 풍경화
19세기 초반 건축의 고딕 양식과 신고전주의 양식
아카데미와 전시회
메두사의 뗏목
조지 시대의 은제품
철제 건축 자재
석판화

31. 19세기 중후반 유럽과 미국 미술
19세기 중후반 유럽과 미국
프랑스 아카데미 건축과 미술
아카데미 건축
아카데미 회화와 조각
유럽과 미국의 초기 사진
리얼리즘과 아방가르드
리얼리즘과 혁명
마네: ‘근대생활의 화가’
프랑스 외 국가들의 리얼리즘에 대한 반응
인상주의
풍경과 여흥
근대적 삶
19세기 후반
후기인상주의
상징주의
프랑스 조각
아르누보
모더니즘의 시작
유럽 건축: 기술과 구조
시카고파
세잔
오리엔탈리즘
미술의 대량 보급
1877년의 미술 재판
모더니즘 화가들과 세계 문화: 일본주의
마하나 노 아투아 (신의 날)
도시공원
사진을 찍는 과정

32. 1900~1950년대 유럽과 아메리카의 현대 미술
20세기 초반 유럽과 아메리카
유럽의 초기 모더니즘
야수파: 색채의 야수들
피카소, ‘원시주의’, 큐비즘의 도래
다리파와 원시주의
표현주의
청기사파
큐비즘의 확대
전통 조각의 추상화
다다이즘: 예술 자체에 대한 의문
아메리카의 모더니즘
스티글리츠와
화랑
아모리 쇼와 자체적인 모더니즘
초기 모더니즘 건축
유럽 모더니즘
아메리카 모더니즘
전쟁 속 유럽 미술
러시아의 실용주의적 미술 형태
네덜란드의 데스틸
독일 바우하우스
초현실주의와 마음
영국의 유닛원
전쟁 속 아메리카 모더니즘
할렘 르네상스
아메리카의 시골 지역
캐나다
멕시코
브라질
쿠바
전후 유럽과 아메리카 미술
유럽의 엥포르멜 미술
라틴아메리카의 실험
뉴욕 추상표현주의
나치의 박해를 받은 아방가르드
대공황 시대 연방 정부의 미국 예술 지원
게르니카
독일 장교의 초상
마천루
국제적 양식

33. 1950년대 이후 세계 미술의 동향
1950년대 이후의 세계
1950년대 이후의 미술
미술계의 확장
앗상블라주
사진
팝아트
오브제의 비물질화
미니멀리즘
관념과 행위 예술
개념 예술
페미니즘과 미술
토공 작업과 부지 특성적 조각
건축: 20세기 중반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20세기 중반 모더니즘 건축
포스트모더니즘 건축
포스트모더니즘
회화
포스트모더니즘과 성
포스트모더니즘과 인종, 또는 민족성
조각
미술, 행동주의, 논쟁: 1990년대
문화 전쟁
행동주의 미술
탈식민주의 담론
첨단 기술과 해체주의 건축
비디오와 필름
세계통합주의: 새천년으로
미술과 기술
미술과 정체성
게릴라 걸스
공공 예술기금에 대한 담론
디너 파티
풍요의 자랑

-용어집
-참고문헌
-자료출처
-색인

2. 한국관련 내용

p. 353
지도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에서의 영향권이 그려져 있다. 한국은 일본의 영향권으로 표시되어 있다.]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음
(p. 297) [10. 1200년도 이전의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미술: 남아시아의 미술] 지도 10-1: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 한반도를 ‘한국’으로 표시.

(p. 301) [10. 1200년도 이전의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미술] 미술 속 문맥읽기: 불교 (싯달타 왕자의 출가, 부처의 가르침과 ‘부처’ 개념에 이은 4번째 단락)

‘테라바다(소승불교)’ 또는 ‘니카야’로 알려진 초기 불교에서는 ‘열반’에 이르러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인의 수양을 강조했다. 소승불교는 주로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 지역에 남아 있다. 소승불교만큼 오래된 마하나야(대승불교)라는 또 다른 형태의 불교는 주로 북인도에서 각광을 받았고 중국과 한국, 일본, 티베트(밀교)에 번성했다. 대승불교의 기초는 모든 중생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개인의 열반 뿐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는 것이 목표이다. 많은 불교학파에서 석가모니 외의 다른 부처들이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미륵은 지상에 나타날 다음 부처라고 알려진 인물이다. 몇몇 분파에서는 부처가 되기 직전 단계인 보살(지혜로운 자) 개념을 받아들이며, 보살은 열반에 이르기 직전에 있는 인물로 다른 이들도 부처가 될 수 있도록 돕는 이들이라고 믿는다. 미술에서 보살과 부처는 의복과 장식으로 뚜렷하게 구분된다. 보살은 인도 왕자와 같은 옷을 입고, 부처는 승려복을 입는다.

(p. 331) [11. 1279년도 이전의 중국과 한국 미술]

(중국 미술 개관을 설명한 뒤 마지막 단락) 중국 문명은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 중국 학문은 계속 한국 문화의 발전을 촉진했고, 그 다음으로 한국이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

<학습> 11.1 초기 중국과 한국 미술의 발전기와 지역적 양식을 찾아보고, 중국 전통과 한국 전통 간의 관계를 알아보자. 11.2 신석기 시대부터 13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한국이 다양한 예술 작품에서 주로 다룬 주제와 소재들을 찾아보자. 11.3 중국, 한국의 예술 역사와 유, 불, 도교 전통 간의 관계를 조사해 보자.

(p. 333) <지도 11-1 중국과 한국> 이 지도에는 현재 중국과 한국의 국경을 표시했다. 밝은 색깔로 칠한 부분은 중국 한 왕조(기원전 206~기원후 220)의 확장을 보여준다. - 한반도를 ‘한국’으로 표기.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 명칭과 함께 개성, 서울, 경주 표시. 동해는 일본해(Sea of Japan)로 표기됨.

(p. 356~359)

[11. 1279년도 이전의 중국과 한국 미술: 한국의 미술]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자리 잡은 한국은 아시아 북동지역의 반도를 차지했다. 한반도에는 수천 년간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삼국시대에 독특한 한국 문화가 발생했다.
삼국시대
보통 기원전 57~기원후 668년으로 추정되는 이 시기에 한반도 남동 지역 신라, 남서 지역 백제, 북쪽 고구려의 세 왕국이 독자적인 국가 형태를 수립했다. 5, 6세기에 지은 거대한 고분에서 삼국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금관: 고분에서 출토된 가장 화려한 물품은 왕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유물들이다(사진 11-26). 이 정교한 왕관은 매장용으로 제작된 제품이 분명하며, 얇게 자른 금판들을 금실로 엮어 구성했다.

쉼표 모양으로 생긴 녹색과 흰색 비취 장식과 금장식이 왕관에 달려 있다. 비취는 중국에서 귀하게 여겼던 연옥과는 광물학적으로 다른 종류다. 왕관 둘레에 가지 모양으로 높게 뻗은 형상은 나뭇가지와 사슴뿔을 닮았다. 왕관 안에는 날개나 깃털 모양의 부속품을 달고 얇은 금판을 엮어서 짠 원뿔 모양 모자를 쓴다.

(p.356) 사진 11-26: 왕관 - 한국 경상북도 경주 금령총에서 발견. 6세기 경 삼국시대 신라. 비취로 장식, 높이 약 44.5cm. 대한민국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화 도자기: 고분 안에는 도자기도 많이 발견된다. 대부분 망자의 영혼이 먹을 음식을 담는 그릇이었다. 이런 그릇은 대부분 유약 처리를 하지 않고 열을 가해 유약 없이도 액체의 영향을 받지 않게 만든 도자기이다.
가장 인상적인 자기는 높은 받침대(사진 11-27)로, 아래쪽이 넓적한 이 원통형 받침대는 바닥이 둥근 단지를 지지할 때 사용했다. [357] 다소 육중해 보였을 수 있으나, 고화 처리 전 흙이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구멍을 내 형태가 산뜻해졌다. 종종 나타나는 물결무늬나 원, v자 무늬를 제외하고 삼국시대 도자기에서 외부 장식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거의 없으나, 이 작품에서는 뱀이 받침대 손잡이 쪽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p.356) 사진 11-27: 뱀 무늬, 추상 무늬, 투조로 장식한 예식용 받침대 - 한국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된 것으로 추정. 5~6세기경 삼국시대 신라. 회색 자기에 무늬와 투조를 내 장식, 천연 유약의 흔적. 높이 약 58.7cm.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 하버드 대학교 새클러 박물관 소장. 마리아 C. 헨더슨 기증, 어니스트 B. 데인과 헬렌 프랫 데인 동양미술품구입기금을 통해 구매.
반가사유상: 중국에서 건너온 불교는 372년 고구려, 384년 백제에 들어왔다. 불교가 5세기 후반 신라에도 소개되었을지 모르나, 공식적으로는 527년에야 인정을 받았다.
초기 불교 미술은 중국을 모방한 형태였다. 그러나 6세기 후반 한국 조각은 독특한 양식을 드러냈고, 전형적인 예로 (미륵보살로 추정되는) 금동 반가사유상이 있다(사진 11-28). 보살의 자세는 6세기 후반 중국 조각을 따랐지만 날씬한 몸매와 타원형 얼굴, 우아한 옷주름, 세 갈래의 관은 한국 조각의 특징이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일본에 불교를 소개했다. 실제로, 수많은 한국 조각가들이 6~7세기에 일본에서 활약했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 일본 불교미술 초기 작품에는 한국의 영향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사진 12-6 참고)

(p.357) 사진 11-28: 반가사유상 - 삼국시대 7세기 초, 신라로 추정. 금동, 높이 약 91cm. 대한민국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서울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전).
 통일신라시대
신라는 660년 백제를 정복하고, 668년 중국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격파해 삼국을 통일했다. 통일신라는 935년까지 지속되었다. 불교는 통일신라시대에 번영했고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안팎으로 많은 큰 규모의 중요 사찰이 건축되었다.
석굴암: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큰 유물인 석굴암은 신라 왕실의 후원으로 경주 근처의 토함산 꼭대기에 지어진 인공 석굴사찰이다. 인도 석굴사찰이 중국에 영향을 미쳤고, 5~7세기에 지어진 중국의 석굴사찰 형식을 한국에서 본떠 석굴암을 만든 것이다.
8세기 중반에 화강암을 깎아 만든 석굴암은 사각의 작은 전실과 천장이 둥근 원형 주실이 좁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높이 3.4m가 넘는 거대한 부처가 주실을 차지하고 있다(사진 11-29). 연꽃에 앉은 불상의 모습은 지면을 만지는 자세(촉지(觸指) 동작)에서 알 수 있듯 부처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역사적인 순간을 나타낸다. 부처의 풍만하고 팽팽한 형태, 얇은 옷자락, 해부학적으로 상세하게 묘사된 가슴팍은 8세기 중국 조각과 연관이 있다. 얕은 돋을새김으로 정교하게 새긴 보살과 하위 신들은 부실과 연결 통로, 주실을 아름답게 장식한다.

(p.358) 사진 11-29: 석가모니 불상 - 한국 경상북도 경주 근처의 석굴암. 통일신라시대 751년경. 화강암, 불상 높이 약 3.42m. - 불상의 땅을 만지는 손 모양은 촉지 동작으로, 깨달음을 의미한다. [358]

고려시대
918년 건국된 고려는 935년에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통일신라의 통치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 1392년까지 지속된 고려의 수도는 개성으로, 오늘날 서울의 북서쪽이자 북한에 있는 도시이다. 고려 왕조 시대의 미술은 품위가 넘쳤으며 유약을 바른 청자가 가장 유명하다.
청자: ‘셀러던(celadon)’이라는 용어는 고화 처리된 자기의 유약이 띠는 투명하고 엷은 청록색을 의미하며, 보통 회백색 자기에 발랐다. 중국 도자기 장인들은 1세기에 이미 청색 유약을 발명해 꾸준히 청자를 제작했다. 한국 장인들은 8~9세기에 청색 유약을 시험해보기 시작했고, 곧 중국의 최상급 도자기에 견줄 만한 세련된 고려청자가 탄생했다. 고려 시대에 이런 청자는 다양한 계층이 두루 사용했지만, 가장 우수한 자기들은 왕족과 귀족, 유력한 승려들에게 돌아갔다.

11세기 고려청자는 고전적인 단순미를 자랑하며 장식을 지양했지만 12세기 장인들은 동시대의 중국 자기를 모방하거나 새로운 장식 기법을 찾아내기 위해 무늬를 새기거나 장식을 넣었다. 장인들의 발명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상감 기법으로, 자기 표면에 음각으로 새긴 무늬에 백토나 흑토를 발라 대조적인 색깔을 배치해 세 가지의 다른 장면을 흑토와 백토로 나타냈다(그림 11-30). [359] 이 자기에는 호숫가에 꽃이 핀 매화나무(늦겨울에 잎이 돋기 전에 꽃이 피는 나무) 가지와 한데 얽힌 대나무 숲을 묘사하고 있다. 호수에 거위가 헤엄치고 나비가 나무 위로 날아다니면서 도자기의 장면을 연결한다. 윗부분이 넓은 이 ‘매병’은 포도주, 식초 등의 액체를 담는 용기로 사용했다. 원래는 종 모양의 조그만 뚜껑으로 주둥이를 덮어 내용물을 보관하고 도자기의 곡선을 보완했다.

(p.358) 그림 11-30: 대나무와 매화나무로 장식된 매병 - 한국 고려시대, 12~13세기. 상감청자: 유약 처리 전의 회백색 자기에 흑토와 백토로 무늬를 넣음. 높이 33.7cm.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
불화: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는 왕가의 후원을 받아, 많은 사찰이 당대 최고의 건축가, 조각가, 화가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고려 시대에 가장 호화로웠던 불교 예술품은 회화였다. 비단 족자에 먹과 물감으로 그린 14세기 수월관음도는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중국식으로는 ‘관인’)을 묘사하고 있다(사진 11-31). 풍성한 색감과 금색 물감은 당대의 화려한 취향을 반영한다. 같은 유형의 수많은 회화가 일본에 수출되어 일본 불교 회화에 영향을 미쳤다.
(p.359) 사진 11-31: 수월관음도 - 한국 고려시대, 14세기 후반. 비단 족자에 먹, 물감, 금색 물감. 높이 159.6cm.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 하버드 대학교 새클러 박물관 소장. 그렌빌 L. 윈스롭 기증.
<연구>

11.1 초기 중국과 한국 미술의 역사 발전에 있어 자연주의(자연 세계의 시각적 외관을 재현하는 경향)는 어느 범위까지 원동력으로 작용했는가? 11.2 중국의 관음보살상(사진 11-20)과 한국의 반가사유상(사진 11-28)을 비교, 대조해 보자. 보살의 의미를 정의하고 신의 속성이 외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조사해 보자.

(p. 362) [12. 1333년도 이전의 일본 미술: 선사시대 일본]
야요이 시대: 야요이 시대(기원전 400년~기원후 300년경)에 한국 이주민들을 통해 논농사를 도입해 일본이 농경 국가로 전환하는 계기를 맞았다. 세계 모든 지역이 그렇듯, 이러한 전환으로 노동은 농사와 그 밖의 활동으로 나뉘고 사회 구조가 계층적으로 형성되어, 정착지 확대와 계급구조 형성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인 정착민들은 금속 기술도 보급했다. 청동은 종과 같은 의례용 도구뿐 아니라 무기를 만드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 철기 제작도 발달해 결국 일상생활에 사용하던 석기를 대체했다.

<지도 12-1: 일본> 한국과 동해 표시. 동해는 일본해로 표기됨. - 일본: 15,000년 전 빙하기 말에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높아져 일본 땅은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큐슈의 4개 섬이 되었다.

(p. 364) [12. 1333년도 이전의 일본 미술: 선사시대 일본]

아스카 시대
1세기 동안의 아스카 시대(554~645년)에 한국과 중국에서 새로운 철학, 의술, 음악, 음식, 복식, 농업, 도시 계획, 종교, 시각 예술, 건축 형태가 일본에 급속도로 밀려들어왔다. 그중 불교, 중앙 집권적 구조, 문자 체계가 가장 중요하며, 각각 일본의 상황에 맞게 변형, 융화되어 오랜 유산이 되었다.

(p. 367) [12. 1333년도 이전의 일본 미술: 선사시대 일본]

(아스카 시대 계속) 석가삼존상: 일본 불교 미술 초기의 국제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는 토리 부시가 만들었다고 전통적으로 알려진 호류사 석가삼존상이다(사진 12-6). (일본어 ‘샤카’는 전설적인 부처인 석가모니를 뜻한다.) 토리 부시(‘부시’는 불상 제작자라는 뜻)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밀려들어온 승려 및 장인들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해 온 한국 장인의 후손으로도 추정된다. 석가삼존상에는 중국 북위시대 미술의 막대한 영향이 드러난다(사진 11-12 참고). 정면을 향한 자세, 커다란 얼굴과 손, 선으로 처리된 휘장은 이 불상을 만든 장인이 대륙의 초기 불상 형태를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암시하는 한편, 세련된 청동 주물 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장인의 숙련된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p. 369) [12. 1333년도 이전의 일본 미술: 선사시대 일본]

헤이안 시대
일본은 헤이안 시대(794~1185년)에 중국과 한국에서 차용한 문물을 완전히 흡수하고 변형시켰다. 전반적으로 평화로운 시대였기에 자립의 분위기가 새롭게 조성됐고, 귀족 가문의 세력이 증가한 9세기에 일본 왕실은 중국과의 유대를 단절했다. 일본어를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도구가 발달했고, 토속 문학의 부상으로 여류작가 무라사키의 <겐지 이야기>와 같은 산문 작품이 등장했다. 화려하고 세련된 4세기 동안 불교는 크게 두 가지 주류로 나타났다. 하나는 밀교이고, 다른 하나는 정토 극락세계의 구원을 믿는 정토종이다.
(p. 371) [12. 1333년도 이전의 일본 미술: 선사시대 일본] 
(헤이안 시대의 불교) 정토종 미술: 군국주의의 부상, 정치적 격변, 궁중의 방종이 11세기 초 일본의 특징이다. 불안정한 이 시기에 많은 이들이 말법(末法), 즉 부처의 바른 가르침이 끊어진 어두운 시대가 닥쳤다고 믿었다. 각계의 일본인들은 신성한 꽃과 음악으로 가득한 눈부신 ‘서방극락정토’를 믿고 내세의 구원을 갈망하게 되었다. 극락에는 아미타(산스크리트 어로 ‘아미타바’)와 그를 수행하는 보살들이 있어, 이들의 자비에 전심으로 복종하는 사람들을 축복의 땅으로 기꺼이 맞아들이고 보호한다. 정토 신앙은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큰 인기를 누렸고, 한국을 통해 일본에도 전해졌다. 밀교의 복잡한 종교 의식에 비해 정토종은 즉각적이고 쉬운 수단으로 구원을 약속한다. 정토종에서는 신실한 신자가 ‘나무아미타불’을 암송하기만 하면 서방 세계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p. 772) [남아시아와 동아시아 지도]

- 지도 우측 상단에 한국 표시.

(p. 793) [25. 1279년도 이후의 중국과 한국 미술]
(당나라의 화풍 특징과 과거제를 소개한 뒤, 5번째 단락) 송나라 때(960~1279) 과거제는 확장되고 체계화되었다. 관직의 절반은 학자들이 차지했다. 뒤이은 원나라와 명나라 때는 문인화(식자층의 취향을 반영한 회화 양식)의 전통이 더욱 발달했다. 외세의 지배를 받았던 원나라의 시대가 끝나고, 명나라 때는 송대의 궁중 전통을 부활시켰다. 명나라는 한국 조선 왕조의 본보기가 되었고, 한국에서도 독특하고 꾸밈없는 미술 양식이 조선 왕조의 지지 아래 발달했다.

<학습> 25.1 중국과 한국 미술에서 나타나는 문인화 양식을 연구하고 문인화와 문인들의 삶의 관계를 탐구해 보자. 25.2 중국과 한국 회화의 풍경화 소재의 발전과 중요성을 이해하자. 25.3 중국과 한국의 궁중 생활과 후원이 각 나라의 미술에 미친 영향을 평가해 보자. 25.4 13세기에서 현재까지 중국과 한국에서 중요한 예술 양상으로 나타난 특징들을 분석하고 학습해 보자.

(p. 794)

<지도 25-1: 중국과 한국>
이 지도에는 현재 중국과 한국의 국경을 표시했다. 색칠한 부분은 중국 청 왕조(1644~1911년)와 청의 조공국들을 포함한 범위로, 당대의 역사적인 확장을 보여준다.

- 한국은 북한, 남한으로 나누어 표시. 개성과 서울을 표기, 남한의 금강산 표시. 동해와 황해 표시. 동해는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음.

(p. 797) [25. 1279년도 이후의 중국과 한국 미술]
(명나라: 화원과 직업화가에 대한 내용)이 시기에는 궁중 회화와 연관되면서도 더욱 대담하고 제약에서 벗어난 풍경화가 인기를 끌었다. 이 회화 양식은 절강 양식이라고도 하는데, 이 양식이 남송 수도가 있었던 절강성 항저우에 기원을 두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표작으로 <춘유만귀도>가 있다(사진 25-5). 서명은 없으나 대진(戴進, 1388~1462)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같은 절강 양식은 안견(사진 25-18 참고)이나 셋슈(사진 26-13 참고) 등의 한국, 일본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p. 808~813) [25. 1279년도 이후의 중국과 한국 미술]

한국의 미술: 조선 왕조에서 현대까지
1392년 이성계 장군(1335~1408)이 고려 왕조(918~1392)를 전복시켜 조선 왕조(1392~1910), 또는 이씨 왕조를 건립했다. 처음에 이성계는 옛 고려의 수도 개성을 그대로 수도로 삼았다가 1394년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수도는 다시 바뀌지 않았다. 조선은 불교를 배척하고 국가 철학으로 성리학을 옹호했다. 중국 명나라를 본받은 조선은 명의 관료제를 본떴고, 심지어 명나라 황실의 상징이었던 백청색 자기를 그대로 차용하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는 문화와 과학 발전을 이루어, 측우기와 천문관측대, 혼천의, 해시계, 물시계뿐 아니라 한국 문자인 한글도 창조했다.
조선 자기
신라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11과 참고) 조선 도자기 장인들도 뛰어난 자기를 제작했는데, 동시대의 중국 작품에서 영감을 얻기는 했지만 그대로 베끼는 일은 드물었다.
분청사기: 고려청자의 전통을 물려받은 조선 자기는 ‘분청’사기라고 불리며, 한반도 전역에서 널리 사용했다. 값비싼 흰 자기와 비슷하게 백토를 많이 사용하면 장식적인 효과가 더욱 높아졌다. 15세기 작품에는 도자기에 백토로 반복적인 무늬를 넣은 작품도 종종 보인다.
16세기 분청사기의 특징은 흰 바탕에 회갈색을 바른 자기에 붓으로 흐르는 듯한 무늬 장식이다. 분청사기는 대부분 꽃무늬가 많았지만, 사진 25-16의 술병처럼 드물게 장면을 묘사한 병도 있다. 신선하고 힘찬 붓질로 그린 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발톱으로 물고기를 낚아 올린다. 그 아래로 파도가 치고 커다란 연꽃 두 송이가 가장자리를 둘렀다.
1592~159년에 일본군이 계속 한반도를 침입해 분청 가마가 많이 파괴되었고, 아예 도자기 제작이 중단될 정도였다. 일본인들이 많은 분청자기 제작자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분청식 자기를 만들게 했고, 이들의 자기는 다도 전문가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았다. 사실 한국 분청사기의 자연스러운 성격이 오늘날까지 일본 자기에 영향을 주었다.
사진 25-16: 물고기를 잡은 새가 그려진 술병
한국 조선시대, 16세기. 분청사기: 연회색 바탕에 백토, 회갈색 무늬. 15.5x24.1cm. 일본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 소장. 스미토모 그룹 기증.
채색된 자기: 한국 장인들은 15세기부터 중국 명나라 자기의 영향으로(사진 25-7 참고) 도자기에 청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 넣었다. 조정에서는 궁궐의 장인들을 한양에서 남동쪽으로 50km정도 떨어진 도자기 가마로 보내 도자기 화가들을 훈련시켰다. 그 결과 15세기부터 최고급 한국 자기에 그려지는 그림은 종이나 비단에 그린 그림과 거의 흡사해졌고, 이는 회화적 전통을 거의 참고하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밟은 중국 도자기의 장식과 사뭇 달라졌다.

또 다른 독특한 점은 16~17세기 한국 자기가 청색 물감을 사용하는 명나라 자기의 전통보다 회갈색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17세기에 상부가 넓고, 몸체는 가늘며, 목은 세로로 좁은 독특한 형태를 띤 도자기가 나타났고, 조선 후기에 가장 특징적인 도자기 형태가 되었다. 사진 25-17의 17세기 도자기는 유약 처리 전 회갈색으로 포도나무 가지 그림을 그려 넣었다. 경계에 구애받지 않은 그림을 그려 넣어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비대칭적인 디자인은 여백의 미를 선호하는 한국인들의 취향을 반영한 전형적인 한국 양식이다.

사진 25-17: 백자철화 포도무늬 항아리
한국 조선시대, 17세기. 유약 처리 전 회갈색으로 그림. 높이 53.8cm. 대한민국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오늘날 남은 고려자기는 별로 없지만 한국 장인들은 약 11~12세기부터 고려의 도자기 제작법을 배웠다. 몇 세기 동안 중국과 한국에서만 도자기 제작법을 알고 있었다.

조선 회화
한국 세속화는 조선 시대에 진가를 발휘했다. 고려의 전통을 물려받아 조선 초기 회화는 중국식 전형을 따랐고, 식물부터 풍경, 인물, 다양한 동물에 이르기까지 그림의 주제를 넓혔다. 
안견(1418년 출생)이 1447년에 그린 몽유도원도(사진 25-18)는 현존하는 조선 세속화 중에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몽유도원도에는 중국에서 숭앙받는 자연시인 도겸(365~427)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묘사했고, 세상과 동떨어진 도원을 거닐었던 꿈을 떠올려 그린 작품이다.
고려와 마찬가지로, 15세기 한국화에 나타나는 거대한 산맥과 광대한 경치는 북송 회화 양식을 반영한다. 중국 남송(1127~1279)과 명나라(1368~1644)도 15~17세기 한국 회화에 영향을 미쳤으나 북송 대가들의 흔적을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사진 25-18: 안견<몽유도원도>
한국 조선시대, 1447년. 비단 두루마리에 먹과 엷은 채색. 36.7x106.1cm. 일본 덴리(나라 근처)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실학운동: 18세기, 중국 고전뿐 아니라 한국 연구도 강조한 실학(실용적인 학문)의 영향으로 진정한 한국적인 양식이 등장했다. 실학 운동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화가는 정선(1676~1759)으로, 선대 화가들이 선호했던 중국 풍경이 아닌 자신에게 친숙한 한국 경치를 그렸다. 정선의 회화에는 한국 동쪽 해안의 울퉁불퉁한 금강산이 자주 등장한다. 1734년에 그린 작품(사진 25-19)에는 바늘처럼 생긴 금강산의 봉우리들을 절묘하게 묘사했다. 주제가 한국이니만큼 작품에 드러난 역동적인 기상과 강한 개성, 수정처럼 생긴 산맥, 묽은 먹으로 섬세하게 표현한 구름, 독자적인 붓놀림도 한국적이다.
사진 25-19: 정선 <금강전도>
한국 조선시대, 1734년. 종이 족자에 먹과 물감. 130.1x94cm. 대한민국 서울 삼성 리움미술관 소장.
인물화가 중 신윤복(1758년 출생)은 실학 정신의 중요한 본보기이다. 18세기 말~19세기 초에 활동한 신윤복은 주로 한복 차림의 양반 계층을 그렸다. <상춘야흥>(사진 25-20)은 어느 가을날 한국 양반들이 기생을 데리고 전원을 즐기는 장면을 담았다. 풍성한 머리와 짧은 상의, 폭넓은 치마를 입은 여자들과, 수염을 기르고 흰 두루마기에 상투를 틀고 챙이 넓은 갓을 쓴 남자들은 누가 보아도 한국인이다. 우측 하단의 남성이 연주하는 현악기는 한국 악기들 중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가야금(한국의 치터)이다.
사진 25-20: 신윤복 <상춘야흥>
혜원 전신첩에서 발췌. 한국 조선시대, 18세기 후반. 30장짜리 화첩, 종이에 먹과 물감. 28.3x35.2cm. 대한민국 서울 간송미술관.
한국의 현대
오랫동안 ‘은자의 왕국’으로 알려졌던 조선왕조는 쇄국정책을 실시해 1876년까지 중국을 제외한 모든 세계에 국경을 열지 않았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왕조는 막을 내렸으나 외부 세계와 차단되어 은둔 기간은 더욱 연장되었다. 자발적 고립의 유산에 식민통치(1910~1945)--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의 혹독한 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뒤이은 더 끔찍한 한국전쟁(1950~1953) 상황--까지 더해짐으로써 한국의 예술, 문화적 발전은 20세기 전반에 방해를 받았다.
한국의 현대화가: 이러한 빈곤한 상황에도 중국과 일본을 통해 한국은 간접적으로나마 현대의 영향을 받았고, 1920년대 초~1930년대에 몇몇 한국 화가들이 서구식 현대 미술을 시도했다. 흔히 세잔이나 고갱을 따랐지만 일부는 비구상적 추상미술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중 김환기(1913~1974)는 구성파와 기하학적 추상화의 영향을 받아 20세기 한국의 영향력 있는 화가가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의 많은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김환기도 서구 모더니즘을 연구하고 싶어 했다. 그는 1956년에 파리를 방문했고 1964~74년에는 뉴욕에 거주, 작업하면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들을 이때 제작했다. 그의 작품 <5-IV-71>은 파랑, 검정, 회색을 띤 점과 사각형으로 구성된 한 쌍의 거대한 원형 패턴을 보여준다(사진 25-21). 방식과 재료, 발상, 심지어 제목으로 쓴 날짜까지도 완전히 서구식이지만, 이 작품은 동아시아의 전통인 단일색상의 수묵화와도 연관성이 보이고 도교나 불교적인 초월성도 제시하는 듯하다. 작가가 한국인이며 어릴 적에 중국 고전을 공부했다는 점, 파리에서 공부했고 뉴욕에서 작업했다는 점에 미루어 볼 때 그의 회화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른다고 볼 수도 있다. 김환기의 작품은 분명하고 개성적인 스타일을 찾는 많은 현대 예술가들이 겪는 딜레마를 표현한다. 전통 양식의 가장 최근 스타일, 철저히 세계적인 스타일, 지역적 특색이 분명하지만 세계적인 스타일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토속적인 성분과 다양한 예술 전통에서 유래된 성분을 통합하는 절충적이고 혼합적인 스타일을 택할 것인가? 김환기는 이런 의문을 제기하면서 유명한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 등 후배 한국인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백남준은 33과에서 다룰 것이다.
사진 25-21: 김환기 <5-IV-71>
한국, 1971년. 캔버스에 유화. 100x100cm. 대한민국 서울 환기미술관 소장. 

(p. 815) [26. 1333년도 이후의 일본 미술]

1630년대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 국민의 출국을 금지하고 외국인들의 입국을 제한했다. 나가사키는 유일한 국제 항구로 한국인, 중국인, 네덜란드인만이 출입할 수 있었고, 그들도 일본 땅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없었다. 기독교 선교사를 막고 외세에 권위를 세우기 위한 일본 정부의 조치였다. 1853년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강제로 다른 항구를 개방한 뒤에야 정책이 바뀌었다. 그 전에도 이 작품(사진 26-1)에 나타나는 담뱃대와 망원경이 증명하듯, 외국의 영향과 물품 유입은 막을 수 없었다.

(p. 816) [26. 1333년도 이후의 일본 미술]

무로마치 시대: 선불교 수묵화
무로마치 시대에도 밝게 채색된 일본 고유의 두루마리 책은 계속 제작되었으나, (가마쿠라 시대(1185~1333년) 말에 대륙에서 일본으로 전래된) 먹의 검은색과 먹을 묽힌 회색을 사용한 회화가 절대적이었다. 무로마치 수묵화는 선불교 미학의 영향을 깊게 받았지만, 선불교의 중요 인물에 치중했던 초기 선불교 수묵화와 달리 많은 화가들이 중국식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승려이자 화가인 슈분(약 1418~1463년에 활동)을 일본 수묵 풍경화의 첫 대가로 인정한다. 모두가 인정하는 슈분의 작품은 애석하게도 모두 소실되었다. 그러나 슈분의 제자 분세이(약 1450~1460년에 활동)의 풍경화 2점은 남아 있다. 사진 26-2의 작품은 명나라(사진 25-5 참고)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수묵 풍경화와 매우 비슷하다. 전경의 바위투성이 지면에는 잎이 뾰족한 소나무, 험준한 바위, 은둔한 시인, 암자의 조그만 정원을 둘러싼 싸리나무 울타리 등 여러 가지 모티프가 겹쳐져 있다. 중간은 여백으로 비워 놓았다. 이 공간은 물이 채워져 있다고 ‘읽어야’ 한다. 빈 공간 위에는 미묘한 회색으로 아득히 떨어진 해변에 놓인 고기잡이배, 작은 오두막, 서 있는 두 사람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이 작품에 그려진 두 장면은 넓은 공간을 사이에 놓고 서로를 향해 메아리치는 듯하다. 선불교의 영향을 받은 이 그림은 시적인 장면으로 순수하고 고즈넉하며 평화로운 영혼을 훌륭하게 묘사했다.

(p. 816) <지도 26-1: 일본> - 지도 좌측 하단에 한국 표시. 동해는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음.

(p. 819) [26. 1333년도 이후의 일본 미술]

미술 속 문맥읽기: 일본 문화의 기반
(2~3번째 단락)야요이 시대(기원전 400년~기원후 300년경)에 위계적인 사회 구조와 함께 완전히 정착한 농경 사회가 출현했다. 사람들은 청동과 철을 제조하는 법을 배웠고 이 금속들을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초가지붕에 색칠하지 않은 야요이 건축은 이미 자연에 대한 친밀함과 명료한 선을 보여주며, 특히 야요이의 곡창 지대는 이후 시대에 사당의 디자인을 거부했다. 사회 조직을 향한 경향은 고훈 시대(300~552년경)까지 지속되어, 한국 관습을 따른 거대한 왕릉이 이 시대의 특징이다. 지도자 숭배 사상에서 왕정 체계가 시작되었고 현재까지 이 제도가 지속된다.
아스카 시대(552~645년)에는 한국을 통해 중국 문명이 일본으로 밀려들어오면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 문화를 발전시킨 중국의 세 가지 주요 문명은 불교(와 불교 미술 및 건축), 문자 체계, 중앙집권 체제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찰인 호류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보존된 목조 건물을 보유하고 있다. 
(p. 819) [26. 1333년도 이후의 일본 미술 - 모모야마 시대] 
(무로마치 시대가 끝나면서 세 명의 강력한 일본 지도자가 등장한다.)첫 번째는 오다 노부나가(1534~1582)로, 1568년 군대를 끌고 교토로 들어와 1573년에 아시카가 쇼군을 몰아내고 일본 정치에 새 시대를 이끌었다. 노부나가는 승려들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교 사원을 파괴할 정도로 무자비한 전사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상하고 세련된 예술을 적극 후원하기도 했다. 군사작전 중에 적에게 굴복하지 않으려고 노부나가가 자살한 뒤, 그의 가신 중 하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가 뒤를 이었고, 곧 일본의 권력을 장악했다. 히데요시 역시 통치에 있어 문화가 필수적인 부가요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군대를 지휘할 때가 아니면 예술을 지지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야심이 지나쳤다. 한국과 중국을 모두 점령할 수 있다고 믿은 그는 두 차례의 불운한 침략 전쟁에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낭비했다. 1600년 직후에야 세 번째 지도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의 승리로 견고한 무신정권이 지속될 수 있었다. 노부나가의 전 동맹이자 히데요시의 심복인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사망한 뒤에야 권력을 잡았다. 굴곡진 시대였지만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통치기는 모모야마 시대(1573~1615년)로 알려져 일본 역사에서 가장 창의적인 시대 중 하나로 꼽힌다.
(p. 823) [26. 1333년도 이후의 일본 미술 - 모모야마 시대] 
다기: (2번째 단락)자연스럽고 비대칭적인 사물에 대한 일본인들의 오랜 사랑은 다기에 그대로 표현되었다. 소작농들이 쓰는 한국식 밥그릇이 갑자기 고상한 취향의 전형으로 추앙받았고, 장인들에게 그 불완전한 형태를 모방하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기형적이라고 모두 각광받지는 않았다. 찻잔 크기가 손에 잘 맞는지, 형태와 질감이 보기 좋은지, 이전에 누가 사용했는지 등이 찻잔의 미를 평가하는 기준이었다. 이런 목적으로 다기 상자가 그 안에 딱 들어맞는 다기만큼이나 중요해졌고, 유명한 차 전문가가 이름을 붙인 다기는 특히 후배들에게 보물처럼 여겨졌다.
(p. 832) [26. 1333년도 이후의 일본 미술 - 에도 시대] 
일본 자기: 일본에서는 역사적으로 문명 초기부터 도자기를 꾸준히 제작해 왔지만, 유약을 바른 고화 도자기는 16세기에야 일본에 확산되었다. 일본 남부에서 특히 번영한 도자기 사업은 1600년에는 숙련된 한국 도자기 장인들이 한꺼번에 들어와 일본 내 장인들이 대륙의 기술을 배울 수 있게 도왔고, 처음으로 자기를 제작하게 되었다. 아리타라는 마을은 자기 제작의 중심지가 되었고, 국내용뿐 아니라 서양 수출용 자기까지 제작했다. 다도에서는 여전히 초지로의 다기(사진 26-9 참고)와 같은 질박한 그릇을 선호했으나, 중국 예술이 유행하면서 일상생활에서는 자기를 더 많이 사용했다. 아리타에서 만든 자기는 제작일과 장식에 따라 이름이 모두 다르다. 사진 26-17의 자기는 1628년 나베시마 사무라이 집안에서 만든 나베시마 자기로 아리타 가마에서 구운 작품이다. 처음에는 이런 자기를 집안에서 쓰거나 도쿠가와 쇼군에 선사했지만, 결국 다른 유력한 귀족 가문에 선물로 주어지기도 했다. 그릇 장식으로는 자연스럽고 불규칙적인 무늬(사진의 등나무꽃)와 추상적이고 견고한 형태(사진의 등나무를 지탱하는 격자)가 나란히 묘사되곤 한다. (최신 유행의 패턴을 담은 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현대적인 디자인은 나부시마 자기의 장식에 자주 영감을 준다.
(p. 1128) [33. 1950년대 이후 세계 미술의 동향 - 미술, 행동주의, 논쟁: 1990년대]
비디오와 필름 - 백남준: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한국인 백남준(1931~2006)은 존 케이지의 영향으로 1950년대 후반~60년대 초반에 실험적인 음악을 작곡했다. 1963년부터 텔레비전을 변형해 작업했고, 소니(SONY)에서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를 만든 해인 1965년 비디오 아트를 만들었다. 백남준은 ‘콜라주 기법이 유화를 대체했듯, 브라운관(텔레비전)이 캔버스를 대체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후 그는 여러 크기의 비디오 모니터에 나타나는 실시간 영상, 녹화 영상, 컴퓨터로 제작한 영상을 가지고 작업을 했고, 그 결과물 중 하나로 뉴욕 홀리 솔로몬 갤러리에 전시했던 <전자 초고속도로:미국 대륙>(사진 33-61)이 있다. 이 작품에는 미 대륙 지도의 윤곽을 네온사인으로 만들어 비디오 모니터 벽 위에 설치했고, 컴퓨터로 조종되는 모니터에서는 각 주의 문화와 역사에 맞게 녹음된 영상이 재빠르게 바뀐다. 알래스카와 하와이는 옆 벽에 붙였다. 이 작품은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복합적인 메시지의 보급과 위력을 나타낸다. 뉴욕 주를 나타내는 모니터에는 갤러리 방문객들을 실시간으로 담아내 작품을 관람자가 미디어를 통해 갖게 된 새 정체성을 스크린에 보여주어, 관람자는 피동적인 관객에서 작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참여자로 바뀐다.

3. 간략분석

미국사 도서로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시절부터 현대까지 미국의 역사를 상세히 다룬다. 대다수 미국사 교과서들처럼 이 책도 한국전쟁이 한국 관련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외에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미국의 입장에서 다루는 부분에서 한국이 언급된다.

4. 검토의견

페이지 한국관련 기술 내용 검토의견 오류코드
p. 333 <지도: 중국과 한국>
-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됨
일본해를 '동해'로 표기하거나 최소한 '동해(일본해)'로 수정해야 함 A1
p. 362 <지도: 일본>
-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됨
일본해를 '동해'로 표기하거나 최소한 '동해(일본해)'로 수정해야 함 A1
p. 794 <지도: 중국과 한국>
-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됨
일본해를 '동해'로 표기하거나 최소한 '동해(일본해)'로 수정해야 함 A1
p. 816 <지도: 일본>
-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됨
일본해를 '동해'로 표기하거나 최소한 '동해(일본해)'로 수정해야 함 A1
p. 356 "불교는 5세기 후반 신라에도 소개되었을지 모르나, 공식적으로는 527년에야 인정을 받았다."로 기술됨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해는 528년이므로 연도를 이에 맞게 수정한다 C3


- 개선 과제 코드 -
개선 과제 유형
A: 동해·독도 표기 수정 필요 B: 단순표기 C: 내용 수정 필요 D: 내용 증·신설 필요 E: 기타
A1: 동해 표기 A2: 독도 표기 C1: 통계 C2: 과거 사실 C3: 객관적 기술 D1: 증설 필요 D2: 신설 필요

연계 정보

관계 대상 문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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