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미국:The earth and its peoples :A global story. volume I, To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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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차

  • 1부 인간 공동체의 출현, 500 B.C.E. 까지
    • 1. 자연, 인간, 역사, 3500 B.C.E. 까지
    • 2. 최초의 하천-계곡 문명, 3500-1500 B.C.E.
    • 3. 지중해와 중동, 2000-500 B.C.E.
    • 4. 서아시아 핵심 지역 밖에서 일어난 새 문명, 2300 B.C.E.-350C.E.
  • 2부 새로운 문화적 공동체의 형성, 1000B.C.E.-400 C.E.
    • 5. 그리스와 이란, 1000-30 B.C.E.
    • 6. 제국의 시대: 로마와 중국의 한나라, 753B.C.E.-330 C.E.
    • 7. 인도와 동남아시아, 1500 B.C.E.-300 C.E.
    • 8. 아메리카의 거주민과 문명, 1200B.C.E.로부터
    • 9. 통신 네트워크와 교류, 300 B.C.E.-1100 C.E.
    • 10. 사산 제국과 이슬람의 대두, 200-1200
    • 11. 유럽의 기독교 사회 출현, 600-1200
    • 12. 아시아 내륙과 동아시아, 400-1200
  • 4부 문화와 접촉의 지역간 유형, 1200-1550
    • 13. 몽골의 유라시아와 그 영향, 1200-1550
    • 14. 라틴 유럽, 1200-1500
    • 15. 남쪽의 제국, 남쪽의 바다, 1200-1500
    • 16. 해양 혁명, 1550까지

2. 한국 관련 내용

p. 160 (지도)
Korea, Sea of Japan(East Sea)


p.161
한 무제는 황제의 권력을 키우는 일을 많이 했다. 그는 남으로는 북부 베트남, 북으로는 만주와 북부 한국(North Korea)을 무력으로 정벌했다.


p.292
한국과 베트남은 물론 내륙 아시아로 까지 확대된 수 나라의 군사적 야심은 높은 수준의 조직과 인력, 가축, 목재, 철, 식량 보급 등 자원의 집중을 필요로 했다. 수 왕조가 추진한 대규모 토목 사업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부담은 수 왕조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임이 드러났다. 과도한 확장은 군사적 패배와 뒤 이은 2대 황제의 암살에서 비롯된 정치적 난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인구 2백만의 장안과 그 주변의 교외는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대도시였다. 천명(天命)을 상징하기 위해 북쪽의 북극성 자리에 궁궐을 짓고 바둑판 모양으로 정교하게 구획한 도시 설계를 한국과 일본이 수도 건설에서 모방했다. …한국과 일본의 승려들이 중국의 불교도와 산스크리트로 강의하는 인도의 승려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었다.


p.293
313-668 3국(고구려, 백제, 신라) 668 한국에서 신라의 승리 918 고려 건국, 한반도 통일


p.294(지도)
(지도 설명문 중) 당나라는 남쪽으로는 안남을 지배했고, 일본과 한국의 신라왕국은 당의 주요 조공국이었다.


p.298
(안록산의) 반란은 8년간 지속되었으며, 난을 진압하기 위한 지방의 군벌들이 세력을 잡는 결과를 빚었다. 그럼에도 장안은 이전의 번영을 회복하지 못하였으며, 당의 쇠락은 8세기 들어 한국과 일본에 있는 위성국가에 대한 영향력의 감소로 나타났다. 두 나라는 더 이상 중국의 지원이나 영향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


pp.304-305

  • 한국

한국 일본 베트남에 대한 최초의 지식은 초기 중국의 관리들과 여행자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기원전 3세기 진 제국이 한반도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였을 때, 중국의 관리들은 한국의 역사와 관습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한의 기록자들은 한국의 작은 왕국들의 말 사육, 강력한 세습 엘리트, 그리고 샤머니즘(조상과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특정인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 주목을 하였다. 그러나 한국은 유교와 불교를 신속하게 받아들였다. 동부와 북부가 산악지대인 한국은 근대에 이르기 까지 숲이 무성했다. 경작할 수 있는 땅(20% 이하)은 대부분 기후가 따뜻하고 장마 비가 2모작을 가능케 해 주는 남쪽에 있었다. 북쪽의 만주와 몽골, 그리고 시베리아로부터 남쪽으로 일본에 이르는 인구 이동은 중국어와는 매우 다르고 내륙 아시아의 터키어와 멀리 연관된 언어의 확산을 촉진했다. 500년대 초, 지배적인 지주 가문은 한반도의 남동부에 있는 왕국 신라에서 항구적인 세습적 지위 – “골품제”(bone ranks) – 를 확립했다. 660년대 초 신라는 남서부에 위치하여 해양 세력으로서 중국의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던 있던 백제왕국을 멸망시켰다. 그런데 668년 북부의 고구려 왕국이 수 및 당과의 오랜 싸움 끝에 멸망하였다. 고구려는 동북 아시아에서 매우 영향력이 커서 요 제국과 금 제국, 그리고 이후의 한반도의 왕국들은 고구려의 유산을 물려 받았다고 주장했다. 당의 지원을 얻어 신라는 이제 한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신라의 통치자들은 당나라 정부를 모방하여 유교경전 시험으로 관리들을 뽑았다. 중국에 불교승려들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지적인 교류는 일방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Korean Commentary”라고 통용된 승려 원효의 저작물은 중국의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900년대 초 당나라의 멸망은 신라의 멸망과 시기적으로 일치하여 오늘날 코리아의 명칭의 기원인 고려 왕조가 그 후 통일된 한반도를 3백 년 동안 지배하게 된다. 북쪽의 요 나라와 뒤이어 금 나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으면서 고려는 남쪽의 송 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고려의 왕들은 불교를 지원하였으며, 정교한 불교 인쇄본을 만들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자 목판 인쇄물은 700년대 중반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당 나라 시절 널리 사용된 목판 인쇄는 고도의 기술적 솜씨가 필요했다. 서예가가 얇은 종이에 글을 쓰면 이를 뒤집어서 목판에 풀로 붙인다. 물에 젖으면 거꾸로 된 글자가 나타나는데, 장인들이 각 글자 주위의 나무를 칼로 깎아낸다. 각 페이지 마다 새로운 목판으로 새겨내는 것이다. 한국의 장인들은 활자 실험 등 나름대로의 인쇄술을 발전시켰다. 송 나라 시절 한국의 실험은 중국에도 전해졌으며, 중국에서 더 개량되어 금속, 또는 도자기 활자가 만들어져 책을 값싸게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좌여백 주석> 샤마니즘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영혼과 접촉할 특별한 사람(샤만)을 인정하는 관행. 중세 초기 한국의 왕국과 중앙 아시아의 초기 사회의 특징.

<도판 – 신라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陶器 騎馬人物形 明器)> 신라의 전사(戰士) 이 물 담는 그릇 – 앞쪽의 튀어 나온 부분은 물을 따르는 꼭지 – 한국이 일찍부터 기병을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말은 아마도 한국을 거쳐 일본에 도입되었을 것이다.


p.332
환경 + 기술 총포가 발명되기 오래 전에 화약은 중국과 한국에서 광산을 파내고 운하를 건설하고 수로를 만드는데 이용하였다 … 중국과 그 다음 한국은 여러 개의 화살 – 때로 불 붙은 – 을 적의 요새에 발사 하는데 화약을 사용하였다.


pp.333-34

동아시아의 중앙집권화와 군사주의, 1200-1500 동아시아의 다른 주요 국가인 한국, 일본, 베트남 왕국은 모두 몽골과의 대결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그 결과는 각기 달랐다. 일본과 북부 베트남은 몽골의 정복을 모면했지만, 몽골의 위협에 대응하면서 변화를 겪고 독립의 의지를 더욱 굳게 하는 보다 효율적이고 팽창적인 정권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원의 통치가 끝난 후 명대에 중국의 전통과 정체성을 강조하였듯이, 몽골의 지배가 한국의 고유 언어와 역사에 대한 관심을 재활성화 하는데 기여했다. 몽골은 어려운 전쟁 끝에 한국을 정복했으며, 한국은 몽골의 통치아래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수난을 당했지만 지배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원 제국과 밀접하게 제휴하고 있었다. 원이 멸망한 후 상인들은 몽골시대 만들어진 국제적 교류를 계속했지만 한국 군은 새로운 왕국을 공고히 하는 한편 해적들을 물리쳤다.

몽골에서 조선왕조로 간 한국, 1231-1500 적의 해상 교역을 끊을 해상 원정을 위한 연안지역을 찾는 몽골에게 한국이 그 해답이었다. 몽골이 침입해 온 1231년 최씨 일가는 군 사령관이자 고려 국왕의 보호자(일본의 쇼군과 다르지 않는)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4세대에 걸친 최씨 일가가 이끄는 무단통치와 오랜 방어전은 전국을 초토화시켰으며, 군대를 기진맥진하게 만들고 보물들이 불타 없어졌다. 최씨 일가가 평화 교섭을 거부하고 한반도에서 몽골을 몰아내기 위해 수도 강화도에서 나오기를 거부함에 따라 전국민이 고통을 받았으며, 군인과 귀족 모두 좌절을 겪었다. 1258년 마지막 최씨 독재자가 부하에게 살해 당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왕은 몽골에 항복하였으며, 그의 가족과 몽골의 황제(Great Khan)과 결혼관계를 통해 신하 왕국이 되었다.

1300년대 말 무렵 고려 국왕은 대부분 몽골의 후손이었으며, 몽골풍의 의상, 관습, 언어를 선호했다. 국왕과 가족은 신하들을 동반하여 자주 중국과 한국 사이를 여행했으며, 한국은 이를 통해 주자학, 찬(한국에서는 선)불교, 청자도자기(연한 녹색) 등 중국 원나라의 철학과 예술을 만나게 되었다.

몽골의 지배는 수세기에 걸친 비교적인 고립상태를 벗어나게 했다. 면화가 남부 한국에 도입되었다. 화약도 사용되었다. 책력을 만드는 법 때문에 천문 관측과 수학을 촉진했다. 몽골어를 기꺼이 배우는 학자들, 토지를 매사냥과 말 목장으로 개방하는 지주, 왕가의 베이징 나들이에 참여하는 상인들에게는 출세의 문이 열렸다. 이러한 사태발전으로 새로운 지주 유식층이 대두하게 되었다.

1368년 원 제국이 멸망하자 고려의 통치가문은 반기를 든 이성계 장군이 새로운 명 제국을 인정하도록 강요할 때까지 몽골에 충성을 하였다. 1392년, 이성계는 국호를 조선으로 하고 수도를 서울로 하는 새로운 왕국을 세우고 뚜렷한 한국의 정체성을 재확립하고자 했다. 러시아와 명 제국과 마찬가지로 조선 정권도 몽골의 지배 시기를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그러나 조선 전부는 몽골 식 토지 측량, 징세, 군사주둔군 기술 들을 사용했다.

명의 황제처럼, 조선 국왕도 유교경전 학습을 부활시켰다. 이는 중국어 지식을 필요로 하고, 국가가 이의 학습에 적극 기여함을 보여주는 활동이다. 이러한 유교학습 부활이 인쇄 기술의 주요한 기술적 돌파구를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

한국은 700년대부터 중국의 목판 인쇄술을 사용했다. 이 기술은 비교적 소수의 책을 많은 구매자들이 원하는 중국에서는 잘 맞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비교적 소수의 선비들이 다양한 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3세기 초 한국에서 목활자와 도자기 활자가 처음 나타났고 아마도 한국에서 발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책은 자주 정확하지 못하고 읽기도 어려웠다. 1400년대 조선의 인쇄공들은 직접 왕과 함께 일을 하며, 활자를 인쇄판에 고정시키는 확실한 장치를 개발했다. 과거 밀랍 접착제를 사용하던 방식을 구리 조임 틀로 바꾸면서 인쇄된 페이지의 가독성을 개선했으며, 고급 책과 정확한 생산이 가능해졌다. 표음문자인 한글과 더불어 이러한 인쇄술은 한국의 높은 문자해독률의 기반이 되었다.

조선의 출판물은 독자들에게 어떻게 비료를 만들고 사용하는지, 모를 이앙하는 법, 저수지를 만드는 법 등을 알려줬다. 몽골이 수입하고 고려가 도입한 유라시아의 지식을 바탕으로 조선의 학자들은 그들만의 천문학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풍속과 강우량을 측정하는 도구를 발명하거나 개선했으며, 중국과 이슬람 시스템을 정밀하게 비교하여 정확한 책력을 만들었다.

농업에서 농부들은 현금작물의 재배를 확대했는데, 이는 명 나라에서 일어난 일과 정 반대였다. 주요작물인 면화는 국가가 세금대신 받을 정도로 높은 가치를 누렸다. 조선군은 면직 제복을 입었으며, 면직물은 조선 상류사회의 가장 선호하는 직물이 되었다. 수력을 이용한 면화씨 제거기와 방적 물레를 사용함으로써 한국은 중국보다 기계화에 더 빨리 발전시켰고, 상당한 양을 목화를 중국과 일본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원과 명은 화약의 제조법을 한국 정부에 알려주지 않았지만, 한국의 관리들은 그 정보를 몰래 빼내었다. 1300년대 후반, 한국은 해적을 찾아 순찰하는 배 위에 대포를 탑재하여 적과 적선에 화약으로 작동하는 화살 발사대를 사용하였다. 장갑선 기술과 함께 이 기술은 소규모의 조선 수군을 막강한 방위 군으로 만들었다.


p.333
(좌여백 주석) 조선(Choson) 조선왕조는 고려의 멸망부터 한국이 일본에 의해 식민지가 될 때까지 한국을 통치했다.

활자(Movable Type) 각기 한 글자를 보여주는 동 활자의 개량으로 한 페이지 전부를 주조하거나 조각할 필요가 없어졌다. 각 활자 – 그림은 한국의 활자 – 는 한 페이지에서 다른 페이지로 옮겨 사용함으로써 고르고 보기 좋은 형태가 된다. 동아시아 전체에서 점차 이러한 형태의 인쇄를 채택하여 값싸고 인기 있는 책들을 찍어냈다. 1400년대 중반 한국은 완전한 표음문자를 실험했으며, 이것과 활자가 결합하여 한국은 일찍이 없었던 높은 문자해독 수준을 달성하고 인쇄물을 접할 수 있었다.


p.334(지도)
Choson Korea, Seoul, Sea of Japan(East Sea) 한국과 일본, 1200-1500 일본에 인접한 한국과 북부 중국을 기지로 몽골은 당시 일본의 3개 섬 (혼슈, 시코쿠, 큐슈) 대부분을 지배하던 카마쿠라 막부를 상대로 막대한 함대를 발진시킬 기회가 있었다.


3. 간략 분석

4. 검토 의견

페이지 한국 관련 기술 내용 검토 의견 개선 과제 코드
- 개선 과제 코드 -
개선 과제 유형
A: 동해·독도 표기 수정 필요 B: 단순표기 C: 내용 수정 필요 D: 내용 증·신설 필요 E: 기타
A1: 동해 표기 A2: 독도 표기 C1: 통계 C2: 과거 사실 C3: 객관적 기술 D1: 증설 필요 D2: 신설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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