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미국:World History Volume 1: To 1800, 7th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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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차

-지도
-박스글
-참고문헌
-서문
-감사의 말
-언어와 연대결정에 대해 학생들에게 전하는 말
-세계사 이해를 위한 주제

1부 최초의 문명들과 제국의 등장 (선사시대부터 기원후 500년까지)
I 초기 인간과 최초의 문명들
최초의 인간들
-호모사피엔스의 등장
-구석기 시대의 사냥-채집
-신석기 혁명 (기원전 1만년부터 4000년)
-사냥-채집과 목축에서 농사까지
문명의 등장
-세계 각지의 초기 문명
-문명이 생겨난 이유
메소포타미아 문명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국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제국
-메소포타미아 문화
이집트 문명: “나일 강의 선물”
-지리의 영향
-고왕국과 중왕국
-고대 이집트의 사회와 경제
-이집트의 문화
-무질서와 새로운 질서: 신왕국
-고대 이집트의 일상: 가족과 결혼
-아크나톤의 아톤 찬가와 히브리 성경의 시편 104편
-퍼져나가는 이집트의 영향: 누비아
문명의 새로운 중심
-유목민: 인도-유럽어족의 영향
-서아시아의 영토국가: 페니키아
-히브리 족: “이스라엘의 아이들”
새로운 제국의 등장
-아시리아 제국
-페르시아 제국

2 고대 인도
인도 문명의 등장: 하랍파 사회
-다양성의 땅
-하랍파 문명: 매혹적인 불가사의
-글과 문명
인도의 아리아족
-추장에서 왕까지
-마우리아 제국
-카스트와 계급: 고대 인도의 사회구조
-고대 인도의 일상
-경제
윤회에서 벗어나기: 고대 인도의 종교계
-브라만 교
-진리의 추구
-대중종교
-불교: 중도
물고기의 법칙(matsyanyaya:rule of fishes): 마우리아 제국 이후의 인도
생기 넘치는 인도 문화
-문학
-건축과 조각
-과학

3 고대 중국
중국 문명의 여명
-중국의 지역과 민족
-상나라
주나라
-정치 구조
-금속의 사용
-경제와 사회
-백가쟁명
-선악에 대한 논쟁
중국 최초의 제국: 진나라
-진나라(기원전 221-206)
고대 중국의 일상
-가족의 역할
-생활양식
-도시
-비천한 처지: 고대 중국의 여성
중국의 문화
-금속공예와 조각
-언어와 문학
-음악

4 그리스 문명
-초기 그리스
-미노아 크레타
-그리스 최초의 국가: 미케네
-암흑시대의 그리스(기원전 1100-750년 경)
그리스 도시국가(기원전 750-500년 경)
-폴리스
-식민도시와 무역의 발전
-그리스 폴리스에서 벌어진 압제
-스파르타
-아테네
-초기 그리스 문화에 미친 외부의 영향
그리스 문명의 정점: 고전기 그리스
-페르시아의 도전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네 제국의 성장
-대(大)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그리스 국가의 쇠퇴
-고전기 그리스의 문화
-축의 시대(Axial Age)
-그리스의 종교
-고전기 아테네의 일상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여성
마케도니아의 부상과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알렉산드로스 대왕
헬레니즘 왕국들의 세계
-헬레니즘 왕정
-정치제도
-알렉산더 (2004)
-헬레니즘 도시
-무역의 중요성
-사회생활: 여성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
-헬레니즘 세계의 문화

5 최초의 세계 문명: 로마, 중국, 그리고 실크로드의 등장
초기 로마와 공화국
-초기 로마
-로마 공화국
-로마의 지중해 정복(기원전 264-133)
-로마 공화국의 쇠퇴와 몰락(기원전 133-31)
로마 제국의 절정
-아우구스투스 시대(기원전 31-기원후 14)
-제국의 초기(14-180)
-로마 세계의 문화와 사회
위기와 제국 말기
-3세기의 위기
-로마 제국 말기
-글래디에이터(2000)
-로마 세계의 변화: 기독교의 발전
-지배자와 신
-로마 당국과 기독교인 각각의 기독교에 대한 관점
영광스러운 한(漢) 제국(기원전 202-기원후 221)
-유교와 국가
-경제
-제국의 확장과 실크로드의 기원
-사회 변화
-종교와 문화
-한나라의 쇠퇴와 몰락
-로마와 중국의 비교

2부 문명의 새로운 유형(500-1500)

6 아메리카
아메리카의 사람들
-최초의 아메리카인
중앙아메리카의 초기 문명
-올멕: 고무의 땅
-사포텍(Zapotec)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 아메리카 최초의 메트로폴리스
-올멕: 어머니 문화인가 동등한 문명 중 최초(First among equals)인가?
-마야
-아즈텍
남아메리카 최초의 문명
-카랄(Caral)
-모체(Moche)
-역사와 환경
-잉카
아메리카의 국가 없는 사회들
-동부삼림(Eastern Woodlands)
-카호키아
-고대 푸에블로 족
-남아메리카: 아라와크(Arawak)
-아마조니아

7 중동의 소요: 이슬람의 발흥
이슬람의 발흥
-무함마드의 역할
-예언자 마호메트(Muhammad: The Messenger of God)(1976)
-무함마드의 가르침
아랍 제국과 그 계승자들
-제국의 창조
-우마이야조의 부상
-아바스조
-십자군
-몽골
-예루살렘 점령: 기독교의 관점과 이슬람의 관점
-안달루시아: 유럽의 이슬람 전진기지
이슬람 문명
-정치 구조
-아랍의 부: 중동의 무역과 도시들
-무역과 문명
-이슬람 사회
-이슬람 문화

8 아프리카의 초기 문명
문명의 등장
-땅
-최초의 농부들
-악숨(Axum)과 메로에(Meroe)
-사하라 일대
-동아프리카
-민족의 이주
이슬람의 도래
-이슬람 이전 아프리카의 종교적 믿음
-북아프리카의 아랍인들
-에티오피아 왕국: 이슬람 바다 위에 뜬 기독교 섬
-동아프리카: 잔즈(Zanj) 땅
-서아프리카의 국가들
중앙 및 남아프리카의 국가의 비중앙집중적(Noncentralized) 사회
-콩고 하곡
-짐바브웨
-남아프리카
-아프리카: 역사 없는 대륙?
아프리카 사회
-도시 생활
-촌락 생활
-여성의 역할
-노예제도
아프리카의 문화
-회화와 조각
-음악
-건축
-문학

9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문명의 확장
실크로드
마우리아 왕조 이후의 인도
-굽타 왕조: 새로운 황금시대?
-불교의 변화
-인도 불교의 쇠퇴
-언제 인도인들이 힌두교 신자가 되었나?
이슬람의 도래
-마흐무드 가즈나비(Mahmud of Ghazni)의 제국
-델리 술탄 시대
-티무르
사회와 문화
-종교
-카스트, 계급, 가족
-경제와 일상
-인도 문화의 경이
황금 지역: 초기 동남아시아
-논과 향신료: 동남아시아 국가들
-일상생활
-영혼의 세계: 종교적 믿음
-태평양으로의 확장

10 고대 중국의 전성기
한나라 이후의 중국
중국의 재통일: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정치구조: 유교의 승리
-행동 또는 무위: 중세 중국의 관념적 논쟁
-경제
-기술의 전파
-고대 중국 사회
중앙아시아의 폭발: 몽골 제국
-두 세계의 만남
-몽골의 중국 지배
-마르코 폴로의 모험(1938)과 마르코 폴로(2007)
-역사상 몽골의 위치
명나라
-정화의 항해
-도의 추구
-불교와 도교의 부상과 쇠퇴
-성리학: 격물(格物)
중국 문화의 절정
-문학
-미술

11 동아시아의 주변지역: 초기 일본, 한국, 베트남
일본: 떠오르는 태양의 땅
-신들의 선물: 선사시대 일본
-일본 국가의 부상
-세계의 봉건 질서
-경제 및 사회 구조
-정토의 추구: 초기 일본의 종교
-라쇼몽(1950)
-전통 일본 문화의 원천
-일본과 중국 모델
한국: 동방의 가교
-삼국시대
-고려의 부상
-몽골 치하
베트남: 작은 용
-다이 비에트(Great Viet, 大越)의 부상
-사회와 가정생활
-장별 요약/연대표/복습/권장 도서

12 유럽의 형성
중세 초기 유럽의 등장
-새로운 게르만 왕국들
-기독교의 역할
-샤를마뉴와 카롤링거 왕조
-군주와 봉신의 세계
고중세 시대의 유럽
-땅과 사람들
-무역과 도시의 신세계
-겨울의 라이온(The Lion in Winter)(1968)
-중세 세계의 도시들
-유럽 왕국의 진화
-기독교와 중세 문명
-고중세 문화
-중세 유럽과 세계
-제1차 십자군
-후기 십자군
-십자군의 영향은 무엇인가?

13 비잔틴 제국과 서방세계의 위기와 회복
동로마에서 비잔틴 제국까지
-유스티아누스 황제(527-565) 치세
-새로운 유형의 제국
비잔틴 문명의 정점(760-1025)
-부흥의 시작
-마케도니아 왕조
비잔틴 제국의 쇠퇴와 몰락(1025-1453)
-새로운 도전과 새로운 대응
-십자군의 영향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콘스탄티노플 함락
14세기 서방의 위기
-흑사병: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역사에 나타난 질병의 역할
-경제 혼란과 사회 격변
-흑사명의 원인: 동시대의 시각
-정치적 불안정
-교회의 쇠퇴
회복: 르네상스
-학문의 르네상스
-예술의 르네상스
-르네상스 시대의 국가

3부 새로운 세계 질서의 등장(1500-1800)

14 새로운 만남: 세계시장의 탄생
탐험과 확장의 시대
-이슬람과 향신료 무역
-서아프리카의 이슬람 전파
-새로운 참가자: 유럽
해양제국 포르투갈
-인도의 포르투갈인들
-향신료 탐색
-새로운 경쟁자들의 출현
“신세계” 정복
-항해
-정복
-제국의 통치
-미션(1986)
-경쟁의 격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영웅인가, 악당인가?
-콜럼부스의 교환
과도기 아프리카
-아프리카의 포르투갈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
-노예무역
-변화하는 대륙의 정치, 사회구조
향신료 무역 시대의 동남아시아
-서양의 도래
-문명의 행진
-식민지 시대 이전 동남아시아의 국가와 사회
-국왕 서신의 교환

15 유럽의 변신: 종교개혁과 국가 건설
16세기의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배경
-마르틴 루터와 독일의 종교개혁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전파
-종교개혁 논쟁: 마르부르크 분쟁
-가톨릭의 종교개혁
-초기 근대 세계의 결혼
위기의 유럽(1560-1650)
-16세기의 정치와 종교 전쟁
-경제, 사회 위기
-17세기의 위기: 혁명과 전쟁
위기에 대한 대응: 절대주의의 실천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
-중부유럽과 동유럽의 절대주의
영국과 입헌군주제
-왕과 의회의 충돌
-내전과 연방
-왕정복고와 명예혁명
유럽 문화의 융성
-미술: 바로크
-미술: 네덜란드 사실주의
-영국 문학의 황금시대

16 이슬람 제국
오스만투르크 제국
-오스만투르크의 부상
-제국의 확장
-전쟁 양상의 변화
-투르크 지배의 본질
-오스만 투르크의 종교와 사회
-오스만 투르크의 쇠퇴
-오스만 투르크의 미술
사파비조(Safavids)
-사파비조의 부상
-왕조의 몰락
-사파비조의 정치와 사회
-사파비조의 미술과 문학
무굴 제국의 위엄
-바부르(Babur): 무굴제국의 시조
-악바르와 인도-이슬람 문명
-악바르의 후계자들
-인도에서 나타난 유럽 세력의 영향
-후글리 항구의 점령
-무굴 제국: “화약의 제국?”
-무굴 제국 하의 사회: 문화의 통합
-무굴 제국의 문화

17 동아시아 세계
절정에 다다른 중국
-명나라에서 청나라까지
-청나라의 위대함
변화하는 중국
-인구 폭발
-산업화의 씨앗
-인구폭발
-청나라의 일상
-문화 발전
도쿠가와 일본
-3 명의 위대한 천하인
-서양에 대한 문호 개방
-도쿠가와의 “위대한 평화”
-촌락의 삶
-도쿠가와의 문화
한국과 베트남
-한국: 위험한 이웃
-베트남: 제국의 위험

18 신세계질서를 목전에 둔 서양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을 향하여: 서양의 지적 혁명
-과학혁명
-계몽주의의 배경
-프랑스 계몽사상가들과 그 사상
-과학혁명
-계몽시대의 문화
-경제 변화와 사회질서
-새로운 경제 질서
-18세기의 유럽 사회
-아메리카의 식민제국과 혁명
-서인도 제도
-영국령 북아메리카
-프랑스령 북아메리카
-미국 독립 혁명
새로운 정치질서와 세계 분쟁을 향하여
-프로이센: 군대와 관료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제국
-예카테리나 여제 치하의 러시아
-재고되는 계몽절대주의
-변화하는 전쟁의 양상: 세계적 대립
프랑스 혁명
-프랑스혁명의 배경
-삼부회의에서 국민의회로
-마리 앙투아네트(2006)
-구체제의 파멸
-프랑스 민중의 자연권: 두 가지 관점
-급진적 혁명
-반동과 집정부
나폴레옹 시대
-나폴레옹의 부상
-국내 정치
-나폴레옹 제국

-장별 요약/연대표/복습/권장도서
-용어사전
-지도 크레디트
-장별 노트
-찾아보기

2. 한국 관련 내용

p. 271
수나라 중(中)
수 황제는 압제적인 통치자였고, 막대한 군사비 지출로 불안이 퍼져나갔다. 618년 한국 정벌이 실패로 끝나고 돌아온 후 황제는 궁전에서 살해되었다.

p. 289
명나라 중(中)
한국의 이씨 왕조와 조공관계를 수립했다.

pp. 301-302
동아시아의 주변지역: 초기 일본, 한국, 베트남

비판적 사고
중국 문명이 일본, 한국, 베트남의 초기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

<전략> 한반도에는 후기신석기사회가 이미 몇 세기 전부터 발전을 시작했다.
이러한 초기 농경 사회는 모두 궁극적으로 거대한 이웃인 중국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 베트남은 수천 년 동안 중국의 지배 아래 있었고, 한국은 독립 국가였지만 오랫동안 중국에 조공을 바쳤으며, 많은 방면에서 중국의 문화적 선례를 따랐다.
<후략>

p. 302
지도 11.1 초기 일본
일본해(동해) - 일본해와 동해가 병기되어 있음

p. 305 지도
11.2 일본과 중국, 한국의 관계
일본해(동해) - 일본해와 동해가 병기되어 있음

pp. 317-319
한국: 동방의 가교
핵심 질문: 초기 한국의 경제적, 사회적 생활상에서 핵심적인 특징은 무엇인가?
중국 주변의 사회 중 한국만큼 중국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사회는 거의 없다. 하지만 중국과 한국의 관계는 긴장과 분쟁으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한국 사람들은 중국의 국수주의와 오만에 분개한 적도 종종 있다.
[318] 이러한 태도의 생생한 사례가 근년에 있었다. 양국 관료와 역사가들은 목소리를 높여서 한국의 초기 역사에 대한 상이한 해석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미네소타 주보다 약간 큰 한반도는 아마도 알타이어를 사용하며, 어업과 사냥을 하는 부족들이 신석기 시대에 이웃 만주에서부터 이주하여 처음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이 상대적으로 산악지대이기 때문에(한반도의 약 1/5 정도만이 경작에 적합하다) 농업은 약 기원전 2000년이 되어서야 행해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조직화된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한중 양국의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 시기이다. 2004년 중국 당국은 고구려(37 BCE-668 CE)로 알려진 이 지역 최초의 왕국이 만주의 넓은 지역과 한반도 북부를 지배했으며, 그러므로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한국의 학자들은 전설과 산재한 역사적 증거에 근거하여 고조선(Gojoseon, goh-joh-SHAWN)으로 알려진,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왕국은 한국인 지배자 단군(Dangun, dan-GOON)에 의해 기원전 2333년에 세워졌으며, 그 구성원이 한국인들이라고 반박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동북아시아에서 청동기 시대가 진행 중이던 때는 바로 이 시기였다.
이 문제로 여전히 격론이 진행 중이지만,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원전 109년,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후 수 세대 동안, 이 지역은 한나라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중국의 주에 분할 편입되어, 중국의 제도가 도입되었다. 3세기 한나라의 쇠퇴와 함께, 통치권은 점차 지역 지도자들에게 넘어갔고, 이들은 중국 관료들을 쫓아냈지만 여전히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결국 한반도에는 세 개의 왕국이 생겨났다. 북쪽의 고구려, 서남부의 백제, 동남부의 신라였다. 비슷한 시기에 야마토 평원에 나라를 세운 일본이 남부 해안에 작은 식민지를 건설했을지도 모른다.

p. 318 지도 한국의 삼국
일본해(동해) - 동해가 일본해와 병기되어 있음

삼국시대
4세기에서 7세기 까지, 사국은 한반도의 영향력과 영토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다. 동시에 삼국 모두 중국의 정치 및 문화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영향력은 고구려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났다. 4세기 후반 불교가 도입됐고, 한반도 최초의 사원이 평양에 세워졌다. 또한 삼국은 모두 한나라의 멸망 이후 중국 대륙에 나타난 나라들 중 하나와 조공 관계를 받아들였다. 신라는 다른 두 나라에 비해 중국의 영향에 덜 노출된 왕국으로 처음에는 삼국 중 가장 약했으나 결국 더 강력한 내부 응집력(아마도 지역 부족의 전통적인 끈기의 결과) 덕택에 한반도를 평정하게 되었다. 그 후 신라의 통치자들은 압록강 일대를 제외하고 한반도에서 중국을 몰아내었다. [319] 거만한 중국인들을 달래기 위해 신라는 당나라의 조공국 지위를 받아들였다. 이 기간에 신라는 한반도 남부에 남아 있던 일본 식민지들을 척결했다.
처음으로 삼국을 통일했을 때, 신라의 통치자들은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중국의 정치제도와 이념을 이용하고자 했다. 대중의 인기를 얻던 불교는 국교가 되었고, 한국의 승려들은 동시대 일본의 승려들처럼 중국으로 순례 길에 올랐다. 중국식 건축과 미술은 경주와 다른 도시를 가득 메웠고, 한자는 법조문서의 공식 문자가 되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한반도 동남부를 다스려왔던 강력한 귀족 가문들이 여전히 궁정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들은 당나라의 과거제도 도입을 막고, 빈곤층에 대한 농지 분배를 거부할 수 있었다. 중국식 모델 도입의 실패는 치명적이었다. 귀족 가문 사이의 분쟁이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780년 왕이 암살당하자 내전이 발발했다.

p. 318
사진 석굴암 불상
석굴암 불상(Sokkuram Buddha)
불교가 인도에서 다른 아시아 지역으로 퍼져나갈 때 인간 형태의 불상도 궤를 같이 했다. 1세기부터, 불상은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흐르는 듯한 주름이 특징인 일부 초기 조각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에 인도로 유입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반영한다. 다른 불상들은 인도 전통의 남성 토지신의 영향을 받아 어깨가 넓고 눈이 빛난다. 굽타 시대 예술가들은 영적, 육체적 완벽을 추구하는 인도의 이상을 강조했다.
불교가 실크로드를 따라 퍼져나가면서 불상은 페르시아, 중국 그리고 종국에는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영향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사진의 불상은 8세기 석굴암 불상으로 신라가 만든 것이다. 인근 언덕의 암석들이 너무 단단하여 중국이나 인도의 동굴 사원과 유사한 구조를 건축하지 못한 한국의 건축자들은 화강암 석재로 작은 돔 모양의 동굴을 꾸미고, 목조 베란다로 장식했다. 오늘날 순례자들은 가파른 언덕을 올라 아시아에서 손꼽힐 만큼 훌륭한 이 강력하고, 평온한 부처에게 경배를 드린다.

p. 319
사진 불국사 종탑
불국사 종탑(Pulguksa Bell Tower)
한반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적 성취로 신라의 고도인 경주 인근의 불국사를 꼽을 수 있다. 8세기에 건축된 이 사찰의 종탑은 아름다운 정원 한가운데에는 사진의 종탑이 자리 잡고 있다. 1966년 불국사 근처의 석탑에서 고문서 하나가 발견되었다. 8세기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고문서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로 여겨지고 있다.

p. 319
고려의 부상
10세기 초반, 고려(Koryo, KAWR-yoh)(오늘날 한국의 영문명의 유래가 되었다)라는 새로운 왕조가 북쪽에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왕국은 국력을 강화하고 영토를 통일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중국의 정치제도를 받아들였다. 과거제도가 958년 도입되었지만 일본에서처럼 관료제는 강한 귀족 가문들의 지배가 이어졌다.
고려는 침략을 막아내며, 400년간 명맥을 이었다. 이웃 중국에 강력한 왕조가 부재한 덕이 컸다. 고려 시대 한반도의 산업과 상업은 점진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중국과 마찬가지로 농업이 부의 주요 원천이었다. 원칙적으로 모든 토지는 왕의 소유였지만, 사실상 귀족 가문이 자신의 토지를 다스렸다. 토지는 농민들이 경작했는데, 이들에게는 유럽의 농노와 유사한 부담이 지워져 있었다. 사회의 최하층에는 천민계층이 있었다. 이들은 노비, 장인과 다른 특수한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
문화적 관점에서 고려 시대는 괄목할 만한 성취가 있었던 시대이다. 정토종과 선종 등 중국에서 도입된 종파들이 운영하는 불교 사찰이 커다란 지역을 지배했고, 승려들은 왕의 고문이 되었다.
처음에는 불교적 주제가 한국의 미술과 조각을 지배했으며, 대장경 전체가 목판으로 인쇄되었다. 하지만 후에는 산수가 회화와 도자기에 등장하며 유교적 주제가 지배적이 되었다.

p. 320
몽골 치하

이전의 신라처럼, 고려도 귀족의 세력과 탄탄한 조세기반의 부재를 극복하지 못했다. 13세기 들어 몽골이 고려의 북방을 점령하고 이를 원나라에 편입시켰다. 약화된 고려는 대도 (大都, Khanbaliq)의 대칸에게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었다.
몽골 통치 시대는 한국인들에게 격심한 고통을 안겨 주었다. 특히 수천의 농민과 장인들은 쿠빌라이 칸의 일본 정벌 준비를 위한 조선 작업에 강제로 징집되어 노동을 해야 했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몽골은 중국과 그 너머 세계의 수많은 새로운 사상과 기술을 전파했다. 고려는 살아남을 수는 있었지만, 몽골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했고, 몽골의 세력이 쇠퇴하자 고려도 함께 쇠락했다. 중국에서 명나라의 세력이 떠오르자 고려는 무너졌고 권력은 장군 이성계의 손에 들어갔다. 이성계(Yi Song Gye[YEE song gye])는 1392년 새로운 이씨 왕조(Yi Dynasty)를 건국했다. 다시 한 번 한국인들은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게 되었다.

p. 493
도쿠가와 일본 중(中)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열도의 다이묘 대부분에게 자신의 권위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고 국가 통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훗날 실패로 돌아간 아시아 본토 통치를 위해 한국을 침략했다. (뒤의 “한국: 위험한 이웃”을 참조)

p. 494
지도 도쿠가와 일본
만주 한국 서울
일본해(동해) - 동해가 일본해와 병기되어 있음.

p. 497
연대표 근대 초기의 일본과 한국
한국, 최초의 표음 문자 15세기
일본에 당도한 포르투갈 상인들 1543
일본에 당도한 프란시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 1549
오다 노부나가의 통치 1568-1582
교토 점령 1568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치 1582-1598
일본의 기독교 금지령 1587
일본의 한국 침략 1592
히데요시의 죽음과 일본군의 철수 1598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통치 1598-1616
도쿠가와 막부의 창설 1603
나가사키 교역을 허가 받은 네덜란드 상인들 1609
기독교 선교사 추방령 1612
중국에 충성서약을 한 한국의 이씨 왕조 1630년대

p. 502
도쿠가와 미술 중(中)
일본 도자기 장인들은 훌륭한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한국에서 기술과 디자인을 모두 빌려왔다.

pp. 503-504
한국과 베트남
핵심질문: 이 시기 한국의 발전상은 중국과 일본의 상황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가? 베트남 문명의 고유한 측면은 무엇인가?

한국: 위험한 이웃
도쿠가와 막부 치하의 일본이 고유의 특징을 지닌 독특한 사회를 만들어가며 중국 제국의 그림자에서 꾸준히 벗어나고 있을 무렵 한국의 이씨 왕조(Yi Dynasty)는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중국의 모델을 계속하여 따르고 있었다. 이씨 왕조는 14세기 말엽 장군 이성계(Yi Song Gye[YEE song gye])가 건국하였고, 즉각 명나라와 가까운 정치적, 문화적 관계를 수립했다. 한반도 중심부의 한강 유역에 위치한 서울을 새로운 수도로 삼은 이씨 왕조는 강력한 이웃인 중국과의 조공관계를 수용하고 중국의 제도와 가치관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였다. 중국에서처럼 과거제도가 관료 후보생들의 유교 고전에 대한 지식을 평가하는 수단이 되었고 성공은 출세로 나아가는 필수적인 단계로 여겨졌다.
하지만 차이점도 있었다. 일본처럼 조선도 귀족 계층인 소위 양반 계층으로의 진입을 계속 제한했다. 동시에 농민들은 여전히 농노와 비슷한 처지였으며, 국가 소유의 토지나 엘리트 계층의 영지에서 일했다. 천민으로 불린 노예계층은 정부의 농장이나 백정이나 광대 같은 특정 직업군에서 일했으며, 다른 집단의 지위 아래에 있다고 간주되었다.
마침내 한국 사회는 중국 정통성에서 벗어나는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15세기 한국의 구어(한글)를 적기 위한 표음문자가 창제되었다. 처음에는 양반계층의 경멸을 받고, 교육용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결국에는 사적 서신이나 대중 소설을 위한 매체가 되었다. 동시에 경제 부문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농업생산성이 향상되어 인구 증가와 소규모 도시 산업과 상업 부문도 등장했다. 사회적으로는 양반 계층의 오랜 지배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양반 계층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권력과 영향력은 오히려 약화되었고, 이에 따라 일부 양반들은 상인이 되거나 농민 계층으로 유입되어 귀족과 평민 사이의 구분이 흐릿해져갔다.
한편, 이씨 왕조는 이웃국가로부터의 홀로서기에 지속적인 어려움을 맞이했다. 16세기 중 많은 시기에, 주된 위협은 북쪽에서 비롯되었다. 만주 지역의 세력이 압록강 바로 남쪽의 한국 영토(p. 494 지도 17.3 참조)를 괴롭혔다. 하지만 1580년대에 이르러, 더 큰 위협이 동쪽에서 다가왔다. 새롭게 통일된 일본이었다. 16세기 중 많은 시간 동안 일본의 다이묘는 오랜 내전에 휘말려 왔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열도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화하기 위해 투쟁을 벌였다. 셋 중 히데요시만이 바다 건너 제국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그는 평민으로 태어났지만, 장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고, 1580년대 후반에 명나라를 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p. 504 박스글 참조) 한국 왕 선조(1567-1608) 는 히데요시의 동맹 제안을 거절했고, 1592년 일본은 한반도를 침공했다.
처음에는 일본의 계획이 잘 진행되었다. 일본군은 한국의 지방을 초토화하며, 한국의 수도 서울로 진격했다. 하지만 한국은 결국 침략군의 다루기 힘든 상륙선을 파괴할 수 있는 빠른 중장갑함을 개발한 이순신 장군(1545-1598)의 탁월한 지휘 하에 반격을 가하여 독립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은 오래 가지 못했다. 1630년대에 이르러 만주족이 북방국경에서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만주족 군은 1630년대에 한국 북방을 침공하여 결국 이씨 왕조가 북경의 새 제국[청나라] 조정에 충성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유럽 상인과 선교사들의 도래를 겪지 않았지만, 중국에 다녀가는 사절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정보가 한반도에 전해졌고, 18세기 후반에는 소규모 가톨릭 공동체가 수립되기도 했다.

p. 504
박스: 내 형제가 되어라. 그렇지 않으면 머리를 부숴 버리겠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은 적들을 무찌르고 일본 열도를 자신의 통치 아래에 넣었다. 그 직후 한국의 이씨 왕조의 사신이 그의 성공을 축하하는 서신을 전달했다. 히데요시는 아래 소개된 서신에서 중국 본토를 정복하고 동아시아 전체를 통치하겠다는 계획을 드러냈다. 과대 망상적 야심이 거의 고스란히 드러난 이 서신에서 히데요시는 이씨 왕조의 지배자가 중국 공격을 지원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복수를 당하게 될 것이라 선언했다. 하지만 한국의 왕은 서쪽의 강력한 이웃을 더 두려워했고, 히데요시의 동맹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일본을 공격했고, 이는 소위 임진왜란(1592-1598)이라고 불렸다. 이로 인해 한반도는 어마어마한 고초를 겪었다.

일본국 관백(關白) 히데요시는 이 서신을 조선 국왕 전하에게 바칩니다.
보내신 서한을 기쁘게 읽고, 전하의 뚜렷한 흔적에서 느껴지는 향기를 음미하고자 재삼 펼쳐서 보고 접곤 했습니다.
우리나라 60여 주는 근래 여러 지역으로 분리되어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대대로 내려오는 예의를 저버리며 조정의 정사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3, 4년 사이에 반신과 적도를 토벌하여 먼 지역과 섬들까지 모두 장악하였습니다.
삼가 나의 지나온 자취를 살펴보건대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일개 신하였지만, 일찍이 어머님께서 나를 잉태할 때에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복술사가 ‘햇빛이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표인풍(八表仁風, 팔표란 팔방의 아주 먼 끝. 인풍은 어질고 덕스러운 교화)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러운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이토록 기이한 징조로 말미암아 제게 적대하는 자는 자연 기세가 꺾여 멸망해갔는데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빼앗았습니다. 이제 천하를 평정한 뒤로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고 외로운 자들을 불쌍히 여겨 위로하니, 백성들이 부유하고 재물이 풍족하므로 지방마다 바치는 공물이 전보다 만 배나 늘었으니, 본조의 개벽 이래로 조정의 성대함과 수도의 장관이 오늘날보다 더한 적이 없었습니다.
비록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오래 산다 해도 예로부터 백 년을 넘지 못하는 데 어찌 답답하게 이곳에만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나라가 산과 바다로 막혀 멀리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한 번에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에 들어가 우리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심어 놓고, 교토의 다스림과 교화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제 마음입니다. 귀국이 앞장서서 입조한 것은, 앞일을 깊이 헤아린 처사이므로 이제는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먼 곳의 작은 섬에 있는 무리라도 뒤늦게 복속해온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에 나온다면 더욱 이웃으로서의 맹약이 굳게 될 것입니다. 제 소원은 삼국에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방물은 목록대로 받았습니다. 몸을 보중하고 아끼십시오.

일본국 관백 히데요시
질문: 히데요시는 동아시아 전역을 지배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어떻게 정당화하고 있는가?

3. 간략 분석

Wadswoth Cengage Learning 출판사의 세계사 교과서 1권이다. 대부분의 미국 세계사 교과서들처럼 이 교과서도 이전보다 한국관련 오류가 줄어들었지만, 아직 일부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과하게 기술하는 부분들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예를 들면, 한 무제의 침입 이후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었다는 기술,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작은 식민지를 건설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신라가 한반도 남부에 있던 일본 식민지들을 척결했다는 기술이 나온다.
한국과 중국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은 다음 기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초기 농경 사회는 모두 궁극적으로 거대한 이웃인 중국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 베트남은 수천 년 동안 중국의 지배 아래 있었고, 한국은 독립 국가였지만 오랫동안 중국에 조공을 바쳤으며, 많은 방면에서 중국의 문화적 선례를 따랐다.” 한국이 독립 국가였지만 중국에 조공을 받쳤고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본다.
이외의 한국 관련 주요 내용 가운데는, 한국의 가원, 한나라의 한반도 북부 점령,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과 중국 격퇴, 한국의 불교 전래와 불교문화(불국사, 석굴암, 대장경 인쇄술), 한국의 구어를 적기 위한 표음문자 창제,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 같은 부분들을 포함한다.

4. 검토 의견

페이지 한국 관련 기술 내용 검토 의견 개선 과제 코드
p. 286 지도에 한반도 전체가 몽골제국 영역에 포함된 것으로 표시됨 몽골의 내정간섭을 받았던 시기에도 고려는 독립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몽골(원)과 한국(고려)의 국경선을 표시하고, 몽골의 영역에서 한반도를 제외시켜야 한다. 또한 ‘고려’라는 정확한 국명을 표기해야 함 C3
p. 318 이 문제로 여전히 격론이 진행 중이지만,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원전 109년,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한 무제의 한사군 설치 연도는 기원전 108년임. C3
p. 318 이 문제로 여전히 격론이 진행 중이지만,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원전 109년,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후 수 세대 동안, 이 지역은 한나라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중국의 주에 분할 편입되어, 중국의 제도가 도입되었다. 한나라의 무제는 고조선을 침략하여 멸망시키고 이 지역에 4군현을 설치하였으나 3개 군현은 곧 폐지되었으며 비교적 오랫동안 지속된 낙랑 역시 최근에 와서는 중국의 직접 지배지역이라기보다는 유이민들이 세운 자치도시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4군현은 중국 기록에서조차 부정확하게 언급되어 있어 통치력이 실제로 미쳤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한반도 북부가 중국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었다”, “이후 수 세대 동안 이 지역은 한나라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중국의 주에 분할 편입되었다”는 부분을 삭제해야 함. C3
p. 318 결국 한반도에는 세 개의 왕국이 생겨났다. 북쪽의 고구려, 서남부의 백제, 동남부의 신라였다. 비슷한 시기에 야마토 평원에 나라를 세운 일본이 남부 해안에 작은 식민지를 건설했을지도 모른다.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작은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주장은 역사적 근거가 없으므로 삭제해야 함. C3
p. 319 그 후 신라의 통치자들은 압록강 일대를 제외하고 한반도에서 중국을 몰아내었다. 거만한 중국인들을 달래기 위해 신라는 당나라의 조공국 지위를 받아들였다. 이 기간에 신라는 한반도 남부에 남아 있던 일본 식민지들을 척결했다.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작은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주장은 역사적 근거가 없으므로 삭제해야 함. C3
p. 319 고려는 침략을 막아내며, 400년간 명맥을 이었다. 이웃 중국에 강력한 왕조가 부재한 덕이 컸다. 한국은 고려시대에도 요(Khitan)와 금(Jin) 같은 강력한 국가들과 전쟁을 벌이며 국가를 유지해갔다. “이웃 중국에 강력한 왕조가 부재한 덕이 컸다”는 부분은 삭제해야 함. C3
p. 320 고려는 살아남을 수는 있었지만, 몽골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했고, 몽골의 세력이 쇠퇴하자 고려도 함께 쇠락했다. 중국에서 명나라의 세력이 떠오르자 고려는 무너졌고 권력은 장군 이성계의 손에 들어갔다. 고려의 쇠락은 몽골의 쇠퇴와 관련이 없다. 오히려 몽골이 쇠퇴하자 고려는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으며 북쪽으로 고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 고려의 쇠락은 한국 내적인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 말미암았다. “몽골의 세력이 쇠퇴하자 고려도 함께 쇠락했다”는 부분은 삭제해야 함. C3
p. 504 과대 망상적 야심이 거의 고스란히 드러난 이 서신에서 히데요시는 이씨 왕조의 지배자가 중국 공격을 지원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복수를 당하게 될 것이라 선언했다. 하지만 한국의 왕은 서쪽의 강력한 이웃을 더 두려워했고, 히데요시의 동맹 요구를 거절했다. 조선 정부가 히데요시의 요구를 거부한 것은 그 요구가 오만하고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며 조선이 명나라를 두려워했기 때문과는 별 관련이 없다. “한국의 왕이 서쪽의 강력한 이웃을 더 두려워했고, 히데요시의 동맹 요구를 거절했다”는 부분을 삭제해야 함. C3


- 개선 과제 코드 -
개선 과제 유형
A: 동해·독도 표기 수정 필요 B: 단순표기 C: 내용 수정 필요 D: 내용 증·신설 필요 E: 기타
A1: 동해 표기 A2: 독도 표기 C1: 통계 C2: 과거 사실 C3: 객관적 기술 D1: 증설 필요 D2: 신설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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