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미국:World History Volume 1: To 1800, 7th Edition"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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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목차==
 
== 1. 목차==
 
 
-지도<br>
 
-지도<br>
 
-박스글<br>
 
-박스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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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제국<br>
 
-페르시아 제국<br>
  
 +
2 고대 인도<br>
 +
인도 문명의 등장: 하랍파 사회<br>
 +
-다양성의 땅<br>
 +
-하랍파 문명: 매혹적인 불가사의<br>
 +
-글과 문명<br>
 +
인도의 아리아족<br>
 +
-추장에서 왕까지<br>
 +
-마우리아 제국<br>
 +
-카스트와 계급: 고대 인도의 사회구조<br>
 +
-고대 인도의 일상<br>
 +
-경제<br>
 +
윤회에서 벗어나기: 고대 인도의 종교계<br>
 +
-브라만 교<br>
 +
-진리의 추구<br>
 +
-대중종교<br>
 +
-불교: 중도<br>
 +
물고기의 법칙(matsyanyaya:rule of fishes): 마우리아 제국 이후의 인도<br>
 +
생기 넘치는 인도 문화<br>
 +
-문학<br>
 +
-건축과 조각<br>
 +
-과학<br>
  
지도   xi
+
3 고대 중국<br>
박스글   xiii
+
중국 문명의 여명<br>
참고문헌 xiv
+
-중국의 지역과 민족<br>
서문   xxi
+
-상나라<br>
감사의 말 xxvii
+
주나라<br>
언어와 연대결정에 대해 학생들에게 전하는 말  xxx
+
-정치 구조<br>
세계사 이해를 위한 주제  xxxi
+
-금속의 사용<br>
 +
-경제와 사회<br>
 +
-백가쟁명<br>
 +
-선악에 대한 논쟁<br>
 +
중국 최초의 제국: 진나라<br>
 +
-진나라(기원전 221-206)<br>
 +
고대 중국의 일상<br>
 +
-가족의 역할<br>
 +
-생활양식<br>
 +
-도시<br>
 +
-비천한 처지: 고대 중국의 여성<br>
 +
중국의 문화<br>
 +
-금속공예와 조각<br>
 +
-언어와 문학<br>
 +
-음악<br>
  
1부 최초의 문명들과 제국의 등장 (선사시대부터 기원후 500년까지)
+
4 그리스 문명<br>
 +
-초기 그리스<br>
 +
-미노아 크레타<br>
 +
-그리스 최초의 국가: 미케네<br>
 +
-암흑시대의 그리스(기원전 1100-750년 경)<br>
 +
그리스 도시국가(기원전 750-500년 경)<br>
 +
-폴리스<br>
 +
-식민도시와 무역의 발전<br>
 +
-그리스 폴리스에서 벌어진 압제<br>
 +
-스파르타<br>
 +
-아테네<br>
 +
-초기 그리스 문화에 미친 외부의 영향<br>
 +
그리스 문명의 정점: 고전기 그리스<br>
 +
-페르시아의 도전<br>
 +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네 제국의 성장<br>
 +
-대(大)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그리스 국가의 쇠퇴<br>
 +
-고전기 그리스의 문화<br>
 +
-축의 시대(Axial Age)<br>
 +
-그리스의 종교<br>
 +
-고전기 아테네의 일상<br>
 +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여성<br>
 +
마케도니아의 부상과 알렉산드로스의 정복<br>
 +
-알렉산드로스 대왕<br>
 +
헬레니즘 왕국들의 세계<br>
 +
-헬레니즘 왕정<br>
 +
-정치제도<br>
 +
-알렉산더 (2004)<br>
 +
-헬레니즘 도시<br>
 +
-무역의 중요성<br>
 +
-사회생활: 여성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br>
 +
-헬레니즘 세계의 문화<br>
  
I 초기 인간과 최초의 문명들
+
5 최초의 세계 문명: 로마, 중국, 그리고 실크로드의 등장<br>
최초의 인간들                                                            3
+
초기 로마와 공화국<br>
호모사피엔스의 등장  3
+
-초기 로마<br>
구석기 시대의 사냥-채집  3
+
-로마 공화국<br>
신석기 혁명 (기원전 1만년부터 4000년)   5
+
-로마의 지중해 정복(기원전 264-133)<br>
비교 읽기
+
-로마 공화국의 쇠퇴와 몰락(기원전 133-31)<br>
사냥-채집과 목축에서 농사까지  7
+
로마 제국의 절정<br>
문명의 등장  8
+
-아우구스투스 시대(기원전 31-기원후 14)<br>
세계 각지의 초기 문명  9
+
-제국의 초기(14-180)<br>
문명이 생겨난 이유  9
+
-로마 세계의 문화와 사회<br>
메소포타미아 문명  10
+
위기와 제국 말기<br>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국가  10
+
-3세기의 위기<br>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제국   12
+
-로마 제국 말기<br>
메소포타미아 문화  13
+
-글래디에이터(2000)<br>
이집트 문명: “나일 강의 선물”  16
+
-로마 세계의 변화: 기독교의 발전<br>
지리의 영향  16
+
-지배자와 신<br>
고왕국과 중왕국  17
+
-로마 당국과 기독교인 각각의 기독교에 대한 관점<br>
고대 이집트의 사회와 경제  19
+
영광스러운 한(漢) 제국(기원전 202-기원후 221)<br>
이집트의 문화  19
+
-유교와 국가<br>
무질서와 새로운 질서: 신왕국  21
+
-경제<br>
고대 이집트의 일상: 가족과 결혼 21
+
-제국의 확장과 실크로드의 기원<br>
반대 관점
+
-사회 변화<br>
아크나톤의 아톤 찬가와 히브리 성경의 시편 104편  22
+
-종교와 문화<br>
퍼져나가는 이집트의 영향: 누비아    23
+
-한나라의 쇠퇴와 몰락<br>
문명의 새로운 중심    24
+
-로마와 중국의 비교<br>
유목민: 인도-유럽어족의 영향  24
+
서아시아의 영토국가: 페니키아  25
+
히브리 족: “이스라엘의 아이들”  26
+
새로운 제국의 등장  29
+
아시리아 제국 29
+
페르시아 제국  33
+
장별 요약/연대표복습/권장도서  35
+
  
2 고대 인도  37
+
2부 문명의 새로운 유형(500-1500)<br>
인도 문명의 등장: 하랍파 사회  38
+
      다양성의 땅  38
+
하랍파 문명: 매혹적인 불가사의  38
+
비교 읽기
+
글과 문명  41
+
인도의 아리아족    42
+
추장에서 왕까지  43
+
마우리아 제국    44
+
카스트와 계급: 고대 인도의 사회구조 44
+
고대 인도의 일상 47
+
경제 48
+
윤회에서 벗어나기: 고대 인도의 종교계 50
+
브라만 교 50
+
반대 관점
+
진리의 추구 51
+
대중종교 52
+
불교: 중도 52
+
물고기의 법칙(matsyanyaya:rule of fishes): 마우리아 제국 이후의 인도 56
+
생기 넘치는 인도 문화 57
+
문학 58
+
건축과 조각 58
+
과학 60
+
장별 요약/연대표/복습/권장도서  62
+
  
3 고대 중국 64
+
6 아메리카<br>
중국 문명의 여명 65
+
아메리카의 사람들<br>
중국의 지역과 민족 65
+
-최초의 아메리카인<br>
상나라 66
+
중앙아메리카의 초기 문명<br>
주나라 69
+
-올멕: 고무의 땅<br>
정치 구조 69
+
-사포텍(Zapotec)<br>
비교 읽기
+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 아메리카 최초의 메트로폴리스<br>
금속의 사용 70
+
-올멕: 어머니 문화인가 동등한 문명 중 최초(First among equals)인가?<br>
경제와 사회 71
+
-마야<br>
백가쟁명 72
+
-아즈텍<br>
반대 관점
+
남아메리카 최초의 문명<br>
선악에 대한 논쟁 76
+
-카랄(Caral)<br>
중국 최초의 제국: 진나라 79
+
-모체(Moche)<br>
진나라(기원전 221-206) 80
+
-역사와 환경<br>
고대 중국의 일상 83
+
-잉카<br>
가족의 역할 83
+
아메리카의 국가 없는 사회들<br>
생활양식 84
+
-동부삼림(Eastern Woodlands)<br>
도시 85
+
-카호키아<br>
비천한 처지: 고대 중국의 여성 85
+
-고대 푸에블로 족<br>
중국의 문화 85
+
-남아메리카: 아라와크(Arawak)<br>
금속공예와 조각 86
+
-아마조니아<br>
언어와 문학 87
+
음악 89
+
장별 요약/연대표/복습/권장도서 90
+
  
4 그리스 문명 92
+
7 중동의 소요: 이슬람의 발흥<br>
초기 그리스 93
+
이슬람의 발흥<br>
미노아 크레타 93
+
-무함마드의 역할<br>
그리스 최초의 국가: 미케네 94
+
-예언자 마호메트(Muhammad: The Messenger of God)(1976)<br>
암흑시대의 그리스(기원전 1100-750년 경) 95
+
-무함마드의 가르침<br>
그리스 도시국가(기원전 750-500년 경) 96
+
아랍 제국과 그 계승자들<br>
폴리스 96
+
-제국의 창조<br>
식민도시와 무역의 발전 98
+
-우마이야조의 부상<br>
그리스 폴리스에서 벌어진 압제 99
+
-아바스조<br>
스파르타 99
+
-십자군<br>
아테네 100
+
-몽골<br>
초기 그리스 문화에 미친 외부의 영향 101
+
-예루살렘 점령: 기독교의 관점과 이슬람의 관점<br>
그리스 문명의 정점: 고전기 그리스 102
+
-안달루시아: 유럽의 이슬람 전진기지<br>
페르시아의 도전 102
+
이슬람 문명<br>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네 제국의 성장 103
+
-정치 구조<br>
대(大)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그리스 국가의 쇠퇴 103
+
-아랍의 부: 중동의 무역과 도시들<br>
고전기 그리스의 문화 104
+
-무역과 문명<br>
비교읽기
+
-이슬람 사회<br>
축의 시대(Axial Age) 109
+
-이슬람 문화<br>
그리스의 종교 109
+
고전기 아테네의 일상 110
+
반대 관점
+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여성 111
+
마케도니아의 부상과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112
+
알렉산드로스 대왕 112
+
헬레니즘 왕국들의 세계 114
+
헬레니즘 왕정 115
+
정치제도 115
+
영화와 역사
+
알렉산더 (2004) 116
+
헬레니즘 도시 116
+
무역의 중요성 117
+
사회생활: 여성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 118
+
헬레니즘 세계의 문화 118
+
장별 요약/ 연대표/ 복습/ 권장도서 122
+
  
5 최초의 세계 문명: 로마, 중국, 그리고 실크로드의 등장 124
+
8 아프리카의 초기 문명<br>
초기 로마와 공화국 125
+
문명의 등장<br>
초기 로마 125
+
-땅<br>
로마 공화국 125
+
-최초의 농부들<br>
로마의 지중해 정복(기원전 264-133) 128
+
-악숨(Axum)과 메로에(Meroe)<br>
로마 공화국의 쇠퇴와 몰락(기원전 133-31) 129
+
-사하라 일대<br>
로마 제국의 절정 132
+
-동아프리카<br>
아우구스투스 시대(기원전 31-기원후 14) 132
+
-민족의 이주<br>
제국의 초기(14-180) 133
+
이슬람의 도래<br>
로마 세계의 문화와 사회 135
+
-이슬람 이전 아프리카의 종교적 믿음<br>
위기와 제국 말기 139
+
-북아프리카의 아랍인들<br>
3세기의 위기 139
+
-에티오피아 왕국: 이슬람 바다 위에 뜬 기독교 섬<br>
로마 제국 말기 139
+
-동아프리카: 잔즈(Zanj) 땅<br>
영화와 역사
+
-서아프리카의 국가들<br>
글래디에이터(2000) 140
+
중앙 및 남아프리카의 국가의 비중앙집중적(Noncentralized) 사회<br>
로마 세계의 변화: 기독교의 발전 142
+
-콩고 하곡<br>
비교 읽기
+
-짐바브웨<br>
지배자와 신 143
+
-남아프리카<br>
반대 관점
+
-아프리카: 역사 없는 대륙?<br>
로마 당국과 기독교인 각각의 기독교에 대한 관점 145
+
아프리카 사회<br>
영광스러운 한(漢) 제국(기원전 202-기원후 221) 146
+
-도시 생활<br>
유교와 국가 146
+
-촌락 생활<br>
경제 146
+
-여성의 역할<br>
제국의 확장과 실크로드의 기원 148
+
-노예제도<br>
사회 변화 150
+
아프리카의 문화<br>
종교와 문화 151
+
-회화와 조각<br>
한나라의 쇠퇴와 몰락 152
+
-음악<br>
로마와 중국의 비교 152
+
-건축<br>
장별 요약/연대표/복습/권장도서 153
+
-문학<br>
  
2부 문명의 새로운 유형(500-1500) 156
+
9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문명의 확장<br>
 +
실크로드<br>
 +
마우리아 왕조 이후의 인도<br>
 +
-굽타 왕조: 새로운 황금시대?<br>
 +
-불교의 변화<br>
 +
-인도 불교의 쇠퇴<br>
 +
-언제 인도인들이 힌두교 신자가 되었나?<br>
 +
이슬람의 도래<br>
 +
-마흐무드 가즈나비(Mahmud of Ghazni)의 제국<br>
 +
-델리 술탄 시대<br>
 +
-티무르<br>
 +
사회와 문화<br>
 +
-종교<br>
 +
-카스트, 계급, 가족<br>
 +
-경제와 일상<br>
 +
-인도 문화의 경이<br>
 +
황금 지역: 초기 동남아시아<br>
 +
-논과 향신료: 동남아시아 국가들<br>
 +
-일상생활<br>
 +
-영혼의 세계: 종교적 믿음<br>
 +
-태평양으로의 확장<br>
  
6 아메리카       158
+
10 고대 중국의 전성기<br>
아메리카의 사람들 159
+
한나라 이후의 중국<br>
최초의 아메리카인 159
+
중국의 재통일: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br>
중앙아메리카의 초기 문명 159
+
-수나라<br>
올멕: 고무의 땅 159
+
-당나라<br>
사포텍(Zapotec) 160
+
-송나라<br>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 아메리카 최초의 메트로폴리스 160
+
-정치구조: 유교의 승리<br>
올멕: 어머니 문화인가 동등한 문명 중 최초(First among equals)인가? 161
+
-행동 또는 무위: 중세 중국의 관념적 논쟁<br>
마야 161
+
-경제<br>
아즈텍 167
+
-기술의 전파<br>
남아메리카 최초의 문명 172
+
-고대 중국 사회<br>
카랄(Caral) 172
+
중앙아시아의 폭발: 몽골 제국<br>
모체(Moche) 173
+
-두 세계의 만남<br>
비교 읽기
+
-몽골의 중국 지배<br>
역사와 환경 174
+
-마르코 폴로의 모험(1938)과 마르코 폴로(2007)<br>
잉카 175
+
-역사상 몽골의 위치<br>
아메리카의 국가 없는 사회들 178
+
명나라<br>
동부삼림(Eastern Woodlands) 178
+
-정화의 항해<br>
카호키아 179
+
-도의 추구<br>
고대 푸에블로 족 179
+
-불교와 도교의 부상과 쇠퇴<br>
남아메리카: 아라와크(Arawak) 180
+
-성리학: 격물(格物)<br>
아마조니아 180
+
중국 문화의 절정<br>
장별 요약/연대표/복습/권장도서 181
+
-문학<br>
 +
-미술<br>
  
7 중동의 소요: 이슬람의 발흥 183
+
11 동아시아의 주변지역: 초기 일본, 한국, 베트남<br>
이슬람의 발흥 184
+
일본: 떠오르는 태양의 땅<br>
무함마드의 역할  184
+
-신들의 선물: 선사시대 일본<br>
영화와 역사
+
-일본 국가의 부상<br>
예언자 마호메트(Muhammad: The Messenger of God)(1976) 186
+
-세계의 봉건 질서<br>
무함마드의 가르침    186
+
-경제 및 사회 구조<br>
아랍 제국과 그 계승자들    188
+
-정토의 추구: 초기 일본의 종교<br>
제국의 창조 189
+
-라쇼몽(1950)<br>
우마이야조의 부상 189
+
-전통 일본 문화의 원천<br>
아바스조 190
+
-일본과 중국 모델<br>
십자군 193
+
한국: 동방의 가교<br>
몽골 194
+
-삼국시대<br>
반대 관점
+
-고려의 부상<br>
예루살렘 점령: 기독교의 관점과 이슬람의 관점  195
+
-몽골 치하<br>
안달루시아: 유럽의 이슬람 전진기지 195
+
베트남: 작은 용<br>
이슬람 문명 197
+
-다이 비에트(Great Viet, 大越)의 부상<br>
정치 구조 198
+
-사회와 가정생활<br>
아랍의 부: 중동의 무역과 도시들 198
+
-장별 요약/연대표/복습/권장 도서<br>
비교 읽기
+
무역과 문명 200
+
이슬람 사회 201
+
이슬람 문화 202
+
장별 요약/연대표/장별 복습/권장도서 210
+
  
8 아프리카의 초기 문명  213
+
12 유럽의 형성<br>
문명의 등장 214
+
중세 초기 유럽의 등장<br>
땅 214
+
-새로운 게르만 왕국들<br>
최초의 농부들  214
+
-기독교의 역할<br>
악숨(Axum)과 메로에(Meroe)   215
+
-샤를마뉴와 카롤링거 왕조<br>
사하라 일대 216
+
-군주와 봉신의 세계<br>
동아프리카 218
+
고중세 시대의 유럽<br>
비교 읽기
+
-땅과 사람들<br>
민족의 이주 219
+
-무역과 도시의 신세계<br>
이슬람의 도래 220
+
-겨울의 라이온(The Lion in Winter)(1968)<br>
이슬람 이전 아프리카의 종교적 믿음 220
+
-중세 세계의 도시들<br>
북아프리카의 아랍인들 220
+
-유럽 왕국의 진화<br>
에티오피아 왕국: 이슬람 바다 위에 뜬 기독교 섬 221
+
-기독교와 중세 문명<br>
동아프리카: 잔즈(Zanj) 땅 222
+
-고중세 문화<br>
서아프리카의 국가들 224
+
-중세 유럽과 세계<br>
중앙 및 남아프리카의 국가의 비중앙집중적(Noncentralized) 사회 227
+
-제1차 십자군<br>
콩고 하곡 228
+
-후기 십자군<br>
짐바브웨 229
+
-십자군의 영향은 무엇인가?<br>
남아프리카 230
+
아프리카: 역사 없는 대륙? 230
+
아프리카 사회 230
+
도시 생활 230
+
촌락 생활 231
+
여성의 역할 231
+
노예제도 232
+
아프리카의 문화 233
+
회화와 조각 233
+
음악 233
+
건축 235
+
문학 235
+
장별 요약/연대표/복습/권장도서 237
+
  
9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문명의 확장 240
+
13 비잔틴 제국과 서방세계의 위기와 회복<br>
실크로드 241
+
동로마에서 비잔틴 제국까지<br>
마우리아 왕조 이후의 인도 242
+
-유스티아누스 황제(527-565) 치세<br>
굽타 왕조: 새로운 황금시대? 243
+
-새로운 유형의 제국<br>
불교의 변화 243
+
비잔틴 문명의 정점(760-1025)<br>
인도 불교의 쇠퇴 245
+
-부흥의 시작<br>
언제 인도인들이 힌두교 신자가 되었나? 246
+
-마케도니아 왕조<br>
이슬람의 도래 248
+
비잔틴 제국의 쇠퇴와 몰락(1025-1453)<br>
마흐무드 가즈나비(Mahmud of Ghazni)의 제국  247
+
-새로운 도전과 새로운 대응<br>
델리 술탄 시대  248
+
-십자군의 영향<br>
티무르 249
+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콘스탄티노플 함락<br>
사회와 문화 249
+
14세기 서방의 위기<br>
종교 249
+
-흑사병: 아시아에서 유럽으로<br>
비교 읽기
+
-역사에 나타난 질병의 역할<br>
카스트, 계급, 가족 252
+
-경제 혼란과 사회 격변<br>
경제와 일상 254
+
-흑사명의 원인: 동시대의 시각<br>
인도 문화의 경이 255
+
-정치적 불안정<br>
황금 지역: 초기 동남아시아 258
+
-교회의 쇠퇴<br>
논과 향신료: 동남아시아 국가들 259
+
회복: 르네상스<br>
일상생활 263
+
-학문의 르네상스<br>
영혼의 세계: 종교적 믿음 264
+
-예술의 르네상스<br>
태평양으로의 확장 267
+
-르네상스 시대의 국가<br>
장별 요약/연대표/복습/권장도서   267
+
10 고대 중국의 전성기  269
+
한나라 이후의 중국  270
+
중국의 재통일: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
수나라 270
+
당나라 271
+
송나라 272
+
정치구조: 유교의 승리 273
+
반대 관점
+
행동 또는 무위: 중세 중국의 관념적 논쟁  275
+
경제 276
+
비교 일기
+
기술의 전파 277
+
고대 중국 사회 279
+
중앙아시아의 폭발: 몽골 제국 279
+
반대 관점
+
두 세계의 만남   284
+
몽골의 중국 지배 285
+
영화와 역사
+
마르코 폴로의 모험(1938)과 마르코 폴로(2007)  287
+
역사상 몽골의 위치 287
+
명나라 289
+
정화의 항해 289
+
도의 추구 290
+
불교와 도교의 부상과 쇠퇴 291
+
성리학: 격물(格物) 292
+
중국 문화의 절정 294
+
문학 294
+
미술 296
+
장별 요약/연대표/복습/권장도서 299
+
  
11 동아시아의 주변지역: 초기 일본, 한국, 베트남 301
+
3부 새로운 세계 질서의 등장(1500-1800)<br>
일본: 떠오르는 태양의 땅 302
+
신들의 선물: 선사시대 일본 303
+
일본 국가의 부상 305
+
비교 일기
+
세계의 봉건 질서 309
+
경제 및 사회 구조 310
+
정토의 추구: 초기 일본의 종교 312
+
영화와 역사
+
라쇼몽(!950) 313
+
전통 일본 문화의 원천 314
+
일본과 중국 모델 317
+
한국: 동방의 가교 318
+
삼국시대 318
+
고려(Kilroy)의 부상 319
+
몽골 치하 320
+
베트남: 작은 용 320
+
다이 비에트(Great Viet, 大越)의 부상 321
+
사회와 가정생활 323
+
장별 요약/연대표/복습/권장 도서 324
+
  
12 유럽의 형성 327
+
14 새로운 만남: 세계시장의 탄생<br>
중세 초기 유럽의 등장 328
+
탐험과 확장의 시대<br>
새로운 게르만 왕국들 328
+
-이슬람과 향신료 무역<br>
기독교의 역할 329
+
-서아프리카의 이슬람 전파<br>
샤를마뉴와 카롤링거 왕조 331
+
-새로운 참가자: 유럽<br>
군주와 봉신의 세계 331
+
해양제국 포르투갈<br>
고중세 시대의 유럽 335
+
-인도의 포르투갈인들<br>
땅과 사람들 335
+
-향신료 탐색<br>
무역과 도시의 신세계 337
+
-새로운 경쟁자들의 출현<br>
영화와 역사
+
“신세계” 정복<br>
겨울의 라이온(The Lion in Winter)(1968) 338
+
-항해<br>
비교 읽기
+
-정복<br>
중세 세계의 도시들 340
+
-제국의 통치<br>
유럽 왕국의 진화 341
+
-미션(1986)<br>
기독교와 중세 문명 347
+
-경쟁의 격화<br>
고중세 문화 350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영웅인가, 악당인가?<br>
중세 유럽과 세계 352
+
-콜럼부스의 교환<br>
제1차 십자군 353
+
과도기 아프리카<br>
후기 십자군 354
+
-아프리카의 포르투갈<br>
십자군의 영향은 무엇인가? 354
+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br>
장별 요약/연대표/복습/권장도서 355
+
-노예무역<br>
+
-변화하는 대륙의 정치, 사회구조<br>
13 비잔틴 제국과 서방세계의 위기와 회복 358
+
향신료 무역 시대의 동남아시아<br>
동로마에서 비잔틴 제국까지 358
+
-서양의 도래<br>
유스티아누스 황제(527-565) 치세  359
+
-문명의 행진<br>
새로운 유형의 제국  362
+
-식민지 시대 이전 동남아시아의 국가와 사회<br>
비잔틴 문명의 정점(760-1025)  367
+
-국왕 서신의 교환<br>
부흥의 시작      367
+
마케도니아 왕조  367
+
비잔틴 제국의 쇠퇴와 몰락(1025-1453)  370
+
새로운 도전과 새로운 대응  370
+
십자군의 영향 371
+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콘스탄티노플 함락  372
+
14세기 서방의 위기  374
+
흑사병: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374
+
비교 읽기
+
역사에 나타난 질병의 역할  375
+
경제 혼란과 사회 격변  376
+
반대 관점
+
흑사명의 원인: 동시대의 시각  377
+
정치적 불안정 378
+
교회의 쇠퇴 379
+
회복: 르네상스 380
+
학문의 르네상스 381
+
예술의 르네상스 381
+
르네상스 시대의 국가 383
+
장별 요약/연대표/복습/권장도서  385
+
  
3부 새로운 세계 질서의 등장(1500-1800) 388
+
15 유럽의 변신: 종교개혁과 국가 건설<br>
 +
16세기의 종교개혁<br>
 +
-종교개혁의 배경<br>
 +
-마르틴 루터와 독일의 종교개혁<br>
 +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전파<br>
 +
-종교개혁 논쟁: 마르부르크 분쟁<br>
 +
-가톨릭의 종교개혁<br>
 +
-초기 근대 세계의 결혼<br>
 +
위기의 유럽(1560-1650)<br>
 +
-16세기의 정치와 종교 전쟁<br>
 +
-경제, 사회 위기<br>
 +
-17세기의 위기: 혁명과 전쟁<br>
 +
위기에 대한 대응: 절대주의의 실천<br>
 +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br>
 +
-중부유럽과 동유럽의 절대주의<br>
 +
영국과 입헌군주제<br>
 +
-왕과 의회의 충돌<br>
 +
-내전과 연방<br>
 +
-왕정복고와 명예혁명<br>
 +
유럽 문화의 융성<br>
 +
-미술: 바로크<br>
 +
-미술: 네덜란드 사실주의<br>
 +
-영국 문학의 황금시대<br>
  
14 새로운 만남: 세계시장의 탄생 390
+
16 이슬람 제국<br>
탐험과 확장의 시대 391
+
오스만투르크 제국<br>
이슬람과 향신료 무역 391
+
-오스만투르크의 부상<br>
서아프리카의 이슬람 전파 391
+
-제국의 확장<br>
새로운 참가자: 유럽 393
+
-전쟁 양상의 변화<br>
해양제국 포르투갈 396
+
-투르크 지배의 본질<br>
인도의 포르투갈인들 386
+
-오스만 투르크의 종교와 사회<br>
향신료 탐색 396
+
-오스만 투르크의 쇠퇴<br>
새로운 경쟁자들의 출현 397
+
-오스만 투르크의 미술<br>
“신세계” 정복 398
+
사파비조(Safavids)<br>
항해 398
+
-사파비조의 부상<br>
정복 398
+
-왕조의 몰락<br>
제국의 통치 400
+
-사파비조의 정치와 사회<br>
영화와 역사
+
-사파비조의 미술과 문학<br>
미션(1986) 402
+
무굴 제국의 위엄<br>
경쟁의 격화 403
+
-바부르(Babur): 무굴제국의 시조<br>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영웅인가, 악당인가? 404
+
-악바르와 인도-이슬람 문명<br>
비교 읽기
+
-악바르의 후계자들<br>
콜럼부스의 교환 405
+
-인도에서 나타난 유럽 세력의 영향<br>
과도기 아프리카 406
+
-후글리 항구의 점령<br>
아프리카의 포르투갈 406
+
-무굴 제국: “화약의 제국?”<br>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 406
+
-무굴 제국 하의 사회: 문화의 통합<br>
노예무역 406
+
-무굴 제국의 문화<br>
변화하는 대륙의 정치, 사회구조 412
+
향신료 무역 시대의 동남아시아 413
+
서양의 도래 413
+
반대 관점
+
문명의 행진 414
+
식민지 시대 이전 동남아시아의 국가와 사회 415
+
반대 관점
+
국왕 서신의 교환 416
+
장별 요약/연대표/복습/권장도서 419
+
  
15 유럽의 변신: 종교개혁과 국가 건설 422
+
17 동아시아 세계<br>
16세기의 종교개혁 423
+
절정에 다다른 중국<br>
종교개혁의 배경 423
+
-명나라에서 청나라까지<br>
마르틴 루터와 독일의 종교개혁 425
+
-청나라의 위대함<br>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전파 427
+
변화하는 중국<br>
반대 관점
+
-인구 폭발<br>
종교개혁 논쟁: 마르부르크 분쟁 430
+
-산업화의 씨앗<br>
가톨릭의 종교개혁 430
+
-인구폭발<br>
비교 읽기
+
-청나라의 일상<br>
초기 근대 세계의 결혼 431
+
-문화 발전<br>
위기의 유럽(1560-1650) 433
+
도쿠가와 일본<br>
16세기의 정치와 종교 전쟁 434
+
-3 명의 위대한 천하인<br>
경제, 사회 위기 436
+
-서양에 대한 문호 개방<br>
17세기의 위기: 혁명과 전쟁 438
+
-도쿠가와의 “위대한 평화”<br>
위기에 대한 대응: 절대주의의 실천 439
+
-촌락의 삶<br>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 440
+
-도쿠가와의 문화<br>
중부유럽과 동유럽의 절대주의 441
+
한국과 베트남<br>
영국과 입헌군주제 442
+
-한국: 위험한 이웃<br>
왕과 의회의 충돌 442
+
-베트남: 제국의 위험<br>
내전과 연방 443
+
왕정복고와 명예혁명 444
+
유럽 문화의 융성 444
+
미술: 바로크 445
+
미술: 네덜란드 사실주의 446
+
영국 문학의 황금시대 447
+
장별 요약/연대표/복습/권장도서 448
+
  
16 이슬람 제국 450
+
18 신세계질서를 목전에 둔 서양<br>
오스만투르크 제국 451
+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을 향하여: 서양의 지적 혁명<br>
오스만투르크의 부상 451
+
-과학혁명<br>
제국의 확장 451
+
-계몽주의의 배경<br>
비교 읽기
+
-프랑스 계몽사상가들과 그 사상<br>
전쟁 양상의 변화 451
+
-과학혁명<br>
투르크 지배의 본질 455
+
-계몽시대의 문화<br>
오스만 투르크의 종교와 사회 457
+
-경제 변화와 사회질서<br>
오스만 투르크의 쇠퇴 458
+
-새로운 경제 질서<br>
오스만 투르크의 미술 458
+
-18세기의 유럽 사회<br>
사파비조(Safavids) 461
+
-아메리카의 식민제국과 혁명<br>
사파비조의 부상 461
+
-서인도 제도<br>
왕조의 몰락 461
+
-영국령 북아메리카<br>
사파비조의 정치와 사회 461
+
-프랑스령 북아메리카<br>
사파비조의 미술과 문학 462
+
-미국 독립 혁명<br>
무굴 제국의 위엄 464
+
새로운 정치질서와 세계 분쟁을 향하여<br>
바부르(Babur): 무굴제국의 시조 464
+
-프로이센: 군대와 관료제<br>
악바르와 인도-이슬람 문명 465
+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제국<br>
악바르의 후계자들 466
+
-예카테리나 여제 치하의 러시아<br>
인도에서 나타난 유럽 세력의 영향 470
+
-재고되는 계몽절대주의<br>
반대 관점
+
-변화하는 전쟁의 양상: 세계적 대립<br>
후글리 항구의 점령 471
+
프랑스 혁명<br>
무굴 제국: “화약의 제국?” 473
+
-프랑스혁명의 배경<br>
무굴 제국 하의 사회: 문화의 통합 483
+
-삼부회의에서 국민의회로<br>
무굴 제국의 문화 475
+
-마리 앙투아네트(2006)<br>
장별 요약/연대표/복습/권장도서 477
+
-구체제의 파멸<br>
 +
-프랑스 민중의 자연권: 두 가지 관점<br>
 +
-급진적 혁명<br>
 +
-반동과 집정부<br>
 +
나폴레옹 시대<br>
 +
-나폴레옹의 부상<br>
 +
-국내 정치<br>
 +
-나폴레옹 제국<br>
  
17 동아시아 세계 479
+
-장별 요약/연대표/복습/권장도서<br>
절정에 다다른 중국 480
+
명나라에서 청나라까지 480
+
청나라의 위대함 482
+
변화하는 중국 486
+
인구 폭발 486
+
산업화의 씨앗 486
+
비교 읽기
+
인구폭발 488
+
청나라의 일상 489
+
문화 발전 491
+
도쿠가와 일본 493
+
3 명의 위대한 천하인 493
+
서양에 대한 문호 개방 493
+
도쿠가와의 “위대한 평화” 496
+
촌락의 삶 498
+
도쿠가와의 문화 500
+
한국과 베트남 503
+
한국: 위험한 이웃 503
+
베트남: 제국의 위험 504
+
장별 요약/연대표/복습/권장도서 505
+
 
+
18 신세계질서를 목전에 둔 서양 508
+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을 향하여: 서양의 지적 혁명 509
+
과학혁명 509
+
계몽주의의 배경 511
+
프랑스 계몽사상가들과 그 사상  511
+
비교 읽기
+
과학혁명 512
+
계몽시대의 문화 516
+
경제 변화와 사회질서 518
+
새로운 경제 질서 518
+
18세기의 유럽 사회 518
+
아메리카의 식민제국과 혁명 520
+
서인도 제도 520
+
영국령 북아메리카 520
+
프랑스령 북아메리카 521
+
미국 독립 혁명 521
+
새로운 정치질서와 세계 분쟁을 향하여  522
+
프로이센: 군대와 관료제        522
+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제국 523
+
예카테리나 여제 치하의 러시아   523
+
재고되는 계몽절대주의           524
+
변화하는 전쟁의 양상: 세계적 대립 524
+
프랑스 혁명 525
+
프랑스혁명의 배경 526
+
삼부회의에서 국민의회로 526
+
영화와 역사
+
마리 앙투아네트(2006)   527
+
구체제의 파멸 528
+
반대 관점
+
프랑스 민중의 자연권: 두 가지 관점 528
+
급진적 혁명 530
+
반동과 집정부 533
+
나폴레옹 시대 533
+
나폴레옹의 부상 533
+
국내 정치 534
+
나폴레옹 제국 535
+
 
+
장별 요약/연대표/복습/권장도서 537
+
용어사전 540
+
지도 크레디트 552
+
장별 노트 553
+
찾아보기 557
+
1단원 초기부터 1861년까지<br>
+
 
+
1장 새로운 사회의 기원, 1754년까지<br>
+
1과 대서양 세계<br>
+
2과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유럽의 식민화<br>
+
3과 아메리카 식민지들의 성장<br>
+
 
+
2장 자유와 질서의 균형 맞추기, 1753-1820<br>
+
1과 독립으로 가는 길<br>
+
2과 미합중국 헌법<br>
+
3과 미국 정치의 기원<br>
+
 
+
3장 새로운 국가의 등장, 1783-1861<br>
+
1과 새로운 국가에서의 삶<br>
+
2과 시장혁명<br>
+
3과 종교와 개혁<br>
+
4과 남북전쟁의 서막<br>
+
 
+
2단원: 강력한 국가의 건설, 1850-1915<br>
+
 
+
4장 남북전쟁, 1861-1865<br>
+
1과 불런(Bull Run) 전투에서 앤티텀(Antietam)운하 전투까지<br>
+
2과 전선 뒤의 생활<br>
+
3과 전세가 역전되다<br>
+
4과 전쟁의 폐해와 새로운 자유<br>
+
+
5장 재건시대, 1865-1877<br>
+
1과 대통령이 주도한 재건<br>
+
2과 의회가 주도한 재건<br>
+
3과 “새로운 남부”의 탄생<br>
+
4과 재건시대의 종료<br>
+
 
+
6장 미국 산업의 팽창, 1850-1900<br>
+
1과 기술혁명<br>
+
2과 대기업의 성장<br>
+
3과 산업화와 노동자들<br>
+
4과 대파업<br>
+
 
+
7장 서부를 향하여, 1860-1900<br>
+
1과 서부 이주<br>
+
2과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충돌<br>
+
3과 광업, 목축업, 농업<br>
+
4과 대중주의(populism)<br>
+
 
+
8장 정치, 이민, 도시생활, 1870-1915<br>
+
1과 대호황기(Gilded Age)의 정치<br>
+
2과 이주하는 사람들<br>
+
3과 도시의 도전<br>
+
4과 개혁의 위한 계획들<br>
+
 
+
9장 20세기 전환기의 생활, 1870-1915<br>
+
1과 교육의 확대<br>
+
2과 새로운 형태의 오락<br>
+
3과 짐 크로우(Jim Crow)의 세계<br>
+
4과 여성의 역할의 변화<br>
+
 
+
3단원: 변화에 직면한 미국, 1890-1920<br>
+
 
+
10장 세계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다, 1890-1915<br>
+
1과 팽창을 향한 압력<br>
+
2과 스페인-미국전쟁<br>
+
3과 새로운 대외정책<br>
+
4과 미국의 새로운 역할에 대한 논쟁<br>
+
 
+
11장 진보주의 개혁시대, 1890-1920<br>
+
1과 진보주의의 기원<br>
+
2과 진보주의 입법<br>
+
3과 태프트와 윌슨 시대의 진보주의<br>
+
4과 여성이 마침내 선거권을 획득하다<br>
+
 
+
12장 제1차 세계대전 시기, 1914-1920<br>
+
1과 전쟁으로 가는 길<br>
+
2과 미국이 참전을 선언하다<br>
+
3과 유럽 전선의 미국인들<br>
+
4과 국내 전선의 미국인들<br>
+
5과 세계평화의 중재자<br>
+
+
4단원 번영의 시대에서 고난의 시대로, 1920-1941<br>
+
 
+
13장 전후 사회의 변화, 1920-1929<br>
+
1과 1920년대의 사회<br>
+
2과 대중매체와 재즈의 시대<br>
+
3과 문화충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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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정치와 번영, 1920-1929<br>
+
1과 공화당이 주도한 10년<br>
+
2과 기업의 번창<br>
+
3과 1920년대 말의 경제<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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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증권시장 대폭락과 대공황, 1929-1933<br>
+
1과 주식시장 대폭락<br>
+
2과 대공황의 사회적 영향<br>
+
3과 대공황을 견뎌내기<br>
+
4과 1932년 선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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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뉴딜정책, 1933-1941<br>
+
1과 뉴딜정책의 형성<br>
+
2과 뉴딜정책에 대한 비판가들<br>
+
3과 뉴딜정책의 마지막 날들<br>
+
 
+
5단원 열전과 냉전, 1931-1960<br>
+
 
+
17장 제2차 세계대전: 전쟁으로 가는 길, 1931-1941 <br>
+
1과 독재자들의 등장<br>
+
2과 유럽이 전쟁에 돌입하다<br>
+
3과 일본이 제국을 세우다<br>
+
4과 고립주의에서 참전으로<br>
+
 
+
18장 제2차 세계대전: 미국의 참전, 1941-1945<br>
+
1과 전시동원<br>
+
2과 유럽의 회복<br>
+
3과 홀로코스트<br>
+
4과 태평양 전쟁<br>
+
5과 전쟁의 사회적 영향<br>
+
 
+
19장 냉전, 1945-1960<br>
+
1과 냉전의 기원<br>
+
2과 냉전이 뜨거워지다<br>
+
3과 한국전쟁<br>
+
4과 지속되는 냉전<br>
+
 
+
20장 전후 국내 사정, 1945-1960<br>
+
1과 전후 경제<br>
+
2과 1950년대의 분위기<br>
+
3과 국내 정치와 정책<br>
+
 
+
6단원 혼돈과 변화의 시대, 1950-1975<br>
+
 
+
21장 민권운동, 1950-1968<br>
+
1과 민권에 대한 요구<br>
+
2과 지도자와 전략<br>
+
3과 투쟁이 격화되다<br>
+
4과 정치권의 반응<br>
+
5과 민권운동이 새로운 전환을 이루다<br>
+
 
+
22장 케네디와 존슨의 시대, 1961-1969<br>
+
1과 뉴프런티어<br>
+
2과 위대한 사회<br>
+
3과 1960년대 초의 대외정책<br>
+
 
+
23장 행동주의 시대, 1960-1975<br>
+
1과 여성운동<br>
+
2과 소수인종이 평등권을 추구하다<br>
+
3과 대항문화(counterculture)<br>
+
4과 환경운동과 소비자운동<br>
+
 
+
24장 베트남 전쟁, 1954-1975<br>
+
1과 전쟁의 전개<br>
+
2과 전쟁터의 상황<br>
+
3과 정치권의 분열<br>
+
4과 전쟁의 종식<br>
+
 
+
7단원: 지속성과 변화, 1969년부터 오늘날까지<br>
+
 
+
25장 닉슨, 포드, 카터의 시대, 1969-1981<br>
+
1과 닉슨의 국내정책<br>
+
2과 닉슨의 대외정책<br>
+
3과 워터게이트 사건<br>
+
4과 포드 행정부<br>
+
5과 카터 행정부<br>
+
 
+
26장 보수주의 혁명, 1980-1992<br>
+
1과 신보수주의의 뿌리<br>
+
2과 레이건의 혁명<br>
+
3과 레이건의 2차 임기<br>
+
4과 조지 H. W. 부시 대통령<br>
+
 
+
27장 새 시대가 열리다, 1992년부터 오늘날까지<br>
+
1과 최근의 정치경향<br>
+
2과 새로운 세계 속의 미국<br>
+
3과 새천년기의 미국인들<br>
+
 
+
<참고자료><br>
+
-미국 문학<br>
+
-미국사의 문서자료<br>
+
-지도와 도표 자료<br>
+
-주요 대법원 판례<br>
+
 
-용어사전<br>
 
-용어사전<br>
-용어사전(스페인어)<br>
+
-지도 크레디트<br>
-인명사전<br>
+
-장별 노트<br>
-색인<br>
+
-찾아보기
-도움을 주신 분들 / 인용자료 목록<br>
+
  
==2. 한국관련 내용==
+
==2. 한국 관련 내용==
 +
'''p. 271'''<br>
 +
수나라 중(中)<br>
 +
수 황제는 압제적인 통치자였고, 막대한 군사비 지출로 불안이 퍼져나갔다. 618년 한국 정벌이 실패로 끝나고 돌아온 후 황제는 궁전에서 살해되었다.<br>
  
'''p. 353'''<br>
+
'''p. 289''' <br>
지도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에서의 영향권이 그려져 있다. 한국은 일본의 영향권으로 표시되어 있다.]<br>
+
명나라 중(中)<br>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음<br>
+
한국의 이씨 왕조와 조공관계를 수립했다.<br>
  
심화학습: 세계사적 사건들<br>
+
'''pp. 301-302'''<br>
청일전쟁: 1868년의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개혁과 근대화의 시기에 들어섰고 제국주의 세력의 하나로 성장했다. (아래 좌측의 지도 참조) 일분은 서구의 군사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선진적인 산업경제를 발전시켰으며 심지어 그들이 정치체제를 서구화하기 까지 하였다. 일본이 경제적, 사회적, 군사적으로 팽0창하면서 민족주의의 부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1894년 8월, 조선에 대한 청과 일본의 갈등은 청일전쟁으로 비화하였다. 일본의 더 현대적인 군대는 쉽게 청의 대규모 군사력을 격퇴시켰다. 그 결과로 청은 타이완과 다른 지역을 일본에 할양했고 이로인해 일본이 세계 주요 열강의 지위를 얻게 되는 신호가 되었다.<br>  
+
동아시아의 주변지역: 초기 일본, 한국, 베트남<br>
  
'''p. 362'''<br>
+
비판적 사고<br>
미국의 해외 개입<br>
+
중국 문명이 일본, 한국, 베트남의 초기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br>
[미국이 해외 문제에 개입한 내용 들이 연도와 함께 간단히 언급된다.]<br>
+
1950 북한이 남한을 침입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미군에게 남한을 방어하도록 명령한다.<br>
+
  
'''pp. 368-369'''<br>
+
<전략> 한반도에는 후기신석기사회가 이미 몇 세기 전부터 발전을 시작했다.<br>  
평화중재자 루즈벨트<br>
+
이러한 초기 농경 사회는 모두 궁극적으로 거대한 이웃인 중국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 베트남은 수천 년 동안 중국의 지배 아래 있었고, 한국은 독립 국가였지만 오랫동안 중국에 조공을 바쳤으며, 많은 방면에서 중국의 문화적 선례를 따랐다.<br>
아시아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의 주요 관심은 중국의 무역개방을 지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과 러시아간의 점증하는 갈등은 아시아의 안보에 위협이 되었다. 이런 분쟁은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일본의 군사력이 러시아를 능가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침내 결정적인 해전에서의 승리 후에 일본은 평화회담을 요청했다.<br>
+
<후략><br>
그러는 동안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의 팽창하는 군사력에 대해 점점 더 염려하게 되었다. 일분은 청일전쟁에서 십 년 전에 중국을 물리쳤고, 그 후로 더 강력하게 성장했다. 그는 또한 캘리포니아에서 제안되고 있던 정책들의 결과가 빚어낼 잠재적인 문제들을 인식하고 있었는데 그 정책들은 일본의 이민자들을 차별하여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친구인 상원의원 헨리 캐벗 롯지(Henry Cabot Lodge)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즈벨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br>
+
  
“나는 우리가 우리 국민들을 한편으로는 관재한 정의와 진정한 예의를 가지고 일본을 대하도록,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군력을 숫자에 있어서나 부대의 효율성에 있어서 상당한 수준으로 유지하도록 설득하기를 희망한다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일본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일세.<br>
+
'''p. 302''' <br>
씨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1905년 6월<br>
+
지도 11.1 초기 일본<br>
 +
일본해(동해) - 일본해와 동해가 병기되어 있음<br>
  
2개월 후, 1905년에 루즈벨트는 러일전쟁의 평화조약을 중재했다. 그는 두 나라의 사절단을 뉴햄프셔주의 포츠머스로 초청해서 막대한 금액의 지불보다 소규모 영토의 할양과 한국에 대한 통제권에 만족하도록 설득했다. 그는 또한 러시아로부터 만주에서 철수하도록 약속을 받아내었는데 당시 만주는 중국의 영토의 일부로 남아있었다. 루즈벨트는 중국의 무역이 모든 나라에 개방된 상태로 유지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중재자로서의 역할로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br>
+
'''p. 305 지도''' <br>
 +
11.2 일본과 중국, 한국의 관계<br>
 +
일본해(동해) - 일본해와 동해가 병기되어 있음<br>
  
'''p. 581'''<br>
+
'''pp. 317-319'''<br>
중국과 전쟁을 벌이고(1894-95) 러시아와도 싸워(1904-1905) 일본은 동아시아에서의 그 영향권을 확대했다. 일본은 조선(Korea)을 병합하고 중국 북부 만주지역에 군대를 주둔시켜 상당한 세력을 확보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일본은 동아시아의 최강국이었고 세계열강의 하나로 성장했다.<br>
+
한국: 동방의 가교<br>
 +
핵심 질문: 초기 한국의 경제적, 사회적 생활상에서 핵심적인 특징은 무엇인가?<br>
 +
중국 주변의 사회 중 한국만큼 중국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사회는 거의 없다. 하지만 중국과 한국의 관계는 긴장과 분쟁으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한국 사람들은 중국의 국수주의와 오만에 분개한 적도 종종 있다.<br>
 +
[318]
 +
이러한 태도의 생생한 사례가 근년에 있었다. 양국 관료와 역사가들은 목소리를 높여서 한국의 초기 역사에 대한 상이한 해석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미네소타 주보다 약간 큰 한반도는 아마도 알타이어를 사용하며, 어업과 사냥을 하는 부족들이 신석기 시대에 이웃 만주에서부터 이주하여 처음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이 상대적으로 산악지대이기 때문에(한반도의 약 1/5 정도만이 경작에 적합하다) 농업은 약 기원전 2000년이 되어서야 행해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조직화된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br>
 +
한중 양국의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 시기이다. 2004년 중국 당국은 고구려(37 BCE-668 CE)로 알려진 이 지역 최초의 왕국이 만주의 넓은 지역과 한반도 북부를 지배했으며, 그러므로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한국의 학자들은 전설과 산재한 역사적 증거에 근거하여 고조선(Gojoseon, goh-joh-SHAWN)으로 알려진,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왕국은 한국인 지배자 단군(Dangun, dan-GOON)에 의해 기원전 2333년에 세워졌으며, 그 구성원이 한국인들이라고 반박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동북아시아에서 청동기 시대가 진행 중이던 때는 바로 이 시기였다.<br>
 +
이 문제로 여전히 격론이 진행 중이지만,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원전 109년,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후 수 세대 동안, 이 지역은 한나라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중국의 주에 분할 편입되어, 중국의 제도가 도입되었다. 3세기 한나라의 쇠퇴와 함께, 통치권은 점차 지역 지도자들에게 넘어갔고, 이들은 중국 관료들을 쫓아냈지만 여전히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결국 한반도에는 세 개의 왕국이 생겨났다. 북쪽의 고구려, 서남부의 백제, 동남부의 신라였다. 비슷한 시기에 야마토 평원에 나라를 세운 일본이 남부 해안에 작은 식민지를 건설했을지도 모른다.<br>
  
'''p. 634'''<br>
+
'''p. 318 지도 한국의 삼국'''<br>
미국의 사건/ 세계의 사건 연표<br>
+
일본해(동해) - 동해가 일본해와 병기되어 있음<br>
1950 한국전쟁이 시작되다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가 반공 운동을 시작하다.<br>
+
  
'''p. 638'''<br>
+
삼국시대<br>
주목할 만한 대통령들 – 해리 S. 트루먼<br>
+
4세기에서 7세기 까지, 사국은 한반도의 영향력과 영토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다. 동시에 삼국 모두 중국의 정치 및 문화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영향력은 고구려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났다. 4세기 후반 불교가 도입됐고, 한반도 최초의 사원이 평양에 세워졌다. 또한 삼국은 모두 한나라의 멸망 이후 중국 대륙에 나타난 나라들 중 하나와 조공 관계를 받아들였다. 신라는 다른 두 나라에 비해 중국의 영향에 덜 노출된 왕국으로 처음에는 삼국 중 가장 약했으나 결국 더 강력한 내부 응집력(아마도 지역 부족의 전통적인 끈기의 결과) 덕택에 한반도를 평정하게 되었다. 그 후 신라의 통치자들은 압록강 일대를 제외하고 한반도에서 중국을 몰아내었다. [319] 거만한 중국인들을 달래기 위해 신라는 당나라의 조공국 지위를 받아들였다. 이 기간에 신라는 한반도 남부에 남아 있던 일본 식민지들을 척결했다.<br>
부통령이었던 트루먼이 FDR의 죽음으로 1945년 갑자기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을 그는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기자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의 책상에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라고 쓴 팻말을 책상위에 올려놓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낸 일본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 트루먼 독트린, 베를린 공수, 한국 파병, 군대 통합, 인권 개혁안 입법 등에 책임을 졌다. 그가 재선에 성공한 것은 당시 정치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고 공정정책(Fair Deal)를 통한 개혁은 양당 모두로부터 결국 지지를 받게 되었다. 오늘날 트루먼은 평범하지 않았던 도전에 상당히 성공적으로 맞섰던 평범한 사람이라고 불려진다.<br>
+
처음으로 삼국을 통일했을 , 신라의 통치자들은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중국의 정치제도와 이념을 이용하고자 했다. 대중의 인기를 얻던 불교는 국교가 되었고, 한국의 승려들은 동시대 일본의 승려들처럼 중국으로 순례 길에 올랐다. 중국식 건축과 미술은 경주와 다른 도시를 가득 메웠고, 한자는 법조문서의 공식 문자가 되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한반도 동남부를 다스려왔던 강력한 귀족 가문들이 여전히 궁정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들은 당나라의 과거제도 도입을 막고, 빈곤층에 대한 농지 분배를 거부할 수 있었다. 중국식 모델 도입의 실패는 치명적이었다. 귀족 가문 사이의 분쟁이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780년 왕이 암살당하자 내전이 발발했다.<br>
  
'''p. 652'''<br>
+
'''p. 318'''<br>
3과 한국전쟁<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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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석굴암 불상<br>
학습목표<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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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불상(Sokkuram Buddha)<br>  
-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팽창이 어떻게 한국전쟁의 배경이 되었는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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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인도에서 다른 아시아 지역으로 퍼져나갈 때 인간 형태의 불상도 궤를 같이 했다. 1세기부터, 불상은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흐르는 듯한 주름이 특징인 일부 초기 조각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에 인도로 유입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반영한다. 다른 불상들은 인도 전통의 남성 토지신의 영향을 받아 어깨가 넓고 눈이 빛난다. 굽타 시대 예술가들은 영적, 육체적 완벽을 추구하는 인도의 이상을 강조했다.<br>
- 한국전쟁의 참전국은 어디인가, 그리고 전쟁의 삼 단계는 어떻게 되는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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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실크로드를 따라 퍼져나가면서 불상은 페르시아, 중국 그리고 종국에는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영향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사진의 불상은 8세기 석굴암 불상으로 신라가 만든 것이다. 인근 언덕의 암석들이 너무 단단하여 중국이나 인도의 동굴 사원과 유사한 구조를 건축하지 못한 한국의 건축자들은 화강암 석재로 작은 돔 모양의 동굴을 꾸미고, 목조 베란다로 장식했다. 오늘날 순례자들은 가파른 언덕을 올라 아시아에서 손꼽힐 만큼 훌륭한 이 강력하고, 평온한 부처에게 경배를 드린다. <br>
- 한국전쟁의 영향은 무엇인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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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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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319''' <br>
남한을 침공한 북한군을 물어내기 위해 미국과 유엔군은 3년간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해 싸웠다. 그 결과로 전쟁 전의 남북한의 경계선이 회복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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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불국사 종탑<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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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종탑(Pulguksa Bell Towe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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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적 성취로 신라의 고도인 경주 인근의 불국사를 꼽을 수 있다. 8세기에 건축된 이 사찰의 종탑은 아름다운 정원 한가운데에는 사진의 종탑이 자리 잡고 있다. 1966년 불국사 근처의 석탑에서 고문서 하나가 발견되었다. 8세기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고문서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로 여겨지고 있다.<br>
  
핵심용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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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319'''<br>
38도선, 한국전쟁,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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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부상<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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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초반, 고려(Koryo, KAWR-yoh)(오늘날 한국의 영문명의 유래가 되었다)라는 새로운 왕조가 북쪽에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왕국은 국력을 강화하고 영토를 통일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중국의 정치제도를 받아들였다. 과거제도가 958년 도입되었지만 일본에서처럼 관료제는 강한 귀족 가문들의 지배가 이어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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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침략을 막아내며, 400년간 명맥을 이었다. 이웃 중국에 강력한 왕조가 부재한 덕이 컸다. 고려 시대 한반도의 산업과 상업은 점진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중국과 마찬가지로 농업이 부의 주요 원천이었다. 원칙적으로 모든 토지는 왕의 소유였지만, 사실상 귀족 가문이 자신의 토지를 다스렸다. 토지는 농민들이 경작했는데, 이들에게는 유럽의 농노와 유사한 부담이 지워져 있었다. 사회의 최하층에는 천민계층이 있었다. 이들은 노비, 장인과 다른 특수한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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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관점에서 고려 시대는 괄목할 만한 성취가 있었던 시대이다. 정토종과 선종 등 중국에서 도입된 종파들이 운영하는 불교 사찰이 커다란 지역을 지배했고, 승려들은 왕의 고문이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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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불교적 주제가 한국의 미술과 조각을 지배했으며, 대장경 전체가 목판으로 인쇄되었다. 하지만 후에는 산수가 회화와 도자기에 등장하며 유교적 주제가 지배적이 되었다. <br>
  
학습주안점<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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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320'''<br>
- 원인과 결과를 찾아내기: 아래 표를 옮겨 그리고. 이번 과를 학습하면서 한국 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채워 넣으시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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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치하<br>
- 원인: 중국이 공산주의에 넘어가다;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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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 트루먼이 공산주의의 팽창을 끝내기로 결심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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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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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신라처럼, 고려도 귀족의 세력과 탄탄한 조세기반의 부재를 극복하지 못했다. 13세기 들어 몽골이 고려의 북방을 점령하고 이를 원나라에 편입시켰다. 약화된 고려는 대도 (大都, Khanbaliq)의 대칸에게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었다. <br>
한국전쟁은 때때로 미국의 잊힌 전쟁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한국에서 싸운 군인들은 한국전쟁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1950년 6월 미군은 대규모로 침략한 공산군을 다시 밀어붙이기 위해 싸웠다. 하니 미군 해병대원은 치열했던 전투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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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통치 시대는 한국인들에게 격심한 고통을 안겨 주었다. 특히 수천의 농민과 장인들은 쿠빌라이 칸의 일본 정벌 준비를 위한 조선 작업에 강제로 징집되어 노동을 해야 했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몽골은 중국과 그 너머 세계의 수많은 새로운 사상과 기술을 전파했다. 고려는 살아남을 수는 있었지만, 몽골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했고, 몽골의 세력이 쇠퇴하자 고려도 함께 쇠락했다. 중국에서 명나라의 세력이 떠오르자 고려는 무너졌고 권력은 장군 이성계의 손에 들어갔다. 이성계(Yi Song Gye[YEE song gye])는 1392년 새로운 이씨 왕조(Yi Dynasty)를 건국했다. 다시 한 번 한국인들은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게 되었다.<br>
  
“강 건너 편으로 북한군을 밀어내기 위해 우리는 능선 너머로 그들을 몰아붙여야 했다. 오르막길을 바로 올라가야 했다. 우리를 가려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관총, 박격포, 수류탄이 쏟아지고 있었다. 뿜어져 나오는 화염은 너무나 끔찍했다. 적들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쏟아 부었다. 전우들이 사방에서 욕을 하며 비명을 지르며 쓰려져 가고 있었다.” - 아놀드 윈터(Arnold Winte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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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493'''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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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일본 중(中)<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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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열도의 다이묘 대부분에게 자신의 권위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고 국가 통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훗날 실패로 돌아간 아시아 본토 통치를 위해 한국을 침략했다. (뒤의 “한국: 위험한 이웃”을 참조)<br>
  
1950년 말에 양 진영은 밀리지 않기 위해 참호를 팠다. 보병이었던 톰 클로슨(Tom Clawson)은 훗날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잘 깨닫지 못했지만 내가 한국에 도착해보니 더 이상 전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진지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진지전”이 어떤 것인지 설명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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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494'''<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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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도쿠가와 일본<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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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한국  서울<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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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동해) - 동해가 일본해와 병기되어 있음.<br>
  
“당신은 매일 여러 시간 당신의 진지를 강화하기 위해 개인호와 참호와 벙커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너무 잘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만간 다른 진지로 옮겨가게 되기 때문이다. 매번 순찰을 하고 나서 다시 처음 있던 곳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날이 온다. 되돌아 와서 새로운 진지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모든 진지가 결국은 같은 능선 위에 있다.” - 톰 클로슨(Tom Clawson)<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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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497'''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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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표 근대 초기의 일본과 한국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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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표음 문자 15세기<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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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당도한 포르투갈 상인들 1543<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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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당도한 프란시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 1549<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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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의 통치 1568-1582<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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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점령 1568<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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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치 1582-1598<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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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기독교 금지령 1587<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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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국 침략 1592<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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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의 죽음과 일본군의 철수 1598<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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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통치 1598-1616<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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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막부의 창설 1603<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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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교역을 허가 받은 네덜란드 상인들 1609<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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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선교사 추방령 1612<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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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충성서약을 한 한국의 이씨 왕조 1630년대<br>
  
한국에서의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영광도 베트남 전쟁과 같은 시련도 없었지만 미국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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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502''' <br>
미군 병사들이 한국 전쟁 기간 참호를 파고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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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미술 (中)<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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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자기 장인들은 훌륭한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한국에서 기술과 디자인을 모두 빌려왔다.<br>
  
'''p. 653'''<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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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 503-504''' <br>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팽창<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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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베트남<br>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유럽에서의 공산주의 위협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을 때 냉전을 “뜨거운” 군사적인 대치로 타오르게 하는 중요한 사건들이 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무장 충돌의 기원은 중국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전개된 중국과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에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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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질문: 시기 한국의 발전상은 중국과 일본의 상황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가? 베트남 문명의 고유한 측면은 무엇인가?<br>
  
중국 내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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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험한 이웃<br>
이미 학습한바 있듯이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해외 열강들은 중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중국 영토의 일부를 차지했다. 일본도 그러한 열강 중 하나였다. 또 다른 세력은 독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 연합국은 이전에 독일의 영토였던 곳을 일본에게 넘겨주었다. 1919년 중국인들이 중국이 더 강력하고 더 독립적인 나라가 되기를 바라며 시위를 벌였다. 어떤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요구했다. 다른 사람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결과에 깊은 인상을 받고 공산주의가 강력한 나라를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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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막부 치하의 일본이 고유의 특징을 지닌 독특한 사회를 만들어가며 중국 제국의 그림자에서 꾸준히 벗어나고 있을 무렵 한국의 이씨 왕조(Yi Dynasty)는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중국의 모델을 계속하여 따르고 있었다. 이씨 왕조는 14세기 말엽 장군 이성계(Yi Song Gye[YEE song gye])가 건국하였고, 즉각 명나라와 가까운 정치적, 문화적 관계를 수립했다. 한반도 중심부의 한강 유역에 위치한 서울을 새로운 수도로 삼은 이씨 왕조는 강력한 이웃인 중국과의 조공관계를 수용하고 중국의 제도와 가치관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였다. 중국에서처럼 과거제도가 관료 후보생들의 유교 고전에 대한 지식을 평가하는 수단이 되었고 성공은 출세로 나아가는 필수적인 단계로 여겨졌다.<br>
1920년대 중반에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은 중국 북부에서 세력을 얻었고 베이징을 점령했다. 그러는 동안 공산당은 상해 인근 지역을 장악했다. 1927년 장제스는 공산당과 그들의 지지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하고 중국 내전이 시작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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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차이점도 있었다. 일본처럼 조선도 귀족 계층인 소위 양반 계층으로의 진입을 계속 제한했다. 동시에 농민들은 여전히 농노와 비슷한 처지였으며, 국가 소유의 토지나 엘리트 계층의 영지에서 일했다. 천민으로 불린 노예계층은 정부의 농장이나 백정이나 광대 같은 특정 직업군에서 일했으며, 다른 집단의 지위 아래에 있다고 간주되었다.<br>
공산당은 마오쩌둥이 이끌었다. 그는 동국 남동부지역에서 땅을 농민들에게 재분배하고 교육과 의료혜택을 제공해서 공산주의의 대의명분에 대한 지지를 얻었다. 1934년 마오쩌둥과 그의 지지자들은 장제스의 공격 때문에 후퇴하게 되었다. 대장정을 마치고 마오쩌둥은 중국 북부에서 그의 세력을 재구축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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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한국 사회는 중국 정통성에서 벗어나는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15세기 한국의 구어(한글)를 적기 위한 표음문자가 창제되었다. 처음에는 양반계층의 경멸을 받고, 교육용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결국에는 사적 서신이나 대중 소설을 위한 매체가 되었다. 동시에 경제 부문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농업생산성이 향상되어 인구 증가와 소규모 도시 산업과 상업 부문도 등장했다. 사회적으로는 양반 계층의 오랜 지배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양반 계층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권력과 영향력은 오히려 약화되었고, 이에 따라 일부 양반들은 상인이 되거나 농민 계층으로 유입되어 귀족과 평민 사이의 구분이 흐릿해져갔다.<br>
2과에서 학습했듯이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협력해야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중국 내전은 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국민당은 강압적인 통치와 고율의 세금과 부패 때문에 지지를 잃었다. 마오쩌둥은 군사적인 승리 뿐 만 아니라 토지개혁과 평등한 사회에 대한 약속으로 지지를 얻어 1949년 중국을 장악했다.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패주했고 거기서 그들이 여전히 중국의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라고 주장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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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씨 왕조는 이웃국가로부터의 홀로서기에 지속적인 어려움을 맞이했다. 16세기 중 많은 시기에, 주된 위협은 북쪽에서 비롯되었다. 만주 지역의 세력이 압록강 바로 남쪽의 한국 영토(p. 494 지도 17.3 참조)를 괴롭혔다. 하지만 1580년대에 이르러, 더 큰 위협이 동쪽에서 다가왔다. 새롭게 통일된 일본이었다. 16세기 중 많은 시간 동안 일본의 다이묘는 오랜 내전에 휘말려 왔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열도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화하기 위해 투쟁을 벌였다. 셋 중 히데요시만이 바다 건너 제국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그는 평민으로 태어났지만, 장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고, 1580년대 후반에 명나라를 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p. 504 박스글 참조) 한국 왕 선조(1567-1608) 는 히데요시의 동맹 제안을 거절했고, 1592년 일본은 한반도를 침공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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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일본의 계획이 잘 진행되었다. 일본군은 한국의 지방을 초토화하며, 한국의 수도 서울로 진격했다. 하지만 한국은 결국 침략군의 다루기 힘든 상륙선을 파괴할 수 있는 빠른 중장갑함을 개발한 이순신 장군(1545-1598)의 탁월한 지휘 하에 반격을 가하여 독립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은 오래 가지 못했다. 1630년대에 이르러 만주족이 북방국경에서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만주족 군은 1630년대에 한국 북방을 침공하여 결국 이씨 왕조가 북경의 새 제국[청나라] 조정에 충성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유럽 상인과 선교사들의 도래를 겪지 않았지만, 중국에 다녀가는 사절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정보가 한반도에 전해졌고, 18세기 후반에는 소규모 가톨릭 공동체가 수립되기도 했다.<br>
  
한국의 분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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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504''' <br>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일본은 중국에서 영토를 얻고 영향력을 확보하는 전략을 추진했고 또한 한반도를 병합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통치는 가혹했고 한국인들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에 그들의 나라를 다시 회복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을 위한 세부적인 계획이 수립되기 전에 전쟁이 끝났다. 1945년 연합국은 일시적인 해법에 동의했다. 소련군은 한반도의 대략 중간지점을 가로지르는 위도 38도선 이북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고 미군은 38도선의 남쪽에서 항복을 받았다. 분할선은 결코 영속적인 것으로 의도된 것은 아니었고 한국은 일시적으로 소련의 점령지역과 미국의 점령지역으로 나뉘었다. 곧 친미정부가 남한에 세워졌고 북한에는 공산주의 체제가 수립되었다. 점령군은 양측에서 1948년과 1949년 철수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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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내 형제가 되어라. 그렇지 않으면 머리를 부숴 버리겠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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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은 적들을 무찌르고 일본 열도를 자신의 통치 아래에 넣었다. 그 직후 한국의 이씨 왕조의 사신이 그의 성공을 축하하는 서신을 전달했다. 히데요시는 아래 소개된 서신에서 중국 본토를 정복하고 동아시아 전체를 통치하겠다는 계획을 드러냈다. 과대 망상적 야심이 거의 고스란히 드러난 이 서신에서 히데요시는 이씨 왕조의 지배자가 중국 공격을 지원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복수를 당하게 될 것이라 선언했다. 하지만 한국의 왕은 서쪽의 강력한 이웃을 더 두려워했고, 히데요시의 동맹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일본을 공격했고, 이는 소위 임진왜란(1592-1598)이라고 불렸다. 이로 인해 한반도는 어마어마한 고초를 겪었다.<br>
  
심화학습: 세계적 사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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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관백(關白) 히데요시는 이 서신을 조선 국왕 전하에게 바칩니다. <br>
- 대장정: 1934년 가을 8만5천명의 공산군은 중국 남동부에서 국민당 군대에 포위되었다. 그들은 국민당의 포위선을 뚫고 소련과의 국경 가까이 북서부 중국으로 향해 일 년에 걸쳐 6천 마일에 달하는 고된 행군을 시작했다. 국민당 군에 의해 공중과 지상의 공격을 당하며 그들은 24개의 강을 건너고 18개의 산맥을 넘었다. 첫 3개월 동안 공산당은 절반이상의 병력을 잃었고 겨우 8천 명 정도가 살아남아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 대장정 기간 동안 마오쩌둥의 지도력이 확립되어 중국 공산당의 확고한 우두머리가 되었다. 절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공산군은 농민들을 존중하고 그들이 필요로 물자들에 비용을 지불하고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이런 행동과 대장정에서 보여준  영웅적인 시련은 많은 젊은 중국인들이 공산주의의 이상에 동조하도록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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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신 서한을 기쁘게  읽고, 전하의 뚜렷한 흔적에서 느껴지는 향기를 음미하고자 재삼 펼쳐서 보고 접곤 했습니다.<br>
학습이해도 확인: 한국은 어떻게 분단국이 되었는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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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60여 주는 근래 여러 지역으로 분리되어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대대로 내려오는 예의를 저버리며 조정의 정사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3, 4년 사이에 반신과 적도를 토벌하여 먼 지역과 섬들까지 모두 장악하였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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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나의 지나온 자취를 살펴보건대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일개 신하였지만, 일찍이 어머님께서 나를 잉태할 때에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복술사가 ‘햇빛이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표인풍(八表仁風, 팔표란 팔방의 아주 먼 끝. 인풍은 어질고 덕스러운 교화)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러운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이토록 기이한 징조로 말미암아 제게 적대하는 자는 자연 기세가 꺾여 멸망해갔는데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빼앗았습니다. 이제 천하를 평정한 뒤로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고 외로운 자들을 불쌍히 여겨 위로하니, 백성들이 부유하고 재물이 풍족하므로 지방마다 바치는 공물이 전보다 만 배나 늘었으니, 본조의 개벽 이래로 조정의 성대함과 수도의 장관이 오늘날보다 더한 적이 없었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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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오래 산다 해도 예로부터 백 년을 넘지 못하는 데 어찌 답답하게 이곳에만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나라가 산과 바다로 막혀 멀리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번에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에 들어가 우리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심어 놓고, 교토의 다스림과 교화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제 마음입니다. 귀국이 앞장서서 입조한 것은, 앞일을 깊이 헤아린 처사이므로 이제는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먼 곳의 작은 섬에 있는 무리라도 뒤늦게 복속해온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에 나온다면 더욱 이웃으로서의 맹약이 굳게 될 것입니다. 제 소원은 삼국에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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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물은 목록대로 받았습니다. 몸을 보중하고 아끼십시오. <br>
  
'''p. 654'''<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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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관백 히데요시<br>
한국에서의 충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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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히데요시는 동아시아 전역을 지배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어떻게 정당화하고 있는가?<br>
분할선 양측의 한국인들은 모두 그들의 나라를 통일하기를 원했다. 1950년 6월 북한군이 무력으로 한국을 통일하기 위해 38도선을 넘어 밀려오면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북한군의 침략은 미국을 놀라게 했다. 또한 미국인들은 소련이 뒤에서 조정하고 있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안해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중국이 공산당에게 넘어간 것도 미국에 큰 충격을 안겼었는데 이제 공산주의는 다시 진격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것이 그는 명백한 침략행위라고 보았기 때문에 분명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강자가 약자를 침략했던” 이전 사례들을 떠올렸다. 트루먼은 민주주의가 절적한 대응에 실패하면 결국 침략자들을 부추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트루먼은 “만일 남한에 대한 침략에 저항하지 않으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어났던 유사한 상황들처럼 결국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다.”고 말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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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치안 유지를 위한 유엔의 행동<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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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간략 분석==
1949년 중국 국민당이 패배한 후에 미국은 중국 공산당이 유엔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트루먼 대통령이 북한의 침략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을 때 소련 대표는 항의의 표시로 퇴장했기 때문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미국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안에 대한 만장일치의 승인을 얻었고 회원국들이 남한을 방어하고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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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dswoth Cengage Learning 출판사의 세계사 교과서 1권이다. 대부분의 미국 세계사 교과서들처럼 이 교과서도 이전보다 한국관련 오류가 줄어들었지만, 아직 일부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과하게 기술하는 부분들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예를 들면, 한 무제의 침입 이후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었다는 기술,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작은 식민지를 건설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신라가 한반도 남부에 있던 일본 식민지들을 척결했다는 기술이 나온다.<br>
트루먼 대통령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 제7함대에게 타이완을 방어하게 했고 남한에 대한 공군과 해군의 지원을 명령했다. 이어서 그는 지상군도 파견했다. 트루먼이 헌법에서 요구하는 대로 선전포고를 의회에 요청하지 않았지만 민주당과 공화당은 그의 단호한 조치를 환영했다. 하원의원들은 트루먼의 조치에 대해 듣게 되었을 때에 일어나 환호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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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은 유엔군사령부를 구성하고 미국에게 유엔군 사령관을 선택해 줄 것을 요청했다. 16개국이 군대와 무기를 보냈지만 미군이 한국에서 유엔의 국제 치안활동에 참여하는 군대의 대략 80퍼센트를 차지고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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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한국전쟁, 1950-1953><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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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6월 북한이 남한의 수도를 점령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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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9월 유엔군이 부산 방어선을 지켜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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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해방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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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1월 유엔군이 최대로 진격<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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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1월 유엔군을 몰아내기 위해 중국이 참전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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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1월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을 다시 침공하고자 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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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7월 휴전선이 처음 남한과 북한의 분단선 가까이에 확정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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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읽기: 이 지도들은 한국전쟁의 밀고 밀리는 특징을 보여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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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 이해: 지도에서 유엔군의 움직임을 살펴보시오. 중국이 왜 참전했다고 생각하는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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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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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655'''<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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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수행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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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은 유엔군 사령관으로 두 번의 세계대전의 영웅이며 강력한 반공주의자인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을 택했다. 맥아더는 일본에서 미군정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 서구 민주주의제도를 수립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헌법을 만드는 일에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는 남한에서도 미군정을 지휘했는데 남한에 민주주의를 이식하는 데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맥아더는 한국 대통령 이승만이 그의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했지만 그를 지지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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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탁월한 군사 전략가였고 남한으로부터 침략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대담한 전략을 구상했다. 소련제 탱크와 전투기로 북한 국은 단 몇 주 만에 남한 전역을 휩쓸었다. 항구도시인 부산에 가까운 작은 지역만이 아직 점령되지 않은 상태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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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북한군의 급속한 진격 때문에 그들의 공급선이 길게 늘어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산을 방어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후 1950년 9월 그는 남한의 북서부에 있는 인천에 군대를 상륙시켜서 적군의 공급선을 뒤에서부터 공격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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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작전은 적중했다. 남북에서 유엔군의 협공을 받고 공급선이 끊어지자 침략자들은 38도선 뒤로 물러갔다. 유엔군은 그들을 쫓아 북쪽으로 진격했다. 미국과 남한의 지도자들은 한국을 남한의 통제 아래 다시 통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중국 공산당을 불안하게 했다. 그들은 이제 권력을 잡은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고 친서방 국가가 바로 옆에 세워지기를 원치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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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에 북한과 중국의 국경으로 다가오자 중국은 더 이상 진격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맥아더는 이 경고를 무시했다. 1950년 112월 24일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을 압록강 넘어 중국으로 몰아내고 전쟁을 끝내기 위한 크리스마스 공세를 선언했다. 그러나 중국 군대가 압록강을 넘어 밀려오며 공세를 시작했다. 중국과 북한군은 유엔군을 남한으로 다시 몰아내었다. 전선은 교착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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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교착된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제2의 전선을 형성하고자 했다. 그는 타이완 섬에 있는 장제스의 중국 저항군이 대륙으로 돌아와 중국 공산당을 공격하기를 원했다. 트루먼은 이 작전이 아시아에서 전쟁을 확산시킬 것을 염려하여 반대했다. 트루먼의 결심을 흔들 수 없게 되자 맥아더는 하원의 소수파 지도자인 조셉 마틴(Joseph Martin)에게 1951년 편지를 보내서 대통령의 정책을 비판했다. 마틴은 이 편지를 공개했다. 4월 11일 트루먼은 불복종의 이유로 맥아더를 해임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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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고국으로 돌아와 영웅으로 환영을 받았다. 양하원 합동회의에서 행한 4월 19일 연설에서 그는 감정이 섞인 작별인사를 고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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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웨스트 포인트에서 서약한 이래 가져왔던 젊은 날의 희망과 꿈은 이제 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당시 막사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군가의 후렴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가사는 매우 자랑스럽게 ‘노병은 죽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사라질 뿐’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군가의 노병처럼 이제 나는 군생활을 마치고 사라지려 합니다. 신이 그에게 부여한 빛으로 깨닫게 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했던 노병으로서. 안녕히 계십시오.” -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1951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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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의 일생<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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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글러스 맥아더 1880-1964: 육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더글러스 맥아더는 동기들 중 수석으로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를 졸업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보여준 용맹한 활약으로 그는 38세에 장성이 되었고 1930년에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맥아더는 아시아의 미군을 지휘했다. 그는 필리핀 방어선을 구축하고 태평양에서 일본군에 대한 섬건너뛰기 작전을 수행했다. 일본과 남한의 미 점령군을 지휘한 후 그는 한국 전쟁에서 유엔군을 이끌었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어 대통령은 불복종의 사유로 그를 해임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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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지휘한 사람들과 많은 미국인들에게는 영웅이었지만 지나치게 야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많은 정치지도자들은 맥아더를 싫어했다. 맥아더도 루즈벨트와 트루먼을 별로 존경하지 않았다. 그는 두 사람이 모두 공산주의에 대해 너무 유화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태도는 맥아더를 반공주의자들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위에 권위를 갖는 사람들에 대해 경멸하는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그의 탁월한 경력을 손상하는 조치가 취해지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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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소리를 들어보기: 맥아더의 의회 연설과 그밖에 다른 냉전 시기의 소리를 들어보시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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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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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말 그대로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졌고 트루먼은 확전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될 때까지 2년을 끌었다. 평화회담이 교착되자 아이젠하워는 원자탄을 사용하겠다고 협박해서 다시 평화회담이 진행되도록 했다. 마침내 1953년 정전협정이 서명되어 한국은 전쟁 전의 분할선인 38도선과 거의 같은 상태에서 분단된 채 남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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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의 영향<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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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미국을 크게 낙심시켰다. 미국인들은 왜 5만4천명의 군인이 전사하고 10만3천명이 부상하고도 그 정도의 결과 밖에 얻지 못했는지 의아해했다. 미국인들은 그들의 정부가 공산주의의 진격을 멈추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공산군을 38도선으로 다시 물리친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봉쇄작전은 핵전쟁의 발발 없이 이루어졌다. 미국인들은 더 제한적인 전쟁과 더 제한적인 승리에 익숙해져야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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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은 또 다른 변화들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한 가지 변화는 군대 자체였다. 트루먼 대통령이 1948년 통합을 명령했지만 한국 전쟁은 백인 병사들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병사들이 같은 부대에 소속되어 싸운 첫 번째 전쟁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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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또한 군비 지출의 큰 증가를 가져왔다. 1950년에 군비는 연방 예산의 3분의 1에 못 미쳤지만 십년 후에 군사 지출은 연방 지출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동시에 미국은 상시 동원체제(permanent mobilization)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100만명이상의 미군이 전 세계에 주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군부세력은 기업과 과학계와의 연계를 발전시켜서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연계는 강력한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를 만들어내어 1960년에는 350만명의 미국인들이 고용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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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또한 아시아에서의 미국 정책의 미래를 형성하였다. 일본이 태평양지역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돕기를 희망하면서 미국은 1951년 일본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게다가 한국전쟁은 공산주의 중국과 관계를 더 악화시켜서 이후 20년간 외교적인 대결이 이어지게 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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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프를 이해하기: 세계의 지도력을 향한 경쟁 때문에 미국과 소련은 군비경쟁을 벌이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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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인과 결과를 인식하기: 제2차 세계대전 후 시기에 미국의 국방비 지출이 다시 급격하게 증가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왜 증가한 지출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처럼 다시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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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과 평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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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이해도 평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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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8도선의 중요성은 무엇이었는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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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 한국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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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양측에 어떤 나라가 참전했는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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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해임했는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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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쟁의 영향 두 가지를 쓰시오.<br>
+
비판적인 사고와 글쓰기<br>
+
5. 결론을 작성하기: 봉쇄정책과 트루먼 독트린을 고려해 볼 때 한국전쟁은 성공이었는가 실패였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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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연표를 만들기: 한국전쟁의 중요한 사건들의 연표를 작성하시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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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657'''<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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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과 냉전의 지속<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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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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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일어난 공산주의자들의 침공은 위스콘신 주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Joseph McCarthy)의 발언으로 유발된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매카시는 한 장의 종이를 들고 나와 이렇게 말했다.<br>
+
 
+
'''p. 659'''<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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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br>
+
1953년 7월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 공약을 지켰다. 1953년 3월 스탈린의 급작스러운 사망과 더 온건한 소련 지도자들의 신속한 등장이 한국전쟁의 해결에 기여했다. 한편 미국은 프랑스가 식민지인 베트남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지지하며 상당한 군사적 지원을 계속해서 제공했다. 국제회의를 통해 베트남이 한국처럼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는 북부와 반공주의자들의 남부로 분단되자 미국은 남부를 지원했지만 당분간은 더 깊이 관여하는 것을 자제했다. (24장을 보라)<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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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662'''<br>
+
19장 복습과 평가<br>
+
요점 복습<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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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한국전쟁이 전개된 세 가지 단계를 서술하시오.(3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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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문제를 분명하게 표현하기: 맥아더 장군은 한국 전쟁을 더 공격적으로 수행하기를 원했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더 조심스러웠다. 각 입장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의견을 설명하시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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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682'''<br>
+
남부출신들이 의회 각 위원회의 주요 자리를 장악하고 있었고 의사진행을 방해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에 의회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948년 7월 트루먼은 연방 공무원 임용에서 인종차별을 금지했다. 그는 또한 군대에서의 격리와 차별을 폐지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느리게 이루어졌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서야 군대는 격리를 폐지하는데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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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684'''<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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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와 공화당의 정책<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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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에 전국의 미국인들은 “나는 아이크를 좋아해요.(I like Ike)”라고 노래했다. 공화당은 승리를 위한 공식으로 K1C2를 고안했다. 이 공식은 세 가지 문제에 초점을 맞춘 것인데 바로 한국(Korea), 공산주의(communism)와 부패(corruption)였다.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을 끝내겠다고 약속했고 공화당은 공산주의의 도전에 강력하게 대응하겠다는 것을 보장했다. 아이젠하워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는 캘리포니아 출신인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이었는데 그는 공직자로 재직 시에 부패에 연루되었다고 두들겨 맞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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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간략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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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dswoth Cengage Learning 출판사의 세계사 교과서이다. 대부분의 미국 세계사 교과서들처럼 이 교과서도 이전보다 한국관련 오류가 줄어들었지만, 아직 일부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과하게 기술하는 부분들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예를 들면, 한 무제의 침입 이후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었다는 기술,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작은 식민지를 건설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신라가 한반도 남부에 있던 일본 식민지들을 척결했다는 기술이 나온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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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은 다음 기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초기 농경 사회는 모두 궁극적으로 거대한 이웃인 중국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 베트남은 수천 년 동안 중국의 지배 아래 있었고, 한국은 독립 국가였지만 오랫동안 중국에 조공을 바쳤으며, 많은 방면에서 중국의 문화적 선례를 따랐다.” 한국이 독립 국가였지만 중국에 조공을 받쳤고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본다.<br>
 
한국과 중국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은 다음 기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초기 농경 사회는 모두 궁극적으로 거대한 이웃인 중국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 베트남은 수천 년 동안 중국의 지배 아래 있었고, 한국은 독립 국가였지만 오랫동안 중국에 조공을 바쳤으며, 많은 방면에서 중국의 문화적 선례를 따랐다.” 한국이 독립 국가였지만 중국에 조공을 받쳤고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본다.<br>
 
이외의 한국 관련 주요 내용 가운데는, 한국의 가원, 한나라의 한반도 북부 점령,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과 중국 격퇴, 한국의 불교 전래와 불교문화(불국사, 석굴암, 대장경 인쇄술), 한국의 구어를 적기 위한 표음문자 창제,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 같은 부분들을 포함한다.<br>
 
이외의 한국 관련 주요 내용 가운데는, 한국의 가원, 한나라의 한반도 북부 점령,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과 중국 격퇴, 한국의 불교 전래와 불교문화(불국사, 석굴암, 대장경 인쇄술), 한국의 구어를 적기 위한 표음문자 창제,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 같은 부분들을 포함한다.<br>
  
==4. 검토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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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검토 의견==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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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background-color:#FBF5EF; text-align:center" | '''페이지''' !! style="background-color:#FBF5EF" | '''한국관련 기술 내용''' !! style="background-color:#FBF5EF;" | '''검토의견''' !! style="background-color:#FBF5EF;" |'''오류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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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background-color:#FBF5EF; text-align:center" | '''페이지''' !! style="background-color:#FBF5EF" | '''한국 관련 기술 내용''' !! style="background-color:#FBF5EF;" | '''검토 의견''' !! style="background-color:#FBF5EF;" |'''개선 과제 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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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 | p. 286 || 지도에 한반도 전체가 몽골제국 영역에 포함된 것으로 표시됨 || 몽골의 내정간섭을 받았던 시기에도 고려는 독립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몽골(원)과 한국(고려)의 국경선을 표시하고, 몽골의 영역에서 한반도를 제외시켜야 한다. 또한 ‘고려’라는 정확한 국명을 표기해야 함 || style="text-align:center" | C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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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 | p. 318 || 이 문제로 여전히 격론이 진행 중이지만,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원전 109년,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 한 무제의 한사군 설치 연도는 기원전 108년임.  || style="text-align:center" | C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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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 | p. 318 || 이 문제로 여전히 격론이 진행 중이지만,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원전 109년,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후 수 세대 동안, 이 지역은 한나라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중국의 주에 분할 편입되어, 중국의 제도가 도입되었다. || 한나라의 무제는 고조선을 침략하여 멸망시키고 이 지역에 4군현을 설치하였으나 3개 군현은 곧 폐지되었으며 비교적 오랫동안 지속된 낙랑 역시 최근에 와서는 중국의 직접 지배지역이라기보다는 유이민들이 세운 자치도시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4군현은 중국 기록에서조차 부정확하게 언급되어 있어 통치력이 실제로 미쳤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한반도 북부가 중국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었다”, “이후 수 세대 동안 이 지역은 한나라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중국의 주에 분할 편입되었다”는 부분을 삭제해야 함.  || style="text-align:center" | C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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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 | p. 318 || 결국 한반도에는 세 개의 왕국이 생겨났다. 북쪽의 고구려, 서남부의 백제, 동남부의 신라였다. 비슷한 시기에 야마토 평원에 나라를 세운 일본이 남부 해안에 작은 식민지를 건설했을지도 모른다. ||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작은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주장은 역사적 근거가 없으므로 삭제해야 함. || style="text-align:center" | C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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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 | p. 319 || 그 후 신라의 통치자들은 압록강 일대를 제외하고 한반도에서 중국을 몰아내었다. 거만한 중국인들을 달래기 위해 신라는 당나라의 조공국 지위를 받아들였다. 이 기간에 신라는 한반도 남부에 남아 있던 일본 식민지들을 척결했다. ||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작은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주장은 역사적 근거가 없으므로 삭제해야 함. || style="text-align:center" | C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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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 | p. 319 || 고려는 침략을 막아내며, 400년간 명맥을 이었다. 이웃 중국에 강력한 왕조가 부재한 덕이 컸다. || 한국은 고려시대에도 요(Khitan)와 금(Jin) 같은 강력한 국가들과 전쟁을 벌이며 국가를 유지해갔다. “이웃 중국에 강력한 왕조가 부재한 덕이 컸다”는 부분은 삭제해야 함.  || style="text-align:center" | C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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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 | p. 353 || <지도: 열강의 중국 분할><br> -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됨 || 일본해를 '동해'로 표기하거나 최소한 '동해(일본해)'로 수정해야 함 || style="text-align:center" | 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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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 | p. 320 || 고려는 살아남을 수는 있었지만, 몽골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했고, 몽골의 세력이 쇠퇴하자 고려도 함께 쇠락했다. 중국에서 명나라의 세력이 떠오르자 고려는 무너졌고 권력은 장군 이성계의 손에 들어갔다. || 고려의 쇠락은 몽골의 쇠퇴와 관련이 없다. 오히려 몽골이 쇠퇴하자 고려는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으며 북쪽으로 고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 고려의 쇠락은 한국 내적인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 말미암았다. “몽골의 세력이 쇠퇴하자 고려도 함께 쇠락했다”는 부분은 삭제해야 . || style="text-align:center" | C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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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 | p. 353 || <지도: 한국전쟁. 1950-1953><br> -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됨 || 일본해를 '동해'로 표기하거나 최소한 '동해(일본해)'로 수정해야 함 || style="text-align:center" | 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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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 | p. 504 || 과대 망상적 야심이 거의 고스란히 드러난 이 서신에서 히데요시는 이씨 왕조의 지배자가 중국 공격을 지원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복수를 당하게 될 것이라 선언했다. 하지만 한국의 왕은 서쪽의 강력한 이웃을 더 두려워했고, 히데요시의 동맹 요구를 거절했다. || 조선 정부가 히데요시의 요구를 거부한 것은 그 요구가 오만하고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며 조선이 명나라를 두려워했기 때문과는 별 관련이 없다. “한국의 왕이 서쪽의 강력한 이웃을 더 두려워했고, 히데요시의 동맹 요구를 거절했다”는 부분을 삭제해야 || style="text-align:center" | C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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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center;" | isReviewOf
 
| style="text-align:center;" | isReviewOf
|[http://lib.aks.ac.kr/DLiWeb20/components/searchir/detail/detail.aspx?cid=499289 교과서 서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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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lib.aks.ac.kr/DLiWeb20/components/searchir/detail/detail.aspx?cid=512111 교과서 서지사항]
 
|분석대상 교과서 서지사항  
 
|분석대상 교과서 서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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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1일 (화) 14:25 기준 최신판

1. 목차

-지도
-박스글
-참고문헌
-서문
-감사의 말
-언어와 연대결정에 대해 학생들에게 전하는 말
-세계사 이해를 위한 주제

1부 최초의 문명들과 제국의 등장 (선사시대부터 기원후 500년까지)
I 초기 인간과 최초의 문명들
최초의 인간들
-호모사피엔스의 등장
-구석기 시대의 사냥-채집
-신석기 혁명 (기원전 1만년부터 4000년)
-사냥-채집과 목축에서 농사까지
문명의 등장
-세계 각지의 초기 문명
-문명이 생겨난 이유
메소포타미아 문명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국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제국
-메소포타미아 문화
이집트 문명: “나일 강의 선물”
-지리의 영향
-고왕국과 중왕국
-고대 이집트의 사회와 경제
-이집트의 문화
-무질서와 새로운 질서: 신왕국
-고대 이집트의 일상: 가족과 결혼
-아크나톤의 아톤 찬가와 히브리 성경의 시편 104편
-퍼져나가는 이집트의 영향: 누비아
문명의 새로운 중심
-유목민: 인도-유럽어족의 영향
-서아시아의 영토국가: 페니키아
-히브리 족: “이스라엘의 아이들”
새로운 제국의 등장
-아시리아 제국
-페르시아 제국

2 고대 인도
인도 문명의 등장: 하랍파 사회
-다양성의 땅
-하랍파 문명: 매혹적인 불가사의
-글과 문명
인도의 아리아족
-추장에서 왕까지
-마우리아 제국
-카스트와 계급: 고대 인도의 사회구조
-고대 인도의 일상
-경제
윤회에서 벗어나기: 고대 인도의 종교계
-브라만 교
-진리의 추구
-대중종교
-불교: 중도
물고기의 법칙(matsyanyaya:rule of fishes): 마우리아 제국 이후의 인도
생기 넘치는 인도 문화
-문학
-건축과 조각
-과학

3 고대 중국
중국 문명의 여명
-중국의 지역과 민족
-상나라
주나라
-정치 구조
-금속의 사용
-경제와 사회
-백가쟁명
-선악에 대한 논쟁
중국 최초의 제국: 진나라
-진나라(기원전 221-206)
고대 중국의 일상
-가족의 역할
-생활양식
-도시
-비천한 처지: 고대 중국의 여성
중국의 문화
-금속공예와 조각
-언어와 문학
-음악

4 그리스 문명
-초기 그리스
-미노아 크레타
-그리스 최초의 국가: 미케네
-암흑시대의 그리스(기원전 1100-750년 경)
그리스 도시국가(기원전 750-500년 경)
-폴리스
-식민도시와 무역의 발전
-그리스 폴리스에서 벌어진 압제
-스파르타
-아테네
-초기 그리스 문화에 미친 외부의 영향
그리스 문명의 정점: 고전기 그리스
-페르시아의 도전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네 제국의 성장
-대(大)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그리스 국가의 쇠퇴
-고전기 그리스의 문화
-축의 시대(Axial Age)
-그리스의 종교
-고전기 아테네의 일상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여성
마케도니아의 부상과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알렉산드로스 대왕
헬레니즘 왕국들의 세계
-헬레니즘 왕정
-정치제도
-알렉산더 (2004)
-헬레니즘 도시
-무역의 중요성
-사회생활: 여성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
-헬레니즘 세계의 문화

5 최초의 세계 문명: 로마, 중국, 그리고 실크로드의 등장
초기 로마와 공화국
-초기 로마
-로마 공화국
-로마의 지중해 정복(기원전 264-133)
-로마 공화국의 쇠퇴와 몰락(기원전 133-31)
로마 제국의 절정
-아우구스투스 시대(기원전 31-기원후 14)
-제국의 초기(14-180)
-로마 세계의 문화와 사회
위기와 제국 말기
-3세기의 위기
-로마 제국 말기
-글래디에이터(2000)
-로마 세계의 변화: 기독교의 발전
-지배자와 신
-로마 당국과 기독교인 각각의 기독교에 대한 관점
영광스러운 한(漢) 제국(기원전 202-기원후 221)
-유교와 국가
-경제
-제국의 확장과 실크로드의 기원
-사회 변화
-종교와 문화
-한나라의 쇠퇴와 몰락
-로마와 중국의 비교

2부 문명의 새로운 유형(500-1500)

6 아메리카
아메리카의 사람들
-최초의 아메리카인
중앙아메리카의 초기 문명
-올멕: 고무의 땅
-사포텍(Zapotec)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 아메리카 최초의 메트로폴리스
-올멕: 어머니 문화인가 동등한 문명 중 최초(First among equals)인가?
-마야
-아즈텍
남아메리카 최초의 문명
-카랄(Caral)
-모체(Moche)
-역사와 환경
-잉카
아메리카의 국가 없는 사회들
-동부삼림(Eastern Woodlands)
-카호키아
-고대 푸에블로 족
-남아메리카: 아라와크(Arawak)
-아마조니아

7 중동의 소요: 이슬람의 발흥
이슬람의 발흥
-무함마드의 역할
-예언자 마호메트(Muhammad: The Messenger of God)(1976)
-무함마드의 가르침
아랍 제국과 그 계승자들
-제국의 창조
-우마이야조의 부상
-아바스조
-십자군
-몽골
-예루살렘 점령: 기독교의 관점과 이슬람의 관점
-안달루시아: 유럽의 이슬람 전진기지
이슬람 문명
-정치 구조
-아랍의 부: 중동의 무역과 도시들
-무역과 문명
-이슬람 사회
-이슬람 문화

8 아프리카의 초기 문명
문명의 등장
-땅
-최초의 농부들
-악숨(Axum)과 메로에(Meroe)
-사하라 일대
-동아프리카
-민족의 이주
이슬람의 도래
-이슬람 이전 아프리카의 종교적 믿음
-북아프리카의 아랍인들
-에티오피아 왕국: 이슬람 바다 위에 뜬 기독교 섬
-동아프리카: 잔즈(Zanj) 땅
-서아프리카의 국가들
중앙 및 남아프리카의 국가의 비중앙집중적(Noncentralized) 사회
-콩고 하곡
-짐바브웨
-남아프리카
-아프리카: 역사 없는 대륙?
아프리카 사회
-도시 생활
-촌락 생활
-여성의 역할
-노예제도
아프리카의 문화
-회화와 조각
-음악
-건축
-문학

9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문명의 확장
실크로드
마우리아 왕조 이후의 인도
-굽타 왕조: 새로운 황금시대?
-불교의 변화
-인도 불교의 쇠퇴
-언제 인도인들이 힌두교 신자가 되었나?
이슬람의 도래
-마흐무드 가즈나비(Mahmud of Ghazni)의 제국
-델리 술탄 시대
-티무르
사회와 문화
-종교
-카스트, 계급, 가족
-경제와 일상
-인도 문화의 경이
황금 지역: 초기 동남아시아
-논과 향신료: 동남아시아 국가들
-일상생활
-영혼의 세계: 종교적 믿음
-태평양으로의 확장

10 고대 중국의 전성기
한나라 이후의 중국
중국의 재통일: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정치구조: 유교의 승리
-행동 또는 무위: 중세 중국의 관념적 논쟁
-경제
-기술의 전파
-고대 중국 사회
중앙아시아의 폭발: 몽골 제국
-두 세계의 만남
-몽골의 중국 지배
-마르코 폴로의 모험(1938)과 마르코 폴로(2007)
-역사상 몽골의 위치
명나라
-정화의 항해
-도의 추구
-불교와 도교의 부상과 쇠퇴
-성리학: 격물(格物)
중국 문화의 절정
-문학
-미술

11 동아시아의 주변지역: 초기 일본, 한국, 베트남
일본: 떠오르는 태양의 땅
-신들의 선물: 선사시대 일본
-일본 국가의 부상
-세계의 봉건 질서
-경제 및 사회 구조
-정토의 추구: 초기 일본의 종교
-라쇼몽(1950)
-전통 일본 문화의 원천
-일본과 중국 모델
한국: 동방의 가교
-삼국시대
-고려의 부상
-몽골 치하
베트남: 작은 용
-다이 비에트(Great Viet, 大越)의 부상
-사회와 가정생활
-장별 요약/연대표/복습/권장 도서

12 유럽의 형성
중세 초기 유럽의 등장
-새로운 게르만 왕국들
-기독교의 역할
-샤를마뉴와 카롤링거 왕조
-군주와 봉신의 세계
고중세 시대의 유럽
-땅과 사람들
-무역과 도시의 신세계
-겨울의 라이온(The Lion in Winter)(1968)
-중세 세계의 도시들
-유럽 왕국의 진화
-기독교와 중세 문명
-고중세 문화
-중세 유럽과 세계
-제1차 십자군
-후기 십자군
-십자군의 영향은 무엇인가?

13 비잔틴 제국과 서방세계의 위기와 회복
동로마에서 비잔틴 제국까지
-유스티아누스 황제(527-565) 치세
-새로운 유형의 제국
비잔틴 문명의 정점(760-1025)
-부흥의 시작
-마케도니아 왕조
비잔틴 제국의 쇠퇴와 몰락(1025-1453)
-새로운 도전과 새로운 대응
-십자군의 영향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콘스탄티노플 함락
14세기 서방의 위기
-흑사병: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역사에 나타난 질병의 역할
-경제 혼란과 사회 격변
-흑사명의 원인: 동시대의 시각
-정치적 불안정
-교회의 쇠퇴
회복: 르네상스
-학문의 르네상스
-예술의 르네상스
-르네상스 시대의 국가

3부 새로운 세계 질서의 등장(1500-1800)

14 새로운 만남: 세계시장의 탄생
탐험과 확장의 시대
-이슬람과 향신료 무역
-서아프리카의 이슬람 전파
-새로운 참가자: 유럽
해양제국 포르투갈
-인도의 포르투갈인들
-향신료 탐색
-새로운 경쟁자들의 출현
“신세계” 정복
-항해
-정복
-제국의 통치
-미션(1986)
-경쟁의 격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영웅인가, 악당인가?
-콜럼부스의 교환
과도기 아프리카
-아프리카의 포르투갈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
-노예무역
-변화하는 대륙의 정치, 사회구조
향신료 무역 시대의 동남아시아
-서양의 도래
-문명의 행진
-식민지 시대 이전 동남아시아의 국가와 사회
-국왕 서신의 교환

15 유럽의 변신: 종교개혁과 국가 건설
16세기의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배경
-마르틴 루터와 독일의 종교개혁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전파
-종교개혁 논쟁: 마르부르크 분쟁
-가톨릭의 종교개혁
-초기 근대 세계의 결혼
위기의 유럽(1560-1650)
-16세기의 정치와 종교 전쟁
-경제, 사회 위기
-17세기의 위기: 혁명과 전쟁
위기에 대한 대응: 절대주의의 실천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
-중부유럽과 동유럽의 절대주의
영국과 입헌군주제
-왕과 의회의 충돌
-내전과 연방
-왕정복고와 명예혁명
유럽 문화의 융성
-미술: 바로크
-미술: 네덜란드 사실주의
-영국 문학의 황금시대

16 이슬람 제국
오스만투르크 제국
-오스만투르크의 부상
-제국의 확장
-전쟁 양상의 변화
-투르크 지배의 본질
-오스만 투르크의 종교와 사회
-오스만 투르크의 쇠퇴
-오스만 투르크의 미술
사파비조(Safavids)
-사파비조의 부상
-왕조의 몰락
-사파비조의 정치와 사회
-사파비조의 미술과 문학
무굴 제국의 위엄
-바부르(Babur): 무굴제국의 시조
-악바르와 인도-이슬람 문명
-악바르의 후계자들
-인도에서 나타난 유럽 세력의 영향
-후글리 항구의 점령
-무굴 제국: “화약의 제국?”
-무굴 제국 하의 사회: 문화의 통합
-무굴 제국의 문화

17 동아시아 세계
절정에 다다른 중국
-명나라에서 청나라까지
-청나라의 위대함
변화하는 중국
-인구 폭발
-산업화의 씨앗
-인구폭발
-청나라의 일상
-문화 발전
도쿠가와 일본
-3 명의 위대한 천하인
-서양에 대한 문호 개방
-도쿠가와의 “위대한 평화”
-촌락의 삶
-도쿠가와의 문화
한국과 베트남
-한국: 위험한 이웃
-베트남: 제국의 위험

18 신세계질서를 목전에 둔 서양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을 향하여: 서양의 지적 혁명
-과학혁명
-계몽주의의 배경
-프랑스 계몽사상가들과 그 사상
-과학혁명
-계몽시대의 문화
-경제 변화와 사회질서
-새로운 경제 질서
-18세기의 유럽 사회
-아메리카의 식민제국과 혁명
-서인도 제도
-영국령 북아메리카
-프랑스령 북아메리카
-미국 독립 혁명
새로운 정치질서와 세계 분쟁을 향하여
-프로이센: 군대와 관료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제국
-예카테리나 여제 치하의 러시아
-재고되는 계몽절대주의
-변화하는 전쟁의 양상: 세계적 대립
프랑스 혁명
-프랑스혁명의 배경
-삼부회의에서 국민의회로
-마리 앙투아네트(2006)
-구체제의 파멸
-프랑스 민중의 자연권: 두 가지 관점
-급진적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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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시대
-나폴레옹의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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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 관련 내용

p. 271
수나라 중(中)
수 황제는 압제적인 통치자였고, 막대한 군사비 지출로 불안이 퍼져나갔다. 618년 한국 정벌이 실패로 끝나고 돌아온 후 황제는 궁전에서 살해되었다.

p. 289
명나라 중(中)
한국의 이씨 왕조와 조공관계를 수립했다.

pp. 301-302
동아시아의 주변지역: 초기 일본, 한국, 베트남

비판적 사고
중국 문명이 일본, 한국, 베트남의 초기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

<전략> 한반도에는 후기신석기사회가 이미 몇 세기 전부터 발전을 시작했다.
이러한 초기 농경 사회는 모두 궁극적으로 거대한 이웃인 중국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 베트남은 수천 년 동안 중국의 지배 아래 있었고, 한국은 독립 국가였지만 오랫동안 중국에 조공을 바쳤으며, 많은 방면에서 중국의 문화적 선례를 따랐다.
<후략>

p. 302
지도 11.1 초기 일본
일본해(동해) - 일본해와 동해가 병기되어 있음

p. 305 지도
11.2 일본과 중국, 한국의 관계
일본해(동해) - 일본해와 동해가 병기되어 있음

pp. 317-319
한국: 동방의 가교
핵심 질문: 초기 한국의 경제적, 사회적 생활상에서 핵심적인 특징은 무엇인가?
중국 주변의 사회 중 한국만큼 중국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사회는 거의 없다. 하지만 중국과 한국의 관계는 긴장과 분쟁으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한국 사람들은 중국의 국수주의와 오만에 분개한 적도 종종 있다.
[318] 이러한 태도의 생생한 사례가 근년에 있었다. 양국 관료와 역사가들은 목소리를 높여서 한국의 초기 역사에 대한 상이한 해석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미네소타 주보다 약간 큰 한반도는 아마도 알타이어를 사용하며, 어업과 사냥을 하는 부족들이 신석기 시대에 이웃 만주에서부터 이주하여 처음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이 상대적으로 산악지대이기 때문에(한반도의 약 1/5 정도만이 경작에 적합하다) 농업은 약 기원전 2000년이 되어서야 행해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조직화된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한중 양국의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 시기이다. 2004년 중국 당국은 고구려(37 BCE-668 CE)로 알려진 이 지역 최초의 왕국이 만주의 넓은 지역과 한반도 북부를 지배했으며, 그러므로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한국의 학자들은 전설과 산재한 역사적 증거에 근거하여 고조선(Gojoseon, goh-joh-SHAWN)으로 알려진,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왕국은 한국인 지배자 단군(Dangun, dan-GOON)에 의해 기원전 2333년에 세워졌으며, 그 구성원이 한국인들이라고 반박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동북아시아에서 청동기 시대가 진행 중이던 때는 바로 이 시기였다.
이 문제로 여전히 격론이 진행 중이지만,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원전 109년,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후 수 세대 동안, 이 지역은 한나라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중국의 주에 분할 편입되어, 중국의 제도가 도입되었다. 3세기 한나라의 쇠퇴와 함께, 통치권은 점차 지역 지도자들에게 넘어갔고, 이들은 중국 관료들을 쫓아냈지만 여전히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결국 한반도에는 세 개의 왕국이 생겨났다. 북쪽의 고구려, 서남부의 백제, 동남부의 신라였다. 비슷한 시기에 야마토 평원에 나라를 세운 일본이 남부 해안에 작은 식민지를 건설했을지도 모른다.

p. 318 지도 한국의 삼국
일본해(동해) - 동해가 일본해와 병기되어 있음

삼국시대
4세기에서 7세기 까지, 사국은 한반도의 영향력과 영토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다. 동시에 삼국 모두 중국의 정치 및 문화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영향력은 고구려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났다. 4세기 후반 불교가 도입됐고, 한반도 최초의 사원이 평양에 세워졌다. 또한 삼국은 모두 한나라의 멸망 이후 중국 대륙에 나타난 나라들 중 하나와 조공 관계를 받아들였다. 신라는 다른 두 나라에 비해 중국의 영향에 덜 노출된 왕국으로 처음에는 삼국 중 가장 약했으나 결국 더 강력한 내부 응집력(아마도 지역 부족의 전통적인 끈기의 결과) 덕택에 한반도를 평정하게 되었다. 그 후 신라의 통치자들은 압록강 일대를 제외하고 한반도에서 중국을 몰아내었다. [319] 거만한 중국인들을 달래기 위해 신라는 당나라의 조공국 지위를 받아들였다. 이 기간에 신라는 한반도 남부에 남아 있던 일본 식민지들을 척결했다.
처음으로 삼국을 통일했을 때, 신라의 통치자들은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중국의 정치제도와 이념을 이용하고자 했다. 대중의 인기를 얻던 불교는 국교가 되었고, 한국의 승려들은 동시대 일본의 승려들처럼 중국으로 순례 길에 올랐다. 중국식 건축과 미술은 경주와 다른 도시를 가득 메웠고, 한자는 법조문서의 공식 문자가 되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한반도 동남부를 다스려왔던 강력한 귀족 가문들이 여전히 궁정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들은 당나라의 과거제도 도입을 막고, 빈곤층에 대한 농지 분배를 거부할 수 있었다. 중국식 모델 도입의 실패는 치명적이었다. 귀족 가문 사이의 분쟁이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780년 왕이 암살당하자 내전이 발발했다.

p. 318
사진 석굴암 불상
석굴암 불상(Sokkuram Buddha)
불교가 인도에서 다른 아시아 지역으로 퍼져나갈 때 인간 형태의 불상도 궤를 같이 했다. 1세기부터, 불상은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흐르는 듯한 주름이 특징인 일부 초기 조각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에 인도로 유입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반영한다. 다른 불상들은 인도 전통의 남성 토지신의 영향을 받아 어깨가 넓고 눈이 빛난다. 굽타 시대 예술가들은 영적, 육체적 완벽을 추구하는 인도의 이상을 강조했다.
불교가 실크로드를 따라 퍼져나가면서 불상은 페르시아, 중국 그리고 종국에는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영향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사진의 불상은 8세기 석굴암 불상으로 신라가 만든 것이다. 인근 언덕의 암석들이 너무 단단하여 중국이나 인도의 동굴 사원과 유사한 구조를 건축하지 못한 한국의 건축자들은 화강암 석재로 작은 돔 모양의 동굴을 꾸미고, 목조 베란다로 장식했다. 오늘날 순례자들은 가파른 언덕을 올라 아시아에서 손꼽힐 만큼 훌륭한 이 강력하고, 평온한 부처에게 경배를 드린다.

p. 319
사진 불국사 종탑
불국사 종탑(Pulguksa Bell Tower)
한반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적 성취로 신라의 고도인 경주 인근의 불국사를 꼽을 수 있다. 8세기에 건축된 이 사찰의 종탑은 아름다운 정원 한가운데에는 사진의 종탑이 자리 잡고 있다. 1966년 불국사 근처의 석탑에서 고문서 하나가 발견되었다. 8세기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고문서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로 여겨지고 있다.

p. 319
고려의 부상
10세기 초반, 고려(Koryo, KAWR-yoh)(오늘날 한국의 영문명의 유래가 되었다)라는 새로운 왕조가 북쪽에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왕국은 국력을 강화하고 영토를 통일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중국의 정치제도를 받아들였다. 과거제도가 958년 도입되었지만 일본에서처럼 관료제는 강한 귀족 가문들의 지배가 이어졌다.
고려는 침략을 막아내며, 400년간 명맥을 이었다. 이웃 중국에 강력한 왕조가 부재한 덕이 컸다. 고려 시대 한반도의 산업과 상업은 점진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중국과 마찬가지로 농업이 부의 주요 원천이었다. 원칙적으로 모든 토지는 왕의 소유였지만, 사실상 귀족 가문이 자신의 토지를 다스렸다. 토지는 농민들이 경작했는데, 이들에게는 유럽의 농노와 유사한 부담이 지워져 있었다. 사회의 최하층에는 천민계층이 있었다. 이들은 노비, 장인과 다른 특수한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
문화적 관점에서 고려 시대는 괄목할 만한 성취가 있었던 시대이다. 정토종과 선종 등 중국에서 도입된 종파들이 운영하는 불교 사찰이 커다란 지역을 지배했고, 승려들은 왕의 고문이 되었다.
처음에는 불교적 주제가 한국의 미술과 조각을 지배했으며, 대장경 전체가 목판으로 인쇄되었다. 하지만 후에는 산수가 회화와 도자기에 등장하며 유교적 주제가 지배적이 되었다.

p. 320
몽골 치하

이전의 신라처럼, 고려도 귀족의 세력과 탄탄한 조세기반의 부재를 극복하지 못했다. 13세기 들어 몽골이 고려의 북방을 점령하고 이를 원나라에 편입시켰다. 약화된 고려는 대도 (大都, Khanbaliq)의 대칸에게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었다.
몽골 통치 시대는 한국인들에게 격심한 고통을 안겨 주었다. 특히 수천의 농민과 장인들은 쿠빌라이 칸의 일본 정벌 준비를 위한 조선 작업에 강제로 징집되어 노동을 해야 했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몽골은 중국과 그 너머 세계의 수많은 새로운 사상과 기술을 전파했다. 고려는 살아남을 수는 있었지만, 몽골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했고, 몽골의 세력이 쇠퇴하자 고려도 함께 쇠락했다. 중국에서 명나라의 세력이 떠오르자 고려는 무너졌고 권력은 장군 이성계의 손에 들어갔다. 이성계(Yi Song Gye[YEE song gye])는 1392년 새로운 이씨 왕조(Yi Dynasty)를 건국했다. 다시 한 번 한국인들은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게 되었다.

p. 493
도쿠가와 일본 중(中)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열도의 다이묘 대부분에게 자신의 권위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고 국가 통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훗날 실패로 돌아간 아시아 본토 통치를 위해 한국을 침략했다. (뒤의 “한국: 위험한 이웃”을 참조)

p. 494
지도 도쿠가와 일본
만주 한국 서울
일본해(동해) - 동해가 일본해와 병기되어 있음.

p. 497
연대표 근대 초기의 일본과 한국
한국, 최초의 표음 문자 15세기
일본에 당도한 포르투갈 상인들 1543
일본에 당도한 프란시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 1549
오다 노부나가의 통치 1568-1582
교토 점령 1568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치 1582-1598
일본의 기독교 금지령 1587
일본의 한국 침략 1592
히데요시의 죽음과 일본군의 철수 1598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통치 1598-1616
도쿠가와 막부의 창설 1603
나가사키 교역을 허가 받은 네덜란드 상인들 1609
기독교 선교사 추방령 1612
중국에 충성서약을 한 한국의 이씨 왕조 1630년대

p. 502
도쿠가와 미술 중(中)
일본 도자기 장인들은 훌륭한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한국에서 기술과 디자인을 모두 빌려왔다.

pp. 503-504
한국과 베트남
핵심질문: 이 시기 한국의 발전상은 중국과 일본의 상황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가? 베트남 문명의 고유한 측면은 무엇인가?

한국: 위험한 이웃
도쿠가와 막부 치하의 일본이 고유의 특징을 지닌 독특한 사회를 만들어가며 중국 제국의 그림자에서 꾸준히 벗어나고 있을 무렵 한국의 이씨 왕조(Yi Dynasty)는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중국의 모델을 계속하여 따르고 있었다. 이씨 왕조는 14세기 말엽 장군 이성계(Yi Song Gye[YEE song gye])가 건국하였고, 즉각 명나라와 가까운 정치적, 문화적 관계를 수립했다. 한반도 중심부의 한강 유역에 위치한 서울을 새로운 수도로 삼은 이씨 왕조는 강력한 이웃인 중국과의 조공관계를 수용하고 중국의 제도와 가치관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였다. 중국에서처럼 과거제도가 관료 후보생들의 유교 고전에 대한 지식을 평가하는 수단이 되었고 성공은 출세로 나아가는 필수적인 단계로 여겨졌다.
하지만 차이점도 있었다. 일본처럼 조선도 귀족 계층인 소위 양반 계층으로의 진입을 계속 제한했다. 동시에 농민들은 여전히 농노와 비슷한 처지였으며, 국가 소유의 토지나 엘리트 계층의 영지에서 일했다. 천민으로 불린 노예계층은 정부의 농장이나 백정이나 광대 같은 특정 직업군에서 일했으며, 다른 집단의 지위 아래에 있다고 간주되었다.
마침내 한국 사회는 중국 정통성에서 벗어나는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15세기 한국의 구어(한글)를 적기 위한 표음문자가 창제되었다. 처음에는 양반계층의 경멸을 받고, 교육용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결국에는 사적 서신이나 대중 소설을 위한 매체가 되었다. 동시에 경제 부문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농업생산성이 향상되어 인구 증가와 소규모 도시 산업과 상업 부문도 등장했다. 사회적으로는 양반 계층의 오랜 지배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양반 계층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권력과 영향력은 오히려 약화되었고, 이에 따라 일부 양반들은 상인이 되거나 농민 계층으로 유입되어 귀족과 평민 사이의 구분이 흐릿해져갔다.
한편, 이씨 왕조는 이웃국가로부터의 홀로서기에 지속적인 어려움을 맞이했다. 16세기 중 많은 시기에, 주된 위협은 북쪽에서 비롯되었다. 만주 지역의 세력이 압록강 바로 남쪽의 한국 영토(p. 494 지도 17.3 참조)를 괴롭혔다. 하지만 1580년대에 이르러, 더 큰 위협이 동쪽에서 다가왔다. 새롭게 통일된 일본이었다. 16세기 중 많은 시간 동안 일본의 다이묘는 오랜 내전에 휘말려 왔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열도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화하기 위해 투쟁을 벌였다. 셋 중 히데요시만이 바다 건너 제국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그는 평민으로 태어났지만, 장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고, 1580년대 후반에 명나라를 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p. 504 박스글 참조) 한국 왕 선조(1567-1608) 는 히데요시의 동맹 제안을 거절했고, 1592년 일본은 한반도를 침공했다.
처음에는 일본의 계획이 잘 진행되었다. 일본군은 한국의 지방을 초토화하며, 한국의 수도 서울로 진격했다. 하지만 한국은 결국 침략군의 다루기 힘든 상륙선을 파괴할 수 있는 빠른 중장갑함을 개발한 이순신 장군(1545-1598)의 탁월한 지휘 하에 반격을 가하여 독립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은 오래 가지 못했다. 1630년대에 이르러 만주족이 북방국경에서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만주족 군은 1630년대에 한국 북방을 침공하여 결국 이씨 왕조가 북경의 새 제국[청나라] 조정에 충성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유럽 상인과 선교사들의 도래를 겪지 않았지만, 중국에 다녀가는 사절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정보가 한반도에 전해졌고, 18세기 후반에는 소규모 가톨릭 공동체가 수립되기도 했다.

p. 504
박스: 내 형제가 되어라. 그렇지 않으면 머리를 부숴 버리겠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은 적들을 무찌르고 일본 열도를 자신의 통치 아래에 넣었다. 그 직후 한국의 이씨 왕조의 사신이 그의 성공을 축하하는 서신을 전달했다. 히데요시는 아래 소개된 서신에서 중국 본토를 정복하고 동아시아 전체를 통치하겠다는 계획을 드러냈다. 과대 망상적 야심이 거의 고스란히 드러난 이 서신에서 히데요시는 이씨 왕조의 지배자가 중국 공격을 지원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복수를 당하게 될 것이라 선언했다. 하지만 한국의 왕은 서쪽의 강력한 이웃을 더 두려워했고, 히데요시의 동맹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일본을 공격했고, 이는 소위 임진왜란(1592-1598)이라고 불렸다. 이로 인해 한반도는 어마어마한 고초를 겪었다.

일본국 관백(關白) 히데요시는 이 서신을 조선 국왕 전하에게 바칩니다.
보내신 서한을 기쁘게 읽고, 전하의 뚜렷한 흔적에서 느껴지는 향기를 음미하고자 재삼 펼쳐서 보고 접곤 했습니다.
우리나라 60여 주는 근래 여러 지역으로 분리되어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대대로 내려오는 예의를 저버리며 조정의 정사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3, 4년 사이에 반신과 적도를 토벌하여 먼 지역과 섬들까지 모두 장악하였습니다.
삼가 나의 지나온 자취를 살펴보건대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일개 신하였지만, 일찍이 어머님께서 나를 잉태할 때에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복술사가 ‘햇빛이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표인풍(八表仁風, 팔표란 팔방의 아주 먼 끝. 인풍은 어질고 덕스러운 교화)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러운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이토록 기이한 징조로 말미암아 제게 적대하는 자는 자연 기세가 꺾여 멸망해갔는데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빼앗았습니다. 이제 천하를 평정한 뒤로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고 외로운 자들을 불쌍히 여겨 위로하니, 백성들이 부유하고 재물이 풍족하므로 지방마다 바치는 공물이 전보다 만 배나 늘었으니, 본조의 개벽 이래로 조정의 성대함과 수도의 장관이 오늘날보다 더한 적이 없었습니다.
비록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오래 산다 해도 예로부터 백 년을 넘지 못하는 데 어찌 답답하게 이곳에만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나라가 산과 바다로 막혀 멀리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한 번에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에 들어가 우리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심어 놓고, 교토의 다스림과 교화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제 마음입니다. 귀국이 앞장서서 입조한 것은, 앞일을 깊이 헤아린 처사이므로 이제는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먼 곳의 작은 섬에 있는 무리라도 뒤늦게 복속해온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에 나온다면 더욱 이웃으로서의 맹약이 굳게 될 것입니다. 제 소원은 삼국에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방물은 목록대로 받았습니다. 몸을 보중하고 아끼십시오.

일본국 관백 히데요시
질문: 히데요시는 동아시아 전역을 지배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어떻게 정당화하고 있는가?

3. 간략 분석

Wadswoth Cengage Learning 출판사의 세계사 교과서 1권이다. 대부분의 미국 세계사 교과서들처럼 이 교과서도 이전보다 한국관련 오류가 줄어들었지만, 아직 일부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과하게 기술하는 부분들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예를 들면, 한 무제의 침입 이후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었다는 기술,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작은 식민지를 건설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신라가 한반도 남부에 있던 일본 식민지들을 척결했다는 기술이 나온다.
한국과 중국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은 다음 기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초기 농경 사회는 모두 궁극적으로 거대한 이웃인 중국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 베트남은 수천 년 동안 중국의 지배 아래 있었고, 한국은 독립 국가였지만 오랫동안 중국에 조공을 바쳤으며, 많은 방면에서 중국의 문화적 선례를 따랐다.” 한국이 독립 국가였지만 중국에 조공을 받쳤고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본다.
이외의 한국 관련 주요 내용 가운데는, 한국의 가원, 한나라의 한반도 북부 점령,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과 중국 격퇴, 한국의 불교 전래와 불교문화(불국사, 석굴암, 대장경 인쇄술), 한국의 구어를 적기 위한 표음문자 창제,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 같은 부분들을 포함한다.

4. 검토 의견

페이지 한국 관련 기술 내용 검토 의견 개선 과제 코드
p. 286 지도에 한반도 전체가 몽골제국 영역에 포함된 것으로 표시됨 몽골의 내정간섭을 받았던 시기에도 고려는 독립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몽골(원)과 한국(고려)의 국경선을 표시하고, 몽골의 영역에서 한반도를 제외시켜야 한다. 또한 ‘고려’라는 정확한 국명을 표기해야 함 C3
p. 318 이 문제로 여전히 격론이 진행 중이지만,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원전 109년,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한 무제의 한사군 설치 연도는 기원전 108년임. C3
p. 318 이 문제로 여전히 격론이 진행 중이지만,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원전 109년,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후 수 세대 동안, 이 지역은 한나라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중국의 주에 분할 편입되어, 중국의 제도가 도입되었다. 한나라의 무제는 고조선을 침략하여 멸망시키고 이 지역에 4군현을 설치하였으나 3개 군현은 곧 폐지되었으며 비교적 오랫동안 지속된 낙랑 역시 최근에 와서는 중국의 직접 지배지역이라기보다는 유이민들이 세운 자치도시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4군현은 중국 기록에서조차 부정확하게 언급되어 있어 통치력이 실제로 미쳤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한반도 북부가 중국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었다”, “이후 수 세대 동안 이 지역은 한나라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중국의 주에 분할 편입되었다”는 부분을 삭제해야 함. C3
p. 318 결국 한반도에는 세 개의 왕국이 생겨났다. 북쪽의 고구려, 서남부의 백제, 동남부의 신라였다. 비슷한 시기에 야마토 평원에 나라를 세운 일본이 남부 해안에 작은 식민지를 건설했을지도 모른다.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작은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주장은 역사적 근거가 없으므로 삭제해야 함. C3
p. 319 그 후 신라의 통치자들은 압록강 일대를 제외하고 한반도에서 중국을 몰아내었다. 거만한 중국인들을 달래기 위해 신라는 당나라의 조공국 지위를 받아들였다. 이 기간에 신라는 한반도 남부에 남아 있던 일본 식민지들을 척결했다.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작은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주장은 역사적 근거가 없으므로 삭제해야 함. C3
p. 319 고려는 침략을 막아내며, 400년간 명맥을 이었다. 이웃 중국에 강력한 왕조가 부재한 덕이 컸다. 한국은 고려시대에도 요(Khitan)와 금(Jin) 같은 강력한 국가들과 전쟁을 벌이며 국가를 유지해갔다. “이웃 중국에 강력한 왕조가 부재한 덕이 컸다”는 부분은 삭제해야 함. C3
p. 320 고려는 살아남을 수는 있었지만, 몽골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했고, 몽골의 세력이 쇠퇴하자 고려도 함께 쇠락했다. 중국에서 명나라의 세력이 떠오르자 고려는 무너졌고 권력은 장군 이성계의 손에 들어갔다. 고려의 쇠락은 몽골의 쇠퇴와 관련이 없다. 오히려 몽골이 쇠퇴하자 고려는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으며 북쪽으로 고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 고려의 쇠락은 한국 내적인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 말미암았다. “몽골의 세력이 쇠퇴하자 고려도 함께 쇠락했다”는 부분은 삭제해야 함. C3
p. 504 과대 망상적 야심이 거의 고스란히 드러난 이 서신에서 히데요시는 이씨 왕조의 지배자가 중국 공격을 지원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복수를 당하게 될 것이라 선언했다. 하지만 한국의 왕은 서쪽의 강력한 이웃을 더 두려워했고, 히데요시의 동맹 요구를 거절했다. 조선 정부가 히데요시의 요구를 거부한 것은 그 요구가 오만하고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며 조선이 명나라를 두려워했기 때문과는 별 관련이 없다. “한국의 왕이 서쪽의 강력한 이웃을 더 두려워했고, 히데요시의 동맹 요구를 거절했다”는 부분을 삭제해야 함. C3


- 개선 과제 코드 -
개선 과제 유형
A: 동해·독도 표기 수정 필요 B: 단순표기 C: 내용 수정 필요 D: 내용 증·신설 필요 E: 기타
A1: 동해 표기 A2: 독도 표기 C1: 통계 C2: 과거 사실 C3: 객관적 기술 D1: 증설 필요 D2: 신설 필요

연계 정보

관계 대상 문서 설명
isRelatedTo 교육제도:미국 미국 교육과정, 2014년 조사 보고
isReviewOf 교과서 서지사항 분석대상 교과서 서지사항
isPartOf 종합분석:미국 2014년 미국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