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미국:World History Volume 2: Since 1500, 7th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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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차

지도
박스글
참고문헌
서문
감사의 말
언어와 연대결정에 대해 학생들에게 전하는 말
세계사 이해를 위한 주제
1500년까지의 세계사

3부 새로운 세계 질서의 등장(1500-1800)

14 새로운 만남: 세계시장의 탄생
탐험과 확장의 시대
-이슬람과 향신료 무역
-서아프리카의 이슬람 전파
-새로운 참가자: 유럽
해양제국 포르투갈
-인도의 포르투갈인들
-향신료 탐색
-새로운 경쟁자들의 출현
“신세계” 정복
-항해
-정복
-제국의 통치
-미션(1986)
-경쟁의 격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영웅인가, 악당인가?
-콜럼부스의 교환
과도기 아프리카
-아프리카의 포르투갈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
-노예무역
-변화하는 대륙의 정치, 사회구조
향신료 무역 시대의 동남아시아
-서양의 도래
-문명의 행진
-식민지 시대 이전 동남아시아의 국가와 사회
-국왕 서신의 교환

15 유럽의 변신: 종교개혁과 국가 건설
16세기의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배경
-마르틴 루터와 독일의 종교개혁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전파
-종교개혁 논쟁: 마르부르크 분쟁
-가톨릭의 종교개혁
-초기 근대 세계의 결혼
위기의 유럽(1560-1650)
-16세기의 정치와 종교 전쟁
-경제, 사회 위기
-17세기의 위기: 혁명과 전쟁
위기에 대한 대응: 절대주의의 실천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
-중부유럽과 동유럽의 절대주의
영국과 입헌군주제
-왕과 의회의 충돌
-내전과 연방
-왕정복고와 명예혁명
유럽 문화의 융성
-미술: 바로크
-미술: 네덜란드 사실주의
-영국 문학의 황금시대

16 이슬람 제국
오스만투르크 제국
-오스만투르크의 부상
-제국의 확장
-전쟁 양상의 변화
-투르크 지배의 본질
-오스만 투르크의 종교와 사회
-오스만 투르크의 쇠퇴
-오스만 투르크의 미술
사파비조(Safavids)
-사파비조의 부상
-왕조의 몰락
-사파비조의 정치와 사회
-사파비조의 미술과 문학
무굴 제국의 위엄
-바부르(Babur): 무굴제국의 시조
-악바르와 인도-이슬람 문명
-악바르의 후계자들
-인도에서 나타난 유럽 세력의 영향
-후글리 항구의 점령
-무굴 제국: “화약의 제국?”
-무굴 제국 하의 사회: 문화의 통합
-무굴 제국의 문화

17 동아시아 세계
절정에 다다른 중국
-명나라에서 청나라까지
-청나라의 위대함
변화하는 중국
-인구 폭발
-산업화의 씨앗
-인구폭발
-청나라의 일상
-문화 발전
도쿠가와 일본
-3 명의 위대한 천하인
-서양에 대한 문호 개방
-도쿠가와의 “위대한 평화”
-촌락의 삶
-도쿠가와의 문화
한국과 베트남
-한국: 위험한 이웃
-베트남: 제국의 위험

18 신세계질서를 목전에 둔 서양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을 향하여: 서양의 지적 혁명
-과학혁명
-계몽주의의 배경
-프랑스 계몽사상가들과 그 사상
-과학혁명
-계몽시대의 문화
-경제 변화와 사회질서
-새로운 경제 질서
-18세기의 유럽 사회
-아메리카의 식민제국과 혁명
-서인도 제도
-영국령 북아메리카
-프랑스령 북아메리카
-미국 독립 혁명
새로운 정치질서와 세계 분쟁을 향하여
-프로이센: 군대와 관료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제국
-예카테리나 여제 치하의 러시아
-재고되는 계몽절대주의
-변화하는 전쟁의 양상: 세계적 대립
프랑스 혁명
-프랑스혁명의 배경
-삼부회의에서 국민의회로
-마리 앙투아네트(2006)
-구체제의 파멸
-프랑스 민중의 자연권: 두 가지 관점
-급진적 혁명
-반동과 집정부
나폴레옹 시대
-나폴레옹의 부상
-국내 정치
-나폴레옹 제국

4부 세계사의 근대 패턴(1800-1945)

19 근대화의 시작: 19세기의 산업화와 내셔널리즘
산업혁명과 그 영향
-영국의 산업혁명
-산업화의 확산
-산업혁명
-산업화 확산에 제약이 걸린 지역
-산업혁명의 사회적 영향
산업 번영의 성장
-새로운 제품
-새로운 패턴
-세계경제의 등장
-산업화의 확산
-여성과 노동: 새로운 취업 기회
-노동계층의 조직
반동과 혁명: 내셔널리즘의 성장
-보수 질서
-변화의 힘
-혁명과 개혁(1830-1832)
-1848년 혁명
-혁명에 대한 반응: 두 가지 관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동구 문제(Eastern Question)
국가통합과 민족국가(1848-1871)
-이탈리아의 통일
-독일의 통일
-영 빅토리아(The Young Victoria)(2009)
유럽의 국가(1871-1914)
-서유럽: 정치적 민주주의의 성장
-중부유럽과 동유럽: 사라지지 않은 구(舊)질서
-국제적 경쟁과 전쟁의 회오리
-오스만투르크제국과 발칸반도의 내셔널리즘

20 아메리카와 서양의 사회문화
19세기-20세기 초의 라틴아메리카
-독립전쟁
-국가 건설의 어려움
-라틴 아메리카 경제와 사회의 전통과 변화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변화
북아메리카의 이웃국가: 미국과 캐나다
-미국의 성장
-미국의 부상
-캐나다의 발전과정
서양의 대중사회 등장
-새로운 도시 환경
-대중사회의 사회구조
-여성의 경험
-여성에게 보내는 조언: 두 가지 관점
-대중사회 시대의 교육
-내셔널리즘의 부상
-대중사회 시대의 여가
문화생활: 서방세계의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낭만주의의 특징
-과학의 새로운 시대
-문학과 미술의 사실주의
근대의식을 향해: 지성적, 문화적 발전
-새로운 물리학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
-다윈의 영향: 사회다윈주의(사회진화론)와 인종주의
-근대성의 문화

21 밀려오는 제국주의
식민 지배의 확산
-동기
-전술
-옛 제국주의와 새로운 제국주의
식민지 체계
-식민주의의 철학
-백인의 짐, 흑인의 슬픔
영국 통치 하의 인도
-식민지 개혁
-식민주의의 대가
동남아시아의 식민 정권
-“동방의 기회(Opportunity in the Orient)"
-동남아시아에서의 식민지 쟁탈
-식민통치의 본질
아프리카에서의 제국 건설
-서아프리카에서 커져가는 유럽 세력
-나일 강에 드리워진 제국주의의 그림자
-동아프리카의 아랍 상인과 유럽 선교사들
-카슘공방전(Kharoum)(1966)
-남부아프리카의 반투(Bantu) 족, 보어인(Boer), 영국인
-아프리카 쟁탈전
-아프리카의 식민주의
반(反)식민주의의 등장
-독립국 지위의 태동
-전통의 저항: 내셔널리즘의 선도자
-제국주의: 대차대조표
-저항하거나 저항하지 않거나

22 태평양에 드리운 그림자: 도전에 직면한 동아시아
만주족[청나라]의 쇠퇴
-아편과 반란
-개혁 노력
-제국주의의 절정
-구(舊)질서의 붕괴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1987)
과도기의 중국
-경제: 전통이란 장애물
-제국주의의 영향
-청나라의 일상
-제국주의와 세계 환경
부국강병: 근대 일본의 부상
-개국(開國)
-메이지유신
-제국주의 열강 합류
-서양문명의 경이: 두 가지 관점
-두 가지 세계관
-과도기의 일본 문화
-메이지 유신: 위로부터의 혁명

23 20세기 위기의 시작: 전쟁과 혁명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길
-내셔널리즘과 내부 불화
-군국주의
-전쟁의 발발: 1914년 여름
제1차 세계대전(The Great War)
-1914-1915: 미망과 교착
-1916-1917: 대학살
-전쟁의 확대
-영광의 길(Paths of Glory)(1957)
-국내 전선: 전면전의 영향
전쟁과 혁명
-러시아 혁명
-전쟁의 마지막 해
-평화협상
-화해에 대한 세 가지 목소리
불확실한 평화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
-안보의 추구
-대공황
-민주주의 국가
-소비에트 러시아의 사회주의
새로운 진실의 추구: 문화와 학문의 경향
-악몽과 새로운 비전
-예술계의 혁명
-무의식 탐색

24 내셔널리즘, 혁명, 그리고 독재: 1919년부터 1939년까지의 아시아, 중동, 라틴아메리카
내셔널리즘의 부상
-근대의 내셔널리즘
-간디와 인도 국민회의파
-간디(1982)
-중동의 내셔널리즘 반란
-근대세계의 이슬람: 두 가지 관점
-내셔널리즘과 혁명
중국의 혁명
-과학과 민주주의: 신문화운동
-내셔널리즘과 공산주의의 연대
-중화민국
-“타도공자점(打倒孔子店)”: 중화민국의 경제, 사회, 문화 변화
-인형의 집을 나와서
라틴아메리카의 내셔널리즘과 독재
-경제 변화
-종속의 영향
-라틴아메리카의 문화

25 위기의 심화: 제2차 세계대전
민주주의의 후퇴: 독재정권
-민주주의에서 멀어지다
-파시즘의 탄생
-히틀러와 나치 독일
-스탈린 시대의 소련
-일본 군국주의의 부상
전쟁에 이르는 길
-아시아, 전쟁에 이르는 길
-뮌헨 회담
제2차 세계대전
-전쟁 중 유럽
-전쟁 중 일본
-전쟁의 전환점(1942-1943)
-전쟁의 마지막 시기
새로운 질서
-유럽의 신(新)질서
-홀로코스트
-영화와 역사
-유로파, 유로파(Europa, Europa)(1990)
-아시아의 신(新)질서
국내 전선
-민중 동원
-근대화를 향한 길
-도시 폭격
전쟁의 여파
-제2차 세계대전의 대가
-제2차 세계대전과 유럽 식민지들: 탈식민지화
-연합국의 전후 처리 회담

5부 세계문명을 향하여 1945년 이후의 세계

26 냉전에 휘말린 동양과 서양
대동맹의 해체
-소련의 동유럽 장악
-내려가는 철의 장막
-트루먼 독트린
-마셜 플랜
-두 동강 난 유럽
아시아의 냉전
-중국 내전
-새로운 중국
-한국전쟁
-인도차이나의 분쟁
대립에서 공존으로
-동유럽의 소요
-소련의 동유럽 억압: 1956년 헝가리
-제3세계 내의 경쟁
-쿠바미사일 위기와 데탕트를 향한 움직임
-10월의 미사일(Missiles of October)(1973)
-중-소 분쟁
-평화로운 공존인가, 인민전쟁(people's war)인가?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
등가교환의 시대
-브레즈네프 독트린
-데탕트의 시대
-제3세계의 새로운 긴장
-악의 제국에 맞서
-새로운 세계 질서를 향하여
-지구촌인가 문명의 충돌인가?

27 멋진 신세계: 시험대에 오른 공산주의
전후의 소련
-스탈린에서 흐루시초프까지
-브레즈네프 시대(1964-1982)
-소비에트 블록 내의 문화 표현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 변화
소련의 해체
-고르바초프 시대
-동유럽: 위성국가에서 주권국가로
-소련은 왜 붕괴했는가?
붉은 동쪽: 공산주의 하의 중국
-새로운 민주주의
-사회주의로의 전환
-문화혁명
-마오쩌둥에서 덩샤오핑까지
-천안문 사태
-학생들의 민주주의 촉구
-유교로의 회귀?
“인민을 섬겨라”: 공산주의 하의 중국 사회
-계획 경제
-사회 문제
-변화의 시기 가족과 사회
-중국 문화의 변화
-공자와 마르크스: 끈질긴 전통

28 1945년 이후 유럽과 서반구
유럽의 회복과 부활
-서유럽: 민주주의의 승리
-타인의 삶(The Lives of Others)(2006)
-공산주의 후의 동유럽
-새로운 러시아
-유럽의 통합
초강대국의 등장: 미국
-베트남 시대 미국의 정치와 사회
-1973년 후의 우향우
캐나다의 발전
1945년 이후의 라틴아메리카
-마르크스 혁명의 위협
-내셔널리즘과 군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사례
-멕시코의 방식
서방세계의 사회와 문화
-새로운 사회의 등장
-성풍속의 반란
-청소년 시위와 학생시위
-전후 서방세계의 여성
-테러리즘의 성장
-이주노동자와 이민
-환경과 녹색운동
-이슬람과 서양: 프랑스의 세속주의
-1945년 이후의 서양 문화
-예술 경향
-과학과 테크놀로지 분야
-다양한 종교 생활
-산업시대부터 테크놀로지시대
-대중문화의 폭발

29 아프리카와 중동, 국가 건설의 어려움
우후루: 아프리카의 독립 투쟁
-식민지의 유산
-내셔널리즘의 부상
독립의 시대
-아프리카의 운명: 통합인가 다양성인가
-꿈과 현실: 독립 아프리카의 정치, 경제 상황
-해법의 탐색
-종교와 사회
근대 아프리카 사회의 지속과 변화
-교육
-도시와 시골의 일상
-아프리카의 여성
-아프리카 문화
-아프리카: 암흑의 대륙인가 빛의 땅인가?
-아프리카의 미래는?
분쟁의 초승달
-팔레스타인 문제
-나세르와 범아랍주의
-아랍-이스라엘 분쟁
-이란의 혁명
-페르세폴리스(Persepolis)(2007)
-페르시아 만의 위기
-아프가니스탄 분쟁과 이라크 분쟁
-중동의 혁명
현대 중동의 사회와 문화
-다양한 정치체제: 이슬람의 정치학
-중동의 경제: 석유와 모래
-이슬람 세계의 경쟁
-중동의 여성
-문학과 미술

30 태평양 세계를 향하여
남아시아
-종말을 맞은 영국의 인도지배
-인도의 독립
-반대 관점
-인도의 두 가지 비전
-정토(淨土): 독립 이후의 파키스탄
-남아시아의 빈곤과 다원주의
-하나의 세계, 하나의 환경
-독립 이후 남아시아의 미술과 문학
-인도의 미래는?
동남아시아
-식민시대의 종말
-냉전의 그림자
-정치개혁을 향하여
-가장 위험한 해(The Year of Living Dangerously)(1983)
-지역분쟁과 공조: 아세안(ASEAN)의 부상
-일상생활: 현대 동남아시아의 도시와 시골
-문화 경향
-유동적인 지역
일본: 아시아의 거인
-근대 일본의 변혁
-경제
-과도기 사회
-일본의 문화
-일본의 차이
작은 호랑이들
-한국: 분단된 반도
-타이완: 또 다른 중국
-싱가포르와 홍콩: 가장 작은 호랑이들
-아시아의 변방: 전후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동아시아의 기적에 대한 해설

에필로그
-용어사전
-지도 크레디트
-장별 노트
-찾아보기

2. 한국 관련 내용

p. 502
도쿠가와 미술 중(中)
일본 도자기 장인들은 훌륭한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한국에서 기술과 디자인을 모두 빌려왔다.

pp. 503-504
한국과 베트남
핵심질문: 이 시기 한국의 발전상은 중국과 일본의 상황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가? 베트남 문명의 고유한 측면은 무엇인가?

한국: 위험한 이웃
도쿠가와 막부 치하의 일본이 고유의 특징을 지닌 독특한 사회를 만들어가며 중국 제국의 그림자에서 꾸준히 벗어나고 있을 무렵 한국의 이씨 왕조(Yi Dynasty)는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중국의 모델을 계속하여 따르고 있었다. 이씨 왕조는 14세기 말엽 장군 이성계(Yi Song Gye[YEE song gye])가 건국하였고, 즉각 명나라와 가까운 정치적, 문화적 관계를 수립했다. 한반도 중심부의 한강 유역에 위치한 서울을 새로운 수도로 삼은 이씨 왕조는 강력한 이웃인 중국과의 조공관계를 수용하고 중국의 제도와 가치관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였다. 중국에서처럼 과거제도가 관료 후보생들의 유교 고전에 대한 지식을 평가하는 수단이 되었고 성공은 출세로 나아가는 필수적인 단계로 여겨졌다.
하지만 차이점도 있었다. 일본처럼 조선도 귀족 계층인 소위 양반 계층으로의 진입을 계속 제한했다. 동시에 농민들은 여전히 농노와 비슷한 처지였으며, 국가 소유의 토지나 엘리트 계층의 영지에서 일했다. 천민으로 불린 노예계층은 정부의 농장이나 백정이나 광대 같은 특정 직업군에서 일했으며, 다른 집단의 지위 아래에 있다고 간주되었다.
마침내 한국 사회는 중국 정통성에서 벗어나는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15세기 한국의 구어(한글)를 적기 위한 표음문자가 창제되었다. 처음에는 양반계층의 경멸을 받고, 교육용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결국에는 사적 서신이나 대중 소설을 위한 매체가 되었다. 동시에 경제 부문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농업생산성이 향상되어 인구 증가와 소규모 도시 산업과 상업 부문도 등장했다. 사회적으로는 양반 계층의 오랜 지배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양반 계층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권력과 영향력은 오히려 약화되었고, 이에 따라 일부 양반들은 상인이 되거나 농민 계층으로 유입되어 귀족과 평민 사이의 구분이 흐릿해져갔다.
한편, 이씨 왕조는 이웃국가로부터의 홀로서기에 지속적인 어려움을 맞이했다. 16세기 중 많은 시기에, 주된 위협은 북쪽에서 비롯되었다. 만주 지역의 세력이 압록강 바로 남쪽의 한국 영토(p. 494 지도 17.3 참조)를 괴롭혔다. 하지만 1580년대에 이르러, 더 큰 위협이 동쪽에서 다가왔다. 새롭게 통일된 일본이었다. 16세기 중 많은 시간 동안 일본의 다이묘는 오랜 내전에 휘말려 왔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열도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화하기 위해 투쟁을 벌였다. 셋 중 히데요시만이 바다 건너 제국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그는 평민으로 태어났지만, 장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고, 1580년대 후반에 명나라를 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p. 504 박스글 참조) 한국 왕 선조(1567-1608) 는 히데요시의 동맹 제안을 거절했고, 1592년 일본은 한반도를 침공했다.
처음에는 일본의 계획이 잘 진행되었다. 일본군은 한국의 지방을 초토화하며, 한국의 수도 서울로 진격했다. 하지만 한국은 결국 침략군의 다루기 힘든 상륙선을 파괴할 수 있는 빠른 중장갑함을 개발한 이순신 장군(1545-1598)의 탁월한 지휘 하에 반격을 가하여 독립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은 오래 가지 못했다. 1630년대에 이르러 만주족이 북방국경에서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만주족 군은 1630년대에 한국 북방을 침공하여 결국 이씨 왕조가 북경의 새 제국[청나라] 조정에 충성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유럽 상인과 선교사들의 도래를 겪지 않았지만, 중국에 다녀가는 사절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정보가 한반도에 전해졌고, 18세기 후반에는 소규모 가톨릭 공동체가 수립되기도 했다.

p. 504
박스: 내 형제가 되어라. 그렇지 않으면 머리를 부숴 버리겠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은 적들을 무찌르고 일본 열도를 자신의 통치 아래에 넣었다. 그 직후 한국의 이씨 왕조의 사신이 그의 성공을 축하하는 서신을 전달했다. 히데요시는 아래 소개된 서신에서 중국 본토를 정복하고 동아시아 전체를 통치하겠다는 계획을 드러냈다. 과대 망상적 야심이 거의 고스란히 드러난 이 서신에서 히데요시는 이씨 왕조의 지배자가 중국 공격을 지원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복수를 당하게 될 것이라 선언했다. 하지만 한국의 왕은 서쪽의 강력한 이웃을 더 두려워했고, 히데요시의 동맹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일본을 공격했고, 이는 소위 임진왜란(1592-1598)이라고 불렸다. 이로 인해 한반도는 어마어마한 고초를 겪었다.

일본국 관백(關白) 히데요시는 이 서신을 조선 국왕 전하에게 바칩니다.
보내신 서한을 기쁘게 읽고, 전하의 뚜렷한 흔적에서 느껴지는 향기를 음미하고자 재삼 펼쳐서 보고 접곤 했습니다.
우리나라 60여 주는 근래 여러 지역으로 분리되어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대대로 내려오는 예의를 저버리며 조정의 정사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3, 4년 사이에 반신과 적도를 토벌하여 먼 지역과 섬들까지 모두 장악하였습니다.
삼가 나의 지나온 자취를 살펴보건대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일개 신하였지만, 일찍이 어머님께서 나를 잉태할 때에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복술사가 ‘햇빛이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표인풍(八表仁風, 팔표란 팔방의 아주 먼 끝. 인풍은 어질고 덕스러운 교화)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러운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이토록 기이한 징조로 말미암아 제게 적대하는 자는 자연 기세가 꺾여 멸망해갔는데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빼앗았습니다. 이제 천하를 평정한 뒤로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고 외로운 자들을 불쌍히 여겨 위로하니, 백성들이 부유하고 재물이 풍족하므로 지방마다 바치는 공물이 전보다 만 배나 늘었으니, 본조의 개벽 이래로 조정의 성대함과 수도의 장관이 오늘날보다 더한 적이 없었습니다.
비록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오래 산다 해도 예로부터 백 년을 넘지 못하는 데 어찌 답답하게 이곳에만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나라가 산과 바다로 막혀 멀리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한 번에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에 들어가 우리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심어 놓고, 교토의 다스림과 교화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제 마음입니다. 귀국이 앞장서서 입조한 것은, 앞일을 깊이 헤아린 처사이므로 이제는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먼 곳의 작은 섬에 있는 무리라도 뒤늦게 복속해온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에 나온다면 더욱 이웃으로서의 맹약이 굳게 될 것입니다. 제 소원은 삼국에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방물은 목록대로 받았습니다. 몸을 보중하고 아끼십시오.

일본국 관백 히데요시
질문: 히데요시는 동아시아 전역을 지배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어떻게 정당화하고 있는가?

p. 643
그림 22.3 1900년 무렵 외세의 점령지와 영향력 범위]
9세기 말, 중국은 외국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멜론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색칠된 지역은 최근 외세의 영향력 아래 들어간 지역을 가리킨다.
일본해(동해) - 일본해와 동해 병기

p. 643 제국주의의 절정 중(中)
1894년 청나라는 일본과 전쟁에 돌입했다. 일본이 한반도에 진출함으로써 중국이 오랫동안 지켜온 한국에 대한 종주권(suzerainty)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p. 656
지도 22.4 메이지 시대 일본의 해외 확장
19세기 후반에 들어가며, 일본은 일본열도를 넘어 확장에 나섰고, 제국주의 열강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일본의 식민지 확장 범위가 이 지도에 나타나 있다.
한국은 1908년에 일본이 획득한 것으로 나온다
일본해(동해) - 일본해와 동해가 병기되어 있음

pp. 658-660
제국주의 열강 중(中)
<전략>
2년 후 일본 해군은 한국이 중국 상인들에게 3개 항구를 개항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한국은 오랫동안 일본의 사례[쇄국주의]를 따랐고, 중국에 보내는 조공사절 외에는 외세와의 접촉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주로 중국이나 프랑스에서 파견된 기독교 선교사들은 크게 박해 당했다. 하지만 한국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내부적이었다. 1860년대 초, 중국의 태평천국 운동에서 부분적으로 영향 받은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후 이씨 왕조는 전통 가치의 회복과 외세 개입을 차단하면서 국력 강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시골 지역의 빈곤과 부정부패가 만연해졌다. 1871년 일본의 페리 제독 사례를 뒤쫓아 미군 함정이 한국의 개항을 노렸지만 상당한 인명 손실을 입은 채 쫓겨났다.
하지만 가장 끈질기게 한국에 구애한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군신관계를 종식시키고, 일본의 방식에 따라 한국을 근대화시키고자 했다. 1876년 두 나라는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인지해 주는 대가로 일본 상인들에게 3개 항구를 개항하기로 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1880년대, 한국을 놓고 중국과 일본과의 경쟁이 격화되었다. 중국은 한국 조정의 보수파를 지원했으며, 일본은 중국의 오랜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비교적 급진적인 세력을 지원했다. 1894년 한국 지방 지역에서 새로운 봉기가 발발하자, 중국과 일본은 각기 반대편에서 개입했다. 전쟁 동안 일본 해군은 중국 군선을 격파하고 청나라의 뤼순을 점령했다.(p. 659 박스 글 참조)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중국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으며, 타이완과 전략적 해군기지인 뤼순 항과 함께 요동 반도를 일본에 이양해야 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유럽 열강의 압력에 따라 중국에 요동 반도를 돌려주었지만, 20세기 초에 다시 공세로 나왔다.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러시아와도 경쟁을 버렸고 양국 관계는 점차 경색되었다. 1904년 일본은 러시아가 1898년 중국에서 탈취한 뤼순항의 러시아 해군 기지를 기습했다. 일본군이 약세였지만 러시아는 새로운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통한 보급 문제에 부딪혔고, 국내의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에 시달렸다. 1905년 일본 함대가 한국 연안에서 러시아 함대를 거의 전멸시킨 후 러시아는 굴욕적인 평화조약에 합의 하며, 전략적 요충지인 요동 반도를 일본에 돌려주는 한편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까지 넘겨줘야했다. 러시아는 또한 한국과 만주 남부에 구축해 두었던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포기는 것에 합의했고, 이는 곧 일본의 통제 하에 넘어가게 되었다. 일본의 승리를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이는 동남아시아의 식민지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백인이 천하무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후 수년 동안, 일본은 1908년 한국을 병합(annexing Korea in 1908 as an integral part of Japan)하는 등 동북아시아에서 자국의 위치를 공고화했다. 한국인들이 이에 저항하자, 일본은 보복을 가해 수천 명을 죽음에 몰아넣었다. 미국은 이 병합(annexation)을 인정한 최초의 국가였다. 일본 정부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고 문호 개방 정책을 수용한 데 대한 보답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아시아 국가로부터의 이민에 제동을 걸자, 양국 간의 서로에 대한 의혹은 커져갔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러-일 전쟁을 중재하는 과정에서 러시아에 배상금을 요구한 일본의 입장을 거부하자 많은 일본인들의 공분을 샀다. 반면, 일부 미국인들은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키워가며 명백하게 드러난 황화(黃禍, yellow peril)의 부상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p. 660
연대기: 제국주의 시대 일본과 한국
도쿄 만에 당도한 페리 제독 1853
타운젠드 해리스 조약 1858
도쿠가와 막부의 몰락 1868
미국 함대의 한국 개항 실패 1871
일본의 봉건제 철폐 1871
일본 제국군대 창설 1871
메이지 헌법 채택 1890
교육에 대한 황국칙령 1890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타이완을 차지한 일본 1895
러-일 전쟁 1904-1905
일본에 합병된 한국 1908

p. 659
반대 관점: 두 가지 세계관
19세기 동안, 중국이 외부 세계를 바라보는 위계적 방식에 심각한 도전이 발생했다. 아시아에서 새로운 영토를 노리는 유럽 국가들뿐만 아니라 부국강병을 위한 핵심은 식민제국이라는 서양의 관점을 받아들이며, 열강으로 부상한 일본도 위협이었다. 일본의 첫 번째 목표는 중국의 오랜 종속국이던 한국이었고, 1894년 중국과 일본이 한반도를 놓고 벌이던 경쟁은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다음은 양국의 통치자들이 발표한 선전포고이다. 중국이 일본을 경멸적으로 지칭한 왜인(Wojen, "dwarf people")에 주목해 보라.

대(對)중국 선전포고
한국은 독립국이다. 한국은 일본의 조언과 지침에 의해 처음으로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중국을 관습적으로 중국의 속국(dependancy)으로 봉해왔으며 공개적으로 또는 암암리에 한국의 내정에 간섭했다. 최근 한국에 반란이 일어나자 중국은 종속국(dependancy)을 원조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짐은 1882년 한국과 체결한 조약에 따른 직권에 의하여, 그리고 위급 상황의 발생 가능성에 대비하여 한국에 군사를 파견한다.
끊이지 않는 혼란으로 인한 재앙에서 한국을 원조하고, 이에 따라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유지하려는 바람으로 일본은 이 목적의 성취를 위해 중국의 협조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온갖 구실을 내밀었다. 중국의 이러한 행위는 황국의 권리와 이익에 직접적인 타격일 뿐만 아니라 동양의 영구적인 평화와 평온에 위협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짐은 중국에 대한 공식적인 선전 포고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對)일본 선전포고
한국은 지난 200년간 우리의 조공국이었다. 한국은 지금껏 우리에게 조공을 바쳐왔으며, 이는 전 세계가 아는 바이다. 지난 십여 년간 한국은 반복된 반론으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으며, 짐은 작은 조공국에 대한 동정을 금치 못하여 수차례에 걸쳐 원조를 제공했다. 올해 한국에서 또 다른 반란이 시작되었고, 한국 왕이 우리에게 반란 진압을 위한 원조를 수차례에 걸쳐 요청했다. 이에 짐은 이홍장에게 한국에 파병하도록 명하였으며, 이들이 [한국] 애산에 당도하자마자 반란군은 즉각 흩어졌다. 하지만 왜인(Wojen)이 어떤 명분도 없이 한국에 군대를 보내어 서울에 진입하였고, 병력이 1만을 넘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증원하였다. 동시에 일본은 온갖 방도로 한국인들을 위협하는 태도를 보이며, 한국 왕을 겁박하여 정부 체제를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이 조약을 위반하고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았으며, 이제는 거짓되고, 기만적인 행위로 가득하여 적대감을 내보이면서 스스로를 여러 강대국들의 규탄의 대상이 되니, 이에 짐은 중국이 항상 온갖 뒤얽힌 관계 속에서 박애와 완벽한 정의를 따라왔으며, 반면, 왜인은 모든 국가들 간의 법과 조약을 깨트림으로써 우리의 인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한다. 이에 따라 짐은 이홍장에게 명하여 짐의 여러 군에 엄격한 명을 내려 속히 왜인을 그 소굴에서 뿌리 뽑으려 한다.
Q: 위 선전포고문에 나타난 19세기 말 중국과 일본의 세계관을 비교해 보자. 어느 관점이 더 설득력이 있는가?

p. 749
아시아의 새로운 질서 중(中)
<전략>
유럽 점령지의 독일 병사들처럼, 일본군도 종종 피정복지의 주민들의 생명을 경시했다. 1937년 중국 난징 정복과정에서 일본군은 며칠 동안을 살인, 강간, 약탈에 몰두했다. 거의 80만 명의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보내졌는데 그들은 대부분 강요된 노동자로 보내졌다. 한국과 필리핀 여성 수만 명이 일본군을 위한 “위안부(comfort women)”(매춘부)로 강제로 복역해야 했다.
(Almost 800,000 Koreans were sent overseas, most of them as forced laborers, to Japan. Tens of thousands of women from Korea and the Philippines were forced to serve as “comfort women” (prostitutes) for Japanese troops.)
<후략>

p. 770
지도 26.2 중국내전
일본해(동해) - 일본해와 동해가 병기되어 있음

pp. 771-772
한국전쟁
한국전쟁의 갑작스런 발발은 동아시아에서의 냉전을 심화시켰다. 1894-95년의 중일 전쟁이후, 오랫동안 중국의 조공국이었던 한국은 점차 일본과 러시아의 경쟁 구도 아래로 빠져들었다. 1905년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를 거둔 이후, 한국은 일본 제국에 합병되었고, 이는 1945년까지 이어졌다. 한국을 일본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의 목표 중 하녀였으며,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전날, 소련과 미국은 한국을 38선을 기점으로 나누어 점령하기로 합의했다. 양국의 본래 계획은 평화를 회복한 후 독립 정부 아래 한국을 통일하여 총선을 치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소 관계가 악화되면서, 한국에는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북쪽에는 공산주의 정부가, 남쪽에는 반공정부가 들어섰다.
남북의 긴장은 분계선을 따라 격화되었고, 1950년 6월 25일 스탈린의 암묵적인 승인 하에 북한군이 한국을 침공했다. 트루먼 정부는 즉각 미 해군과 공군에게 한국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UN 안전보장이사회(소련 대표단은 UN이 중국 신정부의 가입을 거부하는 것에 항의하기 위해 출석하지 않은 상태였다) 회원국들이 UN헌장의 안보 조항에 따라 북한의 남침에 공통으로 반격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9월에 이르러, UN군은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하에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진ㄴ격했다. 통일 한국에 비공산주의 단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목표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중국군이 압록강으로 접근하자 UN군(대부분은 미군이었다)이 중국의 개입을 촉발할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맥아더는 중국이 대응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다. 하지만 11월, 중국의 “자원” 군이 북한 측에 서서 전쟁에 개입했고 UN 군을 남쪽으로 어지러이 몰아붙였다. 전쟁은 계속됐지만, 결국 본래의 분계선이었던 38선 근처에 고착된 방어선이 수립되었다.(지도 26.3 참조)
많은 미국인들에게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아시아의 공산주의 확산을 노리는 중국의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난 증거였다. 그리고 최근의 증거는 마오쩌둥이 아시아에 혁명의 물결이 일어날 것이라 확신하여 북한의 남침에 힘을 보태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중국이 참전 결정을 내린 가장 큰 이유는 적국인 미군이 중국 국경에 주둔하고 국경을 넘어 공격을 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맥아더는 공산주의 중국에 대한 공격의 전초전으로 만주의 도시들에 공습할 것을 공개적으로 촉구함에 따라 이러한 공포를 더욱 키웠다.
어쨌든 한국전쟁의 발발은 중국에게 특히 불행한 일이었다. 침공 직후, 트루먼 대통령은 중국의 타이완 침공을 방지하기 위해 제7함대를 타이완해협으로 급파했다. 더욱 불운한 일은, 이 침공이 유럽 국가들이 지닌 중국의 새로운 정부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심화시켰으며, 이후 20년 동안 자본주의 강대국들로부터 중국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은 타이원의 내셔널리즘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대우했고, 중국의 UN 안보리 가입을 보류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결과적으로 본토 중국은 모든 형태의 경제적, 기술적 원조를 제한 당했고, 어쩔 수 없이 소련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했다.

p. 772
[지도 26.3 한반도]
1950년 6월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한국을 기습 침공했다. 이 지도에는 1953년 종전을 알린 휴전선이 표시되어 있다.
Q: 압록강의 의의는 무엇인가?
일본해(동해) - 일본해와 동해가 병기되어 있음

p. 913
[지도 30,3 현대 일본]
현재 일본을 구성하는 4개 주요 섬을 볼 수 있다.
일본해(동해) - 일본해와 동해가 병기되어 있다.

p. 914
일본: 아시아의 거인 중(中)
문제는 단순히 학술적인 것이 아니다. 동아시아에는 아직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며, 이 지역 국가들과 일본의 관계가 최근 중국해에 잇는 작은 섬의 영유권을 놓고 한국과 중국과 다툼을 벌인 끝에 경색되었다. 군사의 적절한 역할은 일본에서 격렬한 논쟁의 주제였다. 일부 관측통들은 일본이 미국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며 아시아 문제에 있어 더 큰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우려는 최근 몇 년 동안 더 커져왔다. 이웃 북한의 잠재적인 핵 위협(“뒤의 ”한국: 분단된 반도“ 참조)과 강력한 중국의 공격적인 태도는 많은 일본인들에게 위험한 동네에 살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였다.

pp. 918-919
한국: 분단된 반도
세계가 일본 열도의 경제 기적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일본해 건너 아시아 대륙에서 또 다른 기적이 벌어지고 있었다. 1953년 한반도는 3년간의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해 피폐해져 있었다. 이 분쟁으로 38선 양쪽에서 약 4백만 명의 한국인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인구의 1/4이 난민이 되었다. 1953년 6월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적대적인 두 나라가 중무장한 채 서로를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불안한 평화였다.
휴전선 북쪽에는 공산주의 지도자 김일성(1912-1994)이 독재통치를 하는 경찰국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있었다. 남쪽에는 역시 그만큼 독재적 대통령 이승만(1875-1965) 치하의 대한민국이 있었다. 이승만은 북한의 침공에 맞서 저항을 이끈 강경한 반공자의자였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이 부유한 지주계층에 의존하는 이승만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다. 정부의 부패, 부정선거, 경찰의 행패로 대표되는 혹독한 통치가 몇 년간 지속된 후 1960년 봄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이승만을 하야하게 했다.
이승만 시대가 지난 후 잠시 동안 다당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섰으나, 1961년 쿠데타가 발발해 박정희 장군(1917-1979)이 정권을 잡았다. 새로운 정권은 새 헌법을 발표했고, 1963년 박정희는 민간 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십 년간의 외세통치와 내전으로 황폐화된 경제 회복을 주창하고 나섰다. 일본 통치 하에서 민간 부문이 상대적으로 약했었기 때문에 정부는 특정 산업의 발전, 수출 진흥, 인프라 개발을 목표로 하는 일련의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며, 경제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토지개혁 정책을 통해 거대 지주들이 7.4에이커 이상의 농지를 전부 소작인들에게 염가에 팔아야 했다.
토지개혁은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검약, 교육 중시, 근면 등 유교 원리를 비롯해 일본의 자본과 기술 덕택에 한국은 점진적으로 동아시아의 산업 강국으로 떠올랐다. 경제성장률은 1950년대 연 5퍼센트 미만이었던 것이 박정희 시대에 평균 9퍼센트로 뛰어올랐다. 삼성, 대우, 현대 등 대기업들은 재벌(chaebol)이라 불리는 거대 기업집단으로 변신했다. 재벌은 전쟁 전 시기 일본의 자이바츠(Zaibatsu, 財閥)와 유사하다.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과 놀라우리만치 높은 저축률 이용한 한국 기업들은 아시아, 나아가 세계 수출시장에서 일본과 적극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1인당소득 또한 현저하게 상승했다. 1960년대 연간 90달러 미만이었던 것이 20년이 지나자 1,560 달러(공산주의 북한의 2배)로 껑충 뛰었다.
[919] 하지만 동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처럼 한국은 민주주의 원칙 발전에는 더뎠다. 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있는 정부였지만, 박정희는 권위주의적 수단으로 통치를 지속했고, 모든 형태의 반대를 억눌렀다. 1979년 박정희는 암살당했다. 하지만 잠시의 공백 이후, 1980년 전두환 장군(1931~ )이 정권을 거머쥐었다. 새 정권은 전임정부처럼 권위주의적이었고, 1987년 권위주의 통치에 반대한 학생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발발했다.
1989년 마침내 총선이 치러져 한국은 민간인의 통치를 되찾았다. 이후 대통령들은 부정부패를 억제하는 가운데, 재벌을 단속하고 북한의 공산주의 정권과 접촉을 시작하며 통일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1997년 아시아금융위기이후, 경제상황은 일시적으로 악화되었지만, 한국은 이내 회복하여 여전히 국제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여가고 있다. 한국의 커져가는 자신감을 상징하는 것은 2007년 선출된 신임 대통령이다. 전 서울시장인 이명박(1941- )은 서울 단장과 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정력적으로 일했으며, 특히 주 5일 근무제를 정착시켰다.
한편, 현재는 김일성의 아들인 김정일(1941~ )의 독재가 이어지며, 핵 보유를 목전에 둔 북한과의 관계는 여전히 긴장 상태이다. 북한 정권이 핵무기개발프로그램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다국 회담이 수년 간 이어지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없다.

p. 918
지도 1953년 이후 한반도
일본해(동해) - 일본해가 동해와 병기되어 있음.

3. 간략 분석

Wadswoth Cengage Learning 출판사의 세계사 교과서 2권이다. 한국 관련 주요 내용으로 임진왜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병합, 일본에 의한 전시 강제 동원, 한국분단과 한국전쟁, 한국의 경제성장과 민주화 등이다.
부분적으로 한국의 중국에 대한 종속을 드러내는 부분들이 나온다. 한국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갈등을 다룬 부분에서 “중국이 오랫동안 지켜온 한국에 대한 종주권(suzerainty)”, “중국의 오랜 종속국이던 한국”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한국인들의 강제 노동과 위안부 문제를 언급한다. “거의 80만 명의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보내졌는데 그들은 대부분 강요된 노동자로 보내졌다. 한국과 필리핀 여성 수만 명이 일본군을 위한 “위안부(comfort women)”(매춘부)로 강제로 복역해야 했다.”

4. 검토 의견

페이지 한국 관련 기술 내용 검토 의견 개선 과제 코드
p. 504 과대 망상적 야심이 거의 고스란히 드러난 이 서신에서 히데요시는 이씨 왕조의 지배자가 중국 공격을 지원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복수를 당하게 될 것이라 선언했다. 하지만 한국의 왕은 서쪽의 강력한 이웃을 더 두려워했고, 히데요시의 동맹 요구를 거절했다. 조선 정부가 히데요시의 요구를 거부한 것은 그 요구가 오만하고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며 조선이 명나라를 두려워했기 때문과는 별 관련이 없다. “한국의 왕이 서쪽의 강력한 이웃을 더 두려워했고, 히데요시의 동맹 요구를 거절했다”는 부분을 삭제해야 함. C3
p. 643 1894년 청나라는 일본과 전쟁에 돌입했다. 일본이 한반도에 진출함으로써 중국이 오랫동안 지켜온 한국에 대한 종주권(suzerainty)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중국에 조공을 바쳤지만 정치적 독립을 유지했다. “중국이 오랫동안 지켜온 한국에 대한 종주권”이라는 부분을 삭제해야 함. C3
p. 656 <지도 22.4: 메이지 시대 일본의 해외 확장>에 한국은 일본이 1908년에 획득한(territorial acquisitions) 것으로 나온다. 일본에 의한 한국 강제병합이 일어난 해는 1910년임. C3
p. 659 일본의 첫 번째 목표는 중국의 오랜 종속국이던 한국이었고 한국은 중국에 조공을 바쳤지만 정치적 독립을 유지했다. “중국의 오랜 종속국이던 한국이었고”라는 문구를 삭제해야 함. C3
p. 659 이후 수년 동안, 일본은 1908년 한국을 병합(annexing Korea in 1908 as an integral part of Japan)하는 등 동북아시아에서 자국의 위치를 공고화했다. 일본에 의한 한국 강제병합이 일어난 해는 1910년임. C3
p. 918 박정희 대통령은 수십 년간의 외세통치와 내전으로 황폐화된 경제 회복을 주창하고 나섰다. ... 토지개혁 정책을 통해 거대 지주들이 7.4에이커 이상의 농지를 전부 소작인들에게 염가에 팔아야 했다. 이 내용의 토지개혁은 이승만 정부 때 있었던 내용으로 '토지개혁 정책을 통해 7.4에이커 이상의 농지를 전부 소작인들에게 염가에 팔아야 했다.'는 부분을 삭제하고 이 내용을 이승만 정부 부분에 반영해야 함. C3
p. 919 하지만 잠시의 공백 이후, 1980년 전두환 장군(1931~ )이 정권을 거머쥐었다. 새 정권은 전임정부처럼 권위주의적이었고, 1987년 권위주의 통치에 반대한 학생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발발했다.
1989년 마침내 총선이 치러져 한국은 민간인의 통치를 되찾았다.
한국은 1987년 학생들을 비롯한 시민들의 항쟁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여 민주주의를 진작시켰다. 1988년 총선에서 야당들이 과반수 의석을 획득하여 민간인 통치를 진작시켰다. 또한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비군 출신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어 민간인 통치를 완전히 회복했다. 1987을 1988로 수정해야 함. C3


- 개선 과제 코드 -
개선 과제 유형
A: 동해·독도 표기 수정 필요 B: 단순표기 C: 내용 수정 필요 D: 내용 증·신설 필요 E: 기타
A1: 동해 표기 A2: 독도 표기 C1: 통계 C2: 과거 사실 C3: 객관적 기술 D1: 증설 필요 D2: 신설 필요

연계 정보

관계 대상 문서 설명
isRelatedTo 교육제도:미국 미국 교육과정, 2014년 조사 보고
isReviewOf 교과서 서지사항 분석대상 교과서 서지사항
isPartOf 종합분석:미국 2014년 미국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