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미국:World History Volume 2: Since 1500, 7th Edition"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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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간략분석)
(2. 한국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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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관련 내용==
 
==2. 한국관련 내용==
  
'''p. 353'''<br>
 
지도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에서의 영향권이 그려져 있다. 한국은 일본의 영향권으로 표시되어 있다.]<br>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음<br>
 
  
심화학습: 세계사적 사건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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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502''' <br>
청일전쟁: 1868년의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개혁과 근대화의 시기에 들어섰고 제국주의 세력의 하나로 성장했다. (아래 좌측의 지도 참조) 일분은 서구의 군사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선진적인 산업경제를 발전시켰으며 심지어 그들이 정치체제를 서구화하기 까지 하였다. 일본이 경제적, 사회적, 군사적으로 팽0창하면서 민족주의의 부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1894년 8월, 조선에 대한 청과 일본의 갈등은 청일전쟁으로 비화하였다. 일본의 더 현대적인 군대는 쉽게 청의 대규모 군사력을 격퇴시켰다. 그 결과로 청은 타이완과 다른 지역을 일본에 할양했고 이로인해 일본이 세계 주요 열강의 지위를 얻게 되는 신호가 되었다.<br>  
+
도쿠가와 미술 중()<br>
 +
일본 도자기 장인들은 훌륭한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한국에서 기술과 디자인을 모두 빌려왔다.<br>
  
'''p. 362'''<br>
+
'''pp. 503-504''' <br>
미국의 해외 개입<br>
+
한국과 베트남<br>
[미국이 해외 문제에 개입한 내용 들이 연도와 함께 간단히 언급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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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질문: 이 시기 한국의 발전상은 중국과 일본의 상황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가? 베트남 문명의 고유한 측면은 무엇인가?<br>
1950 북한이 남한을 침입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미군에게 남한을 방어하도록 명령한다.<br>
+
  
'''pp. 368-369'''<br>
+
한국: 위험한 이웃<br>
평화중재자 루즈벨트<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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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막부 치하의 일본이 고유의 특징을 지닌 독특한 사회를 만들어가며 중국 제국의 그림자에서 꾸준히 벗어나고 있을 무렵 한국의 이씨 왕조(Yi Dynasty)는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중국의 모델을 계속하여 따르고 있었다. 이씨 왕조는 14세기 말엽 장군 이성계(Yi Song Gye[YEE song gye])가 건국하였고, 즉각 명나라와 가까운 정치적, 문화적 관계를 수립했다. 한반도 중심부의 한강 유역에 위치한 서울을 새로운 수도로 삼은 이씨 왕조는 강력한 이웃인 중국과의 조공관계를 수용하고 중국의 제도와 가치관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였다. 중국에서처럼 과거제도가 관료 후보생들의 유교 고전에 대한 지식을 평가하는 수단이 되었고 성공은 출세로 나아가는 필수적인 단계로 여겨졌다.<br>  
아시아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의 주요 관심은 중국의 무역개방을 지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과 러시아간의 점증하는 갈등은 아시아의 안보에 위협이 되었다. 이런 분쟁은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일본의 군사력이 러시아를 능가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침내 결정적인 해전에서의 승리 후에 일본은 평화회담을 요청했다.<br>
+
하지만 차이점도 있었다. 일본처럼 조선도 귀족 계층인 소위 양반 계층으로의 진입을 계속 제한했다. 동시에 농민들은 여전히 농노와 비슷한 처지였으며, 국가 소유의 토지나 엘리트 계층의 영지에서 일했다. 천민으로 불린 노예계층은 정부의 농장이나 백정이나 광대 같은 특정 직업군에서 일했으며, 다른 집단의 지위 아래에 있다고 간주되었다.<br>
그러는 동안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의 팽창하는 군사력에 대해 점점 더 염려하게 되었다. 일분은 청일전쟁에서 십 년 전에 중국을 물리쳤고, 그 후로 더 강력하게 성장했다. 그는 또한 캘리포니아에서 제안되고 있던 정책들의 결과가 빚어낼 잠재적인 문제들을 인식하고 있었는데 그 정책들은 일본의 이민자들을 차별하여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친구인 상원의원 헨리 캐벗 롯지(Henry Cabot Lodge)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즈벨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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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한국 사회는 중국 정통성에서 벗어나는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15세기 한국의 구어(한글)를 적기 위한 표음문자가 창제되었다. 처음에는 양반계층의 경멸을 받고, 교육용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결국에는 사적 서신이나 대중 소설을 위한 매체가 되었다. 동시에 경제 부문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농업생산성이 향상되어 인구 증가와 소규모 도시 산업과 상업 부문도 등장했다. 사회적으로는 양반 계층의 오랜 지배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양반 계층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권력과 영향력은 오히려 약화되었고, 이에 따라 일부 양반들은 상인이 되거나 농민 계층으로 유입되어 귀족과 평민 사이의 구분이 흐릿해져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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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씨 왕조는 이웃국가로부터의 홀로서기에 지속적인 어려움을 맞이했다. 16세기 중 많은 시기에, 주된 위협은 북쪽에서 비롯되었다. 만주 지역의 세력이 압록강 바로 남쪽의 한국 영토(p. 494 지도 17.3 참조)를 괴롭혔다. 하지만 1580년대에 이르러, 더 큰 위협이 동쪽에서 다가왔다. 새롭게 통일된 일본이었다. 16세기 중 많은 시간 동안 일본의 다이묘는 오랜 내전에 휘말려 왔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열도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화하기 위해 투쟁을 벌였다. 셋 중 히데요시만이 바다 건너 제국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그는 평민으로 태어났지만, 장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고, 1580년대 후반에 명나라를 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p. 504 박스글 참조) 한국 왕 선조(1567-1608) 는 히데요시의 동맹 제안을 거절했고, 1592년 일본은 한반도를 침공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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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일본의 계획이 잘 진행되었다. 일본군은 한국의 지방을 초토화하며, 한국의 수도 서울로 진격했다. 하지만 한국은 결국 침략군의 다루기 힘든 상륙선을 파괴할 수 있는 빠른 중장갑함을 개발한 이순신 장군(1545-1598)의 탁월한 지휘 하에 반격을 가하여 독립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은 오래 가지 못했다. 1630년대에 이르러 만주족이 북방국경에서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만주족 군은 1630년대에 한국 북방을 침공하여 결국 이씨 왕조가 북경의 새 제국[청나라] 조정에 충성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유럽 상인과 선교사들의 도래를 겪지 않았지만, 중국에 다녀가는 사절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정보가 한반도에 전해졌고, 18세기 후반에는 소규모 가톨릭 공동체가 수립되기도 했다.<br>
  
“나는 우리가 우리 국민들을 한편으로는 관재한 정의와 진정한 예의를 가지고 일본을 대하도록,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군력을 숫자에 있어서나 부대의 효율성에 있어서 상당한 수준으로 유지하도록 설득하기를 희망한다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일본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일세.<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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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504''' <br>
씨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1905년 6월<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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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내 형제가 되어라. 그렇지 않으면 머리를 부숴 버리겠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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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은 적들을 무찌르고 일본 열도를 자신의 통치 아래에 넣었다. 그 직후 한국의 이씨 왕조의 사신이 그의 성공을 축하하는 서신을 전달했다. 히데요시는 아래 소개된 서신에서 중국 본토를 정복하고 동아시아 전체를 통치하겠다는 계획을 드러냈다. 과대 망상적 야심이 거의 고스란히 드러난 이 서신에서 히데요시는 이씨 왕조의 지배자가 중국 공격을 지원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복수를 당하게 될 것이라 선언했다. 하지만 한국의 왕은 서쪽의 강력한 이웃을 더 두려워했고, 히데요시의 동맹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일본을 공격했고, 이는 소위 임진왜란(1592-1598)이라고 불렸다. 이로 인해 한반도는 어마어마한 고초를 겪었다.<br>
  
2개월 후, 1905년에 루즈벨트는 러일전쟁의 평화조약을 중재했다. 그는 두 나라의 사절단을 뉴햄프셔주의 포츠머스로 초청해서 막대한 금액의 지불보다 소규모 영토의 할양과 한국에 대한 통제권에 만족하도록 설득했다. 그는 또한 러시아로부터 만주에서 철수하도록 약속을 받아내었는데 당시 만주는 중국의 영토의 일부로 남아있었다. 루즈벨트는 중국의 무역이 모든 나라에 개방된 상태로 유지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중재자로서의 역할로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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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관백(關白) 히데요시는 이 서신을 조선 국왕 전하에게 바칩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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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신 서한을 기쁘게  읽고, 전하의 뚜렷한 흔적에서 느껴지는 향기를 음미하고자 재삼 펼쳐서 보고 접곤 했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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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60여 주는 근래 여러 지역으로 분리되어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대대로 내려오는 예의를 저버리며 조정의 정사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3, 4년 사이에 반신과 적도를 토벌하여 먼 지역과 섬들까지 모두 장악하였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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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나의 지나온 자취를 살펴보건대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일개 신하였지만, 일찍이 어머님께서 나를 잉태할 때에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복술사가 ‘햇빛이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표인풍(八表仁風, 팔표란 팔방의 아주 먼 끝. 인풍은 어질고 덕스러운 교화)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러운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이토록 기이한 징조로 말미암아 제게 적대하는 자는 자연 기세가 꺾여 멸망해갔는데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빼앗았습니다. 이제 천하를 평정한 뒤로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고 외로운 자들을 불쌍히 여겨 위로하니, 백성들이 부유하고 재물이 풍족하므로 지방마다 바치는 공물이 전보다 만 배나 늘었으니, 본조의 개벽 이래로 조정의 성대함과 수도의 장관이 오늘날보다 더한 적이 없었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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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오래 산다 해도 예로부터 백 년을 넘지 못하는 데 어찌 답답하게 이곳에만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나라가 산과 바다로 막혀 멀리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한 번에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에 들어가 우리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심어 놓고, 교토의 다스림과 교화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제 마음입니다. 귀국이 앞장서서 입조한 것은, 앞일을 깊이 헤아린 처사이므로 이제는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먼 곳의 작은 섬에 있는 무리라도 뒤늦게 복속해온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에 나온다면 더욱 이웃으로서의 맹약이 굳게 될 것입니다. 제 소원은 삼국에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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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물은 목록대로 받았습니다. 몸을 보중하고 아끼십시오. <br>
  
'''p. 581'''<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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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관백 히데요시<br>
중국과 전쟁을 벌이고(1894-95) 러시아와도 싸워(1904-1905) 일본은 동아시아에서의 그 영향권을 확대했다. 일본은 조선(Korea)을 병합하고 중국 북부 만주지역에 군대를 주둔시켜 상당한 세력을 확보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일본은 동아시아의 최강국이었고 세계열강의 하나로 성장했다.<br>
+
질문: 히데요시는 동아시아 전역을 지배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어떻게 정당화하고 있는가?<br>
  
'''p. 634'''<br>
+
'''p. 643''' <br>
미국의 사건/ 세계의 사건 연표<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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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2.3 1900년 무렵 외세의 점령지와 영향력 범위]<br>
1950 한국전쟁이 시작되다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가 반공 운동을 시작하다.<br>
+
9세기 말, 중국은 외국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멜론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색칠된 지역은 최근 외세의 영향력 아래 들어간 지역을 가리킨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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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동해) - 일본해와 동해 병기<br>
  
'''p. 638'''<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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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643''' 제국주의의 절정 중(中)<br>
주목할 만한 대통령들 – 해리 S. 트루먼<br>
+
1894년 청나라는 일본과 전쟁에 돌입했다. 일본이 한반도에 진출함으로써 중국이 오랫동안 지켜온 한국에 대한 종주권(suzerainty)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br>
부통령이었던 트루먼이 FDR의 죽음으로 1945년 갑자기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을 때 그는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기자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의 책상에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라고 쓴 팻말을 책상위에 올려놓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낸 일본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 트루먼 독트린, 베를린 공수, 한국 파병, 군대 통합, 인권 개혁안 입법 등에 책임을 졌다. 그가 재선에 성공한 것은 당시 정치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고 공정정책(Fair Deal)를 통한 개혁은 양당 모두로부터 결국 지지를 받게 되었다. 오늘날 트루먼은 평범하지 않았던 도전에 상당히 성공적으로 맞섰던 평범한 사람이라고 불려진다.<br>
+
  
'''p. 652'''<br>
+
'''p. 656''' <br>
3과 한국전쟁<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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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22.4 메이지 시대 일본의 해외 확장><br>
학습목표<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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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에 들어가며, 일본은 일본열도를 넘어 확장에 나섰고, 제국주의 열강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일본의 식민지 확장 범위가 이 지도에 나타나 있다.<br>
-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팽창이 어떻게 한국전쟁의 배경이 되었는가?<br>
+
[[한국은 1908년에 일본이 획득한 것으로 나온다]]<br>
- 한국전쟁의 참전국은 어디인가, 그리고 전쟁의 삼 단계는 어떻게 되는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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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동해) - 일본해와 동해가 병기되어 있음<br>
- 한국전쟁의 영향은 무엇인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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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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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 658-660''' <br>
남한을 침공한 북한군을 물어내기 위해 미국과 유엔군은 3년간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해 싸웠다. 그 결과로 전쟁 전의 남북한의 경계선이 회복되었다.<br>
+
제국주의 열강 중(中)<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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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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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후 일본 해군은 한국이 중국 상인들에게 3개 항구를 개항하라고 압력을 가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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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오랫동안 일본의 사례[쇄국주의]를 따랐고, 중국에 보내는 조공사절 외에는 외세와의 접촉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주로 중국이나 프랑스에서 파견된 기독교 선교사들은 크게 박해 당했다. 하지만 한국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내부적이었다. 1860년대 초, 중국의 태평천국 운동에서 부분적으로 영향 받은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후 이씨 왕조는 전통 가치의 회복과 외세 개입을 차단하면서 국력 강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시골 지역의 빈곤과 부정부패가 만연해졌다. 1871년 일본의 페리 제독 사례를 뒤쫓아 미군 함정이 한국의 개항을 노렸지만 상당한 인명 손실을 입은 채 쫓겨났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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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끈질기게 한국에 구애한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군신관계를 종식시키고, 일본의 방식에 따라 한국을 근대화시키고자 했다. 1876년 두 나라는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인지해 주는 대가로 일본 상인들에게 3개 항구를 개항하기로 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1880년대, 한국을 놓고 중국과 일본과의 경쟁이 격화되었다. 중국은 한국 조정의 보수파를 지원했으며, 일본은 중국의 오랜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비교적 급진적인 세력을 지원했다. 1894년 한국 지방 지역에서 새로운 봉기가 발발하자, 중국과 일본은 각기 반대편에서 개입했다. 전쟁 동안 일본 해군은 중국 군선을 격파하고 청나라의 뤼순을 점령했다.(p. 659 박스 글 참조)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중국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으며, 타이완과 전략적 해군기지인 뤼순 항과 함께 요동 반도를 일본에 이양해야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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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유럽 열강의 압력에 따라 중국에 요동 반도를 돌려주었지만, 20세기 초에 다시 공세로 나왔다.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러시아와도 경쟁을 버렸고 양국 관계는 점차 경색되었다. 1904년 일본은 러시아가 1898년 중국에서 탈취한 뤼순항의 러시아 해군 기지를 기습했다. 일본군이 약세였지만 러시아는 새로운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통한 보급 문제에 부딪혔고, 국내의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에 시달렸다. 1905년 일본 함대가 한국 연안에서 러시아 함대를 거의 전멸시킨 후 러시아는 굴욕적인 평화조약에 합의 하며, 전략적 요충지인 요동 반도를 일본에 돌려주는 한편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까지 넘겨줘야했다. 러시아는 또한 한국과 만주 남부에 구축해 두었던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포기는 것에 합의했고, 이는 곧 일본의 통제 하에 넘어가게 되었다. 일본의 승리를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이는 동남아시아의 식민지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백인이 천하무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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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수년 동안, 일본은 1908년 한국을 병합(annexing Korea in 1908 as an integral part of Japan)하는 등 동북아시아에서 자국의 위치를 공고화했다. 한국인들이 이에 저항하자, 일본은 보복을 가해 수천 명을 죽음에 몰아넣었다. 미국은 이 병합(annexation)을 인정한 최초의 국가였다. 일본 정부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고 문호 개방 정책을 수용한 데 대한 보답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아시아 국가로부터의 이민에 제동을 걸자, 양국 간의 서로에 대한 의혹은 커져갔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러-일 전쟁을 중재하는 과정에서 러시아에 배상금을 요구한 일본의 입장을 거부하자 많은 일본인들의 공분을 샀다. 반면, 일부 미국인들은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키워가며 명백하게 드러난 황화(黃禍,  yellow peril)의 부상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br>
  
핵심용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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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660''' <br>
38도선, 한국전쟁,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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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기: 제국주의 시대 일본과 한국<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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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만에 당도한 페리 제독 1853<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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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운젠드 해리스 조약 1858<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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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막부의 몰락 1868<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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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함대의 한국 개항 실패 1871<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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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봉건제 철폐 1871<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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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군대 창설 1871<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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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헌법 채택 1890<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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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 대한 황국칙령 1890<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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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타이완을 차지한 일본 1895<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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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전쟁 1904-1905<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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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합병된 한국 1908<br>
  
학습주안점<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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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659''' <br>
- 원인과 결과를 찾아내기: 아래 표를 옮겨 그리고. 이번 과를 학습하면서 한국 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채워 넣으시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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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 관점: 두 가지 세계관<br>
- 원인: 중국이 공산주의에 넘어가다;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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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동안, 중국이 외부 세계를 바라보는 위계적 방식에 심각한 도전이 발생했다. 아시아에서 새로운 영토를 노리는 유럽 국가들뿐만 아니라 부국강병을 위한 핵심은 식민제국이라는 서양의 관점을 받아들이며, 열강으로 부상한 일본도 위협이었다. 일본의 첫 번째 목표는 중국의 오랜 종속국이던 한국이었고, 1894년 중국과 일본이 한반도를 놓고 벌이던 경쟁은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다음은 양국의 통치자들이 발표한 선전포고이다. 중국이 일본을 경멸적으로 지칭한 왜인(Wojen, "dwarf people")에 주목해 보라.<br>
- 결과: 트루먼이 공산주의의 팽창을 끝내기로 결심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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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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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對)중국 선전포고<br>
한국전쟁은 때때로 미국의 잊힌 전쟁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한국에서 싸운 군인들은 한국전쟁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1950년 6월 미군은 대규모로 침략한 공산군을 다시 밀어붙이기 위해 싸웠다. 하니 미군 해병대원은 치열했던 전투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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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독립국이다. 한국은 일본의 조언과 지침에 의해 처음으로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중국을 관습적으로 중국의 속국(dependancy)으로 봉해왔으며 공개적으로 또는 암암리에 한국의 내정에 간섭했다. 최근 한국에 반란이 일어나자 중국은 종속국(dependancy)을 원조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짐은 1882년 한국과 체결한 조약에 따른 직권에 의하여, 그리고 위급 상황의 발생 가능성에 대비하여 한국에 군사를 파견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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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이지 않는 혼란으로 인한 재앙에서 한국을 원조하고, 이에 따라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유지하려는 바람으로 일본은 이 목적의 성취를 위해 중국의 협조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온갖 구실을 내밀었다. 중국의 이러한 행위는 황국의 권리와 이익에 직접적인 타격일 뿐만 아니라 동양의 영구적인 평화와 평온에 위협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짐은 중국에 대한 공식적인 선전 포고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br>
  
“강 건너 편으로 북한군을 밀어내기 위해 우리는 능선 너머로 그들을 몰아붙여야 했다. 오르막길을 바로 올라가야 했다. 우리를 가려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관총, 박격포, 수류탄이 쏟아지고 있었다. 뿜어져 나오는 화염은 너무나 끔찍했다. 적들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쏟아 부었다. 전우들이 사방에서 욕을 하며 비명을 지르며 쓰려져 가고 있었다.” - 아놀드 윈터(Arnold Winte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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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對)일본 선전포고<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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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지난 200년간 우리의 조공국이었다. 한국은 지금껏 우리에게 조공을 바쳐왔으며, 이는 전 세계가 아는 바이다. 지난 십여 년간 한국은 반복된 반론으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으며, 짐은 작은 조공국에 대한 동정을 금치 못하여 수차례에 걸쳐 원조를 제공했다. 올해 한국에서 또 다른 반란이 시작되었고, 한국 왕이 우리에게 반란 진압을 위한 원조를 수차례에 걸쳐 요청했다. 이에 짐은 이홍장에게 한국에 파병하도록 명하였으며, 이들이 [한국] 애산에 당도하자마자 반란군은 즉각 흩어졌다. 하지만 왜인(Wojen)이 어떤 명분도 없이 한국에 군대를 보내어 서울에 진입하였고, 병력이 1만을 넘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증원하였다. 동시에 일본은 온갖 방도로 한국인들을 위협하는 태도를 보이며, 한국 왕을 겁박하여 정부 체제를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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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조약을 위반하고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았으며, 이제는 거짓되고, 기만적인 행위로 가득하여 적대감을 내보이면서 스스로를 여러 강대국들의 규탄의 대상이 되니, 이에 짐은 중국이 항상 온갖 뒤얽힌 관계 속에서 박애와 완벽한 정의를 따라왔으며, 반면, 왜인은 모든 국가들 간의 법과 조약을 깨트림으로써 우리의 인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한다. 이에 따라 짐은 이홍장에게 명하여 짐의 여러 군에 엄격한 명을 내려 속히 왜인을 그 소굴에서 뿌리 뽑으려 한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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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위 선전포고문에 나타난 19세기 말 중국과 일본의 세계관을 비교해 보자. 어느 관점이 더 설득력이 있는가?<br>
  
1950년 말에 양 진영은 밀리지 않기 위해 참호를 팠다. 보병이었던 톰 클로슨(Tom Clawson)은 훗날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잘 깨닫지 못했지만 내가 한국에 도착해보니 더 이상 전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진지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진지전”이 어떤 것인지 설명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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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749'''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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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새로운 질서 중()<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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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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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점령지의 독일 병사들처럼, 일본군도 종종 피정복지의 주민들의 생명을 경시했다. 1937년 중국 난징 정복과정에서 일본군은 며칠 동안을 살인, 강간, 약탈에 몰두했다. 거의 80만 명의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보내졌는데 그들은 대부분 강요된 노동자로 보내졌다. 한국과 필리핀 여성 수만 명이 일본군을 위한 “위안부(comfort women)(매춘부)로 강제로 복역해야 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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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most 800,000 Koreans were sent overseas, most of them as forced laborers, to Japan. Tens of thousands of women from Korea and the Philippines were forced to serve as “comfort women” (prostitutes) for Japanese troops.)<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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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략><br>
  
“당신은 매일 여러 시간 당신의 진지를 강화하기 위해 개인호와 참호와 벙커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너무 잘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만간 다른 진지로 옮겨가게 되기 때문이다. 매번 순찰을 하고 나서 다시 처음 있던 곳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날이 온다. 되돌아 와서 새로운 진지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모든 진지가 결국은 같은 능선 위에 있다.” - 톰 클로슨(Tom Clawson)<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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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770'''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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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26.2 중국내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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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동해) - 일본해와 동해가 병기되어 있음<br>
  
한국에서의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영광도 베트남 전쟁과 같은 시련도 없었지만 미국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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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 771-772''' <br>
미군 병사들이 한국 전쟁 기간 참호를 파고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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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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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갑작스런 발발은 동아시아에서의 냉전을 심화시켰다. 1894-95년의 중일 전쟁이후, 오랫동안 중국의 조공국이었던 한국은 점차 일본과 러시아의 경쟁 구도 아래로 빠져들었다. 1905년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를 거둔 이후, 한국은 일본 제국에 합병되었고, 이는 1945년까지 이어졌다. 한국을 일본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의 목표 중 하녀였으며,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전날, 소련과 미국은 한국을 38선을 기점으로 나누어 점령하기로 합의했다. 양국의 본래 계획은 평화를 회복한 후 독립 정부 아래 한국을 통일하여 총선을 치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소 관계가 악화되면서, 한국에는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북쪽에는 공산주의 정부가, 남쪽에는 반공정부가 들어섰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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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의 긴장은 분계선을 따라 격화되었고, 1950년 6월 25일 스탈린의 암묵적인 승인 하에 북한군이 한국을 침공했다. 트루먼 정부는 즉각 미 해군과 공군에게 한국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UN 안전보장이사회(소련 대표단은 UN이 중국 신정부의 가입을 거부하는 것에 항의하기 위해 출석하지 않은 상태였다) 회원국들이 UN헌장의 안보 조항에 따라 북한의 남침에 공통으로 반격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9월에 이르러, UN군은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하에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진ㄴ격했다. 통일 한국에 비공산주의 단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목표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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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대통령은 중국군이 압록강으로 접근하자 UN군(대부분은 미군이었다)이 중국의 개입을 촉발할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맥아더는 중국이 대응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다. 하지만 11월, 중국의 “자원” 군이 북한 측에 서서 전쟁에 개입했고 UN 군을 남쪽으로 어지러이 몰아붙였다. 전쟁은 계속됐지만, 결국 본래의 분계선이었던 38선 근처에 고착된 방어선이 수립되었다.(지도 26.3 참조)<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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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미국인들에게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아시아의 공산주의 확산을 노리는 중국의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난 증거였다. 그리고 최근의 증거는 마오쩌둥이 아시아에 혁명의 물결이 일어날 것이라 확신하여 북한의 남침에 힘을 보태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중국이 참전 결정을 내린 가장 큰 이유는 적국인 미군이 중국 국경에 주둔하고 국경을 넘어 공격을 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맥아더는 공산주의 중국에 대한 공격의 전초전으로 만주의 도시들에 공습할 것을 공개적으로 촉구함에 따라 이러한 공포를 더욱 키웠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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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한국전쟁의 발발은 중국에게 특히 불행한 일이었다. 침공 직후, 트루먼 대통령은 중국의 타이완 침공을 방지하기 위해 제7함대를 타이완해협으로 급파했다. 더욱 불운한 일은, 이 침공이 유럽 국가들이 지닌 중국의 새로운 정부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심화시켰으며, 이후 20년 동안 자본주의 강대국들로부터 중국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은 타이원의 내셔널리즘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대우했고, 중국의 UN 안보리 가입을 보류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결과적으로 본토 중국은 모든 형태의 경제적, 기술적 원조를 제한 당했고, 어쩔 수 없이 소련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했다.<br>
  
'''p. 653'''<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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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772''' <br>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팽창<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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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26.3 한반도]<br>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유럽에서의 공산주의 위협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을 때 냉전을 “뜨거운” 군사적인 대치로 타오르게 하는 중요한 사건들이 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 무장 충돌의 기원은 중국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전개된 중국과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에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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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한국을 기습 침공했다. 이 지도에는 1953년 종전을 알린 휴전선이 표시되어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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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압록강의 의의는 무엇인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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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동해) - 일본해와 동해가 병기되어 있음<br>
  
중국 내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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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913''' <br>
이미 학습한바 있듯이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해외 열강들은 중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중국 영토의 일부를 차지했다. 일본도 그러한 열강 중 하나였다. 또 다른 세력은 독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 연합국은 이전에 독일의 영토였던 곳을 일본에게 넘겨주었다. 1919년 중국인들이 중국이 더 강력하고 더 독립적인 나라가 되기를 바라며 시위를 벌였다. 어떤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요구했다. 다른 사람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결과에 깊은 인상을 받고 공산주의가 강력한 나라를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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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30,3 현대 일본]<br>
1920년대 중반에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은 중국 북부에서 세력을 얻었고 베이징을 점령했다. 그러는 동안 공산당은 상해 인근 지역을 장악했다. 1927년 장제스는 공산당과 그들의 지지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하고 중국 내전이 시작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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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을 구성하는 4개 주요 섬을 볼 수 있다.<br>
공산당은 마오쩌둥이 이끌었다. 그는 동국 남동부지역에서 땅을 농민들에게 재분배하고 교육과 의료혜택을 제공해서 공산주의의 대의명분에 대한 지지를 얻었다. 1934년 마오쩌둥과 그의 지지자들은 장제스의 공격 때문에 후퇴하게 되었다. 대장정을 마치고 마오쩌둥은 중국 북부에서 그의 세력을 재구축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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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동해) - 일본해와 동해가 병기되어 있다.<br>
2과에서 학습했듯이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협력해야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중국 내전은 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국민당은 강압적인 통치와 고율의 세금과 부패 때문에 지지를 잃었다. 마오쩌둥은 군사적인 승리 뿐 만 아니라 토지개혁과 평등한 사회에 대한 약속으로 지지를 얻어 1949년 중국을 장악했다.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패주했고 거기서 그들이 여전히 중국의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라고 주장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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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분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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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914''' <br>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일본은 중국에서 영토를 얻고 영향력을 확보하는 전략을 추진했고 또한 한반도를 병합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통치는 가혹했고 한국인들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에 그들의 나라를 다시 회복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을 위한 세부적인 계획이 수립되기 전에 전쟁이 끝났다. 1945년 연합국은 일시적인 해법에 동의했다. 소련군은 한반도의 대략 중간지점을 가로지르는 위도 38도선 이북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고 미군은 38도선의 남쪽에서 항복을 받았다. 분할선은 결코 영속적인 것으로 의도된 것은 아니었고 한국은 일시적으로 소련의 점령지역과 미국의 점령지역으로 나뉘었다. 곧 친미정부가 남한에 세워졌고 북한에는 공산주의 체제가 수립되었다. 점령군은 양측에서 1948년과 1949년 철수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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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시아의 거인 중(中)<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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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단순히 학술적인 것이 아니다. 동아시아에는 아직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며, 이 지역 국가들과 일본의 관계가 최근 중국해에 잇는 작은 섬의 영유권을 놓고 한국과 중국과 다툼을 벌인 끝에 경색되었다. 군사의 적절한 역할은 일본에서 격렬한 논쟁의 주제였다. 일부 관측통들은 일본이 미국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며 아시아 문제에 있어 더 큰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우려는 최근 몇 년 동안 더 커져왔다. 이웃 북한의 잠재적인 핵 위협(“뒤의 ”한국: 분단된 반도“ 참조)과 강력한 중국의 공격적인 태도는 많은 일본인들에게 위험한 동네에 살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였다. <br>
  
심화학습: 세계적 사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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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 918-919'''<br>
- 대장정: 1934년 가을 8만5천명의 공산군은 중국 남동부에서 국민당 군대에 포위되었다. 그들은 국민당의 포위선을 뚫고 소련과의 국경 가까이 북서부 중국으로 향해 일 년에 걸쳐 6천 마일에 달하는 고된 행군을 시작했다. 국민당 군에 의해 공중과 지상의 공격을 당하며 그들은 24개의 강을 건너고 18개의 산맥을 넘었다. 첫 3개월 동안 공산당은 절반이상의 병력을 잃었고 겨우 8천 명 정도가 살아남아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 대장정 기간 동안 마오쩌둥의 지도력이 확립되어 중국 공산당의 확고한 우두머리가 되었다. 절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공산군은 농민들을 존중하고 그들이 필요로 한 물자들에 비용을 지불하고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이런 행동과 대장정에서 보여준  영웅적인 시련은 많은 젊은 중국인들이 공산주의의 이상에 동조하도록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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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분단된 반도<br>
학습이해도 확인: 한국은 어떻게 분단국이 되었는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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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일본 열도의 경제 기적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일본해 건너 아시아 대륙에서 또 다른 기적이 벌어지고 있었다. 1953년 한반도는 3년간의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해 피폐해져 있었다. 이 분쟁으로 38선 양쪽에서 약 4백만 명의 한국인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인구의 1/4이 난민이 되었다. 1953년 6월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적대적인 두 나라가 중무장한 채  서로를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불안한 평화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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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선 북쪽에는 공산주의 지도자 김일성(1912-1994)독재통치를 하는 경찰국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있었다. 남쪽에는 대한민국이 북한의 침공에 맞서 레지스탕스를 이끌었던 강경한 반공자의자로, 역시 그만큼 권위주의적인 이승만 대통령(1875-1965) 치하에 있었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이 부유한 지주계층에 의존하는 이승만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다. 정부의 부패, 부정선거, 경찰의 행패로 대표되는 혹독한 통치가 몇 년간 지속된 후 1960년 봄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이승만을 하야하게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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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시대가 지난 후 잠시 동안 다당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섰으나, 1961년 쿠데타가 발발해 박정희 장군(1917-1979)이 정권을 잡았다. 새로운 정권은 새 헌법을 발표했고, 1963년 박정희는 민간 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십 년간의 외세통치와 내전으로 황폐화된 경제 회복을 주창하고 나섰다. 일본 통치 하에서 민간 부문이 상대적으로 약했었기 때문에 정부는 특정 산업의 발전, 수출 진흥, 인프라 개발을 목표로 하는 일련의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며, 경제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토지개혁 정책을 통해 거대 지주들이 7.4에이커 이상의 농지를 전부 소작인들에게 염가에 팔아야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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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개혁은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검약, 교육 중시, 근면 등 유교 원리를 비롯해 일본의 자본과 기술 덕택에 한국은 점진적으로 동아시아의 산업 강국으로 떠올랐다. 경제성장률은 1950년대 연 5퍼센트 미만이었던 것이 박정희 시대에 평균 9퍼센트로 뛰어올랐다. 삼성, 대우, 현대 등 대기업들은 재벌(chaebol)이라 불리는 거대 기업집단으로 변신했다. 재벌은 전쟁 전 시기 일본의 자이바츠(Zaibatsu, 財閥)와 유사하다.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과 놀라우리만치 높은 저축률 이용한 한국 기업들은 아시아, 나아가 세계 수출시장에서 일본과 적극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1인당소득 또한 현저하게 상승했다. 1960년대 연간 90달러 미만이었던 것이 20년이 지나자 1,560 달러(공산주의 북한의 2배)로 껑충 뛰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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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 하지만 동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처럼 한국은 민주주의 원칙 발전에는 더뎠다. 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있는 정부였지만, 박정희는 권위주의적 수단으로 통치를 지속했고, 모든 형태의 반대를 억눌렀다. 1979년 박정희는 암살당했다. 하지만 잠시의 공백 이후, 1980년 전두환 장군(1931~ )이 정권을 거머쥐었다. 새 정권은 전임정부처럼 권위주의적이었고, 1987년 권위주의 통치에 반대한 학생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발발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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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마침내 총선이 치러져 한국은 민간인의 통치를 되찾았다. 이후 대통령들은 부정부패를 억제하는 가운데, 재벌을 단속하고 북한의 공산주의 정권과 접촉을 시작하며 통일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1997년 아시아금융위기이후, 경제상황은 일시적으로 악화되었지만, 한국은 이내 회복하여 여전히 국제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여가고 있다. 한국의 커져가는 자신감을 상징하는 것은 2007년 선출된 신임 대통령이다. 전 서울시장인 이명박(1941- )은 서울 단장과 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정력적으로 일했으며, 특히 주 5일 근무제를 정착시켰다.<br>
 +
한편, 현재는 김일성의 아들인 김정일(1941~ )의 독재가 이어지며, 핵 보유를 목전에 둔 북한과의 관계는 여전히 긴장 상태이다. 북한 정권이 핵무기개발프로그램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다국 회담이 수년 간 이어지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없다.<br>
  
'''p. 654'''<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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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918''' <br>
한국에서의 충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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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1953년 이후 한반도<br>
분할선 양측의 한국인들은 모두 그들의 나라를 통일하기를 원했다. 1950년 6월 북한군이 무력으로 한국을 통일하기 위해 38도선을 넘어 밀려오면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북한군의 침략은 미국을 놀라게 했다. 또한 미국인들은 소련이 뒤에서 조정하고 있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안해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중국이 공산당에게 넘어간 것도 미국에 큰 충격을 안겼었는데 이제 공산주의는 다시 진격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것이 그는 명백한 침략행위라고 보았기 때문에 분명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강자가 약자를 침략했던” 이전 사례들을 떠올렸다. 트루먼은 민주주의가 절적한 대응에 실패하면 결국 침략자들을 부추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트루먼은 “만일 남한에 대한 침략에 저항하지 않으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어났던 유사한 상황들처럼 결국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다.”고 말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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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동해) - 일본해가 동해와 병기되어 있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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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치안 유지를 위한 유엔의 행동<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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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중국 국민당이 패배한 후에 미국은 중국 공산당이 유엔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트루먼 대통령이 북한의 침략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을 때 소련 대표는 항의의 표시로 퇴장했기 때문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미국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안에 대한 만장일치의 승인을 얻었고 회원국들이 남한을 방어하고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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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대통령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 제7함대에게 타이완을 방어하게 했고 남한에 대한 공군과 해군의 지원을 명령했다. 이어서 그는 지상군도 파견했다. 트루먼이 헌법에서 요구하는 대로 선전포고를 의회에 요청하지 않았지만 민주당과 공화당은 그의 단호한 조치를 환영했다. 하원의원들은 트루먼의 조치에 대해 듣게 되었을 때에 일어나 환호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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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은 유엔군사령부를 구성하고 미국에게 유엔군 사령관을 선택해 줄 것을 요청했다. 16개국이 군대와 무기를 보냈지만 미군이 한국에서 유엔의 국제 치안활동에 참여하는 군대의 대략 80퍼센트를 차지고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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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한국전쟁, 1950-1953><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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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6월 북한이 남한의 수도를 점령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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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9월 유엔군이 부산 방어선을 지켜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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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해방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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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1월 유엔군이 최대로 진격<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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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1월 유엔군을 몰아내기 위해 중국이 참전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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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1월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을 다시 침공하고자 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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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7월 휴전선이 처음 남한과 북한의 분단선 가까이에 확정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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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읽기: 이 지도들은 한국전쟁의 밀고 밀리는 특징을 보여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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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 이해: 지도에서 유엔군의 움직임을 살펴보시오. 중국이 왜 참전했다고 생각하는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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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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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655'''<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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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수행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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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은 유엔군 사령관으로 두 번의 세계대전의 영웅이며 강력한 반공주의자인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을 택했다. 맥아더는 일본에서 미군정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 서구 민주주의제도를 수립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헌법을 만드는 일에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는 남한에서도 미군정을 지휘했는데 남한에 민주주의를 이식하는 데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맥아더는 한국 대통령 이승만이 그의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했지만 그를 지지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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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탁월한 군사 전략가였고 남한으로부터 침략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대담한 전략을 구상했다. 소련제 탱크와 전투기로 북한 국은 단 몇 주 만에 남한 전역을 휩쓸었다. 항구도시인 부산에 가까운 작은 지역만이 아직 점령되지 않은 상태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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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북한군의 급속한 진격 때문에 그들의 공급선이 길게 늘어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산을 방어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후 1950년 9월 그는 남한의 북서부에 있는 인천에 군대를 상륙시켜서 적군의 공급선을 뒤에서부터 공격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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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작전은 적중했다. 남북에서 유엔군의 협공을 받고 공급선이 끊어지자 침략자들은 38도선 뒤로 물러갔다. 유엔군은 그들을 쫓아 북쪽으로 진격했다. 미국과 남한의 지도자들은 한국을 남한의 통제 아래 다시 통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중국 공산당을 불안하게 했다. 그들은 이제 권력을 잡은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고 친서방 국가가 바로 옆에 세워지기를 원치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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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에 북한과 중국의 국경으로 다가오자 중국은 더 이상 진격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맥아더는 이 경고를 무시했다. 1950년 112월 24일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을 압록강 넘어 중국으로 몰아내고 전쟁을 끝내기 위한 크리스마스 공세를 선언했다. 그러나 중국 군대가 압록강을 넘어 밀려오며 공세를 시작했다. 중국과 북한군은 유엔군을 남한으로 다시 몰아내었다. 전선은 교착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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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교착된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제2의 전선을 형성하고자 했다. 그는 타이완 섬에 있는 장제스의 중국 저항군이 대륙으로 돌아와 중국 공산당을 공격하기를 원했다. 트루먼은 이 작전이 아시아에서 전쟁을 확산시킬 것을 염려하여 반대했다. 트루먼의 결심을 흔들 수 없게 되자 맥아더는 하원의 소수파 지도자인 조셉 마틴(Joseph Martin)에게 1951년 편지를 보내서 대통령의 정책을 비판했다. 마틴은 이 편지를 공개했다. 4월 11일 트루먼은 불복종의 이유로 맥아더를 해임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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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고국으로 돌아와 영웅으로 환영을 받았다. 양하원 합동회의에서 행한 4월 19일 연설에서 그는 감정이 섞인 작별인사를 고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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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웨스트 포인트에서 서약한 이래 가져왔던 젊은 날의 희망과 꿈은 이제 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당시 막사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군가의 후렴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가사는 매우 자랑스럽게 ‘노병은 죽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사라질 뿐’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군가의 노병처럼 이제 나는 군생활을 마치고 사라지려 합니다. 신이 그에게 부여한 빛으로 깨닫게 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했던 노병으로서. 안녕히 계십시오.” -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1951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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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의 일생<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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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글러스 맥아더 1880-1964: 육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더글러스 맥아더는 동기들 중 수석으로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를 졸업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보여준 용맹한 활약으로 그는 38세에 장성이 되었고 1930년에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맥아더는 아시아의 미군을 지휘했다. 그는 필리핀 방어선을 구축하고 태평양에서 일본군에 대한 섬건너뛰기 작전을 수행했다. 일본과 남한의 미 점령군을 지휘한 후 그는 한국 전쟁에서 유엔군을 이끌었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어 대통령은 불복종의 사유로 그를 해임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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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지휘한 사람들과 많은 미국인들에게는 영웅이었지만 지나치게 야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많은 정치지도자들은 맥아더를 싫어했다. 맥아더도 루즈벨트와 트루먼을 별로 존경하지 않았다. 그는 두 사람이 모두 공산주의에 대해 너무 유화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태도는 맥아더를 반공주의자들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위에 권위를 갖는 사람들에 대해 경멸하는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그의 탁월한 경력을 손상하는 조치가 취해지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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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소리를 들어보기: 맥아더의 의회 연설과 그밖에 다른 냉전 시기의 소리를 들어보시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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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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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말 그대로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졌고 트루먼은 확전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될 때까지 2년을 끌었다. 평화회담이 교착되자 아이젠하워는 원자탄을 사용하겠다고 협박해서 다시 평화회담이 진행되도록 했다. 마침내 1953년 정전협정이 서명되어 한국은 전쟁 전의 분할선인 38도선과 거의 같은 상태에서 분단된 채 남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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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의 영향<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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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미국을 크게 낙심시켰다. 미국인들은 왜 5만4천명의 군인이 전사하고 10만3천명이 부상하고도 그 정도의 결과 밖에 얻지 못했는지 의아해했다. 미국인들은 그들의 정부가 공산주의의 진격을 멈추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공산군을 38도선으로 다시 물리친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봉쇄작전은 핵전쟁의 발발 없이 이루어졌다. 미국인들은 더 제한적인 전쟁과 더 제한적인 승리에 익숙해져야 했다.<br>
+
미국인들은 또 다른 변화들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한 가지 변화는 군대 자체였다. 트루먼 대통령이 1948년 통합을 명령했지만 한국 전쟁은 백인 병사들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병사들이 같은 부대에 소속되어 싸운 첫 번째 전쟁이었다.<br>
+
한국전쟁은 또한 군비 지출의 큰 증가를 가져왔다. 1950년에 군비는 연방 예산의 3분의 1에 못 미쳤지만 십년 후에 군사 지출은 연방 지출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동시에 미국은 상시 동원체제(permanent mobilization)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100만명이상의 미군이 전 세계에 주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군부세력은 기업과 과학계와의 연계를 발전시켜서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연계는 강력한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를 만들어내어 1960년에는 350만명의 미국인들이 고용되었다.<br>
+
한국전쟁을 또한 아시아에서의 미국 정책의 미래를 형성하였다. 일본이 태평양지역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돕기를 희망하면서 미국은 1951년 일본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게다가 한국전쟁은 공산주의 중국과 관계를 더 악화시켜서 이후 20년간 외교적인 대결이 이어지게 된다.<br>
+
 
+
그래프를 이해하기: 세계의 지도력을 향한 경쟁 때문에 미국과 소련은 군비경쟁을 벌이게 되었다.<br>
+
- 원인과 결과를 인식하기: 제2차 세계대전 후 시기에 미국의 국방비 지출이 다시 급격하게 증가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왜 증가한 지출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처럼 다시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br>
+
 
+
3과 평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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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이해도 평가<br>
+
1. 38도선의 중요성은 무엇이었는가?<br>
+
2. (a) 한국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br> 
+
(b) 양측에 어떤 나라가 참전했는가?<br>
+
3. 왜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해임했는가?<br>
+
4. 전쟁의 영향 두 가지를 쓰시오.<br>
+
비판적인 사고와 글쓰기<br>
+
5. 결론을 작성하기: 봉쇄정책과 트루먼 독트린을 고려해 볼 때 한국전쟁은 성공이었는가 실패였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br>
+
6. 연표를 만들기: 한국전쟁의 중요한 사건들의 연표를 작성하시오<br>
+
 
+
'''p. 657'''<br>
+
4과 냉전의 지속<br>
+
배경<br>
+
한국에서 일어난 공산주의자들의 침공은 위스콘신 주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Joseph McCarthy)의 발언으로 유발된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매카시는 한 장의 종이를 들고 나와 이렇게 말했다.<br>
+
 
+
'''p. 659'''<br>
+
동남아시아<br>
+
1953년 7월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 공약을 지켰다. 1953년 3월 스탈린의 급작스러운 사망과 더 온건한 소련 지도자들의 신속한 등장이 한국전쟁의 해결에 기여했다. 한편 미국은 프랑스가 식민지인 베트남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지지하며 상당한 군사적 지원을 계속해서 제공했다. 국제회의를 통해 베트남이 한국처럼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는 북부와 반공주의자들의 남부로 분단되자 미국은 남부를 지원했지만 당분간은 더 깊이 관여하는 것을 자제했다. (24장을 보라)<br>
+
 
+
'''p. 662'''<br>
+
19장 복습과 평가<br>
+
요점 복습<br>
+
20. 한국전쟁이 전개된 세 가지 단계를 서술하시오.(3과)<br>
+
27. 문제를 분명하게 표현하기: 맥아더 장군은 한국 전쟁을 더 공격적으로 수행하기를 원했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더 조심스러웠다. 각 입장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의견을 설명하시오.<br>
+
 
+
'''p. 682'''<br>
+
남부출신들이 의회 각 위원회의 주요 자리를 장악하고 있었고 의사진행을 방해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에 의회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948년 7월 트루먼은 연방 공무원 임용에서 인종차별을 금지했다. 그는 또한 군대에서의 격리와 차별을 폐지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느리게 이루어졌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서야 군대는 격리를 폐지하는데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br>
+
 
+
'''p. 684'''<br>
+
아이젠하워와 공화당의 정책<br>
+
1952년에 전국의 미국인들은 “나는 아이크를 좋아해요.(I like Ike)”라고 노래했다. 공화당은 승리를 위한 공식으로 K1C2를 고안했다. 이 공식은 세 가지 문제에 초점을 맞춘 것인데 바로 한국(Korea), 공산주의(communism)와 부패(corruption)였다.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을 끝내겠다고 약속했고 공화당은 공산주의의 도전에 강력하게 대응하겠다는 것을 보장했다. 아이젠하워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는 캘리포니아 출신인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이었는데 그는 공직자로 재직 시에 부패에 연루되었다고 두들겨 맞았다.<br>
+
  
 
==3. 간략분석==
 
==3. 간략분석==

2015년 4월 30일 (목) 17:48 판

1. 목차

지도
박스글
참고문헌
서문
감사의 말
언어와 연대결정에 대해 학생들에게 전하는 말
세계사 이해를 위한 주제
1500년까지의 세계사

3부 새로운 세계 질서의 등장(1500-1800)

14 새로운 만남: 세계시장의 탄생
탐험과 확장의 시대
-이슬람과 향신료 무역
-서아프리카의 이슬람 전파
-새로운 참가자: 유럽
해양제국 포르투갈
-인도의 포르투갈인들
-향신료 탐색
-새로운 경쟁자들의 출현
“신세계” 정복
-항해
-정복
-제국의 통치
-미션(1986)
-경쟁의 격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영웅인가, 악당인가?
-콜럼부스의 교환
과도기 아프리카
-아프리카의 포르투갈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
-노예무역
-변화하는 대륙의 정치, 사회구조
향신료 무역 시대의 동남아시아
-서양의 도래
-문명의 행진
-식민지 시대 이전 동남아시아의 국가와 사회
-국왕 서신의 교환

15 유럽의 변신: 종교개혁과 국가 건설
16세기의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배경
-마르틴 루터와 독일의 종교개혁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전파
-종교개혁 논쟁: 마르부르크 분쟁
-가톨릭의 종교개혁
-초기 근대 세계의 결혼
위기의 유럽(1560-1650)
-16세기의 정치와 종교 전쟁
-경제, 사회 위기
-17세기의 위기: 혁명과 전쟁
위기에 대한 대응: 절대주의의 실천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
-중부유럽과 동유럽의 절대주의
영국과 입헌군주제
-왕과 의회의 충돌
-내전과 연방
-왕정복고와 명예혁명
유럽 문화의 융성
-미술: 바로크
-미술: 네덜란드 사실주의
-영국 문학의 황금시대

16 이슬람 제국
오스만투르크 제국
-오스만투르크의 부상
-제국의 확장
-전쟁 양상의 변화
-투르크 지배의 본질
-오스만 투르크의 종교와 사회
-오스만 투르크의 쇠퇴
-오스만 투르크의 미술
사파비조(Safavids)
-사파비조의 부상
-왕조의 몰락
-사파비조의 정치와 사회
-사파비조의 미술과 문학
무굴 제국의 위엄
-바부르(Babur): 무굴제국의 시조
-악바르와 인도-이슬람 문명
-악바르의 후계자들
-인도에서 나타난 유럽 세력의 영향
-후글리 항구의 점령
-무굴 제국: “화약의 제국?”
-무굴 제국 하의 사회: 문화의 통합
-무굴 제국의 문화

17 동아시아 세계
절정에 다다른 중국
-명나라에서 청나라까지
-청나라의 위대함
변화하는 중국
-인구 폭발
-산업화의 씨앗
-인구폭발
-청나라의 일상
-문화 발전
도쿠가와 일본
-3 명의 위대한 천하인
-서양에 대한 문호 개방
-도쿠가와의 “위대한 평화”
-촌락의 삶
-도쿠가와의 문화
한국과 베트남
-한국: 위험한 이웃
-베트남: 제국의 위험

18 신세계질서를 목전에 둔 서양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을 향하여: 서양의 지적 혁명
-과학혁명
-계몽주의의 배경
-프랑스 계몽사상가들과 그 사상
-과학혁명
-계몽시대의 문화
-경제 변화와 사회질서
-새로운 경제 질서
-18세기의 유럽 사회
-아메리카의 식민제국과 혁명
-서인도 제도
-영국령 북아메리카
-프랑스령 북아메리카
-미국 독립 혁명
새로운 정치질서와 세계 분쟁을 향하여
-프로이센: 군대와 관료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제국
-예카테리나 여제 치하의 러시아
-재고되는 계몽절대주의
-변화하는 전쟁의 양상: 세계적 대립
프랑스 혁명
-프랑스혁명의 배경
-삼부회의에서 국민의회로
-마리 앙투아네트(2006)
-구체제의 파멸
-프랑스 민중의 자연권: 두 가지 관점
-급진적 혁명
-반동과 집정부
나폴레옹 시대
-나폴레옹의 부상
-국내 정치
-나폴레옹 제국

4부 세계사의 근대 패턴(1800-1945)

19 근대화의 시작: 19세기의 산업화와 내셔널리즘
산업혁명과 그 영향
-영국의 산업혁명
-산업화의 확산
-산업혁명
-산업화 확산에 제약이 걸린 지역
-산업혁명의 사회적 영향
산업 번영의 성장
-새로운 제품
-새로운 패턴
-세계경제의 등장
-산업화의 확산
-여성과 노동: 새로운 취업 기회
-노동계층의 조직
반동과 혁명: 내셔널리즘의 성장
-보수 질서
-변화의 힘
-혁명과 개혁(1830-1832)
-1848년 혁명
-혁명에 대한 반응: 두 가지 관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동구 문제(Eastern Question)
국가통합과 민족국가(1848-1871)
-이탈리아의 통일
-독일의 통일
-영 빅토리아(The Young Victoria)(2009)
유럽의 국가(1871-1914)
-서유럽: 정치적 민주주의의 성장
-중부유럽과 동유럽: 사라지지 않은 구(舊)질서
-국제적 경쟁과 전쟁의 회오리
-오스만투르크제국과 발칸반도의 내셔널리즘

20 아메리카와 서양의 사회문화
19세기-20세기 초의 라틴아메리카
-독립전쟁
-국가 건설의 어려움
-라틴 아메리카 경제와 사회의 전통과 변화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변화
북아메리카의 이웃국가: 미국과 캐나다
-미국의 성장
-미국의 부상
-캐나다의 발전과정
서양의 대중사회 등장
-새로운 도시 환경
-대중사회의 사회구조
-여성의 경험
-여성에게 보내는 조언: 두 가지 관점
-대중사회 시대의 교육
-내셔널리즘의 부상
-대중사회 시대의 여가
문화생활: 서방세계의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낭만주의의 특징
-과학의 새로운 시대
-문학과 미술의 사실주의
근대의식을 향해: 지성적, 문화적 발전
-새로운 물리학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
-다윈의 영향: 사회다윈주의(사회진화론)와 인종주의
-근대성의 문화

21 밀려오는 제국주의
식민 지배의 확산
-동기
-전술
-옛 제국주의와 새로운 제국주의
식민지 체계
-식민주의의 철학
-백인의 짐, 흑인의 슬픔
영국 통치 하의 인도
-식민지 개혁
-식민주의의 대가
동남아시아의 식민 정권
-“동방의 기회(Opportunity in the Orient)"
-동남아시아에서의 식민지 쟁탈
-식민통치의 본질
아프리카에서의 제국 건설
-서아프리카에서 커져가는 유럽 세력
-나일 강에 드리워진 제국주의의 그림자
-동아프리카의 아랍 상인과 유럽 선교사들
-카슘공방전(Kharoum)(1966)
-남부아프리카의 반투(Bantu) 족, 보어인(Boer), 영국인
-아프리카 쟁탈전
-아프리카의 식민주의
반(反)식민주의의 등장
-독립국 지위의 태동
-전통의 저항: 내셔널리즘의 선도자
-제국주의: 대차대조표
-저항하거나 저항하지 않거나

22 태평양에 드리운 그림자: 도전에 직면한 동아시아
만주족[청나라]의 쇠퇴
-아편과 반란
-개혁 노력
-제국주의의 절정
-구(舊)질서의 붕괴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1987)
과도기의 중국
-경제: 전통이란 장애물
-제국주의의 영향
-청나라의 일상
-제국주의와 세계 환경
부국강병: 근대 일본의 부상
-개국(開國)
-메이지유신
-제국주의 열강 합류
-서양문명의 경이: 두 가지 관점
-두 가지 세계관
-과도기의 일본 문화
-메이지 유신: 위로부터의 혁명

23 20세기 위기의 시작: 전쟁과 혁명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길
-내셔널리즘과 내부 불화
-군국주의
-전쟁의 발발: 1914년 여름
제1차 세계대전(The Great War)
-1914-1915: 미망과 교착
-1916-1917: 대학살
-전쟁의 확대
-영광의 길(Paths of Glory)(1957)
-국내 전선: 전면전의 영향
전쟁과 혁명
-러시아 혁명
-전쟁의 마지막 해
-평화협상
-화해에 대한 세 가지 목소리
불확실한 평화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
-안보의 추구
-대공황
-민주주의 국가
-소비에트 러시아의 사회주의
새로운 진실의 추구: 문화와 학문의 경향
-악몽과 새로운 비전
-예술계의 혁명
-무의식 탐색

24 내셔널리즘, 혁명, 그리고 독재: 1919년부터 1939년까지의 아시아, 중동, 라틴아메리카
내셔널리즘의 부상
-근대의 내셔널리즘
-간디와 인도 국민회의파
-간디(1982)
-중동의 내셔널리즘 반란
-근대세계의 이슬람: 두 가지 관점
-내셔널리즘과 혁명
중국의 혁명
-과학과 민주주의: 신문화운동
-내셔널리즘과 공산주의의 연대
-중화민국
-“타도공자점(打倒孔子店)”: 중화민국의 경제, 사회, 문화 변화
-인형의 집을 나와서
라틴아메리카의 내셔널리즘과 독재
-경제 변화
-종속의 영향
-라틴아메리카의 문화

25 위기의 심화: 제2차 세계대전
민주주의의 후퇴: 독재정권
-민주주의에서 멀어지다
-파시즘의 탄생
-히틀러와 나치 독일
-스탈린 시대의 소련
-일본 군국주의의 부상
전쟁에 이르는 길
-아시아, 전쟁에 이르는 길
-뮌헨 회담
제2차 세계대전
-전쟁 중 유럽
-전쟁 중 일본
-전쟁의 전환점(1942-1943)
-전쟁의 마지막 시기
새로운 질서
-유럽의 신(新)질서
-홀로코스트
-영화와 역사
-유로파, 유로파(Europa, Europa)(1990)
-아시아의 신(新)질서
국내 전선
-민중 동원
-근대화를 향한 길
-도시 폭격
전쟁의 여파
-제2차 세계대전의 대가
-제2차 세계대전과 유럽 식민지들: 탈식민지화
-연합국의 전후 처리 회담

5부 세계문명을 향하여 1945년 이후의 세계

26 냉전에 휘말린 동양과 서양
대동맹의 해체
-소련의 동유럽 장악
-내려가는 철의 장막
-트루먼 독트린
-마셜 플랜
-두 동강 난 유럽
아시아의 냉전
-중국 내전
-새로운 중국
-한국전쟁
-인도차이나의 분쟁
대립에서 공존으로
-동유럽의 소요
-소련의 동유럽 억압: 1956년 헝가리
-제3세계 내의 경쟁
-쿠바미사일 위기와 데탕트를 향한 움직임
-10월의 미사일(Missiles of October)(1973)
-중-소 분쟁
-평화로운 공존인가, 인민전쟁(people's war)인가?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
등가교환의 시대
-브레즈네프 독트린
-데탕트의 시대
-제3세계의 새로운 긴장
-악의 제국에 맞서
-새로운 세계 질서를 향하여
-지구촌인가 문명의 충돌인가?

27 멋진 신세계: 시험대에 오른 공산주의
전후의 소련
-스탈린에서 흐루시초프까지
-브레즈네프 시대(1964-1982)
-소비에트 블록 내의 문화 표현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 변화
소련의 해체
-고르바초프 시대
-동유럽: 위성국가에서 주권국가로
-소련은 왜 붕괴했는가?
붉은 동쪽: 공산주의 하의 중국
-새로운 민주주의
-사회주의로의 전환
-문화혁명
-마오쩌둥에서 덩샤오핑까지
-천안문 사태
-학생들의 민주주의 촉구
-유교로의 회귀?
“인민을 섬겨라”: 공산주의 하의 중국 사회
-계획 경제
-사회 문제
-변화의 시기 가족과 사회
-중국 문화의 변화
-공자와 마르크스: 끈질긴 전통

28 1945년 이후 유럽과 서반구
유럽의 회복과 부활
-서유럽: 민주주의의 승리
-타인의 삶(The Lives of Others)(2006)
-공산주의 후의 동유럽
-새로운 러시아
-유럽의 통합
초강대국의 등장: 미국
-베트남 시대 미국의 정치와 사회
-1973년 후의 우향우
캐나다의 발전
1945년 이후의 라틴아메리카
-마르크스 혁명의 위협
-내셔널리즘과 군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사례
-멕시코의 방식
서방세계의 사회와 문화
-새로운 사회의 등장
-성풍속의 반란
-청소년 시위와 학생시위
-전후 서방세계의 여성
-테러리즘의 성장
-이주노동자와 이민
-환경과 녹색운동
-이슬람과 서양: 프랑스의 세속주의
-1945년 이후의 서양 문화
-예술 경향
-과학과 테크놀로지 분야
-다양한 종교 생활
-산업시대부터 테크놀로지시대
-대중문화의 폭발

29 아프리카와 중동, 국가 건설의 어려움
우후루: 아프리카의 독립 투쟁
-식민지의 유산
-내셔널리즘의 부상
독립의 시대
-아프리카의 운명: 통합인가 다양성인가
-꿈과 현실: 독립 아프리카의 정치, 경제 상황
-해법의 탐색
-종교와 사회
근대 아프리카 사회의 지속과 변화
-교육
-도시와 시골의 일상
-아프리카의 여성
-아프리카 문화
-아프리카: 암흑의 대륙인가 빛의 땅인가?
-아프리카의 미래는?
분쟁의 초승달
-팔레스타인 문제
-나세르와 범아랍주의
-아랍-이스라엘 분쟁
-이란의 혁명
-페르세폴리스(Persepolis)(2007)
-페르시아 만의 위기
-아프가니스탄 분쟁과 이라크 분쟁
-중동의 혁명
현대 중동의 사회와 문화
-다양한 정치체제: 이슬람의 정치학
-중동의 경제: 석유와 모래
-이슬람 세계의 경쟁
-중동의 여성
-문학과 미술

30 태평양 세계를 향하여
남아시아
-종말을 맞은 영국의 인도지배
-인도의 독립
-반대 관점
-인도의 두 가지 비전
-정토(淨土): 독립 이후의 파키스탄
-남아시아의 빈곤과 다원주의
-하나의 세계, 하나의 환경
-독립 이후 남아시아의 미술과 문학
-인도의 미래는?
동남아시아
-식민시대의 종말
-냉전의 그림자
-정치개혁을 향하여
-가장 위험한 해(The Year of Living Dangerously)(1983)
-지역분쟁과 공조: 아세안(ASEAN)의 부상
-일상생활: 현대 동남아시아의 도시와 시골
-문화 경향
-유동적인 지역
일본: 아시아의 거인
-근대 일본의 변혁
-경제
-과도기 사회
-일본의 문화
-일본의 차이
작은 호랑이들
-한국: 분단된 반도
-타이완: 또 다른 중국
-싱가포르와 홍콩: 가장 작은 호랑이들
-아시아의 변방: 전후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동아시아의 기적에 대한 해설

에필로그
-용어사전
-지도 크레디트
-장별 노트
-찾아보기

2. 한국관련 내용

p. 502
도쿠가와 미술 중(中)
일본 도자기 장인들은 훌륭한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한국에서 기술과 디자인을 모두 빌려왔다.

pp. 503-504
한국과 베트남
핵심질문: 이 시기 한국의 발전상은 중국과 일본의 상황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가? 베트남 문명의 고유한 측면은 무엇인가?

한국: 위험한 이웃
도쿠가와 막부 치하의 일본이 고유의 특징을 지닌 독특한 사회를 만들어가며 중국 제국의 그림자에서 꾸준히 벗어나고 있을 무렵 한국의 이씨 왕조(Yi Dynasty)는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중국의 모델을 계속하여 따르고 있었다. 이씨 왕조는 14세기 말엽 장군 이성계(Yi Song Gye[YEE song gye])가 건국하였고, 즉각 명나라와 가까운 정치적, 문화적 관계를 수립했다. 한반도 중심부의 한강 유역에 위치한 서울을 새로운 수도로 삼은 이씨 왕조는 강력한 이웃인 중국과의 조공관계를 수용하고 중국의 제도와 가치관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였다. 중국에서처럼 과거제도가 관료 후보생들의 유교 고전에 대한 지식을 평가하는 수단이 되었고 성공은 출세로 나아가는 필수적인 단계로 여겨졌다.
하지만 차이점도 있었다. 일본처럼 조선도 귀족 계층인 소위 양반 계층으로의 진입을 계속 제한했다. 동시에 농민들은 여전히 농노와 비슷한 처지였으며, 국가 소유의 토지나 엘리트 계층의 영지에서 일했다. 천민으로 불린 노예계층은 정부의 농장이나 백정이나 광대 같은 특정 직업군에서 일했으며, 다른 집단의 지위 아래에 있다고 간주되었다.
마침내 한국 사회는 중국 정통성에서 벗어나는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15세기 한국의 구어(한글)를 적기 위한 표음문자가 창제되었다. 처음에는 양반계층의 경멸을 받고, 교육용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결국에는 사적 서신이나 대중 소설을 위한 매체가 되었다. 동시에 경제 부문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농업생산성이 향상되어 인구 증가와 소규모 도시 산업과 상업 부문도 등장했다. 사회적으로는 양반 계층의 오랜 지배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양반 계층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권력과 영향력은 오히려 약화되었고, 이에 따라 일부 양반들은 상인이 되거나 농민 계층으로 유입되어 귀족과 평민 사이의 구분이 흐릿해져갔다.
한편, 이씨 왕조는 이웃국가로부터의 홀로서기에 지속적인 어려움을 맞이했다. 16세기 중 많은 시기에, 주된 위협은 북쪽에서 비롯되었다. 만주 지역의 세력이 압록강 바로 남쪽의 한국 영토(p. 494 지도 17.3 참조)를 괴롭혔다. 하지만 1580년대에 이르러, 더 큰 위협이 동쪽에서 다가왔다. 새롭게 통일된 일본이었다. 16세기 중 많은 시간 동안 일본의 다이묘는 오랜 내전에 휘말려 왔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열도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화하기 위해 투쟁을 벌였다. 셋 중 히데요시만이 바다 건너 제국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그는 평민으로 태어났지만, 장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고, 1580년대 후반에 명나라를 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p. 504 박스글 참조) 한국 왕 선조(1567-1608) 는 히데요시의 동맹 제안을 거절했고, 1592년 일본은 한반도를 침공했다.
처음에는 일본의 계획이 잘 진행되었다. 일본군은 한국의 지방을 초토화하며, 한국의 수도 서울로 진격했다. 하지만 한국은 결국 침략군의 다루기 힘든 상륙선을 파괴할 수 있는 빠른 중장갑함을 개발한 이순신 장군(1545-1598)의 탁월한 지휘 하에 반격을 가하여 독립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은 오래 가지 못했다. 1630년대에 이르러 만주족이 북방국경에서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만주족 군은 1630년대에 한국 북방을 침공하여 결국 이씨 왕조가 북경의 새 제국[청나라] 조정에 충성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유럽 상인과 선교사들의 도래를 겪지 않았지만, 중국에 다녀가는 사절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정보가 한반도에 전해졌고, 18세기 후반에는 소규모 가톨릭 공동체가 수립되기도 했다.

p. 504
박스: 내 형제가 되어라. 그렇지 않으면 머리를 부숴 버리겠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은 적들을 무찌르고 일본 열도를 자신의 통치 아래에 넣었다. 그 직후 한국의 이씨 왕조의 사신이 그의 성공을 축하하는 서신을 전달했다. 히데요시는 아래 소개된 서신에서 중국 본토를 정복하고 동아시아 전체를 통치하겠다는 계획을 드러냈다. 과대 망상적 야심이 거의 고스란히 드러난 이 서신에서 히데요시는 이씨 왕조의 지배자가 중국 공격을 지원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복수를 당하게 될 것이라 선언했다. 하지만 한국의 왕은 서쪽의 강력한 이웃을 더 두려워했고, 히데요시의 동맹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일본을 공격했고, 이는 소위 임진왜란(1592-1598)이라고 불렸다. 이로 인해 한반도는 어마어마한 고초를 겪었다.

일본국 관백(關白) 히데요시는 이 서신을 조선 국왕 전하에게 바칩니다.
보내신 서한을 기쁘게 읽고, 전하의 뚜렷한 흔적에서 느껴지는 향기를 음미하고자 재삼 펼쳐서 보고 접곤 했습니다.
우리나라 60여 주는 근래 여러 지역으로 분리되어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대대로 내려오는 예의를 저버리며 조정의 정사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3, 4년 사이에 반신과 적도를 토벌하여 먼 지역과 섬들까지 모두 장악하였습니다.
삼가 나의 지나온 자취를 살펴보건대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일개 신하였지만, 일찍이 어머님께서 나를 잉태할 때에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복술사가 ‘햇빛이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표인풍(八表仁風, 팔표란 팔방의 아주 먼 끝. 인풍은 어질고 덕스러운 교화)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러운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이토록 기이한 징조로 말미암아 제게 적대하는 자는 자연 기세가 꺾여 멸망해갔는데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빼앗았습니다. 이제 천하를 평정한 뒤로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고 외로운 자들을 불쌍히 여겨 위로하니, 백성들이 부유하고 재물이 풍족하므로 지방마다 바치는 공물이 전보다 만 배나 늘었으니, 본조의 개벽 이래로 조정의 성대함과 수도의 장관이 오늘날보다 더한 적이 없었습니다.
비록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오래 산다 해도 예로부터 백 년을 넘지 못하는 데 어찌 답답하게 이곳에만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나라가 산과 바다로 막혀 멀리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한 번에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에 들어가 우리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심어 놓고, 교토의 다스림과 교화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제 마음입니다. 귀국이 앞장서서 입조한 것은, 앞일을 깊이 헤아린 처사이므로 이제는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먼 곳의 작은 섬에 있는 무리라도 뒤늦게 복속해온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에 나온다면 더욱 이웃으로서의 맹약이 굳게 될 것입니다. 제 소원은 삼국에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방물은 목록대로 받았습니다. 몸을 보중하고 아끼십시오.

일본국 관백 히데요시
질문: 히데요시는 동아시아 전역을 지배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어떻게 정당화하고 있는가?

p. 643
그림 22.3 1900년 무렵 외세의 점령지와 영향력 범위]
9세기 말, 중국은 외국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멜론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색칠된 지역은 최근 외세의 영향력 아래 들어간 지역을 가리킨다.
일본해(동해) - 일본해와 동해 병기

p. 643 제국주의의 절정 중(中)
1894년 청나라는 일본과 전쟁에 돌입했다. 일본이 한반도에 진출함으로써 중국이 오랫동안 지켜온 한국에 대한 종주권(suzerainty)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p. 656
지도 22.4 메이지 시대 일본의 해외 확장>

19세기 후반에 들어가며, 일본은 일본열도를 넘어 확장에 나섰고, 제국주의 열강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일본의 식민지 확장 범위가 이 지도에 나타나 있다.

한국은 1908년에 일본이 획득한 것으로 나온다
일본해(동해) - 일본해와 동해가 병기되어 있음

pp. 658-660
제국주의 열강 중(中)
<전략>
2년 후 일본 해군은 한국이 중국 상인들에게 3개 항구를 개항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한국은 오랫동안 일본의 사례[쇄국주의]를 따랐고, 중국에 보내는 조공사절 외에는 외세와의 접촉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주로 중국이나 프랑스에서 파견된 기독교 선교사들은 크게 박해 당했다. 하지만 한국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내부적이었다. 1860년대 초, 중국의 태평천국 운동에서 부분적으로 영향 받은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후 이씨 왕조는 전통 가치의 회복과 외세 개입을 차단하면서 국력 강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시골 지역의 빈곤과 부정부패가 만연해졌다. 1871년 일본의 페리 제독 사례를 뒤쫓아 미군 함정이 한국의 개항을 노렸지만 상당한 인명 손실을 입은 채 쫓겨났다.
하지만 가장 끈질기게 한국에 구애한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군신관계를 종식시키고, 일본의 방식에 따라 한국을 근대화시키고자 했다. 1876년 두 나라는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인지해 주는 대가로 일본 상인들에게 3개 항구를 개항하기로 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1880년대, 한국을 놓고 중국과 일본과의 경쟁이 격화되었다. 중국은 한국 조정의 보수파를 지원했으며, 일본은 중국의 오랜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비교적 급진적인 세력을 지원했다. 1894년 한국 지방 지역에서 새로운 봉기가 발발하자, 중국과 일본은 각기 반대편에서 개입했다. 전쟁 동안 일본 해군은 중국 군선을 격파하고 청나라의 뤼순을 점령했다.(p. 659 박스 글 참조)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중국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으며, 타이완과 전략적 해군기지인 뤼순 항과 함께 요동 반도를 일본에 이양해야 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유럽 열강의 압력에 따라 중국에 요동 반도를 돌려주었지만, 20세기 초에 다시 공세로 나왔다.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러시아와도 경쟁을 버렸고 양국 관계는 점차 경색되었다. 1904년 일본은 러시아가 1898년 중국에서 탈취한 뤼순항의 러시아 해군 기지를 기습했다. 일본군이 약세였지만 러시아는 새로운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통한 보급 문제에 부딪혔고, 국내의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에 시달렸다. 1905년 일본 함대가 한국 연안에서 러시아 함대를 거의 전멸시킨 후 러시아는 굴욕적인 평화조약에 합의 하며, 전략적 요충지인 요동 반도를 일본에 돌려주는 한편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까지 넘겨줘야했다. 러시아는 또한 한국과 만주 남부에 구축해 두었던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포기는 것에 합의했고, 이는 곧 일본의 통제 하에 넘어가게 되었다. 일본의 승리를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이는 동남아시아의 식민지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백인이 천하무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후 수년 동안, 일본은 1908년 한국을 병합(annexing Korea in 1908 as an integral part of Japan)하는 등 동북아시아에서 자국의 위치를 공고화했다. 한국인들이 이에 저항하자, 일본은 보복을 가해 수천 명을 죽음에 몰아넣었다. 미국은 이 병합(annexation)을 인정한 최초의 국가였다. 일본 정부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고 문호 개방 정책을 수용한 데 대한 보답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아시아 국가로부터의 이민에 제동을 걸자, 양국 간의 서로에 대한 의혹은 커져갔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러-일 전쟁을 중재하는 과정에서 러시아에 배상금을 요구한 일본의 입장을 거부하자 많은 일본인들의 공분을 샀다. 반면, 일부 미국인들은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키워가며 명백하게 드러난 황화(黃禍, yellow peril)의 부상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p. 660
연대기: 제국주의 시대 일본과 한국
도쿄 만에 당도한 페리 제독 1853
타운젠드 해리스 조약 1858
도쿠가와 막부의 몰락 1868
미국 함대의 한국 개항 실패 1871
일본의 봉건제 철폐 1871
일본 제국군대 창설 1871
메이지 헌법 채택 1890
교육에 대한 황국칙령 1890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타이완을 차지한 일본 1895
러-일 전쟁 1904-1905
일본에 합병된 한국 1908

p. 659
반대 관점: 두 가지 세계관
19세기 동안, 중국이 외부 세계를 바라보는 위계적 방식에 심각한 도전이 발생했다. 아시아에서 새로운 영토를 노리는 유럽 국가들뿐만 아니라 부국강병을 위한 핵심은 식민제국이라는 서양의 관점을 받아들이며, 열강으로 부상한 일본도 위협이었다. 일본의 첫 번째 목표는 중국의 오랜 종속국이던 한국이었고, 1894년 중국과 일본이 한반도를 놓고 벌이던 경쟁은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다음은 양국의 통치자들이 발표한 선전포고이다. 중국이 일본을 경멸적으로 지칭한 왜인(Wojen, "dwarf people")에 주목해 보라.

대(對)중국 선전포고
한국은 독립국이다. 한국은 일본의 조언과 지침에 의해 처음으로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중국을 관습적으로 중국의 속국(dependancy)으로 봉해왔으며 공개적으로 또는 암암리에 한국의 내정에 간섭했다. 최근 한국에 반란이 일어나자 중국은 종속국(dependancy)을 원조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짐은 1882년 한국과 체결한 조약에 따른 직권에 의하여, 그리고 위급 상황의 발생 가능성에 대비하여 한국에 군사를 파견한다.
끊이지 않는 혼란으로 인한 재앙에서 한국을 원조하고, 이에 따라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유지하려는 바람으로 일본은 이 목적의 성취를 위해 중국의 협조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온갖 구실을 내밀었다. 중국의 이러한 행위는 황국의 권리와 이익에 직접적인 타격일 뿐만 아니라 동양의 영구적인 평화와 평온에 위협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짐은 중국에 대한 공식적인 선전 포고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對)일본 선전포고
한국은 지난 200년간 우리의 조공국이었다. 한국은 지금껏 우리에게 조공을 바쳐왔으며, 이는 전 세계가 아는 바이다. 지난 십여 년간 한국은 반복된 반론으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으며, 짐은 작은 조공국에 대한 동정을 금치 못하여 수차례에 걸쳐 원조를 제공했다. 올해 한국에서 또 다른 반란이 시작되었고, 한국 왕이 우리에게 반란 진압을 위한 원조를 수차례에 걸쳐 요청했다. 이에 짐은 이홍장에게 한국에 파병하도록 명하였으며, 이들이 [한국] 애산에 당도하자마자 반란군은 즉각 흩어졌다. 하지만 왜인(Wojen)이 어떤 명분도 없이 한국에 군대를 보내어 서울에 진입하였고, 병력이 1만을 넘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증원하였다. 동시에 일본은 온갖 방도로 한국인들을 위협하는 태도를 보이며, 한국 왕을 겁박하여 정부 체제를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이 조약을 위반하고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았으며, 이제는 거짓되고, 기만적인 행위로 가득하여 적대감을 내보이면서 스스로를 여러 강대국들의 규탄의 대상이 되니, 이에 짐은 중국이 항상 온갖 뒤얽힌 관계 속에서 박애와 완벽한 정의를 따라왔으며, 반면, 왜인은 모든 국가들 간의 법과 조약을 깨트림으로써 우리의 인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한다. 이에 따라 짐은 이홍장에게 명하여 짐의 여러 군에 엄격한 명을 내려 속히 왜인을 그 소굴에서 뿌리 뽑으려 한다.
Q: 위 선전포고문에 나타난 19세기 말 중국과 일본의 세계관을 비교해 보자. 어느 관점이 더 설득력이 있는가?

p. 749
아시아의 새로운 질서 중(中)
<전략>
유럽 점령지의 독일 병사들처럼, 일본군도 종종 피정복지의 주민들의 생명을 경시했다. 1937년 중국 난징 정복과정에서 일본군은 며칠 동안을 살인, 강간, 약탈에 몰두했다. 거의 80만 명의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보내졌는데 그들은 대부분 강요된 노동자로 보내졌다. 한국과 필리핀 여성 수만 명이 일본군을 위한 “위안부(comfort women)”(매춘부)로 강제로 복역해야 했다.
(Almost 800,000 Koreans were sent overseas, most of them as forced laborers, to Japan. Tens of thousands of women from Korea and the Philippines were forced to serve as “comfort women” (prostitutes) for Japanese troops.)
<후략>

p. 770
지도 26.2 중국내전
일본해(동해) - 일본해와 동해가 병기되어 있음

pp. 771-772
한국전쟁
한국전쟁의 갑작스런 발발은 동아시아에서의 냉전을 심화시켰다. 1894-95년의 중일 전쟁이후, 오랫동안 중국의 조공국이었던 한국은 점차 일본과 러시아의 경쟁 구도 아래로 빠져들었다. 1905년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를 거둔 이후, 한국은 일본 제국에 합병되었고, 이는 1945년까지 이어졌다. 한국을 일본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의 목표 중 하녀였으며,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전날, 소련과 미국은 한국을 38선을 기점으로 나누어 점령하기로 합의했다. 양국의 본래 계획은 평화를 회복한 후 독립 정부 아래 한국을 통일하여 총선을 치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소 관계가 악화되면서, 한국에는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북쪽에는 공산주의 정부가, 남쪽에는 반공정부가 들어섰다.
남북의 긴장은 분계선을 따라 격화되었고, 1950년 6월 25일 스탈린의 암묵적인 승인 하에 북한군이 한국을 침공했다. 트루먼 정부는 즉각 미 해군과 공군에게 한국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UN 안전보장이사회(소련 대표단은 UN이 중국 신정부의 가입을 거부하는 것에 항의하기 위해 출석하지 않은 상태였다) 회원국들이 UN헌장의 안보 조항에 따라 북한의 남침에 공통으로 반격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9월에 이르러, UN군은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하에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진ㄴ격했다. 통일 한국에 비공산주의 단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목표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중국군이 압록강으로 접근하자 UN군(대부분은 미군이었다)이 중국의 개입을 촉발할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맥아더는 중국이 대응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다. 하지만 11월, 중국의 “자원” 군이 북한 측에 서서 전쟁에 개입했고 UN 군을 남쪽으로 어지러이 몰아붙였다. 전쟁은 계속됐지만, 결국 본래의 분계선이었던 38선 근처에 고착된 방어선이 수립되었다.(지도 26.3 참조)
많은 미국인들에게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아시아의 공산주의 확산을 노리는 중국의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난 증거였다. 그리고 최근의 증거는 마오쩌둥이 아시아에 혁명의 물결이 일어날 것이라 확신하여 북한의 남침에 힘을 보태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중국이 참전 결정을 내린 가장 큰 이유는 적국인 미군이 중국 국경에 주둔하고 국경을 넘어 공격을 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맥아더는 공산주의 중국에 대한 공격의 전초전으로 만주의 도시들에 공습할 것을 공개적으로 촉구함에 따라 이러한 공포를 더욱 키웠다.
어쨌든 한국전쟁의 발발은 중국에게 특히 불행한 일이었다. 침공 직후, 트루먼 대통령은 중국의 타이완 침공을 방지하기 위해 제7함대를 타이완해협으로 급파했다. 더욱 불운한 일은, 이 침공이 유럽 국가들이 지닌 중국의 새로운 정부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심화시켰으며, 이후 20년 동안 자본주의 강대국들로부터 중국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은 타이원의 내셔널리즘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대우했고, 중국의 UN 안보리 가입을 보류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결과적으로 본토 중국은 모든 형태의 경제적, 기술적 원조를 제한 당했고, 어쩔 수 없이 소련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했다.

p. 772
[지도 26.3 한반도]
1950년 6월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한국을 기습 침공했다. 이 지도에는 1953년 종전을 알린 휴전선이 표시되어 있다.
Q: 압록강의 의의는 무엇인가?
일본해(동해) - 일본해와 동해가 병기되어 있음

p. 913
[지도 30,3 현대 일본]
현재 일본을 구성하는 4개 주요 섬을 볼 수 있다.
일본해(동해) - 일본해와 동해가 병기되어 있다.

p. 914
일본: 아시아의 거인 중(中)
문제는 단순히 학술적인 것이 아니다. 동아시아에는 아직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며, 이 지역 국가들과 일본의 관계가 최근 중국해에 잇는 작은 섬의 영유권을 놓고 한국과 중국과 다툼을 벌인 끝에 경색되었다. 군사의 적절한 역할은 일본에서 격렬한 논쟁의 주제였다. 일부 관측통들은 일본이 미국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며 아시아 문제에 있어 더 큰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우려는 최근 몇 년 동안 더 커져왔다. 이웃 북한의 잠재적인 핵 위협(“뒤의 ”한국: 분단된 반도“ 참조)과 강력한 중국의 공격적인 태도는 많은 일본인들에게 위험한 동네에 살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였다.

pp. 918-919
한국: 분단된 반도
세계가 일본 열도의 경제 기적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일본해 건너 아시아 대륙에서 또 다른 기적이 벌어지고 있었다. 1953년 한반도는 3년간의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해 피폐해져 있었다. 이 분쟁으로 38선 양쪽에서 약 4백만 명의 한국인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인구의 1/4이 난민이 되었다. 1953년 6월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적대적인 두 나라가 중무장한 채 서로를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불안한 평화였다.
휴전선 북쪽에는 공산주의 지도자 김일성(1912-1994)이 독재통치를 하는 경찰국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있었다. 남쪽에는 대한민국이 북한의 침공에 맞서 레지스탕스를 이끌었던 강경한 반공자의자로, 역시 그만큼 권위주의적인 이승만 대통령(1875-1965) 치하에 있었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이 부유한 지주계층에 의존하는 이승만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다. 정부의 부패, 부정선거, 경찰의 행패로 대표되는 혹독한 통치가 몇 년간 지속된 후 1960년 봄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이승만을 하야하게 했다.
이승만 시대가 지난 후 잠시 동안 다당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섰으나, 1961년 쿠데타가 발발해 박정희 장군(1917-1979)이 정권을 잡았다. 새로운 정권은 새 헌법을 발표했고, 1963년 박정희는 민간 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십 년간의 외세통치와 내전으로 황폐화된 경제 회복을 주창하고 나섰다. 일본 통치 하에서 민간 부문이 상대적으로 약했었기 때문에 정부는 특정 산업의 발전, 수출 진흥, 인프라 개발을 목표로 하는 일련의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며, 경제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토지개혁 정책을 통해 거대 지주들이 7.4에이커 이상의 농지를 전부 소작인들에게 염가에 팔아야 했다.
토지개혁은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검약, 교육 중시, 근면 등 유교 원리를 비롯해 일본의 자본과 기술 덕택에 한국은 점진적으로 동아시아의 산업 강국으로 떠올랐다. 경제성장률은 1950년대 연 5퍼센트 미만이었던 것이 박정희 시대에 평균 9퍼센트로 뛰어올랐다. 삼성, 대우, 현대 등 대기업들은 재벌(chaebol)이라 불리는 거대 기업집단으로 변신했다. 재벌은 전쟁 전 시기 일본의 자이바츠(Zaibatsu, 財閥)와 유사하다.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과 놀라우리만치 높은 저축률 이용한 한국 기업들은 아시아, 나아가 세계 수출시장에서 일본과 적극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1인당소득 또한 현저하게 상승했다. 1960년대 연간 90달러 미만이었던 것이 20년이 지나자 1,560 달러(공산주의 북한의 2배)로 껑충 뛰었다.
[919] 하지만 동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처럼 한국은 민주주의 원칙 발전에는 더뎠다. 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있는 정부였지만, 박정희는 권위주의적 수단으로 통치를 지속했고, 모든 형태의 반대를 억눌렀다. 1979년 박정희는 암살당했다. 하지만 잠시의 공백 이후, 1980년 전두환 장군(1931~ )이 정권을 거머쥐었다. 새 정권은 전임정부처럼 권위주의적이었고, 1987년 권위주의 통치에 반대한 학생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발발했다.
1989년 마침내 총선이 치러져 한국은 민간인의 통치를 되찾았다. 이후 대통령들은 부정부패를 억제하는 가운데, 재벌을 단속하고 북한의 공산주의 정권과 접촉을 시작하며 통일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1997년 아시아금융위기이후, 경제상황은 일시적으로 악화되었지만, 한국은 이내 회복하여 여전히 국제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여가고 있다. 한국의 커져가는 자신감을 상징하는 것은 2007년 선출된 신임 대통령이다. 전 서울시장인 이명박(1941- )은 서울 단장과 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정력적으로 일했으며, 특히 주 5일 근무제를 정착시켰다.
한편, 현재는 김일성의 아들인 김정일(1941~ )의 독재가 이어지며, 핵 보유를 목전에 둔 북한과의 관계는 여전히 긴장 상태이다. 북한 정권이 핵무기개발프로그램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다국 회담이 수년 간 이어지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없다.

p. 918
지도 1953년 이후 한반도
일본해(동해) - 일본해가 동해와 병기되어 있음.

3. 간략분석

Wadswoth Cengage Learning 출판사의 세계사 교과서 2권이다. 한국 관련 주요 내용으로 임진왜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병합, 일본에 의한 전시 강제 동원, 한국분단과 한국전쟁, 한국의 경제성장과 민주화 등이다.
부분적으로 한국의 중국에 대한 종속을 드러내는 부분들이 나온다. 한국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갈등을 다룬 부분에서 “중국이 오랫동안 지켜온 한국에 대한 종주권(suzerainty)”, “중국의 오랜 종속국이던 한국”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한국인들의 강제 노동과 위안부 문제를 언급한다. “거의 80만 명의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보내졌는데 그들은 대부분 강요된 노동자로 보내졌다. 한국과 필리핀 여성 수만 명이 일본군을 위한 “위안부(comfort women)”(매춘부)로 강제로 복역해야 했다.”

4. 검토의견

페이지 한국관련 기술 내용 검토의견 오류코드
p. 353 <지도: 열강의 중국 분할>
-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됨
일본해를 '동해'로 표기하거나 최소한 '동해(일본해)'로 수정해야 함 A1
p. 353 <지도: 한국전쟁. 1950-1953>
-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됨
일본해를 '동해'로 표기하거나 최소한 '동해(일본해)'로 수정해야 함 A1


- 개선 과제 코드 -
개선 과제 유형
A: 동해·독도 표기 수정 필요 B: 단순표기 C: 내용 수정 필요 D: 내용 증·신설 필요 E: 기타
A1: 동해 표기 A2: 독도 표기 C1: 통계 C2: 과거 사실 C3: 객관적 기술 D1: 증설 필요 D2: 신설 필요

연계 정보

관계 대상 문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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