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우즈베키스탄:Всемирная история 8(세계사 8)

Cefia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1. 목차

들어가는 말. 근대사의 시작

  • 제I부. XVI-XVIII 세기 유럽, 아메리카와 아시아 국가
    • 제I장. 유럽과 아메리카 국가
      • 1. 위대한 지리 발견과 그 의미
      • 2. 유럽국가의 식민지 쟁탈전
      • 3. 근대사 초기 서유럽국가의 사회경제적 생활
      • 4. 유럽의 개혁. 독일 농민전쟁
      • 5. 영국 왕의 권력강화
      • 6. 프랑스의 절대주의
      • 7. XVI-XVII 세기 러시아
      • 8. 네덜란드 혁명
      • 9. 유럽 르네상스의 시대 문화
      • 10. 과학의 발달
      • 11. 영국 부르주아 혁명의 시작
      • 12. 영국 내전과 그 결과
      • 13. 최초 산업국가 영국
      • 14. 미합중국의 형성
      • 15. 프랑스 위대한 부르주아혁명과 군주제의 전복
      • 16. 프랑스 위대한 부르주아혁명의 결과와 역사적 의미
      • 17. XVI-XVIII세기 게르만 제국
      • 18. 러시아제국의 형성
    • 제II장. XVI-XVIII 세기 아시아 국가
      • 19. XVI-XVIII 세기 인도
      • 20. XVI-XVIII 세기 중국
      • 21. XVI-XVIII 세기 일본
      • 22. XVI-XVIII 세기 오스만제국
      • 23. XVI-XVIII 세기 이란
  • 제II부. XIX세기 초반에서 70년대까지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
      • 제III장. XIX세기 초반에서 70년대까지 유럽 국가
      • 24. XIX세기 초반에서 70년대까지 영국
      • 25. 프랑스의 첫 제국과 제국의 멸망
      • 26. 프랑스 두 번째 제국 형성
      • 27. XIX세기 초반에서 70년대까지 독일과 이탈리아
      • 28. XIX세기 초반에서 70년대까지 러시아
    • 제IV장. XIX세기 초반에서 70년대까지 아메리카 국가
      • 29. XIX세기 초반에서 70년대까지 미국
      • 30. 라틴아메리카 국민의 민족해방 투쟁
    • 제V장. XIX세기 초반에서 70년대까지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
      • 31. XIX세기 초반에서 70년대까지 인도
      • 32. XIX세기 초반에서 70년대까지 중국
      • 33. XIX세기 초반에서 70년대까지 일본
      • 34. XIX세기 초반에서 70년대까지 코리아
      • 35. XIX세기 초반에서 70년대까지 오스만 제국
      • 36. XIX세기 초반에서 70년대까지 아프가니스탄
      • 37. XIX세기 초반에서 70년대까지 이란
      • 38. XIX세기 초반에서 70년대까지 아프리카 국가
    • 제VI장. 사회정치운동
      • 39. XIX세기 초반에서 70년대까지 유럽의 사회정치운동
    • 제VII장. XVII세기 - XIX세기 60년대 과학, 문학과 예술
      • 40. 과학의 발달
      • 41. 문학과 예술
  • 주요 역사 사건



2. 한국 관련 내용

  • p.126-130

XIX세기 초반에서 70년대까지 코리아

한국(코리아)의 약화. 7학년 세계사에서 본 것과 같이 한국은 1392년 이성계가(1392-1398) 집권을 하고 이(李) 왕조가 형성되었다. 고려라는 국가를 조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성계 집권 당시 한국의 국가 체계는 중국식인 명나라 방식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국가 형성 초기에 한국은 이웃국가들에 비해 발전이 더디게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후진성의 내부 요인으로는 14-15세기에 생긴 토지 소유 봉건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영주 또는 국가관리가 횡령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농업분야에 고리 대금업이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자유로운 농민은 줄었고 농민 반란은 잦았다. 농업과 함께 도시경제, 산업, 무역은 낮은 수준이었다. 수공업자들은 농민들처럼 종속관계에 있었다.
1592-1598년 일본의 침략(임진왜란). 중앙집권국의 약화로 인하여 16세기 북쪽과 남쪽에서 이웃 국가들에 의한 체계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특히 남쪽인 일본에서 위협이 심화되었다. 1592년 일본은 한국을 공격하여 한국군의 저항을 넘어 서울, 그 다음에 평양을 차지하였다. 국가의 대부분의 지역을 일반 주민들을 잔인하게 대하는 일본군이 점령하였다. 잔혹한 죽음을 당한 한국인들의 3만개의 귀와 코가 있는 일본 도시 교토에 있는 “귀 무덤”이 그 잔인함의 증거이다. 점령된 지역에 “올바른 일을 위한” 유격병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군인들은 이순신의 함대 승리로 인하여 고무되었다. 1592년 여름 이순신의 배는 일본의 함대를 참패시켰다.
같은 해 말에 도착한 5만명의 중국군이 한국인들의 전투에 도움이 되었다. 1953년에 한국과 중국의 통합군은 평양과 서울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1597년 일본군의 새로운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국이 공격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었다. 한국인들은 육지에서도, 바다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의 침략은 커다란 심리적, 물질적 피해를 가져왔다. 나라 전체가 황폐화되었고, 도시와 시골이 폐허가 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수도의 인구는 반으로 줄어들었다. 파괴된 궁전을 복원하기 위해 수천명의 농민들이 도시로 동원되었다. 농촌 지역에서는 경작면적이 축소되었다. 고위 관리들 사이 부패와 범죄, 가난한 사람들 사이 기아와 콜레라가 확산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회복되기 시작했고 그 당시 만주군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만주군의 한국 침략. 1627년 중국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만주군이 한국을 침략하였다. 한국군을 패배시키고 많은 도시와 시골이 약탈당하고 점령 당하였다. 한국 정부는 강화도로 이전하고 그 장소에서 점령군과 협상이 이루어졌다. 양측이 서명한 평화조약에 따르면 한국은 중국의 도움을 포기하고 동맹관계를 중단해야 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1636년 만주군이 다시 한국을 공격하였다. 이번에는 서울을 점령할 수 있게 되었다. 불가피한 상황에 처한 한국은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637년에 체결된 새로운 협정에 따르면 한국의 왕은 만주의 신속으로 인정하였다. 한국정부는 명나라와의 어떠한 관계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중국 만주군에 전시 인력, 무기, 선박, 그리고 매년 세의 형태로 금, 은, 쌀, 비단, 원단, 종이를 보내야 했다. 다른 국가들의 영향력 확산 때문에 한국의 왕은 한국을 폐쇄 국가로 선언하였다. 외국인과 어떤 관계도 처형으로 처벌되었다. 이와 같은 조치는 금지령을 어긴 외국인에게도 적용되었다.
일본의 침략에서 회복되지 않는 한국은 만주의 침략으로 인하여 새로운 어려움과 부딪쳤다. 많은 도시와 시골은 약탈, 파괴되었고 그 주민은 노예가 되었다. 농업과 수공업에 충격 또한 컸다. 만주에게 내야 하는 세는 주민의 큰 부담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생산 능력 파괴, 한국의 심각한 경제 상황의 악화를 가져왔다.
사회 발전. 심각한 경제적, 정치적 위기로 인하여 한국 정부는 개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국민의 고위층은 또한 개혁 추진을 요구하였다. 봉건관계와 같은 장벽에도 불구하고 국가에서 현지 시장, 장터, 무역센터가 형성되고 중국, 일본과의 무역관계가 확대되었다.
영종(영조의 잘못된 표기- 번역자 주)(1725-1776)의 재위 기간 동안 나라에서 개혁이 이행되었다. 나라에서 댐, 저수지가 건설되고 기근을 대비한 곡식 창고도 만들어졌다. 동시에 쌀로 술을 제조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국가 세금이 폐지되거나 축소되었다. 심문 시 심한 고문(다리 부러트리기)이 금지 되었다. 영종왕 당시 농노에게서 농민의 개인 종속이 폐지, 그리고 종의 손자, 손녀의 자유를 주는 것에 관한 선언이 발표되었다. 1785년에 만들어진 “위대한 법전”에서는 약화되고 있었던 봉건제의 강화를 위한 시도가 엿보였다. 나라는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유럽국가의 식민주의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19세기 30-60년대의 한국. 19세기 30년대까지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 조짐이 보였던 위기는 악화되었다. 내부 갈등으로 지친 이 왕조는 쇠퇴 상태였다. 이 당시 다른 국가를 위해 한국을 “개방”시키고 식민지로 만들려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위협이 되었다. 먼저 이는 유럽 선교사 활동의 활성화로 나타난다. 1831년 로마의 교황은 한국에 주교단 설립은 선언하였다. 1832년 영국을 대표하는 선박이 한국에 가까워지고 무역관계 수립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당시 가톨릭 종교를 대표하는 자들이 한국 영토에 비밀리에 선교사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들은 가톨릭신자가 된 한국인들과 처형당하였고 이 때문에 프랑스는 군 함대를 보낼 수 있는 구실을 얻었다. 군 영향력을 기반으로 프랑스는 선교사의 죽음에 대한 보상으로 한국의 항구 개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배는 한국 근처에 가라앉았다.
외국의 압박으로 못 이겨 개방된 중국, 서방의 침략으로 인한 만주군의 항복이 한국 권력층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한국의 정부는 더욱 더 패쇠된 고립을 선택하였다. 19세기 중반에 한국에서 사회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선교사가 비밀 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작은 불꽃도 결과를 가늠할 수 없는 큰 불을 가져 올 수 있다.” 쉽지 않은 국내 상황은 1960년대 초 기근으로 인하여 악화되었다. 정부는 많은 농민 반란을 잔인하게 억압했다. 그 당시 자본주의 국가들의 한국에 대한 압박은 강화되고 있었다. 특히 한국 항만을 개방시키고 불공평한 협약을 강요하려는 미국의 시도가 활발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한국의 저항에 부딪쳐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의 자발적 고립, 정부가 현대적인 개혁을 추진하지 않은 것 때문에 국가 경제는 심각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시간이 지나자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전개 양상에 대하여 9학년에서 배우게 될 것이다.

질문과 과제 1. 어떤 요인으로 인하여 한국이 약화되었습니까?
2. 일본의 한국에 대한 침략은 어떤 경제적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3. 만주군의 한국 침략의 결과에 대해 말해보세요.
4. 영종 당시 개혁은 어떠한 목적으로 추진되었습니까?
5. 왜 위대한 강대국은 한국을 “개방”시키려는 시도를 했습니까?

3. 간략 분석

우리나라의 중학교 2학년에 해당하는 과정을 대상으로 하는 세계사교과서로서, 16세기에서부터 19세기 말까지의 내용을 담은 교과서이다. 이 교과서의 특이사항은 한국관련 내용이 신설되었다는 것인데, 우즈베키스탄은 각 학년별 세계사 교과서에서 이 학년에서는 16-19세기의 한국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4. 검토 의견

페이지 한국 관련 기술 내용 검토 의견 개선 과제 코드
p.127 1953년에 한국과 중국의 통합군은 ...<후략> 단순오류로서 ‘1953년'을 ‘1593년’으로 수정해야 한다 B
p.128 영종(1725-1776)의 재위 기간 동안 나라에서 개혁이 이행되었다. 단순오류로서 ‘영종’을 ‘영조’로 수정해야 한다 B
- 개선 과제 코드 -
개선 과제 유형
A: 동해·독도 표기 수정 필요 B: 단순표기 C: 내용 수정 필요 D: 내용 증·신설 필요 E: 기타
A1: 동해 표기 A2: 독도 표기 C1: 통계 C2: 과거 사실 C3: 객관적 기술 D1: 증설 필요 D2: 신설 필요

연계 정보

관계 대상 문서 설명
isRelatedTo 교육제도:우즈베키스탄 우즈베키스탄 교육과정, 2015년 조사 보고
isReviewOf 교과서 서지사항 분석대상 교과서 서지사항
isPartOf 종합분석:우즈베키스탄 2015년 우즈베키스탄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