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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1. 목차== * 1장 유럽의 발흥 ** 1. 고대: 그리스, 로마와 기독교 10 ** 2. 중세 초기: 유럽의 형성 18 ** 3. 중세 중기: 세속적 문명 28 ** 4.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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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다국적 기업의 본거지> 남한은 시가 총액이 1000-10000억 달러로 분류되어 있으며 국가에 본사를 둔 다국적 기업이 11개로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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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한국에서 물러나자 소련은 합의 하에 북한을 통치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점령지역을 공산 정권으로 만들었다.
 
일본이 한국에서 물러나자 소련은 합의 하에 북한을 통치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점령지역을 공산 정권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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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하락과 태국 통화 가치 폭락으로 시작된 문제는 “아시아 기적”을 이뤄낸 국가들인 말레이시아, 남한, 인도네시아, 홍콩과 싱가포르의 해외 투자금 회수와 통화 가치 폭락으로 이어졌다.-----
 
신뢰 하락과 태국 통화 가치 폭락으로 시작된 문제는 “아시아 기적”을 이뤄낸 국가들인 말레이시아, 남한, 인도네시아, 홍콩과 싱가포르의 해외 투자금 회수와 통화 가치 폭락으로 이어졌다.-----
 
 
  
 
==연계 정보 ==
 
==연계 정보 ==

2015년 2월 4일 (수) 15:14 판

1. 목차

  • 1장 유럽의 발흥
    • 1. 고대: 그리스, 로마와 기독교 10
    • 2. 중세 초기: 유럽의 형성 18
    • 3. 중세 중기: 세속적 문명 28
    • 4. 중세 중기: 교회 37
  • 2장 서양 기독교 국가의 대변동, 1300-1560년
    • 5. 14세기의 참사 50
    • 6. 이탈리아 르네상스 56
    • 7. 이탈리아 밖의 르네상스 69
    • 8. 새로운 군주국들 73
    • 9. 종교 개혁 77
    • 10. 가톨릭주의 개혁과 개편 93
  • 3장 경제 회복과 종교 전쟁, 1560-1648년 99
    • 11. 대서양 진출 99
    • 12. 상업 혁명 106
    • 13. 변화하는 사회 구조 114
    • 14. 카톨릭 스페인 전쟁: 네덜란드와 영국 121
    • 15. 프랑스 분열과 재건 130
    • 16. 30년 전쟁, 1618-1648년: 독일의 분열 135
  • 4장 서유럽의 세력 성장, 1640-1715년 145
    • 17. 루이 14세 대왕과 세력 균형 146
    • 18. 네덜란드 공화국 149
    • 19. 영국: 시민 전쟁 155
    • 20. 영국: 의회의 승리 162
    • 21. 루이 14세의 프랑스, 1643-1715년: 절대주의의 승리 169
    • 22. 루이 14세의 전쟁: 위트레흐트 평화 조약, 1713년 181
  • 5장 동유럽의 변화, 1648-1740년 189
    • 23. 노쇠하는 세 개의 제국 190
    • 24. 오스트리아 제국의 형성 199
    • 25. 프로이센의 형성 203
    • 26. 러시아의 “서구화” 211
  • 6장 과학적 세계상 225
    • 27. 과학 문명의 예언자들: 베이컨과 데카르트 226
    • 28. 뉴턴으로의 길: 만류 인력의 법칙 231
    • 29. 인간과 사회에 관한 새로운 지식 240
    • 30. 정치 이론: 자연법 학파 249
  • 7장 부와 제국을 위한 투쟁 257
    • 31. 엘리트 계층과 대중문화 258
    • 32. 18세기의 세계 경제 265
    • 33.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의 서유럽, 1713-1740년 274
    • 34. 18세기 중반의 대전: 파리 평화 조약, 1763년 282
  • 8장 계몽주의 시대 297
    • 35. 계몽사상가들과 그 외의 사람들 298
    • 36. 계몽전제주의: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311
    • 37. 계몽전제주의: 러시아 320
    • 38. 폴란드의 분할 325
    • 39. 새로운 움직임: 영국의 개혁 운동 329
    • 40. 미국 독립 혁명 338
  • 9장 프랑스 혁명 349
    • 41. 배경 350
    • 42. 프랑스 혁명과 개편 355
    • 43. 혁명과 유럽: 전쟁과 “두 번째”, 1792년 370
    • 44. 비상 공화국: 테러, 1792-1795년 374
    • 45. 입헌 공화국: 총재정부, 1795-1799년 383
    • 46. 권위주의 공화국: 영사관, 1799-1804년 389
  • 10장 나폴레옹 시대의 유럽 395
    • 47. 프랑스 제국 체제의 형성 396
    • 48. 대제국: 혁명의 확산 404
    • 49. 대륙 봉쇄령: 영국과 유럽 409
    • 50. 국가적 움직임: 독일 414
    • 51. 나폴레옹의 타도: 비엔나 회의 421
  • 11장 산업, 사상과 개혁을 위한 투쟁, 1815-1848년 433
    • 52. 영국의 산업혁명 435
    • 53. “주의”의 도래 443
    • 54. 제방과 홍수: 국내 457
    • 55. 제방과 홍수: 국제 461
    • 56. 서유럽의 진보주의 돌파: 1830-1832년 혁명 468
    • 57. 서유럽 중산층의 승리 476
  • 12장 혁명과 질서의 재구성, 1848-1870년 483
    • 58. 파리: 서유럽 사회혁명의 망령 484
    • 59. 비엔나: 중유럽과 이탈리아의 국민혁명 490
    • 60. 프랑크푸르트와 베를린: 자유 독일의 의문 498
    • 61. 새로운 유럽의 “주의”: 사실주의, 실증주의, 마르크스주의 503
    • 62. 보나파르티즘: 프랑스 제 2 공화국, 1852-1870년 512
  • 13장 거대한 민족국가의 세계적 통합, 1859-1871년 517
    • 63. 배경: 민족국가의 발상 517
    • 64. 카보우르와 1859년 이탈리아 전쟁: 이탈리아의 통일 521
    • 65. 독일 제국 건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 525
    • 66. 제정러시아의 자유화: 알렉산데르 2세 537
    • 67. 미국: 남북 전쟁 544
    • 68. 캐나다 자치령, 1867년 549
    • 69. 일본과 서양 552
  • 14장 유럽 문명, 1871-1914년: 경제와 정치 561
    • 70. 근대의 “문명화된 세계” 562
    • 71. 기본 인구학: 유럽인의 증가 565
    • 72. 19세기의 세계 경제 574
    • 73. 민주주의의 발달: 프랑스 제 3 공화국, 영국, 독일 제국 584
  • 15장 유럽 문명, 1871-1914년: 사회와 문화 601
    • 74. 민주주의의 발달: 사회주의, 노동조합과 남녀평등주의 602
    • 75. 과학, 철학, 예술과 종교 609
    • 76. 고전적 자유주의의 경고 622
  • 16장 유럽의 세계 패권, 1871-1914년 629
    • 77. 제국주의: 본질과 원인 630
    • 78. 미주 638
    • 79. 오토만 제국의 붕괴 643
    • 80. 아프리카의 분할 650
    • 81. 아시아의 제국주의: 네덜란드, 영국과 러시아 659
    • 82. 아시아의 제국주의: 중국과 서양 666
    • 83. 러일 전쟁과 결과 672
  • 17장 제1차 세계 대전 677
    • 84. 국제적 무정부 677
    • 85. 무장 교착 상태 687
    • 86. 러시아의 붕괴와 미국의 개입 696
    • 87. 오스트리아와 독일 제국의 붕괴 701
    • 88. 전쟁의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영향력 703
    • 89. 파리 평화 조약, 1919년 709
  • 18장 러시아 혁명과 소련 719
    • 90. 배경 721
    • 91. 1905년 혁명 728
    • 92. 1917년 혁명 733
    • 93.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742
    • 94. 스탈린: 5개년 계획과 대숙청 749
    • 95. 공산주의의 국제적 영향력, 1919-1939년 759
  • 19장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민주주의, 반제국주의와 경제 위기 763
    • 96. 1919년 이후의 민주주의 발전 763
    • 97. 서독과 로카르노 정신 768
    • 98. 아시아의 반제국주의 운동 773
    • 99. 대공황: 세계 경제의 붕괴 785
  • 20장 1930년대의 민주주의와 독재정부 795
    • 100. 미국: 공황과 뉴딜정책 796
    • 101. 영국과 프랑스의 재판과 민주주의 조율 799
    • 102. 이탈리아 파시즘 808
    • 103. 전체주의: 독일의 제 3제국 813
  • 21장 제2차 세계 대전 827
    • 104. 민주주의의 약점: 다시 전쟁으로 828
    • 105. 수년간의 추축국 승리 837
    • 106. 서구-소련 승리 845
    • 107. 평화의 토대 859
  • 22장 냉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재건 865
    • 108. 냉전: 새로운 10년, 1945-1955년 866
    • 109. 서유럽: 경제적 재건 882
    • 110. 서유럽: 정치적 재건 886
    • 111. 세계 경제 재형성 896
    • 112. 공산주의 세계: 소련과 동유럽 902
    • 113. 공산주의 세계: 마오쩌둥과 중화인민공화국 908
  • 23장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의 탈식민주의 국가 915
    • 114. 남아시아 독립 국가들의 등장 917
    • 115. 동남아시아 독립 국가들의 등장 925
    • 116. 변화하는 라틴 아메리카 933
  • 24장 제국에서 국가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아프리카와 중동 945
    • 117. 아프리카 혁명 946
    • 118. 중동의 동요 969
    • 119. 페르시아만의 혁명과 전쟁 981
    • 120. 개발도상국 989
  • 25장 공존, 대립과 새로운 세계 경제 995
    • 121. 대립과 긴장완화, 1955-1975년 996
    • 122. 세계 경제의 붕괴와 회복: 1970년대와 1980년대 1010
    • 123. 다시 시작된 냉전 1021
    • 124. 마오쩌둥 이후의 중국 1027
  • 26장 소련의 공산주의에 대한 국제적인 반기 1033
    • 125. 소련의 위기 1034
    • 126. 중유럽과 동유럽의 공산주의체제 붕괴 1039
    • 127. 소련의 붕괴 1046
    • 128. 공산주의 그 이후 1050
  • 27장 변화하는 현대 세계 1065
    • 129. 냉전 이후의 서유럽 1066
    • 130. 세계화 시대의 민족국가와 경제 1069
    • 131. 현대 문화의 지적 그리고 사회적 전환 1079
    • 132. 21세기의 국제 분쟁 1099
    • 133. 21세기의 사회적 문제 1110

2. 한국관련 내용

p. 870
일본이 한국에서 물러나자 소련은 합의 하에 북한을 통치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점령지역을 공산 정권으로 만들었다.

p. 878
만주, 한국을 포함한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수백만 명의 일본인을 송환하고 수많은 농민으로 노동력을 보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여전히 인력난에 시달렸다.

아시아 봉쇄정책: 6.25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서구 연합군과 소련은 한때 일본과 소련의 제국주의 경쟁 대상이자 1910년부터 일본의 통치하에 있었던 한국이 일본의 패배 이후 자유로운 독립 국가가 되는데 동의하였다.  1945년 미국은 군사적 편의에 따라 38선을 기준으로 소련이 북쪽을, 미군이 남쪽을 임시 점령할 것을 제안하였다. 한국 통일을 위한 전후 협상은 좌초되었다. 소련은 공산주의 지도자 김일성의 통치 아래 위성 국가를 설립하였고 북한 군사력을 키웠다. 미국은 남쪽에 의존국을 형성하고 경제 및 군사 원조를 제공하였다. 1947년 유엔 위원단은 전국 선거를 실시하고자 하였으나 소련은 북한지역의 선거 감시를 거부하였다. 1948년 5월 남한에서 실시된 총선거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그는 남한이 민주주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독재적으로 통치하였다. 한국과 다른 국가의 반공산주의는 반드시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선거 이후 미군은 남한에서 점령군을 철수하였지만 계속해서 군사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남한을 지원했다. 소련 또한 점령군을 철수하였지만 잘 훈련되고 우수한 장비를 갖춘 북한군이 갖추어졌다. 결국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두 개의 한국이 생겨났다.

p. 879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1950년이 되자 동아시아의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일본이 다시 부상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전후 점령을 통해 안정적이고 서구에 우호적이며 경제적으로 번영한 일본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소련의 제한적이고 냉소적인 도움으로 중국 공산당은 오랜 내전 끝에 국민당을 물리치고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비록 중국 공산당과 소련의 관계는 우호적이거나 호의적이지는 않았지만 두 국가 모두 일본의 부상과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증가하는 미국의 영향에 대한 우려를 공유했다. 중국과 소련은 1950년 2월에 상호 방어 조약을 맺었으며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에서 국민 중국을 대체할 수 있도록 캠페인을 벌였다. 캠페인이 실패로 돌아가자 소련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회의 참석을 거절했다. 그간 38선 부근에서는 작은 군사 충돌이 종종 발생했지만 1950년 6월 북한 인민군의 남한 기습 전면전은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다. 북한의 노골적인 군사적 침략 행위는 서구에서 명백한 냉전의 첫 공격으로 간주되었다. 북한은 담대한 계획과 막강한 군사력을 힘입어 빠르게 승리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들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외부 세계 또한 도덕적 항의 이상은 제기하기 않을 것이라고 여겨 결국에는 공산당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침략의 정확한 배경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북한이 남측의 친서구적인 한반도 통일 계획을 우려하여 자신만의 계획을 마련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알려진 정보에 의하면 스탈린은 북한의 의도를 알고 있었고 빠른 승리와 제한된 국제적 대응을 확신하여 소련군으로 하여금 북한 침략 계획을 돕도록 허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침략은 당시 안전 보장 이사회와 대치중이던 소련을 놀라게 했다. 소련은 안전 보장 이사회가 북한의 침략을 비난하고 군사적 조치를 허가하였을 때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내전 후 회복 중에 있던 중국의 경우에도 아직 탄탄한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고 대만의 국가주의자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비록 북한의 침략은 동맹 공산주의 국가의 허를 찔렀지만 북한군의 초기 압승은 소련과 중국으로 하여금 일본과 동아시아에 커져가는 미국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소련군은 조용히 군사적인 지원을 제공하였고 소련과 중화 인민 공화국의 인근에서 발생하는 아시아 역내 문제에 개입하는 미국을 비난하였다.   미국 정부와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북한의 공격이 소련에서 비밀스럽게 계획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북한군이 독립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어했다. 미국인들은 다른 지역에서처럼 아시아에서도 약점을 찾으려고 노력한 소련이 약점을 하나 발견했다고 추정하고 소련의 움직임이 중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를린과 같이 한국은 미국과 서구의 의지 확인을 위한 또 다른 실험대가 되어버렸다. 이미 “중국의 손실(1949년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자 자신의 정치적 논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을 우려한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의 침략을 “자유세계의 자유를 위한 의지”의 실험대로 간주하였다. 북한의 침략은 소련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공동의 안보와 봉쇄 정책에 대한 도전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이 “체제 전복”을 지나 “무장 침략과 전쟁” 단계에 진입했다고 말했다. “국지적 군사 행동”으로 간주될 것임을 알고 트루먼 대통령은 선전포고 없이 안보리 결의안에 준거하여 미국 전투 부대를 한국으로 파견하고 38선 북쪽 지역의 공습을 명령하였다. 성공적으로 일본 점령을 주도한 태평양의 전쟁 영웅, 맥아더 장군은 대부분 미군으로 구성된 국제 연합군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p. 880
(사진자료) 6.25 전쟁은 헨리 트루먼 대통령의 공산주의 봉쇄정책을 위한 중요한 시험대였지만 다른 근대 전쟁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배경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을 포함한 수많은 민간인들의 삶을 파괴하였다. 한국 소녀와 그녀의 어린 남동생 사진은 1951년 여름 미군의 탱크 근처에서 촬영되었다. 사진 속 아이들의 표정은 정부와 강대국 간의 난폭한 국제 분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끝없는 현장의 투쟁을 잘 보여준다. (타임 라이프 픽쳐 / 게티 이미지)

(본문) 1950년 전쟁 초기의 여름에 미군 주도의 유엔군은 이남 지역 해안가까지 밀려나 한반도에서의 추방을 직면하였다. 하지만 9월 맥아더 장군은 한반도 서쪽에 훌륭한 상륙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북한군을 38선 위로 몰아낸 뒤, 한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의 국경인 압록강까지 순식간에 전진하였다. 마오쩌둥은 중국 국경에 인접한 국제 연합군에 격분하여 중국의 국제적 중요성을 알리고자 조치를 취하였다. 10월 말, 대규모의 중국 “의용군”이 갑작스럽게 전쟁에 개입하였고 2주도 되지 않아 중국으로 진격해오던 유엔군을 38선 아래 남쪽으로 밀어냈다. 중국이 개입한 이래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창기에 미국의 단호한 결정에 만족했던 유럽 동맹국들은 전쟁이 국제적 충돌, 혹은 핵전쟁으로 확대될까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전선은 계속해서 변동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중국군과 북한군을 후퇴시키고, 38선을 다시 돌파 한 뒤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하였다. 그는 중국 해안 봉쇄 및 중국 도시 폭격을 제안하고, 중국 국민당의 중국 본토 공격을 장려하고, 심지어 방사성 폐기물로 중국으로부터 한국을 봉쇄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의 위협이 중국과의 전면전 및 소련의 개입을 야기하고 유럽 동맹국들의 전적인 지지를 받지 못할 전쟁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식하였다. 맥아더 장군이 공개적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무시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 대신 다른 사령관을 임명하고 휴전 협상을 시도하였다. 1951년 7월 정전 협정은 대규모 전쟁을 중단시켰지만 송환을 거부하는 북한군 포로 교환 문제로 교착 상태에 빠져 휴전 회담이 장기화되었다. 휴전협정은 1953년 7월 아이젠하워 장군의 대통령 임기 중에 서명되었고 분단선은 비무장지대 조항과 함께 3년 전 전투가 시작되었던 38선 근처에 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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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은 또 다른 장기간 분열로 이어졌다. 북한은 건국자의 아들인 김정일의 통치 하에 점점 더 엄격한 공산 독재정부가 되었다. 남한은 이승만 대통령 정권과 이후 정권 아래 오랫동안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루지 못하였지만 활발한 자본주의 경제를 성장시켜 북한의 경제력을 크게 앞질렀다. 몇 십 년이 지난 21세기 초반에도 4만 명 이상의 미군은 여전히 남한에 주둔했고 갈수록 더 고립된 북한 정권은 작은 핵무기 공장을 개발하려고 했다. 하지만 두 한국 사이의 긴장은 여러 가지 협상 덕분에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6.25 전쟁은 양측 모두에게 엄청난 비용을 초래했다. 15개국 군사로 이루어진 UN연합군의 육군 절반과 해군 및 공군 대부분을 제공한 미군은 6.25 전쟁에서 제 1차 세계 대전 전사자 수의 절반에 가까운 5만 4천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10만 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남한의 경우에는 100만 명 이상이 사망, 부상 또는 실종되었고 북한과 중국의 사상자도 비슷한 규모에 달한다. 소련을 대신해서 싸운 전투에서 총 300만 명에서 400만 명에 이르는 인명 손실을 발생했다. 전쟁은 세계 경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 자체적으로 150억 달러 이상을 지출했지만 미국 경제로만 미군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 결과 6.25 전쟁은 서유럽과 일본의 경제 성장을 촉진하였고 독일 재무장에 대한 압박을 가속화시켰다. 미국인의 관점에서는 명백한 침략행위가 확인되었고 국제 봉쇄 전략이 아시아에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이러한 손실들은 정당화 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서유럽 사람들과 맥아더 장군의 무모함을 염려했던 사람들마저도 공산주의 무력침략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대응에 안심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6.25 전쟁은 공산주의 세계와 인도 또는 인도네시아와 같은 많은 아시아의 비동맹국가의 관점에서 볼 때, 최고의 자본주의 세력인 미국이 동방에서 서방의 제국주의적 우위를 점하는 것으로부터 막을 수 있었던 계기였다. 미국은 아시아 역내 안전 보장 조약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서구에 대한 불신감을 가지고 있던 대규모 비공산주의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미국은 강대국들 가운데 19세기 아시아 제국주의에 가장 적게 연루되어있지만 미국의 서구 세계 리더십은 미국의 자유로운 세계 미사여구가 미국 자본주의를 위한 세계 시장을 만들기 위한 겉치레에 불구하다는 의혹, 즉 소련과 중국 공단상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힘입어 서구 억압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6.25 전쟁을 통해 북한의 공격 행위를 무력으로 저지하는데 성공한 미국은 군사력과 단호함이 있다면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봉쇄정책을 전 세계에 적용하였다. 또한 6.25 전쟁은 미국의 아시아 개입 시대의 시작을 열었고 다가올 십 년 안에 발생할 기간과 비용 측면에서 더 큰 전투인 베트남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6.25 전쟁은 유럽에서도 정치적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은 독일 군사력 회복에 대한 프랑스와 다른 유럽 국가의 계속되는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서독의 재무장을 요구하였다. 1954년 유럽 방위 공동체(유럽군대로 이루어진 공동체이지만 독일군이 참여할 수 없었음)에 대한 프랑스의 제안이 프랑스 의회를 통과하지 못하자 서독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포괄적 명령 하에 군대를 만들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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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성장하는 독일의 군국주의에 대한 우려는 줄어들었다. 서독 헌법은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보장하였고 국가 내에서도 확고한 반 군국주의 운동이 발생했다. 1955년 독일 연방 공화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회원국으로 인정되었다. 한편, 6.25 전쟁으로 인해 일본과의 공식 평화조약 체결이 서둘러졌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소련을 제외한 50개국이 체결한 평화조약에는 일반적인 배상금 내용이 없었지만 각 나라는 자국 내 배상금 합의안을 마련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른 안보 조약에서 미국은 일본에 대한 군사적 권리를 계속해서 보유하고 필요 시 합의 하에 평화와 안보를 위해 원하는 기간만큼 인근 섬을 점령하는 규정을 포함시켰다. 1년 후 미국의 일본 점령은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점령한 쿠릴 열도로 돌아갈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에 미국은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과 안보 조약을 체결하여 평화를 위한 미국의 노력을 강화시켰다. 냉전 초기의 뒤숭숭한 국제 관계 이후 몇 십 년 동안 발생한 중요 사건만 살펴보자면 베를린, 쿠바, 베트남, 중동,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대립과 위기를 발생하였고, 무엇보다 두 강국 간의 핵무기 확장 경쟁과 가장 위험한 무기 비축을 시작되었다. 양국 간의 핵무기 확장 경쟁은 미국이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 폭탄보다 몇 백배나 더 강력한 열핵 또는 수소 폭탄 첫 시험을 성공한 1952년 후반에 들어서 더욱 위험한 양상을 띠었다. 거의 동시인 1953년 소련 또한 수소 폭탄을 개발해냈다. 양국은 전략적 이동 체계를 구축함으로 어느 쪽도 계속 심화되는 냉전 속에 결정적인 군사적 강점을 가질 수 없게 만들었다. 냉전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 전에 우리는 이번 단원과 다음 단원을 통해 이 시대에 발생했던 다른 중요한 발전, 즉 서유럽의 놀라운 경제 회복과 정치적 재건, 세계 경제의 재구성, 공산주의 국가 세계와 서구 식민 제국으로부터의 새로운 국가 탄생을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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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하락과 태국 통화 가치 폭락으로 시작된 문제는 “아시아 기적”을 이뤄낸 국가들인 말레이시아, 남한, 인도네시아, 홍콩과 싱가포르의 해외 투자금 회수와 통화 가치 폭락으로 이어졌다.-----

연계 정보

관계 대상 문서 설명
hasDetails 교육과정:캐나다아 캐나다 교육과정, 2014년 조사 보고
hasDetails 교과서목록:캐나다:중등 사회과 캐나다 중등과정 사회과 교과서 목록
 ? 종합분석:캐나다 2014년 콜롬비아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