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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98, 12장 1970년대, 80년대의 글로벌 의존과 갈등, <내용 – 세계화>
 
p. 198, 12장 1970년대, 80년대의 글로벌 의존과 갈등, <내용 – 세계화>
 
떠오르는 아시아 산업화 국가들의 발전은 중요한 글로벌 경제 현상 중 하나이다. 이에 따라 이전에 유럽이나 미국에서 생각되던 일부 생산이 옮겨지면서, 많은 유럽 혹은 미국 자본 기업들은 생산비가 적게 드는 곳에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세계 경제의 이동은 국제 거래, 서비스, 금융의 장벽이 낮아짐에 따라 나타났다. 정보 통신과 교통의 발달은 원거리 경제 활동을 원할하게 해주었다. 특히 노동집약적 생산 분야가 더 싼 노동력을 찾아 이 나라 저 나라 옮겨다니게 되었다. 서독은 1960년과 1985년 사이에 방직 생산 고용이 반으로 떨어졌지만 동시에 해외 투자(예. 터키나 극동)를 10배로 늘렸다. 엄청난 수의 노동자를 고용했던 미국의 제철소는 현재 맥도날드보다 적은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한때 수 백만명의 광부가 일했지만 현재 그 수는 대학생의 수보다 적다. 세계 경제의 장벽이 낮아짐으로서 유럽, 미국 기업들이 국제 경쟁에 돌입하게 되고, 한편 터키의 티셔츠, 한국의 자동차, 남아공의 석탄은 단지 싸기만 한 것으로 보였다. 대기업의 전 그룹은 세계 단위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들의 본사는 북미, 서유럽, 일본의 대도시에 위치하고 공장은 전 세계에 퍼져있다. 어느 미국 기업 회장의 말처럼 “국제 경쟁은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체가 바로 국제적 경쟁자이니까요”  
 
떠오르는 아시아 산업화 국가들의 발전은 중요한 글로벌 경제 현상 중 하나이다. 이에 따라 이전에 유럽이나 미국에서 생각되던 일부 생산이 옮겨지면서, 많은 유럽 혹은 미국 자본 기업들은 생산비가 적게 드는 곳에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세계 경제의 이동은 국제 거래, 서비스, 금융의 장벽이 낮아짐에 따라 나타났다. 정보 통신과 교통의 발달은 원거리 경제 활동을 원할하게 해주었다. 특히 노동집약적 생산 분야가 더 싼 노동력을 찾아 이 나라 저 나라 옮겨다니게 되었다. 서독은 1960년과 1985년 사이에 방직 생산 고용이 반으로 떨어졌지만 동시에 해외 투자(예. 터키나 극동)를 10배로 늘렸다. 엄청난 수의 노동자를 고용했던 미국의 제철소는 현재 맥도날드보다 적은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한때 수 백만명의 광부가 일했지만 현재 그 수는 대학생의 수보다 적다. 세계 경제의 장벽이 낮아짐으로서 유럽, 미국 기업들이 국제 경쟁에 돌입하게 되고, 한편 터키의 티셔츠, 한국의 자동차, 남아공의 석탄은 단지 싸기만 한 것으로 보였다. 대기업의 전 그룹은 세계 단위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들의 본사는 북미, 서유럽, 일본의 대도시에 위치하고 공장은 전 세계에 퍼져있다. 어느 미국 기업 회장의 말처럼 “국제 경쟁은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체가 바로 국제적 경쟁자이니까요”  
(후략 – 세계화의 부작용: 지역격차) 
 
  
 
p.251, 16장 새 유럽 지도, 새 세계 질서, <지도 – 21세기 초반 세계의 부와 빈곤(2006년 기준)>
 
p.251, 16장 새 유럽 지도, 새 세계 질서, <지도 – 21세기 초반 세계의 부와 빈곤(2006년 기준)>

2016년 9월 27일 (화) 17:15 판

1. 목차

  • 제2차 세계 대전
  • 냉전 – 1945-1989년의 유럽 그리고 세계
  • 1989년 이후의 폴란드, 유럽 그리고 세계

2. 한국 관련 내용

p.28, 1장 침략자들의 승리–1939-1941년의 유럽과 세계, <지도 –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확장> 한국은 1937년 일본의 지배를 받던 지역으로 표시됨

p. 103-105, 6장 나눠진 세계, <내용 – 바르샤바 협정> 냉전 갈등은 1950-1953년 한국전쟁 중에 원점으로 돌아갔다. 60년대 초반 다시 한번 긴장이 고조되었지만, 스탈린의 죽음 이후에는 동-서 관계에서 확실한 온화한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미국 비밀 정찰기가 쿠바에 있는 소련 미사일기지에서 발각되면서 1962년 10월 군사적인 갈등이 시작되는 듯 보였다. 쿠바 혁명 정부는 소련과 관계를 맺고 쿠바 영토 내 군사 기지 건설을 허락했다. 이는 미국에게 “머리에 총을 대는” 것을 의미했으며 소련의 핵탄두 미사일이 몇 분 안에 워싱턴, 뉴욕 등 미 동부 주요 대도시를 향할 수도 있었다. (후략; 쿠바 위기와 미국의 대응) p.108, 6장 나눠진 세계, <연표 – 가장 중요한 날들> 1945- UN 창설 1947- 트루먼 독트린 발표 1947- 마셜 플랜 시행 시작 1948-1949- 베를린 위기 1949- NATO 창설 1949- 동독과 서독 건국 1949- 소련의 첫번째 핵실험 성공 1950-1953- 한국 전쟁 1955- 바르샤바 협약 창설 1961- 베를린 장벽 건설 1962- 쿠바 위기 1970- 서독-소련, 서독-폴란드 동방 협정

p. 126, 8장 동구 블록, <내용 – 소련의 산업화> 공산주의 독재는 다른 종류의 독재와 치밀한 국가 경제 계획에서 확연히 차이를 드러낸다. 위성국가들에는 거의 모든 산업, 금융, 무역이 국영화되었다. 농업은 집단 농장화되었다 – 사유 농지는 거대한 집단농장으로 합쳐졌다. 어마어마한 산업화 프로그램, 특히나 중공업 건설이 시작되었다. 산업 생산은 증가하였으나 이는 식량 증가와는 연결되지 못했다. 식량 증가는 억제되었고, 이를 위한 자금은 투자 확대와 한국전쟁 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한 군비에 쓰였다.

p. 148, 9장 인민 폴란드의 건설, <내용 – 사회, 경제 재건> 늘어난 투자와 엄청난 노동자 동원으로 산업 발전이 실제로 이뤄졌다. 짧은 시간 안에 노바 후타의 콤비나트, 제라니에의 자동차 공장, 켕지에지엔의 화학 공장과 같은 새로운 대형 금속, 화학 공장이 생겨났고 조선, 자동차, 항공 산업의 근간이 세워졌다. 산업 생산은 거의 2배나 증가했다. 한국 전쟁(176페이지 참조)과 세계 대전을 대비한 스탈린의 계획은 엄청난 군비 지출에 영향을 미쳤고, 이러한 군비 지출은 경제 계획 실현 가능성을 줄어들게 만들고 심각한 경제 문제를 야기시켰다.

p. 176-177, 11장. 제 3세계-세계의 2/3, <내용 – 한국과 베트남 전쟁> 중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하면서 공산주의 블럭의 범위는 베를린부터 황해까지 포함했고 어마어마한 세계 인구를 포함했다. 아시아에서는 냉전의 두번째 경계가 생겨났고 곧 이러한 지역적 갈등 중에 하나(한국에서의 전쟁)가 전 세계적인 충돌로 바뀌었다. 한국은 전쟁 이후에 소련군의 지배를 받는 북쪽과 미국이 주둔한 남쪽으로 나뉘었다. 소련은 자신들의 공산주의 지역에 종속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설립했다. 1950년 6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예고치 않게 남한을 공격하였고 빠르게 많은 지역을 점령하였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99페이지 참조)는 (다른 경우였으면 분명 거부권을 행사했을) 소련 대표의 배석 하에 한국에 대한 국제적 군사 지원을 결정했다. 유엔군(미군 주축)의 도움으로 침입자를 북한 깊숙히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지만 이 때 수천명의 중공군이 가세하였다. 결국 전선은 초기 국경 근처에서 정해졌다(위도 38도). 1953년 현재까지도 한반도에 명시되어있는 휴전 상태에 들어갔다 : 북쪽 – 평양을 수도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쪽 – 서울을 수도로 하는 대한민국. 미국은 유엔 깃발을 내걸고, 소련은 한국, 중국 연합군을 통해 활동했지만 실제 충돌 대상은 두 강대국이었음은 명백하다. 다행히도 이들은 핵무기까지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이 전쟁으로 양 진영은 150만 명에 가까운 인명이 희생되었다. 한국에 총성이 중단되자, 베트남에서 전쟁이 가열되었다.

p. 176, 11장. 제 3세계-세계의 2/3, <사진1 – 한국 전쟁> 사진 : 1951년 최전방에서 소형포를 들고 있는 미군

p. 176, 11장. 제 3세계-세계의 2/3, <사진2 – 북한 독재자 초상화 앞에서의 합창 공연> 사진 : 1975년 자신의 초상을 중국의 마오쩌둥과 비슷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우상화한 한국의 공산주의 독재자 김일성

p. 177, 11장. 제 3세계-세계의 2/3, <사진3 – 김일성(1912-1994)> 사진 : 젊은 공산주의 정치인으로서 일본에 대항했고, 세계 대전 기간엔 소련군 장교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생긴 이래 사망 전까지 독재 정권을 이끌었다.

p. 181, 11장. 제 3세계-세계의 2/3, <지도 – 식민 해방 이후의 동남아시아> 한국은 분쟁이 있는 곳으로 표시됨

p. 197, 12장 1970년대, 80년대의 글로벌 의존과 갈등 <내용 – 아시아의 호랑이들과 글로벌 경제 변화> p. 197 일본의 사례는 아시아의 작은 나라들에게도 서로 영향을 미쳤다. 홍콩, 싱가포르, 대만, 대한민국은 산업 발전에 괄목할 만한 도약을 이뤄냈고 이로 인해 “아시아의 호랑이들”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아르헨티나, 칠레, 멕시코보다 가난했던 이들 국가들은 20년 후 이들을 크게 따돌리고 1인당 국민 소득을 2-3배 성장시켰다. 이러한 성공의 핵심은 수출에 있었다. 이들 국가에서 온 상품들은 전 세계 가정 곳곳에서 등장했고, 세계 수출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5배나 증가했다. 일례로 한국의 기업 삼성은 70년대 연간 몇 백대의 전자레인지 생산에서 시작하여 20년 뒤 한 주당 8000대의 판매를 기록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제조사가 되었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또한 비슷하게 움직이며 생산 수준과 국민 생활의 질을 크게 올렸지만 아시아의 호랑이들과 같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p. 198, 12장 1970년대, 80년대의 글로벌 의존과 갈등, <내용 – 세계화> 떠오르는 아시아 산업화 국가들의 발전은 중요한 글로벌 경제 현상 중 하나이다. 이에 따라 이전에 유럽이나 미국에서 생각되던 일부 생산이 옮겨지면서, 많은 유럽 혹은 미국 자본 기업들은 생산비가 적게 드는 곳에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세계 경제의 이동은 국제 거래, 서비스, 금융의 장벽이 낮아짐에 따라 나타났다. 정보 통신과 교통의 발달은 원거리 경제 활동을 원할하게 해주었다. 특히 노동집약적 생산 분야가 더 싼 노동력을 찾아 이 나라 저 나라 옮겨다니게 되었다. 서독은 1960년과 1985년 사이에 방직 생산 고용이 반으로 떨어졌지만 동시에 해외 투자(예. 터키나 극동)를 10배로 늘렸다. 엄청난 수의 노동자를 고용했던 미국의 제철소는 현재 맥도날드보다 적은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한때 수 백만명의 광부가 일했지만 현재 그 수는 대학생의 수보다 적다. 세계 경제의 장벽이 낮아짐으로서 유럽, 미국 기업들이 국제 경쟁에 돌입하게 되고, 한편 터키의 티셔츠, 한국의 자동차, 남아공의 석탄은 단지 싸기만 한 것으로 보였다. 대기업의 전 그룹은 세계 단위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들의 본사는 북미, 서유럽, 일본의 대도시에 위치하고 공장은 전 세계에 퍼져있다. 어느 미국 기업 회장의 말처럼 “국제 경쟁은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체가 바로 국제적 경쟁자이니까요”

p.251, 16장 새 유럽 지도, 새 세계 질서, <지도 – 21세기 초반 세계의 부와 빈곤(2006년 기준)> 한국은 선진국으로 표시됨

p. 283 <연표 – 20세기> 20세기 세계사 부분, 1950-1953년 한국 전쟁

연계 정보

관계 대상 문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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