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프랑스:Histoire (Hachette Education 2009)(VV) To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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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부터 오늘날까지의 세계, 유럽 그리고 프랑스

제 1 장 : 2차 세계대전 직후의 세계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인류 역사상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낳은 6년간의 전쟁은 끝이 난다. 전쟁은 수 천 만 명의 인명피해와 셀 수 없이 많은 잔해를 남겼다. 강제 수용소와 집단 학살 수용소가 발견되고 원자폭탄까지 투하되면서 전쟁은 세계를 엄청난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전쟁이 야기한 격변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희망과 재건의 움직임이 일어난다. 과연 어떤 것들일까?

1. 1945 : 원자폭탄의 공포...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이 투하된 직후의 히로시마 “어떠한 중형 도시든 축구공만한 크기의 폭탄 하나로 완전히 폐허가 될 수 있다[...]. 기계 문명은 이로써 잔혹성의 정점에 도달했다[...]. 인류 앞에 펼쳐진 끔찍한 전망을 통해 우리는 평화를 위한 싸움이야말로 유일하게 이끌어갈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걸 더더욱 실감한다. 이것은 더 이상 희망사항이 아닌 명령이다. 민중이 정부를 향해 외치라는 명령, 지옥과 이성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선택하라는 명령 말이다.” 1945년 8월 8일 자 프랑스 철학가 알베르 카뮈가 기고한 투쟁 신문의 사설 중.

2...그렇지만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하려는 마음도. 1945년 유엔(UN)의 주춧돌이 된 2차 세계대전 연합국의 모임. 미국의 한 포스터, 1945. “우리 연합국 국민들은[...]전쟁의 불행에서 다음 세대를 구하고, 기본적 인권[...]에 대한 신념을 재확인하며, 정의와 조약 및 기타 국제법의 연원으로부터 발생하는 의무에 대한 존중이 계속 유지될 수 있는 조건을 확립하며, 사회적 진보를 촉진하고[...] 관용을 실천하고[...]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하한 이러한 목적을 현실화하고 우리들의 힘을 합하기 위하여 국제연합이라는 국제기구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1945년 6월 2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표된 국제연합헌장 머리말 중.

1. 1945년 세계현황, 모든 것을 다시 새로


가) 인명피해 현황

제2차 세계대전으로 총 6천 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이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보다 6배 더 많은 수치이다. 즉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낸 전쟁이다. 나라별 사망자 수는 다음과 같다 . 러시아 2,100만 명, 중국 1,350만 명, 독일인 약 7백만 명. 폴란드는 1939년 집계된 인구 중 16%를 전쟁으로 잃었는데 그 중 거의 대다수가 유태인이었다. 러시아는 13%, 독일은 10%의 인구를 잃은 것으로 나타난 반면, 서유럽 국가와 미국의 인명피해는 상대적으로 덜했다. 이 전쟁은 1차 세계전보다 더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 3배가 넘는 병력이 육해공 전투에 참가했다. 몇몇 국가는 군사적 차원에선 피해가 적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1차 세계대전에 비해 6배 덜 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 한편,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의 피해는 훨씬 컸다. 공중전의 직격탄을 맞은 건 민간인들이었다. 영국과 미국이 투하한 폭탄으로 사망한 민간인이 독일이 입은 전체 손실의 50%를 차지한다. 게다가 점령당한 나라의 국민에게 적용된 각종 제한과 식량 배급으로 인구가 급격히 쇠약해지고 사망률을 증가시켰으며, 결핵과 같은 병의 창궐을 부추겼다. 동유럽에 살던 민간인들은 또한 대량 학살의 희생양이 돼야 했고, 그 외에도 포로 학살, 정치범으로 체포된 이들은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렇게 약 1천 500만 여명의 민간인들이 전쟁 중 사망하였는데, 그중 1만 명이 유럽의 민간인들이었다. 이 수치에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나치의 말살정책으로 설치된 학살 수용소에서 죽어나간 500에서 600만 명의 유태인, 집시들이다.

나) 초토화된 국토

물질적 피해 또한 상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전방과 후방 전체를 동원한 이른바 전면전이었다. 상충된 사상(이데올로기)전은 각종 산업과 연구원, 그리고 일반 주민들을 동원시켰다. 1차 세계대전과의 차이점은 전쟁이 일정한 전방에 집중된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공중전의 규모가 매우 컸다. 특히 영국, 일본과 독일 상공에서 벌어진 폭탄 투하 작전이 많은 피해를 안겼다. 독일 도시의 70%가 초토화 됐고, 유고슬라비아의 건물 20%가 무너졌다. 전쟁이 초래한 물질적 피해의 절반을 러시아 혼자 입었다. 공장, 다리, 도로와 철도, 기차역등이 파괴돼 유럽 대부분의 지역, 중국과 일본의 경제와 교역이 마비됐다. 1945년, 유럽 국가들과 일본, 중국, 동남아 일부 국가의 경제체계는 거의 다 무너졌다. 1939년에 비해 농산물과 공산품 생산량이 30%에서 많게는 70%까지 폭락했다. 대부분 국가의 국민총생산 또한 추락했다. 이탈리아(-39%), 프랑스(-46%), 일본(-70%), 독일(-71%) 등이 가장 타격이 심한 나라들이었다. 식량제한이 일반화 돈 유럽 전역은 궁핍으로 뒤덮였다. 전쟁은 유럽 국가들의 화폐보유량 또한 잠식시켰다. 1945~1946년 사이 유럽 국가에서는 물가가 급격히 상승했고 수요가 공급을 뛰어넘는 대규모 초과수요사태가 벌어졌다. 프랑스의 물가상승률은 1945년 36%였고, 1946년에는 63%까지 올라갔다. 1939년에서 1945년 사이 영국의 국가채무는 3배 증가했고, 프랑스는 4배, 미국은 6배, 독일은 10배 증가했다. 미국의 상황은 그나마 가장 나은 편이었다. 미국은 연합국 중 유일하게 국토에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국가다. 그렇게 1945년부터 미국은 세계 경제 주도권을 잡게 된다.

어휘


이념(이데올로기) : 사회 집단에 있어서 사상, 행동, 생활 방법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관념이나 신조의 체계로 하나의 정치적 혹은 종교적 사상을 띠는 게 특징이다.

국민총샌산(GNI) : 일정 기간 동안 한 나라의 국민 또는 기업이 생산한 재화와 용역의 부가 가치를 시장 가격으로 평가한 총액이다. 이 국민이 외국에서 생산한 재화와 용역의 부가가치도 국민총생산에 포함되고, 해당 국가에서 외국 기업 또는 국민이 생산한 재화와 용역의 부가가치는 국민총생산 계산에서 제외시킨다.


1. 주요 참전국 사망자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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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요 공중폭격으로 발생한 피해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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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3년 7월부터 1945년 3월까지 전투기로 많은 양의 폭탄을 투하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2.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폭탄들은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나?


3. 쑥대밭이 된 뉘렌베르크(독일), 1945년 5월

4. 러시아 측 피해현황

소련연합이 점령하고 있던 영토에 거주하고 있던 인구는 전쟁 전 8천8백만 명이었고, 산업생산량은 460억 루블(1926~27년 물가 기준)에 달했다. 총 1억 9백만 마리의 가축 중 3천1백만 마리가 소, 1천2백만 마리가 말이었다. 농경지 총 면적은 7천1만 헥타르였으며, 122,000 킬로미터의 철도선이 놓여있었다. 나치군은 1,710개의 도시와 와 70,000개 이상의 작은 도시와 마을 전체를 혹은 부분적으로 약탈하고 불 질렀다. 건물 6백만 채가 불타거나 무너졌고, 250만 명의 부랑자가 발생했다. 적군은 약 4백만 명의 노동자가 일하던 31,850개의 공장을 폐허로 만들어 놓았다. 철도 65,000 킬로미터도 적군에 의해 파괴됐다. 병원 내지 보건소 40,000곳과 84,000개의 학교가 98,000개의 콜호즈, 1,876개의 국영농장, 그리고 2,890여대의 농기계처럼 훼손되거나 사라졌다. 말 7백만 마리와 소 1백70만 마리가 징집됐다. [...] 국가비상위는 소비에트 연합 국민과 경제가 입은 타격이 총 6천7백90억 루블(1941년 물가 기준)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 이 피해액뿐만이 아니다. 국영기업, 콜호즈와 국민들의 경제 활동이 줄어들거나 중단됨에 따라 국민소득 감소하면서 발생한 피해액도 포함시켜야 한다. 이 모든 것과 더불어 나치군이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영토에서 사살된 수백만 명의 국민들도 생각해야 한다.

1945년 9월 12일, 국가비상위원회의 보고서 중.

1. 이 문서를 간략하게 설명하시오.
2. 어떤 것들이 피해를 입었는가?
3. 이 피해현황들이 폭력화 되어가는 동유럽 전방이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시오.
4. 주민들은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나?

5. 1945년 패전 후 독일의 식량난 모든 게 초토화됐던 시기에 독일인들이 섭취한 하루 평균 칼로리는 700에서 800정도로 최저 필요 칼로리인 2000에 훨씬 못 미친다.[...] 1946년 말, 함부르크에 그나마 남아있던 병원들은 기아로 인해 부종에 걸린 10,000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쾰른에서 실시한 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아이들 중 12%만이 정상체중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도시민들을 더 굶주리게 만드는 요인으로는 식량 재고량의 횡령과 농촌과의 연결망 부재 등이 있다. 투기, 불법 저장, 암시장 등이 굉장한 속도로 성행해 나갔다. 도시민과 농민들과의 갈등도 극에 달했다.[...] 암시장에서의 불법거래는 전후 더 힘든 시기를 겪은 타 유럽 국가들의 그것보다 더 높은 정점을 찍었다. 가격은 공식가보다 100배에서 200배 가까이 높았다. 담배 한 갑이 노동자의 한 달 월급과 맞먹는 정도였다.[...] 진귀한 생필품을 갖고 있던 연합군 군인들이 자연스럽게 암시장의 주요 인사로 떠올랐다. 그들은 주로 클럽이나 카바레 등에서 거래를 했다. 이러한 시설들에서는 사람들이 가져 온 것만 겨우 살 수 있었다. 이 시설들의 주 고객은 보급물자를 두둑이 가져온 연합군 병사들과 브로커, 그리고 매춘부들이었다.

A. Mannon과 L. Marlou의 증언록 중, “독일연방공화국”, 파야르 출판사, 1967년


6. 영국인들이 겪는 어려움 오늘날 영국은 부족한 식량과 산업 가동에 필요한 기본 물자를 외국으로부터 자유롭게 구입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 영국은 그럴만한 수단이 없다. 전쟁 동안 해외에 있던 수많은 자금을 청산해야 했고, 외국과 체결한 자금 대출로 조금이나마 들어오던 돈은 1938년 해외 수입의 23%를 차지했다. 영국의 가계는 국가가 수입할 재량이 없는 식량을 끊어야 하며, 필요한 물건의 소비를 줄여 외국환 유입을 촉진하기 위해 외국으로 팔아야 한다. 또한 공장들을 가동시킬 수 있도록 난방의 사용도 끊어야 한다.

베르트랑 드 쥬브넬, “경험의 실패” 중, 라 따블 롱드 출판사, 1948년

1. 영국인들은 무엇을 끊어야 하는가? 왜 그런가?
2. 이 텍스트에 따르면, 영국은 국제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취약해졌는가?
3. 그로 인한 결과는 무엇이 있을까? 

p.22

자료집

얄타 그리고 포츠담 회담

독일, 일본, 이탈리아 삼국 동맹을 상대로 한 전투를 총괄하기 위해 연합군은 참전국 중 가장 영향력있는 나라의 원수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회담들을 개최한다. 1943년 11월 28일에서 12월 1일까지 테헤란에서 만난 뒤 처칠, 루즈벨트와 스탈린은 흑해안에 위치한 러시아의 얄타에서 1945년 2월 4일에서 11까지 다시 회동한다. 협상은 세 사람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결과로 끝났다. 스탈린은 중앙 유럽 영토를 서방 국가에 조금밖에 양도하지 않아도 됐고, 처칠은 공산세력이 발칸반도까지 올라오는 걸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루즈벨트는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는 대로 일본과의 전쟁에 돌입하겠다는 러시아 측의 확답을 받아냈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 후, 이 세 나라는 베를린 외곽에 위치한 포츠담에서 또 한 번의 회담을 갖는다(7월 17일~8월 2일). 독일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또한 일본과의 전쟁을 어떻게 할지가 회담의 주요 내용이었다. 3국 중 유일하게 원폭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주도권이 그 어느 때보다 컸다.

1. 얄타 회담이 열리던 때 즈음의 전쟁 현황

2. 얄타에서 결정된 사안

회담에 참여한 3국은 각자 독일의 지역을 나누어 점령한다. 또한 원한다면 독일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관리 위원회의 네 번째 회원으로 합류하는 것을 프랑스에 권유하기로 했다. 독일의 군국주의와 나치즘을 파괴하는 것이 우리의 꺾을 수 없는 목표다. 우리는 전범들을 최대한 빨리 법정에 세우고 벌하기로 결심했다. [...] 우리는 연합국과 함께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평화와 안보를 지킬 수 있는 국제기구를 창설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945년 4월 25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UN) 회담을 개최해[...] 이 기구의 헌장을 발표하기로 합의했다. 우리는 해방된 유럽에 관한 공동 성명문을 작성하고 서명했다.[...] 해방된 유럽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일은 유럽의 국민들이 나치즘과 파시즘의 마지막 흔적까지 지우고, 그들의 선택으로 민주주의 기관을 설립할 수 있도록 뒷받침 해 주는 방법을 통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강하고 자유롭고 민주적인 독립 폴란드가 재건되는 걸 지켜보는 우리의 공동 염원을 재차 확인한다.[...] 폴란드의 동쪽 국경은 커즌 라인 1919년 영국 외상 커즌(Curzon)이 권고한 라인으로 폴란드 주민과 백러시아, 우크라이나 주민을 분리시키는 역할을 했다. 을 따라야 할 것이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고 두 달 혹은 석 달 뒤 러시아는 연합군과 함께 일본에 맞선 전쟁에 참여할 것이다.

처칠, 루즈벨트, 스탈린의 1945년 2월 얄타 회담 공식 발표 내용 중

3. 포츠담 회담에서 결정된 독일에 관련된 사항

비무장화. 독일의 완전 무장해제 및 비무장화, 전반에 걸친 전시 산업의 철폐 혹은 관리 감독 체제화. 이와 관련 독일의 군국주의가 재건되거나 재탄생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육해공 전력은 물론이고 나치 친위대, 특공대, 비밀경찰 그리고 게슈타포 산하에 있는 모든 조직은 완전히 그리고 확실하게 해체될 것이다[...] 나치당과 그 계열 조직은 사라져야 한다. 따라서 나치와 관련된 모든 기관은 전부 와해됨이 마땅하다. 그리고 이들이 어떤 형태로든 다시 재기할 여지를 절대 내 주어선 안 되기에 마땅한 조치를 사전에 취해야 한다. 즉 나치와 관련된 어떠한 행동이나 프로파간다를 막아야 할 것이다.[...] 나치 법제의 폐기. 전범들의 유죄판결. 나치 간부들의 체포 및 구금. [...] 카르텔의 해체. 전시 생산 체제 금지, 산업 분야의 감시, 산업의 무장해제. 경제 활동의 지방분산.[...]

포츠담 회담 최종 선언문 발췌문 중, 1945년 8월 2일.

p.23


4. 얄타(러시아) 회담에 모인 3대국 정상들, 1945년 2월. 왼쪽부터 처칠(영국), 루즈벨트(미국), 스탈린(러시아)

5. 1945년 7-8월, 포츠담의 분위기

회담 도중 미국인들의 마음을 바꾸고 그들이 회담을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만든 요소가 등장한다. 바로 원자 폭탄이다. 트루먼은 회담이 끝나기 전 결정적인 원폭 실험이 감행되길 희망했고, 결국 그해 7월 16일 뉴멕시코주의 알라모가르도에서 원폭 실험이 진행됐는데, 이건 “천개의 태양보다도 더 빛났으며”, 대다수가 상상한 것 그 이상으로 훨씬 더 강력했다.[...] 7월 21일, 트루먼은 원폭 무기가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더 큰 파괴성을 지니고 있고 이 무기를 조만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전달받았다.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본회의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처칠이 말했다. “트루먼은 러시아가 야기하는 불만족스러운 부분들을 끄집어내며 회의를 주도했다.” S.1 원자폭탄은 트루먼의 인내심을 재촉하였다. 7월 22일, 그는 친필로 원자폭탄을 투하를 지시했다, 하지만 그가 러시아인들과 포츠담을 떠난 뒤에 하라는 조건이 있었다.

<짓밟힌 평화. 냉전의 원인> 중. D. 예르긴 저, 발랑 출판사, 1980년.


6. 포츠담(독일) 회담에 모인 3대국의 정상들, 1945년 7-8월.

왼쪽부터 아틀리(영국), 트루먼(미국), 스탈린(러시아).

질문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얄타 회담에 참가한 사람들은 누구인가(자료 4)? 2. 이 회담이 열릴 당시의 군사적 상황은 어떠했는가? 그리하여 나머지 두 사람에 비해 누가 더 월등한 위치에 서게 됐는가(자료 1)? 3. 얄타 회담에서 결정된 사항들은 무엇인가(자료 2)? 4. 포츠담 회담 중 미국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라(자료 5). 5.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 관련 결정된 정치적 사안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자료 3)?

B. 자료 연관 짓기

6. 사전을 참고하여 얄타와 포츠담 회담에 참가한 사람들의 차이를 설명하라(자료 4, 6). 7. 얄타 회담이 결국 전승국 간의 세계 주권 분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라(자료 1, 2). 8. 포츠담 회담이 이미 전후 시대를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라(자료 3, 5, 6).

C. 논술

9. 얄타와 포츠담 회담이 패전국들에는 얼마나 중요했는지 한 문단으로 서술하여 증명하라. 10. “얄타, 세계 주권 분배”와 같은 전설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찾아라.


p.24

지도

1945년의 유럽

러시아는 1939년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에 체결된 독·러 불가침 협정을 근거로 1940년 이미 정복한 영토와 프러시아 북쪽지방의 반을 점령하기 위해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를 이용한다. 스탈린은 이와 같은 영토합병과 커즌선(線)과 오더 나이쎄선(線) 사이까지 폴란드의 국경을 서쪽으로 이동시키는 것을 연합군에게 당당히 요구할 방침이었다. 독일은 1939년 사라졌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4개의 점령지대로 나뉘었고, 베를린과 비엔나도 같은 방식으로 분할되었다. 이런 모든 격변은 큰 규모의 인구 이동을 수반하였다. 강제추방, 소련 공산군에 공포감을 느끼고 서쪽으로 도망간 독일인들, 수감자들, 강제노동징집자들, 강제수용 됐던 사람들의 귀환 등으로 수 백 만 명의 인구가 길 위로 내던져졌다. 발칸 반도에서는, 의해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만이 일부 공산주의 레지스탕스에 의해 해방되었다. 그리스에서는 공산주의 레지스탕스가 영국이 지지하는 군주주의 정부에 대항하여 내전을 일으킨다.

어휘

커즌선(線) : 동유럽에서 벨로러시아에 거주하는 폴란드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을 갈라놓은 선. 오더 나이쎄선(線) : 오더강과 그 지류인 나이쎄 강으로 이루어진 선. 1945년부터 폴란드의 서쪽 국경이기도 하다.

질문

1. 1939년도에 비해 1945년 독일이 잃은 영토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2. 1937년부터 1939년까지 독일에 합병된 국가들 중 어떤 국가들이 945년 새로운 유럽 지도에 다시 생겼는가? 3. 러시아에 합병된 영토는 어떤 것들인가? 4. 지도에서 언급된 주요 인구 이동은 어떤 게 있는지 설명하라. 5. 영토적인 측면에서 가장 큰 혜택을 본 승자는 어떤 나라로 보이는가?

1. 1945년의 유럽


p.26


2. 다시 만들어갈 세계는 어떠한 세계여야 할까?

A. 전쟁이 남긴 후유증

역사상 2차 세계 대전 만큼 큰 후유증을 남긴 전쟁은 없었다. 이전에 채결된 국제 조약과 인권은 철저히 무시됐고, 유럽 동쪽 전방과 아시아에서는 전쟁의 야만스러움이 극에 달했다. 연합군이 유럽에 진격하면서 강제 수용소 및 집단 학살 수용소의 실체가 밝혀졌다. 세계는 그렇게 조금씩 ‘쇼아’(500p서 600만 명의 피해자를 남긴 것으로 추정)의 현실을 인지하기 시작한다. 또한 나치 군의관 혹은 만주의 일본 의사들이 수감자들에게 생체 실험을 자행한 게 밝혀지면서 세계는 다시 한 번 경악했다.

B. 어떠한 가치들을 수호해야 했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세계인들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안긴다. 단 한 대의 비행기에서 투하된 단 한 개의 폭탄이 여러 대의 폭격기에 버금갈 만큼 많은 사상자와 잔해를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류는 1945년 원자핵의 공포를 처음으로 체험한다. 많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은 1945년 이후 그들 세대의 도덕적 혼란과 인류가 공동으로 지켜나가야 할 가치에 대한 의문을 표현한다. 전쟁은 다수의 국가 공동체의 뿌리 깊은 분열을 야기했다. 앞으로 누구에게 복종을 하여야 하고, 이행해야 할 의무는 무엇이었을까? 1945년, 나치즘과 파시즘을 척결하는 일은 독일-이태리-일본 삼국 동맹에 맞서 싸운 레지스탕스에 관련 있는 정치 세력에게 유리하게 다가왔다. 자유선거가 조직된 곳마다 나라를 위해 싸운 애국자들과 좌파 계열의 정치 세력이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그렇다고 하여 우파 세력과 나치 동조 세력을, 그리고 좌파 세력과 레지스탕스를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우파 계열 레지스탕스 운동가들이 있었던 반면, 좌파 나치 협력자들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 암울한 시기에 생긴 상처들은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봉합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C.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하나?

1943년에 연합군은 모스크바 회담에서 전쟁에서 승리한 후 삼국 동맹 책임자들을 처단하기로 합의했다. 여섯 개의 나치 관련 조직과 24명의 고위급 간부들은 1945년 11월 20일에서 1946년 10월 1일까지 뉘렌베르크에 설치된 국제 법정 앞에 서게 된다. 이들은 음모, 반평화 범죄, 전범죄, 그리고 반인륜 범죄 등의 혐의를 받는다. 일본의 전범들을 처리하기 위해 이와 비슷한 재판이 1946년 도쿄에서 열렸다. 많은 지도자들은 더욱 공정한 세계를 건설하길 희망한다. 윈스턴 처칠 정부가 이끄는 영국에서는 1942년이 되자마자 개혁의 바람이 불었다. 프랑스에서도 레지스탕스 임시정부가 1944년 제시한 정책 프로그램에 다수의 개혁이 예고됐다. 1944년 7월 브레튼 우즈(미국)에서 44개국이 모여 새로운 국제 통화 시스템을 도입한다. 이 시스템은 크게 3가지의 특징을 골자로 한다 : 금환본위제도, 고정 환율제도, 각각의 통화 가치 변동을 제한하는 중앙은행들의 개입 등이 그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가 통화의 안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창설됐다. 또한 가입국들의 재건 자금을 지원하기 위한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 탄생했다. 세계의 75%에 달하는 금을 보유한 미국은 이 새로운 통화 시스템 지배하게 됐다. 달러는 새로운 국제 기준 통화가 됐다. 국제 사회의 새로운 규범 또한 1945년 4월에서 6월 사이 발족한 유엔 국제연합이 제시하는 기준에 따르게 됐다. 공식적인 인권 선언문 발표를 준비하기 위한 인권위원회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렇게 1948년 12월 파리에서 세계인권선언이 공표됐다. 이를 통해 1789년 선언됐던 인권을 재확인하고 새로운 인간의 권리를 추가적으로 발표했는데, 교육권, 사회보장권, 노동권, 건강권, 문화 권리 등이 그것이다.

어휘

쇼아(Shoah) :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단어로, 나치가 유대인들을 집단 학살한 사건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나치는 유대인과 유대인 문화를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할 목적으로 집단 학살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반인륜 범죄 : 새로운 법률 용어로, 뉘렌베르크 재판에서 그 의미가 정의됐다. 반인륜 범죄는 정치적, 인종적 혹은 종교적인 목적 하에 국민의 구성원을 살인, 학살, 강제 수용 하거나 이들에게 가하는 모든 비인간적인 행위에 적용된다.

고정 환율 : 각국 화폐 사이의 환율이 변동폭 없이 일정 수준에 고정하는 제도를 뜻한다.

중앙은행 : 각국의 화폐 발행을 담당하는 은행

1. 쇼아로 인한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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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스트 위에서부터 네 번째 국가까지의 퍼센티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2. 벨기에, 프랑스, 덴마크의 퍼센티지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2. 1945년 4월 12일 미국군에 의해 해방되는 도라 강제 수용소

3. 세계 인권 선언, 1948년 12월 10일 (일부)

인권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만행이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했던가를 기억하며[...]; 유엔 총회는 모든 인류가 ‘다 함께 달성해야 할 하나의 공통기준’으로서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한다. [...] 제 1조 :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제 4조 : 어느 누구도 노예가 되거나 타인에게 예속된 상태에 놓여서는 안 된다. 노예제도와 노예매매는 어떤 형태로든 일절 금지한다. 제 5조 : 어느 누구도 고문이나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모욕, 형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 제 9조 : 어느 누구도 임의적으로 체포, 구금, 추방을 당하지 않는다. 제 13조 : 모든 사람은 자기 나라 영토 안에서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서든 살 수 있다. 또한 그 나라를 떠날 권리가 있고, 다시 돌아올 권리도 있다. 제 14조 : 모든 사람은 박해를 피해, 타국에 피난처를 구하고 그곳에 망명할 권리가 있다.[...] 제 16조 : [...] 가정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자연적이고 기본적인 요소이며 국가와 사회로부터 보호 받을 권리가 있다. 제 17조 : [...] 어느 누구도 자기 재산을 정당한 이유 없이 남에게 함부로 빼앗기지 않는다. 제 18조 : 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제 21조 : [...] 국민이 원하는 바는 정기적으로, 공평하게, 비밀리에 치러지는 정직한 선거를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 제 22조 :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제 24조 : 모든 사람은 휴식할 권리와 여가를 즐길 권리가 있다.[...] 제 26조 : 모든 사람은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4. 뉘렌베르크 재판에 송환된 피고인들

  그들 뒤로 헌병들이, 피고인들이 앉아있는 박스 앞에는 변호사들이 있다.

사형선고 : 괴링 국가 총원수(1), 히틀러의 후계자, 공군 대장, 형 집행 전 자살함 ; 폰 리벤트로프(3), 외무 장관 ; 카이텔(4) 육군 원수, 히틀러의 참모 장교; 칼텐브루너(5), 제국보안본부 본부장 ; 로젠베르크(6), 동부 점령지 행정 장관 ; 프랑크(7), 폴란드 총독 ; 프리크(8), 내무 장관 ; 슈트라이허(9), 반유대주의 주간지 데어 슈튀르머 편집장 ; 자우켈(15), 강제 노동 감독관 ; 요들(16), 군사 작전 장교 ; 자이스-인크바르트(18), 네덜란드 점령지 총독 ; 보르만, 1941년부터 히틀러의 비서, 도주 하여 궐석재판으로 사형선고 받음. 무기징역 : 헤스(2), 1941년까지 히틀러의 비서, 1987년 감옥에서 사망 ; 퓽크(10), 제국은행장, 1957년 석방 ; 레더 제독(13), 1943년까지 독일 해군 사령관, 1955년 석방. 징역 20년 : 폰 쉬라흐(14), 히틀러 유겐트 총 지도자 ; 슈페어(19), 히틀러 건축가, 군수 장관 ; 이 둘은 모두 1966년 석방. 징역 15년 : 폰 노이라트(20), 뵈멘-메렌 보호령 총독, 1954년 석방. 징역 10년 : 되니츠 제독(12), 1943년부터 독일 해군 총사령관, 1956년 석방. 무죄판결 : 샤흐트(11), 경제 장관 ; 폰 파펜(17), 히틀러 전 마지막 총리 ; 프리체(21), 라디오 프로파간다 책임자.

5. 브레튼 우드 체제

금 = 달러 새로운 금본위 : 금 1온스(31.10g) = 35 달러($) 달러에 비래하는 다른 통화

달러 이외 다른 통화 비축량 = 금 또는 달러

p.28

국제연합(UN)의 탄생

1919년에 설립된 국제연맹은 실질적인 권력의 부재로 인해 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된 각종 위기를 막지 못했다. 1941년 8월, 대서양 헌장은 공동안보에 입각한 만국평화의 개념을 도입한다. 이 개념은 1944년 국제연합기구가 생기면서 한 층 공고화됐는데, 여기서 “국제연합”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 3자 동맹에 대항하여 1942년부터 싸우던 국가를 이르는 표현이 재사용된 것이다. 국제연합기구는 1945년 6월 26일 샌프란시스코 회담을 통해 발족됐다. 이 회담을 통해 수립됨 새로운 기구의 정의와 목적은 다음과 같다 : 평화를 수호할 것, 인권을 선언할 것, 국제 협력을 증대시킬 것. 1945년에 이미 51개국이 국제연합에 가입했다.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모든 국가는 가입을 권유받았고,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은 가입 대상국에서 제외됐다. 국제연합은 일 년에 한 번씩 정기총회를 갖는다. 주요 결정은 11개의 상임이사국으로 구성된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를 통해 이루어진다.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5개 국가(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은 국제연합에서 영구적인 의석을 차지하게 됐다. 5년 임기로 선출되는 사무총장은 기구의 행정 전반을 책임진다. 국제연합의 본부(유엔 본부)는 뉴욕에 있다. 다수의 특수기관 또한 국제연합에 속해있는 것이 특징이다.

어휘 국제연맹 : 1919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앞장서 설립한 국제기구. 국제연맹은 협상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고 국제 협력을 도모하는 일을 주도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국제연맹 가입국이 아니어서 초창기부터 이 기구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1930년대에 들어 국제연맹은 각종 독재 체제의 무력행위 및 도발을 막을 방도를 찾지 못했다.

대서양 헌장 : F.D. 루즈벨트와 W. 처칠이 1941년 8월 14일 캐나다 연안의 한 전투함에서 공식적으로 서명한 문서. 헌장은 영국이 전쟁에 참가하는 목적과 미국과 영국이 어떤 기초원칙을 토대로 3국동맹의 패전 이후 새로운 국제 관계를 재건해 나갈 것인 지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1. 대서양 헌장 (1941년 8월)

미국 대통령과 처칠 총리는[...] 몇몇의 국가가 육해공에서 자신들의 국경을 넘어 무기를 사용하여 침략 위협을 계속 가하는 이상 지속적인 평화가 불가능하기에, 현실적이고도 정신적인 이유를 바탕으로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무력 사용을 점진적으로 포기해 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이 두 사람은 보다 광범위하고 영구적인 보편적 안보 시스템이 구축될 때까지 무력 사용을 하겠다고 위협하는 국가의 무장 해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굳게 확신한다. 위와 같은 의도에서, 이 둘은 평화에 목마른 민족들을 짓누르는 무장이란 큰 짐을 최대한 덜 수 있을 만한 유용한 조취를 뒷받침하고 이들을 도울 것이다. 프랭클린 딜라노 루즈벨트와 윈스턴 처칠, 1941년 8월 14일.


2. 국제연합기구에 속한 기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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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9

3. 1944년 국제연합의 탄생을 기리는 포스터, 유엔 활동의 예고, 1945년 5월

4. 국제연합 헌장

우리 연합국 국민들은 ·우리 일생중에 두 번이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인류에 가져온 전쟁의 불행에서 다음 세대를 구하고, ·기본적 인권, 인간의 존엄 및 가치, 남녀 및 대소 각국의 평등권에 대한 신념을 재확인하며, ·정의와 조약 및 기타 국제법의 연원으로부터 발생하는 의무에 대한 존중이 계속 유지될 수 있는 조건을 확립하며, ·더 많은 자유속에서 사회적 진보와 생활수준의 향상을 촉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관용을 실천하고 선량한 이웃으로서 상호간 평화롭게 같이 생활하며,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힘을 합하며, ·공동이익을 위한 경우 이외에는 무력을 사용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원칙의 수락과 방법의 설정에 의하여, 보장하고, ·모든 국민의 경제적 및 사회적 발전을 촉진하기 위하여 국제기관을 이용한다는 것을 결의하면서,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의 노력을 결집할 것을 결정하였다.

5. 미국의 풍자화가 로우(Low)가 본 국제연합 클럽

“좋은 팀, 그러나 통일성이 있어야 성장할 수 있음... 룰 : 모든 선수들은 같이 게임을 한다, 하지만 각자의 플레이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이것은 현실적이지 않을 수 있다)“


질문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대서양 헌장이 내다보는 전후 재건은 어떠한 원칙하에 계획되었나(자료 1)? 2. 유엔의 주요 기관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자료 2)? 3. 포스터를 묘사하라. 유엔의 탄생엔 어떤 희망이 담겨있는가(자료 3)? 4. 유엔의 설립을 설명하는 원칙들은 무엇들인가(자료 4)? 5. 이 풍자만화에 그려진 나라와 인물들은 누구인가?


B. 자료 연관 짓기

6. 유엔이 대서양 헌장에 담긴 내용을 전수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어라(자료 1, 4). 7. 1945년 승전국이 유엔을 지배한다는 걸 보여주어라. 풍자만화가 그려진 그 시기에, 유엔 내부 갈등 원인이 무엇일 수 있는가 (자료 2, 3, 4 그리고 5)?

C. 논술

8. 유엔의 설립과 함께 생겨난 기대는 무엇인지 한 문단으로 약술하라.

제 2 장 : 탈공업 사회로

1944-45년부터, 미국이 이끄는 산업화된 자본주의 국가들은 이전에는 없었던 규모의 발전을 경험한다. 이를 “영광의 30년”이라고 한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발생한 긴 경기침체가 세계를 불안정성과 경제적 혼란에 빠뜨린다. 이 시기를 거치며 처절한 경쟁구도 속에 세계화를 가속화시킨 기술 발전이 이루어졌다. 서비스의 자리가 더욱 지배적인 탈공업 사회가 도래했다.

“영광의 30년”이란 무엇인가? 20세기 말 경기침체와 세계화는 어떻게 새로운 경제와 탈공업 사회의 탄생을 앞당겼을까?

1. 영광의 30년 동안 이룩한 경제발전에서... 1957년 솔트 레이크 시티의 자동차 영화관 “1946년에서 1976년까지, 한 세대 만에, 유럽인 1인당 평균 구매력은 4배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전 세대보다 4배나 더 부자인 셈이다. 희한한 것은 이러한 사실이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넘어갔다는 것이다,” “위기 만세”, 리베라시옹 신문, 1984년 2월. p.35

2. ... 세계화된 탈공업 사회로


2002년 세계에 곳곳에 자리 잡은 도요타 시스템 “세계화는 처음 나타난 게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생긴 현상이다(실크로드, 마르코 폴로, 콜롬버스...). 이 개념이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 처음 나타난 게 아니지만, 새로운 것이 있다면 특히 고도의 기술력을 통한 세계화 프로세스의 가속화와 근대화이다. 오늘날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계를 무대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프랭크 하우프레히트, 경쟁력 연구노트, 2007년 8월 29일. p.36


1. 영광의 30년

A. 발전과 번영은... 자료 3, 4, 5

1945년에서 1975년 사이, 세계는 엄청난 발전의 시기를 지난다. 이 시기를 추후에 “영광의 30년”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이는 경제학자인 쟝 푸라스티에가 처음 사용하였다. 이 시기에 산업화된 나라는 연간 5%라는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경제 성장률을, 그것도 오랜 기간 동안 기록한다. 완전 고용이 보장되고, 구매력은 일정하게 증가한다. 가정에서는 냉장고, 자동차, 텔레비전 등을 들여 놓는다. 생활수준은 계속해서 높아진다. “소비 사회”라고 흔히 불리는 풍족한 사회의 출현이다. 아무도 1929년 대공황과 같은 위기를 다시 겪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다. 이 이례적인 경제성장은 수요와 공급의 동반 증가로 설명할 수 있다. 전후 인구의 폭발적 증가, 재건, 구매력 증가, 여신금융의 발전, 광고, 새로운 형태의 유통채널(미국에서 탄생한 슈퍼마켓은 1960년대부터 유럽을 점령한다) 등이 수요를 증가시킨다. 또한 섬유나 건설 산업 등으로 테일러리즘이 확대됨으로써 생산성이 증대 되고, 기술 혁신과 더불어 제 3국이 수출하는 원료와 자원재의 낮은 가격 덕분에 공급량도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올라간다.


B. ...뿌리 깊은 경제 변화의 결과물이지만... 자료 1

석유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점점 커진다. 석유는 기존의 주요 에너지 자원이었던 석탄을 대체해 나가고, 합성 섬유 및 플라스틱 재질 생산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자원이 된다. 석유는 제트기와 자동차 산업의 비약적 발달로 대표되는 교통수단 혁명을 이루어내는 일등공신이다. 농업도 근대화 되어 수익과 생산성 모두 증가한다. 전자, 바이오화학, 교통 산업 등과 같은 수많은 산업이 초유의 역동적 성장을 경험한다. 1957년 쏘아올린 상상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와 1969년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하는 데 성공하면서 우주 정복이 가시화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GATT조약 체결로 자유시장을 표방하는 선진국끼리의 무역이 개방되면서 국제 교역량은 증가한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비난받았던 자본주의는 1945년 이후 활력을 되찾는다.


C.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자료 2, 6, 7

몇몇 국가들(미국, 유럽, 러시아, 조금 지난 후 일본)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영광의 30년 동안 이룩한 발전의 혜택을 더 많이 입었다. 1973년, 세계 인구의 19%밖에 되지 않는 주요 6개의 선진공업국이 세계 전기량의 68%를 소비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총 자동차 보유량의 82%를 차지했다. 하지만 제3국가들도 경제 발전의 수혜를 입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다만 그 강도가 덜 했을 뿐이다. 특히 동남아시아의 몇몇 국가는 이 시기에 경제 이륙을 성공시켰다. 유럽 국가들에서는 2세기가 걸린 평균 수명 연장이 이 모든 국가들에서는 20여 년 만에 이루어졌다. 선진국 내에서도 경제발전은 극심한 빈곤을 줄어들게 했지만 사회의 양극화 현상은 해소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경우 1954년부터 성직자인 아베 피에르가 노숙자와 불우이웃을 위한 구호운동을 전개한다. 1960년대 말, 경제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이와 같이 엄청난 성장이 지구의 자원을 고갈시키지는 않을지 의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1968년 그들 중 몇몇은 “재로 성장”을 외치지만 아무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1973년 석유 파동 전까지는.


용어


경제발전 : 1년 사이 생산량의 증가를 의미하며, 국민총생산(GNP)와 국내총생산(GNI)의 변화율을 토대로 측정할 수 있다.

위기 : p.46의 “헷갈리지 말 것” 참조하기.

생산성 : 생산된 재화나 서비스와 이를 위해 투입된 노동량의 비율.

GATT :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의 약자로서 관세장벽과 수출입 제한을 제거하는 일반협정으로 80개 국가가 1947년 서명했다.


1. 스푸트니크(러시아), 1957년

2. 1970년 소득 분배 현황

위의 선진국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경제 발전의 혜택을 누리는가? 가장 큰 격차를 보이는 나라는 어디인가?


p.37

3. 발전, 그리고 풍족함

a. “영광의 30년”은 경제적 관점에서 봤을 때 나라를 완전히 바꿔놓은 혁명이었다[...]. 생산량이 엄청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시간을 이전보다 덜 투입해서 얻어낸 결과란 사실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예전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노동 시간을 들였으나 생산성은 낮았다. 왜 그랬을까? 오늘날에 비해 생산 기술의 효율성이 훨씬 떨어졌기 때문이다 [...] 쟝 푸라스티에, 역사 매거진, 1980년 9월호

b. 빈곤의 무게에 눌려 사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 한 세기 전 가장 돈이 많은 재력가들도 가질 수 없었던-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모든 편의품(식료품, 엔터테인먼트, 개인 교통수단, 위생 시설...)에 접근 가능한 사람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이 변화는 실로 엄청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광고와 판촉 행사와 같은 인위적인 방식들이 이 욕구들을 불러일으키고, 더 명확하게 만들고, 유지해나가는데, 이를 통해야만 이 욕구들이 확실해진다. 광고와 판촉 행사는 가장 비중 있는 직업군이 되었고 이 중에 많은 이들의 실력있는 전문가들이 생겼다. 19세기 초만 해도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위해 광고 에이전트를 필요료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 미국 경제학자 겸 사회학자, <풍요의 시대>, 미셸 라포트르 출판사, 1961년

5. 프랑스의 실제 가격 변동

6. 씨트로엔의 2CV 한 대를 구입하려면 몇 시간의 노동을 해야 할까?

4. 1950년대의 광고

이 광고가 내세우는 주장은 무엇인가? 이 광고가 “영광의 30년”의 초기에 만들어졌다는 걸 증명하라.

5. 경제성장 : 애매모호한 개념

경제성장과 같은 현상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물질적 정의만 놓고 본다면, 국민총소득의 증가가 가장 좋은 경제 성장 지수라고 할 수 있다. 이 성장 지수야말로 확실한 현실을 반영하니까 말이다. 즉, 성장이란 물질적 재화의 유통이 매 해 증가한다는 뜻이다. [...] 이 현실은 곧 재화의 실질적인 존재와도 부합한다. 국민총소득이 높을수록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재화의 양과, 그 나라의 교육 및 위생 수준은 올라가기 마련이다. 공동 재화를 생산비용만으로 측정하면서, 국민총소득은 경제성장의 많은 이면(교육, 건강, 친환경 공간 등)을 간과한다, 생산으로 인해 발생하는 공해와 오염을 처리해야하는 비용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효과를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측정한 국민총소득의 변화는 국민 복지의 실질적인 변화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통체증(기름 소비가 늘어나기 때문에)이 생기거나, 차사고(카센터의 영업 건수가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가 나거나, 아니면 노틀담 사원이 사무실 건물로 대체된다면 국민총소득은 증가할 것이다. 건강, 위생에 관련된 지출이 국방에 들어가는 지출이 증가하는 만큼 줄어든다면, 국민총소득은 감소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총소득이라는 개념이 실질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위의 예시를 통해 드러난다. 바로 비상업 활동과 시장 외 의무사항을 제외한 모든 형태를 띤 상업 경제의 확장이다.


쟈크 아딸리, 당시 사회당과 가까웠던 프랑스 경제학자 <경제 성장>, 세계 백과사전 중, 1973년


경제 성장을 어떻게 계산하는가? 쟈크 아딸리에 따르면 이 개념이 애매모호한 이유는 무엇인가?


2. 1970년대부터는 위기 또는 경기침체의 시작?

A. 석유 위기부터... 자료 2

중동에서 발생한 전쟁으로 인해 1973년,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위기가 닥친다. 많은 관찰자들은 경제활동 저하의 원인이 석유 가격의 급등에 있다고 본다. 그렇게 “석유 파동”이라는 표현을 쓰게 됐다. 욤 키푸르 전쟁을 계기로 석유를 생산하는 아랍 국가들은 석유의 배럴 가격을 기존의 2.47달러에서 11.25달러로 4배나 올린다. 이것이 바로 1차 석유 파동이다. “석유 위기” 또는 “에너지 위기”라는 표현은 석유수출국기구에 속한 나라들을 이 사태의 책임자로 지목한다고 볼 수 있다. 석유 가격의 급등은 아주 빠른 속도로 산업 전반의 생산비용에 영향을 미친다.

B. ...장기간의 경기침체까지 자료 1, 4

1974년부터 “에너지 위기”는 연료, 전기, 그리고 생산 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모든 재화의 가격을 상승시킨다. 이로 인해 생산이 감소한다. 기업들은 생산 활동에 제동을 걸 수밖에 없고 실업자 수는 증가한다. 1929년 대공황 때부터 실업과 인플레이션은 공존할 수 없는 현상으로 여겨졌지만 이번 위기를 계기로 이 두 현상이 같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새로운 상황을 지칭하는 새로운 단어가 생겼는데 바로 스태그플레이션이다. 경제는 그러나 계속해서 성장한다. 그 속도와 규모가 더 작을 뿐이다. 위기는 전 세계로 확장된다. 이 위기로 인해 타격을 받게 될 차례는 바로 동구권 국가들이었다. 에너지와 가공품을 동시에 수입해야하는 제3세계의 몇몇 국가는 가난해졌다. 국제 무역의 상황도 나빠졌다.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상황이 회복되다 악화되는 일이 반복된다. 1975년 이후 상황은 조금 나아졌으나 1979년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으로 배럴당 가격을 3배 높이고, 인플레이션과 실업을 야기한 2차 석유 파동으로 인해 상황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1982년 석유 가격이 안정세를 되찾으면서 상황은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석유파동의 반작용으로 선진국은 인플레이션을 잡는데 성공하나 실업을 막는 데는 실패한다. 그렇게 경기 불황의 원인이 석유 파동 말고도 다른 데 있다는 게 서서히

C. 그 원인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데 자료 3,4,5

석유가 경기 불황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1973년 초, 그러니까 1차 석유 파동보다 훨씬 앞서, 원료의 가격은 큰 폭으로 올랐다(1년 사이 구리의 가격은 88%으로 증가). 이 현상은 큰 국가들의 동시적 성장으로 인한 결과다. 이 성장을 뒷받침 하려면 더 많은 양의 원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도나 브라질과 같은 나라들이 경쟁에 돌입하면서 이와 같은 대란은 더욱 확대된다. 여기에 통화 위기도 한 몫 한다. 1971년 달러화의 평가절하(1944년 브레튼 우즈에서 도입된 금-달러 태환성의 폐지)이후 각 나라 통화들 사이의 환율은 “변동환율”로 바뀐다. 즉 환율은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의해 변하게 된 것이다. 이제부터 국가들은 화폐를 더 쉽게 찍어낼 수 있게 됐다. 실업을 피하기 위해 통화를 희생양으로 삼은 이 정책은 인플레이션과 투자의 감소를 야기한다. 인구 변화도 경기 침체의 원인 중 하나이다. 1960년대 “베이비 붐” 시대가 끝나면서 수요가 감소한다. 가정집이 냉장고와 자동차 등을 갖춘 뒤 내수 시장이 포화상태에 빠지면서 수요 감소는 더욱 악화된다. 그리고 1970년대에 기술 개혁은 점점 줄어들고 생산 이득은 하락한다. 임금을 지급하는 일이 부담으로 작용되면서 기업들은 공장을 기계화시키고 생산기지를 이전한다. 이렇게 선진국의 실업률은 더욱 악화된다. 여론의 일부는 “경제의 세계화”를 불황의 주요 원인으로 본다.


용어

석유수출국기구(OPEC) : 1960년 바그다드에서 창설됐으며 1973년 총 13개국이 회원이다.

인플레이션 : p.46의 “헷갈리지 말 것” 참조하기

스테그플레이션 : 인플레이션(물가 상승)과 경제 부진, 나아가 경제 약화가 한꺼번에 겹쳐 실업이 발생하는 경제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오늘날 몇몇 경제 역사학자들은 이 개념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불황 : p.46의 “헷갈리지 말 것” 참조하기

평가절하 : 정부가 수입보다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 통화의 가치를 낮추는 행위.



1. “인플레이션의 징조는 어디서든 나타나고 있다” 1971년도의 그림, 영국의 풍자 잡지인 펀치에 개제됨.


p.39

2. 1900년 이후 석유 시세 변동


1 영광의 30년 동안 석유의 시세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2 그 후 30년의 시세는 어떠한가?

3 이러한 변화가 가져온 결과는 무엇인가?


3. 경기의 후퇴 아니면 재정비?

언론은 후퇴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그리고 경기후퇴로 인해 개인적으로 타격을 입을 경우 그것은 더 이상 “후퇴”가 아니라 “침체”가 된다. 이러한 현상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경기가 후퇴되면서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항상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도 이해한다. 그러나 후퇴나 침체와 같은 개념을 계속 사용하는 것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일이다. 이로 인해 이 현상의 원인이 아닌 증상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게 된다는 게 문제다. 이전의 불황기 때, 기본 산업의 여러 분야가 정리해고, 매상 감소, 부도, 청산 등과 같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큰 규모의 기업이 문을 닫았다. 하지만 새롭고 막강한 산업이 동시에 생기는 일은 적었다. 오늘날, 자동차, 철강, 고무, 섬유등과 같이 대량 생산 위주로 돌아가는, 다시 말해 전통 산업 경제의 골격을 이루었던 산업들이 죽어가고 있다. 벨기에의 야금공, 영국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 북 캘리포니아와 일본 섬유공장의 인부들이 일자리를 잃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전자, 컴퓨터, 전산, 유전자, 우주항공, 재활용 계통의 산업 및 몇몇 서비스 산업, 그리고 신생에너지에 특화된 산업들은 오히려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 물론 좋아졌다 나빠졌다 할 때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이 계통의 산업들은 확장 추세에 있다. 우리가 현재 직면해 있는 상황은 정확히 말해 후퇴가 아니라 사회 기술 및 경제 기반의 개편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다.

앨빈 토플러, 미국의 작가 겸 사회학자, <미래의 지도>, 드노엘 출판사, 1983년


1 저자에 따르면 1980년대 경제 상황과 과거 “불황기” 때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2 “사회의 기술 및 경제 기반의 완전 개편”이란 표현을 설명하라.


4. 1970년도와 1982년도 프랑스의 경기 침체 지수

1970년대부터, 경제학자들은 정사각형(마방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의 형태로 경기 침체의 주요 현상을 도표 상에 나타낸다. 정사각형의 크기가 줄어들수록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완전마방진(높은 성장률, 높은 무역 수지 흑자, 적은 물가상승률, 적은 실업률)은 이론상으로만 존재한다(위 도표에서 적색으로 그려졌다).


5. 마르크화의 시세(단위 : 프랑스 프랑) : 변동 환율제도의 효과

1 1975년에서 1983까지 프랑은 마르크에 비해 어떤 비율만큼 평가절하 됐는가?

2 이와 같은 시스템이 국제 무역에 끼치는 악영향은 무엇인가?

p.40


자료집


경기 침체에 직면한 국가들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공업국가의 수장들은 우선 케인즈가 제시했던 경기 부양 정책을 사용했다. 즉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 정부 지출을 늘리고, 임금 올리고, 대출 요건을 대폭 낮췄다. 1930년대의 경제 위기를 부분적으로 해결하는 데 효과적이었던 이 정책들은 과세율의 빠른 급등으로 인해 그 효과가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학자들과 정치가들은 강경한 자유주의로의 귀환(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말하던 “신자유주의”), 통화주의, 세금 감면 정책 등에서 새로운 해결책을 찾았다. 부분적으로나마 효과가 있었던 이 조치들로 인해 20세기 말에는 경제 상황이 다시 나아진다.


용어

케인즈 경제학 : 가계의 소비가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는 영국의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이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학파이다. 국가는 그에 맞는 경기 부양과 경제 활성화 정책을 도입해야한다.

과세 : 세금과 사회보장제도 납입금을 총칭하는 용어.

자유주의 : 경제적인 관점 : 국가는 경제에 최대한 적게 개입해야 하며, 수요-공급의 메카니즘이 알아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 따라서 국유화도 지양해야한다.

통화주의 : 인플레이션을 경기 침체의 주원인으로 지목한 경제 이론. 인플레이션을 조정하기 위해서 돈을 찍어내는 일에 제동을 걸어야 하고, 대출도 제한해야한다.



1. 프랑스 공산당에 의하면...국유화해야 할까 아니면 사유화해야 할까? 1974년 10월, 프랑스 공산당의 벽보

프랑스 경제학자 기 소르망에 따르면... 비국영화는 자유주의가 그동안 갖고 있었던 보수적인 이미지에서 완전히 탈출할 수 있게 해주는 놀라운 사회적 발전의 기회를 제공한다. 영국이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 공공서비스 기관의 사유화는 원래 서비스 자체가 공공성을 띌 수 있는 경우가 드물다는 자유 경제의 교훈을 준다. 서비스가 공적인 경우는 정치적인 개입이 있을 때만 그러하다. 미국에서는 화재 진압 서비스나 교도소등이 개인에 의해 운영되기도 한다. 기 소르망, 자유주의적 해결책, 파이야르 출판사, 1984년

2. 케인스 주의자의 실패

백악관에 입성할 당시 지미 카터(미국의 대통령, 1976~1980)는 케인스 주의자였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고용률을 지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의 임기 동안 고용 부문의 성과는 매우 컸다. 실업자는 250만 명이나 감소했고, 새로운 일자리 천 만 개가 생겼다. 어떻게 된 영문일까? 예산을 한 해에만 무려 20%나 올리고, 이자율을 물가상승률보다 낮춰 연간 4~5%대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한 것이다. 하지만 2년 뒤 실업률이 증가하면서 생산성이 저하되고 인플레이션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다 (1978-79년 11.3%). 전 세계는 가치가 하락하는 달러화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또한 카터의 임기 동안 가격을 관리하고 세금과 모든 종류의 사회지출을 올리기 위해 각종 관료주의적 절차가 생겨났다[...]. 재산, 기업의 이윤, 개인 소득에 대한 과세가 부여되자 국민들은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1978년, 카터는 정책의 방향전환을 한다. 재정 적자를 반으로 감소시키고 화폐 발행 기관의 고삐를 다시 잡겠다고 약속한다. 1978년에 그는 이렇게 자신이 이끈 정책의 실패를 인정했고 그의 자리를 이은 로널드 레이건(미국의 대통령, 1980~1988)의 극보수 정책에 날개를 달아 주게 된 셈이었다. 미셸 알베르, 경제학자, <프랑스의 도전>, 르 쇠이 출판사, 1982년

p.41


4. 로널드 레이건의 경제 정책

1970년대에 레이건이 주지사로 있는 캘리포니아주는 세금 감면을 골자로 한 “주민발의 13”을 투표하여 시행한다. 그 결과, 토지세가 60% 내려가면서 부동산 건축 붐이 일어나 경제 전반이 활성화 됐다. 십 여 개의 다른 주에서도 도입된 “주민발의 13”은 빠른 시일 내에 국민의 동의를 얻어냈다. 이 발의문은 1980년 레이건 후보자의 대선 캠프팀이 제안하는 정책 상당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고 그 뒤로 이 정책들은 구체화 되었다. 그 정책들은 다음과 같다 : 1981년 10월 1일 세금 5% 인하, 1982년 7월 10% 인하, 그리고 1983년 7월 또다시 10% 인하. 총 인하율은 25%였다. 3년 동안 2700억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 연방 정부 예산에서 공제됐다. 이는 2조 프랑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프랑스 연간 예산의 두 배나 되는 수치였다! 물론 정부 지출을 그만큼 줄여야 했다. 민간 대출은 3분의 1이나 줄고, 많은 사회보장 관련 지출과 공무원의 자리는 사라졌다. 필요성이 있는 곳에는 공공기관의 바통을 민영기관이 이어받았다. 건강이나 사회 안전 분야 같은 경우는 민영업체가 더 좋은 가격과 이전과 동등하거나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경제성장률이 이를 증명하듯 경제를 활성화시켰다. 알자스 뉴스, 1984년 11월 7일

5. 신기술로 위기를 탈출할 수 있을까?

미국은 오늘날 반도체 분야(인텔), 컴퓨터 프로그램 분야(마이크로소프트 등), 컴퓨터 분야(IBM, 델 컴퓨터), 통신 분야(루센트 테크놀로지, 시스코), 멀티미디어 분야(대규모 합병된 AOL과 타임 워너)의 선두주자이다[...]. 인터넷 사업은 “미국의 전유물”이다. 네트워크 연결망은 미국국립과학재단에 의해 유럽인들도, 일본인들도 인터넷이 특히 경제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e-커머스의 발전을 토대로 경제와 금융시장에 미치게 될 엄청난 영향력을 가늠조차 하지 못하던 시절인 1991년에 민영화됐다. 지난 수십 여 년 간 1.5%대(독일은 3%, 일본은 4%)를 유지하던 미국 생산성 상승률은 현재 연간 3%대로 올라왔다. 위의 다른 나라는 모두 3%대 아래로 하락했다. 4% 대로 하락한 실업률은 1960년대 이후 미국 역사상 가장 낮은 수치이며 가슴 졸였던 인플레이션 악화도 따로 없었다. 미국에서는 전 세계가 따라하게 될 “신경제”모델이 새롭게 자리잡아가고 있다.

미셸 구쏘, 지리학자, 경제 지리 교과서 편찬, <새로운 세계 경제 속의 미국>, 아르망 콜랭 출판사

6. 파이낸셜 타임즈가 본 “신경제”

삽화 : 데이빗 브롬비, 1990년


질문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자료 1에 따르면 공산주의와 자유주의가 어떤 부분에서 근본적으로 대치되는가?

2. 케인즈 주의에 입각한 카터의 정책과, 이 정책이 미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하라(자료 2).

3. 1971년에서 1984년 사이 프랑스의 과세가 어떻게 변화했는가(자료 3)? 래퍼 곡선에 따르면, 과세 정책의 결과는 어떠한가?

4. 레이건의 경제 정책에 대해 몇 줄로 요약하라(자료 4).

5. 자료 5의 저자는 어떤 방안을 제안하는가?

B. 자료 연관짓기

6. 지미 카터 대통령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추진한 경제 정책의 차이점에 대해 설명하라(자료 2)

7. 그림(자료 6)이 보여주고 있는 상황을 담고 있는 자료는 자료집 중에 어떤 것일까? 왜 그러한가?

C. 논술

8. 이 자료집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경제 불황을 타파하기 위해 제시된 여러 가지 “처방”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문단을 작성하라.


p. 42


3. 세계화된 경제

A. 무역의 세계화 그리고 자유화 자료 2, 3, 4, 5


1950년대에 처음 생긴 “세계화”라는 196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일상에서 쓰이기 시작한다. 사실, 나라 간의 국제교역은 오랜 세기 전부터 있어왔다. 20세기 말 국제 교역의 새로운 점은, 교역의 규모와 이 교역이 이루어지는 배경이다. 자유 자본주의에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었던 소비에트 공산주의가 멸망하면서 남게 된 경제 발전 모델은 자유 무역과 경쟁을 표방한다. 이 모델은 생산비와 효율성이란 두 가지 기준을 철저히 따른다. 즉 최대한 많은 양의 재화를 최소한의 시간에 최소한의 비용을 투자해 생산해내는 것이다. 그러게 “세계화”라는 용어는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뜻하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됐다. 세계화는 경제, 기술 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문화적, 정치적, 나아가 볍률적 세계화도 같이 진행됐다. 텔레마티크의 발전과 교역의 자유화를 통해 이익을 창출한 다국적기업들이 경제 분야에서 세계화를 주도했다. “세계화”란 용어는 세 가지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 국제화. 전 세계 국가들 사이에서 교역이 활발해 졌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가 생산하는 부의 4분의 1이 수출 덕분이다. - 생산기지 이전. 다국적기업은 세계 각지에 투자를 하고, 생산기지를 이전하여 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재화를 생산하려 한다. - 종합화. 종합화는 생산망과 정보망이 세계적으로 구축되면서 가능해졌다. 통신 혁명(인터넷)은 세계화의 일등공신이다. 통신 혁명으로 나스닥이 큰 성공을 거두었고, 출처가 다양한 혁신과 기술이 때로는 별도의 제어 없이 하나의 망으로 연결되었다.


B. 그 결과는 좋지만은 않은데... 자료 1


산업국 소비자들의 대부분은 옷을 더 낮은 가격에 살 수 있게 하고, 여행도 더 자주 할 수 있게 하고, 텔레비전의 채널 선택권을 다양하게 해 준 시장 개방의 혜택을 환영한다. 그러나 세계화의 부정적인 효과(실업, 고용 불안정, 사회보장제도의 논란)는 한편으로 소비자로서 세계화의 혜택을 받는 임금 노동자들의 불안을 증폭시킨다. 국가 경제가 세계 경제 체제에 개방되면서 가격이 동일화되고 공장이 문을 닫는 등의 결과가 초래됐다. 후진국이었던 몇몇 국가들은 경제 개방을 통해 이익을 얻기도 했다. 그렇게 수출국가인 아시아의 작은 나라들(싱가포르, 타이완), 칠레, 멕시코, 터키, 모리셔스 섬 등은 자신들의 국가 경제를 국제 시스템에 발 빠르게 동화시켰고, 이로 하여금 국부 축적과,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 이 국가들의 성공 이면에는 노동력의 저렴한 비용과 저조한 사회 보호시스템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국가들은 오히려 빈곤에 빠졌다. 이들은 선진국들이 자유무역을 강요하면서 국가의 지원으로 농업 혹은 섬유산업과 같이 개발도상국들이 강점을 지닌 부문을 완전히 보호조치 하는 이중적 잣대를 비난했다.


C. ...때로는 세계화를 격렬하게 거부하는 목소리도. 자료 6

세계화는 많은 이들의 불안과 공포를 야기한다. WTO가 모이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그에 반대하는 이들이 와 시위를 하는데, 때로는 폭력이 동원되기도 한다. 1999년 12월, 시애틀 시위는 참가한 세계 각지에서 모인 50 000명의 반세계화 운동가들을 결집시킨다.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이 새로운 형태의 항의는 해가 갈수록 더 잦아지고(2001년 제노바, 2003년 칸쿤), 이는 곧 세계화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사이에 벌어지게 될 설전의 개막을 예고한다.


용어

나스닥(National Association of Securities Dealers Automated Quotation) : 컴퓨터 전산망만으로 운영되는 장외 주식시장.

WTO : 1995년에 설립된 세계무역기구는 국제 경제 교류를 보다 체계적으로 조직하기 위해 모인 총 146개국의 회원을 두고 있다.

반세계화 운동가 : 1990년대에 나타난 세력으로, 자본주의가 이끄는 세계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21세기 초, 그들은 “탈세계주의자”로도 불리게 됐으며 자유 자본주의가 이끄는 세계에 벗어난 또다른 세계를 원한다.


1. 나이키 운동화 한 켤레 팔기

나이키 운동화 한 켤레가 있다고 가정하자. X 모델, 미국에서 70$에 팔리고 있다. 가격을 해부해보면 운동화를 만드는 노동자의 임금이 2.75$이다. 불공정 거래의 충격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비싼 재화를 만드는데 이렇게 조금 번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 가죽, 섬유, 기계 그리고 운송비와 세관비용도 물론 생각해야한다. 이 요소들을 다 합치면 총 16$가 나온다. 이 물질적 비용에 나이키가 이 물리적 사물을 하나의 사회적 사물, 즉 사람들이 갖고 싶어할만한 운동화로 변형시키는데 지출하는 비용을 더해야한다. 바로 여기에 나이키 사업의 핵심 포인트가 있다. 운동화를 알리고 갖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광고활동, 또한 유명한 운동선수들에게 협찬을 통해 전 세계 텔레비전 시청자들에게 이 운동화를 신고 싶게 만드는 마케팅 행사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 신발 가격은 이렇게 두 배로 뛰어 35$가 된다. 여기엔 모든 생산비용과 프로모션 비용이 포함돼 있다. [...] 그럼 35&에서 어떻게 70$가 되는 건가? 간단하다. 남은 과정은 소비자의 발에 신발에 물리적으로 신기는 순간까지 필요한 제반비용, 즉 유통비용이다. 이와 같은 가격 구조는 탈산업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윤곽을 보여준다. 생산의 전 단계와 생산 후 단계로 나뉘는 이 개념은 선진국들 경제활동의 핵심이 돼가고 있다. 중간 과정, 즉 생산과정의 중요도는 이차적으로 밀려나고 생산 자체가 선진국 밖의 지역에서 실행될 수도 있다. 데이빗 코헨, 경제학자, 탈산업 사회에 관한 3가지 강의, 쐬이 출판사, 2006년

1 이 글에서 저자가 충격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2“탈공업 사회”의 주요 특징은 무엇인가?

p.43

2. 노동의 세계화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떠나서 사는 사람의 수가 1750만 명이다. 1년에 자국에 그들이 송금한 총액은 930억 달러에 달한다. 이 수치는 인적 이동이 국제적으로 광범위해졌다는 사실과 이민과 노동 사이의 밀접한 과계를 보여준다. 멕시코는 인도와 함께 자국으로의 송금을 가장 많이 받는 나라다. 그 액수는 2001년 기준 100억 달러나 된다. 그 뒤를 쫓는 필리핀과 모로코, 이집트, 터키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타국에 나가있는 국민들이 자국으로 보내는 송금은 조금 규모가 작은 나라들의 경우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와 같은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이와 같은 자금은 베르데 곶, 살바도르, 니카라과, 레바논 국내총생산의 12%에서 16%를 차지한다. 요르단의 경우 22%, 레소토에서는 26%나 된다! 이민자들의 타입은 바뀐다. 이민자들은 더 이상 세상 물정에 밝은 농촌의 프롤레타리아들만이 있는 게 아니다.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도 이젠 이민자 대열에 합류했다. 학력이 높거나 전문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장은 세계화 됐다. 캘리포니아나 독일 혹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인도의 컴퓨터 공학도를 찾고, 사우디아라비아나 오만의 병원에서는 의사를 필요로 한다. 영국은 남아프리카 간호사 파견을 요청한다. 기 헤르츠리히, <세계 이니셔티브>, 2004년 6월


3. 명나라 황릉 근처, 베이징 북부

4. 만화가 피엠이 본 세계화 1980년 10월 3일자 <알자스 최신 뉴스>에 개제

5. 세계화란 무엇인가?

에릭 J. 아르누와의 인터뷰, 민족학자 겸 애리조나 대학교 마케팅과 교수 세계화에 대한 정의를 내리실 수 있겠습니까? 세계화란 개념은 지구 한 편의 자원이 지구의 반대편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내포한 개념이다. 이 이동하는 자원들 중에는 인간, 이미지, 생각, 자연 자원, 자본, 소비 행태 등이 있다. 기업들에게 세계화란 무엇입니까?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와 조합 그리고 소비 행위에서 세계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패스트푸드, 쇼핑, 대규모 대량 유통, 미인 대회, 관광, 레저, 그중 특히 “디즈니피케이션”이 있다. 세계화는 국제노동시장의 새로운 분배를 야기하는가? 어떻게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금융자금은 전문적이고 저렴한 유효 노동력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력 보고서>, 2009년 8월 29일


6. 브라질에서 열린 반세계화 시위.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2001년 1월)

1. 시위자들은 무엇을 규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가?


자료집

세계화의 여러 가지 모습

“영광의 30년” 이후 기술 혁신은 빠른 속도로 이어졌다. 제3의 산업혁명은 신속한 정보처리를 가능하게 한 마이크로프로세서 사용과 정보 운반을 원활하게 하는 광섬유 사용을 일반화시켰다. 미국에서 시작돼 새로운 기술력이 이끄는 “신경제”가 다른 모든 대륙으로 번졌고, 이 현상은 소비에트 블록이 무너진 뒤로 더욱 가속화 됐다. 이로 인해 사회 구성원을 새롭게 구분하는 잣대가 생기는 경향이 있다. 이 잣대는 바로 “정보 격차”다.


용어

정보 격차 : 정보를 전달하는 신기술(인터넷)을 사용할 줄 아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을 갈라놓는 틈.

1. 르 푸앙 신문의 일면, 1985년 8월 22일.

2. 세계화에 맞선 중국 당국의 검열

수백 만 명의 중국 시청자들은 올 여름 스촨성에 사는 여대생을 그들이 가장 선호하는 프로그램의 슈퍼걸로 지목했다 [...] 후 진타오 주석과는 달리, 호감형 여대생 이주춘씨는 SMS를 통해 352만 표를 얻어 당선됐고, 그녀의 가장 가까운 경쟁자는 327만 표를 획득했다. 당국은 아직 국민직접투표 자체를 모르는 국민들에게 이러한 방식은 정권에 위험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바로 검열에 착수했다. 공안당국은 슈퍼걸 선발과 관련하여 “모든 정치적 발언을 금하라”는 명령을 언론사들과 주요 인터넷 포털사에 내렸다. 이 일화는 그냥 웃어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그 후 3주 뒤 인터넷의 가혹한 검열이 시행되면서 심각성을 띠게 됐다. [...] 중국 정부는 막강한 소프트웨어를 통해 중국의 인터넷을 세계로부터 고립시키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사상) 수호 방패를 전국적으로 까는 데 성공했다. 처음부터 목적은 중국인들이 체제수호에 걸림돌이 되는 정보(민주주의나 탄압 관련)에 접근하는 걸 제안하는 것이었다. 프로파간다국(검열 당국의 공식 명칭)이 발표한 새로운 지침은 또 다른 목적을 표방한다. 중국인들이 토론 포럼이나 블로그, 나아가 이메일 상에서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개인 의견을 표출하는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다. “정보를 일차적으로 필터링 한 뒤, 거기에 딸린 모든 코멘트를 막는 것”이라고 중국의 전문가가 상황을 요약한다.

르 피가로, 2005년 10월 11일


3. “자본주의와 결합한 뒤 그것을 다시 위협하는 독재체제”

어제까지만 해도 중국은 새로운 엘도라도였다. 막 개방되던 이 엄청난 시장에서 한 몫을 챙기려면 그곳에 투자해야만 했다. 에어버스, TGV, 기계, 자동차, 요구르트 등을 그곳에 팔아야했다. 그랬던 중국이 오늘날엔 비난의 대상 축에 올랐다. 중국의 섬유 수출은 미국과 유럽의 생산자들을 파산의 늪으로 집어삼켰다. 중간국가인 튀니지, 마다가스카르, 멕시코의 수출도 대체되고 있어 그곳에 공들여서 세워졌던 수 백 여개의 공장들은 문을 닫아야 했다. 거대한 중국은 반칙을 쓴다! 중국은 브랜드 고유의 권리와 지식재산권을 무시한 채 이미 출시된 모델을 아무렇지도 않게 모방하고 표절한다. 수 백 여개의 공장으로부터 가짜 롤렉스, 가짜 라코스테 셔츠가 만들어진다. WTO에 2001년 가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는 이 현안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이다. “중국룡(龍)”의 지칠 줄 모르는 욕망으로 인해 석유 및 다른 원료의 시세가 요동친다. 미래가 갑자기 불확실해 보인다. 중국이 이와 같은 속도로 계속해서 발전에 박차를 가하면, 중국 국민 모두를 자동차와 에어컨을 소유하게끔 한다면 세계는 연료 부족 사태로 인해 모든 것이 멈춰버릴 수도 있다. 중국을 지탱하는 원동력은 세계에서 제일 저렴한 임금과 7억 명의 불우한 농민들로 구성된 예비군이다. [...]. 자본주의와 결합한 뒤 그것을 다시 위협하는 독재체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의 공장”이 된 뒤로 중국은 세계화의 모든 이익을 끌어들이는 인상을 준다. 중국은 결코 과거의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더 빨리 성장하지 않는다, 1950년대의 일본이나 1980년대의 한국처럼 말이다. 차이는 중국의 크기에 있다.

<세계의 자료와 기록물>, 345호, 2005년 9월

p. 45


4. 2002년 불공평한 부의 분배


5. 경상 수지


6. 석유 전쟁

미국에게 석유는 경제적 변수가 아니다. 지구는 새로운 세기의 중반에 이 자원의 부족 현상을 겪게 될 것이다. 세계는 앞으로 40년분의 확실한 석유 매장량을 갖고 있다. 세계는 발전하는 속도에 비해(아시아), 즉 에너지 자원을 더욱 필요로 하는 데에 비해 새로운 에너지를 발견하는 데는 더디다. 지구에 아무리 2세기분의 석탄 비축량이 있다고 해도, 무연탄으로는 민항기와 군용기를 하늘에 띄울 수 없는 노릇이다. 오늘날 실제로 재생 가능한 에너지 개발을 위한 정치적 의욕이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추세이긴 하나, 그것만으로는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석유 공급의 감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원자력은 잠재력이 충만한 에너지임엔 분명하지만 문제는 원자력이 여론에 미치는 공포감이다. 위와 같은 관찰을 통해 미국은 두 가지 결론을 도출해 낸다. 우선, 40년 안에 석유는 누구에게나 공급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정치적으로 석유 생산지와 그것의 이송 경로를 정치적으로 관리하면서 미래 미국이 필요하게 될 석유를 확보를 해둬야 한다. 그 다음 이 국제적인 석유 감시를 통해 미국은 미래의 경쟁국들, 그리고 반년이 지나면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헤게모니를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적인 중국에 우위를 확보하게 된다. 역사, 279호, 2003년 9월


질문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자료 1이 증명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2 중국이 인터넷을 감시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자료 2)?

3 자료 3에 따르면 중국 경제의 강점은 무엇인가? 중국 경제가 어떤 의미에서 위협이 되는가?

4 자료 4가 보여주려 하는 것은 무엇인가?

5 자료 5는 미국 경제의 어떤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가? 이러한 상황을 가능하게 하는 건 무엇인가?

6 자료 6에 따르면, 석유는 왜 여러 나라들이 눈독을 들이는 자원인가?

B. 자료 연관짓기

7 자료집에 제시된 자료들 중 어떤 것들이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하는가?

C. 약술

8 미국, 중국 그리고 세계화.

p.46

복습 카드

외워야할 사건


■ 1944 : 브레튼 우즈 조약 ■ 1971 : 달러 태환성 폐지 ■ 1973 : 1차 석유 파동 ■ 1979 : 2차 석유 파동 ■ 1995 : GATT를 대체하는 WTO의 탄생 ■ 1996 : 인터넷 일반 사용자에게 개방 ■ 1999 : 반세계주의 운동가들의 첫 번째 시위 ■ 2008 : 석유 가격 바릴 당 100$ 돌파

하이라이트

1.“영광의 30년”

□ 1945년 이후 세계 경제는 30년 동안 전례 없는 경제 성장을 한다. 이 시기를 “영광의 30년”이라 부른다.

□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는 수요 급증(베이비 붐)과 공급의 증가, 저렴한 에너지(석유), 생산성 확대 등이 있다.

2. 20세계 말에는 찾아온 건 경제 위기 아니면 경제 침체?

□1973년 1차 석유 파동으로 인해 경제가 위기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기는 점점 긴 침체의 늪으로 빠지고 스테그플레이션 현상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경제성장은 지속된다.

□ 이 악화 현상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 - 1971년부터 생긴 국제 통화 시스템의 혼란 - 석유와 원료 가격의 급등 - 생산성 저하 - 선진국 베이비 붐 시대의 끝

□ 케인즈 학파가 제시한 대책은 효과가 미미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다른 대안이 대세가 됐다 : 자유주의, 통화주의.

3. 경제의 세계화

□ 이러한 경제적 배경 안에서 경제의 세계화는 속도가 붙는다(특히 디지털 네트워크, 국제 무역 및 교류 확대 등의 효과가 컸다).

□ 세계화에 대한 평가는 좋지만은 않았고 자유 자본주의를 규탄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 2008년 : 석유는 바릴 당 100$를 기록한다.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들

GDP와 GNP

▶ 한 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이란 이 나라 안에서 자국의 기업과 외국 기업에 의해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의 값을 의미한다. ▶ 한 나라의 국민총생산(GNP)이란 이 국내 및 국내에서 이 나라의 자국 기업에 의해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의 값을 의미한다. 이 나라 안에서 외국 기업이 생산한 재화와 서비스는 국민총생산에 포함되지 않는다.

인플레이션과 가격 상승 ▶ 인플레이션은 주어진 재화의 양에 비해 통화량이 급속하게 증가하는 현상이다. 이로 인해 해당 통화의 가치가 하락하게 된다. ▶ 가격 상승은 통화 가치 하락이 야기하는 결과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이란 단어를 가격 상승의 뜻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경제 위기와 경기 침체 ▶ 경제 위기는 경제 상황이 급격하게 하지만 단기적으로(몇 개월에서 2~3년까지) 악화되는 현상을 뜻한다. 경제 위기의 징후로 실업, 도산, 경제 성장률 하락이 있다. ▶ 경기 침체는 몇 십 년까지 지속될 수 있는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는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을 의미한다. 경기 침체기 때는 경제 성장률이 느려지거나 마이너스를 기록한다.


p.47

바칼로레아 대비

에세이(1/9)


주제 : 경제성장 그리고 경제성장이 20세기 후반에 자본주의 경제 선진국에 끼친 결과.


접근 방법

Ⓐ 주제를 읽고 이해하기

역사 에세이의 주제는 항상 다음의 요소를 포함시키고 있다 : - 기간 - 공간 - 하나 혹은 여러 가지의 테마


주제를 이해한다는 것은 : - 주제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한정되어 있는지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기간 = 20세기 후반, 즉 “1945년에서 20세기 말”이 된다. - 또한 관련된 공간, 지역을 알아내는 것이다 : 미국, 서유럽, 일본과 같은 자본주의 선진국. 주제는 제3국과 공산주의 국가들은 배제시킨다. - 주제에 제시된 용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경제성장이 무엇인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해서도 안 된다.

Ⓑ 에세이가 답해야할 큰 질문을 주제에서 끄집어내기

● 이 질문은 주제에 제시된 모든 요소를 포함시켜야 하며 그 외의 테마를 포함시켜선 안 된다 (예 : 제 3국에 끼친 결과). 즉 이 과정은 주제가 던지는 문제에 답할 수 있는 질문을 도출해 내는 것이다.

● 간혹 에세이의 주제가 처음부터 질문 형태로 제시되는 경우가 있다 (예 : “1945년에서 2000년 사이, 경제성장은 발전의 요인이었는가?”). 이런 경우엔 이 형태를 그대로 가져오면 된다.

●질문은 바로 제시되기 보다는 여기서처럼 암시하는 형태로 제시되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 주제를 질문형태로 바꿔야한다. 예 : - 경제성장은 1945년 이래 어떤 식으로 변동했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아니면 - 선진국의 경제성장 변동의 결과는 경제와 사회 발전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는가?

Ⓒ 알고 있는 지식 동원하기

● 풀어나가야 할 주요 포인트 집계 조사하고 연대 좌표 파악하기. 선생님의 수업내용과 교과서의 단원, 복습 페이지, 개인 독서로부터 관련된 정보 가져오기.

● 위에 제안된 주제는 2단원의 2개 부문을 포함시키고 있다: - 우선 폭발적인 경제성장의 시기인 “영광의 30년”, 1945년부터 1973년 석유파동까지(p.36-37). - 그다음 1973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보다 “둔해진” 경제 성장 시기이자 경제 위기, 침체기라고도 부르는 시기(p.38-39). 개인의 독서로 습득한 지식도 사용할 수 있어야한다 : 경제상경 계열의 학생이라면 영광의 30년에 관한 쟝 푸라스티에의 저서 한 권쯤은 읽어둬야 한다.

Ⓓ 동원된 지식 분류하고 목차 구성하기

● 이 주제 같은 경우 에세이의 목차를 구성하는 일은 교과서의 목차를 따라서 하면 되기 때문에 간편하다: 1. “영광의 30년”간의 폭발적인 경제성장

2. 석유 파동 이후 경기 침체와 더뎌지긴 하였으나 여전히 진행되는 경제성장

3. 결과 : 소비 사회와 완전 고용은 폭발적인 경제성장 시대의 대표적 현상. 성장이 둔화되면서 실업의 발생...

모의 바칼로레아

똑같은 작업을 다른 주제로 해보기. 주제 : 1945년에서 1974년까지의 경제성장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경제 사회 발전의 주요 요인이었는가?


p.48


자료집 연구(2/17)

주제 : 세계화는 번영의 주요인인가?


질문

파트 1

1. 자료 1이 제시하는 세 가지 타입의 정보들이 상호 보충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어라.

2. 1973년은 어떤 의미에서 전환점이 되는가(자료 2)? 5개 선진국의 국내총생산의 변화에 주목할 만 한 점은 무엇인가? 베네수엘라, 나이지리아, 그리고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국민총생산 변화에서는?

3. 자료 3이 묘사하는 세계화의 여러 가지 면모는 무엇인가?

4. 자료 4와 자료 5에 따르면, 세계화는 개발도상국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하는가? 텍스트에서 제시하는 예외에 다른 예시를 들어보아라.

5. 자료 1, 2, 4는 세계화에 있어 미국의 어떤 역할에 대해 얘기해 주는가?

파트 2

질문에 대한 답변, 자료에서 가져온 정보와 기존의 지식을 토대로 지원자는 다음 질문에 대해 구성된 답변을 약술하라 : 세계화는 번영의 주요인인가?


1. 2007년 세계의 인터넷 사용자

2. 20세게 후반 국내총생산의 변화

3. 일상생활에서의 세계화

각종 수치와 숫자이기 이전에 경제 세계화는 우선 콜롬비아에서 배로 수입되어 서독에서 용기에 담기고 슈퍼마켓 체인점 등을 통해 유통되는 과정을 거친 후 내가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이다. 세계화는 사우디아라비아나 북해에서 파이프라인 혹은 유조선을 통해 국내에 오는 석유이기도 하며 이탈리아에서 생산된 신발들이기도 하다. 내 식탁에, 내 접시 위에 혹은 내 몸으로 당도하기 전 내가 사용하고 소비하는 주요 제품들은 아시아 노동자들의 손과 아프리카의 하역인부들을 거쳐 수 천 킬로미터를 지나 왔다. 나는 이들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할 것이고 그들도 나를 영원히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지불한 돈의 보잘 것 없는 일부는 그들의 가족을 먹여 살리는데 쓰일 것이다. 세계화된 경제란 바로 원자재, 공산품, 자본, 그리고 투자하고, 생산하고, 사고팔고, 운반하고 소비하는 남자들과 여자들로 얽혀 해체될 수 없는 이 그물망이다. 재화와 자본 이외에도 세계화된 경제는 세계 각지로 여행하는 이미지(텔레비전에 나오는 미국 드라마), 세계 각국으로 퍼지는 소비 행태(코카콜라 혹은 중국 요리), 돌고 도는 인적 자본과 아이디어들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경제의 세계화는 그 다음에서야 언론에 의해 커피의 국제 시세, 환율, 국제 수지 등과 같은 각종 지수로 탈바꿈한다.

p.49

4. 무역 아니면 건강?

새로 도입된 장치(무역과 관련된 지식 재산권 존중을 보장하기 위해 2003년 9월 WTO의 일환으로 체결된 조약들)의 복합성 뒤에는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숨어있다. 바로 제약 산업의 영향을 받은 일부 몇몇 국가들이 일반의약품 사용을 제한하려는 의도이다. 위협과 압박이 최고조에 이른 시대다 [...]. 유럽과 프랑스는 이것에 대한 큰 책임이 있다. 미국과 산업가들이 그들의 의도를 시행할 수 있게 내버려 둔 책임, 다른 국가들과 담합하여 개발도상국의 건강 분야에 각종 제제(정작 그들은 지식재산 조약으로 면제받은)를 부과한 책임이 그것이다. 2001년 11월 도하에서는 상업적 이익이 공공 건강 이익보다 앞서는 일은 없어야 된다는 발표문이 WTO의 모든 회원국로부터 승인받았다. 오늘날 WTO는 몇몇 다국적 기업의 경제 이익이 다른 국민들의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수 백 만 명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미국의 산하에 있는 WTO는 공정한 거래의 틀을 만들 수 없는 무능력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WTO는 국민들을 무시한 채 차별적인 규정을 강요하고 있다. Act Up Paris, “WTO의 일반 의약품 관련 조약 : 특허에 의한 죽음”, 2003년 9월. Act Up은 에이즈에 감염된 국민을 보호하는 단체이다.

5. 중국 선전의 한 장난감 공장. 공방에서....숙소에서.


접근 방법


Ⓐ 전체적인 도움말 : 비판적으로 텍스트 분석하기

신문 기사들은 팩트를 주관적인 관점에서 제시할 가능성이 있다. 독자를 설득하려는 단체를 소개하는 자료 4가 특히 이러한 케이스에 해당할 수 있다. 즉 이러한 종류의 글은 과장을 할 수 있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텍스트를 접할 때엔 이전에 습득한 지식을 활용하여 개인적인 견해를 주장할 수도 있는 글을 비판저긴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 파트 1에 제시된 질문에 대한 답변에 관한 도움말

질문 1 : 자료는 3가지 형태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 전반적인 정보 : 세계 ● 조금 더 세밀한 정보 : 나라별 순위 ● 인구를 고려한 더 예리한 분석 : 중국이 2위에서 마지막 순위로 밀려난다.

질문 2 : 처음 봤을 때 이 도표는 의외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광의 30년”을 그 뒤에 오는 경기 침체와 대조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 1973년 이후에도 선진국의 경제 성장은 계속된다. - 석유생산국(베네수엘라, 사우디아라비아, 나이지리아)의 국민총생산은 1973년 이후 줄어든다.

질문 4 : 다른 예시를 어디서 찾을까?

● 텍스트는 몇몇 예시들을 암시하고 있다. 그걸 찾아야 한다.

● 습득한 지식의 도움을 받자.

질문 5 : 예를 들어 자료 1은 미국의 우위를 보여주고, 자료 2는 코카콜라를 인용한다.


Ⓒ 파트 2에 제시된 질문 답변에 관한 도움말


제시된 질문에는 대조되는 두 개의 파트로 이루어진 목차를 구성할 수 있다 :

● 세계화는 번영의 주요인이다

● 세계화가 번영의 주요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자료집은 사실 세계화에서 비롯된 번영에 관한 근거를 제시함과 동시에 그것의 상대성을 보여준다. 여기에 따른 찬반논리를 펼칠 수 있다.



제 3 장 : 정보통신 사회

1945년 이후 각 나라의 사회와 문화에는 큰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신기술이 세계 곳곳으로 퍼지면서 지구를 변화시켰다. 몇몇 사상가들은 지구가 정보통신의 역할이 두드러진 “글로벌 빌리지(지구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개개인 사이의 거리를 없애고 문화 자체를 세계화 시키면서 정보통신은 모든 사회에서 새로운 형태의 행동을 낳았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본질적인 요인은 무엇일까? 이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문화적 관습은 어떻게 행하여지고 있나?

1. 정보통신의 남용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는 사진기자들, 제 59회 칸느 국제영화제, 2006년 5월 17일. 칸느 국제영화제는 세계에서 미디어가 가장 많이 다루는 행사 중 하나이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약 4,500명의 기자들과 300명의 사진기자들은 1000여개의 신문사, 300개의 방송사, 200개의 통신사, 150개의 라디오 방송사를 대표하여 이 자리에 참석한다.


2. ...정보통신의 접근성 확대까지

사하라에서, 21세기 초반. “휴대폰, 노트북과 같은 무선 기술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이미 일상화 되었다. 이 현상은 정보화 된 도시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정보통신 인프라가 발달되지 못한 지역(농촌지역, 개발도상국)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무선 네트워크 덕분에 하드 인프라 구축에 드는 비용을 절약하면서 많은 나라의 국민들이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S. 프루, S. 쿠튀르, <2007년 세계 현황>에서, 라 데쿠베르트 출판사.

p.51

1. 20세기 후반의 문화 혁명

A. 시청각 기술의 혁명 자료 1

1945년부터 메스 커뮤니케이션의 장비에 있어서 기술 발전이 가속화 되었다. 기존의 라디오에 새로운 미디어가 출현한다. 바로 텔레비전이다. 1950년대 북아메리카, 그리고 서유럽에서는 텔레비전을 보유한 가구가 늘어난다. 1970년대부터 이 미디어들은 국경을 초월하여 송신을 가능하게 하는 위성 원거리 통신 발달의 혜택을 받는다. 전쟁이 끝나던 시기에 발명된 컴퓨터는 점점 작아지기 시작해 1980년대 초에는 사무실과 가정에 놓이게 된다. 1980-90년대에는 또 다른 정보통신 혁명이 멀티미디어의 재림을 알린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고, CD롬에 모든 데이터를 저장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멀티미디어는 기존에 ᄄᆞ로따로 취급되던 텍스트, 이미지, 사운드를 통합시켜 관리할 수 있게 해준다. 인터넷은 이 혁명을 대규모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한다. 1992년도부터 “지구망”(웹)이 구축되면서 개인에게도 개방된 인터넷 네트워크는 정보통신 세계를 완전히 변화시키고 세계화를 이끌어나가는 가장 큰 매체가 된다.

B. 지식, 여가시간, 높아진 임금 자료 2, 3, 4

“모든 이는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원칙은 1948년 UN이 도입한 세계인권선언에 기록되어 있다. 교육을 받을 권리는 세계적인 추세가 되었고 중고등 교육은 실제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전반적으로 젊은이의 교육 수준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은 더욱 권리를 주장하는 세대가 되었다. 특히 공산권 국가들에서는 젊은이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 많았다 : 1968년 프라하에서, 1989년 베이징의 천안문 사태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언론 매체(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아니면 인터넷)은 지식의 증대에 큰 역할을 한다. 텔레비전은 50년 사이 인류 대부분의 가정을 엄습한 보편적인 물건이 되었다. 케이블 채널과 위성 채널로 매우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청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21세기 초, 세계로 전파되는 텔레비전 방송의 80%가 미국에서 제작된 것이다. “영광의 30”년간 지속된 완전 고용과, 복지국가의 역할, 국제 분업 등에 힘입어 세계 많은 인구의 임금은 빈곤국과 부국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있음에도 전체적으로 향상되었다. 노동자는 과잉 해고로부터 보호 또는 노동 시간 제한 등과 같은 권리를 인정받는다.

C. 모든 이가 이 발전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는가? 자료 5, 6

지식과 라이프 스타일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도 인류의 다수는 이 행렬에 동참하지 못한다. 이 행렬에서 배제된 첫 번째 이유는 바로 빈곤이다. 세계 인구의 절반이 하루에 2유로로 생활한다. “남쪽” 나라에 주로 집중된 이 빈곤은 선진국에도 아예 없지는 않다. 선진국 인구의 4~8%가 빈곤층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다른 이유는 빈곤의 결과 중 하나인데 바로 교육권이다. 1990년, 15세 이상의 문맹인 사람이 9억 명이나 된다, 이중에 여성이 매우 많다. 2008년 인도 인구의 절반이 여전히 읽거나 쓰지 못한다. 교육의 부제로 인한 문맹률이 낮은 선진국의 경우에도 읽거나 쓰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미국, 프랑스에서는 교육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문맹인 17세 이상 인구의 비율이 10%에서 13%나 된다. 그럼에도 다른 종류의 발전이 가져다주는 혜택을 보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진다. 예를 들어 계속 가격이 낮아지는 컴퓨터로 인도와 중국의 통신 연결수가 빠르게 증가하였다.

용어

아날로그 : 예를 들어 소리와 같은 물리적인 현상을 전자 시그널로 나타내는 방식

디지털 : 문자(일반적으로 숫자)를 통해 데이터, 정보를 나타내는 방식

시디롬 : Compact disc Read Only Memory. 롬은 전원이 없어도 내용이 지워지지 않는 메모리를 뜻한다. 시디롬은 컴퓨터로 읽을 수 있는 대량의 결합된 텍스트, 이미지, 음향을 저장할 수 있다.

문맹 : p.62 “헷갈리지 말 것” 참고하기.

문자해독능력 부재 : p.62 “헷갈리지 말 것” 참고하기.


1. 세계 몇몇 국가에서의 텔레비전 대수

Tv.png

2. 텔레비전과 철의 장막

헤르츠 주파수에 저항하는 장벽은 없다. 동독인들은 매일 저녁 서독의 텔레비전 뉴스를 보곤 하였고 헝가리 인들도 오스트리아의 방송시간에 일상생활이 맞춰져 있었다. 동쪽의 모든 민족들은 서방의 막강한 라디오 주파수를 잡아댄다. 위성 기술이 그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떻게 보면 1989년은 텔레비전의 한 해라고 할 수 있다. CNN이 천안문 사태를 중계방송 한 뒤로 루마니아 인들도 텔레비전의 역할이 자기네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그들의 반란을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부크레쉬티의 방송 스튜디오를 장악하여 생방송으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 생방송이 루마니아 혁명을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9년은 텔레비전이 더해진 1848년이었다. 세르쥬 줄리, <리베라시옹>, 1990년 1월 2일

1. 저자는 텔레비전과 라디오에 어떤 역할을 부여하는가?

2. 마지막 문장을 설명하여라.


p.53

3. 2007년 세계 인터넷 이용자 현황

4. 카콘다 학교, 앙골라, 1996년

5. 중산층의 성장

1. 가장 큰 중산층의 성장을 보이는 지역은 어디인가?

2. 가장 미미한 성장을 기록한 지역은?

6. 세계로 연결됨

모든 네티즌들은 복잡한 케이블이나 전기코드에 방해받지 않고 어딜 가든 인터넷에 연결될 수 있는 걸 바란다. 이 꿈이 코모르(헝가리)에서 현실이 되었다. 그곳에 사는 집시들은 와이 파이 네트워크에 무료로 접속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컴퓨터도 매우 보잘 것 없는 가격(80 유로)에 살 수 있다. 이 마을에서는 한 개인 주택이 Rom Som(“나는 집시다”)이라는 단체의 지원을 받아 문호를 개방했다. 집시 아이들은 인터넷과 친해지기 위해 집을 방문하고 그들의 부모들은 인터넷 덕분에 원거리 교육 혜택을 받을 수 있다 [...] 토모르의 주민들은 Rom Som 덕분에 4개월 무이자 할부로 컴퓨터를 살 수 있다. 우리가 토모르를 거쳤을 때 기술자들이 마을 전방 2km 안팎을 커버해야하는 와이파이 안테나의 사정거리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것을 설치하기 위해 빨래 건조대의 일부를 사용했다. 헤티 빌라가즈다색, <주간 세계 경제>, 부다페스트, 2007년 7월 5일


p.54

2. 새로운 생활 방식

A. 더 도시적이고, 더 유동적이며, 더 노후화된 생활 자료 2, 3, 4

1950년에 세계 인구 중 28%가 도시인이었다면 2000년에는 50%에 육박한다. 30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근대화의 온상인 도시에 산다는 것이다. 이 엄청난 증가는 이농 현상과도 관계가 있지만 특히 인구 증가율과 관계가 깊다. 도시 주변에는 교외 지역이 발전을 하는데 그중 몇몇은, 특히 제3국에서는, 통행, 오염, 치안 등의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1960년에는 7천 만 명의 사람들이 이주를 했다면, 이 숫자는 2000년에 들어 세 배로 증가하였다. 이주의 대부분이 우선 남국(南國)들 사이에서 이루어지지만 미국은 그래도 가장 많은 이민자들을 받는 나라이다. 유럽도 오늘날 유럽인들의 높은 생활수준에 이끌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드는 이민자들로 북적인다. 복지가 향상되고, 교육, 피임 등이 늘어나면서 출산율이 낮아졌다. 대부분의 남국에서는 평균 출산율이 1950년 여성 1명당 6자녀에서 2005년 3자녀로 줄었다. 각지에서 위생보건 여건이 좋아지면서 사망률도 줄었다. 1950년에 60세 이상의 노인들은 총 2억 명이었고 2050년에는 총 20억 명일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이런 인구 노후화 현상은 은퇴 자금 지원 및 건강 보험 시스템과 같은 다양한 고민거리를 낳고 있다.

B. 획일화 된 생활 스타일 자료 1

경제성장은

C. 자유, 평등, 신앙 자료 5

1960년대에 들어 서양에는 진정한 풍습의 혁명이 일어난다. 미국에서 나타난 히피 운동은 이후 유럽으로 전파된다. 이 젊은 청년들은 물질주의와 순응주의가 만연한 소비 사회를 비판하고 더 진보적인 자유를 요구하면서 “성의 혁명”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자유로운 동거와 혼외정사는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아니다. 같은 기간에 페미니즘 운동도 탄생하였다. 양성 평등을 주장하는 여성들이다. 서양 국가에서는 여자아이들의 교육권이 확실히 보장된 것이 사실이이다. 그러나 경제, 정치 분야에서는 평등함이 공포되었을지라도 현실을 그렇지 않다. 아직까지 여러 나라의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늘 갖지는 못한다. 특히 남녀가 엄격히 구분된 이슬람 국가의 경우 더더욱 그렇다. 서양세계는 20세기 중반부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줄고 전통적인 종교활동을 하는 이들도 감소했다. 그러나 물질만능주의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종교는 이곳저곳에서 다시 활기를 되찾고 있다. 주요 종교 이외의 사이비 종교와 비이성적인 신앙도 활개를 친다. 나아가 동유럽에서는 공산당이 무너진 이후 기독교가 다시 부활하는 추세이고, 이슬람 국가들에선 그들 정체성과도 같은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소수의 극단세력이 수를 늘려가고 있다.


용어

히피족 : 1960-70년대에 소비사회의 사회적, 문화적 가치를 거부하는 사람을 뜻한다.

1. 21세기의 관광 : 단체관광객 또는 디즈니랜드화 된 관광객?

점점 더 많은 관광객들이 이제부터는 “다르게” 여행하고 싶어 한다. 어떤 것을 기준으로 다르게란 말인가? 바로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관광객, 즉 쾌적한 버스로 이동하면서 썬텐을 하는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이 갖춰진 시멘트가 발라진 해변으로 몰려드는 단체관광객, 바로 <루타르 가이드북>이 비꼬았던 유형에 관광객으로부터 멀어지고 싶다는 얘기다. 오늘날의 관광객은 “자신의 여행을 살고 싶어 한다”-...] 공급처를 늘리기 위해 새로운 제품을 끊임없이 개발하는 농식품 산업처럼 관광 산업도 관광객에게 가격이 매겨진 꿈의 한 조각을 선사하기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컨셉을 개발하고 틈새시장을 공략한다. 그렇게 “모험” 코너는 관광객을 그의 선택에 따라서 카우보이(미국), 금광 채굴자(호주) 아니면 잔해물 탐사가(필리핀)로 만들어준다. 이는 곧 관광객의 어렸을 적 꿈을 실현시켜주는 일이다. 이 모든 여행들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가격이 비싸 돈이 많은 특정 엘리트 계급에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한 가지는 물질적으로 너무나 풍족해진 서양인에게 환상을 선물하고, 돌아가면서 인류학자, 타잔, 로빈슨의 역할을 체험하게 해주는 일종의 역할극에 그를 빠뜨려 그를 아이로 전락시켜버린다는 점이다.

실비 브뤼넬, “관광업이 지구를 디즈니랜드화 할 때”, <인문학>, 2006년


1. 두 가지 관광 형태의 어떤 특징들이 묘사되어 있는가?

2. 저자는 이것에 대해 어떻게 비판하는가?


p.55

2. 세계 인구

3. 1972년 콘크가 본 생활 방식의 획일화

4. 2005년 세계 이주 현황

5. 사회학자가 본 1968년 학생 봉기 사태

회오리바람과도 같은 이 학생시위의 진원지는 매우 큰 곳도 있고 작은 곳도 있다. 어마어마한 쪽을 보면, 바로 1968년 초부터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미국과 같은 나라들을 강타한 국제적 대규모 학생 봉기이다. 작은 쪽을 보면, 자신들이 발단시킨 시위가 연속적으로 퍼져나가면서 그 규모가 점점 커져 마침내 경이로운 학생 코뮌이 돼버린 소규모의 혁명 분자들이다. 현재의 위기를 이해하려하는 두 가지 종류의 해석이 존재한다. 첫 번째 해석은 문제의 원인을 공공 행정기관과 대학교에서 찾는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학교의 수업이 따라오지 못하고, 취업과 효용성 면에서 대학교육이 제대로 준비를 시켜주지 못하면서 대학생들의 불신과 불만이 커져가고 있던 것이다. 대학교는 즉 현실의 삶과 근대 세계에 동떨어져있으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대학교를 여기에 적응키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즉 오래된 관습을 청산하고, 교원, 시설, 건물 등을 확대하고 수업방식을 갱신하여 학생들에게 건강하고 자유분방하고(사회 풍습의 변화에 맞추기 위해) 열린 캠퍼스를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취업을 보장해 주는 대학교를 만드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이와는 반대로 비열하고, 인색하고, 규율에 얽매이고 남을 짓누르는 부르주아적 삶에 대한 대학생들의 거부에 초점을 맞춘다. 더 이상 커리어를 추구하는 게 아닌, 자신들을 기다리는 관료의 삶을 멸시하고, 어른 세계에 최대한 빨리 진입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른 사회 자체에 반기를 드는 대학생들의 새로운 이상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격렬한 시위 본부가 있었던 버클리 대학교나 컬럼비아 대학교처럼 근대에 발맞췄던 유명 대학교들을 높이 평가한다.

에드가 모랭, “학생 코뮌”, E. 모랭, C. 르포르, J-M. 쿠드레, 1968년 5월 : 갈라짐. 사건에 대한 첫 번째 연구> 중, 파야르 출판사, 1968년'

1. “학생 코뮌”은 어떤 사건을 생각나게 하는가? 2. 학생 봉기가 일어난 나라들은 어디인가? 3. 이 반란의 첫 번째 해석에 대해 소개하고, 이것이 제안하는 대책에 대해 설명하라. 4. 이 반란의 두 번째 해석에 대해 소개하고, 이것이 제안하는 대책에 대해 설명하라.


p.56 종교의 귀환

“21세기는 종교적이거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말로의 남겼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 이 격언이 확인되는 듯하다. 발전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매장당하거나 잊혀 지기는커녕 종교는 계속해서 살아있다. 근대화 속에 세계적으로 불안정성이 확대되고,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공허한 메시지와 세속적인 가치는 많은 이들을 혼란에 빠졌고, 이들은 자신들의 근심을 해소해줄 수 있는 대안을 신적인 존재에서 찾는다.

1. 종교의 귀환에 관한 생각

19세기부터 과학이 미신을 대체하고, 기술이 마술을 짓밟고, 의학이 기도의 권위를 땅바닥으로 떨어뜨릴 것이라고 모두가 생각했다. 모든 것들이 종교를 비난하는 듯 했다. [...] 그러나 적어도 30년 전부터 사회학자들은 그들이 착각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모든 형태의 종교가 세계적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 이를 증명한다. 이슬람이 잠에서 깨어나고, 전 세계에 개신교 순복음교가 확산되고, 동유럽에선 기독교가 다시 활기를 찾는데다 중국에서도 종교가 다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곳곳에서 사이비 종교와 새로운 종교운동이 생겨나고 있다. 곳곳에서 종교지도자, 예언자, 목사 등이 튀어나오고 있다. [...] 마르크시스트와 국수주의자들의 실패 이후 이슬람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가장 눈에 띄는 이슬람의 구성원은 바로 이슬람을 정치적인 종교로 보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다.[...] 종교가 근대 사회에서 이렇게 놀라운 보존, 적응능력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종교가 과거의 고리타분한 관습 따위로 여겨질 수 없다는 것이다. 철학자 미셸 옹프레가 저서 <무신론 협약>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종교는 단순히 “믿어야 할 필요성” 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시켜주는 일시적인 대안에 국한될 수 없다. 많은 연구에서 밝혀졌든 종교는 죽음을 견디는 것보다 삶에 맞서 나가는 데 더 도움이 된다.

쟝 프랑수아 도르티에, 로랑 테스토, <인문학> 160호, 2005년 5월

2. 마케팅이란 명분으로

반세기 조금 넘는 시간 안에 브라질의 복음주의자들의 숫자는 총인구의 3%에서 15%로 증가했다. 오늘날 그들은 약 2천 5백 만 명이다. 근 몇 년 동안 그들은 새롭고 매우 효과적인 전도 모델을 도입했다. “세포 교회”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인 복음주의는 신앙의 프렌차이즈 식으로 운영되고, 마케팅 기법을 사용한다. 12명이 한 세포 당 12명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신자 수를 계속해서 늘려나가는 방식으로 시스템이 운영된다. 각 세포는 새로운 세포를 만들기 위해 충분한 수의 신자를 끌어들여야 한다. 마르첼로 카르멜로, <베하>, 2004년 9월 29일

3. 세계의 종교 현황


4. 기독교의 대조적인 두 가지 모습

5. “상대주의의 독재”에 반(反)하여

지난 몇 십년간 얼마나 많은 교리의 바람이, 얼마나 많은 이데올로기와 사상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갔는가...작은 배에 비교할 수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생각은 이러한 파도에 의해 수도 없이 극과 극 사이에서 이리저리 휩쓸렸다 : 마르크시즘에서 자유주의, 나아가 자유분방주의 사이에서 그랬고, 집단주의에서 철저한 개인주의 사이에서, 무신론과 애매모호한 종교적 신비주의 사이에서, 불가지론에서 제설 혼합주의 사이에서도 그래왔다. 날마다 새로운 사이비 종교가 탄생하고 있고 바오로 성인이 말했던 인간의 거만함과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하는 속임수들이 판을 치고 있다. 교회의 사도신경에 따른 확실하고 명확한 신앙을 갖고 있는 게 흔히 극단주의로 정의된다. 반면, 상대주의, 즉 “모든 교리의 바람”에 몸을 맡기는 일이 현 시대에 걸 맞는 태도로 여겨지고 있다. 이렇게 최후의 기준점이 돼버린 개인의 자아와 욕망 외에는 아무것도 확실하다고 단정 짓지 않는 상대주의의 독재가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기준점이 있지 않은가. 바로 진정한 인간인 하느님의 아들이다. 바로 그가 진정한 휴머니즘의 기준이다. 성숙한 “어른” 신앙은 새로운 사고의 유행을 따르지 않는다. 성숙한 신앙이란 그리스도와의 우정 깊은 곳에서 싹트는 그런 신앙이다. [...] 바로 이와 같은 신앙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양떼를 인도해야 한다. 라칭거 추기경의 미사 강론, 2005년, 베네딕토 16세란 명칭의 교황으로 선발되기 전날. 출처 : www.vatican.va

6. 인도에서, 카스트 하층민에 속하는 힌두교도들이 카스트 제도를 탈피하기 위해 불교로 개종하는 모습


질문

A. 자료들로부터 정보 추출하기

1. 세계의 주요 종교권의 위치를 파악 하여라(자료 3).

2. 신심의 귀환엔 어떠한 원인이 있는가(자료 1)?

3. 복음주의 교회는 신자를 어떤 방식으로 모으는가(자료 2)?

4. 여기서 소개된 기독교에는 어떠한 다양한 모습들이 있는가(자료 4)?

5. 라칭거 추기경이 비판하는 믿음의 상대주의에 대해 설명하라(자료 5).

B. 자료 연관짓기

6. 신심의 귀환에는 어떤 다양한 면모가 있는가(자료 1, 4, 5, 6)?

C. 논술

이 자료집에 제시된 다양한 자료로부터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다음 질문에 답하는 문단 한 개를 작성하라 :오늘날 세계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p.58


3. 세계적인 문화?

A. 어떤 문화 행위가 발달했을까? 자료 1, 2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대중문화가 반세기 사이 눈에 띄게 발전하였다. 음악분야에서는 앵글로 색슨 문화의 영향력이 커졌다. 1954년,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탄생한 록앤롤은 진정한 혁명으로 비춰졌다, 왜냐하면 이 음악은 기존에 뿌리내린 사회적 통념과 관습에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록앤롤은 다수의 젊은 청년을 매료시켰다. 그 밖에도 재즈, 블루스 등에서 영감을 얻은 새로운 음악 트렌드는 음악과 춤을 점점 혼합시킨다. 소울 뮤직, 레게, 디스코, 랩, 테크노 등등이 그 예이다. 콘서트를 통해 전파되고, 1980년대부터는 CD로 전파되는 이 음악들은 21세기 초 인터넷 상에서 가장 많이 불법유출 되거나 불법 다운로드 되었다. 1950년에 들어 헐리우드의 슈퍼프로덕션이 영화계를 점령한다. 또한 저자 영화(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 프랑스의 누벨 바그)와 비 서양인 감독(일본, 또는 이란 등)이 제작하는 영화도 떠오른다. 전후 문학의 특징은 전쟁의 허무함과 전쟁이 남긴 폐허 앞의 환멸, 그리고 정치적인 신념을 나타내는 등의 특징이 관찰된다. 포켓 사이즈의 책이 나오면서 책은 가장 광범위하게 보급화 된 문화 상품이 되었지만 다른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다른 매체와 점점 경쟁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B. 미국화와 문화변용 자료 3, 4

1960년대 초, 이러한 다양한 문화의 조합을 두고 캐나다 사회학자인 맥 루한은 “지구촌”이란 표현을 처음 쓰게 됐다. 중심점인 미국이 지배하는 지구촌은 언어(영어), 전 세계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TV 드라마, 음악, 패션코드(청바지), 식문화(맥도날드, 코카콜라) 뿐만 아니라 더 공정하고 민주적인 사회관까지 전파한다. 몇 몇 개의 다국적 미디어 기업들은 경제를 넘어 문화까지 이윤창출이란 명목 하에 일정한 형식 안에 가두고, 지식과 정보 접근성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사실 “문화의 미국화”라는 명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실제로 텍사스의 농부와, 브라질 청년 혹은 파리의 지성인 3명 모두 청바지를 입고, “맥도날드”에서 먹고, “헐리우드 표” 영화를 보면서도 그들의 관심사와 문화적 지향성은 다른 부분에서 완전히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이러한 문화의 세계화를 말하려면 문화변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게 더 적절하다.

C. 예외에서 문화적 다양성까지 자료 5, 6

세계화에 맞서 저항세력이 들고 일어난다. 지식인들은 사고의 획일화로 인한 문화적 퇴보를 비판한다. 유럽연합의 국가들처럼 몇몇 국가들은 문화가 단순한 상업적 생산물로 인식되는 것을 거부하며 1996년 문화적 예외 원칙을 내세웠다. 이 원칙은 쿼터제와 지원 제도를 통해 특정한 문화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슬람 문화권 내에서도 서양 문화와 생활양식에 대한 강한 반감이 표출된다. 이러한 반감은 1979년 미국 문화 모델이 비난을 받았던 이란혁명 당시 이미 눈에 띄었다. 재화 혹은 문화 분야에서 몇몇의 단체들은 국경을 넘어서까지 단체원들을 모집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획일화된 세계 시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이 “반세계주의 운동가”들은 가끔씩 선진국들의 정상회의가 열릴 때 다양성을 존중하고 가장 가난한 나라에도 기회를 주는 것을 주장하며 구석에서 시위를 벌인다. 이 긴장관계에 대해 인지한 유네스코측은 2007년 문화적 다양석의 원칙을 발표한다. 이 원칙은 문화유산을 생물다양성과 같은 선상에서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용어

문화변용 :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의 가치를 모두 혹은 부분적으로 채택하여 문화에 변동이 일어나는 현상.


1. 세계에서, 그리고 프랑스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운동선수들(2005년, 유로화 기준)

2. 세계적으로 흥행 수입이 가장 높았던 영화들

Cine.png


p.59

3. 세계화의 역설

일본은 지난 몇 년 전부터 자신의 문화와 전통에 더욱 신경 쓰게 되었다. 그 반면에 일본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맥월드(“맥도날드”와 세계를 뜻하는 영어 단어 “월드”의 합성어)가 생산해내는 재화를 누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데 말이다. 1992년 손님을 가장 많이 받은 식당은 맥도날드였고 그 뒤를 KFC가 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유로디즈니랜드가 파리 근교에 만들어질 당시 잦아지던 “프랑글레”(프랑스어와 영어의 합성어)의 사용을 지적했다. 미국 영화의 확산에 맞서 프랑스 영화산업을 지키던 그였음에도 미국 영화배우 실베스터 스텔론에게 문학과 예술상을 수여했다(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쟈크 랑이 1990년 수여함). 인도에서도 이러한 모순을 찾아볼 수 있다. 봄베이 외곽에는 아직도 빈곤의 늪에서 해어 나오지 못하는 마을들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많이 알려진 바와 같이 신생아가 원하지 않던 여아일 경우 아기를 서슴없이 죽이는 행위가 자해지고 있다. 바로 이 마을 옆에 위치한 신도시에서는 힌디어, 타밀어, 마라티어를 구사하는 프로그래머들이 스위스항공, ATT 및 인건비를 줄이고자 하는 기타 다국적기업을 위한 프로그램을 작성하고 있다. B.R. 바버, 미국 정치학자, <지하드 VS 맥월드>, 1996년.

4. 네팔의 문화변용

1. 미국화는 어떤 요소들을 통해 볼 수 있는가?

2. 현지인들에게 미국화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5. 문화의 다양성

이 협정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을 보호하고 증진시키는 것. 다양한 문화가 꽃피고, 서로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면서 더욱 그 가치가 충실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 상대방의 문화를 존중하고, 평화의 문화를 수호하려는 분위기 안에서 세계 여러 나라 문화 간의 대화가 더욱 깊어지고 균형 잡힐 수 있도록 적극 장려하는 것 [...].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을 본국에서만큼은 수호하고 증진시키는 데 적합한 정책을 보존하고, 도입하고, 만들 수 있는 국가들의 주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 유네스코가 2005년 10월 20일 도입한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 및 증진을 위한 협약.

6. “위기에 처한 세계 문화” 이전 시대의 전통을 배척하고나 홀대하는 일, 기본원칙이라고 여겨졌던 것에 대한 기본적인 반감 등과 같이 역사가 바뀔 때마다 이 위험하고도 반문화적인 현상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 현상은 예전에 “미래주의”로 얼룩진 깃발과 그것을 자축하는 트럼펫 소리와 함께 불쑥 나타났었다. 오늘날 우리는 “탈근대주의(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 20세기에 들어서 가혹하고 씁쓸한 운명은 공산주의 치하에 있던 곳들이 맞이하게 됐지만, 이 현상은 사실 더 광범위했다. 정신적으로 병들어있었던 20세기가 이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탈근대주의가 야기한 혼란은 물론 다른 원인도 있었지만, 비슷한 성격을 지닌 채 서구권을 강타했다. 문명의 혜택이 점점 커지고, 물질적 삶의 만족도는 나날이 올라가고 있는 이 와중에 안타깝게도 서구권의 가장 위엄 있는 도덕적 상징들도 그 가치가 점점 떨어지고, 빛을 잃었다.[...] 그렇다. 세계 문화는 오늘 위기에 처했고, 이 위기는 심각하다. 이미 수 십 년 전부터 문학, 음악, 미술, 조각 등에서는 인간의 정신과 예술성을 표현하는 가장 숭고한 작품을 창조하는 데 열중하는 게 아닌, 오히려 그것들을 “혁신”이라는 열광적이고 기만적인 가치관 하에 파괴해버리는 데 모든 걸 바치는, 더욱 좋아지기보다 쇠퇴하는 풍조가 만연하다. 공공기관 장식물로 너무나도 기괴한 것들이 미화되어 설치되고, 이러 것들은 더 이상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만약 외계인들이 주파수를 통해 우리별의 음악을 듣게 된다면, 더 이상 효력을 다해 버려진 바흐, 베토벤, 슈베르트가 지구인들 사이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우리 예술가들이 이러한 흐름에 순응해버리고, 지나간 세월이 남긴 위대한 전통과 그것을 성장시킨 정신적 근본에 더 이상 가치를 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구상 인간 혼의 매우 위험한 쇠퇴에 인류의 타락에 가담하는 꼴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지금보다 단계 낮은, 즉 동물성에 더 가까운 쪽으로 인류를 몰고 가버리게 될 것이다.

A. 솔예니친, <르 피가로>, 1993년 4월 5일

1. 저자와 이 글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라.

2. “세계 문화가 위기에 처해있다”고 생각하는 저자의 발언은 어떤 근거를 토대로 하는가?

3. 이 상황에 관련된 세계의 지역은 어디인가?

4. 저자는 문화계의 미래를 어떻게 예상하는가?

p.60

자료집


현대 미술

20세기 후반 현대 미술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건축, 미술, 조각에 이어 사진,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 탐사까지 현대 미술의 숨결이 미친다. 예술가들은 새로운 경지를 열고자 노력한다(해프닝, 설치미술 등). 예술파도 여러 가지로 세분화된다 : 폴록으로 대표되는 추상적 표현주의, 앤디 워홀 또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이끄는 팝아트, 랜드아트, 컨셉아트, 미니멀리즘 등...

용어

해프닝 :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직역할 수 있으며, 1960년대 비연극적, 탈연극적인 연극 형식으로 관객의 참여로 작품이 완성되는 게 특징이다.

설치 미술 : 전시된 장소와 미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선택된 잡다한 요소들로 구성된 현대 미술 작품. 예를 들어 땅 위에 직접 설치된 물건들이 설치 미술 중 하나다.


1. 질베르와 조르쥬의 라이브스(1984년) 벽에 거는 사진 작품 2.41 x 3.51 m

2. 예술가들의 말

나는 다른 전시회와는 다른 전시회를 열 것이다. 내 전시회는 차원이 다를 것이며 난잡하고 무질서 그 자체일 것이다. 그것은 예술도 예술 아닌 것도 아니고 예술이 아닌 예술일 것이다(원문대로). 현대 미술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식료품점 주인도, 정육점 주인도, 친구들도 모두 다 올 것이다. 벤, 니스에서 열린 자신의 전시회와 관련하여, 2001년 2월-5월

내 작업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나 자신의 자화상이며, 그것을 통한 내 개인적인 여행이기도 하고, 그 길을 가다가 발견한 재료들이기도 하다. 리샤르 롱, 랜드 아티스트, 이자벨 드 종 루쥬가 인용함, <현대 미술> 르 카발리에 블루, 2002년

3. 열 개의 캠벨 스프 캔, 앤디 워홀(1968년)

실스크린 인쇄 1.83 x 3.06 m 에피날 도립 전통 및 현대 미술관

p.61


4. 쟝 미셸 바스키아의 <줄루족의 왕>(1984)

칸티니 미술관. 뉴욕 빈민가 출신의 흑인 아티스트로 지하철과 뉴욕의 담벼락에 분노에 가득 찬 그래피티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뒤 언어와 이미지의 충돌이 인상적인 유화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마약 과용으로 28세에 사망하였다.

5. 빌 비올라의 <통로>(1987)

비디오 아트. 6.65m x 16.36m

6. 현대 미술을 정의할 수 있나?

현대 미술에 관해서 아무거나 다 말하거나 그와 완전히 반대되는 것도 말할 수 있다. 아무튼 우리는 모든 걸 다 들어왔다. 아무것도 이해할 것도 없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모든 움직임 속에 우리는 길을 잃을 뿐만 아니라, 현대 미술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도 하고, 엘리트의 전유물이라고도 하나다. 신념을 나타내는 예술, 정치적인 예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예술, 재미있고, 공격적이고, 못났고, 아름답고, 즐겁게 해주고, 심기를 건드리고, 지원을 받거나, 무료이거나, 투기적이거나, 그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는 장사꾼들과 큐레이터들의 세계에 속한 예술이기도하고, 관객과의 교감을 잃었으면서 관객으로부터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예술이다...현대 미술에 관한 열거는 끝이 없다. 이 모든 비판은 그들의 모순 속에서 정당성을 찾을 수도 있다. 즉 우리는 현대 미술을 특정한 양식이나 직인에 국한시킬 수 없다. 현대 미술은 천성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특성이기 때문에, 이미 굳어버린 상태에 제한될 수 없다. 현대 미술은 계속해서 변하고 현재 시제로 쓰여 진다. 현대 미술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고, 무엇이 남게 될지 모르며, 계속해서 나타나는 새로움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 필요한 거리가 충분치 않기에, 그들은 현대 미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길을 잃고 만다. 현대 미술은 이미 정해진 카테고리를 벗어나거나 그 한계점을 어긴다.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현대 미술가의 행위를 막을 수 있는 경계선은 어디에도 없다. 관객에겐 도움이 될 만한 어떠한 공간적, 시간적 지표도 없다. 모든 게 예술이 될 수는 있으나, 모든 조건에서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예술가이려면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해야 하며, 남들에게도 그렇게 생각돼야만 한다. 여기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조형예술 같은 경우 시각적이기만 하지 않은 문화의 틀에 속한다. 이 틀은 미술가도, 조각가도 아닌, 정확하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다양한 예술가들을 포함시킨다. 몇몇 작품은 아예 눈에 보이지 않기도 하고, 다른 작품들은 구두 혹은 서술된 문장의 형태로 존재한다...몇몇 예술가들은 뜬금없는 공간을 차지하기도 하고, 몇몇은 예술 활동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기술을 이용하여 작품을 창조하기도 한다...그리고 모든 예술가들은 작품과 관객 사이의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요구한다.

질문

A 자료로부터 정보 추출하기

1. 예술가 질레르와 조르쥬는 자신들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자료 1)?

2. 이 두 예술가들이 주장하는 게 무엇인가(자료 2)?

3. 이 작품을 그린 작가는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가(자료 4)?

4. 작가가 사용한 장치와 기술은 무엇인가(자료 5)?

5. 현대 미술 관객이 직면한 새로운 과제는 무엇인가(자료 6)?

B 약술

6. 자료들로부터 도출해낸 정보를 토대로 다음 질문에 답하는 문단을 작성하라 : 현대 미술은 어떤 변화를 거쳐 왔는가?


p.62

복습 페이지

하이라이트

1. 여러 가지 요인이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가져온다...

 □미디어와 디지털 분야에서의 기술 혁명
 □지식과 정보 접근성 완화
 □여가 시간 확대, 수입 증가

2. 이 변화들이 사회적 문화적 행동을 바꿔놓는다

 □도시인구 증가, 인구 이동 증가
 □인구 노령화
 □생활 방식은 획일화되고, 의식의 변화가 일어난다
 □음악, 스포츠,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의 일반화
 □절대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추구함과 동시에 보다 더 큰 자유와 평등을 요구함

3. 문화의 세계화

 □세계화는 다양하고 상방된 결과를 가져왔다.
 - 여러 인구 계층의 소외
 - 문화 변용의 심화
 - 문화적 공허함 호소
 - 문화 획일화에 맞서는 목소리가 높아짐

인물

앤디 워홀 (1928-1987) 미국 화가 (p.415 자세한 전기 참고하기)

로이 리히텐슈타인 (1923-1997) 미국 화가 (p.412 자세한 전기 참고하기)

베네딕토 16세 (요세프 라칭거 추기경, 1928), 2005년 4월 19일부로 교황 (p.408 자세한 전기 참고하기)

헷갈리지 말 것

1945년 이후 주요 예술 흐름

▶ 추상적 표현주의 : 1940년대 미국에서 나타난 화풍(잭슨 폴록이 대표적임). 작가의 행위 및 그가 사용한 도구의 흔적에 중점을 둔 것이 특징.

▶ 팝 아트(영어 Popular Art의 줄임말) : 1950년대 영국에서 나타난 예술로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진 이미지를 사용한 게 특징이다. 구상파의 귀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물건과 잡지, 광고, 만화 등에서 가져온 이미지들이 팝 아트 작품 구성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앤디 워홀 또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기계적이고 중복되는 복제 기법이 자주 사용된다.

▶ 컨셉 아트 : 1967년 처음 생긴 흐름. 아무런 작품도 만들어내지 않는 한이 있어도 컨셉 아티스트들은 무엇보다 이념, 예술의 전개, 개념에 중점을 둔다. 이브 클라인은 그렇게 공백의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 랜드 아트 : 풍경이 예술적 표현의 매체가 된다. 작가를 통해 풍경은 새로운 가치를 갖게된다 . ▶ 하이퍼리얼리즘 : 1980년대 미국에서 나타난 하이퍼리얼리즘에서는 화가가 사진과 비슷할 정도의 현실을 표현해 내는 것이 특징이다.

▶ 배드 페인팅(Bad painting) : 1978년에 처음 나타난 이 화풍은 고상한 컨셉 아트 주지주의를 비판한다.

문맹과 문자해독능력 부재

▶문맹 : 읽고 쓰는 것을 한 번도 배우지 못하는 일

▶문자해독능력 부재 : 읽고 쓰는 법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일 p.63

사료 설명하기(2/15)

주제 : “팝 아트”가 본 미국의 인테리어

자료 : 리처드 해밀턴, <Just what is it that makes our today’s homes so different, so appealing?>, 1956 (오늘날 우리 홈 인테리어를 다르게 하고, 매력적이게 하는 게 대체 무엇일까?). 콜라주, 26 x 25 cm, 쿤스트할레 튀빙겐, 튀빙겐.


질문

1. 이 자료의 성격과 역사적 예술적 배경에 대해 말하라. 2.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물질적 안락함과 여가를 나타내는 요소를 찾아라. 3. 이 자료는 어떤 사회를 연상시키는가? 4. 이 작품은 무엇을 비판하는가?

병행 자료

리처드 해밀턴 1922년에 런던에서 태어난 리차드 해밀턴은 1948년부터 1951년까지 런던 슬레이드 미술학교에 다닌다. 디자이너였다가 화가로 전향한 그는 1956년 팝 아트의 탄생을 알린 “This is tomorrow”전을 개최한 런던 현대미술학회의 “independent group”의 일원이다. 이 그림은 팝 아트 초창기 작품에 해당한다.

리처드 해밀턴이 정의내리는 팝아트 팝 아트 : 대중적, 일시적, 일회용, 저렴한, 대량 생산, 젊은, 웃긴, 섹시한, 재치있는, 눈길을 끌고 수익성이 좋은 예술.

접근 방법

Ⓐ 예술작품 분석 예술작품을 이해하려면, 분석에 들어가기 전 이 작품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1. 예술작품 개요

 ● 작가 : 출신, 학력 등
 ● 작품의 성격 : 그림, 콜라주, 조각, 설치미술 등
 ● 주제와 장르 : 자화상, 정물화, 풍경, 풍속화 등
 ● 역사적, 예술적 배경

2. 작품 분석

 ● 구성 읽기 : 작품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면과 작품의 방향을 나타내는 선
 ● 색상과 빛 식별하기
 ● 내용 알아내기 : 인물과 장식 요소 묘사 둥

3. 작품 해석하기

 ● 작품이 어느 예술 흐름에 속하는지 파악하기
 ●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알아보기 : 이 작품은 한 시대, 한 흐름을       대표할 만한가?
 ● 작품의 영향력은 얼만한가? 작품은 예술 역사 상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는가?

Ⓑ 질문 2에 대한 답변에 관한 도움말

그림 안에 미국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살펴보기 : 포드, 워너브라더스, 최초 유성 영화 <The Jazz Singer>.

Ⓒ 답변 작성 예시

질문 1:

제시된 자료는 콜라주다. 작가는 신문, 잡지, 카탈로그에서 자른 이미지를 사용하였다. 영국 출신 작가가 만든 이 작품은 1945년에 선진국에서 시작된 경제적 번영 시기인 영광의 30년이 한창일 때인 1956년 탄생했다.

p.64


자료집 연구(3/17)

주제 : 20세기 후반에 여성조건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질문

파트 1

1. 어떤 자료가 20세기 후반 여성의 이미지 또는 여성조건을 비판하는가? 2. 자료 1에서 작가 듀앤 한슨은 여성을 어떤 이미지로 표현했는가? 3. 자료 2, 3, 4에 따르면 1945년 이후 여성조건을 어떻게 변화했는가? 4. 여성의 위상이 바뀐 분야들이 있다면 어떤 것들인가? 5. 자료 4, 5가 보여주는 여성 위상의 발전, 후퇴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자료 1

<슈퍼마켓 쇼핑객> 사진 조각, 듀앤 한슨, 1970년

자료 2 : 조용한 혁명

1960년대에 들어 미국 여성들은 북유럽 여성들에 비해서는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프랑스 여성들과 비슷한 시기에 노동시장에 대거 투입된다. 이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서도 매우 앞서나간 것이다 [...]. 프랑스와 스웨덴은 “조용한 혁명”으로도 불리는 변화를 겪었다. 1940년대에 태어난 세대와 함께 전환점이 찾아왔다. 프랑스의 전환점은 1950년대에 태어난 세대와 함께 나타났다. 이 세대들은 사회적, 경제적 지표의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여성들은 사회적 커리어를 끝까지 쌓고 자신들의 교육에 투자하고자하는 욕망을 표출하였다. 그렇게 여성들은 결혼과 육아를 점차 미루기 시작했다. 미국여성의 경제 활동 참가율은 30년 사이 거의 30% 가까이 증가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15~64세 미국 여성의 70%가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미국은 1970년대 초에 프랑스(64%)를 추월했다. [...] 프랑스, 스웨덴 여성들처럼, 학위를 받은 미국 여성들은 남성보다 더 많다. [...] 여성은 43%의 간부직을 차지하고, 보수가 높은 자유직업을 대거 갖게됐다.

도미니크 메다, 엘렌 페리비에, <해방 2세대>, 2007년

자료 3 : 세계의 여성들

Women.png


p.65

자료 5 : 여성, 아프리카의 미래?

60%의 표를 얻은 아프리카의 첫 번째 여성 대통령인 라이베리아의 엘렌 존슨 시리애프의 당선은 여성 전체의 승리로 여겨진다 [...] 67세의 할머니이기도 한 그녀는 하버드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1972년 정계 입문 전까지 세계은행에서 커리어를 쌓았다. 14년 동안의 내전(1989-2003, 150 000명 사망)으로 얼룩진 그녀의 조국에서 그녀가 해쳐나가야 일은 산더미처럼 많다. 수십 만 명에 이르는 소년병들을 사회에 다시 적응시켜야 하며, 물, 전기 공급망을 다시 구축하고, 도로도 재건해야 한다. 누가 여자보다 더 능숙하게 이러한 상황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을까? 해방이 된 이래 아프리카 수장들을 종합평가하자면 과장을 아주 조금 보태 부패와, 전쟁 이 두 단어로 축양할 수 있다. “연약”하다고 말하는 여성이 아프리카 대륙을 지탱하고 있다. 밭에서든, 시장바닥에서든 생계를 책임지는 건 다름 아닌 여성들이다. 정치에서는, 모성애가 발달한 여성이 교육과 보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 밖의 다른 분야에서도 여성들의 직접적인 참가율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식민지 해방 운동에 참가했음에도 독립 후 변방으로 물러나야만 했던 여성들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모잠비크, 남아프리카 공화국, 부룬디의 의회는 이제 여성의 비율이 30%나 된다(프랑스는 12%이다). 케냐의 왕가리 마타이는 삼림 파괴 저지 운동을 한 공을 인정받아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1999년부터 보츠와나의 중앙은행 총장인 리나 모홀로도 높은 자리에 오른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여성으로 꼽힌다.

악셀 길덴, <렉스프레스>, 2005년 11월 15일

접근 방법

Ⓐ 전체적인 도움말 : 자료 분석

질문에 답하기 전에 자료를 꼼꼼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1. 자료의 종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여기선 서로 매우 다른 종류의 자료들이 제시되어 있다(예술작품, 통계치, 만화, 텍스트). 텍스트들도 매우 다양하다 : 책의 인용문, 신문 기사.

2. 시기 파악하기

역사 시험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각 자료가 다루는 시기, 날짜 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

 - 제시된 주제는 1945년에서 21세기 초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이 시기에 일어난 변화에 대해 연구하는 게 주 목적이 되겠다.
 - 자료 3만 이 시기 전체에 해당한다.
 - 자료 1은 이 시기의 중간 부분에 해당한다.
 - 자료 2, 4, 5는 이 시기의 끝 부분에 해당한다. 

3. 묘사된 시기를 파악하기

즉, 자료가 생산된 시기와 자료가 다루는 시기를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 : 자료 2는 2007년도에 나온 자료이고 1960년대와 1990년대를 묘사하고 있다. 자료 4는 2002-2003년도에 생산됐고, 1979년 이후의 시기를 묘사하고 있다.

4. 관련된 지역 파악하기

이 자료들과 관련된 지리적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

 - 세계 여러 대륙
 - 서로 다른 발전 상황
 - 서로 다른 문화

Ⓑ 파트 1 질문에 대한 답변에 관한 도움말

질문 2 : 듀앤 한슨이 보여주는 여성의 모습은 불쌍하기도 하고 위험해보인다. 여성은 여기서 소비 사회가 낳은 피해자로 묘사됐다. 이 여성은 1970년대의 전형적인 가정주부와 흡사하다. 작가는 비웃지 않는다, 다만 이 여성이 사는 세계를 둘러싼 공허함과 절망을 표현한 것뿐이다.

제 4 장 : 미국형 모델

1960년대부터 미국형 모델은 환상을 심어줌과 동시에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각종 민주주의 제도, 경제력, 사회의 역동성, 다양한 형태의 문화생활 및 군사력 등은 미국을 동경 혹은 경계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누구도 미국에 대해 무관심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776년에 건국한 미국이 어떻게 20세기에 두 개 중 하나의 초강대국으로 거듭났을까? 이 미국형 모델은 어떻게 변화해 갔을까?

1. 자유...

뉴욕 항구 입구에 서있는 자유의 여신상 “나에게 다오. 지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자유롭게 숨쉬기를 갈망하는 무리들을. 부둣가에 몰려든 가엾은 난민들을. 거처도 없이 폭풍에 시달린 이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나는 황금빛 문 옆에 서서 그대들을 위해 횃불을 들어 올리리라.”

엠마 래저러스, “새로운 거인”, 1883

2...그리고 애국심, 미국의 2대 가치

“우리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 전과안, 타임 스퀘어, 뉴욕, 2002년 7월 우리는 다음을 자명한 진리로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신은 그들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몇 가지 권리를 부여했다. 여기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추구의 권리가 포함된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민은 정부를 만들었으며,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에서 나온다.“ 미국독립선언문 중, 1776년.


자료집

미국의 민주주의 가치

민주주의는 미국의 핵심가치 중 하나이다. 수정안을 통해 변경될 수도 있는 연방 헌법은 국가의 주요 사안을 지배한다. 지역 현안은 합중국 헌법의 소관이다. 미국인 개개인은 이 연합국의 국민이다. 그는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선출한다. 생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는 특별히 보호받는다. 삼권분립은 철저히 지켜진다. 현실에서는 이 원칙이 왜곡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원칙들은 미국인들이 독립을 선언하고(1776) 헌법을 만든(1787) 이래 신성불가침 원칙으로 여겨진다. 개인의 자주적 행동 또한 미국의 주요 가치 중 하나이다.

용어

수정 : 빼거나 변경하는 일.

1. 미국 헌법

모든 미국인은 합중국의 국민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주의 주민이기도 하다. 그는 주지사와 국회에서 자신을 대표할 인물 그리고 재판관을 임명한다.

2. 이민자들로 구성된 민족, 귀화한 미국인.

2 000 명의 이민자들이 2002년 뉴욕에서 선서식을 한다. 이민자들은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 5년을 기다리고, 시민교육을 받아야 하며 헌법 앞에서 선서를 해야한다.

3. 미국의 30개 주와 연방 정부


p.69

4. 성경에 손을 대고 선서하는 케네디 대통령(1961년 1월 20일)

나는 미국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최선을 다해 미국 헌법을 보존하고 보호하며 수호할 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 미국의 최고 법원장 앞에서 대통령 취임식 때 성경에 손을 얹고 하는 선서.

5. 1776년 미국 국기와 오늘날의 국기'

6. 미국의 1 달러

7. 헌법 수정 조항 몇 가지

[수정 제1조] (1791) 합중국의 회의는 특정 종교를 옹호하거나 자유로운 종교 행위를 금지하거나, 언론 또는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또는 조용히 집회하고 피해를 구제받기 위하여 정부에 청원하는 인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수정 제10조] (1791) 헌법에 의하여 합중국에 위임되지 않고, 각 주에 의한 보유가 금지되지 않는 권한은 각 주 또는 인민에 속한다.

[수정 제13조] (1865) 노예 제도(奴隸制度)는 합중국 및 합중국의 관할에 속하는 어떤 지역에서도 금지된다. 정당한 재판에 의한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의 처벌로서가 아닌 강제 노역의 경우도 동일하다.

[수정 제19조] (1920) 합중국 시민의 투표권은 성별(性別)을 이유로 합중국 또는 어느 주에 의해서도 거부되거나 제한되지 아니한다.

[수정 제22조] (1951) 누구든지 2회를 초과하여 대통령에 선출될 수 없다 [...]

[수정 제26조] (1971) 18세 이상의 합중국 시민의 투표권은 연령을 이유로 부인되거나 제한되지 아니한다.

질문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미국 대통령이 가진 권한은 무엇이 있는가(자료 1)?

2. 미국의 정치 체제가 대통령제라는 것을 보여주어라(자료 1).

3. 미국의 이민자들은 어떤 절차를 거쳐 미국 국민이 되는가(자료 2)?

4. 미국 연방이 어떻게 건설됐는지 역사적 큰 단계를 다시 살펴보아라(자료 3)

5. 이 제스쳐의 의미는 무엇인가(자료 4)?

6. 붉은색과 흰색 띠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별은 무엇을 상징하는가(자료5)?

7. 수정 헌법 조항은 어떤 가치에서 유래되었는가(자료 7)? 개인을 보호하는 수정 조항엔 어떤 것들이 있는가(자료 3)? 권리와 자유를 더 부여하는 수정 조항은 무엇인가(자료 3)?

B. 자료 연관짓기

8. 미국 국기의 변화는 미국 영토의 형성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라(자료 3, 5). 왜 미국국기는 “Stars and stripes”(별과 띠)란 표현으로 불리는지 증명하라.

9. 자료 4와 자료 6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C 논술

10. 이 자료집에서 볼 수 있는 미국의 핵심가치에 대해 설명하라.


1. 풍요로운 사회


A. 1945년 이후 미국의 지배력 자료 1, 3, 4

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경제성장을 촉진했다. 1945년,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금의 양은 세계 금 보유량의 3/4이나 된다. 달러는 많은 나라에서 무역 통화임과 동시에 기축 통화로 쓰인다. 모두가 평등한 기회를 갖는다는 원칙이 미국 사회를 지배한다. 즉 각 개인은 주도권을 가질 자유가 보장되고 경쟁을 통하여 기회를 쟁취하는 문화가 뿌리내렸다. 제네럴 모터스나 스탠더드 오일과 같은 공업회사들은 그 규모가 엄청나다. 기업 집중을 통해 경쟁은 작은 편이다. 현대화와 과학기술 혁신이 경제활동 분야 전반(농업 포함)에 변화를 가져왔다. 전후 베이비 붐 현상은 계속 진행된다. 1950년 미국의 인구는 1억 5천 4백 만 명에서 1970년 2억 8백 만 명으로 증가한다. 인구 증가에서 이민이 차지하는 비중은 부수적이다. 그러나 미국은 높은 수준의 유럽 연구원들을 끌어들인다. 이것을 브레인 드레인, “두뇌 유출”이라고 한다.

B. 풍요와 성공의 사회, 미국 자료 2, 5, 6

1955년, 세계인구의 6%밖에 차지하지 않는 미국은 세계 부의 50%를 생산한다. 1953년에서 1963년 사이, 1인당 국민총생산은 25%나 증가했다. 미국기업이 대다수인 다국적기업들은 외국에 투자한다. 풍요, 안락함, 낭비는 미국 일상생활의 주요 키워드가 됐다. 광고는 신용 구매, 즉 비즈니스를 촉진시킨다.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한 미국인들은 재화 소비를 적극적으로 하고, 빚을 지는데 망설임이 없다. 미국 사회학자들은 “화이트 칼라”(변호사, 의사, 교육자, 공무원, 회사원, 상인)과 “블루 칼라”(노동자)들을 구분한다. 하지만 계급 간 투쟁 이론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다. 모든 미국인들은 열심히 일하고, 운이 좋으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고 잘하면 제 2의 록펠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부자들은 재단을 설립하면서 사회적 성공 모델을 제시한다. 큰 기업들의 경영진들(“매니저”)은 점점 사장, 주인의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한다. 교외지역은 중산층의 군림을 상징한다. 교외는 하루 일과가 끝나고 평화로운 안식처이자 피난처 역할을 한다. 교외는 여유로운 삶의 상징이다. 학교, 셀 수 없이 많은 성당, 교회, 새로 지어지는 유태교회당들은 교외 문명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대변한다.

C. 아메리칸 드림 뒤에 감춰진 이면 자료 7, 8

아메리칸 드림은 충분히 유혹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뒤에는 또 다른 모습이 감춰져있다. 남부지역 같은 경우 인종 분리와 같은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1960년대 중반까지 인종 분리는 남부지역에서 합법적이고, 그 이후에도 사람들의 관습 속에서 계속 유지된다.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병원에서도, 학교에서도, 공공건물, 대중교통에서도 백인과 흑인은 분리돼서 살아가고 절대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두 인종이 서로 결혼하는 경우는 금지되었거나 매우 드물다. 미국 북부와 서부의 주에서도 인종 분리가 사라지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럼에도 최고 법원은 1954년 학교에서 인종을 분리하는 것은 아이들 사이에 불평등함을 야기하는 행위라고 제정한다. 1950년대에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백인 자유당원들과 함께 흑인들의 인권, 평등을 위한 운동을 벌인다.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3천에서 4천 만 명의 미국인이 빈곤에 허덕인다. 1960년대 초반 연방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메디컬 에이드라고 하는 빈민층을 위한 무상의료 서비스를, 65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메디케어라는 무상의료 서비스를 지원한다. 주거, 학비지원, 사회보장에 관련된 다른 법안들이 이어진다. 웰페어 스테이트(복지 국가)는 빈곤과의 전쟁을 통해 더욱 견고해지지만 양극화를 해소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용어

다국적기업 : 여러 나라에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는 기업

자유당원 : 미국의 자유당원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확대시키는 데 우호적인 사람이다. 자유당원들은 정치적으로 좌파(진보)진영에 속한다.

웰페어 스테이트(복지국가) : 국가에 사회 복지와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는 시스템으로 1930년대 미국에서 탄생한 제도이다. 이 제도는 국민에게 질병, 노후 혹은 실업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장치이며, 복지 연금으로 운영된다.

재단 : 자본으로 구성된 조직으로 학생, 예술가, 교회 등에 금전적 지원을 한다.


1. 세계 속 미국의 투자액

2. 미국인들은 위의 사회 계층 중 어떤 곳에 속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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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에, 그리고 1980년에 미국에서 실시된 두 개의 여론조사 질문 중 하나.

메리, 로버트 잭맨 미국 사회 계층 인식,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출판, 1983년

1.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 계층은 어느 계층인가?
2. 1964년에서 1980년 사이 가장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면 어느 것인가?


p.71

3. 1820년에서 1975년 사이 미국으로의 이민자 수

4. 1990년에서 1974년까지 미국의 인구 변화

5. 1970년대 인종별 미국의 수입 현황

파일:Income.png

6. 1960년대, American way of life

7. 또 다른 미국

1950년대, 이 미국은 자신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미국의 고민거리들 자체가 풍요로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교외의 부유한 동네 사람이 겪는 심리적 고통이 단적인 예이다. 이런 고민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동안에도 4천에서 5천 만 명의 미국인들은 빈곤에 빠져있었다. 또 다른 미국이 있었던 것이다. 가난했던 그들은 여전히 가난하다. 굶주림에 허덕이진 않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배가 고프다. 살이 찐 그들은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어서이다. 빈곤층에 비만인 사람들이 많은 이유다. 이들의 주거상태는 열악하고, 교육도 관리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 또 다른 미국, 즉 빈곤의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그 모습이 가려져있다. 수 천만 명의 빈민들은 사회적으로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 옷이 빈민들을 가려버린다. 미국에서만큼은 빈곤과 옷을 잘 입는 것 사이에 상충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 미국에서는 적당하게 옷을 입는 것이 적당한 거처를 갖는다거나, 적당한 먹을거리를 먹는다거나, 적당한 건강관리를 받는 일보다 훨씬 쉽다. 엄청나게 가난한 이들도 풍족해 보일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빈민들은 정치적으로도 투명인간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선진국 사회에 있어 가장 잔인한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불우한 이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없다.

마이클 해링턴, <또 다른 미국>, 1962

8. 1954년 5월 17일, 최고 법정의 판결문

공립학교에서 아이들을 인종에 따라 분리하는 것이 과연 소수 그룹에 속하는 아이들에게 평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를 박탈하는 일인가? 그렇다, 이것이 우리의 대답이다. [...] 그리하여 공교육에서는 “분리되었지만 평등하다”는 주장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결론내린다. 분리된 교육 방식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함이 내포되어있다.

브라운대 토페카(캔사스) 교육위원회 사건.

1. 첫 번째 문장을 설명하라.
2. 이 판결로 학교에서 행해지는 인종 분리가 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어라. 


p.72

2. 자유로운 세계를 지키는 미국

A. 서유럽을 지키는 게 1순위 자료 2, 3

진주만 사태(1941년 12월 7일) 이후 미국은 쇄국주의를 탈피했다. 미국은 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7년 이후 미국은 냉전에 돌입한다, 자유세계의 리더로서 미국은 러시아에 맞서게 된다. 특히 서유럽의 재건은 미국의 가장 시급한 사항이다. 러시아가 엘베강까지 제국주의의 영향력을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해 쇠약해진 독일 연방 공화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러시아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1947년 6월 미국은 마셜 플랜을 제안한다. 그렇게 미국은 교역의 자유, 생각, 재화, 자본 등의 자유로운 순환을 지킨다. 이와 같은 이념으로 미국은 초기 유럽 연합 창건을 지지한다. 1948년 러시아가 국제 조약을 어기고 베를린을 고립시켰을 때 미국은 비행기로 베를린 사람들에게 줄 식량, 기름, 석탄 등을 실어 날랐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미국은 조지 워싱턴 대통령 당시부터 내려오던 전통과는 반대로 1949년 유사시 미국이 유럽의 연합국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는 대서양 조약을 체결한다. 1949년 7월, 러시아는 자국 최초의 원자 폭탄을 발사한다. 미국은 1945년부터 갖고 있던 독점 체제를 잃게 된 셈이다. 무기 전쟁이 이렇게 다시 시작되고,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이 한창이던 시기에 간첩을 축출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율리우스와 에텔 로젠버그는 러시아에 원폭의 비밀을 폭로한 혐의를 받아 사형선고를 받고 1953년 6월 처형당했다. 1950-1960년대 내내 미국은 군사기지, 핵무기(1953년부터는 H 폭탄), 경제 지원 등을 통해 서베를린 사람들의 자유를 보장하고 서유럽의 독립을 지킨다.

B. 위험에 처한 아시아 자료 1, 4, 5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민주화가 미국이 거둔 가장 큰 성공으로 여겨진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일본은 진정한 의회제를 도입하고 경제를 복원 한다. 그리고 “서구식” 사회로 탈바꿈한다. 그렇게 일본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연합국이 된다. 1949년 9월, 중국 대륙은 공산당의 손에 넘어간다. 타이완 섬으로 피신한 국수주의자 장계석 장군을 지지하던 워싱턴은 심각한 반전 상황을 맞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당은 남한을 침공한다. 유엔의 이름으로 미국은 남한을 돕기 위해 전쟁에 뛰어든다. 전쟁은 3년간 지속되지만 승자는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공산주의의 침략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겠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었고, 유사시 같은 방식으로 유럽의 연합국들을 도울 것이라는 것을 암시했다. 1954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패배한 이후, 미국은 공산당의 손에 넘어간 북베트남과 월남 공산주의자들의 게릴라에 맞서는 월남의 보호국이 된다. 1962년부터 미국은 월남에 군사지원을 펼친다. 1965년 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의 수는 184 000명에 달했다. 1968년에는 그 숫자가 500 000명 이상으로 증가한다. 군사적 우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승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지 못한 탓이었을까? 기자들의 보도에 경악을 금치 못한 여론의 악화 때문이었을까? 월남 정치인들의 부정부패와 무능함이 원인이었을까? 1968년부터 시작된 평화 협상을 시작으로 파리 협정(1973년 1월)이 체결된다. 미국이 패배한 첫 번째 전쟁인 베트남전쟁은 미국인들의 기억 속에 큰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용어

쇄국주의 : 미국의 대외정책 중 하나로 아메리카 이외의 대륙에서 벌어지는 전쟁 혹은 긴장 관계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 특징이다.

북대서양 협정 혹은 대서양 동맹 : 1949년에 미국, 태나다, 서유럽 주요 국가(프랑스, 영국 등) 사이에 체결된 협정이다. 북대서양협정기구는 연합국들의 군사지휘권을 북대서양 조약 하에 통일시킨다.

매카시즘 : 1950년대 초 미국의 상의원 조셉 매카시가 주장한 정치이념으로 공산주의 사상에 우호적이라고 의심되는 모든 이들을 경찰 조사에 넘기고 차별을 둬야한다는 것(“마녀사냥”)을 골자로 한 것이 특징이다. 매카시즘은 1954년 미국 상원에 의해 규탄을 받았고 경찰 조사도 중단되었다.

1. 미국과 베트남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와의 전쟁이 성공적으로 끝나려면 투쟁은 투철하게, 결단력 있게 진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은 결국 태평양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고 미국 본토만을 방위해야 할 처지에 놓일 수도 있을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에게 존슨 부통령이 올린 보고서 중, 1961년 5월 23일. 우리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립 월남을 원한다. [...] 우리가 이 목표를 월남에서 이룰 수 없다면, 동남아시아의 거의 모든 국가들(두 개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은 공산주의에 굴복하고 말 것이고, 미국과 반공사주의자들(미얀마)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없애는데 동의해 버리고 말 것이다. 태국[...]은 심한 압력을 받을 것이고 필리핀까지도 공산주의 바람에 휘청거릴 수도 있다. 서쪽에서는 인도를, 남쪽에서는 호주, 뉴질랜드를, 북쪽에서는 대만, 한국, 일본을 노리는 공산주의의 위협이 크게 증가할 것이다. 존슨 대통령레게 맥 나마라가 올린 보고서 중, 1966년 10월 14일. 오늘 우리의 우방국을 버리는 일은 우리 자신을 배반하는 것이며, 우리의 운명을 버리는 것과 같다.

닉슨 대통령의 연설 중, 1972년 4월 26일.

1. 존슨과 맥 나마라가 강조하는 위험은 어떤 것인가?
2. 맥 나마라와 닉슨은 베트남전쟁을 어떻게 정당화하는가? 

p.73

2. 미국 지도 앞에 서있는 맥 카시 상의원, 1950년 2월 20일.

조셉 맥 카티는 1952년에서 1954년까지 반미 주의 행동을 관찰하고 조사하는 상원 조사 위원회를 이끌었다.

1. 1950년 세계 정황을 소개하라.
2. 이 사진에 따르면 맥 카시는 무엇을 증명하려 하는가?

3. 유렵의 재구성에 필요한 미국의 도움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프로파간다 사진, 1949년.

4. 요르단에서의 미국 농업 컨설턴트, 1950년대.

5.1961년 1월 20일, J. F.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문

바로 이 시각, 이 자리에서 우리의 우방과 적들에게 그 횃불이 20세기에 태어나 전쟁으로 단련되고, 힘겹고 가혹한 평화로 훈육 되고, 오랜 유산에 자부심을 갖는 젊은 세대의 손에 넘어왔으며, 우리는 이 나라가 항상 약속해왔고 지금도 전세계가 헌신하고 있는 인권이 말살되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알립시다. 우리가 잘되길 바라는 나라나 우리가 잘못되길 바라는 나라 모두에 대해 우리는 자유의 존속과 성공을 위해 그 어떠한 대가도 치를 것이며, 어떤 짐이라도 짊어질 것이며, 그 어떤 어려움과도 맞서 우방을 지지하고 어떤 적과도 맞서 싸울 것임을 알려줍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약속합니다. 아니 그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약속합니다. 첫째로 우리와 문화적, 정신적 뿌리를 함께하는 오랜 우방국들에, 우리는 변하지 않을 충실한 우정을 약속합니다. 또한 자유 국가의 대열에 새로이 합류한 신생국들에 다음과 같이 약속합니다. 우리는 한 형태의 식민 통치가 끝난다는 것이 그보다 훨씬 더 가혹한 형태의 통치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지 않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전 세계의 절반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오두막과 극심한 빈곤의 사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들의 자조(自助) 활동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그 일을 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또 그들의 지지표를 얻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적대하는 국가들에 우리는 맹세가 아닌 요청을 하려합니다. 과학이 가져온 무서운 파괴력이 계획적인 또는 우발적인 자기 파괴 행위로 인간다운 모든 것을 말살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양쪽 진영 모두가 다시 평화를 위한 원정을 시작할 것을 제의합니다[...].

1. 케네디는 어떤 나라들에 약속을 하는가?
2. 이 텍스트를 보면 케네디의 대외정책은 어떤 원칙에서부터 비록된 것인가?
3. 마지막 전 문단에서 케네디는 왜 공산당원들에 대한 언급을 하는가?
4. 이전의 식민지와 관련하여 케네디의 고심거리는 무엇인가?

5. 이 텍스트에서 케네디가 자신의 행보를 평화주의적으로 보이게 한가는 것을 보여주어라. 

p.74

3. 60년대의 미국

A. 와스프가 지배하는 미국에 대한 문제 제기? 자료 1, 2, 5

1960년대, 미국 사회는 큰 격변을 겪는다. 소수 민족들이 평등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흑인 계층은 인종 분리 정책 폐지를 원한다. 그들은 민주주의 사회라고 불리는 곳이 불평등하고 인종차별적인 사회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백인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얻는다. 초기에는 비폭력 시위가 지배적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공민권 운동”은 보이콧과 길거리에서의 평화 시위를 권장한다. 공민권에 관련하여 1964년 제정된 법과 투표권과 관련하여 1965년 제정된 법들과 같은 연방법들은 모든 형태의 차별을 금지하지만 이 법들이 현실에서 시행되는지가 관건이다. 운동은 점점 과격해지고 “블랙 파워”를 외치는 리더들도 등장한다. 다른 민족 공동체들도 통합과 다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다. 예를 들어 히스패닉 계 미국인들은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려 한다. 1924년부터 미국 시민권 혜택을 받는 인디언들도 “미국 인디언 운동”이란 단체를 만들어 그들의 영토의 반환을 요구하고 그들의 권리가 인정받고, 삶의 조건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용광로(melting-pot)은 더 이상 성공한 모델이 아니다. 중산층 여성들도 성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친다. 이들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한다. 그중 “여성 해방 운동”의 승리를 위한 몇몇의 투쟁은 눈에 띈다.


B. 도시 폭동 시대 자료 3, 4

이러한 요구에 답하기 위해 존슨 정부는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로 대표되는 “위대한 사회” 정책을 도입한다. 1965년에서 1968년까지 흑인들이 모여 사는 게토는 불바다가 된다. 어느 도시를 가든 비슷한 시나리오다. 젊은 남성들이 대다수인 폭동꾼들은 상점과 자신들 거주지의 공공건물을 파괴한다. 경찰은 이에 폭력적으로 대응한다. 1965년 로스엔젤레스 왓츠지역에서는 폭동이 5일이나 지속된다. 폭동이 남긴 상처는 잔혹하다 : 34명이 사망하고, 1 032명 부상당했으며, 977채의 건물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4 000명이 경찰 조사를 받아야 했다. 왓츠폭동은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 1966년과 1967년, 207건의 폭동이 발생한다. 1968년 4월 4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사건으로 수많은 시위대가 일어나고, 패싸움, 화재 등이 100여개의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인종문제로 일어난 3년간의 폭력사태로 225명의 미국인이 사망했고, 4 000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1억 1천 2백만 달러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이 사태를 텔레비전으로 지켜본 미국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C. 베트남 전쟁 반대

1967년부터 “전쟁과의 전쟁”은 그 규모가 커진다. 대학교 캠퍼스의 대학생들은 자신들이 동의하지 않는 대외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징병 제도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한다. 또한 정부의 “제국주의”를 규탄한다. 록, 포크송, 컨추리 음악 가수인 호안 바에즈와 밥 딜런은 그들의 방식대로 베트남 국민을 핍박하는 풍족함이 넘치는 미국사회를 비난한다. 자유주의자들, 사회운동가들과 정치인들도 이 운동에 동참한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에는 정치에 입문하는 나이가 된 베이비 붐 세대들이다. 1945년 이후에 태어나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자란 그들은 과도하게 물질적이고, 비판의식 없고, 제3세계에 무관심한 자신들의 문명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나라의 대외정책을 비난하는 일은 곳 그 정책을 만들고, 행하고, 승인하는 이들을 비난하는 것과 같다. 사회는 이렇게 분열되고 세계 속 미국의 이미지는 악화된다.

용어

용광로(Melting-pot) : 미국으로 몰려든 모든 이민자들이 서로 섞여 출신지와 상관 없이 미국 국민을 이루는 용광로를 뜻한다.

메디케어(medicare) : 노인들을 위한 의료 지원.

메디케이드(medicaid) : 극빈곤층을 위한 의료 지원.

베이비붐 세대 : 2차 세계 대전 직후에 태어난 세대를 일컫는 말.


1.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백 년 전, 우리 미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그림자로 남은 한 위대한 미국인이 노예해방을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백년 후에도 흑인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백년 후에도 흑인들은 인종차별이라는 굴레 속에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백년 후에도 흑인은 풍요ㅢ 바다 한 가운데 빈곤의 섬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백년 후에도 흑인은 미국 사회의 변방에서 활기를 잃어가고 자신의 나라는 그의 유배지입니다 [...]. 흑인이 시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이상 미국에는 조용하고 잠잠한 날은 없을 것입니다. 혁명의 소용돌이는 정의의 날이 오는 빛나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우리나라의 기반을 흔들 것입니다 [...]. 나는 언젠가는 이 나라 국민들이 분기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음을 자명한 진리로 삼는다”는 이 나라 국민 신조의 참 뜻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옛 노예의 자손들이 옛 노예 소유주의 자손들과 함께 형제애의 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4명의 자녀들이 언젠가는 그들의 피부색으로 판단되지 않고 그들의 인품에 의해 판단되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흑인 침례교 목사, 1968년 암살)의 연설, 워싱턴, 1963년 8월 28일

1. 저자가 묘사하는 과거의 상황은 어떤 것인가?
2. 저자는 1963년도의 어떤 상황을 묘사하는가?
3. 그의 희망을 가능케 하는 요소는 어떤 것들인가? 

p.75

2. 1964년, 존슨 대통령과 마틴 루터 킹

3. 존슨 대통령이 말하는 “위대한 사회”

오는 나는 위대한 사회 건설을 시공할 세 가지 장소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그곳은 우리의 도시들, 시골, 그리고 우리의 학교들입니다 [...]. 도시가 안고 있는 각종 불행을 열거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도심의 낙후, 교외지역의 황폐화 등이 그 예입니다. 우리에겐 돌아다니기 위해 필요한 교통수단도 충분히 없습니다. 시골은 점점 사라지고, 오래된 건물들은 손상됐습니다 [...]. 위대한 사회를 건설 할 두 번째 장소는 우리의 시골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강하고 자유로운 미국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미국의 자손들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껴 왔습니다. 오늘날, 이 아름다움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가 마시는 물과, 무리가 먹는 식량, 그리고 우리가 숨쉬는 공기까지 오염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위대한 사회를 건설 할 세 번째 장소는 학교입니다. 학교에서야말로 우리 아이들의 삶이 만들어집니다 [...]. 많은 학교들의 학급은 학생 수가 너무 많고 교육 프로그램은 너무 오래됐습니다. 우리의 유능한 교사들의 임금은 너무 적고 임금을 많이 받는 교사들은 무능합니다. 우리는 모든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각각 책상과 걸상을, 그리고 배울 수 있도록 선생님을 제공해야 합니다. 가난함이 지식을 막아서는 안 되고, 지식은 가난함을 탈출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L. B. 존슨(미국의 대통령 1963년~1969년), 1964년 5월 22일 연설문 중

1.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라.
2. 미국 사회가 처한 어떤 어려움을 텍스트는 언급하는가?
3. 미국의 학교에 관해서 대통령은 어떻게 평가하는가?
4. 이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기 위해 어떤 수단이 동원됐는가?

4. 복지 국가의 역할

5. “근대 여성 인권 선언”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한다.

I. “법에 의한 동등한 권리가 성별을 이유로 미국 또는 미국의 어떤한 주에 의해서도 부정당하거나 제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국 의회가 헌법에 동등 권리에 관한 수정안(Equal Rights Amendments 또는 ERA)을 즉시 발의할 것을 그리고 많은 주가 이 수정안을 비준하기를 요구한다.

II. 평등 채용이 남성들에게 적용되는 것처럼 모든 여성들에게도 보장되어야 함을 요구한다. 특히 “채용의 평등한 기회 제공을 위한 위원회”가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것 또한 강조하는 사항이다.

III. 모든 여성들이 법적 보호 조치를 받아 경력 단절 없이 출산 후 다시 일을 할 수 있도록 보장받을 것을 그리고 사회보장제도에 의해 유급 출산휴가를 보장받을 것을 요구한다.

VI. 성별로 인한 모든 형태의 차별(서술 혹은 암묵적인 형태)이 교육의 모든 단계, 즉 중고등학교, 직업학교, 대학교, 대출과 장학금, 연방정부 혹은 Job Corps.와 같은 주의 교육 프로그램 등에서 사라지도록 연방법과 지방법이 여성 본인의 능력으로 남성과 동등하게 평가받을 수 있도록 교육에 관한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VIII. 여성에게 피임과 낙태에 관련된 정보 접근을 제한하는 형사법의 일부를 없애 자신의 성생활을 자신이 관리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를 보장받을 것을 요구한다.

전미여성기구(NOW)의 전국회의 내용 중 일부, 1967년

1. 여기서 주창된 평등 법칙은 무엇인가?
2. 정확하게 어떤 요구사항들이 여기서 표명되었는가?


p.76


자료집

미국의 소수민족

처음 북아메리카에 온 식민지 개척자들은 영국과 북서유럽에서 왔다. 그들은 남북전쟁 이후인 1865년에 자유의 몸이 된 흑인 노예들을 사용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루어진 대거 이민은 인구 구성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그때부터 와스프(White Anglo-Saxon Protestant: 앵글로색슨계 백인 신교도)와 소수 인종(흑인, 아시아인, 가장 처음 미국 땅에 살고 있었던 인디언), 소수 민족(유대인, 히스패닉), 소수 국민(이탈리아인, 그리스인, 러시아인) 등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모두 미국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뿌리에 대한 자부심을 버리지 못하고 미국이라는 멜팅폿 용광로에 완전히 녹아드는 것을 거부하며 다문화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이민자들과 그들의 후손들로 구성된 미국은 공통 가치를 지키는 혼합국가이다.

1. 1968년 올림픽 게임에서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

멕시코 올림픽 메달리스트(200m 금메달과 동메달)인 그들은 국가가 울려 퍼질 때 검정색 장갑을 낀 주먹을 들어 올리고 있다.

2. 1945년에 “흑인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흑인들은 링컨이 그들에게 빵 없이 자유만 준 그 날부터 불행 속에 살아왔다. 톨스토이를 읽으면서 감명 깊었던 문장 한 구절이 떠오른다 : “모두를 위한 빵과 자유는 한 번도 충분한 적이 없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닥쳤을 때, 우리는 이 두 개 모두 없었다. [...] 그들은 미국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방법으로, 즉 그들의 인종에게 주어진 제한사항과 조건에 맞춰가며 피부색을 극복했다. [...] 흑인이라는 사실을 절대 바꿀 수 없는 상태로서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흑인 후예로서 이어받은 유산에 대해 자만하고, 흑인 영웅을 칭송하며, 흑인 리더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흑인 형제들에게 사기를 치고 백인 형제들을 좋아하며(이 사실을 잊지 마시오) 따로 떨어져 거리를 두며 지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고 난 나면 한 발짝 크게 진보했고 계속해서 진보해 나갈 것이라 머릿속에서 상상하며, 백인들이 결국 이 사실을 깨닫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너는 오랫동안 착한 흑인이었다. 이제 들어오게 해주마.”라고 말할 것이라고 상상하면 그만이었다. [...] 그러나 내 영혼은 계속해서 이 순리에 반항했다. 흑인으로 살아가는 법은 내게 비밀이 아니었었나 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배웠다. 나는 백인들과 똑같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배웠다. 자유, 정의, 평등에 관한 이 모든 감언이설들 말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이는 미국 시민이다...나는 이것들을 백인들과 똑같은 책으로, 똑같은 학교에서 배웠다.

체스터 하임스(1909-1984), 추리 소설 작가, <소리 지른다면 그를 놔줘라>, 1945

3. 시카고의 흑인 게토

마틴 루터 킹의 암살 이후 심각한 봉기가 시카고에서 일어난다.

시카고는 다른 여는 미국의 도시들처럼 썩어가는 곳이다. 이것은 아주 흔한 도식이다. 백인들은 수단이 생기면 바로 도시 중심지역을 떠난다. 일자리도 도시를 같이 떠난다. 오래된 동네는 일자리, 권력이 없어 기분이 상한 흑인들이 차지하게 된다. 그들의 초라한 학교에선 폭력이 점점 심해지고, 그들의 폭력은 점점 많은 백인들을 그곳에서 쫓아낸다. 폴란드인들과 다른 소수민족들은 “관심을 집중 받고, 그들을 위해 나라가 운영되고, 그들을 위해 영혼까지 파는 정치인들이 있는 현실”속에서 흑인들에게 쌓인 게 많다. [...] 시카고 인구의 30%가 흑인이지만 흑인 게토는 아무런 힘도 없다. [...] 웨스트 사이드[...]는 모든 글을 깨우치지 못한 남부지역에서 온 흑인 청년들의 입구나 다름없다. 이곳은 말 그대로 야생적이고, 엉망이며, 초라한 동네이다. 갈 수 있는 이들은 웬만하면 사우스 사이드로 가고 나머지는 희망도, 일자리도 없이, 한 해 동안 수없이 주거공간을 옮겨가며 웨스트 사이드에 남는다. 웨스트 사이드에 있는 상점들은 거의 모두가 다른 지역에 사는 백인이 소유하고 있고 집들의 소유주는 대부분 백인들이거나 아예 없다 [...]. 킹 박사의 살인사건 이후, 웨스트 사이드는 불타올랐다 [...]. 그렇다. 시카고의 흑인들에게는 힘이 너무나도 없어서 그들에게 남은 힘이라곤 쓰라림과 분노의 힘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부정적인 힘, 파괴하는 힘이다.

데이빗 할버스탬, <해퍼스 메거진(Harper’s Magazine)> 기자, 1968년 8월

p.77

4. “커스터는 너희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

비네 델로리아가 1972년 출간한 책의 제목. 저자는 수 족 인디언이자 전 미 전국 인디언 회장이었다. 악튀엘 : 인디언들을 유대인들에 자주 비유하시는데, 이스라엘처럼 미국 안에 인디언 독립 국가를 원하시는 겁니까? 델로리아 : 그렇게 되면 좋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되찾고 싶습니다. 우리는 미국이 결국 자기 자신에 의해 파멸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백인 미국인들은 주로 연안의 도시에서 삽니다. 그들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 너무나도 큰 불균형을 만들어 냈기에 머지않아 큰 재앙이 그들을 집어 삼킬 것입니다. 내륙지역에 있는 인디언 보호구역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을 것입니다. 호피교가 전도하는 게 바로 그런 내용이고 인디언들은 점점 기독교를 버리고 호피교에 빠져드는 추세입니다. 악튀엘 : 그런데 대부분의 인디언들은 백인 사회에 동화되길 원하지 않습니까? 델로리아 :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도시에 사는 이들은 방학이나 주말이 되면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옵니다. 돈을 많이 버는 이들은 보호구역에 재투자 합니다. 나와 같은 경우, 20족의 변호사를 맡고 있으며, 많은 수의 인디언 변호사들을 배양하기 위한 재단도 만들었습니다. 2년 안에 200명 정도의 변호사가 나왔으면 합니다. 인디언보호구역에 사는 이들은 그렇게 낚시권과 영토에 관련한 협약을 위반한 미국의 행정부를 고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많은 이들의 인디언들이 영화에서 엑스트라 배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전장에서 그들의 언어로 소리를 치는 씬을 찍을 때 그들은 “전장 공격”이란 말 대신 정치적 슬로건을 외칩니다. 물론 이것들은 아주 작은 시작이지만 우리들 누구든 충분히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악튀엘>지 인터뷰 중, 1972년 4월

5. 1970년 인디언들에 의한 알카트라즈 섬 점령.

샌프란시스코만 한 가운데 떠있는 알카트라즈 섬은 유명한 알카트라즈 감옥이 폐쇄된 이후에 버려진 섬이었다.

6. 1971년 캘리포니아에서 벌어진 히스패닉계 치카노스 농부들의 시위.

정면에 전국농부연맹의 단장인 세자르 샤베즈가 보인다.


질문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이 행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자료 1)?

2. 이 글이 비꼬는 대상은 어떤 것인가(자료 2)?

3. 이 텍스트에 따르면, 흑인들은 어떤 사회적 핸디캡을 안고 살아가는가(자료 3)?

4. 이 텍스트는 백인들의 행동 중 어떤 부분을 비판하는가(자료 4)?

5. 알카트라즈가 정확하게 무엇이고 어디에 위치하는지 찾아라(자료 5).

  왜 이곳을 점령하기로 했을까?

6. 전국농부연맹을 어떤 종류의 단체에 연결시킬 수 있을까(자료 6)?

B. 자료 연관짓기

7. 자료 2와 3에서 인종 차별의 어떤 모습이 비판 대상인가?

C. 논술

8. 흑인, 인디언, 시카노스족의 행동 방식에서 나타나는 공통점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p.77


4. 문화 그리고 대항문화

미국은 진정한 자신만의 문화가 있을까? 다인종으로 구성되어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신생국가 미국은 프랑스, 영국, 독일 등과 같은 유럽의 오래된 국가들에 필적할 수 있을까? 1960년부터 커지기 시작한 대항문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A. 미국 문화의 기원 자료 2

미국인들은 오랫동안 17세기에 넘어온 기독교 식민자들의 청교도주의의 영향을 받아왔다. 그리하여 노동이 최고의 가치로 평가받고, 문화는 비난받아 마땅한 오락, 혹은 죄악으로 여겨졌다. 미국 개척지 변경선을 따라 그들은 한 손엔 총을, 다른 한 손엔 성경을 쥔 채 자연을 길들였다. 이민자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는 교육의 사치를 허락해도 자신들은 안락함과 풍족한 생활을 최우선적으로 열망했다. 그럼에도 18세기 말부터 페니모어 쿠퍼, 에드가 포, 마크 트웨인과 같은 작가들과 저지 거슈윈과 같은 음악가들이 등장하면서 미국의 문화가 점점 꽃피우기 시작했다. 남부지역의 흑인들은 강론의 내용을 직접 노래 부르며 가스펠이라고 하는 리드미컬한 음악과 재즈와 락앤롤의 기원인 블루즈를 탄생시키며 기존 음악에 혁명의 바람을 일으켰다. 유럽에서 들어온 문물 또한 미국 문화를 더욱 충실하게 만든다. 나치 정권에 의해 쫓겨난 발터 그로피우스는 건축계를 뒤흔든다.나치즘의 피해자였던 아인슈타인, 혹은 엔리코 페르미와 같은 학자들 역시 과학 연구를 촉진시킨다. 1945년 이후 유명인과 유명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1954년에, 존 슈타인벡은 1962년에 각각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미술계에선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파 아트의 본보기가 된다. 문화는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퍼진다. 워싱턴의 내셔널 갤러리, 뉴욕의 메트로폴리탄과 같은 큰 미술관들은 사적, 공공 컬렉션을 전시한다. 학교에서는 예술 수업을 진행하고, 문학 작품은 페이퍼백으로 출판된다.

B. 문화 모델로 자리잡은 매스 미디어 자료 1, 3

매스 미디어는 미국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테크니컬러 기술과 스타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할리우드의 영화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영화들이 시장을 휩쓴다. 1940년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텔레비전은 그 이후 뉴스, 오락, 드라마, 버라이어티 쇼 등을 통해 그 영향력을 끊임없이 확장시켜나간다. 여가 문명은 문화 상품 산업을 탄생시킨다. 대형 유원지(1955년 세워진 캘리포니아의 디즈니랜드, 플로리다의 디즈니월드)는 만화 영화 또는 유럽의 동화를 테마로 한다. 유럽에서도 똑같이 따라한다.

C. 1960년대의 대항문화 자료 4, 5, 6

대항문화는 미국에서 늘 존재해 왔지만 1960년대에 들어 부각되기 시작한다. 대항문화는 우선 생활 방식에서부터 표현된다. 모든 제한을 벗어던지는 것을 큰 특징으로 한다. 가장 그리고 유일하게 중요시되는 건 바로 개인의 자유이다. 각자 개개인은 본인의 “본능적인 욕구”를 만족시킬 권리가 있다. 미국 그리고 세계는 머리를 자라게 내버려두고, 오리엔탈 풍의 옷을 입고, 소비 사회를 규탄하고 마약의 세계에 빠져 전쟁과 폭력에 반항하고, 유기농 농업을 예찬하는 비트족과 히피족을 차례로 발견한다. 신문, 노래, 1969년도의 우드스턱 페스티발과 같은 음악 축제들은 이러한 대항문화를 반영한다. 1960년대 말, 청교도주의의 장벽이 무너졌다고 할 수 있다. 전통 가치관은 비판의 도마에 오른다. 사업가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생산과 판매를 촉진시킬 수 있는 도구로 이용한다. 이러한 과격한 변화 앞에서 상당수의 미국인들은 우려를 나타낸다.

용어

변경 : 프런티어(“변경”)는 19세기 미국의 개척자들이 동부에서 서부로 땅을 개척해나갈 때 개척된 땅과 그렇지 않은 땅을 구분시키던 일종의 선이다. 프런티어는 점점 서부로 이동을 하면서 국토가 완전히 개척되면서 사라졌다.

스타 시스템 : 언론에 의해 사생활 대부분이 공개되는 유명 배우의 출연을 앞세운 영화 제작자들의 제작 방침.

비트족 : 비트(beat)는 영어로 “두드리기”라는 뜻을 가졌는데, 이 의미를 확장하여 리듬있는 음악(락앤롤)로 해석할 수 있다. 비트족은 리듬있는 음악을 좋아하고 옷을 입는 방식과 행동 등으로 사회와 자발적으로 멀어지고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을 선택한 젊은이들을 일컫는 용어다.


1. 마릴린 먼로(1926-1962), 헐리우드 스타 시스템의 간판스타

p.79

2. 로이 리히텐슈타인, 아를르의 침실

1992, 320mm x 420.4 mm. 개인 컬랙션

3. 1955년 월트 디즈니 만화영화의 주인공을 테마로 만들어진 최초의 놀이공원인 디즈니랜드.

 1  초창기 월트 디즈니 만화 제목과 주인공을 찾아라.
 2  어느 나라 문화권에 이 만화들은 속하는가?
 3  디즈니랜드에서는 오직 미국 문화만 보급된다고 할 수 있는가?

4. 잭 케루악, 길 위에서

다가오던 터무니없는 사건의 회오리바람은 그 때 불어 닥쳤다. 이 바람은 내 친구와 남아있던 가족 모두를 미국의 밤하늘 위에 뜬 커다란 먼지 구름 속으로 내동댕이쳤다. [...] 나란히, 그들을 엮어준 첫 번째 우정과 비슷한 방식으로 모든 사물을 음미하며 그들은 길거리로 뛰쳐나갔다 [...] 그러다 갑자기 길거리에서 미친 노숙자들처럼 춤을 추면서 그들은 어디론가 훌쩍 가버리곤 했다. 그리고 나는 내 관심을 끄는 사람들을 만나면 항상 그랬던 것처럼 휘청거리며 그들을 쫓았다. 왜냐하면 내게는 오로지 미친 사람, 즉 미친 듯이 살고, 미친 듯이 말하고, 미친 듯이 구원받으려 하고, 뭐든지 욕망하고, 절대 하품이나 진부한 말을 하지 않으며, 다만 황금빛의 멋진 로마 꽃불이 솟아올라 하늘의 별을 가로지르며 거미 모양으로 작렬하는 가운데 파란 꽃불이 펑 터지는 것처럼, 모두 “우와!”하고 감탄할 만큼 활활 타오르는 그런 사라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잭 케루악, 길 위에서, 1960

1 잭 케루악이 누구인지 조사하라.
2 이 텍스트는 어떤 문화 트렌드의 전조인가?

5. 어느 한 반체제주의자의 변화 : 1968년의 제리 루빈 : “do it(그것을 해라)”

제리 루빈은 1968년 “Do it”(그것을 해라)에서 이와 같이 선언한다 : “정치인들은 게토가 불에 타오를 때만 빈민들의 존재를 깨닫는다. 군사 장부가 처음으로 불에 탔을 때 펜타곤의 나라엔 난리가 났다. 국기도 태우고, 교회도 태워라. 태워라! 태워라! 태워라!”

...그리고 1980년의 그. 제리 루빈은 1980년 7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 “정치와 혁명이 1960년대를 수놓았다. 1980년대는 돈과 금융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내가 사는 이 사회에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돈만이 부여할 수 있는 권력이 내겐 필요하다. 월 스트리트여 안녕, 내가 왔도다!”

6. 우드스턱 축제, 1969년

300 000여명의 젊은 남녀는 3일 밤낮으로 조 카커, 지미 핸드릭스, 리치 하벤스, 존 바에즈, Ten years after, Crosby, Still, Nash와 Young, 그리고 1960년대의 팝, 록 그룹의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몰려든다. 그들은 베트남 전쟁에 참가하는 미국 정부를 규탄하고, 마약을 흡입하며 성적 자유를 외친다.

p.82

지도

미국의 영향권 안에 있는 세계

1970년대 초,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민주주의 체제를 이룩했다. 미국은 42개 국가와 80개의 조약을 서명했고, 그들의 군사 베이스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설치됐다.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6개의 군함은 모든 대양에서 활동한다. 특히 3개의 지역이 미국의 군사 전개 영향권에 직접적으로 들어가 있다 : - 아메리카 대륙, 먼로 독트린(1823) 이후 미국 외에 아무도 손댈 수 없는 곳이며, 그들의 헤게모니에 위협이 될 만한 체제를 차단하기 위해 군사개입을 하기도 한다. - 유럽과 지중해에는 독일을 혹시 모를 러시아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300 000명의 군인과 여섯 번째 군함을 배치하였다. - 동남아, 남한부터 월남까지. 이미 일부에서 큰 반감을 일으키는 미국의 영향력은 군사 작전 이외에도 경제적(다국적 기업), 문화적(영화, 텔레비전) 형태를 띤다.

1. 1970년 경 미국 영향권 안에 있는 세계

2. 먼로 독트린(1823)

유럽 강대국들과의 미국의 친선관계가 있기에, 우리는 그들의 영향력을 우리 영토 어느 부분에라도 행사하려 한다면, 그것은 우리 안보와 안녕을 위협하는 시도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 관하여], 유럽의 열강이 그들을 억압하거나, 그들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려 한다면, 이것은 미국에 대한 그들의 비우호적 행위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처사이다.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일반교서, 1823년 12월 2일

질문

1. 먼로 독트린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자료 1)? 이 “독트린”은 아직까지도 미국에서 유효한가?

2. 파나마 운하 지배권을 갖는 일은 미국에 왜 반드시 필요한가? 쿠바는 미국에 어떤 중요성을 갖는가?

3. 왜 미국이 유럽에 주둔하는 것이 중요한지 설명하여라.

4. 보라색으로 줄쳐진 3개의 지역이 미국의 국방안보에 왜 필수적인지 설명하여라.


p.84

복습 페이지

기억해야 할 사건

1950 : 매카시즘 시초

1961-1963 : 케네디 대통령 임기, 미국의 베트남전 참가

1964 : 공권에 관한 첫 번째 법안 입법

1969 : 인류 최초 달 착륙

1975 : 미국 베트남전 패전


하이라이트

1. 미국형 모델의 전성기 : 1950년대

■ 토대 : 민주주의, 기회의 평등, 도전의 자유, 개인 간 경쟁. 하지만 : - 인종 분리, 차별. 그로 인하여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항쟁. - 3~4천 만 명의 미국인이 빈곤층. 복지 국가 시스템 강화.

■ 풍부한 미국 문화 : 헤밍웨이와 스타인벡의 노벨 문학상 수상; 화가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팝 아트) ; 재즈 ; 할리우드 영화.

2. 미국, 자유로운 세계의 수장

■ 마셜 플랜(1947), 북대서양 조약(1949), 러시아의 잠재적 침략 가능성에 대비한 미군의 유럽 주둔.

■ 아시아에서 거둔 성공과 실패 : 일본은 민주주의 국가가 되고 미국의 연합국이 된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중국에서 승리한다(1949). 한국 전쟁. 베트남에서는 : 케네디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베트남전 참가. 1975년 미국의 패배.

3. 1960년대 : 도마 위에 오른 미국형 모델

■ 소수 민족들이 평등한 권리를 요구함. 멜팅폿은 더 이상 유효한 모델이 아님. 도시에서는 반란이 일어남.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짐.

■ 대항문화의 영향력이 점점 커짐(비트족과 히피족).

■ 케네디 대통령(1963)과 마틴 루터 킹(1968)의 암살로 충격에 빠진 미국은 더구나 미국 역사상 최초의 패전인 베트남전에서의 패배로 혼돈과 회의에 빠진다.


헷갈리지 말 것

연방국과 국가

▶ 1776년, 영국이 갖고 있던 13개의 북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한다. 이 13개 신생 주가 모여 한 개의 연방국을 형성 한다 : United States of America(미합중국). 이들은 헌법을 도입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부에 새로 생긴 주는 연방국에 편입된다. ▶ 각 주는 자신만의 헌법을 도입하고, 행정부, 입법부를 뽑고, 사법부를 임명한다. 이들은 화폐와 대외 정책(외교)을 통일한다.

민주당과 공화당

▶ 공화당은 링컨의 사상을 계승한 정당으로 사업가들(“big business”)을 지지하는 측면이 강하여 부유층 지지자들이 많다. ▶ 민주당은 연방 정부의 역할을 더 강화시키길 원하고, 소수 민족들의 지지를 받는다. 전통적으로 남부지역에서 우세하며 오랫동안 인종 분리 정책을 지지해 왔다.

1945년 이후 미국의 대통령들

▶ 선거는 4마다 한 번, 11월 첫 월요일 다음날인 화요일에 치러진다. 사망, 질명, 사퇴로 인한 재선거는 없다. 대통령이 임기 중 사망하거나 대통령직을 내려놓아야 할 경우, 부통령이 그 뒤를 잇는다. 1951년부터 대통령 선거에는 한 번 출마 가능하다. “


p.85

역사 자료 해석 (3/15)

주제 : 워터게이트 사건

저는 미국 국민여러분께서 의심의 그림자 없이, 제 대통령 임기동안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누구든 간에 정의가 정직하게, 완전하게 그리고 공정하게 구현될 것이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리처드 닉슨, 1973년 4월 30일

“6월 23일의 녹음파일은 당시 사건의 정치적인 면모에 대해 제가 의논한 것을 보여주고, 저의 재선을 위해 조직된 위원회에 관련된 사람들의 사건 개입을 폭로하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 제가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음을 제가 잘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리처드 닉슨, 1974년 8월 5일

“대통령으로서 저는 미국의 이익을 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특히 국내와 국외에서 여러 문제에 부닥쳐 있는 이 시기의 미국은 풀타임 대통령과 풀타임 의회가 필요합니다. 대외적으로는 평화의 문제, 대내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이 없는 번영에 전적으로 집중해야 하는 시기에 제 개인적인 변명을 위해 앞으로 몇 달 동안 내내 계속 싸움을 한다면 대통령과 의회 모두 시간과 주의력을 거의 전부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내일 정오를 기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겠습니다. 포드 부통령이 그 시각에 이 사무실에서 대통령 선서를 할 것입니다.” 리처드 닉슨, 1974년 8월 8일

1974년 7월 24일 미국 연방 대법원이 내린 판결

“행정부가 형사 재판에 당연히 필요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정의에 호소할 수 있는 모두의 권리에 큰 타격을 입히는 것이며, 재판관들의 본질적인 기능을 크게 훼손하는 일이다”

사건 연대기

▶ 1972년 6월 17일 : 민주당 본부가 있는 워터게이트 빌딩 도난사건 발생. 도둑들은 체포되었고, 경찰은 이들이 백악관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냄. ▶ 6월 22일 : 닉슨 대통령(1913-1994)은 자신이 도난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밝힘. ▶ 6월 23일 : 1973년 8월 5일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닉슨과 그의 보좌관 로버트 핼더먼의 대화. ▶ 11월 7일 : 대통령 선거. 닉슨 재당선. ▶ 1973년 초 : 도둑들에 대한 형사 재판. 여러 기자들이 사건 전말에 대한 심층 조사 착수. ▶ 1973년 4월 30일 : 로버트 핼더먼 사퇴 ▶ 7월 16일 : 한 증인이 닉슨이 나눈 모든 대화가 자기 테이프에 녹음되었다고 증언함. ▶ 1974년 2월 6일 : 하원은 탄핵 절차 개시에 찬성함. ▶ 7월 24일 : 연방 대법원은 닉슨에게 녹음 파일 전부를 제출할 것을 지시함. ▶ 7월 27-30일 : 탄핵 절차 개시. ▶ 8월 5일 : 닉슨은 공개석상에서 자백함. ▶ 8월 9일 : 닉슨이 사퇴하고,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미국의 대통령이 됨.

질문

1. 닉슨 대통령의 연설문에서 감지되는 변화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2. 닉슨은 어떤 죄를 저질렀는가? 그가 탄핵의 대상이 된 원인은 무엇인가?
3. 탄핵 절차 개시가 닉슨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었는가?
4. 워터게이트 사건이 미국형 모델을 훼손했다는 것을 보여주어라.  

접근 방법

A. 어떻게 연대기를 사용할까?

설명해야 할 자료는 여러 개의 텍스트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사항을 준수해야 한다 :

● 연대기의 순서를 확인해야 한다. 연대기는 단순히 암기에 도움을 주는 자료가 아니라 그 자체로 역사를 접근하는데 큰 의미가 있다. ● 연대기에 제시되어 있는 날짜를 보고 텍스트를 시간상으로 위치시켜야 한다. ● 질문이 언급하는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확인하고 연대기와 날짜가 들어있는 자료와 연결시켜야 한다.

B. 질문에 대한 답변 관련 도움말

질문 1 : 사건에 개입된 인물들과 그들의 역할, 그리고 그들의 임무 등을 잘 파악하기. 
질문 3 : 미국의 기관들에 대한 본인의 지식을 확인하기 : 연방 대법원, 하원.
질문 3 : 미국 대통령에게 부여된 권한이 무엇인지 기억하기.

제 5 장 : 소련형 모델

전쟁 끝난 후 소련은 세계에서 두 번째 가는 초강대국이다.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중부유럽과 동유럽을 평정한 소련은 막강한 군사력에 힘입어 1970년대 말까지 초강대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간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스탈린이 1930년대에 구축한 소련형 모델 – 중앙화, 계획화, 관료화, 개인의 이니셔티브에 대한 통제, 경찰 감시-은 점점 사회에 큰 부담을 안긴다. 소련형 모델은 결국 위기를 맞는다. 1980년대 후반에 고르바초프가 감행한 개혁은 이미 늦었고 개혁 자체가 불가능했던 소련형 모델을 구하기엔 역부족이었다. 1991년, 소련은 파멸의 길로 치닫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1950-60년대 소련형 모델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 모델이 그 후 어떻게 변화하고 1991년도에 왜 사라지게 되는가?

1, 초강대국에서...

혁명 68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펼쳐진 군사 퍼레이드(1985년 11월 7일). “우리는 공산당이 전 세계에서 결국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 이러한 확신은 사회 발전의 섭리에 대한 지식을 근거로 한다.”

니키타 흐루시초프, <평화적 공존에 대한 나의 생각>, 1960년

p.89

2. ... 소비에트 시스템의 붕괴까지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1991년 12월 전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러시아 국회 연단에서 끌어내린다.“1991년 8월의 쿠데타는 급변사태를 극단으로 치닫게 했다. 이 급변사태가 야기한 가장 최악의 상황은 바로 국가의 붕괴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우리 국민들이 강대국 시민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 결과는 우리 모두에게 심각하게 미칠 것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1991년 12월 25일.

p.91

자료집

마르크시즘-레니니즘의 원칙

소련 체제는 19세기 카를 마르크스(1818-1883),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의 저서인 <공산당 선언>(1848)과 <자본론>(1867-1894)으로부터 탄생한 공식 이데올로기(이념)를 근간으로 세워졌다. 마르크시즘인 이 이데올로기는 20세기 초 레닌(1870-1924)이라 불리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아노프에 의해 수정, 보안되어 20세기 중반에 불변의 이데올로기인 “마르크시즘-레니니즘”으로 자리 잡았다. 마르크시즘 레니니즘은 소련 진영의 모든 학교와 대학교에서 세상사를 설명할 수 있는 과학으로서 가르쳐졌다.

1. 소련의 벽보, 1953년. A. 코쏘프 작.

“무적의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의 위대한 깃발 만세.”

2. 계급투쟁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모든 인간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 오늘날 우리는 부르주아지 시대에 살고있고, 이 시대는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 계급의 대립을 단순화시켰기 때문이다. 점점 사회 전체가 두 개의 상반된 계급인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로 나뉘고 있다. [...] 부르주아지, 즉 자본이 성장하면서 프롤레타리아도 같이 성장한다. 내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는 바로 일을 찾아야만 살아갈 수 있고, 자본을 증대시키는 일만 진정한 일로 취급받는 근대 노동자 계층을 의미한다. [...] 모든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은 현재의 사회적 정치적 상태에 반기를 드는 혁명 운동을 지지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과거의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뒤엎어야만 그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사회 지도층은 다가올 공산혁명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이라곤 그들을 속박하고 있는 사슬뿐이다. 그리고 지금의 세계는 그들이 무언가 쟁취할 수 있는 그런 세계다.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여, 모두 단결하시오!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1848년

3. 프롤레타리아의 역할

가장 이성적인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7년 11월에 <공산당 선언>에서 국가에 관해 쓴 내용을 분석하는 일일 것이다. “노동 혁명의 첫 번째 단계는 프롤레타리아가 지배 계급으로 승격하는 것이다 [...]. 프롤레타리아는 정치적 우위를 사용하여 부르주아지로부터 자본을 쟁취하고, 국가, 즉 지배 계급으로 조직화된 프롤레타리아가가 모든 생산 도구를 중앙집권화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며, 빠른 시일 내에 생산력을 제고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p.37 1906년 독일어 판, 7쇄). 여기서 국가에 관한 마르크시즘의 가장 놀랍고 중요한 사상이 서술된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파리 코뮌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말한 것처럼)가 그것이다. 우리는 그 다음 국가의 정의를 “국가, 즉 지배 계급으로 조직화된 프롤레타리아”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국가의 정의[...]는 개량주의와는 절대적으로 상충관계에 놓여있다. 이것은 기존 기회주의자들의 편견과 “민주주의로 향하는 평화적 발전”이란 환상에 젖은 작은 부르주아지와 정면충돌한다. 국가는 권력을 특별히 조직한 것이나 다름없다. 국가는 한 계층을 진압하기 위해 필요한 폭력을 조직화 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진압해야 할 계급은 누구일까? 바로 착취를 일삼는 계습, 부르주아지다. 국가는 오로지 노동자들이 착취자들의 저항을 억압할 때만 필요한 존재다. 그리고 오로지 프롤레타리아만이 혁명 계급으로서 이 일을 수행할 수 있다.

레닌, “국가와 혁명, 프로그레(Progres) 출판사, 모스크바, 1967년

4. “프롤레타리아의 전위”

마르크스가 국가와 사회주의 혁명에 적용하는 계급투쟁 이론은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지배,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필연적으로 이어진다. 즉 프롤레타리아는 그 누구와도 권력을 나눠 갖지 않고, 이 권력은 무장한 군중의 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것이다. [...] 프롤레타리아는 착취자들의 저항을 진압하고 군중을 통솔하기 위해 힘을 중앙집권화하고 폭력을 조직화할 필요가 있다 [...]. 노동당을 가르치면서 마르크시즘은 권력을 쟁취하고 국민 모두를 사회주의로 인도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전위를 가르친다.

레닌, <국가와 혁명>, 프로그레(Progrs) 출판사, 모스크바, 1967년

p.91

5. 스탈린이 본 레닌의 역할

레닌은 자발적인 노동 운동을 지휘하고 혁명 정신을 불어넣는 당의 이론과 의식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매우 드높였다. 마르크스는 마르크시스트 당이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융합이라는 마르크시즘의 근본 원리를 훌륭히 증명했다 [...]. 이 원리들은 훗날 볼셰비키 당의 이념 토대가 된 <무엇을 해야 하나?>에서 전개된 이론이다.

요세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볼셰비키) 역사 개요>, 날짜 없음.

6. 스탈린의 당원 증명서

No. 000001은 레닌에게 부여됐었다.

7. 국가와 당.

8. 마르크시즘 레니니즘, 하나의 과학.

마르크시즘 레니니즘은 사회발전, 사회주의 혁명과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법칙의 과학,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 건립의 과학이다. 마르크시즘 레니니즘은 다음과 같은 세 개의 부문을 포함하고 있는 조화로운 과학 체계이다 : 철학, 정치 경제, 과학적 공산주의 이론. 마르크시즘 레니니즘에 따르면 자연과 사회는 고립된 현상들의 축적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반대로 이들은 서로 연결되어있고 상호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 현상들의 밀접한 관계는 자연과 사회 진화 법칙에 나타난다. 경제 법칙이 사회 발전을 좌지우지한다. 경제 법칙이야말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사회적 생산 관계의 다양함의 원인이다. 이 관계는 다시 말해 생산, 분배, 교환, 소비 범위에서 발생하는 관계이다. 자연과 사회의 법칙은 객관적인 것이 특징이다. 즉 이 법칙들은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을 알건 모르건, 표면화 되어 현실 속에서 작용한다.

P. 니키틴, <정치적 경제 원리>, 모스크바 출판사, 1966년.

9. 1992년 모스크바에 게시된 벽보


질문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그림 속 인물들은 누구인가? 소련의 설립에서 그들의 저서와 행동들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자료 1)?

2. 마르크스에 따르면 혁명은 불가피한가(자료 2)? 왜 그런가?

3. 레닌에게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자료 3)?

4. 이 독재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하는가(자료 3)?

5. “프롤레타리아의 전위”에 어떤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까(자료 4)?

6. 마르크시즘 레니니즘의 어떤 원칙이 이 권력의 조직에 적용되었는가(자료 7)?

7. 마르크시즘 레니니즘이 하나의 과학으로 소개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어라(자료 8).

8. 이 벽보는 마르크시즘의 어떤 전망을 나타내는가(자료 9)?

B. 자료 연관짓기

9. 스탈린이 마르크스와 레닌의 계보를 이으려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는 어떤 것들인가?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어떤 수단을 사용하는가?

C. 논술

10. 이 페이지에 소개된 마르크시즘 레니니즘의 원칙을 요약하는 문단 한 개를 작성하여라.


1. 1950년대 초 소련형 모델

A. 소련, 전체주의 체제 자료 2, 3, 5

모든 전체주의 체제처럼, 스탈린 체제는 KGB와 사상 감시 등 경찰의 강력한 탄압 정책에 의해 유지된다. 굴라그와 같은 집단 수용소는 2천 5백 만 명 이상의 수감자들을 가둘 정도로 이시기에 절정을 이룬다. 이들은 방대한 공사 현장이나 살기 힘든 지역인 북부지역, 시베리아, 카자흐스탄 등에 수감된다. 세계가 두 개의 상충된 진영으로 나뉜 가운데 1947년부터 사람들의 이념에 대한 감시가 더욱 강화된다. “문란한 서양”문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 모든 창조 활동에 대한 대규모 이념적 공세가 계획된다. 소련 체제는 공식 문학과 프로파간다 예술 도입을 강요한다. “범세계주의”의 비판여론은 1953년 절정에 달하는 반유대주의로 이어진다. 크레믈린의 유대인 의사들이 스탈린을 살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된 “의사들의 음모” 진압 사건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1953년 3월 5일 독재자의 죽음만이 공포 정치의 막을 내릴 수 있었다.

B. 계획경제와 산업화

1930년대 초부터 계획경제가 시장경제를 대체한다. 5개년 계획(1928-1932; 1933-1937; 1938-1942)은 나라의 군사력과 경제적 자립을 위해 필수 요소로 여겨지는 중공업 발전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소비재 산업은 그에 비해 비교적으로 방치된다. 이와 같은 전향으로 피해를 받는 것은 소련 국민들이었다. 하지만 이는 곧 “위대한 애국 전쟁”(1941-1945)동안 정당화 되었다. 왜냐하면 소련은 기존의 산업 기반을 전시 산업으로 빠르게 전환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소련인 2천 6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네 번째 계획(1946-1950)은 초토화된 나라의 재건을 목표로 삼았다. 방향은 초기 5개년 계획과 같았다. 중공업과 인프라 건설에 막강한 투자가 집중되고 우선시되면서 주민들은 지쳐갔고 이들의 생활수준은 나아지는 게 거의 없었다. 거대한 제철 복합단지와 대규모 수력 발전소 덕분에 소련은 냉전 시대에 접어들면서 세계 2대 군사, 산업 대국으로 군림한다.

C. 스탈린 시대의 소련 사회 자료 1, 4

1929년, 소련은 원자폭탄 소유국이 되지만 국민들의 주거 문제와 식량 보급 문제의 해법을 찾지 못한다. 가게 앞에 늘어선 긴 줄, 불결하고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주택들의 밀집, 직장 변경 불가, 10에서 12시간의 긴 노동시간 등이 도시에 사는 소련인들의 일상이다. 하지만 시골의 사정이 가장 열악하다. 1929년부터 시작된 경작지의 강제 공유화는 소련 농업에 오랜 시간동안 혼란을 야기하였다. 곡식 생산 수준은 1939년이 되어서야 1913년에 달성했던 수치를 겨우 따라잡는다. 당국의 시각에서 보면 목적은 분명히 달성됐다. 콜호즈 정책의 일환으로 농민들은 국가가 정한 매우 낮은 가격에 수확물을 양도해야 했고 국가는 적은 비용으로 도시에 사는 산업 인부들의 먹거리를 책임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징수는 모든 발전 가능성을 차단시켰다. 농부와 그의 땅 사이의 관계가 사라지면서 콜호즈의 농부는 “공동” 경작지에서 성의 없이 일을 하고, 당국이 개인 소유를 허가한 얼마 안 되는 자신의 토지에 전력을 쏟는다. 1947년, 극심한 흉작이 러시아 서부지역을 강타한다. 농업의 어려움이 점점 소련 경제와 소련인들의 삶을 짓누른다.


용어

KGB(Komitet Gosudarstvennoi Bezopastnosti, “소련 국가 안전 위원회”) : 정치 감시, 경찰 진압, 첩보, 반첩보 활동 기관으로 1954년 설립되었다. KGB는 1946년에 생긴 MGB의 기능을 물려받았고 1917년 12월 7일 생긴 체카와 1922년에 생긴 게페우 그리고 1934년에 설립된 NKVD의 뒤를 잇는다. KGB는 1991년 사라졌다.

전체주의 체제 : p.246 참고하기

콜호즈(Kolkhoze, 러시아어로 “공동 경작”을 의미함): 소련의 농민 협동조합 역할을 함.


1. 프로파간다와 현실

a. 1947년 소련의 포스터

“일을 잘하는 자는 수확도 잘한다”

b. 1947년 보로네즈 지역에 발생한 기근

검열기관은 537통의 편지를 걸러냈는데 [...] 그 편지에는 농민들이 콜호즈를 떠나겠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1947년 3월 23일. “여기서 우린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어. 빵도 없고, 감자는 100루블이나 해. 사람들은 도망갈 수 있으면 도망가고 있어. 콜호즈에 남아 있으려 하는 사람은 없어. 우린 하루종일 일해도 아무것도 못 받는 상황이야.”

1947년 3월 31일. “[...] 우리는 빵이나 콜호즈에서 나온 감자 1그램도 받지 못했어. 우리는 빵을 사려고 우리집에 있던 가축을 모두 팔았어. 정말 사는 게 너무 힘들어. 마을을 떠난 사람들이 매우 많아.” 국가 공안부 보고서, 1947년 5월 8일

 1  이 편지들은 소련 상황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주는가?
 2  이 편지들이 검열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2. 스탈린의 탄생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합창 공연, 1049년 12월, 볼쵸이 극장.

단원들이 입은 의상은 소련을 구성하는 15개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들을 상징한다.

3. “의사들의 음모”

크레믈린의 한 의사들 일당이 테러와 간첩행위에 가담한 사실을 밝힌 공식 성명이 스베르드로프스크 주민들의 큰 관심사가 되었다. [...]. 발표된 정보의 진실성에 의구심을 일으키기 위한 몇몇 이 성명에 반대하는 세력과 의학계 인사들의 시도가 있었다, [...]. 유태인들에 대한 적대심이 커져가고 있다. 당원이자 217번 공장장인 옐리아빈은 그 예로 이렇게 말했다 : “유태인들이 한 얘기 들으셨습니까 [...] 그들은 우리 장군님들을 독살하려 했습니다. 미국과 영국의 지령을 받았다지요. 나는 그 사람들을 총살하는 것보다 인민 광장에서 목 매달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소련 정권에 대한 적대적인 음모 혐의를 받는 유태인들을 고발하는 사례가 매우 많습니다.”

“의사들의 음모”(1953년 1월 14일)를 발표한 후 주민들의 반응에 관한 국가 공안부의 우랄 지역 본부가 전한 내용. N. 베르트, G. 물렉이 <소련의 비밀 보고서, 1921-1991>에서 인용한 내용.

 1 체제에 반대하는 이들은 어떤 식으로 불리는가?
 2 이 보고서는 어떤 감정을 보여주는가?

4. 1970년대 우즈베키스탄의 벽보.

“소련 경찰은 국민과 밀접하다.” 1970년대에는 1950년대와 마찬가지로 프로파간다가 소련 민족의 단일성을 꾸준히 찬양하였다.

5.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가 쓴 스탈린에 대한 극찬

[...] 수천명의 동지가 카를 마르크스를 지지했고 수천명의 동지가 레닌을 지지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내일의 우리를 위하여 현재 존재한다 스탈린은 오늘날의 불행을 없앤다 신뢰감은 사랑으로 가득 찬 그의 뇌에서 나온 열매다. 그것은 가장 완벽한 이성의 포도송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가을을 모르고 살아간다 스탈린의 미래는 늘 되살아난다 [...].

폴 엘뤼아르, “요세프 스탈린”에서 발췌, <작품 전집>, 플레이아드 문고, 갈리마르 출판사, 1949년 12월.


p.94

자료집

굴라그

소련 체제가 수립될 당시 체제에 반대하는 이들을 탄압하기 위한 시스템도 같이 만들어졌다. 바로 1920년대 말에 생긴 굴라그다. 굴라그는 북부 지역이나 시베리아에 설치된 강제 노동 캠프의 거대한 집합을 일컫는다. “제크(zek)”라고 불리는 수감자들의 명분은 다양하다. 조그만 절도라도 처벌하는 법에 희생된 이들도 있고, 체제를 비난한 러시아 인 이외의 국수주의자들, 발트족, 체첸 사람들, 러시아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 등이 있었다. 이들은 거대한 공사 현장(돈 볼가 운하, 수력 댐, 탄광)에 투입되었다. 1950년대 초, 이 시스템은 점점 비생산적으로 변해간다. 흐루시초프는 결국 대다수의 수감자들을 해방시킨다.

용어

굴라그 : Glovnoie Oupravleinie Laguieriei(“수용소 중심 본부”)의 줄임말. 이 용어는 확장된 의미로 강제 노동 수용소 자체를 뜻한다.

제크(zek) : 수감자를 뜻하는 zaklioutchenni의 줄임말.


1. 전쟁 직후의 굴라그 현황

2. 수감자들 이송 및 수용소 도착 과정

“겨울에 이동을 하는 건 공포의 극치이자 죽음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감시에 혈안이 된 호위대는 25개의 난로에 석탄을 일일이 넣을 만큼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염이 한창인 여름의 이송과정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빛들이창 네 개 중 두 개가 아예 밀폐됐고 지붕은 과열된 상태다 [...]. 사람들을 무개화차에 과연 어떻게 실어 나를까? 또 그들을 어떻게 감시할까? 호송대는 여러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자, 어떻게 했는지 살펴보자. 그들은 몸을 움츠리라고 우리에게 지시했고, 서로의 몸 위에 누우라고 명령한 뒤 거대한 덮개로 우리를 한꺼번에 덮어버렸다, 포템킨호의 선원들처럼 말이다. 안 그러면 우리를 총으로 쏴버린다고 위협했다. 덮개로 덮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북쪽지역에 있었던 올레니오프와 그의 동지들은 지붕이 없는 무개화차 위에서 하루 종일을 보내야 했다. 앞서 말한 이 좁은 철로의 종착역에서 제크를 맞이한 기이한 광경은 무엇이었을까? 건물? 단언컨대 한 채도 없었다. 어떻게 이런데서 살지? 글쎄, “산다”라.. 천막 밑에서 살아야 했다.“ [...] ”무릎 굻어“ ”옷 벗어!“. 호송대가 내리던 규정된 명령들은 절대적인 권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떠한 대화도, 타협도 불가했다. 나체가 된 사람은 사실상 모든 자신감을 잃기 마련이고, 그는 옷을 입은 이와는 동등한 선상에서 대화를 나누는 게 불가능하다. 수색이 시작된다. 나체인 사람들은 방금 벗은 옷가지들과 소지품을 손에 쥔 채 앞으로 나간다. 주위에는 무장한 군인 무리가 목을 지키고 있다. 마치 호송되는 기분이 아니라 바로 현장에서 총살당하거나 가스실로 끌려가는 느낌을 받는다. 이와 같은 상태에선,s 자기 소지품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군인들은 가방을 비우고 흔든다. 물건들이 굴러 떨어지고 따로 쌓이기 시작한다 [...] 그리고 해가 질 무렵 수감자들을 태운 마지막 트럭이 마당을 떠나면 수감자들은 호송대 사람들이 가장 마음에 드는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해 달려드는 광경을 볼 수 있다.

A. 솔제니친, <굴라그 열도>, 쐬이(Seuil) 출판사, 1974년


3. 콜리마에 수감되었던 사람의 증언(1940년대)

수용소에서는 20일에서 30일이면 건강한 남성을 낙오자로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수용소에 있는 탄광에서 하루에 16시간동안 일해야 했고 휴일은 없었다. 끊임없는 배고픔에 시달렸고 걸칠 것이라곤 누더기 옷뿐이었다. 영하 60도에서 찢어진 천막 안에서 수감자는 자야했다. 이 모는 것들이 수감자의 모든 것을 파괴시켰고, 현장감독, 경비, 치안 담당관의 매질은 수감자 상태의 악화를 촉진시켰다. 금광에서 처음 한 계절을 시작했던 팀들 중(팀들은 그들의 우두머리 이름으로 불렸다), 계절이 끝날 무렵엔 감독관과 그의 연락병 그리고 그의 몇몇 친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머지는 여름 내내 여러 차례 교체되었다. 금광은 주기적으로 거기서 나온 폐기물을 병원, “회복기 환자와 불구자 병동”, 그리고 “동지들의 공동묘지”인 공동묘혈로 보내곤 했다.

바를란 찰라모프, 1929년부터 1932년까지 그리고 1937년부터 1951년까지 굴라그에서 생활, <콜리마 이야기>, 1969년

4. 사라토프-스탈린그라드 구간 철도, 1950년대 초, 성토 공사 현장.

5. 굴라그 수감자 현황

6. 흐루시초프가 발트-백해 운하의 강제 노동 현장을 시찰하고 있다, 1930년대.


질문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무슨 이유로 발트족, 타타르족, 체첸족과 코카시아 민족들은 강제 이송을 당하였는가(자료 1)?

2. 수감자들은 무엇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려 하는가(자료 2)?

3. “건강한 남성을 낙오자로 만들기” 위해 고작 20에서 30일일 걸리는 이유는 무엇인가(자료 3)?

4. 스탈린 독재정권 말년의 특징은 어떤 것들인가(자료 5)?

B. 자료 연관짓기

5. 생활 조건을 더욱 어렵게 하는 요소들이 무엇인가(자료 2, 3, 4)?

C. 논술

6. 스탈린 체제 하의 소련에서 굴라그의 중요성은 어느 정도인가?


p.96


2. 니키타 흐루시초프의 소련(1953-1964)


A. 비스탈린화와 그 한계 자료 1, 2, 3, 5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은 한 시대의 끝을 알리지만 소련형 모델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몇 년 사이에 소련은 전체주의 시스템에서 독재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스탈린의 후계자들은 모두 공통 고민이 있었다. 바로 새로운 독재자의 재림을 막고, 집단 박해의 뿌리를 뽑는 일이었다. 공산당 제1 서기관인 흐루시초프는 1953년 말 스탈린 체제 하 정치범 경찰총장이었던 베리아가 사형되고 스탈린의 후계자였던 말렌코프가 정부 수장의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크레믈린 궁의 새로운 권력자로 떠오른다. 1956년 2월에 열린 제 20차 소련 공산당 회의에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주의와 확실한 결별을 선언한다. 그는 비밀 보고서에서 스탈린이 조직한 “개인숭배”를 고발한다. 흐루시초프는 “진정한 레닌주의”에 입각한 공산주의 원칙을 고수하고 당의 책임 문제는 회피한다. 서구진영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냉전 체제에서 “평화적 공존”체제로의 전향을 제안한다.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도 사회주의의 다양한 노선을 인정하고 유고슬라비아의 수장인 티토와도 화해한다. 소련형 모델은 더 이상 하나의 노선으로 통제되지 않는다. 이러한 변화는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다. 1956년 10월 부다페스트에서 공산정권 자체를 뒤엎기 위한 민중 항쟁이 일어난다. 헝가리는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탈퇴하겠다고 협박한다. 소련에 있어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행위이었기에 부다페스트 폭동사태는 1956년 11월 소련의 장갑차에 의해 진압되는 유혈사태로 끝이 난다. 이는 즉 소련의 위성국이 소련 체제를 함부로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B.혁신의 시도... 자료 4, 7

흐루시초프에게 비스탈린화는 비효율적이었던 경제 시스템을 개혁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을 따라잡고 추월하기”가 1957년 5월 당이 내건 슬로건이었다. 공산당의 승리는 풍족함과 사회적 발전이 따라 주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1959년 발표된 계획은 소비재 산업, 주거지와 농업 육성에 중점을 두었다. 국민들의 생활 조건을 점점 좋아졌다. 퇴직 연령이 남성은 60세, 여성은 55세로 낮춰졌고, 주간 노동시간은 49시간에서 42시간으로 감소했으며, 새 주거 건물이 세워져 콜호즈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 전반이 나아졌다. 소련인들에게 흐루시초프 집권 시기는 생활 조건 개선의 동의어로 인식된다.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흐루시초프는 카자흐스탄 대초원과 “처녀 토지”의 개척, 조직적인 옥수수 농사 육성등과 같은 대형 농업 계획을 시행시킨다. 그러나 혹한과 관리주의의 우둔함을 고려하지 않은 채 시행된 비현실적인 이 계획들은 실패로 끝난다. 반대로 소련은 우주 정복에 있어서는 눈부신 성과를 얻는다. 1957년 소련은 첫 번째 인공위성인 스푸트닉호를 띄운다. 1961년에는 유리 가가린이 우주 최초의 비행사로 역사에 남게 된다.

C. ...는 실패로 끝나고. 자료 6

흐루시초프는 정치 시스템의 중앙집권화를 끝내고 관료주의 네트워크를 분해하려는 개혁으로 인해 본인들의 특권이 사라지려고 하자 이에 반감이 든 막강한 노멘클라투라의 적의에 부딪힌다.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는 쿠바 급변 사태로 인해 힘이 약해져 결국 나머지 당 지도부원들에 의해 모든 직책에서 쫓겨난다. 흐루시초프의 자리는 합의제 지도부로 대체된다.


용어

노멘클라투라 : 소련에서 가장 중요한 고위 행정직 리스트. 확장된 의미로 노멘클라투라는 이 리스트에 올라 이와 관련된 많은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1. 흐루시초프의 미국 순방.

디모인에서 그는 생에 첫 핫도그를 맛본다(아이오와 주, 미국), 1959년 9월 22일.

2. 흐루시초프가 본 스탈린

스탈린이 내린 명령 중 다수가 권력 남용에 의해 당의 원칙과 사회주의적 법칙을 벗어난 것을 많은 사실들이 증명하고 있다. 스탈린은 경계심이 강하고 병적으로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을 보면서 충분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 “왜 오늘 눈빛이 흔들리죠?” 혹은 “왜 오늘 내 눈을 피하고 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합니까?” 이 병적인 의심은 그를 경계심 가득한 인간으로 만들어 놓았고, 그가 오래전부터 알던 당의 유능한 인사들까지도 경계하게 만들었다. 그는 어딜 가든지 모든 것에서 “적”, “이중인격자”, “간첩”들을 보곤 했다. 무한한 권력의 소유자였던 그이기에, 그는 독단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을 신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무력화시켰다. 스탈린이 누구, 누구가 체포되어야 한다고 말하면 이들을 사실상 “국민의 적”으로 즉시 받아들여야 했다.

제 20회 소련 공산당 회의에서 흐루시초프가 남긴 비밀 연설문 중(1956년 2월 24일)

1. 여기서 볼 수 있는 스탈린의 취약점은 무엇인가?
2. 여기서 공산당 자체를 문제 삼는가? 답변에 근거를 제시하라.
3. “국민의 적”이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를 내릴 수 있는가?

p.97

3. 스탈린의 관을 들고있는 스탈린의 후계자들, 1953년 3월 9일.

4. 풍족함의 원천, 옥수수 1958년 포스터

5. 적(赤)군이 부다페스트 봉기를 진압한 현장(1956년 11월).

도시를 되찾기 위해 투쟁에 가담한 2 000명이 사망하였다.

6. “결과적으로 나쁘지만은 않은 결과”

중앙 위원회의 다수가 저울질을 열심히 한 뒤 흐루시초프의 자질이 그가 남긴 실패를 가리는데 역부족이었다고 스스로 설득 당했음이 분명하다. 그의 실패 원인은 그가 앞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앞서 나가려고만 하는 경향에서 찾을 수 있다. 농업문제도, 베를린, 쿠바, 중국 문제도 그의 예측이 빗나갔을 경우를 대비하지 않은 채 일을 무리하게 진행시킨 결과였다. [...] 그는 과다한 시도로 죄를 지었을지 몰라도 평화를 되찾고 국민들의 생활조건을 개선시켰으므로 그의 업적은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다. 이제 소련이 모든 창의적인 생각이 국가기관의 뒤떨어진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히는 비생산적인 보수주의 국면으로 진입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1964년 10월 17일자 르 몽드지 사설

7. 우주 정복

1961년 4월 14일자 뤼마니테(L’Humanite)지 일면

 1 뤼마니테지에 실린 다음 사설 제목을 설명하여라 : “어제의 유토피아에서 내일의 현실까지”      
 2 이 쾌거로 인해 소련형 모델이 강화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p.98


3. 보수주의와 정체

A.“자스또이”와 당의 역할 자료 1, 5

1964년 흐루시초프를 대체한 합의제 지도부 내에서 레오니드 브레즈네프가 대세로 떠오른다. 그에게서 스탈린처럼 전능한 독재자의 면모를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노멘클라투라를 대표하는 핵심인물로 여겨진다. 보수주의와 정계 인사들의 노화가 브레즈네프 집권 시기(1964-1982)의 특징인 부동상태(자스또이)의 원인이다. 소련형 모델은 더 이상 아무런 혁신이 불가능해 보인다. 

유일하게 허가된 당인 소련 공산당은 정치 생활의 중앙 톱니바퀴 역할을 하는 기구로 계속 남는다. 1980년 천 8백만 명의 당원을 보유하고 있는 소련공산당의 당원증은 학위를 받는데 유용한 “보조 이력”이다. 당 일에 최소한으로 참가해도 당원증은 커리어를 쌓는데 도움이 된다. “게임의 법칙”을 지키고 정부의 공식 입장과 일상에서 마주하는 부정부패, 식량난, 공동체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이 앞서는 파렴치한 “사회주의의 현실” 사이의 모순을 모른 채 하면 될 뿐이다.

B. 불가능한 경제 개혁 자료 3, 6

브레즈네프 시절의 사업가들은 1965년 기업 혁신을 도입한다. 이윤, 노동자들 사이의 이익분배와 자립의 기준을 경영에 새로 도입한다. 이 개혁 시도는 상여금에 적은 관심을 보이는 노동자들의 수동적인 태도와 가게들이 텅 빈 상태가 이어지면서 금방 정체되어 버린다. 1973년 석유 파동이 일어나면서 수입하는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이어지는 5개년 계획은 시베리아에 매몰되어 있는 엄청난 자원(가스, 석유, 금)을 개척하는데 중점을 뒀다. 이러한 선택도 더뎌진 성장률, 생산성 저하, 투자 중지 등과 같은 소련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수많은 제약이 소련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평균 수명 감소, 낙후된 시설, 미국과의 무기 경쟁을 하느라 소요된 기상천외한 군사비용의 증가 등이 그 원인이었다.

C.“시민 사회”의 출현 자료 2, 4

브레즈네프 시대 특유의 정치적 보수주의 아래, 소련 사회는 깊은 변화를 겪는다.

- 인구 증가의 둔화. 출생률이 눈에 띄게 낮아졌다, 그러나 지역 편차가 심하다. 중앙아시아 공화국에 사는 이슬람 인구의 증가율이 평균보다 빠르다. 이토록 상반된 인구 변동은 수 십 년에 걸친 마르크시즘-레니니즘의 교육에도 불구하고 소련 내에서 국가를 구성하는 민족별 특이 행동이 또렷하고, 서로 다른 다양한 사회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도시화. 20년 사이 소련의 도시 인구는 48%에서 66%로 늘어난다.

- 점점 학력이 높아지는 사회. 40%의 도시인들이 고등 및 대학교육을 이수한 “전문가”들이다.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공식 이데올로기와는 많이 다른 자신만의 문화를 보유한 진정한 시민 사회 출범이 더 용이해진다. KGB에 의해 엄중하게 감시받는 이 시민사회는 흔히 서구 문화, 소비 사회, 록 음악, 친환경주의, 나아가 종교에 관심을 갖는다.

권력을 가진 자들과 “하층민”들의 구분이 점점 명확해져 가는 가운데, 사회 구성원들의 정치 참가는 점점 형식적으로 변해간다. 소련 사회가 정부의 입장에 답하는 가장 흔한 형식이 바로 일자리와 최소한의 안락함을 보장하는 체제를 겉으로 지지하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모든 일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태만한 시민들의 방만함이 감춰져 있다. 모든 개인 이니셔티브에 불이익을 주는 시스템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현실이다.

1. “평화 만세!”

1977년 소련 포스터

2. KGB와 올림픽 게임

제 22회 올림픽 게임 기간 동안 질서를 유지하고 보안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 우리는 세계의 정세, 특수 임무반의 활동과 나라 안의 불순물자(반대파, 범죄자)들을 고려하였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조취를 취하기로 하였다 :

- 테러, 극단주의나 체제에 적대적인 단체와 밀접한 외국인들을 식별하고 입국을 금지시키기

- 게임 기간 동안 소련으로 입국하는 외국인 100%에 대한 수색

- KGB 공무원 일정 명을 올림픽촌의 숙소를 청소하고 유지하는데 파견하기. 이 관계자들은 유사시 바로 투입될 수 있을 것이다.

- 반사회적 요소들을 제거하여 모스크바와 근교의 질서를 강화하는 조취를 취하기.

1980년 5월 20일, 중앙 위원회에 제출한 KGB의 보고서 중.

 1 “테러, 극단주의나 체제에 적대적인 단체”가 무엇인지 설명하라.
 2 KGB가 취한 조취를 어떻게 규정지을 수 있을까?

p.99

3. 1981년 11월 7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펼쳐진 10월 혁명 기념일 행사.

브레즈네프는 무기 산업 전문가인 우스티노프 장군, 이데올로기 통제관 미하일 수슬로프, 장관 회의 부회장인 티코노프에게 둘러싸여 있다.

4. “전투적인 노동을 통해 10번째 계획을 달성하자”

1966년 유리 툽신이 그린 포스터

5. 노멘클라투라

노멘클라투라는 서열상 위에 속하는 이들의 결정으로 직접 뽑히는 게 아닌 서열상 위에 있는 당의 기관의 의견에 의해 선출되는 고위급 간부 직책 리스트다. 이 직책을 맡을만한 사람들을 나열한 리스트이기도 하다. 간부급 직책으로 승진할 수 있는 방편으로, 노멘클라투라는 진정한 사회 계급의 하나가 되었다 [...]. 출세 지상주의는 노멘클라투라에 속한 이들을 특징짓는 심리적 특성이다. 상관들은 서열에서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이들 중 출세 지상주의가 눈에 띄는 이들을 선발한다. 이들이 쓰는 어휘 자체가 상당히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노멘클라투라에 들어가는 것을 “탄약병이 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노멘클라투라의 은어로 수장, 단체 혹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 탄약이 되는 것을 자처하며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뜻한다 [...] 이반 이바노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노멘클라투라로의 신분 상승을 할 수 있었을까? 당원이 되고 난 뒤 그는 이리 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자신이 사는 동네에 프로파간다를 배포하고, 선동꾼들이 속한 분대장이 되어 선동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 그는 이미 “탄약병”이거나 추후 “탄약병”이 될 만한 사람들만 골라서 상종한다. 그는 서로 굳게 결속된 파벌에 속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당의 지방 위원회 비서직이 되는 순간이 온다. 구역 위원회에 의해 매년 재당선되는데, 재당선은 곧 서열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에서 3번의 재선 이후 이바노프는 지역 위원회의 신입회원으로 뽑힐 수 있다. 그는 그의 옛 동료들에게 드디어 이 신성한 말을 건넬 수 있다 : “나 됐어.”

 1 “노멘클라투라”가 갖고 있는 두 가지 의미를 설명하라.
 2 노멘클라투라의 회원이 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는가?
 3 이러한 행동과 마르크시즘 레니니즘이 내세우는 평등 원칙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6. “노보시비르스크 보고서”(1983)

지난 15년 동안 국민 소득 증가 속도가 줄어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그 원인은 잠재 노동력과 사회의 지적 자원의 완전하고 효율적인 사용을 보장해주는 생산 관계 시스템의 작동이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 소련 경제 행정 시스템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지방분권을 짓누르는 중앙집권화이다 [...]. 자원의 일부로, 노동자들은 어떠한 결정권도, 행동권도 없고 오로지 “작동”하기만 할 뿐이다. 이들은 일이나 직책을 바꾸지 않고 “배분 정책의 대상” 중 하나이다. 중앙집권화된 경제 행정 시스템은 1930년대 소련의 생산력 발전 수준에 겨우 견줄 수 있다. 이 시절 사람들은 국가 경제라는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로 인식됐고 다른 기계나 원료와 같이 복종적인 태도로 행동했다 [...]. 그러나 그 후로는 노동자들의 교육, 문화, 정보, 사회적 인식 수준이 높아졌다. 오늘날 노동자들의 욕구와 관심사는 1930년대 그들에 비해 훨씬 풍부하고 방대해졌다. 이들은 경제적인 개체뿐만 아니라, 사회적 그리고 영적인 개체이다 [...]. 노동자들은 옛날에 비해 더 복합적인 관리 대상이이 되었다. 신기술의 보급, 관리하고 개선을 담당하는 직책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면서 노동자들에게는 더 커진 책임감과 일에 대한 집중이 요구된다...

타티아나 자스라프카이아, “노보시비르스크 보고서(1983)”, <20세기>, 1993년 4월-6월

 1  1930년대 이후 경제 분야에서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나?
 2  사회는 어떤 변화를 겪었는가?
 3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이 변화의 결과는 무엇인가?


p.100

자료집

소련의 반체제주의자들

소련 체제에 반기를 든 저항자들은 비폭력적이고 투명함 속에서 합법성을 내세우고 당국의 거짓말을 일삼는 당국을 비난한다. 소련에서 이런 반체제주의 운동은 1960년대 중반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소련의 반체제주의자들은 인권과 소련 헌법과 소련이 서명했지만 자주 위반하는 국제 조약이 이론적으로 보장하는 권리의 존중을 주장한다. 러시아 지식인들, 이스라엘로 이주할 권리를 요구하는 유태인들, 의식의 자유를 요구하는 사제들이나 평신도들 수용소에 수감되거나 정신병원에 감금당하거나 망명을 가는 것으로 저항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매우 소수인 반체제주의(몇 백 명밖에 되지 않는다) 운동은 안드레이 사하로프나 알렉산더 솔제니친과 같은 몇몇의 특별한 인물들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다.

1. 1987년 3월 두 반체제주의자들의 모습 : 안드레이 사카로프와 헬레나 보너.

2. 1977년 KGB 의장 유리 안드로포브와 반체제주의자들

국민들은 비판을 하고 새로운 제안을 할 권리가 있다. 이 권리는 비판을 행사하는 그 누구의 처벌도 금하는 헌법 49조에 의해 보장되어 있다. 하지만 비판을 반소련 활동으로 변질시키고, 법을 어기며 서양의 프로파간다 센터에 틀린 정보를 전달하고 잘못된 소문을 퍼뜨리고 반사회적 활동 조직을 시도하려는 자들이 있을 때는 다른 얘기다. 이 변절자들은 소련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공장이나 공동 농장 혹은 다른 국가 기관에서 공공연하게 말을 할 시도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조직들에서 추방당하리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소련에서 반체제주의자들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외국 언론의 선전과 이들 “반체제주의자”들을 금전적으로 후하게 지원하는 외교 부처, 기타 지하 조직이 있기 때문이다. [...]. 우리 사회에서 안타깝게도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몇몇 있다. 어느 사회에서든 도둑, 사기꾼, 매수된 사람들 또는 기타 보통범들이 있기 마련인 것처럼 말이다. 이 두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사회의 악으로서 우리는 이들을 처리한다. 이들은 소련 법의 엄정한 잣대로 심판받고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 나라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도 반소련 활동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이들의 수가 적다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반체제주의의 현실이다.

KGB 의장 유리 안드로포브의 연설문 중, 1977년 9월 16일

3. “우리 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왜곡되어 출판된다”

Glavlit이라는 용어로 공적으로는 절대 입에 오르내리지 않고 헌법에도 나와 있지 않으므로 불법인 검열이 우리의 문학의 숨통을 조이고 있고 작가들을 문학에는 완전히 문외한인 자들의 독단에 구속하고 있다 [...]. 우리 작가들은 사람들과 사회의 의식 상태에 대해 시대를 앞서나가는 식으로 의견을 제시할 권리도 인정받지 못하며, 사회에 포진해있는 문제들 혹은 우리나라가 고통의 시간을 통해 얻은 역사적 경험을 그들의 방식대로 설명할 권리도 인정받지 못한다. 국가에 성숙한 생각의 양식이 되고, 영적 분야와 여론 발전에 유익한 역할을 할 만한 작품들은 모두 근시안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천하고 이기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에 의해 금지되거나 검열에 걸려 삭제된다 [...]. 얼마나 많은 작가 연맹의 회원들이 검열의 압박에 굴복하여 자신들 책의 구조와 목적을 바꾸고 장, 페이지, 문단, 문장을 고치고, 제목을 완화하고 책이 인쇄되는 것을 반드시 보기위해 어떤 짓이라도 하기로 마음먹고 자신들의 책을 돌이킬 수 없이 왜곡시킨 사실을 알고 있을까? 더구나 이 모든 왜곡이 하필이면 좋은 작품들에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별 볼일 없는 작품들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이 문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왜곡되어 출판되는 것이다.

소련 작가 학회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보낸 서신 1967년 5월 16일

p.101

4. 2005년 모스크바에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5. 어떻게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평판을 떨어뜨리는지

중앙 위원회 앞으로.

지시에 따라 노보스티 통신사는 솔제니친의 반소련 행동에 관한 폭로 밒 프로파간다 활동을 계획하였다 [...]. 솔제니친의 도덕적 평판 하락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노보스티 통신사는 솔제니친의 무도덕한 행동을 강조하는 그의 전부인 레체토프스카이아가 쓴 메모 특집기사를 준비하고 있다. 솔제니친 전부인의 인터뷰는 프랑스의 가장 큰 부르주아 신문인 <르 피가로>지에 실렸다[...]. 솔제니친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작업은 KGB와 공동으로 진행되고 있다. 노보스티사는 <배반의 길 위에서>라는 제목을 단 솔제니친에 관한 책을 출간할 예정이다. 이 책은 이탈리아, 일본, 프랑스, 캐나다, 모스크바에서 각국의 언어로 인쇄될 것이다.

소련 공식 언론 통신사 노보스티가 솔제니친이 외국으로 추방당한 뒤 취한 프로파간다 조치, 1974년 2월 22일.

6. 1973년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 호소하는 성명서

우리는 본보기로 4년 혹은 5년 내에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조치로 구성된 다음 프로그램을 제안할 수 있다 :

- 당과 정부의 상부 기관이 민주화를 더 진행시켜야 할 필요성과 민주화를 어떤 속도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정착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공식 선언하기 [...].

- 외국 라디오 방송의 전파 방해를 중단하기. 외국 서적과 간행물을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도록 하기. 국제 저작권 및 발행권 보호 시스템에 우리나라도 가입하기. 외국인 관광객들을 수용하고 우리 국민이 해외여행을 가는 것을 점진적으로 허용하고, 국제 서신 교환 제한 조치를 완화하기. 그리고 국제적 교류를 확대시키는 기타 조치를 취하기.

- 정치범들의 사면. 속기로 작성된 정치적 성격을 띤 재판의 조서를 빠짐없이 공개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법령을 공표하기. 수감 시설과 정신병원의 사회적 감시 [...].

- 모든 단체와 시민 그룹이 새로운 언론사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장해주는 언론과 정보에 관련된 법을 도입하기.

- 모든 단계에서 치러지는 당과 소비에트 연합 기구 선거에서 한 의석에 여러 사람이 출마하는 걸 허용하는 제도를 점진적으로 정착시키기.

- 스탈린 정권 하에 강제로 이송되었던 주민들의 모든 권리를 회복시키기. 강제 이송되었던 민족들의 자치권을 회복시켜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 주어 야 함.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 호소하는 성명문, 파리에서 출판된 <사하로프가 말한다>에서 발췌, 르쐬이(Le Seuil) 출판사, 1974년

7. “브레즈네프, 우리 가족이 떠날 수 있도록 내버려 둬”, 서명 : 마마 아가포프


질문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안드로포브가 반체제주의자들에게 꾸짖는 내용은 어떤 것인가(자료 2)?

2. 반체제주의자들은 무엇에 동류시되고 비교되었는가?

3. 솔제니친은 소련 지도자들의 어떤 점을 비난하는가(자료 3)?

4. “반소련 활동”과 “그의 무도덕한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자료 5)?

5. 개인 자유 회복과 가까운 요구사항들은 어떤 것들인가(자료 6)?

B. 자료 연관짓기

6. 반체제주의자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자료 3, 6)?

7. 소련이 반체제주의자들을 함구시키기 위해 보유하고 있는 수단을 보여주는 자료는 어ᄄᅠᆫ 것들인가?

C. 논술

8. 소련 반체제주의자들이 소수였음에도 어떻게 힘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 몇 줄로 요약하여 설명하라.


p. 102

4. 마지막 개혁 시도

A.페레스트로이카, 전체적인 개혁 시도... 자료 1, 2

1985년 3월부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라고 불리는 광범위한 개혁 정책을 펼친다. 흐루시초프의 시도와는 달리 고르바초프의 계획은 더 포괄적이고 급진적인 성격을 띤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경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시스템, 사회, 국제관계도 여기에 포함된다. 국민이 정치에 다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민주주의를 조금씩 침투시키고, 개인 이니셔티브를 장려하고 경제의 경쟁력을 제고시키는 것이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야심찬 도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공산당 시스템과 소련형 모델을 문제 삼는 것은 아니었고, 다만 거기서 발견된 기능장애를 고치기 위함이었다. 몇 년 사이에 본질적인 개혁으로 인해 경직된 상태에 있던 나라에 다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윗선”에서 추진한 개혁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검열이 사라지고, 글라스노스트(“투명함”) 정책으로 자유롭게 정보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정치 분야에서도 폭넓은 개혁이 착수됐다. 헌법을 기반으로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고르바초프는 규모가 확대된 새 의회이자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선거를 거쳐 당선된 인민 위원회를 통해 선출되는 소련 대통령직을 새로 개설한다. 1989년 3월 무기명 투표로 진행된 인민위원 선거에는 다수의 후보자가 출마했고 이 선거는 소련의 정계가 민주주의로 나아가는데 결정적인 단계가 되었다.

B. ...그러나 실패로 끝나고 자료 3, 4

대규모 경제 개혁이 착수돼 민간 부문이 1988년 상업과 서비스 분야에서 처음 나타난다. 개혁은 의심과 반대의 목소리를 동시에 낳는다. 국민들의 혼란은 더욱 커져만 갔다. 해가 지나면서 소련의 평균 국민과 국가 사이에는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이것을 다음 문구로 요약할 수 있다 : “나는 일하는 척하고, 국가는 내게 돈을 주는 척한다.” 그런데, 근대화 사업인 페레스트로이카는 수익성, 불필요한 일자리 감축, 실업 위기와 인플레이션의 동의어나 다름없었다, 임금은 가격 상승을 따라잡지 못했고 이곳저곳에서 시위가 일어나 급기야 생산체계가 붕괴됐다. 개혁의 열기는 발트 지역, 우크라이나, 코카시아 공화국의 주민들에게 전파돼 그곳에서는 민족주의 단체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소련 체제에 의해 억눌려 왔던 긴장과 갈등이 결국 터져버린다. 1940년 무력으로 소련에 합병된 발트 공화국들이 1990년 초 가장 먼저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한다.

C. 소련의 붕괴 자료 5, 6, 7

경제적, 정치적 위기가 악화되어가는 가운데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점점 고립된다. 그는 생활수준이 바닥으로 떨어진 국민들에 의해, 국가를 혼란으로 이끌고 간다고 그를 비난하는 노멘클라투라에 의해, 그리고 하나 둘 씩 그를 버리고 보리스 옐친을 지지하는 개혁가들에 의해 전면에서 동시에 비난을 받는다. 1991년 6월 12일 보통 선거로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보리스 옐친은 금방 큰 인기를 얻는다. 그는 1991년 8월 19일에서 21일 사이 고르바초프를 며칠 동안 권력에서 떼어 놓은 공산 보수주의 지도자들이 모인 단체가 계획한 쿠데타 시도에 반기를 드는데 앞장선다. 그들의 실패는 거대한 반공산주의 물결을 일으키고 중앙 권력의 해체를 앞당긴다. 보리스 옐친은 소련 공산당을 러시아에서 금지시킨다. KGB 또한 와해된다. 1991년 가을, 소련을 구성하던 15개 공화국 중 8이 독립을 선언한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미카일 고르바초프는 1991년 12월 25일 자신이 기키고 있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소련의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소련은 15개의 독립국가에 자리를 양보한다. 소련형 모델은 끝났다.


용어

페레스트로이카 : “재정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양립시키고 경제를 재조정 하여 더 큰 자유와 더 나은 생활수준을 허락하기 위한 정치 개혁.

글라스노스트 : “투명함”, 숨겨져 있던 것을 공개하고자 하는 고르바초프의 의지를 말한다. 글라스노스트는 표현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1. 고르바초프와 페레스트로이카

페레스트로이카, 이것은 정체기를 극복하고, 억제 구조를 타파하고,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진보를 촉진시키고 활성화시키기 위해 신뢰가고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을 의미한다. 이것은 민중의 자주적 행동을 뜻하기도 한다. 페레스트로이카는 민주주의 완성이고, 사회주의적 자율성, 자주적 행동과 창의적인 태도의 장려를 뜻하기도 하고,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더 엄격한 질서와 규율, 더 큰 투명성, 그리고 비판과 자기비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또한 개인을 절대적으로 존중하고 사람의 존엄성을 가장 고려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은 국민의 희망을 충족시키자는 목표를 바탕으로 복지 분야를 우선적으로 개선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M. 고르바초프, <페레스트로이카>, 1987년

2. 민주주의의 진전

레닌그라드와 노프고로드 대주교인 알렉시스가 1989년 5월에 열린 인민위원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p. 103

3. 임금, 가격, 루블 시세

숙련공의 월급

1985년 ,,,,,,,,,,,, 250 루블

1990년 초 ........ 5 000 루블

1994년 말 ........ 150 000 루블

빵과 고기 가격

검은빵(1kg) 1985......... 0.10 루블

              1990년 초......... 25 루블
              1994년 말......... 900 루블

소고기(1kg) 1985........ 5 루블

              1990년 초 ........ 300 루블
              1995년 말 ........ 15 000 루블

달러 대비 루블 시세

1985 ............................ 1$ = 4 루블

1987 ............................ 1$ = 10 루블

1989 ............................ 1$ = 20 루블

1990년 12월 ................. 1$ = 100 루블

1992년 12월 ................. 1$ = 500 루블

1994년 11월 ................. 1$ = 3 000 루블


4. 1991년의 ZIL 자동차 공장

나라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전체적으로 불안정해지고, 산업 기반이 흔들리면서 노동 계층과 일하는 지식 계급의 생활 형편이 악화되었고,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을 증폭되었는가 하면, 사회 진보로 얻은 혜택도 사라질 위기에 쳐했다 [...]. 공장의 일자리는 80% 미만으로 차있는데 모스크바 시내에 가보면 일해야 할 시간에 느긋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이들을 볼 수 있다. 1989년에서 90년 사이 4 000명 이상의 고급 숙련공들과 전문성을 갖춘 노동자들이 우리 공장을 떠나 임금이 평소 받던 것보다 훨씬 높고 업무 강도도 낮은 편인 협동조합이나 준 국영회사로 일자리를 옮겼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만성적인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면 임금을 상당히 올리는 길 밖에 없었다 [...]. 제품의 인도가 불규칙적이고,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계획 경제가 혼란에 빠졌고 모든 생산 고리가 불가피하게 멈췄다 [...]. 이 문제들이 소련 자동차 생산 1위 업체이자 시중에 굴러다니는 자동차의 25%를 차지하는 ZIL사를 곤경에 빠뜨린다. ZIL 자동차 공장의 경영진들이 회사 사정에 대하여 중앙 위원회에 보낸 편지, 1991년 2월 8일.

 1  회사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어라.
 2   이 텍스트가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강조하는 소련 사회의 결점은 무엇인가?

5. 고르바초프가 1991년 8월 21일 모스크바로 되돌아온다.

 1  고르바초프가 귀국하기 전날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가?
 2  이 사진과 고르바초프가 4개월 뒤 선언한 내용과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자료 6)? 

6.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1991년 12월 25일 소련 텔레비전에서 대통령직 사퇴를 발표한다.

7. 2005년 12월 2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 탄생 기념 행사

 1 이 광경, 사람들, 그리고 상징물들을 묘사하라.
 2 이 시위는 무엇을 증명하는가?

p.104


복습 페이지

기억해야 할 사건

1953년 3월 5일 : 스탈린 사망

1956년 2월 : 제 20회 소련 공산당 회의 : 비스탈린화

1964년 10월 : 흐루시초프 사임

1965-1982 : 브레즈네프 시대

1991년 12월 : 소련 붕괴, 15개의 독립 국가 탄생

인물

이오시프 쥬가츄빌리 스탈린 (1879-1953)

1922에서 1953년까지 소련 공산당 서기장 (p.415의 자세한 전기 참고하기)

니키타 세르게이에비치 흐루시초프 (1894-1971)

1953년에서 1964년까지 소련 공산당 총리 (p.412의 자세한 전기 참고하기)

미하일 고르바초프 (1931~)

1985년에서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총리 (p.410의 자세한 전기 참고하기)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18~)

러시아 반체제주의 작가 (p.415의 자세한 전기 참고하기)

안드레이 사하로프 (1921-1989)

러시아 반체제주의 물리학자 1975년 오벨 평화상 수상 (p.414의 자세한 전기 참고하기)


하이라이트

1. 1950년대 초 스탈린이 만든 소련형 모델

■ 1930년대 스탈린 체제 시작

■ 소련이 나치즘 패전에 큰 공을 세웠던 2차 세계대전 이후 스탈린식 소련형 모델은 한 층 강화됨.

■ 마르크시즘-레니니즘이라 불리는 이데올로기가 핵심

■ 굴라그와 같은 탄압 시스템

■ 스탈린의 독재는 소련 체제에 전체주의 성격을 강화시킴

2. 흐루시초프의 개혁 시도 (1953-1964)

■ 스탈린이 사망한 뒤(1953), 흐루시초프는 제 20회 소련 공산당 회의(1956)에서 스탈린식 체제의 막을 내린다.

■ 소련은 전체주의 체제에서 독재적인 경찰국가로 바뀐다.

■ 그는 공산주의 이념(마르크시즘-레니니즘)은 계속해서 중요하게 여기지만 소련 국민의 일상생활 여건을 개선시키는데 더 중점을 둔다.

3. 브레즈네프 시대 : “정체기”(자스또이) (1964-1982)

■ 정계 인사들의 보수주의와 노화 :

 - 소련 경제는 점점 경쟁력을 잃는다.
 - 소련 사회의 교육 수준이 높아진다. 과도한 중앙집권화, 일방적인 계획경제, 개인의 이니시어티브를 완강히 거부하여 발전이 거의 없는 체제는 점점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4. 고르바초프의 실패 그리고 소련형 모델의 최후 (1985-1991)

■ 1985년 고르바초프는 전면적인 개역을 감행한다. (페레스트로이카)

■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련 체제를 구원하기 위해 도입되었지만 체제는 사실상 개혁이 불가능했다.

■ 5년 뒤 소련형 모델은 붕괴되고 소련은 1991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헷갈리지 말 것

당 서기장과 국가 원수

▶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 –혹은 총리-은 당의 원수이다. 요우시프 스탈린이 1922~1953 ; 니키타 흐루시초프 1952~1964 ;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1964~1982 ; 유리 안드로포프 1982~1984) ; 콘스탄틴 체르넨코 1984~1985 ; 미하일 고르바초프 1985~1991.

▶ 국가 원수는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회장이다. 두 개의 직위를 모두 가졌던 서기장도 몇몇 있다(흐루시초프 1960~1964 ; 브레즈네프 1977~1982). 현실적으로 소련에서의 권력은 당 서기장이 갖고 있다.

소련과 러시아

▶ 소련에는 15개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소속되어 있었고, 공화국들은 소련에서 가장 많은 15개의 민족들에 해당됐다. 그중 가장 넓고 큰 공화국이 RSFSR(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었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15개의 독립 국가가 생기는데 그중 가장 큰 나라가 바로 러시아다. 러시아는 옛 RSFSR의 국경을 그대로 유지했다.

굴라그와 쿨라크

▶ 굴라그 (Glavnoie Oypravlenie laguerei) : "수용소의 주 관리기관“). 이 약칭은 소련 노동 수용소의 관리 기관을 뜻하는데, 확장된 의미로 소련의 모든 수용소를 의미한다. 굴라그는 한 개의 수용소를 별칭하는 게 아니라 소련의 전체적인 수용소 시스템을 말한다.

▶ 쿨라크는 자신보다 가난한 다른 농부들을 보유하고 관리하는 러시아의 부유한 농빈이다. 직역을 하면 “주먹 아래”라는 뜻이다.


p.105


역사 자료 설명 (4/15)

주제 : 도미니크 드상티와의 인터뷰 : “내가 왜 스탈린 지지자였나”

전쟁당시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정치계에 입문했다. 나는 남편과 함께 공산당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다. 몇 달 뒤 나는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다. “공포 정치”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1943년이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소련에 자유를 되찾고자하는 우리의 희망을 모두 건 상태였다. 1946년에 스틸린 체제의 수용소에 관련된 최초 자료가 공개되었다. 우리는 [...] 그것을 과장된 “짜깁기”로 여겼다. 냉전이 시작되던 시기였으니까 말이다. 크라브첸코가 영어로 쓴 책은 나오자마자 읽었고, 나는 그가 배신자라고 생각했다. 물론 당시에 이미 소련이 빛나는 이상적인 나라가 더 이상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개인적으로 소련체제에 대한 나의 믿음에 깨지게 된 계기는 1949년 12월 불가리아 공산당 서기장인 코스토프의 재판에 참여하면서다. 그때는 동유럽 인민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는 재판의 소용돌이가 불어 닥치던 시기다 [...]. 모든 국가 기능이 마비된 상태였다. 피고인은 “나는 결백하다, 이들은 내게 자백을 강요했다”고 외쳤다. 나는 그를 믿었다. 그 말은 즉 다른 모든 재판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완전한 딜레마에 빠졌다. 내가 품고 있던 의심을 동료들에게 말하면 나는 곧장 당에서 축출될 게 뻔했고 변절자를 옹호하는 또 하나의 변절자가 되는 것이었다. 아니면 함구하는 방법도 있었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게 있다면, 프랑스 공산당원들은 진정한 반사회적인 조직이었다는 것이다. 그들만의 대학교와 간부양성 학교가 있었고, 그들만의 축제가 있었고 결속력 또한 대단했다. 이런 모든 것들과 결별해야 하는 것이었다. 시위대와 내 영웅이었던 광부들과도 이별해야 했다. 즉 내 친구들과 절교를 하는 셈이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당에서 쫓겨나는 순간부터 다는 당원들에게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다시 당으로 되돌아 왔다, “개가 자신의 토사물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이 표현도 전형적인 공산당원들의 표현이다! 결국 공산당에 열광했던 시기는 해방 된 뒤로 1949년 말까지만 지속됐다. 그 뒤로, 소련에 관해 부정적인 얘기를 듣게 될 때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믿을 때, 나는 그것을 단순히 특수하고 일시적인 문제로 치부했다. 동유럽 체제가 매우 탄압적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는 어쩔 수 없이 거쳐 가야 하는 과정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게 분명했다. 나는 스탈린이 매우 인간적인 사람이라고 꼭 믿고싶었다 [...]. 흐루시초프가 1956년 공개한 “비밀 보고서”를 보면서 재판 오류 또는 단순한 복수로 생각해 왔던 것들이 사실 한 개의 완전한 체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당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물론 결별하는 일은 어려웠다. 1956년 헝가리 사태를 소련의 장갑차가 진압하는 것을 보고난 뒤 나는 당에서 확실하게 멀어졌다. 하지만 내 탈당을 선언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일조차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스탈린 주의자들>(파이아르 출판사, 1975년)을 쓰는 데만 12년이 걸렸다. 내가 배신해고 사람들이 떠드는 걸 나는 원치 않았다.

도미니크 드상티, <역사>지와의 인터뷰, 247호, 2000년 10월


질문

1. 저자와 자료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소개하라.
2. 공산당에 입당하게 된 계기를 저자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3. 그녀의 신념을 뒤흔든 일련의 사건들은 어떤 것들인가?
4. 공산당이 어떻게 묘사되었는가? 프랑스 공산당과 소련은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었는가?
5. 저자가 지나온 길을 요약하라. 


비토르 크라브첸코와 프랑스 공산당

소련의 공산당원이었던 빅토르 크라브첸코는 자국을 탈출해 미국으로 건너가 1945년 소련 체제의 현실(탄압, 굶주림, 체포, 강제이송, 수용소, 처형 등)을 고발하는 책을 출간했다. 프랑스 공산당은 그가 거짓 증언을 한다며 공격적인 언론 공세를 펼쳤다. 크라브첸코는 공산당 잡지인 <프랑스 편지>사에 소송을 걸면서 대응을 하고 이 재판에서 이긴다. 크라브첸코가 증언한 내용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과 프랑스 공산당의 언론 기관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오늘날 전부 밝혀졌다.


접근 방법

A. 전반적인 도움말

자료는 한 사람의 증언을 담고 있다. 객관적인 자료(법, 조약)와는 달리 여기 제시된 자료는 회고록처럼 주관성이 짙다.

- 이 자료는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 이 자료가 언제 쓰였는가?

- 저자는 제대로 알고 썼는가?

- 저자는 자신이 묘사하는 사건에 개인적으로 가담한 적이 있는가?

즉, 자료가 신빙성이 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B. 질문 3에 대한 답변 관련 도움말

도미니크 드상티의 공산주의 신념은 여러 사건을 계기로 흔들리게 된다.

- 그녀가 당원이 된 1943년에는 스탈리니즘이 곧 공산당을 의미한다.

-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여러 공산당 지도자들은 “미국 제국주의와 내통” 내지는 “티티즘”의 혐의를 받고 재판을 받았다.

- 1956년 제 20회 소련 공산당 회의와 흐루시초프가 1956년 공개한 비밀 보고는 스탈린이 저지른 범죄와 자신을 신격화 한 자기숭배에 관한 현실을 고발한다. 스탈린주의자로 남은 공주의자들은 이 보고서의 진실성을 부정하고 이 보고서가 “흐루시초프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 저자의 신념을 완벽하게 무너뜨리는 사건은 바로 1956년 헝가리 혁명 진압사건이다.


p.106

자료집 연구 (4/17)

주제 : 제 20회 소련 공산당 회의 : 개혁인가 아니면 공산당에 대한 문제제기인가?


질문

파트 1

1. 날짜를 강조하며 제시된 자료들을 소개하라. 자료들에 해당되는 시기는 어떤 시기인가?

2. 자료 1, 2, 3, 5에서 소련형 모델의 어떤 점들이 쟁점인가?

3. 소련형 모델에 급진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이는 누구인가? 어떤 수단을 사용하는가? 이런 모습이 어떻게 비춰지는가?

4. 결별의 의지가 아닌 진전의 의지를 보여주는 요소들은 자료 1, 3, 5의 어느 부분에 있는가?

5. 자료들의 저자들은 어느 정당, 어느 정치파에 속하는가? 여기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파트 2

자료들로부터 도출한 정보와 기존의 지식을 바탕으로 주제의 질문에 답하라.

자료 1 : 제 20회 소련공산당 회의에서 공개된 흐루시초프의 비밀 보고서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흐루시초프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임명된다. 1956년 2월, 제 20회 소련 공산당 회의 도중 그는 당원들 앞에서 보고서 한 개를 낭독한다.

정부 기관에 의해 대규모 탄압 정책이 도입된 것은 1936-1938년 사이인데, 우선 정치적으로 오래전부터 당에 패배한 레니니즘의 적인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부카린의 추종자들이 그 대상이었고, 그 후 정직한 수많은 공산당원들과 내전에 참여하고 어려웠던 초기 산업화 시기를 책임졌던 당의 간부들 또한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 “국민의 적”이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자기와 의견이 맞지 않는 이는 누구나 국민의 적이라는 명분하에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숙청하였다. [...] 제 17회 당 회의에서 선출된 당 중앙 위원회의 당원과 대리인 139명 중 98명이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이는 총원의 70%에 해당하는 수치였다(대부분 1937-1938년에 숙청되었다). [...] 전쟁 초기인 1937년에서 1941년 사이 스탈린은 수많은 장교와 정계 공무원들을 제거했다. 이 시기에 군 간부 일부 계층이 탄압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었다. 중대장 급부터 시작하여 대대장을 거쳐 군의 고위급 간부까지 탄압을 받았다 스페인이나 극동아시아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은 장교들 또한 대부분 숙청되었다. 스탈린이 강요한 개인숭배는 그 규모가 기형적으로 커졌는데 이는 스탈린이 자신을 신격화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에게서 겸손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대목이 1948년 그의 <전기 개요>가 출반됐을 때다. 책에서 스탈린은 신처럼 받들어지고 숭배의 대상이 된데다 무류의 현자, “가장 위대한 지도자”, “사상 최고의 사령관”으로 묘사된다.

            소련 공산당 임시 국회 도중 비공개로 의원들 앞에서 읽힌 흐루시초프 보고서 내용 중(1956년 2월) 


자료 2 : 소련 공산당의 어느 당원의 양심선언

특정한 역사적 원인으로 인해 개인숭배는 몇몇의 당원들과 정부 사람들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덕분에 승승장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 와서 어떻게 하면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고민한다 [...] 그중엔 수 천 명의 무고한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이들도 있다 [...]. 만약 이 모든 사람들이 직책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만약 그들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아무도 치르게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제 20회 소련 공산당 회의에서 결의된 사안들을 그들에게 맡기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다.

 1956년 4월 제 20회 위원회의 결론에 대해 토론이 벌어진 핵심 당원 모임 중 비알릭(문학 평론가)의 선언.


자료 3 : 고무우카의 연설, 1956년 10월 21일

1956년 10월, 폴란드에서는 시위가 일어난다. 고무우카는 광장을 차지한다. 폴란드 공산당 지도자인 그는 1948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권력에서 물러나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는 1956년 석방돼 폴란드 노동자당(폴란드 공산당) 서기장의 자리를 되찾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은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유일한 국가가 더 이상 아니다. 세계무대에 사회주의 건설에 사명을 건 중화 인민공화국과 폴란드를 포함한 여러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이 생겨났다. 이 나라들의 노동당, 즉 우리 당은 각 나라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며 사회주의로 가는 길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물음에 직면했다. 이 물음은 사회주의 모델의 형성, 당과 국가와의 상호관계, 당과 사회주의 진영에 속한 국가 정부들과의 상호관계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 각 나라는 완전한 독립과 자주성을 가져야할 것이며, 각 민족의 자치권 또한 완전하게 그리고 상호적으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자료 4 : 1956년 10월 헝가리 반란 진압

1956년 10월 24일 헝가리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스탈린 체제의 간부인 라코시는 개혁을 외치는 공산당원들에게 권력을 넘겨줘야하는 상황에 처한다. 11월 1일, 임레 너지는 헝가리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탈퇴할 것이라고 밝힌다. 11월 초, 헝가리 반란은 적군(赤軍)에 의해 진압된다. 이로 인해 수 천 명의 사망자가 속출한다.

자료 5 : 프라브다 신문에 배달된 익명의 편지

왜 스탈린의 과오를 그가 죽은 뒤에 쓰는 겁니까? 왜 우리 사상가 동지들은 스탈린의 과오를 노동자와 콜호즈 농부들 앞에서 말하는 걸 거부하는 겁니까? 불가닌 동지는 왜 당시에 스탈린을 저지하지 못했는지, 왜 중앙 위원회 전체가 사회주의에 악영향을 미친 스탈린을 막지 못했는지 해명해야 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이와 같은 질문에 명확한 답변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나 익명으로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두려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두렵습니다. 나는 한 번도 탄압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무섭습니다. 우리는 공포와 복종 속에서 교육을 받아 왔습니다. 비판에 관한 의견교환은 그저 비생산적인 수다에 불과합니다. 비판하는 자는 내쫓기지 않습니까.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정치국 사람들은 스탈린을 비판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1956년 2월에서 8월 사이 프라브다 신문사로 보내진 익명의 편지, 소련 공산당 일지, 하지만 당시에 공개되진 않음.

불가닌 : 1947년 국방부 장관, 1958년에는 정치국 소속이었다. 1953년에는 의회 부회장을 역임한다. 그는 1953년에서 1958년까지 흐루시초프와 나란히 당의 핵심 인사 중 하나였다.


접근방법

A. 전체적인 도움말

주제는 소련형 모델과 “인민 민주주의 국가”에 관련된 교과서의 챕터로부터 배운 지식을 요구한다. 어디서부터 생각을 해야하나 : 주제에 해당되는 날짜로부터 출발한다. 20회 당회의 전 소련형 모델이 어땠는지 생각해보고, 자료에 제시된 여러 날짜들을 고려해 주제의 의미를 파악한다.

B. 질문에 대한 답변 관련 도움말

질문 1

제20회 당회의 날짜와 관련된 자료들을 추려내기.

텍스트들은 사건과 동시대에 쓰여졌는가?

질문 2

제 20회 당회의 당시 소련의 상황에 관련된 지식을 상기시키기 : 흐루시초프의 신망, 폴란드에서 고무우카의 태도, 헝가리에서의 라코지와 임레 너지의 태도, 소련의 대응. 자주 언급된 중요한 인물이 누구인가?

질문 3, 4

질문 3, 4는 동시에 다뤄질 수 있다 : 어떤 요소들이 진전에 대해 얘기하고, 어떤 요소들이 문제 제기를 얘기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예를 들어 자료 4에서 헝가리 민간인이 총을 멘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문제가 있는 현 상황의 끝을 내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보여준다. 지문과 사진 구석에 보이는 전투장갑차는 교전이 격렬했음을 짐작케 한다. 낙심한 두 민간인의 모습과 사진을 찍은 각도를 보면 마치 장갑차가 남자의 머리를 조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반란이 실패했음을 암시한다. 결국 적군에 의한 진압으로 문제 제기는 없었던 일이 된다.

C. 파트 2 질문에 대한 답변 관련 도움말

“진전”(사건의 전개가 완전히 뒤집히지 않고 변화하는 것)과 “문제 제기”(현 상황과 확실한 단절)을 헷갈리면 안 된다. 공산당이 집권하는 국가에서 소련형 모델에 “문제 제기”한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질문에 대한 답변을 작성할 때 각 나라와 시기에 따른 차이를 고려하기. 자료 4와 같은 경우 반란만이 헝가리인들에게 문제 제기의 근본적인 대책이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난폭한 진압과 이 문제제기를 거부하는 소련 측 입장도 설명해야 한다.



제 6 장 : 냉전시대의 세계, 1947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로마-베를린-도쿄 3국 동맹에 맞서 싸웠던 서구의 민주주의 국가들과 소련의 동맹은 전쟁이 끝난 뒤 계속되지 못한다. 1945년에 이미 경계 징조를 보여 왔던 서방 국가들과 소련은 1947년이 되자 적대적인 관계로 돌변하며 전후 시대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두 개의 진영이 생기는데 한 개는 미국의 지휘 아래,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소련의 지휘권 아래 맞서게 된다. 원폭 전쟁에 대한 공포가 전면전을 면하게 해준 유일한 요소였다. 이렇게 “냉전”이 이전에 겪어왔던 전쟁을 대체한다.

두 진영 사이의 대립은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

1947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의 국제관계는 이 대결의 기억으로만 남았는가?

1. 서구가 본 소련의 세력 확장...

반공 운동 포스터 “평화와 자유”, 1952년

“소련은 동유럽 전부를 포함시키는 하나의 정치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 소련은 체제에 지금 점령하고 있는 독일의 일부를 통합시키려한다. 이 모든 국가의 정부는 모스크바가 내리는 지시에 복종하는 공산당에 의해 감시되고, 모두가 모스크바가 지정한 똑같은 원칙을 따라야 한다. ”인민 민주주의 국가“가 된 이 나라들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로 인해 귀족, 도시나 시골 부르주아지와 같은 다른 계급이 예외 없이 와해되어 가고 있다. 제국주의 국가라고 부르는 나라들에 맞서 이 국가들은 늘 방어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국경을 폐쇄하는 일은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진다. 이 새로운 세계는 ”철의 장막“으로 고립되었다. 이 나라들은 수많은 조약들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로제 쎄레, <전쟁과 평화 사이>, PUF, 1949.

p.109

2...공산당이 본 유럽을 점령하는 미국의 위협

프랑스 공산당의 포스터, 1951년.

“미국의 군사 작전은 평상시에도 미국 대륙에서 떨어진 수많은 군사 주둔지를 설치할 계획이다. 이 군사기지들은 러시아와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을 공격 시 사용하기 위함이다. 미국의 육해공 군사기지는 알라스카, 일본, 이탈리아, 남한, 중국, 이집트, 이란, 터키, 그리스, 오스트리아, 서독 이미 존재하거나 만들어질 예정이다.[...] 전쟁이 끝난지 오래지만, 영국과 미국의 군사 동맹과 영미 참모본부의 합동 군사력은 아직도 남아있다.”

주다노프 보고서, 1947년 9월.


p.110

1. 둘로 나뉜 세계


A. 연합국간 증폭되는 경계심 자료 1

1946년이 되자마자 서방국가와 소련 사이의 대립 관계로 접어든다. 전자는 공산당이 중부와 동부 유럽을 지배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소련은 당시 유일하게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있던 미국을 경계한다. 소련은 점령하고 있는 독일 지역의 경제 재건을 준비하고 중부 유럽과 발트 지역 국가의 정치에 개입하여 얄타 조약으로 이미 예정된 자유선거를 다시 주장하는 서방국가들을 비난한다. 유명한 1946년 3월에 윈스턴 처칠은 그가 한 유명한 “펄튼 연설”에서 유럽에 드리워져 세계를 둘로 나누는 “철의 장막”을 규탄한다. 이 증폭되는 긴장 국면 때문에 옛 연합국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처분과 관련하여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한다. 연합국 연맹의 마지막 행사는 1947년 독일의 연합국과 서명한 평화 조약이다. 국경은 1937년 이전의 것으로 되돌아가지만 소련은 1939년 8월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정복한 영토를 유지하기로 하고 여기에 대해서는 문제제기가 따로 되지 않았다.

B. 1947년 자료 3, 4, 5

1947년 초, 그리스에서 벌어지는 공산주의자들의 게릴라전이 지속되고, 중부 유럽(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에서는 공산당이 정부에 참여하게 되자 몇몇 서방국가들은 긴장하기 시작한다. 공산당의 위협에 수동적인 태도를 나무라는 여론에 대응하기 위해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다음 두 가지 정책을 제안한다 :

- 자유 유럽이 공산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군사적 지원하기(1947년 3월). 이 정책이 바로 Containment(“봉쇄”) 정책으로 잘 알려진 “트루먼 독트린”이다. 긴장관계가 악화되고, 공산당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정부에서 쫓겨나게 된다.

- 공산당이 유럽에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유럽의 경제재건 지원하기. 이 금전적 지원은 1947년 6월 착수한 “마셜 플랜”으로 구체화 된다.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은 이 지원을 받아들이지만 소련은 이것을 거부하고 적군(赤軍)이 주둔하는 중부 유럽과 동유럽 국가들에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라고 명령한다. 미국의 정책을 방해하기 위해 유럽의 9개 국가(소련, 동유럽, 프랑스, 이탈리아)의 공산당 대표들은 1947년 9월 서로 모여 세계가 미국이 지위하는 “제국주의”진영과 소련이 이끄는 “반제국주의, 민주주의” 진영, 이렇게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고 주장한 소련인 주다노프의 보고서를 승인한다. 이로써 냉전 시대가 시작된다.


C. 서로 필적할만한 두 진영 자료 2

1947년 7월부터 서방 진영이 조직화된다. 경제 계획 측면에서는, 16개의 서유럽 국가가 마셜 플랜의 지원을 받고, 미국의 지원을 분배하는 역할을 맡은 유럽경제협력기구(OEEC)를 1948년에 창설한다. 같은 해, 세계 무역의 80%를 차지하는 23개국이 GATT조약을 체결한다. 군사적으로도, 미국과 서유럽 국가는 방어 동맹을 맺는다. 이 동맹을 통해 정치적 동맹인 대서양 동맹과 군사적 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1949년 4월 탄생하게 된다. 같은 시기, 동쪽 진영의 중부 유럽 국가들은 1946년에서 1949년 사이 스탈린에 의해 소련형 모델을 강제로 도입한다. 코민포름이라 불리는 정치 기관이 각 국가의 공산당들의 행동을 조율하기 위해 설립된다. 미국에 파견된 간첩들의 효율적인 네트워크로 소련은 1949년 핵무기를 보유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중국에서 마오가 이끄는 공산당 게릴라전의 승리로 공산 진영은 아시아로 크게 확장된다.


용어

냉전 : 서방과 동방의 국제적 긴장관계가 지속된 시기이나 전면 충돌은 없었다. 이 용어는 특히 1947-1962년에 적합한 용어이나 1962-1991년도 냉전시기에 속한다.

대서양 동맹 : p.72 참고하기

NATO : 북대서양조약기구(1949)는 대서양 동맹에 속한 여러 나라의 군사 작전권을 한데 결속시켰다.

코민포름 : (“공산당 정보국”) : 1947년에서 `956년ᄁᆞ지 소련, 동유럽, 프랑스, 이탈리아 공산당을 집결시킨 조직이다. 코민포름은 코민턴(국제 공산당, 제3인터내셔녈)을 잇는 조직이다.


1. 펄튼 연설 (미국)

발틱해의 슈테틴으로부터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에 이르기까지 유럽대륙을 가로질러 철의 장막이 내려앉았습니다. 그 뒤에는 고대국가들과 중앙 및 동부유럽의 모든 수도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바르샤바, 베를린, 프라하, 빈,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부크레쉬티, 그리고 소피아등, 이 모든 유명한 도시들과 그 주변의 인구들은 소위 말하는 소련의 영향권 내에 들어 있으며 형태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커져만 가는 모스크바의 통제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멸의 영광을 지니고 있는 아테네만이 영국, 미국, 프랑스의 감시 하에 선거를 통해 그 미래를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는 처지에 있습니다. [...] 세력이 매우 약했던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당은 그들의 규모보다 훨씬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고 그들은 각처에서 전체주의적인 감시를 행사하려합니다. [...] 저는 러시아가 전쟁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러시아가 원하는 것은 전쟁에서 거둬들인 수확물과 무제한적인 자신의 세력과 이념의 확장입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하는 건 영구적으로 전쟁을 억제하는 방법과 모든 나라에 자유와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방법입니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수상 1946년 3월 5일

1 이 연설문에서 어떤 변화가 기술되었는가?
2 처칠에 따르면 이 변화가 위험한 이유는 무엇인가?
3 이 텍스트가 연합국 연맹의 끝을 알린다는 것을 보여주어라. 


p.111

2. 1947년의 유럽

3. 트루먼 독트린, 1947년 3월

미국은 자신들을 굴복시키려는 소수의 무장 세력에 저항하는 자유로운 국가의 국민들을 지지해야합니다. [...] 우리의 지원은 주로 경제적 그리고 금전적인 지원이어야 합니다. [...] 각 국가는 이제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삶의 양식을 선택해야하는 기로에 서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다수가 원하는 것으로, 자유로운 제도, 대의정부, 자유선거, 개인의 자유, 표현과 종교의 자유의 보장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소수가 강제로 다수에게 강요하는 것입니다. 공포와 억압, 신문과 라디오의 통제, 선거 조작과 개인 자유의 박탈이 특징입니다. 전체주의 체제의 씨앗은 궁핍과 빈곤을 먹고 큰다. [...] 국민이 더 나은 삶을 기대하는 것을 포기했을 때 전체주의의 씨앗은 완전히 자라난다. 이 기대를 우리는 평생 유지해야합니다. 세계의 자유로운 국민들은 그들의 자유를 지키는 것을 우리가 도와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해리 S. 트루먼, <회고록>, 1955년

4. 마셜 플랜

세계의 경제가 건강하지 않으면 정치적 안정과 확실한 평화가 불가능하기에, 미국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이것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우리의 정책이 대항하는 것은 어떤 나라도 어떤 이념도 아니다. 우리 정책이 맞서고자 하는 것은 배고픔, 빈곤, 절망 그리고 혼란이다. 정책의 목적은 자유로운 제도가 존재할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조건이 조성될 수 있는 세계 경제의 복원이다.

G. 마셜의 연설(미국 보좌관), 하버드, 1947년 6월 5일

1 마셜 플랜이 트루먼 독트린을 적용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어라.
2 유럽의 어느 지역에 지원이 닿는가?
3 주다노프 보고서(자료 5)의 어떤 부분이 마셜 플랜과 상반되는가?

5. 주다노프 보고서, 1947년 9월

미국의 궁극적인 목표는[...] 강력한 경쟁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이 없어지고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자본주의 동반 국가의 힘이 약해지면서 확립된 미국 제국주의의 세계지배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 새로운 기류는 방대한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 수단을 바탕으로 한다. 이 정책들이 적용될 경우 미국의 확장주의가 겨냥하는 모든 나라에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를 확립하고 이 나라들을 미국의 위성국으로 만들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 전쟁이 끝난 뒤 시간이 지날수록 제국주의/반민주주의 진영과 반제국주의/민주주의 진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미국은 제국주의 진영의 핵심 세력으로,[...] 영국, 프랑스, 식민지 보유국과 미국에 의존하는 국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반제국주의, 반파시즘 세력이 나머지 진영을 이룬다. 거기엔 소련과 제국주의를 거부하는 나라들, 민주 노동권과 형제나라의 공산당 등이 속한다.

A. 주다노프, 유럽 공산당 세미나의 소련 대표


p.112

자료집

1948년 베를린, 냉전의 첫 급변사태

1948년 동유럽이 공산 진영으로 넘어가면서 서방국가들은 하루빨리 번영을 되찾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독일의 재건을 서두른다. 이를 위해 새로운 통화인 독일 마르크를 만드는데, 이것이 베를린 사태의 발단이 된다. 얄타와 포츠담 국제 조약과 반대되는 이러한 결정에 반감을 드러내며 스탈린은 1948년 6월 20일 베를린 봉쇄를 명령한다. 서베를린으로 이어지는 3군데 통로로ㅠ 연결된 도로와 철도가 모두 끊겼다. 서베를린에 물자공급을 위해 서방 연합국은 대규모의 긴급공수를 조직한다. 이들을 실패로 이끌지 못하자 스탈린은 1949년 5월 12일 봉쇄를 해제한다.

용어

봉쇄 : 한 장소(도시나 국가)에 사람이나 물자의 모든 출입을 막는 행위


1. 독일 정치가가 본 베를린 사태

1948년 3월 말, 소련은 지상 연결망을 하나 둘 끊기 시작했다. 30일, 그들은 서방의 군용기를 수색하겠다고 요구하여 완강히 거부하였다. [...] 6월 20일 화폐 개혁이 서독에 시행되면서 동서독간의 왕래가 러시아에 의해 차단되었다 [...] 그들의 목적은 분명했다. 서방을 강제로 후퇴시키고 도시 전체를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는 것이었다. 서방 연합국은 긴급 공수를 조직하여 이 도발에 대응했다. 공수 작전은 6월 25일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근대 항공 역사상 가장 화려한 작전이었고 서독 주민들의 자유를 구해준 사건이다. 1948년 6월 25일에서 1949년 5월까지 150만 톤에 달하는 다양한 물자, 식량, 석탄, 원료와 의약품이 항공기로 도달했다. [...] 1949년 5월 12일 밤 러시아는 결국 봉쇄를 해제한다. 주민들의 저항을 짓밟고 서방 세력이 자리를 뜨게 만들고자 했던 목표를 그들은 결국 달성하지 못했다. 베를린은 서방의 보루로 남았다.

콘라드 아덴아우어, 서독 수상, <회고록 1945-1953>, 1965년

서방이 점령당한 독일 지역의 화폐인 독일 마르크를 만들면서 1945년 도입된 통화 시스템이 사라졌다. 점령군은 원하는 만큼 화폐를 찍어냈다. 이 화폐는 독일 전 지역에서 유효했다. 1958년 화폐 개혁으로 막을 내린 이 수단은 소련에 의해 많이 사용되었다.

2. 점령당한 독일 내 베를린 봉쇄

p.113

3. 미국의 항의에 대한 소련의 답변

소련 정부는 이 상황을 자초한 게 미국, 영국, 프랑스 정부라고 생각한다. 독일과 베를린에 관해 4개국이 공동 결정을 내린 바 있지만, 그것을 위반하고 화폐 개혁을 감행해 서베를린에 특수 화폐를 만들고, 독일의 분할 정책을 계속 이어나가려 했으니까 말이다. [...] 도시를 4개의 관할 구역으로 나눈 베를린 통치 조약은 4개의 지역으로 나뉜 독일 통치 조약의 일부나 마찬가지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서베를린에 별도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4개의 지역으로 나뉜 독일 통치 시스템을 훼손하고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을 서독 정부의 수도로 만들려고 하였으니 베를린 통치에 참여할 법적 권리를 스스로 박탈한 셈이다. 베를린 봉쇄 관련 미국의 항의에 대한 소련의 답변 중, 1948년 7월 14일.

4. 봉쇄당한 서베를린의 물자지원

사진은 1948년에 찍혔다.

5. 긴급공수를 조직한 루시우스 D. 클레이 장군의 풍자화

미국 풍자화, 1949년

6. 숫자로 본 긴급 공수 현황(1948년 6월 26일 – 1949년 9월 30일)

Air.png


질문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사태를 일으킨 계기는 무엇인가? 서방은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가(자료 1)?

2. 베를린이 4개의 구역으로 나뉜 이유를 다시 한 번 설명하라(자료 2).

3. 소련에 따르면 이 사태의 원인은 무엇인가(자료 3)?

4. 풍자화에서 베를린을 상징하는 건물은 어떤 것인가(자료 3)?

5. 공수 작전에서 각 나라가 차지한 비중에 대해 설명하라(자료 6).


B. 자료 연관짓기

6. 베를린에서 서방국가들의 지위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보여주어라(자료 2, 4).

7. 긴급 공수가 서베를린 주민들을 어떻게 구원했는가(자료 4, 5, 6)?

C. 논술

8. 베를린 통치가 서방과 소련 모두에게 쟁점이라는 것을 보여주어라.


p.114

2. 1949년에서 1962년까지의 냉전

A. 베를린 사태의 결과

베를린 봉쇄가 실패로 돌아가자 서독인들 사이에서는 서방의 지지도가 상승했다. 대부분의 서독인들에게 서방국은 연합국이자 소련의 위협에서 그들을 지켜주는 보호자가 되었다. 1949년 5월, 베를린 봉쇄 사건의 직접적인 결과물로 서방국가가 관할하던 3개의 지역이 독일 연방 공화국으로 탄생했다. 그에 대응하기 위해 소련은 자신이 관할하던 지역에 공산당이 이끄는 새로운 국가인 독일민주공화국을 수립한다. 두 개의 나라로 나뉜 독일의 분단은 유럽에서의 냉전을 상징하게 된다.

B. 한국전쟁 자료 1

새로운 급변사태가 1950년 한국에서 발발한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이 나라는 1945년부터 2개의 나라로 분단되었다. 하나는 친미성향인 남한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 정권인 북한이 되었다. 1950년 6월, 북한의 군대가 남한을 침략하자 UN은 북한의 습격을 비난한다. 미국은 UN 국제연합군의 이름으로 한국에 참전하여 북한군을 격퇴시키고 북한을 침공한다. 그러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중공군이 개입하여 UN군을 다시 후퇴시킨다. 결국 38선에서 전선이 고정된다. 전투는 양측 간의 입장을 더욱 견고하게 했지만 스탈린이 1953년 3월에 사망하면서 3백 만 명의 사망자를 낸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체결된 휴전협정을 계기로 중단된다. 독일처럼 한국도 두 개의 국가로 분단돼 아시아에서 냉전의 상징이 된다.

C. 평화 공존과 새로운 급변사태 자료 2~7

1953년 사망한 스탈린의 뒤를 이은 그의 후계자들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평화 공존”을 받아들인다. 미국에서도 공산주의의 격퇴를 지지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평화를 원한다. 긴장 관계가 완화되고 “해빙”기에 접어든다. 진영 간 경쟁은 무기, 우즈 등 다른 분야로 이전된다. 그로나 1962년까지 세계에는 크고 작은 위기가 발발하기도 한다. 1956년 두 차례의 위기가 닥친다. 첫 번째는 수에즈 전쟁이다. 이 전쟁은 이집트 대통령인 나세르가 19세기 중반 프랑스가 건설한 수에즈 운하를 운영하는 민영기업(대부분 프랑스, 영국 자본)을 국유화 시키려 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운하를 되찾기 위해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군사 개입을 감행한다(1956년 10월-11월). 소련과 미국이 압력을 넣어 이들은 결국 군대를 철수시킨다. 같은 시기인 1956년 가을, 헝가리 반란이 일어나 소련이 무자비하게 진압한다. 서방은 그들을 내버려둔다. 베를린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1945년 이후 3백 만 명의 동독인들이 소련 구역을 떠나 대부분 서베를린을 거쳐 서독으로 넘어갔다. “공산주의 낙원”을 찬양하고 “지옥의 자본주의”를 규탄하는 소련의 프로파간다를 반증하는 이 인구이탈을 막기 위해 동독은 소련의 승인 하에 1961년 8월 13일부터 서베를린을 완전히 고립시키는 베를린 장벽을 쌓기 시작한다. 가장 심각한 위기는 1962년 쿠바에서 터진다. 1959년 미국의 지원을 받던 독재자 바티스타를 쫓아낸 피델 카스트로 이후 소련 진영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 쿠바섬에 소련 미사일 설치를 허용한다. 미국이 이 사실을 알면서 1962년 10월 양쪽 진영의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미국은 쿠바섬 봉쇄작전을 펼치고, 소련 미사일을 철수 시킬 것을 요구한다. 소련 미사일은 결국 해체되고, 쿠바 봉쇄 조치는 해제됐다. 그러나 미국은 더 이상 무력으로 카스트로의 체제를 뒤엎을 시도를 하지 않았다.


1. 한국전쟁.

2. 1956년 발표된 평화 공존

세계 2대 강대국인 소련과 미국의 지속적인 친선관계 구축은 세계 평화를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영토보전과 주권 존중, 불가침, 내정에 대한 불간섭, 상호간의 평등과 이득 존중, 평화 공존과 경제협력과 같은 평화 공존 5대 원칙을 바탕으로 친선관계를 유지한다면, 이는 곳 인류 전체에 이례적인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제 20회 소련 공산당 회의에서 발표된 흐루시초프의 보고서, 1956년 2월

1  텍스트의 날짜를 기준으로 3년 전부터 어떤 역사적 변화가 있었는가?
2  “평화 공존”의 원칙은 어떤 것들인가? 
3  “평화 공존”이 국제 관계에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어라. 

p.115

3. 수에즈 전쟁(1956).

프랑스, 영국, 이스라엘의 개입은 군사적으로 성공적이었으나(운하의 감독권을 되찾고 이집트 군대를 무찔렀다) 외교적으로는 큰 실패였다.

4. 베를린 장벽 구축, 1961년 8월 13일.

5. 피델 카스트로는 1959년 1월 쿠바(하바나)에서 정권을 장악한다.

6. 1962년 10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의 텔레비전 연설

이 미사일들은 각각 워싱턴 DC, 파나마 운하, 커내버럴 곶, 멕시코시티, 혹은 미국 남동부와 중앙아메리카 및 카리부 지역 전역에 있는 도시를 사정거리 안에 두고 있습니다. [...] 1930년대는 우리에게 확실한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공격정인 행위를 위심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 저는 다음과 같은 초기 조치를 즉각 시행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 공격용 미사일 기지가 구축되는 것을 막기 위해 쿠바로 향하는 모든 공격용 군사장비에 대한 엄격한 “검역”을 시행중입니다 [...] 쿠바와 쿠바 내 군사기지 건설에 대해 철저한 감시를 유지하고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 미국은 쿠바에서 발사된 핵미사일이 아메리카 대륙의 어떤 나라를 공격하더라도 소련의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전면적인 보복 대응에 나설 것입니다. [...] 유엔 헌장에 따라 오늘 저녁 긴급 안전보장이사회의 즉각적인 소집을 요청합니다. [...] 흐루시초프 서기장에게 도발적인 위협을 중단할 것을 호소합니다 [...]. 세계를 장악하려는 이 같은 행동을 버리고 위험한 무기 경쟁을 끝내며 인류 역사를 바꾸기 위한 역사적인 노력에 동참할 것을 요청합니다.

1  쿠바에 설치된 미사일은 어떤 위협 요소로 작용하는가?
2  케네디 대통령은 군사적으로 어떤 결정을 내렸는가?
3  이 상황이 어떤 이유에서 미국과 소련 사이의 심각한 도발사태로 번질 수 있는가?
4  케네디가 이 위기를 평화롭게 해결하고자 한다는 것을 보여주어라. 

7. 쿠바 위기.

p.116

지도

1950년대의 두 진영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미국은 NATO와 같은 동맹 시스템을 구축한다. 소련도 모든 공산주의 국가를 자신의 산하에 결속시킨다. NATO가 창설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동유럽 국가들은 1955년 바르샤바 협정기구를 만든다. 그렇게 1947년에서 1955년 사이 두 개의 대립 진영이 형성되었다. 무기 경쟁으로 두 국가 모두 한 쪽 진영을 파괴시킬 수 있는 핵무기고(수소폭탄, 원자폭탄)를 보유하게 됐다. 이러 인해 세계에는 진정한 “공포의 균형”이 자리 잡게 된다. 냉전은 두 개의 세계관, 두 개의 정치, 경제 시스템 즉 자본주의/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연장선인 공산주의 사이의 대립이다. 서구는 “자유세계”를 침범하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우려한다. 반대로 소련은 “자본주의 진영”에 포위되었다고 생각한다.

1. 두 개의 대립 진영 편성

Alliance.png

2. 1950년대 중반의 두 진영

질문

1. “소련 진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2. 소련 진형을 놓고 봤을 때 미국 연합국들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이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어떤 목적을 노리고 있는가?

3. “대륙 열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국가는 어디인가? 왜 그러한가?

4. “해상 열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국가는 어디인가? 왜 그러한가?

P.118

자료집

1945년 이후의 근동 지역

3대 일신 종교의 진원지인 근동은 16세기에서 1918년까지 터키의 지배를 받았다. 1890년대 시온주의자들은 고대에 유대인들이 주로 살던 땅인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1차 세계 대전(1914-1918)동안 영국은 아랍인들(이들에게 1915년 독립 아랍 왕국을 약속했다)과 유대인들(이들에게는 1917년에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의 건설을 약속했다)을 동시에 지지했다. 1918년 팔레스타인, 이라크, 트란스요르단은 영국령이 되고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령이 된다. 1945년 이 지역의 아랍 국가들은 아랍 연맹을 설립한다. 팔레스타인에서는 1920년 이후 우대인과 아랍인들 사이의 대립이 증폭해왔고, 1945년 이후에는 유대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더욱 심해졌다. 전략축과 석유를 통제권이 걸린 중동지역 전체가 극심한 긴장 국면에 들어간다.


용어

시온주의자 : 예루살렘에 있는 동산 시온에서 온 말이다.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테오도어 헤르츨에 의해 1896년 비엔나에서 처음 창설된 시온주의 단체를 지지하는 이를 일컫는 말이다.

-령 : p.148의 헷갈리지 말 것 참조하기


1. 1945년의 중동

2. 영국의 이중 약속

제시된 국경 안에 속한 지역과 관련해서 저는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할 수 있습니다 :

1. 영국은 메카의 왕이 요구하는 영토에 위차한 모든 지역에 아랍인들의 독립을 인정하고 지지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2, 영국은 이슬람의 모든 성지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것을 보장합니다. [...] 영국은 아랍인들에게 조언을 해줄 것이며, 적합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도울 것입니다.

H. 막-마혼, 이집트에 파견된 영국 고등판무관, 메카의 왕께, 1915년 10월 24일

국왕 전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 고향의 건설을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에 사는 비 유대인 단체의 시민권과 종교법을 훼손하지 않는 차원에서, 그리고 다른 나라에 사는 유대인들이 누리는 정치적 지위와 권리를 보호하는 선에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시온주의 연맹 대표 로스차일드 경에게 밸푸어 외교장관이 보낸 서신, 1917년 11월 7일.

p.119

3. 예루살렘, 3대 종교의 성지.

통곡의 벽은 예루살렘 신전의 유일한 유적이다(유대교);

예수의 무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뒤 묻힌 곳으로 전해지는 자리에 세워진 건축물이다(기독교);

모스크 광장은 마호메트가 아라비아에서 하룻밤만에 도착한 곳으로 전해지는 곳이다(이슬람교).

4.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와 아랍인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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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알렉산드리아 회담 당시 팔레스타인에 관란 해결책

위원회는 팔레스타인이 아랍권의 중요한 일부라고 여기며,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곧 아랍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훼손하는 일과 같다고 판단한다. 위원회는 유대인들의 이민 정지, 아랍 영토 보존,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약속한 영국의 약조가 아랍인들의 영구적인 권리라고 여긴다. [...] 위원회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지지할 것을 선언한다. 그리고 유럽의 독재국가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들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아파한다는 것을 공표한다. 하지만 희생된 유대인들의 문제와 시오니즘 문제를 혼동하여서는 안 된다. 유럽 유대인들의 문제를 또 다른 불의로 해결하는 것, 즉 다양한 종교와 신념을 가진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 이 문제해결을 위해 부당행위를 저지르는 일보다 더 부당하고 폭력적인 일은 없기 때문이다.

아랍 연맹 위원회, 1944년 10월 7일.

6. 영국 군사들이 팔레스타인인을 수색하는 장면, 1933년


질문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1945년 중동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국가는 어디인가(자료 1)?

2.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은 각각 어떤 약조를 받았는가? 양립될 수 있는 약조들인가(자료 2)?

3. 예루살렘이 갖고 있는 종교적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라 (자료 3).

4. 어느 공동체가 가장 빨리 증가하는가? 왜 그런가(자료 4)?

5. 펠레스타인에 대한 아랍 국가들의 입장은 어떠한가(자료 5)?

6. 이 사진은 어떤 상황을 보여주는가(자료 6)?


B. 자료 연관짓기

7. 자료집에 제시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려는 원인과 그것에 대한 아랍인들의 입장을 설명하라.


C. 논술

8. 1948년 이전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이 서로 대립하는 원인을 서술하라.


p.120

3. 근동, 전쟁과 긴장의 연속

A. 1948년 5월 : 이스라엘의 탄생 자료 1

1945년 나치의 학살 수용소의 현실이 밝혀지면서 국제 여론은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고자하는 시오니스트들의 요구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 사이의 긴장관계를 해결하지 못한 영국은 UN에 이 문제를 넘긴다. UN은 1947년 팔레스타인을 유대인과 아랍인 구역으로 나누는 계획을 투표에 부친다. 이 계획안은 아랍인들에 의해 거부된다. 유대인 지도자 다비드 벤구리온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탄생을 선언한다. 미국, 소련, 프랑스는 이와 같은 결정을 승인한다. 5월 15일이 되자마자 이스라엘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와 같은 인근 아랍 국가들이 결성한 군대의 공격을 받는다. 이스라엘은 아랍인들을 후퇴시키는 데 성공한다. UN의 분립 계획안이 예상했던 아랍 국가는 사실상 요르단과 이집트가 관리하게 되었고 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요르단으로 나뉘었다.


B. 이스라엘-아랍 전쟁의 시작 자료 2, 4

1949년 전투가 중단된 뒤 아무런 평화 조약도 체결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탄생은 대규모의 인구이동을 불러온다. 600 000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 신생국가를 떠나 이웃 아랍 국가의 난민캠프로 간다. 이스라엘은 유대인 이민자들을 줄지어 받는다. 이들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들이거나 동유럽, 중동, 북아프리카 출신이다. 1950년 입법된 귀환법은 이스라엘로 돌아오고자 하는 모든 유대인의 입국을 허용한다. 주민들의 다양한 배경과 개척 정신의 지속성으로 다져진 독창적인 사회가 이 새로운 국민 국가를 이룬다. 자유 원칙과 주권, 평등한 법을 사회에 적용하는 이스라엘은 근동의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주변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다. 이스라엘은 영국, 프랑스와 함께 1956년 수에즈 원정에 참가한다. 1967년 이스라엘은 점점 위협을 가하는 아랍 국가들에 맞서 경고성 전쟁을 일으킨다. 6월 5일에서 11일까지 벌어진 “6일 전쟁”동안 이스라엘 군대는 이집트와 시리아 군대를 무찌르고 시나이 반도, 요르단강 서안 지구, 골란 고원을 차지한다.

C. 이스라엘에 맞선 아람 국가들과 팔레스타인 자료 3, 5

이집트, 시리아, 바스당이 집권한 이라크 등 이스라엘 이웃 국가에선 1960년대부터 아랍 민족주의가 발달한다. 소련은 이들 체제를 지원한다. 1956년부터 이집트 지도자 나세르는 범아랍주의의 리더를 자청한다. 터키의 지배가 끝난 뒤 근동의 아랍인들은 “아랍의 통일”을 꿈꿔왔다.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나세르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통합(통일 아랍 공화국(1958-1961)을 이뤄내지만 1967년 나세르가 이끄는 이집트 군대가 패배하면서 그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사우디아라비아가 새로운 리더로 떠오른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와하비즘이 지배하는 극보수주의 왕조 체제를 유지한 나라이다. 1964년 여러 개의 팔레스타인 조직이 모여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결성한다. PLO는 1947년의 분단과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팔레스타인의 공격과 이스라엘의 보복이 잇따른다. 1967년 이후, PLO는 무장 투쟁이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여 주변의 원건파 아랍 국가들의 우려를 낳는다. 1970년 9월, 요르단의 후세인왕은 자신의 나라에 주둔하는 팔레스타인 관련 조직들을 모두 없애기로 결정한다. 군사 작전이 시작돼 수천 명의 사망자가 생겨난다. 그러자 팔레스타인은 비행기 회항, 테러 등을 새로운 무기로 삼는다. 이러한 극단적인 행동들은 팔레스타인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고 만다.


용어

팔레스타인인 : 팔레스타인에 사는 아랍어를 쓰는 사람으로서 기독교인이거나 무슬림이다. 1948년 이후 이 용어는 이스라엘을 떠나 인근 아랍 국가에 정착한 난민을 지칭하기도 한다.

바스(Baas) 당 : 1947년 생긴 민족주의 단체로 사회주의 영향을 받았다.

범아랍주의 : 한 국가에 모든 아랍인들을 결집시키고자 하는 사상.

와하비즘 : 18세기 중반 압둘 와하브의 전도로 아라비아에서 나타난 정치, 종교 단체다. 그는 “초기의 이슬람”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그는 성인 숭배, 담배, 음악, 남녀가 공공장소에서 함께 있는 것을 금지하고 “온건”한 이슬람교도들과 이교도들(시아파)에 맞서 싸우는 성스러운 전쟁을 선포한다.


1. 이스라엘의 탄생을 선언하는 벤구리온

이스라엘 땅은 유대민족이 태어난 곳입니다 [...] 테오도르 헤르츨의 유대인 국가 건설 계획으로부터 출발한 첫 번째 시온주의 위원회는 1897년 본인들의 나라에서 새로운 출발을 할 유대민족의 권리를 선언하였습니다. 이 권리는 밸푸어 선언에서도 인정받은 바 있습니다. [...] 최근에 벌어진 홀로코스트로 유럽에 살던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팔레스타인에 새로운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여 이 문제를 해결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1947년 11월 29일 UN총회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 결론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공동체와 시온주의 단체를 대표하는 국회 임원들은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 국가 건국을 선언하고, 이 국가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국은 전 세계에 흩어졌던 모든 유대인들의 이민을 환영합니다.

벤구리온의 선언, 1948년 5월 14일

2. 1948년 12월 전장의 이스라엘인들

1  사진의 병사들을 묘사하라.
2  정규 군대가 아니라는 것을 무엇을 통에 알 수 있는가?

3. 1970년 9월, 전투중인 팔레스타인 사람들

 1  사진의 병사들을 묘사하라.
 2  이들은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 왜 그러한가?

4. 건국(1947-1948)에서 6일 전쟁까지(1967년 6월)의 이스라엘.

5. 1964년 그리고 1968년의 팔레스타인 헌장

a. 1964년판 헌장

1. 팔레스타인은 아랍 땅이다. [...]

2. 영국령 시절의 국경을 유지하는 팔레스타인은 불가분한 지역 단위이다

3. 팔레스타인의 아랍 민족은 조국을 가질 [권리]가 있다. [...]

6. 팔레스타인인이라 함은, 현재 그곳에 남아있든, 쫓겨났든 1947년까지 팔레스타인에서 별 탈 없이 살았던 아랍 국민을 뜻한다. [...]

7. 팔레스타인 출신의 유대인들은 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합법적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팔레스타인인으로 인정된다 [...]

17. 1947년 팔레스타인의 분단과 이스라엘의 건국은 불법이며 인위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국민들의 의사에 반하는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


b. 1968년판 헌장

1.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의 아랍 민족의 조국이다. [...]

7. 팔레스타인에 시온주의자들이 침략을 시작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인이다. [...]

9.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위한 유일한 길은 오직 무장 전투뿐이다, [...] 팔레스타인 아랍 민족은 팔레스타인에서 정상적인 삶을 누릴 권리와 그것에서 주권을 [...] 행사할 권리가 있다.

10. 특공대의 임무가 팔레스타인 민중 해방 전쟁의 핵심을 이룬다. [...]

 1  PLO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PLO는 누구와 대립하는가?
 2  1964년판 헌장과 1968년 헌장의 차이점을 찾아내라. 
 3  1968년판 헌장이 이스라엘에 맞선 강경해진 팔레스타인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라. 


p.122

4. 조금의 긴장 완화(데탕트) (1963-1975)


A. 두 열강 사이의 합의 자료 1, 2, 3

제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뻔했던 쿠바 사태 이후 두 열강은 또다른 심각한 사태를 피하기 위해 서로 합의한다. 이로써 워싱턴과 모스크바 간 직통 전화인 “핫라인”이 설치된다. 미국은 “집단 보복” 주의를 버리고 점진적 반격 주의를 택한다. 핵무기 공격이 있을 시, 미국은 핵무기를 모두 사용하는 대신 비슷한 강도의 대응을 할 방침이다. 핵무기 도입을 금지시킬 목적의 조약도 다수 체결되는데 그중 하나가 1968년의 핵확산 방지 조약이다. 두 열강은 이 조약을 적용하는 데는 실패하지만 무기 도입 제한에 관련된 협상을 타결한다(SALT 협정). 이러한 완화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우선 미국은 무기 경쟁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더 이상 없는데다 베트남 전쟁의 늪에 빠져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다. 농업 생산량이 정체된 소련도 외부 경제 지원이 필요한 상황인데다 중국이 소련형 모델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소련에 압박을 넣기 위해 미국은 중국 공산당과 1972년 손을 잡는다. 미국 대통령 닉슨과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주네프는 1972년, 1973년, 1974년에 연속으로 만나 공동지배(콘도미니엄)에 합의한다, 즉 두 열강은 각자 자신의 영향권 외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각동 협력 조약이 체결돼 미국산 밀가루가 소련에 공급되고 우주분야에도 협력이 이루어진다(아폴로-소유즈 선, 1975년).

B.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의 긴장 상태 자료 4, 5

데탕트는 제3국 국가들에는 그리 영향을 주지 않는다. 1966년 피델 카스트로의 동지인 에르네스토 체게바라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게릴라 혁명전을 일으킨다. 쿠바 공산 정부는 이 혁명 운동을 지지하지만 실패로 끝난다. 체게바라는 1967년 볼리비아에서 암살당한다. 데탕트는 양 진영 외곽에서의 분쟁을 동반한다. 베트남을 예로 들 수 있다. 미국은 친미 성향인 베트남 남쪽 정부를 경제적,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공산 체제인 북쪽 정부는 소련의 도움을 받는다. 1962년부터 미국은 점진적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기 시작한다. 1968년 베트남 전쟁에 참가한 미국 군인의 숫자는 500 000명에 달하지만 북베트남군이 지휘하는 공산당 게릴라전에서 끝내 패하고 만다. 1973년 미국은 결국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월남전은 남베트남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라오스에서도 공산당의 승리로 1975년 막을 내린다.

C. 유럽에서의 데탕트 자료 6

유럽에서는 데탕트로 인해 각 진영에서 미국과 소련의 패권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진다. 서방 진영에서는 드골 장군이 미국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소련형 모델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1968년 반발의 대상이 된다. 체코에서는 “인간적 사회주의”가 시도되지만 곧 바르샤바 조약기구 군대가 들이닥쳐 진압하면서 중단된다. 특히 1969년부터 서독 총리인 빌리 브란트는 두 독일의 화해 정책을 펴는데 이 정책을 “오스트폴리틱(Ostpolitik)”이라고 부른다. 이로써 두 나라는 외교관을 상호 파견하고 UN에 1973년 가입한다. 헬싱키 회담(1973-1975)은 유럽 33개국(소련 포함), 캐나다, 미국 사이 체결된 협정으로 이어진다. 이 회담은 유럽 데탕트 시기의 절정으로 평가받는다. 회담을 통해 국가 간 협력 및 사람들의 자유로운 통행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무역 협정 혜택을 누리게 된 반면 인권 존중과 관련해서는 뚜렷한 개선을 보이지 않은 소련이 협정의 가장 큰 수혜자다.


용어

SALT 협정 (Strategic Armements Limitation Talks) : “전략무기제한협정” : 1972년 미국과 소련이 체결한 것으로 핵무기 보유량 제한을 골자로 한 협정이다.

콘도미니엄 : 라틴어에서 온 말로 cum은 “같이”를 뜻하고 dominare는 “지배하다”를 의미한다. 콘도미니엄은 두 파트너가 같이 지배를 하고 중요한 사안 결정 시 다른 국가를 배제하기로 합의한 협정을 뜻한다.


1. 미국과 공산국가들과의 관계

우리는 사적인 좋은 관계 또는 좋은 감정이 전후 긴장관계의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에게 이득이 될 만한 분야를 개척하고 엄격한 호혜 조건 속에서 조약을 체결할 준비는 되어 있었다. [...] 우리는 소련측의 무모한 요구를 확실히 거부할 예정이었고 상호 자제 원칙을 바탕으로 한 데탕트 정책을 통해 긴장의 완화를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우리가 중국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무조건 반소련주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우리가 중국에 손을 내밀었다면, 그것은 소련에 맞서 중국과 한패를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건설적인 목표 달성에 적합한 상황을 만들어 각각의 공산주의 세력이 우리와 더 나은 관계를 이어나가게 함이었다. 이러한 균형은 궁극적으로 열강들 사이의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시켜줄뿐더러, 1970, 80년대에는 잠재적 협력관계로 발전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삼자 외교의 장점과 더불어 (이 정책을 도입한 배경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베트남이다. 중국과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헨리 키신저, 리처드 닉슨의 보좌관, <백악관에서>, 1968-1973

1  미국의 목표는 무엇인가?
2  중국과의 친선정책이 주는 장점은 무엇인가?
3  키신저의 글 중 “삼자 외교”가 무슨 뜻인지 설명하여라.
4  왜 베트남 전쟁을 “골치 아픈 문제”라고 하는가?

p.123

2. 1973년 모스크바에서 만난 브레주네프(소련)와 닉슨(미국)

브레주네프는 양국 간의 관계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굉장히 심각해진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 “지배력과 영향력에 관한 한 소련과 미국, 이 두 나라가 현실적으로 세계를 좌지우지 한다는 것을 우린 알지 않습니까. 우리끼리 무엇을 결정하든, 세계 나머지 국가들은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설령 거기에 동의를 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리처드 닉슨, <회고록>, 1978년. 1973년 6월 브레주네프와 닉슨 간 만남에 관하여


3. 무기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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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베트남에서 전쟁 중인 미국인들

5. 베트남전.

6. 헬싱키 회담 최종 의정서

1. 여기에 참여하는 국가는 서로의 동등한 주권과 그 주권에 내재된 모든 권리, 즉 영토보전권, 자유와 정치적 도립을 보장받을 권리를 상호 존중한다. 각 국가가 자신만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시스템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한다.

2. 위협과 무력 사용에 의지하지 않기

3. 참여국들은 모든 국경을 서로 침범할 수 없다.

4. 참여국들은 이들에 속한 나라의 영토를 군사 점령지로 만들 수 없다.

5. 참여국들끼리 분쟁이 발생할 경우 평화적인 수단으로 이를 해결한다.

6. 참여국들은 다른 참여국 관할의 외정,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참여국들은 참여국의 체제를 뒤엎을 목적을 갖고 있는 테러나 전복활동 단체들을 일절 지원하지 않는다.

7. 참여국들은 인권과 생각의 자유, 의식의 자유, 종교의 자유, 신념의 자유와 같은 기본 자유를 누구에게나 인종, 성별, 언어, 종교와 상관없이 보장한다. 참여국들은 인간의 존엄성에 내재한 모든 시민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기타 권리와 자유 행사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장려한다.

1975년 8월 1일, 35개국(유럽, 소련, 미국, 캐나다) 수장들이 헬싱키(핀란드)에서 체결한 조약.

1  처음 3개 조항이 소련을 만족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2  조항 7은 서구진영의 어떤 희망을 담고 있는가? 소련은 여기에 어떤 조항으로 맞설 수 있는가?
3 헬싱키 최종 의정서가 진영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라.


p.124

복습 페이지

기억해야할 사건

■ 1947년 : 급변 : 트루먼 독트린, 마셜 플랜, 주다노프 보고서

■ 1948-1949 : 베를린 봉쇄 작전

■ 1950-1953 : 한국전쟁

■ 1956 : 수에즈, 헝가리 사태

■ 1961 : 쿠바 전쟁

■ 1962-1973 :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

■ 1975 : 헬싱키 회담


인물

해리 S. 트루먼 (1884-1972)

1945년에서 1952년까지 미국의 대통령 (p.415 자세한 전기 참고하기)

안드레이 A. 주다노프 (1896-1948)

소련 지도자, 1938년부터 소련 프로파간다 담당자. (p.411 자세한 전기 참고하기)

빌리 브란트 (1913-1992)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서독 총리 (p.408 자세한 전기 참고하기)

피델 카스트로 (1927년 생)

쿠바 국가 원수 (p.409 자세한 전기 참고하기)



하이라이트

1. 반으로 갈라진 세계

● 1946년에 이미 W.처칠은 유럽을 둘로 가르는 “철의 장막”을 언급한다.

● 1947년부터 서구와 동구의 대립 :

 - 서구에서는 미국이 공산주의의 확산을 억제하려 한다 (트루먼 독트린, 마셜 플랜, NATO).
 - 동구에서는 소련이 주다노프 보고서와 코민포름의 창설로 이에 맞대응한다.

2. 1949년부터 1962년까지 이어지는 냉전

● 1949년부터 : 미국/소련은 전면전 없는 대립을 이어나간다. 이것이 바로 냉전이다.

● 여러 번의 급변사태가 냉전시대에 벌어진다 : 베를린 봉쇄작전, 한국전쟁, 수에즈 위기, 헝가리 반란, 베를린 장벽, 쿠바 정쟁.

3. 1973년까지의 근동지역

● 근동 : 서구/동구 대립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긴장 사태의 진원지.

●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역사적, 종교적 이유로 똑같이 팔레스타인 영토를 주장한다. 전자는 그곳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려 하고 후자는 1948년 UN이 투표한 팔레스타인 분단 결정을 거부한다.

 - 이스라엘-아랍 전쟁 : 1948-1949, 1956, 1967(6일 전쟁)
 - 1970년부터 팔레스타인은 테러 행위를 벌인다.

4. 1962년부터 1973년까지의 데탕트

● 쿠바 전쟁 이후 두 열강 사이의 무기 경쟁은 잠잠해진다.

●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 싸움은 제 3국에서 지속된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지는 게릴라전은 실패로 끝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1975년 베트남전에서 승리한다. 베트남전은 그러나 열강 사이 큰 급변사태를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 유럽에서도 데탕트 분위기가 조성된다: “오스트폴리틱”, 헬싱키 조약.


헷갈리지 말 것

원자폭탄(1945년 미국)과 수소폭탄(1952년 미국)

▶ 원자폭탄은 우라늄 239와 같은 무거운 원자핵이 연쇄적으로 분열되어 방사능을 갖게되는 원리로 작용한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은 14킬로톤에 달하는 위력을 갖고 있었다 (1kt = TNT 1000 톤)

▶ 수소폭탄 또는 핵융합폭탄은 수소, 리튬, 트리티움 원자의 융합으로 만들어진다. 수소폭탄의 위력은 메가톤으로 나타낸다 (1mt = TNT 백만 톤).

유대인과 이스라엘

▶ 유대인은 유대교를 종교로 가진 민족을 구성한다.

▶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국민이다. 대부분 유대교도들이지만, 아랍, 이슬람, 기독교 출신의 이스라엘인들도 있다.

근동과 중동

▶ 20세기 초 중동이란 단어는 오토만 제국과 인도 제국 사이에 위치한 지역을 뜻했다. 오늘날 중동은 보스포러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에서부터 이집트, 아라비아 반도, 이란을 아우르는 지역을 뜻한다.

▶ 근동은 터키에서 시리아, 요르단을 거쳐 이집트까지 이르는 지역을 의미한다.

p.125


역사자료 설명하기(5/15)

주제 : 냉전에 대한 풍자

자료 : “평화와 자유” 단체 포스터, 1950년대 초

댄서를 위주로 윈쪽에서 오른쪽으로 : 마르셀 카샹, 쟈크 뒤클로, 앙드레 마르티, 모리스 토레즈,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들.


질문

1. 포스터에 그려진 장면을 묘사하여라. 주인공은 누구인가? 그를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장치는 무엇인가? 그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2. 포스터는 어떤 상황을 돌려 말하고 있는가?

3. 위협을 느낄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왜 그런가?

4. 이 포스터가 고발하는 것은?

5. 이 자료가 프로파간다라는 것을 보여주어라.


접근방법

A. 풍자 분석하기(1) 풍자는 인물이나 상황을 의도적으로 비꼬아서 표현하는 방식이다. 의도된 과장으로 풍자는 웃음을 유발하거나 불안하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풍자는 다른 여느 역사 자료와 같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분석가능하다 :

● 그려진 장면 묘사부터 시작하기

● 그다음 이것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분석하기

B. 질문 2에 대한 답변 관련 도움말

바닥 위에 놓인 표적을 잘 읽기. 이 장면이 당시 어떤 역사적 상황에 연관되어 있는지 살피기. 주인공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기 : 짓밟힌 표적, 짓밟히지 않은 표적.


모의 바칼로레아

주제 : 헬싱키 회담, 1975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짜이퉁>의 풍자만화, 1975년 7월 30일.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 V. 지스카르 데스탱(프), H. 슈미트(서독), L. 브레주네프(소련), G. 포드(미), H. 히스(영국).


질문

1.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라.

2, 메인 장면, 그리고 원경과 근경에 있는 인물을 묘사하라.

3. 메인 장면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원경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4. 헬싱키 조약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설명하여라. 이 주제에 관한 풍자 작가의 의견은 어떠한가?


p.126

작문(3/9)

주제 : 1950년대 중반의 두 진영


연대기

■ 1953년 7월 : 한국전쟁 종료

■ 1954년 : 디엔 비엔 푸에서 프랑스의 패배, 인도차이나 전쟁 종료

■ 1955 : 반둥 회담 ; 바그다드 협약; 바르샤바 협약

■ 1956년 2월 : 제 20회 소련 공산당 위원회 : 스탈린주의 비방.

■ 7월-11월 : 수에즈 사태

■ 1956년 10월-11월 : 헝가리 반란


첨부자료 수에즈 사태(1956년 11월) 포트 사이드에 배치된 영국 장갑차.


접근 방법

A. 도움말

1. 주제를 읽고 분석하기

● 주제는 짧고 테마는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주어진 용어 하나하나에 대한 고챃을 할 필요가 있다.

1. 지리 범위 :

범위는 주제 지문에 나타나지 않는다 :

- 두 진영과 관련된 나라들은 어디인지 살피기

- 여기서는 미국과 소련 두 나라만을 얘기해서는 안 된다. 연대기는 동맹 시스템과 관련된 정보를 준다.

- 주제의 범위는 지구의 대부분 지역을 포괄한다.

2. 테마 :

- 테마도 주제 지문에 명시되어있지 않다.

- 두 진형을 이루는 나라들 간의 관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시기 :

- 1955년만 대상으로 삼으면 안 된다.

- “중반” : 이런 종류의 표시는 “초기”처럼 관찰 범위를 이전, 이후의 짧은 시기까지 포함시켜 확장시켜야 함을 보여준다.


● 주제는 두 가지 테마를 동시에 다루도록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여기에 주제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 두 진영과 이들의 관계.

● 진영이 어떻게 조직되고 그들의 관계가 주제에 제시된 시기에는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게 관건이다.


2. 주제의 내용에 관하여 더 심도있게 관찰하기

● “두 진영” : 이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관찰하기 :

- 미국과 소련 두 나라만 다루는 게 아니다.

- 진영에 속한 다른 나라들도 언급해야 하고 이 시기에 존재하는 동맹 시스템 또한 생각해야 한다.

- 이 두 진영이 통합을 이뤘는지 아니면 진영 내에 독립을 얻으려는 시도가 나타나는지 살펴볼 수 있다.

- 또한 진영에 속하기를 거부하면서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뉜 세계에 문제를 제기하는 시도는 없는지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3. 시기

● 날짜가 어떻게 쓰였는지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

- 날짜는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주어진 한 해를 다루는 게 아니다.

- “중반”을 글짜 그대로 해석하여 1955년만 다루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1955년을 둘러싼 시기를 연구해야 하고 1950년대의 모든 국제관계를 다뤄서도 안 된다.

- 연대기는 소중한 지표다. 연대기는 1955년 전후에 일어난 주요 사건을 정리해준다 : 인도차이나 전쟁 종료, 수에즈 사태와 헝가리 반란 사태. 그러므로 1955년보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소 1955년 이후 조금 더 내려와서 1954-1956년도의 사건을 살펴야 한다.

- 그러나 주제는 제시된 날짜에 일어난 사건들을 순차적으로 나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B. 문제와 목차구성

1. 핵심 문제 끄집어내기

● 테마를 잘 구분짖고 연구 대상인 시기를 잘 파악한 후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

 - 두 진영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 왜 1950년대 중반이 중요한 시기인가?
 - 이 시기 두 진영 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2. 목차 구성하기

● 목차는 주제의 시기 속 두 진영의 상황을 담아야 한다.

● 목차는 이 시기 두 진영 간의 관계를 담아야 한다.

● 목차는 각 진영 내 변화의 유무도 포함해야 한다.


3. 모범답안(목차 제안)

I. 1955년경 두 진영의 구성

a. 미국과 서구 진영

b. 스탈린 이후의 소련과 사회주의 진영

c. 두 진영의 동시 완성 : 바그다드 조약, 바르샤바 조약


II. 국제관계와 진영 내부가 새로운 국면을 맞는 시기

a. 두 진영 대립의 완화 : 서구/동구 대립이었던 한국 전쟁 종료와 인도차이나 전쟁의 종료.

b. 두 진영 내의 새로운 변화 감지 :

 - 식민 전쟁 종료 : 인도차이나 국가들의 독립
 - 동구권에서 진행된 비스탈린화

c. 제3세계는 두 진영을 벗어나려 한다 : 반둥 회담

III. 내부 균열이 결국 두 열강 체제를 강화함.

a. 동구권에서는 비스탈린화가 헝가리 반란 사태를 일으킨다.

b. 수에즈 사태는 새로운 식민 전쟁이다 : 프랑스와 영국은 수에즈 운하의 관리권을 보존하려 한다.

c. 두 사태의 해결 :

 - 프랑스와 영국은 이집트를 군사적으로 이기나 병력을 철수시켜야 한다.
 - 헝가리 반란은 적군의 진압에 의해 유혈사태로 끝났다.
 - 미국과 러시아는 국제 사회의 여전한 강자로 남는다. 

C. 서론 작성 예시

서론은 다음과 같이 구성될 수 있다 :

- 주제의 전반적인 소개

- 작문에서 다뤄질 질문 분석

- 목차 보고


주제 소개 :

1950년대 중반, 세계는 냉전의 첫 번째 심각한 대립을 겪은 직후다. 세계는 그래도 두 개 진영에 지배되고 있다. 한 진영은 미국이 이끄는 자유주이, 자본주의 진영이고 다른 하나는 소련이 이끄는 사회주의 진영이다.

문제 :

1950년대 중반은 중요한 변화가 감지되는 시기이다. 이 변화들이 진영 논리를 타파할 만한 파급력을 갖고 있는가?

목차 보고 :

1955년경, 두 진영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구성이 완성된 상태다. 이 시기는 주요 심각한 사태가 끝난 시기다. 우리는 이 시기에 발생한 진영 내 내부 균열에 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제 7 장 : 유럽국가들의 식민지배부터 식민지 해방까지

유럽의 식민지배의 역사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부터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간의 경쟁으로 인해 폭발적인 식민지 팽창이 이루어진다. 이로 인해 많은 영토가 식민지화 되어 유럽의 경제에 속하게 된다. 이러한 유럽국가의 식민지배는 1918년 이후부터 비난을 받게 된다. 1945년부터, 유럽의 식민제국들은 수십 년에 걸쳐 붕괴되었다.

어떻게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왜 식민지 해방이 그렇게 빨랐는가?

자료1. 스캔. 구 식민제국의 번영

대영제국, 그래픽 매거진(Graphic Magazine), 1896년 7월 24일 “로마제국이 현대 문명의 기반을 세운 것처럼 […], 오늘날 아프리카에, […] 야만과 어둠의 땅에 문명과 진보의 빛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 문명의 필요를 만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

프레데릭 루거드(Frederick Lugard), 영국인 식민지이론학자이자 식민지 개척자, 18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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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2. 스캔. 그리고 그들은 무너졌다.

디엔비엔푸(Dien Bien Phu)에서, 베트민 병사들이 카스트리(Castries) 장군의 사령부에 깃발을 게양하고 있다. 1954년 5월 7일. (베트민의 선전을 위한 사진을 복원) “디엔비엔푸의 승리와 1954년 제네바 조약은 인도차이나의 혁명세력의 승리이며, 동시에 프랑스 제국주의 식민지 제도, 세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필연적인 붕괴에 대한 크나큰 기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치민(Ho Chi Minh), ‘인간, 인민’. The Gioi 출판, 하노이, 1997년.


p.132

지도

1860년의 식민제국들

유럽국가의 식민지배가 16세기부터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그 규모는 1860년까지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사실, 이전에 유럽국가들에 의해 지배되었던 많은 영토들이 해방되었었다. 18세기 말에 들어서 많은 국가들이 해방되었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고, 19세기 초에 남미국가들이 포르투갈(브라질이 포르투갈에서 독립)과 스페인(대부분의 남미국가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으로부터 독립하였다. 큰 도시가 위치하고 있는 인접지역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러시아와 오토만 제국을 예외로 치더라도, 캐나다, 호주, 영국령 인도,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를 제외하고는 유럽국가들의 대부분의 식민지가 넓은 지역에 걸쳐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럽은 식민상관을 통한 통치를 했다. 식민지배는 넓은 영토를 통치하는 것보다는 주로 교역이나 군함대의 기항지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유럽국가의 식민지배가 가장 크게 발전했던 곳은 아시아이다. 하지만 아시아는 유럽국가들이 진전된 문명의 국가와 사회(페르시아, 중국)를 조우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또, 가장 거센 식민지 해방운동이 있었던 미국에 대한 식민지배의 규모가 가장 작았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유럽국가들은 연안지대를 차지하는데 그쳤다.


용어

Comptoir(식민상관): 해외영토에 설치된 상업 단체

식민지 : p.148의 혼동하지 않기 참조.


문제

1.러시아 제국은 어느 지역까지 뻗어있었는가? 오토만 제국은 어떠했는가? 이 제국들은 식민제국인가?

2.1번의 두 제국을 제외하고, 유럽에서 가장 넓은 식민지를 지배했던 국가는 어디인가?

3.포르투갈의 식민지는 어떤 지역에 위치해 있었는가? 스페인의 식민지는 어떠한가?

4.1860년의 프랑스 식민지는 어디였는가(지리적 위치)?

5.1860년에, 어떤 곳이 새로이 식민지배를 당할 가능성이 있었는가?


자료1. 스캔. 1860년의 식민제국들.


1. 유럽 식민지의 확대


A. 1870년까지의 식민 제국 자료 2, 3

19세기 중반, 대영제국의 면적은 2천 200만㎢에 달하고 총 2억 4천 만 명의 인구가 대영제국에서 산다. 대영제국은 인도,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인도로 가는 길”의 경유지 역할을 하는 섬들과 상관들로 구성된다.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의 식민지는 규모가 더 작다. 아프리카는 유럽인들의 손길의 거의 닿지 않은 상태다. 유럽인들은 기후가 온화한 지역에 이주 식민지 몇 개를 만든다. 알제리 정복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생각에는 인구가 많은 땅은 개척 식민지로 삼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소요되었다. 자유경제를 지지하는 유럽인들 대부분은 식민화에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해외 상관을 통한 단순한 교역관계만을 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B. 대규모 정벌의 시기 자료 1

1870년 이후 식민지 사업에 속도가 붙는다. 선교사들과 항해사들의 발견으로 탄력을 받은 식민화는 유럽의 인구증가와 더불어 “대불황”(1873-1896)이 낳은 경제적 어려움이 나라들로 하여금 해외 시장으로 눈길을 돌리게 하면서 그 규모가 커진다. 몇몇 나라는 영향권 확보를 위해 식민지를 만든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뿐만 아니라 새로운 국가인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도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든다. 아시아에서는 영국이 인도의 지배를 강화한다. 인도 정부는 세포이 항쟁 이후인 1858년 동인도회사의 손에 넘어간다. 프랑스는 1849년에서 1895년 사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정벌하고,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열도 정복에 열을 올린다. 아프리카는 정벌의 규모가 더 크다. 식민 열강들에 의해 식민지 배분 규칙이 정해진 뒤(베를린 회담, 1884-1885), 쥴 페리가 말한 “종탑 건설 전쟁”에 너도 나도 뛰어든다. 급변사태(예 : 1898년 수단을 갖고 영국과 프랑스 사이 벌어진 파쇼다 사건)에도 불구하고 식민화 경쟁으로 인해 아프리카 대륙은 유럽인들의 손아귀에 거의 넘어간 상태다.

C. 문제 제기의 시작 자료 4, 5, 6

1919년, 1920년에 국제연맹은 독일과 터키의 식민지를 승전국이 위임통치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그 후 일본(1932년 만주), 이탈리아(1936년 에티오피아)만이 국제연맹이 규탄하는 추가 정벌을 감행한다. 식민제국 확장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유럽 국가들은 제국을 자신들의 군대 인원을 확충할 수 있는 보고로 여긴다. 제국 우선주의로 제국과의 시장 거래가 우선시된다. 식민제국에 대한 여론의 관심도도 높아진다. 프랑스에서 열린 1931년의 식민 박람회는 성황리에 개최된다. 그러나 유럽 식민지 지배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커진다. 제국 우선주의로 인해 자신에게 다른 식민지 시장이 문을 닫자 미국은 개방주의를 옹호하기 시작한다. 민족주의 단체들이 인도(간디는 영국의 지배를 규탄하기 위해 비폭력 시위를 한다), 인도차이나, 아랍 국가들에 출현한다. 모로코에서는 1920년대(리프 전쟁), 인도차이나에는 1930년에 반란 사태가 일어난다. 유럽 내에서도 마르크스주의자들, 기독교인들, 지식인들(알버트 아인슈타인, 루이 페르디낭 셀린, 앙드레 말로, 로맹 롤랑, 앙드레 지드)이 식민 정책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용어


개척 식민지 : 이국적인 상품을 본국에 공급하기 위해 설립하는 식민지.

제국주의 : p.148 헷갈리지 말 것 참조하기

위임통치령 : 1919년 이후 국제연맹이 한 국가에게 그 나라의 이름으로 행사할 수 있는 통치권을 부여한 영토.

제국 우선주의 : 국가의 교역 정책으로 식민지와의 교역을 우선시하고 다른 나라와 무역을 금지하기 까지 하는 정책을 일컫는다.


자료1. 베를린 회의에서 내린 결정

제 1조항 – 국적에 관계 없이, 모든 선박은 상기에 명시된 영토의 모든 연안지대, 바다로 흐르는 강, 콩고의 모든 수로 및 호수를 포함한 지류, 이 근방에 위치한 항구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

제 6조항 –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거나 전술의 영토에 대한 권한을 지닌 모든 국가들은 원주민 보호관리 및 이들의 도덕적, 물질적 존재 조건 향상에 힘쓰고 노예 무역을 필두로 한 노예 제도 폐지를 약속한다. 모든 국가들은 원주민을 가르치고 원주민들에게 문명의 이점을 이해시키고 존중시키기 위해 구성되고 창설된 모든 종교, 과학, 자선 기관 및 기업을 보호하고 지원할 것이다. […]

제 13조항 – 모든 국가의 […] 상선은 현재에도, 미래에도 자유롭게 콩고를 항해할 수 있다.[…]

제 34조항 – 아프리카 대륙의 해안에서 영토를 새롭게 보유하게 될 국가는 타 체결 국가에게 미리 통보해야 한다. 이는 기타 국가들의 이의 제기 권리 행사를 위함이다.

제 35조항 – 체결국가들은 충분한 권한을 지닌 당국의 실존 여부를 보장해야 한다. 이는 각자가 점령한 영토 내에서 행사되는 법, 필요한 경우에는 무역과 화물수송 자유를 보장하기 위함이다.

1. 위 글에 따르면 식민지화의 목적은 무엇인가?
2. 한 유럽국가가 식민지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가?
3. 원주민들에게 보장되는 내용에는 무엇이 있는가?


p. 135

자료2.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과 관련된 결정적인 에피소드: 1843년 5월 오말 (Aumale) 공작의 Smala d’Abd el-Kader 점령.

1832년부터 1847년까지 Abd el-Kader은 프랑스의 알제리 점령에 맞서기 위한 반란을 명령한다. Bugeaud 장군에게, 패한 Abd el-Kader 는 1847년에 라모리시에르 장군을 만나러 간다.

Horace Vernet의 그림, 베르사이유, 국립 베르사이유궁전 박물관.


자료3. 식민지화에 대한 한 자유당원의 의견

나는 영국이 식민지 국가들에 행사하고 있는 모든 정치적 지배권을 포기하길 바란다. 또한 영국이 공통된 기원, 공통된 법, 공통된 종교와 문학이 지구 곳곳에 퍼져나간 모든 앵글로색슨 민족에게 건넨 자연적 관계를 따르길 희망한다.

리차드 콥덴, 영국 산업가, 경제이론가, 자유주의와 자유무역 신봉자, 1850년.

1. 저자는 식민지화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나?
2. 저자가 펼치는 주장은 무엇인가?


자료4. 블랙아프리카에서 확산되는 자치권에 대한 구상

흑인 사회 내에 자치권에 대한 구상이 확산되고 있다. 1920년 연초, 아크라에서 열린 국민회의에서는 서아프리카 영국 식민지 국가들의 원주민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흥미롭고도 특수한, The Educated Natives라 불리는 계층의 흑인들 중에서 대변인을 선발했다. 영국의 문명화를 거의 완벽하게 흡수한 이들은 영국인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같은 종교, 법, 관습을 지니고 있다. 도시에 거주하며 공무원과 상업대리인으로 근무하기도 하며 통역 및 비서 역할도 맡아 영국의 문명화와 이윤 사업에도 진출 중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민족성을 잊지 않았으며 형제들의 입장을 지지한다. 오래 전부터 정치적 자유를 요구해왔으며 서아프리카 전역에 정치적 자유에 대한 개념을 퍼트리는 중이다. 1920년, 이들은 모든 국가의 대표자들을 한데 모은 회의를 개최하는데 성공했다. 이 회의에서 서아프리카 내 self-government 창설을 요구했으며 인종 불평등주의에 대해 항의했다.

알베르 드망종, 프랑스 지리학자, L’Empire brinnique, 1931년.

1. 저자가 나타내는 아프리카인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2. 이러한 생각은 어떤 사회적 카테고리에서 두드러지는가?

자료5. 1918년 이후 식민지의 역할

[전쟁의] 잔해와 재해를 복구하기 위해, 조국은 [식민지 국가로부터] 자금력과 산업, 상업 인력을 끌어올 수 있다. 식민지 국가들에 있는 모든 종류의 자원들을 국가 재건에 이용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휴전 이후, 지금까지 외면당한 이 새로운 땅으로 이윤을 찾아 떠나는 금융인, 기업가, 상인들이 날마다 증가 중이다.

알베르 사로, 프랑스 식민지 정부, La Mise en valeur des colonies francaises, 1923년.

1. 저자가 나타낸 프랑스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무엇인가?
2. 식민지는 이 같은 문제해결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자료6. 식민지 주도권에 대한 논쟁.

소름 사티아그라하 행진, 1930년 3월 22일, Ahmadabad (Gujarat, 인도) 근처에서. 소금에 부과되는 영국의 조세에 반대하기 위해, 간디는 인도인들에게 자급자족으로 소금 생산을 하도록 호소한다.


p.136

2. 식민지 영향권 안에 든 세계

A. 식민지 관리 자료 1

식민 제국은 원주민들의 생활 방식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조직된다. 그렇게 사하라의 유목민인 투아렉족이 이동하며 생활하던 영토는 알제리, 모리타니아, 차드로 나뉜다. 유럽인들은 간접적인 통치를 택하여 현지 원주민의 정권을 살려두고 관리 감독만 한다. 이러한 간접 통치 방식은 네덜란드와 독일 식민지에서는 물론, 대부분의 영국 식민지, 프랑스 포호령에서 사용됐다. 프랑스 보호령의 경우 모로코의 술탄이나 아남의 황제처럼 원주민 왕들은 왕좌를 보존할 수 있었다. 직접 통치 방식이 채택되었을 경우, 본국이 파견한 고위 간부가 전권을 행사했는데 프랑스 총독의 예를 들 수 있다. 알제리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알제리는 식민지가 아닌 프랑스 국토의 일부로 간주되어 여러 개의 도로 나뉘었다. 제국을 관리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은 대규모의 재편성에 착수한다. 영국령 인도와 라자들이 통치하는 국가들로 이루어진 인도와 스리랑카, 버마가 인도 제국을 형성한다. 프랑스 제국의 경우, 인도차이나 연합이란 이름하에 식민지인 코친차이나, 세 개의 간접적 위임통치령(아남, 라오스, 캄보디아)과 직접 통치령인 통킹이 편성된다.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는 1904년 설립된 서부 프랑스령 아프리카(AOF)와 1910년 만들어진 동부 프랑스령 아프리카(AEF)로 구성된다. 식민 제국의 관리는 획일화 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경우, 알제리는 내무부에 예속된 반면, 식민지는 식민지부가, 위임통치령은 외교부가 관리한다. 영국의 경우, 식민지는 Colonial Office가, 인도는 Indian Office가 관리한다.


B. 식민지 지배의 다양한 면모 자료 2~6

식민지 지배는 경제적, 금전적 지배가 가장 보편적이다. 본국은 제국 우선주의에 입각하여 식민지로부터 원료(설탕, 커피, 면, 광석 등)을 수입하고 식민지에 소비재를 판다. 본국은 식민지에 자본을 투자한다. 그러나 많은 양의 유럽발 투자 자금은 식민지뿐만 아니라 미국, 오토만 제국과 같은 곳으로 향한다. 즉 유럽의 경제적 제국주의는 식민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식민지 지배는 종교적인 부분에서도 이루어진다. 기독교 교회들은 선교사를 파견한다. 다른 대륙에 사는 비기독교 민족들을 교육시키고 그곳에 선교를 할 필요성을 느낀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에게 유럽의 언어, 종교, 생활 방식을 강요한다. 이러한 시도는 꽤나 성공적이다. 기독교는 아프리카, 아시아, 이슬람 국가에서까지 발전한다. 식민지에 학교, 병원, 도로가 건설되고 노예제도(프랑스에서 1948년 폐지)와 유럽인들이 오기 전 아프리카는 물론 아라비아와 오토만 제국에서 성행하던 흑인 거래가 사라지면서 식민지는 발전과 근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그러나 유럽 개척자들은 현지인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렇게 아프리카에서 강제 노역이 생겨났다. 1840년에서 1914년까지 4천 만 명의 유럽인들이 이주 식민지(캐나다, 호주, 알제리)와 미국으로 이주한다. 유럽인들이 식민지 인구의 다수가 될 경우, 그들은 본국이 현지인 취급을 하지 않는 걸 요구한다. 그리하여 1867에서 1910년 사이 영국의 식민지인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는 자치령이 된다. 이들에겐 자치 정부가 생긴다. 그러나 자치 정부는 백인들에게만 유효한 것이다. 식민지에서 현지인들은 백인보다 낮은 대우를 받고 본국의 추구하는 동화정책은 이론적일 뿐이다.


용어

위임통치령 : p.148 헷갈리지 말 것 참조하기

선교 : 기독교 용어로, 비기독교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 단체를 뜻한다.

흑인 거래 : 흑인 노예를 사고 팔던 제도.

동화 : 다른 민족의 생활 방식을 도입하는 일. 식민지의 경우 유럽의 생활 방식을 도입하는 것을 뜻한다.


자료1. 1920년의 모로코인들

전 세계에 걸쳐, 혁명이라는 의미에서, 민족 스스로가 해방과 변화의 권리 양식을 획득하는 과정은 아무런 지장 없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모로코인들이 이 보편적 움직임에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을 것이라 믿는다면 오산이다. 마그렙의 외국인 혐오증과 독립을 부러워하는 정신 상태가 오랜 기간 모로코와 세계 이웃국가 간에 빈틈 없는 장벽을 만들고 모로코를 불변의 신정 형태에 가두었지만 이러한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우리의 모로코 정착, 유럽 이주민의 증가, 신문, 모든 당국과 관련된 우리의 자유로운 대화와 독립에 대한 관습은 이 나라를 흔드는데 충분했다. 하지만 전쟁과 더불어 모로코 수 천명이 유럽으로 떠났다. 그들은 우리 군대와 함께 싸웠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작업장에서 일을 수행하고 읽고 들으며 배웠다. 그리하여 새로운 발상을 지닌 채 모로코로 돌아왔다. […] 오늘날 모로코의 젊은이들은 삶을 즐기고 행동을 실천하고 싶어하며 교육과 비즈니스에 눈을 떴다. 좁은 일자리와 하위 조건 속에서, 모로코 젊은이들은 다른 곳에서 그들의 길을 찾을 것이다. 그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유럽 공동체에서 반대 목표를 지니며 또는 기타 외국인이나 무슬림 공동체에서, 혹은 그들 스스로 공동체를 이뤄 길을 찾아 나갈 것이다.

Lyautey의 편지, 모로코 거주자 (1912년 – 1924년), 1920년 11월 18일.

1. 저자에 따르면 식민지화 이전 모로코의 상황은 어떠했나?
2. 식민지화는 어떤 변화들을 모로코에 가져왔는가?
3. 이 텍스트가 담고 있는 비판 내용은 무엇인가?

p. 137

자료2. ‘알제리 해방 백 주년’을 기념하는 포스터의 글.

1830년 이전 터키 제국의 이름뿐인 지방이었던 알제리에는 무정부주의가 팽만했었으며 백만 명의 알제리 국민들은 욕심 많고 야만스러운 지도자들에게 착취당하며 살아왔다. 이 때 프랑스가 알제리에 들어왔고 알제리인들을 해방시킴과 동시에 알제리를 프랑스의 진정한 한 지방으로 만들었다. 원주민 5백만 명은 문명화의 모든 이점을 누리는 중이다. 프랑스인들과는 한 마음으로 모여 커다란 유대감을 공유하고 있다. 1930년은 알제리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이다. 걸출한 지도자의 추진아래 피에르 보르드 총재는 나라를 비옥하게 하는 작업을 이어나갈 것이며 평화와 형제애로 마음을 한데 모아 프랑스 문명화를 나아갈 것이다.

1. 어떤 해방을 말하고 있나?
2. 식민지 전 알제리는 어떻게 표현되었나?
3. 글 막판 내용 중 이상적인 것에는 무엇이 있나?

자료3. 프랑스 수출량에서 식민지 국가들이 차지하는 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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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4. 동화 혹은 자립

프랑스는 외국인 인종 관리 문제 해결에 접근한 거의 유일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는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외국인 인종을 도태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그 어떤 나라보다 외국인들을 동화시키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여태껏 식민지 본국과 식민지 국가들을 포괄하여 하나의 조국, 하나의 국가로 구상하는 시도를 한 나라는 프랑스가 유일하다. 프랑스, 아프리카, 앤틸리스 제도, 인도차이나 반도의 모든 프랑스인들은 같은 의무와 같은 권리를 지녔다.

알프레드 랑보, 역사가, 쥘 페리의 공저자, La France coloniale, 1893.

식민지 본국에 속하는 모든 공동체는 자립으로 향하고 있다. 피부의 색깔과는 상관 없이, 각 식민지 국가들은 자국의 힘과 역량이 발전함과 동시에 점진적인 자치 체제를 구축 중이다. 영국의 완전한 지배 영향에서 벗어난 식민지 국가들은 새로운 단계로 뻗어나가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 본국의 통제는 지속적으로 줄어들 것이며 결국에는 그 어떤 통제도 가하지 않는 단계가 올 것이다. 오늘날 자치령은 대영제국의 옛 식민지 국가들이다. 대영제국의 현 식민지 국가들은 언젠가 모두 자치령이 될 것이다.

세실 허스트, The British Empire as political unit under international Law, 1918.


자료5. 강제노동에 처해진 여성들, 동아프리카 독일 식민지, 1900년도.

자료6. 수면병과의 싸움. 원주민 간호사들이 혈액 검사를 하고 있다. 토고. 1930년도경.

p. 138

지도

1939년의 식민제국들

1939년에 유럽국가의 식민지배는 절정에 달한다. 식민제국들은 전체 영토의 40%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그 인구는 전세계의 1/3에 달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가장 거대한 두 식민제국이었다. 반대로, 독일의 식민지배는 세계 1차대전 말에 중지된다. 독일의 식민지들의 위임통치권이 국제연맹에 의해 승전국(프랑스, 영국, 벨기에, 남아프리카)들에게 분배되었다. 양차대전 사이에, 또 다른 두 식민제국이 세력을 확장했다. 태평양 지역에서는 일본이, 에티오피아에서는 이탈리아가 세력을 확장하였다. 미국은 태평양 지역의 영토를 통치하였다. 반면에 러시아 제국을 계승한 소련은 중앙 아시아를 통치하였다.

자료1. 1939년의 식민제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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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1.1939년에 가장 넓은 식민제국은 어디인가? 가장 인구가 많은 제국은 어디인가(자료1)?

2.가장 많은 식민지배지역이 있는 대륙인 어디인가? 1939년에 그 대륙에 존재하는 독립지역들은 어디인가(자료2)?

3.어느 지역의 국가들이 독립했는가(자료2)?

4.일본제국에 대해 설명하시오(자료2).

5.태평양 근처에는 어떤 식민제국들이 있었는가?


자료2. 스캔. 1939년 초의 식민제국들


p.140

3. 제국의 위기


A. 제국을 동요하는 전쟁 자료 1, 2, 5

2차 세계대전은 본국과 식민지 사이의 관계를 대폭 바꿔놓는다. 연합국이 주도하여 식민 제국의 원주민들과 유럽 주민들까지(영국 자치령, 북아프리카, 프랑스령 아프리카 등) 동원한 전쟁은 자유사상 전파에 큰 역할을 했다. 자유사상은 1941년 대서양 헌장과 1948년 세계인권선언문에 재차 언급된다. UN이 지지하는 이 사상들은 식민지 국민들에게 큰 힘이 된다. 식민지 국민들은 본국이 전쟁으로 인해 얼마나 쇠약해졌는지 가늠할 수 있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는 몇 주 만에 패배했고, 그들 영토의 일부는 3국 동맹 세력에 의해 점령당했다(튀니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자신의 식민지에 반유럽 프로파간다를 배포하고, 패배 후 이들 식민지의 독립을 선언한다. 1945년 이후 이전 식민지 주인이 되돌아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두 열강은 식민지 국민을 지지한다. 소련이 이들을 지지하는 이유는 식민화 자체가 특별한 형태의 제국주의, 자본주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독립 사상을 옹호하는데, 이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덕분에 오늘날의 미국이 탄생했고, 다른 한 편으론 식민 제국이 자유무역의 발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미국은 식민 정책에 반대하는 식민지의 정치세력이 소련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식민 제국이 원칙적으로 미국의 연합국일지라도 미국은 이렇게 식민 정책에 반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B. 독립에 대한 요구가 커진다 자료 3, 4, 6, 7

전쟁으로 인해 심화된 식민지 국민들의 독립에 대한 염원에는 다양한 배경이 있다. 전통 문화를 중시하여 유럽에서 건너온 정치사상과 생활방식을 거부하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세네갈의 생고르처럼 본국에서 공부를 한 원주민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익힌 1789년의 자유, 평등 원칙을 내세우며 본국을 압박한다. 또한 베트남의 호치민은 유럽에서 민족주의와 결합된 마르크시즘을 배웠고 그것으로부터 또 하나의 혁명 사상을 수립한다. 이러한 다양한 배경은 자칫 독립을 위한 전선에 분란을 일으킬 수도 있었지만 식민 세력이라는 공통된 적이 있었기에 투쟁의 연대성이 유지될 수 있었다. 민족주의 단체들이 오래전부터 활동해 왔던 영국 식민지의 경우처럼 독립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경우가 있고, 본국이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원주민 지도자들은 무장 투쟁을 조직하여 게릴라전을 벌인다. 이들은 외부의 도움을 때때로 받기도 한다. 베트남은 중국과 소련의 도움을, 알제리는 튀니지, 모로코, 그리고 민족주의자 나세르가 이끄는 이집트의 도움을 받는다. 본국은 초기에는 부유함의 원천이자 과거 영광의 상징인 식민지들의 독립에 반대한다. 알제리나 로디지아에서처럼 현지에 정착한 개척인들 또한 이와 같은 상황 변화에 적대적인 입장을 보인다. 유럽인들의 극소수만이 식민지 국민의 염원을 환영한다. 지식인들, 공산당, 복음화보다는 이제 해방을 더 중요시 여기는 교회들이 이에 속한다. 본국의 여론은 그러나 빠르게 변화한다. 식민지 지배를 지속하려면 인력, 돈 등 엄청난 비용이 드는 게 사실이다. 1950년대 말 점점 많은 프랑스인들은 식민지를 포기하고 코레즈주를 잠베지보다 우선시하길 원한다.


자료1. 프랑스 군대의 훈장을 수여 받는 모로코 병사.

1944년 6월 29일, 드골 장군이 모로코 토착민 병사에게 훈장을 수여 중이다.


자료2. 식민지 문제와 직면한 UN

UN의 회원국들은 각 회원국의 관리하에 있는 식민지 국민들의 민족 자결권 획득을 인정하고 도와야 하며 이들의 민족 자결권을 행사를 촉진해야 한다. 이는 UN 헌장의 원칙과 정신을 따르는 것이며 해당 국민이 자유롭게 표현한 의지를 고려하는 것이다. 해당 국가의 국민들은 국민투표 또는 기타 민주주의적 장치를 통해 그들의 의지를 표현했다.

UN 결의안, 1952년 12월 16일.


자료3. 센고르(Senghor), 세네갈인의 입장

그들은 우리에게 인간과 보편에 상응하는 프랑스를 재건하는데 협조를 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요청을 받아들이지만 프랑스는 우리를 속여서도 농간을 부려서도 안 된다. ‘선한 검둥이’는 죽었다. 부자주의자들은 이제 단념해야 한다. 그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랐다. 3세기가 넘게 지속된 노예 거래도 한 세기 동안 이어져온 점령도 우리를 전락시킬 수 없었다. 그들이 주입하려던 모든 교리 교육도… 우리가 열등하다고 믿게 하는데 실패했다… 우리는 그들의 사탕발린말에 지쳤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이다.

레오폴 세다르 센고르, “블랙아프리카 수호(Defense de l’Afrique noire)”, Esprit, 1945년 7월.

p. 141

자료4. 프랑스 포스터, 1945년 이후.

포스터 문구:

인도차이나, 프랑스령 서부 아프리카, 프랑스령 동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 일하고 싶은 당신, 제 4공병대에 해외 공병으로 입대하세요, 재입대하세요.

1. 포스터에 언급된 영토들의 위치를 파악하시오.
2. ‘입대하세요, 재입대하세요’라는 표현을 설명하시오. 이 슬로건은 누구를 대상으로 쓰였나?
3. 포스터의 그림은 무엇을 연상시키는가?
4. 이 포스터가 식민지 본국이 식민지 국가들에 애착을 보이고 있음을 증명한다는 사실을 나타내시오.


자료5. 일본 포스터, 1943년경.

“영미인들을 무찌르시오, 새로운 필리핀을 일으키시오.”

1. 이 포스터가 만들어진 시기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시오.
2. 이 포스터는 누구를 대상으로 제작되었나? 포스터 속 인물들의 자세는 무엇을 연상시키는가?
   쓰여진 문구를 통해 어떤 연관을 지을 수 있나?
3. 빨강으로 칠해진 국가는 무엇에 해당하나?


자료6. 식민지 문제와 직면한 미국과 소련

식민지의 국민들은 더 이상 과거처럼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식민지 본국의 지배세력은 더 이상 과거처럼 그들을 좌지우지 할 수 없다. 군사력으로 해방 운동을 진압하는 작업은 무장한 식민지 국민들의 저항과 충돌해 장기간 이어지는 식민지 전쟁으로 치닫고 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서,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전쟁 중이다.

즈다노프, 1947년.

나는 일년이 넘도록 인도차이나가 또 다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것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해왔으며 인도차이나가 국제 위원회의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나의 의견은 창 카이첵(Tchang Kai-chek) 총사령관과 스탈린 원수의 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우리가 영국의 계획에 가담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본다. […] 그들은 각자의 식민지와 네덜란드의 식민지에 미칠 영향을 두려워하고 있다. […] 물론 각각의 상황은 분리해서 해결되어야 한다. 헌데 인도차이나 문제는 명확하다. 프랑스는 100년 전부터 인도차이나에 피를 뽑아내고 있다. 인도차이나의 국민들은 이보다 나은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

루즈벨트, 1945년.

1. 즈다노프에 따르면, 탈식민지화를 막을 수 없게 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2. 루즈벨트는 인도차이나의 탈식민지화를 어떻게 정당화하는가?
3. 루즈벨트가 암시한 ‘영국의 계획’은 무엇인가?

자료7. 식민지 제국에 대해 찬성 또는 반대?

블랙아프리카에서 프랑스는 돈을 쓴다[…]. 프랑스는 기상청, 지리학, 라디오 기지, 항공 인프라, 주요 공항에 들어가는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 프랑스는 외환 적자를 메우고 예산이 세어 나가지 않게 막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제품 생산에 대한 보조를 점차 늘리고 있다 […]. 로메 병원(번역주: 아프리카 지방)을 네베르(번역주: 프랑스 중부 지방)에 지었거나 보보 디우라소 고등학교를 타르브에 세웠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 모로코의 전례를 보자. 수 많은 도시, 탄광, 토목공사가 프랑스의 예산으로 진행되고 날라가 버렸다! 그럼에도 어떤 미치광이들은 토고에 항구를 지으려하고 카메룬에 360억 프랑을 들여 철도를 설치하려 하고 있다!

까르띠에, 기자, Paris-Match, 1956년 8월 18일.


p.142

4. 해방된 아시아

A. 독립의 시작 자료 2, 3, 5

중동에서는, 1939년 이전 영국이 이집트(1922)와 이라크(1932)를 해방시켰다.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에 있는 자신의 위탁통치령 포기를 망설이다 1943년에서 1946년 사이 결국 동의한다. 같은 해인 1946년, 영국은 트란스요르단의 독립은 승인한다. 그리고 1948년 영국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대립시킨 채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한다. 인도의 경우, 영국은 오랫동안 간디와 네루가 몸담는 국민회의파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 전쟁 중 영국은 독립을 주장하는 인도 민족주의자들을 진압한다. 그러나 1945년 정권을 잡은 영국의 노동당은 결국 인도의 독립을 인정한다. 힌두교와 이슬람교도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여 영국은 인도를 두 개의 나라로 분단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1947년 8월, 종교를 기반으로 한 두 개의 국가가 탄생한다. 힌두교도들이 다수인 인도 연합, 그리고 이슬람교도가 다수이자 서로 1700km 떨어진 두 개의 영토로 구성된 파키스탄이다. 이 분단으로 인해 대규모 인구이동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이슬람교도들이 한두교를 학살하거나 그 반대의 사태가 발생하여 총 백 만 여명의 사망자를 낸다. 영국이 소유하고 있는 다른 아시아 식민지도 차례로 독립을 얻는다 : 스리랑카와 버마가 1948년에, 말레이시아가 1957년에 독립국가가 된다.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는 항일 운동을 펼쳤던 민족주의자 수카르노가 1945년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한다. 네덜란드는 1946년 그에게 네덜란드에 연계된 인도네시아 연방 체제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자바와 수마트라 섬의 주권을 허락한다. 1947, 1948년 네덜란드는 지배권을 되찾고자 침략을 강행하지만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1949년 인도네시아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한다.

B. 인도차이나 전쟁 자료 1, 4, 6

1940년에서 1945년 동안 인도차이나를 점령했던 일본은 반프랑스 정서를 키웠다. 일본은 그러나 1945년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는 공산주의자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에 패한다. 프랑스는 군대를 파견하여 코친차이나의 지배권을 되찾으려한다. 1946년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만 프랑스 연합은 유지한다. 이 시기에 프랑스의 고등판무관인 티에리 다르장리외가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선포한다. 프랑스의 입장이 강경해짐에 따라 혼란이 발생하고, 프랑스는 1946년 11월 수 백 명의 사망자를 남긴 하이퐁 폭격을 감행한다. 그 다음 달, 베트민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하노이에서 유럽인들을 학살한다. 인도차이나 전쟁은 이렇게 발발하게 된다. 소련의 지지를 받아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게릴라 군과 싸워야 했던 프랑스에게 이 전쟁은 분리했다. 더군다나 본국에서도 이 전쟁에는 무관심했고, 공산당은 “더러운 전쟁”이라며 인ㅌ=도차이나 전쟁을 비난했다. 미국조차 이와 같은 구식 식민 전쟁을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1949-1950년 사이 중국에서 마오가 승리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급격히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태도를 바꿔 프랑스를 금전적으로 지원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베트민을 물리치기에는 부족했다. 베트민과 협상을 타결하기 전, 프랑스는 결정적인 승리를 하길 원했다. 프랑스는 가장 잘 단련된 군대를 디엔 비엔 푸에 보낸다. 참호 속에 베트남군을 끌어들인 뒤 포병대와 전투기를 이용해 그들을 공격할 작전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병사들이 오히려 제 덧에 걸린 꼴이 되었고 54일간의 전투 끝인 1954년 5월 7일 디엔 비엔 푸는 함락된다. 1954년 7월, 프랑스는 라오스, 캄보디아, 두 국가로 나뉜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한다. 디엔 비엔 푸 전은 큰 반향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아시아의 탈식민지화의 끝을 장식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1955년 봄에 열린 반둥 회담은 이 사건을 기념한다.


용어

인도 분단 : 1947년 영국령 인도가 종교의 원인으로 두 국가로 나뉜 사건. 인도 연합은 대다수가 힌두교도이고, 파키스탄은 이슬람교도가 대다수다. 파키스탄은 오늘날의 파키스탄인 서파키스탄과 오늘날의 방글라데시인 동파키스탄으로 구성된다.

베트민 : 베트남독립동맹으로 호치민이 1941년 창설했다. 이 단체는 공산당과 몇몇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다.

프랑스 연합 : 1946년 프랑스, 그리고 연계 국가라 불리는 프랑스의 옛 식민지와 위탁통치령으로 구성된 집합을 이르는 말이다. 프랑스 연합은 1958년 사라진다.


자료1. 베트남 민주공화국 독립선언문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습니다.” 이 불후의 명언은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에 있는 말입니다. […] 1791년 프랑스혁명의 ‘인권 선언문’에서도 “인간은 권리에 있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누구든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누리게 되어있다”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명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최근 80년 동안 프랑스 식민집단은 ‘자유-평등-박애’란 깃발을 이용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우리인민들을 억압하였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인륜과 정의에 완전히 역류하는 것이었습니다. […] 우리 인민은 프랑스 손아귀가 아니라 일본 손아귀에서 다시 나라를 찾았습니다. 프랑스가 도망가고 일본이 항복하였습니다. 우리 인민은 베트남이란 독립된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결국 100여 년의 식민지 사슬을 끊어버렸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베트남의 임시정부인 우리는 베트남 전체 인민을 대표하여 프랑스와의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베트남 전체 인민은 상-하가 한 마음으로 프랑스 식민집단과 그들의 음모를 절대적으로 반대합니다. 우리는 민족 평등 원칙을 인정한 동맹국가들이 결코 베트남 인민의 독립 권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하노이, 1945년 9월 2일.

1. 1945년 인도차이나의 상황은 어떠한가?
2. 이 선언문은 어떤 원칙을 바탕으로 하는가?
3. 베트민은 독립을 얻기 위해 누구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가?


p. 143

자료2. 인도분할 당시 스크교인들의 증언

“무슬림인이 우리 쪽으로 다가와 악수를 나누는데 우리 손에 음식을 지니고 있었다면, 이 음식은 더럽혀 졌다고 여겨져 먹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쪽 손에 개를 쥐고 있고 다른 한쪽 손에 음식을 쥐고 있었다면, 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우리 마을의 모든 주민들은 근방에 위치한 무슬림 마을을 토벌하러 갔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미친 상태였습니다… 저는 50년 째 이날 일을 후회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죽인 사람들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La Monstreuse vivisection de l’Inde(잔인한 인도 해부)>에 소개된 증언, Le Monde, 2007년 8월 5일.'


자료3. ‘인도 분할’.

1947년, 네루 수상(좌)와 알리 지나(우) 무슬림 연맹 의장의 만남. 마운트배튼 제독과 인도의 마지막 총독이 참관(중앙).


자료4. « 아시아는 더 이상 지배 받지 않는다 »

아시아는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 아시아는 더 이상 지배를 받지 않을 것이며 살아 숨쉴 것입니다 [...]. 우리는 그 어떤 대륙에도, 그 어떤 나라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여럿에게 오랫동안 고통을 안긴 헤게모니와 식민지주의에 반대를 호소합니다. [...] 지난 수 세기 동안 아프리카가 겪은 비극보다 끔찍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 아프리카인 수 백만명은 아메리카나 다른 곳으로 노예의 신분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들 중 절반 이상이 갤리선에서 죽음을 맞이햇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같은 참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직접 가담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아프리카에서는 그 어떤 대륙에서보다 비극적인 정치적, 인종적 참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시아는 아프리카의 형제 대륙이기에 최선을 다해 아프리카를 도와야 합니다...

네루의 반둥 회의 폐회사. 1955년 4월 24일.

1. 연사와 당시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시오.
2. 연사는 왜 아시아가 더 이상 지배 받지 않는다고 판단하는가?
3. 그가 희망하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을 선언하는가?

자료5. 델리에서 벌어진 무슬림 학살, 1947년 9월. 자료6. 시민들을 이동시키는 베트민.

베트민의 명령을 받아 군수품을 운반 중인 베트남 상국 소수 민족 여성들. 1954년


p.144

5.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의 해방

A. 마그레브의 독립 자료 2, 3

모로코와 튀니지에 있던 프랑스 위탁통치령에서는 1945년 이후 모로코의 이스틱랄과 모로코의 신두스투르 당을 중심으로 원주민 정치 세력이 독립을 주장한다. 프랑스는 고민한다. 모로코에서 프랑스는 술탄에게 반감을 가진 영주들의 지지를 받고, 튀니지에서는 유럽 식민지 개척자들의 압력으로 인해 초기에 했던 독립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UN은 프랑스의 정책을 비난하고 1956년 프랑스는 결국 두 나라의 독립을 인정한다. 1830년부터 프랑스 영토 알제리에는 유럽 출신 개척자들의 10%가 살고 있었다. 알제리 세티프에서 1945년 첫 반란이 일어난다. 이 반란은 폭력적인 진압으로 마무리 되고 알제리는 다시 평온을 되찾은 듯 했다. 그러나 1956년 만성절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테러는 민족 해방 전선의 급작스런 출현을 알린다. 알제리 전쟁이 이렇게 시작된다. 프랑스는 초기에 민족 해방 전선과의 협상을 거부한다. 드골 장군이 1958년 정권을 쥐면서 1959년 여름부터 탈식민지화가 진행된다. 알제리는 1962년 3월 에비앙 조약을 통해 독립을 인정받는다.

B. 아프리카의 해방 자료 1, 4, 5

영국의 식민지 중 가나가 1951년 자치권을 갖게 되고 1957년 독립을 한다. 나이지리아의 독립은 1960년 인정받았다. 동아프리카에서는 인종 간 분쟁으로 주춤해졌던 탈식민지화가 1961년에서 1963년 사이 진행된다. 남 로디지아에서는 소수 백인이 일방적으로 1965년 독립을 선언하고 남아프리카를 모방하여 인종 분리 체제를 수립한다.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와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의 경우 1944년 브라짜빌 회담으로 self-government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예 거론이 되지 않았지만 1946년부터 프랑스는 이들에게 자치권과 프랑스 의회에서 국회의원을 선출할 수 있는 투표권을 주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1947년 마다가스카르에서 일어난 민족주의 봉기를 잔인하게 진압한다. 1958년 드골은 아프리카에 독립을 할 것인지 프랑스 공동체에 남을 것인지 선택권을 준다. 프랑스 공동체란 내부 자치권은 인정받되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국방, 통화)를 유지하는 체제이다. 프랑스는 결국 1960년 이모든 국가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한다. 벨기에령 콩고는 벨기에에 의해 매우 부자주의적인 방식으로 통치되어 왔고 벨기에는 모든 변화를 거부해 왔다. 콩고의 풍부한 자원(동, 다이아몬드)는 대규모 광산 기업들의 탐욕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1960년 발생한 폭력사태로 인해 벨기에는 재빨리 콩고의 독립을 인정한다. 유럽인들이 살해당하고, 종족간의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소련의 지지를 받던 1961년 암살당한 루뭄바 총리파, 미국의 지원을 받는 카사부부 공화국 대통령파가 서로 대립하면서 내전이 일어난다. UN의 개입에도 이 폭동사태는 1965년이 돼서야 모부투의 쿠데타로 끝난다. 모부투는 군대의 참모로 1997년 사망할 때까지 권력을 유지한다. 르완다, 브룬디 및 기타 벨기에 식민지는 1962년 독립한다.

C. 마지막 독립국가들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자료 6

포르투갈은 수 십 년간 보유하고 있던 아프리카 식민지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이들 식민지는 모두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 게릴라 작전을 펼쳤다. 이들과의 전쟁에서 포르투갈 군은 피로를 느끼고 결국 1974년 본국의 독재체제를 뒤엎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앙골라는 이렇게 독립을 하게 된다. 같은 시기 오세아니아의 열도들도 해방을 누린다. 파푸아시아는 1970년에, 솔로몬 제도는 1978년, 뉴헤브리디스 제도는 1980년에 각각 해방된다.


용어

이스틱랄(독립) : 모로코 술탄의 지휘 아래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인 주요 세력을 집합시킨 정당을 일컫는다.

신두스투르 : 1934년 튀니지에서 하비브 부르기바가 독립을 얻고 근대화된 세속국가를 만들기 위해 결성한 단체를 뜻한다 (두스투르는 “헌법”을 의미한다).


자료1. ‘변화의 바람’

우리는 지난 수 세기 동안 다른 힘에 의지하여 살아온 사람들이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모습을 봐 왔습니다. 15년 전에 이러한 움직임은 아시아로 번져 나갔습니다. 각기 다른 인종과 문명에 뿌리를 둔 그곳의 국가들이 각자의 독립을 외치며 일어섰습니다. 지금 그러한 움직임이 아프리카에서 일고 있습니다. 장소마다 각기 다른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어디에서나 일고 있습니다. 변화의 바람이 아프리카 대륙에 불어 닥치고 있습니다. 좋으나 싫으나 이러한 민족의식의 성장은 우리에게 닥친 정치적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를 사실로서 받아들여야 하며, 국가의 정책 역시 이를 고려하여 펼쳐져야 합니다. 오늘날 세계는 크게 세 집단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나는 흔히 말하는 ‘서양 열강’입니다. 우리 남아프리카 연방과 영국을 비롯해 영연방이 여기에 속합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를 ‘자유진영’이라고도 부릅니다. 두 번 째는 공산주의 집단으로 러시아와 그 주변 유럽 내 위성국가, 그리고 향후 10년 안에 인구가 8억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중국이 이에 속합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까지는 공산주의나 서양 열강 어느 쪽에도 지지를 보내지 않은 집단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20세기 후반의 주된 쟁점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중립적인 국민들이 동과 서 중 어느 쪽으로 기울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공산 진영에 가담할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일 것인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특히 영연방에서 현재 진행 중인 자치정부에 대한 거대한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그들 사례가 눈길을 끌게 된다면, 그 결과 세계의 균형이 자유와 질서, 정의 편으로 기울 것인가? 투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입니다.

해럴드 맥밀런의 연설, 보수주의자, 1957년 ~ 1963년 영국총리, 남아프리카 국회에서, 1960년 2월 3일, 케이프타운.

p.145


자료2. 민족 해방 전선(FLN)의 선언문

1954년 10월 31일, 알제.

알제리 인민과 민족적 대의를 위해 싸우는 전사들에게.

목적 - 다음과 같은 방법을 통한 민족해방:

1. 이슬람 원칙의 테두리 안에서,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알제리 주권 국가 재건

2. 인종과 종교를 떠나서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자유 존중

대내적인 목표

식민지 체제의 청산을 위한 알제리 인민의 모든 건전한 역량을 결집하고 조직화한다.

대외적인 목표

1. 알제리 문제를 국제적 쟁점으로 만든다.

2. 아랍-이슬람 차원에서 북아프리카의 결집을 실현한다.

3. 유엔 헌장에 의거하여 우리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모든 국가에 대한 호의를 표명한다.

투쟁의 수단

혁명의 원칙과 국내외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우리의 목적을 실현할 때까지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투쟁을 지속한다.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민족해방전선은 정면으로 동시에 실행할 두 가지 임무를 가지고 있다. 대내적인 활동은 정치적 차원뿐만 아니라 활동 자체의 차원에서 이루어지 며, 대외적인 활동은 우리와 친근한 우방의 지원으로 알제리 문제를 국제적인 현실로 알리는 것이다.

민족의 모든 역량과 힘의 결집을 요구하는 급박한 임무가 바로 이것이다. 전투는 오래 지속될 것이나, 그 결과는 확실하다.

1. 민족해방전선이 요구하는 것은?
2. 이 요구사항은 어떤 원칙을 바탕으로 하는가?
3.‘국제적 쟁점으로 만든다’라는 문장을 설명하시오.

자료3. 민족해방전선 무기 은닉 발견 현장, 1955년.

자료4. 벨기에 왕의 메시지, 1959년 1월 13일.

오늘, 우리는 콩고를 번영과 발전을 속에 해방하기로 지체 없이 결정했다. […] 우리는 콩고의 독립을 망설임 없이 수락하고 콩고 형제들의 갈망을 들어주었다. 한편 벨기에가 80년간의 노고와 노력을 바탕으로 콩고와 우호적이며 공정한 협력관계를 이루어냈다는 점은 잊을 수 없는 사실이다. 토착민들과 콩코 거주 백인들을 위한 우리의 지침과 자문 역할은 지속될 것이며, 그 영향력은 콩고가 발전함에 따라 점점 줄어들 것이다.

1. 벨기에 왕이 제안하는 것은 무엇인가?
2. 그는 식민지화를 어떻게 묘사하는가?

자료5. 드골이 말하는 탈식민지화.

식민지 국민들의 해방이 우리 나라의 모토와 일치하고, 갈리에니, 리요테와 같은 훌륭한 식민지 설계자들이 구상했던 목표와 일치하며, 세계 대전 당시와 종전 중 전세계에서 일어난 피할 수 없는 흐름과 일치하기에 나는 이들의 해방을 위한 길을 택했다. 물론 서방 국가들, 특히 프랑스가 식민지화를 통해 이루어놓은 업적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화 작업은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으며 훌륭했고 비옥했다.

샤를 드골,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 1960년 9월 5일 기자회견에서.

자료6. 1975년, 앙골라의 탈식민지화. 20세기 초 당시 앙골라 총독, 노턴 데 마토스의 동상.


p. 146

지도

식민지 해방

20세기 초에는, 서유럽국가들만이 식민지배를 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는 코카서스 지역부터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지배하였고, 오토만 제국은 아랍과 근동 지역의 상당부분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오토만 제국이 1918년에 세계 1차대전의 패배로 붕괴되어, 아랍지역은 1919-1920년 간 승전국들에게 위임통치를 받게 된다. 서유럽국가들은 세계 2차대전까지 식민지배를 유지한다. 하지만 전쟁 이후, 1947-1954년 아시아, 1957-1975년 아프리카, 마침내 1970년대부터는 오세아니아 지역의 식민지 해방 운동의 확장으로 식민제국은 사라지게 되었다. 차르(황제)에 의해 통치되고 있던 러시아 제국은 더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되었다. 소련체제 하의 공산당 지도자들에 의해 유지된 러시아의 영향력은, 1991년이 되어서야 제국의 붕괴를 통해 사라지게 된다. 러시아 제국의 붕괴는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의 종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구 러시아 제국의 붕괴를 통해 15개의 새로운 국가들이 탄생하였다. 이로써, 식민지 해방이 종결되었다.

자료1. 스캔. 식민지 해방(해방 국가들의 국경)

자료2. UN가입 국가의 수.

Un2.png


문제

1.1945년부터 특히나 더 많은 식민지해방이 이루어진 대륙은 어디인가?

2.1955년에, 어떤 지역들이 식민 지배 하에 놓여있었는가?

3.1955년에 여전히 식민통치를 당하고 있던 아프리카 지역은 어디인가? 어떤 국가가 통치하고 있었는가?

4.주요 독립전쟁이 있었던 곳은 어디인가? 어떤 국가의 식민지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났는가?

5.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과 같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어떤 국가에서 독립했는가?


p.148

복습자료

필수연도

- 1884년 ~ 1885년: 베를린 회의

- 1936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정복. 마지막 식민지 정복.

- 1947년: 인도 해방.

- 1954년: 프랑스, 디안 비안 푸에서 패배.

- 1962년: 알제리 해방.


필수


1. 식민지 확장

■ 1880년과 1914년 사이 식민지화의 거대한 확장. 종교(선교), 경제(자원 및 일자리 창출), 정치(국제적 라이벌구도), 전략 등이 원인. 유럽 제국주의 발달.

■ 유럽 국가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에 식민지 확장:

- 식민지 국가 간 규정 설정 (베를린 회의, 1884년 ~ 1885년).

- 식민지와 보호령 구성.

■ 두 차례 전쟁 사이, 식민지 제국은 힘의 상징으로 여겨짐 (식민지 박람회, 1931년). 반발의 시작.


2. 흔들리는 식민지 제국

■ 식민지 본국,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흔들림. 식민지 국가에서는 자유에 대한 발상이 퍼짐. 미국과 소련에 이어 UN또한 이를 지지.

■ 전통주의, 모더니즘, 혁명주의 등 다양한 뿌리에서 출발한 민족주의 운동이 식민지 국가들에서 일어남. 협상 또는 전쟁이 해방으로 이어짐.


3.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의 해방

■ 중동, 1946년 ~ 1948년: 시리아, 레바논, 트란스요르단, 이스라엘 해방.

■ 인도, 1947년부터 해방. 그러나 인도-파키스탄 분할.

■ 인도네시아(1949년), 인도차이나(1954년): 독립 전쟁.

■ 마그렙 지역: 1956년, 모로코와 튀니지 해방. 알제리는 오랜 전쟁 끝에 1962년에 해방.

■ 블랙아프리카: 프랑스와 영국 식민지 국가들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방(1957년~1963년).

 1960년, 벨기에 식민지 콩고에서 내전 발생. 1970년 이후, 포르투갈 식민지 국가 및 오세아니아 지역 해방.


인물


모한다스 간디 (Mohandas Gandhi, 1869-1948)

인도의 정치 지도자, 비폭력주의자


호치민(Ho Chi Minh, 1890-1969)

베트남 공산당 지도자.


크와네 은크루마(Kwane N’Krumah, 1909-1972)

가나 정치 지도자



혼동하지 않기


식민지, 보호령, 위탁, 자치령

→ 식민지는 다른 국가의 완전한 자치권 밑으로 들어가는 영토를 의미한다.

→ 보호령은 본국에 의존하는 영토 또는 국가를 의미하나 해당국가의 고유한 정부체제를 유지함으로 일정의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다.

→ 위탁은 1919년 이후, 국제연맹이 다른 국가에 맡겨 관리하도록 넘긴 영토를 뜻하며 원칙대로라면 해방으로 이어져야 한다.

→ 자치령은 내부 자치권 및 추후 독립이 보장되는 영국의 구 식민지 국가들을 의미한다. 자치령은 백인으로 구성된 캐나다(1867년), 호주(1900년), 뉴질랜드(1907년), 남아프리카(1910년)에 먼저 내려졌다.


제국주의와 식민지주의

→ 제국주의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통치한다는 뜻이다. 제국주의는 경제, 재정, 문화적 맥락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제국주의는 통치국가의 정치적 자립을 반드시 문제삼지는 않는다. 통치국가들은 고유의 정부를 유지할 수 있다.

→ 식민지주의는 제국주의의 일부 형태다. 식민지 본국은 식민지 국가를 정치적으로 통제한다. 이 경우 식민지 본국이 식민지 국가의 모든 분야를 관할하며 관리한다.


자치와 해방

→ 자치영토는 내부 고유 기관을 보유하나 특히 외교와 같은 분야에서는 다른 한 국가에 의존한다.

→ 해방국가는 자신의 완전한 주권(외교, 화폐정책, 국방)을 획득한 국가를 의미한다.


p. 149

역사적 자료 설명 (6/15)

주제: 뱅센 국제 식민지 박람회 결산(1931년)

프랑스는 식민지를 이뤄야 할 소명이 있다. 이 진리의 의미가 흐릿해졌다. 18세기의 일시적 실패는 2세기에 걸친 기획과 성공을 잊혀지게 만들었다. 백 년 전부터 우리가 알제리, 인도차이나, 튀니지, 마다가스카르, 서아프리카, 콩고, 모로코에서 되찾은 전통과 이뤄놓은 끊임 없는 영광으로 가득 찬 성공은 보람없이 지나갔다. 여전히 편견이 남아있었다. 사람들은 프랑스가 식민지를 이루지 않았다고 여러 차례 반복했다. 이 같은 망상을 해소하기 위해서 바로 이번 박람회와 전대미문의 성공이 필요하다. 오늘날 식민지에 대한 발상이 한창 발전 중에 있다. 수 백만 명이 넘는 프랑스인들이 뱅센의 장엄함을 만끽했다. 프랑스인들에게 식민지 국가들은 더 이상 이름없는 대상이 아니다. 초등학생들도 우리 식민지의 거대함, 아름다움, 자원에 대해 알고 있다. 바로 아이들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다. 프랑스의 모든 국민들은 위대한 프랑스, 전 세계 5대륙의 시민이라는 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진리가 나타날 시간이 도래했다. 오늘날 경제 상황이 그 어느 때 보다 좋지 않다. 그러나 프랑스는 식민지를 통해 용기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에는 약자가 없으며 번영을 위해 영혼을 받친 이들만이 있다. 식민지에서 요구하고 성잘할 우수인력은 강인한 몸과 강철 같은 심장을 지녔다. 이 같은 자질이 없는 이들은 스스로 제거될 것이다. 본인들이 이루어낼 고된 일을 통해 그들은 강력한 인력으로 거듭날 것이다. 식민지 구성을 위해 가담한 이들의 수는 적지만 프랑스의 모든 이들이 식민지로부터 혜택을 누릴 것이다. 이미 해외 영토의 프랑스는 유럽 프랑스의 가장 큰 고객이며 제1 공급자 역할을 맡고 잇다. 면직물 총 생산 중 1/4이 식민지 국가에 제공되고 있다. 이 같은 경로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면 상당수의 실업자가 발생할 것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제국주의를 흡수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식민지 정책이 가져올 커다란 성공을 당당히 기다릴 수 있다. 프랑스의 해외영토와 본국의 막대한 자금이 만나 경이로운 풍요를 가져올 것이다. 식민지화에 호의적인 입장을 보인 하원이 재정투자를 의결했다. 재정지원을 등에 업은 프랑스는 식민지에서 최신식 생산설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외부 프랑스에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우리는 지속적인 장미 빛 이상을 내다볼 수 있을 것이다 […]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식민지에 물직적, 비물질적 진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왔다.황금책이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는지 모르겠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은 문명과 더 많은 부가 이루어지길.

폴 레노, 식민지 장관, Introduction au livre d’or de l’exposition(박람회 황금책 전문).

박람회는 1931년 5월 6일 개장했으며 황금책은 1931년 10월 8일에 발행되었다.


문제

1. 위 자료와 저자를 소개하시오.

2. 폴 레노는 프랑스의 식민지 역사를 어떻게 소개하는가?

3. 위 글이 공식적 관점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나타내시오.

4. 폴 레노에 따르면, 식민지 개척자가 지녀야 할 자질에는 무엇이 있는가?

5. 폴 레노에 따르면, 식민지화는 프랑스에 어떤 이점들을 가져다 주는가?


A. 문제에 대한 답변 힌트

문제1: 자료를 풍부히 활용하시오.

- 위 글은 식민지 장관이 작성했으므로 식민지 박람회에 대한 공식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 황금책은 박람회가 종료된 후 발행되었으므로 박람회에 대한 결산을 내리고 있다.


문제2:

식민지 역사의 과정을 추출하시오(첫 번째 문단). 이 과정은 제국의 지리적 소개로 이어진다. ‘끊임 없는 영광으로 가득 찬 성공’이라는 표현을 살펴보고 사실과 일치하는지 자문하시오.


문제3:

1931년 당시 식민지화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은 어떠했나?


문제5:

가장 명확한 부분에 먼저 집중하시오(2문단, 3문단). 단, 4문단과 5문단의 내용도 소홀히 두지 마시오.


B. 작문예시

문제5:

폴 레노는 식민지화의 혜택을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관점에서 동시에 바라본다. 물질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식민지 국가들은 프랑스인들 모두가 혜택을 볼 수 있는 이점을 가져다 준다. 면직물의 예처럼 식민지 국가는 프랑스 산업의 판로 역할을 맡으며 실업률을 감소시킨다. 또한 프랑스 본국 자본의 투자 대상이 되어, 투자자들은 ‘경이로운 풍요함’, 즉 이윤을 남길 수 있다. 비물질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식민지제국은 프랑스에 ‘지속적인 장미 빛 이상’을 제공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상이란 저자가 말했듯이 더 많은 인간에게 더 많은 문명의 혜택과 부를 안기는 것이다. 즉 이는 문명화라는 과제를 푸는 것이며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할 것이다.


p.150

전체자료 연구(6/17)

주제: 1914년 이전의 아프리카는 어떻게 나뉘고 정복되었나?

문제


1부: 자료 분석


1.아프리카를 식민지화 한 국가는(자료2, 자료3, 자료4)?

2.아프리카를 두고 유럽국가들 사이에 어떤 경쟁이 생겨났나(자료3)?

3.어떠한 수단을 통해 아프리카 정복이 이루어졌는가(자료2, 자료3, 자료4)?

4.유럽인들의 아프리카에 대한 어떤 시각이 자료에서 드러나고 있는가(자료1, 자료2, 자료4)?


2부

위 문제들에 대한 답변과 배경지식을 활용하여, 다음 질문에 답하시오.

19세기에 아프리카는 어떻게 나뉘고 정복되었는가?


자료1. 스캔. 1991년 이탈리아의 트리폴리타니아 정복.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 1991년 10월 15일.


자료2. 알제리 정복

시민 대상의 연설

알제리 거주자 여러분, 법정에서, 제가 아프리카 임기 동안 했던 일처럼, 저는 우리나라가 알제리의 완전한 정복을 하고자 하는 것을 저지하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큰 희생과 많은 군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 저의 목소리는 새로운 국면을 열수도 있는 이 큰 발걸음을 멈출 만큼 강하지 못했습니다. 알제리 정복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에 따라야만 합니다. 저는 이 과업을 달성하기 위한, 이 위대하고도 보람찬 임무를 받아들였습니다. […] 아랍인들은 굴복해야만 할 것입니다. 아프리카에는 프랑스 국기만이 나부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이 불가피한 전쟁 자체가 목표인 것은 아닙니다. 정복은 식민지배를 배제하고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핵심적이고, 풍요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합시다. 외부의 자본을 성장시켜 프랑스에 보탬이 되도록 합시다. 우리는 마을들을 건립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동포들과 이웃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안락한 거처와, 외부의 예기치 못한 공격으로부터 효율적으로 보호해줄, 비옥한 토지로 둘러싸인 완성된 건물을 주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설들은 알제리에 있는 프랑스인들을 위해 제공될 것입니다. 이렇게, 프랑스는 진정한 식민지를 세우고, 프랑스가 치를 희생들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군 대상의 연설

국왕께서 저에게 여러분을 이끌도록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아랍인들을 정복하였고, 또 정복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달아나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들을 굴복시켜야만 합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전쟁에서 피해갈 수 없는 궁핍과 괴로운 행군에 익숙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승자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도망친 유목민의 국가에서, 용기와 인내로 버텨냈습니다. 다음 번의 원정을 통해, 여러분은 프랑스가 자랑하는 전사의 덕목을 다시 한번 고국에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목적의 달성을 위해, 조국과 국왕에 대한 여러분의 헌신을 보여줄 것을 부탁 드립니다.

알제리 총독 뷔고(Bugeaud) 장군의 알제 부임 당시 연설(1784-1849), 1841년 2월 22일, 앙드레 릭텐버거(André Lichtenberger)의 저서 ‘뷔고(Bugeaud)’에서 발췌, 플롱 출판사, 1931년.


p.151

자료3. 스캔. 1885-1914년의 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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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4. 스캔. 프랑스와 영국간의 조약.

1.대영제국의 정부는 마다가스카르 섬이 프랑스의 보호령임을 인정한다. 마다가스카르에 체류하는 두 국가의 선교사들은 완전한 보호를 받는다. 모든 종교, 종교교육에 대한 관용과 자유가 보장된다. 프랑스의 단체들은 해당 지역에 거주중인 영국인의 권리와 면책특권을 침해할 수 없다.

2.대영제국의 정부는, 지중해 지역의 프랑스 식민지 남쪽에 위치한 프랑스의 세력권을 인정한다. 니제르(Niger)의 세(Say)부터 차드(Tchad) 호수에 위치한 바뤼브(Barruve)까지 그어진 국경은, 니제르 회사(la Compagnie du Niger)와 소코토(Sokoto) 왕국의 세력권을 구분한다. 대영제국은 두 명의 판무관을 즉시 파견하여, 프랑스 측의 판무관들과 파리에서 위에 언급한 국경선을 정하기 위한 회동을 갖도록 한다. 국경의 세부 사항에 관해 판무관들이 합의에 다다르지 못할 경우, 위에서 언급한 국경에 관한 사항은 효력을 잃는다. 판무관들은 또한, 니제르 서부에서 중남부와 북부에 이르는 지역에 대해 두 국가의 각각의 세력권을 정해야 하는 임무를 갖는다. 주영국 프랑스 대사 웨딩턴(Waddington)이 런던에서 체결한 조약, 1890년 8월 5일.


문제 해법

A. 먼저 생각해보기

주제를 분석하자. 역사적 사건에 대해 공부하되, 진행되는 상황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배경과 원인, 목적과 맥락을 밝히기 위해 자료들을 주의 깊게 읽자.

B. 답변 힌트

1부의 문제에 대해서는 간략한 답변을 제시해야 한다. 2부의 문제에 대해서는, 예를 들면 식민지 확장의 야욕이나 다양한 유럽국가들(자료3)을 언급해야 한다. 2부 문제의 답변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

- 한 두 문장의 도입부가 있어야 한다. 아프리카의 정복과 영토 분할에 대해 공부하고, 가능한 해법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보자.

- 내용 전개를 여러 부분으로 구성한다. 각 부분에는 자료 분석을 통해 도출된 내용들이 들어가야 한다.

1. 정복 식민지의 규모

2. 정복의 수단

3. 유럽의 경쟁을 유발한 정복사업

- 한 두 줄의 결론.

p. 152

전체자료연구 (7/17)

주제: 식민지화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문제

첫 번째 파트

1. 1930년대의 식민지 제국 상황과 1960년의 탈식민지화 과정을 소개하시오(자료2).

2. ‘끔찍한 흑인 노예 거래’ (자료1)라는 표현을 해석하시오. 1880년도에 노예 거래가 여전히 이루어진 국가는 어디인가? 자료1과 자료4에 소개된 발전 사안들은 무엇인가? 어떤 점에서 이 같은 발전이 해당국가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나?

3. 자료2와 자료3은 식민지화의 어떤 비전을 제시하는가?

4. 경제적, 인적, 독립접근방식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위 질문의 비전이 어떤 점에서 보두앙왕의 비전(자료1)과 완전하게 다른가?


두 번째 파트

문제에 대한 해답, 자료에서 추출한 정보, 개인적 지식을 바탕으로 위 주제에 답하는 글을 작성하시오.


자료1. 보두앙 벨기에 왕의 연설, 콩고 해방 기념식에서.

80년 동안, 벨기에는 여러분의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해 힘써왔습니다. 먼저, 수 많은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끔찍한 흑인 노예 거래로부터 콩고를 해방시키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 다음, 한 때 적이었던 이들을 한 민족으로 결합하여 아프리카의 가장 큰 독립국가로 세우기 위해 힘썼습니다. 또한 콩고를 대표하여 하나된 국회에 모인 여러분에게 보다 행복한 삶을 제공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이 역사적인 순간, 우리 모두는 아프리카 해방의 선구자들과 오늘 날의 콩고를 이룩한 분들을 떠올려야 합니다... [...] 콩고에 세워진 철도, 도로, 수로, 항로는 여러분의 국민들의 왕래를 도모하여 통합을 이루어내었으며 콩고를 세계 무대로 뻗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들여 구축된 의료시스템은 여러분을 치명적인 병으로부터 살렸습니다. 농업분야는 개선되었고 근대화를 이루었습니다. 대도시가 세워졌습니다 [...]. 과목할 만한 경제 성장도 이루어졌습니다[...]. 선교활동을 통해 탄탄한 교육과정이 이루어졌고 우수한 인재들이 싹을 피우고 있습니다. [...] 큰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콩고에게 발전의 길을 향한 발판을 마련해 줄 수 있어서 매우 행복합니다.

보두앙 1세의 연설, 레오폴드빌(콩고), 1960년 6월 30일.

자료2. 파트리스 뤼뮘바의 연설, 콩고 해방 기념식에서.

오늘, 벨기에와 합의 하에 콩고가 해방되었다 할지라도, 모든 콩고 국민들은 콩고의 해방이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투쟁은 눈물과 총성, 그리고 피로 가득한 투쟁이었습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치욕을 안긴 노예 제도를 종결시기 위해서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습니다. 80년간 이어진 식민지 체제에서, 우리는 의식주조차 해결할 수 없고 아이들을 소중한 존재로 키울 만한 여력도 되지 않는 비루한 급여를 받고 고된 노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조롱 받고 모욕당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우리는 검둥이라는 이유로 구타 당했습니다. 여러분이 흑인이라면 존대 받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친구 사이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존댓말은 오직 백인들을 위한 것이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땅은 오직 강자의 권리를 위해 존재하는 법률의 이름으로 강탈 당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법은 결코 같은 법이 아니었습니다. 백인을 위한 타협적인 법과 흑인을 위한 잔인한 법뿐이었습니다. 정치적이거나 종교적 목소리를 낸 이들은 유배되어 끔찍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어떤 흑인도 서양식 영화관, 식당, 가게에 절대 입장할 수 없었습니다.

파트리스 뤼뮘바의 연설, 레오폴드빌(콩고), 1960년 6월 30일.

파트리스 뤼뮘바(Patrice Lumumba, 1925-1961)는 1958년에 콩고민족운동을 창설했으며 1960년에 벨기에와 콩고 해방을 협상한다. 해방 콩고의 국무 총리가 된 그는 다수의 경쟁자와 충돌한 끝에 모뷔튀(Mobutu)에 의해 체포되어 결국 살해당한다.

자료3. 1928년, 프랑스 콩고 내 식민지 행정

프랑스 식민지 하 콩고는 가장 부유하고 번영할 식민지 국가가 될 것이라고 늘 점쳐졌다. 하지만 지금까지만을 보면 가장 가난하고 결핍한 나라 중 하나이다. 콩고는 더 이상 이런 빈곤을 겪지 말아야 할 권리가 있다. [...] 1899년, 무기력한 정부가 식민지화에 굴복한 일은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정말 놀라운 점은, 식민지 총독들이 여러 차례 고발한 후에도, 콩고가 파렴치하게 착취당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에도, 끔찍한 식민지 체제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 그쪽의 행정관들은 이렇다 할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오직 상관에게만 보고할 수 있다. 선교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조용히 입을 닫는 일뿐이다. [...] 상콩고 프랑스 기업 (la Compagnie Francaise du Haut-Congo)는 많은 이윤을 남겼지만, 그들이 착취한 토착민들의 삶에 개선에는 일체 기여하지 않았다. 그들을 위한 그 어떤 도로, 학교, 병원, 조금한 보건소 조차 세워지지 않았다. [...] 대기업들은 토착민 행정관들과 그들의 상사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다는 점을 여러 차례 보여주었다.

앙드레 지드, 프랑스 작가, Voyage au Congo, Gaillmard출판사, 1928년.

제 8 장 : 제3세계 – 독립에서 다양화에 이르기까지

제 9 장 : 1973-1991년 사이 국제관계

제 10 장: 탈냉전시대의 세계

1945년부터 오늘날까지의 유럽

제 11 장: 서유럽의 중축

p.216 정치•경제적으로 통일된 유럽에 대한 구상은 이전부터 이어져왔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도, 나치즘의 몰락 이후 유럽의 재구성을 도모하는 일부 레지스탕스 운동가들은 통일된 유럽구상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45년 이후에는 프랑스의 쟝모네와 로베르 슈만, 이탈리아의 알치데 데가스페리, 벨기에의 폴-앙리 스팍, 독일의 콘라드 아데나워 등 기독교 민주주의에 속한 ‘유럽의 아버지’들이 통일된 유럽 구상 실현에 뛰어든다.

하지만 냉전의 맥락에서 유럽의 통일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1950년대와 1990년 독일의 통일 사이에 어떤 핵심사건이 일어났나?

[지도스캔] 자료1.‘기독교와 로마법, 그리고 그리스 휴머니즘의 산물’인 (자크 들로르, 1989년) 유럽은… 1947년의 유럽 “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아래와 같은 세가지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유럽인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첫째, 튼튼하고 조직력을 갖춘 권력의 영원한 모델인 로마의 영향[...]. 둘째, 의식의 심부까지 점진적으로 도달하는 기독교의 영향[...]. 끝으로 우리 문명에서 가장 특징적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의 영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로부터 지성의 단련, 그리고 모든 것을 인간, 완전한 인간에게 결부시키는 사고방식을 배웠습니다.” 폴 발레리, 1922년 취리히 대학생들 앞에서.

p.217 [화살표 스캔] [사진: 유럽의회, 스트라스부르그] 자료2. 1993년 유럽연합으로 탄생한다. “우리는 우리의 유구한 공동체 문명유산을 지켜야 합니다… 유럽은 가장 오래된 기원과 고상한 전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치데 데가스페리, 1951년 12월 10일, 유럽평의회 자문의회에서 연설 중.

p. 218 자료집 통일의지 공동운명체에 대한 유럽인들의 갈망은 일찍이 1945년전부터 존재해왔다. 이는 폴 발레리에 의하면,‘그리스의 사유와 기독교의 사상’을 한데 녹인 틀을 구축한 고대 로마제국의 유산인 공동 문명에 대한 의식에서부터 비롯된다. 한편 유럽은 역사 속 반복된 전쟁으로 인해 분열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유럽 국가간 평화를 도모하고 공동 기구 창설을 위한 움직임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반나치 레지스탕스 등이 대표적인 예다. 유럽재건 시기를 맞은 유럽인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한다. 오랜 역사 속에 분열된 유럽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

자료1. 1930년말, 유럽 체제 형태 [지도스캔]

자료2. 통일에 대한 결의를 보여주는 반나치 레지스탕스 1. 독일과 유럽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연방 체제로 향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해결방법이다[...]. 그러나 여기에 앞서 유럽 국민 모두는 정책이 본질적으로 도덕성과 연결돼 있다는 점과 좋은 정책은 공정하고 인간적인 정책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정치적 정의가 없다면 민족에게는 평화도 자유도 행복도 없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자크 마리탱의 선언, 철학가, 레지스탕스, 1940년, ‘유럽과 연방에 관한 발상’에서.

2. 제국주의적 권력은 그 근원이 어디이든 반드시 억제시켜야 한다. 프러시아 군국주의가 다시는 일어서면 안 된다. 새로운 유럽을 구축하기 위한 바탕은 오직 유럽 국민들간의 협동을 통해서만 그려질 수 있다. 1943년 2월 18일, 하얀 장미 (소피, 한스 숄)의 마지막 전단지에서.

3. 희생된 이들의 삶의 의미가 퇴색되는걸 원치 않는다면, 이 전쟁의 끝은 긴밀히 하나된 유럽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만 유럽통합은 다른 민족을 복종시키거나 그들의 삶을 빼앗으면서 이뤄져서는 안 된다. 유럽은 자주적인 국가의 자유로운 동의 하에 하나가 되어야 하며, 이러한 통합 속에서 각 국가들의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칼 괴들러스, 독일 레지스탕스, 1944, 독일 연방문서보관서 1113/73

4. 유럽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는 유럽의 가족을 재구성하고 유럽이 평화, 안보 및 자유 안에서 발전할 수 있도록 도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미합중국과 같은 형태의 유럽을 세워야 합니다[...]. 이와 같이 중대한 사업을 위해 프랑스와 독일이 힘을 합쳐야만 합니다. 윈스턴 처칠, 취리히 연설문 중, 1946년 9월 19일.

p.219 자료3. 아리스티드 브리앙의 유럽에 대한 꿈 ‘제네바 성서’, 데르소와 켈렌의 커리커쳐, 1931

자료4. ‘No, 그럼으로, CSU(기사당)당'. 1949년 선거를 위한 CSU(독일 기사당)당의 선거 포스터.

자료5. 유럽을 위한 세가지 모델? 글쓴이는 1945년 당시 존재했을 세 가지 모델을 소개한다. 근본적 정치경험을 민족국가와 주권국가[...]에 바탕을 둔 일부 정치가들에게 있어, 유럽 통일은 국가연합을 의미했을 것이다. 이는 각 국가가 주권을 보존하며 여러 지도자들이 한데 모여 정립하고 채택한 정책을 특정한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함께 펼쳐나가는 모델이다. 처칠과 드골은 이와 같은 비전을 내다본 가장 명망 높은 정치인이었다[...]. 두 번째 모델은 실용적인 모델이다. 석탄과 철강 시장, 핵에너지, 합동군 또는 공통관세를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며 관리할 목적으로 각 국가가 정치적 주권은 유지하되 초국가적인 차원의 당국을 위임하는 것이다. 쟝모네는 유럽의 구체적 공공이익 관리로부터 마침내는 유럽의 정치적 상부구조가 세워질 것이라 내다봤다. 세 번째 모델은 연방제모델이다[...]. 이 모델은 국가적 의미와 차원을 지닌 모든 분야에서는 각 국가의 주권 유지와 존중을 제안한다. 한편 초국가적 분야를 외교, 국방, 경제, 민법보호와 관련된 유럽의 법을 준수하며 유럽의회와 같은 유럽 정부가 민주적으로 관리하도록 제안한다[...]. 이는 미국과 스위스 모델과도 같다. 알티에로 스피넬리 (1907 – 1986), 반파시즘 레지스탕스, 유럽재건 주요인물, 본인의 강연 중, 1985.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지도에서 보았을 때 유럽은 어떻게 분열되어 있는가(자료1)? 이 분열의 원인이 된 사건은? 2. 저자 네 명의 글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자료2)? 3. 아리스티드 브리앙에 대해 조사하시오. 커리커쳐 제목의 의미를 설명하시오(자료3). 4. 이 자료의 역사적 맥락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시오(자료4). 유럽의 어떤 정당을 표현했는가? 포스터에서 고발된 내용은 무엇인가? 5. 자료5에 제시된 세가지 모델을 소개하시오.

B. 각 자료 정보들 사이 연관 짓기 6. 반나치 레지스탕스 사이에 유럽통일에 관한 구상이 피어난 이유는? (자료2, 5) 7. 자료2와 자료5에 따르면, 유럽연합 지지자들을 갈라놓을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인가?

C. 작문 8. 유럽연합 창설에 있어 내재된 어려움을 설명하는 글을 작성하시오.

p.220

1) 유럽 건설의 시작 A. 유리한 조건… 자료3, 4 ■ 유럽의 건설은 1945년 후, 한 때 적이었던 유럽국가 간의 결속을 도모하며 평화를 공고히 하려는 의지로부터 시작한다. 전쟁은 아리스티드 브리앙의 노력을 막을 수 없었으며 사회민주당과 기독교민주당의 레지스탕스 운동가들은 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하는 틀 안에 하나된 유럽을 새우기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 1947년 후, 하나된 유럽에 대한 희망은 냉전으로 인해 서유럽에만 한정되고 만다.

■ 적대적 상황의 종료 후, ‘유럽의 미국’을 세울 꿈을 가진 처칠이 유럽 통합의 새로운 지지자로 떠오른다. 그의 통일에 대한 희망은: - 유럽 통일에 호의적인 기독교 민주당 출신의 정치가인 프랑스의 쟝 모네, 로베르 슈만, 서독의 콘라드 아데노어, 이탈리아의 알치데 데가스페리 등의 정권 참여, - 우파국수주의자들 타파, -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과 붉은 군대 (소베이트 연방 군사)의 공격, - 유럽 부흥 계획 (plan Marshall)이 일시적이므로, 함께 유럽 재건에 힘을 쏟지 않으면 경제쇠퇴가 온다는 점, 등에 근거한다.

B. 하지만 서로 다른 견해… 자료5 ■ 하지만 유럽 통일에 관한 서로 다른 견해가 점진적으로 나타난다: - ‘통일주의자(Uniosts)’들은 강력한 행정부, 완전 통합형 경제, 군사 시스템을 갖춘 초국가적 유럽을 세우고자 하는 반면, - 조금 더 조심스러운 당시의 ‘연방주의자(Federalist)’들은 각 국가들에 더 폭넓은 자치권을 보장하는 권력의 경계선이 뚜렷한 연방정부를 세우고자 한다. ■ 유럽인들은 미국에 대한 태도에 의해서도 입장이 갈린다: - 1950년대와 1960년대 사이, 사회주의자들과 기독교 민주당의 정치인들은 공산주의의 위협에 앞서, 유럽의 통일은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의 동맹관계에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 1960년대부터는 경제분야와 군사분야를 통괄함과 동시에 국권의 원칙을 보존하는 드골파의 ‘유럽합중국’ 개념이 그려진다. 드골은 소련의 지배하에 있는 동유럽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기 위해 ‘ATTU (Atlantic to the Urals 대서양부터 우랄스크까지) 유럽’을 구상한다. - 다수의 좌파정치인들은 ‘모노폴 유럽’에 반하는 사회주의적인 유럽, ‘국민의 유럽’을 주장한다.

C. 실패로 이어지는 성공 자료1, 2, 6 ■ 각자의 의견이 갈림에도 유럽 통일은 구체적인 모습을 띈다. 처칠의 주도하에, 서유럽 10개의 국가는 1949년 5월 유럽 평의회를 창설한다. 유럽 평의회는 각 회원국을 대표하는 각료위원회와 스트라스부르그에 있는 유럽 의회로 구성되어있다. 유럽 평의회 회원국의 숫자는 곧 21, 즉 서유럽과 소아시아 모두를 의미한다. 하지만 유럽 평의회의 역할은 법률과 문화 분야에 국한된다. ■ 1951년, 파리조약으로 인해,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ECSC)가 쟝 모네, 로베르 슈만, 콘라드 아데노어에 의해 설립된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그, 프랑스, 이탈리아, 서독이 회원국이다. ECSC는 프랑스와 독일간의 관개 계선과 기타 분야에서 유럽 통일의 점진적 발전에 대한 희망에 기초한다. ■ 위와 같은 성공사례 후, 유럽의 통일건설은 프랑스가 1954년, 유럽 방위 공동체 비준화를 거부함에 따라 제동이 걸리고 만다. 유럽 방위 공동체는 서독의 병력를 유럽군 병력에 통합시키는, 즉 서독의 재무장을 허용하겠다는 프로젝트였다.

어휘

Supranational (초국가적): 유럽당국의 결정권이 각 유럽 회원국의 결정권보다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의미. Fédéraliste (연방주의자): 국가의 권력이 중앙 정부와 주에 동등하게 분배되어 있는 정치형태인 연방제 국가의 당원. Atlantiste(범대서양주의자): 소련의 위협에 맞서 미국, 캐나다 등 북대서양 국가와 서유럽 국가 간의 동맹에 호의적인 사람을 뜻함. Conseil de l’Europe(유럽평의회): 1949년 5월 5일 창설. 유럽평의회는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아일랜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등 초기 10개의 회원국으로 시작한다. 1949년에는 그리스와 터키가, 1950년에는 서독, 그 뒤를 이어 대부분의 서유럽국가들이 합류하였으며 1990년 후에는, 동유럽 국가들 또한 합류하였다.

자료1. 슈만 플랜

유럽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단일한 구상으로 통합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상의 통합을 이루어낼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을 쌓아 올려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유럽국가들이 한데 모이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이어져온 프랑스와 독일의 적대관계를 해소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프랑스와 독일을 움직여야 합니다[...].

프랑스정부는 프랑스와 독일산 석탄과 철강을 타 유럽 국가가 관장할 수 있는 기관과도 같은 공동 고등기관(High Authority)에 저장해두는 것을 제안합니다. 석탄과 철강 생산을 함께 관리함으로써 유럽연방으로 나아갈 첫 단계인 공통 경제발전의 틀이 곧바로 마련될 것입니다. 또한 지금까지 전쟁의 무기 생산지이자 줄곧 전쟁의 희생양이었던 이 나라들의 운명이 바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루어진 프랑스와 독일의 연대 관계는 양국간의 전쟁은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또한 물질적으로 불가능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생산의 공통관리와 프랑스, 독일 그리고 다른 참여국가의 결정권을 이어줄 새로운 고등기관(High Authority)의 설립을 통해, 이 제안은 평화 보존에 없어서는 안될 유럽연방의 구체적이고 근본적인 토대를 마련해줄 것입니다. 슈만 선언, 프랑스 외무부장관, 1950년 5월 9일.

p.221 자료2. 영국신문지 펀치(Punch)가 바라본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 1950년. [스캔] 1. 그림에 소개된 두 인물은 누구인가? 2. 펀치는 어떤 시각으로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를 평가하고있나?

자료3. ‘평화와 자유’ 포스터, 1950년.

자료4. 유럽의 아버지. 좌부터. 알치데 데가스페리(이탈리아), 콘라드 아데나워(독일), 로베르 슈만(프랑스).

자료5. 쟝 모네와 유럽

1946년, 나는 국가적 역량의 한계를 어렴풋이 느꼈다. 프랑스인들은 이웃국가 없이 혼자서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웃국가 또한 그들의 시장이 얼마나 협소한지 깨닫고 한계에 부딪치려던 참이었다. 우리 프랑스의 제철업은 독일산 코크스 배달량에 의해 좌지우지 될까? 훗날 우리 프랑스의 농업은 유럽 수입업체들의 변덕에 휘둘릴까? 이처럼 프랑스의 기업가들은 보호무역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려 하였다[...].

나와 같은 경우,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행동은 과거의 실수에서 새로운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시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프랑스가 독일 산업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다면, 유럽 통일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제거될 것이다. 이는 프랑스 산업의 출발점을 독일 산업의 출발점과 같은 선상에 위치시킬 것이며 프랑스 산업을 패배의식에서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유럽에게 반드시 필요한 화합의 경제적, 정치적 조건을 재정립시킬 것이다. 나아가 이는 유럽 통일의 요인이 될 것이다. 쟝 모네, 회고록, 파아아르 출판사, 1989. 1. 왜 유럽의 통일이 필요한가? 2. 쟝 모네가 결국 구상하는 해법은 무엇인가?

자료6. 기 몰레와 유럽 우리의 정신상태는 ‘중립주의’의 환상과 적게든 많든 관련된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져 있다. 우리는 현세에서, 중립국은 잠재적 공격자들의 먹잇감이 된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자유로운 세상의 수호와 구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물질적으로, 도덕적으로 필수적인 일이다. 위성국도 중립국도 아닌 충실하고 자주적인 동맹국만이 우리의 유일한 원칙이다[...]. 영국도 프랑스도, 서유럽 민주주의 체제의 어떤 국가도 미국에 맞설 충분한 힘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공동 안보체제의 진정한 목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을 막는 것이다. 누가 미국에 견주어 이 같은 발언을 할 수 있는가? 누가 유럽의 중립성이 아닌 유럽에게 꼭 필요한 자주성을 보장해줄 것인가? 하나된 유럽 아니겠는가? 기 몰레에 관한 기사, '하나된 유럽. 왜? 어떻게?', 1953년 1월.

p.222 자료집

실패로 돌아온 유럽 방위 공동체 • 냉전중인 1950년 9월, 서유럽이 소련군의 공격을 우려하는 와중에 트루먼 미대통령은 독일군의 재무장을 제안한다. 나토 회원국 중 프랑스만이 반대의사를 표시한다. 르네 플레방 프랑스 수상은 유럽석탄철공 공동체의 규범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한다. 나토군 참모부의 지휘하에 배치된 서독군을 포함한 10만명의 유럽 합동군을 창설하자는 것이다. • 이 제안은 1952년 5월 27일, 유럽방위공동체 설립 추진을 위한 파리조약으로 이어진다. 하원의 비준이 남은 상황에서, 파리조약은 여러 반대의견에 부딪쳐 결국 기각되고 만다.

자료1. 유럽 방위 공동체 조약 서명, 1952년 5월 27일, 파리에서.[스캔] 좌부터: 1. 콘라드 아데나워(서독), 2. 폴 판 젤란트(벨기에), 3. 로베르 슈망(프랑스), 4. 알치데 데가스페리(이탈리아), 5. 조셉 벡(룩셈부르크), 6. 디르크 스티커(네덜란다).

자료2. 드골과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유럽 방위 공동체 a. 이 프로젝트는 진실과 동떨어진 네 가지 주장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람들은 유럽군을 창설한다고 한다. 헌데 이는 실제로 유럽군이라 할 수 없다. 또한 프랑스의 자주권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프랑스에 대한 미국의 협력이 보장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조약에는 프랑스 보호보장과 관련된 내용은 찾아 볼 수 없으며 우리 프랑스를 미군의 지휘하에 종속시키기만 할 뿐이다. 한편 G6의 공동 방위, 특히 우리 프랑스의 방위를 책임질 수 있는 초국가적 공동체를 설립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본질적이고 구성적인 측면을 고려해본다면 이 공동체들은 절대로 유럽의 공동 방위를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끝으로 독일의 군사력 재건을 억제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 독일을 재무장 시키지 않으면서도 독일인들에게 총기를 다시 쥐어주는 자칭 유럽군사조약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이 조약은 미국의 최근 정책과 맞물려 독일에게 군사적, 정치적 주도권을 직접적으로 쥐어줄 것이 확실하다. 드골 장군의 기자회견, 1953년 2월 25일.

b. 프랑스는 유럽 방위 공동체에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반세기 동안 우리 나라를 두 번이나 공격한 군국주의자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서독이다. 그 어떠한 방식이라도 서독의 재무장은 유럽의 한 가운데에 전쟁의 위험을 다시 불지피고 프랑스와 평화에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이다. 프랑스 국민은 유럽 방위 공동체와 더불어 독일 국방군의 모든 형태의 재무장에 반대할 것이다. 에티엔 파종, 뤼마니떼(L’Humanité), 1954년 8월 24일.

자료3. 르네 플레방이 말하는 유럽 방위 공동체? 프랑스 정부는 공동 방위와 같은 매우 민감한 문제가 다루어지기 전에, 유럽석탄철강 공동체의 설립을 통해, 사람들이 유럽 공동체에 대한 개념에 익숙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유럽 국민 모두에 대한 집단 안전 보장의 필요성을 느낀 우리 정부는 안보문제를 석탄철강 공동체 설립 때와 같은 방식과 같은 정신으로 다룰 것입니다[...]. 우리 정부는 통일된 유럽의 정치 기관에 부속될 공동 방위를 목적으로 하는 유럽연합군 창설을 제안합니다[...]. 이전 방식과도 같은 단순한 동맹관계로 맺어진 유럽 연합군의 설립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유럽 국적을 가진 병사들로 이루어질 연합군은 정치•군사적으로 하나된 유럽당국의 산하에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인적, 물질적 융합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회원국의 정부는 국방 장관을 선출할 것입니다. 유럽국방 장관은 각 국가의 국방부 장관과 동등한 힘을 쥐게 될 것입니다. 르네 플레방, 프랑스 수상, 하원 연설 중, 1950년.

p.223 자료4. 유럽 방위 공동체에 대한 시선을 담은 프랑스 공산당의 포스터, 1954년. 위험! 파리 조약은 독일 국방군을 부활시킬 것입니다 여러분의 당선자에게 거부권을 요구하십시오 프랑스 공산당.

자료5. 유럽 방위 공동체, 1952년. 제 9조항. 공식 명칭이 ‘유럽 방위 공동체’인 유럽 공동체의 군대는 현 조약의 요건에 부응할 목적으로 각 회원국이 소집한 징집병으로 구성된다.

자료6. 외신의 반응 a. 프랑스 하원의 결정은 프랑스 이웃국가들이 기대했던 군사•정치•경제적으로 통합된 자유로운 유럽에 대한 희망을 소멸시켜버렸다. 폴크스크란트(Volkskrant), 네덜란드 신문, 1954년 8월 31일.

b. 프랑스의 유럽 방위 공동체 거부는 슬픈 소식이 아닐 수 없다. [...] 벨기에, 독일,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등 유럽 방위 공동체의 잠재적 회원국은 모두 파리 조약을 비준화했다. 다섯 번째 나라인 이탈리아도 비준화 직전의 단계에 있었다. 한편 영국과 미국은 유럽 방위 공동체와 협력에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프랑스는 이같이 일방적인 결정으로 인해 잠재적 파트너 국가들과 동떨어지게 되었다.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무장관, 1954년 9월 2일. 자료7. 프랑스 하원의 유럽 방위 공동체에 대한 의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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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자료3과 자료5를 참조하여 유럽 방위 공동체의 구성에 대해 설명하시오. 2. 드골 장군과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을 소개하시오 (자료2). 3. 이 포스터에 나타난 주장은 무엇인가(자료4)? 4. 자료6에 따르면 프랑스가 유럽 방위 공동체를 반대한 것에 따른 결과는 무엇인가? B. 각 자료 정보들 사이 연관 짓기 5. 1954년 8월 30일 투표에서 나타난 찬반 대립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자료들은 무엇인가(자료7)? C. 작문 6. 유럽 방위 공동체의 찬성자와 반대자의 주장을 나타내는 글을 쓰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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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럽경제공동체 A. 로마 조약으로부터 출범한 유럽경제공동체 자료2 ■ 유럽방위공동체의 기각으로 인해 유럽 통합은 군사적 측면에서 실패를 맛보았다. 그러자 유럽 지도자들은 경제 분야로 시선을 돌렸다. 1955년 6월 유럽석탄철강 공동체의 6개 회원국은 유럽공동시장 설립을 결정한다. ■ 1957년 3월 로마조약의 체결로 유럽경제공동체가 출범한다. 로마조약은 경제협력, 관세철폐, 대외 공통관세 설정을 목표로 삼는다. 로마 조약은 유럽 원자력 공동체 출범에 바탕이 될 두 번째 조약으로 보완된다. 유럽경제공동체와 관련된 사안은 만장일치로 결의하기 때문에 설립된 이와 같은 유럽 공동체는 각 회원국의 주권을 보장한다.

B. 새로운 회원국의 합류로 커나가는 공동체 자료1, 3 ■ 1960년대 들어 유럽경제공동체가 높은 경제성장을 이룸에 따라 공동체에 합류하려는 국가들이 늘어난다. 그러나 영국 측이 문제가 된다. 유럽경제공동체의 초국가적 특성에 반발한 영국은 1959년에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포르투갈, 스위스, 오스트리아와 함께 경쟁 공동체인 유럽자유무역연합을 설립한다. ■ 지리학적으로 통합이 불가능한 유럽자유무역연합이 유럽경제공동체와 효율적인 경쟁을 펼칠 수 없자 영국은 1961년에 유럽경제공동체 가입을 신청하며 노선을 변경한다. 한편 영국을 미국의 ‘트로이 목마’로 지목하고 영국의 코먼웰스에 대한 편애를 비판한 드골은 1963년과 1967년 두 차례에 걸쳐 영국의 가입승인에 거부권을 행사한다. 영국은 1973년이 되어서야 아일랜드, 덴마크와 함께 유럽경제공동체에 합류한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지중해 근방의 세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를 되찾는다. 1974년 그리스에서는 군사독재정부가 몰락한다. 1939년부터 집권한 프랑코 장군의 사망 후 스페인은 1975년에, 포르투갈은 살라잘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혁명 후 1974년에 민주주의를 되찾는다. 민주주의 체제는 유럽경제공동체 가입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으며, 1981년에는 그리스가, 1986년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공동체와 함께하게 된다.

C. 산화기관으로부터 기반을 다져가는 공동체 자료4, 5, 6 ■ 1970년대 들어 유럽경제공동체는 변화를 겪는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유럽경제공동체, 유럽원자력공동체의 행정부는 단일 이사회와 위원회로 융합되고 1979년부터는 직접 보통선거에 의해 유럽의회 의원이 선출되기 시작했다. 또한 유럽의회는 1986년부터 입법과 예산분야에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된다. 한편 1985년 채결된 솅겐조약은 유럽 회원국가간 자유로운 인적 교류를 위해 국경철폐를 선언한다. 7개국과 출발한 이 협정은 1996년에 비준화된다. ■ 유럽은 1975년 66개의 아프리카, 중앙 아메리카, 오세아니아의 국가와 로메협정을 체결하며 또 하나의 협력을 도모한다. 1986년 유럽통합법은 3억 7천만 유럽국민으로 구성된 단일시장 구축을 마련한다. ■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유럽대륙에 지각변동을 일으킨다. 독일이 통일됨과 함께 구동독이 유럽경제공동체에 합류한다. 철의 장막이 걷힌 후, 유럽의 지도자들은 독일이 유럽 통일에는 소홀한 채 접근이 용이한 중앙 유럽에만 관심을 쏟지 않을까 우려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중부 유럽 (Mitteleuropa)’은 1945년 전까지 독일에게 문화•경제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받은 지역이었다. 유럽은 위와 같은 새로운 과제를 안고 1990년대를 맞이한다.


어휘 Marché commun(공동시장): 1992년 마스트리히트조약이 정식으로 조인되어 유럽연합으로 변화하기 전까지의 유럽경제공통체를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된 용어. Commonwealth(커먼웰스): 대영제국의 일부이던 국가들로 구성된 조직. 커먼웰스 내 국가들은 일종의 연대감을 공유한다. 각 국가는 자치 국가이거나 영국 왕실에 충성을 맹세했다. 오늘날 50개 국가가 커먼웰스를 구성하고 있다. Accord de Schengen(솅겐조약): 1985년 채결된 자유로운 왕래 지역, 즉 ‘솅겐지역’의 경계를 정하는 조약. ‘솅겐지역’에 속한 지역 국경에서 여권 검사는 출국 시에만 이루어진다. 자료1. 드골과 영국의 가입. 1963년 2월 7일 프랑스 수아(France Soir)지에 기재된 커밍스의 커리커쳐. 1. 이 그림을 어떤 요소에 의해 커리커쳐라 할 수 있나? 2. 이 그림이 내포한 의미는?

p.225 자료2. 1972년, 통일사회당의 포스터. 통일사회당은 1972년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 가입에 대한 국민투표 보이콧을 촉구한다. 포스터 문구: 고용주들의 유럽에 반대 노동자들의 유럽을 위해 4월 23일: 보이콧

자료3. 드골과 아데노어, 독일에서. 1962년 9월 6일.

자료4. 선택의 기로에 놓인 유럽

3억 2천만명의 소비자로 구성된 이 거대한 시장을 단일화하기 위해서는 모든 회원국들이 각종 장벽 철폐, 규제 조정, 상호 입법, 세무구조의 이견 조정, 통화협력 등에 대해 서로 동의해야 한다[...]. 과거의 교훈을 바탕으로 삼는다면 우리의 꿈은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 국경 철폐와 관련해서는 관세장벽철폐가 머릿속에 바로 떠오른다. 관세장벽은 유럽 시장 단일화의 명백한 걸림돌이다. 관세장벽의 철폐는 유럽의 진정한 공동시장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유럽은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결단과 결의로 전진하는 길과 초라한 과거로 후퇴하는 길뿐이다. 우리에겐 경제통합 완성에 매달리는 방법과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려는 정치적 의지 부족으로 모든걸 단념하여 유럽이 단순한 자유무역 지대가 되도록 내버려 두는 방법이 있다. 쟈크 들로르 (유럽 집행위원회 위원장, 1985년 – 1994년), 공동시장의 완성. 들로르 백서, 1985년 6월. 1. 쟈크 들로르는 ‘진정한 공동시장’과 ‘단순한 자유무역 지대’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두는가? 2. 자크 들로르의 제안은 1986년에 어떻게 구체화 되었는가?


자료5. 1987년 1월 19일 쟝피에르 슈벤망의 연설문

저는 프랑스 정계에서 애국심을 강하게 드러내는 정치인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저는 동시에 열렬한 유럽인입니다. 유럽에서 모순을 발견하려면 우리 유럽의 역사를 잘못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회통념과 반대로, 저는 각 유럽국가가 독창적이고 심도 있는 가장 고귀한 꿈을 실현 중이라고 믿습니다[...].

독일이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대규모 상공업 활성화의 결실을 맺는 것도, 자립과 안보를 되찾아 중앙 유럽 지역에서 독일 원래의 역할을 되찾는 일도 모두 유럽을 통해서 아니겠습니까? 독일이 또 다른 유럽, 우리의 이웃인 동유럽과 유용하게 소통하는 것도 유럽의 힘, 유럽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 대영제국이 물러가고 영국은 유럽을 택했습니다. 그러면서 영국은 새로운 목표, 새로운 믿음과 희망의 근거를 찾았을 것입니다. 영국은 국가의 역할 뿐만 아니라 영국 국민 모두의 역할을 재정립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유럽이 우리에게 어떠한 기여를 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 그렇습니다. 각자의 모국에 향한 애국심과 유럽을 건설하려는 의지 사이에 모순이란 없습니다. 조레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그만 국제주의는 조국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만 거대한 국제주의는 조국으로 끌어온다.” 저는 기꺼이 말할 수 있습니다. 조그만 애국주의가 유럽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각자의 정체성을 지키고 자립을 갈망하며 쇠퇴를 거부하려는 애국정신으로 유럽에 다가가야 합니다. 쟝피에르 슈벤망, 전 사회주의 장관 연설문의 결론부. 1987년 1월 19일, 스트라스부르그 < 제국에 맞선 유럽 (Europe in front of empires) > 심포지엄에서.

p.226 자료집

유럽공동체의 기관 • 로마 조약 체결 후 회원국의 수가 6개에서 12개국가로 확대됨과 동시에 유럽공동체의 기관들은 점차적으로 진화하고 발전한다. 1990년대 초, 이 기관들은 어떻게 역할을 수행하는가?

자료1. 1992년 12개 회원국의 유럽 / 유럽 G12 [지도 스캔]

자료2. 감수가 필요한 유럽공동체의 기관들 오늘날 로마 조약에서 규정된 유럽공동체의 기관들은 그들의 역할을 더 이상 충실히 이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유럽 공동체 내에서 중요한 결정권을 쥐고 있던 외무장관이사회는 영향력을 잃었습니다. 먼저 이사회가 세분화되어 외무장관이사회의 조정자 역할이 축소되었습니다. 또 지난 몇 년간 유럽 이사회가 유럽 공동체와 관련된 모든 사안을 관리하는 결정기관 역할을 이행해온 이유도 있습니다. 한편 유럽위원회는 제안권 축소로 인해 공신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유럽위원회는 외무장관이사회의 제국주의 앞에서 제안권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힘을 응집해야 할 순간에 분산되기도 했습니다[...]. 그토록 공을 들여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된 유럽의회는 의회가 유럽 국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해줄 것이라 믿었던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유럽의회의 권한이 제한적이거나 애매모호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특히 유럽의회는 예산부분에 있어 이미 커다란 권한을 쥐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럽의회는 우리 유럽 국가들이 겪어온 힘든 시기에 분별없는 지출 성향을 보였습니다. 결국은 회원국들의 예산에서 지출하는 것이죠. 로마조약과는 별개로 자립적인 유럽이사회는 그 어떤 제안권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유럽이사회는 갈수록 많은 기술적인 문제에 발목이 잡혀있습니다. 연간 3차례 열리는 회의에서 각국과 정부 지도자들은 36시간 동안 기술자가 되어보지만 역부족입니다. 레몽 바르, 낭시 유럽센터에서 강연, 1984년 5월 10일.

p.227 자료3. 1992년 유럽의회 구성 [스캔]. 각 당원들의 자리는 나라별이 아닌 정치성향(우파-좌파)별로 배치된다. 의원 518명 (1994년에는 567명)

자료4. 1992년 유럽 기관들의 운영 [스캔]

자료5. 1984년 퐁텐블로 유럽 정상회담. 1984년 6월 26일. 플랑튀의 그림. 유럽 정상회담에서는 유럽 여권이 신설되었으며 영국이 유럽공동체에 지불한 예산에 대한 환급금 보장조항을 얻어냈다.

자료6. 누가 받으실래요? 세르게이의 그림, 2001년 4월 16일.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영국은 왜 1973년이 되어서야 유럽공동체에 가입할 수 있었나?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의 가입 승인을 가능하게 한 사건은 무엇인가? (자료1) 2. 유럽의회 위원들의 자리는 어떻게 배치되나? (자료3) 3. 유럽경제공동체 회원국은 어떤 조건하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가? (자료4를 참조하시오) 4. 그림 속 인물들은 누구인가(자료5)? 좌측과 우측 인물들의 제스처의 의미를 설명하시오.

B. 각 자료 정보들 사이 연관 짓기 5. 자료2를 참고하여 자료4에 나타나지 않은 유럽의회의 기능을 설명하시오. 이 기능을 그림4의 어느 부분에 배치할 수 있는가? 6. 자료2, 자료5, 자료6에서 비판한 유럽 기관들의 기능장애 요소들은 무엇인가?

C. 작문 7. 유럽 공동체의 의결 과정을 설명하고 그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제한사항을 나타내는 글을 쓰시오.


p.228 복습자료

필수암기연도 1951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설립 1954년: 유럽방위공동체 무산 1957년: 로마조약, 유럽경제공동체 설립 1973년: 덴마크, 아일랜드, 영국 가입 1981년: 그리스 가입 1985년: 솅겐조약 1986년: 스페인, 포르투갈 가입 및 유럽통합법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 1990년: 독일통일

필수암기약자 ECSC: 유럽석탄철강공동체 EEC: 유럽경제공동체 EU: 유럽연합


인물정보

쟝 모네 (1888 – 1979),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초대 의장 로베르 슈만 (1886 – 1963), 프랑스 외무부장관 콘라드 아데나워 (1876 – 1967), 1949년부터 1963년 까지 서독의 초대 총리

필수 1. 유럽 건설 초기 ■ 1945년 후, 윈스턴 처칠은 아리스티드 브리앙의 ‘유럽합중국’건립 구상을 차용한다. 처칠의 호소는 긍정적인 반응을 이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유럽 대다수 국가에서 유럽 통합에 매우 호의적인 기독교 민주당의 집권 - 국수주의 세력의 몰락 - 소련군 공격에 대한 우려 - 경제 분야에서 협력 필요성 인지 ■ 초국가주의자, 연방주의자, 드골지지파, 사회주의자, 범대서양주의자 간 의견 대립. 성공요소: 1951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설립 실패요소: 프랑스의 반대로 유럽방위공동체 무산. 유럽방위공동체는 독일군의 재무장을 허용할 수 있었음.

2. 유럽경제공동체: EEC ■ 1957년: 로마 조약으로부터 공동 시장 또는 유럽경제공동체 설립. G6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Europe of Six) ■ 신규 회원국. 6개국에서 12개국으로 확대. 1973년: 영국, 아일랜드, 덴마크. 1981년: 그리스. 1986년: 스페인, 포르투갈. ■ 유럽 통합의 길은 성장세로: 1986년, 유럽통합법. 솅겐조약 (국경 없는 시장) 혼동하지 않기 유럽평의회와 유럽이사회 두 기관 모두 스트라스부르그에 소재지가 있다. -> 1949년에 설립된 유럽평의회에는 유럽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속해있다. 유럽평의회는 유럽경제공동체 설립 이전부터 유럽의 미래와 관련된 문제들을 유럽인들이 함께 다루도록 이끄는데 공헌했다. 하지만 유럽평의회의는 어디까지나 자문위원회다. 유럽평의회의 주요 업적으로는 유립인권보호조약 제정 (1950년) 및 유럽인권재판소 설립이 있다. ->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유럽이사회는 유럽경제공동체의 심장과도 같은 기관이다.

유럽경제공동체, 유럽자유무역연합, 유럽연합 -> 유럽경제공동체에는 1957년에 로마 조약에 체결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6개 국가가 있다. (G6) -> 유럽자유무역연합은 1959년 유럽경제공동체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영국, 포르투갈,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7개국이 창립 회원국이었다. 오늘날 아이슬란드, 스위스, 리히덴슈타인, 노르웨이를 제외한 국가들은 유럽경제공동체에 합류했다. -> 유럽경제공동체는 1993년 1월 1일부터 유럽연합으로 거듭난다.

p.229 사료해설

주제: 로마조약 (1957년 3월 25일)

더욱 긴밀한 유럽 통합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유럽분열을 초래하는 장벽을 철폐하여 사회, 경제적 발전을 공동으로 도모하며, […] 공동 상업 정책을 통해 국가교류에 존재하는 규제완화에 기여하고, 유럽과 세계를 융합하며 그들의 번영과 발전을 희망하며, 국제 연합 헌장을 준수하고, 이 공동체 설립을 바탕으로 평화와 자유 수호를 공고히 한다는 결의와 더불어 뜻을 함께하는 기타 유럽 국민들에게 호소하며 […] (전권사절을 뜻한다), 벨기에 국왕, 독일 연방 공화국 총리,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 룩셈부르크 대공비 전하, 네덜란드 왕비는 아래 조항에 합의한다.

제 1조. 체결국은 본 조약을 통해 유럽 경제 공동체를 창설한다.

제 2조. 유럽 경제 공동체는 공동 시장 설립과 각 회원국 경제 정책의 점진적 접근을 바탕으로 공동체 내 조화로운 경제활동 발전, 지속적이고 균형적인 시장 확대, 안정성 제고, 민생수준 향상 및 회원국간 유대감 강화를 도모한다.

제 3조. 이전 조항에 명시된 사항 중 유럽 경제 공동체는 아래와 같이 허용한다. 1항. 역내 관세 철폐 및 출입국시 재화 수량제한 철폐. 2항. 대외 공통관세 및 상업정책 설정. 3항. 역내 인력, 용역, 자본의 자유로운 유동을 위한 장애요소 타파. 4항. 농업 분야 내 공동 정책 수립. 5항. 교통 분야 내 공동 정책 수립. 6항. 경쟁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제도.

문제 1. 로마조약 체결 당시 유럽 및 세계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시오. 2. 체결국의 목적은 무엇인가? 목적달성을 위한 구상은? 3. 이 조약이 서유럽 국가들에 의해 체결되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4. 로마조약을 통해 유럽 통합이 재활성화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이유는?

문제해법 A. 개괄적 힌트 위 문서는 유럽 공동체 설립에 관한 문서다. 이 문서는 성공과 실패여부를 떠나 유럽인들의 노력을 증언한다. 로마조약을 역사적 배경에서 살펴 보려면 다음을 고려해야 한다: ∙ 유럽 내: 유럽방위공동체 무산. ∙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 고려하기. 인도차이나는 1954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고 같은 해 알제리 전쟁이 발발한다. 또한 프랑스와 영국은 수에즈 운하 운영권을 상실한다.

B. 답변힌트 문제2: 체결국의 목적은 전문에 서술되어있다. 작성자는 누구인가? 문제3: 서유럽 국가들의 정치∙경제적 구상의 특징을 나타내는 표현을 전문과 조항에서 찾으시오. 문제4: 유럽석탄철공공동체 설립의 바탕이 된 조약의 조항과 로마조약의 조약을 비교하시오. 조약에서 구상한 유럽이 상업자의 유럽이라는 것을 나타내시오.

C. 예시답변 문제3: 이 조약이 서유럽 국가들에 의해 체결되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6개 체결국은 서유럽 국가들이다. 마샬플랜의 도움을 받았으며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들이다. 모두 자유의 가치에 중점을 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다 (“평화와 자유 수호를 공고히 한다는 결의와~”). 자유경제국가인 체결국들은 미국과 더불어 자유로운 교류가 번영의 씨앗이라고 믿는다(“국가교류에 존재하는 규제완화에 기여하고~”). 또한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강력한 국가자본주의국가임에도 체결국들은 자유로운 경쟁을 지지한다(“경쟁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제도”).

p.230 전체자료 연구 (15/17) 주제: 1945년과 1990년 사이 독일은 어떠한 변화를 겪는가?

문제 1부 1. 1945년 독일의 상황은 어떠한가 (자료1)? 2. 분단된 두 독일은 어떻게 대립하나 (자료1, 3, 4)? 3. 레이건 대통령에게 베를린이란 무엇을 의미하나 (자료4)? 그가 언급 하는 다른 연설문은 무엇인가? 4.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Ostpolitik)의 의의는? 5.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나 (자료5)?

2부 학생은 첫 번째 부분의 답변과 본인 지식을 동원하여 주제질문에 나타난 문제제기에 답하는 글을 작성하시오.

연표 1945: 독일 네 지역으로 분단 1948년 6월 – 1949년 5월: 베를린 봉쇄 1949: 서독과 동독 건국 1955: 서독 북대서양조약기구 조인 1961: 베를린 장벽 설치 1970: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 바르샤바 게토 투사들 추모 1973: 두 독일 UN 합류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 붕괴 1990년: 독일 통일

자료1. 1945년부터 1991년까지의 독일 [스캔]

자료2. 동방정책(Ostpolitik) 1966년 외무부 기획실 실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나는 독일통일을 실현시킬 조건을 구상했다. 나는 사람들이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바랄 때 그에게 다가가야지 등을 돌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전 까지 두 독일간에는 어떠한 교류도 없었다. 우리는 이 금기를 깼다. 기독교민주연합은 동독을 한 국가가 아닌 하나의 ‘현상’으로 여겼다. 그랬기에 동독을 인정하고 양국관계뿐만 아니라 기타 동유럽국가들과의 관계를 정상화 시켜야만 했다. 또한 동맹국들과의 안보적인 측면을 고려해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국경선을 인정해야만 했다. 두 독일의 통일이 이미 정해진 국경 내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은 당연했다. 동부 지방의 포기는 통일 조건의 일부였다. 우리에게 동독을 인정하는 동방정책이란 통일의 시발점이었다. 우리는 두 독일 사이에서 우리 민족의 자양분을 지키려고 했다. 한편 우리의 또 다른 목표는 이 정상화를 통해 가능해진 양국간의 왕래를 통해 서독의 정보와 소식을 동독으로 도달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공통된 소속감을 고양할 수 있었다. 에곤 바르, 빌리 브란트 총리 자문관, 사회민주당, <역사>, 2004년 4월.

p.231 자료3. 소비에트 봉쇄와 마주친 서독. 1948년 6월 – 1949년 5월. 딕 스펜서의 커리커쳐, 1948년.

자료4 1987년, 베를린에서 레이건 대통령. 고르바초프 서기장, 평화를 원한다면, 소련과 동유럽의 번영을 원한다면, 자유화를 원한다면, 이 문으로 오시오! 고르바초프 선생, 이 문을 여시오! 고르바초프 선생, 이 장벽을 무너뜨리시오[…] 그렇습니다[…], 유럽 전역에서 이 장벽이 무너질 것입니다. 믿음을 이길 수 없고, 진실을 이길 수 없고, 자유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 보다 먼저 이 곳에 왔던 수많은 미국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오늘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든 ‘베를린에 가방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Ich hab noch einen koffer in Berlin"). 내 뒤로는 이 도시의 자유로운 부분을 둘러싼 장벽이 서 있으며, 이는 유럽대륙 전체를 둘로 나누는 거대한 장벽의 일부입니다. 이 장벽은 발트해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내려와 가시 철조망, 콘크리트, 순찰견, 초소 등으로 독일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미대통령, 베를린 브랑데부르문 앞에서 연설, 1987년 6월 12일.

자료5.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개방.

문제해법 A. 개괄적 힌트

문제2 분단된 두 독일의 서로 다른 정치, 경제, 사회정책을 나타내시오.

문제3 베를린의 특수한 상황을 분석하시오. 베를린관 연관된 냉전의 급변을 떠올리시오. “나 보다 먼저 이 곳에 왔던 수많은 미국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이 문장은 1963년 베를린을 방문했던 케네디 대통령을 암시한다 (p.80 자료3). 비슷한 단어와 표현을 찾아내시오: - 케네디: “자유로운 세계”, “베를린으로 오시오” - 레이건: “자유”, “이 문으로 오시오” 또한 독일어 사용을 찾아내시오. 한편 역사적 배경의 변화에도 주목하시오. 케네디가 방어적 자세(장벽으로부터 서독의 자유 수호 주문)였다면 레이건은 공격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 장벽이 무너질 것입니다.”

문제5 본인의 지식을 바탕으로 통일이 독일 국내외에 미친 결과를 나타내시오.

B. 답변힌트 독일의 근대사에 중요한 사건을 재배치해보시오: 1. 유럽 통합의 맥락에서. 2. 국제 관계의 맥락에서: - 제 2차 세계 대전 종전과 그에 따른 결과 (얄타, 포츠담) - 냉전

제 12 장: '민중민주주의'

p.232 1944년과 1945년부터 스탈린의 붉은 군대는 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동유럽 국가들을 장악한다. 40년이 넘도록 ‘큰형’ 소련의 정치∙경제 정책과 이데올로기 도입을 강요 받은 ‘민중민주주의’ 국가들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의 위성국가로 여겨진다. 1950년부터 1970년대까지 시위와 폭동으로 이루어진 개혁시도들이 실패하며 가혹한 탄압이 뒤따른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 예상치 못한 상황이 전개된다. ‘민중민주주의’국가들이 흔들리고 몇 주 만에 몰락하고 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민중민주주의’는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했는가? 민중민주주의는 왜 빠르게 사라졌는가?

자료1. 중앙 유럽과, 동유럽. 감금과… 베를린 장벽 건설, 1961년 8월… “국민은 정부의 신용을 배신했다. 신용을 다시 얻기 위해서는 두 배로 일해야만 할 것이다. 정부가 이 국민들을 해체하고 다른 이들로 대체했으면 더 간단하지 않았을까?” 동독에 거주하던 독일 시인,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출간되지 않은 시에서 발췌. 1953년, 동베를린 봉기 후.

p.233 [스캔] 자료2. 해방 시도. 1968년, 프라하의 봄 진압: 체코의 젊은이들이 붉은군대에 평화적으로 맞서고 있다. “그토록 추악한 파시스트 정권은 독재자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 때서야 국민들은 희망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함 소련이[…] 이끄는 공산주의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독재는 일시적이지만 소련은 영원한 듯하다. 우리 나라에는 일련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밀란 쿤데라, 체코 작가, <무명>, 가이마르 출판사, 2003.

p. 234 1) 공산당 지배 하에 동유럽 A. 민주주의적 절차로 보이지만… 자료1,3 ■ 제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소련군은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동독 등을 포함한 중앙 유럽을 차지한다. 소련군은 나치와 나치 동맹군을 물리친 해방군처럼 보였다. 초기에 소련은 공산당에 속하지 않은 사회주의파, 중도파, 농민들에게 <국민 전선> 동맹 정부를 구성하도록 제안한다. ■ 하지만 소련 관리하에 들어간 국민 전선 동맹국들은 소련 모델을 따라 경제•사회 개혁을 실시한다. 여기엔 토지 개혁, 국영화, 의료보험, 유급 휴가 등이 포함된다. 국민들은 대부분 이러한 개혁에 호응을 보였으나 소련이 1947년 마샬 플랜 거부를 강요하자 의혹이 확산된다.

B. 점점 커지는 소련의 장악 자료2, 5, 6 ■ 공산당에 속하지 않은 당원들은 빠르게 제거당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은 각 국가의 공산당원들은 헝가리 지도자 마티아시 라코시가 명칭한 ‘살라미 전술’을 사용한다. 반대 세력의 저항을 소시지 자르듯 잘라버린다는 뜻이다. 1946년과 1947년에는 선거가 열린다. 압박, 폭력, 사기로 물든 이 조작된 선거의 결과에 따라 공산당원들이 당선된다. ■ 이러한 과정 속에 무력 항쟁도 있었다. 1948년 2월 프라하 정변이 대표적인 예다. 체코 공산당의 지휘 하에 움직이는 노동군은 베니시 대통령을 압박해 비공산당원 장관들을 면직시키고 주요 정부 직책에 공산당원을 앉혀놓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1949년 헝가리에서는 마티아시 라코시가 단일 후보 투표를 실시한다. 점점 동유럽 모든 국가들이 ‘민중민주주의’체제에 들어가게 된다. ■ 자립적인 공산당원들이 나치를 물리친 알바니아와 유고슬리비아의 경우는 특수한데 이들은 소련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 벗어나 자발적으로 공산체제를 세운다. 하지만 티토 유고슬리비아 지도자가 소련의 영향권을 지나치게 벗어났다 여긴 소련 공산당 정보국(Kominform)은 유고슬리바아를 1948년부터 정보국에서 제외시킨다.

C. 국민들의 움직임 자료4 ■ 공산당원들의 집권 후 “민중민주주의” 체제에 반발하는 이들은 무자비하게 진압당한다. 지식인, 가톨릭 신자, 구 당원 등 반공산주의자들이 억압당하고 힘없는 시민들은 지속적인 감시 아래 살인 당하거나 수용소로 보내진다. ■ 소련의 노선에 함께 하지 않는 옛 공산당 지도자들 또한 탄압받기 시작한다. 1936년과 1938년 일어난 모스크바 재판을 연상시키는 조작된 재판에서 이들은 ‘미국 제국주의 첩보원’, ‘유태민족주의자’, ‘티토주의자’ 등으로 판명되어 고발당한다. 공산당 체제 설립에 기여했음에도 불구, 라즐로 라직 헝가리 지도자와 루돌프 슬란스키 전 체코슬로바키아 사무총장은 전체주의의 희생양이 되어 처형당한다. ‘철의 장막’뒤 벌어지는 숙청은 공포의 분위기를 확산시킨다.

어휘 Démocratie populaire (민중민주주의): 공산당원들이 1947년과 1948년 중앙유럽과 동유럽에 세운 체제를 가리키기 위한 명칭. 오직 공산주의만 허용된 이 체제는 민주주의체제도 민중체제도 아니다. 공산당원들은 국민들을 통치한다는 명목으로 강력한 진압을 일삼는다.

자료1. 붉은군대 환영식 베니시 체코 대통령이 프라하에서 붉은군대의 군기를 전시 중이다. 일뤼스트라시옹 (L’Illustration )지 일면, 1945년 12월 15일.

자료2. 소련의 한 커리커쳐 작가가 표현한 티토 소련 잡지 크로코딜 (Krokodil)에 기재된 커리커쳐, 1949년 9월 20일. 뱀 그림에 새겨진 단어: ‘배반’, ‘변절’, ‘테러’, ‘스파이’.

1. 작가는 티토에게 무엇을 비방하는가?
2. 소련이 이토록 치열하게 티토를 비난하는 이유는?

p. 235 자료3. 소련과 마샬 플랜 [스캔] 두루마리 위: 북대서양 조약 가입. 포스터 하단: “인민들은 재난을 초래하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 조셉 스탈린.

1. 왼쪽 인물은 무엇을 건내려 하고 있나?
2. 건내려는 두루마리는 무엇과 연관 지을 수 있나?
3. 소련은 제안 거부를 어떻게 정당화 하는가?

자료4. 불가리아에서 일어난 처형. 전 레지스탕스이자 불가리아 농본당원의 지도자였던 니콜라이 페트코프는 1944년 <조국 전선>의 부통령이었다. 1946년 공산당원들은 모든 반발 세력을 추출하려했고 페트코프를 조작된 재판에 새운다. 지난 밤, 니콜라이 페트코프가 처형됐다. 종전 후 가장 불공정한 재판 중 하나가 이렇게 종료됐다. 니콜라이 페트코프 불가리아 농본당 지도자는 자국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평생 독재와 맞서 싸웠다. 군주정치의 적인 그는 군주 정치주의자로, 파시즘의 적인 그는 파시즘 옹호주의자로 유죄를 받았다. 애국자인 그는 ‘간첩’으로 낙인 찍혀 처형당했다. 르몽드, 1947년 9월 24일.

정의의 의미를 알고 파시즘을 증오하는 모든 이들은 이번 재판을 수긍할 것이다. 우리가 CNR 프로그램 도입(Programme du CNR), 즉 거침없는 숙청을 주장한 이들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우리는 오늘날 어떻게 되었을까? 뤼마니떼(L’Humanité), 프랑스 공산당의 일간지, 1947년 9월 25일. 1. 르몽드지에 따르면 페트코프는 어떤 맥락에서 처형됐는가? 그의 처형의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2. 뤼마니떼지는 페트코프의 처형을 어떤 식으로 정당화하는가? 무엇이 뤼마니떼지의 진영 선택에 영향을 줄 수 있었나?

자료5. 마티아스 라코시, 헝가리 공산당 지도자의 연설 올해 경제 분야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대은행과 대기업의 국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국영화가 갖는 의미는 다가올 미래에 민중민주주의체제의 경제 기반을 다지는데 있어 셀 수 없을만큼 큽니다. 이를 계기로 자본주의자들의 우리 민주국가의 경제, 정치 분야에 대한 간섭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1947년 1월 1일과 1948년 1월 1일을 비교해보십시오. 1947년 초, 나라를 주도하던 자들은 독립소지주당이었습니다. 이들은 의회의 다수파로서 독단적으로 끊임 없이 우리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협했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의 가장 큰 정당은 공산당이며 공산당은 민주주의와 가장 일치하는 수호자입니다. 봉건제로 회귀를 바라던 반동주의자들, 이 민주주의의 적들은 1947년 대패했습다. 마티아스 라코시 헝가리 공산당 지도자, 평의회 이사장의 선언문. 1948년 신년 기념일, 부다페스트에서. 1. 연사는 국영화를 어떻게 정당화하나? 2. 공산당의 적들은 어떻게 묘사되었나? 1947년 1월 1일과 1948년 1월 1일 사이 어떤 일들이 벌어졌나? 3. 헝가리 공산당을 민주주의와 가장 일치하는 수호자라고 할 수 있는가? 이유는?

자료6. 동독 공산당의 소재지, 베를린, 1950년.

p. 236

지도

'민중민주주의’의 탄생

• 1945년 붉은군대의 진격과 더불어 공산당원들은 나치 동맹국들(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와 1938년과 1939년에 나치에 점령된 국가들(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에 도달한다. 먼저 동맹 국가들은 다음과 같은 부류의 지도자를 모으기 시작한다. - 1938년과 1939년 사이 런던으로 피난한 비공산당 레지스탕스. 특히 폴란드인과 체코인들. - 비공산당원이자 반나치 정당 소속인 - 지역 공산당원. 루마니아와 같이 당원이 2천명 혹은 3천명이내 임에도 불구. • 하지만 붉은군대의 존재는 동독과 같이 동맹 정부가 없는 곳을 포함한 모든 지역에서 결정적인 요소로 남는다. • 발칸 제도에서는 반나치 왕정주의자 게릴라를 물리친 공산당 게릴라가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를 독일에서 해방시킨다. 그리스에서는 독일군을 물리친 왕정주의자 게릴라와 공산당 게릴라가 맞붙으며 1949년 공산당 게릴라가 패하고 만다. • 1945년 5월부터 1949년 말까지,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모든 중앙 유럽과 동유럽 국가들은 ‘민중민주주의’국가가 된다.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형태의 당은 금지된다. 민중민주주의 체제로 넘어간 마지막 두 국가는 1948년 ‘프라하 정변’ 이후의 체코슬로바키아와 1949년 10월 건국한 동독이다

자료1. 1945년과 1946년 공산주의의 진격. [스캔] 주석 1939년 소련 국경, 1945년 국경, 1945년 5월 8일 붉은군대 진격 반나치 레지스탕스 : 공산당, 비공산당, 소련점령, 유고슬라비아점령, 1945년 공산당 단독 집권 1946년, 공산당 동맹 정부

p. 237


자료2. 프라하 정변. 공산당원들이 장학한 정부 결성. 1948년 2월 25일, 프라하 구시가 광장. 구시가 광장: 클레멘트 고트발드 공산당 서기가 노동조합과 체코 공산당원 군중 앞에서 연설 중이다. 군무장 세력을 대동한 고트발드는 공산당이 관리하는 정부 수립을 명한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민중민주주의’국가가 되는 순간이다.

자료3. 1947년 말 ~ 1949년, 공산당의 전진. 소련과 민중민주주의 국가. [스캔]

문제 1. 공산당원들의 권력 집권을 유리하게 만든 요소는 무엇인가? 2. 1945년과 1948년, 1949년 사이에 체코슬로바키아와 그리스 정세의 특징은 무엇인가? 3. 공산주의의 동유럽 확장은 서유럽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4. 공산주의 집권의 여파로 인해 유럽은 거대한 동맹 연합에서 두 진영으로 분열되었는가? 5. 1949년 철의 장막에 속한 국가는 ? ‘민중민주주의’로 가는 과정에서 예외를 보이는 나라는 어디인가?

p. 238

2)‘민중민주주의’란?

A. 소련 경제 모델 도입 자료1 ■ 소련 진영에 속한 민중민주주의 국가들은 시장 경제를 버리고 토지 집산화, 기업국영화, 생산계획 등의 사회주의 원리를 도입한다.

■ 토지 집산화는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먼저 대지주의 부동산 압수 및 압수된 토지를 농민들에게 할당하는 토지 개혁이 시작된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국가가 할당 토지를 재통합한다. 대부분의 경우 농민들은 두 번째 단계에서 정부의 요구에 대항하였으며 폴란드와 같은 경우에는 소수의 개인 지주들이 살아남았다. 공장과 은행은 국영화되고 5년 단위로 생산량이 계획된다. 소련에서와 같이 이 계획은 재화 소비를 희생시키며 중공업에 중점을 둔다. 따라서 삶의 질이 하락함과 동시에 생필품 부족 현상이 심하게 나타났다. 더불어 노동자들에게 부여된 장시간 근무량은 노동 환경의 질을 저하시키며 노동자들의 강한 불만을 일으킨다.

B. 스탈린 시스템 도입 자료2, 3, 4

■ 소련 정부의 요구에 부합하여 ‘민중민주주의’국가는 스탈린의 명령을 따라 소련의 것과 유사한 헌법을 재정한다. 헌법에 따르면 공산당이 정부의 모든 정책을 관할한다. 공산당 서기관이 지도자 역할을 맡는다. 스탈린과 같이 서기관은 숭배 대상이 되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헝가리의 라코시와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가 있다. 전체주의 체제는 사회를 관리하고 지휘한다. 어린이들은 어린 나이 때부터 공산주의청년단으로 편성된다. 아이들은 마르크스와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진리에서 비롯된 과목들을 습득하게 된다. 한편 영화와 문학은 선전 활동에 이용된다.

■ 스탈린식 진압이 차용되기도 한다.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모델을 본뜬 정보기관들(동독의 Stasi, 헝가리의 AVH, 루마니아의 Securitate)의 협조로 각 정부는 공포의 분위기를 확산시키고 체제에 반대하는 이들을 숙청한다. 모든 표현 자유가 실종되고 시민들은 철저히 국경 안에 갇히게 된다.

C. ‘큰형’의 감시 아래 자료5, 6

■ 경제상호원조회는 1949년부터 소련과 ‘민중민주주의’국가 간의 교류를 계획하며 양측의 경제 관계를 조정한다. 이에 두 가지 결과가 따른다. 첫 째, ‘민중민주주의’국가들은 세계 시장으로부터 고립된다. 둘 째, ‘민중민주주의’국가들이 소련 ‘큰형’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구도가 만들어지며 이 국가들은 소련에 굴복하게 된다.

■ 군사와 외교 분야에서는 1955년 구성된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통한 소련의 주도권이 이어진다. 소련의 장악은 로코소프스키 소련 총사령관의 폴란드 국방부장관 임명이나 모든 행정을 관리, 감시하는 군의원 배치 등, 음양에서 이루어진다. 이 군의원들은 코민포름이 정의한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 주입 교육에도 관여할 뿐만 아니라 반세력 숙청에도 깊숙히 관여한다.

어휘

Planification(계획): 미리 세워진 계획에 따라 그 나라의 경제를 조직하는 것.

Norme(작업량): 계획 경제에서 한 명의 노동자가 생산해내야 하는 량. 작업량이 결과물의 질에 관여하지는 않는다.

Totalitaire(전체주의의): 246 페이지 ‘혼동하지 않기’ 참조.

Stasi(슈타지): 동독 국가보안부의 약자. 수십만명의 요원과 고발자를 아우르는 비밀정보기관. CAEM 또는 COMECON(경제상호원조회의): 1950년 당시 가맹국으로는 소련,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가 있으며 1962년에는 몽골, 1964년에는 유고슬라비아, 1972년에는 쿠바, 1978년에는 베트남이 합류한다.

Pacte de Varsovie(바르샤바 조약): 1955년에 결성한 정치 군사 동맹 기구. 소련과 유고슬라비아를 제외한 유럽 공산당 국가들이 결성했다.


자료1. 동독의 헌법

제 9항. 독일민주공화국 경제의 근본은 생산도구의 사회주의적 소유권에 기반한다. 독일민주공화국 경제는 사회주의의 경제법에 따라 발전한다. 사회주의 생산 반환은 여태껏 공격적인 정책으로 인해 독일 민족에게 불행만 안긴 독점적 자본주의와 싸워 이겨 확립됐다. 독점 권력과 대지주 삭제, 자본주의 이윤 청산 등은 전쟁의 원인과 인간의 인간 착취를 뿌리뽑도록 했다.

동독의 헌법, 1949년.

제 1항. 독일민주공화국은 독일민족의 사회주의 국가다. 독일민주공화국은 노동급과 마르크스 및 레닌주의자들의 지도아래 사회주의 구현에 함께 힘쓰는 도시와 농촌 노동자들의 정치당이다. 제 2항. 사회주의 사회의 견고한 틀은 노동계급, 협동조합농민계급, 지식인들, 기타 계급 간의 탄탄한 동맹, 생산도구의 사회주의적 소유권, 경제계획과 사회 발전의 과학적 관리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노동에 따라’라는 원칙이 실현될 것이다.

동독의 헌법, 1968년.

1. 동독은 어떤 형태의 경제 체제에 기반하나?
2. ‘노동계급과 사회주의당의 지도’가 무엇인지 설명하시오.

p.239

자료2. 1948년 소련의 언론 장악

편집회의는 소련 기자들의 목전에서 이루어졌고 그들은 무엇이 쓰여져야 하나 결정했다. 기자 본인이나 편집위원회에게 자문을 구하거나 동의를 얻지 않은 채 기사 내용이 수정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기자들은 본인들이 쓰지 않은 내용이 담긴 그들의 기사를 접하는 것에 불평했다. […] 100부가 먼저 인쇄되면 그들은 기계를 멈추고 사진기를 꺼냈다. 인쇄작업은 중단되고 사무실은 닫힌다. 그 날 인쇄된 신문은 몇 일 후에나 발간된다.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허가를 먼저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허가가 떨어지면 인쇄작업이 시작된다.

블라디미르 데디에, 유고슬라비아 역사가, 티토 장군의 동료, <스탈린의 패배한 싸움>, 비엔나, 1970년.

1. 언론 장악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2. 언론 검열의 최종단계에는 누가 있나?

자료3. 동독 슈타지의 병력수.

상설 병력 수에 단기적으로 협조한 요원들의 수를 추가하자면 1950년에는 2만, 1955년과 1968년 사이에는 10만, 1980년대에는 18만명이 넘는다.

[스캔] 슈타지 병사 / 슈타지 직원

1. 병력수 급상승의 원인은?
2. 슈타지의 역할은?
3. 동독 체제를 어떻게 수식할 수 있는가?

자료4. 바르샤바의 문화궁. 소련이 폴란드에 ‘증정’한 이 걸물은 1950년대 초 모스크바에 건설된 스탈린 양식 건물의 복제판이다.

자료5. 1980년대의 바르샤바 조약군.


자료6. 제한된 주권의 브레녜프(Brejnev) 주의

소련공산당은 각 민족의 특성을 고려하여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의 길 위에서 구체적인 발전 형태를 찾도록 도모해왔다. 동지들이여, 우리는 사회주의를 구성하는 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법에 벗어나는 행위는 사회주의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세력이 사회주의의 한 국가에 다가가 변절을 시도하고 자본주의를 도입시키려 한다면, 다시 말해 그 나라에 사회주의 공동체 안보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존재한다면 이 문제는 해당국가의 국민들에게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사회주의국가 모두를 아우르는 공동의 문제가 된다. 형제국으로 군사적 지원을 보내 사회주의 질서의 위협 요소를 억제시키는 일은 그 필요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특별한 조치라 할 수 있다. 군사적 대응은 사회주의 적들이 국내외 또는 사회주의 진영에 가하는 위협행위에 한해 정당화될 수 있다.

레오니드 브레녜프, 소련 공산당 서기관의 연설. 1968년 바르샤바에서.

1. 연사와 연설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시오.
2. 이 연설문에서 ‘변절’과 ‘심각한 위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연사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개입을 어떻게 정의하고 정당화 하는가?

p. 240

3) 반란과 항의

A. 베를린, 바르샤바, 부다페스트 자료2, 4

■ 1953년 스탈린의 사망, 1956년 소련 공산당 제 20차 대회에서 스탈린의 범죄 폭로, ‘사회주의로 가는 방향의 다양성’ 인정 후 소련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1953년 6월부터 베를린에서는 가격 상승과 작업량 증가에 반대하는 파업과 시위가 폭동으로까지 이어진다. 폭동은 빠르게 진압되지만 500명의 희생자가 나오고 2만 5천명이 소련 수용소로 보내진다.

■ 3년 후 폴란드에서는 반소련 폭동이 일어난다. 흐루시초프는 폴란드의 사회주의 진영 소속 보전을 조건으로 소련으로부터 자립적인 공산당 지도자 고물카에게 권력을 넘긴다.

■ 헝가리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폴란드에 자극 받은 헝가리 국민들은 1956년 10월 22일부터 24일까지 폭동을 일으킨다. 다원주의와 소련군 철수를 요구하는 그들은 스탈린파 지도자인 라코시를 몰아내고 개혁파 공산당원 임레 너지를 집권시킨다. 너지는 11월 1일 다원주의와 헝가리의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를 선언한다. 하지만 소련군은 11월 3일 군력을 동원해 사태를 뒤집어놓는다. 그 결과 2만명의 헝가리인이 사망하고 20만명이 망명한다. 임레 너지는 처형된다. 그 뒤를 이어 소련은 야노시 카다르를 헝가리 지도자로 앉히는데, 카다르는 소련의 이데올로기와 대중의 목소리 사이 타협을 찾게 된다. 바로 구야쉬 사회주의의 시작이다.

B. 베를린의 장벽부터 프라하의 봄까지 자료1, 5

■ 동독의 경우 폭동진압으로 경제적 문제까지 해결하진 못했다. 1953년과 1961년 사이 약 2백 50만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도망치게 된다. 이들은 주로 베를린을 통해 국경을 넘는데, 동독 정부는 자국인들의 ‘자본주의 지옥행’을 저지 하기 위해 1961년 8월 13일 베를린의 장벽을 건설한다.

■ 1968년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반소련 반란이 일어난다. 1968년 2부터 4월 사이, 시민들의 지지를 얻은 체코 공산당원들은 그들의 새로운 리더 알렉산더 두브체크를 필두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주창한다. 당과 정부 사이 권력 분리, 복수 정당제, 검열 폐지 등이 여기 포함된다.

■ 이것이 ‘프라하의 봄’이다. 하지만 레오니드 브레녜프 소련 지도자는 그의 제한된 주권주의를 실행에 옮긴다. 체코슬로바키아 반란의 전염을 우려한 ‘형제 국가’의 지원을 등에 업은 브레녜프는 1968년 8월 20일 보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명한다. 두브체크는 축출되고 만다. ‘프라하의 봄’의 실패는 ‘민중민주주의’체제 자립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C. 1980년대, 솔리다르노시치가 폴란드에 자료6

■ 1970년대 들어 폴란드에선 수 많은 사회 운동이 일어난다. 그단스크(Gdansk) 조선소 파업, 지식인들과 가톨릭교도들의 반발이 그 예다. 반소련 움직임은 1978년 폴란드인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이 요한 바오로 2세의 이름으로 교황에 임명되며 더욱 공고해진다. 1980년에는 파업이 연달아 일어나고 공산당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적인 노조, 연대자유노조(Solidarnosc)가 설립된다. 노조 지도자 바웬사는 노조의 독립성, 파업권, 언론 및 표현 자유 등을 인정하는 ‘그단스크 협정’ 체결을 이끈다. 추후 노동 활동의 금지와 1981년 야루젤루스키 공산당 제1 서기 장군 주도 하에 이루어진 노동 조합원 수 천명의 체포에도 불구 이 같은 움직임은 시민 사회의 생명력을 ‘민중민주주의’국가들에 불어넣는다.

어휘

‘normaliser’뒤집어 놓는다’/정상화 시킨다: 한 국가를 ‘정상’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 ‘민중민주주의’국가의 경우, 해당 국가의 정치, 경제, 치안 등의 구조를 소련의 구조에 맞추는 것을 뜻한다.

‘socialisme du goulasch’(굴라시 공산주의): 야노시 카다르가 도입한 정책. 굴라시는 헝가리인들이 좋아하는 쇠고기 스튜를 가리키는데 굴라시 공산주의는 더 유연한 경제 계획과 기업의 자립성 보장 등을 포함하여 이웃 ‘민중민주주의’국가들보다 덜 엄격하고 더욱 열린 정책을 지향한다.

Solidarnosc(연대자유노조): 바웬사가 1980년 세운 폴란드의 첫 번째 노조연합.

Societe civile(시민사회): 정치가가 아니더라도 개인이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회.

자료1. 동독 공산당원들이 말하는 베를린 장벽

8월 13일은 앞으로 항상 1961년의 일요일을 떠오르게 할 것이다. 이날 민중민족군과 동독국경부대 또 슈타지와 무장한 노동자들은 서독과 서베를린으로 부터 우리 국경을 지켰다. 우리의 주적은 수시로 동독을 무너뜨리려 한다. […] 그들은 우리의 주권과 국경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훌륭한 일꾼을 빼가고 우리의 재화와 화폐를 가로채가며 경제를 약화시키려 했다. 냉전은 정점을 찍었고 유럽 내 긴장감은 치솟고 있다. 서독 브란덴부르크에서는 군사 행렬이 벌어지기도 했다. 8월 13일은 서독의 도발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날을 빌어 우리는 유럽의 평화를 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독일은 사회주의가 더욱 번창하고 만개하도록 이끌었다.

Neues Deustschland, 동독 공산당 신문, 1961년 8월 14일.

1. 이 기사는 베를린 장벽 건설을 어떻게 정당화하는가?
2. 베를린 장벽 건설의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P. 241

자료2. 1956년 10월 ~ 11월: 라디오 전쟁

부다페스트 라디오 (radio Kossuth libre), 1956년 10월 30일, 14시 28분.

“여기는 임레 너지다. 헝가리의 노동자, 군인, 농민, 지식인들이여. 우리 정치계의 더욱 폭넓은 민주화를 위해 정부는 단일 정당 체제를 폐지했으며 연립 합동 민주화 정당에 기반한 정부체제로의 회귀를 결정했다. 임시정부는 소련 군 최고사령부에게 주 헝가리 부다페스트군의 철수를 통보했다.”

모스크바 라디오, 1956년 11월 1일.

“부르주아 프로파간다의 허위 방송이 전파된 것이 몇 번째 인가. 그들은 서방세력이 우리 민족과 국가의 자치권과 자립을 존중한다고 우기고 있다. 레닌원칙에 충실한 소련은 헝가리의 내정에 간섭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바를 밝힌다.”

부다페스트 라디오 (radio Kossuth libre), 1956년 11월 04일, 5시 19분.

“여기는 임레 너지다. 오늘 새벽 소련군은 헝가리 공화국의 합법적 정부를 뒤엎을 의도로 우리 수도를 침공했다. 우리군은 싸우고 있다. 정부는 정부의 자리를 지키는 중이다. 나는 소련의 침공을 우리나라와 전 세계에 알리는 바이다.”

위 방송은 영어, 러시아어, 헝가리어, 프랑스어로 통역되어 반복되었다.

모스크바 라디오, 같은 날, 21시 05분.

“오늘 오전 헝가리 국민들을 위협하는 모반 세력이 진압되었다. 야노시 카다르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새로운 혁명 정부를 세웠다. 이 정부는 민중 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고 반란 세력을 완전히 전멸시키기 위해 헝가리 국민들이 힘을 모아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부다페스트 라디오 (radio Kossuth libre), 1956년 11월 05일.

“정부는 헝가리를 또 한번 해방시켜준 소련 정부에 감사를 표한다.”

M. J Lasky, ‘헝가리 혁명’, 베를린, 1959년.

1. Kossuth가 누구인지 조사하시오.
2. 위 라디오 방송 전파 당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시오.
3. 부다페스트 라디오와 모스크바 라디오는 어떤 원칙과 가치에 중점을 두는가?
4. 부다페스트 라디오에서 11월 4일 오전 5시와 11월 5일 오후 9시 사이에 벌어진 사건을 재구성하시오.

자료3. 베를린 장벽의 커리커쳐.

서독의 커리커쳐 작가가 그린 발터 울브리히트, 독일사회주의통일당 제 1서. 1961년 8월.

자료4. 1956년 10월 헝가리 혁명. 스탈린 동상을 쓰러뜨리는 군중들.

자료5. 타스(주:소련 국영 통신사) 공보, 1968년 8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군사령부와 정부가 소련과 동맹국에게 체코슬로바키아 형제들을 위한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외부세력과 맞물린 반란세력의 위협으로 인해 이번 요청이 들어왔다. 그 누구도 사회주의 국가 공동체의 고리를 끊을 수 없을 것이다. Tass, 소련 국영 통신사, 1968년 8월 21일.

1. 위 공보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은 무엇인가?
2. 이 사건은 어떻게 정당화 되는가?

자료6. 폴란드 전시 상태.

1981년 12월 14일. 야루젤스키 장군이 폴란드 tv 방송에서 전시 상태를 알리고 있다.

“국민 여러분. 힘겨운 도전의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이 도전을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 자국의 주인은 우리라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국가 안보 군회의는 폴란드 전국에 전시 상태를 알리는 바입니다.”

p. 242 4)‘민중민주주의’의 종말

A. 폴란드와 헝가리의 민주화 자료1, 2, 3

■ 1989년은 ‘민중민주주의’의 종말 고한다. 이와 같은 정치적 격변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부터 소련에 가져온 변화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 정책과 더불어 반대세력의 억압이 중단된다. 폴란드와 헝가리에는 조용한 변화의 바람이 분다. 시민 사회의 지지를 받는 반공산주의 운동은 정치계의 판도를 서서히 변화시킨다.

■ 헝가리에서는 지식인층과 학생층들로 이루어진 자유 민주주의 동맹인 ‘민주주의 포럼’의 압박 끝에 공산당 정부가 1989년 5월 5일, 자유선거, 복수 정당제, 철의 장막 개방 등을 허용한다. 민주주의 절차는 빠르게 뿌리를 내린다.

■ 폴란드의 경우, 노동자, 시민사회 지식인, 천주교인들의 지지를 받는 레흐 바웬사와 솔리다르노시치 노동 조합은 파업을 통해 야루젤스키 장군으로부터 솔리다르노시치 조합 공인을 이끌어 내고 민주주의 선거 허용을 받아 낸다. 공산당원들의 선거 패배는 폴란드 공화국 대통령으로 남은 어제의 적, 야루젤스키와 솔리다르노시치 지도자 간의 권력 분립으로 이어진다. 1989년 8월 24일 솔리다르노시치 지도자들은 1945년 이후 동유럽에서 처음으로 비공산당 집권자가 된다.

B.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의 압박 자료5, 6, 7

■ 헝가리가 오스트리에게 국경을 개방한 순간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정부는 크게 흔들린다. 수 십만 명의 동독인들이 ‘철의 장막’의 틈을 통해 서독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지지가 끊긴 호네커는 개혁파 공산당원, 진보 기독교인, 지식인, 시민 사회 대표자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시위대 앞에 결국 항복한다. 호네커가 하야한 자리에 개혁파 공산당원들이 들어선다. 시위가 지속되는 가운데 이들은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을 열고 1990년 5월 6일에는 자유 선거를 선포한다. 기독교 민주당이 이끄는 정치 동맹이 자유선거를 통해 집권을 시작함과 더불어 두 독일은 더욱 가까워지게 된다. 마침내 1990년 8월 31일, 고르바초프의 동의와 함께 베를린에서는 독일 통일이 체결되었다.

■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반체제 작가 바츨라프 하벨이 설립한 시민포럼이 주도한 프라하 바츨라프(Wenceslas) 광장 대규모 시위와 파업으로 인해 공산당 체제가 일주일 만에 무너지고 공산당원의석이 소수로 이루어진 새로운 정부가 구성된다. 바로 ‘벨벳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의 영웅이자 국회의장이 된 두브체크는 1989년 12월 29일 바츨라프 하벨을 대통령으로 임명한다.

C. 루마니아와 발칸 반도에서 일어난 폭력 혁명

■ 1954년부터 불가리아 공산당을 이끈 지브코프는 유혈사태 없이 면직된다. 하지만 루마니아에서는 차우세스쿠 독재자의 과대 망상과 국가 경재의 어려운 상황들이 더욱 격렬한 상황을 불러 일으킨다. 폭력적 봉기는 차우세스쿠의 몰락과 처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반체제 세력의 결속력 부족으로 인해 혁명 이후에도 루마니아에서는 공산당 계파가 일정 기간 다시 집권한다.

■ 발칸 반도에서 일어난 공산주의의 몰락 뒤에는 유고슬라비아의 분열과 내전이 이어진다. 그 결과 유럽은 지리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맞이한다.

자료1. 자유를 찾아서. 1989년 여름, 프라하. 체코 경찰이 주프라하동독대사관을 침투하려는 한 동독일인을 붙잡고 있다.

자료2. 헝가리 시민 포럼의 포스터, 1989년 7월. 한 러시아 군인의 뒷모습. ‘Tovaritch’는 ‘동지’를 뜻한다. 그 위에 붙은 스티커에는 ‘끝이다’라고 쓰여있다.

1. 이 포스터가 헝가리에서 새로운 이유는?
2. 이 포스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 문단으로 작성하시오.

p. 243 자료3. 동유럽의 새로운 현상

오늘날 현실은 유럽의 각 국가가 서로 다른 사회 체제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의 인정과 각 나라 국민들의 자유롭게 사회 체제를 선택할 수 있는 주권 존중은 유럽의 정상화 과정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여러 나라의 사회, 정치 구성은 과거로부터 변화를 겪어 왔으며 이 같은 과정은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선택권과 결정권의 열쇠는 국민들에게 있다. 이웃나라, 동맹국 혹은 기타 모든 나라의 각 국가에 대한 내정간섭과 주권 제한 시도는 허용될 수 없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유럽 평의회에서 발언한 연설 중. 스트라스부르그. 1989년 7월 7일.

자료4. 차우세스쿠의 몰락에 환호하는 시위자들.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1989년 12월.

자료5. ‘민중민주주의’의 종말.

[스캔]. 주석: 철의 장막 / ‘민중민주주의’체제: 네모 반나치 레지스탕스의 연장선 / 별 붉은군대 주둔 / 1989년 전 봉기와 반발 / 공산당의 온화한 몰락 / 유혈사태를 일으킨 전쟁 혹은 혁명

자료6. 1989년의 연표

- 2월 11일: 헝가리 공산당이 복수 정당제를 허용한다.

- 5월 2일: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국경선의 ‘철의 장막’을 해체한다.

- 6월 18일: 폴란드, 솔리다르노시치 조합의 선거 승리.

- 8월 24일: 폴란드, 첫 비공산당 정부.

- 9월 10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간 국경개방. 헝가리를 통한 동독일인들의 탈출.

- 11월 4일: 동베를린과 동독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다.

- 11월 9일: 베를린의 장벽 붕괴.

- 11월 10일: 1954년부터 불가리아를 집권한 지브코프가 물러난다.

- 11월 17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공산당 붕괴.

- 12월 22일: 루마니아 공산당 독제자 차우세스쿠의 몰락.


자료7. 에필로그

a. 1990년 9월 12일, 2 + 4 조약.

제 1조.

통일된 독일 영토에는 독일 연방 공화국, 독일 민주공화국 및 베를린 전체가 포함된다. 통일된 독일의 국경선은 독일 연방 공화국과 독일 민주공화국의 국경선이다.

1990년 9월 12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4개국과 동,서 독일 사이에서 체결한 2 + 4 조약.

b. 지난 세기 중앙 유럽과 동유럽을 장악하고 오늘 날 아직까지도 세계 다수의 국가에 자리 잡은 공산당 전체주의 체제는 예외 없이 거대 인권 유린을 일삼았다.

유럽 평의회, 결의안 찬성 99표, 반대 42표. 르 몽드지 인용. 2006년 2월 3일자.

1. 2 + 4 조약의 주요 조항은 무엇인가?
2. 이 조약은 어떤 위험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하나?
3. 유럽평의회가 규탄하는 대상자는 정확히 누구인가?

p. 244

자료집. 공산주의에서 시장 경제로. 쉽지 않은 전환과정.

• 소련의 독재정권에서 해방된 구 ‘민중민주주의’ 국가들은 행복감도 잠시,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향하는 전환과정에 착수한다. 한편 유럽연합 가입의 의지도 나타낸다.

• 발전을 위한 의지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위와 같은 전환과정은 손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자유 선거 구성, 경제 계획 폐지, 기업 민영화, 삶의 질 급감이 초래한 사회적 문제 해결 등이 단기간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헝가리 같은 경우는 자유선거를 치른 경험이 전무하다.

자료1. 시장 경제로 가는 길.

a. 비아츠(Wiaz)의 커리커쳐, 누벨 옵세르바뛔르, 1990년 3월 1일. b. 플랑튀(Plantu)의 커리커쳐, 1991년 10월.

자료2. 신 민주주의 국가들의 어려움.

소련 제국의 몰락과 유럽 절반을 장악했던 공산당 체제의 종말을 상징하는 베를린 장벽 붕괴 1년 후, 신 민주주의 국가들은 해방의 행복감이 감추었던 어려움에 부딪쳐 싸운다.

빠른 변화속도와 40년이 넘도록 그들의 의지와 별개로 독단적인 국경 속에 갇혀 있던 이들이 만끽한 해방감은 외회주의의 민주주의로 향하는 길에 깔린 함정을 잊게 했다.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가는 첫 번째 과정은 쓴맛을 남긴다.

경제상호원조회의는 가짜 공동 시장이었지만 진정한 경쟁 세계에서는 더 이상의 매수인을 찾지 못하는 사회주의 기업의 소규모 생산품들에게 판로를 열어주곤 했다. 한편 석유 파동은 변화의 고통에 빠진 동유럽의 경제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만다.

경제 문제는 새로운 지도자들의 유일한 걱정거리가 아니다. 공산당 체제에 가려있던 민족간의 긴장구도, 국가간 대립, 정치적 논쟁 문제가 다시 수면위로 떠오른 것이다. 오스만 제국을 기준으로 한 동유럽과 서유럽의 분단도 다시 생겨난다. 유럽은 세계대전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기나긴 고통의 괄호가 닫힌듯이.

베르네, ‘유럽을 뒤흔든 1989년, 1990년의 가을/겨울’, 르몽드, 1991년 10월 28일.

자료3. 계획 경제에서 시장 경제로 가는 길.

시장 경제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물가 변동을 최대치 수준으로 허용하고 경쟁구도를 유발해야 한다. 또한 차별화를 도모하고 노동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임금을 자유화해야 한다. 그 후에는 노동력의 유연한 이동성을 지향하고 계획 경제를 실시한 대다수의 국가에서 드러난 비효율성과 저생산량의 원인인 초과 인원 유지를 지양하는 고용 정책이 필요하다. 이는 다시 말해 계획 경제체제에서 통상적이었던 고용 안전을 포기한다는 의미다.

한편 결정 과정에서 지방 분권화를 실시해야 한다. 기업의 주인들은 성공은 이윤으로 보상받고 동시에 실패는 파산으로 갚는 구조 안에서 그들이 내린 결정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질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끝으로 해외 경쟁국에 문을 열고 적극적인 해외 사업 참여를 이끌어 내야 한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법률 개혁, 제도 개혁, 금융 중재조직 편성 등을 성공시켜 법률적으로 믿을 수 있는 국가를 세워야 한다.

미셸 캉드쉬, IMF 보고서, 1990년 5월 14일.

p. 245

자료4. 민주주의 선거로 선출한 폴란드의 첫 번째 국회, 1989년 6월.

어제의 적, 오늘의 동지. 좌부터. 야루젤스키 장군, 레흐 바웬사 공화국 대통령, 게레메크 브로니슬라브 역사학자, 솔리다르노시치 지도자들.

자료5. ‘벨벳 혁명’후의 프라하

프라하의 일반 시민들에게 민주주의란 더 이상 이웃을 두려워하지 않고, 친구끼리 얀 후스의 동상 앞에 모여 자유로이 카를교를 산책하는 것이다. 시내가게 속 엽서, 그림, 각종 잡화 진열대들은 민간 상업을 상징한다. 민간 상업의 깨끗한 유리창과 말끔히 진열된 상품들은 국가 상업과 큰 차이를 보인다. 정부는 민영화를 주도 중이다. 이에 따라 50세 이상 인구는 물가 상승을 우려하고 그들의 거주지에서 쫓겨날까 두려워하고 있다.

쟝 부아소나, <확장(l’Expansion)>, 1991년 10월 3 ~ 6.

자료6. 1991년의 슬로바키아

슬로바키아 산업의 잠재력은 ‘큰형’ 소련이 고안했다. 거대한 공장, 이웃나라로 향하는 수출품 등이 그 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슬로바키아 서부 고산지대에는 무기공장들이 세워졌다. 하지만 오늘날 소련은 지불 능력을 잃었으며 시리아나 이란과 같은 잠재적 고객은 추천대상이 아니다. 슬로바키아 산업의 또 다른 기둥인 야금업계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금부터 원료 지불은 외화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원료는 상당한 양의 에너지를 소비하는데 소련이 적당한 가격에 제공하던 석유 값에 비해 가격이 네 배나 뛰었다.

프랑수아 랑글레, <확장(l’Expansion)>, 1991년 9월 5일.

자료7. 체코슬로바키아의 실업 현황.

[스캔]. /노동 인구 중 실업자 비율 /

자료8. 첫 번째 개혁 종합 평가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는 빠르게 자본주의의 법칙을 깨우쳤다. 헝가리는 가장 빠르게 민영화를 실행하였으며 외국 투자자 유치 조성에 앞장섰다.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도 이를 뒤따를 것이다. 이미 입법 단계가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다. 세 국가에서 민간 부분의 국민 총생산 대비 비중도는 1989년 1/5 이하에서 1991년 1/3 이상으로 상승했다. 지금부터 1992년말안에 지하 경제를 포함한 민간 부분은 국민 총생산의 50%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는 유럽경제공동체와 맺은 제휴 협정으로 이득을 볼 것이다. 이를 통해 서유럽 국가를 대상 수출 증가를 이루어낼 전망이다. 부정적인 요소도 없지 않아 존재한다. 다수의 지역에서 실업률이 10%를 웃돌고 있다. 대기업들이 문을 닫는 절망적인 상황도 도래할지 모른다. 인플레이션은 또 다른 과제로 남아있다.

다니엘 프랭클린, 디 이코노미스트, 1991년 12월.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자료1에 그려진 인물은 누구인가? 두 그림이 갖는 의미는?

2. 1989년 후 중앙 유럽과 동유럽의 신 민주주의 국가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는가(자료2)?

3. 이 지문에 따르면 시장 경제의 특징엔 무엇이 있나(자료3)?

4. 이 세 인물의 역할은 무엇인가(자료4)?

5. 슬로바키아의 경제적 어려움은 어디로부터 오는가(자료6, 자료7)?

B. 자료 연관 짓기

6. 자료3에 쓰여진 여러 조건들 중 해답을 찾은 조건들을 자료5와 자료8에서 찾으시오.

7. 위 자료들은 구 ‘민중민주주의’국가 속 새로운 정치체제의 어떠한 점들을 알려주는가?

C. 작문

8. 구 ‘민중민주주의’국가들은 어떻게,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어 시장 경제 국가들이 되었는가?

p.246

복습 자료

필수 암기 연도

- 1945년 ~ 1949년: ‘민중민주주의’체제 돌입

- 1953년: 동베를린 봉기

- 1956년: 소련 공산당 제 20차 대회

         부다페스트 혁명

- 1968년 8월: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프라하의 봄’ 종료

- 1980년: 첫 번째 자유 노동조합, 솔리다르노시치

-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 1989년 12월: 프라하 ‘벨벳 혁명’

전기 알렉산더 두브체크 (Alexander Dubcek) (1921-1992), 체코슬로바키아 개혁파 공산당 지도자(410쪽 참조).

블라디슬라브 고물카 (Wladyslaw Gomulka) (1905-1982), 폴란드 공산당 지도자(410쪽 참조).

바클라프 하벨 (Vaclav Havel) (1936년생), 체코 작가이자 정치인(410쪽 참조).

너지 임레 (Imre Nagy) (1892-1985), 헝거리 개혁파 공산당 지도자(410쪽 참조).

레흐 바웬사 (Lech Walesa) (1943년 생), 솔리다르노스크 조합 지도자(410쪽 참조).

필수

1. ‘민중민주주의’의 탄생

■ 1945년: 나치에게 해방된 후 붉은군대가 점령한 동유럽과 중앙유럽.

- 1945년 ~ 1949년, 동맹 정부 시기와 지역 공산당의 점차적 집권. 1948년 2월 ‘프라하 쿠데타’.

■ 스탈린의 소련 모델은 다음과 같은 분야에 적용된다:

- 정치 (단일 정당, 정치활동 감시)

- 경제 (계획 경제, 농지 공동화, 중공업 중시)

- 이데올로기 및 문화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 국민들은 공산당 체제의 명령에 따라야만 한다.

2. 반란과 항의

■ 스탈린의 사망(1953년, 동베를린에서)과 1956년 10월~11월 헝가리의 탈소련화 이후 소련이 ‘민중민주주의’국가에 심은 전체주의체제에 대한 반발세력이 일어난다.

1968년 초 ‘프라하의 봄’의 실패.

■ 폴란드: 1980년 8월 연이은 파업은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첫 노동조합, 솔리다르노스크의 창설로 이어진다.

3. ‘민중민주주의’의 종말. 1989년

■ ‘민중민주주의국가’ 대다수는 여러 원인으로 인해 빠르게 무너진다(1989년 5월~10월).

소련: 페레스트로이카/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시민 사회의 격동.

불가능해 보이는 공산당체제의 개혁.

■ 1989년 11월: 베를린의 장벽 개방.

■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 등 발칸 반도에서 공산당 붕괴는 전쟁을 비롯해 더 느리게 진행된다.

혼동하지 않기

의회 민주주의와 ‘민중민주주의’

-> 의회 민주주의에서는 국민이 권력을 지니며 보통선거에서 의원과 대통령을 선출한다. 정부가법안과 예산을 표결하는 의회의 앞에서 책임을 질 때 ‘의회 민주주의’체제라 한다.

-> 소련이 지배한 중앙 유럽 국가들은 ‘민중민주주의’체제라 자칭했는데 이는 중복법이다.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가 공식 이데올로기이며 진정한 권력은 공산당에게만 한정된다.

독재와 전체주의체제 -> 독재는 한 사람 혹은 하나의 집단이 모든 반체제 요소를 금지시킨 채 제한 없는 권력을 행사함을 뜻한다.

-> 전체주의체제는 한 사람 혹은 한 정당이 집권을 하는데,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 체제다.

- 전체주의체제는 ‘민중민주주의’체제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근거하듯 모두가 믿고 따라야 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한다.

- 전체주의체제는 모든 분야에서 사회와 그 구성원의 행동을 통제한다.

‘프라하 쿠데타’와 ‘프라하의 봄’

-> ‘프라하 쿠데타’: 정부의 모든 주요 관직을 공산당원들에게 돌아가게 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쿠데타. 노동자 민병대가 쿠데타에 참여했다.

-> ‘프라하의 봄’: 1968년 1월 ~ 8월 두브체크가 이끄는 체코 공산당의 자유화 시도 사건. 프라하의 봄 혁명은 1968년 8월 바르샤바 조약군에 의해 저지당한다.

p. 247

에세이 (5/9)


주제: 1945년부터 1991년, 큰 형 ‘소련’과 ‘민중민주주의’ 국가들.

연대

- 1945 ~ 1949: ‘민중민주주의’ 도입

- 1953: 동베를린 봉기

- 1956: 부다페스트 혁명

- 1968년 8월: 체크슬로바키아 침공, ‘프라하의 봄’ 실패.

- 1980년: 첫 자유 노동조합, 솔리다르노스크.

- 1989년: 폴란드 정계를 집권하는 솔리다르노스크.

-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참고자료: 1991년 11월 13일, 레닌 동상 철거.

문제해법

A. 주제 분석하기

1. 테마: 소련 지배 시기를 분석하고 ‘큰 형’의 동의어를 찾으시오.

2. 지리: 어떤 나라들이 관련되어있나?

1945년부터 1991년, 큰 형 ‘소련’과 ‘민중민주주의’ 국가들.

3. 연결어: 소련의 역사와 ‘민중민주주의’의 역사를 따로 다루지 말고 연계하여 다룰 것.

4. 시대: 1945년의 주요 사건들은? 1991년의 주요 사건들은?

주제 질문이 연결어를 포함할 경우 (위 질문의 경우, 소련’과’) 절대로 전자와 후자를 따로 분석하지 말아야 한다. 제 12장의 ‘민중민주주의’체제와 제 5장의 소련, 두 파트에 개인지식을 총동원해야 한다. ‘큰 형’이라는 단어는 복종 관계를 암시함으로 이러한 수직관계가 에세이에 잘 드러나야 한다.

B. 문제제기하기.

• 질문지에서 출발하여 문제를 찾아본다.

1945년과 1991년 사이 소련과 ‘민중민주주의’국가 간 관계는 어떻게 발전하는가? 또는

소련의 ‘민중민주주의’국가에 대한 45년의 지배는 왜 공산당의 몰락으로 이어지는가? 또는

‘큰 형’ 소련은 1989년부터 1991년 사이 어떻게 제거되는가?

C. 전개 구성하기.

• 다음과 같은 요소로부터 시작해본다:

- 1945년 붉은군대는 유럽의 절반을 점령한다.

- ‘민중민주주의’국가가 된 ‘형제국’내에서 공산당 체제는 어떻게 유지되는가?

- 소련은 소련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형제국’들의 자유화 시도 앞에 어떻게 대처하나? (연대표 참조)

- 1989년 공산당 진영의 붕괴

• 이러한 종류의 주제가 나올 경우 연대순으로 전개하는 것이 좋다. 사건의 전개 과정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전개 구성 제안:
1. ‘민중민주주의’를 도입하는 소련
2. ‘민중민주주의’국가를 통제하는 소련
3. 소련으로부터 벗어나는 ‘민중민주주의’ 국가들.

p. 248 사료연구 (12/17)


주제: 폴란드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골칫덩어리’인가?


질문지

첫 번째 파트.

1. 자료1이 언급하는 스타니슬라프씨가 겪는 상황이 폴란드에서 자주 일어나는가? 이 상황은 공산당 혹은 ‘민중민주주의’체제가 권장한 규범에 속하는가?
2. 고물카의 폴란드 재집권시 상황은 어떠한가? 고물카는 구상하는 것은? 고물카는 본인이 밝힌 노선을 따르는가?
3. 반공산당 투쟁에서 폴란드의 천주교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4. 파업자들이 반민주주의 체제에 속하는 것을 증명하는 그들의 요구는 무엇인가? (자료4)
5. 포스터가 나타내는 위협은 사실인가?
1947년부터 포스터와 같은 운명에 처하는 ‘민중민주주의’국가는 어디인가? 그 이유는?

두 번째 파트.

위 질문에 대한 정답 및 자료에서 추출한 정보 및 개인적 지식을 바탕으로 위 주제 질문에 답하는 글을 작성하시오.

연표

- 1945~1947: 붉은 군대가 점령한 폴란드. 공산당 체제 돌입.

- 1948년 9월: 고물카를 지나치게 독립적이라 여긴 소련, 고물카 지휘권 박탈 및 체포 명령.

- 1956년 10월: 폴란드 시위와 파업. 스탈린의 지휘를 받던 공산당 지휘자들은 고물카와 개혁파 공산원에게 집권을 넘긴다.

- 1968년 8월: 고물카, ‘프라하의 봄’ 진압에 참여. 신용을 잃은 그는 1970년 자리에서 물러난다.

- 1979년 10월: 카롤 보이티와 크라쿠프 대주교, 요한 바오로 2세의 세례명을 받아 교황으로 임명.

- 1979년 6월: 교황의 첫 폴란드 방문.

1980년 7월~8월: 파업. 레흐 바웬사가 주도 아래 그다니스크 조선소 파압 위원회 설립.

- 솔리다르노스크 조합 창설

- 정부와 솔리다르노스크 그라니스크에서 조약 체결 (21항)

- 1980년 12월 13일: 야루젤스크 장군, 총리, 공산당 서기관 ‘전시 상황’ 선포. 솔리다르노스크 해체 및 노조위원 체포. 1989년까지 솔리다르노스크는 비밀리에 활동.

- 1988년 8월: 새로운 파업.

- 1989년 2월: 솔리다르노스크 조합과 협상할 수 밖에 없는 정부, 여러 개혁 실시.

- 1989년 6월: 반대세력의 선거 승리. 폴란드, ‘민중민주주의’에서 벗어남. 자료1. 1982년, 폴란드의 농민이 입을 열다.

프워츠크 근교에 사는 농업인 스타니슬라프씨는 암소와 송아지 26마리, 황소 2마리와 밭갈이를 위한 말 2마리를 보유하고 있다. 2년 전, 저금리(이자 2%) 덕분에 그는 축사를 하나 더 지을 수 있었다. 얼마 전 구입하여 들여놓은 스웨덴산 착유기는 그의 자랑거리이다. 우유는 연간 1만2천에서 1만5천 즐로티(번역주:폴란드의 화폐 단위)의 매출을 낸다. 하지만 매일 아침 우유를 협동 조합에 운반해야 하며 생산 원가는 너무 낮다. “맥주가 질 좋은 우유 1리터 보다 비쌉니다.” 스타니슬라프씨는 폴란드에서는 꾀나 넓다 할 수 있는 농작지 12헥타르를 소유하고 있다. 그 중 절반은 사료에 나머지 절반은 멘솔, 나무딸기, 감자, 밀, 호밀 등의 경작에 이용된다. 스타니슬라프씨프씨에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기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취재 내내 ‘트랙터’라는 단어를 반복했다. 그는 “보통 말들을 데리고 작업하는데 작업이 너무 많을 때는 농민 단체에서 기계를 빌린다”고 했다. 또한 그는 “내년 봄에는 트랙터를 받았으면 좋겠다. 세 달에 한번, 한 지역에 한대씩 밖에 안 들어오기 때문에 트랙터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시장님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다른 농민들과 동업을 생각해보았을까? 이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절레 흔들며 “협동조합은 장사 안 된다. 이 근처에서도 한군데 있었는데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농부는 스스로 작업해야 농부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르몽드, 1975년 12월 10일.

1975년, 경작지 중 84%가 개인소유(헝가리에서는 17%,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15%, 동독에서는 14%, 불가리에서는 10%).

자료2. 각 국가의 고유한 사회주의 방향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사회주의를 불어넣는 나라가 소련만 있던 건 아니다. 세계적으로 보면중화인민공화국이나 폴란드와 같은 민중민주주의국가 다수가 사회주의를 도입했다. 이 나라의 노동당 앞에, 다시 말해 우리의 정당 앞에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현실적인 문재가 발생한다. 이를테면 각 국가의 고유한 사회주의로 가는 방향의 조건의 문재가 있다. 이 같은 문재는 정당과 국가간에, 즉 사회주의 진영 국가 내 정당과 정부의 상호 관계 문재로 이어진다[…].

정당과 정부는 모두가 단결하여 결집해야 할 것이다 […]. 모두가 결집할 때, 각 국가는 자주권과 자율성을 지닐 것이며 자주적 국가에서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국민의 권리는 상호간에 완전하게 존중될 것이다.

고물카의 연설, 1956년 10월 21일.

p.249

자료3. 그다니스크 조선소 파업에서 노동자들의 고해성사, 1980년 8월. 레흐 바웬사, 좌측, 첫 째줄.

자료4. 그다니스크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

1. 정당과 고용주들로부터 독립된 자유로운 노동 조합 설립 권리.
2. 파원권리.
3. 표현과 언론 자유 존중.
4. 1970년 및 1976년에 해고된 노동자들과 대학교에서 퇴학당한 학생들 의 권리 회복, 정치범 석방, 사상범죄를 빌미로 하는 탄압 중지.
7. 물가 상승에 따른 월급 2000 즐로티 인상.
8. 35년 근무 후 정년퇴임.
9. PEWEX 가게 철거 (오직 외화로만 거래하는 서유럽 물품 판매 가게).
10. 정당 기구에 대한 특혜 철폐.
11. 정당 소속이 기준이 아닌 경쟁력을 기준으로 한 승진 기준 인정.

노동위원회의 21가지 요점사항, 1980년 8월.

자료5. 솔리다르노스크의 포스터, 1970년 말


문제해법 A. 개괄적 힌트

∙ 각 자료를 각각의 맥락에 배치시키는 연표는 자료 해석에 도움을 준다

∙ 교과서 뒤 쪽 전기 참조.

B. 답변 힌트

문제1: 이 농민의 경우는 사회주의 진영의 ‘골칫덩이’의 예다. 그는 그럼에도 장비 구입 등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이득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기사 밑 줄을 보면 폴란드가 예외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4: 요구사항을 두 가지로 분류하라: 노조의 전형적인 요구사항과 노조의 자유에 대한 요구사항.


제 13 장: 1989년 후의 유럽 연합. 성공과 실패 사이

p. 250

1990년대 들어 유럽경제공동체는 여러 과제에 직면한다. 그 원인은 논쟁이 계속되는 타협에 근거하는 각 기관들의 허술함과 동유럽에서 일어난 공산당의 붕괴에 있다.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난 중앙 유럽과 동유럽이 유럽 연합 합류를 요구하자 유럽 연합은 호의적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회원국의 수가 15개에서 25개로, 또 27개로 확장되는 사이 각 기관들의 역할 수행이 복잡해지며 유럽 대륙의 국경에 대한 문제가 야기된다. 유럽에게 있어 공동체 기관의 개혁은 유럽의 생존 문제와도 같아 진다.


유럽연합은 유럽연합의 확장, 국경, 기관 개혁 문제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자료1. 확장된 유럽… [스캔]2007년의 유럽 연합.

“우리는 오랫동안 유럽을 둘로 가른 이데올로기적 경계선으로부터 고통 받아 왔다. 이 경계선은 폭력을 동반했다. 자유의 이름으로 사라지길! […] 동유럽 국민들은 거대한 재적응 과정 속에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로베르 슈만의 사망 후 발견된 자필, in Dominique Giuliani에서 언급, <통일 유럽을 위하여>, 로베르 슈만 재단, 2002.

p. 251 [스캔] 자료2. 그러나 회의적인 유럽인들.

유럽 헌법 제정은 유럽연합의 초창기 회원국인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국민투표결과에 의해 부결된다. 2004년 10월 29일, 로마에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교황 이노센트 10세 동상 앞에서 유럽 헌법 제정 조약에 서명 중이다. 이 조약은 2005년 5월 29일 프랑스의 국민투표 (반대 54%)로 인해 부결된다.

p.252

1) 새로운 국제 정세 속 유럽 연합

A. 동유럽의 격변… 자료1, 2, 4

■ 공산당 진영의 퇴장은 구소련이 지배했던 동유럽의 민주화와 반공산당 세력의 집권으로 이어진다.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바츨라프 하벨이 대표적 인물이다. 구소련에서 해방된 동유럽 국가들은 빠르게 유럽연합의 큰 관심을 끈다. 유럽연합은 동유럽이 계획 경제 체제를 시장 경제로 전환했음에도 망설이는 입장을 보인다.

■ 동유럽에서 그 동안 탄압받았던 옛 국수주의자들의 재등장이 유럽 연합을 망설이게 하는 것이다. 1993년 1월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의 ‘벨벳이혼’은 평화적으로 종료되지만 발칸 반도의 서로 다른 극우세력이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일으킨다.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분열. 1992년부터 1994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간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내전. 알바니아 동요. 1998년~1999년 코소보 전쟁.

■ 그와 동시에 냉전이 끝난 후, 유럽 연합은 소련의 잠재적 공격을 함께 대비했던 동맹국 미국과의 관계를 재정립 해야 한다. 유럽이 세계 외교 무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유럽만의 외교 정책이 필요해 보인다.

B. … 그리고 세계 경제의 변화는 … 자료5

■ 1990년대 들어 교류의 세계화, 교류의 자유화 발전은 동시에 유럽 연합에 영향을 미친다. 먼저 세계 무역 기구가 제정한 조항은 보호무역주의를 배제한다. 이에 따라 공동농업정책이 도마 위에 오른다. 또 한편 유럽 연합은 미국 경제와도 치열한 경쟁을 펼쳐야 한다.

■ 같은 시기,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가는 과정을 거치는 구 공산국가들 내에서는 농산업 생산 붕괴와 물가 급상승이 밀려온다. 이들을 돕기 위해 유럽연합은 교역을 원활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수의 협력 협정을 만든다. 같은 맥락에서 투자를 활성화 하기 위해 유럽 부흥 개발 은행이 창설된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 루마니아나 불가리 등 빈곤국가출신 국민들의 이민을 막기는 어려워 보인다.

C. … 유럽을 의구심에 빠트린다. 자료3, 6

■ 이러한 새로운 맥락 속에서 유럽연합국가들의 여론은 분열된다. ‘유럽회의주의자’ 혹은 ‘유럽비관론자’들은 유럽 국민들의 감독을 벗어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결정권의 테크노크라트(기술주의)적 특징을 비판한다. 그들은 유럽 연합의 실업문제 타파 실패나 무능한 자연재해 예보 등을 비판한다. 그 중 일부는 구 유고슬라비아에 개입하지 못하는 유럽 연합에 격분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를 동원해 세르비아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반대편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 또는 유럽연합의 대 세르비아 전쟁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이들 모두는 유럽 연합이 새로운 가입국과 더불어 점점 더 연방제의 모습을 띠기에 각 회원국이 주권을 잃어 간다고 우려한다.

■ 공동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또 다른 여론도 있다. 이들은 아리안로켓, 에라스뮈스(Erasmus) 프로그램 등과 같은 유럽 연합의 성공적 합작을 예찬하며 중앙 유럽과 동유럽의 유럽연합 합류를 권장한다.


어휘

BERD: 구 ‘민중민주주의’국가들의 유럽 부흥 개발 은행.

technocratique(테크노크라트의): 기술자의 힘에 기반하며 사회, 인간적 문제를 배제하고 기술적인 문제에만 치중하는 기구 또는 단체.

programme Erasmus(에라스뮈스 프로그램): 1987년부터 시행된 유럽 대학생들의 다른 유럽 연합 국가 내 3~12개월간의 유학 프로그램.


자료1. 1990년~1991년 유럽에 대한 시선.

a. 독일 통일은 전쟁 후의 부당하다고 여겼던 국경을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헝가리 국민 대다수는 헝가리의 현재 국경이 1920년 트리아농 조약 체결 시 결정한 국경이라 생각하며 전쟁 후 그려진 국경선은 부정당하다고 여긴다.

야노스 키스, 자유 민주주의 동맹 지도자, 1990년.

b. 민주주의 전통이 존재하지 않으며 협의 체제가 이루어 지지 않는 등, 이처럼 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세계에서는 국수주의 진영의 조그만 움직임도 혁명처럼 보일 수 있다. 바스크 분리주의자, 코르시카의 자치주의자, 플랑드르인들, 발론인들, 북과 남아일랜드인들은 단 한 차례도 유럽을 흔들려는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유럽에서는 모든 사건, 모든 주장이 괴도를 벗어나 유럽 대륙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

렉스프레스, 1990년 1월 12일.

c. 독일과 유럽 통일은 유럽 곳곳에서 관심이 끊겼던 정체성과 오래된 국경선에 다시 불을 지폈다. 유럽의 변방에서 총기를 든 이들은 유럽의 중심에서 삭제되었던 국경선을 놓고 맞선다. 1990년이 독일 민족 통일의 해였다면 1991년은 소련, 유고슬라비아 연방 분열의 해가 될 것이다. 발트해 연안 국가들부터 쓰러진 유고슬라비아까지, 그루지아부터 발칸 반도 까지. 이는 바로 새로운 세상의 탄생이다.

알자스 최신 뉴스, 1991년 10월.

1. 위 세 텍스트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2. 1989년 이후 동유럽에서 국경 문제가 발생한 이유는?

p. 253

자료2. 유럽합중국에 호의 적인 1960년도의 포스터. 유럽합중국은 여러분을 지켜줄 것입니다.

자료3. 플랑튀의 그림, 르몽드지 1992년 10월 27일.

1. 말풍선 속 그림을 하나 또는 두 문장으로 대체하시오. (그림: 스테그네이션, 저축, 자본, 인상, 투자, 소비)
2. 이 커리커쳐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나?

자료4. 1992년의 유럽 연합. 플랑튀의 커리커쳐, <세관원들 죽어나간다>, 1992년.

자료5. 2004년 유럽의 폴란드.

이스뚜아르(이하 H): 유럽연합에 어떤 기대를 거시나요?

브로니슬로 게레멕(이하 B.G): 폴란드를 방문할 때면 이 나라의 경제 상황 악화에 놀라곤 합니다. 몇몇 지역에서는 해당 지역 인구 대비 실업률이 40%까지 치솟아 있습니다. 시장 자유를 향하는 경제 시스템 전환이 시작된 지 15년이 흐른 지금, 폴란드에서 실업 문제는 다른 옛 공산당 국가들에서처럼 나라를 병들게 하고 있죠. 폴란드 국민들이 유럽 연합에 거는 기대는 그래서 크다는 것입니다. 폴란드 문제는 유럽 통합 과정에 있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

H: 프랑스 여론은 폴란드가 유럽 보다는 미국 쪽으로 눈을 돌린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긴장감도 감돌고 있는데요.

B.G: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를 두고 분쟁이라기 보다는 오해라고 해야겠죠. 최근에 특히 폴란드는 미국제 전투기를 구입했으며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폴란드가 유럽 보다 미국 편이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 폴란드인들과 동유럽 이웃국민들에게 있어 미국은 자유와 번영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유럽과 깊숙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동등한 선에서 유럽에 합류하길 기대합니다. 현재로서는 이러한 우리의 기대에 돌아오는 것은 실망과 구겨진 자존심뿐입니다.

브뤼노 카반 기자가 진행한 브로니슬로 게레멕과의 인터뷰, 폴란드 역사학자, 정치인. 이스뚜아르지 286호, 2004년 4월.

1. 이 인터뷰에 따르면 폴란드가 유럽에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2. 이러한 기대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p. 254


자료집


분열된 유고슬라비아


∙ 유고슬라비아의 분열은 공산주의 붕괴의 결과물 중 하나이다. 티토 시절,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종주국 세르비아의 권한에 이의를 제기하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몬테네그로 등 5개 국가는 각자의 독립을 선언하고 여러 차례 전쟁을 일으킨다.

∙ 과거 국가주의자들 간의 긴장감이 다시 고개를 들고 ‘인종청소’가 시작된다. 이로 인해 외부의 개입이 들어오고 코소보 평화유지군(KFOR)이 코소보의 세르비아 지방을 점령하게 된다. 폭력과 학살의 현장 속에서 유럽 연합은 유럽 국경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분쟁 앞에 어떠한 자세를 취하는가?

어휘

KFOR(코소보 평화유지군): 북대서양조약기구가 이끄는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군으로 이루어진 다국적 점령군.

purification ethnique(인종청소): 인종, 언어, 종교를 기준으로 진행하는 한 인구의 동질화. 인종청소는 인구 이동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때로는 학살이 동반된다.

연표

- 1946년: 티토 장군 지휘 아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화.

- 1991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의 독립 선업. 밀로셰비치 대통령의 세르비아, 유고슬라비아의 전체 영토를 재건 시도. 세르비아 대 크로아티아 전쟁.

- 1992년: 브소니아 헤르체코비나에서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보스니아 무슬림 간의 전쟁. UN, 국제연합국 투입.

- 1994년: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 투즈만 크로아티아 대통령, 이제트베고비치 보스니아 무슬림 대통령 파리에서 데이튼(Dayton) 조약 체결.

- 1997년: 코소보의 안티 세르비아 알바니아인들의 코소보 해방군 결성.

- 1998년: 코소보 전쟁. 코소보의 알바니아인들에게 공격을 가하는 세르비아.

- 1999년: 코소보 ‘인종청소’후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코소보와 세르비아 폭격. 랑부예 평화 조약. 6월, 질서 유지를 위한 코소보 평화유지군 투입.

- 2000년: 세르비아 선거 결과에 반발한 국민 시위, 밀로셰비치 권력에서 물러나.

- 2001년: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 헤이그 국제 전범 재판소에서 전쟁 범죄 및 인도에 반한 죄로 기소. 2006년 옥사.

- 2006년: 몬테네그로 독립 선언.


자료1. 유고슬라비아 문제에 직면한 유럽과 UN

a.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무지하게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부추겼다. 프랑스는 발칸 반도 국가들에게 그들 서로와 서로의 국경 인정을 권고할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 […] 요컨대 모두가 1914년 당시의 동맹 형태를 띠었다. 프랑스는 러시아, 세르비아와, 독일은 크로아티아, 터키, 보스니아와 한 편에서 말이다. 영국은 늘 그래왔듯이 불 난 집에 부채질할 뿐이다. 마스트리흐트 조약 체결에 해를 끼칠까 두려운 나머지 유럽의 그 누구도 유고슬라비아 문제 앞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쟈크 아탈리, 르몽드지, 1995년 6월 15일.

b. 스레브레니차 UN 안전지역 (Save Haven)에는 450명의 가벼운 무장을 한 네덜란드 평화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1995년 7월 6일, 라트코 믈라디치의 세르비아군은 스레브레니차에 공격을 가하고 네덜란드 군은 고립된다. […] 보스니아 무슬림 수 만 명이 붙잡히고 ‘인종청소’의 대상이 되었다. 무슬림 여성과 아이 2만 명이 대피해야 했으며 세르비아인들은 무고한 무슬림인들을 학살한다. […] 당시 국제 연합군은 안전지역에 중립적 자세를 유지하며 주둔했다. 그들은 어느 한쪽 편에 서서 싸울 권한도, 방법도 없었다.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1992년~1996년 UN 사무총장, <My years in the Glass House> 중, 파이아르 출판사, 1999년.


자료2. 인종적, 종교적, 행정적 유고슬라비아. 스캔


p. 255 자료3. 코소보에서 벌어진 인종청소의 희생자들인 알바니아인들. 1999년. 세르비아군의 만행으로 인해 이웃국가로 피난 중인 코소보의 알바니아인들.

자료4. 플랑튀의 그림, 2002년. [스캔] 말풍선: (1917년 죽은 매형을 복수 중인 민병대원) (1944년 강간 당한 사촌 여동생을 복구 중인 군인) (2023년에 아버지 복수를 생각 중인 갓난아기)

자료5. 1999년 후 코소보 인종청소의 희생자들인 세르비아인들.

세르비아 군의 공격과 19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의 폭격으로 인해 코소보의 알바니아 인들이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로 피난을 떠나는 과정에서 코소보 내에 거주하는 소수 세르비아인들도 영향을 받는다.

UN 난민 기구는 “유고슬라비아 군의 후퇴와 코소보 평화유지군 투입 후, 수일간 소수민족의 피난, 특히 코소보의 세르비아인들이 피난을 떠났다”는 보고 내용을 발표한다. 또한 “이들은 세르비아 군과 어떠한 관계가 없음에도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자료에는 소수 세르비아 노인들에게 가해진 습격이 여러 차례 보고되었다. UN 난민 기구에 따르면 북대서양조약기구의 폭격 이전 까지 세르비아인 20만 명 이상이 코소보에 거주했으며 약 18만 명이 대피한 것으로 보인다 […].

세르비아 무슬림 (Gorani People)들과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박해의 대상이다. 그들은 무슬림 종교를 지니며 세르비아어와 크로아티아어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마리안지, 1999년 11월 1일.

자료6. 코소보 독립의 위험성

코소보, 200만 명의 인구로 이루어진 이 작은 땅에서는 근로가능 나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실업자다. 유럽연합이 주도하는 국제적 원조는 일반화된 부패 속에서 무용지물이다. 지역 마피아와 연계된 ‘1999년 전쟁의 영웅들’이 부패의 주범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독립 문제와 코소보 정당을 위한 당면 과제에 가려 있다. UN, 북대서양조약기구, 유럽 연합은 여기에 더 깊이 관여할 생각이 없다. […]

유럽은 겉으로 보이는 것 보다 더 많이 우려하고 있다. 코소보가 UN과 별개로 일방적인 독립 선언을 하더라도 유럽 연합 내에서 만장일치를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발칸 반도 국가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겠는가? 인구 1/3이 알바니아계인들로 이루어진 마케도니아는 새로운 국가주의 세력의 반발로 인해 혼란을 겪을 것이다.

코소보의 독립 문제는 후폭풍을 부를 것이다. 코소보인들의 자주적 결정을 받아들이는 순간, 유럽은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 합류하길 희망하는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내 세르비아인들의 독립 선언을 거절 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원리로 러시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의 몰도바, 얍하스, 오세티야 및 그루지아의 복귀를 조성할 수도 있다…

유럽연합과 회원국들은 그들의 우유부단함에 대한 대가를 치루는 중이다. 유럽연합은 코소보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무능력 했을 뿐만 아니라 발칸 반도 인들에게 미래를 심어주는데 있어서도 실패했다. 그 결과 코소보는 유럽 내 가장 빈곤한 극소 국가로 남을 것이다.

알자스 최신 뉴스, 2007년 11월 20일.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유럽의 무력함에 대한 원인은 (자료1 a)? 스레브레니차에서 이루어진 ‘인종청소’를 가능케 한 요소는 무엇인가 (자료1 b)?

2. 세르비아인 인구는 어떻게 분포 되었나 (자료2)? 알바니아인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유고슬라비아에 터키인들이 있는 이유는?

4. 1917년과 1944년은 유고슬라비아의 어떤 역사적 사건을 의미하는가 (자료4)?

5. 자료6에서 ‘코소보의 독립 문제는 후폭풍을 부를 것이다’.라는 문장을 설명하시오. B. 자료 연관짓기

6.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코소보 개입이 시작되기 전 인종청소 희생자는 누구인가? 코소보 전쟁 이후의 희생자는?

7. 유럽 연합이 보이는 자세의 특징은?

C. 작문

8. 유고슬라비아 문제의 정보와 발칸 반도를 대하는 유럽 연합의 자세를 보여주는 글을 한 단락 쓰시오.

p. 256

2) 전무후무한 확장

A. 12에서 27로 자료5

■ 1990년대 초, 동독이 서독에 통합되며, 결과적으로 유럽 연합에 합류한다. 1995년, 오스트리아, 핀란드, 스웨덴의 합류와 더불어 유럽 연합의 회원국 수는 15가 된다. 하지만 2004년 10개의 회원국의 추가로 합류하며 문제가 발생한다. 신규 회원국에는 지중해 섬 국가 몰타와 키프로스(키프로스의 일부는 터키군이 점령)가 있으며 슬로베니아, 체코 공화국, 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구 소련 국가 8개국이 있다. 2007년에는 불가리아와 루마니아가 뒤를 잇는다.

■ 하나된 유럽이 대세를 이룸에도 서유럽 국가 중 일부는 유럽 연합 가입을 거부한다. 노르웨이는 1972년과 같이 1994년 다시 한 번 거부 입장을 표명한다. 1997년 스위스 국민들은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 합류를 거절한다.

B. 회원국들 사이의 단결을 찾아서 자료1, 3, 4, 6

■ 규모가 확장됨에 따라 유럽연합 가입국들 사이의 연대성 문제가 발생한다. 초창기 회원국 중 일부는 신규 가입국을 위한 공동체 기금 상승이 불러오는 경제적 손실, 농업 분야 내 경쟁구도, 저임금 노동자 공급 등을 우려한다.

■ 위와 같은 우려 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1993년 6월 유럽 정상들이 모여 유럽 확장을 위한 후보국가의 기준을 마련한다. 민주주의, 법치주의, 자유 경쟁을 펼칠 수 있는 시장경제 체제 유지 등이 기준에 포함된다.

■ 유럽연합은 같은 맥락에서 후보국들에게 ‘가입 전 지원’을 제공한다. 각 후보국의 발전 단계에 따라 연간, 인구당 10에서 30유로를 지원하는 것이다. 그 댓가로 중앙 유럽 후보국들이 그들의 시장을 개방하며 서유럽 국가들의 수출량을 10배 가까이 확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6개의 회원국으로 출발한 유럽 연합의 기관은 12개 회원국 체제에서도 전반적인 기능 수행을 효율적으로 해냈다. 회원국의 수가 27로 확대되자 상황이 달라진다. 대부분의 사안은 절대 과반수 이상의 다수 원칙으로 가결되지만 예산, 세제, 외교와 같은 가장 중요한 사안들은 만장일치로 가결한다. 그 결과 결정할 사안이 미뤄지거나 동결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기관의 개혁이 시급해진다.

C. 가입에 관한 새로운 방안? 자료2

■ 지금도 여러 신규국가가 유럽연합 가입을 신청한 상황이다. 그 중에는 우크라이나, 몰도바, 발칸 반도 국가들과 같이 지리적으로 유럽에 속하는 나라들이 있는 반면 터키와 같이 유럽 대륙 밖에 위치한 나라도 있다. 이와 같은 가입신청 사례는 유럽 국경 정립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오늘날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공식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 이러한 이유로 가입 승낙 또는 거부와 같은 두 가지 결정 외에 세 번째 방안이 점점 더 거론되고 있다. 세 번째 방안은 교류 자유화 또는 상호 투자 보호와 같은 경제, 상업 분야 내 제휴 협정을 의미한다. ‘유럽의 이웃지간 정책’은 구 소련 또는 지중해 국가들을 대상으로 구체화 되고 있으며 특히 교통망이나 환경 보호 분야에서 펼쳐지고 있다. 프랑스는 이 같은 형태의 ‘특권이 부여된 제휴관계’를 터키에게 권장하고 있다.


자료1. 연방제 유럽을 향해?

동유럽 국가의 합류와 같은 역사적 과제를 풀고 신규 회원국들을 통합시키기 위해 우리는 유럽 통합 과정의 마무리 단계, 즉 정책 통합을 이뤄내야 한다. 유럽 공동체의 확장으로 인해 기구들의 근본적 개혁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30명의 국가 원수와 정부 수반이 함께하는 유럽 평의회를 상상할 수 있는가?

현재와 같은 유럽 기구 조직에서 서른 명이 어떻게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의결하여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이 같은 문제에 대한 해답은 간단명료하다. 바로 연방제 유럽 안에서 완전한 의회제도화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유럽 의회가 아닌 입법부와 행정부 체계가 갖추어진 유럽 정부를 의미한다. 이 유럽 연방은 헌법 조약에 기반해야 할 것이다[…].

연방제가 각 국민 국가의 종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 국가는 각각의 문화적, 민주주의적 전통과 함께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전통을 통해 국민들이 수용하는 구성원과 국가의 통합을 적법하게 만들 수 있다.

오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부 장관, 2000년 5월 12일.

1. 유럽 연방은 어떠한 형태로 이루어 질 수 있나?
2. 유럽 의회와 유럽 정부의 영향력은 어디까지 뻗을까?


자료2. “유럽 연합에 터키가?”

“어제 코펜하겐에서는 인어 공주상에 검정 부르카가 씌워 졌다. 부르카에는 “유럽 연합에 터키가?”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리베라씨옹지, 2004년 12월 17일.


p. 257

자료3. “저 커다란 문을 여세요, 입구를 크게 해주세요.” 1997년 12월 13일. 독일 커리커쳐. 하단에는 독일의 유명한 크리스마스 노래 가사가 인용되어있다.

자료4. 폴란드 관광청 포스터. [스캔] 포스터 문구: 저 폴란드에 있어요. 모두 폴란드로 오세요. 유럽 연합 확장 이후 ‘폴란드인 배관공’은 저렴한 노동인력의 잠재적 침투를 우려한 이들에게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자료5. 6개국의 유럽부터 27개국의 유럽까지. [스캔]

자료6. 여러 국가의 비중. 스캔/ 공동 예산 참여율 동그라미 그래프: 4인방의 비중도:65.2% / 23개 기타 국가의 비중도


p.258

자료집

터키 문제


• 터키가 유럽 연합 가입 자격을 갖추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찬성쪽과 반대쪽의 주장은 정치, 경제, 인구, 문화, 그리고 지리까지 여러 분야에서 펼쳐진다.


자료1. “날으는 양탄자를 타도 어려워요!” 피터 쉬랭크, 이코노미스트지, 2005년 5월 14일. 그림 속 인물은 터키 국무총리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gan).

자료2. 가입 신청과 협상 단계

연표

- 1963년: 유럽경제공동체와 터키 간 협력조약

- 1980년 ~ 1986년: 터키 쿠데타로 인한 협력조약 효과 마비

- 1987년: 터키 공식 가입 요청

- 1993년 6월: 코펜하겐 유럽 정상 회담에서 유럽 연합 가입 기준 정립(민주주의, 법치주의 보장 및 자유 경쟁 유지). 터키에게는 좋은 기회.

- 1999년: 터키 후보국으로 인정.

- 2004년 12월: 터키가 ‘코펜하겐 기준’을 충족시킨다 여긴 유럽 연합, 터키와의 협상 시작을 2005년 10월 3일로 발표.

- 2005년 5월~6월: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국민투표에서 유럽헌법 비준 부결. 반대측은 터키의 유럽 대륙 합류 거부를 이유로 내세움.

- 2005년 10월: 유럽 연합과 터키 협상 시작.

“길고 어려운 협상이 될 것이다.”

“터키의 가입은 보장할 수도 없을뿐더러 자동적으로 이루어 지는 일도 아니다.”

“협상은 10년에서 15년 까지 지속될 수 있으며 터키의 민주주의와 인권 위반이 지속된다면 협상이 결렬될 지도 모른다.”

조세 마누엘 바로소, 유럽 위원회 위원장, 2005년 10월.

- 2007년 5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당선. “터키의 가입은 반대, 하지만 최대한 긴밀협력관계는 찬성.”


자료3. 유럽의 마지막 장벽.

a. 그린 라인.

1878년부터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 1959년 독립한 키프로스 인구의 80%는 그리스계인들이다. 그리스계 주민들은 키프로스와 그리스의 병합을 원하였으며 1974년 그리스는 키프로스 합병을 시도한다. 이에 대한 반발로 터키군이 상륙하고 북부지방을 오늘날까지 점령하고 있다. 키프로스는 UN이 지정한 ‘그린 라인’을 기준으로 분단되었다. 북쪽에는 국제공동체가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이 있고 남쪽에는 2004년부터 유럽 연합의 회원국인이 키르로스 공화국이 있다.

b. 포스터, 그리스, 로도스 섬, 2007년 4월.


자료4. 터키는 가입 조건을 충족시키는가?

표현의 자유, 비무슬림 종교 공동체들의 권리, 부패척결, 사법부의 자립, 노동조합법, 여성과 아동의 권리 등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기자, 지식인, 인권운동가 배척이 증가하고 있다. 터키는 “정책 개혁을 위한 발판”을 되찾아야 한다. 또한 쿠르드족이 그들의 권리를 충분히 누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한편 유럽위원회는 터키의 키프로스 공화국과의 관계 정상화가 정체되어 있는 상황에 유감을 표한다.

2007년 11월 유럽위원회 연간 보고서, 르몽드지에 인용, 2007년 11월 3일.

p.259

자료5. 터키의 유럽 합류를 반대한다.

a. 터키는 유럽 연합에 합류할 수 있는 자연법을 소유하지 않았다 […] 터키 여성들이 권리의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와 가족 관계에 있어 남성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 말할 수 있나? 2020년쯤이면 터키는 유럽 연합 내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가 될 것이다. 유럽 의회에서 터키의석의 수는 독일의석의 수와 동등해질 것이다 […].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의 강대국들은 민족주의 성향이 항상 짙었던 터키의 특징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터키의 이런 색깔이 유럽 연합의 외교 정책, 특히 중동과의 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겠는가?

2004년 12월, 가입 협상 시작을 수용하는 순간 우리는 유럽 연합의 지리 변동이 결정될 것이며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이라크, 이란, 시리아와 공동 국경을 공유할 것이다. 즉 현 유럽 국민들의 사전 동의는 고려하지 않은 채 유럽 자체의 개념을 변형할 것이다.

로베르 바뎅테르, 실비 굴라르 저서 <거대한 터키와 베니스 공화국>의 서문 중, 파이아르 출판사, 2004년.

b. ‘터키의 가입 진행 진척’에 대한 유럽위원회의 1993년 가을 보고서에 따르면, 종교적 차별을 떠나서, 현시점 가장 중대한 문제의 제공자가 ‘가톨릭 단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 터키 가입을 찬성하는 이들에게 유럽은 불안에 떨고 있으며 터키에서는 종교적 차별이 벌어지고 있다 말해줘야 한다. 무슬림 국가에서 기타 종교의 자유는 매우 한정적이다.

[유럽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터키에서 비무슬림 종교 단체는 단체의 법인, 소유권, 경영 등의 분야에서 난관을 겪고 있으며 그들의 성직자를 임명할 수 조차 없다.”

실리 굴라르, <거대한 터키와 베니스 공화국>, 파이아르 출판사, 2004년.

자료6. 터키의 유럽 합류를 찬성한다.

a. 유럽에서는 번영과 민주주의 가치가 점점 번져나가고 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어 유럽 공동체의 전체적인 확장과 터키의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

물론 영토의 97%가 아시아 대륙에 속한 터키를 완전한 유럽이라고는 할 수 없다. 헌데 터키의 가장 큰 도시인 이스탄불은 유럽 문화수도 중 한 곳이다. 터키는 무슬림 국가인가? 그렇다. 하지만 터키는 약 80년 전부터 정교분리 국가이며 이를 잘 지켜오고 있다. […]

우리가 터키 가입을 거부한다면 이 시대에 가장 뒤떨어진 두 세력, 즉 이슬람주의 지지파와 반민주주의 군세력에 힘을 실어주고 말 것이다.

미셸 로카르, 프랑스 전 국무총리, 렉스프레스지, 2002년 12월 12일.

b. 터키는 터키의 역사, 지리, 가치관 구조를 통해 유럽처럼 행동하고 반응한다. 터키는 3세기 동안 지속돼온 적응 과정 끝에 유럽의 가치관에 동조하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 내에서도 터키는 50년 째 유럽의 한 편으로써 유럽의 방위와 안보에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다. 터키는 근대성과 국가의 정체성을 결합하고 이슬람교와 정교분리 민주주의를 통합한 모델 국가다. […]

터키를 회원국으로 수용함으로써 유럽 연합은 민족 톨레랑스, 종교와 문화 존중과 같은 공동체의 기반이 되는 가치관의 의미를 더욱 빛나게 할 것이다. 동남 유럽에 평화와 안보가 공고해질 것이다.

압둘라 굴 터키 외무부장관, 추후 대통령의 선언, 르몽드지 2002년 12월 11월자에서 발췌.


자료7. 터키가 유럽 국가였다면?

오스만 제국의 멸망 이후 항상 예민한 사안이었던 쿠르드족 문제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쿠르드족은 전쟁 중인 이라크의 북쪽 지방에 하나의 국가를 건설하여 다시 일어나길 꿈꾼다. 이를 절대 수용할 수 없는 터키는 황급히 군사 10만명을 국경에 배치하고 폭격을 늘렸다.

그런데 만일 터키가 유럽 연합 회원국이었다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 유럽인들은 앞장 서서 협상테이블에… 그리고 전장에 나설 것이다. 유럽 연합은 시리아, 이라크, 이란 등 중동 국가들 사이에 둘러 쌓이게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 유럽 연합은 아르메니아 집단학살을 인정한 터키가 유럽 연합 가입 조건에 맞지 않는다고 여긴다. 과거에서부터 오랫동안 유럽과 터키의 관계 개선은 어려워 보였다.

쿠르드족 문제해결을 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유럽 연합과 터키가 공통적인 의견을 공유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대화를 하려는 유럽의 전통과 화력을 앞세우는 터키의 도발 사이에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까?

이브 테아르의 사설, 르피가로지, 2007년 11월3일, 4일.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날으는 양탄자는 무엇을 비유하는가 (자료1)? 이 양탄자의 이륙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2. 키프로스 ‘그린 라인’이 정립된 배경은 (자료3)?

3. 자료4의 제목에 대해 주장이 뒷받침된 답변을 쓰시오.

4. 터키 유럽 합류 반대파의 주장(자료5)와 터키 유럽 합류 천성파의 주장(자료6)을 표를 그려 나타내시오.

5. 아르메니아 집단학살에 대해 조사하시오 (자료7). 글쓴이가 이 사건을 언급하는 이유는?

B. 자료 연계하기

6. 이 자료집 중 터키 국무총리의 양탄자를 붙잡는 세 가지 요소를 나타내는 자료는 무엇인가?

7. 압둘라 굴리(자료6)의 선언과 모순되는 자료들은 무엇인가?

C. 작문

8. 이 자료집의 문서들을 바탕으로 터키의 유럽 연합 가입 찬성자와 반대자들의 주장을 나타내는 글을 쓰시오.


p. 260

3) 진행중인 유럽 통합 과정

A. 마스트리흐트 조약, 유럽연합을 창설하다. 자료1,3

■ 1984년부터 1994년 까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쟈크 들로르와 콜 독일 총리,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지지를 받은 마스트리흐트 조약은 1992년 2월 7일 체결된다. 유럽경제공동체가 유럽 연합이 되는 순간이다. 이 조약을 통해 통합 정책이 우대를 받고 유럽 건설 분야가 확장된다. 산업, 에너지, 연구, 환경, 복지, 의료, 문화, 사법 등의 분야가 공동체 관할로 속하게 된 것이다.

■ 마스트리흐트 조약은 공동 방어책으로 연장될 수 있는 외교 정책과 공동 안보 문제를 다룰 뿐만 아니라 불법이민, 테러, 마약밀수와의 전쟁도 포함한다. 한편 이 조약은 모든 회원국 국민들의 유럽 시민권과도 같다.

■ 모든 절차가 만장일치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룩셈부르크, 아일랜드, 그리스가 빠르게 비준화한 반면 프랑스에서는 국민 중 51%만이 찬성을 투표했고 영국과 덴마크는 예외 조항을 걸고 수용하기로 결정한다.

B. 결속을 강화하는 공동 화폐 자료2

■ 마스트리흐트 조약의 또 하나 주요 사항으로는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유럽중항은행 설립을 통한 유로 화폐통합이다. 화폐통합은 엄격한 화폐 관리와 인플레이션과의 공동 전쟁을 아우르는 경제 정책의 연계성을 전재로 한다. 단일화폐는 경제분야뿐만 아니라 화폐발행권과도 관련이 있다.

즉 국권과도 이어지는 화폐통합의 시작으로 유럽 연합의 역사에 새로운 페이지가 추가된 것이다. 한편 유로존의 모든 국가들은 유로를 통해 결집한다. 그 결과 한 회원국의 국채가 지나치게 증가할 경우 나머지 모든 국가들의 공통 화폐인 유로도 영향을 받게 된다.

■ 유로 동전과 지폐는 2002년이 되어서야 12개 유로존 국가에서 정식 통용된다. 영국, 덴마크, 스웨덴은 유로존 합류를 미룬다. 12개 유로존 국가들은 마스트리흐트 조약에서 정해 놓은 환산 기준을 충족시켜야 했는데 국채가 국내총생산(GDP)의 60%를 넘지 않을 것, 재정 적자가 국내총생산의 3%를 초과하지 않을 것, 시장 가격대의 안정성 및 저금리 보장 등이 위 기준에 포함된다.

C. 기구 개혁의 실패 자료4, 5

■ 이전에 존재하는 여러 조약을 대체하기 위한 진정한 유럽 헌법의 필요성은 점점 더 부각된다. 지스카르 데스탱이 주도하는 위원회가 헌법안을 담당하게 된다. 이 위원회는 2년 반의 위임기간을 갖는 유럽 이사회 의장 선출과 유럽의회의 권한을 강화하는데 주력한다. 이 헌법안은 절대 과반수 이상의 다수 원칙을 기본으로 하지만 특정한 분야에서는 거부권이 허용된다. 한편 헌법안 유럽 내 가톨릭 근원에 대해서도 문제를 재기한다.

■ 헌법안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크다. 주권론자들은 신 헌법이 화폐, 국방, 외교 분야에서 절대 권력을 갖는 국가들에게 특혜를 주며 연방제 유럽을 지향한다고 비판한다. 2005년 5월과 6월에 걸쳐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는 유럽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패한다. 유럽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간 듯 보이나 2007년 가을 유럽 연합 27개 회원국 정상들이 리스본에 모여 ‘미니 헌법’에 최종 합의한다.


어휘

citoyenneté européenne (유럽연합 시민권):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따라 유럽 연합 회원국의 모든 소속민에게 부여되는 시민권. 시민권은 거주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소속민들에게 거부권과 유럽과 지방 선거에서의 피선거 자격을 부여한다.

politique d’intégration(통합 정책): 유럽 연합 국가 간 상호관계 확대 정책. souverainiste(주권론자): 민족국가체제 주권자이자 각 민족이 하나의 국가와 더 이상 일치하지 않을지 모르는 유럽 연방제에 반대하는자.


자료1. 마스트리히트 조약(발췌)

현 조약은 유럽 국민들간의 긴밀한 관계를 끊임없이 도모하는 새로운 단계를 의미한다. 유럽 국민들은 가능한 최대로 의사 결정을 내릴 것이다.

유럽 연합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 역내 국경 없는 지역 구성, 사회∙경제 연대 강화, 단일 화폐를 이용하는 화폐∙경제 통합 등에 기반하는 경제발전과 균형되고 지속적인 사회진보 도모.

- 때가 오면 공동 방위군 창설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공동 방위 정책 실행을 통한 세계무대 내 유럽연합의 정체성 확보.

- 유럽 연합 시민권 부여를 통한 회원국 소속민들의 권리와 이익 보장 강화.

- 사법 분야에서 긴밀한 협조관계 확장.

1992년 2월 7일 체결. 1993년 11월 1일 비준화.

1. 이 조약의 목표는 무엇인가?
2. 로마조약 때부터 유럽 통합 과정에서 어떠한 발전이 이루어졌는가?
3. 이 목표들 중 달성된 것들은?

p. 261

자료2. 공동 자산의 상징, 유로

(지폐 위에 그려진) 모티브들은 실존하는 창문도, 정면 현관(번역주: 성당 등의)도 혹은 다리의 그림도 아니다 […]. 이 그림들은 유럽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건축 양식을 표현한다. 각 지폐 앞면의 창과 정문 현관 그림은 유럽 연합의 개방 정신과 합동 정신을 상징하는 주요 모티브다. 지폐 뒷면에는 유럽의 분단되었던 역사를 표현한다. […] 다리는 유럽인들을 한데 묶는데 그치지 않고 유럽과 세계를 하나로 모으는 매개체이다.

프랑스 경제재정산업부, 1997년 11월 17일.

자료3. 유럽으로 향하는 불법이민

스캔

1. 유럽으로 향하는 불법이민 흐름을 설명하시오.
2. 불법이민자들이 가장 많은 나라는 어디인가? 그 이유는?


자료4. 2005년 5월 30일 월요일자, 유럽 언론에서는.

“유럽 전역에 지진.” Standard, 오스트리아 일간지.

“프랑스, 유럽을 위기에 빠트리다.” het Laastste Nieuws, 벨기에 일간지.

“프랑스 국민들에게 유럽 건설의 퇴보를 탓해서는 안 된다. 무관심에 틀어 박힌 지도층에 있는 자들은 국민들을 유럽을 사랑하도록 이끄는데 무능하다.” Le Soir, 벨기에 일간지.

“프랑스는 유럽 초국가의 죽음에 이별키스를 했다.” Daily Mail, 영국 일간지.

“유럽연합의 동유럽으로 향한 확장을 지켜보는 서유럽인들은 레비아탄 (번역주: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바다의 괴물)의 재림인 듯 두려워한다. 국경 없이 퍼지는 어둠의 세력이 도래한 것처럼.”Suddeutsche Zeitung, 독일 일간지.

“프랑스인들의 결정은 유럽, 특히 프랑스의 나약함을 증거로 보여준다. 수요일, 네덜란드인들은 프랑스인들의 결정에 뒤따를 것이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도 국민투표를 펼쳤다면, 두 나라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Rzeczpospolita, 폴란드 일간지.

“프랑스의 반대는 최근 몇 년째 유럽연합 내에서 점점 뚜렷하게 드러나는 경향을 확인시켜준다. 바로 국가주의로의 회귀이다.” De Volkskrant, 네덜란드 일간지.

1. 위 일간지들은 프랑스의 반대 투표결과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2. 가장 비관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매체는 어디인가? 비관적인 결과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나?


자료5. ‘미니헌법’을 향하여?

2년 전 부결된 유럽헌법의 대체재를 찾기 위해 27개국의 정상이 모였다.

그 동안 결과가 좋았던 회의들에서와 같이, 각 국가는 조그만 승리를 거머쥐었다. 독일은 유럽 이사회에서 가장 많은 수의 표를 보장하는 이중 과반수를 유지했다. 영국은 인권 헌장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는 울트라 자유주의의 극에 이른 악행으로 치닫는 ‘변질되지 않는 자유 경쟁’에 대한 인용을 삭제했다.

한편 헌법안을 통해 도출된 기구에 대한 제안들 가운데 일부는 유지되었다. 의임 기간은 그대로 유지할 것이며 유럽 의회의 권한은 모든 분야에서 확대될 것이다. 또한 유럽 의회는 절대 과반수 이상의 다수 시스템을 채택한다. 국민투표 당시 논란의 대상이었던 공동 정책은 그대로 남아있으며 새로운 조약은 이를 수정하는데 그친다.

르몽드지, 2007년 6월 24일.


p. 262


유럽연합. 어떠한 가치와 함께?


∙ “우리는 국가들을 통합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1952년 쟝 모네의 이 발언은 유럽 연합이 유럽 국민들에게 평화와 번영을 보장하는 계획 그 이상을 내다보는 야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럽연합은 모두에게 인정 받는 문명의 가치에 기반하는 유럽 시민권 창조를 목표로 세운다.

∙ 유럽연합이 뿌리를 내리고 결합하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가치들은 무엇인가?


자료1. ‘유럽’이라는 단어의 근원으로.

a. ‘ereb’ 이라는 단어는 페니키아어로 저녁 또는 서방을 뜻했으며 근동 지방 혹은 아시아의 반대말이었다. 이 단어의 어원은 헤시오도스의 기원 전 8세기 그리스 신화 작품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우스는 페니키아의 왕 아게노르의 딸인 에우로페를 납치하고 황소로 변신시킨다. 에우로페는 크레타의 전설적인 왕이 될 미노스를 출산 후 제우스에게 버려진다. […]

헤로도토스 그리스 역사학자는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이들을 지칭하기 위해 ‘Europaioi’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는 정치적 유럽이 유럽인들과 페르시아인들과의 전쟁 속에서 구체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유럽’이라는 단어는 아시아에서 건너온 공공의 적들과 맞서기 위한 여러 그리스 도시의 동맹을 떠올린다. 자클린 드 로미이는 기원 전 480년도에 일어난 살라미나 전투를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그리스인들은 처음으로 그들의 문명을 적국의 문명으로부터 수호한다는 감정을 느꼈다.[…]”

‘Europaioi’’ 라는 단어의 출현 이후 ‘Europeenses’라는 단어가 한 모자랍교도 작가의 작품에 등장한다. 저자는 Isidore de Pacensis로 작품연도는 759년으로 추정된다. 위 단어는 투르와 푸아티에 지방에서 무슬림의 공격에 맞서는 샤를 마르텔 왕국의 프랑크인들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중세 초기부터 투르크족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1453년까지 가톨릭교도는 가톨릭 ‘이교도’인들과 끊임없는 맞대결을 펼친다.

엘라자베스 뒤 레오, 제오(Géo), 2003년 9월.

b. 귀스타브 모로, <에우로페의 납치>, 1868년. 귀스타브 모로 박물관, 파리.


자료2. 유럽 헌법에 따른 공동 가치

- 유럽연합은 유럽이 문명사회의 대륙이라는 점과 유럽 시민들이 인간의 평등, 자유, 이성 중시 등 휴머니즘의 기반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켜왔다는 점을 인지한다.

- 유럽연합은 유럽의 문화, 종교, 휴머니즘 유산을 본받는다. 유럽 유산의 가치는 사회 내 인간,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불가침권, 권리 존중 자각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유럽 연합은 이제 하나된 유럽이 약자들과 극빈자들을 포함한 모든 시민과 함께 문명, 진보, 번영을 향해 나아갈 것으로 확신한다. 유럽 연합은 유럽이 문화, 지식, 사회진보에 열린 대륙으로 남을 것이라 확신한다. 유럽연합은 유럽이 투명한 민주주의 체제를 강화할 것이며 세계의 평화, 정의, 연대를 위해 힘을 합칠 것이라 확신한다.

- 유럽연합은 유럽 시민들이 각자의 정체성, 역사를 잃지 않음과 동시에 과거의 분열을 이겨내고 그 어느 때보다 단결하여 공동 운명을 함께 건설해나갈 것을 확신한다.

- 유럽연합은 유럽연합조약의 회원국들이 유럽 시민과 국가의 이름으로 현 헌법을 구상했다고 인정한다. 회원국들은 다음 조항에 동의한다...

유럽연합 헌법 서문 초안, 2003년.


자료3. 유럽의 새로운 야심

유럽통합의 아버지들이 꿈꾸던 유럽 통합 정책이 장애물에 부딪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25개 회원국이 함께하는 유럽 연합을 위해 현실적인 야심을 갖는 것은 필수일 뿐만 아니라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위와 같은 야심이 다음 요소들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평화의 장과 인권, 여성의 권리를 존중하는 상호 이해 관계의 장 조성이다. 둘째, 공정하고 사회연대적 발전을 위한 틀 마련이다. 셋째, 인간과 사화의 개념으로 한데 모여 우리의 자산이 될 다양성 촉진이다. 한편 우리는 외교, 국방, 경제 및 화폐 통합을 위해 전위 함대를 구성할 수도 있을 것이며 서로의 협력 관계를 증진하며 서로에게 열린 틀 안에서 회원국 일부가 보다 멀리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줘야 할 것이다.

자크 들로르, 전 유럽 연합 이사회 회장, 렉스프레스지, 2003년 6월 19일.


p. 263

자료4. 환경보호의 필요성 : 2007년 8월 그리스에서 대형화제 발생.

위기에 처한 환경보호는 유럽연합이 수호하려는 가치 중 하나다.


자료5. 공통 문화로 충분할까?

우리는 우리의 눈부신 과거를 언급하는 것만으로 과연 유럽의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겠는가? 유럽은 하나의 조국도, 민족도, 연방도 아니기에 [...] 어떤 이들은 공통 문화, 다시 말해 우리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 반신, 영웅 등을 내세워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단테,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괴테, 몰리에르 등을 언급하다 보면 우리는 놀라움을 이끌어낼 수 있다 확신하고 어떻게 유럽을 언급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환상은 바로 버려야 한다. 문제는 다른데 있다. 우리는 우리가 물려받을 문화유산에 대한 자격을 갖춰야 할 뿐만 아니라 위와 같은 공통 문화 유산의 존재도 유럽 국가간의 분쟁은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문화 유산의 메시지는 명확하지도 공통적이지도 않다. [...] 왜냐하면 유럽연합은 미적 가치뿐만 아니라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가치에도 존재 이유를 두기 때문이다. 만약 오스트리아에서 위와 같은 가치관에 반하는 정책을 도입하는 극우파가 집권을 한다면, 오스트리아의 작가와 예술가들의 영광스러운 업적과는 별개로 오스트리아의 유럽 내 존속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쟝 다니엘, 누벨 옵세르바퉤르, 1999년 10월.


자료6. ‘가톨릭교의 뿌리’에 대해

협상 테이블에서 신에 대한 질문이 갑작스레 던져졌다. 송아지, 콩, 유전자 주입 옥수수, 쿼터제도 등의 주제에서 한 단계 더 오른 수준이었다. 브뤼셀에서 던져진 이 질문은 프랑스를 필두로 한 세속 사회 지지자들과 폴란드를 필두로 한 가톨릭교의 뿌리와 관련된 조항을 주장하는 이들간에 논쟁을 일으켰다. 터키 가입 문제와 이슬람 체제유지주의 상승은 이러한 의견 분쟁에 대한 원인을 제공했다.

사실 신에 대한 언급은 정교분리원칙과 부딪치기도 하지만 종교적 가치관을 지닌 공동체가 과거유럽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 유럽을 세운 것이 그리스와 로마 문명, 가톨릭교에서 나온 가치관의 결합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교황이 말한 ‘가톨릭교의 뿌리’는 정교분리 가치관에 반한다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정교분리는 가톨릭교에서부터 나온 개념이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와 시작된 정교 분리 덕분에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는 교황청의 권한을 무시할 수 있는 시민 사회를 구성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이나 알제에서 볼테르나 디드로가 이슬람교를 조롱하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퍼트렸다면 그들은 말뚝에 박아 처형당했을 것이다.

따라서 종교분리원칙 출현의 전재조건인 가톨릭교의 휴머니즘과 종교분리원칙을 대립시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종교분리원칙은 가톨릭교 문화에서 잉태된 아이다.

쟝마리 루아르, Adieu a la France qui s’en va, 2003년.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로미이가 살라미나 전쟁에 대해 말한”그들의 문명을 적국의 문명으로부터 수호한다는 감정을 느꼈다.”라는 표현을 설명하시오 (자료1).

2. 헌법의 서문이 필요한 이유는(자료2)?

3. 자크 들로르가 말하는 ‘유럽을 위한 현실적인 야심은’에는 무엇이 있는가(자료3)?

4. 환경보호가 유럽 연합이 중시하는 가치 중 하나인 이유를 예를 바탕으로 설명하시오.

5. “종교분리원칙은 가톨릭교 문화에서 잉태된 아이다.”라는 쟝 마리 루아르의 표현을 해석하시오(자료6). B. 자료 연계하기

6. 쟝 다니엘이 말하는 ‘공통 문화’에 대해서 설명하시오.

C. 작문

7. 유럽 연합이 수호하려는 가치가 무엇이고 가치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지를 나타내는 글을 작문하시오.


p. 264 복습자료


필수연도

-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 유럽경제공동체에서 유럽연합으로.

- 1995년: 유럽연합 회원국 수 15개 국가로 확대.

- 2002년: 유로 화폐 유통.

- 2004년: 유럽연합 회원국 수 24개 국가로 확대.

-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 유럽헌법안 거부.

- 2007년: 유럽연합 회원국 수 27개 국가로 확대. 리스본 조약이 유럽헌법안 대체.


전기

자크 들로르(1925년생),

1981년 ~ 1984년, 프랑스 경제재정부 장관

1985년 ~ 1994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


필수

1/ 새로운 국제 정세 속 유럽 연합

■ 소련 진영의 붕괴. 구소련 중앙유럽과 동유럽 공산당 국가들, 유럽연합 가입을 희망. 그들의 낙후된 상황이 우려되나 구 공산당 국가들의 합류는 위험한 국가간 충돌을 막을 수 있음 (유고슬라비아).

■ 동시에, 유럽연합은 교역 자유화의 흐름에 따라 가야함(세계화). 일부 보호무역주의 규정도 해결과제로 남음.

■ ‘유럽회의주의’가 상승. 주권론자들의 반대.

2/ 전무후무한 확장

■ 회원국의 수: 12 -> 15. 2007년에는 25 -> 27.

■ 약화되는 유럽연합의 결속. 기구 개혁이 필수.

■ 일부 인접 국가의 후보자격이 유럽의 가치관 및 국경선 문제와 충돌. 유럽가입 허용인가 우대 협력관계인가?

(터키 가입 문제 찬반논란)

3/ 진행중인 유럽 통합 과정

■ 마스트리히트 조약(1992년)을 통해 유럽연합은 외교 정책과 공동 안보 체계를 도입. 또한 유럽 시민권이 창설되고 유로 화폐의 등장으로 경제 화폐 통합 달성.

■ 2003년, 유럽헌법안을 통한 기구 개혁 구상.

■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 국민 투표를 통해 헌법안 거부. 유럽 통합 정책 일시 정지.


혼동하지 않기

유럽경제공동체와 유럽연합.

- 유럽경제공동체는 1957년 로마 조약에 의해 창설되었다.

-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거쳐 유럽경제공동체는 유럽연합으로 변모한다. 동시에 외교 정책과 안보 체계 및 국토안보 체계를 도입한다.


유럽 연합의 주요 기관

- 유럽 이사회: 각 회원국의 지도자, 정부수반, 위원장으로 구성됨. 유럽 정책의 큰 방향을 결정.

- 유럽 위원회: 유럽 의회의 동의를 거쳐 유럽 이사회가 각 회원국의 대표 위원들을 임명. 유럽 이사회와 더불어 법안, 규정, 지침서 이니셔티브를 담당. 조약 작성 및 실행을 관장.

- 유럽 연합 이사회: 특정 분야에 해당하는 각 회원국 장관들의 이사회.

예) 내무부 이사회나 법무부 이사회는 국토안보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만 각 회원국 국회가 비준화를 해야한다.

- 유럽 의회: 보통선거에서 선출된 785명의 위원으로 구성. 의회는 예산을 투표하고 규정과 지침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며 유럽 이사회와 공동으로 결정을 내린다.

[스캔]

p. 265

사료해설 (10/15)


주제: 2007년 당시 유럽 연합의 지도 [지도 스캔]


문제

1. 이 지도에 따르면 1989년부터 유럽에는 어떤 변화들이 일어났나?

2. 유럽 연합은 지리적으로 어떻게 변화하나?

3. 오늘날 까지도 유럽연합 내 한 국가를 분단하고 있는 장벽은 무엇인가? 이 장벽은 어떤 국가에게 유럽 연합 가입을 위한 장벽이 되는가? 이 장벽만이 해당국가의 가입에 대한 걸림돌인가?

4. 지도를 바탕으로 유럽 통합 건설 과정의 큰 틀을 재조명하시오.


문제해법

A. 개괄적 힌트

지도와 주석을 자세히 관찰하시오:

∙ 연도를 자세히 관찰하고, 주석과 지도를 함께 보시오.

개인 지식을 이용하시오:

∙ 제 13장에서 배운 내용뿐만 아니라 유럽 건설의 과정(제11장), 냉전(제6장과 제9장), ‘민중민주주의’ 역사(제12장) 등에 관한 지식을 동원하시오. B. 답변 힌트

문제2: 6개 회원국의 유럽연합에서 출발하시오. 그 다음 1989년 전후 동유럽과 중앙유럽의 정치적 지리상황을 관찰하시오.

문제4: 가입국을 차례대로 나열하는데 그치지 마시오. 예를 들어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의 유럽 연합 가입이 왜 가능할 수 있었는지 자문하시오.


p. 266

자료집 연구 (13/17)


주제: 유럽 연합은 왜 여론을 분열해 놓았는가?


문제

첫 번째 파트

1. 자료1에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은 이 헌법과 더불어 “유럽이 정치 통일을 위한 관문을 확실히 넘어섰다”고 단언한다. 그의 말을 지지하는 주장들은?

2. 자료2의 마지막 문장을 해석하시오. 어떠한 ‘가치’가 거론되고 있는가? 어떤 유럽에 반대하는 것인가?

3. 자료3에 있는 포스터들을 바탕으로 헌법안에 대한 프랑스 국민투표 기간 중 찬성과 반대를 유도하는 서로 다른 의견이 무엇인지 나타내시오.

4. 자료4에 나오는 ‘북대서양조약기구’, ‘위원회’, ‘가톨릭교 뿌리’, ‘절대 과반수 이상의 다수’, ‘거부권’ 등의 표현이나 단어를 설명하시오.

5. 자료4에 따르면,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기각 이후 유럽헌법안 비준화를 위해 국민투표를 진행해야 하는 국가들은 어디인가? 프랑스의 반대 이후 기각된 또 하나의 유럽 법안을 언급하시오.

두 번째 파트

첫 번째 파트 질문의 응답, 자료에서 추출한 정보, 사전지식 등을 바탕으로 주제 문제에 답변이 되는 글을 체계적으로 작성하시오.


자료1. 헌법 구성의 참여자가 소개하는 유럽연합헌법안.

이 헌법과 더불어 유럽은 정치 통일로 향하는 관문을 확실하게 넘어선다. 정치 통일이란 유럽 시민의 통일과 회원국들의 통일이다. 이 헌법은 시민권에 새로운 참여 가능성을 부여하고 유럽연합과 회원국 사이에 확실하고 투명하게 권력 분배를 하여 각 국가의 국회가 참여를 도모한다.

유럽연합의 권한은 시민들이 요구하는 다음과 같은 분야까지 확장된다:

- 커다란 범죄와 맞서고 회원국 사이에 서로 다른 시민권 인정을 통한 자유, 안보, 정의의 장 마련.

- 세계 무대에서 유럽의 이름으로 행동하고 목소리를 내는 유럽 외무부와 유럽 무기청 창설을통한 외교 정책과 공동 방위의 점진적 발전.

- 우리 공동 화폐의 안정성과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 유로를 채택한 국가 간 경제 협조 개선.

- 안정적이고 민주적이며 효과적인 기관 설치.

유럽 의회는 유럽 연합의 주요 입법자 자격을 얻는다. 유럽 의회는 유럽 이사회와 함께 법안을 제정할 것이다. 유럽의 법제는 유럽 시민과 회원국이 선출한 대표인들의 합의에서 도출될 것이며 유럽 이사회는 틀을 갖추고 내구성을 지닐 것이다. 유럽 이사회의 의장은 각 국가의 역할을 구성할 것이며 각 자의 역할을 적절한 시기에 등재하고 예측할 것이다. 유럽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창설된 유럽 위원회는 주요 행정부 역할을 맡을 것이다. 유럽 위원회는 유럽 공동 이익을 대변할 것이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유럽 헌법위원회 의장의 선언문, 로마, 2003년 7월 18일.


자료2. 유럽 헌법을 위하여 모두가 알다시피 오늘날 유럽은 전환점을 맞고 있다. 잘하면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못하면 시민들의 반감 속에서 정체할 수도 있다. 혹은 사람들의 공동 재산이 되어 새로운 사회 협정의 장으로 등극할 수 있다.

단일시장, 단일화폐, 일치된 경제 정책은 유럽 건설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헌데 유럽은 유럽의 국민들에게 경제에 국한된 이미지 이상의 것을 심어줘야 한다. 유럽은 몽테스키외가 말했듯이 “삶의 근원과 보편적인 사유를” 표현해야 한다. 나아가 리스본에서 바르샤바까지, 런던에서 부다페스트까지, 이 안에 모두가 서로 인정하는 상상계, 거울의 세계, 갈망할 수 있는 사회질서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유럽은 바로 헌법이 필요한 것이다. 단순히 기관들 간에 권한과 권력 관계를 배분하자는 것이 아니다. 유럽 헌법은 인간이 공통된 삶을 건설하는데 있어 기반이 되는 가치관을 담아내야 한다.

D. 루소, <유럽 헌법을 위하여>, 르데바 108호, 2000년 1월-2월호.


p. 267

자료3. 국민투표 선거 포스터, 렌느, 2005년 5월 28일.

자료4. 불화의 원인

유럽 방위. 영국, 북유럽 국가들, 구소련 국가들은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지배적 역할 재검토에 반대한다.

유럽 위원회 구성. 위원수를 15자리로 줄이려는 유럽 위원회 개혁안은 신규 가입국가들의 반대에 몰리고 있다. 이들은 강대국과 동등한 선에서 교섭하기 위해 각 국가당 한 명의 위원을 보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다.

종교. 유럽 헌법 서문에서 가톨릭교 뿌리에 대한 언급 부재는 중앙 유럽과 동유럽 가톨릭 국가들과 충돌한다. 25개 국가 중 15개 국가는 헌법 안에 ‘가톨릭교’ 단어 추가를 요구 중이다.

장관회의 내 표의 균형. 국가 중 50%, 인구 중 60% 등의 절대 과반수 이상의 다수 정립은 25개 국가 중 18개 국가의 반발을 산다.

거부권. 외교 정책, 기업 과세, 예산 정책 등 민감한 분야에서 유지되어온 거부권은 확장된 유럽의 개혁을 마비시킬 지도 모른다.

르피가로지, 2003년 10월 4일.


자료5. 2006년 전 유럽헌법 채택 [스캔]

문제해법

A. 개괄적 힌트

∙ 주제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필요하다. 주제는 명확하게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분열’이라는 단어는 각자의 주장에 근거한 서로 다른 관점의 충돌을 뜻한다.

∙ 유럽헌법의 찬성파와 반대파를 대립시키는 주장들은 무엇인가?

B. 답변 힌트

∙ 작문을 하기 전, 각 자료를 읽은 후 2열의 표 안에 찬성과 반대 의견을 정리한다. 자료에서 추출한 정보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그 다음 본인의 지식을 동원한다.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선을 따라 분류하고 정리한다.

자료5의 경우 위 지도는 단순한 상황묘사이며 찬반 논란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다. 연도를 정확히 작성하고 유럽 연합 회원국들에 대한 프랑스의 입장을 표현해본다.


1945년부터 오늘날까지의 프랑스

제 14 장: 제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평가와 잔해

p. 268

1945년 프랑스는 끔찍한 트라우마를 겪은 상태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벗어나기 위한 갈망과 분열을 잊으려는 의지는 국가 재건으로 이어진다. 레지스탕스의 상징이었던 프랑스이지만 1950년대 들어 여러 분열이 다시 일어난다. 분쟁의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비시 정부의 기억은 프랑스의 여론을 갈라 놓으며 암흑의 시대가 도래한다. 역사학자 앙리 루소가 말한 ‘인정할 수 없는 과거’처럼.


제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 구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비시 정부와 제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논쟁은 어떠한 점에서 기억과 역사 사이의 차이점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나?

자료1. 해방에서… 히틀러 전범에 관한 전시회. 1945년 프랑스 정보부가 개최한 전시회.

“우리는 프랑스로 돌아가는 그 길에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알았지만 우리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전쟁이 끝나면 어떤 사람들을 보게 될까? 이 열차에서 내리면 우리는 환영 받을까? 우리는 두려웠다. 또한 우리는 남들과 같은 평범한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삶을 다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질식되어있었다. 해방을 맞은 지 3주가 되었지만 우리의 정신은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전쟁의 비극은 머리 속에 맴돌았다. 이 비극은 절대로 잊혀질 수 없을 것 같았다…”

1942년 6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 갔던 앙리 타슈너씨의 증언. 1945년 6월 프랑스로 돌아오는 길에, 저자 앙리 타슈너, <생존자의 목소리, 아우슈비츠 지옥에서의 3년>, Voix du Nord 출판사, 1995년.


p.269 스캔


자료2. 홀로코스트의 기억까지. 프랑스에서. 홀로코스트기념비.

“수용소를 다시 언급하기 까지 최소 40년, 두 세대가 걸렸다. 1945년, 우리가 수용소에서 해방되어 돌아왔을 때, 우리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처럼 환영 받지 못했다. 때로는 무관심과 경멸을 느끼기도 했다. 그 누구도 우리가 겪은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 홀로코스트는 우리 모두의 유산이다.

나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이 인류 존엄성과 기초 가치관의 존중을 고취시키길 간절히 희망한다.”

시몬 베이, 수용소 희생자, 전 정관, 홀로코스트 재단 회장. 암스테르담 대학교의 홀로코스트 집단 학살 연구소 개막식 연설 중. 2003년 9월 8일.


p. 270

1) 전쟁 직후

A. 잔인한 숙청 자료1, 2

■ 해방 직후 프랑스에서는 이미 약 60만 명이 죽음을 맞이한 상황이었으며 수용소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많다. 경제 상황은 심각하고 재정난과 더불어 건물 2백만채 등 수 많은 인프라구조가 폐허되었다. 1948년까지 프랑스국민들은 식량난과 식량배급에 어려움을 겪는다. 레지스탕스로부터 출발한 프랑스 임시 공화국정부는 시민 평화를 다시 세우기 위해 힘쓴다.

■ 1944년부터 해방일 까지, 프랑스에서는 수 개월 간 내부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내분이 일어난다. 자유프랑스군과 레지스탕스는 합법적 절차에서 벗어난 숙청을 단행한다. 대독협력자와의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1944년 가을 가혹한 숙청이 벌어진다. 프랑스 영토의 80%가 해방된 시점에 총 8천명에서 9천명이 숙청당한다. 독일인에게 협조하지 않았더라도 교류한 흔적이 있는 여성들은 대중들 앞에서 삭발과 채벌을 당하게 된다.

■ 이에 정부는 합법적인 차원에서 숙청을 관리하려 한다. 대독협력자와 배신자들을 재판하여 벌하는 일은 비시 정부가 낳은 희생자들의 이름으로 정의를 되찾는다는 의미를 지니며 매국노들을 몰아내어 정치계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데 초석을 다지는 것과도 같다. B. 사법 숙청 자료3, 4, 5, 6

■ 사법적 숙청은 군사법원, 시민법정, 법원 등에서 이어진다. 약 32만 명이 재판대에 오르게 된다. 피고인들 중 3/4은 구속되거나 국적을 박탈당한다. 한편 1500명이 사형선고를 받는다.

■ 비시 정부의 고위급들은 고등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고등 법원은 18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8명에게 종신 강제 노동을 선고한다. 비시 정부의 지도자였던 라발과 다르낭은 처형당했으며 드골장문이 형을 감면해준 페탕은 Yeu 섬에서 감금되어 1951년에 생을 마감한다. 페탕은 재판에서 ‘방패’논리를 펼치며 프랑스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C. 끝나지 않은 숙청의 명암

■ 직종별 숙청은 분야에 따라 그 강도가 달라진다. 행정 기관 분야에서는 국가재건에 인력이 필수라 여겨져 숙청이 크게 이루어 지지 않았다. 공무원 2만 여명 이상이 징계를 받고 그 중 절반이 파면 당한다. 군에서도 일부 숙청이 진행되는 한편 경제 분야에서는 커다란 움직임이 없다. 기자들과 작가들의 도덕적 책임감을 묻는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한 숙청은 논란을 일으킨다. 여러 친독 협력 신문매체의 국장이었던 로베르 브라실라쉬는 사형을 선고 받고 처형된다. 프랑수아 모리악, 폴 발레리, 폴 클로델, 알베르 까뮈 등 지식인 59명이 그의 감형을 요청해보지만 무용지물이었다.

■ 1951년부터 1953년 까지 프랑스에서는 사면법이 두 차례 의결되며 구속된 친독 협력자들의 수는 현저히 줄게 된다. 1946년 복역자의 수는 약 3만 명, 1954년에는 천 명 이하, 1960년에는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약 20년간 수 많은 반역자들을 집단 수용소로 보냈음에도 불구 프랑스는 과거를 잊고 역류하여 국가의 정치적, 도덕적 정체성을 다시 세우려 한다. 실제로 ‘인도에 반한 죄’라는 개념은 전쟁 희생자의 자손들에 의해 1970년대에 들어서야 나타난다.


어휘

épuration(숙청): 해방 후 독일과 협력한 반역자를 정치계와 사회에서 몰아내기 위한 움직임.

amnisite(사면): 그리스어 ‘amnestia’로 용서, 잊음을 뜻함. 죄를 사함을 결정.


자료1. 1944년 파리 해방 당시 한 여인이 삭발을 당했다.


자료2. 1939년 ~ 1945년, 전쟁으로 인한 프랑스의 인명피해

1939년 ~ 1940년, 군인 사망자 123 000

독일에서 사망한 수용소인 45 000

독일 국방군(Wehrmacht)에 의해 사망한 알자스와 로랜 주민 31 000

자유 프랑스군 사망자 11 700

국내 자유 프랑스군 사망자 8 000

해방군 43 000

총살형 희생자 25 000

레지스탕스 27 000

군인 및 관련인물 총 희생자수 316 000

수용소 희생자 83 000

독일에서 사망한 징용 노동자 40 000

폭격 희생자 67 000

테러 희생자 58 000

해방 시 처형당한 피고인 10 000

독일인이 살육한 희생자 6 000

총 시민수 264 000


자료3. 합법적 숙청 결산.

사형선고 7 037

   처형  약 1 500

강제노동형 13 211

징역 26 289

시민권 및 정치권 박탈 70 249

면소 및 무죄 석방 73 501

군사 법원 및 처형 약 800


p. 271

자료4. 피에르 라발, 페탕 재판에서.


자료5. 페탕 장군의 선언, 그의 재판 중, 1945년 7월 23일.

1940년 7월 10일, 프랑스 국민들은 하원 의원들을 통해 나에게 정권을 맡겼다. 나는 오늘 현 정권에 해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다.

나는 일생을 프랑스를 위해 바쳤다. 오늘 날, 90살의 나이에도, 옥살이를 하는 상황에서도, 나는 프랑스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다시 한 번 호소하려 한다. 국가는 나를 기억해주길 ! ... 나는 1918년에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 프랑스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날을 맞았던 순간에도 프랑스는 나를 찾았다. [...]

그래서 나는 내가 벌이지도 않은 비극적 상황을 물려받았다. 비극의 진정한 책임자들은 국민들의 화가 두려워 내 뒤로 숨었다. [...] 그렇다. 휴전은 프랑스를 살렸으며 자유로운 지중해와 동맹국들의 온전한 상태를 보장하여 동맹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나는 합법적으로 정권을 물려 받았으며 이를 교황청부터 소련까지, 전 세계의 모든 국가들에게 인정받았다. 나는 프랑스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이 정권을 방패로 삼았다. [...]

사람들은 당시와 같은 상황에서 집권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해하려고 하는가 ? 하루하루 내 목에는 칼이 들어왔고 적들의 요구에 맞서 싸워야 했다 [...] 독일의 프랑스 점령으로 인해 나는 적들의 목소리에 맞춰주어야 했다. 하지만 이는 국토 해방을 기다리는 와중 당신들을 위해서 한 일뿐이다. 점령으로 인해 나는 내 스스로도 원치 않는 발언과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내 자신은 당신들 보다 더욱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적들의 요구 앞에서 나는 조국의 존재를 절대 잊지 않았다 [...]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국민을 공경하고 계층간 분쟁을 막기 위해 공장과 농장 근무 환경 보장에 힘쓴 정권이 내 정권 말고도 또 있는가.

1. 페탕 장군은 정권의 합법성을 어떻게 정당화하는가?
2. 본인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어떤 주장을 펼치는가?
3. 마지막 문장에서 페탕이 말하고 있는 가치관은 무엇인가 ?


자료6. 검사의 논고, 페탕 장군 재판에서.

패배와 신용의 실종 속에 창설된 페탕 정부는 히틀러와 모든 분야에 협업하는 대독 정책으로 단 4년을 버텼다. 여러분, 이것은 배신이다.

어떤 사람들은 만약 독일에 협력하지 않았다면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을지 모른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벨기에의 상황은 프랑스의 상황보다 좋았던 것으로 안다. 프랑스에서는 인질 15만 명이 총살당하였으며 노동자 75만 명이 독일로 노동을 위해 동원되었다. 협업 뒤에는 강제수용이 가려져있다. 정치수용범 11만 명, 인종차별학대 수용범 12만 명 중에 살아 돌아온 이들은 1500명이 전부다. 이보다 더 나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오히려 더 안 좋은 것이 있다. 4년간 이 정부는 우리 프랑스의 명예를 훼손할 뻔 했다. 4년간 이 정부는 프랑스, 프랑스의 약속이행, 프랑스의 입장, 프랑스의 명예에 의심만 안겨놓았다.

국가와 국민은 같이 간다. 유베날리스의 시 구절이 와 닿는다. « 최악의 재난이란, 비참한 존재를 잃기 두려워 삶의 이유 자체를 잃는 것이다 ». 삶의 이유란 명예다. 페탕 정부는 프랑스의 명예를 앗아가며 국민들의 존재의 이유마저 빼앗으려 했다. 이는 속죄 받을 수 없는 죄다. 그 어떠한 감형도 있어서는 안되며 법이 정한 체계에서 재판소가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형벌을 선고해야 한다.

모르네 검사, 논고 중, 1945년 8월 11일.

1. 논고는 비시 체제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2. 검사는 페탕의 어떤 주장에 반박하는가?
3. 위 논고의 마지막 부분은 어떤 가치관에 기반하나?


자료7. 브라실라쉬의 감형 요구를 정당화하는 알베르 카뮈

나는 항상 사형을 증오해왔고 한 인간으로서 기권을 할지언정 사형제도에 찬성할 수 없었다. 이게 전부다. 이런 양심의 가책이 브라실라쉬의 친구들을 웃게 만들지도 [...].

내가 서명에 동참하는 것은 브라실라쉬를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그의 집필을 지지하지 않으며 브라실라쉬라는 인간을 경멸한다. 브라실라쉬의 측근들이 짓밟은 친구 둘 혹은 세 명에 대한 기억은 나의 서명동참을 머뭇거리게 만든다. 당신은 브라실라쉬가 우연히 정치적 견해에 들어갔다고 하고 나는 이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당신들의 명예를 더럽힘을 택하는 것에는 우연이 없다는 것을 안다. 또한 브라실라쉬가 자크 드쿠르에 대한 호의적인 기사를 단 한 차례도 쓰지 않았음에도 내가 서명에 동참하는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알베르 카뮈, 1945년 1월 27일, 마르셀 에메에게 전하는 편지, P. Assouline이 인용, <지식인 숙청>, Complexe, 1996년.

자크 드쿠르 :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 작가, 1942년, 독일군에게 체포된 후 총살당함.

1. 카뮈는 브라실라쉬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나?
2. 카뮈는 어떤 원리를 방침으로 브라실라쉬의 감형을 요구하나?


p.272

자료집

제 2차 세계대전 관련 문학과 기억


∙ 문학은 ‘제 2차 세계대전의 기억’을 재구성 하는 주요 도구 중 하나다. 르네 샤르, 로베르 데스노스, 쟝 폴란, 앙드레 말로와 같은 작가들은 레지스탕스에 참여했으며 막스 자콥, 로베르 앙텔므, 다비드 루세 등은 수용소로 보내지기도 했다. 그들의 경험은 전쟁 후 시호, 목격담, 허구, 시 등의 형태로 알려진다.

∙ 전쟁의 경험은 직접적으로 전쟁을 겪지 않은 작가들에게도 영감을 준다. 작가들은 여론을 끊임 없이 움직이는 전쟁시대에 매혹되거나 일종의 메시지를 전달할 목적으로 전쟁의 기억을 구성한다.


자료1. 바다의 침묵(Le Silence de la mer)

그는 어제와 같은 시간 저녁에 돌아왔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가 문에 노크를 했다. 조카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지 않은 체 스스로 문을 열었다. 그가 “여러분을 방해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소. 원하신다면 부엌 쪽으로 다니겠소. 이 문은 열쇠로 잠그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그는 방을 건너 문고리에 손을 얹은 채로 방 구석 구석을 둘러보았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좋은 밤 되시오”라 말하며 방을 나갔다. 우리는 그 문을 절대 열쇠로 잠그지 않았다. 내 자신도 왜 그랬는지 명확하고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조카와 나는 우리 삶에 어떠한 변화도 주지 말자며 암묵적인 동의를 했다. 단 하나의 작은 요소에도. 마치 저 장교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가 유령이었다는 듯이. 헌데 내 마음속에 어떤 다름 감정이 개입했을 지도 모른다. 그가 내 적이었을지언정 나는 고통 없이 한 남자를 공격할 수 없었다.

베르코르, 만화가이자 작가인 쟝 브륄러의 가명, 1941년 10월에 집필한 단편 소설. Minuit 출판사에서 1942년에 은밀히 출판.


자료2. 쟝 피에르 멜빌의 영화를 위한 레이몽 지드의 포스터, 1949년.

자료3. 레지스탕스 운동가들의 시, Feuillets d’Hypnos(잠이 든 신의 글)의 도입부.

이 글은 본인을 향한 사랑, 단편소설, 격언 또는 산문에서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다. 바싹 마른 풀잎의 불꽃이 이 글의 편찬자였다.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피는 글의 방향성을 잃게 만들었고 글의 중요성을 소멸시켰다. 이 글은 긴장감, 분노, 두려움, 대항 의식, 경멸, 술수, 은밀함, 미래에 대한 암시, 우정, 사랑 속에서 작성되었다. 이 글이 전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 말하고 싶다. 또한 여러 번 정독하기 보다는 대충 훑어 보았다.

한 인간의 삶의 의미는 그의 긴 삶의 여정 속에 감춰져 있기에, 때로는 환각을 일으키는 의태와 분리할 수 없기에, 이 글은 그 누구의 것이라고도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같은 경향은 그럼에도 반박되었다.

이 글은 햇빛을 다시 보기 위한 대가를 치르는 것을 감수한, 책임감과 미덕을 지닌 한 휴머니즘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기록하고 있다.

르네 샤르가 1943년 ~ 1944년에 쓴 글. 1946년에 출판. 1930년대에는 시인과 항독지하운동가 대장으로 활동. 이 글은 알베르 카뮈에게 바치는 글이다.

분노와 신비(Fureur et mystere), 가이마르 시 출판사.


p. 273

자료4. 에디씨옹 드 미뉘

바다의 침묵 커버 (초판)

에디씨옹 드 미뉘(Les Editions de Minuit)는 1941년, 독일군이 점령한 파리에서 만화가 쟝 브륄러(미래의 베르코르)와 작가 피에르 드 레스퀴르가 개업한 출판사다. 1942년 첫 작품으로 베르코르의 <바다의 침묵>을 출판한다. 작품의 제목은 당시 시대의 어두움을 반영한다. 그 후 출판사에서는 폴 엘뤼아르의 시집 <시인들의 명예>와 아라공, 마리탱, 모리악, 폴란, 지드 등 프랑스의 저명한 작가들의 작품과 존 스테인벡과 같은 미국인의 작품들이 출판된다.


자료5.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우리 중 누군가를 더 잘 죽도록 도와줄 뉘앙스 두 개나 세 개를 획득하기 위해 새벽에 죽음을 당한 사람 수십만 명, 감옥의 끔찍한 벽, 시체 수 백만구가 쌓여 버린 유럽이 필요했다. 그렇다. 이는 절망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이 같은 부당함을 받을 만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세운 목표이며 우리의 목표는 내일 실행될 것이다. 여름 바람이 휘날리는 유럽에서는 오늘밤, 무장한 이들과 무장하지 않은 이들이 전투를 준비 중이다. 당신들이 패배 하는 순간 동이 트일 것이다. 당신들의 잔인한 승리 앞에 무심했던 하늘은 당신들의 당연한 패배 앞에서도 무심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하늘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당신들이 고립시키려 했던 이 고독한 존재를 구원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당신들은 인간을 향한 충심을 무시한 죄로 외롭게 죽어나갈 것이다. 지금 나는 당신에게 이별을 고한다.

알베르 카뮈,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Lettre a un ami allemande), 1944년 7월, 가이마르 출판사.


자료6. Impression vraie, 1944년 8월.

자크 프레베르에게


그릴룸향이 수용소에 피어오르네

랑드뤼에 있는 부엌에 나는 향처럼 묘하네

그들의 손 위로 차가운 살의 악취가 피어오르네

하트만에 있는 도살업자의 손에서처럼


강렬한 범죄의 불꽃이 저녁에 불타오르네

지붕에 쌓인 눈 위로 피가 뿌려지네

저 블록을 거슬러 등록된 그림자가 지나가네

어깨를 으쓱거리고 크레마토리움이라 외치네


흥행사가 오네 끔직하기도 하여라

저 뼈다귀 꼭두각시에 바람이 부서지네

허술한 기차역에 죄수들

아무도 아닌 이들이 시위를 벌이네

안개 속에 두려움이 내려오네

보르지아 복도를 방황하던 이들에게

밤에 똑 같은 별이 떠오르네

골고타의 불을 고정 시켰던 이들에게


앙드레 베르데, 시인, 1944년 3월 22일 체포, 아우슈비츠에 이어 뷔셴발트로 강제 수용당함.

1945년 4월 11일에 해방.


자료7. 망각을 반대하는 문학, 도라 브루더.

화자는 전쟁 중 파리에 거주하다 수용소로 끌려간 유태인 출신의 한 오스트리아 소녀의 실종 조사에 착수한다.

도라가 떠난 다음 날, 점령 당국은 렉스 영화관에서 발생한 테러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야간 통행금지령을 선포했다. 그 누구도 오후 세시부터 다음 날 오전까지 외출할 수 없었다. 도라의 부재를 부각시키듯 마을은 텅텅 비어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의 행방을 쫓으려던 곳인 파리는 그날처럼 인적이 없고 조용해왔다. 나는 텅빈 거리를 걷는다. 퇴근 시간에도, 사람들이 지하철을 타려 서로 북적거릴 때도 파리는 나에게 늘 한적해 보인다. 나는 도라를 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 없고 파리의 어딘가에 그녀의 존재가 울려오는 것 같다. 몇 일전 저녁에는 북역의 근처에서 그녀의 존재를 느꼈다.

나는 그녀가 하루를 어떻게 보냈을지, 어디에 숨어 지냈을지, 탈출하였을 때는 누구와 함께 겨울과 봄을 이겨냈을지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여기 이것이 그녀의 비밀이다. 학대자, 당국, 수용소, 감옥, 유치장, 역사, 시간 과 더불어 당신을 더럽히고 망가트리는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서 앗아갈 수 없는 보잘것없지만 소중한 그녀의 비밀이다.

파트릭 모디아노, 도라 브뤼더, 가이마르 출판사, 1997년.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이 글의 출판일은 어떤 중요성을 지니는가(자료1)?

2. 작가는 레지스탕스 운동가의 맹세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자료3)?

3. 수용소 징용의 뼈아픈 경험을 나타내는 단어와 표현을 찾으시오(자료6). ‘골고타의 미치광이’는 누구를 암시하나?

4. 문학은 어떤 기법을 통해 홀로코스트 사건의 이해를 돕는가(자료7)?

B. 자료 연관짓기

5. 작가들은 독일인들에게 어떻게 맞서는가 (자료1, 자료5)? 그들은 무엇의 이름으로 레지스탕스 운동을 지지하는가(자료1, 자료3, 자료5)?

그들은 서로 다른 기법을 통해 전쟁을 어떻게 이야기로 담아내는가?

C. 작문

6. 제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이 자료들은 무엇을 알려주는가(자료1 ~ 자료7)


p. 274

2) 역사, 전쟁의 기억

A. 망각에 맞서는 전쟁의 희생자들 자료1, 3

■ 1945년 이래 제 2차 세계대전의 기억은 프랑스 정치계가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전쟁의 희생자들은 보상을 얻기 위해, 그들이 겪은 고통을 알리기 위해 투쟁한다. 한편 일부 정치정당과 정치인들은 전쟁의 기억으로 논쟁을 펼치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전쟁의 기억을 미끼로 삼아 이득을 취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었다.

■ 수용소에서 돌아온 희생자들은 프랑스 사회에 재정착하는데 있어 어려움을 호소한다. 여러 단체들은 서로 다른 ‘(전쟁에 대한)기억’을 구성한다. 독일에 거주하는 노동자들은 그들이 겪었던 강제수용노동에 대한 사실이 잊혀지지 않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울려 퍼지지 못할뿐더러 패배자라는 이미지만이 그들을 따라다닐 뿐이다.

B.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신화와 ‘비시 신드롬’ 자료2, 4

■ 드골 장군은 국민통일을 이루기 위해 레지스탕스로부터 출범한 영원한 프랑스 정부의 신화를 알리는데 힘쓴다. 전쟁 순교자의 이미지가 레지스탕스운동가들의 이미지로 투영되는 한편 다른 분야의 희생자들은 상대적으로 소외된다. 레지스탕스와 관련된 레페랑스는 정치성을 띤다. 공산당은 ‘총상자 75000명의 당’으로 불리며 페탕과 라발이 이끌었던 비시 정부의 지지자들은 비시의 선악 논리를 펼치며 스스로를 변호한다.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 1958년 드골의 집권, 긴장감 완화 등은 1960년대부터 양측의 합의 하에 암흑시기를 재조명하는 장을 마련한다. 1964년 쟝 물랑 유골의 판테온 이전은 레지스탕스 운동에 대한 예찬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반면 비시 정부에 대한 언급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 1970년대 들어서는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계획이 재조명된다. 독일과 협력한 비시 정부 관계자들은 역사가들의 펜으로 도마에 오른다. 1973년 로베르 팍스톤의 <비시의 프랑스>가 대표적인 저서 중 하나다. 마르셀 오퓔스의 <슬픔과 연민>(1971년)과 같은 영화는 프랑스 국민들의 레지스탕스 신화를 보여 준다.

■ 1964년 12월, 시효에 의해 소멸되지 않는 인도에 반한 죄를 다루는 법이 의결되며 다수의 재판이 열리게 된다. 1987년에는 리옹 게슈타포의 대장과 클로스 바비 나치 친위대원이, 1994년에는 폴 투비에가, 1997년과 1998년에는 모르스 파퐁이 차례대로 법정에 선다. 재판 당시 역사학자들이 증인의 신분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C. 역사와 기억 자료5, 6

■ 지도층의 입장 변화와 전쟁에 대한 기념 정책은 제 2차 세계대전에 대한 기억을 변화시킨다. 1944년, 드골은 비시 정부는 잠깐의 공백이었을 뿐 프랑스 공화국은 항상 존재해온 것을 강조하며 공화국 선언을 거부한다. 1972년, 퐁피두는 폴 투비에를 특사하고 ‘국가적 화해’를 도모한다. 1995년, 시락은 1942년 7월 16일 벨디브 유태인 일제검거 사건을 추모하며 ‘프랑스 국가’와 독일점령군의 공범 사실을 인정한다.

■ 1990년도에는 부인주의자들의 주장에 맞서기 위한 ‘인종차별, 반유태주의, 외국인 혐오증’과 관련된 모든 발언을 금하고 인도에 반한 죄를 부인하는 것을 범죄행위로 지목하는 법안이 의결된다. 일부 역사학자는 이 이니셔티브에 반대한다. 역사학자들은 정치인들이 역사를 쓰기 위한 자질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생각의 자유에 위협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후에도 전쟁 기억과 관련된 법안들이 채택될 때 마다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어휘 parti des ’75 000 fusillés (총상자 75000명의 당)’ : 프랑스 공산당이 1945년 후 사용한 수식어. 레지스탕스 총상자 7만 5천이라는 숫자는 거짓이며 이는 정치적 속임수에 해당한다. 실제 전쟁 중 전체 총상자 수는 2만 5천명이다.

negationnistes(부정주의자): 나치의 독가스실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 이들 중 일부는 나치의 유태인 및 집시인 대학살을 부정하기도 한다.


자료1. 레지스탕스 활동가와 대독협력자

∙ 1940년 프랑스 인구 수: 4천 2백만 명

∙ 레지스탕스 운동가들이 배포한 지도 수: 21만 3천 부

∙ 독일군이나 친독 의용대에 자원 입대한 프랑스인들의 수: 5만 5천

∙ 해방 동조자: 1051명

∙ 비시 정부가 사용한 도끼 문장 보유자: 2천 6백명


자료2. « 역사학자는 ‘증인’이 될 수 없다 »

중죄법원 판사님.

저는 모리스 파퐁 씨의 요청을 받아 증인의 자격으로 법정에 소환을 받았습니다. 파퐁 씨는 인도에 반한 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출두를 피하고 싶습니다. [...]

역사학자는 ‘증인’이 될 수 없으며 역사학자의 ‘자질’은 판결법원의 규율과 목적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발상의 자유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구 또는 학습이 동반되어야 합니다만 한 개인의 운명이 달린 법정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 입니다. [...]

저는 제 ‘증언’이 중죄법원의 맥락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구상되고 쓰여질 역사적 해석 도구화를 위한 구실이 될까 두렵습니다. 법정에서 나오는 주장은 강의에서 나오는 주장과 그 본질이 다릅니다.

앙리 루소, 모리스 파퐁 제판에 출두된 역사학자, 1997년 10월 6일.

1. 글쓴이가 법정 출두를 거부하는 이유는?
2. 그는 역사학자의 작업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p. 275

자료3. 죄수, 유형수, 피난인 부의 포스터, 1945년.


자료4. 앙드레 말로, 문화부 장관의 연설, 1964년 12월 19일.

1942년 1월 1일, 쟝 물랑이 프랑스에 낙하산을 타고 강하했을 당시, 레지스탕스는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은 조직이었습니다[...]. 물론 레지스탕스 활동가들은 동맹군에 충성을 다하는 병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럿이 아닌 하나로 뭉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쟝 물랑이 런던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런던에 프랑스 병사들이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 런던에서는 자유프랑스군이 결성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쟝 물랑은 드골 장군을 찾아가 돈과 무기를 구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드골 장군에게 ‘도의적 동의’를 구하고 그와 ‘긴밀하고 빠르며 확실한 관계’를 구축하려 했습니다. 드골 장군은 쟝 물랑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장소와 형태에 관계 없이 저항운동을 지속시키고 프랑스의 운명을 지키는데 뜻을 모았습니다. [...]

‘레지스탕스의 통합.’ 이것이 바로 쟝 물랑이 하루하루 레지스탕스를 이끌며 전념했던 일입니다.

모두 해방을 꿈꾸는 급진사회주의와 반동주의 창시자, 반동주의와 자유주의 장교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트로츠키 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등 서로 다른 이들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얼마나 큰 어려움이 있었을지 상상이 가십니까. [...] 국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있을 때 레지스탕스의 통합을 위해서 정치적 여론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 레지스탕스의 통합은 유럽에서 반향을 일으키던 전체주의 사상을 물리칠 것이었습니다 [...] 레지스탕스의 통합은 국가의 통합을 위한 주요 방안이었으며 이는 드골주의를 표방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레지스탕스의 통합은 프랑스의 생존을 선언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

아프리카의 태양과 알자스 전투에서 돌아온 르클레르가 성대한 행렬과 더불어 앵발리드에 들어왔듯이, 쟝 물랑이 이곳에 들어옵니다. 그는 그와 같이 표현조차 하지 못하고 가버린 이들과 함께 이곳에 있습니다 [...].

오늘 조의를 표하기 위해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은밀하게 불렸던 ‘당원들의 노래’입니다. [...] 프랑스의 젊은이들이여,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는 불행의 노래였던 이 노래를 들으십시오. 장송곡입니다. 오늘 쟝 물랑의 유골은 카르노와 그의 군인들, 레미제라블의 빅토 위고, 정의가 돌보고 있는 조레스의 옆에 놓여질 것입니다. 프랑스의 젊은이들이여, 오늘 가기 전 그의 얼굴과 입을 열지 못했던 그의 입술을 어루만지고 그를 생각합시다. 그날, 그의 얼굴은 프랑스의 얼굴이었습니다.

앙드레 말로, 쟝 물랑의 유골 이전 당시.

1. 르끌레르, 카르노, 조레스 등과 같은 역사적 암시를 설명하시오.
2. 화자는 쟝 물랑, 드골, 드골주의 사이에 어떤 관계를 정의하는가?
3. 이 글을 어떠한 점에서 1940년 ~ 1944년에 대한 공식적인 추모사라고 할 수 있나?


자료5. 기억과 관련된 법안들.

규범적 법률:

■ 1990년 7월 13일 법: 게소법(Gayssot). 반인권 및 반인도주의적 발언을 억압하는 법.

선언적 법률:

■ 2001년 5월 23일 법: 토비라법(Taubira)은 노예제와 노예무역이 반인륜 범죄라고 규정한다.

■ 2001년 1월 29일 법: 프랑스는 1915년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존재를 인정한다. 다만 이 법은 대학살의 주모자를 명시하고 있지 않으며 게소법과는 반대로, 아르메니아 대학살 존재를 부정해도 처벌을 가하지 않는다.

■ 2005년 2월 23일 법: 프랑스 식민지의 민족을 인정하는 법. 이 법을 둘러싼 논란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식민지화의 긍정적인 역할에 관한 조항이 추후 삭제되기도 한다.


자료6. 학살, 판사, 역사학자.

히틀러가 저지른 대학살의 부정과 나치주의의 보편화는 끝내 여론을 깊이 자극하였고 프랑스 하원은 1990년 6월 30일, 1881년 7월 29일 재정된 언론의 자유와 ‘모든 인종 차별, 반유태주의, 외국인 혐오 주의와 관련된 행위’를 억압하는 법안을 수정하는 새로운 법안의 틀 안에서 반인도주의적 범죄 부정을 벌하는 조항을 의결시킨다. 반인도주의적 범죄는 1945년 8월 8일 런던 협정에서 정립된 바가 있다. 그렇다면 부당하게 ‘수정주의자’라고 불리는 이들의 운명은 법정에서 결정되어야 하는가? 과연 법의 이름으로 그들을 억누를 수 있고 억눌러야 하는가? 역사에 대한 발언 권이 이것인가? 법은 금기, 시효를 정하며 자유를 정립할 수 있다. 법은 규범적이라 할 수 있다. 법은 진실을 전부 밝힐 수 없다. 역사적 허구를 범죄로 처벌하는 것 보다 어려운 일은 없을뿐더러 역사의 진실이라는 개념 자체는 국가의 구속력을 거부한다. 이는 소련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프랑스 공교육 교사들에게 교과서 자유선택권을 부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학살은 ‘고찰’될 수도 있으며 되어야 한다. 또한 비교되고 가능하다면 학살에 대한 해석을 달수도 있어야 한다. 말들은 평가 받아야 하며 기억의 오류는 교정되어야 한다. 범죄를 설명하는 일, 범죄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 나치의 학살을 기타 반인도주의적 범죄와 비교하는 일이 바로 이 같은 범죄를 물리치는 일이다. 자유로운 정신은 억압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처럼 형성시켜야 한다.

마들렌 르베리우, 역사학자, 전 인권 보호 연맹 회장, <역사(L’Histoire)>, 1990년 11월.


p. 275

자료집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

● 나치 수용소에 끌려간 유태인 7만 6천명 중 단 2천5백 명 만이 나치의 유태인 학살계획을 피해 살아 남을 수 있었다. 프랑스 내부 수용소에서는 3천명이 사망했고 약 천 명이 처형당했다. 프랑스 내 유태인 중 1/4이 죽었다.

● 나치 학살에 대한 기억을 구성시키는 작업은 점차적으로 진행되었다. 1945년 후 유태인들은 기타 다른 수용소 희생자들로부터 특별히 다르게 구분되지 않았으며 유태인들은 단지 프랑스 사회에 다시 정착하고 싶을 뿐이다. 1967년 6일 전쟁은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다. 격렬한 반시오니즘은 한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더욱 불러 일으킨다. 반시오니즘의 부흥, 부정주의 주장의 등장 및 희생자 연합의 작업 등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 살리기로 이어진다. 21세기 초반에 와서는 아우슈비츠가 강제 수용소의 상징이 된다.


어휘

‘solution finale’(나치의 유태인 학살계획):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 계획.

‘Shoah’(홀로코스트): 히브리어로 재앙, 비탄을 뜻한다.


자료1. <홀로코스트>, 유태인 수용과 학살을 다룬 클로드 란츠만의 영화. 1985년.

« 이야기하기 조차 힘듭니다.

그 누구도 여기서 일어난 일을 겪을 수는 없습니다.

안됩니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내 자신이...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습니다.

네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이곳은 항상 조용했습니다. 늘.

매일 유태인 2천명이 불타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조용했습니다.

아무도 소리 지르지 않았습니다. 각자 자신의 일만 했죠. 고요하고, 잔잔했어요.

지금 이 순간처럼. »

시몬 스레프니드, 부모가 처형을 당한 아픔을 겪은 생존자.


자료2. 1990년 6월, ‘유태인 수용소 희생자들의 아들과 딸 연합’의 시위, 르네 부스케, 비시 정부 구 경찰청장 집 앞에서.

« ‘유태인 수용소 희생자들의 아들과 딸 연합’은 1979년에 창설되었다. 이 단체의 창설 목적에는 프랑스 내 유태인을 수용소로 몰고 간 독일 및 프랑스 관계자들의 처벌 촉구, 1940년과 1944년 사이 프랑스 내 유태인들의 삶을 매우 자세히 표현한 저작물 발간, 유태인 희생자 추모 수호, 반유대주의와의 투쟁, 이스라엘 국가 존립 지지, 전세계에서 박해 받는 유태인들과 전쟁 생존자들 보호 등이 있다. 또한 이 연합은 역사를 변조하는 이들과 법정에서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이들과 투쟁하고 있으며 여러 중요한 발행물에 도움을 주고 있다. »

세르쥬 클라스펠드, Le Calendrier de la persecution des Juifs en France, 1940-1944, 파리, 1993년


p. 277

자료3. 아우슈비츠, 하나의 추모에서 또 다른 추모로.

2005년 1월에 열린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60주년 기념식은 전쟁 추모와 관련된 새로운 정세를 잘 나타내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까지는 수용소에 대한 기념식은 폴란드인들과 공산당원들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폴란드인들과 공산당원들은 유태인 희생자 수백만 명을 부정하곤 했다.

1995년 기념식에서는 유태인의 입장과 폴란드의 입장이 충돌하였으나 2005년 기념식에서는 그 어떠한 논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기념식에는 유태인 수용소 희생자들을 대표하는 시몬 베일, ‘정치수용범(역사학자들이 말하는 레지스탕스 운동가들)’을 대표하는 블라디슬로브 바르토체브스키 아우슈비츠 국제위원회 회장, 집시들을 대표하는 로마니 로즈 독일 신티(Sinti)∙롬 민족 중앙 의회 회장 등이 희생자들을 대표하여 참석했다. 한편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아우슈비츠를 방문했다. 자크 시락 대통령은 유태인이 기차에서 내리던 현장에 추모장소를 마련했다. 또한 아유슈비츠 제1 수용소 20번 블록에 프랑스 추모관을 설치했다. 1979년의 추모식이 ‘1935년 ~ 1945년 프랑스국민들의 투쟁과 순교’와 관련이 있었다면 이번 추모식은 ‘1942년 ~ 1945년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프랑스인들’을 주제로 삼았다. 이 두 추모식의 제목은 역사관과 기억이 변모했다는 사실을 잘 나타낸다.

아네트 비에프이오르카, CNRS Them@, 2005년 3월.


자료4. 시몬 베일의 증언

우리 국민 대부분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나는 1946년 1월 드골의 사임이 국가적 재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싶다. 드골은 비시 정부 심판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프랑스인들간의 화해를 지나치게 이끌어내려 했다.

라발과 페탕의 재판에서는 수용소 강제수용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 유태인 문제는 철저히 은폐됐었다. 정부의 모든 기관도 일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유태인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홀로코스트의 기억도 그들에게는 과연 얼마나 충격으로 다가왔을지 아닐지 상상이 된다.

추후 나는 드골의 정책이 ‘망각’을 넘어 더 먼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골은 유태인 문제뿐만 아니라 프랑스를 분열시키는 모든 요소, ‘자유로운’ 프랑스인들과 어둠 속 레지스탕스 운동가들 간의 대립, 정당 간의 다툼을 침묵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요소들이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요소들 아닌가.

시몬 베일, 한 삶 (Une vie), Stock 출판사, 2008년.


자료5. «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 오늘날에도 나치를 저지하는 또 하나의 일이다 »

« 내게 소금을 건네주시오 ». 언젠가 수용소로 끌려갔던 이야기를 글로 쓴다면 제목을 저렇게 짓고 싶다. 이 제목에 대한 생각은 수용소 희생자 연합에서 개최한 한 회의에서 떠올렸다. 회원 중 한 여성이 말하길, 그녀의 가족이나 친구들과 식사를 하는 도중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면 « 사라야 소금 좀 건네줘. »라며 그녀의 이야기를 묵살시켰다고 한다.

큰 틀에서 보면, 수용소 생존자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원치 않는 이들에게 말할 때 어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듣는 이들의 입장에서도 « 희생자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면 그에게 상처를 줄까 »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증언자들의 경우, 수 많은 희생자들이 겪은 이야기를 되살리는 과정과 범죄가 어떻게 저질러졌는지 생각하는 과정이 고된 일이다.

따라서 말한다는 것은 하나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과도 같다. 또한 하나의 위안과 평화를 찾는 일과도 같다. 법치국가에서 범죄를 목격한자는 증언을 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나갈 아이들과 손자들이 있다는 것이 오늘날에도 나치를 저지하는 또 하나의 일이다.

과거의 고통, 쓰라린 경험, 끔찍한 장면에 대해 말하고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고발하는 일이야 말로 수동적인 희생자 입장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며 기억과 인권을 수호하는 활동적인 투쟁가로 진입하는 길이다.

앙리 보를랑의 이야기. 15세 때 아우슈비츠에 끌려감.

Marie-Anne Matard-Bonucci에 실림, la Liberation des camps et le retour des deportes, Complexe, 1995년.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학살에 대한 기억을 구성하는 작업에서 영화의 역할은 무엇인가(자료1)?

2. 르네 부스케의 집 앞에서 시위를 하는 이유는(자료2)?

3. 아들과 딸 연합의 투쟁은 어떤 결과로 이어지나(자료3)?

4. 1945년 해방 이후 유태인 수용소 희생자들에 대한 사실을 은폐했다고 보여주는 요소는 무엇인가(자료4)?

5. 유태인 포로의 특이사항은 전쟁 직후 포함되었는가(자료4, 자료5)?

6. 수용소 희생자들의 호소가 많이 들려지지 않는 이유는(자료4, 자료5)?

B. 자료 연관짓기

7. 학살에 대한 기억을 긍정하기까지 거쳐간 단계는 무엇인가(자료1부터 자료5)?

C. 작문

8. 민족 학살 기억에 대한 컨텐츠/내용물은 무엇인가?


p. 278

추모: 추모 건축물

●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수 많은 시민들과 수용소 노역자들은 폭격 속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의 ‘집단 죽음’을 기리기 위한 건축물들은 제 1차 세계 대전의 추모 건축물과는 상당히 달랐으며 그 수도 더 적었다. 이는 추모에 대한 여론이 얼마나 다양하고 분열되었는지 잘 나타낸다. 추모 건축물 중에는 벽이나 사망장소에 세워진 석비와 표지판이 있다. 또한 수용소나 항독지하운동가들의 은닉처와 같은 상징적인 장소에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관 등도 있다.

● 추모 건축물은 군중을 한데 모으는 추도를 위한 장소이자 정치인들의 연설 공간이기도 하다.


자료1. 콜롬베의 로렌 십자가.


자료2. 파리 수용소 순교자 추모관의 철문.

노틀담 대성당 뒤편에 위치한 수용소 순교자 추모관은 1941년과 1944년 사이 수용소에 끌려간 프랑스인들의 고통을 기리는 장소이다. 이 추모관은 1962년 4월 12일 드골 대통령의 명으로 열렸으며 Réseau du Souvenir(추모 네트워크)라는 단체의 제안에 따라 건축가 조르주-앙리 팽귀송이 설계를 맡았다. 이 단체는 1964년 2월 29일 국가에 기부를 하기도 했다.

작은 공원을 지나면 의도적으로 가파르게 설계된 계단을 따라가면 커다란 벽으로 둘러 쌓인 삼각형 광장이 나온다. 시간을 초월한 이 공간에서는 창살과 내리닫이 살문을 넘어 하늘과 센느강의 극히 일부만 볼 수 있다. 추모비는 콘크리트 위에 하얀 시멘트와 프랑스의 산자락에서 채굴한 돌을 발라 제작했다. 통돌로 된 두 블록 사이의 좁은 공간을 지나면 땅에서 반사된 빛이 약하게 밝히고 있는 납골당이 나온다. 입구 앞에는 노이슈타트 수용소에서 사망하고 이곳에 1962년 4월 10일에 옮겨진 한 무명인의 시체가 보관된 무덤이 있다. 어둡고 긴 갤러리는 나치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한 희생자 수만 명을 기리는 유리면들로 뒤덮여 있다. 납골당의 중앙에는 추모별이 동판에 새겨져있다. 양쪽 갤러리에 있는 삼각형 모양의 방들에는 여러 수용소에서 가져온 흙과 유골을 담은 단지들이 보관되어 있다. 벽에는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한 로베르 데스노 말고도 폴 엘뤼아르, 루이 아라공의 시 구절이 적혀있다.

국방부의 소개문.


p. 279

자료3. 베르코르(Vercors)지방, 바시유(Vassieux) 추모 정원.

희생당한 시민을 기리는 정원. 바시유 마을의 공동 묘지 내에 지어졌다. 정원의 기획자 임마뉘엘 솔리니에는 묘지 내 비석 일부를 그대로 두고 희생자 73명의 죽음을 기리는 유리판을 잔디밭 위에 세웠다. 대리석판 위에는 73인의 이름과 더불어 ‘남으시오 – 맞서 싸우시오’라는 문구가 함께 적혀있다.

자료4. 추모 내력

- 제 1차 세계대전 추모

11월 11일: 승리와 평화의 축제 (1920년 11월 10일 법)

          승리와 평화 기념일 (1922년 10월 25일 법)

- 제 2차 세계대전 추모

5월 8일: 승리 기념일 (1946년 5월 7일 법)

        휴전 기념일 (1953년 5월 20일 법)
        승리 기념일 (1959년 4월 11일 법령)
        기념일 삭제: 지스카르 데스탱의 편지, 1975년 5월 7일
        기념일 다시 제정 (1981년 10월 2일 법)

4월 마지막 주 일요일: 전쟁 영웅과 수용소 희생자 추모일 (1954년 4월 14일 법)

7월 16일: 비지 정권 아래 인종차별과 반유태주의 학대를 받은 이들을 추모하는 날.

         벨디브의 날(Vel’ d’hiv) (1993년 2월 4일 법령)

6월 18일: 드골 장군의 호소를 기념하는 날 (1996년 3월 10일 법령)


자료5. 나츠바일러-슈트루포트 수용소의 기념비

하얀 돌로 이루어진 41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구조물. 이 기념비는 « 꺼져서는 안될 수용소 기억의 불꽃 »을 상징한다. 기념비에는 한 노역자의 해골이 새겨져 있다. 건물의 하단에는 1957년 5월 5일에 묻힌 한 프랑스 희생자의 시신이 누워있다. 이 기념비는 1960년 7월 23일 드골 장군에 의해 세워졌다.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이 건축물들이 표현하는 상징들은 무엇인가 (자료1, 2, 3, 5)?

2. 각각의 추모 건축물들에게 있어 관련된 장소가 중요한 이유는?

3. 이 건축물들은 어떤 방식으로 역사를 재조명 하는가 (자료2, 5)?

4. 예술가들은 어떤 절차를 걸쳐 희생자와 순교자들이 겪은 일을 되살려 내는가? B. 자료 연관 짓기

5. 군인들과 시민들에게 할당된 부분을 명시하시오. C. 작문

6. 이 건축물들은 제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어떤 점들을 부각시키는가?


p. 280 복습 자료

필수 연도

- 1945년: 수용소 노동자, 전쟁포로, ‘피난민’들의 복귀

- 1951년: 사면법

- 1964년: 쟝 물랑의 유골 판테온으로 이전.

        시효의 대상이 되지 않는 전범관련법

- 1987년: 바르비 재판

- 1995년: 파퐁 재판


필수

1. 숙청과 피난민들의 복귀

■ 해방 직후, 프랑스는 강렬한 내부 충돌에 휩싸인다.

■ 잔인한 숙청 기간에 이어 사법적 숙청이 뒤따른다.

- 군사재판,

- 시민법정,

- 법원

재판결과는 피고인의 사회직능별 카테고리에 따라 다르다.

■ 비시 정부의 장관과 고위급 관계자들은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는다.

사면법은 과거의 역류 시기를 불러온다.

■ 수용소 희생자, 전쟁포로, 대독노동자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은 아픔의 기억이 잊혀지지 않도록 각자가 겪은 경험과 고통을 알리는데 힘쓴다.

2. 추모와 전쟁의 기억

■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기억은 어렵게 구성된다. 그 중 일부는 신화를 바탕으로 진행된다.

- 1970년대 들어,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드골 신화가 흔들린다.

- 비시정부에게 프랑스 유태인 강제수용 문제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 반인도주의적 범죄를 ‘시효의 대상이 되지 않는 죄’로 선언한 법이 의결됨에 따라 대규모 재판이 진행된다. 재판 기간 내내, 전쟁의 기억을 두고 프랑스 내에서 여론이 분열된다.

■ 희생자 연합 단체들의 투쟁 끝에 홀로코스트 추모 작업이 시작된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시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계획에 초점을 맞춘다.


전기 모리스 파퐁(Maurice Papon, 1910-2007), 프랑스 고급 관료.

클라우스 바르비(Klaus Barbie, 1913-1991), 1942년 ~ 1944년 사이 리옹에서 활동한 나치 친위대원.

르네 부스케(Rene Bousquet, 1909-1993), 1942년 ~ 1943년, 비시 정부 경찰청장.

쟝 물랑(Jean Moulin, 1899-1943), 도지사이자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가.

혼동하지 않기

역사와 기억

→ 역사: 역사는 인간의 과거에 대한 지식이다. 역사는 보편적이다.

→ 기억: 기억은 한 개인 또는 하나의 집단이 겪은 경험과 인상에서 유추된 집합체이다.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기억은 과거를 재구성한다. 기억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다.

<역사를 위한 자유(Liberte pour l’histoire)>연합 회장이자 역사학자인 피에르 노라는 « 역사는 집결시키고 기억은 분열시킨다 »라고 말했다. (월간지 Enjeux와의 인터뷰에서, 2007년 7월) 전범, 반인륜범죄, 집단살해

전범과 반인륜범죄는 1945년 8월 8일, 런던 협정에서 동맹국들에 의해 정의되었다.

→ 전범: 전쟁 관련 법과 관습법 위반을 의미한다. 여기에 살인, 학대, 강제노역이나 기타 목적을 위한 시민 또는 전쟁포로 강제수용, 인질처형, 도시 또는 마을 파괴 등이 포함된다.

→ 반인륜범죄: 전쟁 전 혹은 전쟁 기간 내 정치적, 인종적 혹은 종교적 이유를 빌미로 살인, 학살, 노예화, 시민 강제수용을 한 경우.

→ 집단살해: UN이 1948년 12월 9일 협정에서 정의한 용어.

« 민족, 인종, 종교 등 어떠한 특성을 공유하는 집단 전체를 의도적으로 쓸어버리는 행위 ».


p. 281

사료해설 (11/15) 주제: 프랑스 정의의 사도들에게 표하는 오마쥬


60년 전, 잔인한 나치무리들은 무너져 내린 유럽에서 유태인 학살계획을 결정했습니다. [...] 철저한 잔인함과 난폭이 동반된 나치의 광기는 유태인을 겨냥했습니다. [...] 서방 유럽은 잔인함의 늪 속에 깊숙이 빠졌습니다. 한편 비시정권은 1940년 10월 3일 « 유태인 신분법 1»을 제정하며 프랑스의 명예를 훼손하기도 했습니다. [...] 프랑스에 6월 7일 독일의 행정명령2이 내려지고 노란 별의 치욕 사건이 발생한지 65년이 지났습니다. 또한 돌이킬 수 없는 7월 16일과 17일에 일어난 벨로드롬 범죄 사건3이 있습니다. 8월 26일부터 28일까지 일어난 자유 지역에 있던 수 천명의 외국 유태인 소탕 사건도 있습니다. [...]

어둠이 드리웠습니다. 하지만 빛도 있습니다. 유태인 가족에게 종이를 나눠주고 마을 주민들에게 유태인과 식권을 나누자고 설득하던 시청의 여직원이 있습니다. [...] 독일군의 자동차 브레이크 소리가 나자, 건물에 숨어 있던 유태인들을 경고하여 그들을 강제수용으로부터 구해낸 관리인이 있습니다. 도망 치던 유태인 수 백명을 모든 마을, 샹봉 쉬르 리뇽(Chambon-sur-Lignon) 지방의 모든 사람들을 이끌고 맞이한 트록메 목사가 있습니다. 유태인 아이들을 수녀원과 기숙사에 맞아들인 수녀님들이 있습니다. 도피중인 피난민들을 도와 국경을 넘은 사제님들이 있습니다. [...] 모두가 위험을 무릎 썼습니다. 게슈타포의 갑작스런 순찰, 심문, 고문을 받을지도 모른 그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수용소에 끌려가거나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습니다. [...]

위대한 이들을 기리는 이 자리에서, 오늘 프랑스는 이 모든 분들의 헌신을 증언하려 합니다. [...] 프랑스인이란 누구인가, 프랑스의 보편적 가치는 무엇인가 자문하는 이들에게, 프랑스의 정의의 사도들인 여러분들은 저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우리 역사 중 가장 잔혹한 시기에서도 내놓았습니다. 프랑스의 이름으로, 프랑스 모든 민족의 이름으로,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의 연설, 판테온에서, 2007년 1월 18일.


1. 유태인 신분법 (1940년 10월 3일): 비시 정부가 유태인의 공공기관 및 사기업 진출을 금하는 법령.

2. 6세 이상, 점령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유태인에게 노란 별을 착용하도록 강요.

3. 1942년 7월 16일 ~ 17일: 유대인 12884명이 체포되어 파리의 벨로드롬에 집결되었다.


참고자료

야드 바 솀 표창장.

야드 바 솀 재단이 1995년에 수여한 표창장. 죽음 혹은 강제수용 위기에 처한 유태인을 물질적 보상 없이, 위험을 무릎 쓰고 도운 사람들을 수여함(야드 바 솀 센터는 프랑스에서 수여 대상자 2740명으로 추산했다).


문제

1. 자료를 소개하시오: 연설의 종류, 연사의 직위, 연설문 장소, 연설문의 날짜와 관련 사건들.

2. 프랑스 정의의 사도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떻게 소개되었는가?

3. 그들에게 오마쥬를 표하는 이유는?

4. 이 연설문에서 나타나는 « 기억 »은 무엇인가?

5. 이 연설문은 1940년과 ~ 1944년 사이와 이 시기의 기억과 관련된 어떤 정보를 제공하는가?


문제해법

A. 전반적인 힌트

이 연설문은 수 많은 제2차 세계 대전 추모 관련 연설문 중 하나이다. 사건들이 일어난 지 60년 이상이 지난 시점에서, 연설문은 ‘어둠의 시기’를 조명한다. 이 시기와 관련되어 있는 다른 기억들과 연관을 지으시오.


B. 문제 해답을 위한 힌트

문제1: 대통령이 연사인 연설문이다. 대통령 직위의 중요성을 떠올리시오.

판테온은 프랑스 역사의 위인들 시신이 잠든 곳이다. 프랑스 공화국과 대통령은 주기적으로 이곳에서 추모를 한다.

문제2: 시라크 대통령이 개인적 예시를 여럿 들은 이유를 생각하시오.

연설문의 제목에 걸 맞는 프랑스인들은 누구일지 떠올리시오.

문제5: 연설문은 이 시기의 긍정적이고 또 다른 의미의 기억을 구축하는데 기여한다.


제 15 장: 1945-1962: 프랑스를 위한 제도는?

p. 282

해방 이후 프랑스는 국가 재건설과 새로운 제도 설립이라는 두 가지 주요 정치 쟁점과 마주한다. 제4공화국 설립자들은 국가를 근대화함과 동시에 새로운 헌법과 함께 견고하고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제도를 갖추기를 원한다. 그러나 1958년에 들어 이 제도들은 몰락하고 그 잔해 위로 초기 몇 년 간 알제리 전쟁을 겪을 제5공화국이 들어선다.


제4공화국의 짧은 존재 기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1958년, 어떠한 상황 내에서 체제 변화가 일어나는가?

자료1. 경제부흥…

스캔.

1946년경 경제부흥 및 도시계획부 포스터

“생산, 프랑스의 새로운 전투” (‘리베라시옹’지 슬로건)


p.283 스캔

자료2. 그리고 정치부흥… 스캔

1945년 루시앙 베르토의 대중공화당운동(MRP) 포스터

"돈의 전선에 맞서 우리는 노동 전선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 정의로운 정부는 공익을 실천하고 가장 불쌍한 자들을 돕는 정부이다. 해방 이후 3당연립체제 시절 사회적 관점에서 이것이 가장 가치 있는 성과를 냈던 시절은 3당연립체제 시기이다(공산당, 사회당, 대중공화당운동)."

1953년 10월 12일 MRP소속 아베 고 오드 지역 의원


p.284

1) 초기의 "4공"

A. 새로운 공화국 설립 자료1, 3

■ 1944년 여름부터 1947년 초, 새로운 제도들이 확립된다. 2년 반의 기간 동안 프랑스는 임시제도 및 임시정부 상황에 놓인다. 국가에 새로운 제도를 설립하기 위해 2회의 제헌국회, 2개의 헌법 초안, 3회의 국민투표를 거치게 된다. 1945년 10월 21일, 최초 제헌국회가 선출된다. 세 개의 지배정당이 주축을 이뤄 이 국회를 구성한다. 해방 시 사상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지닌 공산당(득표율 26%), 국제 노동자 동맹 프랑스 지부 소속 사회당(득표율 23%), 1944년 창당한 기독교민주당 일부, 대중공화당운동(MRP: 득표율 24%)이다. 이 세 정당이 전체 중 3/4의 표를 차지한다.

■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의 수정이었던 드골 장군과 의회 간에 빠른 속도로 관계가 형성된다. 드골 장군은 의회가 정부의 주도권을 쥐는 것을 거부한다. 이를 이유로 드골은 1946년 1월 20일 사임한다.

■ 드골 정권에서 이미 권력을 쥐고 있었던 세 지배정당은 함께 동치를 계속한다. 이것이 바로 3당연립체제이다. 의회에서 절대다수석을 차지했던 공산당과 사회당은 강력한 의회를 구성하는 계획을 강요하는 데 이른다. 그러나 대중공화당운동을 포함한 기타 정당들은 이 계획에 반대한다. 1946년 5월 5일 국민투표 결과는 53%의 "반대"로 귀결된다.

B. 제4공화국 헌법 자료2, 4, 5

■ 새로운 제헌국회가 1946년 6월 2일 선출된다. 1945년 10월과 마찬가지로 3당연립체제를 이루는 정당들이 전체 표의 3/4을 획득한다. 그러나 두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사회당과 공산당은 더 이상 절대다수석을 차지하지 못 하고 프랑스공산당은 입법부와 행정부 권력 간의 균형이라는 이념을 고수하는 대중공화당운동에 뒤쳐진다.

■ 결국, 3당연립체제는 타협에 이른다. 공화국평의회의 존재가 2차 의회에서 논의된다. 그러나 입법권은 5년 임기로 선출된 의회가 쥐고 있었다. 의회만이 법률을 표결하고 평의회는 의견만 제시할 뿐이었다. 한편, 의회는 행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행정부를 조종한다. 공화국평의회와 함께 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하고 절대다수투표를 통하여 정부 운영을 위하여 공화국 대통령이 지명하는 평의회 의장 공천권을 표결한다. 이 2차 헌법 초안은 1946년 10월 승인된다.

C. 재건과 쇄신 자료6

■ 전쟁으로 인한 파괴로 인해 국가 재건이 필수불가결하게 된다. 프랑스 쇄신이라는 열망은 개혁에 대한 의지로도 드러난다. 국영화를 통하여 거대 공공기업부문이 구성되었다. 정부가 경제 부분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된 것이다. 좌파적 성격이 강하고 의회 중추의 성격도 좌파인 전후 이데올로기적 맥락에서 국영화는 프랑스 경제를 근대화하고 재건할 수 있는 방안으로 간주되었다.

■당대 정치 책임자들에게 있어 이러한 근대화는 당면과제를 정의하는 지시적 계획경제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었다. 1945년 12월 21일, 장 모네가 이끄는 위원회제가 창설되었다. 1945년 10월 창설된 사회 보장과 같이 "불안정의 요소에 맞서 국가 인구 전체를 보호할" 주요 결정 또한 이루어졌다.

어휘

Assemblé constituante(제헌국회): p.302 혼동하지 않기 참고

tripartisme(3당연립체제): 해방 이후 프랑스 정계의 3개 지배정당인 공산당(PCF), 사회당(국제 노동자 동맹 프랑스 지부 소속), 대중공화당운동(MRP)의 연합.

investiture(공천): 제4공화국 당시 정부 수장 지정 방식: 평의회장 후보가 국회에 자신을 신임할 것을 요구하는 방식. 과반수 의원이 찬성할 경우 해당 후보가 "공천된다".

nationalisation(국영화): 기존에 민간 혹은 민영 소유였던 재화의 국가 소유화(토지, 공장, 은행 등).

planification(계획경제): 사전에 수립된 계획을 통한 생산 구성. 강제성을 가질 수도 있고(URSS의 경우) 참고적 성격을 띨 수도 있다(프랑스의 경우).


자료1. 스캔. 1945년 10월 21일 선출된 제헌국회

(1차 제헌국회)

PCF(공산당) 안보임

SFIO(사회당(국제 노동자 동맹 프랑스 지부 소속)) 142

MRP(대중공화당운동) 152

=> 3당연립

centre gauche(중도좌파) 59

온건파 61

1. 어떤 두 정달들이 함께 절대다수석을 차지하고 있는가?
2. 대중공화당운동은 누구를 대표하는가?


자료2. 스캔. 1946년 6월 2일 선출된 제헌국회

(2차 제헌국회)

PCF(공산당) 안보임

SFIO(사회당(국제 노동자 동맹 프랑스 지부 소속)) 129

MRP(대중공화당운동) 169

=> 3당연립

centre gauche(중도좌파) 53

온건파 67

1. 1945년 제헌국회와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2. 3당연립체제 내 어떠한 중요 차이점이 나타나는가?

p.285


자료3. 스캔. 1944년 선거권을 획득한 프랑스 여성들

1946년 투표소


자료4. 1946년 헌법 서문

프랑스 국민은 모든 인간이 인종, 종교, 신념에 관계없이 양도할 수 없는 신성 불가침의 권리를 지님을 선언한다. 공화국 법률로부터 인정받은 근본적 방침과 1789년 인권 선언으로 부여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공식적으로 재확언한다. 또한 프랑스 국민은 우리 시대에 필수적인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방침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법률은 모든 분야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여성에게 보장된다.

자유를 추구하는 행위로 인하여 박해 받는 모든 인간은 공화국 영토에서 보호받을 권리를 지닌다.

모든 개인은 일할 의무가 있으며 일자리를 얻을 권리를 지닌다. 그 누구도 개인의 혈통, 사상, 신념 등으로 인해 노동 시 또는 직장에서 권리를 침해 받을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노동조합 행위를 통해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할 수 있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다.

파업권은 규제 법규 내에서 행사될 수 있다.

모든 노동자는 대표자를 통하여 근무 환경 및 기업 경영 결정에 공동으로 참여한다.

국가 공공재 또는 독점의 대상이 되는 모든 재화, 모든 기업은 공동 소유가 되어야 한다.

국가는 개인과 가정에 그들의 발전을 위한 필요조건을 보장한다. [...]

프랑스는 해외 영토 국민들과 함께 인종, 종교 간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세워진 권리와 의무의 연합을 구성한다.


자료5. 스캔. 1946년 제4공화국 헌법

1. 누가 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하는가? 2. 의회가 가진 절대권력을 설명하시오.


자료6. 스캔. 1945년 공산당 포스터

1. 1945년 프랑스 공산당은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는가?
2. 프랑스 상황에 대한 프랑스 공산당의 태도는 어떠한가?
3. 이 포스터를 통하여 공산당이 선전하고자 하는 목적 무엇인가?


p.286

자료집


1944-1946년 대개혁


해방 시기 완만한 신정치제도 조정과 함께 고도의 경제적, 사회적 삶 관련 대개혁이 실시된다. 레지스탕스 국민의회 강령에 의해 일부 영감을 받은 국영화의 흐름은 거대 공공기업부문 구축을 가능케 한다. 정부는 위원회제를 구성한다. 사회 보장 제도의 창설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정년 및 질병과 산업재해에 대한 보호를 보장한다.

해방 이후 프랑스에 중요한 전환점이 나타난다. 여성이 최초로 투표에 참여한다. 1944년 4월 선거인 확대 행정명령에 드골이 서명하였다.


자료1. 레지스탕스 국가위원회 헌장 (1944년 3월)

경제 계획 관련: 경제 지휘권자의 경제적 봉건제도 축출을 포함하는 진정한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 수립, 이성적인 경제조직 설립, 대규모 독점 생산물, 에너지 자원, 지하자원 및 은행의 국가 귀속, 필요직능을 갖춘 노동자들의 기업 지휘 및 행정활동 참여권 및 노동자들의 경제활동 참여.

사회 계획 관련: 노동권 및 휴식권 [...], 임금의 인상조정, 노동이 불가능한 모든 시민의 생존방법을 보장하고 해당 시민과 국가의 관리를 통한 완전한 사회보장 설계, [...] 고령 노동자들이 명예롭게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하는 정년.


자료2. 스캔. 국영화


자료3. 노르-파-드-칼레 탄광 국영화 행정명령

프랑스는 탄광 산업에 지대한 어려움을 가져 온 4년 간의 점령에서 이제 막 벗어났다. [...] 전쟁 시 탈취, 노동력 부족, 흩어진 가정에게 점점 더 가해지는 부담이라는 심각한 지하 채취 또는 수입 원료들의 감소는 탄광산업의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효과적인 해결책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시설 구상과 설립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하였다.

오직 정부만이 이와 같은 일을 행할 충분한 권한을 소유하고 있다 [...]. 오직 정부만이 광산에 생산 프로그램을 요구할 수 있고, 필요 자원 채취를 결집할 수 있으며, [...]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노동자들의 건강과 이익을 더욱 잘 보존할 수 있고 경영인과 노동자 간에 너무나 자주 발생하는 갈등을 완화시킬 수 있으며, 정당성에 대한 요청을 할 수 있으며, 노동자들이 기업 경영에 참여하게 할 수 있다 [...].

이와 같은 절대적인 이유로 정부는 노르-파-드-칼레 탄광을 국영화하기로 결정하였다.

1944년 12월 14일 노르-파-드-칼레 탄광 국영화 행정명령


자료4. 전기 및 가스 국영화

전기 및 가스 국영화

제1조: 다음의 사항들은 국영화된다:

1. 전기 생산, 운송, 유통, 수출입

2. 연료가스 생산, 운송, 유통, 수출입

3. 국영화된 전기 운영 기업은 "프랑스 전력공사(EDF)"로 명명되어 산업적 및 상업적 국영회사가 된다.

제20조: 공공 서비스는 법령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은 18인의 평의회 구성원들에 의해 관리된다.

1. 정부 대표 6인, [...]

2. 소비자 대표 6인, [...]

3. 임원 대표 6인, [...]

1946년 4월 8일 관보에 게시된 법


p.287

자료5. "근대화 및 시설 계획 관련 제안" (1945년 12월)

분명히 명시되었던 기본방침은 "근대화 및 재건설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방침은 수출을 위한 필수원료 수입 비용 지불을 위해 종류가 다양하고 덜 비싼 제품들을 생산하는 것이다. 세 번쨰 방침은 긴급에 대한 방침이었다. "우리는 매우 빠른 시일 내로 노동 완전 고용과 모든 산업자원의 구비를 프랑스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생산품 유통에 어떠한 문제가 없을 때 수요가 있게 됩니다. 바로 그 때, 모든 이익을 위하여 생산 도구를 보호하길 바라는 요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삶의 질이 진보하고 상승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고, 제2의 강대국 자리에 있는 프랑스의 힘을 약화시킬 것입니다." [...] 네 번째 방침은 방법론에 관한 것이었다. "국가 전체는 이 노력을 위해 단결해야 합니다. [...]" 1946년 1월 3일, 법령 제1조항이 다음과 같이 명시함에 따라 새로운 계획이 세워졌다. "6개월 내로 프랑스 본토 및 해외 영토의 시설 구비 및 근대화를 위한 1차 계획이 설립될 것입니다."

이 계획의 목표는 4개의 항목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1. 국내 생산 발전 및 프랑스가 유리한 조건에 있는 대외교류 분야 발전

2. 노동생산성 향상

3. 노동력 완전고용 보장

4. 국민 삶의 질 개선, 공동주거지 및 주거 환경 개선

장 모네, <회고록>, 파야르 출판사, 1976


자료6. 스캔. 1947년 사회보장 선거 시 프랑스 가톨릭 노동자 동맹(CFTC) 포스터


자료7. 스캔. 1945년-1996년 사회보장 운영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경제적 봉건제도"라는 표현을 설명하시오. (자료1)

2. 어느 정부 하에서 국영화의 핵심이 결정되었는가? (자료2)

3. 국영화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어떠한 이유들이 거론되었는가? (자료3)

4. 프랑스전력공사 경영자는 누구인가? (자료4)

5. 1945년 프랑스 경제상황과 경제계획 설립 간에 어떠한 연결을 맺을 수 있는가? (자료5)

6. 사회보장제도가 가져온 진보는 무엇인가? (자료6)

7. 사회보장기금은 누구에 의하여 공급되었나? (자료7) 환급금이 소득 재분배의 형태라는 사실을 설명하시오.

B. 자료 연관 짓기

8. 레지스탕스 평의회의 약속에 부합하는 개혁들을 설명하시오. (자료1, 2, 3, 4)

9. 1945년-1996년 누가 사회보장제도를 관리하였는가? (자료6, 자료7) 프랑스 가톨릭 노동자 동맹 조합은 누구를 조심하라고 경고하는가?

C. 작문

10. 개혁으로 인해 보장된 사회 진보는 무엇이 있는가?


p.288

2) 빠르게 쇠약해지는 공화국

A. 쇠퇴하는 제도? 자료1

■ 새로운 체제는 12년 만에 침체된다. 많은 점에서, 이 체제의 역사를 기술하는 일은 대단히 짧았던 이 체제의 존재기간에 대한 이유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 짧은 역사는 처음부터 쇠약했던 제도의 특징으로 기인한다.

- 1946년 10월 3일 국민투표에서 기권표가 많았고 "찬성’표 또한 전체 등록 투표자의 36%에 그쳤다. 그렇기 때문에 드골이 헌법 선언 시 "프랑스인 3분의 1은 이를 버렸다. 다른 3분의 1은 기권했다. 나머지 3분의 1은 이를 승인했다. "라고 밝혔다.

- 1946년 6월 16일 ‘바이외 연설’에서 드골은 이 제도에 적대감을 드러내고 매우 다른 헌법 방침을 소개한다. 그리고 특히 의회에 대한 행정부의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드골에게 정부란 정치정당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드골은 스스로를 제4공화국의 완강한 반대자로 밝히며, 제4공화국을 ‘정당의 체제’에 비유한다.

■ 의회에 존재하는 정치정당들은 행정부를 조정하는 권력을 그럭저럭 유지한다. 3당연립체제 하에서는 응집된 과반수가 정부를 지지한다. 따라서 정부는 전복될 위험이 없다. 그러나 응집력이 낮은 과반수는 지속적인 내각 불안정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

B. 냉전과 탈식민지화의 충격파 자료2, 3

■ 그런데 1947년 냉전 초반부터 3당연립체제가 와해되기 시작한다. 1947년 5월 5일 국회로부터 소속 장관들의 파면을 겪은 공산당은 그 때부터 체제에 반대한다. 국제적 차원에서 공산당은 소비에트 연방에 동조한다. 1947년 말, 폭력적 파업의 파도가 프랑스를 뒤흔든다. 같은 해, 드골은 마찬가지로 제4공화국에 적대적인 프랑스 인민 연합(RPF)을 창설한다. 이에 따라 제4공화구근 이중의 반대에 부딪힌다. "제삼세력"에 의한 정부들이 설립되지만 그 중 다수는 지속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 또한 제4공화국의 주된 쇠약 이유 중 하나이다.

■ 이 체제의 점진적인 무력함이 주로 제도의 결함으로 설명되지만, 이 제도가 1947년부터 냉전과 탈식민지화라는 충격파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분석의 대상이 된다. 세계가 동구권과 서구권이라는 두 개의 거대 진영으로 분열됨으로써 프랑스 정치에 그 여파가 도달했다. 공산당 진영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과 선거권에서 큰 영향력을 지녔던 공산당의 존재로 인함이었다. 게다가 세계에서 2번째로 강력한 식민지배국이었던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와 알제리에서 발발한 탈식민지 전쟁을 겪게 되었다.

C. 유럽 방위 공동체의 위기와 식민지 전쟁의 위기 자료4, 5, 6

■ 물론 프랑스는 경제 부흥을 지속해 나갔다. 1952년, 앙투안 피네(소상공인과 농민의 국민중심)가 평의회 의장이 되며 우파가 권력을 되찾았다. 피네는 재정 안정화를 실행하여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1952년과 1954년 사이 프랑스인들은 유럽 방위 공동체 계획에 대하여 분열된 생각을 가진 상태였다. 인도차이나 전쟁에서는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서 대패하였다.

■1954년 6월 17일 평의회 의원으로 공천된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전쟁을 종결하고 1954년 7월 20일 제네바 조약을 체결한다. 그를 필수적 개혁의 인물로 여기는 여론 의해 큰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망데스주의"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망데스 프랑스는 1954년 만성절에 알제리 저항을 겪게 된다. 알제리 전쟁은 체제를 흔들게 된다.


어휘

instabilité ministérielle(내각 불안정): 잦은 정부 교체

troisième force(제삼세력): 제4공화국 초기 공산당과 드골주의자를 제외한 정치권력의 연합


자료1. 스캔 헌법 관련 국민투표 (1946년 10월 13일)

자료2. 1947년

1947년이 이렇게 막을 내린다. 힘들었지만 제4공화국이 정착한 해이기도 했다 [...]. 새로운 사실은 공산당의 중요하고 적극적인 존재이다. 공산당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활동한다면 매우 유용하지만 지난 달부터 그래오고 있듯 소비에트 제국에 복종한다면 해롭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프랑스 인민 연합이나 드골과 같은 또다른 완고한 준전체주의 반대진영이 나타난다면, 더 이상의 과반수 민주세력은 없을 것이며 공화국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심각한 사실은 바로 공산당이 당원들의 행정부를 건립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권력의 신화가 자리잡도록 내버려 두었으며 정부를 트로이 목마 상태에 놓았다. 게다가 이들은 노동조합원들을 조종하여 폭동의 파업을 유발했다. 우리는 내전의 위험을 겪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개입하였다면 내전이 전쟁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부흥을 시작했다.

뱅상 오리올, 전 공화국 대통령, <7년 임기 간의 일기>, 1947-1954, A. Colin 출판사, 1970

1. 본문의 역사적 맥락은 무엇인가?
2. 본문에 의하면 신생 공화국은 어떠한 위협을 겪었는가?
3. 본문에 의하면 공산당원들은 어디에 의지를 할 수 있나?

p.289


자료3. 스캔. 1950년경 "평화와 자유" 운동 포스터

1. 포스터를 자세히 묘사하시오.
2. 포스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3. 포스터의 의미와 뱅상 오리올의 발언을 어떻게 연결 지을 수 있는가? (자료2)


자료4. 스캔. 1951년 국회의원 선거 시 프랑스 인민 연합 포스터


자료5. 스캔. 1954년 유럽 방위 공동체 계획을 반대하는 프랑스 공산당의 포스터

서유럽 국가(특히 독일연방)를 포함하는 유럽 방위 공동체 계획은 프랑스인들의 의견을 완전히 갈라놓는다. 일부에게 유럽 방위 공동체는 모든 침략으로부터의 보호, 즉 평화를 수호하는 요소이다. 공산당과 드골주의자들에게 유럽 방위 공동체는 독일 군대의 부활을 돕는 요소이다.

1. 군인의 헬멧을 설명하시오. (포스터 및 문구)
2. 이 포스터 내에서 유럽 방위 공동체는 무엇과 연합하는가?
3. 공산주의자들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


자료6. 1954년 6월 17일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공천사

인도차이나에서의 충돌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대비해야 할 전쟁, 세계전쟁, 핵전쟁의 위험이 있습니다. [...] 제네바에서 협상이 이루어졌습니다. [...] 여러분께서 결정하여 주신다면 제가 구성하게 될 정부는 평화 유지를 위한 의지로 점철된 협정을 지속할 것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앞에 있는 이는 우리가 투쟁하고 있는 원인들과 단 한 번도 결합하여 본 적이 없는 이들로 구성된 과반수에 대비하여 그를 지지하라고 여러분께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 저는 7월 20일 이전에 여러분 앞에 다시 서겠습니다. 이 날짜 이전에 어떠한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찾지 못 한다면 [...] 저의 정부는 사임의 의사를 밝히겠습니다 [...]. [이것들이 바로] 저의 정부가 활동 개시를 위해 지정할 다음 단계들입니다. 먼저 경제 활동입니다. [...] 활동적인 경제 및 사회 진보 정책은 확고한 재정 정책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 프랑스는 이어서 중대한 문제에 집중하여 정책을 발표해야 합니다. 바로 유럽 문제입니다. [...]

모로코와 튀니지는 알제리 관할의 측면에서 불안정과 동요의 진원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이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

정부는 구성원과 성격을 같이 할 것입니다. [...] 우리가 여태까지 겪어 온 끝나지 않는 협상은 없을 것입니다. [...] 헌법에 대한 장관들의 선택은 공천된 평의회 의장에게 달려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공천투표를 통해 여러분께서 제게 주실 권리와 타협할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6월 17일 국회 회기

1. 국제 계획에 관한 프랑스 상황에 대하여 망데스 프랑스는 어떠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
2. 대외 계획은 어떠한가?
3. 어떤 분야에서 활동을 개시하려 하는가?


p.290


자료집


인도차이나 전쟁, 1946-1954


1946년부터 약 8년 간 제4공화국은 본토로부터 10,000km 떨어진 곳에서 탈식민지 전쟁을 겪게 된다. 너무나 먼 곳의 일처럼 느껴지고, 징집병에게 해당사항이 없는 전쟁이기에 국민 여론은 무관심하다. 베트민에게 호의적인 대부분의 공산당은 이 전쟁을 ‘더러운 전쟁’으로 규정한다. 1953년, 프랑스 군대는 베트민 군대와 재래전을 펼치기 위해 디엔비엔푸를 기지로 정하고 15,000명을 파병하나 실패로 끝난다. 54일 간의 포위전 이후 1954년 5월 7일, 생존자 11,000명은 포로로 붙잡혀 베트민 캠프로 이송된다. 7,000명은 그 후로 돌아오지 못 한다.

디엔비엔푸에서의 패배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으로 다가온다. 최정예 정규 부대가 게릴라 부대에게 패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4공화국은 인도차이나를 잃는다.


자료1. 스캔. 인도차이나 전쟁


자료2. 보 응웬 장군이 말하는 1953년 베트민 군대

저항의 지주였던 ‘인민군’은 초기에는 약했으나 8년 간의 훈련과 전투를 점차 엄청난 발전과 증강을 이루었다. 인민군은 정규 군대를 위해서는 사단과 연대에 주력했고, 지역군 대대와 연대를 포함했다. 정규군과 지역군 이외에는 그 수가 많고 강한 게릴라를 교육하여 국가 전체에 확장하였다.

이 ‘3군’의 양성과 발전은 ‘모든 인민을 집결시키고 무장시키는 것, 인민의 전쟁을 개시하는 것’이라는 우리 정당의 올바른 정책에 기인한 결과였다.

이것은 또한 ‘장기 혁명전을 위한 실전 방침: 게릴라 부대로의 인민 집결, 게릴라전에서 정통 전쟁으로의 이행, 게릴라전과 정통 전쟁의 긴밀한 조화, 게릴라전에서 기동전, 소모전으로의 이행’ 등을 적용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베트민군 지휘관 지압 장군, <디엔비엔푸>, The Gioi 출판사, 하노이, 1994


자료3. 1950년 2월: 식민지 4번도로(RC 4)와 친프랑스 베트남 도시 포기

1950년 2월의 어느 날, 절반은 비어 있고 에스코트를 동반한 수송차가 도착했다. 후퇴 작전이었다. 까오방의 오뜨 레지옹에 분산되어 있던, 베트민에게 포위될 모든 병력을 송환해야 했다. 만약 남아 있다면 병력의 많은 숫자에 휩쓸려 버릴 위험이 있었다. [...]

유격대원(1)들이 차에 타기 위해 가족들을 모았다. [...] 그리고 우리는 차에 탔다. 소문을 들은 인근 마을의 주민들이 우리와 함께 떠나기 위해 달려왔다. 이들은 우리의 보호를 받아들였던 주민들이었다. 우리와 함께가 아니라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자리가 부족하여 이들을 차에 태울 수 없었다. 또한 탑승 순서는 매우 단호했다. 유격대원들만이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었다. 이 순간은 나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나를 신뢰했고 나와 함께 했던 남성과 여성들. 외인부대 병사들이 이들을 바닥으로 밀어냈다. 짐칸의 철창에 매달려 있던 손들이 떨어져 나가 먼지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곤봉으로 때렸다. 몇몇은 우리에게 간청했다. 다른 이들은 우리를 그저 바라보았다. 그들의 무지는 우리의 배신을 더욱 끔찍한 것으로 만들었다. 전진하는 트럭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외인부대 병사들은 시선을 바닥에 내리깔았다. 이들은 서로를 바라볼 엄두조차 내지 못 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요동치는 차에 몸을 흔들거리며, 나는 고통과 수치심에 눈을 감았다.

반베트민 외인부대 사령관, 프랑스군 장교 엘리 드 생 마르크, <숯의 들판, 회고록>, 페렝(Perrin) 출판사, 1995

(1) 베트민에 맞서 싸운 친프랑스 베트남인들


p.291

자료4. 스캔. 1954년 초 디엔비엔푸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펼치고 있는 프랑스 군대


자료5. "동양식 병참술"

메오스 고개를 통과할 적에 우리는 수평선 저 너머에서부터 페달과 안장에 쌀가마니와 탄약상자를 가득 싣고 오는 끊이지 않는 짐꾼(1)들의 행렬과 마주쳤다. [...] 경이적인 동양식 병참술이었다! 전투 개시 전, 프랑스 첩보원들은 비에트(2)들이 물자와 탄약을 보급할 능력이 없을 것이라 예상하였다. 본거지로부터 400km나 떨어진 비엔티엔푸의 포위된 요새에 40,000명의 정규군에게 물자 조달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프랑스 첩보원들의 명백한 실패였다. 첩보원들은 아시아 민중들을 고려하지 않았다. 근면하고 순종적인 전체 국민들의 완전한 협력을 상상하지 못 한 것이다. 포로의 처지에서 나는 공산당 이데올로기가 지니는 효율성의 핵심적인 면을 발견했다. 전체의 이익을 위한 개인의 소거, 능동적인 또는 강요되는 자발성이었다.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민의 포로생활을 겪은 프랑스군 중사 피에르 보니.

피에르 주르누와 위그 테르트레가 엮은 실화

<디엔비엔푸 이야기>, 탈랑디에 출판사, 2004

(1) 자격증을 소유하지 않은 노동자

(2) 프랑스 군인들이 베트민 군인들에게 붙인 별명


자료6. 113 포로수용소

나는 광경을 절대로 잊지 못 할 것이다. 입구에서부터 피골이 상접한 사람들, 서 있는 시체들의 무리와 마주했다. 누렇고 쭈글쭈글한 얼굴 위의 커다란 두 눈, 헐벗은 상반신과 화농성 염증으로 일그러진 다리들...그들은 말을 할 권리를 갖지 못 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겨우 말을 했다. 그들은 이 죽음의 대기실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사람들이었다. 이 중 살이 오른 생명체는 쥐들뿐이었다. 그들은 포로들이 선잠을 자고 있던 대나무로 만들어진 더러운 판자 침대 위로 굴러 떨어졌다. 더러운 시궁창 같았던 그 곳과 비교하면 우리의 수용소는 최고급 호텔처럼 보였다...우리를 담당했던 정치 판무관들은 모두 베트남인들이었다. 그러나 113 수용소에서는 프랑스인이 한 명 있었다.

1991년 3월 21일 프랑스 시사지 ‘렉스프레스’, 장 푸게 중대장의 증언


자료7. 스캔. 1954년 7월 제네바에서 인도차이나 전쟁 종결에 관한 제네바 협정을 체결한 망데스 프랑스.

중국 수상 저우언라이와 악수하는 망데스 프랑스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1950년, 인도차이나의 어느 지역에서 베트민 게릴라가 가장 잘 정착하였나? (자료1)

2. 어떠한 "정당"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자료2) 게릴라전과 정통전쟁의 차이는 무엇인가?

3. 화자에 따르면 프랑스인들에 대한 이 주민들의 태도는 어떠하였나? (자료3) 베트민에 대해서는?

4. 프랑스 군대는 전진하면서 점차 어떠한 어려움들을 겪게 되는가? (자료4)

5. 화자의 입장에서 "근면하고 순종적인 전체 국민들"이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를 설명하시오. (자료5) 이 증언으로 보았을 때 국민을 집결하기 위하여 이데올로기가 행한 역할은 무엇인가?

6. 포로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어떠한 방법들이 사용되었는가? (자료6) B. 자료 연관 짓기

7.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중국 공산당이 맡은 역할은 무엇인가? (자료6)

8. 본문 2와 3은 어떻게 다른가? 모든 베트남인이 베트민 편에 있었는가?

9. 베트민이 승리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이유를 자세히 기술하시오.

C. 작문

10. 인도차이나 전쟁이 단순한 탈식민지 전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설명하시오.


p.292

3) 제4공화국의 붕괴 A. 반3당연립체제 움직임 자료1

■ 1955년, 반3당연립체제 움직임인 푸자드주의가 발전한다. 초기에는 피에르 푸자드의 추진 하에 소매상, 농업인, 수공예가들을 결집하는 직업수호단체였다. 이후 이는 우편향적인 정치운동으로 변모한다. 간략주의 슬로건인 "퇴임자들, 퇴임하라."는 국가 제도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정부가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고 생각하고 있던 유권자들의 마음에 큰 동향을 일으켰다.

■ 1956년 1월 2일의 선거는 공사당이 아닌 좌파 공화전선이 승리한다. 사회주의자 기 몰레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한다. 그러나 전체적 득표로 보자면 12%의 득표율과 52석을 차지한 푸자드주의자 후보, 즉 장-마리 르펜의 승리였다. 알제리 전쟁이 연장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결과는 정치적 불안의 심각한 정도를 보여주는 사안이었다.

B. 편재하는 알제리 전쟁... 자료2, 자료3

■ 제4공화국 정부는 좌파, 우파 관계없이 유럽 태생의 프랑스 백만 명 이상이 사고 있는 프랑스 알제리를 유지하고자 했다. 망데스 프랑스 정권의 내무부 장관 미테랑은 1954년 11월, "알제리는 프랑스다. "라고 공포했다. 평의회 의장인 사회주의자 기 몰레는 1955년 선거운동 기간동안 "알제리의 평화"를 약속했지만, 1956년 알제리 민족해방정선이 테러 행위를 자행하자(공공기관 폭탄테러) 전쟁을 강조했다. 군대를 통한 "평화 회복"은 모든 협상 전 게릴라를 진압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기 몰레는 알제리에 징집병을 보냈고, 군복무 기간은 27개월로 연장되었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에 맞서 프랑스 군대는 "경계" 작전을 통해 간신히 대응했다. 정보를 얻기 위해 불법적인 방식으로 고문이 자행되었다.

■ 기 몰레 정부(1956년 2월-1957년 3월)는 알제리 위기를 해결하는데 성공하지 못 한다. 그 다음의 정부들은 더욱 성공을 거두지 못 한다. 1958년 봄, 수 주에 걸친 내각 위기 이후, 알제리 민족해방전선과의 협상 지지자로 여겨진 대중공화당운동(MRP)의 피에르 프리믈랭은 새로운 정부구성의 필요성을 예감한다. C. 1958년 5월 13일 쏟아져 나오다... 자료4 자료5, 자료6

■ 프리믈랭의 공천 소식은 제4공화국의 운명적인 시기를 열게 된다. 파리에서 프리믈랭의 공천이 예정된 5월 13일, 알제리 프랑스를 지지하는 인파가 알제에서 시위를 벌여 반대 의사를 표시한다. 이 인파는 군 개입 없이 마쉬 장군이 지휘하는 공안위원회가 있던 정부 관저를 점령한다. 그 사이 평의회 의장으로 공천된 프리믈랭은 알제의 프랑스 공권력을 재건하지 못 한다.

■ 이러한 혼란의 시기 중, 5월 15일, 드골 장군은 콜롱베-레-되-제글리즈를 떠나 공식적으로 개입한다. 드골은 정권에 복귀할 준비가 되었다고 알리며 합법적인 절차로 복귀한다. 같은 날, 알제 공안위원회 소속인 살랭 장군은 연설 시 "드골 만세"로 끝을 맽는다. 자유 프랑스의 옛 수장은 스스로를 현 상황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며, 알제리 프랑스의 지지자에게도 동일하게 여겨진다.

■ 내전에 대한 공포는 드골 장군의 정권 복귀를 위하여 정권 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집결을 이뤄낸다. 1958년 6월 1일, 드골은 과반수 득표를 통해(찬성 329표, 반대 224표) 의회 수장으로 공천된다. 6월 2일, 의회는 드골에게 새로운 헌법을 준비할 것을 허가한다. 이는 제4공화국의 멸망을 입증한다.


어휘

contigent(징집병): 군복무를 위해 소환된 청년 전체


자료1. 스캔. 1956년 선거 포스터

자료2. 기 몰레 연설

이 연설에서 기 몰레는 알제리 관련 "특별한 권력"을 요구한다.

오늘,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동화되지 않은 팔백만 명의 무슬림이 있기 때문에 알제리는 다른 프랑스 지방과 같지 않습니다. 또한, 프랑스 본토 출신 백만 명의 프랑스인이 있기 때문에, 알제리는 무슬림 국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역사적 현실과 인종적 진실에 부합하지 않는 알제리 정부의 구상을 전적으로 거부합니다. [...]

프랑스 전력 5분의 1이 알제리에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더 많이, 그리고 더 잘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정부는 군대에 전적인 효력을 제공할 것입니다. [...]

정부는 국민과 재산의 실패 없는 안전을 보장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의도를 알고 있습니다. 투자를 위한 대대적 노력, 토지 개혁, 농업 종사자들의 임금 상승입니다.

1956년 3월 9일 의회에서의 평의회장 기 몰레


p.293

자료3. 스캔. 1958년 3월 프랑스 공산당 포스터

1. 알제리 전쟁으로 인한 어떠한 결과들에 대한 비판이 포스터에 나타나는가?
2. 프랑스 공산당은 알제리의 독립을 주장하는가?
3. 프랑스 공산당의 주장은 1956-1957년 기 몰레 정책과 양립할 수 없는가?


자료4. 스캔. 1958년 5월 알제 공안위원회


자료5. 드골 장군의 의회 공천 연설

정부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통일성이 즉각적으로 위협받고 있습니다. 알제리는 고난과 반란의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본국에서는 갈수록 열광과 행동이 거세지는 반대의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칭송받을만 한 유혈 임무를 오랫동안 수해해 오고 있는 군대는 권력의 무능력에 분노하고 있습니다...우리의 국제적 평판 뿐 아니라 동맹 관계마저 손상당하였습니다. 이것이 현재 국가가 처한 상황입니다. 많은 기회와 존경을 누릴 수 있는 이 시기에 프랑스는 붕괴의 위기를 겪고 있고, 더 나아가 내전마저 발발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는 한 번 더 국가, 정부, 공화국의 안보를 위해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국가 수장의 허락 하에 저는 제가 이 무거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의회에 저에 대한 공천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이 임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방법들이 필요합니다.

정부는, 여러분께서 권리를 부여하신다면, 여러분께 매우 빠르게 권리를 요청드릴 것입니다. 정부는 여러분께 전적인 권력을 요청할 것입니다 [...]. 여러분의 신뢰를 통해 제가 구성할 정부는 지체없이 헌법 개혁을 진행할 것입니다. 정부가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필수적 변화들에 관해 여러분께 국민투표를 요청할 권리를 의회로부터 위임받는다면, 지체없이 이를 실행할 것입니다.

샤를 드골, <연설문과 전언들>, t.III, 플롱(Plon) 출판사, 1970

1. 연설이 행해진 때의 프랑스 상황은 어떠하였나?
2. "정부는 점점 더 악화", "프랑스의 통일성이 [...]위협받고 있습니다."에 이어 나오는 다음 문단을 참고하여 이 표현들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시오. 
3. 1947년부터 드골이 취한 입장을 설명하시오. 드골은 무엇을 요청하고 있는가?


자료6. 스캔. 1958년 5월 29일 파리 시위, 1958년 6월 콘스탄틴(알제리) 시위


p.294


자료집


제2공화국의 종합 평가는?


제5공화국의 장점으로 경제적 확장이 평가되었던 데 반해, "사랑 받지 못한" 제4공화국은 무능력, 빠른 정부 계승과 갑작스러운 몰락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사실, 프랑스 산업생산은 1949년부터 1938년의 수준을 되찾는다. 전후 어려운 상황에서 새로운 공화국은 국가의 재건과 근대화에 몰두하였다. 1950년대 국가의 쇠퇴를 막지 못 했던 명백한 무능력은 당시 국가가 마주해야 했던 엄청난 어려움과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당시 프랑스는 냉전의 영향과 식민지 전쟁으로 인해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알제리 전쟁은 그 중 가장 주요한 문제점이 되었다.


자료1. 스캔. 제4공화국 정부


자료2. 스캔. 제4공화국 시 국내총생산


자료3. 스캔. 1954년 6월-1955년 2월, 망데스 프랑스 정부


p.295


자료4. 드페르 기본법(1956)

기 몰레 정부의 해외영토부 장관 가스통 드페르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에 대하여 보통선거 도입, 프랑스 고등판무관 귀속 연방권력 창설, 예산, 경제, 사회 분야 담당 최고의회 설립 등의 내용을 포함하는 기본법을 제안한다.

"프랑스 아프리카에서, 우리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 모든 영토와 모든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국민이 자신들의 출생국가에서 행해지는 업무와 관리에 참여할 능력을 갖추지 못 한다면 진보가 이루어지지 못 할 것입니다." 1944년 1월 20일 브라자빌 회의 개회식 연설에서 드골 장군은 이렇게 공표하였다. [...] 그 후로 해외영토 국민들은 의회 및 프랑스연합의 의원들을 선출할 권리를 얻었다. 이후 국방의회가 창설되었다.

이러한 개혁들은 해외영토 국민들에게 자유로운 의사표시를 가능케 하였다. 국민들은 민주제도의 운영방식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 지역의 국민들에게 그들이 우리에게 요구한 자유를 주었기 때문에 유혈사태가 발생했고 아직까지 발생하고 있는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 반해 이들이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프랑스에 우호적일 수 있었다고 확신한다. 다른 개혁들도 약속되었고, 대기 중에 있으며, 그 개혁들은 반드시 필요하다. [...] 우리에게 이토록 우호적인 이들을 신뢰하자. 이들의 대표자들이 포함된 프랑스 정부와 의회가 평화 속에서 우리에게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학수고대하는 이들을 신뢰하자.

1956년 3월 21일 발표되고 이틀 후 표결된 법조문 발췌

자료5. 스캔. 프랑스 공산당 포스터(1945)


자료6. 스캔. 프랑스 정치계에서의 프랑스 공산당(PCF)


자료7. 스캔. 1952년 포스터


피네가 발행한 채권은 금의 시세의 연동되어, 금과 같은 가치를 지녔다. 한편, 채권 소지자가 사망할 경우 상속자는 채권에 대한 상속세를 납부하지 않았다.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제4공화국이 프랑스의 경제 부흥을 이뤘다는 사실을 설명하시오. (자료2)

2. 이에 해당되는 영토들은 어디인가? (자료4) 드페르는 독립을 주장하고 있는가?

3. 본문에 드러나는 알제리 상황에 대한 임시를 설명하시오.

4. 포스터를 설명하시오. (자료5) 새와 "trust"라는 단어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5. 프랑스 정치계에서 프랑스 공산당은 어떠한 중요성을 차지하는가? (자료6)

6. "가져오는 이에게 금을"이라는 슬로건을 설명하시오. (자료7)

B. 자료 연관 짓기

7. 식민지 전쟁 순서에 따라 그 시대의 배경에 놓고 망데스 프랑스 정권을 설명하시오. (자료1, 3)

C. 작문

8. 제4공화국의 어떠한 문제점들이 해결되었나?


p.296


4) 새로운 정치체제

A. "쿠데타"에서 탄생한 체제? 자료1

■ 당대와 그 이후 드골의 반대파들은 5월 13일과 이후 일련의 사건들은 드골주의자들의 음모라고 여겼다. 몇몇 이들은 "실력 행사", "쿠데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 현실은 더욱 복잡했다. 이 혼란의 기간 동안 무시하고 넘기기는 어려운 드골주의자들의 정치 군사 작전이 알제에서 있었다. 그러나 5월 13일을 성공한 음모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사건의 연속은 상황을 예측 불가능한 사태에 놓이게 했다. 드골과 드골주의자가 야기한 상황보다는 드골이 이용한 상황에 대하여 말해야 할 것이다. 한편, 사건의 연속이 "쿠데타"를 조직한 것은 아니었다. 드골의 정권 회귀 과정은 헌법에 의거하여 이루어졌다.

■ 그러나, 이 회귀가 여론과 정계의 공포, 알제에서의 폭동으로 인해 쉽게 이뤄진 것은 사실이다. 드골은 이러한 공포와 위협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B. 환영받는 헌법 자료3, 4, 5, 6

■ 미래 헌법 집필은 1958년 여름에 원활하고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다. 드골 장군의 생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그 중 특히 바이외 연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헌법은 미쉘 드브레를 중심으로 구성된 고급 관료들이 준비한다. 미쉘 드브레는 드골주의자들의 지도자이자 법무부 장관이었다. 헌법은 9월 4일 드골에 의해 국가에 발표된다. 발표 장소(파리 레퓌블리크 광장)과 발표일(1870년 9월 4일 제3공화국 출범일 기념)은 모두 심사숙고하여 정해진 것이었다. 유권자들은 9월 28일 국민투표에 참여하여 의사를 표현했다.

■ 오직 공산당, 소수 사회주의자 및 급진주의자들과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프랑수아 미테랑 등 좌파의 몇몇 인사들만이 "반대" 의사를 밝혔다. 기타 정치권력은 "찬성"의 입장이었다.

■ 9월 28일, 투표 참여율은 대단히 높았고(기권표 16%에 그침) 찬성이라는 결과도 매우 뚜렷이 나타났다(찬성 79%). 유권자들의 근 3분의 1이 기권했던 이전 공화국 설립 시와는 매우 다른 상황이었다. 따라서 제5공화국은 9월 28일의 국민투표를 통해 탄생하였다.

■ 드골장군은 이중의 승리를 거두었다.

- 한 편으로는 신제도가 자신의 제도적 비전과 일치하였다.

- 다른 한 편으로는 프랑스 국민들이 정책 실행에 있어서 그를 전적으로 지지했다.


C. 드골, 공화국 대통령 자료2

■ 드골주의의 승리는 1958년 11월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입증된다. 단기 2회제 투표를 통하여 신의회를 구성하였다. 드골주의자들은 이 투표 방식을 통해 제4공화국을 지켜내지 못 한 응집 과반수를 쉽게 밀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신공화국동맹(UNR)으로 결집된 드골주의자들과 이들의 연합들은 의회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1958년 12월 21일, 80,000명의 유권자, 상원의원, 하원의원, 도의회 의원, 시의회 대표 등이 참여한 간접선거를 통해 드골은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드골은 1959년 1월 9일자로 공식 재임을 시작하고 이튿날 미쉘 드브레를 총리로 임명한다. 프랑스는 새로운 체제를 갖추지만, 알제리 문제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었다.


어휘

putsch(폭동): 무력을 통한 권력 탈취 혹은 그 시도


자료1. "군 동원 실력행사의 위협"

제4공화국은 스스로의 과실로 인하여 멸망했습니다. 그 체제는 당면했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붕괴한 것입니다. [...]

장군이 그렇게나 비판하였고 그 비판을 받을 만했던 "체계"는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늘날 필요한 근본적 요소들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드골이라는 사람과 드골의 과거 행적에 대해 제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관계 없이, 저는 드골 공천을 위해 투표하지 않을 것입니다. [...] 저는 군 동원 실력행사의 위협과 폭동을 위해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 저는 우리가 그들에게 규정하는 결정과 그들의 결정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발생할 내전이라는 협박과 국민 대표에 대한 실력 행사를 생각합니다.


1958년 6월 1일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의회 연설

1. 연설 당시 의회의 상황과 알제리의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2. 연설자는 무엇을 걱정하는가?


자료2. 스캔. 1959년 드골정당 포스터


p.297

자료3. 앙드레 말로가 생각하는 공화국

제4공화국이 실패와 단념만을 가져다 주었 것과 다르게, 제5공화국은 기회와 희망을 가져 온다는 것을 전 국가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공화국의 쇠퇴를 바라는 이들과 프랑스의 쇠퇴를 바라는 이들이 여러분의 희망을 앗아가도록 하지 않을 것입니다. [...]

프랑스인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프랑스를 재건할 수 없고, 공화국은 유배된 공화국이 그 옛날 희미하게 소리쳤던 것과 같이 프랑스 국민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나는 다시 프랑스가 되고 싶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많은 분들은 매일 "여기는 런던입니다.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인들에게 말합니다. 영광과 조국. 여러분은 드골을 들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곳 파리는, 모든 파리는, 포르트 디탈리에서 라데팡스 원형 광장에 이르는 파리는 프랑스를 위해, 청동의 공화국을 위해 듣습니다. 영광스러운 유구한 범선의 대답을 듣습니다. "여기는 파리입니다. 영광과 조국. 공화국과의 약속, 역사와의 약속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드골을 들을 것입니다."

1958년 9월 4일 앙드레 말로의 레퓌블리크 광장 연설


자료4. 스캔. 1958년 9월 4일 제5공화국 헌법을 발표하는 드골

자료5. 1958년 헌법 발췌

서문

프랑스 국민은 1946년 선언에 명시된 대로, 인권과 주권에 대한 기본 요소에 대한 충성을 선언한다.

제1장 – 주권

제2조. 프랑스는 개체, 정교분리, 사회민주주의 공화국이다. 프랑스는 혈통, 인종, 종교에 대한 차별 없이 모든 시민이 법 앞에 평등함을 보장한다. 프랑스는 모든 신념을 존중한다. 국가의 상징은 파란색, 흰색, 빨간색의 삼색기이다. 국가는 ‘라 마르세예즈’이다. [...]

제3조. 국가의 주권은 대표자와 국민투표를 통해 행하는 국민에게 있다. 어떤 국민이나 개인도 주권 행사를 자신의 소유라 주장할 수 없다.

헌법에 명시된 조건에 따라 선거는 직접선거가 될 수도, 간접선거가 될 수도 있다. 모든 선거는 보통선거, 평등선거, 비밀선거이다. 법에 명시된 조건 내에서 모든 성인 프랑스인, 모든 성별의 유권자들은 권리와 정치를 누린다.


제2장 – 공화국 대통령

제5조. 공화국 대통령은 헌법 준수에 유의한다. 대통령은 중재를 통해 공권력의 합법적인 운영과 정부의 지속성을 보장한다. [...]

제6조. 공화국 대통령은 의회, 도의회, 해외영토 의회, 시의회 선출 대표인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을 통해 선출되어 7년 간 재임한다. [...]

제20조. 정부는 국가의 정치를 결정하고 운영한다. 정부는 행정부와 군사력을 갖춘다 [...].

제4장 – 의회

제24조. 의회는 상원의회와 하원의회를 포함한다. 하원의원은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상원의회는 간접선거로 선출된다. 상원의회는 공화국 국가 대표를 보증하였다.


자료6. 스캔. 1958년 제5공화국 헌법

1. 누가 행정권을 소유하는가? 누가 입법권을 소유하는가?
2. 의회가 제4공화국 시대만큼의 권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 점을 설명하시오.
3. 현정부 헌법과의 차이점들은 무엇이 있는가?


p.298

5) 알제리를 어찌 할 것인가?

A. "저는 여러분을 이해했습니다!"

■ 알제리 문제가 바로 드골이 권력으로 회귀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알제리 프랑스를 유지하기를 원했던 이들이 있었던 반면, 다른 이들은 드골이 알제리 민족주의자들에게 더욱 유리한 해결책을 찾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1958년 6월 4일 알제에서 드골은 다음과 같은 모호한 문장을 뱉었다. "저는 여러분을 이해했습니다!" 40년이 흐른 후에도 역사가들은 1958년 당시 드골 장군의 정확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대해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 알제리에 독립을 가져다 준 국가 수장은 1958년 5월부터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인가?

- 그럴 경우, 드골은 피에 누아르들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인가? 또는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했던 것인가?

- 다른 가정을 해 본다면, 초기에는 프랑스 알제리의 굳건한 지지자였던 드골이 역전시킬 수 없는상황의 흐름을 재빨리 확인하고 현실주의적 관점을 지니게 된 것일까? 이 점은 바로 계속되는 논쟁거리이다.

B. 민족자결? 자료4, 5, 6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제리 문제에 관한 드골 장군의 대응 방식은 여러 양상에서 구별할 수 있다. 첫 번째 양상은 제4공화국에 의해 실시된 정책과 전혀 다르지 않다. 1958년 가을, 경제 개혁(콘스탄틴 계획)이 대통령에 의해 발표된다. 동시에 대통령은 "용감한 이들의 평화"를 기원하는 뜻을 밝히기도 한다. 동시에 군사행동도 계속된다. 최초의 선회는 1959년 9월에 이루어진다. 드골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언급한다. 프랑스 알제리 지지자들이 속았다는 느낌을 받은, 드골과 프랑스 알제리 지지자들의 최초 반목이 일어나는 때이다. 1960년 1월 알제에서 일어난 "바리케이드의 주"는 이러한 대립의 정도를 잘 드러낸다.

■ 같은 해인 1960년, 두 번째 결정적인 전환점이 나타난다. 대통령은 독립 추진을 위한 해결책 추구 교섭을 약속한 듯 보인다. 11월 4일, 드골은 최초로 "알제리 공화국"에 대한 가능성을 드러낸다. 1961년 1월, 알제리의 민족자결 원칙을 두고 행해진 국민투표에서 75.2%가 찬성 의사를 밝힌다. 이와 같은 성공은 프랑스 알제리 지지자들과 프랑스군 일부가 급진적인 행동을 갖추도록 만든다. 비밀 군사 조직(OAS)과 같은 비밀집단이 탄생한다. 1961년 4월 22일, 젤러, 주오, 살랭, 샬과 같은 장군들을 비롯한 몇몇 연대가 알제리 권력을 탈취한다. 그러나 체제는 굳건히 버티고 폭동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C. 독립 자료2, 7

굵은 글씨 수 년 간의 혼돈으로 인해 체제가 동요를 겪기는 하지만, 혼돈은 동시에 체제의 정착에 기여하기도 한다. 매 번 닥치는 위기는 체제의 효율성을 입증하는 듯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1958년 9월 국민투표의 ‘찬성’이라는 결과 또한 제5공화국의 단단한 정착에 기여하였다. 이 시기 드골은 알제리 민족해방전선과의 협상을 지속하여 1962년 3월 18일 알제리 독립을 승인하는 에비앙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은 1962년 4월 8일의 국민투표에서 90%의 찬성을 통해 승인되었다. "피에 누아르"들은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 비밀 군사 조직은 알제리와 프랑스 본국에서 더 많은 테러를 자행했다.

■ 이러한 환경에서 자신들의 삶과 안정에 위협을 느낀 알제리 거주 유럽인들은 심각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된다. 유럽인들과 무슬림들 사이에는 단절이 발생하게 되었다. 1962년 봄이 끝나갈 무렵, 불안정하고 비극적인 상황에서(오란에서의 유럽인 200-300인 학살) 백만 명 이상의 피에 누아르들이 알제리를 떠나 "모국 송환자"가 된다. 학살을 겪으며 생명의 위협을 받은 북아프리카 주둔 프랑스군의 원주민 보충병들 또한 알제리 독립(1962년 7월 3일) 이후 알제리를 탈출한다.

어휘

pieds-noirs(피에 누아르): 북아프리카에 정착한 유럽인들을 일컫는 말

autodétermination(민족자결) : 한 공동체가 정치적 지위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

harkis(원주민 보충병): 프랑스 군대 또는 보조 군대에 가담한 알제리 무슬림 군인들


자료1. 스캔. 1958년 알제의 드골주의당 포스터


자료2. 스캔. 1962년 알제리를 떠나 마르세유에 도착한 모국 송환자들

p.299

자료3. "저는 여러분을 이해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이해했습니다! [...] 여러분이 알제리에 혁신과 유대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저는 모든 면에서의 혁신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혁신이 시작으로부터 시작하기를, 다시 말해 우리의 제도를 통해 시작하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곳에 온 것입니다. 서로 다른 공동체의 시민들이 손을 잡고 같은 열망으로 연대를 이루는 이 장엄한 광경을 보고 저는 유대의 길이라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저는 프랑스의 이름으로 공표합니다. 오늘부로, 프랑스는 알제리 전역에 단 한 부류의 거주민만 존재한다고 간주합니다. 완전한 프랑스인만 존재합니다.

오늘 이 곳을 제외한 그 어느 때에도, 그 어떤 곳에서도 저는 프랑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거대한지, 얼마나 고결한 지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공화국 만세! 프랑스 만세!

1958년 6월 4일 드골의 알제 연설

1. 연설문의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시오.
2. 누구를 대상으로 연설하고 있는가?
3. "알제리 전역에 단 한 부류의 거주민만 존재한다"를 설명하시오.

자료4. 민족자결에 대한 연설

알제리인들이 평화 속에서 선택할 정치적 운명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 세 가지 예상 가능한 해결책을 참조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독립을 통한 분리이다. 알제리인들이 프랑스로부터의 분리라는 의지를 표명한다면 프랑스는 떠날 것이다.

둘째: 완전한 프랑스화이다. 권리의 평등이 내포하는 대로, 됭케르크, 타만라세트에서 그러하듯, 알제리인들은 프랑스 국민의 일부를 구성하여 정부의 모든 정치, 행정, 법적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경제, 교육, 국방, 외교 분야 관련 프랑스의 지원을 받고 프랑스와의 긴밀한 연합을 통한 알제리인들에 의한 알제리인들의 정부이다. 이 경우, 알제리 내부 체제는 프랑스인, 아랍인, 카빌인, 모자비트인 등 알제리에 공존하는 다양한 공동체들이 고유의 삶을 보장받고 협동의 환경을 이룩할 수 있도록 연방체제가 될 것이다.

1959년 9월 16일 드골 장군


자료5. 스캔. 1961년 4월 22일 알제의 폭동 지도 장군들

왼쪽부터 젤러, 주오, 살랭, 샬


자료6. 스캔. 1961년 5월 드골주의당 포스터

"군부 쿠데타를 통해 폭동 권력이 알제리에 세워졌습니다. [...] 은퇴를 앞둔 소수의 장군들이 이 권력의 외양입니다. 야망에 찬 광신도적인 한 무리의 장교와 유격대원이 이 권력의 현실입니다.

1961년 4월 23일 드골 연설 발췌

1. 1961년 4월 23일 드골은 누구에게 화답하고 있는가?
2. "은퇴를 앞둔 소수의 장군들"을 설명하시오.


자료7. 1961년 10월 17일 시위 진압

프랑스 정부로부터 금지된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파리 시위는 경찰에게 난폭하게 진압되었다. 시위자 중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p.300


자료집


알제리에서 전쟁 중인 프랑스 (1954-1962)


디엔비엔푸 전투 패배와 인도차이나 상실을 딛고 일어선 제4공화국은 점점 더 복잡해지는 알제리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 한다. 지정학적 근접성, 인구 구성(유럽인 1백만명, 무슬림 9백만명), 1956년부터 실시된 징집병 파병 등을 포함하는 알제리 전쟁은 인도차이나 전쟁과는 전혀 다른 식민지 전쟁의 양상을 보인다.


이 두 전쟁의 진행기간은 약 8년으로 비슷하지만, 전쟁으로 비롯되는 영향에는 차이가 있다. 제4공화국 하의 정부들은 국가적 차원의 병역 지원을 강화하였고, 이로 인해 국가 내 문제가 점점 커졌다. 1958년 이후, 제5공화국은 이례적으로 심각한 상황과 마주해야 했다.


자료1. 1954년 11월 7일 알제리 국영 일간지 ‘레코 달제’의 일면지

프랑수아 미테랑은 기 몰레 정권의 내무부 장관이었다.

"알제리 행정구역은 공화국의 일부를 이룬다. [...] 그 어떠한 정부도 이 근본 원칙을 양도할 수 없다."

1954년 11월 12일 평의회장 망데스 프랑스


자료2. 스캔. 민간인 대상 평화 수립 노력과 심리학적 활동

1958년-1960년경 프랑스어와 아랍어로 제작된 전단지 "이것이 알제리 빨치산의 모습이다"

평화수립기구 대표로서 나의 임무는 나에게 많은 걱정을 가져다 준다. 학교의 많은 아이들이 신발을 신지 않고 있고 난방시설도 없다. [...]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퇴역 군인 한 명이 나를 찾아와 몇 달 간 받지 못 한 연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신분증 검사 시 신분증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직 어린 6명의 아이를 기르는 여인은 남편이 작년에 있었던 폭동에 동원되어 그 이후로는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 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이렇게 벅찬 일들로 인해 가끔은 피로감을 느끼기도 한다. [...]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나의 일꾼, 교관, 간호사, 통역사, 비서들을 위해 나는 이들에게 노동의 가치를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에게는 지식의 중요성을 가르쳐야 한다. 이 모든 이들의 영혼 깊이 들어가야 한다...한 손에는 검을, 다른 손에는 쟁기를 들고 말이다.

<진중일기> 중 익명의 오란 남부 투타 지역 평화수립기구 대표의 1960년 11월 14일 증언

J.-C. Jauffret가 인용, <알제리의 군인들 1954-1962>, 오트르망(Autrement) 출판사, 2000


자료3. 1961년 4월 23일 드골 연설에 대한 집필


세 명의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역 하사관, 중사, 소집병이었다. 이들이 말했다. "중위님, 중위님의 의견을 저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방금 드골의 연설을 듣고 오는 길입니다. 저희는 드골에 동의합니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 장교들이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내일 "드골 만세!"를 외칠 것입니다." 나는 자연스레 그 태도에 동의했고 그들을 격려했다. 나는 부대 전체의 생각을 대표하는 이 셋에게 말했다. "하지만, 자네들이 왜 고문은 허용하고, 장군들의 폭동은 허용하지 않는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간단합니다." 이들이 대답했다. [...] "고문, 억압와 같은 모든 더러운 일들은 저희가 알제리에서 수행해야 할 임무입니다. 알제리 빨치산 추격, 프랑스 세력 유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공모자들은 우리를 우리의 가족, 친구, 국가, 즉 공화국으로부터 분리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발언이었다.

자크 쥘리아르, <파스칼의 선택>, 데클레 드 브루어(Desclée de Brouwer), 2003

좌파 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국장 자크 쥘리아르는 당시 중위로서 알제리에 복무했다. 자크 쥘리아르는 현재까지 프랑스군이 자행한 고문에 반대한다.


p.301


자료4. 권리 및 자유 수호 위원회 보고서

나는 테러리즘, 테러리즘의 잔인성, 참수, 가학적인 절단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테러리즘은 반테러리즘이라는 말로 우리를 함정에 빠뜨린다. 반테러리즘이라는 말은 테러에 대한 투쟁의 풍자화로 들린다. [...] 반테러리즘은 군대와 정부에 대한 평행적인 음모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군대와 정부 내부에 잠입한다. 효율성이라는 구실로, 그것은 그것의 행위에 있어서 인간의 생명을 경시한다. 너무나 많은 ‘탈주병’들이 약식 처형을 통해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너무나 많은 ‘실종자’들은 ‘과도한’ 신문의 결과였다. 공식 권력기간이 알지도 못한 채, 사람들은 특별 권력에 의해 체포되었다. 민사법원이나 형사법원에서 석방된 이들은 법원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감금되었다. 나는 이 부패의 원인이 무엇인지 자문했다. 한 편으로는 공공서비스를 담당하는 당국과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탓이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군대 지휘관들의 문제였다. 얼버무리지 말자. 군대와 민간의 관계를 타락시키고 유럽인과 무슬림 사이에 단절을 만드는 위선적인 계엄령이 알제리를 지배하고 있다.

1957년 12월 ‘르몽드’지에 게재된 R.Delavignette의 개인 보고서

자료5. 알제리에서 행해진 고문

최근 정치범수용소를 방문하여 본 소환자들에게서 남아있는, 14년 전 내가 게슈타포의 지하실에서 받았던 학대와 고문의 흔적을 보았습니다. [...]

이 즉흥적이고 제어되지 않는 방법들로 인해 인간의 자유 의지는 정당성을 찾습니다. 더군다나 프랑스는 불분명함 속에서 영혼을 잃을 위협에 놓여 있습니다. 저는 단 한 번도 시니컬한 적이 없었고 저는 익명의 책임자 하에서 행해지는 결과인 이와 같은 과오를 더 이상 용인할 자신이 없습니다.

전 레지스탕스였던 알제 경찰 서기관 폴 테이트겐의 사직서. 1957년 9월 직위에서 사임했다.


자료6. 스캔. 1958년 알제리 오레스에서의 군사작전


자료7. 스캔. 1958년경 알제리 원주민 보충병


알제리 전쟁 동안 150,000-200,000명 정도의 무슬림이 프랑스 군대에 복무했다.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자료에 명시된 시기 전 알제리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자료1)

2.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 전단지인가? (자료2) 이 전단지는 알제리 민족주의 전사들에게 어떠한 이미지를 입히고 싶어 하는가?

3. 익명의 저자가 주장하고 하는 바는 무엇인가? (자료2) 자신의 존재와 행위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가?

4. 본문을 정확한 역사적 맥락에 비춰 설명하시오. (자료3) 당시 "드골 만세!"를 외치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 명의 군인들은 어떠한 의도를 촉발하는가?

5. 고문행위에 대해 저자는 어떠한 판단을 내리는가? (자료5)

6. 원주민 보충병의 행동은 인도차이나에서 행해진 어떠한 행동과(p.290-291 참조) 비교할 수 있는가? (자료7) B. 자료 연관 짓기

7. 두 페이지에 걸친 증언에 따르면 고문에 대한 프랑스인 일부의 반응은 어떠한가? (자료3, 4, 5)

C. 논술

8. 알제리에서 프랑스 군대가 행한 군사행동과 방법이 극도로 다양하다는 점을 설명하시오.


p.302


복습 자료 필수 암기 연도

■ 1944: 여성의 선거권 획득

■ 1946년 6월: 바이외 연설

■ 1946년 10월: 헌법 관련 국민투표: 제4공화국의 시작

■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패배, 인도차이나 전쟁 종전, 알제리 전쟁 시작

■ 1958년 5월 13일: 알제 실력 행사

■ 1958년 9월: 헌법 관련 국민투표: 제5공화국의 시작

■ 1962년: 알제리 독립


인물정보

샤를 드골(180-1970)

6월 임시정부 수장(1944-1949)

제5공화국 창시자이자 대통령(1958-1969).


앙투안 피네 (1891-1994)

1952년 3월-12월 평의회 의장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1907-1982)

1954년 6월-1955년 2월 평의회 회장


기 몰레(1905-1975)

1956년 2월-1957년 3월 평의회 의장



필수

1. 제4공화국

■ 어려운 준비작업: 해방 시 국가 재건설의 시대

- 국가 재건설 필요

- 개혁 필요: 여성의 선거권, 국영화, 계획경제, 사회보장제도 창설

- 신제도 창설 필요

■ 점차 쇠약해지는 체제: 해방 시 희망을 전달하였으나 12년 만에 침몰하고 만다. 이유는 무엇인가?

- 냉전의 영향과 공산주의자들의 체계 반대

- 식민지 전쟁 영향의 연속성: 인도차이나 전쟁을 종식한 제네바 협정 체결 4개월 이후 알제리 전쟁 시작

- 경제 도약의 시기에 여러 명의 지도자(피네, 망데스 프랑스) 존재

- 심화되는 정부의 불안정성

■ 알제리 전쟁으로 인해 마침내 체제 종식(1958년 3월 13일)

2. 제5공화국의 시작

■ 빠른 체제 설립

- 1958년 여름, 신헌법

- 1958년 9월 국민투표를 통한 다수의 지지

- 1958년 12월, 제5공화국 대통령으로 드골 선출

■ 이후 4년 간 이 신생 체제는 알제리 전쟁과 마주한다.

알제리 전쟁은 에비앙 협정을 통해 1962년(3월) 종결되고 알제리는 독립을 맞는다(7월). 혼동하지 않기

제헌국회와 입법의회

▶ 제헌국회는 헌법을 집필하기 위해 선출된 의회이다. 헌법 집필이 완료되고 국민에게 승인될 때 임기가 만료된다.

▶ 입법의회는 헌법에 의거하여 선출되며 법안과 예산 관련 투표를 진행한다. 제한된 임기를 지닌다.

3당연립체제와 제삼세력 스캔 ▶ 3당연립체제: 공산당, 사회당(국제 노동자 동맹 프랑스 지부 소속), 대중공화당운동

▶ 제삼세력: 드골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제외한 세력의 연합

선거와 국민투표

▶ 선거는 투표를 통하여 대표인, 의회, 또는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보통선거 또는 납세선거(왕정복고 시대, 7월 왕정 시대), 간접선거(오늘날 상원의회)를 통해 이루어진다.

▶ 국민투표는 국민에게 질문을 하면 보통선거를 통해 국민이 찬성, 반대를 통해 답하는 것이다.


p.303


사료해설 (12/15)

주제 : 1946년 6월 16일 바이외 연설


물론, 여론을 표현하고 선거를 통해 여론이 스스로의 견해, 공공행위와 입법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모든 원칙과 모든 경험이 공권,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은 명백히 분리되고 견고한 균형을 유지하여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발적인 정치사태 너머로 결합의 지속성을 견고히 하기 위하여 국가의 중재가 설립되어야 합니다. 법률과 예산에 대한 결정적인 투표는 보통선거와 직접선거를 통하여 선출된 의회에 귀결되는 것은 자명하고 또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의회의 1차 전개는 통찰력과 평정을 필수적으로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선출되고 구성된 2차 의회에게 1차 의회가 결정하고, 수정하고, 제시한 사항을 공식적으로 검토하는 의무를 부여해야 합니다. [...]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되고 입법권을 지닌 의회에 대해서는 행정권이 정부가 곧 대표단의 의회의 형태로 그치고 말게 되는 권력의 혼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은 자명합니다. 실제로, 프랑스 정부의 연합, 결속, 내부 규율은 국가를 무력화하고 국가의 신용을 실추시키지 않기 위해서, 신성한 것이어야 합니다. [...]

그렇지만, 만약 행정권이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또 다른 권력으로부터 유래하게 된다면, 또한 국가 전체를 대표하는 임무를 공동으로 맡고 있는 정부의 각 구성원이 한 정당의 대리인으로서 그 직위를 맡고 있다면, 이러한 연합고 결속, 규율이 어떻게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

따라서 정당 위에 위치하며, 의회에서 더 나아가 더 많은 이를 포함하는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 행정권을 집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의회로부터 독립적인 방침으로 개인의 선택에 대한 공공 이익을 조화시키는 임무는 대통령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장관과, 정부 정책과 임무를 통솔하는 총리의 임명도 대통령이 수행해야 합니다. 법을 공표하고 법령을 채택하는 직무 또한 대통령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내각 회의를 주재하고 국가를 위한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임무 또한 대통령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제2회 노르망디 해방 기념식에 참석한 드골의 바이외 연설


문제

1. 연설문을 소개하시오: 주제, 화자, 맥락, 청자

2. 입법권 및 입법권과 행정권에 관해 드골 장군은 어떠한 견해를 갖고 있는가?

3. 대통령에게 어떠한 권력과 역할이 주어지는가?

4. 제도 설립 계획에서 드골이 계승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5. 장기적, 단기적인 관점에서 프랑스인들은 드골 장군의 헌법 제정을 어떻게 수용하는가?


문제해법 A. 개괄적 힌트

특정한 시기에 비범한 인물이 발표한 이 유명한 연설은 진정한 헌법 발표로서, 1946년의 헌법과 1958년의 헌법과 관계되어 있다.

정치용어를 잘 알고 있는지 확인할 것: 직접보통선거, 수정안, 책임자, 국민의 대표, 공포

B. 답변 힌트

문제1. 1946년 6월 16일, 드골 장군은 프랑스 내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공식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는가?

문제2. "실행하다", "유래하다" 등의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잘 생각하며 연설자가 국가 또는 조국관련 어떻게 단어를 활용하고 있는 지 설명할 것.

문제3. 두 전쟁 사이의 기간 동안 이전 체제인 제3공화국이 어떠한 약점을 지녔는지 잘 생각할 것.

문제5. 1946년 어떠한 성격으로 체제가 설립되었나? 1958년 프랑스인들이 승인한 체제의 성격은 무엇인가?

C. 예시 답변

문제1. 본문을 설명하시오.

1946년 6월 16일, 드골 장군은 1944년 6월 드골의 프랑스 귀환 시 그를 환영했던 최초 도시 중 하나인 바이외에서 연설을 한다. 이 유명한 연설에서 드골은 헌법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낸다.

이 날까지도 프랑스에는 아직 헌법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다. 프랑스인들은 제3공화국의 회귀(1945년 10월)와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좌파가 지배하던 제헌국회가 집필한 헌법 개정(1946년 5월)을 연속해서 거부하였다. 드골은 1차 제헌국회가 제안한 헌법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 우해 1946년 1월 20일 사임했다. 모든 공식 직위에서 벗어났지만 드골은 대다수의 프랑스인에게 국가의 영광을 사수한 자유 프랑스 수호자로 여겨져 높은 명성을 유지한다.


p.304


에세이 (6/9)

주제: 탈식민지화와 마주한 프랑스와 프랑스인들 (1945-1962)


연표

■ 1945년 5월 8일: 세피트 폭동(알제리)

■ 1945년 9월: 베트민에 의한 베트남 독립선언

■ 1946년: 프랑스 연합의 식민제국 대체

■ 1946년 12월: 인도차이나 전쟁 시작

■ 1947년-1954년: 프랑스 공산당의 "더러운 전쟁" 규탄

■ 1950년: 중국 국경에서의 베트민 공세: 4번 식민지 도로 포기

■ 1954년 5월: 디엔비엔푸 전투 패배

■ 1954년 6월: 망데스 프랑스 정부

■ 1954년 7월: 제네바 협정: 인도차이나 전쟁 종전, 비에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독립

■ 1954년 11월 1일: 알제리 반란: 알제리 전쟁 시작, "알제리는 프랑스다."내무부 장관 발표

■ 1956년: 모로코와 튀니지 독립. 프랑스 해외영토 발전을 위한 드페르 기본법. 기 몰레 정부의 징집병 알제리 파병, 프랑스 내 시위

■ 1958년 5월 13일: 알제 실력행사

■ 1958년 6월: 드골, 평의회 의장. 제4공화국 종결

■ 1959년-1960년: 알제리 내 프랑스군 공세: 샬 계획

■ 1959년 9월: 알제리 민족자결에 대한 샤를 드골 연설

■ 1960년: 사하라 이남 프랑스 아프리카 독립

■ 1962년: 에비앙 협정, 알제리 독립


문제해법

A. 개괄적 힌트

1. 주제 읽기

이러한 주제 분석은 몇 가지 큰 주제 위주로 연결시켜야 한다.

1. 1945년, 프랑스는 세계 제2의 식민대국이다. 1962년, 알제리 전쟁 이후, 프랑스는 제국시대의 "잔여물"을 가진 것이 전부이다. 사반 세기 만에 큰 몰락이 있었던 것이다.

2. 이러한 몰락은 2회에 걸친 전쟁과 동반한다. 전쟁의 진행뿐만 아니라 전쟁의 "영향" 또한 분석해야 할 점이다.

3.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전쟁의 각기 다른 "영향"에 주의해야 한다. 1954년까지 지속된 인도차이나 전쟁은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알제리 전쟁은 조금씩 중요성이 커져 공화국 붕괴에 일조했고 이후 체제의 초반 4년 간 큰 어려움을 안겼다.

4. 연보에 명시되어 있는 전쟁 없이 이루어진 탈식민지화(튀니지, 모로코) 또하 언급되어야 한다. 또한 비교를 위하여 평화적 탈식민지화(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또한 간략하게 언급되어야 한다.

5. 교과서의 탈식민지에 대해 다루는 부분에 언급된 지식을 잘 활용할 것.

2. 주제 분석하기

1. 연결어:

가장 중요한 연결어는 "마주한"이다:

- 탈식민지 현상과 마주한

- 프랑스와 프랑스인들이 마주한

탈식민지화와 마주한 (1945-1962) (스캔)

2. 시대:

두 개의 식민지 전쟁기를 포함하는 시대이다.

3. 에세이 주제 정하기

"프랑스와 프랑스인들"은 탈식민지화와 두 개의 전쟁을 마주한 "프랑스" 정부뿐만 아니라 "프랑스인"의 여론에도 영향을 미친 전쟁의 무게 또한 의미한다.

따라서 다음 두 가지 요소 간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 식민지 전쟁이 체제와 여론에 미친 영향

- 체제의 강점 또는 약점과 식민지 전쟁 및 평화적 탈식민지화가 미친 영향


p.305


참고자료 스캔


인도차이나의 극동아시아 원정군 수송차(CEFEO), 1954년 5월


B. 개요 제안


서론

1946년-1962년, 프랑스는 두 식민지 전쟁에서 모두 패한다. 1945년 식민제국이었던 프랑스는 1962년 제국을 잃는다.

프랑스인들은 이 시련을 어떻게 겪었는가? 같은 방식으로 이 시련에 대응하였는가? 이유는 무엇인가?

I. 1945-1954: 초기 탈식민지화에 분명히 큰 영향을 받지 않은 프랑스인들

1. 1차 위기

- 1945년 5월: 세티프(알제리), 1946년 12월: 인도차이나

- 프랑스 연합 설립

2. 인도차이나 전쟁

- "게릴라"에 맞서는 프랑스 원정군(상비군)

- 게릴라 진압의 어려움

- 프랑스 본국 상황: 지리적 거리로 인한 무관심이 지배적, 적대적 반대(공산당)

3. 디엔비엔푸의 충격

- 디엔비엔푸 전쟁 패배: 정규군 패배, 포로로 끌려간 주둔군

-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신정부와 제네바 협정

- 결과: 굴욕, 인도차이나 독립

II. 1954-1958: 알제리 전쟁과 마주한 제4공화국

1.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두 전쟁의 연속

- 평화적 탈식민지화 고려(튀니지)

- 그러나 1954년 만성절, 알제리 전쟁 발발

- 1954년, 여론과 정계는 "알제리는 프랑스다." 라는 의견(내무부 장관 프랑수아 미테랑 선언).

2.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 알제리

- 기 몰레의 징집군 파병: 전쟁에 대한 여론 변화(인도차이나 전쟁은 자발적 상비군 파병이었음), 인명피해

- 고문 행위에 대한 여론 대립

3. 1958-1962: 드골, 프랑스, 탈식민지화

I. 해결방안 모색

- 계속되는 전쟁, 군사적 해결방안 모색

- 협상을 통한 해결방안 모색("용감한 이들의 평화") 및 개혁 추진(콘스탄틴 계획)

- 1959년 9월: 민족자결주의 표명

2. 1959년 9월에서 1962년 봄까지의 요동

- 전쟁이 유발한 위기: 바리케이트의 주(1960), 장군 폭동(1961), 피에 누아르들의 프랑스 알제리포기 거부

- 군사적 해답

- 동시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평화적" 탈식민지화 지속

3. 종국

- 에비앙 협정

- 1962년 악몽의 봄: 비밀 군사 조직 테러, 원주민 보충병 학살

- 유럽인 모국 송환자 및 원주민 보충병

결론

몰락하는 제4공화국, 동요를 겪지만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제5공화국. 프랑스는 탈식민지화에 큰 대가를 치뤘다.

두 전쟁에 대해 다른 생각을 보인 프랑스인들: 인도차이나 전쟁은 상비군 파견이었기에 무관심. 1956년 알제리 전쟁은 징집병, 독립 논쟁, 고문 문제.


제 16 장: 드골과 함께한 제5공화국, 드골 부재 하의 제5공화국 (1962-1981)

p. 306

알제리 전쟁의 영향으로 1958년 출범한 제5공화국은 1962년에 들어서야 제도적 윤곽을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이어서 드골은 1969년까지 공화국 대통령직을 지낸다. 제5공화국은 그 창설자를 충실히 따라가는 능력을 보여 1969년, 드골주의자 조르주 퐁피두가 대통령직에 오른다. 1974년 조르주 퐁피두의 사망 이후에는 자유우익 진영의 인물이 그 뒤를 잇게 된다. 프랑스의 역사적 상황에서 제5공화국은 드골 대통령의 지휘 하에서 어떻게 그 뿌리를 내렸으며 드골의 퇴진 이후에는 어떻게 그 뿌리를 이어 나갔는가?


자료1. 스캔 드골 공화국으로부터…

기자회견장에서의 드골

“누가 권력의 자리로 다시 소환받아 돌아온 드골 장군이 기념일에 국화를 헌화하는 일에나 만족할 것이라 믿었는가? [...]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은 공화국의 대통령은 이제부터 공화국 조직 제도를 비호하고 결속하는 머릿돌과도 같다.”

1965년 9월 9일 기자회견장에서의 샤를 드골 장군

p.307

스캔 (도표)


자료2. 점진적인 변화까지…

스캔 1976년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를 맞이하는 지스카르 데스탱

“드골 장군으로부터 물려받은 전제공화국의 특징과 점점 더 복잡하게 발전하는 사회 간의 총합체를 찾는 일은 큰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임무였다.”

R. Rémond, J.-F. Sirinelli, <지스카르의 시대(Les Années Giscard)>, S. Berstein(지도교수), 파야르 출판, 2003에 수록된 2002년 1월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의 어록


p.308

1) 1962: 개정된 헌법

A. 보통선거를 통한 대통령 선출? 자료3, 4

■ 참혹한 알제리 전쟁의 종결로 인한 타격에도 불구하고, 1962년 일사분기에 제5공화국은 파란 많았던 출범 초반 시기를 통해 구조를 견고히 다졌다. 그러나 제5공화국의 완전한 제도적 틀은 드골과 여러 정당 간의 정치적 대립 끝에 1962년에서야 형성된다.

■ 1962년 여름, 대통령은 아직 자신이 할 일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한다. 한편 프랑스 정계 주요 인물들의 무리는 그와 반대되는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대통령은 자신의 7년 임기를 완수함과 동시에 제5공화국의 최종 윤곽을 완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 견고하고 안정적인 행정부로부터 이루어지는 ‘강한 국가’라는 드골이 가진 비전과 더불어 행정부와 국민 간의 관계에 대한 드골의 구상은 그로 하여금 더 이상 선거인단을 통해서가 아닌 보통선거를 통한 대통령 선출을 원하게 만든다.

■ 1962년 8월 22일 알제리 독립 주장 무장단체 OAS가 파리 근교 쁘띠 끌라마르에서 드골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고, 드골은 가까스로 피신에 성공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드골의 보통선거 결정은 더욱 앞당겨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9월 12월, 드골은 프랑스 국민에게 국민투표를 통한 헌법 개정을 실시할 것을 공표한다. 반대론자들은 국민투표 청원이 헌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여기며 국회의원들이 이 문제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반대론자들은 보통선거를 통한 대통령선거에도 이의를 제기하며 공격을 가한다. 반대파들은 대통령 선택 권한을 오직 당선자들만 가질 수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B. 보통선거 대통령 선출에 대한 국민투표 자료1, 2

■ 1962년 10월 5일, 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정당들이 퐁피두 정권 불신임을 의결한다. 드골 장군은 이에 프랑스 국회 해산으로 응수한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주권 국민들 10월 28일 국민투표, 11월 국회의원 총선거라는 두 개의 상반된 상황을 겪게 된다.

■ 신공화국을 위한 연합(UNR-Union pour la nouvelle République)의 드골주의자들만이 찬성표를 던지고, 반대 정당들은 모두 반대표를 던지게 된다. 이 반대 정당들은 “반대 카르텔“이라는 별명 하에 뒤얽힌 연합을 결성한 것이다. 10월 28일, 찬성표가 총 62%를 차지함으로서 드골 장군은 이론의 여지 없는 승리를 얻는다.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이 때부터 대통령선거는 국민투표를 통해 이루어진다.

C. 재구성된 정치계 자료5, 6

■ 1962년 11월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드골의 정당은 재정부 장관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이끄는 독립 공화당의 도움까지 합하여 총 233석의 의석을 차지한다. 이로써 드골은 퐁피두 내각을 후원하는 안정적인 대다수 의석을 차지하게 된다. 본 총선 이후 퐁피두는 국무총리로 재지명되었다. 반대파들은 이러한 이중 교전을 겪으며 세력이 약해지게 된다. 이 중 특히 좌파정당들은 결정적인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1947년부터 대립해 오던 공산당과 사회당은 이제 서로 가깝게 지내야 하는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 1965년으로 예정된 1차 대통령 보통선거를 전망하며 사회당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며 망설인다. 공산당과 결합하여 좌파 연합을 결성해야 하는가, 또는 제4공화국에서 종종 그랬던 듯이 중도파와 결합하여 우파 연합을 결성해야 하는가? 이들은 마침내 첫 번째 방안을 선택하게 된다. 1965년 가을 초, 사회당과 공산당은 함께 프랑수아 미테랑을 대통령 후보로 지지한다. 프랑수아 미테랑은 제4공화국에서 여러 차례 장관직을 지낸 인물이었다. 또한 1964년에는 『지속적인 쿠데타』 (원제: Le Coup d’Etat permanent)을 집필하여 당시의 정치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한 작가이기도 했다. 바로 이 인물을 통해 좌파정당들의 힘이 한곳에 집결하게 되었다.


어휘

censure(불신임): 제5공화국 시기의 불신임 발의는 불신임을 찬성하는, 다시 말해 정부를 뒤엎기를 원하는 과반수 의원의 투표를 통해 채택된 문서를 통해 이루어졌다.


자료1. 1962년 10월 2일 불신임 발의, 5일 불신임 표결

국회는, [...]

헌법이 명료하게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헌법 개정 제의는 상원의원과 하원의원의 투표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고, 프랑스 국민들이 의회 내 토론 사항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투표를 통해 승인되어야 한다고 간주하며,

상원의원과 하원의원의 투표를 배제하는 공화국 대통령은 헌법을 위배하고 있는 것이라 간주하며,

이 행위를 통해 공화국 대통령이 추후 협잡꾼이 공화국을 전복시키고 자유를 박탈할 목적으로 파고 들어올 수 있는 틈을 열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며,

공화국 대통령은 내각의 “제의“대로만 행동할 수 있었다고 간주하며,

헌법 제49조 2호에 의거하여 정부 불신임 동의를 의결한다.

서명자: 민주동맹(Entente démocratique), 인민공화주의운동(MRP – Mouvement républicain populaire), 사회주의자, 독립인 구성원

자료2. 1958년 헌법 내의 불신임

제49조. 국무 총리는 장관회의의 의결 이후 국회에 대하여 정부 정책에 대한 책임 또는 경우에 따라 정책성명에 대한 책임을 약속한다. 국회는 불신임 발의를 통해 정부의 책임을 묻는다. 불신임 발의는 국회 구성원의 최소 10분의 1의 인원에게 서명을 받을 경우에만 수리가 가능하다. [...] 국회 구성 인원의 과반수가 불신임 발의에 찬성으로 투표할 경우에만 투표 조사가 행해진다.

1. 어떠한 조건 하에서 정부는 불신임 발의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2. 국회의 불신임 발의 표결로 인해 발생하는 영향은 무엇인가?


p.309


자료3. 스캔. 드골 장군의 공식 초상화


자료4. 1962년 9월 20일 드골의 연설

프랑스 국민 여러분이 제가 수장으로서의 제 자리에 공식적으로 돌아올 것을 명한 뒤로, 저는 국민 여러분께 언젠가는 제 자리의 계승에 관한 질문을 드려야 할 날이 오겠다고 자연스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대통령 선거 방법에 대한 질문입니다. [...] 우리 중 프랑스 공화국이 당시 체제의 나약함으로 인해 맞닥뜨려야 했던, 1958년 5월 쇠퇴의 그 날을 기억하지 못 하는 이가 있습니까? 권력의 무능함은 갑작스러운 쿠데타, 무정부 사상의 보급, 내전 등의 위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저는 조국의 운명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저의 정부 각료들과 함께 현행 헌법을 제안하였습니다. 80%의 유권자를 통해 수용된 본 헌법이 제정된 지 4년이 되었습니다. [...] 현재 우리 제도의 핵심은 프랑스인들의 이성과 감성을 통해 국가의 수장이자 프랑스의 지도자 지정하는 새로운 지정 방식입니다. [...]

헌법이 명시하는 각각의 법률관계나 정치권력,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간의 상호관계를 수정하지 않으면서도 미래에 그 어떤 형태의 선동적인 공격에 맞서 우리의 제도를 유지하고 공고히 하며, 또는 선의로든 악의로든 그 어떤 형태의 행위에 맞서 우리의 제도를 유지하고 공고히 하며 과거의 치명적인 체제로 회귀하지 않기 위하여, 저는 프랑스에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7년 임기가 만기된 후, 또는 사망이나 질병으로 인해 임기 전 퇴임이 발생할 경우,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은 그 때부터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되어야 할 것입니다.

1. 텍스트를 소개하시오: 저자, 텍스트 성격, 역사적 맥락
2. 1958년의 상황을 드골은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3. “미래에 그 어떤 형태의 선동적인 공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4. 헌법 개정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자료5. 스캔. 1962년 국민투표 이후 프랑스 제도

1. 제4공화국의 제도와 위의 제도를 비교하시오.
2. 현재의 제도와 위의 제도 간에는 어떠한 차이점이 존재하는가?


자료6. “사적인 권력”

a. 권력이 단 하나의 인물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제5공화국은 무엇인가 [...] ? 일시적 행정관? 개인의 군주제? 영구직 집정관? [...] 그리고 드골, 그는 누구인가? 수상, 독재자, 총통, 지도자? [...] 나는 드골 체제를 독재라고 칭한다. 드골 체제는 바로 독재와 가장 유사하기 때문이고, 이는 필연적으로 드골에 의해 사적인 권력의 지속적 강화로 이어지며, 드골은 이제 정치 노선을 변경하는 데 주저함이 없기 때문이다.

폭동을 일으켜 국가를 점령한 이래로 드골주의란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매일의 쿠데타이다.

프랑수아 미테랑, <지속적인 쿠데타> 발췌부분, 줄리아르 출판사, 1964

b. “사적인 권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공화국 대통령이 그에게 따르는 책임에 따라 개인적으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확한 사실이다. [...] 그러나 대통령이 모든 사항을 무시하고 자신의 마음대로 행동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현 대통령이 현재 얼마나 많은 표결과 협의로 둘러싸여 있는지 보이지 않는가!

드골 장군, 기자회견 발췌, 1965년 9월 9일

1. 미테랑을 드골장군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2. 이 평가는 사실과 일치하는가?
3. 이에 대해 드골장군은 어떻게 답변하고 있는가?


p.310

2) 드골 프랑스의 전성기

A. “영광의 30년”의 한가운데에서… 자료2

■ 균형을 잃고 쇠약해진 반대파에 맞서 드골장군은 입지를 공고히 하며 그의 1차 7년 임기를 마친다. 그가 설립하고 그가 개정까지 마친 체제는 1958년에 이어 1962년에도 주권국민이 참여한 보통선거를 통해 더욱 견고해진다.

■ 경제상황 또한 빠른 체제 정착에 기여한다. “영광의 30년”의 중추를 이루는 1960년대는 프랑스가 이례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고 전례 없는 사회 변화를 겪은 시기였다.

■ 제5공화국은 이렇듯 유리한 정세의 혜택을 확실히 누린다. 조르주 퐁피두 총리는 이 사회적 비약의 시기를 신중하게 관리한다. 이 시기에 총리는 1963년 광산 노동자 파업 등의 심각한 사회 분규를 겪기도 한다. 같은 시기에 대통령은 세계 속 프랑스의 “입지”라는 자신의 또 다른 그림에 우선적으로 몰두한다.

B. …폭발적인 경제성장 자료1, 3

■ ‘위대한 프랑스’ 대외정책을 주도하고 프랑스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프랑스 경제성장률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했다. 1945년 이후, 제4공화국은 프랑스를 재건설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프랑스 화폐인 프랑의 가치가 하락하였다. “신 프랑” 창설과 앙투안 피네 재정부 장관이 주도한 1960년 화폐개혁을 통해 화폐 안정화가 이루어졌다. 징수와 지출의 균형, 견고한 화폐, 프랑스 기술 발전(SECAM 컬러텔레비전 방식, 1969년 3월 2일 처녀비행을 수행한 콩코드 여객기 제작)으로 표명된 엄격한 재정정책은 1960년대 경제 팽창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 강력한 경제성장을 통해(연평균 성장률 5%) 프랑스는 산업근대화에 착수한다. 이러한 성장은 프랑스인들의 삶의 질을 명백하고 빠르게 향상시켰고 준완전 고용 상황 또한 창출하였다(1962년 단 21,000명의 보상금 수급 실업자 존재).

C. 1965년 대통령 선거 자료4, 5, 6

■ 1962년의 정치적 성공과 유리한 경제상황을 통해 드골장군은 아주 쉬운 재선 성공을 예측할 수 있었다. 재선은 이전 선거보다는 쉽지 않았지만 동시에 드골 체제 정착을 확인시켰다. 1962년 가을 정치 분쟁 시, 대부분의 정당이 보통선거를 통한 대통령 선출에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들의 답변은 정확했다. 85%의 선거참여율을 통해 보통선거는 이 때부터 프랑스 정치행위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 1차 선거에서 드골 장군은 44.7%의 득표율을 얻으며 2차 선거를 기다리게 된다. 드골 장군의 주요 경쟁자는 둘이 있었는데, 좌파 연합의 프랑수아 미테랑은 31.7%, 중도 좌파의 장 르카뉘에는 15.6%의 득표율을 기록한다. 1958년과 1962년 드골 진영의 승리에 비하면 이는 놀라운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골은 2차 선거에서 미테랑과 대결하여 (44.8%) 55.2%의 득표율을 얻으며 가뿐히 재선에 승리한다.

■ 오늘날에는 2차 선거가 흔히 발생하는 일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심지어 드골 장군 스스로에게 있어서도 이는 절반의 실패로 해석되었다. 게다가 재선된 대통령의 나이는 75세였다. 드골이 세계적인 영향력을 지니는 국가의 수장임은 분명하였다. 그러나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프랑스와 드골 사이의 격차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격차는 1968년 5월 위기 때 전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어휘

Ballotage(산표): 어느 후보자도 1차 투표에서 당선에 필요한 절대적 다수표를 얻지 못한 상태(절반+1의 득표수). 이 경우 2차 투표에서는 상대적 다수표 득표자가 당선인으로 선출된다(가장 높은 득표수).

자료1. 스캔. “신 프랑”. 재정부 장관인 앙투안 피네가 신 프랑의 앞면과 뒷면을 소개하고 있다(1신 프랑=100 구 프랑)

자료2. 스캔. 산업생산 및 구매력

위: 산업생산량 누적상승률 (단위: %) 아래: 시급에 따른 구매력 누적상승률 (단위: %)


자료3. 스캔. 프랑스의 전성기 1962년, 대형 여객선 ‘프랑스호’가 뉴욕항에 들어서고 있다.


자료4. 스캔. 1965년 대통령 선거 포스터

(포스터 내 문구: 나는 7살이에요 / 나는 계속 자랄 거에요)

1. 포스터 제작 연대를 추정해 보시오.
2. 작은 소녀는 누구를 의미하는가?
3. 소녀 쪽으로 뻗어있는 손은 누구의 손인가?
4. “나는 7살이에요, 나는 계속 자랄 거에요”라는 문구는 무엇을 뜻하는가?
5. 포스터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자료5. 스캔. 1966년 4월 릴에서의 드골


자료6. 스캔. 1965년 12월 3일 미테랑 후보의 연설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오는 일요일에 1940년 6월 18일 조국의 영광을 강생시킨 군인과 자신들의 과제를 저버린 세대 중 하나를 선택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전쟁 포로의 캠프에서, 내부 저항의 대열에서, 모든 프랑스 국민은 드골 장군처럼, 그리고 드골과 함께 자유라는 권리를 사수하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오는 일요일에 무질서와 안정 중 하나를 선택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질서를 단죄하였고 그 누구도 감히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못 할 것입니다. [...]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오는 일요일에 현 체제와 정당들의 체제 중 하나를 선택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현 체제는 단 한 명의 체제입니다. 그가 떠날 날이 오면 그는 알려지지 않은 계승자를 여러분에게 인도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계승자에게 정당보다 더 나쁜, 사리사욕과 난국을 가져올 익명의 조합원 측근 파벌을 지정할 것입니다.

1. 본 연설의 역사적인 맥락은 무엇인가? 드골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2. 드골의 과거 역할을 과소평가하기 위하여 어떠한 주장이 사용되었는가?


p.312


자료집

“프랑스는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정상에 위치한다”


• 회고록의 도입 부분에서 드골 장군은 “일생 동안 나는 프랑스의 소신을 위해 일했다”, “프랑스는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정상에 위치한다”고 밝힌다. 드골의 대외정책은 “입지”뿐 아니라 “위대함”, 그리고 자주성을 시사한다. 그의 관점에서 프랑스는 오로지 핵억제력을 통해서만 강해질 수 있다. 이는 바로 1960년대에 실행되었다 (1960년 핵폭탄 A, 1968년 핵폭탄 H).

• 1966년, 대통령은 대서양 동맹을 굳건히 유지하면서 NATO 통합군사령부로부터 탈퇴를 결정한다. 그러나 드골에게 있어 국가의 자주성은 억제력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세계적 영향력, 과거 제국주의 식민지 국가 및 드골이 눈에 띄는 순방을 실시한 제3세계 전반에서의 영향력으로부터 발현되는 것이었다.


어휘

Force de dissuasion(억제력): 1960년부터 드골 장군이 주목한 핵무기를 갖춘 군사력으로 폭격기 미라지 IV, 미사일발사 핵잠수함, 프로방스 지방의 알비용 고원에 설치된 지대지 미사일 등이 포함된다.

Dissuasion(억제): 드골 장군이 채택한 독트린으로, 프랑스의 반격 능력을 통해 프랑스를 공격하려는 적에게 ‘감당할 수 없는 손실’로 위협하며 공격을 억제하려는 것.


자료1. 드골과 프랑스

일생 동안 나는 프랑스의 소신을 위해 일했다. 이성만큼 감성 또한 나를 그 일로 이끌었다. 나에게 있어 프랑스는 감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동화 속 공주, 프레스코 벽화의 마돈나와 같은 각별하고 이례적인 운명에 헌신하는 이미지 말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여태껏 달성한 성공과 본보기가 될 만한 실패를 위해 신이 그러한 이미지를 창조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만약 범인들이 이러한 사실과 행동을 표출한다면, 나는 조국의 특성이 아닌 프랑스 국민의 잘못으로 돌려야 할 난해한 모순과 격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내 정신의 긍정적인 부분은 프랑스는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정상에 위치한다며 나를 설득한다. 거대한 계획들만이 국민들이 스스로 지니고 있는 분산의 요인을 상쇄할 수 있다고, 우리의 국가는 다른 국가들이 그러하듯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더욱 위를 바라보며 반듯이 서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프랑스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권위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믿음은 내가 태어난 곳에서 나와 함께 성장했다. 사상가, 문학가, 전통수호자였던 나의 아버지는 프랑스의 존엄이라는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역사가 무엇인지 알려 주셨다. 나의 어머니는 당신의 신앙심만큼이나 강렬한 조국에 대한 열정을 지니신 분이셨다. [...]

릴 출신인 내가 파리에 살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우리 조국의 영광을 나타내는 상징들이었다. 노트르담의 야경, 저녁 시간 베르사이유의 위엄, 햇빛에 빛나는 개선문, 앵발리드 궁륭에서 펄럭이는 국기들. 조국의 성공을 이보다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있을지. 러시아 차르 행진을 보며 열광하는 국민들, 롱샴 열병식, 경탄을 자아내는 박람회, 우리 비행사들의 최초 비행.

샤를 드골, <전쟁 회고록> 중 ‘소환’, 1940-1942, 플롱 출판사, 1958년


자료2. 스캔. 1967년 드골과 프랑스 최초 핵잠수함

1960년~1969년 국방부 장관을 지낸 피에르 메스메와 동행한 드골은 1967년 3월 29일 쉘부르에서 열린 프랑스 최초 미사일발사 핵잠수함 발표식에 참석했다.


p. 313


자료3. 스캔. “자유 퀘벡 만세”

드골의 몬트리올 해외 순방(1967)

“여러분께 몬트리올에서 열린 이 놀라운 집회를 통해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갖고 간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 오늘 저녁 이 곳에 왔습니다. 프랑스 전체가 이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보며,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현장에서 직접 보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몬트리올 만세! 퀘벡 만세! 자유 퀘벡 만세! 프랑스 캐나다 만세, 그리고 프랑스 만세!”

몬트리올 시청 발코니에서의 즉흥 연설, 1967년 7월 24일

자료4. 프놈펜 연설

1954년 제네바 협약 체결 이튿날, 캄보디아는 용맹함과 통찰력으로 중립 정책을 택했습니다. [...] 여러분의 국가는 여러분이 주인으로서의 자리를 지켜 여러분의 육체와 정신을 보존하기에 이르렀으나, 우리는 정치 권력과 미국 군대가 남 베트남에 정착하는 것을 보았고, 국가적 저항의 형태로 전쟁이 다시 발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후, 군대 주둔에 대한 환상을 통해 원정군이 지속적으로 증강되었으며 이 원정군은 아시아 지역에서 점차 단계적인 세력 확장을 이루었습니다. [...]

프랑스의 입장은 정해졌습니다. 바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한 규탄을 통해서 말입니다. [...] 그렇습니다! 프랑스는 현재 인도차이나를 유린하는 전투들은 그 누구에게도 해결책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미국 군무기가 인도차이나에서 무력화된다면, 아시아 국가의 국민들은 태평양 건너 외국의 법률에 종속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군무기 도입의 의도가 어쨌든, 그 군무기가 얼마나 강력했는지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현재의 시련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든 간에 프랑스는 군사적 해결책을 강구하지 않겠다는 확실한 입장을 밝힙니다. 샤를 드골, 프놈펜(캄보디아), 1966년 9월 1일


자료5. “연방 유럽 외 다른 유럽은 있을 수 없다”

기자 여러분, 덧붙여 저는 제가 그 어떠한 발언에서도 “조국의 유럽”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께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사람들은 늘 제가 이미 이러한 이야기를 했다고 주장하지만 말입니다. 그러한 주장은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건대 절대로 저의 주장이 아닙니다. 반대로 저는 유럽이 프랑스인들의 프랑스, 독일인들의 독일, 이탈리아인들의 이탈리아로 행동하지 않을 때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지지합니다. 단테, 괴테, 샤토브리앙은 이탈리아인, 독일인, 프랑스인이었다는 점에서 유럽에 속하는 인물들입니다. 그들이 무국적자였거나 통합된 ‘에스페란토어’ 또는 ‘블라뷔크어’ 등을 통해 생각하고 글을 썼다면 그들이 작품에서 유럽을 그렇게 많이 차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라는 것이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요소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유럽을 건설할 수 있는 것은 행동, 권위, 책임의 요소입니다. 이 요소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바로 연방입니다! 효력이 있는 고려 방안 내에서 적법하게 실행할 능력이 있는 요소는 오직 연방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드렸던 말씀을 지금 다시 한 번 드립니다. 오늘날에는 연방 유럽 외 다른 유럽은 있을 수 없습니다. 경제 공동체의 진행 상황이 이를 매일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 경제 공동체는 바로 연방에 의해 창설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자회견장에서의 샤를 드골, 1962년 5월 15일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여태껏 달성한 성공과 본보기가 될 만한 실패’의 예를 들어 보시오. (자료1)

2. 드골의 이러한 발언은 누구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자료3)

3. 프놈펜 연설에서 드골은 누구를 규탄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자료4)

4. 드골은 조국과 연방 간의 차이를 어떻게 지정하고 있는가? 드골이 반대하는 유럽의 개념은 무엇인가? (자료5)

B. 자료 연관 짓기

5. 자료1에 소개된 사상의 연장선에 있는 1958년 이후 드골의 결정들을 나열해 보시오.

6. 드골에게 있어서 프랑스의 대외정책은 무엇보다도 국가 자주의 정책임을 설명하시오.

C. 작문

7. 자료집의 내용을 활용하여 프랑스의 “입지”와 “위대함”을 설명하시오.


p.314


자료집


드골 반대자들


• 2회에 걸친 임기 동안 드골장군은 다양한 반대진영의 출현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알제리 전쟁 종전 이후 반대진영은 증가하게 되어 1962년 가을 정치 분쟁, 1965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중도 반대파의 존재와 좌파 진영의 적의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반대 진영의 주요 조합원들은 사회운동을 통해 반감을 드러낸다.

• 1968년 5월, 심각한 사회운동 또한 학생 운동의 기폭제 이후 각기 다른 반대진영의 집중으로 설명된다. 1969년 4월 국민투표 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을 비롯한 드골 측근들의 반대 연합진영의 가담은 대다수의 반대표 창출의 활로를 뚫는다.

자료1. 스캔. 1962년 국민투표 시기 프랑스 공산당 포스터

자료2. 스캔. 1965년 12월 5일 대통령선거 1차투표 및 결과


p.315


자료3. 스캔. 1962년 5월 16일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 일면

본 자료의 ‘리베라시옹’은 레지스탕스 이후 엠마뉴엘 다스티에 드 라 비제리가 창간한 리베라시옹으로, 1964년 폐간되었다.

(신문기사 제목: “드골이 보고 싶어하지 않는…그리고 그가 언급하기를 ‘잊은’ 파업들”)


자료4. 1967년 1월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의 “찬성, 그러나…”


우리의 “찬성”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무엇에 “그러나”를 붙입니까? 우리는 공화국 대통령에 “찬성”하고, 안정에 “찬성”하며, 프랑스의 대외정책에 “찬성”합니다.

독립 공화국민들은 공화국 대통령 드골에 “찬성”합니다. 국민들은 대통령 선거 시 그를 위해 투표했습니다. 우리는 프랑스 유권자들에게 1967년 선거에도 1965년 그들이 선택했던 것처럼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유권자로 남아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여성 유권자 여러분들은 절조를 지켜 주시고, 남성 유권자 여러분들은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 주십시오. [...]

프랑스의 대외정책에 찬성이라 함은, 끈기를 가지고 두 방향으로 진행된 행위를 뜻합니다. 조국 독립성의 재건설과 오늘날 프랑스가 베트남 전쟁 종결을 요청하는 이유인 세계 평화 추구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그러나”를 붙입니까?

프랑스는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두 번 다시 같은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체계적으로 꼼꼼하게 노력하며 너무나 많은 불안감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보통선거를 통한 대통령 선출과 과반수 이상 의사 결정으로 완성된 제5공화국 제도는 행정부의 안정성을 보장합니다. 오히려 위협이 되는 것은 핵심적인 결정을 추진하려는 이들과 여론 사이를 분리시키는 차이점일 것입니다. 제5공화국은 대화의 핵심적인 위치에 위치해야 합니다.

1967년 1월 12일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자료5. 장 폴 사르트르가 판단한 드골주의

나쁜 드골주의는 없다. 좋은 드골주의도 있을 수 없다. 드골주의는 존재한다. 그것이 전부이다. 다시 말 해 체제라는 것은 천성적으로 우리가 맞서 싸우는 지배 계층의 표현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부르주아 사회에서 [...] 정부라는 장치는 적들에게 필수불가결한 장치이다. [...]

이렇듯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억압은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체제의 영원한 전쟁의 한 순간에 불과하다. 체제가 자신의 발가벗은 모습을 공개하는 진실의 순간이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체제를 진보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기회를 통해 모든 이들에게 억압이 감추려고 노력하는 스스로의 역겨운 알몸을 보여주기 위해 이를 규탄한다. 억압은 만성적이고 때로는 예리한 계층갈등의 형태이다. 경영자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

우리 사회는 거짓말을 기반으로 세워져 있으며 정부의 의무는 프랑스 각 가정의 거실에 복구할 수 없는 정도의 거짓말을 선전하기 위해 매스미디어를 활용하는 것이다. 저널리스트들에 대한 파면 통고는 이러한 선전의 방어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일이다. 정부는 거짓말을 하거나 곪아 터져야 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이다.

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에 게시된 장 폴 사르트르의 기사, 1968년 11월 4일


자료6. 스캔. “가면을 쓴 자, 바로 그다!”

1968년 프랑스 미술학교 아틀리에 작품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어떠한 국민투표에 관련된 맥락인가? (자료1)

2. 어떠한 반대의견들이 소개되어 있는가? (자료2) 드골이 진부하게 묘사된 점을 설명하시오.

3. 이 신문의 제목을 통해 어떠한 반대의견들이 나타나는가? (자료3)

4. 이 텍스트를 쓴 이는 드골 반대자인가? (자료4) 답변을 입증하시오.

5. 이 텍스트의 저자는 어떠한 이데올로기에 기반하는가? (자료5) “정부는 거짓말을 하거나 곪아 터져야 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이다.” 를 설명하시오.

6. 어떠한 점에서 이 그림이 드골 반대주의를 드러내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자료6)

B. 자료 연관 짓기

7. 드골에게 어떠한 비판이 가해지고 있는가? (자료1, 자료5)

C. 작문

8. 드골 반대주의 정책의 대략적인 내용을 몇 문장 내로 소개하시오


p.316


3) 중단된 7년 임기

A. 1968년 5월, 체제의 위기? 자료3, 4, 5

1968년 5월의 “사건들”은 사실 전체 위기의 물꼬를 튼 세 가지 위기의 연속이었다.

■ 먼저 대학생 위기로 시작되었다. 대학생의 일정 인원이 극좌파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자본주의 사회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좌익 급진주의자들”은 정원이 지속적인 증가 추세에 있던 학생 진영에서 활동하였다. 3월 낭테르 대학에서 충돌이 발생하였다. 5월 초에는 파리에서 학생들과 경찰들 간의 충돌이 발생하여 사회 운동을 촉발시켰다. 며칠 사이에 대학교들은 파업으로 마비되었다. 5월 10일에서 11일로 넘어가는 밤에 있었던 첫 번째 ‘바리케이드의 밤’은 라탱 지구 폭력 충돌 사태의 계기였다.

■ 경찰의 억압과 ‘드골 체제’에 반대하기 위하여 노동자 조합은 5월 13일 파업을 선포하였다. 이는 점점 크게 퍼져나가 며칠 내에 프랑스 기업의 대부분이 파업에 돌입하였고 많은 경우 기업의 노동자들에게 점령되었다. 위기는 사회적 수준의 위기가 되었다.

■ 이 같은 이중 위기를 맞닥뜨린 대통령과 총리는 사태 초기에 상황을 진압할 능력이 없는 듯 보였다. 위기는 따라서 정치적 수준의 위기가 되었다. 며칠 간 우세했던 반응은 권력이 허약하다는 반응이었다.

B. 드골주의 재건… 자료1, 6

■ 이틀 간의 협상을 거쳐 5월 27일 경영인과 노동조합 사이에 그르넬 협상이 체결된다. 이들은 임금 대폭 상승을 예상하였다. 그러나 노동자 하부 조직은 이 협상을 거부하고 파업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드골 장군은 이틀 만에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꾼다. 29일, 드골은 몇 시간 동안 ‘사라진다’. 얼마 후 드골이 바덴바덴에서 독일 주둔 프랑스군 총사령관 마쉬 장군을 만났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튿날, 드골은 국회 해산을 발표한다. 같은 날, 대규모의 행렬을 통해 당원들이 샹젤리제에 집결한다. 이는 당연히 놀라움을 유발한다. 여론은 초기에는 5월 혁명에 호의적이었으나 지속되는 위기에 불안을 느끼게 된다.

■ 여론의 권태는 권력에 도움을 준다. 프랑스는 국회의원 선거 운동에 들어간다 (6월 23일, 30일). 학생 운동은 정체되고 기업은 운영을 재개한다. 조르주 퐁피두 총리는 무질서의 공포를 이용하여 능수능란하게 선거 운동을 진행한다. ‘공화국 수호를 위한 연합’ (Union pour la défense de la République(UDR))으로 당명을 개명한 드골 정당은 487석 중 294석을 차지한다. 이는 우파의 승리로 귀결되고, 드골주의자들은 위기에서 확실히 벗어나 더욱 강력해진다.

C. …그리고 드골 장군의 사임 자료2, 7

■ 프랑스의 68년 5월 혁명이 1960년대 말 부유한 서방 산업 사회에 대한 거대 항의 운동에 동화된 것이었다 할 지라도, 또한 이 운동의 주요 참여 인원은 베이비붐 세대라 할 지라도, 프랑스는 이러한 항의가 첨예한 정치적 위기로까지 발전한 유일한 국가였다. 드골 스스로가 이에 타격을 받았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1968년 6월의 승리는 오히려 집행유예처럼 보였다.

■ 선거 승리의 취약함을 인지하고 발의권을 되찾는 행위를 걱정하며 1969년 2월,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상원 개혁과 지방분권화에 대한 국민투표를 제안한다. 그러나 대통령은 곧 다양한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반대표를 던지며 계획에 거세게 반대하는 좌파, 중도파뿐만 아니라 과반수가 넘는 반대파와 함께 지스카르 데스탱 또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다. 4월 25일, 드골은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다음과 같은 의사를 밝힌다. “여러분 중 과반수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저는 그 즉시 저의 직위에서 물러나겠습니다.” 4월 27일의 결과는 돌이킬 수 없었다. 52%의 프랑스인들이 반대표를 던졌다. 이튿날, 드골은 사임하였다.


어휘

gauchistes(좌익 급진주의자): 레닌에게 있어 좌익 급진주의는 모든 요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혁명을 추구하는 특징을 지닌, 공산주의의 일탈된 형태였다. 1968년 5월 이래로 ‘좌익 급진주의’는 무정부주의자, 모택동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등 급진 좌파를 뜻한다.


자료1. 스캔 1967년과 1968년의 국회

1967년

FGDS(민주사회좌파연맹) 121

centrists(중도) 41

gaullistes(드골정당) 200

républicains indépendants(독립공화당) 44

=>과반수

무소속 8

1968년

FGDS(민주사회좌파연맹) 57

centrists(중도) 33

UDR(드골정당) 293

républicains indépendants(독립공화당) 61

무소속 9

=>과반수

1. 두 선거결과의 급진적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2. 공화국 수호를 위한 연합(UDR)의 승리는 어째서 실제로 취약하였는가? 


자료2. 스캔. 사임 이후 아일랜드에서의 드골

“공화국 대통령 관저의 공식 성명이 0시 11분 발표되었다. ‘저는 공화국 대통령이라는 직위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본 결정은 오늘 정오부터 효력을 발휘합니다.’” 드골주의는 한 전투에서 패했다. 드골주의는 공화국과 프랑스를 위한 전투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계속한다.”

월요일 일간지 ‘라 나시옹’, 1969년 4월 28일


자료3. 1968년 5월 7일 ‘악시옹’지의 제1사설

우리의 전투는 이제 막 시작한 것에 불과하다. 젊은이들이 자본주의 위기와 베트남,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를 압제하는 제국주의 위기에 민감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늘, 학생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현존하는 경제 시스템을 최선으로 작동시키기 위해 급여를 지급받는 관리자들이 되는 것이다. 이들의 투쟁은 모든 노동자들에게 관련된다. 왜냐하면 이 투쟁은 바로 노동자들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부르주아 자식들을 선발하며 다른 이들은 배제시키는 교육 시스템 하의 교사가 되기를 거부한다. 정부 선거 운동 슬로건을 생산하는 사회학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고용주가 최고의 이익을 얻도록 하기 위해 ‘노동자 작업반’을 ‘작동시키는’ 일을 맡는 심리학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노동자에 반대하여 자신들 스스로도 그 밑에 종속되는 시스템을 적용하는 일을 맡는 기업 간부가 되기를 거부한다.

자료4. 프랑스 공산당과 좌파 급진주의자들


낭테르 대학에 몇 백 명 남짓의 학생 집단이 독일인 무정부주의자 콘-벤디트의 지도 하에 행해지는 ‘3월 22일 낭테르 운동’에 모였다. 학생 계층에서 이와 같은 동요를 불러 일으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며, [...] 이 소위 혁명가들은 이제 노동자 운동에 가르침을 주려는 오만을 범하고 있다……이 가짜 혁명가들은 드골파 권력과 거대 자본주의 독점가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고 있다.

이 ‘혁명가’들의 견해와 활동은 웃음을 자아낼 지경이다. 이들은 주로 노동자 계층 출신의 학생들을 무시하는 부르주아의 자식들이다. 이들은 곧 자신들의 ‘혁명의 불꽃’을 끄고 자신들의 아빠가 운영하는 기업을 운영하러 가서 가장 전통적인 자본주의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착취할 것이다.

G. 마르쉐(프랑스 공산당 단체 보좌관), 1968년 5월 3일 ‘위마니떼’ 기고

1. 텍스트를 소개하시오(저자, 역사적 맥락).
2. 프랑스 공산당에게 있어 ‘소위 혁명가’는 무엇인가?
3. 프랑스 공산당이 좌익 급진주의자를 규탄한다는 것을 설명하시오.


자료5. 스캔. 1968년 5월 30일 드골파 시위


자료6. 스캔. 1968년 5월 말 점유된 시트로앵 공장


자료7. 드골의 유언장

나는 국장을 원하지 않는다. 대통령, 장관들, 국회 구성원들, 사법기관의 참석도 원하지 않는다. 오직 군대만이 공식적으로 참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군대의 참석도 음악, 팡파레, 나팔 소리 없이 매우 검소한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어떠한 연설도 행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마찬가지다. 의회에서의 장례 기도도 행해져서는 안 된다. 장례식 중 나의 가족, 나의 해방상훈국 동지들, 콜롱베 시의회를 위한 부지를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부지도 마련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프랑스 또는 다른 나라의 남성과 여성들은 그들이 친절하게도 이를 원할 경우 나의 입관까지 참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과정이 침묵 속에서 행해지기를 원한다.

나는 사전에 프랑스 또는 외국으로부터의 모든 훈장, 진급, 품위, 표창, 장식을 거부함을 밝힌다. 이 중에 하나라도 나에게 부여된다면 그것은 나의 마지막 의도를 모독하는 행위일 것이다.

샤를 드골의 유언장, 1952년 1월 16일 작성, 1970년 11월 10일 엘리제궁 공보관실 공표

1. 이 유언장은 어떠한 맥락에서 작성되었는가?
2. 자신의 장례식에서 드골은 공식 권력기관, 군대, 프랑스 국민을 위해 각각 어떠한 위치를 부여하는가?


p.318


자료집


드골과 1968년 5월


•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산업화된 여러 국가의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준 다양한 형태의 대형 항의라는 맥락 내에서 다시 놓고 보아야 할 지라도, 이 사건들의 특수성에는 변함이 없다. 위기의 특징 중 하나는 표면상이라 할 지라도 체제의 동요 속에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국가의 수장은 초반에 위기의 성격과 중대함을 잘 인식하지 못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으며, 이러한 초기의 문제는 이와 같은 인상의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

• 그러나 드골주의자들은 이후 상황을 재구축하여 6월 말 선거를 승리로 이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드골 장군은 쇠약해진 채로 위기에서 탈피한다.


자료1. 1968년을 앞둔 드골 장군의 기원

1968년은 어떠할까요? 미래는 인간에게 달려있지 않고, 저는 예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의 흐름을 통해 보자면 저는 향후 12개월 간 우리 나라의 존재에 대한 확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이익, 모든 경향, 모든 소원이 내년에 가득 이뤄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고난, 결함, 실망을 겪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여러 가지 불만, 후회, 비판 또한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 결론적으로 우주를 뒤엎을 만한 위협이 없는 한, 우리의 상황은 계속 진보할 것이고 모두가 그 안에서 각자의 자리를 찾을 것이라 믿습니다.

드골 장군의 텔레비전 담화, 1967년 12월 31일


자료2. 스캔. 1968년 5월 초 학생 시위 진압


자료3. 스캔. 루마니아 공식 방문 중인 드골 (1968년 5월 15일~19일)

자료4. 스캔. 3인의 학생 시위 리더: 대학 교사 조합 비서관 알랭 자이스마르, ‘3월 22일 시위단’ 일원 다니엘 콘-벤디트, 프랑스 대학생 연합(UNEF) 부회장 자크 소바조


p.319


자료5. 스캔. 5월 29일 독일 연방 공화국 바덴바덴으로 떠나는 드골

드골은 바덴바덴에서 독일 주둔 프랑스군 총사령관 마쉬 장군을 만난다.


자료6. 1968년 5월 30일 드골의 성명


현재의 상황에서 저는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저는 국민에게 받은 직무가 있습니다. 저는 이를 완수할 것입니다. 저는 총리를 교체하지 않을 것입니다 [...]. 저는 오늘 국회를 해산합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을 방해하고, 교사들이 강의하는 것을 방해하고, 노동자들이 일하는 것을 방해하는 방법과 같은 방식으로 모든 프랑스 국민들이 속박되어 의사 표현과 생존에 방해를 받지 않는 이상, 국회의원 총선거는 헌법에 게시된 기간 내에 실시될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장기간에 걸친 특정 집단과 전체주의 정당이 행하는 위협이며, 세뇌이자, 폭정입니다. 이러한 행위에 관련된 다른 적수가 존재한다 해도 말입니다.

프랑스는 독재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국가적 절망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 즉 독재 공산주의 정복자의 권력이 분명한 이 권력에 프랑스가 굴복하기를 바라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버려진 정치인들의 야심과 증오를 이용하여 외양을 속임수로 물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들은 이들의 체중에 버금가는 무거운 영향력을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공화국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국민은 침착함을 되찾을 것입니다.


자료7. 1968년 6월 7일 드골의 텔레비전 인터뷰

드골 장군: 5월 29일에 저는 물러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제가 떠난다면 위협적인 전복 사태가 펼쳐지고 공화국이 탈취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습니다. [...]

5월 30일 국민 여러분께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바를 말씀 드리고 콩코드 광장과 샹젤리제에 집결한 거대 인파를 통해 전달된 국민 여러분의 답변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어서 많은 도시에서 행해진 행렬을 통해 저의 호소가 구원의 신호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프랑스인들의 의지에 이하여 강화된 저의 결심을 느꼈습니다. [...]

미셸 드로아: 장군님, 여론에 강한 충격을 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위기를 예상하지 못 하셨다는 점인데요……

드골 장군: 지난 10년 간 이루어진 눈부신 진보로 인해, 또는 세계에 비할 데 없는 안정적인 평화 재구축 상태에도 불구하고,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이 폭발은 몇몇 집단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이 집단들은 동구 공산주의 사회,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 관계없이 현대 사회, 소비 사회, 기계 사회에 반기를 드는 집단입니다. 한편 이들은 무엇으로 이 사회들을 대체해야 할 지 전혀 알지도 못 하면서 부정, 파괴, 폭력, 무정부상태를 즐기며 저항의 깃발을 드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행위가 전파되어 같은 사태가 몇몇 공장과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발생하였습니다. 그러나 파리의 독재 공산주의 집단은 이러한 혁명 분파가 자신들의 외부에서, 그리고 자신들에 대항하여 궐기하는 모습을 보고 파업을 보편화하여 돌연 모든 것을 흐리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감시인과 장기간 준비해 온 조직을 이용하며 말입니다. 이로 인하여 국가에 치명적인 마비 상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자료8. 1968년 5월 연표

■ 5월 3일: 학생들에 의한 점유를 피하기 위해 소르본 대학 폐쇄, 파리 내 학생/경찰 1차 충돌

■ 5월 6일~10일: 대규모 학생 시위

■ 5월 13일 월요일: 프랑스 내 ‘학생 시위’ 및 노동조합을 소환하는 다수의 시위 발생

■ 5월 14일-15일: 1차 공장 점유 발생

■ 5월 17일-20일: 프랑스 대상 파업의 승리-파업인 7백만명 돌파

■ 5월 25일-27일: 그르넬 가 노동부에서의 협상

■ 5월 27일: ‘그르넬 협상’ 결렬

■ 5월 28일: 미테랑의 드골 사임 시 공화국 대통령 선거 출마 의사 발표

■ 5월 29일: 드골 비밀리 독일행, 노동연맹과 프랑스 공산당의 ‘인민 정부’ 주장 시위

■ 5월 30일: 드골에 의한 국해 해산, 샹젤리제에서 드골주의 시위 발생

■ 6월 4일-7일: 공장과 사무실 운영 재개 시작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드골은 왜 ‘향후 12개월 간 우리 나라의 존재에 대한 확답’을 예측할 수 있었는가? (자료1)

2. 이 사진에서 나타나는 68년 5월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3. 드골의 태도를 묘사 및 설명하시오 (자료3, 자료5).

4. 이 성명의 구체적인 맥락을 설명하시오 (자료6).

5. 5월 29일에 대한 자신의 결정을 드골은 어떻게 입증하고 있는가? (자료5, 자료7) B. 자료 연관 짓기 6. 자료2, 자료4, 자료6, 자료7에서 68년 5월 위기의 어떠한 양상들이 나타나는가?

C. 작문

7. 1968년 1월에서 6월에 이르기까지 드골 장군의 태도 변화를 몇 문장 내로 설명하시오.


p.320


4) 1969-1974 퐁피두 시대

A. 드골 부재 하의 제5공화국 자료1, 3

■ 드골의 사임으로 제5공화국 역사의 한 단계가 끝을 맺는다. 알제리 전쟁을 통해 탄생하고 1962년 가을 정치 위기 시 개편된 이 체제는 1968년 5월의 첨예한 위기를 극복한다. 최초 설립자가 떠난 후에도 이 체제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 다시 한 번, 제5공화국은 적응력을 보인다. 1969년, 한 드골주의자가 드골 장군의 뒤를 잇는다. 5년 후 특별한 동요 없이 대통령직이 수행된다. 이후 7년 간 드골주의자들은 자유우파진영에 위치한다. 이 12년 간 제5공화국은 더욱 그 뿌리를 견고히 내렸다.

■ 드골 장군의 사임 이후 헌법에 의거하여 알랭 포에르 상원의장이 1969년 6월로 확정된 대통령 선거일까지 대리직을 수행하였다. 1965년 대통령 선거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사회당과 공산당의 단일후보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당은 가스통 드페르를, 공산당은 자크 뒤클로를 후보로 내세웠다. 우파 진영에서는 조르주 퐁피두가 드골정당과 독립공화당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중도 반대파의 알랭 포에르 또한 후보로 나섰다.

■ 1차 투표에서 좌파 후보들은 탈락하였다. 드페르의 득표율은 5%에 그쳤으며 뒤클로는 21.5%의 득표율을 얻어 3위에 올랐다. 2차 투표에서 퐁피두는 포에르와 대적하게 된다. 드페르가 포에르를 지지하기 위해 후보 사퇴를 하자, 공산당은 기권을 권장하였다. 이들이 보기에는 어느 후보를 선택하든 다를 바 없는 선택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르주 퐁피두는 1969년 6월 15일 2차 투표에서 57.8%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무리 없이 당선되었다. 이렇게 해서 정치적 드골주의는 드골 장군의 사임 이후에도 살아남게 되었다.

B. ‘새로운 사회’에서 퐁피두의 서거까지 자료2, 4, 5, 6

■ 영광의 30년은 계속되었다. 새로운 대통령은 자신이 총리를 지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경제가 급성장하는 상황에서 프랑스를 경제 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야심 찬 산업 정책을 지속하기를 원했다.

■ 동시에 프랑스는 이미 시작되었던 사회문화적 변동에 가속을 붙게 한 1968년 5월의 결과에 직면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조르주 퐁피두는 매우 복잡한 태도를 보인다. 우선 그는 자크 샤방-델마 총리의 ‘새로운 사회’ 프로젝트를 지지한다. 이 프로젝트는 무엇보다도 성장의 결실을 가장 바람직하게 분배하고, 급속한 변동 속에 여러 갈등이 발생하는 프랑스 사회를 근대화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

■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추후에는 대통령도 이 다양한 형태에 갈등에 겁을 먹고 이로 인해 비롯되는 정치적 결과를 두려워하게 된다. 1972년 초여름, 조르주 퐁피두는 총리에게 사임을 강요하고 더욱 보수적인 정치관을 지닌 피에르 메스메를 총리로 임명한다. 정치적 양극화는 심화되어 같은 해인 1972년에는 좌파연합과의 결속을 다지는 정부 공동 강령이 체결되어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좌익 급진주의자들이 모두 하나로 뭉치게 된다. 그러나 1973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우파가 승리한다.

■ 두 가지 사건이 점진적으로 프랑스의 흐름을 바꾸게 된다.

- 1973년 가을, 1차 오일 쇼크가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경제 악화 과정을 유발한다. 영광의 30년은 막을 내리게 되어 상황은 확장에서 침체기로 변화한다.

- 한편, 공화국 대통령의 건강이 악화된다. 조르주 퐁피두는 임기 중인 1974년 4월 2일에 서거한다.


어휘


bipolarisation(양극화): 정계가 2개의 대규모 정당에 의해 분리되어 있거나 2개의 정치 동맹으로 구성되어 있는 국가의 상황(주로 좌파와 우파).


자료1. 1969년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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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차투표 시 사회당 후보의 상황을 설명하시오.
2. 1차 투표에서 좌파의 결과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3. 조르주 퐁피두의 대규모 승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자료2. 스캔. 1973년 국회의원 총선거


1. 과반수 의원의 정치적 상황을 설명하시오.
2. 위의 상황을 1968년, 1967년의 상황들과 비교하시오.
3. 중도파가 지닌 입장의 특징을 설명하시오.


자료3. 스캔. 1969년 캉탈 지방에서 선거 운동 중인 조르주 퐁피두


자료4. “새로운 사회”

급진적으로 야기된 우리의 변동이 지니는 불안은 주로 우리가 차단된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이 차단된 사회에서 저는 세 가지 주요 원인을 꼽습니다. 바로 우리 경제의 쇠약함, 불완전한 정부의 기능, 보수적이고 구식인 우리 사회구조입니다.

심각한 소득 격차와 불충분한 계층 이동은 사회 계층 간에 시대착오적인 장벽을 세웁니다. [...] 사회구조의 보수성은 이데올로기의 극단화를 유발한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실제 상황보다는 단어들을 놓고 싸웁니다. 단어들은 비극적인 실패들을 덮어 버리는 것들인데도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혁명을 하는 시늉만 하며 진정한 개혁을 이루지 못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사회는 아직까지 거대 위기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 발전하는 단계에 다다르지 못 했습니다. 우리의 구식 사회를 구조할 젊음, 창조, 발명이라는 새로운 효모는 더욱 풍요로운 민주주의와 참여라는 새로운 형태라는 반죽을 부풀게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회 기관과 더욱 유연해지고 지방 분권화 된 정부 내부에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새로운 사회 건설에 착수할 수 있습니다.

1969년 9월 16일, 자크 샤방-델마의 국회 연설

1. 자크 샤방-델마에 의하면 프랑스 사회는 왜 차단된 상태인가?
2. “혁명을 하는 시늉만 하며 진정한 개혁을 이루지 못 하는 것”을 설명하시오.
3. “새로운” 사회라는 표현은 1960년대 미국 대통령들의 주요 연설 중 어떠한 연설을 참고한 것인 것?


자료5. 스캔. 1972녀 좌파연합의 최초 미팅

로베르 파브르(좌익 급진주의), 조르주 마르쉐(프랑스 공산당), 프랑수아 미테랑(사회당)


자료6. 1972년 7월 12일 정부 공동 강령

좌파 연합에 의한 개방적인 전망, 국민이 지닌 모든 힘의 집결, 본 강령에 게재된 제안들은 프랑스인들이 더 나은 삶을 살고 삶을 변화시키도록 해 줄 요소들이다. [...] 경제적 민주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는 분리될 수 없다. 두 민주주의의 공동 발전은 각각의 노동자와 시민이 모든 수준에서 결정 구상의 이해관계자가 될 가능성과 방법을 지니고, 방법의 선택권을 지니고, 그 방법의 실행과 결과를 감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더욱 확대되고 적극적인 노동자들의 국가 및 기업 운영 개입은 이 시대의 주된 필요성이다. [...]

선거법은 국회의원 선거를 위한 비례대표제를 제정할 것이다. [...]

현 체제에서 공화국 대통령은 대내 및 대외 정책 운영에 있어 감시 없이 행할 수 있는 과도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 공화국 대통령이 모든 권력을 찬탈하는 것을 허가하는 제16조는 폐지될 것이다. [...] 대통령 임기는 5년으로 제정될 것이다.

1. 본 “정부 공동 강령”의 목표는 무엇인가?
2. 좌파에 의해 어떠한 “정부 공동 강령”의 정치적 요소들이 실행되었는가? 


p.322

5) 위기의 시점에 따른 ‘변화’

A.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의 당선 자료1, 4

■ 대통령 선거 1차 투표에서 지스카르 데스탱은 드골파의 후보 샤방-델마를 가뿐히 앞지른다.

2차 투표는 치열하게 벌어진다. 좌파 연합의 힘이 강력히 떠오르고 단일후보 미테랑으로 인해 다이나믹한 상황이 연출되어 미테랑에게 강점으로 작용한다. 2차 투표일인 5월 19일, 지스카르 데스탱은 근소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된다(득표율 50.81%).

■ 최초 공식 연설에서 새로운 대통령은 단숨에 ‘변화’라는 행동의 신호를 알린다. 이어서 6월부터 개혁이 시작된다. 7월부터 성년은 18세로 지정되며 상호 협의에 의한 이혼이 가결된다. 1975년 1월, 좌파 의원들의 지지로 임신중절을 합법화하는 베이 법이 표결된다.

■ 초기의 개혁 도약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해도, 빠른 속도로 어려움이 나타나게 된다. 1974년부터 경제 위기로 발생한 경제 성장 정체, 실업률 상승 등의 영향이 드러난다. 두 가지 정책이 자크 시라크 총리에 의해 실행된다. 첫 번째 정책은 1974년, 대출 제한을 통한 “경제 진정” 정책이다. 두 번째 정책은 1975년 실행된 소비 재활성화 정책으로, 대출을 완화하고 급여 생활자들의 구매력 유지를 보장하는 등의 방식으로 실행되었다.

B. 정계의 양극화 자료2, 6, 7

■ 1976년은 7년 임기의 이중 전환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자크 시라크는 자의로 8월 사임한다. 제5공화국 하의 야담은 이를 강력한 2개의 주요 우파 간의 증대되는 경쟁으로 해석한다. 이는 1976년 12월부터 공화국연합(RPR)을 중심으로 재결합한 드골주의자들과 신프랑스민주연합(UDF)을 중심으로 모인 지스카르파 자유주의당원 간의 경쟁을 뜻한다. 또한 시의회 및 면의회 선거에서 좌파연합의 약진은 정계의 양극화를 고조시킨다.

■ 그러나 1977년 여름부터 나타난 공산당과 사회당 간의 불협화음으로 인해 공화국연합과 신프랑스민주연합의 대다수가 1978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자신들의 약진에 걸린 제동에 좌파는 타격을 입는다. 또한 사회당 내 프랑수아 미테랑과 미쉘 로카르 간의 대립으로도 타격을 입는다. 경제 문제도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1979년 발발한 2차 오일 쇼크는 새로이 임명된 레몽 바르 총리의 경제 재활성화 노력을 무너뜨린다. 인플레이션률은 다시 높게 치솟아 1980년 13%가 넘는 수치를 기록한다. 실업률도 상승하여 임기 말에는 실업자의 수가 1,650,000명에 이른다. 1981년 대통령 선거는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긴장되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놓인다.

C. 어려운 시기 자료3, 5

■ 한편, 대통령의 행동은 다양한 장애물로 인해 제약을 받는다:

- 중도 계획 추진자인 대통령의 7년 임기는 양극화 선거로 점철된다.

- 영광의 30년 시대에 드골과 퐁피두 정권 하에서 재정부 장관직을 맡았던 그는 경제 위기가 발발한 시기에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 프랑스 사회 개혁의 지지자이지만 하락세인 경제 상황과 정당의 분열로 인해 개혁을 실행하지 못 한다.

■ 지스카르 데스탱은 개인적으로도 충격이 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다이아몬드 사건’(중앙아프리카 독재자 장 베델 보카사가 대통령에게 다이아몬드를 선물한 사건) 등의 사건은 대통령의 직위를 훼손하는 사건으로 여겨지게 된다. 대통령은 파리의 환경미화원들을 엘리제 궁에 초청하고 프랑스 서민 가정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는 등 국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인 중 일부에게 대통령은 거리감이 있고 거만한 인간으로 비춰진다.


자료1. 스캔.1974년 대통령 선거

Miterand.png


자료2. 스캔. 1978년 국회의원 선거

PS et radicaux de gauche(사회당과 좌익 급진주의자) 113 UDF(신프랑스민주연합) 124 RPR(gaullistes)(공화국연합(드골주의자)) 154 non-inscrits(무소속) 14


자료3. 연극 정치의 시작

과거의 정치는 사상이었다. 오늘날의 정치는 인간, 더 나아가 인물이다. 각각의 대표들이 직무를 하나 선택하고 연기를 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연극에서처럼 말이다.

이제 정부는 스스로 연극단체로 변화하고 있다. 연극 ‘제작자’로 말이다. 이제 정치는 미쟝센으로 변하고 있다. 이제 각각의 대표들은 자신의 모습을 선보이며 부각시키고 있다. 권력의 인격화가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원에 충실한 모습이다. 인간(personne)이라는 단어는 연극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 persona로부터 유래되지 않았던가?

로제-제라르 스와젠베르, <연극 정부>, 플라마리옹 출판사, 1977

1. 작가의 주장에 따른 ‘사상’에서 ‘인간’으로의 변동, ‘인간’에서 ‘인물’로의 변동을 설명하시오.
2. 저서의 제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p.323


자료4. “연속성과 새로움”

저는 프랑스인들이 [...] 두 가지를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연속성과 새로움입니다. 프랑스인들은 제5공화국이 그들에게 가져다 준 것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말 해 프랑스의 존엄성, 제도의 안정성, 사회경제적 진보를 유지하기 위해 연속성을 원합니다. 사회경제적 진보를 위해 5년 간 퐁피두 대통령과 일했기 때문에, 프랑스인들은 연속성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저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움, 즉 민주주의, 자유, 정의의 본보기인 더욱 개방되고 더욱 유연한 나라, 침체를 잊고 젊음을 되찾은 나라, 스스로에게 확신이 있는 나라,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 나설 준비가 된 나라 또한 원합니다. 새로운 정부는 프랑스인들의 이러한 소망에 응답해야 합니다. [...]

저는 제 주위에 공포감을 주는 연합을 조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공동 강령의 후보와 자연히 싸워야 합니다. 대다수의 프랑스인들이 이 강령을 원하지 않기에 우리는 싸울 것입니다. 저는 열정과 진보의 운동을 나타내며 이끌고 싶습니다. 대통령 선거는 바로 이 일의 시작일 것입니다.

1974년 4월 13일 발레리 지르카르 데스탱

1. 이 텍스트가 작성된 시점의 프랑스 정치 상황을 설명하시오.
2. 저자가 구상하는 정치의 주요 기본방침을 설명하시오.
3. “공동 강령의 후보”는 누구인가? 


자료5. 스캔. 1975년 신정 이브리(발 드 마른 지역)에서의 지스카르 데스탱


자료6. 스캔. 1976년~1981년 총리직을 지낸 레몽 바르

자료7. 1978년 국회의원 총선거 캠페인 초반 지스카르 데스탱의 연설

저는 여러분께 프랑스를 위해 올바른 선택을 해 주실 것을 부탁 드리기 위해 이 곳에 왔습니다. 바로 국회의원 총선거에 대한 선택입니다 [...]. 올바른 선택은 올바른 방향을 통해 규정됩니다. 진실을 대면해서 보아야 합니다. 네 가지의 진실이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우리의 경제 재활성화를 이룩해야 합니다. 프랑스는 관리되어야 합니다. 통합과 정의를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 다른 선택에는 공동 강령 적용이 있습니다. [...] 프랑스 내 공동 권고 강령 적용은 프랑스를 경제적 무질서로 이끌 것입니다. 가진 자와 부자들의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살고 있는 여러분의 프랑스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취업을 걱정하는 젊은이들의 프랑스, 고령인구, 저소득 전임교수, 가족들의 프랑스, 물가 상승으로 인해 그 누구보다도 고통을 겪는 모든 이들의 프랑스 말입니다.

불가피하게 재정 적자 악화와 화폐 가치하락이 일어날 것입니다. 농업인 소득과 유가로 인한 결과입니다. 경제 안정과 고용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결과로 인해 대외 적자가 증가할 것입니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프랑스는 바로 실업 상태의 프랑스일 것입니다. [...]

여러분께서는 공동 강령을 선택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권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께서 공동 강령을 선택하신다면, 공동 강령이 적용될 것입니다. 헌법에 공화국 대통령이 이에 반대할 수 있는 방법이 명시되어 있다고 믿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여러분께서 이러한 사항을 미리 경계하실 수 있도록 알려 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 직무를 다 하지 않는 행위일 것입니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베르됭-쉬르-르-두, 1978년 1월 27일

1. “올바른 선택을 해 주실 것”이라는 화자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2. 화자는 어떠한 주장을 사용하고 있는가?
3. 국회의원 총선거의 중점은 무엇인가? 

p.324


복습 자료

필수 암기 연도

■ 1962: 보통선거를 통한 공화국 대통령 선출에 대한 국민투표

■ 1965: 드골 재선

■ 1968년 5월: 대학교, 사회적, 정치적 위기

■ 1969: 드골 사임

■ 1969: 퐁피두 당선

■ 1974: 지스카르 데스탱 당선


인물정보

조르주 퐁피두 (1911-1974)

1969년~1974년(서거) 공화국 대통령 재임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1926년 출생)

1974년~1981년 공화국 대통령 재임

프랑수아 미테랑(1916~1996)

1981년~1995년 공화국 대통령 재임


필수

1. 1962년 헌법 개정

■ 제5공화국은 1962년 진정한 제도 형태를 갖춘다. 보통선거를 통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 국민투표를 통한 헌법 개정: 대부분의 정치 정당은 개정에 반대한다.

2. 대통령 드골 (1962~1969)

■ 국가 독립적 대외정책: 프랑스의 ‘입지’

- 프랑스의 근대화 및 경제발전의 시대

- 다시 대두되는 반대진영: 1965년 결선투표를 거치게 되는 드골

- 드골주의 권력은 1968년 5월 대학교, 사회적, 정치적 위기로 인해 타격을 입는다.

- 드골은 위기에서 명백한 승리를 거두며 빠져 나가나, 1969년 4월 국민투표의 결과가 ‘반대’로 나타나 드골이 사임하기 에 이른다.

3. 대통령 퐁피두와 지스카르 (1969~1981) ■ 드골의 계승자 퐁피두는 1968년 5월의 충격의 파동을 잠재우기 위한 ‘새로운 사회’ 계획을 주친하는 자크 샤방-델마를 총리로 임명한다.

■ 그러나 1972년, 퐁피두는 총리를 교체하고 개혁의 정도를 낮춘다. 1차 ‘오일 쇼크’가 발발한다(1973).

■ 퐁피두가 병환으로 인해 1974년 4월 2일 서거한다.

■ 1974년 당선된 새로운 대통령이 주장한 ‘변화’는 경제위기로 인해 구속당한다.

■ 주요 개혁

- 성년 연령 18세

- 임신 중절 합법화

그러나

- 다수 정당 분열(1976년 8월 자크 시라크 총리 사임)

- 좌파의 선거 약진 및 양극화

- 1979년 2차 ‘오일 쇼크’


혼동하지 않기

드골 장군 시기 국민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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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25


사료해설(13/15)


주제: 풍자화 된 드골 자료 스캔

“박물관의...군주!“

1966년 프랑스 잡지 ‘르 카나르 앙쉐네’에 기고된 화가 모아장의 풍자화


문제


1. 자료를 설명하시오: 저자, 잡지, 인물 및 풍자화 제목과의 관계

2. 등장인물을 묘사하시오: 제목과 날짜와 연관하여 태도, 의상, 작품의 풍자화 제목과의 관계

3. 작품 내 다른 요소들에 대해 설명하시오: 작품 완성 이전의 시기에 드골이 실행한 정책과의 연관성을 찾으시오.

4. 명시된 시기에 대해 이 풍자화는 어떠한 전반적인 이미지를 전달하고자 하는가?

5. 어떠한 요소들을 통해 이것이 풍자화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가?


문제해법

A. 풍자화 분석하기(2)

풍자화는 순수한 그림이 아니다. 풍자화는 웃음을 유발함과 동시에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림이다. 때때로 독자에게 충격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풍자화 화가는 늘 시인하지는 않지만 정치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화가의 그림, 텍스트, 발언, 창조된 인물들은 절대 중립적이지 않다.

B. 문제 힌트

문제2: 어떠한 경우에 군주가 이 의상을 착용하는가? 작품에 명시된 기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문제3: 둥근 지붕의 건물은 파리의 어떠한 건물을 상기시키는가? 장군 발 밑의 총리들은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목표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시오.


모의고사 주제: 1968년 6월 스캔


자료 “드골주의자들이 원기를 회복했다.“ 1968년 6월 화가 시네의 풍자화


문제

1. 상세한 연대기적 맥락 내에 작품을 놓고 생각해 보시오.

2. 그림에 묘사된 사회 계층과 인물들을 판별해 보시오.

3. 제목이 내포하는 언어유희에 대해 설명하시오.

4. 이 풍자화가 가리키는 “드골주의자들“은 누구인가? 어떤 사회 계층이 나타나 있지 않는가?

5. 이 작품이 풍자화라는 것을 설명하시오.


p.326


에세이(7/9)


주제: 1944년에서 1969년 프랑스 대내 정책에서 드골은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연표


■ 1944년 6월: 드골, 임시 정부의 수장

■ 1946년 1월: 드골 사임

■ 1946년 6월: 바이외 연설

■ 1946년 10월: 제4공화국 헌법 가결

■ 1947년 4월: 드골, 프랑스국민연합(RPF) 창당 발표

■ 1953년: RPF 활동 정지, ‘재야’의 시작

■ 1958년 5월: 프랑스 내 정치 위기, 드골은 “공화국 권력을 보장할 준비가 되었다”고 밝힘

■ 1958년 6월: 국회에 의한 드골 임명

■ 1958년 9월: 제5공화국 헌법 가결

■ 1958년 12월: 드골, 공화국 대통령

■ 1961년 1월: 알제리 ‘민족자결주의’ 관련 국민투표

■ 1961년 4월: 알제 군사 쿠데타 실패

■ 1962년 4월: 에비앙 협정

■ 1962년 8월 22일: 쁘띠-클라마르 테러

■ 1962년 10월: 의회에 의한 퐁피두 정권 전복: 보통선거를 통한 대통령 선출 관련 국민투표

■ 1965년 12월: 대통령 선거: 2차 투표에서 드골 재선

■ 1968년 5월: 프랑스 내 사회경제적 위기

■ 1968년 6월: 드골파의 국회의원 총선거 승리

■ 1969년 4월: 국민투표 패배: 드골 사임

■ 1970년 11월 9일: 콜롱베-레-되-제글리즈에서 드골 서거


참고자료

1962년 포스터 “네, 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할 이는 바로 여러분입니다”


문제해법


A. 주제 분석

1. 주제:

두 개의 중심표현 혹은 중심문장:

- 정계 관련 주제(예를 들어 경제정책은 다루지 말 것).

1944년~1969년(드골)의 프랑스 역사를 이야기 하지 말 것.

2. 연결어

연결어 “~내의”는 필수적이다.

주제의 어려움은 드골과 프랑스 정계 간의 ‘관계’로부터 기인한다.

1944년에서 1969년 프랑스 대내 정책에서 드골은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3. 지정학적 구역:

질문에 대한 답은 형용사 ‘프랑스의’와 특히 ‘대내’로 구성된다. 드골의 대외정책은 주제 이탈이다.

4. 역사적 시기:

두 연도의 시기에 드골 장군이 취한 역할과 행동은 무엇인가?

두 연도 사이에 어떠한 시기가 끼워져 있는가?

주제 이탈 주의

간략한 인물 소개를 해야 할 지라도, 1944년 이전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레지스탕스 시절 드골의 행동을 자세히 묘사하면 안 된다.

본 주제와 같이 인물 중심 주제에서 주의할 점은 전 시기에 걸친 인물의 이야기를 하지 말고 인물의 행위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p.327

B. 에세이 주제 구상하기

• 프랑스 역사에서 드골 장군은 중요한 역할을 수 차례 수행하였다. 그 시기들은 언제였는가?

• 드골은 왜 권력의 자리에 돌아왔는가? 국가 및 제도 재건에서 드러난 그의 행동의 특징은 무엇이었는가?

- 연표에 소개된 중요한 사건들을 활용할 것: 1944년 드골의 레지스탕스에 가담, 1946년 레지스탕스 탈퇴, 1958년 권력 복귀, 1962년 위기 등

- 드골은 두 번 사임하였다. 드골은 비밀군사조직의 17회 공격의 타겟이었고, 1965년 결선 투표를 거치기도 했다. 드골

이 왜 사임하였는지, 좌절의 순간은 언제였는지, 1958년 왜 권력에 복귀하였는지, 1958년에 왜 권력을 포기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볼 것.

C. 개요 구상하기

• 이러한 주제의 경우, 연대순 골격이 필수적이다. 한 인간의 행위나 영향을 분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분석을 위해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 연대순 전개에서는 몇 가지 상황에서 주요 포인트를 심화 분석해야 한다(인물의 사상, 행위의 특성, 역사 속 행위의 중요한 순간).

• 전환점의 순간을 잘 선택할 것: 전쟁과 전후 당장의 시기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1946년 1월은 최초 전환점이다. 본론의 첫 부분에서는 1944년 6월과 1946년 1월 사이의 시기를 다룰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드골 장군이 지속적으로 반대 진영에 위치했던 제4공화국 시기는 본론의 두 번째 부분을 구성할 수 있다. 1958년 말(1958년 5월 13일이 아님)은 두 번째 전환점이다. 프랑스 정계는 제5공화국 헌법 개정으로 인해 극도로 수정되었다. 따라서 본론의 두 번째 부분은 1946년~1958년 말로 구성된다.

마지막 전환점은 1968us 5월~6월의 영향으로 인한 1969년 사임이다. 1959년~1969년이 본론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되지만 보통선거를 통한 대통령 선출이라는 주요 정치 수정이 강조되어야 한다.

D. 논술 개요 제안

서론

수차례 반복하여 행한 결정적인 역할, 승리를 위한 전투에 참전하고, 1962년 알제리에 평화를 재건하였으며, 새로운 제도를 설립한 인물의 중요성을 강조할 것. 드골은 20세기 후반기 프랑스 정계에서 유례없는 역할을 수행했다. 주제 소개

이 인물의 여정에 이렇게 큰 기복이 존재한 이유는 무엇인가? 정계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다 주었는가?

본론 소개

I. 드골, 임시정부의 수장


1. 전쟁 말기 레지스탕스 수장(1944년 여름~1945년 가을)

- 간략한 재언급: 1940년 6월 18일 소환


- 정부 권력기관 재건설

- 사회경제 대개혁

2. 논쟁과 사임(1945년 가을~1946년 1월 20일)

- 기존 정치정당의 반대

- 사임(1946년 1월 20일)

II. 드골, 제4공화국 반대자이자 제5공화국 설립자

1. 신체제에 맞선 투쟁

- 드골의 정치관: 1946년 6월 바이외 연설

- 드골, 프랑스국민연합(RPF)의 수장(1947~1951)

2. ‘재야’ 기간

- 실망의 시기(1951~1953)

- 콜롱베-레-되-제글리즈로의 환향: 쉬어가는 시기인가 또는 최종 은퇴인가?

3. 권력 복귀: 1958년

- 1958년 5월 13일

- 1958년 6월: 드골, 수상 임명

- 제5공화국 헌법과 1958년: 드골, 공화국 대통령 재임

III. 드골 공화국(1958~1969)

1. 알제리 문제 해결

- 군사적 해결책 모색

- 알제리 국민 민족자결주의

- 반대(1961)와 평화(1962)

2. 보통선거를 통한 공화국 대통령 선거

- 1962년 국민투표와 프랑스 정계 재구성의 귀결: 과반수, 반대진영

- 1965년 결선 투표로 인한 충격

3. 중단된 7년 임기

- 1968년 5월의 동요. 1968년 6월의 승리: 약진인가 또는 집행유예인가?

- 1969년 4월 국민투표: 실패 및 사임

결론 작성 예시: 1940년 6월 18일의 인물이자 해방의 인물인 드골은 기존 정치 세력과의 갈등에 마주했을 때 사임하는 편을 택한다. 1958년, 드골은 신헌법(드골을 용서하지 않는 제4공화국과 제4공화국 지지자에 대항)과 알제리 전쟁 해결의 인물이 된다. 11년의 권력 기간 후 새로운 위기로 인해 사임하게 된다.

새로운 관점: 제도의 안정성: 보통선거를 통한 공화국 대통령 선출이라는 혁신-프랑스 정계의 대부분이 이 선거를 통해 구성된다.


p.328


전체자료 연구(14/17)


주제: 1956년~1981년의 유럽과 프랑스: 유럽 건설에서 프랑스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문제

1부

1. 풍자화를 설명하시오(자료1): 유럽에 상륙하려는 이는 누구인가? 이에 반대하는 이는 누구인가? 이 풍자화는 어떤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하는가?

2. 이 포스터에 나타난 6개의 국가는 어디인가? 화가는 이를 통해 무엇을 나타내고 싶어 하는가? (자료2)

3. 유럽 상황에 대해 드골 장군은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가? 드골은 프랑스에 어떤 위치를 부여하는가? (자료3)

4. 엘리제 조약의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유럽 건설에 있어 이 조약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자료4)

5. 1976년, 유럽의 건설은 어느 단계에 있는가? 장 모네는 누구이며 유럽 건설에 있어 그가 맡은 역할은 무엇인가? (자료5)

2부

1차 질문에 대한 답변과 개인의 지식을 활용하여 다음 질문에 대한 답변을 작성하시오: 1956년~1981년 유럽 건설에서 프랑스가 맡은 역할은 무엇인가?


자료1. 스캔 영국의 유럽 입성을 거부하는 드골

"1944년에도 상륙은 쉽지 않았다." 1967년 F. 베렌트의 풍자화


자료2. 스캔. 공동시장 창설에 찬성하는 프랑스 포스터, 1957년 비우 작 (그림: ‘6’인은 공동 시장 창설을 시작한다...)


p.329


자료3. 대서양에서 우랄산맥까지 이르는 유럽

독일에 대한 우리의 생각 말씀입니까? 동독과 서독의 균형은 절대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임을 감안하고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독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현재 독일에서 완성된 일들을 수정하는 것은 시의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현재 상황에서 그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제가 이미 말씀 드렸던 대로 이 주제와 관련된 모든 협상은 서양의 후퇴를 일으키고 위험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독일과 프랑스 간의 유대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양국 국민의 즉각적인 안정이 이 유대에 달려 있습니다. 이를 믿기 위해서는 현재 쥐고 있는 카드를 살펴보기만 하면 됩니다. 경제 분야, 국방 분야, 정치 분야에서 유럽의 연합을 이루겠다는 소망이 이 유대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대성양에서 우랄산맥까지 이르는 유럽의 운명이 이 유대에 달려 있습니다. 단단하고 순탄하고 매력적인 서구 유럽을 건설하고 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구 국가와 유럽 차원의 평형을 재구성할 수 있고, 전체주의 체제가 이 모든 원천을 망가뜨리는 일을 멈춘다면 완전히 유럽적인 협력이 다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62년 5월 15일 드골 장군 기자회견

자료4. 스캔. 1963년 1월 22일 엘리제 협정 체결 시 드골 장군과 독일 콘라드 아데나워 수상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인 드골 장군과 독일 연방 공화국의 콘라드 아데나워 수상(1)은, 매우 오래된 대립관계에 끝을 맺는 독일 국민과 프랑스 국민의 화해가 양국 국민의 관계를 전적으로 변화시키는 역사적 사건을 구성할 것이라 확신하며, 양국 간의 협력 증강이 양국 국민의 목표인 통일유럽으로 가는 길에 있어서 필수적인 단계임을 인식하고 안보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적, 문화적 발전의 차원에서의 양국 국민 간 유대를 의식하며, 오늘 자로 체결된 협정이 명시하는 대로 양국 협력 기관에서 협정에 동의하였다.

1963년 1월 22일 엘리제 협정 공동 선언

(1) 1933년 나치에 의해 체포된 쾰른 시장, 1949년 기독교 민주 연합 주요 지도자, 1949년~1963년 독일 연방 공화국 수상


자료5. 유럽, 장 모네에게 경의를 표하다(1976)

25년이 넘은 낡은 유럽 공동체는 이제부터, 그것이 갖는 결함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유럽연합의 관점을 심화하고자 하는 희망으로 분명히 밝혀지는 희망을 통해 훌륭한 실현을 선보이고 있다.

정치적 연합의 초기 단계와 진보의 전야에서 내릴 수 있는 이 긍정적인 종합평가는 우리는 대담하고 넓은 시각을 가진 몇 인물들 덕분이다. 그들 중 장 모네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유럽 국가 간 새로운 형태의 관계를 설립하겠다는 목적으로 유럽의 경제구조와 정치구조의 관성력을 단호히 해결하려 애썼다. 현실주의자였던 모네는 모든 분야에 걸쳐 존재하던 유러 국민들 간의 동맹을 이룩하겠다는 자신의 통찰적인 목표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경제적 이익으로부터 떠났다. 유럽 건설의 역경으로 인해 종종 이 목표를 시야에서 잃기도 했다. 현재 그 어느 때보다도 이 목표는 우리가 일상의 관리라는 임무를 넘어 증진하도록 우리의 안내자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임무가 진정한 입체감과 일관성을 지닐 수 있도록 말이다. 룩셈부르크의 유럽의회에 모인 공동체 정부의 수장들은 모네에게 유럽 명예시민 직위를 부여하기로 결정하였다.

룩셈부르크에 집결한 정부 수장들의 결의,1976년 4월 1일, 2일 유럽의회


문제해법

A. 개괄적 힌트

• 카테고리별로 자료들을 배치할 것: 유럽 건설에 호의적인 내용의 자료들, 유럽 건설 또는 유럽확장에 반대하는 내용의 자료들

• 1956년~1981년 사이 국제관계의 흐름에 따라 자료들을 재배치하여 검토하는 것을 잊지 말 것.

B. 답변 힌트

문제3: - 독일의 상황은 어떠한가?

- 드골장군이 생각하는 유럽은 무엇인가?

- 그 유럽은 유럽 경제 공동체와 일치하는가?

문제4: 드골과 아데나워라는 인물과 이들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볼 것


제 17 장: 나이를 먹어가는 제5공화국 (1981-2007)

p.330

1981년에서 2007년까지 프랑스는 3번의 7년 임기와 1번의 5년 임기를 겪는다. 3회에 걸쳐 과반수의 변화를 겪는다. 3회의 “동거정부”가 지난 20년 간의 프랑스 정치 역사를 수놓고 있다. 여기에 5년 임기라는 중요한 제도변화가 2000년에 이루어진다.

자신의 제도 중심에 보통선거를 통한 공화국 대통령 선출이라는 개혁을 이뤄낸 지 50년이 지난 현재의 제5공화국은 정치적 표현에 대한 위기를 겪을 것인가?

혹은 2007년의 적극적인 참여는 이와 같은 위기 과정 역전 신호인가?

1981년과 2007년 사이의 상황에서 제5공화국은 어떠한 변화들을 겪었는가?


자료1. 스캔. 권력의 자리에 선 좌파 1981년 5월 21일 프랑수아 미테랑과 측근들 1번째 줄 왼쪽부터 독일 연방 공화국의 전 수상 윌리 브란트, 미래의 총리 피에르 베레고보아, 미래의 외교부 장관(왼쪽에서 5번째) 롤랑 뒤마, 프랑수아 미테랑의 포로 시절 옛 동료이자 기업가 로제-파트리스 펠라(8번째), 오른쪽 끝에는 마르세이유 시장 가스통 데페르와 가수 달리다


p.331

스캔


자료2. 스캔. 2007년 5월 니콜라 사르코지의 대통령 당선

2007년 5월 16일 니콜라 사르코지 샹젤리제에 오르다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직을 공식적으로 맡게 되는 오늘, 저는 수많은 고난을 겪으며 늘 다시 일어난, 늘 모든 인간을 변호한 프랑스를 생각합니다. [...]

그러나 이 엄숙한 순간, 저는 가장 먼저 유구한 역사를 지니며,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위해 굴복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일어선 위대한 국민, 프랑스 국민을 생각합니다 [...]. 이제 막 막을 내린 캠페인 기간 동안 강렬하게 표현되었던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감정, 기대, 희망, 믿음과 함께 생각합니다.”

니콜라 사르코지, 2007년 5월 16일


p.332


자료집

프랑수아 미테랑


• 1981년 5월 10일, 프랑수아 미테랑이 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제5공화국의 최초 정권 교체를 가능케 한 그의 승리는 많은 점에서 매우 독자적인 성취이기도 하다.

• 미테랑의 정치 여정은 사실 극우파와 가까운 학생 진영 내부에서 두 전쟁 사이의 기간에 시작된다. 전쟁 중 페탱파였던 미테랑은 1943년 레지스탕스에 가담한다.

• 이후 미테랑은 제4공화국 하 중도좌파 내에서 조숙하고 찬란한 정치 여정을 겪는다 (장관직 11회 수행).

• 제5공화국 건설에 반대했던 미테랑은 1965년 대통령 선거 후보로서 좌파의 힘을 집결시킨다. 1971년, 이전에 단 한 번도 사회당 편에 속한 적이 없던 미테랑은 사회당의 일등 서기관이 된다. 좌파 연합의 대통령 후보로 다시 한 번 나선 그는 1974년 승리를 아깝게 놓친다. 1981년, 미테랑은 마침내 정권에 정상에 오르겠다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 14년 간 정상의 자리에 머무르게 된다.


자료1. 스캔. 1935년 제3공화국 하의 우파 시위

“프랑스 거류 외국인 유입”과 의대 내 다수 유대인 존재를 반대하기 위해 라탱 거리에서 행해진 시위. 첫 번째 줄 맨 왼쪽이 프랑수아 미테랑.


자료2. 스캔. 신실한 우정의 남자

1974년 랑드에 위치한 프랑수아 미테랑의 자택에 있는 프랑수아 미테랑과 구 비시 정권 경찰 수장이자 벨디브 집단 감금의 조직자 르네 부스케


자료3. 스캔. 1954년 제4공화국 하 알제리에서의 장관

프랑수아 미테랑은 망데스 프랑스 정부의 내무부 장관이었다.


p.333


자료4. 스캔. 1960년 드골의 반대파: 프랑수아 미테랑, 롤랑 뒤마,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자료5. 1971년 6월 에피네 사회당 대회에서의 미테랑

우리의 관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분열의 전략을 채택하는 순간부터, 사회주의를 향하는 발걸음의 가능성이 없는 정의는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몇 번의 숙고 끝에 매우 명확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즉 우리의 관점은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연구, 교류, 생산을 위한 다양한 방법의 공동 소유물 없이는 사회주의에 기반한 사회가 절대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

우리의 관점은 경제적 분석이며, 독트린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경제적 상황과 사회적 상황을 결합시키는 과학입니다. [...]

진정한 적은 단 하나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그것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천적인 경제 구조의 분열이라는 단 한가지 관점만, 진정한 적은 열쇠를 쥐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 자리잡고 있는, 쫓아내야 할 적입니다. 그것은 바로 독점입니다! 부패를 일으키는 돈, 구매하는 돈, 인간의 의식을 사고 짓밟고, 죽이고, 황폐화시키고, 썩게 만드는 힘을 지닌 광의의 적입니다!

에피네 사회당 대회 연설, 1971년 6월


자료6. 미테랑 후보의 110가지 공약 중 일부 (1981년 1월)

21. 공동 강령 및 사회당 강령에 명시된 철강업, 무기업, 공공 금융업 등 9개 공역 국영화. 신용대출 및 보험 국영화 또한 완성될 것입니다.

22. 정규직 고용 계약이 노동 조건의 기본으로 재설립 될 것입니다.

23. 근무시간은 점진적으로 35시간까지 단축될 것입니다. [...]

31. 최저임금이 인상될 것입니다 [...].

32. 생활 필수품에 대한 부가가치세율이 0으로 지정될 것입니다. [...]

34. 거액 재산에 대한 세금이 제정될 것입니다 [...].

47. 국회의원 선거 시 비례대표제가 제정될 것입니다 [...]. 30%의 여성 의원 비율이 할당될 것입니다. [...]

49. 청렴한 공직생활이 실행될 것입니다 [...].

50. 공인 관련 법적 사건이 있을 시 정의에 의하여 심판할 것입니다. [...]

82. 남성 정년 퇴직은 60세부터, 여성은 55세부터 가능할 것입니다. [...]

90. 공공 통합 및 세속분리 교육이 대공공 서비스로 지정될 것입니다 [...].

105. 군복무 기간이 6개월로 단축될 것입니다.

자료7. 스캔. 1986년, 공화국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이 오르세 미술관을 설립하다.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1930년대 “프랑스 거류 외국인”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료1)

2. 제4공화국 하에서 프랑수아 미테랑이 맡았던 직위들을 찾아 보시오. (자료3)

3. 알제리 전쟁 초반 알제리에 대한 미테랑의 태도는 어떠하였는가? (자료3)

4. 미테랑이 드골에 반대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자료4)

5. “우리의 관점은 경제적 분석이며 [...] 과학입니다.”에서 “과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료5)

6. 미테랑이 규탄하고 있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자료5)

7. 미테랑의 7년 임기 중 어떠한 정책들이 고려되었는가? (자료6)

8. 미테랑 좌측에 있는 인물은 누구인가? (자료7)

B. 자료 연관 짓기

9. 몇 가지 공약들은 에피네에서 미테랑이 약속한 사항들에 부합한다는 것을 보이시오. (자료5, 자료6)

C. 작문

10. 1981년까지 미테랑의 정치 커리에서 중요한 단계들을 몇 문장 내로 설명하시오.


p.334


1)승리의 좌파

A. “삶을 변화시키기”? 자료1, 2

■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은 7년 임기 동안 1979년 발생한 2차 오일 쇼크로 인해 장기화된 경제위기, 전 총리 자크 시라크의 대통령 선거 출마로 상징되는 본인의 정치진영 내 분열 등으로 세력이 약해진다.

■ 사회당 내부에서는 프랑수아 미테랑이 자신의 라이벌 미쉘 로카르를 축출하기에 이른다. 1차 투표에서 공산당 후보 조르주 마르쉐와의 대결에서 가뿐히 이김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의 강력한 힘을 두려워했던 사회주의 유권자들의 두려움을 물리친다. 일부 여론은 좌파 인물이 권력을 쥐게 된다면 미테랑 후보가 제시한 110가지 공약에 따라 실업률을 감소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며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미테랑은 1981년 5월 10일 2차 투표에서 과반수의 표 를 얻는 데 성공한다(51.7%). 제5공화국 설리 23년 만에 좌파는 “정권교체”에 성공하여 권력을 얻는다.

B. 소비를 통한 경제부양 자료3

■ “1981년 5월 10일의 승리자는 단 하나뿐이다, 바로 희망이다.” 프랑수아 미테랑은 5월 21일에 이렇게 발표한다. 정치적 상황은 피에르 모루아가 이끄는 새로운 정부의 방침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1981년 6월, 이전 국회 해산 후 당선된 사회당은 국회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공산주의자들은 4명읙 공산당 소속 장관을 임명한 정부를 지지한다. 그러나 경제 상승폭은 매우아, 실업자 수는 2백만에 근접하고, 연간 인플레이션율은 14%을 넘어서며 국제 수지는 적자를 기록한다.

■ 사형제 폐지, 불법 이민자 신분 합법화 등 여러 방침들이 즉각적으로 적용된다. 사회 및 정치 분야에서는 주당 39시간 노동제, 5주 유급휴가, 60세 정년퇴직, 노동권 관련 “오루 법”, 지방분권화, 거액 재산세 등 “변화의 초석”인 개혁이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 정부는 최저임금 상승과 사회보장금을 이용하여 소비 재활성화를 기대한다. 사회주의자들은 증가한 소비를 통하여 프랑스인들의 상품과 서비스 수요가 늘어날 것이며 기업들은 채용을 통하여 이러한 수요에 답변할 것이라 예측한다. 이러한 경제정책은 5개 기업, 2개 금융기업(파리바, 수에즈)과 36개 은행을 대상으로 한 국영화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어휘

rigueur(긴축): 1982년 6월부터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적용된 정책으로 임금 동결, 세금 증대, 인플레이션 대응, 환율 통제 등 정부 징수와 지출의 균형을 추구하기 위한 정책이다.


자료1. 스캔. 1981년 대통령 선거

자료2. 스캔. 사회당 포스터(1981년 6월)

(포스터 내용)

이제까지:

• 최저임금 11.5% 상승

• 가족수당 25%, 노령수당 20% 상승

• 주택수당 25% 상승 및 사회주택 50,000채 건설

• 장애인수당 20% 상승

이제부터:

• 공공 일자리 210,000개 창출

• 정년퇴직 연령 60세로 하향조절

• 안보와 자유 관련 법 수정

• 주당 노동시간 35시간으로 점진적 단축

1. 왜 “이제까지”와 “이제부터”라는 단어들이 사용되었는가?
2. 포스터 내의 정책 중 어떤 정책들이 1981년에 채택되었는가?


자료3. 스캔. 1981년 6월 국회

p.335


자료4. 스캔. 1983년 미테랑의 정책

그렇습니다. 이 정책은 우리의 정책이 아닌 다른 경제정책에 종속된 국제적 환경이 강요하는 제약들을 아는 이들에게 좋은 정책입니다. [...]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파른 길을 건너 왔으며 몇 개월 만에 프랑스가 반세기 동안 겪지 못한 많은 사회적 개혁과 발전을 이뤄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이겨내야 할 3가지 장벽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실업, 인플레이션, 대외무역 [...] 입니다.

저는 피에르 모루아에게 이 일을 맡겼습니다. 제가 그에게 바라는 것은 새로운 긴축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른 긴축에 맞는 정책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 저는 또한 그에게 다음과 같은 목표를 명시하였습니다.

- 인플레이션을 경쟁국 수준으로 조절할 것

- 2년 안에 대외무역 균형을 재조정할 것

- 현재 한도 내에서 정부 예산을 관리할 것

1983년 3월 23일, 프랑수아 미테랑, 텔레비전 회견

1. 화자는 긴축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2. 모루아에게 주어졌던 과제는 수행되었는가?

자료5. 스캔 긴축의 전환. 구직과 1982년 9월 3일 플랑튀의 풍자화

1. 플랑튀는 긴축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2. 그래프와 곡선을 어떻게 관련 지을 수 있는가? 


자료6. 스캔 1984년 6월 24일 사립학교 수호를 위한 시위

“대공공 통합 교육 서비스”에 반대하기 위해 모인 백만 명 이상의 시위자들.

자료7. 스캔 1985년 7월 10일 레인보우 워리어호 사건

프랑스의 태평양 핵실험에 반대하는 환경단체 그린피스의 선박 레인보우 워리어호가 뉴질랜드 오클랜드항에서 침몰했다. 이 사건으로 1명이 사망하였다. 수 차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선박의 침몰은 프랑스 비밀조직에서 행한 일임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샤를 에르뉘 국방부 장관이 사임하였다.


자료8. 스캔. 1986년 국회의원 선거용 사회당 포스터


p.336


2) 일시적인 과반수의 시기 (1986-1993) A. 1차 동거정부 자료1, 4

■ 제5공화국 하에서 최초로 1986년 국회의원 선거가 연기투표로 행해진다. 득표수로는 확실한 우파의 승리는 (45%의 지지표) 이로 인해 좌석 감소로 나타나게 된다. 우파는 577석 중 291석을 차지하고 수 년 전부터 성장세에 있는 극우단체인 국민전선은 35석을 차지한다. 1956년 이래로 이 정도 숫자의 극우단체가 국회 의석을 차지한 것은 처음이었다. 제5공화국 초반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의 정당이 의회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 하였다. 이로 인해 좌파 대통령과 자크 시라크가 이끄는 우파 정부의 ‘동거정부’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이 펼쳐지게 된다.

■ 이 정부는 자유주의로부터 영감을 얻은 강령을 지녔다. 산업회사, 보험회사 및 은행 등 65개의 기업이 민영화된다. 1981년 사회개혁의 핵심은 다시 실행되지 않았으나 국회의원 선거 관련 최고 득표자 당선 투표제 법이 다시 제정된다. 정부는 여러 사회적 어려움에 봉착한다. 12월, SNCF 파업으로 인해 국가가 한 달간 마비 상태를 겪는다. 파업인들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프랑수아 미테랑은 ‘사회적 유산’의 수호자임을 자처한다. 미테랑은 와해된 국민을 점차 자기 편으로 되찾는다.

B. 1988년: 좌파의 복수? 자료2,3

■ 1987년은 정부에게도 고된 해였다. 경제 상황은 거의 나아지지 않고 실업률 상승이 여론의 주요 관심사로 떠오른다. 1988년 대통령 선거 시, 우파 진영에는 2명의 후보가 나선다. 공화국연합의 자크 시라크, 프랑스 민주 연합의 레몽 바르였다. 프랑수아 미테랑 또한 후보로 참여한다. 공산당에서는 앙드레 라주아니, 극우파에서는 장-마리 르펜이 후보로 나선다.

■ 1988년 4월 24일 1차 투표일 저녁, 우파는 저조한 모습을 보인다(자크 시라크 19.9%, 레몽 바르 16.5%). 반면, 국민전선은 경이적으로 발전한 결과를 거둔다(14.4%). 좌파 진영에서 미테랑은 좋은 결과를 얻지만 공산당은 후퇴의 모습을 보인다(6.8%). 2차 투표에서 프랑수아 미테랑이 재선된다.

C. 또다시 어려움에 놓인 좌파 자료5, 6, 7, 8

■ 1981년과 마찬가지로 프랑수아 미테랑은 국회를 해산한다. 1988년 6월의 국회 선거에서 미쉘 로카르 총리는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한다. 미쉘 로카르는 최저 통합 수당(RMI)을 제정하고, 경제 성장 재개를 통해 고용률 상승을 노린다. 그러나 정치금융 스캔들의 증대에 의한 내부 갈등이 사회당을 약화시킨다. 1991년 5월, 미쉘 로카르에게 동료의식을 느끼지 않는 프랑수아 미테랑은 그에게 사임을 강요한다. 이어서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총리직에 여성 에디트 크레송이 오르게 된다. 그러나 경제성장 약화와 심화되는 평판 하락으로 인해 에디트 크레송은 직무적 한계에 부딪힌다. 사회주의자들에게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다준 지방선거 및 면의회 선거 이후 1992년 4월, 에디트 크레송의 자리를 피에르 베레고부아가 대체하게 된다.

■ 유럽 건설 연정 정책을 통해 미테랑은 원기 회복을 꾀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1992년 9월, 미테랑은 마스트리히트 조약 관련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과반수가 겨우 넘는(51%) 프랑스인들이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찬성표를 던진다. 인플레이션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고용 상황은 지속적으로 악화된다. 실업자 3백만명이라는 상징적인 한계는 국회의원 선거 전인 1993년 초 봄에 그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어휘

scandale politico-financier(정치금융 스캔들): 공적 자금을 사적 용도로 사용할 목적으로 횡령한 정치인 또는 정당 관련 금융 스캔들


자료1. 스캔. 1986년 6월 국회

PS(사회당) 201

UDF et divers droite(프랑스 민주 연합 및 기타우파) 134

RPR(공화당연합) 157

FN(국민전선) 35

1. 국민전선의 의회 입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2. 우파는 어떠한 과반수를 구성하는가?


자료2. 스캔. 1988년 대통령 선거


자료3. 스캔. 1988년 6월 국회


자료4. 1986년 4월 8일 의회에 전하는 프랑수아 미테랑의 메시지

제5공화국의 탄생, 1962년 보통선거를 통한 대통령 선출이라는 개혁, 공화국 대통령과 과반수 의원 간의 일치성을 동반한 상황들은 문서 너머의 관례를 생성하고 발전시키고, 공무에 대한 대통령의 역할을 증가시켰습니다. 현재 나타나는 혁신은 다양한 방면에서 새로운 업무수행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 저는, 헌법은 단지 국가 수장에게 선거 여론조사나 대통령의 임기에 영향을 전혀 끼칠 수 없는 권력을 부여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드릴 것입니다.

공공 권력의 적법한 운영, 정부의 지속성, 국가의 독립성, 국토의 완전함, 조약 중시, 제5조에서는 헌법이 갖는 권위나 심판으로서의 역할이 적용되는 [...] 분야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정부 차원에서는 제20조에 관련하여 국가 정책을 결정하고 진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제20조는 공화국 대통령의 특권과 의회의 신용 하에 프랑스인들의 약속을 실행할 의무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통령의 직무입니다.

이러한 사항이 명확히 설립된 채로, 대통령과 정부는 모든 상황에서 국가 간 이익을 위한 공동 조약을 잘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할 의무가 있습니다.

1. 미테랑은 헌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2. 1번째 문단 마지막에 언급된 "혁신"은 무엇인가? 


자료5. 1988년 모든 프랑스인들에게 보내는 미테랑의 편지

국가 연합을 감시하기 위하여, 그리고 세계가 우리 나라에 기대하는 역할을 보장하기 위하여 우리 모두가 아직도 함께 해 나갈 것이 많다는 확신이 없다면, 저는 임기 동안 다시 한 번 선거에 참여할 계획을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

저는 통상적인 단어의 의미로 구성된 강령을 여러분께 제안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사회당 수장으로 있었던 1981년에 이미 그 일을 하였습니다. 사실, 강령은 정당의 직무입니다. 공화국 대통령 혹은 공화국 대통령이 되기를 원하는 이들의 일은 아닙니다. 대통령 선거를 의회 선거와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의 하루하루라는 세부 사항들을 조절하는 일은 정부의 일입니다. 저의 역할은 다가오는 4월 24일과 5월 8일, 향후 7년 간 프랑스에 대한 계획을 여러분께 제출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민주적 삶에 대한 합법적인 반대 의견들을 넘어, 연합 프랑스에 대한 열정을 영혼에 담은 채로 최선을 다해 이 일을 수행하겠습니다.


자료6. 스캔. 1988년 4월 19일 프랑수아 미테랑과 미래의 총리 미쉘 로카르

자료7. 스캔. 사회당 포스터 (1991년 5월 6일)

(내용: 10년 간의 파종)


자료8. 스캔. 1991년 5월 9일 화가 페장의 풍자화

(내용: “10년 간의 파종!”, “일자리는 늘 없네!”)

1. 작품과 작품 속의 인물들을 소개하시오.
2. 자료7을 참고하여 작품 속 문장들을 설명하시오.
3. 어떠한 문제가 언급되고 있는가? 


p.338

3) 공고해진 우파 (1993-1997)? A. 2차 동거정부 자료1, 4, 6

■ 1993년의 국회의원 선거는 1차 투표에서 17.4%의 득표율을 기록한 사회당에게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다 준다. 우파는 1차 투표에서 44%의 득표율을 기록하고, 2차 투표에서 486석을 차지한다. 1988년 때와 마찬가지로 공화국 대통령은 과반수 우파와 마주하게 된다. 대통령은 공화국 연합의 일원인 에두아르 발라뒤르를 총리로 임명한다. 이렇게 2차 동거정부가 시작된다.

■ 1994년 총리는 새로운 민영화 캠페인을 실시하고 민간 기업 정년 체제 개혁을 실시한다. 수명 연장과 정년 연장으로 인해 연급 불입액은 점점 상승한다. 따라서 급여 생활자의 분담 기간을 더욱 연장해야 하게 된다.

■ 발라뒤르는 큰 인기를 누려, 1995년 공화국연합의 대표직 종료에 가까워질 무렵 그와 자크 시라크 대표 간의 경쟁이 조성된다. 한편, 공화국 대통령은 질병과 비시 정권 편에 섰던 과거가 발각되어 세력이 약해진다. 프랑수아 미테랑이 학생 시절 극우주의자였으며 비시 정권 하 공무원으로 일하며 비시 정부 도끼문장과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이 프랑스인들에게 알려진 것이다.

B. 자크 시라크 대통령 (1995) 자료2, 3

■ 1995년 4월-5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우파에서는 공화국 연합에서 주요 인물 두 명이 후보로 나섰다. 현 총리 에두아르 발라뒤르와 “사회 골절”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는 자크 시라크였다. 사회당 진영에서는 여론조사에 따르면 가장 높은 인기도를 지닌 전 미테랑 정권 총리이자 구 유럽 위원회 회장이었던 자크 들로르가 후보로 점쳐진다. 그러나 들로르는 후보로 나서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사회당은 구 사회당 수석비서관 리오넬 조스팽이 후보로 나서게 된다. 국민전선에서는 장-마리 르펜이, 프랑스 공산당에서는 로베르 위가 후보로 나선다.

■ 1차 투표에서 시라크가 발라뒤르를 앞선다. 반대 후보자들 모두(좌익 급진주의, 국민전선, 녹색당) 꽤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다. 이것은 프랑스인들이 기존 정치권력을 점점 신뢰하지 못한다는 정치적 위기를 드러내는 사실이었다. 2차 투표에서 시라크가 조스팽을 제치고 승리하여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C. “사회 분열”에 맞서는 우파 자료5, 7, 8

■ 5월 17일, 자크 시라크는 알랭 주페를 총리로 임명한다. 드골주의자들이 엘리제궁과 마티뇽에 재입성하는 1974년 이래로 없었던 전대미문의 상황이 일어난다. 자크 시라크와 알랭 주페는 매우 빠른 속도로 쌓이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1980년대부터 쌓여온 국가 채무의 양이 엄청난 것이다. ‘유로’라는 유럽 공동 화폐를 창설하기 위한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요구 조건에 프랑스가 부합하도록 하기 위하여 채무를 줄여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유럽 연합주의자인 자크 시라크와 알랑 주페는 국가 채무를 줄여 프랑스를 마스트리트 조약의 기준에 부합하는 국가로 만들고자 한다. 따라서 선거운동 시절 공약과 반대되는 세금 상승이 정책에 포함되게 된다.

■ 주페 정부에 의해 이행된 개혁, 그 중 사회보장과 공공직 은퇴와 같은 정책들은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파업을 유발한다. 파업으로 인해 1995년 12월 국가가 마비된다. 1995년 여름과 가을, 프랑스는 알제리 이슬람 과격 테러 단체 GIA의 테러를 겪는다. 이 유혈사태는 10월에 종료된다.

■ 그러나 경제적 위기가 지속되고 실업률은 계속 상승한다. 1997년 4월, 이러한 어려움이 계속될 것을 우려한 자크 시라크는 국회를 해산한다. 1997년 6월, 국회의원 선거가 개최된다.

어휘

fracture sociale(사회 분열): 1995년 선거운동 시 자크 시라크가 사용한 용어로, 부유층과 ‘경제 성장을 위해 버려진’ 빈곤층 간의 심화되는 분열을 의미한다.


자료1. 스캔. 1993년 3월 국회


자료2. 1995년 실행되는 정책은?

1995년에 실행 가능한 다른 정책들이 있었다.

- 국가재정과 사회보장금을 급증시키는 자세를 취하고 계산기를 0에 놓은 뒤 2년 반의 기간 동안에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요구조건을 충족하기 어려웠다고 발표할 것인가?

- 프랑화에 미칠 동요의 위험을 감수하고 환율을 평가절하하여 새로운 기준에서 다시 시작할 것인가?

이것들이 바로 선택 가능한 정책들이었다. 나는 이것들을 선택하지 않았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프랑스 대통령이 말한 바와 일치하지 않는 정책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정책들이 프랑스에 좋지 않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 내 관점에서 중요하게 여긴 유로화 창설이라는 정책을 오랫동안 위태롭게 한 정책이었다.

- 경기 회복을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에 도움이 되지 못 하고 우리에게 쉬운 길로만 갈 것을 종용하는 정책이었다.

지출 안정화, 국가 채무 및 적자 감소, 세금 하락 등이 우선적으로 상식적인 과제들이었기는 하지만 말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전진을 위한 후퇴를 했다. 더욱 엄밀히 말하자면 더욱 높은 도약을 위해 어깨에 더 무거운 짐을 진 것이었다.

알랭 주페, <우리들 간의 이야기>, 닐(Nil) 출판사, 1996년

1.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기준을 찾으시오.
2. 주페가 채택한 정책을 어떻게 특징지을 수 있는가?
3. 채택 가능한 다른 정책에는 무엇이 있었나?
4. 알랭 주페에 따르면 채택 가능한 다른 정책들의 단점은 무엇이었나? 


p.339

자료3. 스캔. 1995년 대통령 선거

자료4. 1993년 4월 8일 에두아르 발라뒤르의 소신 피력 연설

우리의 사회가 질문하거나,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사항이 있습니다. 실업과 같은 가중된 불안정은 프랑스인들의 마음에 불안감을 가져다 주고, 이전 정부의 무능함은 이 불안감을 가중시켰습니다. 외곽 지역과 도시에서 발생하는 위기들은 심각하고,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젊은이들의 불안도 심각합니다. 이 모든 것은 정신적 위기로 귀결됩니다.

우리가 현재까지도 그 영향을 겪고 있는 1980년대 초의 치명적인, 현실적인 경제 기반을 구축하지 않은 채로 사회 진보를 보장하려 한 노력으로부터 기인한 오류들은 1988년-1990년 또다른 오류들로 더해졌습니다. 그로 인해 성장의 시대에서 프랑스 사회를 개혁할 수 있었던 역사적인 기회를 놓쳤습니다.

1. 연설자를 소개하시오.
2. 1993년 4월 프랑스의 정치상황은 어떠하였는가?
3. 발라뒤르가 암시하는 1980년대 초에 발생한 “오류들”은 무엇인가? 


자료5. 스캔 1995년 12월 알랭 주페의 사회 보장 개혁 반대 시위를 벌이는 공무원들


자료6. 스캔. 1994년 성탄절 알제리 이슬람 과격 단체의 에어프랑스 비행기 납치

마르세유 공항에서 프랑스 대테러 부대 GIGN이 개입하여 테러리스트 4명이 사살되었다.

자료7. 프랑수아 미테랑과 그의 정책에 관한 의견 중 일부

1995년 4월 17일 유럽1에 출연한 프랑스 시사주간지 <르푸앵> 국장 클로드 앵베르:

“우리는 2명의 마술사 대통령을 선출했다. 프랑스에 대해 확고한 사상을 가진 마술사 드골과 권력의 마술사 미테랑이다 [...]. 미테랑은 페텡주의자이자 레지스탕스였고, 식민지해방을 찬성하고 반대하였다. 핵 억제력도 찬성 및 반대했다. 헌법도, 자본주의와의 결별도 찬성 및 반대했다.”

1997년 7월 29일 프랑스 일간지 <피가로>에서 미쉘 로카르:

“시라크는 미테랑보다 속임수를 쓰는 성향이 덜했다.”

1996년 9월 25일 <피가로>에서 전 재정부 장관이자 프랑수아 미테랑의 친구였던 미쉘 샤라스:

- 질문: “1993년 패배의 저녁, 미테랑이 당신에게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하던데요. “사실 사회주의자들은 집권한 게 아니야! 프랑스인들이 그들에게 값을 지불하게 한 것이지.” 왜 사회주의자들이 집권한 것이 아닌가요?”

- 샤라스: “미테랑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가 늘 어려운 결정을 내릴 용기를 지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료8. 스캔. 1993년 풍자화 아티스트 카뷔 눈에 비춰진 미테랑

(내용: 사회당(P.S)을 엠마우스(Emmaüs, 중고물품을 수거하여 판매하는 프랑스 자선단체) 넝마장수들에게 남긴다.)

1. 작품 속의 인물들을 식별하시오.
2. 카뷔가 묘사하고자 하는 미테랑과 사회당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p.340 4) 3차 동거정부 (1997-2002)

A. 리오넬 조스팽 총리 자료1, 4, 6, 7

■ 750,000개 일자리 창출과 주당 35시간 노동제 실시를 약속하는 좌파는 2차 투표에서 국민전선이 다른 모든 후보자들의 전진을 저지함으로써 1997년 선거에서 승리한다. 국민전선의 저지는 선거 삼파전을 유발하여, 이 선거 대부분에서 좌파가 승리하게 된다. 이로써 3차 동거정부가 시작된다.

■ 6월 2일 총리로 임명된 리오넬 조스팽은 사회당, 공산당, 녹색당을 아우르며 “복수 좌파”라 불리는 정부를 구성한다. “미래의 변화”라는 주제로 선거 운동을 펼쳤던 총리는 국가 채무 감소 정책을 지속하여, 세금이 상승한다. 선거 공약을 지키고 과반수 의회를 구성하는 좌파를 만족시키기 위해 1998년 조스팽은 주당 35시간 근무제를 주장하는 오브리 법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좌파는 노동 분담을 통한 실업률 하락을 끌어낼 수 있는 이 정책의 효과를 기대한다. 5년 간 국가 재정 지원 하에 수십만 개의 청년 세대 일자리가 창출된다.

B. 조금씩 분열되는 “복수 좌파” 자료2, 5

■ 초반에 조스팽 정부는 경제 성장 재개로 유리한 상황을 얻는다. 주 35시간 노동제라는 개혁은 노동의 가치하락과 기업 간 경쟁을 유발할 것이라는 우파의 반대를 받지만, 이 정책은 국민들로부터 지속적인 인기를 보장한다. 자신이 속한 정치 진영의 분열과 파리 시장 임기 시 발생했던 법적 “소송”으로 인하여 세력이 약해진 대통령을 상대로 조스팽의 동거정부는 성공한 듯 보인다.

■ 그러나 “복수 좌파”는 조금씩 여러 정책에서 분열을 겪게 된다.

- 장-피에르 슈베느망 내무부 장관은 對코르시카 정책에 반대하여 2000년 8월 사임한다.

- 공산당은 더욱 “사회적”인 정책을 촉구한다.

- 녹색당은 원자력 발전소 운영 중지를 요구한다.

■ 좌파는 급진좌파의 공약 경쟁에 굴복하게 되고 우파는 2001년 3월 시의회 선거에서 승리하여 힘을 회복한다. 유럽 공동체 관련 갈등도 점차 커진다. 조스팽이 관람석에 있었던 2001년 10월 6일 프랑스 대 알제리 축구 경기는 시위자들이 휘파람으로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보내는 야유로 진행에 차질을 빚게 된다.

■ 재정부 장관의 개혁에 반대하는 공무원, 교사, 간호사, 헌병 등의 사회 계층이 가진 불만족이 고조되어 2001년 12월 시위가 발생한다! 파리 외곽지역에서는 이민자 출신 인구 일부의 통합이 어렵게 진행되고 있었다. 2002년 선거 운동의 주요 주제는 ‘심화되는 불안정’이 된다. 조스팽 또한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한다. 실업의 단계적 해소만으로는 인구 통합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C. 제5공화국의 전환점? 자료3, 8

■ 유권자 70%가 기권한 국민투표 이후, 대통령 임기는 5년으로 제정된다. 초기에는 여론의 환영을 받았던 동거정부는 점점 비판을 받게 된다. 국가에 심층적인 개혁이 필요했던 시점에 동거정부 정부는 무기력을 조장하였기 때문이다.

■ 2002년 4월 21월의 결과는 모두에게 충격을 안긴다. 2차 투표에 장-마리 르 펜이 진출하고 1차 투표에서 사회당 후보가 탈락한 것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 결과는 점점 심화되는 투표 기권과 반대를 위한 투표에 기인한 것이었다. 3분의 1이 넘는 유권자들이 기존 정권 시스템의 바깥에 자리하고, 기존 정권을 거부하는 후보들에게 표를 던졌다.

어휘

élection triangulaire(선거 삼파전): 3인의 후보가 결전을 벌이는 선거. 3위 후보가 1, 2위 후보의 정당 소속 인물이라면 선거에 혼란을 가져오고 절대값으로 보자면 소수파인 상대 진영 후보를 탈락시킬 수 있다.


자료1. 스캔. 1997년 의회

PCF(프랑스 공산당) 38

PS et apparentés(사회당 및 연합후보) 240

기타 좌파 28

녹색당 7

 과반수

UDF(프랑스 민주 연합) 108

RPR(공화국 연합) 131

기타 우파 14

국민전선 1


자료2. 스캔. 1997년-2004년 공공적자

1. 공공적자는 전체적으로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2. 이 상황과 관련된 미래의 결과에는 무엇이 있는가?


자료3. 스캔. 국민전선 득표율


p.341


자료4. 스캔. 1997년 국회의원 선거구

1. 한 선거구에서 국민전선과 함께 당선된 좌파 당선인은 몇 명인가?
2. 한 선거구에서 국민전선과 함께 당선된 우파 당선인은 몇 명인가?
3. 1997년 선거구는 국민전선과 함께 어느 파에 유리하게 작용되었나?


자료5. ‘라 마르세예즈’가 휘파람으로 연주된 경기

경기장이 휘파람으로 연주되는 ‘라 마르세예즈’로 가득 찼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몇 마디를 나누었다. "무슨 일이지?" [...] 알제리 국가는 들리지 않았다. 알제리 역사에 대한 존중이 있었다. 대부분 프랑스에서 태어난 이 젊은이들은 왜 그들의 국가를 불렀던 것일까? 이들은 프랑스인이 아니던가? [...]

나는 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 그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의 부모 또는 조부모는 프랑스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그들이 맞서 싸운 나라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신의 상황을 찾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 이해한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무의식 속에 존재한다 [...].

이후 나는 좀더 연령대가 높은, 그리고 프랑스에서 태어나지 않은 스튜어드들과 토론을 했다. 그들 중 한 명은 나에게 "만약 내 아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면, 프랑스로 가게 해서 우리가 프랑스에서 그렇게 나쁘게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릴리안 튀람, 프랑스 축구팀 선수, 2001년 10월 8일,

1. 이 축구선수를 분노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2. 스튜어디스가 언급한 내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자료6. 스캔. 1997년 6월 5일 첫 의회에 참석하는 엘리제 궁의 조스팽 정부


자료7. 스캔. 주 35시간 근무 정책

자료8. 스캔. 2002년 4월-5월 대통령 선거


p.342


자료집

7년 임기제에서 5년 임기제로


• 2000년 9월 24일 국민투표를 통한 5년 임기제 정착은 제5공화국 제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1세기가 넘은 낡은 전통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사실 7년 대통령 임기제는 제3공화국 제도가 설립된 18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 7년이라는 기간은 체제 계승에도 불구하고 변화하지 않았다.

• 2000년 가을의 헌법 개혁은 대통령 임기를 5년으로 단축하며 국회의원 임기와 같은 시기로 맞추었다. 2년 후인 2002년, 리오넬 조스팽 총리에 의하여 대통령 선거가 국회의원 선거보다 먼저 치러지도록 선거 일정이 변경되었다. 이는 대통령 선거를 프랑스 정치의 중심에 위치시키고 중요성을 증강시키기 위함이었다.


자료1. 대통령 선거

■ 1962년 10월 28일: 보통선거를 통한 대통령 선거에 대한 국민투표 (찬성 61.7%)

■ 1965년 12월: 최초 보통선거를 통한 대통령 선거: 드골 재선

■ 1969년 6월: 드골주의자인 조르주 퐁피두 당선

■ 1974년 5월: 독립공화당 소속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당선

■ 1981년 5월: 사회당 소속 프랑수아 미테랑 당선

■ 1986년 3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우파 승리. 좌파 대통령과 동거정부 정부 구성

■ 1988년 5월: 프랑수아 미테랑 재선

■ 1993년 3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우파 승리. 좌파 대통령과 동거정부 정부 구성

■ 1995년 5월: 드골주의자인 자크 시라크 당서

■ 1997년 6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좌파 승리. 우파 대통령과 동거정부 정부 구성

■ 2000년 9월: 5년 임기제에 대한 국민투표 (73% 찬성)

■ 2002년 4월: 5년 임기로 자크 시라크 재선

■ 2007년 5월: 5년 임기로 드골주의자 니콜라 사르코지 당선


자료3. 스캔. "헌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에 대한 두 풍자화

a. 1986년 3월 르몽드에 게재된 플랑튀의 풍자화

b. 1991년 11월 피가로에 게재된 페장의 풍자화


p.343

자료4. "헌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에 대한 한 법률가의 의견

40년이 넘은 이후 제5공화국은 20세기 프랑스가 가진 최고의 체제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정부의 불안정성을 치료하였기 때문이다. [...]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1962년 헌법 개정이 보통선거를 통하여 공화국 대통령의 권력을 증강하였다 하더라도 드골 장군이 불어넣은 헌법의 정신은 동거정부로 인하여 반박되었다는 점이다. [...] 동거정부 정부에서 행정부의 실질적 수장은 국회 과반수 정당의 리더이다. 프랑스 국회와 마찬가지로 엘리제궁은, 미국 국회 등 외국 정계의 영향을 받았다 할 지라도, 중재자로서의 권력 역할을 지닌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이것은 드골이 원했던 바와 정반대되는 상황인 것이다.

이 양두정치(1)가 해로운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우리는 헌법 문서를 탓하거나 동거정부 정부를 실행한 이들에게 비난을 돌린다. 헌법 문서를 검토하지 않은 채 인물들을 규탄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위해 말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헌법의 불확실성을 피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헌법 작성자들의 부주의를 탓하며 문서를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문서의 탓으로 돌릴 경우, 헌법 개정이 제안되어야 한다. 5년 임기제 관련 또는 대통령과 총리의 권력에 대한 논쟁은 바로 현재 모두가 우리 헌법의 근본적인 모순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장-클로드 카사노바 게재, 피가로, 2000년 2월 2일

(1) 이두정치: 두 인물 혹은 두 제도가 공유하는 권력


자료5. 스캔. 공화국 대통령 자크 시라크와 총리 리오넬 조스팽

두 인물 모두 7년 임기제에서 5년 임기제로의 변경에 대한 2000년 9월 국민투표 시 공직에 있었다.


자료6. 2000년 9월 24일 국민투표

공화국 대통령은

헌법 제3조, 제60조, 제80조에 의거하여,

상원 및 하원 임기에 맞춰 공화국 대통령의 임기를 조정하는 헌법 관련 계획에 의거하여,

1958년 11월 7일 조직법률의 행정명령 58-1067 제46조에 명시된 조건 하에 헌법위원회와 의논하여,

다음과 같이 공포한다.

제1조: 본 법령에 첨부된 2000년 6월 29일 상원과 2000년 6월 20일 하원 임기에 맞춰 공화국 대통령의 임기를 조정하는 헌법 관련 계획은 헌법 제89조에 의거하여 2000년 9월 24일 국민투표에 부쳐질 것이다.

제2조: 유권자들은 다음의 질문에 “찬성” 또는 “반대”로 답할 것이다: ”헌법 상에 공화국 대통령의 임기를 5년으로 지정하는 것을 승인하십니까?”

제3조: 총리와 내무부 장관은 각자 프랑스 공화국 관보에 게시될 본 법령을 실행할 의무가 있다.

파리에서 작성, 2000년 7월 12일


자료7. 스캔. 2000년 9월 24일 국민투표

유일항목

헌법 제6조 제1항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공화국 대통령은 보통선거로 선출되어 5년의 임기를 지낸다.”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연속된 동거정부 정부는 어떠한 문제를 양산하는가? (자료1)

2. 헌법은 어떻게 분석될 수 있는가? (자료2)

3. 플랑튀 작품의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시오 (자료3). 두 인물은 왜 헌법을 읽으러 가는가?

4. 페장의 작품은 누구를 암시하는가? (자료3)

5. 저자에 따르면 동거정부의 결과는 무엇인가? (자료4)

6. 저자는 동거정부 정부와 헌법 개정을 어떻게 연결짓고 있는가? (자료4)

7. 5년 임기로의 전환을 입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료6)

8. 7년 임기에서 5년 임기로 전환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낮은 관심도를 설명하시오. (자료7)

B. 자료 연관 짓기

9. 헌법 해석에 대한 문제는 언제부터 나타나는가? (자료1, 자료2, 자료3, 자료4)

C. 작문

10. 7년 임기에서 5년 임기로의 전환은 동거정부 정부의 모든 위험을 타개하도록 해 주는가?


p.344


자료집

프랑스 공산당

• 1920년 투르 회의에서 사회당(국제 노동자당 프랑스 지부)과의 분리를 통해 탄생한 공산당은 해방 이후 프랑스 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공산당은 25-28%의 지지율로 좌파 권력 내 1위를 차지한다. 동시에 공산당은 소비에트 연방(간접적 재정지원, 공산당 지도자들이 행한 수 차례 모스크바 여행 및 동구권 국가 여행 체류)과 굳건한 관계를 형성한다.

• 공산당은 이로 인하여 제4공화국 기간과 정치권 재기 기간에서, 사회당과의 선거 협약과 1981년 공동 강령 등 고립의 시기를 겪는다. 사회당과의 관계는 늘 복잡하여, 좌파 내 선거 지배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초부터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붕괴된다.


자료1. 스캔. 1945년 5월 201회 공산당 집회: 프랑스인 4인 중 1인이 공산당에 투표


자료2. 1976년 이데올로기의 전환점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 프랑스를 위해 원하는 것’을 주제로 회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는 우리가 맞서 싸우는 사회당원들의 프랑스 정치 권력을 규정하는 문서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

우리는 1976년에 있습니다. 우리는 1년 반 전과는 완전히 다른, 더 나아가 25년과는 완전히 다른 프랑스에서 살며 투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가장 중요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고 실질적인 연구가 기념비로 자처되는 도그마의 인용구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

아주 간략히 말하자면, 우리는 국민들에게 진보, 자유, 평화라는 이 시대의 조건을 고려하며 민주주의와 혁명이라는 길을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을 제안합니다.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오늘날 우리가 노동자들과 국민에게 제안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문서에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프랑스 공산당 출간지 ‘뤼마니떼’에 게재, 1976년 1월 20일


자료3. 스캔. 1924년-2007년 공산당 득표 변화

p.345

자료4. 스캔. 프랑스 공산당 포스터(1954)


자료5. 스캔. 1977년 붉은 파리 외곽

1977년 프랑스 공산당이 통솔하는 파리 외곽 행정구역


자료6. 프랑스 공산당과 정부 공동 강령

우리는 우리를 고무하는 다음의 이유를 통해 여러분께 편지를 드립니다. 민주주의적 변화를 위한 연합을 위해서입니다. 15년 동안 우리는 이를 위해 모든 노력을 불사하였습니다. 기억하십시오. 1962년, 우리는 여러분께 다음과 같은 호출을 보냈습니다. “함께 걸으며 함께 치자.” 1964년, 우리는 여러분께 정부 공동 강령 체결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이루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투쟁하였습니다. 1965년, 우리의 자주적인 결정으로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프랑수아 미테랑을 단일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1974년, 우리는 좌파 단일 후보를 제안하고 단일 후보를 위한 선거 운동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15년 간 우리의 연합을 더욱 공고하게, 강하게, 크게 하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두 정당 간에는 큰 차이가 존재하였기에, 이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그것을 예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연합이 국가와 국민의 새로운 이익으로 가는 길을 여는 단 하나의 방법이라 확신했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프랑스 공산당 위원회가 사회당 집행위원회에 전하는 편지, 1977년 9월 23일


자료7. 스캔. 1981년 모루아 정부 내 4명의 공산당 소속 장관

왼쪽부터 마르셀 리구(직업교육부), 샤를 피테르만(교통부), 작 랄리트(보건복지부), 아니세 르 포르(공공업무부)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1976년 이데올로기의 전환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자료2)

2. “붉은 파리 외곽”이라는 표현을 설명하시오. 오늘날은 어떠한가? (자료5)

3. 프랑스 공산당원은 무엇을 공표하는가? (자료6)

4. 프랑스에서 공산당 소속 장관이 지명되지 않은 것은 언제부터인가? (자료7)

B. 자료 연관 짓기

5. 어떠한 대내적, 대외적 변화가 프랑스 공산당에 영향을 끼쳤는가? (자료3, 자료4, 자료6, 자료7)

C. 작문

6. 1960년대부터 프랑스 공산당과 선거 결과의 변화 과정을 설명하시오.


p.346

5) 자크 시라크 재임기

A. 5년 임기로 재선된 자크 시라크

■ 2002년, 2차 투표에서 자크 시라크는 82%의 득표율로 크게 승리를 거둬 재선한다. 우파가 대규모 과반수를 차지하게 된 6월 국회의원 선거는 여론의 동거정부 거부를 입증한다. 이렇듯 특징적인 상황에서 재선된 자크 시라크는 장-피에르 라파랭을 총리로 임명한다.

B. 어려운 5년 자료1, 3, 4

■ 경제 성장세는 약화되고 사회 분위기는 긴장된 상태로 유지된다. 그러나 정부는 2003년 정년 개혁을 단행한다. 같은 해, 대통령은 여론에 의해 표현된 결정을 내린다. 바로 이라크 전쟁 참전 거부이다. 5년 임기 동안 도로 안정화, 암 치료 연구, 장애인 지원이라는 3개의 큰 정책이 실시된다. 2005년 교육기관, 중학교, 고등학교 내 종교적 색채를 띠는 의복 착용 금지라는 중요 법안이 표결에 부쳐진다.

■ 정치적 상황은 빠른 속도로 과반수 정당에 불리하게 변화한다. 2004년 3월 지방선거에서 대패를 한 것이다.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부 장관은 점진적으로 대통령 선거 출마 의사를 내비치고 대중운동연합에 가담한다. 자크 시라크는 “내가 결정하고 그가 실행한다”라며 니콜라 사르코지를 자신의 쪽으로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시라크의 임기 말은 니콜라 사르코지와 도미니크 드 빌팽의 정치싸움으로 특징지어진다.

■ 대통령의 주요 보좌관인 도미니크 드 빌팽은 2005년 5월 29일 유럽헌법 관련 국민투표에서 “반대”를 이끌어내는 승리를 거둔 이후 총리로 임명된다. 이후 2005년 10월-11월 수 주간 파리 외곽지역에서 벌어진 연속적인 폭력 시위와 최초고용계약에 반대하는 고등학생 및 대학생들의 반대에 마주하게 된다. 마침내 대중운동연합의 대통령 후보는 니콜라 사르코지로 결정된다.

C.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 자료2, 5, 6

■ 4월 22일 대통령 선거 1차 투표 결과는 2002년 4월 21일 선거 결과와 아주 판이했다. 높은 투표 참여율로(85%) 제5공화국 역사상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10.5%의 득표율로 장 마리 르펜은 2002년과 비교하여 크게 후퇴했다. 급진좌파도 후퇴하였고 복수 좌파 내의 기존 사회당 협력자들도, 공산당과 녹색당(1.9%, 1.6%)도 후퇴를 겪었다. 중도파 프랑수아 베이루의 선전에도 불구하고(18.6%), 니콜라 사르코지와(31.1%) 사회당 여성 후보 세골렌 루아얄(25.8%) 두 후보가 2002년 자크 시라크와 리오넬 조스팽이 얻었던 스코어의 2배를 기록한다.

■ 1965년, 1974년, 1981년, 1995년과 마찬가지로 2차 투표는 좌-우의대결이 된다. 투표율은 계속 높아 사르코지가 53%의 득표율을 기록한다. 이 강력한 승리는 1차 투표에서부터 이루어졌던 다이나믹한 흐름의 결과였다. 사르코지는 잦은 분열을 겪는 우파를 집결시켜 국민전선 지지자들의 표를 얻었다.

■ 대중운동연합의 선전은 6월 10일 국회의원 선거까지 이어져 1차 투표에서 45.5%의 득표율을 기록하지만 사회당 또한 국회의 건재한다. 그러나 사르코지 대통령이 5월 임명한 프랑수아 피용 총리는 의회 내 굳건한 대중운동연합의 지지를 받는다.

■ 2007년 여름부터 선거 기간 동안 공약으로 소개되었던 최소 교통수단 서비스, 과세 및 상속권수정, 대학 자율화 관련 법 등의 개혁에 대한 의회 투표가 이루어진다. 같은 해 가을, 정년 특별법 개혁이 행해진다.


자료1. 정년 문제

인구 노령화는 의존도를 심화시킨다.(60세 이상 비율 / 20-59세) 2040년에는 이 비율이 38.5%에서 72.6%를 기록할 것이다. 이미 시행된 개혁들이 재취업률이 민간 분야 근로자 재취업률(수당/임금 을 심화시키고 있다. 현 상태를 유지한다면 2040년에는 국내총생산 중 보조금의 비율이 12%에서 16%로, 국가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2%에서 18.5%로 변화할 것이다. 따라서 자신들의 조부모 들보다 더욱 긴 은퇴 시기를 보낼 세대를 위한 새로운 사회보장 제도를 구축해야 한다. 세 가지 실행 가능한 방안이 있다: 1. 세금 상승 2. 보조금 하향조절 3. 정년 연장 [...] 세금 상 승을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다면 구매력이 2040에 9%에서 15%만큼 삭감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모든 징수제 상승을 피하고 싶다면 정년을 9년 연장하거나 재취업률 절반 하락을 감수해야 한다. [...]

실행될 해결방안은 세금 징수 기간을 늘리고 보조금 저하를 가져 올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가? [...] 더욱 어렵고 무거운 시대를 살아갈 다음 세대에게 지워질 부담을 오늘에 지우는 방안들이다. 오늘날 국가채무를 발생시키고 이에 대한 상 환을 다음 세대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정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리베라시옹에 게재된 엘리 코엔의 글, 2003년 5월 26일

자료2. 스캔. 2007년 국회


p.347

자료3. 스캔. 2006년 1월 빌팽 정부


자료4. 스캔. 10년 간 국가별 채무 상황


자료5. 스캔. 2007년 사회당 후보 세골렌 루아얄과 사회당 수석비서관 프랑수아 올랑드

1988년 의원이었던 세골렌 루아얄과 프랑수아 올랑드는 2007년 사회당 주요 지도자들이었다. 2007년 사회당 대통령 후보 선출은 사회당 내 예비선거로 이루어졌다. 세골렌 루아얄은 도미니크 스트라우스-칸과 로랑 파비우스를 제치고 후보로 선출되었다. 사회당 수석비서관이었던 프랑수아 올랑드는 후보가 아니었다.


자료6. 스캔. 대통령 선거 기권 및 투표율

1. 1965년 이래로 투표율의 변동상황은 어떠한가? 
2. 2007년 선거 시 어떠한 변화가 나타나는가? 


p.348


자료집


자크 시라크

• 1932년 출생한 자크 시라크는 전쟁 중과 전후에 탄생한 1세대 드골주의자에 속하지 않는다. 국립행정학교 출신인 시라크는 조르주 퐁피두의 비호 하에 정계에 입문한다. 1974년 퐁피두의 서거 후 시라크는 드골주의자 후보 자크 샤방-델마를 제치고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의 총리로 임명된다. 공화국연합(RPR)을 창당한 1976년 이래로 시라크는 신드골주의파의 수장이 되어 자신과 자신의 정당을 위해 대통령직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한다.

• 19년 후 대통령직에 오른 후 1984년-1986년, 시라크는 미테랑 1차 동거정부 정부의 총리가 된다. 자크 시라크는 12년 간 대통령, 4년 간 총리직을 맡았다.


자료1. 스캔. 1956년: 알제리 전쟁 시 소위


자료2. 스캔. 1968년: 그르넬 협정 시

왼쪽부터 사회부 장관 장-마르셀 자네, 총리 조르주 퐁피두, 정무차관 자크 시라크, 프랑스 노동 총연맹 비서관 조르주 세기


자료3. 스캔. 1981년: 레알 지구 축소모형을 보는 파리 시장


자료4. 1986년: 소신 피력 연설

수 십년 전부터 [...], 프랑스는 정부의 계획경제를 원했습니다. 경제, 교육, 문화, 연구, 신기술, 환경보호 등 모든 분야에 대해 국민은 정부에게 계획을 요구하였습니다. 거대 계획을 운영하며 숙련된 전문가들의 손에서부터 조금씩 행정사회가 건설되었고 공동 행정사회 또한 건설되었습니다. 이러한 정부 시스템은 품질 또한 놓치지 않았습니다. 평등을 위한 국가의 열망에 대답했습니다. [...] 복지국가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안전에 대한 필요성을 완벽히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중대한 결함이 존재합니다. 정부는 비만으로 인해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p.349


자료5. 스캔. 1992년 6월: 유럽으로 개종

1992년 6월 플랑튀 작품

1978년 유럽에서 시라크는 스스로를 주권론자로 규정했다. 14년 뒤, 시라크는 유럽 건설에 가담하고 찬성표를 얻어낸 마스트리히트 협약 관련 국민투표를 위해 미테랑을 지지했다.


자료6. 1994년: “새로운 프랑스”

프랑스인을 위협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포기의 위험, 노력에 대한 거부의 위험, 능력 부족입니다. 데카당스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새로운 계층으로 구분된 사회에서 새롭고 큰 위험이 다가오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확실한 일자리를 지닌 특권 계층이 있습니다. 일자리를 찾는 기회를 가졌으나 일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이들입니다. 실업 상태에 있지만 살아갈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위기를 모면합니다. 마지막으로 점점 더 그 수가 많아지는 사람들은 바로 희망을 잃고, 다시 일어설 능력을 잃고, 사회와 구조로부터 격리된 소회계층입니다. 다른 이들이 무관심의 시선으로 일관하는 현대시대의 천민입니다. 프랑스 혁명이 있은 지 2세기가 지난 시점에 말입니다!

자크 시라크, <새로운 프랑스>, 닐(Nil) 출판사, 1994년


자료7. 로카르가 본 시라크

대내 정치적인 면에서 시라크는 용인할 수 없는 사회 불평등, 빈곤 강화, 실업률 상승이 자리잡도록 내버려 두었다. 대응을 조금 하기는 했지만, 내 생각에 그는 거시경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것으로 보인다. 감세 정책에 대해서는…나도 감세 정책을 시행했지만 같은 방식은 아니었다. 시라크는 높은 소득세를 납부하는 이들의 세금을 감세했다.

반대로, 대외 정치적인 면에서 시라크는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용기있는 신념을 보였다. 이 점은 모두가 기억할 것이다. [...] [유럽 헌법에 대한] “반대”로 결정이 난다면, 그것은 시라크 인생에서의 크나큰 실패일 것이다. [...]

자크 시라크라는 국가 수장이 열렬한 유럽주의자가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2005년 9월 인터뷰(‘역사’, 2005년 10월)


자료8. 스캔. 1995년, 독실한 유럽주의자 시라크, 독일 수상 헬무트 콜과 함께

스트라스부르 레스토랑에서 그가 좋아했던 소머리고기를 시식하기 전


자료9. 스캔. 프랑스 정지풍자 시사 코미디 인형극 ‘기뇰 드 랭포(Guignols de l’Info)’에서 풍자화 된 시라크 파리 시청 내 명목 상 고용 혐의를 받은(이후 2007년 11월 기소) 시라크는 풍자화의 대상이었다.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어떠한 협상을 의미하는가? (자료2) 이러한 협상은 어떤 맥락에서 진행되었는가

2. 프랑스 정부의 무게에 대해 시라크는 어떻게 분석하는가? (자료4)

3.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가? (자료4)

4. 두 인물의 태도를 설명하시오. (자료5)

5. 자크 시라크는 무엇을 비판하고 있는가? (자료6)

6. 시라크에 대한 로카르의 평가 중 긍정적인 요소는 무엇이며, 부정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자료7)

B. 자료 연관 짓기

7. 유럽에 대한 자크 시라크의 태도 변화를 설명하시오.

C. 작문

8. 자크 시라크의 정치적 사상과 행보 내 드골주의적인 면모는 무엇이 있는가


p.350


자료집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 선거 포스터

• 1945년 이후, 새로운 미디어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포스터는 계속 정치사상, 공약, 메시지를 드러내기에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여겨진다. 잡지를 읽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텔레비전을 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길거리 혹은 선거 광고판에서 포스터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제4공화국 이후 정치적 메시지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냉전 시기 이데올로기 투쟁과 보통선거를 통한 공화국 대통령 당선이라는 선거 캠페인 등을 통해 이미지와 메시지를 더욱 섬세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선거 포스터 구성이 변화되었다. 1970년대부터는 이미지가 텍스트보다 더욱 중요해졌다. 포스터는 유권자들의 시선을 끌어야 했다. 정치는 더 이상 연설 재생산이 아닌 이미지로 행해졌다.

자료1. 스캔. 1946년 국회의원 선거 시 위한 공산당 포스터


자료2. 스캔. 1965년 대통령 선거 시 장 르카뉘에 포스터


자료3. 스캔. 1965년 대통통령 선거 시 프랑수아 미테랑 포스터


자료4. 스캔. 1968년 6월 미술학교 포스터


p.351

자료5. 스캔. 1974년 대통령 선거 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포스터


자료6. 스캔. 1981년 대통령 선거 시 프랑수아 미테랑 포스터


자료7. 스캔. 1986년 국회의원 선거 시 공화국연합(RPR) 포스터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이미지가 소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사진과 대비하여 텍스트의 중요한 점은 무엇인가? (자료1)

2. 이 포스터의 독창적인 면은 무엇인가? (자료2)

3. 슬로건과 장식을 분석하시오(자료3). 미테랑 후보는 어떻게 드골 장군에 반대하고 있는가?

4. 이 포스터에 담긴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시오(자료4). 무엇이 완곡적으로 표현되어 있는가?

5. 인물들의 의상과 태도는 무엇을 상기시키는가? (자료5)

6. 이 포스터에 나타나는 색다른 점은 무엇인가? (자료5) 포스터에 나타나는 새로운 점은 무엇인가?

7. 오른편 배경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료6) 왼편은? 이 포스터에 나타나는 색다른 점은 무엇인가?

8. 빛의 방향을 분석하시오. (자료6) 이 포스터에 사용된 몽타주를 설명하시오.

9. 인물들의 배치와 색감의 선택을 설명하시오. (자료7) 인물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포스터가 어떠한 인상을 주고 있는 가? (자료7)

10. 슬로건은 어떠한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는가? (자료7) B. 자료 연관 짓기

11. 프랑수아 미테랑의 1965년과 1981년의 포스터를 비교하시오. 구성 면에서 어떠한 발전 양상이 보이는가? C. 작문

12. 1945년에서 1980년에 거쳐 어떠한 정치적 메시지 표현의 발전 양상이 드러나는가?


p.352


복습 자료


필수 암기 연도

■ 1981년과 1988년: 프랑수아 미테랑 당선

■ 1986년과 1993년: 1차, 2차 동거정부 정부

■ 1995년과 2002년: 자크 시라크 당선

■ 1997년: 3차 동거정부 정부

■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 당선


전기

장-마리 르펜 (1928년 출생) 국민전선 대표

리오넬 조스팽(1937년 출생) 1997년-2002년 총리

자크 시라크(1932년 출생) 1995년-2007년 공화국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1955년 출생) 2007년 공화국 대통령 당선

필수


1. 교체의 시기 (1981-1986)

■1981년: 좌파의 대통령 선거 승리: “교체”가 이뤄져 프랑수아 미테랑과 피에르 모루아 총리는 개혁을 단행한다(국영화).

■1982년, 임기 초기, 긴축이라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연기 투표로 인하여 국민전선이 35석을 획득하나 우파의 승리를 막지는 못한다(1986).

2. 동거정부 정부 시기 (1986-2002)

■1986-1998: 좌파 대통령과 과반수 우파의 동거시기

■1988년 미테랑 재선: 경제적 어려움(실업)과 정치적 어려움(정치금융 스캔들), 1993년 좌파 패배: 2차 동거정부 정부

■1995년 시라크 당선. 자유개혁 단행하나 1997년 좌파 승리. 1997년 시라크(우파)와 조스팽(좌파)의 3차 동거정부정부 시작: 5년 임기제 제정

■2002: 1차 투표 조스팽 탈락, 시라크 재선. 큰 개혁 없음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우파) 당선. 많은 개혁 단행

혼동하지 않기

제5공화국의 대통령들과 총리들


1958년-2007년 정치권력도 스캔


p.353

사료해설 (14/15)

주제: 1988년 5월 8일 미테랑의 메시지


동포 여러분, 여러분께서 저에게 신뢰를 보내 주시기로 결정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그 동안 7년 간 엄중히 실행해 온 직무를 계속해서 실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공화국의 근본을 엄수하며 일하겠습니다. 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라고 불리는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척을 향한 거부는 계속하여 인류에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과제는 사회적 연대라는 사실을 잊게 하는 많은 근심과 어려움, 불확실이 우리와 우리 사회에 존재합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세계를 넘어, 그리고 유럽을, 유럽의 경제, 기술, 문화를 건설은 프랑스가 지닌 사회 응집력이라는 능력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청년들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우리의 자원입니다. 저는 우리 노력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학교 내의 평등과 현대 사회의 프랑스 기업에게 가장 큰 경쟁력을 가져다 줄 직업능력 교육이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삶이 여기에 달려 있기에, 저는 열정을 다 하여 동포 여러분의 이름으로 가난한 국가들의 발전을 위해 일하고 무장해제와 평화를 이뤄내겠습니다. 매우 시급한 일들이기에 이를 행하는 데 시간을 지체하지 않겠습니다. 이 장대한 시기에서 프랑스를 사랑하고 프랑스를 받듭시다. 공화국 만세, 프랑스 만세!

프랑수아 미테랑의 메시지, 1988년 5월 8일


문제

1. 연설문과 화자를 소개하시오.

2. 이 메시지는 어떠한 상황 이후 전달되었는가?

3. 이 텍스트에 언급된 공화국의 근본요소는 무엇인가? 화자가 이 근본요소를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4. 어떠한 정치적 방향이 이 텍스트에 소개되어 있는가?

5. 이 연설문이 집결을 이루기 위한 연설문임을 설명하시오.

문제해법

A. 개괄적 힌트

연설문의 시기가 중요하다. 1988년과 5월 8일이라는 날짜에 주목하여 생각해야 한다.

B. 질문에 대한 답변 힌트

문제3: 공화국의 가치를 언급하는 텍스트를 참조할 것. 프랑스 상황의 어떠한 양상이(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이 호소에 필수적인지 생각할 것.

문제4: 대내정책과 대외정책의 양상,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분석하고 구분 지을 것.


모의고사


주제: 1995년 알랭 주페의 정책

1995년 봄의 선택으로 다시 돌아와 내가 속한 과반수 정당의 거물들을 꿈꾸는 “다른 정책”을 실행해야 할까? 15년 간 프랑스 경제를 망쳐 놓은, 우리의 아이들이 수용할 수 없는 적자와 지출을 쌓는 위험을 감수하며 “공공지출 재구축” 낡은 방법들을 되살려야 할까? 기업 파산을 감수하고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저해하는 위협을 가져오는 해고 금지를 실시하고, 주 39시간 의무 노동제와 같은 수준의 실업을 양산하는 주 35시간 근무제를 실시해야 할까?

나는 이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를 쇠락의 길로 이끄는 이 길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더욱 높이 가기를 원한다. 더욱 낮은 곳이 아닌 더욱 높은 곳으로 가기를 원한다. [...]

나는 사회 연대의 책임감을 신뢰한다. 오는 몇 주간 실행될 “나의 순례”라고도 말할 수 있을 나의 우선 과제를 신뢰한다. 그것이 바로 “창업”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존재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리고 젊은이보다 더 젊은 이들은 창업을 하고 싶어 한다. 매 해 많은 수의 기업이 설립되고 있다. 많은 수의 기업이 사라지고 있기도 하다. 창업의 순간, 창업 계획을 잘 확인하며 창업자에게 조언을 해 주며 창업자를 도와야 한다. 또한 기존 은행이 대출하여 주지 않을 자금을 제공하여야 한다.

알랭 주페, <우리들 간의 이야기>, 닐(Nil) 출판사, 1996년

문제

1. 저자를 소개하시오. 1995년 저자가 맡은 직위는 무엇인가?

2. 본문에서 알랭 주페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3. 이 선택을 어떻게 특징지을 수 있는가?

4. “다른 정책”을 설명하시오. 다른 정책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설명하시오. 누가 이 정책을 실시했는가?

5. 이 선택의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p.354


전체자료 연구 (15/17)

주제: 1981년 이래로 프랑스를 특징짓는 큰 개혁에는 무엇이 있는가?


문제

1부

1. 1981년-1995년 사이 프랑수아 미테랑 후보는 제도, 경제, 사회이익, 정치적 삶에 어떠한 변화를 약속하였고 실행하였는가? 1995년 이후에는 어떠하였는가?

2. 국영화를 찬성하는 이는 누구인가? (자료2) 민영화에 찬성하는 이는 누구인가? 이 사항에 관련하여 어떠한 주장들이 펼쳐졌는가?

3. 본문의 출처를 설명하시오. (자료4) 정년 개혁에 관련하여 어떠한 주장들이 펼쳐졌는가?

4. 1981년-2008년 사이 어떠한 모순적인 개혁 계획이 이루어졌는가?

5. 1990년대 고려 가능한 큰 개혁들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6. 이 시위자들은 어떠한 개혁과 어떠한 정부에 반대하는가? (자료5) 반대 이유는 무엇인가?

2부

1차 질문의 답변들과 개인적 지식을 동원하여 다음의 질문에 대하여 작문하시오: 1981년 이래로 프랑스를 특징짓는 큰 개혁에는 무엇이 있는가?

자료1. 미테랑 후보의 110가지 공약 중 일부

19. 민주화 및 지방화 계획은 경제 개발의 내용에 포함이 될 것입니다.

20. 투기에 대항하여 프랑화는 보호될 것입니다. [...]

21. 공동 강령 및 사회당 강령에 명시된 철강업, 군수업, 공공 금융업 등 9개 공역 국영화. 신용대출 및 보험 국영화 또 한 완성될 것입니다.

22. 정규직 고용 계약이 노동 조건의 기본으로 재정립될 것입니다.

23. 근무시간은 점진적으로 35시간까지 단축될 것입니다. [...]

31. 최저임금이 인상될 것입니다 [...].

32. 생활 필수품에 대한 부가가치세율이 0으로 지정될 것입니다. [...] 새로운 사회 보장 제도가 아동 당 일일 가족지원금을 대체할 것입니다.

34. 거액 재산에 대한 세금이 제정될 것입니다 [...].

35. 간이 납부자에 대한 직접세가 경감되고, 고소득자에 대한 직접세가 가중될 것입니다.

45. 대통령 임기는 5년 임기 1회 재선, 또는 7년 임기 재선 불가로 제정될 것입니다.

47. 국회의원 선거 시 비례대표제가 제정될 것입니다 [...]. 30%의 여성 의원 비율이 할당될 것입니다. [...]

49. 청렴한 공직생활이 실행될 것입니다 [...].

50. 공인 관련 법적 사건이 있을 시 정의에 의하여 심판할 것입니다. [...]

65. 남녀 임금 평등이 보장될 것입니다. [...]

82. 남성 정년 퇴직은 60세부터, 여성은 55세부터 가능할 것입니다. [...]

90. 공공 통합 및 세속분리 교육이 대공공 서비스로 지정될 것입니다 [...].

91. 모든 이에게 교육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 역사 교육과 철학 교육이 발전될 것입니다.

105. 독자적 핵억제력 전략을 발전시키고 군복무 기간이 6개월로 단축될 것입니다.


자료2. 국영화와 민영화

우리는 단순하게, 이데올로기이든 아니든, 경제 필수 분야 또는 국민의 생활 필수품과 국가 안전 필수품 분야 내 경쟁을 막는 독점 기업을 국영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드골 장군은 1945년 대형 은형과 보험회사, 가스회사, 전기회사, 석탄회사, 르노 등을 국영화했다. 그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는 국영기업들이 우리 경제를 이끌고, 투자를 하고, 수출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바로 산업 도약의 원천이다.

1981년 7월 9일 독일 시사지 ‘스테른’과의 인터뷰, 프랑수아 미테랑

1981년 12월 18일: 국영화법 투표: 9개 기업, 36개 은행, 2개 금융기업.

1986년 7월 31일: 민영화법 투표

민영화는 산업, 은행, 보험분야 프랑스 기업들이 외국 경쟁사들과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는 주도권과 유연성을 지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경제부 장관 에두아르 발라두르, <더욱 강한 프랑스>, 1988년 3월 16일


p.355 자료3. 두 총리의 의회 연설 저는 남녀간의 법적 평등을 위한 헌법개정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또한, 대통령의 임기도 5년으로 정할 것을 제안합니다. 또, 임금의 삭감 없이 노동시간을 줄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경제 발전이자 사회적 발전입니다. 이는 많은 일자리의 창출도 가능케 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당 노동시간을 39시간에서 35시간으로 줄여야 합니다. 그리고, 시민들이 스스로를 건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빈곤층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더 나은 의료보험체계가 필요합니다.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정책이 시행 될 것입니다. 정부는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고 지휘합니다. 국무총리는 정부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이것이 개정을 제안하는 헌법의 명확하고 상세한 조항입니다. 이 제안들은 실행에 옮겨질 것입니다. 의회에서 리오넬 조스팽의 연설, 1997년 6월 16일. 80년 대초의 중대한 시행착오에 더하여 나타난 88-90년대의 시행착오로 인해, 우리는 그 여파를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 시행착오들은 경제적 바탕을 마련하지 않고 사회적 발전을 이루고자 했기에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성장기의 프랑스 사회를 개혁할 역사적 기회를 놓쳤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국가적 위기를 겪었습니다. 프랑스는 더 이상 사회연대와 질서의 수호자로써의 역할을 만족스럽게 해내고 있지 못합니다. 사법과 치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국가로서의 책임을 지는데 난항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 이 야심 찬 개혁안을 실행시키기 위해서는 공권력의 응집과 효율성, 국가기관이 각 기관의 정신과 규범에 부합하여 기능함으로써 얻어지는 능률과 단결이 필요합니다. 즉, 여러분의 신뢰에 기반한 정부의 기능은 일반적으로, 스스로 성장할 능력이 있습니다. 헌법에 따르면, 정부란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고 지휘하는 기관’이고, 정부를 지휘하는 것은 여러분입니다. 의회에서 에두아르 발라뒤르의 연설, 1993년 4월 8일. 자료4. 퇴직제도 개혁 이 개혁안은 공무원, 사기업 근로자, 그리고 개인사업자(예술가, 상인, 기업가, 프리랜서와 농장주)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왜 개혁이 필요한가? 현재 프랑스의 은퇴제도는 사회적 재분배에 기반하고 있다. 사회적 재분배란, 세대 간의 연대라고 할 수 있다. 즉, 은퇴자들의 연금을 위한 비용을 경제활동인구들이 분담하는 것이다. 오늘날 어떠한 대책도 마련되지 않는다면, 50년 전에 마련된 이 사회적 재분배에 기반한 은퇴제도는 2006년부터 점점 더 심각한 적자문제를 겪게 될 것이다. 두 가지 주요 근거가 있다. 첫 번째는, 점점 더 많은 전후세대가 은퇴 연령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며, 기대수명이 매년 한달 반정도 씩 계속 연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 은퇴자 1인당 부양 인구의 변화: 1960 은퇴자 1명당 4명의 경제활동 인구 2000 은퇴자 1명당 2명의 경제활동인구 2040 은퇴자 1명당 1명의 경제활동인구

출처: 은퇴자대책위원회(COR)

어떻게 개혁을 해야하는가? 개혁 법안에 따른 은퇴연령은 사기업 근로자에 대해서는 60세, 공무원은 지위에 따라 50,55,60세로 유지될 것이다. 전체연금 수령을 위해 사회 분담금을 불입해야 하는 기한은, 2008년에 모든 시민에 대해 40세로 정해졌다. 2008년에 상황이 명료해질 것으로 보인다. 경제, 재정, 인구 상황에 따라, 사회분담금 불입기한이 2009년부터 1년에 3개월씩 점차적으로 늘어나, 2012년에는 41세로 연장될 것으로 보인다. 민간부문에서 이른 나이부터 일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60세 이전에 은퇴하게 될 것이다. 매년 물가상승을 감안하여 연금이 책정되므로 은퇴자들의 구매력은 유지될 것이다. 더 오래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퇴직금을 수령하게 된다. 매년 3%의 추가적인 ‘초과분담금’을 수령하게 될 것이다. -‘은퇴자의 미래를 위한 개혁안’, 프랑스 정부 웹사이트, 2003년 2월. 자료5. 스캔. 2003년 5월 시위


제 18 장: 1945년 이후 프랑스의 사회경제적 혼란

p.356

독일로부터의 해방 이후, 프랑스는 소위 ‘영광의 30년’이라 불리는 30년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 동안, 프랑스 사회는 역사상 가장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 성장이 둔화되면서, 프랑스는 사회적 변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혼란에 빠지게 된다.

‘영광의 30년’은 프랑스 사회에 어떤 혼란을 가져왔을까?

경제성장의 둔화는 프랑스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자료1. 과거 프랑스의 전원적 풍경

스캔. 1950년대초 첫 ‘2마력 자동차’.

“18세기 농업혁명으로 프랑스 농촌지역이 개발되기까지는 1세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당시 농업혁명은 산업의 형태가 아직 변화하지 않았던 농촌의 흐름을 따라 이루어졌다. 농업혁명으로 인해 여러 가지 사회적 변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 그러나 농촌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특성들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앙리 망드라스(Henri Mendras), <농민의 종말>, 아르망 콜랭 출판사, 1967.


p.357


자료2. 빠른 근대화를 겪다

드골파의 선전 포스터, 1958년.

포스터 상단: “진전은 시작되었다. 어떤 것도 진전을 막을 수 없다.” (에밀 졸라)

하단: 노력과 보상에 찬성합니다

“다시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희생과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없다면, 우리나라는 끊임없는 위기와 부진함 속에서 뒤쳐진 채로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경제부흥을 위한 거대한 국영기업을 세우게 된다면, 이야말로 우리가 정상으로 향하는 큰 한걸음이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앞으로 다가올 새 시대에 모든 여성, 남성 시민 여러분들께 약속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1958년 12월 28일, TV와 라디오로 방송된 드골의 연설.


p.358


1) 변혁기의 사회

A.고도 성장의 자극제 자료3, 6

■ 1964년 2월, 미국의 잡지 뉴스위크(Newsweek)에는 ‘위대함으로의 회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오늘날의 프랑스는 1940년대말~ 1950년대초의 프랑스에 비하면 상전벽해라고 할 수 있다.” 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해방 이후부터, 프랑스는 그 역사상 가장 빠른 사회경제적 성장을 이룩한다. 그 성장세는 1973년 1차 오일쇼크 때까지 이어진다.

■ 1979년, 경제학자 장 푸라스티에(Jean Fourastié)는 이 30년의 고도성장기를 ‘영광의 30년’이라 칭한다. 이러한 고도성장과 변혁, 그 중에서도 지속적인 경제성장에는 여러 원인이 있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딛고 일어나자, 프랑스의 경제는 연 평균 약 5%의 성장률을 보이며 꾸준하고 강한 성장을 보인다. 1963년과 1973년 사이에 성장률은 무려 6.5%에 달하게 된다.

B. 한층 젊어진 프랑스 자료5

■ 동시에, 프랑스 인구 역시 급성장한다. 1942년에 출산장려책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 1964년까지 프랑스의 여성1인당 출산율은 항상 2.5명 이상을 유지했으며, 해방 직후 몇 년간의 베이비붐으로 그 절정에 달하게 된다.

■ 이 베이비붐 세대에 속하는 여성들이 1960년 중반부터 성인이 되면서, 인구는 계속해서 증가하게 되었다. 출산율의 저하는 아주 늦게 나타나는데, 1970년 중반이 되어서야 출산율이 저하가 명확히 나타난다. 따라서 인구의 자연증감률은 장기간 동안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2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연간 약 8%를 유지했다).

C. 농민의 종말 자료1, 2, 4, 7

■ 1967년, 사회학자 앙리 망드라스(Henri Mendras)는 파격적인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 바로 <농민의 종말>이었다. 그의 저서는 극단적으로 빠른 사회적 변화에 대해 다루었다. 1946년의 집계에 따르면 농촌인구는 프랑스 전체인구의 47%였다. 하지만 1968년에는 34%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유일한 경제활동인구라고 할 수 있었던 농민들에게 이는 아주 민감할 수 밖에 없는 현상이었다. 1946년에 농업은 전체 생산의 36%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 수치는 1968년에는 15%로 떨어지게 되었다. 당시 농업종사자들의 숫자는 200만을 채 넘기지 못하였다. 1945년에는 750만명에 달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숫자라 할 수 있다.

■ 농촌사회의 변화는 단지 수치적인 측면에 국한되지 않았다. 삶의 방식과 기술적 환경 역시 동일한 시기 동안 크게 변화했다. 이 시기를 ‘농촌 혁명(Revolution in the countryside)’이라 부르기도 한다. 기계화를 통해, 농산물 생산량의 증가와 농법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를테면, 농촌에서 트랙터를 흔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또, 콤바인은 수확을 훨씬 손쉽게 만들어 주었지만 노동력의 절감을 가져오기도 했다. 과거에는 수확을 하기 위해서 수십 명의 노동력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콤바인을 운전할 한 명만 필요하게 되었다. 이렇게 농촌사회는 점점 사라져가게 되었다. 농업관련종사자들과 계절성 노동자들, 그리고 소규모 농민들의 사회는 현대적인 자원분배체계에 거의 편입되지 못했고, 여전히 자급자족으로 유지되고 있다.

■ 한편 일상생활 측면에서, 농촌의 거주환경, 위생, 의료시스템은 많은 발전을 거둔다. 휴대전화와 자동차의 사용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TV가 보편화되면서, 1960년대 농촌지역의 사회문화적 격차가 줄어들었다.


자료1. 도시와 농촌의 인구


자료2. 1945-1975년의 생 클레망(Saint-Clément) 마을

전쟁 이후, 거의 모든 사람들은 포도농사에 의존했다. 한 경작지(평균 10-20헥타르)마다 약 2명에서 4명의 농민들이 일했고, 지주가 그들에게 세를 준 집에서 생활하였다. 장제사가 목요일마다 마을에 오면, 그에게 노새를 데려가 편자를 박았다. 토요일에는 마구제조인이나 소미에르(Sommières, 프랑스 남부도시)에 사는 통제조인의 가게에 갔다. 꼬박 하루가 걸리는 일이다… 포도수확철에는, 25-30명의 세벤(Cévennes)이나 로제르(Lozère) 주민들이 내려왔다. 매일 밤마다 아코디언을 불며 잔치를 했다. 이런 분위기는 60년대가 되면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60년대에는 그들 대신 스페인사람들이 건당이나 일당으로 돈을 받으며 일했다. 그들은 일을 한 후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 춤출 힘이 없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마을의 카페도 문을 닫았다. 영세 상인이나 일꾼들은 기름짜는 방앗간 앞에서 그날그날의 소식을 교환해야만 했다. 75년대에는, 마지막 양떼가 사라지게 되었다. 농민들이 양떼를 다 팔아버린 것이다. 양들의 냄새가 주민들을 거슬리게 했었는지.. 1980년에는 다시 15명 가량의 포도농사꾼들이 나타났다. 2005년에는 5명만이 남았다. 현실적으로, 농사로 꾸준히 소득을 올리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자동화 되어 버렸다. 방앗간에서도 더 이상 기름을 짜지 않았다. 2006년에는 초등학교가 문을 닫았다. 생 클레망 마을은 제노바와 바르셀로나를 잇는 대서양 인근의 거대한 도시지역을 닮아가게 될 것이다.

1.위 지문에서 1945년 이후의 어떠한 역사적 시기와 단계가 드러나 있는가?
2.이 시기에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가?


p.359

자료3. 1946년도와 1975년도의 프랑스


자료4. 스캔. 크레디 아그리콜(Crédit agricole)의 광고포스터

포스터 상단 : 전국농업신용금고/행복한 1953년

포스터 하단 : 7,11,15년 동안 더 높은 이율을/농업의 발전을 위하여


자료5. 스캔. ‘영광의 30년’ 동안의 인구성장

Y축 : 출생인구, 10만 단위

베이비붐/베이비붐 세대가 혼인연령에 다다르는 시점


자료6. 장 푸라스티에가 말하는 ‘영광의 30년’

1945년과 1975년을 나누는 30년의 기간을 ‘영광의 30년’ 이라 칭하는 것은, 그 기간이 프랑스인들의 삶의 방식과 수준이 증진된 시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증진이 다른 어떠한 분야, 이를테면 철학적 고찰이나 예술, 문학, 정신적 삶, 인구, 생명력, 미덕과 같은 분야에서는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세계 2차대전 때보다도 우리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번영을 위해, 특히 경제적 번영을 위해 우리의 국민성을 재정비하고 사회적 합의를 일군 것이 아니었다.

장 푸라스티에(Jean Fourastié), <영광의 30년 혹은 1946-1975년의 사이의 보이지 않는 혁명>, 파야르 출판사, 1979.

1. 글쓴이는 어떤 분야의 ‘영광의 30년’에 대해 다루고 있는가?
2. 위 글에 나타난 ‘영광의 30년’이라는 표현에는 어떤 의미적 제약이 있는가?
3. 마지막 문장에서, 글쓴이는 프랑스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는가? 

자료7. 드골이 본 프랑스

우리의 유서 깊고 역사가 오랜 도시들은, 새로이 탈바꿈 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파리의 경우에는 [...] 복원된 기념물들 주위에 자동차들이 넘쳐흐르고, 3개의 고속도로가 뚫렸으며, 외곽도로로 둘러싸여 있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축건물들의 벽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동전에는 양면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산업발전은 필연적으로, 농업의 비중의 감소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우선 우리의 수도에 대해 말을 하자면, 파리는 앞으로도 국가기구의 거점도시이자 그 주 활동지가 될 것이며, 또한 과학과 예술, 노동, 상업 활동을 위한 최고의 장소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근본, 국민의 모태, 제도의 바탕이자 조국을 위한 저의 공약입니다.

사실상 프랑스가 농업에 의존하는 시기는 끝났습니다. 농민이 그 스스로나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한줌의 밭을 일구고, 여남은 작물로 다른 시민을 먹여 살리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기계화가 농촌에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고대부터 이어져오던 균형이 흔들리고, 더 많은 수확을 하게 되었고, 따라서 더 많은 생산물을 축적하게 되었으며, 도처에서 재화가 생산되고 또한 새로운 욕구가 생겨났습니다. [...] 외국 상품들의 수입을 바라게 되었으며, 그에 대한 급부로 우리는 더욱 질 좋은 상품들을 생산해야만 합니다. 이제, 농업에는 선택, 집중, 판매 라는 시장의 법칙이 적용될 것입니다.

샤를 드골, <1958-1962 희망의 기억들(Mémoires d’espoir)>, 플롱 출판사, 1962.

1. 세 번째 문단에서 어떠한 상황이 묘사되어있는가?
2. 첫 번째와 네 번째 문단에 나타난 변화는 무엇인가?
3. 위 글을 읽고,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p.360

자료집


베이비붐 세대 

1945년, 드골 장군은 향후 10년 간 ‘1200만 명의 신생아’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출산을 장려했다. 그의 바람은 해방 이후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이 기간 동안 출산율이 크게 증가한다. 1939년에 612,000명, 1946년에는 무려 840,000명의 신생아가 탄생했다.

이러한 출산율 증가세는 계속 되어, 프랑스 인구구조는 획기적으로 바뀌게 된다. 1968년, 20세 미만, 그 중에서도 16-24세 인구가 프랑스 전체인구의 1/3에 달했다. 이들이 바로 베이비붐 세대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인구는 800만명 이상에, 프랑스 전체 인구의 16.1%를 차지했다.

베이비붐 세대는 변혁의 시기였던 ‘영광의 30년’의 한 가운데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베이비붐 이전의 어떠한 세대도, 이 정도로 급격한 변화를 겪은 적이 없었다.

자료1. 스캔. 1945년의 출산율 장려 선전 포스터

상단 : 아이가 없으면 프랑스의 미래도 없다.

중간 : 프랑스의 번영을 위하여

하단 : 인구감소 대책 연합에 가입하세요 /1896년 창립


자료2. ‘초등학교 졸업장의 나라 프랑스’의 종말

전후시기에는 출산장려정책으로 인해 더 많은 수의 젊은이들이 태어났는데, 이들은 이전보다 훨씬 긴 교육기간을 거치게 되었다. [...] 양차대전 사이의 ’취학(就學) 인구’는 초등교육을 마친 500만의 인구 중에서도 10%, 즉 50만명 밖에 되지 않았다. 1960년대 중반에는, 기술교육을 받는 학생들을 제외하고도 그 수가 거의 200만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공립교육기관이 사실상 청소년들의 일상과 친교활동의 중심이 되면서, 교육기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는 문화적 변천에 대한 분석을 할 수 없는 것이다.

[...] 1966년에는 1,160만명이 초중고등학교 및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60년에 150만명이 입학한 것에 비해 크게 늘어난 숫자였다. 1950년 이후 중고등학교의 정원만 세배가 늘어났다. [...] 65%의 젊은 프랑스 남녀는 중등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 이후로, ‘졸업장’의 시대는 끝나게 되었다. 졸업장은 이후 25년이 더 지나, 1989년 8월 28일자 법령으로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되기 전까지는 계속 존재했다. 하지만, 1963년부터 중학교 진학이 보편화되고 늘어나기 전까지 졸업시험이라는 형식은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

또, 베이비붐 세대는 모든 변화과정의 참여자였다. 베이비붐 세대의 교육수준이 올라가기 시작했던 1947년도에 중학교 입학시험이 부활하면서, 초등학교 졸업장은 중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되어버렸다.

장-프랑수아 시리넬리(Jean-François Sirinelli), <베이비붐 세대>, 파야르 출판사, 2003

자료3. 1946년부터 75년까지의 프랑스인


자료4. 스캔. 1962년 연령별 인구 피라미드


p.361

자료5. 스캔. 베이비붐 세대의 아이들


자료6. ‘또래친구’의 시기

대중매체(신문, 라디오, TV, 영화)는 롤모델과 우상, 여러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며, 이 새로운 세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첫 번째로, 영화를 통해 청소년들의 새로운 우상이 나타났다. 제임스 딘과 같은 이미지를 가진 배우들이었다. 두 번째로는 록 음악이 대중문화의 기폭제 역할을 한다. 이 모든 과정에는 대중매체가 연관되어 있었다. 또, 엘비스 프레슬리가 영화계의 톱스타로 등극했다.[...]

이 세대는 다음과 같은 특징으로 정의된다.

- 소위 ‘꼰대’들이 젊은 층을 따라하려 할 때마다 유행하는 패션이 바뀌었다. 청바지, 폴로티셔츠, 점퍼와 가죽 조끼, 프린트 티셔츠, 자수가 놓인 셔츠가 대표적인 예이다. [...] - 전축, 기타, 트랜지스터 라디오, 레코드 판 수집, 사진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 아주 거친 비속어나, 자신들 사이에서만 암호처럼 은어를 사용하였다. - 깜짝 파티를 열거나 무도회장에 다니면서, 자신들의 모임행사를 열었다.


자료7. 스캔. 조니 홀리데이, 실비 바르탕과 에디 미첼의 데뷔. 골프-드루오(Golf-Drouot) 클럽, 1964.

가장 오른쪽에 젊은 시절의 자크 뒤트롱크(Jacques Dutronc)와 프랑스 락밴드 ‘사이클론즈(Cyclones)’의 기타리스트가 보인다.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자료1에 나타난 ‘인구감소’ 에 대해 설명하시오. 프랑스인들의 출산을 독려하기 위한 논거들은 무엇이었는가?

2. 베이비붐 세대는 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베이비붐 세대로 인해 프랑스 사회가 겪은 주요 변화들에는 무엇이 있는지 쓰시오.

3. 자료3에 나타난 혼인율과 사망률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가? 각 시기마다 나타난 여성 100명당 출산율의 영향은?

4. 자료4의 인구 피라미드에서 베이비붐 세대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5. 자료6에 묘사된 베이비붐 세대의 문화활동에 영향을 준 외부요인은?

6. 자료7에 묘사된 문화활동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B. 자료 연관 짓기

7. 자료 2,3,4,5,6에 나타난 베이비붐 세대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C. 작문

8. 이 자료집에 나타난 베이비붐 세대의 특징을 서술하시오.


p.362


2) 풍요로운 사회

A.‘새로운 노동계급’ 자료1, 3

■ 이 시기에 경제활동인구에서 노동자의 비중이 상승하기 시작했는데, 1946년에는 30%, 1968년에는 39%으로 늘어났다. 1960년대에는 3개의 거대노조인 노동총동맹(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과 프랑스민주노동동맹(Confédération française et démocratique des travailleurs), 노동자의 힘(Force ouvrière)이 등장하여 노동자들을 대변하고 경제성장의 결실의 몫을 요구하였다.

■ 그 후에, 경제활동인구에서 노동자의 비중은 더 이상 늘지 않았고, 노동자계층의 구성에 변화가 생겼다. 일단, 노동의 분업화가 일어나면서 일반기능공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일반기능공은 생산공정의 아주 작은 일부분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반면, 숙련공과 현장감독의 경우에는 삶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된다. 바로 중산층에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신노동계층’이라 부른다.

B. 두터워진 중산층 자료2

■ 중산층의 급격한 확대는 농촌지역의 쇠퇴와 더불어 1945년 이후 프랑스 사회의 가장 중요한 변혁이라 할 수 있다. 기술공, 근로자와 기업의 간부들이 경제활동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빠르게 증가했다. 사무직 근로자의 숫자는 1954년과 1975년 사이 2배로 증가하였다. 특히 3차 산업 분야에서 1946년에는 34%, 1975년에는 51%로, 기술공, 근로자, 간부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 중 기업의 간부들은 ‘영광의 30년’의 상징이 된다.

■ 3차산업 종사자들과 ‘신노동계층’이 두터운 중산계층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 현상을 2가지 요소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 월급노동자의 확대: 1970년에 월급제가 보편화되었다. 이 시기에 약 80%의 노동자는 월급을 받았다.

- 프랑스 사회의 풍요: 프랑스인들이 공통적인 꿈을 갖게 되었다. 바로 여가와 중산층의 소비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C. 생활수준의 상승 자료4,5,6

■ 195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인들의 생활 수준은 양차대전 사이의 시기를 방불케 했다. 가전기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안락한 삶과도 거리가 있었다. 1950년대 초가 되어서야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한다. 1950년과 1954년 사이에 주택의 숫자가 2배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 시기에 노숙자의 수는 여전히 많았다. 1954년 혹한기 동안, 피에르 신부(Abbé Pierre)의 노숙자구제운동은 주택 부족문제의 심각성을 잘 보여주었다.

■ 1950년대 중반부터는 약 15년에 걸친 변화가 일어났다. 프랑스인들이 겪었던 가장 빠르고 눈부신 경제적 풍요로 나타난 변화였다. 1인당 연소득이 1953년에서 1968년 사이에 2배로 증가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득의 증가는 더욱 가속화되었고, 이 상승세는 1973년 원유가격 상승 전까지 계속되었다.

■ 생활수준의 상승은 가족 단위의 소비를 늘렸다. 또 다른 사회변동이었던 여성의 급격한 노동시장 진출로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가족의 소비 역시 점점 더 많아졌다. 프랑스인들의 소득에서 식비가 아닌 지출이 점점 더 커졌다. 1954년에 가계지출에서 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40%였지만, 1974년에는 25%까지 떨어졌다.

■ 그러나, 이러한 풍요가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빈곤층은 근근이 삶을 유지하고 있었다. 노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적은 퇴직금뿐이었다. 또, 주로 기피직종에서 일하던 이민노동자들은 대도시 변두리의 비위생적이고 불편한 판자촌에서 거주했다.

자료1. ‘신노동계층’

노동계층의 일상생활은 더 이상 사회학적으로 구분되는 삶의 양식이 아니게 되었다. 노동계층은 그 동안의 역사적 과정에서 얻은 계층 특징의 대부분을 잃었다. 노동자들의 거주지역 역시 기계조립공이나 사장, 기술자, 중간관리자들이 공동 소유하는 건물에 자리를 내주며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결국에는 ‘붉은 변두리(banlieue rouge)’ 라 불리는 지역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코트다쥐르(Côte d’azur) 지역과 그리스의 시칠리아 섬의 리조트에는 젊은 금속가공업자들이 기업중역들의 딸들과 ‘타히티풍’의 방갈로에서 함께 휴가를 보냈다. 그들은 똑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리듬에 춤을 추었다. 숙련공, 기술 간부들, 서비스 산업 종사자들 그리고 프리랜서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의 교류는 사회의 동질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노동계층은 따로 구분되어 살지 않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산업화 초기에는 삶의 질,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것을 숨겼지만, 이제는 숨기지 않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이제 더 이상 공장에서 나올 때의 기분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세르주 말레(Serge Mallet), 사회학자, <신노동계층>, 1963.

1. 위 지문이 쓰인 시기는 언제인가?
2. 어떠한 사회적 변화가 두드러지는가?
3. 노동계층의 ‘그 동안의 역사적 과정’과 비교하여 위 지문에 나타난 사회적 변화가 보이는 특이한 점은 무엇인가?

자료2. 경제활동인구의 변천

1. 가장 큰 변화를 겪은 분야는 무엇인가?
2. 공업 및 건축, 서비스 분야에서 나타난 노동자 분포의 차이를 각각 설명하시오.


p.363

자료3. 스캔.1952년 르노 4CV 모델의 조립공정


자료4. 스캔. 1960년대의 상징과 같은 전축의 브랜드 광고

기쁨을 가져다 드립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디자인의 전축.

자료5. ‘영광의 30년’말의 번영

삶은 어떻게 향유하는 것입니까? 가장 흔한 방법은 내구재나 내구성이 있는 장비를 많이 소유하는 것입니다. 우리 프랑스인들에게 친숙한 자동차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늘날, 개인이 소유한 자동차의 수는 1,100만대에 달합니다. 세 가정 중 두 가정은 자가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과 10년 전만해도 세 가정 중 한 가정만이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세탁기의 경우, [...] 약 1000만 대를 소유하고 있는데, 1961년에 비해 2.5배가 늘어난 수치입니다. 라디오 수신기를 보면, 1800만대가 보급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한 가정이 한 대 이상의 수신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수치들은 모든 프랑스인, 즉 모든 노동자를 대상으로 얻은 것입니다. 이를 보고 삶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더 놀라운 것은, 같은 시기에 시간당 임금의 구매력, 실질구매력은 물가상승과 함께 50%가 상승하였다는 것입니다. 같은 시기에, 상장회사들이 발행한 주식의 가치는 절하된 프랑 기준으로 17%가 하락했는데 이것은 자본가들을 위한 노동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까?

조르주 퐁피두, 1972년 3월 16일 기자회견.

1. 위 지문 연설의 주체는 누구인가? 연설 시점의 정황은 어떠한가? 
2. ‘구매력’이란 무엇인가?
3. 위 지문의 마지막 발화의 대상은 누구인가?


자료6. 스캔. 가계소비

1. 위 도표를 설명하시오
2. 1949년과 1974년 사이에 어떤 큰 변화가 있었는가?


p.364

자료집


이민


19세기 후반의 프랑스가 그랬던 것처럼, 이민 인구가 많은 나라에서는, 수많은 외국인 인구로 인해 출생, 지리적 위치, 법률, 사회문화와 관련된 여러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 인근 국가로부터의 이민을 살펴보면, 프랑스에 양차대전 사이의 시기에 중앙유럽국가로부터의 이민이 증가했다. 1945년 이후 마그렙(모로코•튀니지•알제리를 포함하는 북아프리카 지방) 출신 인구의 유입과 최근에는 사하라이남아프리카 지역의 이민자가 유입되고 있다. 20세기 후반부에는 프랑스는 이민문제를 우려하여, 이민유입인구의 신분과 이민절차에 관련된 관련 기초 제도를 마련했다. 1945년 11월부터, 프랑스 정부는 이민에 관련된 세부사항을 정하는 명령을 내린다.

법률 조항을 중심으로 이민자들의 지위와 합법적 이민요건이 규정되었다. 하지만 수십 년에 걸쳐 이 법안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프랑스 공화국의 가치와 원칙, 즉 이민자들의 프랑스 사회, 문화에 대한 적응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자료1. 1945년의 이민과 귀화

유학생에게만 귀화를 허용하는 것은 실정에 맞지 않다고 보입니다. 개인의 선택보다 인종구성, 인구, 지리, 직업 관련 분야의 국익을 우선하는 것이 알맞습니다.

우선, 인종구성의 측면에서 지중해 연안과 아시아인구의 유입을 제한하는 것이 좋습니다. 미국처럼 엄격한 쿼터제를 도입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북유럽 출신(벨기에, 스위스, 네덜란드, 덴마크, 영국, 독일) 이민자들의 귀화를 우선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또, 직업적 측면에서 프랑스에는 생산에 기여할 수 있는 노동자들이 특히 필요합니다. 농업종사자, 광업종사자, 건설업종사자와 같은 노동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편, 이민자 동화에 대한 국가의 권력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상업이나 은행업 같은 개인사업직종이 외국인들에게 폭넓게 개방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외국인들이 프랑스에 지식적,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더라도 그들만의 배타적인 특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직종 종사자들의 귀화는 제한하는 편이 이롭습니다. 인구통계적 측면에서는, 젊은이들과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을 귀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법무부장관에서 보내는 드골 대통령의 편지, 1945년 6월 12일


자료2. 극우정당 국민전선(Front National)의 포스터, 1980년 11월.

스캔

150만의 실업자, 그것은 150만의 이민자가 있다는 것! 프랑스와 프랑스인이 우선이다! CLP(르펜 위원회)


어휘

Acculturation(문화적응) : 정복, 지배, 이민의 이유로 인구를 구성하는 인종이나 민족의 문화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말한다.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다. ‘어딘가를 향하여’라는 뜻이 있는 ad와 ‘문화’의 뜻인 cultura가 합쳐진 단어이다. 1880년 인류학자들에 의해 미국에서 처음 생겨난 용어이다. 문화적응은 두 다른 문화권 출신의 인구간의 접촉이 있을 때 나타난다. 한 문화가 다른 문화에 흡수되는 것은 문화동화라 부른다.

자료3. 스캔. 스포츠를 통한 화합. 레몽 코파체프스키(Raymond Kopaszewski), 하산 아케스비(Hassan Akesbi)와 폴란드 이민자의 아들, 1959년 모로코 출생.

스포츠의 창(Le miroir des sports)

랭스(Reims)와 님(Nimes)의 미래는 이들에게 걸려있다!

R.kopa 동점골(15’)/H.Akesbi, 결승골(56’)

p.365

자료4. 통계자료


자료5. 스캔. 외국인 인구의 출신 (위부터)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폴란드,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기타 아프리카인, 터키, 기타 아시아인, 기타 국적


자료6. 이민자 출신의 두 남성 정치인

파트릭 드브지앙(Patrick Devedjian)

저는 아르메니아계 프랑스인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1919년에 프랑스로 탈출하셨죠. 어머니는 프랑스인이지만, 아버지께서는 귀화를 결코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일생동안, OFRA(프랑스 난민 및 무국적자 사무소) 카드를 늘 소지하고 다니셨죠 […]. 저는 그 사실이 너무나 싫어서, 더욱 프랑스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제 생각에 저의 아버지는 프랑스를 위해 참전했던 형제들의 군적서류를 보고 큰 충격을 받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 서류에는 붉은 인장이 찍혀있었는데, 이 서류는 대상자에게 프랑스국적을 취득할 권리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내용에 대해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그렇게 제가 저희 집안의 첫 프랑스 남자가 되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프랑스인이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을 뿐더러, 저 혼자였으니까요.

제가 1986년에 처음으로 국회의사당에 입성하게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굉장히 자랑스러워하셨으리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현재 이민에 대한 도발적인 논의를 잠재우지 않는다면, 결국 폭력적인 결과만 빚어질 것입니다. 저 역시 폭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열흘 전부터, 인종차별적인 욕설이 담긴 편지들을 받았습니다. 그 중 어느 것도 저의 선거지역에서 온 것은 아니었지만요. 그리고 또 오늘 아침에 16구에서 온 작은 카드 한 장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뿌리와 지지표를 잃는 것이 두렵다면, 아르메니아로 돌아가십시오. 속인주의여 영원하라!” 라고 적혀있었습니다.

리베라시옹에서 발췌, 1991년 10월 4일자.


클로드 바르톨론(Claude Bartolone)

저는 프랑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태어났을 때 아직 튀니지가 프랑스 보호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가족은 1956년에 프랑스로 왔습니다. 저는 훌륭한 프랑스인이 되기 위해 오랫동안 저의 뿌리를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머니가 몰타 출신이라 영국인이기도 하고, 아버지는 시칠리아 출신이기 때문에 이탈리아인이기도 합니다. 저의 부모님은 프랑스의 프레-생-제르베(Près-Saint-Gervais)지역에 정착하였죠. 프랑스어로 글 쓰는 법은 모르셨습니다. 부모님께서 서로는 이탈리아어로 대화를 하셨지만, 자식들 앞에서는 프랑스어를 쓰셨죠. 당신의 자녀들은 프랑스에 잘 정착하기 바라셨으니까요 [...]. 저는 시칠리아에 가본적이 없습니다. 학교가 없었다면, 저는 국회의원이 될 수 없었겠지요. 아버지께서는 1962년에 귀화하셨습니다. 모든 이탈리아인이 사랑하는 스포츠인 축구를 관람하실때도 스스로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심지어 이탈리아 대 프랑스의 경기를 볼 때였어요. 프랑스가 골을 넣자 벌떡 일어나 기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그래, 난 정말 프랑스인이야. ”라고요. 이렇게 저는 오랫동안 저의 뿌리를 외면한 채로 살았습니다. 오늘날, 저는 부모님이 프랑스인이 되기 위해서 당신들의 문화를 전부 버리셨던 것이 안타깝다고 생각합니다.

리베라시옹에서 발췌한 발언, 1991년 10월 4일자.


자료7. 사회동화의 문제

최근에는 외국계 프랑스인들의 사회동화 문제가 더 이상[...] 제기되지 않는 듯 보인다. 프랑스 법률을 통해 프랑스 사회에서 외국계 프랑스인들의 사회적 권익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보장되어왔다. 그래도 외국계 프랑스인들은 그 출신으로 인해 종종 차별을 당하고 피해를 입고 있다. 하지만 빈곤계층이 야기하는 문제들에 비해서 외국계 프랑스인들의 사회적, 경제적 측면의 사회 편입은 큰 문제를 유발하지 않는다. [...]

오늘날 마그렙계이건, 프랑스령 해외영토 출신이건,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외국계 프랑스인은 찾아볼 수가 없다. 국가기관, 대사, 도지사, 장교와 같은 보직에는 단 한 명의 외국 혈통의 프랑스인들이 없으며, 고급공무원 중에는 아주 간혹 있을까 말까이다. [...] 정부가 이렇게 다른 지역 출신의 남녀를 요직에 배정함으로써 이 과정을 앞당길 수는 없는 것일까 [...]?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젊은 이민자들에 대한 ‘동화’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민자 동화에 대한 고등심의위원회 2001년 보고서

문제 A. 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 어떤 형태의 이민을 장려하고 있는가(자료1)? 그 이유는 무엇인가?

2. 두 수치간의 관계를 통해 드러내려 하는 것은 무엇인가(자료2)?

3. “영광의 30년” 초와 20세기 말의 외국인과 이민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자료4, 자료5)?

4. 이 두 인터뷰를 보았을 때, 어떠한 요소들이 사회동화를 촉진하는가(자료6)?

5. 자료7의 저자에 따르면, 왜 긍정적 차별과 사회동화 정책이 필요한가?

B. 자료 연관 짓기

6. 무엇에 대해 이 두 자료가 대립된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자료2, 자료3)?

C.작문

이 자료들에 따르면, 어떤 수단을 통해 동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p.366

3) 위기의 시대 A.‘순조롭던 나날들’의 종말 자료1, 2, 4

■ ‘영광의 30년’은 경제성장의 시기였다. 그러나 1973년부터 프랑스는 기나긴 경제침체에 접어들게 된다. 연평균 5%에 달했던 경제성장률은 1974년 이후 2%로 떨어진다. 실업자의 수도 1974년 450,000 명에서 1982년에는 2000만명, 1993년에는 300만 명을 넘어서게 된다. 오랜기간 완전고용사회였던 프랑스에게 큰 충격이었다.

■ 프랑스국민들은 경제위기에 대해 즉각적인 인식이 없었다. 그때까지 프랑스인들은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익숙했고, 닥쳐온 경제위기가 ‘영광의 30년’ 속에 나타난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전 세계가 침체의 수렁에 빠졌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수년이 걸렸다. 1979년에 장 푸라스티에의 저술처럼, 1970년대 중반의 시기는 ‘순조롭던 나날들’에 종지부를 찍었다.

■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만이 경제침체의 원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마지막 분기 내내, 오랜 산업사회의 변화, 경제 세계화의 진전과 같이 거대하고 복합적인 현상들이 프랑스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변화들과 맞물려, 1970년대 중반에 위기가 더욱 심화된다.

B. 경제위기의 여파 자료5, 6, 7

■ 경제위기의 여파는 프랑스 사회 전체에 깊은 타격을 준다. 2008년에 실업자, 일용직 및 시간제 근로자, 직종변경을 위해 재교육을 받는 사람들을 모두 합쳐 500만 명이 넘게 되었다. 빈곤은 젊은이들과 실업자 및 무산자, 노숙자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빈곤계층’은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다. 교육지출이 실업문제 해결에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각종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 경제위기는 대도시 인근지역에서 가장 잘 느낄 수 있었다. ‘대형아파트단지’의 등장이 그 증거이다. 이 새로운 형태의 건축양식을 통해, 베이비붐과 이촌향도 현상으로 늘어난 인구를 수용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도시계획의 부실함이 드러나고 프랑스인들의 생활 수준이 상승했다. 그리고 그렇게 첫 아파트단지 입주자들이 떠나게 되었고, 그들이 떠난 자리를 채운 것은 빈곤계층이었다. 실업자들과 이민2세대가 프랑스사회에 동화되는데 겪는 어려움들이 대도시 인근지역을 사회문제의 온상이자 무법지대로 탈바꿈시켰다.

C. 탈산업화 사회를 향하여 자료3

■ 하지만 경제위기도 프랑스 사회의 변천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경제 구조조정은 오랜 기간사회의 다수를 차지했던 노동자 수의 감소를 가져왔다. 서비스산업의 정보화 역시 3차산업의 고용구조를 바꾸었다. 주당 근로시간을 35시간으로 줄인 오브리 법안(les lois Aubry)으로 인해, 여가시간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그렇게 프랑스는 탈산업화 사회로 진입하였다.

■ 프랑스 인구의 성장세는 1970년부터 잦아들기 시작한다. 가임기 여성 1명이 평생에 걸쳐 낳는 아이의 수가 평균 1.7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2007년에 이 수치는 다시 2명으로 상승한다. 인구보충출생률(총인구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출생률로, 보통 여성1명당 2.1명의 신생아)에 거의 다다른 수치이다. 이렇게 인구가 계속 늘어나면서, 2008년에 프랑스 인구는 6,400만에 이르렀다. 21세기 초에는 이러한 인구성장과 동시에 이민인구의 유입이 경제성장을 유지시키는 요인이었다.


자료1. 1973년과 2004년 사이에 프랑스인들은 풍요로워졌는가?

30년 전부터 프랑스인들은 굉장히 부유했다. 1973년과 2003년 사이, 프랑스인들의 구매력은 영광의 30년동안 계속 증가했다. 유로가치의 안정세로, 연간 순소득이 14,000유로에서 약 21,400유로로 증가하였고 프랑스인들의 소유자산은 이 30년동안 3배로 증가했다. 총 소유자산 규모는 1970년 1억 8000만 유로에서 2001년에는 약 5억 유로로 평가되었다. 프랑스는 실제로 가장 부유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경제학자 장 푸라스티에는 1970년대 말에 영광의 30년 동안 프랑스인들의 구매력이 4배가 상승한 동시에, 생활수준저하와 가난에 대한 전단이 프랑스 사회에 흩뿌려지는 것을 목격했다. […]

오늘날 우리는 부유해진 사회에서 살고 있다. 동시에, 그 사회에서는 침체를 부추기는, 비참한 사회적 일면에 대한 논의가 함께 진행되고 있다. 사실 현실은 그 정도로 비참하지도 않은데도 말이다. 종종 경제적 상황이 크게 향상된 이들이 이러한 상황에 대해 투쟁하고는 한다. 처음으로 회사원들보다 더 좋은 급여를 받게 된 공무원들에 대해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그들은 정말 생활에 대해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과 마주할 위험은 없지 않은가.

역사학자 자크 마르세유, 피가로(Figaro)에 기고, 2004년 9월 28일자.

자료2. 사회적 유동성은 존재하는가?

봉급생활을 하는 중산층의 등장은 세계 2차대전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의 사회적 변혁은 세대에 걸쳐 사회계층을 뒤섞어놓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다지 중대하지 않은 몇몇 변화들이 보이기는 한다. 50년대 초에, 약 절반(54%)이 넘는 서민층이 중산층에 속하게 되었다. 25년 후에, 그 비중은 44%로 줄었다. […] 이러한 변화는 프랑스 사회가 경직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조부와 손자를 비교해보면, 그 둘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달라진 것이다. 농민의 경우에는, 그들의 조부와 똑 같은 지위를 유지하는 빈도가 크게 줄어들었다. 조부 100명을 기준으로 할 때, 41.3%의 부친들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손자 대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비중이 채 26%를 넘지 못했다. 대부분은 서비스나, 일반 고용노동자가 되었다.

교육의 세계, 1983년 4월


p.367

자료3. 스캔. 총급여의 변천

Indice 100 en 1995: 1995년을 100으로 설정.

France : 프랑스

Allemagne: 독일

1.프랑스와 독일에서 급여는 얼만큼 오르거나 감소하였나?
2.급여 변화로 어떤 영향이 있을까?

자료4. 스캔. 1949년 이후 프랑스 경제성장률

1. “영광의 30년” 동안 평균 경제성장률은 어떻게 되는가?
2. 975년 이후의 성장률은 어떻게 되는가?

자료5. 스캔. 2000년 라 쿠르뇌브 지역 건물 철거


자료6. 프랑스의 실업률


자료7. 스캔. 환경오염, 새로운 문제로 등극하다.

1978년 3월 국회의원 선거 포스터.

1. 포스터에 도시가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2. “파리-친환경(Paris-écologie)당“ 후보들이 이 포스터를 통해 제시하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p.368


자료집


빈곤문제

20세기 전반, 특히 하반기는 프랑스에게는 풍요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20세기 하반기 동안에 무려 3배가 뛰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 사회에서 빈곤 문제가 사라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 빈곤문제는 다음과 같이 여러 형태를 띄었다.

- 1945년과 60년 사이에 빈곤 문제중에서도 특히 주거문제가 특히 두드러진다. 1950년 중반 피에르 신부의 빈민구제운동이 그 심각성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 경제성장은 사회에 큰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빈곤문제는 여전했다. 이주노동자, 가난한 농민들, 몇몇 노동자 계층과 은퇴 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노인들이 빈민촌을 이루게 되었다.

- 1970년대 중반 이후로 사회 조직에 균열이 생기자, “영광의 30년”동안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빈곤 문제가 다시 심각하게 나타났다.


자료1. 스캔. 1954년 크리스마스에 노숙자들을 도우러 온 피에르 신부


자료2. 스캔. 1949-1973년 동안 지어진 주택


자료3. 사랑의 식당(les Restos du Coeur)


자료4. 1972년 포스-쉬르-메르(Fos-sur-Mer)의 이민자들

포스의 아파트 단지는 바로 생지옥이다. 콘크리트, 철, 물, 모래, 먼지로 이루어진 지옥이 그곳이다. 자갈, 돌, 모래밭, 다리, 철골, 알루미늄 저장소, 곳곳의 큰 구멍들, 배관들이 몇 천 헥타르에 걸쳐 널려있다. […]

물론 그곳에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잊곤한다. 오늘날 그 아파트단지에 살고 있는 사람은 약 6,000명이다. 정확한 수치를 알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시로 이동하는 인력, 이민자들이기 때문이다. 거주자의 약 50%가 이민자들이다. 대부분은 알제리, 모로코, 포르투갈, 서인도제도 출신의 이민자들이다.

다른 독신자들처럼, 이민자들 역시 알제코(Algéco)라고 불리는 이 작은 천국에 정착했다. 안락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10m² 너비의 허름하기 짝이없는 집이었다. 이런 집들이 포스-쉬르-메르를 쭉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보통 그 집에는 4명이 살았고, 월세는 80 프랑이었다. 물을 쓰기 위해서는 때떄로 10여미터를 더 가야했다.[...] 마르티그 출신의 두 젊은이가 다음과 같이 얘기해주었다. “ 그렇게 일을 하고 또 했는데도, 사는게 이 동네처럼 시궁창이에요.

최근에 비가 왔을 때는, 바닥에 물이 차서 생고생을 했어요. 샤워할 수 있는 시설도 없고, 있어도 작동도 안해요. 물이 안나오거든요. 그냥 거기서 밥을 해먹죠. 말 나온김에 밥먹는 얘기도 해야겠네요! 부엌도 없어요. 각자 밥그릇을 일터에 챙겨가요. 가끔 부엌이 있다해도, 천장에서 모래가 떨어져요. 식탁이랑 그릇이 모래밭이 되죠. [...] 어쨌든, 사람들이 으레 말하는 것처럼, 북아프리카인들은 무화과 두세개만 먹고도 살수 있나보죠. ”

누벨 옵세르바퇴르, 1972년 6월 26일자.

자료5. ‘신빈곤계층’. 스캔. 1980년대 중반에 등장한 이 표현은 ‘부랑자’를 대체하게 되었다. 1987년 1월 파리에서 촬영한 사진.


자료6. 프랑스와 파리의 빈곤

어제 천주교 자선단체(Secours Catholique)는 빈곤 실태가 ‘우려할만하다’는 의견을 보였다. 현재 자신들의 시설에서 수용하고 있는 빈곤계층이 일을 하기보다는 사회보조금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또, 자선단체는 ‘노동이 더 이상 빈곤계층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말을 전했다. 사회보조금으로만 운영되는 천주교 자선단체에 의탁하고 있는 사람들의 소득 수준은 3,829프랑으로, 사회보조금을 받지않고 사는 사람들의 소득인 3,646프랑보다 조금 높았다.

피가로, 1999년 11월 4일

말그대로 “뼈가 빠지게” 1년 반을 일하고, 그랑팔레(Grand Palais)에서 몇번의 계약직을 거친 40세의 에르베씨는, 2002년 2월에 파리에 위치한 카르나발레(Carnavalet) 박물관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계약직이었다. 고용주는 과연 누구일까? 바로 파리시(市)다.[…] 경비원으로 취직하여, 매주 일요일도 일한다. 하지만 일요일에 나와서 일해도 평일과 같은 봉급을 받는다. 그래도 에르베씨는 이 일이 좋다. 박물관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이다. 에르베씨의 한달 월급은 1,160유로다. 여기서 파리 시청이 경제난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알 수 있다. CES(사회연대고용계약), 정직원, 전일제 계약직, 시간제 계약직을 고용하는 것이다. 에르베씨는, 박물관의 정직원들이 언젠가 계약이 끝난다는 계약직의 불안함을 이전에 겪어봤기 때문에 굉장히 예민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캄수크씨는 33살이고, 시간제 계약 경비로 14년째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 다른 두명의 경비들처럼, 해고통지서도 받지 못한채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는 “작년에 도난 사건이 몇건 있었기 때문에, 해고당한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이건 정말 너무합니다.” 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실업수당을 받을 수 없다는 짤막한 증명서를 받았다. 파리 시는 2,000명의 비정규직과 15,000명의 시간제 계약직 노동자로, 시 운영 비용을 감축하고 있다. 크레테이(Créteil)에서는 식당관리인, 파리시청에서는 수요일마다 행사진행자로 일하는 이자벨씨는 올해 39세의 이혼녀로, 아이도 둘이나 키우고 있지만 불평하지 않는다. 그녀는 매달 550유로를 벌고 있으며, 주택보조금으로 244유로를 받으며, 집세로는 ‘200유로 밖에’ 나가지 않는다. 그녀는 30유로를 벌기 위해 야구르트와 세제 소비자 모임에 가서 진행자로 일을 한다. 이자벨은 파리시청이 진행자 자격증 취득을 위한 교육을 제공해주는 것에 만족하며, 파리시청에서 ‘계약직’이 되기 위해 ‘그 이상’으로는 노력하지 않는다. 이자벨은 “ 자유로운 것이 더 좋다 ” 고 말한다.

도미니크 르 기유두, 르몽드, 2003년 10월 31일자.


자료7. 2006년 12월의 노숙자들.

노숙자들을 위한 임시 거처.


자료8. 봉급으로 생활하는 빈곤가정(빈곤의 한계선 이하로 살아가는)의 연간소득.

프랑스 통계청(INSEE)에 따르면, 2000년에 7%의 프랑스인이 빈곤의 한계선 이하로 살아가고 있다.


문제

A.자료에서 정보 추출하기

1.곡선에 대해 설명하라(자료2). 이 시기에는 어떠한 사회적 문제가 있었을까(자료1, 자료2)?

2.어떤 종류의 빈곤 문제에 사랑의 식당이 도움을 주었을까(자료3)?

3.이 자료에 드러난 빈곤 문제는(자료4)?

4.빈곤문제가 다시 나타났을 때 놀라웠던 점은 무엇이 있을까(자료5)?

5.자료에 나타난 인물의 불우한 상황은 어떤 것들을 통해 드러나는가(자료6)?

6.위 자료에 드러난 기관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가(자료7)? 1950년대에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인물은 누구인가?

B.자료 연관 짓기

7.자료1에 나타난 문제는 당시 어떻게 해결되었는가? 그 이후 어떤 형태의 문제로 다시 나타났는가?

8.자료7과 자료8을 보고, “봉급으로 생활하며 빈곤하다”는 표현의 의미를 설명하시오. C.작문

9.1945년부터 2000년대까지 나타난 각기 다른 빈곤의 형태에 대해 서술하시오.


p.372

전체자료 연구(16/17)


주제: 1945년 이후 프랑스의 가정이 겪은 변화는 무엇인가?


문제

1부

1.왜 가정이 프랑스 사회의 기반이라고 하는 것일까(자료1, 자료2, 자료5)?

2.1945년 이후 결혼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자료3, 자료4)?

3.가족과 관련된 결정이나 법안이 프랑스의 가정이 변화하는데 끼친 영향은(자료3, 자료5)?

4.1945년 이후 프랑스의 가족 형태가 어떻게 다양화 되었는지 설명하라(자료2, 자료4).

2부

위의 답변과 본인의 지식을 활용하여 다음 문제에 대한 답변을 작성하시오.

“ 1945년 이후 프랑스의 가정의 겪은 변화는 무엇인가?”


p.370

복습자료


필수암기연도

■ 1944-45/1974-1975: “영광의 30년”

■ 1945: 여성의 첫 투표 참여

■ 1950: 최저임금보장제(SMIG) 제정

■ 1970: 최저임금보장제의 명칭이 슬라이드제 전직종 최저 임금으로 바뀜(SMIG→SMIC)

■ 1988: 최저통합수당(RMI) 제정

■ 1993: 실업인구 300만명


인물정보

피에르 신부(1912-2007)

빈민구호공동체 ‘엠마우스(Emmaüs)’의 창시자.


필수

1.변혁기의 사회

■‘영광의 30년’이라 불리는 30년간, 프랑스는 유례없는 사회 변혁과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겪는다.

■1945년부터, 베이비붐으로 출산율이 다시 상승한다. 프랑스의 인구는 해방 이후 30년간 1/3이 증가한다.

■동시에, 농촌지역의 인구는 줄어든다.

2.풍요로운 사회

■노동자의 비중이 늘어난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노동자의 수는 전반적으로 성장을 멈춘다.

■이 기간 동안 가장 눈에 띄는 사회적 변화는, 중산층의 급격한 확대와 중산층의 꿈이 모두 동일해지는 현상이다.

■당시 프랑스인들의 삶의 수준의 엄청난 상승이, 중산층들이 같은 꿈을 꾸게 만드는데 일조한다. 1953년에서 1968년 사이에 삶의 수준이 두 배는 좋아졌다. 3.위기의 시대

■‘영광의 30년’동안의 경제성장세는 1973년 가을의 1차 오일쇼크 이후 둔화된다.

-긴 경기침체와 실업률 상승을 겪게 되었다.

-프랑스 사회 전체가 위기를 겪었다(몇몇 대도시 인근 지역의 생활 환경 악화와 실업문제).

■ 그렇지만 경제위기도 프랑스 사회의 변혁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많은 점에서, 프랑스는 점차적으로 탈산업화 사회로 나아갔다.


혼동하지 않기


스캔.


p.371


사료해설 (15/15)


주제: ‘영광의 60년대’


1970년대 초에, 피니스테르(Finistère) 지방에 브르타뉴 마을의 삶을 관찰하기 위해 갔었던 적이 있다. 우리가 당장 겪고 있었던 역사적 변천의 위력을 느껴보기 위함이었다. 이 마을에는 동네를 벗어나본 적도 없고, 프랑스어도 할 줄 모르는 노부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녀들은 네이팜탄으로 부상을 입은 비아프라(Biafra)인들을 TV로 보며 눈물을 짓고 있었다. 또, 낫과 도리깨를 쓰다 바로 콤바인을 이용하기 시작한 농부들도 만났다. 그들은 콤바인과 함께 욕조가 딸린 화장실이나 수도시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그리하여 나는 1960년대의 대변혁이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보다도 농촌사회를 더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60년대의 대변혁이라고 한다면, 전례 없는 산업성장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한다. 1938년도의 경제수준을 기준점, 즉 100으로 놓는다면, 1967년의 수준은 338, 1972년은 452로 측정된다. 26년만에 프랑스의 산업은 매년 5.9%라는 미증유의 수치로 가파르게 성장해 온 것이다.

생산하기 위해 생산을 한다? 아니,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더 잘 살기 위해 생산하는 것이다. 1949년부터 1976년까지, 노동자들의 급여는 15배가 증가했다. 인플레이션과 화폐가치절하 등의 요인이 [중략] 결론적으로, 이 시간 동안 구매력이 3배 이상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54년에는 10%의 가정이 욕조가 딸려있는 화장실, 26%는 집 내부에 설치된 화장실이라는 사치를 부릴 수 있었다. 대부분의 프랑스인에게 화장실이란 여전히 층계의 한 켠 아니면 정원 구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75년에, 65%의 가정이 욕조를, 70%는 화장실을 소유하게 되었다.

마셜플랜의 수혜를 받아, 이 경제성장 붐은 서유럽에 다소 영향을 미쳐, 모든 지역이 산업화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경우 독특한 점은, 그 정도로 급격한 경제성장이 그 이전까지의 역사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앙드레 뷔르기에르(André Burguière), 역사가, 누벨 옵세르바퇴르, 1984년 11월.


문제

1.글쓴이가 묘사한 시기는 언제인가? 언제 쓴 글인가? 어떤 격차가 묘사되어 있는가?

2.첫 번째 문단에서 글쓴이가 목격한 변화는 무엇인가?

3.이어지는 문단들에서 보여지는 변화는 무엇인가?

4.이 사회변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문제해법

날짜를 잘 생각해보기

연대기라는 점을 숙지하고, 역사적 시각으로 지문을 잘 읽고 이해해보자. 날짜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한다.

-첫 번째, 두 번째 문단: 1970년대에 묘사된 1960년대

-세 번째, 네 번째 문단: 과거 시점으로 돌아가 서술하다 1975-1976년 시기까지 연결

-이 지문은 1984년에 쓰여졌다. 따라서, 글쓴이의 시점에서는 단순한 과거시점이지만 우리는 두 번의 시점 후퇴를 해야 한다. 즉, 쓰여진 시점으로 한번 돌아간 후, 지문이 묘사하는 시기로 한번 더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모의고사

주제: “농민의 종말”


약 20년 후, 프랑스의 경제활동인구는 약 1,400만명에 달할 것이다. 이중 약 5, 10%가 농업활동이라고 한다면, 약 100만명의 농업종사자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에 비하면 약 2/3이 감소한 수치이다 […].

18세기 농업혁명이 프랑스 농촌지역 곳곳에 영향을 미치는데 1세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농촌지역의 가장 핵심적인 특성들은 바뀌지 않았다. 지속적인 이촌향도 현상이 1세기 이상 진행된 후, 사회적 변화로 인해 농업종사자의 수는 1년에 16,000명이라는 엄청난 규모로 줄어들었다. 이것은 농업종사자들이 후계자가 없이 사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농촌의 젊은이들이 다른 직업으로 전향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수가 늘어나고 있었던 경영자들은 새로운 경제적, 기술적 요구에 발맞추어 나갈 수 있었으나, 농촌사회는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여태까지의 균형은 깨졌다. 느리게 흘러가는 농경사업은 위태로워졌다. 농경사업은 에너지 자원이나 최신 기술을 제공해주는 다른 산업에 발을 맞추게 되었다. 10년도 채 되지 않아, 수익성이 2배 이상 증가하게 되었다. 농부들은 1헥타르당 15 퀸탈(1퀸탈은 약 100kg)의 밀이 생산된다는 사실에 만족했는데, [중략] 이제는 40 퀸탈을 얻게 되었다 […].

모든 농산품은 시장의 변화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다른 상품생산 분야처럼, 농업 역시 산업사외의 경제적, 기술적 변화의 리듬에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앙리 망드라스(H. Mendras), 사회학자, <농민의 종말>, 아르망 콜랭 출판사, 1967.


1.지문의 역사적 맥락과 그 탄생배경을 설명하시오.
2.글쓴이가 목격하고 묘사한 프랑스 사회의 변화는 무엇인가?
3.1945년과 1965년 사이에 일어났던 프랑스의 농민 사회와 농업 경제의 거대한 변화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4.저서의 제목이 극단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라. 


p.372


전체자료 연구(16/17)


주제: 1945년 이후 프랑스의 가정이 겪은 변화는 무엇인가?


문제

1부

1.왜 가정이 프랑스 사회의 기반이라고 하는 것일까(자료1, 자료2, 자료5)?

2.1945년 이후 결혼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자료3, 자료4)?

3.가족과 관련된 결정이나 법안이 프랑스의 가정이 변화하는데 끼친 영향은(자료3, 자료5)?

4.1945년 이후 프랑스의 가족 형태가 어떻게 다양화 되었는지 설명하라(자료2, 자료4).

2부

위의 답변과 본인의 지식을 활용하여 다음 문제에 대한 답변을 작성하시오.

“ 1945년 이후 프랑스의 가정의 겪은 변화는 무엇인가?”


연표

■ 1945 : 국민 가족 고등심의회 창설, 소득세에 대한 가족계수(한 부모 당 자녀의 수에 비례하여 세금 부담을 낮추는 것) 제정

■ 1946 : 임산부 지원수당(Allocations prénatales)

■ 1956 : 가족계획(Planning familial) 제정

■ 1970 : 부모의 친권 분배

■ 1972 : 혼외자녀를 적자로 인정하는 법률

■ 1975 : 쌍방합의 이혼에 대한 법률

■ 1985 : 부부재산제에 관한 배우자의 동등함 인정

■ 1999 : 시민연대협약(PACS)의 제정

■ 2004 : 이혼 절차 간소화 법안


자료1. 스캔. 1950년대 초반, 휴가중인 프랑스 가족의 모습.


자료2. 가족의 다양한 형태

가족이란, 우리 사회를 받치는 기둥 중 하나입니다. 가족은 단순히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대 및 이성 간의 구속력 있는 관계를 처음 맺는 장소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가족의 형태가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분화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젊은 부부, 노부부, 아이가 있거나 없는 동거 커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수명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다양한 가족 구성 상황을 겪게 될 것입니다. 우리 프랑스 시민들의 생각과 법률 간의 괴리가 깊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법적으로 고려해야만 합니다. […] 한 아이의 정체성은 가족관계와 부모의 권위를 통해 정립되는 것입니다. 모든 아이들은 부모와의 동등한 관계에 있어야만 하며, 법률은 가족형태의 변화에 맞추어 나가야 합니다.

엘리자베스 기고(Élisabeth Guigo), 조스팽 정권의 좌파 장관, 가족법 업무부서에 보내는 편지, 1999.


자료3. 스캔.

1946년과 2005년 사이의 결혼, 이혼, 혼외자녀의 수


자료4. "대세는 ‘행복한 이혼’ 이다"

사랑에서 우정으로, 자주 만나기, 가까이 살기.. 점점 더 많은 이혼 커플들이 파경 이후, 새로운 형태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혼은 정말 ‘행복’할 수 있는 것일까? 사회학자 장-피에르 르 고프(Jean-Pierre Le Goff)에게, 이혼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런 태도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1950-1960년대에, 결혼과 같은 제도들은 감정적으로든 제도적으로든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불륜은 허용되었지만, 이혼은 사회적으로 굉장히 부정적으로 비춰졌죠. 1970년대 이후, 결혼의 제도적 측면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점점 많아지다 못해 이제는 흔해진 이혼은 2004년 5월 26일에 제정된 이혼절차간소화 법안을 통해 완전히 “현대화”되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대부분의 부부들은 합의이혼을 택했고, 더욱 신속하고 타격 없이 이혼을 했다. 2005년, 소송이나 합의에 의한 이혼건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2004년에는 총 134,601건의 이혼 중 63,881건이 소송이나 합의에 의한 이혼이었는데, 2005년에는 155,253건 중 91,850건으로 치솟은 것이다. 많은 부부들이 이혼절차간소화의 혜택을 받기 위해 2005년 1월 1일까지 기다렸기 때문이다. 2006년,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이 상승세는 잦아들어, 총 이혼 138,147 건 중 76,794건이 합의 이혼이었다. […]

부부들은 더욱 조용히 이혼을 진행하게 되었지만, 이런 방식의 이혼 역시 정신적, 감정적 상처를 남기기는 마찬가지였다. “사회적 측면에서 이혼은 더욱 간편해졌습니다. 그러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 더욱 커지고, 개인 내부적인 문제가 됨으로써 삶에 큰 고통을 겪게 되기도 합니다.” 라고 르 고프는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이혼으로 상처받았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최근의 흐름이죠. 우리 사회는 비극을 거부합니다. 하지만 정신적 문제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감정은 무의식에 자취를 남기고, 그 자취를 영원히 묻어두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아네스 르클레어(Agnès Leclair), 피가로, 2007년 10월 14일자.


자료5. 1997년, 가족지원수당 조건부 적용에 대한 가족들의 시위


문제해법


A. 개괄적 힌트

영광의 30년과 결정적 20년(1965-85) 동안에 걸친 가족의 변천과 개념에 대해 묻고 있다. 법에 정의된 전통적 가족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부친이 모든 권위를 갖는다.

-결혼은 신성하다.

이러한 형태의 전통적 가족은, 이혼의 보편화와 여성의 지위상승으로 해체된다.

B. 3번 문제답변 힌트

-연표를 활용하는 것을 잊지 말자. 연표를 통해 1945년 이후 가족에 대한 국가의 핵심적이자 새로운 역할을 파악할 수 있다.

-가족형태의 변화에서 이혼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혼에 대한 법률의 중요성을 명확히 파악하자.


제 19 장: 생활양식, 문화생활 그리고 신념

p.374


영광의 30년 동안 프랑스의 사회와 경제만 변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인들의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문화생활 역시 큰 변천을 겪게 된다. 게다가 1970년대 중반에 닥친 경제침체로 인한 사회혼란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계속된다. 21세기 초의 프랑스는 전후의 프랑스와는 많이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경제위기가 생활양식의 변화를 가로막았는가?


대중문화는 무엇인가? 그리고 대중문화는 어떤 식으로 전파되는가?


자료1. 스캔. 잡지와 라디오를 통해 인기를 얻은 가요

살뤼 레 코팽(Salut les copains, ‘안녕 친구들’ 이라는 뜻) 방송 프로그램 팀. 1966년 4월 12일. 1960년대 중반의 47명의 젊은 가수들의 사진이다. 살뤼 레 코팽(1959년, 프랑크 테노,다니엘 필리파키 제작, Europe 1 채널에서 오후 5시에 방영)이라는 방송과 잡지의 홍보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사진에서는 조니 홀리데이, 실비 바탕, 에디 미첼, 클로드 프랑수아, 리샤르 앙토니, 프랑수아즈 아르디, 앙투안, 아다모, 딕 리버스, 레 쉬프(les Surfs), 쉴라, 심지어는 넥타이를 맨 세르주 갱스부르까지 확인 할 수 있다.


p.375

자료2. 지하철역과 길거리의 미화

장-샤를 블레(Jean-Charles Blais)가 장식한 지하철역, 1989년.

프랑스대혁명 200주년을 기념하여, 정부가 장-샤를 블레에게 아상블레 나쇼날(Assemblée Nationale)역을 꾸밀 수 있도록 허가를 해주었다. 광고 벽보를 모두 떼고, 프랑스를 상징하는 3색을 이용하여 시민들의 얼굴을 음영으로 표현하였다.


p. 376.


1) 영광의 30년의 프랑스

A. 소비사회의 도래 자료2, 3, 4

■ 1950년대부터 프랑스 사회의 변혁과 동시에, 프랑스인들의 일상생활의 변화도 가속화되었다. 영광의 30년은 생활양식이 완전히 변모하는 단계이기도 하였다.

■ 소득의 전반적 상승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중산층의 생활양식의 획일화를 가져왔다. 가전기기부터, 여가활동, 자가용, 가족규모 등등 많은 것이 모두 유사한 형태가 되었다. 신용대출로 인해 이러한 소비활동이 더욱 쉬워지고 촉진되었다.

■ 1920년대의 미국처럼, 주거형태의 발달과 생활양식의 현대화가 이 사회적 팽창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전기기는 영광의 30년의 상징 중 하나였으며, 1950년대부터 가전분야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1954년에는 7%, 1964년에는 50%, 1975년에는 91%의 가정이 냉장고를 소유하게 되었다.

B.‘대형주택단지’의 시대 자료5, 6

■ 전후시기에 프랑스의 주거 상황은 열악했다. 전쟁으로 인한 많은 파괴가 있었고, 국가경제회복이 우선으로 하여 중공업과 에너지 분야에 많은 신경을 쏟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46년에 파리에는 5가구 당 한 개의 샤워나 욕조가 딸린 화장실이 있었다. 지방대도시에는 2/3이상의 건물들이 공동화장실을 활용했다.

■ 그 이후, 이촌향도현상과 베이비붐의 영향을 따라가기 위해, 도시에서 농촌에 아우르는 프랑스인들의 주거 상황은 크게 향상된다. 1955-1975년 동안 대도시 인근지역에 대규모 건설계획이 진행되었다. 오늘날 ‘탑’과 ‘장벽’에 비유하는 교외지역의 건물들은 이 시기에 지어진 것들이다. 이 교외지역은 도시인근지역들을 전부 포함하게 되어, 도심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의 주거지역으로 변화하였다.

■ 이 시기 전반기에, ‘대형아파트단지’는 일종의 발전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위생과 안락함의 측면에서 그러했다. 후반기인 1980-1990년이 되어서, 공해와 같은 여러 심각한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C.‘여가문화’의 시대가 오는가? 자료1

■ 자가용이 점차 프랑스인들의 일상에 들어오게 되었다. 경제가 다시 활성화 되면서 몇몇 기종은 큰 인기를 끌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1946년 10월에 출시된 르노의 소형차 4CV는 1947년과 1961년 사이에 1,100,000대가 생산되었다. 그야말로 모든 사회계층이 구매한 자동차였다. 1955년에 이 자동차를 구매한 고객의 40%는 노동자들이었다. 또, 1948년에 출시된 시트로엥의 2CV는 궁핍의 종말과 동시에 소비사회를 상징하는 자동차였다. 사치품이라고 할 수 있었던 자가용이 조금씩 보급되기 시작되면서 여가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 생활수준의 상승은 프랑스사회를 몇몇 사회학자들이 ‘여가문화’라고 칭하는 문화로 이끌었다. 휴가를 떠나는 것이, 느리기는 하였지만 일반화되었다. 1956년에 7명의 프랑스인 중 2명만이 휴가를 떠났다. 이들은 평균적으로 자신들의 집에서 250km 이상 떨어진 곳으로는 휴가를 가지 않았다. 25년 후인 1981년에는 50%가 넘는 프랑스인들이 휴가를 떠났고, 그 중 17%는 해외로 휴가를 갔다.

■ 여가의 획일화는 프랑스 사회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문화생활의 획일화로 여가생활은 더욱 확대되었다. 영광의 30년은 대중문화가 꽃핀 시기이기도 했다.


자료1.스캔. 국제노동자동맹 프랑스지부(SFIO)의 광고

인민전선(Front Populaire) 창립 20주년 포스터.

1.당시에 누가 집권하고 있었는가?
2.포스터에서 강조하고 있는 사회적 달성목표는 무엇인가?


자료2. 스캔. 레제(Reiser)의 풍자화, 1979년

1.위 만화를 묘사하고,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설명하시오.
2.작가는 무엇을 비판하고 있는가? 


p.377


자료3. 스캔. 1963년 파리의 생트-주네비에브-데-부아(Sainte-Geneviève-des-Bois)지역에 들어선 프랑스 최초의 대형마트가 문을 열다.


자료4. 스캔. 가계의 가전기기 소유 현황

1.위 표를 설명하시오.
2.위 표에서 나타나는 소비의 큰 변화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자료5. 스캔. <1956년에 살고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야. >(잡지 레알리테(réalité)에서 발췌, 1956년 3월호)

1.위 자료에서 어떠한 사회의 발전양상이 보이는가?
2.위 자료의 제목이 묘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료6. 1960년대 초의 한 도시: 미래의 도시

다리를 건너 사르셀(Sarcelles)에 도착했다. 조금 위로 올라가자, 모든 것이 보였다. 세상에! 내가 블록 속에 살고 있었다고 믿었는데! 그렇다. 블록들이 있었고, 그것이 도시였다. 바로 미래의 도시! 수 킬로미터에 걸치고 걸친, 집, 집, 그리고 또 집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똑같고, 줄지어 서있고, 하얀 집들이었다. 그리고 또 집들이 있었고... 하늘도 있었다. 광활함 그 자체였다. 화창한 햇볕이 집을 통해 비추고 있었다. 광활하고, 깨끗하고, 멋진 녹지에는 푯말이 꽂혀있었다. 그 푯말에는 ‘잔디와 나무를 존중하고, 존중하게 합시다’ 라고 적혀있었다.

가게들은 집들이 모여 사각형을 이루는 곳의 중심에 모두 모여 있었다. 그래서 주부들이 국수를 사러 갈 때, 모두 똑같은 수의 발걸음을 옮기면 되었다. 심지어 평등함까지 있는 것이다. 그 곁에는 전면 유리로 되어있는 자그마한 건물들도 있었다. 지나가면서 모두가 그 속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 건물들 중의 하나는 깔끔하고 세련된 의자와 책상들이 있는 도서관이었다. 그곳에 앉아있으면, 모두가 당신이 책을 읽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머지 한 건물은 시골을 떠올리게끔, 나무로 지어져 있었는데 바로 ‘청년들과 문화활동을 위한 센터’ 였다. 젊은 남녀들이 안에 있었는데, 그들이 웃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은 나쁜 짓을 저지를 수가 없는 곳이다. 한 아이가 학교를 몰래 빼먹는다 해도, 영 맞지 않는 시간에 혼자 밖에 나와있는 아이 정도는 즉시 찾아낼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건축이다.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아름답다. 초록색과 흰색. 정돈된 모습. 우리는 조직성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모든 요소들이 우리의 안녕을 위해 완성되어 있었다. 그것들이 마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한 것 같았다. 안녕을 위해서는 어떤 것이 있어야 있어야 할까? 그럼 그 요소들을 추가했다. 심지어는 다양성까지 있었다. 풍경에 변화를 더하기 위한 4개의 거대한 마천루와, 땅의 변화무쌍함을 보여주는 몇 개의 작은 언덕이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인 양 그곳에 있었다. 두 개의 자그마한 건물들도 결코 똑같지가 않았다. 정말 모든 것이 완벽히 고려되어 있어서, 가장 작은 요소들에서 조차 그 생각과 발상, 의지와 잘해내고자 하는 욕망, 노력, 꼼꼼함, 실행력, 지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해냈다는 것은 정말 자랑스러워 할 일이다.

크리스티안 로슈포르(Christiane Rochefort), <세기의 아이들(Les petits enfants du siècle)>, 그라세 출판사, 1961년.


p.378

자료집


해방 이후의 프랑스 여성들


1944년, 드골 장군에 의해 여성에게도 투표권이 보장되었다. 여성들은 1945년 4-5월에 있었던 지방에서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하였다.

노동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20세기 후반기가 되어서야 여성들에게 새로운 법적 권리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남성과 여성간의 법적 형평성뿐만 아니라 기회의 형평성이 문제로 제기되었다. 예를 들면 정치적 평등은 여성들도 참여하여 가장 열띠게 토론을 했던 주제였다. 21세기 초에 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근 몇 십 년간 진행되었던 여성의 권리투쟁이, 남녀평등의 원칙에 기반하지 않는 다른 문화의 출현과 요구로 인해 위험에 빠지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자료1. 민법상 여성의 지위


자료2. 스캔.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

노장-르-로트루(Nogent-le-Rotrou)의 텔레비전 조립공장. 1967년.


자료3. 1967년의 노이비르트(Neuwirth) 법안.

제 2조. 피임약의 제조와 수입을 허가한다.

제 3조. 피임 효과가 있는 상품과 약제품의 판매는 복지부의 허가를 받은 후에 가능하다. 그리고 피임약의 판매는 약국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피임약의 판매나 공급은 처방전에 법적 대리인이나 부모 중 한쪽의 서면상 동의가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제 5조. 산아제한에 관련된 선전은 금지한다. 피임과 관련된 상품이나 피임약의 모든 직간접적인 광고나 선전을 금지한다. 다만, 의사나 약사를 대상으로 하는 광고는 허용한다.


자료4. 스캔. 영광의 30년 동안 나이에 따른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


p.379


자료5. 1975년 1월 17일, 자유의사에 따른 임신중절 관련 법안.

제 1장

제 1조. 해당법률은 출생 때부터 모든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보장한다. 오직 필요한 경우에 의해서만 이 권리는 침해될 수 있으며, 법률에 의해 규정되지 않은 조건에 의해서는 침해 당하지 아니한다.

제 2조. 임신 10주 전에 공공보건법 L.176조를 충족하는 사립의료시설의 의사에 의해 자유의사에 따른 임신중절이 행해졌을 경우, 형법 317조의 첫 네 줄에 해당하는 항목이 적용이 된다는 것을 공표하기까지 5년의 기간을 유예한다.


자료6. 스캔. 1980년대 프랑스 가족계획 운동(MFPF)의 포스터.


자료7. ‘어려운 동네’에 살던 한 소녀가 산채로 타 죽다.

2002년 10월초, 17살의 소안느라는 소녀가 비트리-쉬르-센(현재 발-드-마른)에서 산채로 타 타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녀와 말다툼을 벌였던 한 소년이 벌인 짓이었다. 교외지역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좋지 않은 상황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건이다. 소위 ‘어려운 동네’라고 불리는 지역에 설치된 여러 협회에 따르면, 1990년 대 이후 교외지역에서 여성의 지위, 특히 젊은 여성의 지위가 ‘명백하고도 빠르게’ 하락하였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이민자 가족의 가부장적 문화를 원인으로 꼽는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늘어났다는 것, 또는 도시정책 자체가 남성들 위주(스포츠 팀이나, 문화활동에 대하여)로 구성되어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비판을 받고 있는 이 현상들은 도시들의 게토화(化) 과정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게토의 특징 중 하나는, 남성우월주의와 가부장제에 기반한 전통사회구조로의 본격적 회귀이다’라고 오랭(H.Orain)이 분석한 바 있다.

-P. Kremer 와 M.lantonche, 르몽드, 2002년 11월 25일


자료8. 스캔. 20세기 초에 선출된 여성 정치인의 비율


문제

A.자료에서 문제 추출하기

1.민법상 여성의 지위는 어떻게 변화해왔는가?

2.노이비르트 법안은 무엇을 허용했는가(자료3)? 무엇이 금지되었는가?

3.60세 이상의 여성들이 가장 많이 일했던 시기는 언제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4.1954년에 가장 많은 여성들이 일을 했던 시기는 언제인가(자료4)? 1975년에는 어떠했는가?

5.임신중절에 대한 벨의 법안은 어떤 상황에서 도입되었는가(자료5)?

6.기자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였는가? (자료7)

7.여성이 가장 많이 선출된 집단은 어디인가(자료8)? 그 결과는 선거의 종류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B.자료 관련 짓기

8.포스터에 나타나있는 플래카드에 적혀있는 글귀는 어떤 다른 자료들과 연관이 있는가(자료6)?

9.여성의 지위변화는 가족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C.작문

10.해방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여성 지위의 주요 발전을 한 단락으로 설명하라.


p.380


2) 대중문화의 부상

A. 문화적 획일화의 과정 자료1, 7

■ 대중문화가 해방 이후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양차대전 사이에, 신문, 라디오, 영화를 통해 대중문화를 널리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삶의 수준 상승, 여가활동 시간 증가, 특히 TV를 통한 통신기술 발전으로 인해, 대중문화는 전쟁 이후 더욱 빠르게 보편화되었다.

■ ‘취학아동의 폭발적 증가’는 교육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베이비붐세대의 도래로 학생의 수가 중고등학교에 걸쳐 크게 늘어난 것뿐만이 아니라, 고등교육 역시 보편화되었다. 1950년에는 대학 입학인구는, 입학연령대 인구의 5%에 해당하는 30,000명이었다. 1967년에는 130,000명(입학연령대 인구의 15%)으로 증가했다. 대학생의 수는 1950년에는 140,000명에서 1967년에는 570,000명으로 늘어났다.

B. 인쇄매체의 유지 자료3

■ 경제성장기 동안 주로 음성이나 이미지에 기반한 새로운 통신수단이 나타나거나, 그 수가 늘어났다. 그렇지만, 인쇄매체(정기간행물이나 서적) 역시 중요한 문화매체로 남아있었다.

■ 1953년에 만들어진 문고본 도서 덕분에, 도서의 가격은 더욱 저렴해졌다. 동시에, 정기간행물 역시 대중매체가 보편화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수단 중 하나였다. 여러 종류의 신문들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 연애와 같은 감정적인 내용이나 패션이 마리-클레르, 마리-프랑스, 특히 1945년에 창간된 엘르와 같은 여성지에서 다루어졌다. ‘사진소설(일련의 사진에 간단한 이야기를 곁들인 형식)’이라는 것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여성잡지들은 독자들의 취향을 획일화 시키는데 기여하였다.

- 파리 마치(Paris Match)의 성공을 통해 르포, 사진 잡지가 미국의 ‘라이프’라는 잡지와 함께대중에게 널리 퍼지게 되었다.

- 정치를 다루는 주간지들의 수가 늘어났다(프랑스 옵세르바퇴르 1950년 창간, 렉스프레스 1953년 창간).

■ 1960년대에는 TV프로그램에 관련된 잡지가 가장 많이 출판되었다. 음성과 이미지가 인쇄매체를 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C. 이미지와 음성의 시대가 오다 자료2, 4, 5, 6

■ 영광의 30년 초에도, 영화는 여전히 프랑스인들의 주요 오락거리였다. 1950년대 초반에, 매년 130개의 영화가 생산되었다. 이후의 25년 동안에는 서서히 그 수가 줄어들었다. TV 시청자가 늘어나면서, 영화의 ‘최후의 날’이 오고 말았다. 1990년대 초에는, 영화를 극장에서 보기보다는, TV로 시청하는 경우가 더욱 늘어났다. 그래도 영화는 미국 영화와의 경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요한 매체로 남아있게 된다.

■ 1945년 이후, 라디오 청취자의 수는 계속 늘어난다. 1954년 약 1000만명의 청취자가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의 프랑스 가정은 라디오 수신기를 가지고 있었다. 국가가 독점하고 있었던 라디오와 함께, ‘인접 국가 내’의 사유 기지국이라는 것도 있었다. 프랑스 영토 밖에 설치된 기지국을 그렇게 불렀는데, 1931년에 설치된 라디오-룩셈부르크(Radio-Luxembourg)와 1955년에 설치된 유럽 No.1(Europe no.1)이 그 예이다. 1960년대 초에 음성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다. 베이비붐 세대가 청소년이 되고 가정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라디오와 음반 시장이 성장한 것이다. 유럽 No.1에서는 ‘예예(yéyé)’문화와 함께 ‘살뤼 레 코팽’의 방송이 나오게 되었다. TV는 프랑스에 더 늦게 보급되었다. 1958년에는 TV를 소유하고 있는 가정은 전체의 10%가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에 급격한 변화가 찾아오면서, 1970년에는 70%의 가정이 TV를 소유하게 되었다.


자료1. 스캔. 대학합격자의 백분율.

1.기업중역의 자녀와 노동자의 자녀간에는 어떠한 격차가 있는가?
2.영광의 30년 동안에 어떤 진전이 있었는가?

(위부터) 연령대별 대학합격자 비중

임원자녀 연령대별 대학합격자 비중

노동자자녀 연령대별 대학합격자 비중


자료2. 스캔. 프랑스 TV 수신기의 수


p.381


자료3. 프랑스인들의 문화생활 현황

1.연령대별 독서 형태는 어떻게 다른가? 
2.농업종사자, 임원, 노동자간의 문화생활 방식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3.문화생활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의 가장 큰 두 가지 차이점은 무엇인가?


자료4. 스캔. 파리 대탈출(La Grande Vadrouille)

가장 성공한 프랑스 영화. 1700만 관객이 관람했다.


자료5. 스캔. ‘조로가 왔다네(Zorro est arrivé)’ (앙리 살바도르, 1964년)의 예기치 못한 성공.

1960년대 최고 히트곡은 라디오 프로그램 편성으로 인해 우연히 생겨난 것이었다. ‘레코드판’에서 ‘조로’는 B면의 4번째 곡으로 수록되어 있었는데, B면에는 주로 인기가 없는 곡들이 실렸다.


자료6. 스캔. TV의 출현(1954년 1월)


자료7. 문화부 장관 알랭 페르피트(Alain Peyrefitte)의 연설문

모든 사회계층과 직업계층이 휴가를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할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여유가 있는 것은 개인사업자들로, 85%가 휴가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농업종사자의 8%만이 휴가를 떠나고 있습니다. 6년 전부터 계속되어온 흐름이 유지된다면, 지금으로부터 20년 안에 모든 프랑스인 valides 들이 휴가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프랑스인들은 1년만에 한 달 월급보다도 더 많은 비용을 여가에 지출하게 되었습니다. [...] 30일 연속 휴가, 48주간 매주 2일의 휴일, 8-9일의 공휴일이 있는데, 법적 휴일이 1년에 135일이라는 것입니다. 3일에 하루는 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인들의 재정과 관심에서 여가활동이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은 명백한 번영의 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여가활동 비중의 증가가(급여의 증가처럼) 생산증가보다 더 빨라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변혁을 정상화하고, 제어하는 것이 바로 정부가 할 일인 것입니다.

페르피트 장관의 연설, 프로방스(Provins) 시장, 프로방스 고교 시상식에서. 1964년 6월 28일.


p.382


자료집


프랑스의 종교문제


몇 세기에 걸친 프랑스에 남겨진 가톨릭의 자취는 아주 중요하다. 예술, 가치, 집단행동, 더 나아가서는 문명화와 프랑스 사회가 가톨릭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두 가지 현상이 관찰 된다. 가톨릭의 입지, 즉 종교활동과 그 영향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 현상은 이민으로 인한 것인데, 프랑스 인구에서 이슬람교도들의 비중이 증가하여 오늘날에는 4%에 이르게 되었다.

프랑스 국민과 종교간의 관계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종교와 자기정체성을 동일시 하기 때문에 종교는 가장 중요한 문화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종교란 신념의 문제이며, 규칙적인 종교활동을 하고 그 사상에 깊이 젖어드는 것이다.

자료1.스캔. 1950년대의 교리교육


자료2. 프랑스인들과 종교문제


자료3. 프랑스인들은 여전히 가톨릭신자인가(1986년)?

프랑스인들은 여전히 가톨릭신자인가? 모든 여론조사에서 프랑스인들이 대부분(약 80%)이 자신이 가톨릭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프랑스는 더 이상 가톨릭 국가가 아니다. 소수를 제외하고는, 스스로 가톨릭이라는 주장과 그 종교의 영향과 내용은 더 이상 관련이 없다. 프랑스인들은 더 이상 종교생활을 하지 않고, 가톨릭의 신념과 가치를 따르지 않을뿐더러, 종교단체와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탈선’은 해가 갈수록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1986년에 프랑스여론조사협회(SOFRES)가 르몽드(Le Monde), 라 비(La vie)와 프랑스 앵테르(France inter)를 위해, 1500명의 프랑스인(81%가 가톨릭이라 응답)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이 조사에는 종교생활의 모든 요소가 포함되었다. 예를 들면 종교생활(미사 참여 빈도, 종교 교육의 수준, 세례는 받았는지, 결혼은 어떤 식으로 하였는지 등), 믿음(신, 내세개념, 인생에서 종교적 믿음의 위치), 특정 사회가치판단에 대한 영향(낙태를 용납할 수 있는지), 가톨릭교회와 교황에 대한 동일시 등 과 같은 요소들이 있다.[...]

모두 비슷한 결과들이 나왔다. 종교생활에 있어서, 출생, 청소년기, 결혼, 죽음과 같은‘인생 중대사와 함께하는 종교’라는 특성은 잘 남아있었다. [...] 세례를 받았으며 질의에 응답한 프랑스인의 절반은 가톨릭의 구체적인 신념을 따르지 않았다(예수나, 사후세계의 존재에 대한 것 등).

르몽드, 1991년 12월 20일자, 기 미슐라(Guy Michelat)의 보고서

‘프랑스인들은 여전히 가톨릭신자인가?’, 쥘리앙 포텔(Julien Potel), 자크 쉬테(Jacques Sutter), 자크 메트르(Jacques Maître), 프랑스국립과학연구원(CNRS)/르 세르(Le Cerf), 1991년.


자료4. 프랑스는 여전히 가톨릭국가인가(2007년)?

프랑스는 여전히 가톨릭국가인가? 수치를 보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전후에 사르트르가 ‘우리는 모두 가톨릭교이다’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 문장은 이 설문조사의 애매모호함을 걷어내준다. 문화적 소속감이나 종교에 대해 생각했을 때, 프랑스는 여전히 많은 면에서 가톨릭국가라 할 수 있을까? 신념에 대한 수치는 상당히 걱정스러운 수준이다 [...]. 전 사회가 잘 지켜온, 프랑스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맥락을 넘어서는 모든 가치들이 오늘날에 공격받고 있다. 만약 이대로 계속된다면, 가톨릭 신앙을 실천하는 것은 반문화가 될 것이다. [...]

프랑스인 가톨릭신자들은 교리에 집착하지 않는다. 프랑스인들은 더 이상 교리를 모른다! [...] 베네딕트 16세의 의견에 따르면, 그것이 ‘가톨릭 문화’의 특징이다. 교황은 인본주의, 인도주의와 같이 프랑스인들이 믿는 가치들을 옹호했다. 베네딕트 16세는 전대 교황들의 노력의 결실을 거두었다. 그러나, 문명의 충돌로 위협받는 세계에서 베네딕트 16세는 이슬람과 같은 외세를 막는 방파제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앙리 마들랭(Henri Madelin)의 인터뷰, 1월 9일자 ‘종교의 세계’에 기재된 CSA 설문에 대한 예수회 응답, 피가로, 2007년 1월 10일자


p.383


자료5.스캔. 2007년도 가톨릭과 이슬람 인구 신고 현황

좌 : 카톨릭교라 신고한 인구의 백분율

70%이상, 64-70%, 55-63%, 47-54%

국가 평균 : 64%

우 : 이슬람교라 신고한 인구의 백분율

6% 이상, 4-6%, 1-4%, 1퍼센트 미만

국가 평균 : 3%

출처 : 라 비(La vie), 2007년 3월.


자료6. 스캔. 1994년 프랑스의 한 고등학교.


자료7. 비종교성을 지지하는 이슬람교도

히잡과 관련된 마찰이 잦아드는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법안의 영향일까? 이는 비종교성을 표방하는 공화국인 프랑스가, 이 원칙을 되새기기 위해 종종 큰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분명히, 이 법을 통해 사람들의 태도가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두 악(惡) 중에, 대중은 차악을 택했다. 즉, 자신들의 딸을 무슬림 거주구역에 가둬두기 보다는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몇몇 종교지도자들이 신성모독이라며 부리는 히스테리보다도 알 권리, 공화국 시민의 태도, 실용주의를 우선시한 모든 무슬림들에게 경의를 보낸다. 이슬람 강경주의자들이 여러분을 잠재적 숙적이라고 생각하는 상태에서 냉정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지금은 교외지역 출신의 젊은 이슬람계 프랑스인들뿐만 아니라, 기업과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이슬람계 프랑스인을 인정해달라는 요청을 들어볼 때다.

강경주의가 무슬림 사회의 대세인가?

완전히 소수다. 그러나 언론으로 인해 인공적으로 다수가 된 것이다. 프랑스 무슬림 심의회(CFCM)에서도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심의회에 속한 강경주의자들은 지나치게 교리적인 내용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 자신들이 모범이 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들이 프랑스에게 깊은 공포감을 주는 것이다. 게다가, 이 자칭 대변인들은 다음 심의회 선거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다.[...] 프랑스에 이론의 여지 없이 다수인 강력한 힘이 있으며, 그 힘은 현대적, 공화국의 정신에 부합하며, 비종교적이고 시민적이다. 또한 그 힘은 종교와 정치간의 세속적 관계에 밀착되어 있으며, 종교의 거짓된 이름으로 여러 문제가 생기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 A. 자료에서 문제 추출하기

1.위 지문에 따르면, 종교 교리와 종교활동에 대한 프랑스인 가톨릭교도들의 태도는 어떠한가(자료3)?

2.위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변해야 할까(자료4)? 어떠한 뉘앙스를 전달해야 할까?

3.어떤 지역의 비율이 가장 낮은가(자료5)? 가장 높은 곳은(자료5)?

4.오늘날 어떤 법안이 이러한 행위를 금지했는가(자료6)?

5.글쓴이가 비난한 대상은 누구인가(자료7)?

B.자료 연관 짓기

6.16년만에 어떠한 변화가 나타났는가(자료3, 자료5)?

7.1986년과 2007년의 프랑스인 카톨릭교도의 행동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C.작문

8.21세기 초에는 ‘교회의 큰 딸, 프랑스’라는 표현에 어떤 뉘앙스가 있는가?


p.384


3)‘결정적 20년’


A.신념과 가치 자료1

■ 생활양식과 신념의 변화는 1950년에 시작되어 1960년 중반에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위기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계속되었다. 약 20여년간,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는 수세기에 걸친 것보다도 많은 변화를 겪는다.

■ 이 20여년간, 종교활동이 크게 저하된다. 종교활동의 저하는 일요일마다 미사에 참석하는 것과 같은 종교행위의 감소를 가져오게 되었다. 성체 배령을 덜 하게 될수록 고해성사도 덜하게 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회는 위기에 처한다. 1960년대 이전에 자신이 가톨릭이라 응답한 프랑스인들은 85%였으나, 2007년에는 51-64% 사이로 하락하게 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성직자들의 수도 함께 하락하였다.

■ 특히 집단적 가치가 크게 바뀌게 되었다. 오랫동안 프랑스 사회에서는 근검절약과 같은 가치들이 중시되었는데,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영광의 30년간 프랑스가 부유해지게 되면서, 이런 사고방식은 지나치게 현실을 구속하는 것이 되었다. 소비사회의 이기를 과시하는 이미지의 광고들이 소비 욕구를 자극했다. 연금생활자의 이미지는 광고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소비자들과 신용거래 이용자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B.‘자유방임’의 시기가 오는가? 자료2, 3

■ 단체행동양식과 관습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를테면 임신, 결혼, 성생활과 같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에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여러 법안을 통해 이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1967년에 노이비르트 법안이 피임을 장려했고, 1975년에 벨 법안은 임신중절을 허가했다. 그때 이후로, 이 법안들이 사회를 ‘방임주의’적으로 만든다고 비난하는 하는 사람들과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이라 본 사람들 간의 논쟁이 계속 되고 있다.

■ 이러한 변혁들은 1945년 이전에도 일어나곤 했지만, 행동양식에 있어서의 변화는 1960년대 중반, 1968년 이전부터 가속화된다. 따라서 68혁명은 이미 시작되었던 사회적 변화를 보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이 혁명은 영광의 30년 이전에 이미 변화된 프랑스 사회와 1945년 이전의 프랑스에서 이어져온 가치체계 간의 간극을 더욱 벌리는 계기이기도 했다.

C.국민 합의의 위기가 오는가? 자료4, 5, 6

■ ‘결정적 20년’ 영광의 30년의 시기에 시작되어, 영광의 30년이 끝난 후에도 지속되었던 이 1965-85년의 기간은 ‘결정적 20년’으로 프랑스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에 국가적 차원의 논쟁들이 사그라지게 되었다.

- 1983년에 발표된 ‘긴축재정’으로 좌파가 더 이상 ‘자본주의와의 단절’이 아닌 시장의 논리에 따르게 되었다.

- 1984년, 사립학교 갈등의 종식으로 긴 역사의 교육문제가 해결 된 것처럼 보였다.

■ 동일한 시기에, 공화국 정신과 국민국가의 존재가 다시 정치적 토론의 주제로 떠올랐다. 국가공동체의 응집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국가공동체는, 국가 내부의 문제뿐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의 더욱 첨예해지는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사회적 연대가 점점 느슨해지고, 인격 및 비인격체를 가리지 않는 반복적인 폭력행위, 경제의 세계화가 문제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국의 가치란 어떠한 지표처럼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용어

Concile(공의회): 카톨릭 교회의 서열제에 속한 성직자들(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의 집회를 말한다. 모든 급의 성직자들이 소집되는 공의회는 만국 공의회라 불린다. 교회의 20세기에 걸친 역사 중, 4세기(325년 니케아 공의회)부터 20세기(1962-196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이에 20회의 만국 공의회가 있었다.


자료1. 결정적 20년

집단행동양식과 관습의 변화가 출생, 죽음, 결혼, 즐거움과 같은 사회가치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가장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던 20여년에 걸친 시간이 있었다. 그 20년간 일어난 사회가치의 한계선, 기저 가치, 규범과 위반의 변화가 지난 몇 세기의 변화보다도 컸다.

1965년이 바로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전환점의 해’이다. 바로 이 해에 앙리 망드라스(Henri Mendras)가 지칭하는 ‘제 2차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어 1984년까지 전개된다. 영광의 30년이 이 결정적 20년이라는 시기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경제 구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결정적 20년의 시기는 계속 되었다. 그러는 한편, 이데올로기적 기반까지 송두리째 바뀌게 되는 것이었다. 몇 세대에 걸쳐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거대한 이데올로기들이 ‘솔제니친 효과’로 70년대 내내 차례로 타격을 입었다. 솔제니친 효과란, 중국형 모델이나, 베트남인 보트피플, 그리고 캄보디아에서의 ‘대학살 유토피아’에 대한 무관심을 말한다. [...] 이제부터는 세계를 다르게 인식해야 한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동유럽의 공산주의 체제의 와해가 일어나기 약 10여년전, 프랑스 좌파 문화정책의 일부분이 절망 속에 갈 길을 잃었다.

장-프랑수아 시리넬리(Jean-François Sirinelli), J.P 리우(Rious)와 J.F 시리넬리(Sirinelli) 저술, <프랑스의 서로 다른 두 세기 1914-2000>, 2002년.

1.첫 번째 문단에 나타난 분야(탄생, 죽음, 결혼, 쾌락)에서의 행동양식의 변화의 예를 드시오. 
2.위 글에서 말하는 ‘종합적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3.두 번째 문단 마지막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여론의 차이는 무엇인가?


p.385


자료2. 스캔. 빌렘(Wilem)의 풍자화. 리베라시옹, 1990년 11월 12일자.

아이 : 아빠, 저는 좀 맞아야 할 것 같아요.

아빠 :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 까지 안 된다!

1.위 풍자화에 나타난 부모는 어떤 세대인가? 2.전통적 가치를 갖고 있는 세대가 뒤바뀌었다는 것을 증명하시오.


자료3. 자유방임주의는 68혁명의 유산인가?

젊은이들은 시대정신과 19세기에서부터 내려온 도덕규범 간의 격차가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68혁명의 이전의 세대도 마찬가지였다. 젊은이들은 쾌락, 소비, 경험과 자아성취에 그들의 가치를 두었다. 이 현상은 인간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

모든 것이 지도자와 지도 당하는 자, 상류와 하류 간의 암묵적 사회계약이 이루어진 양 진행되었다. 이것은 기존의 사회구조를 건드리지는 않으면서 행동양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였다. 70년대 프랑스의 이 기묘한 제도적 부동성과 사회적 부동성 간의 대조적인 모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정체된 사회’이자, 가족과 남녀관계, 성 역할에 관련된 가치를 모두 포괄하는 용이함을 갖춘 사회였다.

수 대에 걸친 오랜 기간 동안, 프랑스인들은 날 때부터 나폴레옹 법전을 끼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프랑스인들은 누군가가 다른 이들의 위나 밑에 위치하지 않고 다른 의견을 낸다는 것을 생각도 못했다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평등을 사랑하고 차이를 싫어했다. 70년대에 프랑스인들은 방임주의 사회 속에서 갑작스럽게 깨어나게 되었다. 방임주의 사회에서 여성, 브르타뉴인, 젊은이, 성적소수자 더 나아가 이민자들은 더 이상 스스로를 감추고 ‘남들처럼’ 살지 않아도 되었다. 시대가 막장으로 가면서 동거계약이 결혼의 형태를 향하여 나아가고는 있었지만, 당시 혼외출생 건수가 법적혼 내 출생보다도 많았다 [...].

하지만 하나의 사회가 두 가지의 다른 속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일까? 프랑스인들은 일상에서는 방임주의적이면서, 단체생활에서는 권위적인 삶을 살았다. 또한 개인간의 관계에서 진실성과 투명성을 요구하면서, 사회적 관계에서는 불평등과 특권을 지켜내고자 하였다. 이 두 다른 사회의 양상은 한 사회에서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

앙드레 뷔르기에르(André Burguière), 역사학자, <영광의 60년대>, 누벨 옵세르바퇴르, 1964-1984년에 관련된 특별호 <20살이 된다는 것>, 1984년 11월.

1.첫 번째 문단을 참고하여, 밑줄 친 문장을 설명하시오. 
2.위 글에 나타난 1970년대 생활양식의 변화는 무엇인가?
3.글쓴이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들의 원인은 무엇인가?
4.글쓴이는 왜 ‘일상적 도덕 속의 방임주의적 사회’에 대해 이야기한 것일까?


자료4. 프랑스식 모델이 문제로 제기되다

새 시대의 주요 특징은 경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경제라는 주제는 시민사회의 해방과 함께 대두되었다. 물론 가족, 개인과 같은 비경제적 변화도 함께 나타났다. 이러한 자유화는 공권력과 사회간의 관계를 완전히 바꾸었다. 이 모든 변혁들은 ‘프랑스식 모델’에 반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한다는 것은 ‘정서적, 지성적 변혁’이 도처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뜻했다. 이 변혁은 국가 정체성을 완전히 다시 쓰는 것이었다.

유럽의 건설은 1945-1975년 사이의 수월했던 근대화 과정의 연장선이었다. 유럽의 건설은 프랑스식의 유럽이라는 이유로 비난 당했던 프랑스식 모델을 구해낼, 미테랑 대통령의 마지막 희망이 되었다. 그러나 미테랑주의자들의 기만이었다. 이 발상은 드골주의자들의 착각을 다른 식으로 재구성해낸 것에 불과했으며, 오늘날 그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유럽은 유럽의 정체성을 구현하는데 실패하였다. 유럽이 정체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특히 프랑스에서는 그에 대한 희미한 인식만이(반미주의의 정도에 따라) 유럽식 모델과는 따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는 일들을 해결 할 열쇠이다.

마르셀 고셰(Marcel Gauchet), 철학자, 잡지 르 데바(Le débat)의 편집장, 리베라시옹, 2006년 2월 25일자.


자료5. ‘이 모든 게 오래 전에 이미 터졌어야 했었지’

10년 전에 녹음된 프랑스 힙합그룹 쉬프렘 NTM(Suprême NTM)의 앨범 ‘폭탄 밑의 파리(Paris sous les bombes)의 수록곡 «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나?(Qu’est-ce qu’on attend) » 는 시대를 앞선 음악이다.

센-생-드니 출신의 2인조 그룹인 쉬프렘 NTM은 분노에 찬 랩을 선보였다.

Combien de temps tout ceci va encore durer

이 모든 게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

Ça fait des années que tout aurait dû péter

이 모든 게 오래 전에 이미 터졌어야 했었지

Dommage que l'unité n'ait été de notre côté

이 모든 게 우리 편이 아니지

Mais vous savez que ça va finir mal, tout ça

안 좋게 끝날 것을 알고 있지, 이 모든 게

La guerre des mondes vous l'avez voulue, la voilà

너희가 바라던 전쟁이 났지, 이렇게

Mais qu'est-ce, mais qu'est-ce qu'on attend pour foutre le feu

도대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

Mais qu'est-ce qu'on attend pour ne plus suivre les règles du jeu

더 이상 놀아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

<프랑스의 랩, 빈민가의 역사>, 르몽드, 2005년 11월 11일자


자료6. 스캔. 빌리에-르-벨(Villiers-le-Bel) 소요사태 때 일어난 도서관 방화, 2007년 11월 26일.


p.386


자료집


공화국의 가치


한 세기도 전부터, 프랑스의 학교에서는 프랑스시민의 사회화와 이민자들의 동화(1학년 교육과정을 참고)교육을 시행해 왔다. 1905년 법안으로 통과된 비종교성의 원칙은 가톨릭교회와 국가간의 합의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비종교성의 원칙은 공권력과 공화국 시민 교육간의 마찰의 가능성을 줄일 뿐 아니라, 개인적인 종교생활의 자유는 보장하였다. 똘레랑스(관용)의 기준 역시 프랑스 공화국 시민의 합의로 정해진 것이었다.


교육, 비종교성, 언어, 똘레랑스, 그 외에도 많은 요소들이 사회적 공유가치와 공화국의 가치에 대한 프랑스인의 정체성을 정의하게 되었다.


자료1. 학교에서의 종교적 표식 착용에 대한 법안

a.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연설, 2003년 12월 17일

비종교성이란 우리의 전통에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비종교성은 우리의 공화국 정체성의 중심에 있습니다. 비종교성을 다시 세우고 그 한계선을 수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 비종교성의 원칙을 지킬 것을 [...] 모든 프랑스 여성, 남성 시민들에게 요청 드립니다.

프랑스 시민들은 풍부한 다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종교의 다양성입니다. 이 기독교의 오랜 고장에는 2000년전으로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는 유대교의 전통 역시 존재합니다. 가톨릭의 정신은 종교전쟁으로 인한 분열을 넘고, 시민대혁명 후에 개신교들의 입지도 마침내 인정하였습니다. 이러한 개방의 정신을 통해 프랑스인들은 이슬람 전통 역시 프랑스의 한 부분으로써 받아들일 것입니다. 거대한 이데올로기들이 존재하고 있는 가운데, 반계몽주의와 종교적 광신이 점점 그 세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위험은, 분리를 원하는 세력들이 독립하는 것입니다. 배타주의가 힘을 얻는 것입니다. 위험은, 법률보다도 개인의 규칙을 우선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 프랑스는 공동체주의를 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동체주의는 우리의 역사, 전통, 문화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b.공립학교에서 ‘지나치게 종교색을 드러내는’ 종교적 표식 착용 법안에 대한 투표결과.

자료2. 국가

우리는 국가가 필요하다. 국가가 해체되었을 때, 박애정신은 더욱 고양될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각 민족간의 서로 다른 무시무시한 논리들을 보게 될 것이다. [...]

국가를 위해 확실히 기능하는 요소는 없다. 그렇게 기능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프랑스의 엘리트들이 개인의 이익과 교양으로 국가공동체의 정신을 다시 부활시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우리는 자포자기하고 붕괴할 것이다. 여러분이 역사에 대한 관점을 배제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을 돕지 않는 한,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 나는 이 국가적 차원의 논의를 지속할만할 용기가 있는 정치 권력(외국인에 대해 배타적이지도 않고, 자족적이지도 않은)이 우연히라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권력이 ‘시대는 변하고 있지만 우리는 과거이며 우리의 주요 문제에서 매여있습니다.’ 와 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위험에서 한층 멀어질 수 있을 것이다.


자료3. 이민과 동화

1960년에 시작된, 약 반세기에 걸친 이민 정책은 결국 실패인 것인가?

-이미 이민이라는 말 자체부터 명확하지가 않다. 일반적인 이민자들은 문제가 아니다. 성인 이민자들은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자녀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프랑스로 이민을 오는 사람은, 어째서 이민을 오게 되었는지를 알고 있다. 자신이 태어난 국가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러한 이민자들의 자녀는 아주 다른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들은 왜 자신들이 이곳에 와있는지를 모른다. 단지 그들의 부모가 왔기 때문에 오게 된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부모의 문화와 자신들이 정착하게 된 나라의 문화를 배우게 된다. 대체로, 자신들의 부모의 문화와 그와 함께 딸려오는 하류 인생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이민자녀들이 받아들이게 되는 프랑스 문화자체가 불명확하다는 것도 이유가 되지 않을까?

-사실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유럽의 국가정체성은 점점 잘 드러나지 않거나 의식할 수 없게 되었고 [...], 이런 점들이 국가정체성을 더욱 이해하기 힘들고 그에 동화되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국과 비교를 해보면 아주 명확하다. 미국이 프랑스만큼 이민자들에게 좋은 사회적 조건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융화능력은 흠 잡을 데가 없다. 그들의 규칙은 아주 엄격하다. 살아남거나, 죽거나. 그러나 미국은 유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확고한 애국주의와 미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있다. 그들의 자부심은 인류 역사에서의 모두가 성공할 권리, 자유, 민주주의의 나라로서의 미국의 자취에 대한 우월감을 동반하는 것이다.

마르셀 고셰(Marcel Gauchet)와의 인터뷰, 리베라시옹, 2006년 2월 25일자.


p.387


자료4.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로 남을 것이다’

물론, 모든 프랑스인들이 가톨릭신자인 것은 아니다. 물론 모든 가톨릭신자들이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정교분리법안을 통해 몇몇 종교, 특히 많은 수가 믿는 종교를 우선시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물론, 프랑스에서 종교는 사생활의 영역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이다.

프랑스는 기독교 국가라는 정체성 위에서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일성을 유지해왔다. 교회의 맏딸인 프랑스는, 교회의 세속적인 오른팔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프랑스에는 칼과 성수채, 군부와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 [...]

이런 거대한 분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의 것은 로마 황제에게, 신에게 속한 것은 신에게 돌려주라.’고 한 예수의 말을 잊지 않았다. 오늘날 기독교는 정치적 질서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에서는 완전히 벗어나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역설적인 것은, 기독교는 교의상 정치적 관점에서의 종교 해방과 비종교성의 지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렇지만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로 남을 것이다. 문화, 관습, 정신, 지리적 풍경, 프랑스의 모든 것은 전통에 종속되어 있다. 그 전통이란, 국민들의 사상에 젖어 들어가있으며, 국가의 업무를 책임지는 엘리트의 육성방침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제라르 이스라엘(Gérard Israël), 종교 역사학자, 피가로, 2003년 12월 9일자.


자료5. 스캔. 공화국의 가치

공화국의 단결과 불가분성.

자유,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1793년 작, 프랑스 대혁명 박물관, 비질(Vizille)의 성에 보관.


자료6. ‘내가 프랑스 시민이기에 골 족이 나의 조상이다’

분명하게도, 나의 조상은 골 족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프랑스인이며, 프랑스 역시 나를 받아들였기에 골 족을 조상으로서 인정할 수 있다. 내 개인적 뿌리를 잊거나 부정하지 않더라도, 나는 골 족을 내 조상으로서 인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프랑스인이고, 프랑스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라틴, 게르만, 브르타뉴, 노르망디 심지어는 아랍인들이 프랑스에 이바지한 바와 별개로, 이 나라의 선조는 골 족이다.

누군가는 이 주장이 역사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라 반박할 것이다. 그들은 켈트족이 다른 민족을 침략하면서 오늘날의 프랑스의 국토에 정착한 것이라는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주장이 신화와 같은 것이라 반박하더라도 이는 별로 중요치 않다. 이 신화가 국가정체성을 만들고, 우리를 하나의 국가로 단결하게 하기 때문이다.

라시드 카시(Rachid Kaci), 카빌리아계 프랑스인, FLN지지자의 아들, ‘프랑스 플뤼(France plus)’ 의 창립자, <겁쟁이 공화국>, 시르트 출판사, 2003년.

자료7.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말하는 공화국의 가치

4일간의 1차 투표 후, 공약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번 대선의 진정한 주제는, 가치입니다. 과거부터,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하나의 현안이 있어왔습니다. 1997년에는 청년일자리와 주당 35시간 노동법이었습니다. 2002년에는 안보였죠. 이번 해에는 모든 것이 현안입니다. 노동, 교육, 이민, 안보, 이 모든 현안이 국가정체성에 위기를 불러왔습니다. 저의 공약은 프랑스인들이 잘 알고 있는 가치의 혁신입니다. 나는 정치적 싸움이나 이데올로기 싸움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 매일 밤, 저는 교육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68 혁명의 유산을 비난하면서 말이죠. 저는 도덕적, 문화적, 지성적 상대주의를 지탄합니다. 나의 주장에 대해 쏟아지는 좌파의 비난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겠죠. [...]

프랑스는 우파 성향으로 기울고 있는 것일까요?

많은 노동자들, 그리고 좌파들은 국가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합니다. 저는 국가적 정체성에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지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니콜라 사르코지와의 인터뷰, 2007년 4월 18일.


문제

A.자료에서 문제 추출하기

1.이 법률의 투표결과가 대다수의 합의에 부합하는지 증명하라(자료1)

2.어째서 국가는 필수불가결한가(자료2)?

3.이민자들이 동화되게끔 하는 요소는 무엇인가(자료3)?

4.‘기독교는 교의상 비종교성의 지침이 될 수 있다’의 의미를 설명하시오(자료4).

5.위 자료에 드러난 글쓴이의 모순이 있는가(자료6)? 이 모순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6.어째서 사르코지 대통령은 ‘이데올로기 싸움’이라 말했을까(자료7)?

B.자료 관련 짓기

7.비종교성의 가치와 관련되어있는 자료는 무엇인가?

C.작문

8.위 자료들을 참고하여, 시라크 대통령이 ‘공동체주의는 우리의 역사에 반하는 것입니다’라는 발언을 통해 암시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시오.


p.388


복습자료

필수 암기 연도

■ 1944 : 여성 투표권

■ 1954 : 피에르 신부의 빈민구제운동

■ 1967 : 피임에 관한 노이비르트 법안

■ 1974 : 투표권 행사가 가능한 성년이 18세

■ 1975 : 임신중절에 대한 벨 법안

■ 1993 : 파리 디즈니랜드 오픈

■ 1999 : 사회연대협약(PACS)이 생기다


필수


1.영광의 30년의 프랑스

■1945-1975년 동안, 프랑스 사회는 빠르게 변화했다.

-프랑스인의 일상이 바뀌었다. 삶의 질(가계의 소비 증가)과 생활 수준이 더욱 상승했고, 주거 환경도 좋아졌다.

-대량소비가 나타났다.

-여가활동의 비중이 이전에 비해 훨씬 커졌다.

2.대중문화의 대두

■대중문화의 발달로 인해 여가생활의 획일화가 점점 더 두드러지게 되었다

-전체 인구의 학업 수준이 상승하면서, 잡지와 서적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라디오, 영화, TV로 대표되는 이미지와 음성매체가 프랑스인의 문화생활의 주요 매체가 되었다.

3.계속되는 변화

■1975년 이후, 생활 양식과 문화 생활의 변천은 영광의 30년이 끝나고 나서 1965-1985년도의 결정적 20년에도 계속 된다.

■집단행동과 가치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큰 변화를 겪는다.

-성생활(성적 개방성)

-가족(이혼이 더욱 쉬워졌지만 가족적 가치에 대한 애착은 유지되었다)

-기존의 권위와 위계질서에 대한 문제제기

■ 공화국의 가치, 비종교성, 국가적 단결성이 정치적 화두로 떠올랐다.


혼동하지 않기

가톨릭, 이슬람을 ‘믿다’ 와 가톨릭, 이슬람 ‘종교생활을 하다’ 의 차이

스캔. 2006년의 프랑스 종교 현황

51% 가톨릭

31% 무교

5% 일반 가톨릭 신자

4% 이슬람

3% 개신교

1% 유대교

5% 기타 응답


잡지 ‘종교의 세계’에 실린 CSA 설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 다음의 종교를 믿는다.

-가톨릭 : 전체 인구의 51%, 31,620,000 명

-이슬람 : 4%, 2,480,000 명

-개신교 : 3%, 1,860,000 명

-유대교 : 1%, 620,000 명 → 다음의 종교생활을 한다.

-가톨릭(정기적으로, 혹은 자주 미사에 간다) : 17%, 5,375,400 명

-이슬람 (1주일에 1회 이상 예배에 간다) : 5-10%(2004년 12월 공안과 자료), 124,000 – 248,000 명


대중문화(culture de masse)와 민중문화(culture populaire)

→ 대중문화라는 표현은 미국에서 나타나, 서유럽에서는 1950년대부터 쓰인다. 같은 형태의 문화 수단(음반, 영화, 잡지)을 저렴한 가격에 대량 소비, 배포한다는 것이 대중문화의 특징이다.

→ 민중문화 : 민중에 의해 생산된 다양한 문화를 의미한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대중문화의 출현이 민중문화를 와해했다고 보고 있다.

p.389


에세이(8/9)


주제: 1945-2001년의 프랑스인들의 여가생활의 변화


참고자료. 스캔.

휴가를 떠난 프랑스 여인, 1958년

연표

■ 1949. 6월 : TV 방송 시작(시청자 297명)

■ 1950 : 클럽메드 설립. 발레아르 군도에 첫 리조트가 세워짐.

■ 1953 : ‘문고판’ 서적 발간

■ 1956 : 3주간의 유급 휴가

■ 1967 : 컬러 TV의 등장(두 번째 채널 개설)

■ 1969 : 유급휴가 4주로 연장

■ 1970 : 70%의 프랑스 가정이 TV소유

■ 1971 : 아프리카에 첫 ‘클럽 메드’ 리조트 오픈

■ 1982 : 유급휴가 5주로 연장. 주당 노동시간은 39시간으로 제한.

■ 1984 : 첫 유료채널 카날 플뤼스(Canal +)의 등장. 전세계 1000대의 컴퓨터가 인터넷에 연결됨

■ 1985 : 케이블 TV의 최초의 방송채널들 개설

■ 1989 : 아스테릭스 파크 오픈

■ 1991 : 라이언에어(RyanAir)설립. 유럽의 첫 저가 항공사중 하나

■ 1992: 전세계 백만여대의 컴퓨터가 인터넷에 연결.

■ 2000 : 주당 노동시간 35시간으로 감소.

■ 2001: M6 채널에서 첫 리얼리티쇼(Loft story) 방송


문제해법

A.주제 분석하기

주제는 간단하지만, 용어 사용에 있어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

예) 여가활동이란 무엇인가? 여가활동은 활동뿐만 아니라 행동과도 관련이 있다.

B.주제의 문제의식 생각하기

연표와 자료를 참고해서 어떤 관점으로 주제를 고려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예) 여가 시간의 증가로 프랑스인들은 문화생활과 독서를 하게 되었나?

C.개요 구상하기

중심생각과 연표를 이용해서 개요를 짜야 한다.

두 가지 관점에 생각해보자.

-해당 시대에 프랑스인이 즐겼던 여가는 무엇인가?

-어떤 식으로 연대를 구분할 것인가?

-경제적 관점에 따라(영광의 30년, 세기말의 침체)

-다른 사건에 따라(유급휴가의 연장, 새로운 형태의 여가가 등장)

전개 구성을 선택한다.

-주요주제를 중심으로(여가활동 변화를 강조 : 라디오 청취, 영화보기, TV 시청 등)

-중요한 시간대를 중심으로(영광의 30년과 그 뒤 시대 간의 전통의 단절이나, 신기술 혹은 새로운 여가 형태의 출현을 강조)


p.390


전체자료 연구(17/17)

주제: 1960-1981년 동안 프랑스인의 정치적 삶에 TV는 어떤 역할을 하였나?


문제

1부

1.정치권력과 TV와의 어떤 관계가 자료2에서 나타나는가?

2.자료1, 자료2, 자료4에 드러난, 정치권력에 있어 TV의 용도는 무엇인가?

3.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가 프랑스인들의 정치생활과 TV간의 관계에서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시오(자료3, 자료5)

4.TV가 정치적 쟁점이었다는 것을 설명하시오(자료2, 자료3)

5.어떤 자료들이 정치인들의 TV를 이용하는 방식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가? 무엇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가?

2부

자신의 지식과 자료들을 참고했을 때, 1960-1981년 사이의 프랑스인들의 정치생활에서의 TV의 역할은 무엇인가?


자료1. 스캔. TV 토론

a.1974년 지스카르 데스탱과 미테랑 후보의 대통령 선거 때, 첫 번째 생방송 TV토론을 준비하는 모습. 미테랑 대통령이 ‘당신은 과거의 사람입니다.’ 라는 발언을 한 토론이다.

b.1981년 지스카르 데스탱, 미테랑 후보간의 토론. 이 토론에서 미테랑 후보는 지스카르 데스탱 후보에게 “저는 당신이 가르치는 학생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연표

■1960년대 초: TV채널이 한 개뿐이었으며, 국가가 TV와 라디오 중계권을 RTF(프랑스 국영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국; Radiodiffusion television française)를 통해 독점하고 있었다. 이후 RTF는 ORTF로 바뀐다.

■1960 : 프랑스 가정의 13%가 TV수신기를 소유

■1964 : 2 번째 TV채널 개설

■1965 : 대통령 선거. 첫 번째로 TV를 이용한 선거 유세가 치러졌다.

■1968 : TV수신기를 소유한 프랑스 가정이 62%로 증가.

■1970 : 2개의 TV보도국이 생겨, 둘 간의 경합이 생김.

■1974 : 대통령 2차 투표 전, 두 후보간의 첫 번째 생방송 TV 토론이 중계되었다. 오후 8시부터 투표 결과 첫 예측

■1974년 말: ORTF 해체

■1981 : 국가의 라디오 방송 독점 종료

■1982년 7월 29일 법안 : 1조- ‘시청각 소통은 자유롭다.’

■1982 : TV수신기를 소유한 프랑스 가정이 92%로 증가.


p.391


자료2. 드골과 TV

매일 보는 저녁 8시 뉴스가 끝나기 전까지 잘못된 것은 없었다. 드골 장군이 “나의 TV”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나운서의 어조에 그다지 만족하지 않았던 것인지, 신경에 거슬렸던 것인지 그냥 “TV”라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민망했는지, 정보통신부 장관을 소환해서는 얼굴을 붉히며 “어제 저녁에 당신의 TV를 봤다” 는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드골장군은 프랑스에 TV방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그 시점에 정치권력에 접근할 기회를 얻었다. 오늘날 그는 작은 TV화면에서 약 천만 명의 프랑스 국민을 향해 말한다.[…] 1958년에 그의 연설을 들었던 사람은 몇 만 명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드골의 두 번째 기회는-그가 어느 정도는 스스로 만들어낸 기회였다-TV를 정치적 선전의 수단으로 기가 막히게 활용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어떤 다른 인물보다도 TV의 기술적 조건을 훌륭히 이용했다. 대통령 유세를 하는 동안 TV화면 안에 늘어서있는 정치지도자들 곁에서, 드골은 여러 들러리들에게 둘러싸인 스타처럼 보였다. 그는 글을 쓰고 암기하는 것에는 탁월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연설을 제대로 할 줄 알았다. 목소리를 적절하게 가다듬을 줄 알았고, 나쁜 버릇도 잘 조절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알았다. 그는 발성 레슨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피해야 할 제스처와 억양, 말의 리듬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그는 TV에 있어서 진정한 전문가였다. 또 극적인 상황은 그가 가장 선호하는 것이었다. 그는 가장 힘든 순간에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수백만의 프랑스인이 그와 함께 천천히 늙어갔다. 그는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 브라더(Big Brother)’가 아니라,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할아버지로 삼고 싶은 사람’ 이라 표현한 것처럼, 늙은 삼촌에 가까웠다. 또한 드골 장군의 개인적 인기는 그의 정치와 정부체제와는 거의 별개의 것이 었다.

피에르 비앙송-퐁테(Pierre Viansson-Ponté), 르몽드 기자, <드골주의자들>, 쇠이 출판사, 1963년.


자료3. 1968년 5월의 대자보

에콜 데 보자르의 대중문화예술 작업

자료4. 우리는 TV 덕에 승리했는가?

1965년, 프랑스인들은 미테랑과 르카뉘에가 드골 장군을 비난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디저트를 오랫동안 금지 당한 어린아이들처럼 말이다. 보통선거로 치러진 첫 번째 대선은 ORTF(프랑스 라디오텔레비전 국영방송국)에 대한 드골주의자들의 일방적인 태도를 완전히 꺾어놓았다. 그 후로 출마자들은 긴장과 동요 속에서 망설이며, 반복적인 연습과 훈련을 거쳐왔다. 미테랑은 1974년에 있었던 지스카르 데스탱 후보와의 면대면 TV 토론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대단한 이미지 전략가였던 지스카르 데스탱은 1981년에, TV가 있었던 투표 결과 자체를 일군 것은 아니었다는 의견을 전했다.

TV에서 유세를 한다는 것은 모험적인 일이었다. 1974년에 대통령 후보간의 TV토론이 처음 도입되었다. 두 진영간의 토론은 모든 열화와 같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 1981년의 토론은 편집이 없는 방송이었다. 미테랑 후보가 지스카르 데스탱이 자신을 공격하는 동안, 자신의 자료를 뒤적거리는 모습이 1974년의 대선결과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 대선의 역사와 TV의 역사는 동시에 쓰여졌다.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프랑스에서 TV와 정치권은 멀어지기 힘든 것이다.

텔레라마, 1995년 3월 29일.


자료5. 정치권력과 TV의 지위

프랑스 라디오텔레비전 국영방송국(ORTF)는 공공서비스, 방송 전반의 질을 보장한다는 특성을 지켜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 역할을 완전히 해내기 위해서, 그 내부에서 경쟁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 저는 현재 2개의 채널에 해당하는 2개의 독립된 단체를 설립할 것을 요청 드린 바 있습니다.

이 두 단체의 장은 자유롭게 언론인을 선택할 수 있으며, 자신의 유일무이한 권위 하에 여러 수단을 이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점차적으로 언론인들의 직업적 양심과 자유가 있으며, 최상의 정보와 객관성을 가진, 책임감 있는 기구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국영방송국은 모두에게 열려있어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정치단체, 그리고 전국의 사회직능별 단체가 자주 의견을 피력할 수 있도록 하는 TV의 시대가 올 수 있도록 해주시길 요청 드립니다.

자크 샤방-델마스(Jacques Chaban-Delmas), 국무총리, 국회연설, 1969년 9월 16일

원하던 원하지 않던, 방송언론인들은 다른 언론인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들에게는 더 많은 책임이 있습니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TV는 프랑스의 목소리입니다. 프랑스인들이, 외국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명백한 두 가지 이유로, 신중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방송언론인들의 책임감이라는 것은 스스로가 행사할 수 있는 여러 수단의 기능이자, 그 수단인 TV는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위와 같은 이유로 방송언론인들은 독점적인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기자회견, 조르주 퐁피두 전대통령, 1973년 9월 21일.


제 20 장: 세계 속의 프랑스

p. 392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였던 프랑스는, 가까스로 국제연합(UN)의 ‘영광스러운’ 4번째 자리를 1945년에 차지하게 된다. 냉전과 식민지의 해방, 1956년 수에즈 원정의 실패는 그 자리의 헛됨을 빠르게 드러내고 있었다.

프랑스는 더 이상 구소련이나 미국과 같은 강대국의 대열에 끼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중요한 주체로 거듭나게 된 유럽연합의 창립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여전히 세계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 해야 할 것이다.

유럽의 대국이자, 중간국으로 거듭난 프랑스는 여전히 세계적 영향력을 끼칠 수단과 야심을 갖고있는가?


자료1. 스캔. 식민 열강의 모습

프랑스 연합. 1950년대 초의 교과서 지도.

‘프랑스 연합을 잃는다는 것은, 우리의 독립을 대가로 치러야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드골장군, 1947년 5월 15일


p.393


자료2. 국제 협력작전에서.

NATO 소속으로 2006년에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프랑스 군인.

‘군 편성 법안은 유럽의 안보를 수호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세계평화의 유지 및 재건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모든 종류의 활동에 대한 군사적 개입, 우리의 행동과 결정에 대한 자주권을 보장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세계 속에서의 프랑스의 안녕과 입지를 보장할 것입니다.


p.394 1) 중간국가

A.제국에서 유럽이 되기까지

■ 1945년에도 프랑스 국민의 대부분에게 프랑스는 여전히 거대한 식민지(1200만 제곱 킬로미터, 7000만의 인구)를 갖고 있는 대국이었다. 1940년 세계 2차대전에서 독일에 패배로 인한 손해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식민지들은 프랑스의 ‘입지’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1946년에 제정된 프랑스연합 헌법은 프랑스 해외영토(TOM), 해외도(DOM)나 베트남, 캄보디아, 튀니지, 모로코, 토고, 카메룬과 같은 기타 관련 영토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을 유지했다. 결과적으로 많은 독립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알제리와 마다가스카르 탄압, 알제리 전쟁 이후 이어진 인도차이나 전쟁). 프랑스연합은 프랑스의 주 무역상대국이었으며, 1955년 프랑스의 투자의 20%가 이 지역들에서 이루어졌다.

■ 마셜플랜을 받아들이면서, 프랑스는 서방 블록에 들어가게 되었다(1951년 베르사유 근처에 유럽연합군 최고사령부’SHAPE’가 설치되었다). 드골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자주성을 잃는 것이라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냉전은 프랑스가 ‘미국의 우산’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 1956년에 수에즈 원정의 실패는 프랑스가 더 이상 세계적 강대국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냈고, 1957년에 시작된 유럽연합의 건설이 시급하다는 것을 프랑스의 지도자들이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제5공화국에 유럽연합의 건설은 계속되었으며, 프랑스는 식민지 시대에서 벗어나게 된다. 프랑스와 독립한 프랑스의 옛 식민지들 일부들에 의해 ‘프랑스 공동체’가 1958년에 세워지지만, 1962년에 사라지게 된다. 이제는 유럽이라는 체제하에서, 중간국가인 프랑스가 세계적 명성을 떨칠 수 있게 되었다.

B.거대한 야망들 자료2, 3

■ 하지만 프랑스는 그저 그런 국가는 아니었다. 드골 정부는 프랑스의 ‘입지’와 ‘자주성’에 대해 우려하였지만, 프랑스의 주권에 대한 침해에 대해서는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프랑스는 NATO의 합동군사사령부에서 탈퇴하였다. 또한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에도 가장 마지막에 조인했고, 2005년 유럽헌법 제정에 대한 국민 투표에도 대다수가 반대함으로써, 주권을 상실할 수도 있는 위험에 대한 우유부단한 태도를 다시 한번 보였다.

■ 프랑스는 ‘인권의 나라’ 임을 자처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자유와 평등의 메시지를 전세계에 전하는 전령이 되고자 하였다. 그러한 태도의 일환으로, 1989년 ‘북경의 봄’을 탄압한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자주성과 인권을 지키고자 하는 대국으로서, 프랑스는 세계의 중재자 역할을 도맡았다.이를테면 냉전 중에 동유럽국가들과 접촉한다거나, 선진국-개도국간의 대화와 지역분쟁의 중재에 나섰다.

C.프랑스의 강점 자료1, 4, 5

■ 식민시대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해외영토의 인구는 200만을 넘는다. 프랑스 해외영토는 주로 열도(DOM-ROM, COM, POM)였는데, 이들을 통해 프랑스는 드넓은 영해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약 1100만 제곱 킬로미터의 면적).

■ 프랑스는 국제연합(UN)의 창립국가이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하 안보리)의 자리를 얻게 되었다. 프랑스는, 핵의 보유와 1996년 이후 징병제 병역 복무 중단 이후에 창설한 모병 군대를 통해 핵을 억제함으로써 안보를 유지하는 국가인 것이다.

■ 세계 6위의 GDP 규모를 갖고 있는 프랑스는 G8의 회원국이다. 유럽연합(EU)의 최대농업 국이기도하며, 농산가공업과 서비스산업의 수출규모도 크다. 프랑스는 토탈(Total), 다논(Danone), 로레알(L’Oréal)로 대표되는 여러 세계적 기업도 소유하고 있다. 프랑스는 많은 외국 자본을 유치하고 있으며, 명품이나 첨단기술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드높은 명성을 가지고 있다.


어휘


DOM-ROM, COM, POM : p.402의 ‘혼동하지 않기’ 부분 참고.

SHAPE(유럽연합군 최고사령부; Supreme Headquarters Allied Powers Europe): NATO에 속한 유럽의 주요 국가들을 일컫는다.


자료1. 1952-1970년의 프랑스의 교역국.

1.1952년 프랑스에게 있어서 프랑 통용 지역(프랑스 연합)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2.1959년 이후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자료2. 프랑스, 인권의 발상지

프랑스대혁명 200주년은, 혁명이 일어난 지 200년도 넘은 오늘날 우리에게 세계에서 민주주의의 개념이 살아 숨쉬고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 전 세계에는, 인류의 발전을 이끈 희망, 평등, 자유와 인권, 군비축소와 박애와 같은 1789년 도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이 퍼져있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국가들이 프랑스가 프랑스의 이미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대혁명의 이념들을 수호하고 지지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789년의 혁명가들은 그들의 후손들의 지도자가 아닙니다. 오늘날, 선조들의 사상은 드넓은 프랑스의 비옥한 토지 곳곳에 스며들어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에도 말입니다. 브라질이나 다른 국가에서도, 200년이 지난 지금 대혁명의 이념을 찾아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도 거대한 민중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은, 프랑스의 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드위주 아비스(Edwige Avice), 외무부 차관, 1989년 7월 12일.

1. 프랑스의 국가 이미지에는 어떠한 이념들이 관련되어 있는가? 
2.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은 전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p. 395


자료3. 1965년 프랑스의 자주성

1965년, 우리는 발전을 곧 의미하기도 하는 프랑스의 자주성을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자주성이라 말하겠습니다. 프랑스의 자주성은 국가가 스스로의 주인이 되고 국민을 통치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끝난 해와 새로 올 해는 정치, 경제, 통화, 국방의 분야에서 프랑스의 자주성을 보이고, 공고히 하는 시기입니다. 이것은 ‘초국가’, 혹은 ‘통합’, ‘범대서양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제도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도들은 현실의 헤게모니이기에, 이를 유지하고 우리의 동맹국들과의 긴밀한 협동에 응할 것입니다. 우리는 서유럽국 연합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하고, 개발도상국의 국민들을 위한 원조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임할 것입니다. [...] 중국과의 수교를 재개하고, 동유럽국가들 내에서 평화를 향해 진일보하는 개혁이 이루어짐에 따라, 동유럽국가들과의 교류를 확대할 것입니다. 프랑스와 세계와의 관계가 재개되면서, 전세계의 인류가 프랑스의 역할에 대해 유례없는 기대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드골 장군의 연설, 1964년 12월 31일.

1. ‘초국가’, ‘통합’, ‘범대서양주의’적이라는 표현을 설명하시오. 드골 장군이 의미한 ‘제도’란 무엇인가? 
2. 위 자료에 따르면, 드골 장군이 뭔하는 자주성이란 무엇인가?
3. 드골 장군이 말하는 전세계에서 프랑스의 역할은 무엇인가? 


자료4. 스캔. 랑부이예(1999년)에서 있었던 세르비아와 코소보의 평화회담, 플랑튀(Plantu)작.

1.세르비아와 코소보가 만난 목적은 무엇인가?
2.플랑튀에 따르면, 이 회담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자료5. 스캔. 세계로 뻗어나가는 다논. 2006년 연간 보고서, 출처: www.danone.com

1.다논(Danone)의 사업이 가장 잘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은 어디인가?
2.이러한 해외진출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된 것일까?


p. 396.


2) 프랑스는 세계적 영향력이 있는가?

A.제 3세계의 개방 자료1, 5

■ 블록 체제를 반대했던 드골은, 제3세계에 대한 접촉과 순방을 늘렸다. 드골주의자들은 아프리카와 아랍 지역으로 이 움직임을 확장했다.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지역이 국제원조 상호조약 하에, 가장 많은 기술, 군사적 원조를 받았다. 프랑스는 과거의 식민지에 치안과 안정상태를 확보하는데 도움(40년간 약 60회의 개입)을 주었다. 이러한 긴밀한 관계를 통해 프랑스는 오랜기간 동안 아프리카를 ‘세력권’ 하에 둘 수 있었다.

■ 21세기 초, 아프리카는 더 이상 프랑스의 ‘세력권’이 아니었다. 2002년 코트디부아르 내전에 대한 프랑스의 외교적, 군사적 개입은 평화를 되찾는데 되찾는데 기여하지 못했다. 프랑스는 코트디부아르 민족주의자, 즉 ‘애국주의자’들에게 거센 비판을 당했다. 프랑스는 점점 커지는 미국의 영향력을 저지하기 위해 UN, 아프리카 연합과 협력해야 했다.

■ 아프리카에도, 중동(1991년 걸프전)이나 발칸 국가(코소보 전쟁와 1999년 세르비아 폭격)들, 탈레반 정권에 맞서고 있던 아프가니스탄과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차원에서 프랑스가 개입해 있었다. 이러한 활동들을 하면서도, 프랑스는 2003년에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개입에 대해 맞설 수 있었다.

B.문화적 명성 자료4

■ 프랑스는 여전히 문화 종주국이다. 오늘날 프랑스어 사용인구는 전세계적으로 1억 8000만 명에 달한다. 또한 프랑스어는 UN, EU, 올림픽의 공식 언어이며, 20여 개국이 프랑스어를 공식언어로 채택하고 있다. 1883년에 창립된 알리앙스 프랑세즈(Alliance française)에서는 138개국에 걸친 40만명의 학생들이 프랑스어를 배운다. 알리앙스 프랑세즈는 전세계적으로 프랑스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세워진,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프랑스어 교육기관(15만 명의 학생이 있다)이다. 프랑스어 고등교육을 위한 170개의 과정이 개설되어 있다.

■ 1969년에, 프랑스어권 국제 기구(OIF; l’Organisation internationale de la francophonie)가 출범한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총 68개의 아프리카, 유럽(예: 스위스), 아메리카(캐나다), 그리고 아시아(예: 베트남)국가가 가입했다. 2년마다 공식 회담이 열린다. 프랑스어 활용을 보호하고, ‘프랑스어 사용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국가간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했다. 21세기 초에는 안보와 민주주의의 증진까지 그 활동영역이 확장되었다. 전 세계에서 프랑스어채널(1984년 창설된 TV5, 2007년 창설된 프랑스24)을 시청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프랑스의 문화적 영향력을 더욱 확장시켰다.

■ 1990년 초에, 프랑스는 ‘문화적 예외’라는 법조항을 다른 유럽국가들에 대해 관철시킨다. 문화적 예외란, 몇몇 문화 분야의 미국화를 제한하고 프랑스 영화산업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C.국수주의적 움직임 자료2, 3, 6

■ 1950년대에 프랑스는 유럽 연합의 건설에 참여한다. 그러나 몇 십 년이 흐르면서, 여론이 불가피한 ‘유럽연합의 건설’이 진행되는 것에 대해 신중해지기 시작했다. 프랑스인들은 공동체의 ‘일방적 결정’에 대한 비난에 민감해졌다.

■ 많은 프랑스인들이 국가의 자주성이 위협받는 것과 점점 확대되는 유럽에 프랑스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것, 한때는 부러움을 샀던 프랑스식 사회 모델에 종말이 오는 것에 대해 우려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주권과 자주성을 잃고, 프랑스의 몰락으로 느끼게 되면서, 프랑스 내부에 있기만을 원하는 ‘유럽 회의론자’가 나타났다.


어휘

Coopération(국제원조) : 기술 원조(의사, 기술자, 교사들을 파견하는 것), 경제적, 금전적 원조(차관 제공)

Exception culturelle(문화적 예외) : 문화 서비스나 상품은 일반 상품처럼 취급될 수 없다는 원칙.


자료1. 프랑스와 이라크 전쟁

오늘날에 무력의 사용은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전쟁에 대한 대안은 존재합니다. 그것은 면밀한 조사를 통해 이라크를 무력화 하는 것입니다. [...] 이 국제연합의 전당에서, 우리는 이상의 수호자이며, 양심의 수호자이기도 합니다. 무거운 책임감과 크나큰 명예를 지고, 우리는 평화를 위해 비무장화를 우선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말하는 것과 같은, 프랑스와 같은 오래된 국가, 유럽과 같은 오래된 대륙은 전쟁과 식민지화와, 폭력을 겪었습니다. 프랑스는 미국과 다른 국가에서 온 투사들에게 자유를 빚졌다는 것을 알고 있고, 잊지 않고 있습니다. [...] 이러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단결해야 합니다. 모든 국제사회의 참가국들이 단결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힘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도미닉 빌팽의 연설, 외무부 장관, 이라크 군사개입에 관련된 UN의 토론에서, 2003년 2월 14일.

자료2. 유럽에 대한 3회의 프랑스 국민투표 결과.

1972: 덴마크, 아일랜드, 영국의 EEC가입

1992: 유럽연합에 대한 마스트리히트 조약

2005: 유럽의 건설에 대한 조약 제정


p. 397


자료3. 스캔. 1962년 7월 랭스(Reims) 성당에 있는 드골과 아데나워(Adenauer).

서독 수상의 첫 프랑스 공식 방문 때 찍은 사진이다.


자료4.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문화적 예외’

문화가 상업에 굴복해서는 안됩니다. 세계화라는 인류의 새로운 도전에 대응할 무기는 문화에 있습니다. 문명화의 충격과 시대에 도태, 자기정체성의 경직, 국수주의적, 종교적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은 문화입니다. […] 이것이 프랑스의 신념입니다. 이것이 우리 문화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신념입니다. 우리는 교류를 할 준비가 되어있으며, 획일화라는 거푸집을 거부할 것입니다 […]. 도서정책, 영화산업진흥책 […], 세계에서 프랑스 문화산업을 진흥할 수 있는 정책들. 그렇습니다. 국가와 공권력이 개입하는 것은 프랑스의 전통이자, 힘이며, 예술가들과 창조자들을 지원하는 적법한 행위입니다.

엘리제궁에서의 연설, 문화에 대한 국제회담, 2003년 2월 2일


자료5. 스캔. 프랑스 비정부 기구

2004년 12월 26일 발생한 쓰나미 이후에 인도네시아 어린이들에게 예방접종을 하고 있는 모습.


자료6. 세계에서 프랑스의 입지에 대한 2가지 의견

a.냉전 이후 체제의 세계에서는 […] 프랑스의 국제적 입지는 국가자주성이라는 개념에 따라 완전히 다시 재정립되었다[…]. 오늘날, 프랑스는 세계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고 있다. 지정학적 혼란 속에서, 민주주의는 새로이 생겨나는 위험에 대한 대응책이자 동시에 협조의 원칙이 되었다. 세계의 분열과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반면 프랑스의 외교는 [...] 추상적인 단어들을 늘어놓음으로써 구체적인 제안을 하는 것은 교묘하게 피하면서도, 비판적인 태도(미국에 대하여)를 취했다. 프랑스는 이런 것들-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의 헤게모니, 유럽에서의 영국의 리더십 –은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는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부인할 수 없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니콜라 바브레즈(Nicolas Baverez), <몰락하는 프랑스(La France qui tombe)>, 페랭 출판사, 2003년.

b.좌파던 우파던, 대다수의 여론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하나는, 프랑스는 더 이상 ‘중간국가’밖에 되지 못하며, 더 이상 영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로 인해 ‘국제사회’에서의 프랑스의 결정권이 예전 같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더 이상 유럽에 영향력이 없다는 생각은 틀렸다. 세계에는 프랑스의 영향력, 문화적, 정치적 등등의 수단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그리고 프랑스의 대외정책이 필요한 곳들이 있다.

위베르 베드린(Hubert Védrine), 외무부의 사회당 소속 전(前) 장관, 2007년 4월 22일.

1. 니콜라 바르베즈는 프랑스의 외교에 대해 어떻게 분석했는가?
2. 니콜라 바르베즈는 프랑스 몰락의 원인을 어디서 찾았는가?
3. 위베르 베드린은 프랑스가 세계적 영향을 갖고 있다는 근거로 어떤 것을 제시하였는가?


p.398


중국인이 보는 프랑스와 프랑스인

프랑스는 공산주의 중국을 1964년부터 인정하여 문화와 상업 교류관계를 맺었다. 1976년에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중국은 개방정책을 시행하였으며, 엄청난 경제 성장률(연간 약 11-12%)을 보였다. 2006년에 약 60만명의 중국인 관광객들이 프랑스를 방문했다.

중국은 21세기에 엄청난 영토와 인구, 그리고 군사력과 핵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또한 중국은 미래에 예정된 경제대국이며, 초강대국이 된 미국의 유일한 경쟁국가로 예상된다.

중국의 시각에서, 프랑스는 중국의 오랜 교역국이자, 비판자이다. 프랑스는 주기적으로 중국정부에 의한 심각한 인권침해(티베트에 대한 정치적 종교적 탄압, ‘북경의 봄’ 탄압, 정치적 반대세력의 추방과 처형, 체포, 중국 공산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 금지, 언론의 자유 부재, 산아 및 인구제한 정책 등)을 비난하고 있다.


자료1. 스캔. 북경 근처에 메종 라피트(Maisons-Laffitte)를 본 따 지은 성

중국의 백만장자인 장 유첸(Zhang Yuchen)이 건설한 중국판 메종 라피트 성(프랑스 이블린에 위치)에서 정원사들과 함께 찍힌 사진.


자료2. 스캔. 중국 시각에서 본 세계.


p.399


자료3. 스캔. 난징의 루이비통 매장의 손님들


자료4.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来)가 본 프랑스의 대외정책

우리 미국인들은 퐁피두 대통령과는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라고 저우언라이 총리가 얘기했다. 또한 그는, 프랑스의 자주성 선언은 우리에게는 거슬릴 수 있지만, 우리는 프랑스가 유럽의 어떤 다른 국가들보다도 서방의 안보를 강화하는, 강경한 대외정책을 펼쳐왔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전략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이따금씩 우리는 프랑스가 독일이 러시아의 편에 서려 했던 것을 저지했던 강국이라는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헨리 키신저의 전언,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미국과 중국의 화합을 이끌어낸 장본인.

1973년 2월의 발언, 헨리 키신저의 보고, 격변의 시대(Years of Upheaval), 파야르 출판, 1982년.

자료5. 스캔. 중국에서 프랑스 시장의 비중

Janv-nov : 1월-11월

Parfum : 향수

Eaux de vie : 독주

Cosmetique :화장품

Vin : 와인

Medicament : 의약품

Turboreactuers : 터보 제트엔진

Voitures de tourisme : 자가용


자료6. ‘어떻게 21세기가 되었는데도 저런 것을 믿을 수가 있을까?’

불과 몇 년 전인 1995년-2002년 사이에, 대부분의 중국 언론들은 프랑스를 빅토르 위고, 샤넬, 지네딘 지단의 나라라고만 알고 있었다. [...] 이라크 전쟁 이후부터, 우리는 자크 시라크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가 바로 미국인들에게 ‘아니오’라 말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낭만의 나라인 프랑스는 정치적 국가, 특히 미국과는 다른 나라가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만약 국가적, 외교적 자주성을 고수하는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가, 어떤 또 다른 지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더 나아가 중국과 같은 개발도상국에게 대안이 될 수 있을 지가 궁금했다. [...] 그렇지만, 나는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 상하이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나는 아를레트 라기예(Arlette Laguiller)부터 올리비에 브장스노(Olivier Besancenot), 그리고 마리-조르주 뷔페(Marie-George Buffet)에 이르는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노동자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중국인들에게 설명하였다. 그러자 한 방청객이 일어나서 크게 외쳤다. ‘우리 철밥통을 프랑스인들에게 수출해야겠군요.’ 라고 말이다. 이 발언은 회의장에 웃음을 터지게 했다. 이 ‘철밥통’은 마오쩌둥 시대 때 탄탄한 직장, 국가가 마련해주는 주택, 제공되던 무료 의료혜택을 통틀어 가리키는 것이다. [...] 중국인들의 웃음을 터트리게 한 것은, 21세기에도 저런 말을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젱 루올린(Zheng Ruolin), 웬휘바오(Wen Hui Bao, 중국 일간지), 데지르 드 프랑스에서 인용, <15명의 국제언론 특파원들이 우리의 미래를 보고 질문하다>, 미샬롱 출판사, 2007.


문제

A.자료에서 문제 추출하기

1.중국에 대한 프랑스의 입지는 어떠한지 설명하시오(자료2).

2.저우언라이 총리가 인정한 프랑스의 대외정책의 특징은 무엇인가(자료4)?

3.중국에서 프랑스의 어떤 분야가 각광받는가(자료3, 자료5)?

4.자료5의 그래프에 나타난 정보가 자료3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설명하시오.

5.중국의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자료6에 나타난 ‘저런 것들’이란 무엇인가?

B.자료 관련 짓기

6.프랑스의 정책에 대해 중국은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가(자료4, 자료6)? 문화에 대해서는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가(자료1, 자료3, 자료6)? 프랑스의 권력에대해서는 어떠한가(자료2, 자료5)?

7.중국인들에게 인기를 얻을만한 프랑스의 매력은 무엇이 있을지 나열해 보시오.

C.작문

8.중국인들의 시각에 대한 자료를 통해, 프랑스의 성장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시오.


p.400


지도

오늘날 세계 속의 프랑스

프랑스는 21세기 세계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해외영토도 보존하고 있으며, 병력도 배치하였다(2007년 35,000명 이상). 또한 해외영토에 언어와 문화 역시 전파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제력과 외교력에 의한 영향은 특히 아프리카에 강하게 미치고 있다. 프랑스는 동맹국과의 관계에 충실하고 임하고 있다. 또한, 드골 장군의 시대처럼 ‘국가자주성’을 지키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점점 더 국제적인 범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자료1. 2007년 프랑스의 국제적 영향력.

Le territoire métropolitain : 프랑스 본토

Les DOM : 프랑스 해외도

COM : 해외 공동체

CTOM : 해외 지역공동체

CDOM : 해외도 공동체

POM : 해외 국가

Zone économique exclusive des 200 milles : 200해리 이내의 배타적 경제수역


자료2. 와가두구(Ouagadougou, 부르키나 파소의 수도)에서 열리는 제 10회 프랑스어권 국제기구 정상회담을 알리는 광고물, 2004년. 문제

1.21세기의 프랑스는 5개의 대륙 중 4개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자료1)?

2.아프리카에 대한 프랑스의 강한 영향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자료1, 자료2)?

3.프랑스는 어떤 국제기구에 속해있는가(자료1, 자료2)?

4.다수의 국가가 참여하는 행위에 대해 프랑스의 영향력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5.자료1과 2에 나타난 프랑스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p.401

présence militaire française :프랑스군 주둔

présence militaire française au sein d’opérations menées par l’ONU, l’OTAN, ou l’UE

UN, NATO, EU 연합에 소속된 프랑스군 주둔

État ou le français est la langue officielle(seule ou avec d’autres langues)

프랑스어가 공식언어(공식어가 하나거나 여러 개인)인 국가

Minorité francophone

소수의 프랑스어 활용인구

État ou région participant aux sommets de la francophonie

프랑스어권 국제기구 정상회담에 참여하는 지역이나 국가

État partiellement de langue française ne participant pas aux sommets de la francophonie

일부 인구만 프랑스어를 활용하며, 프랑스어권 국제기구 정상회담에 참여하지 않는 국가

Puissance nucléraire et membre permanent du conseil de sécurité de l’ONU

핵보유국이며, UN안보리 상임이사국

État membre du G8

G8 회원국


p.402


복습자료

필수 암기 연도

■ 1946 : 식민제국을 대체하는 프랑스 연합 창설

■ 1956-1962 : 식민지 독립 전쟁, 식민지 해방. 1958년 프랑스어 공동체(Communauté française) 창설 그러나 회원 수 조금씩 감소

■ 1957 : 로마 조약으로 EEC의 창설

■ 1980년대 이후 : 프랑스어권 기구 정상회담

■ 2003 : 프랑스가 미국의 이라크 개입에 반대하다.

■ 2005 : 프랑스인들이 유럽헌법조약을 거부하다.


필수

1.중간국가

■ 프랑스는 프랑스연합이라는 체제하에 식민 제국을 유지하고자 하였지만, 실패한다.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전쟁이 그 예이다.

-냉전 시기 중에 프랑스는 서구 진영에 속해있었다.

-또한 프랑스는 유럽의 재건에 참여하였다.

■ 프랑스는 자주성을 지키고자 하였고, 인권의 나라임을 자처하였다. 늘 국제 분쟁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 프랑스는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다. 넓은 해상영토(1,100만 제곱 킬로미터에 달한다), 군사 및 외교적, 경제적, 문화적 권력이 그 예이다.

2.프랑스는 세계적 영향력이 있는가?

■ 프랑스는 대서양동맹을 지지하면서 미국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취했으며, 문화적 예외를 고수했다. 유럽연합의 창설에도 참여하였고, ‘프랑스-독일 밀월 관계’ 역시 유지하였다. 제 3세계, 특히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국제적 원조를 하였다.

■ 프랑스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있다.

■ 그러나 다자관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 문화적, 인본주의적 영향력을 갖추고 있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혼동하지 않기

스캔

DOM-ROM, COM, POM

1946년, 해외도(DOM)와 해외영토(TOM)를 구분하게 되었다. 1960년대부터, 프랑스의 해외에서의 지위는 바뀌게 되었다.

→ DOM-ROM, 해외도 및 해외지역(마르티니크, 과들루프, 레위니옹, 기안)은 프랑스의 법률이 완전히 적용되는 지역이다. 따라서 유럽연합에 포함된다.

→ 옛날에 TOM, 해외령(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왈리스 퓌티나, 프랑스령 남부와 남극 지역)이라 불렸던 지역은 현재 COM, 해외 공동체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는, 국가의 권한이 제한된다. 해당 영토의 대통령과 장관, 의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왈리스 퓌튀나의 지위는 지방분권 이전의 프랑스 해외도에 해당한다.

→ 누벨 칼레도니(Nouvelle-Calédonie)는 해외국가이다. 1999년부터, 누벨 칼레도니 시민권이 존재했다. 누벨 칼레도니는 2018년에 독립국가가 될 가능성이 있다.

-마요트(Mayotte)는 지방공동체이다.

-생-피에르-미클롱은 해외영토공동체가 되었다.


p.403


에세이(9/9)

주제 : 세계, 그리고 유럽의 대국인 프랑스의, 1945년부터 오늘날까지의 대외 정책의 방향.

연도

■ 1945 : UN설립에 기여한 회원국이 되다.

■ 1949 : 북대서양 조약에 서명하다.

■ 1954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 1957 : 로마조약에 서명하다.

■ 1960 : 프랑스의 첫 핵폭탄 실험

■ 1962 : 알제리 독립

■ 1966 : NATO 통합군 탈퇴

■ 1989 : 프랑스어권 국제기구의 정상회담이 다카르(Dakar)에서 열리다.

■ 1992 : 국민투표로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승인하다.

■ 1999 : NATO군에 협력하여 코소보 전쟁 참전

■ 2003 : 이라크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거부

■ 2005 : 국민투표로 유럽헌법조약을 거부하다.

참고자료. 스캔.

드골에 의한 프랑스의 NATO 연합군 탈퇴결정을 표현한 르펠(Leffel)의 풍자화, 1966년 3월

문제해법

A.주제 분석하기

프랑스의 세계적 영향력의 수단으로써 대외정책을 개발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이 어려운 부분이다. 주제에서 정의하는 기간을 너무 개별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반대로 급격한 변화가 있었던 시점이나, 사건의 연속성을 중심으로 큰 흐름을 잡아야 한다. 냉전, 식민지 해방, 유럽 재건, 프랑스의 내부 정책과 같은 여러 정책에 대한 지식을 이용하자.

B.주제의 문제의식 정의하기

권력과 실행능력, 영향력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보자. 문제의식은 1945년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세계2차 대전의 패배와 동서 진영의 대립으로 타격을 입은 프랑스의 영향력과 권력에 대한 것이다.

드골이 바랐던 ‘위대한 프랑스’ 정책은 프랑스가 미국, 유럽, 제3세계와의 관계의 중심에 위치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1980-1990년대에, 프랑스는 세계대전 전과 같은 강대국이 아닌, 중간국이 된다. 그리고 유럽 창설계획에서 선봉장이 되어 많은 희망을 불어 넣었다.

미국과 소련의 세력다툼 속에서도 어떻게 프랑스는 강국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프랑스의 대외정책은 어떻게 유럽차원의 정책까지 통합할 수 있을까?

C.개요 구상하기

주제에 역사적 기간이 언급되어있기 때문에 시간 순서로 개요를 짜면서, 각 부분은 지정학적 측면의 큰 주제를 담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미국과의 관계, 유럽 창설, 프랑스와 제3세계와의 관계 같은 주제가 있어야 한다.

I.세력이 약화된 프랑스의 친미정책(1945-1958)

-1945년, 프랑스는 미국의 보호아래 들어가게 된다

-식민지의 독립과 그 영향

-유럽 창설에 참여

II.드골정권 시기 정책의 변화 : 자주성과 위대한 프랑스에 대한 의지(1958-1974) -식민지의 해방을 마치고 제 3세계와의 새로운 관계 정립

-대(對)미국 국가 자주성 유지

-유럽연합 창설에 대한 최종적 지지는 마지못한 결정이었을까?

III.드골정권부터 이어진 정책의 유지와 단절(1974년 이후)

D.연습문제

-C의 III의 개요를 완성하시오.

-전체 작문을 완성하시오(도입, 3단계 전개,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