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뉴질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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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NZNF.jpg
인구 447만 8백명 (2013. 07월 기준, 추정치)/ 북섬에 약 75% 거주
면적 27만 ㎢(북섬11.6만 ㎢, 남섬15.1만 ㎢, 기타 도서 3,542㎢)
언어 영어, 마오리어(원주민어)
문자 Roman alphabet
정부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통화 뉴질랜드달러(NZD)
GDP 1,557억 미국달러(1,946억 뉴질랜드달러, 2010년 1월~12월 회계연도 기준)
국제전화 +64
도메인 .nz


뉴질랜드 개황

뉴질랜드(New Zealand)의 수도는 웰링턴(Wellington)으로 1865년 수도를 오클랜드(Auckland)에서 웰링턴으로 옮겼다. 전체 인구는 447만 8백명(2013년 7월 기준)이며 인구의 75%는 북섬에, 25%는 남섬에 거주하고 있다. 웰링턴 시의 인구는 18만 5,000명이고, 웰링턴 지역 인구는 46만 명이다.

면적은 총 27만㎢로, 북섬이 11만 6,000㎢, 남섬이 15만 1,000㎢, 기타 도서가 3,542㎢이다. 한반도의 1.2배이며 남한의 2.7배이다. 자치령은 쿡제도(Cook Islands)와 니우에(Niue)이며, 해외 영토는 토켈라우(Tokelau)와 남극 로스 해 연안의 여러 섬인 로스 속령(Ross Dependency)이다. 기후는 해양성 기후로 1월 평균 기온은 20℃이고 7월 평균 기온은 11℃이다.

인종은 유럽인이 68%, 마오리족이 14%, 아시아인이 9.2%, 남태평양인이 6.9%로 구성되어 있다. 종교는 성공회, 개신교, 가톨릭이다. 독립일은 영국으로부터 자치령 지위를 획득한1907년 9월 26일이다. 국경일은 2월 6일로 와이탕이 데이(Waitangi Day)라고 불린다. 와이탕이 데이는 1840년 마오리족 대표가 영국에 주권을 이양한 날이다.

뉴질랜드의 정부 형태는 의원내각제이다. 국가 원수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Elizabeth) 2세이며, 아난드 사티아난드(Anand Satyanand) 총독이 대리한다. 2011년 현재 총리는 국민당의 존 필립 키(John Phillip Key)이다. 의회는 임기 3년의 단원제이다. 의석수는 120석이며 투표 결과에 따라 변동된다. 2011년 현재 의석수는 122석이다.

뉴질랜드의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은 2010년 기준 미국달러(USD)로는 약 1,557억 달러이며 뉴질랜드달러(NZD)로는 1,946억 달러이다. 1인당 국내총생산은 미국달러로는 약 3만 5,628달러이며, 뉴질랜드달러로는 4만 4535달러이다.

화폐 단위는 뉴질랜드달러로 2011년 6월 기준으로 1뉴질랜드달러는 0.80미국달러이다. 시차는 한국보다 3시간 빠르며 뉴질랜드는 매년 9월 마지막 주 일요일부터 익년 4월 첫째 주 일요일까지 서머타임제를 운영한다. 이 시기에는 한국보다 4시간 빠르다.

[1]

한국과의 관계

뉴질랜드와 한국은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가? 그리고 이런 관계가 어떻게 뉴질랜드의 학교교육에 영향을 끼쳐왔는가? 우선 한국과 뉴질랜드의 관계는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 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고, 바로 이런 사실이, 뒤에서도 보겠지만 뉴질랜드에서의 한국에 대한 교육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

뉴질랜드와 한국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뉴질랜드가 영연방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할 때까지 양국 사이에 어떤 의미 있는 관계도 없었다. 비록 몇 몇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봉사를 한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 선교사는 단지 뉴질랜드에서 잠시 머물다가 온 영국인 또는 호주인들 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선교활동을 뉴질랜드와 한국의 관계에서 거론할 이유가 없다.

아무튼 1950년6월에 한국에서 발발한 전쟁은 곧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고,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는 침략자 북한으로 부터 일방적인 공격을 받은 남한을 돕기 위해 국제사회가 군사적으로 도움을 주기를 호소했고, 여기에 뉴질랜드가 답을 하여 일차적으로 1,000명의 뉴질랜드 젊은이가 두 척의 프리키트 함선과 함께 한국에 와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은 특히 1951년 4월23일 부터 25일 사이에 경기도 가평에서 후퇴하는 한국군 부대를 추격하여 남하하던 중공군 사단을 호주부대와 캐나다부대와 함께 성공적으로 막아내어 적으로 부터 서울을 방어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뉴질랜드군은 총 인원 4,500명이 참가를 했고, 이 가운데 33명이 전사하고, 79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들 뉴질랜드 참전용사들이 한국에 남긴 영향은 별로 없는 것 같지만 이들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마오리 병사들은 “포 카레 카레 안나” (Po kare kare anna)라는 노래를 남기었고, 이 노래는 “연가”라는 노래로 한국인들 모두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전쟁 중에 뉴질랜드 병사들은 모든 휴가를 일본에서 지냈기 때문에 한국인과 뉴질랜드병사들의 접촉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전쟁이 흔히 가져다주는 ‘전쟁결혼’ 뉴질랜드 병사와 한국인 여성들 사이에는 거의 없었는데, 역시 이들이 휴가를 대부분 일본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들 가운데 일본인 여성과 결혼을 한 사람은 몇 명이 있었다.

한국전에 참여했던 뉴질랜드 군인들은 “케이포스” (Kay Force)라는 이름으로 뉴질랜드에서 잘 알려져 있으며, 이들 가운데 아직도 생존해 있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뉴질랜드 내에서 아직도 친한 인사로 활동한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전사한 동료들을 애도하며, 경기도의 가평초교에 장학금을 전달한다. 이들 참전용사들이 뉴질랜드로 돌아와 뉴질랜드 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또한 저술활동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알렸는데, 이것은 오늘날에도 뉴질랜드인들의 한국에 대한 지식을 형성한다. 또한 뒤에서 자세히 보게 되겠지만, 이들의 의견이 오늘날의 학교 교육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전후에 뉴질랜드는 또한 한국의 복구사업에도 관여했다. 1962년에는 양국사이에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되었으며, 특히 콜롬보 플랜 (Combo Plan)을 통해 1960년대에 300명 정도의 한국인 학생들을 뉴질랜드로 데려와 교육을 시켜 한국의 발전에 공헌을 했다. 또한 한국의 축산업을 돕기 위해 경험 있는 농부들을 파견하여 목장을 운영하고, 또 유제품의 제조 등을 교육했다. 뉴질랜드 인들은 한국인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기술을 전수해 준 최초의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외교관계가 1962년에 수립되기는 했지만 뉴질랜드의 주한 대사관은 1971년에 비로소 문을 열었고, 대한민국은 1972년에 웰링턴에 대사관을 개설했다. 양국은 뉴질랜드의 한국전쟁 참전을 바탕으로 정치, 군사적으로 강한 유대감을 보여 왔다. 이런 사실도 어느 정도는 오늘날의 뉴질랜드 학교교육에 반영이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1980년대 말 이후 뉴질랜드의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다른 아시아계 이민과 함께 한인 이민의 증가가 있었고, 그 증가 속도가 아주 빨랐다. 1980년대 말까지의 조사에 의하면 400명가량의 한국인이 뉴질랜드에 살고 있었다. 그러다 이민법이 바뀌고 1991년에는 903명으로 늘고, 1년 후 한인 이주자의 수는 3,000명으로 크게 불었다. 그리고 이 수는 1996년에는 13,000명가량이 된다. 한인 이민의 이런 증가 속도는 모든 아시아 이민자들 가운데서 가장 빠른 것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도 한인 이주자의 수는 계속 늘었지만 그 가운데는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는 사람들도 생겨나 현재는 32,000명 수준에 있다.

이렇게 늘어가는 한인이민자는, 국제사회에서 더욱 높아진 한국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지위와 함께, 뉴질랜드의 학교 교육에서 한국어와 한국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가져왔다. 특히 한국과의 무역관계가 심화되면서 뉴질랜드에게 있어서 한국의 시장의 중요성이 더욱 커져 (현재 한국은 뉴질랜드에게 있어서 다섯 번 째로 중요한 시장이다), 한국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이런 이유로 현지인들 가운데 한국어를 배우려는 욕구가 있게 되었다. 따라서 학교의 교육에서 한국에 대한 교육이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에 위치한 오클랜드대학에서 1990년대 초부터 한국어 강좌가 개설되었다. 본 강좌는 점점 더 발전하여 1990년대 말에는 정식으로 한국어학과로 발전을 하였고, 2000년부터는 세 사람의 전임교수가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국역사와 문화의 강좌도 시작하게 되었다. 일단 대학에서 이렇게 한국어와 문화, 역사에 대한 강좌가 개설되면서 일선 학교에서도 이에 관련된 교육이 강화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이 때 정부의 정책이 뉴질랜드 내에서 아시아언어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어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오클랜드 인근의 중·고등학교들에서 한국어 수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정부의 재정적 지원은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 재정축소로 줄어들었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교의 수는 급격히 줄었다. 다만 대학에서의 교육은 큰 문제없이 지속되었다.

최근 들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뉴질랜드에서도 한국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늘고 있다. 특히 중국인들을 비롯한 아시아계 이민자들 사이에서 한국의 대중문화와 음식 등에 대한 관심이 많으며, 점차로 유럽계 뉴질랜드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아직도 뉴질랜드에서는 일반인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이 낮은 편이고, 아직도 남한과 북한을 구별하지 못 하는 사람도 많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중·고등학교에서의 한국에 대한 교육 실태를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2]


  1. 뉴질랜드 개황, 2011.06, 외교부.
  2. 현지인력을 활용한 뉴질랜드 분석보고서, 2013.10.

바깥 고리

연계 정보

관계 대상 문서 설명
isRelatedTo 교육제도:뉴질랜드 뉴질랜드 교육과정, 2014년 조사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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