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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국가 명칭은 브루나이 다루살람(Brunei Darussalam)이다. 말레이어로는 느가라 브루네이 다루살람(Negara Brunei Darussalam)이라고 한다. 다루살람(Darussalam)은 ‘평화가 깃든 곳(Abode of Peace)’을 의미한다. 수도는 반다르스리브가완(Bandar Seri Begawan)으로 원래는 ‘브루나이 타운(Brunei Town)’이라고 불렀으나, 1970년 10월 선왕의 호칭 중 ‘스리브가완(Seri Begawan)’을 따서 개칭하였다. 반다르(Bandar)는 마을(Town)을 의미한다.
 
정식 국가 명칭은 브루나이 다루살람(Brunei Darussalam)이다. 말레이어로는 느가라 브루네이 다루살람(Negara Brunei Darussalam)이라고 한다. 다루살람(Darussalam)은 ‘평화가 깃든 곳(Abode of Peace)’을 의미한다. 수도는 반다르스리브가완(Bandar Seri Begawan)으로 원래는 ‘브루나이 타운(Brunei Town)’이라고 불렀으나, 1970년 10월 선왕의 호칭 중 ‘스리브가완(Seri Begawan)’을 따서 개칭하였다. 반다르(Bandar)는 마을(Town)을 의미한다.

2016년 12월 9일 (금) 14:29 판

브루나이(Brunei Darussalam)
Brunei.jpg
인구 436,620명(2016년)
면적 5,765km²
언어 말레이어(공용어), 영어, 중국어, 기타 토속어
정부 이슬람 절대세습왕정제
통화 브루나이 링깃(BND)
GDP $321.06억(2014년)
국제전화 +673
도메인 .bn


이름 및 위치

브루나이 위치

정식 국가 명칭은 브루나이 다루살람(Brunei Darussalam)이다. 말레이어로는 느가라 브루네이 다루살람(Negara Brunei Darussalam)이라고 한다. 다루살람(Darussalam)은 ‘평화가 깃든 곳(Abode of Peace)’을 의미한다. 수도는 반다르스리브가완(Bandar Seri Begawan)으로 원래는 ‘브루나이 타운(Brunei Town)’이라고 불렀으나, 1970년 10월 선왕의 호칭 중 ‘스리브가완(Seri Begawan)’을 따서 개칭하였다. 반다르(Bandar)는 마을(Town)을 의미한다.

브루나이는 동남아시아 보르네오(Borneo) 섬 서북 연안에 위치하며 동부 말레이시아의 사라왁(Sarawak) 주에 의해 동서로 양분된다. 북위 4° 2′~5° 3′, 동경 114° 4′~115° 2′에 자리 잡고 있다. 면적은 5,765㎢로 경기도의 약 1/2, 한반도의 1/40 크기이다. 산림이 국토의 85%를 차지하며 경작지는 5%이고 목초지는 0.5%이다. 브루나이무아라(Brunei-Muara), 벨라잇(Belait), 투통(Tutong), 템부롱(Temburong)의 4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간략역사

1. 식민 시대 이전


중국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6세기~7세기에 현재의 브루나이 지역에 말레이 부족국가가 형성되었다. 1405년에는 브루나이 이슬람 왕국이 창설되었다. 이는 초대 모하마드(Mohammad) 국왕이 조호르(Johor) 공주와 결혼하여 이슬람 국가가 된 것으로, 이때 현재 동부 말레이시아에 속하는 섬 북부 연안 상당 부분을 영유하였다.

15세기~16세기에 왕국은 보르네오(Borneo) 섬 북반부 전체 및 필리핀 일부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다 1578년 4월 6일 마닐라에 주재하는 스페인 총독이 브루나이를 점령하였다.


2. 식민시대


17세기에 접어들자 네덜란드가 보르네오 섬 동부 및 남부를 지배하였다. 18세기~19세기 전반에는 영국이 보르네오 남부를 지배하여, 1701년에는 반자르마신(Banjarmasin)에 영국의 무역소가 설치되었다. 1847년 브루나이는 영국과 우호조약을 체결하였고, 이때 현재 동부 말레이시아의 사바(Sabah) 주 및 사라왁(Sarawak) 주 등 영토의 대부분을 영국에 할양하여 소국(小國)으로 전락하였다. 1888년에는 영국과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1906년에는 영국인 상주 총독(British Resident)이 부임하였다. 1929년 세리아(Seria) 지역에서 유전이 발견되어 1932년부터 원유 생산이 시작되었다. 1941년~1945년에는 일본군이 브루나이를 3년 반 동안 점령하였고, 1950년에 전 28대 국왕인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Omar Ali Saifuddin)이 즉위하였다. 오마르 알리 국왕은 현 국왕인 하사날 볼키아(Hassanal Bolkiah)의 선친이다. 1953년 브루나이는 제1차 국가개발 5개년 계획을 개시하였으며 1959년 9월 29일 자치정부가 헌법 제정을 공포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외교, 국방 및 안보는 영국이 관장하고 영국의 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이 파견되었다. 1962년 최초의 선거가 실시되어 브루나이 인민당1)이 승리하였다. 1962년 12월 8일에는 말레이시아 연방 가입을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으나 영국의 지원으로 진압되었고, 이때 정당이 해산되고 헌법이 정지되었다. 1967년 10월 4일 제28대 국왕이 퇴위하고 1968년 8월 1일 제29대 국왕인 하사날 볼키아가 즉위하였다. 1971년 11월 23일 브루나이는 영국과의 조약을 개정하여 내정을 완전 자치화하고 외교는 영국이 계속 관장하되 국방 및 안보는 상호 협의 아래 결정하기로 하였다. 1979년 1월 7일 브루나이는 영국과 우호 협력조약을 체결하였다.


3. 독립 이후


브루나이는 1984년 1월 1일 영국으로부터 완전 독립하였다. 1984년 1월 7일에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이하 약어)에 가입하였다. 1984년 1월 16일 이슬람회의기구(OIC, Organization of the Islamic Conference)에 가입하였고, 같은 해 9월 21일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에 가입하여 제159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1986년 9월 7일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Omar Ali Saifuddin) 선왕이 사망하였다. 1989년 11월 브루나이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Asia 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이하 약어)에 가입하였고 1996년 3월에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Asia-Europe Meeting)에 가입하였다. 2000년 11월 브루나이에서 APEC 정상회의가 개최되었으며 2001년 11월에는 ASEAN / ASEAN+32) 정상회의를 개최하였다.

사회

브루나이는 정치, 경제, 사회 등 제 분야에서 왕실의 권한이 절대적이다. 정부의 고급 관리들을 주로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 학위를 받은 젊은 엘리트로 기용하고 있으며, 군인을 포함한 공무원들을 우대함으로써 국왕 통치 체제의 지지 기반으로 활용하고 있다. 브루나이는 전체 인구의 약 15%를 차지하는 중국계가 사실상 상권을 장악하고 있으나, 정부가 부미푸트라(Bumi Putra) 정책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말레이계의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부미푸트라 정책이란 브루나이 정부가 말레이계(부미푸트라) 국민들의 경제적 지위 향상과 경제활동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말레이계를 우대하고 배려하는 정책을 말한다. 이는 타민족, 특히 중국계가 경제적인 실권을 장악하는 것을 견제하고 자국민을 보호하는 측면에서 실시하는 것이다. 1982년 9월, 브루나이 국왕은 브루나이 상권의 대부분을 쥐고 있는 중국인들에게 앞으로 말레이인들에게 상업을 지도하여 브루나이 전체의 경제발전에 기여해줄 것을 당부하고 브루나이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말레이어를 배워 사용할 것을 권장하였다.


인구

2016년 CIA The World Factbook 기준 추정 인구는 436,620명이이다. 인구성장률은 1.8%이며, 유아사망률은 1000명당 13명이다. 주민의 평균수명은 75.3세로 남자는 73.12세, 여자는 77.59세이다. 국민들은 대부분 가정을 중시하며, 독실한 종교생활 및 스포츠 등 가족중심의 여가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브루나이는 금주령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슬람교 교육 강화 등 이슬람 교리의 생활화를 지향하고 있다.

인종

브루나이의 인구는 브루나이의 인종구성은 말레이계(系)가 67%, 중국계가 15%, 토착인종이 6%, 기타 외국인이 12%를 차지한다. 언어는 말레이어(공용어), 영어, 중국어를 주로 사용하며 기타 토속어도 사용한다.


종교

종교는 국교인 이슬람교가 67%, 불교 13%, 그리스도교 10%, 토착신앙 및 기타가 10%이다.

정치

타이완은 최고기관인 국민대회 및 총통 아래 입법원(국회), 행정원(내각), 사법원, 고시원, 감찰원의 5권분립제를 택하고 있다. 1947년 1월 1일 헌법이 제정되고 2005년 6월 7일 국민대회에서 개정된 헌법에 따르면 타이완은 입헌민주제 공화국이다. 총통이 국가를 대표하고 행정부의 수장이다. 행정, 입법, 사법, 고시, 감찰의 5권 분립체제 상 총통이 이를 관할한다. 국민당 1당지배정치를 펴온 타이완 정부는 1949년 이래 계속 실시된 계엄령을 1987년 7월 해제하였으며, 1988년 1월 13일 총통 장징궈[蔣經國]가 사망한 후 부총통 리덩후이[李登輝]가 총통으로 취임하였다. 1989년 1월에는 복수정당제를 도입하였으며, 같은해 12월의 입법원 선거에서 야당세력이 예상외의 의석수를 차지함으로써 집권 국민당에 타격을 주었다.

1991년에는 타이완 수비사령부를 해체하고 진먼섬 계엄을 종식하였으며, 1992년에는 사상경찰제 및 타이완 경비사령부를 폐지하였다. 1993년 11월 최초의 지방선거를 실시, 1994년 7월 국민대회에서 선출되던 총통직선제 개헌안 승인을 거쳐, 1996년 3월 총통 리덩후이가 최초의 직선총통이자 제9대 총통으로 선출되었다. 2000년 3월 야당인 민진당(民進黨)의 후보 천수이볜[陳水扁]이 롄잔을 꺾고 총통으로 선출되어 50년 이상 계속되어온 국민당 체제가 중단되었다. 2001년 12월 1일 제5기 입법위원 선거 결과 민진당이 제1당으로 도약하였으며 그후 2004년 3월 20일 총통선거에서 천수이볜 총통이 50.12%의 지지를 얻어 연임에 성공하였다. 이때 야당은 3월 19일의 천수이볜 총통 피격 사건으로 국가안전체제가 발동되어 군인과 경찰의 투표권이 박탈당했다는 것을 이유로 당선 및 선거무효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최고법원에서 모두 기각 패소하였다.

2004년 12월 11일 실시된 제6대 입법위원 선거에서 야당(국민당, 신민당, 신당)이 입법원내 과반수(113석) 이상을 확보함으로써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民進黨 89석, 國民黨 79석, 親民黨 34석, 台聯 12석, 新黨 1석, 기타 10석)되고 이에 2005년 6월 7일 국민대회에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입법위원수 1/2 감축, 소선거구제 채택, 헌법 개정안의 국민투표 실시, 국민회의 해산 등 헌법 개정 내용이 확정되었다. 국민대회는 동대회를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 천수이볜 총통의 측근 비리혐의로 국민당, 친민당 주도 하에 타이완 정치사상 최초로 총통파면안이 입법원에 제출되었으나 2006년 6월 27일 부결되었다. 2008년 1월 12일 제7대 입법위원 선거 결과에 따르면 정당별 의석 분포는 국민당 81석, 민진당 27석, 기타 5석 등이다. 2008년 3월 마잉주[馬英九]가 제12대 총통에 당선되었다.


문화

타이완은 오랫동안 아시아의 대륙문화와 태평양의 해양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대륙과 해양의 문화 유산이 다양하다. 중국의 한(漢)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고 한때는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기도 했으며 서유럽의 영향을 일찍부터 받아왔기 때문에 문화유산이 중첩되어 있다.

경극(京劇)은 중국 무대예술 중 가장 잘 알려진 연극 분야이지만 타이완의 오페라는 경극의 지역적 변형으로 표준어 대신에 푸젠 방언을 사용한다. 중국대륙의 창초우 지역 민요로부터 근원을 찾을 수 있으며, 일부 레퍼토리는 남부 푸젠성 민요와 타이완 원주민 민요에서 따온 것으로 전해진다. 퉁소의 역할, 배우들의 훨씬 자유로운 움직임이 타이완식 경극과 베이징식 경극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여름에는 가장 오래된 민속놀이 중의 하나로서, 푸젠성 남부 방언으로 공연되는 꼭두각시놀음이 공연되는데, 능란한 손놀림, 목소리, 흉내, 재미있는 사설들이 볼만한 장면들을 연출한다. 경극과 마찬가지로 이는 북과 징의 반주로 시작되는데 오늘날에는 중국식 악기와 서구 악기가 함께 연주하는 음악이 배경 음악으로 깔린다. 손으로 조종하는 꼭두각시놀음은 과거의 종교적 의미를 아직도 갖고 있지만 풍성한 농산물 수학을 축하하기 위해 보통 여름에 무대에 올려지며 마리오넷 꼭두각시놀음은 신의 가호를 기원하거나 악귀를 몰아내기 위해 공연한다.

타이완의 주요 도시들은 전통적인 중국식 건축물과 20세기 초의 일본식 건축물 및 근대 서구식 건축물 등 어떤 형태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혼합양식의 건축물들이 많다. 타이난이나 루캉곽 같은 타이완의 오래된 도시에서는 중국의 전통적 건축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중국의 건축은 유럽의 고딕식 사원이나 일본의 정원양식과는 차이를 보인다. 건물의 기본구조가 전형적인 U자형으로 구성되어 있고 1층 또는 2층의 건물로 처마가 매우 가파른 기와지붕의 중국 고대양식 건축물들이 지방에 산재되어 있다. 타이완에는 또 주로 청대(淸代: 1644~1911)에 건축된 사원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는 절들이 많이 남아 있다.


한국과의 관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국민정부는 대만으로 옮겨갔다. 1948년 8월 13일, 한국은 대만과 단독수교를 맺고 상호 상주공관을 설치하였다. 이후 양국은 항공협정(1952. 3), 무역협정(1961. 3), 문화협정(1965. 5), 해운협정(1983. 9), 항공운수협정(1986. 11) 등을 체결하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당시 한국과 대만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공국가로서 서로의 입장을 지지해왔으며, 모두 아시아의 신흥공업국가로서 경제협력 규모를 지속적으로 늘려왔다. 그러나 1992년 한국이 중국과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체결하면서 한국은 대만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게 된다. 1992년 단교 이후 비록 정부 차원의 공식적 정치‧외교 관계는 단절되었지만, 경제‧통상 등 비정치 분야의 민간 차원의 교류는 계속 유지되어 양자 간의 교류는 꾸준한 성장세를 보여 왔다. 한국과 대만 간의 분야별 교류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양자 간 교역규모를 살펴보면, 아래 <표 1>에서도 나타나듯이 양자 간의 공식 외교관계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2012년 무역협회 기준, 양국의 무역총액은 288억 2,700만 달러이다. 그 중 한국의 대만 수출액이 14,815백만 달러, 대만으로부터의 수입액은 14,012백만 불로 803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현재 한국과 대만은 서로에게 4~8대 교역대상국이면서, 우리 측이 지속적으로 흑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바깥고리

연계 정보

관계 대상 문서 설명
uses 교육제도:대만 대만 교육과정, 2014년 조사 보고
uses 교과서목록:대만 대만 사회과 교과서 총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