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싱가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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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공화국 (Republic of Singapore)
3.jpg
인구 5,353,494(2012년)
면적 약 712.4km2(서울시의 1.18배)
언어 중국어, 영어, 말레이어, 타밀어
정부 공화제
통화 싱가포르 달러(S$)
GDP 전체 $US 2,765억 달러(2012년 기준) / 1인당 명목 GDP $49,936 달러(2012년 기준)
국제전화 +65
도메인 .sg


이름 및 위치

싱가포르 위치

정식국명은 싱가포르 공화국(Republic of Singapore)이며 1819년 영국이 무역 거점으로 개발한 도시였다. 1963년 현재의 말레이시아에 포함되었다가 1965년 말라야 연방에서 탈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시가지는 섬의 남부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19세기 초 건설 당시 유럽인·인도인·말레이인 등 종족별 주거지로 나뉘어 그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해상 동서교통의 중요 지점에 자리잡고 있어 자유무역항으로 번창하였다.


간략역사

3세기경 중국 왕실의 기록에 의하면 싱가포르를 '반도 끝의 섬'이라는 의미의 파라주(婆罗洲, Pu Luo Chung)라고 하였는데 이는 말레이어의 플라우 우종(Pulau Ujong: 섬 끝의 땅)에서 그 음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13세기 스리위자야왕국의 뜨리부아나(Tri Buana, 또는 Sang Nila Utama) 왕자가 현재 싱가포르에 표류했을 때 사자를 목격하고 싱가뿌라(Singapura: 산스크리트어로 사자의 도시)라고 명명한 것이 싱가포르 국명의 유래이다. 1330년 경 중국인 여행가 왕다유안(Wang Dayuan, 网大圓)은 소수의 중국인들이 거주하며, 해적들이 지나가는 선박들에게 통행세를 징수하는 싱가포르 내 말레이인들의 정착촌인 단마씨(Dan Ma Xi, 单马锡)를 여행했다. 1365년 자바문헌 나가라끄레따가마(Nagarakretagama)에 처음으로 싱가포르를 '떼마쎅(Teamasek: 항구도시)'이라고 기록하였고, 14세기 후반부터 싱가뿌라라는 표현이 통칭적으로 사용되었다. 1390년대에는 마자삐힛 왕조가 멸망하자 빠라메스와라(Parameswara) 왕자가 싱가포르에서 여생을 보냈다. 1511년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점령하자 말레이 제독이 싱가포르로 도망한 후 조호르 라마(Johor Lama)에 새로운 수도를 세웠으나 1587년 포르투갈에 의해 다시 멸망하였다. 1613년 포르투갈은 관헌이 있는 싱가포르를 불태워 싱가포르에 관련된 모든 자료와 기록이 소실되었다.

19세기 초까지 싱가포르는 네덜란드의 영향 하에 있다가 1819년 1월 영국의 래플스(Sir Thomas Stamford Raffles)가 조호르 왕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싱가포르의 개발을 착수하였다. 1823년 6월 7일, 래플스는 매달 2,000달러 이상의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하고 조호르왕국의 술탄 거주지역과 떼멩공(Temenggong)을 제외하고 싱가포르 전역을 영국동인도회사에 영구적으로 할양하는 조약을 성립시켰다. 1826년 싱가포르는 말라카와 뻬낭에 흡수되어 동인도회사 지배 하의 해협식민지로 편입되었고, 1867년 싱가포르의 관할권이 영국 식민지청으로 이전되면서 본격적인 식민지시대가 개막되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싱가포르는 일본에 의해 점령당하였으나 일본의 패망으로 1946년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영국이 싱가포르를 재점령하였을 때 싱가포르 국민들은 영국에 대한 신뢰감 보다는 국민적 자각에서 발아한 민족주의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가 단계적으로 자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형태의 식민정책으로 전환하였다. 1953년 말라야공산당의 위협이 다소 누그러지자 식민 정부는 조지 랜들(Sir George Rendel)을 중심으로 한 자립정부 구성을 약속했다. 자립정부는 총 32석 중 25석을 국민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입법의회와 총리, 각료들이 존재하는 행정부를 갖춘 의원내각제로 구성되었다. 영국 식민정부는 국내 안보나 외교업무, 입법부에 대한 거부권을 유지하였다.

1963년 9월 16일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연방의 구성원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채 2년도 못가서 싱가포르의 정치인들이 비말레이계의 단결과 지지를 호소했다는 이유로 말레이시아연방으로부터 추방 아닌 추방을 당하여 1965년 8월 9일 독립하였다. 세계 언론들은 싱가포르의 독립보다 작은 섬나라의 생존 자체가 어려울 것 같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앞세웠다. 국민의 대부분이 무단정착촌에 거주하는 상황이었고, 제대로 된 교육도 실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실업률도 10~12%에 달하였다. 무엇보다도 좁은 국토와 부족한 천연자원으로 인해 전통적으로 고정 수입원이 없는 상황이었고, 유일한 수입원인 중계무역항은 19세기 이래로 개발이 미진하여 더 이상의 물동량을 소화할 수 없었다.

정부는 경제성장에 총력을 기울였다. 주롱(Jurong) 지역에 산업단지를 건설하고, 싱가포르에 투자하는 모든 외국기업과 투자자들에게 5~10년간 법인세를 면제해 주는 텍스 홀리데이(tax holiday)를 실시하였다. 한편 식민당국이 약탈을 행하는 추출(抽出)무역에서 가공무역으로 산업구조를 전환하기 위해 필요한 숙련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영어를 필수 언어로 채택하여 공교육이나 공기업에서 상용화 되도록 하였다. 종족간의 갈등을 완화시키기 위해 영어와 함께 국가이데올로기로서 ‘국가애’(national fraternity, 國家愛)를 학교에서 교육 하였다. 주택부족 문제 역시 주택개발공사(Housing Development Board)가 주도한 공공주택 프로그램의 성공으로 국민의 90% 정도가 주택문제를 해결했다.


지리

싱가포르는 말레이반도의 남쪽 끝, 조호르해(海)를 사이에 두고 말레이도와 마주보고 있는 싱가포르섬과 약 63개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3해리 떨어진 지역에는 인도네시아령의 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섬 서쪽의 파시르판장항(港)과 남쪽의 케펠항은 천연의 양항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싱가포르의 기후는 전형적인 열대기후로 무덥고 습하며 비가 자주 내린다. 우기와 건기의 구별이 뚜렷한데 12월부터 3월까지는 북동몬순이 불며, 6월부터 9월까지는 남서몬순기후로 이 시기에 비가 자주 온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에는 대기가 불안정 해 주로 저녁에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진다. 일일 평균기온은 26.8℃, 연평균 최고기온은 31.4℃, 연평균 최저기온은 24.7℃, 연평균 강우량은 2,344㎜, 연평균 습도는 84.3%로 생활하기에 알맞다.


사회

싱가포르는 중국인·말레이인·인도 파키스탄인·유럽계인 등이 저마다 다른 언어·풍속·습관·문화·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의 문화가 섞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인종에 따라 직업도 다른데 대부분 중국인은 서비스 부문과 제조업, 상업에 종사하고, 말레이인은 하급공무원과 하급노동자로 일하며, 인도인은 공무원이거나 택시기사, 청소부 등이 많다. 이러한 복합사회는 인종간의 대립을 불러일으켜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함으로써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또 중국인 사이에는 푸젠[福建]·광둥[廣東]·커자[客家]·차오저우[潮州]·하이난[海南] 등 출신지에 따라 서로 다른 사회적 결합관계인 방(幇)이 있는데, 상업활동은 이 방을 중심으로 행해지며 다른 방과의 관계는 희박하다. 이처럼 인종적으로 분단되는 데다가 방 등으로 다시 분단되기 때문에 계층 문화가 표면화되지는 않는다.


인구

2010년 말 기준, 508만 싱가포르 인구 중 377만 명이 시민권자 또는 영주권자이고 131만명이 외국인이다. 싱가포르의 인구는 중국계 74%, 말레이계 13%, 인도계 9%로 구성된다. 이외에 유럽인과 현지인 사이에서 태어난 유라시안계도 일부 있다. 따라서 종교 역시 불교(33%), 기독교(18%), 이슬람교(14%), 도교(10%), 힌두교(5%) 등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다양성은 주거는 물론 요리, 쇼핑, 문화 등 측면에서 싱가포르의 곳곳에서 피부로 실감할 수 있다.

싱가포르의 다양한 인종 구성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 식민지 시절부터 시행된 싱가포르 이민 정책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독립 후 리콴유 정부는 다문화 속에서 국민적 정체성을 창출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1965년 제정된 싱가포르 헌법은 각 인종간 평등주의를 명시하고 영어 이외에 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였으며, 각 종교 별로 균등하게 법정 공휴일을 지정토록 규정하였다.

싱가포르의 총리를 비롯하여 다수 각료가 중국계이다. 이는 싱가포르 인구의 다수가 중국계인데다 리콴유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한 중국계 엘리트들이 건국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통령의 경우는 말레이·인도·중국계를 돌아가며 배출되기도 하였고 각료급 임명 시에도 가급적 인종별 분포를 반영하여 인종간 화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공영 아파트(HDB)의 경우에도 각 인종별 인구 비율에 따라 분양함으로써 특정인종이 특정지역에 편중되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인종

싱가포르는 인종이 다양하다. 가장 큰 인종 집단은 메스티소로 전체의 70%에 이른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약 15%이고, 주로 크리올인 백인은 약 7.4%이다. 물라토와 삼보 같은 아프리카계 싱가포르인은 주로 에스메랄다스 주와 임바부라 주에 거주하는데 전체 인구의 약 7.2%를 차지한다


언어

콜롬비아 대다수는 공용어인 스페인어를 구사한다. 그러나 콜롬비아의 세계인종언어 데이터베이스에는 총 101개 언어가 등재되어 있으며, 이 중 80개는 오늘날에도 쓰이는 언어이다. 대부분은 칩차어와 아라와크어, 카리브 언어족에 속해있다. 잉카 제국의 후손들이 쓰는 케추아어는 북쪽으로 콜롬비아까지 뻗어있으며, 주로 남부 고원의 중심 도시에 분포하고 있다. 토착어 사용자는 현재 500,000여명이 있다. 인디언언어와 영어도 통용된다.


종교

싱가포르인의 95%는 로마 가톨릭 교회이고 4%는 개신교이다. 시골 지역에는 토착 신앙과 로마 가톨릭 교회가 혼합되기도 한다. 축제나 연중 행사 대부분은 종교 행사에서 나온 것으로, 온갖 의식과 상징이 혼합됐다. 기타 정교회나 토착 종교, 이슬람, 불교, 바하이 신앙도 소수 존재한다.


경제

싱가포르는 독립 이후 경제발전을 국가의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고, 국가주도의 개발정책과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개입을 통해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 정책은 리콴유를 중심으로 한 인민행동당(PAP)이 독립 이후 장기 집권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경제개발 초기부터 정부는 외자주도의 경제성장을 추진하면서 외국기업이 싱가포르 경제를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국가주도의 개발정책은 싱가포르가 지리적 협소성과 주변 강대국으로부터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전략이었다. 싱가포르는 1961년 경제개발청(Economic Development Board)을 설치하고 싱가포르를 세계 무역과 투자의 중심지로 육성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시행하였다. 구체적으로 1948년 싱가포르진보당이 제안한 중앙적립기금(Central Provident Fund)을 1955년부터 조성하여 고용자와 피고용자가 적립하는 일정 기금을 공공주택건설사업, 후생복지사업, 교육사업에 투자하여 사회간접자본 시설을 확충하고 공업화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2005년 현재에도 정부 예산안의 21%를 중앙적립기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1967년 외국인 투자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면세 조치를 취하고, 1968년에는 노사관계법과 고용법을 개정하여 노동조합을 불법으로 규정하여 외국 기업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구조적 변화를 주었다. 그 결과 제조업과 금융업에 집중된 3,000개 이상의 다국적기업이 싱가포르로 진출하였으며 실질적으로도 2000년 기준 싱가포르 경제의 두 축은 제조업(26%)과 금융업(22%)이 차지하고 있다. 수치 면에서도 놀랄만한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는데 1960년부터 1999년까지 평균 8.0%의 높은 경제성장을 기록하였다. 특히 1985년 플라자협정 이후 일본의 직접 투자가 활발해 졌고, 1997년 경제위기 이전까지 외국인 투자액은 연 100억 싱가포르 달러를 돌파했다.

1997년 발생한 경제위기에 싱가포르는 한국, 대만, 홍콩 등 아시아 신흥공업국(NICs)과 비교했을 때 타격의 정도가 심한 편은 아니었다. 1998년 실질 GDP는 0.1% 증가하여 전년도 8.5%에 비해 크게 저조했지만 1999년 5.4%, 2000년 9.9%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여 경기 회복의 조짐을 보였다. 싱가포르 정부는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도로, 해상, 항공 운송비를 절감하고, 중앙적립기금의 기업 분담금을 절감하여 기업에서 지출해야할 비용을 절감하여 국고(國庫)를 확충하였다. 미국, 일본, EU 국가 등 세계경제의 침체가 이어지면서 2001년 경제성장률은 -2.0%를 기록하였고, 사스(SARS)의 영향으로 2003년 성장률은 1.1%에 그쳤다. 경제성장률 목표는 낮게 설정하였지만 2004년부터 경기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정치

싱가포르의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다. 임기는 6년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나 그 기간마저도 명확하게 지켜지지 않는 등 그 동안 싱가포르의 대통령은 상징적이거나 실질적 권한이 없는 직책이었다. 그러나 1991년 1월 헌법 개정에서 대통령 권한을 대폭 강화했다. 헌법 제 22조를 통해 대법원장과 대법원 판사, 검찰총장, 군참모총장 등 주요 공직자의 임명에 대한 거부권과 정부의 예산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권한을 보장받았다.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직선제로 선출되며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로 당적을 둘 수 없다. 피선거권은 45세 이상이다.

행정부의 수반은 총리이며 행정부의 구성원인 총리와 각 부처의 구성원들은 의회의원이어야 한다. 대통령은 다수당 소속 국회의원 중 1명을 총리로 임명하는데 임명 절차를 제외하고 총리는 정치·행정 및 각 분야 최고의 권한을 행사하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이다. 그러나 헌법에는 총리의 자격에 관한 어떠한 조항도 없으며 임무와 권한도 상당히 제한적으로 명시되어있다. 총리는 내각회의를 주재(主宰)하고, 내각의 어떠한 행정부처의 장관직을 유지할 수 있다. 총리는 각 부처 활동과 정부의 일반 정책에 대한 조정과 방향을 제시하고, 공무원 채용과 임용, 교육훈련 등 공무원 관련 업무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내각은 총 14개 부처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부처 장관은 총리의 추천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한다. 선임장관(Senior Minister)과 스승장관(Minister Mentor)에 각각 고촉동과 리콴유가 재직하고 있어 이들의 영향력이 여전히 의회 정치에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정부는 부정부패 척결과 청렴한 사회를 구현하고자 총리실 직속으로 부패행위조사국(Corrupt Practices Investigation Bureau)을 설치하였다.

싱가포르의 의회는 기본적으로 영국 의회제를 모델로 하고 있지만 영국과 달리 1955년 제정된 랜들헌법(Rendel Constitution)에 따라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싱가포르 국회의 고유 권한과 임무는 국가의 법률안과 예산안을 심의하고 의결하며 기타 주요 국정을 논의하는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는 임기가 끝나기 전 3개월 이내에 실시해야 한다.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할 수 있는 자격으로는 21세 이상의 싱가포르 시민권자로 국내에서 10년 이상 거주해야한다. 국회의원의 임기는 5년이고, 총 정족수는 94석인데 그 구성을 보면 상당히 복잡하다. 우선 지역별로 배정된 총 84석의 선출직과 대통령이 임명하는 2년 6개월의 지명직 9석, 그리고 총선에서 야당이 3석 미만의 의석을 획득했을 경우 가장 높은 득표를 한 야당 입후보자를 국회의원으로 추천하는 무선거구(Non-Constituency) 의원 1석으로 구성된다.

싱가포르의 군부는 독립 초기 국내적으로 공산당과 종족주의, 국외적으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같은 주변 강국에 비해 인구와 자원이 절대 부족하고 해협으로 포위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중추적 기관이었으나 단 한번도 정권에 참여하거나 집권한 적이 없다.

군부는 말레이시아의 영토였던 1957년 영국군에서 연방군으로 통합운용 되었고, 독립과 동시에 말레이시아와 외부의 위협에 공동 대처하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1971년에는 자국을 포함해서 영국, 호주, 뉴질랜드, 말레이시아 등 총 5개국과 방위협정(Five Power Defence Arrangement)을 체결하여 지역 안보를 공동으로 담당하고 있다. 1967년부터 18세 이상의 성인 남성에게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고, 지원자에 한해서 여성들도 군 복무가 가능하며 의무복무기간은 2년에서 2년 6개월 사이이다. 2005년 현재 직업군인이 2만 명, 의무복무병이 4만 명, 상비예비군이 31만 명으로 총 병력이 37만 명에 달한다. 상비 예비군은 장교가 50세, 사병은 40세까지 연간 40일간 실시되는 동원훈련을 받아야 한다. 기타 준군사 조직으로 이스라엘을 모델로 한 민방위대가 12만 명의 가용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

1970년 12월 싱가포르에 한국의 통상경제 대표부가 개설되었으며, 그 이듬해인 1971년 7월 대표부가 총영사관으로 승격하였다. 이어 1972년 12월 양국간 항공협정이 체결되었으며, 1975년 8월 영사관계가 대사 관계로 승격하였다. 또 1979년 11월 한국·싱가포르 간 ‘이중과세(二重課稅)방지협정’이 체결되었다. 또한 1980년 3월 27일부터 31일까지 제1차 한국·싱가포르 통상장관 회담이 싱가포르에서 개최되었으며, 양국간의 교역확대, 한국의 싱가포르 지하철 건설계획 참여, 싱가포르가 중계무역항이라는 이점을 활용하여 싱가포르 내에 합작 무역업체의 설립 등의 문제를 검토, 협의하고 양국간의 경제·무역 협력관계를 강화하였다. 2006년 3월 한-싱가포르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었다.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한국의 해외건설시장으로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1972년 한국의 건설업체가 처음으로 진출한 이후 싱가포르의 대표적인 건물들이 한국인의 기술로 건설되었으며, 그중에서 쌍용건설(주)이 시공·완성한 싱가포르의 래플시티는 복합건물로 싱가포르의 상징적인 건물이 되었다. 한국통계기준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한국의 11대 교역대상국(수출 7위, 수입 13위)이며, 싱가포르통계기준으로는 한국은 싱가포르의 9대 교역대상국(수출 10위, 수입 8위)이다. 현재 약 70여 개에 달하는 한국 기업이 싱가포르에 진출해 있으며, 상당수 기업은 동남아 지역본부로 활동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여러 분야에서 지역내 또는 세계적 차원의 허브로서 기능하는 등 전략적 중요성이 높은 경제 대상국이다.

2005년 현재 한국측 통계에 따른 싱가포르와의 총교역액은 127억3천만 달러(수출 74억1천만 달러, 수입 53억2천만 달러)이고, 싱가포르측 통계에 따르면 총교역액은 166억6천만 달러(수출 80억6천만 달러, 수입 86억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수산물, 농산물, 귀금속, 화학공업 등이며, 수출품은 유리, 수산물, 귀금속, 제약원료 등이다.

2007년 1월 현재 한국인은 약 1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고, 2000년 6월 싱가포르 인구조사에 따르면 1년이상 장기체류하고 있는 한국인은 4,400명이었다. 이들은 주로 국제 비지니스에 종사하는 한국 회사 관계자, 싱가포르 기업 및 다국적기업에 근무하고 있다.

바깥고리

연계 정보

관계 대상 문서 설명
uses 교육제도:싱가포르 싱가포르 교육과정, 2014년 조사 보고
uses 교과서목록:싱가포르 싱가포르 사회과 교과서 총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