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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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JUNGWOOK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5년 11월 20일 (금) 17:16 판 (긴장 관계의 형성 1900-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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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열강들 1900

전쟁 발발의 원인을 알기 위해 배경을 먼저 파악해 보자.


당시 유럽에는 5대 주요 열강이 있었다.

1) 영국은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상을 제국 통치하였고, 부유한 산업을 소유하고 있었다. 섬나라이기 때문에 자국 및 식민지를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했다. 19세기 동안, 영국은 고립정책을 취하며 유럽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2) 프랑스 또한 해외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프랑스인들은 1871년 보불전쟁에서 독일에게 알사체(Alsace)와 로레인(Lorraine)을 빼앗긴 것을 억울해 했다.

3) 러시아는 가난했지만 유럽 최고의 대국이었다. 니콜라이 2세 (Tsar Nicholars II)가 통치했다. 해외 식민지는 없었지만 바다로 접근이 가능한 유럽과 아시아에 식민지 개척을 원했다.

4)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0여개국으로 구성된 중유럽 제국이었으며, 이들 대부분이 독립을 원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Emperor Franz Joseph I)가 통치하였다.

5) 독일은 카이저 빌헬름 2세(Kaiser Wilhelm II)가 통치하는 작은 제국이었다. 카이저 황제는 영국의 뛰어난 해상력과 부유한 자원식민지를 질투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영향력과 해외에서 부를 키우기를 원했다. 그는 독일의 작은 식민 제국을 '양지'(place in the sun)로 묘사하면서 이를 확장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안보를 위해 동맹관계를 형성했다.

이들 국가들은 서로 돕기 위한 조약들을 만들었다.

1) 1879: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간의 2국 동맹 형성

2) 1882: 이탈리아가 2국 동맹에 참여하면서 3국 동맹체제로 돌입. 이 동맹들로 인해 중유럽 지역의 거대한 동맹 집단이 형성되면서 프랑스와 러시아를 자극하게 되었다.

3) 1892: 3국 동맹에 반대하여 러시아-프랑스 동맹 형성

4) 1904: 영국과 프랑스간 화친협정

5) 1907: 영국-러시아 화친협정으로 러시아, 영국 그리고 프랑스간 3국 화친협정이 결렬.

화친협정들은 군사협정은 아니었지만, 3국 동맹과 3국 화친협정 간의 긴장으로 말미암아 군대를 개입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동맹과 화친협정은 주요 강대국들 간에 긴장을 고조시켰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그리고 이탈리아는 3국 화친협정국들에 둘러싸여 위협감을 느끼게 되었다. 러시아는 발칸반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본심을 알아채고 이를 견제했던 반면, 영국과 독일은 세계 최고의 해군을 창립하게 되었다.


Tip!!

국제 정치 - 교활한 비즈니스

각 국은 아이디어 공유를 위해 동맹 관계를 형성했는데, 이것은 패거리로 적에게 맞서는 방법과 같았다. 이들 국가들의 주요 강점 및 이들이 형성했던 동맹들을 나열하여 적어보자.

긴장 관계의 형성 1900-1914

유럽에서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는데, 독일과 영국이 주요 역할을 했다.


독일과 영국 간 군비 확장 경쟁이 시작되었다.

1) 카이저 황제는 독일이 세계 최고의 열강이 되기를 원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해군 전력 강화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독일은 ‘세계정책(Weltpolitik)’을 실행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독일 병력 강화 및 독일 제국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매우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의미한다.

2) 1900년에서 1914년까지 독일은 해군 규모를 두 배로 확장하고자 하였다.

3) 영국에는 2국 표준원칙 정책이 있었는데, 이는 영국의 해군력은 언제나 유럽에서 영국 다음가는 두 나라의 해군력을 합친 것과 같거나 커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영국은 해상에서 절대 열세일 수 없다는 의미이다.

4) 영국은 1906년 드레드노트 (20세기 초에 사용된 전함)를 건조하여, 독일의 해군력 향상에 대비하였다.

5) 독일은 1907년과1908년에 전함을 직접 건조하였으나 , 이 후 1912년 영국은 이보다 더 큰 새로운 전함을 건조하였다.

6) 1914년까지 영국은 모두 29개의 드레드노트 전함을 그리고 독일은 17개의 전함을 건조하였다.


주요 열강들이 전쟁을 계획하였다.

1) 동부와 서부 국경에 적국들이 대치되어 있었던 독일은 1905년 슐리펜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전쟁 시 러시아가 전쟁을 개시하기 전에 독일이 프랑스를 무찌르고, 그 이후 러시아와 싸운다는 것이다.

2) 프랑스는 제 17호 계획(Plan 17)을 준비하여 독일로부터 알자스와 로레인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3) 영국은 15만 병력의 원정군을 창설하여 전쟁이 발발할 경우 유럽으로 즉시 출병할 수 있도록 태세를 정비했다.

4) 러시아는 전쟁에 대비하여 1909년 군부대를 증강하기 시작하였다.


모로코를 둘러싼 두 차례의 위기

모로코 위기 1905-6

1) 프랑스는 아프리카 독립국인 모로코를 프랑스 식민제국에 영입하고자 하였다.

2) 독일은 이에 반대하여 모로코의 미래에 대한 국제회의를 요구하였다.

3) 1906년에 열린 알헤시라스 회의(Algeciras Conference)에서 독일은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그리고 스페인이 프랑스의 모로코 경찰과 은행 지배권 획득에 찬성하면서 의견이 묵살되었다.


아가디르(Agadir) 위기 1911

1) 프랑스는 모로코 반란군들과 싸우기 위해 모로코의 페스(Fez)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2) 이에 독일은 프랑스가 모로코를 완전히 장악하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3) 독일은 아가디르에 군함 팬더(Panther)를 보내 프랑스가 프랑스령 콩고를 그들에게 넘기도록 강요하였다.

4) 영국은 독일의 아가디르 해군기지 건설이 영국의 주요 해협을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하여, 영국도 아가디르에 군함을 보냈다.

5) 독일은 결국 모로코에서의 프랑스의 영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점점 반영 감정이 커지고 있었다.


Tip!

갈등의 초읽기 돌입 – 단지 시간 문제일 뿐...

제 1차 세계대전 발발에 대한 3가지 주요 요소를 정리해 보자. 군비 확장 경쟁이 시작되면서 전쟁 가능성이 명백해졌고, 특히 독일은 영국을 능가하는 힘을 갖기 위해 노력하였다.

발간반도에서의 갈등

전쟁 발발

요약

연습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