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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대공황의 여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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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13일 (일) 22:27 판


목차

제 1차 세계대전에 대한 미국의 반응

제1차 세계대전(First World War: 1914-1918) 이후, 미국은 국제문제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이 정책은 고립주의라고 불린다.

미국 대통령이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를 제안했다.

1) 국제연맹은 미국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이것은 그가 평화 합의의 기반이 된다고 생각한 14가지 원칙이었던, 14개 조항(p. 21) 중 하나였다.

2) 그는 국제연맹이 주요강대국들의 대표들이 모두 만나 중요한 국제 사안을 논의하는 세계의 국회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3) 그는 이러한 단체가 또 다른 세계전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미국은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1) 제1차 세계대전 후 베르샤유 조약의 일부로써 국제연맹이 설립되었다.

2) 윌슨은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을 희망하였으나, 미 의회의 승인이 필요했다.

3)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가입을 원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4) 미국 국민의 대다수는 ‘고립주의’를 선호했다. 그들은 미국이 다른 나라들 간의 복잡한 관계에서 떨어져 고립되어 있기를 원했다.

미국인들은 국제연맹을 신뢰하지 않았다.

1) 많은 미국인들은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개입에 반대하였으며, 전쟁 때문에 미국인들이 목숨을 잃은 것을 분개했다.

2) 미국인들은 만약 미국이 국제연맹에 가입하게 되면,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자신들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여러 분쟁들에 의무적으로 참여하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을 우려했다.

3) 미국에는 독일 또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이민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국제연맹과 그들이 증오하는 베르사이유 조약을 연관 지어 생각했다. 그들은 미국이 독일에게 엄청난 양의 전쟁 배상금(전쟁에 대한 손해배상금)을 내도록 강요하는 단체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4) 일부 미국인들은 프랑스와 영국을 의심했다. 그들은 국제연맹이 영국과 프랑스의 관할 하에 있고 이들 국가들의 식민지를 방어하는데 도움이 필요할 시 미국을 끌어들인다고 확신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식민지라는 것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사상에 맞지 않는 것이며, 이를 지원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5) 또 다른 미국인들은 국제연맹에 참여함으로써 들어가는 비용을 우려했다. 그들은 국제연맹이 미국을 수많은 고비용의 전쟁에 끌어들일 것을 걱정했다. 많은 기업가들은 미국이 유럽의 문제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부유해질 수 있었음에 만족하였으며, 유럽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은 홀로 떨어져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미국이 국제연맹에 참여를 거부한 것은 이기적인 결정 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잠시나마 수많은 문제들과 
여러 비용문제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낼 수 있었을 것이다. 가입하지 않기로 결정한 모든 이유를 잘 학습해보자.


고립주의 강화

미국은 단지 혼자 있고 싶었다.

미국은 뒤늦게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익을 얻었다.

1)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미국 경제는 붐을 이루었다.

2) 미국은 전쟁 시 유럽으로 무기와 식량을 수출했다.

3) 미국은 1917년 연합군에 합류했다 – 그러나 미국땅에서 치뤄진 전쟁은 없었다.

4) 전쟁 후, 산업시설들이 파괴된 유럽국가들은 미국으로부터 대출금을 받아 미국의 물자를 사들이는데 사용했다.

저렴한 유럽산 수입품들이 위협으로 느껴졌다.

1) 미국 기업들은 저렴한 유럽 산 수입품들이 미국에 밀려들어 올 것을 우려했다.

2) 유럽의 실업률이 더 높았으므로 유럽의 노동자들은 더 낮은 임금에 일할 의사가 있었다. 기업가들은 미국의 소비자들이 비싼 미국 제품보다 저렴한 유럽 산 제품을 구매하게 될 것을 걱정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 - 미국에서의 일자리의 감소
 - 미국 기업들의 수익 감소
 - 미국 정부의 세수입 감소

워런 G 하딩(Warren G Harding)은 미국 산업 보호를 위해 관세를 인상했다.

1) 1921년 하딩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1921년 5월 긴급관세법을 도입했다. 관세는 수입이나 수출되는 상품에 부과하는 세금을 말한다. 이 법안은 수입 농산물에 대한 관세를 인상하는 것이었다.

2) 1922년 포드니-맥컴버 관세법(Fordney-McCumber Tariff)으로 대통령은 관세율을 올리거나 내릴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3) 하딩은 포드니-맥컴버 관세법을 이용하여 가공품과 농산품 모두에 세금을 올렸다.

4) 그는 “불공정한” 유럽과의 경쟁에서 미국을 보호하고자 했다.

출입국 관리가 강화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 미국은 모든 이들이 미국으로 이주해 오는 것을 허용하는 ‘문호개방(Open Doors)’ 정책을 따랐다. 그러나 일부 미국인들은 이’문호’를 닫아야 한다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대부분의 미국 내 힘과 부를 가진 집단들은 주로 영국인을 조상으로 둔 사람들이었다 - 이후 와스프(WASPs: White Anglo-Saxon Protestant)로 지칭함.

1) 많은 와스프들은 무정부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으로 유입되어 미국의 생활방식을 위태롭게 한다고 믿었다.

2) 그들은 또한 미국으로 유입되는 아시아인, 가톨릭교도, 유대인들의 숫자에 불안감을 갖기 시작했다.

와스프들은 미 국회(Congress)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하딩 대통령은 이민에 엄격한 제한을 두기로 결정하였으며, 특히 동남부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에 대하여 더욱 엄격했다. 1921년 국회에서 쿼터제를 도입하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1929년 연간 이민자는 1백만명에서 150,000명으로 감소했다.


고립주의 – It’s tariffic……(tariff+terrific의 의미)
제1차 세계대전이후, 미국은 비교적 문제가 없었지만, 유럽은 여러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수입을 제한하고, 이민자를 줄임으로써 
미국 평화와 부유함을 지켜나갔다.


1920년대의 번영

1920년대 미국은 엄청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

1920년대는 풍요의 시절이었다.

이 시기는 여러 의미에서 ‘호황의 시기’ 였다 – 수입이 증가하였으며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

1) 저 인플레이션, 저 실업률, 그리고 낮은 이율이 유지되었다.

2) 도시들은 고층빌딩들로 다시 개발되었으며, 도로 건설이 착수 되었다.

3) 소비재 호황이 왔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 냉장고, 세탁기, 진공청소기, 전화기와 같은 물건들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4) 광고는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쓰도록 유도하였고, 라디오와 영화 광고로 영역이 확장되면서 그 자체로 큰 산업이 되었다.

5) 외상으로 밖에 구입할 방법이 없는 평균소득자들이 차를 구입할 수 있도록 할부구입(분납하여 지불)이 도입되었다. 이는 사치품에 대한 더 큰 소비를 부추겼다.

6) 공화당 정부의 정책도 부유함을 누리는데 기여했다. 소득세를 줄여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쓸 수 있도록 했다. 정부는 또한 연방준비 이사회(Federal Reserve Board: 중앙 은행 제도)를 통한 저리의 신용대출을 촉진하여, 은행들이 더 쉬운 조건에 돈을 빌려주도록 장려했다, 이는 (잠시나마) 호황에 기여했다.

주식시장이 호황을 맞이했다.

1920년대 150만명의 미국인들이 주식을 구입했다. 1928년 주가가 비현실적으로 치솟기 전까지는 주식을 매입하는데 대한 합리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 사람들은 제조업과 소비재에 많은 투자를 했다. 사람들이 매도 차익을 남길 것을 기대하며 신용대출로 주식을 사기 시작하였을 때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자동차 산업이 호황을 주도했다.

1) 노동자 12명중 1명의 직업이 자동차 제조와 연관된 직종이었다.

2) 자동차 제조는 철강, 석유, 화학, 유리, 고무 등의 다른 산업들도 성장시켰다.

3) 자동차를 더욱 손쉽게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 포드 모델 T(Model T Ford)는 300달러 이했다.

4) 자동차 제조는 큰 세 곳의 회사들이 장악했다 – 포드(Ford), 크라이슬러(Chrysler),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

5) 포드사의 공장은 어셈블리 라인 시스템을 사용했다. 이는 한 그룹 안에서 작업자들의 생산 업무를 서로 나눠 분담하고, 순서에 따라 무빙벨트에 위치하여 일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산과정의 효율성을 극대화 시켰고, 큰 가격의 인하를 가져왔다. 1929년이 되자, 미국인 5명 당 자동차 1대의 비율이 되었다.

<그림 설명>

연간 자동차 생산량

1920 – 1백9십만대

1929 – 4백5십만대


미국에서의 호황 – 이것을 복습하고 성공하길…
이 페이지는 정말 중요하다. 1920년대 어떻게 미국의 경제가 살아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몇몇 통계들을 
잘 공부하도록 하자 – 시험관에게 감명을 줄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의 빈곤

많은 미국인들에게는 호황의 시기였지만, 다른 이들에게 삶은 여전히 고달팠다.

빈곤은 아직 남아있었다.

부는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 미국의 부자와 가난한 자의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었다.


< 그림 설명>

60%의 가난한 계층이 5% 이하의 부를 소유

5%의 부자 계층이 25%의 부를 소유

1%의 부자 계층이 16%의 부를 소유

도심지역에서의 빈곤

1) 독점(한 회사나 그 연합체에 의해 전체 산업이 소유되거나 통제되는 것)은 고객들과 노동자들간의 경쟁을 없앰으로써 고가격과 저임금을 유지시켰다.

2) 많은 아프리카 계 미국인들은 군수 산업에서의 일자리를 찾기 위해 남부에서 북부로 이동했다. 그들은 종종 편견과 가난으로 인해 영세민지역에서 살수밖에 없었다.

3) 일부의 도심지역에서의 빈곤은 몰려드는 사람들의 숫자에 의해 발생된 것이다 – 많은 사람들이 농촌지역에서의 어려운 삶 때문에 도시로 이주했다.

“구식” 산업은 악화되었다.

1) 석탄 산업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석탄 채광 업은 석유와의 경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자동차나 트럭이 석탄의 주요 사용처인 기차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2) 1919년과 비교하여 1929년 석탄의 채광량은 10%나 줄었다. 또한 더욱 효과적인 채광 기술은 탄광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았으며, 남아있는 광부들의 임금은 줄어들었다. 탄광 마을은 극심한 어려움에 시달리게 되었다.

3) 전쟁 덕택에 일었던 목화 호황은 1920년에 끝이 났다. 1921년 목화 바구미(목화를 먹는 딱정벌레)가 수확량의 30%를 망가뜨렸다. 1920년대 중반에는 과잉생산 이라는 그 반대의 문제가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가격이 곤두박질쳤다.

농업의 문제들이 농촌지역의 빈곤을 유발했다.

1) 전쟁 기간 동안 농부들은 부유해졌다. 그러나 1920년대 그들은 필요한 양 보다 더 많은 양을 재배했다. 과잉생산은 가격의 하락을 불러왔고 이에 따라 수익도 줄었다.

2) 세금, 융자금, 임금이 상승했다. 농부들의 수익은 더욱 더 줄어들었다.

3) 1920년대를 지나면서 대외 경쟁이 증가했다. 유럽의 농업은 전쟁으로부터 회복하였고, 그러는 동안 캐나다(Canada), 러시아(Russia), 아르헨티나(Argentina) 그리고 호주(Australia)가 세계시장의 경쟁에 뛰어들었다.

4) 공화당 정부는 농부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의회에서 정부가 농부들의 생산물을 매수할 수 있도록 하는 맥네리-호건 법안(McNary-Haugen bill)을 통과시켰을 때, 쿨리지(Coolidge) 대통령은 두 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했다 – 그는 그것이 과잉생산을 더욱 부추기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5) 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농업인구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재즈 시대(Jazz Age)는 벤틀리(Bentley)와 샴페인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항상 승자와 패자가 존재한다 – 1920년대도 다르지 않았다. 종종 ‘좋은 시절’이라고 생각되는 시기를 어떤 
사람들은 힘겹게 지나가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1920년대의 편협함 (1)

1920년대 미국의 일부 사람들은 차별과 학대에 시달렸다.

이민자들에 대한 편견이 적색 공포(Red Scare)를 야기했다.

1) 새로운 이민자 그룹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였으며, 공산주의 선동가의 국내 유입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1919년 온 나라에 걸쳐 심각한 폭탄테러가 일어났다, 정부는 이것을 빌미로 ‘적색 공포’에 불을 지폈다. 4천명의 사람들을 강제 추방하였으며, 이들은 대부분 러시아인 들이었다.

2) 적색 공포 당시, 니콜라 사코(Nicola Sacco)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Bartolomeo Vanzetti)라는 두명의 이탈리아(Italy) 출신 무정부주의자들이 살인과 강도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것은 오심이며, 판사에게 편견이 있었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항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1927년 처형되었다.

이민을 제한하기 위한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 1917년부터 이민자들은 ‘읽기와 쓰기 검사’를 통과해야만 했다.
- 1921년 쿼터제가 도입되었다. 이것은 엄격하게 이민을 제한하는 이민 제한법(National Origins Act)으로 1924년 대체되었다. 이 법률은 남동부 유럽, 그리고 아시아로부터의 이주민들을 차별했다.

인종차별주의자 큐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이하 KKK로 표기)이 세력을 확장했다.

1) 1860년대 처음으로 조직되었으며, 1920년대 초 KKK에 새로운 회원들이 생기게 되었다.

2) KKK는 미국 남부 지역에 기반을 둔 백인지상주의자 조직이었다.

3) 그들은 아프리카 계 미국인에게 더 이상의 권리를 제공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들은 또한 이민자, 유대인, 가톨릭 교도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위협과 폭력을 행사했다.

4) 1925년 KKK 회원 수는 4백만명 가까이로 증가했다.

5) 1925년, 인디아나 주의 KKK 리더인 D C 스티븐슨(D.C. Stephenson: 그는 납치와 2급 살인으로 기소되었다)이 관련된 추문 사건이 있었다. 조직은 많은 지지자들을 잃게 되었으며, 이전처럼 눈에 띄는 문화 정치적 세력을 다시는 얻지 못했다.

미국 사회의 추하고, 폭력적인 면이 존재했다…
1920년대 미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차별 당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1920년대의 편협함 (2)

학대는 KKK와 같은 인종차별주의자 단체들에 의해서만 저질러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일부 법안들은 인종 차별적이었다.

1) ‘짐 크로 법(Jim Crow Laws)’은 아프리카 계 미국인들을 차별하는 법률들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이는 미국의 남부 주들에서 더욱 일반적이었다.

2) 일부 법안들은 아프리카 계 미국인들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힘들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어떤 주들에서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할아버지들이 선거를 했다는 증명을 해야만 했다 – 이것은 선거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노예 출신 조상들을 둔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제외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노예제도는 1865년도에야 미국에서 사라졌다).

3) 어떤 법안들은 백인들과 아프리카 계 미국인들이 서로 분리된 시설(예를 들어 다른 학교, 교통수단, 공원, 카페, 그리고 공원)을 이용하도록 강제했다. 이것은 분리 정책이라고 불렀다. 시설들은 “분리 되어있지만 동등”한 것이어야 했지만, 아프리카 계 미국인들에게 제공된 것들은 대체로 훨씬 열악했다.

일부 과학적 사상에 대한 편견도 있었다.

1) 1925년 존 스콥스(John Scopes)라는 교사가 테네시주(Tennessee) 법률 위반인 다윈(Darwin)의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2) 그는 고의적으로 법률을 위반하기로 한 것이었다.

3) ‘원숭이 재판(Monkey Trial)’은 뉴스의 헤드라인이 되었다. 항소심에서, 스콥스의 변호인은 법률이 언론의 자유와,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대한 미국 헌법 수정안(US Constitutional Amendments)을 위반한다고 주장했다.

4) 스콥스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 그러나 그의 변호인은 그 법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들은 법과 싸웠으나 – 법이 이겼다…
만약 당신이 현재의 미국 내에서 핍박을 받고 있다면, 법이 당신의 편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1920년대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었다.


금주법과 조직범죄 (1)

1920년 1월, 주류를 제조하고 유통 또는 판매하는 것이 불법이 되었다. 이것을 금주법 이라고 한다.

1920년 미국은 절대 금주를 선언했다.

1) 금주에 대한 압력은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일부 주들은 1917년까지도 “금주” 였다.

2) 19세기 이래로 금주운동가들은 금주법 제정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 그들은 농촌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대부분 기독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술이 폭력과, 비도덕적 행동을 유발하고, 가족의 삶을 망가뜨린다고 주장했다.

3) 중산층들은 종종 이민자들이나 노동자 계급의 무질서 함을 알코올 탓으로 돌렸다. 기업가들은 알코올이 노동자들을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든다고 주장했다.

4) 제1차 세계대전(1917년에 미국 참전)은 금주법에 대한 더 많은 지지를 불러오는 결과를 낳았다. 많은 양조장들이 독일 출신 이민자들의 소유였고, 미국은 독일을 상대로 전쟁 중이었다.

5) 금주법에 반대하는 이들은 주로 도시(특히 북쪽 주에 있는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다.

술집들은 문을 닫았다. 불법으로 주류를 사는 것은 비쌌기 때문에, 소비가 감소했다(특히 가난한 계층에서 더욱).

미국 당국조직 범죄단이 주류의 유통을 ‘맡았다’.

금주법 관련 범죄와 조직폭력은 이 법률을 집행하기 위해 1500명 이상의 에이전트(후에 2800명 이상으로 증가)를 고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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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는 미국에서 금지되었다…
금주법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술을 필요로 했다. 이는 불법 주류를 제공하는 것이 엄청난 돈 벌이가 
된다는 뜻이었고, 따라서 많은 범죄자들이 이것을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금주법과 조직범죄 (2)

금주법은 많은 이들이 바랬던 것처럼 미국에 평화를 불러오지는 못했다. 영향이 있었다면, 상황이 점점 더 폭력적으로 된 것이다…….

알 카포네(Al Capone)는 유명한 폭력배(gangster)였다.

1926-29년사이 시카고(Chicago)에서는 갱들 간의 전쟁으로 1300명 가량이 사망했다. 알 카포네는 폭력배 우두머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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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마침내 금주법이 해제되었다.

1) 주류를 필요로 하는 대중의 수요가 여전히 있었으므로, 금주를 강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2) 금주법은 부패로 이어졌다 – 판사들이나 경찰관들은 폭력배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 일부 경찰들은 직접 주류 밀매에 연루되기도 했다. 1930년, 조지 캐서디(George Cassiday)라는 주류밀매업자가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에게 주류를 판매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3) 1932년 대선 캠페인에서 루스벨트(루스벨트(p. 129))는 금주법의 폐지를 공약했다. 1933년 12월 국회는 금주법을 폐지했다.


금주법 – 절대 금주의 절대 재난……(a tee-total disaster)
금주법은 실패로 돌아갔다, 술에 대한 수요가 계속 있었기 때문이었다. 범죄자들은 발빠르게 불법 주류를 사람들에게 
제공하기 시작하여 큰 이윤을 얻었고, 촘촘한 범죄 조직망을 구축했다.

사회 개발

1920년대 미국 사회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여가생활을 위한 지출을 늘였다.

1) 영화는 필수적인 대중 엔터테인먼트가 되었고, 수백만 달러의 산업이 되었다. 4000석 이상의 좌석을 갖춘 거대한 극장들이 지어졌다. 1927년 최초의 “말하는” 영화가 발표되기 전 까지는 무성영화만 있었다. 할리우드(Hollywood)는 가장 큰 영화제작의 중심지였다.

2) 라디오도 호황을 이루었다. 1921년 허가 받은 방송국은 단 하나뿐이었지만, 2년 후 508개가 되었다. 엄청난 숫자의 수신기가 판매되었다. 1929년까지, 매 해 8억 5천만 달러가 수신기와 구성 품을 사는 데에 사용되었다. NBC(National Broadcasting Company)가 1926년 설립되었으며, 1929년까지 1억 5천만 달러를 광고로부터 벌어들였다.

예의범절과 도덕률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1) 젊은이들은 흡연, 춤, 칵테일 파티를 즐겼다. 일부 여성들은 립스틱을 바르고, 짧은 치마와 하이힐을 신었다(이들은 신여성이라 불렸다).

2) 교회 참석률이 떨어졌고 이혼율이 증가했다.

3)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유방임과 성적 자유가 도에 지나치다고 느꼈다.

여성들은 더 많은 자유를 얻었으며 독립적이 되었다.

1) 영화들, 유행가들 그리고 페이퍼백 서적들은 새로운 유행 스타일과 자유를 부추겼다.

2) 일부의 페미니스트들은 해방운동을 벌였으나, 제한적인 성공만을 거두었다.

3) 여성들의 경제적 독립이 장려되었다 – 어떤 이들은 무역업무를 배우거나 타이피스트나 비서로서 교육을 받았다. 새로운 사무직들이 생겨나 많은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4) 가사를 위한 도구들은 집안일의 힘들고 단조로움을 해소해 주었다.

5) 고등학교와 대학 진학률은 여성들이 이전에 비해 더 나은 교육을 받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시각들도 남아있었다.

1) 일부 서적들과 잡지들은 ‘품위 있는’ 표준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2) 여성들은 여전히 가정주부가 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3) 고용시장에서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지속되었다.

4) 대부분의 일하는 여성들은 저 기능, 저 임금의 직업들을 지속하여야만 했다.

5) 전통적인 남성의 가치관은 ‘공공분야’에서 남성 우위를 강조하기 위해 지속되었다.


할리우드, 짧은 치마 – 그리고 그런 것들(all that jazz)……
이 두어 장의 페이지는 학습하기에 훌륭하지 않은가! – 조직폭력배들, 신여성들, 영화 스타들, 모두들 다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넋을 잃지 말기를 – 여전히 시험을 위해 알아야 할 여러 사실들이 있다.

검은 목요일: 경제 대공황 (1)

월 스트리트(Wall Street)는 뉴욕에 있는 금융 중심가이다. 채권과 주식들이 이곳에서 사고 팔린다.

주가는 기업의 성공여부에 달려있다.

주식을 사고 파는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이렇게 이루어진다:

   당신이 회사의 주식을 구매하고, 회사는 이 돈을 이용한다.
   만약 회사가 성공적으로 운영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주식을 사기를 원할 것이며, 
   이는 주식의 가격을 상승하도록 한다.
   주주는 주식을 매도할 수 있으며, 주당 가격이 상승하였을 시 이윤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회사가 성공적으로 운영되지 못한다면, 사람들의 신뢰를 잃을 것이고 그들은 보유한 주식을 
   팔고자 할 것이다. 주식의 가격이 내려가고, 주주는 손실을 입게 된다.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에 주가는 폭락했다.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13백만가량의 주가 팔렸다. 주식 가치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10월 28, 29 양일간, 잇따른 주식가치의 급격한 하락이 시작되었다.

일부 주요 채권은 가치가 3/4으로 하락했다.
가격은 여러 해 동안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1933년 가장 낮은 포인트까지 떨어졌고, 83%의 주식회사들의 가치가 하락했다.

주식가격의 하락은 높은 실업률을 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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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주식투자와 수익분배(share-ing)는 해가 될 수도 있다…
주식시장에 투자를 한다는 것은 주들을 사고 팔아서 돈을 벌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잘못되었을 때, 
모두가 경제상황의 끔찍한 결과로 인해 고통 받았다.


검은 목요일: 경제 대공황 (2)

1920년대 초 ‘호황의 시기’의 풍요로움은 마치 시한폭탄과 같았다 – 사람들은 실제로 가지고 있지도 않았던 돈을 써 댔고, 따라서 폭락이 일어나자 경제는 산산조각이 났다.

가격을 떠받치고자 했던 노력들은 실패로 돌아갔다.

대부분의 초기 손실은 큰 스케일의 투기업자들이 입었다. 선도 금융업자들이 소집하여 2억4천만 달러를 공동 출자 했다. 그들은 이 돈을 신뢰를 회복시키고 공황상태를 끝내기 위한 주식을 사들이는데 사용했다.

그들은 실패했다 – 공황 매도는 추가 하락을 불러왔다.

투자신탁은 채무이행이 불가능했다.
채무불이행은 다른 곳들의 파산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예금을 찾기 위해 은행으로 몰려갔으며, 이는 많은 은행들의 파산을 초래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던 경제 문제들이 주가폭락에 일조했다.

     1920년대가 많은 이들이게 ‘풍요로운 시기’ 이었음에도 불고하고, 경제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었다. 
     풍요로움은 사람들의 지속적인 지출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빚을 크게 늘렸거나, 
     이미 필요한 소비재를 구입하고 난 후였다. 1972년 이후, 수요의 침체가 왔다.

이 상황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더 악화되었다.

1) 부의 불평등한 분배가 있었다 – 증가하는 이윤은 노동자들에게 까지 돌아가지 않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출을 늘이기에는 너무 가난했다. 이것은 빠른 생산의 속도만큼 수요가 따라가지 못했다 것을 의미한다.

2) 과잉생산이 있었다 – 산업은 사람들이 구매하려는 것 이상으로 많은 제품을 생산했다. 1929년, 팔리지 않은 재고는 쌓여갔고 제조사들은 생산량을 줄였다. 그들은 직원들을 해고하기 시작하였으며 실업률이 증가했다.

3) 은행들은 대부분 규제를 받지 않았다. 그들은 불안정했고 예금자들의 돈으로 증권거래소에서 도박을 했다.

4) 중계인들은 투자자들이 주식을 살수 있도록 값비싼 대출을 제공했다. 주식시장이 붕괴하였을 때, 투자자들은 대출을 상환할 능력이 없었다.

5) 미국과 유럽 사이에 무역 장벽이 있었다(높은 관세 등) – 이는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 때문이기도 하다. 거기에 더해 유럽 국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다. 이것은 유럽이 미국의 잉여생산물을 위한 좋은 시장을 제공하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월스트리트 1929 – 상황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 문제의 거리…
투자자들에게 상황이 정말 나빠져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공황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 이것이 상황을 훨씬 더 
나쁘게 만들었다. 상황이 심각하게 나빠진 것에 대한 모든 이유들을 나열해 보자.

경제 대공황의 여파 (1)

폭락은 신뢰를 파괴했다. 사람들은 돈과 예금을 잃었고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의 장기 폭락은 1931년 중반부터 1933년 초반까지였고, 더 많은 파산을 초래했다.

대공황은 모든 계층에 타격을 주었다.

1) 1932년 한해 동안만 미국 내 약 20,000개의 사업장이 문을 닫았다.

2) 1929년 하반기부터 1932년 중반까지 5000곳의 은행이 사업을 접었으며, 32억 달러의 예금이 사라졌다.

3) 국민 소득이 800억 달러에서 400억 달러로 감소했다(1929-33).

4) 상품의 가격이 지속적으로 떨어졌고, 제조업의 생산이 중단되었다. 임금은 하락하였고 노동자들은 해고당했다. 1933년에는 노동력의 1/4의 (약 13백만)이 실업자가 되었다.

5) 농축산물의 가격이 60% 하락했다. 이는 농부들이 생산품을 팔아 벌어들이는 돈보다 수확하고 운반하는 데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한다는 의미이다 – 과일들은 썩어갔고, 양들은 죽여 태워졌다, 밀은 추수되지 않았고, 빚은 늘어만 갔다. 많은 파산한 농부들은 땅에서 쫓겨나거나 소작인이 되어, 그들의 자립을 잃었다.

대공황은 심각한 빈곤을 불러왔다.

1) 빈곤은 영양부족을 불러왔다.

2) 수 천명이 노숙자가 되었다. 일부는 판자촌을 만들어 그곳에 살았다. 이곳은 후버(Hoover)대통령의 이름을 따 후버빌(Hoovervilles)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3)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주했다. 어떤 가장들은 일자리를 찾아 가족을 떠났다.

4) 이민지 출신 농장 노동자들은 일을 찾아 시골지역을 떠돌아다녔다. 그들의 상황은 중서부의 가뭄 기간과, 일부 토지남용으로 인한 영향으로 더 나빠졌다.

5) 결혼은 연기되었고 출산율은 떨어졌다.


대공황의 식사 – 별로 군침이 돌지는 않는다…
대공황은 기업가들부터 농장 노동자들까지,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만약 당신에게 직업도, 집도, 음식도, 자립할 
수도 없다면, 터널 끝의 어떤 빛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경제 대공황의 여파 (2)

불과 몇 년 전까지도 그들은 풍요로움과 자립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대공황은 많은 사람들을 더욱 더 힘들게 만들었다.

사람들을 돕기 위한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대공황은 엄청나게 충격적이고 사기를 저하시키는 경험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살아남기위해 그리고 자존심을 시키기 위해 열심히 싸웠다. 주정부와 자선기관들은 국민들이 이를 견뎌낼 수 있도록 돕는 노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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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타인벡(Steinbeck)은 그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는 책을 썼다.

존 스타인벡의 훌륭한 소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는 대공황 시기 자신들의 행운을 기다리며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농부들의 이야기이다.

도움의 손길…
만약 네가 분노의 포도를 읽을 시간이 없다면, 영화를 찾아서 보도록 – 그 훌륭한 영화를 보는 동안 이 내용들을 다시 
복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공부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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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네시강 유역 개발 공사

2차 뉴딜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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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정리

시험자료

연습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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