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영국 사회의 변화 1890-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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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JUNGWOOK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5년 12월 14일 (월) 02:1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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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필요성

1890년대 많은 영국인은 그냥 가난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절망적이었다.
노인, 병자, 실업자에 대한 정부의 도움이 없었다.

1890년대 빈민들은 매우 어려움을 겪었다.

1) 가난한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데는 지방 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구빈원(workhouse) 뿐이었다. 이곳에서는 가혹한 조건에서 장시간 일하는 대가로 기초적인 식품과 잠자리를 제공했다. 많은 사람들이 구빈원에 가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2) 일부 산업에서는 실업이 심각했으며, 실업수당이나 실업급여도 없었다.

3) 저축이 없거나 가족이 없는 노인은 살기가 매우 힘들었다. 정부의 연금이 없었다. 많은 노인들의 유일한 선택은 구빈원 뿐이었다.

4) 빈민 지역의 주거환경은 습기차고 추웠으며, 하수도 시설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는 쉽게 병에 걸리고, 병에 걸리면 결근을 해야 하고, 실직을 할 수도 있었다.

5) 많은 사람이 의사와 약품의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6) 많은 어린이가 어린 나이에 일하러 가야 했고,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7)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먹을 수 조차 없었다. 보어전쟁(1899-1902)에 참전하기 위해 모집된 청년들 중 절반이 영양실조였다.

2개의 보고서가 영국인의 3분의1이 가난하다고 밝혔다.

빈곤이 그 정도로 심하다고 믿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특히 부자들이 그러했다.
2개의 보고서가 빈곤이 심각할 뿐 더러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다고 밝혔다.

찰스 부스(Charles Booth)는 1889년 인민들의 생활과 노동(Life and Labour of the People) 제1판을 발표했다. 보고서는 런던 주민 30%가 심각한 빈곤을 겪고 있으며, 때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일자리를 얻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부 일자리의 임금은 너무 낮아서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밝혔다.

시봄 론트리(Seebohm Rowntree)는 요크에 공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곳의 문제가 런던만큼 심각하다고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생활환경을 조사했다. 1901년 발표한 의 조사보고서 빈곤, 도시생활의 한 연구(Poverty, A study of Town Life)는 요크의 주민 28%가 매우 가난하여 기초적인 식품과 주거환경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론트리 – 사회개혁가이며 과일검의 발명자…
1890년대 다수의 영국인들의 삶은 고달팠다.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문제의 사례와 두 보고서를 공부해 두자. 종이에 적어보고, 
제대로 알고 있는지 점검해 보자.

보수당, 자유당, 노동당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영국의 빈곤 문제는 더 이상 묵살할 수 없게 되었다. 정치가들과 국민들은 무언가 해야 된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데 대한 여론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인구의 3분의 1을 구빈원에 넣을 수는 없다. 영국은 빈곤 문제에 대처하는 새로운 대책이 필요했다.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갖고 있었다.

1)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골즈워디(I. Galsworthy),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H.G. 웰즈(H.G. Wells) 등 존경 받는 인기 작가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글로 썼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하며, 이것이 이루어지도록 정부가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공중보건과 의료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정부는 건강문제에 더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을 하는 사람과 전통적으로 최고 부유층인 공장과 농장 소유자 사이에 부의 분배가 보다 평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4) 노동당은 유일한 주류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그들은 정부가 사회의 최빈곤층에게 재정적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당은 점차 더 많은 노동계층의 지지자를 규합하게 되었다.

왕립조사단이 빈곤문제를 조사했다.

1905년 보수당은 빈민법(Poor Law)를 검토하기 위해 왕립조사단을 만들었다. 19세기에 만들어진 이 법은 구빈원의 설치와 기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지원을 정한 것이었다. 위원단의 임무는 이 법이 이 법에 의한 도움이 충분한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기구의 위원들은 빈곤의 원인에 대하여 합의에 실패했기에 2개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다수파의 보고서 (조사단 다수의 생각)

- 사람들이 가난한 것은 그들의 잘못이다.
- 그들은 도박과 음주 때문에 가난해졌다. 그러므로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다.
-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이미 할 만큼 해주었다.

소수파의 보고서 (조사단의 소수의 생각)

-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가난해졌다.
- 병과 노령, 그리고 일자리 부족이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었다.
- 사람들이 가난해 지는 것을 막기 위해 더 많은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디킨스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1905년 무렵,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국에 빈곤 문제가 있다는 깨달았지만, 이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할지는 분명치 않았다. 정당과 의료
전문가들은 그들 나름의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위원들은 가난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잘못으로 가난해 졌으므로 자력갱생해야 한다고 느꼈다.

보수당, 자유당, 노동당

어린이와 노인들을 위한 법

노동자 보호법

자유주의 개혁의 효과

1890년대 여성의 권리

여성 투표권 운동 1900-1914

제 1차 세계대전의 시작

참호전

신무기

서부전선

전쟁 준비

식량 부족

영국의 전쟁에 대한 견해

전쟁 종료

여성과 투표권 1914-1928

총파업 형성배경 1918-1926

총파업 1926

총파업의 영향

요약

시험 자료

연습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