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평화 정착

CefiaWiki
HONGJUNGWOOK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5년 11월 23일 (월) 19:55 판

이동: 둘러보기, 검색


평화 정착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에 시작되어 1918년까지 지속되었다. 전쟁은 1918년 11월 11일 휴전으로 막을 내렸고, 승전국들 (영국, 프랑스 그리고 미국)은 패전국들과의 평화협정에 동의해야 했다.

세 가지 우려 사항

1) 수백만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벨기에와 프랑스 같은 나라들은 황폐화되었고, 주요 열강들은 전쟁에 너무 많은 자금을 쏟아 부었다.

2) 많은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독일에게 돌렸고, 독일과 그의 동맹국들은 회담 참석이 거부되었다.

3) 모든 국가들이 이러한 전쟁이 다시 발생할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하기를 원했지만, 이를 위한 방법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즉, 연합 체계는 확실히 실패했다.

3대 주요 열강은 프랑스, 영국 그리고 미국이었다.

1) 3개국 모두 평화 정착에 대한 구상을 가지고 있었고, 종종 서로의 구상안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2) 따라서 협의에서는 구상안들 중 단지 몇 건만이 평화 정책에 반영되었다.

3) 중요한 것은 프랑스가 심각한 고통에 시달렸으며, 영국도 어려운 상태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양국 모두 독일을 처벌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프랑스와 영국에 비해 덜 힘든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은 감성적이었고 공정함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윌슨은 14개 조항을 제안했다.

1) 윌슨 대통령은 1918년 1월 독일이 휴전을 요청했을 때 14개 조항을 제시했다. 2) 독일은 당시에는 이 조항을 거부하였으나, 이 후 전쟁이 종료되었을 때 의사를 바꾸어 이 조항에 토대를 부어 평화 정착 기틀을 마련하기를 원했다. 3) 동맹국들은 윌슨의 조항을 거부하였는데, 이는 독일이 이전에 이를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4) 그러나 이 14개 조항은 평화 정착을 이루기 위한 중요한 부분이었다. 특히 14번 항목에서는 국제연맹을 조직하여 분쟁을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항목은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윌슨의 14개 조항
1918년 1월

1.  비밀 협정 금지
2.  모든 국가들의 항해 자유 보장
3.  국가 간의 무역 자유 보장 
4.  군비축소
5.  식민지들에게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발언권 부여
6.  러시아에서 독일군 철수
7.  벨기에 독립
8.  알사체-로레인을 프랑스에 반환
9.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간 국경 변경
10. 동유럽인들의 자결권 인정
11. 세르비아의 해상 접근 허용
12. 터키제국 국민들의 자결권 인정
13. 폴란드의 독립 허용과 해상 접근 허용
14.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국제연맹 마련 


14개 조항 – 평화를 위한 기회..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사소한 다툼도 끝났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승전국은 전후 처리에 대해 여전히 논쟁을 벌였다. 
왜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과 다른 구상안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기억하자. 그리고 14개 조항을 나열하여 적어보고 꼼꼼히 내용을 공부하자.


베르사이유 조약

윌슨의 14개 조항은 독일에게 꽤 유리하게 보였지만, 실제로 조항대로 이행되지는 못했다. 결국 많은 협상이 이어진 후, 베르사이유 조약이 대두되었다.

1919년 6월 베르사이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1) 이 조약은 독일에 대해 다루었으나, 다른 패전국들에게는 다른 조약을 적용하였다.

2) 이 지도는 이와 관련한 주요 변화를 보여주므로, 누가 어느 지역을 차지했는지 살펴보고 이해하라.

3) 독일이 상실한 영토를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하라 – 특히 독일 서부에서 가장 광활한 영토인 알사체와 로레인 지역 (A)을 살펴보라.

4) Rhineland (라인란트) (R)는 비무장지대로 규정되었다. 독일의 이 지역을 통한 프랑스와 벨기에로의 침략을 우려하여 독일의 이 지역으로의 병력 투입이 금지되었다.

5) 이 조약으로 탄생한 신생국들 중 특히 독일과 인접한 국가들을 살펴보라. 일부 국가들은 영토 내에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국가들은 잠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


<지도>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


베르사이유 조약의 결과는 가혹했다.

1) 독일이 상실했던 것은 단지 영토만이 아니었다. 조약 231번 문항을 통해 독일이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한다는 전범조항(War-Guilt Clause)을 명시하였다.

2) 독일의 병력은 자원병에 한해 십만 명으로 축소되었고, 장갑차와 항공기 및 잠수함은 보유할 수 없었고 오직 전함 6대만을 보유할 수 있었다.

3) 독일은 전쟁으로 인한 손실액으로 6천6백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급해야 했다. 이 금액은 1921년에 결정되었지만, 이후에 다시 조정되었다. 이 배상액은 독일이 198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지급해야하는 것이었다.

4) 독일 제국은 붕괴되어, 독일은 해외식민지에 대한 통치권을 국제연맹에 위임해야 했다.

5) 국제연맹은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이 기관에 대해서는 더 많은 학습이 필요하다.


베르사이유 – 독일을 위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이 조약은 체결 이후 20년간 유럽의 주요 문서였으며, 제 2차 세계대전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독일은 이 조약 결과에 대해 매우 분노하였고, 이 후 여러 차례의 주요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반응들

그 외의 조약들

요점

연습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