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제 1차 세계대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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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에서의 삶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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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의 전술을 지지하는 의견'''
 
'''헤이그의 전술을 지지하는 의견'''
  
〮      - 그 대가가 무엇이었든, 헤이그의 주 목표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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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대가가 무엇이었든, 헤이그의 주 목표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 만일 당시 영국 정부가 더 나은 전략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헤이그를 교체하였을 것이다 –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 만일 당시 영국 정부가 더 나은 전략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헤이그를 교체하였을 것이다 –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 일부 독일 최고 병력이 솜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그리고 그들을 대체하지 못하였다.
 
       - 일부 독일 최고 병력이 솜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그리고 그들을 대체하지 못하였다.

2015년 12월 4일 (금) 00:15 판

슐리펜 계획

이 장은 제1차 세계대전의 주요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만약 이 주제에 대해 다시 검토하고자 한다면, 제1장에서 다루고 있는 전쟁의 원인과 발생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독일(Germany)인들은 프랑스(France), 러시아(Russia)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1) 프랑스는 1870-71년 독일에 패하였으며 복수를 원하고있었다. 프랑스는 1871년 빼앗긴 영토인 알자스(Alsace)와 로렌(Lorraine)을 되찾기 위한 Plan 17이라는 비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2) 1984년 프랑스는 러시아와 조약을 맺었으며, 이에 독일은 러시아가 프랑스를 돕기 위해 동쪽으로부터 공격해 올 것이라 예상했다.

3) 독일은 양면전을 벌여야 했다. 이에 대한 답안은 1905년 작성된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이었다.

      슐리펜 계획은 러시아군이 준비를 마치기 전에 벨기에(Belgium)를 가로질러 프랑스를 공격하고 승리를 거둔 후, 
      다시 돌아와 러시아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슐리펜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1) 벨기에는 독일의 군대가 자국의 영토를 지나 프랑스를 침공하러 가는 것을 거부하였다. 독일은무력을 사용하여야 하였으며, 이로 인해 그들의 진군 속도가 늦어지게 되었다.

2) 1839년 벨기에는 중립국가로서의 상태를 지키기 위해 영국(Britain)과의 조약에 서명하였다. 독일이 벨기에로부터의 철수를 거부하자, 영국은 전쟁을 선언하였다.

3) 러시아는 독일의 예상보다 빠르게 전쟁 준비를 마쳤다. 다수의 소중한 독일 군인들이 프랑스로 나아가는 대신 그들(러시아)을 대면하기 위해 동쪽으로 전진해갔다.

모든 일이 독일의 계획처럼 되지 않았다...===
독일은 벨기에를 통과하는 프랑스침공이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다시 돌아와 러시아군과 맞설 수 있도록 
그들을 자유롭게 내버려 둘 것이라 생각하였다 – 벨기에의 저항과, 러시아가 그토록 잘 대처할 것을 예상하지 못하였다.


서부전선에서의 고착상태

제1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형태의 전쟁의 시작이었다 – 그리고 그것은 충격적일 정도로 무서웠다.

단기간의 야전이 뒤따랐다.

서부에서의 초기 전투는 우위를 차지하기위한 양측의 투쟁의 양상을 보였다:

몽스(MONS) – 1914년 8월 첫 병력으로 영국으로부터 파병된 영국 원정군(BEF; British Expeditionary Force)은 독일의 진군 속도를 늦추었으나,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독일 황제(German Kaiser)는 그들을 ‘비열한 작은 군대’라고 지칭하였다.

마르느(MARNE) – 연합군은 파리(Paris)를 수호하였고, 독일을 엔(Aisne)강으로 퇴각시켰다. 전투는 5일간 지속되었다.

이프르(YPRES) – 상대 군이 해안지대를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양측모두 ‘바다로 돌진하였다’ 연합군이 이에 성공하였으나, 엄청나게 많은 인명손실을 입었다.

         어느 쪽도 상대편을 퇴각 시키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참호를 파고 적군의 진격을 막았다. 
         1914년 말, 참호 선은 벨기에 해안에서부터 스위스(Switzerland)까지 늘어서게 되었고 
         양쪽 모두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전쟁의 변화는 참호 내 교착을 의미했다.

1) 어느 누구도 참호전에 익숙하지 않았다. 교착상태를 끝내는 방법을 알기까지 오랜 기간이 걸렸다.

2)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그처럼 큰 규모의 군사를 통솔한 적이 없었다. 방법을 배워야만 했다.

3) 모든 새로운 병력들을 훈련시키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이것은 전쟁 발발 전 소규모의 군대 만을 보유하였던 영국에게는 특히나 힘든 일이었다.

4) 군이 보유한 새로운 무기들은 대체로 공격보다 방어에 더 적합하였다(그림 참조).

5) 전진 부대들은 점령한 고지를 지키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후퇴해야만 하였다.

6) 양측모두 보급이 잘 이루어졌으며, 항상 더 많은 군대와 인원을 요청할 수 있었다.

7) 상황은 끔찍하였다, 진흙투성이와 축축한 환경은 빠른 공격에 적합하지 않았다.

8) 포병대의 폭격으로 적군의 전선을 약화시키고자 하였으나 – 적들에게 공격의 시작을 경고하는 데에 그쳤다.


이 모든 사실들을 머릿속에 쏙쏙 집어넣기를...
부대가 참호에 들어가게 되자, Christmas에는 전쟁이 끝날것이라는 희망은 사라졌다.


참호에서의 삶 (1)

솜(Somme) 전투에서 어느 쪽도 이 새로운 형태의 전쟁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장성들은 지속적으로 부대를 ‘돌격’ 시켰다.

양측은 종종 수천 명의 군을 무인 지대를 가로질러 진격 시킴으로써 교착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결과는 보병대의 거대한 살육전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일부 전투는 전체 전쟁에 영향을 미쳤다.

1) 1915년 이프르에서의 두 번째 전투에서, 독일은 처음으로 연합군을 상대로 독가스를 사용하였다.

2) 1916년 베르됭(Verdun)에서 페탱 장군(General Petain)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독일군으로부터 도시를 지켜내었다.

3) 이 승리로 프랑스군의 사기가 높아졌다 – 베르됭은 프랑스의 자유와, 당연히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독일의 사기 저하의 상징이 되었다.

4) 베르됭에 가해지는 독일군의 압력을 완화시키기 위해, 영국은 솜에서 대 공격을 감행하였다(1916년 7월-11월). 이 전투에서 영국 군대는 새로운 발명품을 사용하였다 – 그것은 탱크였다.

솜 전투는 대전이었으며 대재앙이었다.

솜 전투는 세계대전 중 중요한 전투의 하나였다. 영국 사령관은 더글라스 헤이그 경(Sir Douglas Haig)이였다.
      대규모 포병대의 폭격 이후, 영국 군인들은 독일군의 참호를 습격하기 위해 ‘돌격’ 하였다. 그들은 천천히 전진하며, 
달리지 않을 것을 명령 받았다. 이것은 독일군이 공격에 대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 천천히 움직이는
영국 군사들은 손쉬운 타깃이 되었다. 첫날 하루 동안에만 57,000명의 영국군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하였다.
이후의 공격들은 그보다는 성공적이었지만, 전투는 11월까지도 지속되었다.
어느 곳에서는 겨우 12km 정도만 전진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솜 전투의 결과

1) 독일군은 솜 공격에 관하여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군사기밀을 유지하는데 큰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2) 영국군의 포병대는 적군의 전선을 무너뜨리는데 실패하였다. 여러 날 동안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철조망조차 파괴하지 못하였다.

3) 이 전투들은 촬영되어 고국에 공개되었다. 그것을 통해 사람들은 참호의 실상을 알게 되었다 – 그러나 실제 전투는 더 지나치게 끔찍하였음으로 일부 장면들은 조작되었다.

4) 고국의 사람들은 군 장성들과 그들의 전술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참호전 – 서부전선 이상 없다...
여기서는 알아야 할 것들이 많다. 책을 덮고 기억나는 모든 것을 써 보도록 하자. 그런 다음 빠뜨린 것들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반복해보자.


참호에서의 삶 (2)

참호에서의 삶은 힘들고 위험했다.

1) 무인지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참호에서의 삶도 위험했다.

2) 인당 일당 1실링(5p)을 지급받았으며, 주요 배급품은 쇠고기 통조림, 잼, 그리고 차 등이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 전술들이 옳은 것이었는지 동의할 수 없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솜과 그 외의 다른 전투에서 사용된 전술들은 옳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가지고있는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이미지들은 TV, 책 그리고 영화 등으로부터 알게 된 것들이다 - 이 매체들은 종종 “솜의 도살 자”라 불리는 더글라스 헤이그 경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진실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이것들이 양측의 주요 의견들이다.

헤이그의 전술을 지지하는 의견

     - 그 대가가 무엇이었든, 헤이그의 주 목표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 만일 당시 영국 정부가 더 나은 전략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헤이그를 교체하였을 것이다 –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 일부 독일 최고 병력이 솜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그리고 그들을 대체하지 못하였다.
     - 헤이그는 솜을 앞에 두고 더 많은 탱크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 그는 베르됭에 가해지는 압력을 완화시켜야 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체 전쟁에서 패할 수도 있었다.
     - 1918년까지 헤이그는 이 공격 전술들의 실전 적용을 습득하였고 그로 인해 더욱 성공을 거두었다. 1918년 영국군은 
       아미앵 전투(Battle of Amiens)에서 독일군을 퇴각시켰다.

헤이그의 전술에 반대하는 의견

     - 헤이그의 명령하에 엄청난 숫자의 인명이 살상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어떠한 손실이 있더라도, 공격은 감행 되어야 한다”.
     - 헤이그는 솜에서 탱크의 추가지원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했다면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 솜에서 첫날의 살육전을 보았다면, 그는 전략에 변화를 주어야 했다.
     - 헤이그는 더 일찍 자신의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재앙으로 드러난 전쟁에 관한 낡은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수많은 인명을 희생하였다.
     - 일부 하급 장교들은 헤이그가 열악한 기후 조건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승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면서...
영국군의 전술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다. 헤이그에 대한 근대적 견해만을 따르는 이들을 조심해야 한다. 
양쪽의 주요 의견을 모두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부전선

갈리폴리 전투

해상 전쟁

전쟁 종료

요약

시험 자료

연습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