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제 1차 세계대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Cefia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갈리폴리 전투 (1))
(갈리폴리 전투 (2))
212번째 줄: 212번째 줄:
 
  터키는 영국군에게 중요하였다 – 그들은 러시아로의 필수 물자 공급 로를 통제할 뿐 아니라, 그들을 이용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을 <br />약화시킬 수도 있었다. 터키 군은 갈리폴리에서 강력하게 대항하였으며 그로 인해 양측 모두에 대학살을 초래하였다.
 
  터키는 영국군에게 중요하였다 – 그들은 러시아로의 필수 물자 공급 로를 통제할 뿐 아니라, 그들을 이용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을 <br />약화시킬 수도 있었다. 터키 군은 갈리폴리에서 강력하게 대항하였으며 그로 인해 양측 모두에 대학살을 초래하였다.
  
=='''갈리폴리 전투 (2)'''==
+
=='''갈리폴리 작전 (2)'''==
  
 +
영국군에게 갈리폴리 작전은 몹시 잘못된 것이었다, 그리고 터키군은 연합군의 진군은 막았지만 그들 역시 끔찍하게 고통스러웠다.
  
 +
===재난은 잘못된 계획에서 일부 비롯되었다.===
 +
 +
1) 모든 연합군 사령관들은 그 지역에 대한 지식이 없었으며, 제대로 된 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
 +
2) 그들은 터키의 군사력이 얼마나 강하고 잘 배치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
 +
3) 상륙지점으로 선택한 곳은 험난한 지형이었다 – 가파른 언덕을 등지고 있는 좁은 해변이었다.
 +
 +
          갈리폴리에 파병된 ANZAC군의 3분의 1이상이 전사하였다. 처칠은 해군 본부 위원회 수석 위원 자리에서
 +
          물러나게 되었으며, 다르다넬스 해협은 터키의 통치하에 남게 되었다.
 +
 +
 +
<그림>
 +
 +
 +
'''''참호 전투는 서부전선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
이 내용은 복잡하지만 그렇다고 피해갈 수는 없다 – 갈리폴리 작전으로 무엇을 얻고자 하였고 왜 그것이 심각하게 잘못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당시는 <br />매우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군인들이 해안으로부터 철수하기까지 수 개월이 소요되었다 – 모두 철수하기까지 양측모두 수만 명의 부상자들과 지독한 <br />상황으로 인해 고통 받았다.
  
 
=='''해상 전쟁'''==
 
=='''해상 전쟁'''==

2015년 12월 4일 (금) 00:29 판

슐리펜 계획

이 장은 제1차 세계대전의 주요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만약 이 주제에 대해 다시 검토하고자 한다면, 제1장에서 다루고 있는 전쟁의 원인과 발생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독일(Germany)인들은 프랑스(France), 러시아(Russia)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1) 프랑스는 1870-71년 독일에 패하였으며 복수를 원하고있었다. 프랑스는 1871년 빼앗긴 영토인 알자스(Alsace)와 로렌(Lorraine)을 되찾기 위한 Plan 17이라는 비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2) 1984년 프랑스는 러시아와 조약을 맺었으며, 이에 독일은 러시아가 프랑스를 돕기 위해 동쪽으로부터 공격해 올 것이라 예상했다.

3) 독일은 양면전을 벌여야 했다. 이에 대한 답안은 1905년 작성된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이었다.

      슐리펜 계획은 러시아군이 준비를 마치기 전에 벨기에(Belgium)를 가로질러 프랑스를 공격하고 승리를 거둔 후, 
      다시 돌아와 러시아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슐리펜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1) 벨기에는 독일의 군대가 자국의 영토를 지나 프랑스를 침공하러 가는 것을 거부하였다. 독일은무력을 사용하여야 하였으며, 이로 인해 그들의 진군 속도가 늦어지게 되었다.

2) 1839년 벨기에는 중립국가로서의 상태를 지키기 위해 영국(Britain)과의 조약에 서명하였다. 독일이 벨기에로부터의 철수를 거부하자, 영국은 전쟁을 선언하였다.

3) 러시아는 독일의 예상보다 빠르게 전쟁 준비를 마쳤다. 다수의 소중한 독일 군인들이 프랑스로 나아가는 대신 그들(러시아)을 대면하기 위해 동쪽으로 전진해갔다.

모든 일이 독일의 계획처럼 되지 않았다...===
독일은 벨기에를 통과하는 프랑스침공이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다시 돌아와 러시아군과 맞설 수 있도록 
그들을 자유롭게 내버려 둘 것이라 생각하였다 – 벨기에의 저항과, 러시아가 그토록 잘 대처할 것을 예상하지 못하였다.


서부전선에서의 고착상태

제1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형태의 전쟁의 시작이었다 – 그리고 그것은 충격적일 정도로 무서웠다.

단기간의 야전이 뒤따랐다.

서부에서의 초기 전투는 우위를 차지하기위한 양측의 투쟁의 양상을 보였다:

몽스(MONS) – 1914년 8월 첫 병력으로 영국으로부터 파병된 영국 원정군(BEF; British Expeditionary Force)은 독일의 진군 속도를 늦추었으나,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독일 황제(German Kaiser)는 그들을 ‘비열한 작은 군대’라고 지칭하였다.

마르느(MARNE) – 연합군은 파리(Paris)를 수호하였고, 독일을 엔(Aisne)강으로 퇴각시켰다. 전투는 5일간 지속되었다.

이프르(YPRES) – 상대 군이 해안지대를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양측모두 ‘바다로 돌진하였다’ 연합군이 이에 성공하였으나, 엄청나게 많은 인명손실을 입었다.

         어느 쪽도 상대편을 퇴각 시키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참호를 파고 적군의 진격을 막았다. 
         1914년 말, 참호 선은 벨기에 해안에서부터 스위스(Switzerland)까지 늘어서게 되었고 
         양쪽 모두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전쟁의 변화는 참호 내 교착을 의미했다.

1) 어느 누구도 참호전에 익숙하지 않았다. 교착상태를 끝내는 방법을 알기까지 오랜 기간이 걸렸다.

2)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그처럼 큰 규모의 군사를 통솔한 적이 없었다. 방법을 배워야만 했다.

3) 모든 새로운 병력들을 훈련시키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이것은 전쟁 발발 전 소규모의 군대 만을 보유하였던 영국에게는 특히나 힘든 일이었다.

4) 군이 보유한 새로운 무기들은 대체로 공격보다 방어에 더 적합하였다(그림 참조).

5) 전진 부대들은 점령한 고지를 지키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후퇴해야만 하였다.

6) 양측모두 보급이 잘 이루어졌으며, 항상 더 많은 군대와 인원을 요청할 수 있었다.

7) 상황은 끔찍하였다, 진흙투성이와 축축한 환경은 빠른 공격에 적합하지 않았다.

8) 포병대의 폭격으로 적군의 전선을 약화시키고자 하였으나 – 적들에게 공격의 시작을 경고하는 데에 그쳤다.


이 모든 사실들을 머릿속에 쏙쏙 집어넣기를...
부대가 참호에 들어가게 되자, Christmas에는 전쟁이 끝날것이라는 희망은 사라졌다.


참호에서의 삶 (1)

솜(Somme) 전투에서 어느 쪽도 이 새로운 형태의 전쟁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장성들은 지속적으로 부대를 ‘돌격’ 시켰다.

양측은 종종 수천 명의 군을 무인 지대를 가로질러 진격 시킴으로써 교착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결과는 보병대의 거대한 살육전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일부 전투는 전체 전쟁에 영향을 미쳤다.

1) 1915년 이프르에서의 두 번째 전투에서, 독일은 처음으로 연합군을 상대로 독가스를 사용하였다.

2) 1916년 베르됭(Verdun)에서 페탱 장군(General Petain)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독일군으로부터 도시를 지켜내었다.

3) 이 승리로 프랑스군의 사기가 높아졌다 – 베르됭은 프랑스의 자유와, 당연히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독일의 사기 저하의 상징이 되었다.

4) 베르됭에 가해지는 독일군의 압력을 완화시키기 위해, 영국은 솜에서 대 공격을 감행하였다(1916년 7월-11월). 이 전투에서 영국 군대는 새로운 발명품을 사용하였다 – 그것은 탱크였다.

솜 전투는 대전이었으며 대재앙이었다.

솜 전투는 세계대전 중 중요한 전투의 하나였다. 영국 사령관은 더글라스 헤이그 경(Sir Douglas Haig)이였다.
      대규모 포병대의 폭격 이후, 영국 군인들은 독일군의 참호를 습격하기 위해 ‘돌격’ 하였다. 그들은 천천히 전진하며, 
달리지 않을 것을 명령 받았다. 이것은 독일군이 공격에 대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 천천히 움직이는
영국 군사들은 손쉬운 타깃이 되었다. 첫날 하루 동안에만 57,000명의 영국군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하였다.
이후의 공격들은 그보다는 성공적이었지만, 전투는 11월까지도 지속되었다.
어느 곳에서는 겨우 12km 정도만 전진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솜 전투의 결과

1) 독일군은 솜 공격에 관하여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군사기밀을 유지하는데 큰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2) 영국군의 포병대는 적군의 전선을 무너뜨리는데 실패하였다. 여러 날 동안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철조망조차 파괴하지 못하였다.

3) 이 전투들은 촬영되어 고국에 공개되었다. 그것을 통해 사람들은 참호의 실상을 알게 되었다 – 그러나 실제 전투는 더 지나치게 끔찍하였음으로 일부 장면들은 조작되었다.

4) 고국의 사람들은 군 장성들과 그들의 전술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참호전 – 서부전선 이상 없다...
여기서는 알아야 할 것들이 많다. 책을 덮고 기억나는 모든 것을 써 보도록 하자. 그런 다음 빠뜨린 것들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반복해보자.


참호에서의 삶 (2)

참호에서의 삶은 힘들고 위험했다.

1) 무인지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참호에서의 삶도 위험했다.

2) 인당 일당 1실링(5p)을 지급받았으며, 주요 배급품은 쇠고기 통조림, 잼, 그리고 차 등이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 전술들이 옳은 것이었는지 동의할 수 없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솜과 그 외의 다른 전투에서 사용된 전술들은 옳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가지고있는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이미지들은 TV, 책 그리고 영화 등으로부터 알게 된 것들이다 - 이 매체들은 종종 “솜의 도살 자”라 불리는 더글라스 헤이그 경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진실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이것들이 양측의 주요 의견들이다.

헤이그의 전술을 지지하는 의견

     - 그 대가가 무엇이었든, 헤이그의 주 목표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 만일 당시 영국 정부가 더 나은 전략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헤이그를 교체하였을 것이다 –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 일부 독일 최고 병력이 솜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그리고 그들을 대체하지 못하였다.
     - 헤이그는 솜을 앞에 두고 더 많은 탱크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 그는 베르됭에 가해지는 압력을 완화시켜야 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체 전쟁에서 패할 수도 있었다.
     - 1918년까지 헤이그는 이 공격 전술들의 실전 적용을 습득하였고 그로 인해 더욱 성공을 거두었다. 1918년 영국군은 
       아미앵 전투(Battle of Amiens)에서 독일군을 퇴각시켰다.

헤이그의 전술에 반대하는 의견

     - 헤이그의 명령하에 엄청난 숫자의 인명이 살상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어떠한 손실이 있더라도, 공격은 감행 되어야 한다”.
     - 헤이그는 솜에서 탱크의 추가지원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했다면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 솜에서 첫날의 살육전을 보았다면, 그는 전략에 변화를 주어야 했다.
     - 헤이그는 더 일찍 자신의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재앙으로 드러난 전쟁에 관한 낡은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수많은 인명을 희생하였다.
     - 일부 하급 장교들은 헤이그가 열악한 기후 조건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승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면서...
영국군의 전술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다. 헤이그에 대한 근대적 견해만을 따르는 이들을 조심해야 한다. 
양쪽의 주요 의견을 모두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부전선

서부전선만 존재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세계대전이었고, 동부전선에 대하여도 알아야 한다.

러시아 군은 스팀롤러로 생각되었다.

1) 연합군의 계획은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 군이 동부에서 진군해 올 때까지, 독일군을 서부에 잡아두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독일군을 적군들 사이에 가둬 두고자 한 것이다.

2) 개전 시, 영국 신문들은 상대편을 으스러뜨리며 독일을 향해 진군하는 러시아군 스팀롤러에 관하여 자신 있게 떠들어댔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3) 반면, 러시아군은 독일군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 그들은 열흘 안에 6백만명을 준비시킬 수 있었다. 독일군은 프랑스를 물리치기도 전에 병력을 동부로 보내야만 했다 – 그리하여 슐리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러시아의 진군은 실패로 돌아갔다.

1) 러시아군은 독일을 향해 진군하였으나, 충분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많은 군인들은 총을 얻기 위해서 누군가가 죽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2) 빠르게 진군해 나가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계획은 성급하게 이루어졌다. 그들은 장기간의 군사작전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3) 군은 형편없는 조직이었다. 많은 장교들이 경험 부족이었고 군의 기강 또한 해이하였다.

4) 1914년 타넨베르크(Tannenberg)과 마수리안 호수(Masurian Lake) 전투에서 150,000명의 러시아군이 폰 힌덴부르크(von Hindenberg)와 루덴도르프(Ludendorff) 지휘하의 독일군에 의해 전사하였다.

5) 이 사건으로 러시아군은 후퇴하였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Austria-Hungary)군이 전진하였다.

6) 동부전선에서도 교착상태가 전개되었다. 이제 전쟁은 체스 게임과 같았다. 군에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민간인들의 생활이 궁핍하게 되었으므로, 전쟁은 러시아에게 큰 부담이었다.


러시아 스팀롤러 – 스팀이 금방 바닥나고 말았다...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 러시아군에 대한 기대와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해 알아야 한다. 기억할 것 – 러시아군이 신속하게 전쟁준비를 
마쳤기 때문에 슐리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러시아군의 진격이 엄청난 재난이 된 여러 이유들을 기술하시오.

갈리폴리 작전 (1)

터키(Turkey)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은 연합군의 또 다른 적이었다.

영국군은 터키를 공격하여 독일군을 약화시킬 계획을 세웠다.

1) 1914년 11월 오스만 제국은 독일군의 편에 서서 참전하였다. 그들은 발칸 지역(Balkans)의 지배권을 되찾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러시아를 공격하였다.

2) 해군 본부 위원회 수석 위원(the First Lord of the Admiralty)이었던 윈스톤 처칠(Winston Churchill) 과 같은 영국의 일부 지도자들은 동쪽에서 터키를 공격함으로써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다르다넬스 해협(Dardanelles)을 장악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1) 터키는 흑해(Black Sea)로가는 좁은 길목인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영국은 러시아로 보급물자를 보낼 수가 없었다.

2) 만약 영국이 갈리폴리 반도(Gallipoli Peninsula)에 병사들을 상륙시킬 수 있다면, 다르다넬스 해협을 점령할 수 있고, 그런 다음에는 터키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점령하러 갈수 있을 것이었다.

3) 그렇게 되면 그리스(Greece)와 루마니아(Romania)같은 주변국들은 영국의 편에 설 것이며, 동쪽에서 독일을 공격하여 연합군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었다.

해변의 살육 – 갈리폴리 1915

1) 2월, 해군은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진출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터키의 요새들과 지뢰를 뚫는 것에 실패하였다.

2) 해군은 철수하고 육군이 투입되었다. 이 군대는 한 개 사단의 영국군과 ANZAC(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 그리고 프랑스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3) 갈리폴리 반도를 가로질러 터키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킬 생각이었다. 상륙 전은 4월에 시작되었다.

4) 터키 군은 준비되어 있었다. 해변가 위쪽의 언덕에서 아래쪽을 향해 포격하며 연합군이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저지하였다.

5) 연합군측은 참호를 파야만 하였다.

6) 그들은 부족한 식량과 탄약을 가지고 총격과, 더위와 질병으로 고통 받으며 여름과 가을을 보내야만 하였다. 8월까지 40,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7) 아직 12월이 되기도 전에 철수가 시작되었다. 105,000명의 군인들이 철군하였다.

8) 터키 군은 연합군보다 더 많은 인명손실을 입었다: 65,000명이 전사하였다. 이로 인해 그들의 군사력이 심각하게 약화되었으나, 그 당시는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1915년 12월 그들은 완전히 혼란에 빠진듯한 상태로 보였다.


갈리폴리 – 해변으로의 즐거운 여행은 확실히 아니었다...
터키는 영국군에게 중요하였다 – 그들은 러시아로의 필수 물자 공급 로를 통제할 뿐 아니라, 그들을 이용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을 
약화시킬 수도 있었다. 터키 군은 갈리폴리에서 강력하게 대항하였으며 그로 인해 양측 모두에 대학살을 초래하였다.

갈리폴리 작전 (2)

영국군에게 갈리폴리 작전은 몹시 잘못된 것이었다, 그리고 터키군은 연합군의 진군은 막았지만 그들 역시 끔찍하게 고통스러웠다.

재난은 잘못된 계획에서 일부 비롯되었다.

1) 모든 연합군 사령관들은 그 지역에 대한 지식이 없었으며, 제대로 된 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2) 그들은 터키의 군사력이 얼마나 강하고 잘 배치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3) 상륙지점으로 선택한 곳은 험난한 지형이었다 – 가파른 언덕을 등지고 있는 좁은 해변이었다.

          갈리폴리에 파병된 ANZAC군의 3분의 1이상이 전사하였다. 처칠은 해군 본부 위원회 수석 위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다르다넬스 해협은 터키의 통치하에 남게 되었다.


<그림>


참호 전투는 서부전선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 내용은 복잡하지만 그렇다고 피해갈 수는 없다 – 갈리폴리 작전으로 무엇을 얻고자 하였고 왜 그것이 심각하게 잘못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당시는 
매우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군인들이 해안으로부터 철수하기까지 수 개월이 소요되었다 – 모두 철수하기까지 양측모두 수만 명의 부상자들과 지독한
상황으로 인해 고통 받았다.

해상 전쟁

전쟁 종료

요약

시험 자료

연습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