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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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이제 강력한 지도자 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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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치당이 선거에 승리하자 독일은 순식간에 민주 국가에서 독재국가로 바뀌었다. 히틀러는 자신을 수상, 대통령, 그리고 <br />군의 총 사령관을 아우르는 절대권력으로 만들었다.
 
  나치당이 선거에 승리하자 독일은 순식간에 민주 국가에서 독재국가로 바뀌었다. 히틀러는 자신을 수상, 대통령, 그리고 <br />군의 총 사령관을 아우르는 절대권력으로 만들었다.
  

2015년 12월 13일 (일) 02:20 판


목차

바이마르 공화국 (1)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First World War: 1914-1918)에서 패전했다. 평화합의안은 독일에게 가혹 했다 – 그들은 전쟁에 대한 비난을 감수하여야 했고 660만 파운드의 전쟁배상금을 지불하여야 했다.

황제가 퇴진하고 새로운 정부가 등장했다.

1) 황제 빌헬름 2세는 독일 제국을 군주제 하에 통치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마지막에 다다를 즈음 독일에서는 폭력 소요의 시기가 있었고, 1918년 11월 황제는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2) 1919년 초 프레드릭 에베르트(Friedrich Ebert)가 이끄는 새로운 정부가 권력을 잡았으며, 독일은 공화국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베를린(Berlin)에는 폭력사태가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바이마르(Weimar)에 세워졌다. 에베르트는 초대 대통령이, 샤이데만(Scheidemann)은 수상이 되었다.

3) 에베르트는 온건파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의 수장이었다. 새로운 정부는 민주주의 정부였으며, 국민이 국가의 운영을 결정하여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4) 새로운 독일 정부는 1919년의 평화 회의에 초대받지 못했으며, 베르사이유 조약(Versailles Treaty)에서는 결정권이 없었다. 처음, 에베르트는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나, 다시 전쟁을 시작하는 위험을 감수하기에 독일은 너무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불만 요인들

1)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가난과 기아에 시달리고 있었다. 유행성 인플루엔자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2) 많은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전쟁에 패하였음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휴전과 베르사이유 조약에 합의한 ‘노벰버 크리미널즈(November Criminals)’의 탓으로 돌렸다

3) 다른 이들은 패전의 책임을 공산주의자, 정부, 그리고 유대인들의 탓으로 돌렸다.

4) 정부는 힘없고 무능 했다 – 베르사이유 조약은 독일의 생활환경을 더욱더 악화시켰다.

바이마르 헌법(Weimar Constitution)은 독일을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바이마르 정부

- 라이히 참의원 (REICHSRAT) - 상위 기관(국회에서 통과된 법안을 지연시킬 수 있다)
- 국회(REICHSTAG) - 새로운 독일 국회(비례대표제로 선출된다)
- 대통령(PRESIDENT) - 7년에 한번씩 선출된다. 군의 수장이다. 수상을 선임한다.

비례대표제는 한 정당의 의회에서 얻은 자리 수의 비례에 따라 당선자 수를 결정하는 것이다. 독일의 이러한 제도는 종종 국회(독일 의회)안의 정당 수가 너무 많아져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힘들게 만들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2)

바이마르 공화국(Weimar Republic)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1) 국회 안에 지나치게 많은 정당들이 존재하여 의사결정이 힘들었다.

2) 국회의 과반수 지지를 얻는 수상을 선임하는 것이 어려웠다.

3) 새로운 정부는 베르사이유 조약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영토의 손실, ‘전범’조항, 전쟁 배상금 등 때문에 많은 독일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4)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였고, 에베르트는 평화 유지를 위한 군 단체인 프라이 코어(Freikorps)을 조직하는 것에 동의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많은 문화 업적을 남겼다.

1)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2) 예술, 건축, 음악, 문학의 발전이 있었다. 프리츠 랑(Fritz Lang)이 감독한 ‘메트로폴리스(Metropolis)’와 같은 독일 영화들은 성공적이었다.

3)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희곡과 같은 몇몇 작품들은 대담하고 새로웠다. 바우하우스 디자인 학교(Bauhaus School of design)는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4) 바이마르 공화국은 프랑크푸르트 대학(Frankfurt University)같은 곳들을 통해 비판적 사고의 새로운 방법들을 장려했다.

5) 모든 이들이 이 문화적 변화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 일부의 사람들은 베를린에서의 카바레 문화를 비도덕적으로 받아들였다. 나치 하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문화도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없었다...


바이마르 – 소시지의 종류가 아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패전의 시기에 세워졌으므로, 시작부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많은 독일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시의 
평화합의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꼭 기억하자. 바이마르 공화국과 그 수립과정에 대해 간단히 써보자.


불안의 시기 1919-1923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몇 년 동안 모든 종류의 문제들과 대면하게 되었다.

곧 폭동과 반란이 일어났다.

1) 1919년, 스파르타쿠스 반란(Spartacist Revolt)이 일어났고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베를린 점거를 시도 하였으나, 프라이코어에 저지당했다.

2) 1920년 일부의 우익 프라이코어들은 볼프강 카프(Wolfgang Kapp)가 이끄는 가프 반란(Kapp Putsch: Putsch는 반란을 의미)에 참여했다. 그들은 신 정부를 세우기 위해 베를린을 점거하였으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였고, 카프는 이에 굴복했다. 많은 재판관들이 카프와 같은 사람들을 옹호하였기 때문에, 정부는 반란 자들을 처벌하지는 않았다.

3) 1922년 발터 라테나우(Walter Rathenau)가 살해되었다 – 그는 외무장관으로서 러시아와의 라팔로 조약(Rapallo Treaty)에 서명 하였으며 유대인이었다. 이제 많은 독일인들은 반유대주의자(anti-Semitic)가 되었다.

1923년 독일은 전쟁배상금을 지불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벨기에가 전쟁배상금을 대신하여 자원을 가져가고자 독일에서 가장 부유한 산업 지역이었던 루르지방(Ruhr)을 점령했다. 이것이 독일을 격분하게 만들었고, 루르지방의 노동자들은 일을 거부했다. 독일의 산업은 다시 파괴되었다, 경제는 곤두박질쳤으며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다.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생산량이 시장에 있는 화폐의 양을 따라가지 못할 때 나타나며, 이로 인해 화폐는 
     가치를 잃게 된다.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의한 세 가지의 중요한 결과들

1) 가격이 다시 상승하기 전에 임금은 하루에 두 번 지급되었다.

2) 은행예금이 쓸모 없어지자 중산층이 손해를 입게 되었다.

3) 독일의 마르크화는 가치를 잃었다.


하이퍼 인플레이션
경제상황이 악화되자 독일내의 불만이 점점 심각해져 갔다는 것을 기억하자 – 그러나 다른 요인들도 많다. 이제 책을 덮고 
기억나는 모든 것들을 써보자.


슈트레제만과 경제회복

1923년 8월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 수상이 되었고, 그는 점진적으로 독일의 회복을 견인했다.

슈트레제만은 국제협력을 원했다.

슈트레제만은 몇 개월간 수상 직을 맡았고, 그 후 외무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독일의 회복을 위한 절호의 기회는 다른 국가들과의 협력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1) 1923년 9월 그는 루르지방의 노동자들에게 일터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2) 1924년 도즈 안(Dawes Plan)을 수락하였으며, 통화안정을 위해 렌텐마르크(Rentenmark)라는 새로운 독일 마르크화를 발행했다.

3) 1925년 프랑스와 벨기에 군대는 루르지방을 떠났다.

4) 1925년 10월 그는 로카르노 조약(Locarno Treaty)에 합의하였고 독일의 서쪽 국경이 정해졌다(동쪽은 제외),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그는 노벨 평화상(Nobel Peace Prize)을 수상했다.

5) 1926년 독일은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에 합류하였고, 상임이사국 중 하나가 되었다.

6) 1928년 독일은 켈로그브리앙 조약(Kellogg-Brian Pact)에 참가한 65개국 중 하나였으며, 분쟁해결을 위한 무력 사용 금지를 약속했다.

7) 1929년 영 안(Young Plan)이 도즈 안을 대체했다 – 전쟁배상금이 3/4로 감액되고, 독일에게 59년의 상환기간이 주어졌다.

독일은 회복되기 시작하였지만 미국(US)의 돈에 의존하게 되었다.

슈트레제만의 업적 덕택으로 독일인들의 삶은 나아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월 스트리트 사태(Wall Street Crash) 직전인 1929년 10월 사망했다.

그가 합의했던 계획들은 미국이 충분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어 독일에 지속적으로 돈을 빌려줄 수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 그러나 이제 그것은 불가능해졌다. 갑자기 모든 것들이 다시 악화되고 있었다.


거의 모든 것이 나아졌다...
1920년대는 독일에게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슈트레제만이 문제들을 해결한 것으로 보였다. 슈트레제만의 업적(자국 내에서와 
해외에서의 정책)에 관하여 간단히 써 보자.


나치당의 근원

1920년대의 나치당은 작은 조직이었으나. 큰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나치의 지도자였다.

1) 1889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히틀러는 1912년 이후로 계속 독일에 살았다.

2)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용감한 군인으로서 서부전선에서의 전투에 참여하였고, 철 십자 훈장(Iron Cross)을 두 번이나 수여 받았다. 그는 독일의 패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3) 1919년 그는 안톤 드렉슬러(Anton Drexler)가 이끄는 독일 노동자당(German Worker’s Party)에 가입했다. 아주 작은 정당이었으며 히틀러는 55번째 회원이었다. 1920년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National Socialist German Worker’s Party: Nazis)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4) 히틀러는 카리스마 있는 연설가였으며 새로운 멤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당의 수장을 맡게 되었다.

5) 당은 나치 돌격대(SA: 나치 수뇌부를 보호하고 반대파를 괴롭히는 역할을 하는 갈색 셔츠의 돌격 대원들) 라고 불리는 자체 무장조직을 만들었다.

히틀러는 뮌헨 봉기(Munich Putsch)를 통해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

1) 1923년 바이마르 공화국에는 좋지 않은 상황이 계속되었고, 세력은 약화되었다.

2) 히틀러는 바이에른(Bavaria) 시 정부의 장악을 시작으로 하여, 바이마르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3) 히틀러의 군대는 뮌헨의 바이에른 시 지역 정부 대표들이 만나고 있던 맥주 홀을 점거했다. 그는 혁명이 시작되었다고 발표했다.

4) 다음날 히틀러는 돌격대와 함께 뮌헨을 향해 전진했다. 그러나 경찰이 반란세력들에 발포하면서 반란은 금방 끝이 났다.

히틀러는 수감 중 ‘나의 투쟁(Mein Kampf)’을 집필했다.

1) 히틀러는 뮌헨 봉기에서의 역할로 인해 구속되었다.

2) 그는 수감 중 그의 신념과 포부에 대한 책을 집필했다.


나치 – 압승을 거둘 준비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나치를 지지했다. 1925년까지는 30,000명도 되지 않는 인원이었다, 그리고 1928년 선거에서 
공산당 54석, 사회 민주당의 153석과 비교해 나치는 국회에서 12석만을 확보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하고 있었다……


나치의 발흥 (1)

대공황은 독일에 큰 타격을 주었다. 사람들은 바이마르 정부가 독일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였고, 결과적으로 나치당의 인기가 치솟게 되었다.

뮌헨 봉기 이후 히틀러의 전략에 변화가 있었다.

1) 뮌헨 봉기 이후 나치당은 금지되었다. 히틀러가 감옥에서 풀려난 후, 그는 스스로를 최고지도자로 하여 당을 새로이 일으켜 세웠다.

2) 1920년대 중반까지, 슈트레제만 하의 독일의 경제상황은 회복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나치에 대한 일반인들의 지지가 사라졌고 쿠데타를 통한 정부의 전복은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아 보였다.

3) 히틀러는 전략을 바꾸었다 – 그는 이제 민주적인 제도를 통해 권력을 얻고자 노력했다. 나치당은 지역정당으로 머무르지 않고 전국적인 네트워크로 확대되었으며, 정당의 신념을 알리기 위해 프로파간다를 이용했다.

대공황이 빈곤과 고난을 야기했다.

1) 대공황은 독일 내 대량실업을 야기했다. 1933년까지 6백만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었다.

2) 1931년 독일 최대 은행이 파산했다. 이것으로 전쟁 배상금의 지불은 더욱 어려워졌다.

3) 이 시기 바이마르 정부는 여러 번의 변화를 겪었지만, 그 누구도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4) 대공황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에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새로운 정부가 그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에 희망을 걸었다.

5) 나치당과 같은 극단주의자 단체들은 강력한 리더십을 내세워 더욱 인기를 얻었다.

공황 시기 나치당의 인기는 커져만 갔다.

1) 나치는 부유함을 약속하였고 독일을 다시 위대한 국가로 만들겠다고 했다. 이는 많은 실업자, 기업인, 청년들이 매력을 느끼게 했다.

2) 일부 사람들은 나치의 반공, 반 유대인 사고방식을 지지했다.

3) 1930년 나치 당원은 300,0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또 다른 암울한 페이지…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나치은 정치권 한 귀퉁이의 소규모 극단주의자 단체로 머물러야만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공황은 
그들에게 주류에 편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나치의 발흥 (2)

1930년의 선거 결과는 나치당 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1930년 선거는 나치의 득표수 증가를 보여주었다.

하인리히 브뤼닝(Heinrich Brüning) 수상은 국회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 나치당(107석 확보) 과 공산당(77석 확보)의 의석수가 크게 증가했다. 어느 정당도 국회에 대한 지배권을 가질 수 있는 충분한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브뤼닝은 긴급조치 하에 통치하여야 했다.

독일은 강력한 정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1) 1932년 4월까지도 독일의 상황은 심각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국가는 강력한 정부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2) 힌덴부르크(Hindenburg) 대통령은 그의 임기종료일이 가까워지자, 재선에 출마했다. 히틀러는 그에 맞서 출마하였고, 공산당 후보 또한 있었다.

3) 국가적 영웅이었던 힌덴부르크는 쉽게 당선될 것이라 믿었으나, 첫 번째 선거에서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 두 번째 무기명 투표에서는 53%의 표를 얻어 36.8%를 얻은 히틀러를 이겼다.

힌덴부르크는 나치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1) 힌덴부르크는 국회의 지지를 받는 수상을 찾을 수 없었다.

2) 그는 경험이 부족했던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을 지목했다.

3) 1932년 7월 국회 선거에서, 나치당이 230석을 확보했다 – 이제 그들은 가장 큰 정당이 되었으나, 국회의 과반수를 넘지는 못했다. 히틀러는 자신을 수상으로 임명해줄 것을 요청했다.

4)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신뢰하지 않았으므로 이를 거부하였으며, 폰 파펜을 고수했다.


나치의 발흥 (3)

나치당은 많은 표를 얻었다 – 그러나 그들은 부정한 방법을 사용했다…

나치당은 선거에서 의석을 잃게 되었다.

1) 1932년 11월 선거에서 나치당은 34석을 잃었으며, 그들의 인기가 하락하는 듯 했다.

2) 힌덴부르크는 수상의 자리에 쿠르트 폰 슐라이허(Kurt von Schleicher)를 지목했다. 폰 슐라이허는 나치의 다른 지도자인 그레고르 슈트라서(Gregor Strasser)에게 부 수상의 자리를 맡을 것을 요청함으로써 나치의 내분을 꾀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슈트라서의 수락을 제지했다.

3) 곧 힌덴부르크는 굴복하였으며, 1933년 1월 히틀러에게 수상의 자리를 제안하게 되었다.

4) 1933년 3월 히틀러는 나치당이 국회 안에서 더욱 확고한 위치를 얻기를 바라며, 또 한번의 선거를 요청하기로 했다.

나치는 1933년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비열한 짓을 했다.

나치당이 선거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1) 그들은 뉴스 매체를 통제했다.
2) 경쟁자 측의 집회가 금지되었다.
3) 그들은 나치 돌격대를 이용하여 반대측에 테러를 가했다.
4) 국회에 화재가 났고, 히틀러는 이를 공산주의자들의 탓으로 돌려 공산당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자극했다. 공산당원의 대규모 체포가 뒤따랐다.
5) 히틀러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긴급조치를 취하였고, 권력을 이용하여 공산당 유권자들을 위협했다.


독일 1930-33 – 혼돈의 상태
알아야 할 것들이 많지만, 모조리 암기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사건들의 시간적 흐름이다. 히틀러는 하룻밤에 권력을 잡은 것이
아니다 – 경제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다른 정치 정당들이 독일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하자 히틀러에 대한 지지가 상승했다.

히틀러 정권 장악

히틀러가 수상이 되고 나자 그는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법을 바꾸었다.

1) 나치당은 288석을 얻었으나 과반수를 넘지 않았으며, 공산당이 여전히 81석을 확보했다.

2) 이에 히틀러는 공산당은 불법이라고 선언했다.

3)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수권법안(Enabling Bill)을 제출하기 위한 의회 내에서의 충분한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법안은 1933년 3월 위협과 협상에 의해 통과되었다.

4) 이 법안은 그가 의회 없이 4년간 통치할 수 있도록 하였고, 다른 모든 정당들은 불법화 했다. 히틀러가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피의숙청사건(The Night of the Long Knives)

1) 여전히 히틀러에게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으며, 그는 나치 내부의 경쟁자를 우려했다.

2) 가장 큰 위협은 나치 돌격대(400,000명 이상)를 통제하고 있는 에른스트 룀(Ernst Röhm)이었다. 1934년 29-30일, 히틀러는 사람을 보내 룀과 그 일당을 체포했다. 이 사건은 ‘피의숙청사건’이라 불린다.

3) 룀, 슈트라서, 폰 슐라이허를 포함 수백 명의 사람들이 살해 당했다. 모든 잠재적 반대세력들은 뿌리 뽑혔다.

4) 한달 후 힌덴부르크가 사망했다. 히틀러는 수상과 대통령직을 겸임하고 군의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퓌러(Der Führer: 총통, 지도자)이라고 불렸다. 이것은 독재의 시작이었다.

독일은 이제 강력한 지도자 하에 있었다.

1) 독일은 여러 지구로 재편되었다. 각각의 지구는 가우(Gau: 복수는 Gaue)라 칭하였으며, 이를 가우라이터(Gauleiter: 충성도 높은 나치)가 담당하고 있었다.

2) 그 위로는 히틀러가 조언을 구하는 라이흐스라이터(Reichsleiter)가 있었다(프로파간다를 담당했던 괴벨스(Goebbels)와 독일 경찰을 담당했던 히믈러(Himmler) 등).

3) 최 상층에는 절대적 지배권을 가진 퓌러가 있었으며, 이는 히틀러 자신이었다.

4) 생활의 모든 측면들이 주의 깊게 통제되었으며, 충성스러운 나치당원 만이 성공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권력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치당이 선거에 승리하자 독일은 순식간에 민주 국가에서 독재국가로 바뀌었다. 히틀러는 자신을 수상, 대통령, 그리고 
군의 총 사령관을 아우르는 절대권력으로 만들었다.

나치: 통치 방법

나치는 독일 국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설득에서부터 폭력까지 여러 방법을 사용했다.

나치는 프로파간다를 이용했다.

프로파간다는 사람들의 생각을 통제하기 위해 특정 사상이나 관점을 널리 퍼뜨리는 것을 말한다. 나치의 프로파간다는 독일이 가지고 있던 문제의 대부분을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의 탓으로 돌렸다.

1) 나치는 미디어를 탈취했다. 그들은 라디오 방송을 통제했다, 그리고 영화와 포스터들도 그들의 메시지를 알리는데 이용되었다.

2) 국민 계몽 선전부(Ministry of Public Enlightenment and Propaganda: 1933년 설립)는 요제프 괴벨스에 의해 주도되었다. 모든 예술가, 작가, 언론인, 음악인들은 작업 허가를 받기 위해 신고를 하여야 했다.

3) 나치는 권력과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다는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대규모의 당원 집회를 열었다. 그들은 또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국제적 관심을 끌기 위한 기회로 이용했다.

나치는 검열을 실시했다.

1) 나치는 서적, 신문, 그리고 다른 매체들도 검열했다.

2) 반 나치 매체를 발행하는 사람은 처형의 위험을 감수하여야 했다.

3) 나치는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조장하기 위해 검열을 이용했다. 그들은 바그너(Wagner)와 같은 애국적 독일 작곡가들은 칭송하였으나, 멘델스존(Mendelssohn)과 같은 유대인 작곡가들의 작품은 금지했다.

독일은 경찰 국가가 되었다.

1) 나치 친위대(SS: Schutzstaffel)은 히틀러의 친위대로 시작되었다. 1930년대 그들은 히믈러의 지도력 아래서 엄청난 규모로 확장되었다. 조직원들은 히틀러에게 전적인 충성을 맹세하였으며, 그들의 잔인함으로 인해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히믈러는 비밀 경찰인 게슈타포(Gestapo) 또한 맡고 있었다.

2) 1933년 이후 정치범이나 나치에 위협이 될 소지가 있는 사람들을 수감하기 위한 강제 수용소가 독일과 그 주변지역 전역에 만들어졌다. 이들 중 일부는 이후에 죽음의 수용소로 바뀌게 된다.

3) 독일 인들이 나치에 충성을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지역 감시인들이 고용되었다. 사람들은 충성스럽지 못한 행위들을 신고 하도록 장려되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게슈타포에 체포 당했다.

나치는 교회를 위협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1) 많은 나치당원들은 기독교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 평화에 대한 가르침은 나치의 사상과는 공존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는 그들을 즉시 공격하는 모험을 감수하지는 않았다.

2) 1933년 히틀러는 가톨릭 교회와 합의안에 서명했다. 양측은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는 교회의 영향력을 억제하고자 노력하였고, 나치의 정책에 반대하는 가톨릭의 항의도 있었다.

3) 히틀러는 서로 다른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교회들을 하나의 라이히 교회(Reich Church)로 통합하고자 했다. 그는 나치 주교인 루드비히 뮐러(Ludwig Müller)를 수장으로 했다. 일부 교회 구성원들은 이러한 국가의 간섭에 분개하여 떨어져나가,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p. 100)를 만들었다.

4) 나치 체제에 맞섰던 많은 성직자들은 강제 수용소로 보내어졌다.


이 책은 나치 독일에서는 절대 출판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라디오와 신문이 모두 동일한 방법으로 같은 소식을 다루며, 같은 의견만을 내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머지않아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나치 통치와 독일의 성장

젊은이와 여성들

나치에 대한 저항

나치의 만행

요약

시험 자료

연습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