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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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공화국 (1)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First World War: 1914-1918)에서 패전했다. 평화합의안은 독일에게 가혹 했다 – 그들은 전쟁에 대한 비난을 감수하여야 했고 660만 파운드의 전쟁배상금을 지불하여야 했다.

황제가 퇴진하고 새로운 정부가 등장했다.

1) 황제 빌헬름 2세는 독일 제국을 군주제 하에 통치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마지막에 다다를 즈음 독일에서는 폭력 소요의 시기가 있었고, 1918년 11월 황제는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2) 1919년 초 프레드릭 에베르트(Friedrich Ebert)가 이끄는 새로운 정부가 권력을 잡았으며, 독일은 공화국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베를린(Berlin)에는 폭력사태가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바이마르(Weimar)에 세워졌다. 에베르트는 초대 대통령이, 샤이데만(Scheidemann)은 수상이 되었다.

3) 에베르트는 온건파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의 수장이었다. 새로운 정부는 민주주의 정부였으며, 국민이 국가의 운영을 결정하여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4) 새로운 독일 정부는 1919년의 평화 회의에 초대받지 못했으며, 베르사이유 조약(Versailles Treaty)에서는 결정권이 없었다. 처음, 에베르트는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나, 다시 전쟁을 시작하는 위험을 감수하기에 독일은 너무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불만 요인들

1)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가난과 기아에 시달리고 있었다. 유행성 인플루엔자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2) 많은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전쟁에 패하였음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휴전과 베르사이유 조약에 합의한 ‘노벰버 크리미널즈(November Criminals)’의 탓으로 돌렸다

3) 다른 이들은 패전의 책임을 공산주의자, 정부, 그리고 유대인들의 탓으로 돌렸다.

4) 정부는 힘없고 무능 했다 – 베르사이유 조약은 독일의 생활환경을 더욱더 악화시켰다.

바이마르 헌법(Weimar Constitution)은 독일을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바이마르 정부

- 라이히 참의원 (REICHSRAT) - 상위 기관(국회에서 통과된 법안을 지연시킬 수 있다)
- 국회(REICHSTAG) - 새로운 독일 국회(비례대표제로 선출된다)
- 대통령(PRESIDENT) - 7년에 한번씩 선출된다. 군의 수장이다. 수상을 선임한다.

비례대표제는 한 정당의 의회에서 얻은 자리 수의 비례에 따라 당선자 수를 결정하는 것이다. 독일의 이러한 제도는 종종 국회(독일 의회)안의 정당 수가 너무 많아져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힘들게 만들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2)

바이마르 공화국(Weimar Republic)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1) 국회 안에 지나치게 많은 정당들이 존재하여 의사결정이 힘들었다.

2) 국회의 과반수 지지를 얻는 수상을 선임하는 것이 어려웠다.

3) 새로운 정부는 베르사이유 조약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영토의 손실, ‘전범’조항, 전쟁 배상금 등 때문에 많은 독일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4)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였고, 에베르트는 평화 유지를 위한 군 단체인 프라이 코어(Freikorps)을 조직하는 것에 동의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많은 문화 업적을 남겼다.

1)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2) 예술, 건축, 음악, 문학의 발전이 있었다. 프리츠 랑(Fritz Lang)이 감독한 ‘메트로폴리스(Metropolis)’와 같은 독일 영화들은 성공적이었다.

3)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희곡과 같은 몇몇 작품들은 대담하고 새로웠다. 바우하우스 디자인 학교(Bauhaus School of design)는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4) 바이마르 공화국은 프랑크푸르트 대학(Frankfurt University)같은 곳들을 통해 비판적 사고의 새로운 방법들을 장려했다.

5) 모든 이들이 이 문화적 변화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 일부의 사람들은 베를린에서의 카바레 문화를 비도덕적으로 받아들였다. 나치 하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문화도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없었다...


바이마르 – 소시지의 종류가 아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패전의 시기에 세워졌으므로, 시작부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많은 독일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시의 
평화합의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꼭 기억하자. 바이마르 공화국과 그 수립과정에 대해 간단히 써보자.

불안의 시기 1919-1923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몇 년 동안 모든 종류의 문제들과 대면하게 되었다.

곧 폭동과 반란이 일어났다.

1) 1919년, 스파르타쿠스 반란(Spartacist Revolt)이 일어났고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베를린 점거를 시도 하였으나, 프라이코어에 저지당했다.

2) 1920년 일부의 우익 프라이코어들은 볼프강 카프(Wolfgang Kapp)가 이끄는 가프 반란(Kapp Putsch: Putsch는 반란을 의미)에 참여했다. 그들은 신 정부를 세우기 위해 베를린을 점거하였으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였고, 카프는 이에 굴복했다. 많은 재판관들이 카프와 같은 사람들을 옹호하였기 때문에, 정부는 반란 자들을 처벌하지는 않았다.

3) 1922년 발터 라테나우(Walter Rathenau)가 살해되었다 – 그는 외무장관으로서 러시아와의 라팔로 조약(Rapallo Treaty)에 서명 하였으며 유대인이었다. 이제 많은 독일인들은 반유대주의자(anti-Semitic)가 되었다.

1923년 독일은 전쟁배상금을 지불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벨기에가 전쟁배상금을 대신하여 자원을 가져가고자 독일에서 가장 부유한 산업 지역이었던 루르지방(Ruhr)을 점령했다. 이것이 독일을 격분하게 만들었고, 루르지방의 노동자들은 일을 거부했다. 독일의 산업은 다시 파괴되었다, 경제는 곤두박질쳤으며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다.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생산량이 시장에 있는 화폐의 양을 따라가지 못할 때 나타나며, 이로 인해 화폐는 
     가치를 잃게 된다.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의한 세 가지의 중요한 결과들

1) 가격이 다시 상승하기 전에 임금은 하루에 두 번 지급되었다.

2) 은행예금이 쓸모 없어지자 중산층이 손해를 입게 되었다.

3) 독일의 마르크화는 가치를 잃었다.


하이퍼 인플레이션
경제상황이 악화되자 독일내의 불만이 점점 심각해져 갔다는 것을 기억하자 – 그러나 다른 요인들도 많다. 이제 책을 덮고 
기억나는 모든 것들을 써보자.

슈트레제만과 경제회복

나치당의 근원

나치 발흥

히틀러 정권 장악

나치: 통치 방법

나치 통치와 독일의 성장

젊은이와 여성들

나치에 대한 저항

나치의 만행

요약

시험 자료

연습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