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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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JUNGWOOK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5년 12월 13일 (일) 02:07 판 (나치 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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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공화국 (1)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First World War: 1914-1918)에서 패전했다. 평화합의안은 독일에게 가혹 했다 – 그들은 전쟁에 대한 비난을 감수하여야 했고 660만 파운드의 전쟁배상금을 지불하여야 했다.

황제가 퇴진하고 새로운 정부가 등장했다.

1) 황제 빌헬름 2세는 독일 제국을 군주제 하에 통치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마지막에 다다를 즈음 독일에서는 폭력 소요의 시기가 있었고, 1918년 11월 황제는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2) 1919년 초 프레드릭 에베르트(Friedrich Ebert)가 이끄는 새로운 정부가 권력을 잡았으며, 독일은 공화국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베를린(Berlin)에는 폭력사태가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바이마르(Weimar)에 세워졌다. 에베르트는 초대 대통령이, 샤이데만(Scheidemann)은 수상이 되었다.

3) 에베르트는 온건파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의 수장이었다. 새로운 정부는 민주주의 정부였으며, 국민이 국가의 운영을 결정하여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4) 새로운 독일 정부는 1919년의 평화 회의에 초대받지 못했으며, 베르사이유 조약(Versailles Treaty)에서는 결정권이 없었다. 처음, 에베르트는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나, 다시 전쟁을 시작하는 위험을 감수하기에 독일은 너무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불만 요인들

1)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가난과 기아에 시달리고 있었다. 유행성 인플루엔자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2) 많은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전쟁에 패하였음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휴전과 베르사이유 조약에 합의한 ‘노벰버 크리미널즈(November Criminals)’의 탓으로 돌렸다

3) 다른 이들은 패전의 책임을 공산주의자, 정부, 그리고 유대인들의 탓으로 돌렸다.

4) 정부는 힘없고 무능 했다 – 베르사이유 조약은 독일의 생활환경을 더욱더 악화시켰다.

바이마르 헌법(Weimar Constitution)은 독일을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바이마르 정부

- 라이히 참의원 (REICHSRAT) - 상위 기관(국회에서 통과된 법안을 지연시킬 수 있다)
- 국회(REICHSTAG) - 새로운 독일 국회(비례대표제로 선출된다)
- 대통령(PRESIDENT) - 7년에 한번씩 선출된다. 군의 수장이다. 수상을 선임한다.

비례대표제는 한 정당의 의회에서 얻은 자리 수의 비례에 따라 당선자 수를 결정하는 것이다. 독일의 이러한 제도는 종종 국회(독일 의회)안의 정당 수가 너무 많아져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힘들게 만들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2)

바이마르 공화국(Weimar Republic)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1) 국회 안에 지나치게 많은 정당들이 존재하여 의사결정이 힘들었다.

2) 국회의 과반수 지지를 얻는 수상을 선임하는 것이 어려웠다.

3) 새로운 정부는 베르사이유 조약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영토의 손실, ‘전범’조항, 전쟁 배상금 등 때문에 많은 독일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4)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였고, 에베르트는 평화 유지를 위한 군 단체인 프라이 코어(Freikorps)을 조직하는 것에 동의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많은 문화 업적을 남겼다.

1)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2) 예술, 건축, 음악, 문학의 발전이 있었다. 프리츠 랑(Fritz Lang)이 감독한 ‘메트로폴리스(Metropolis)’와 같은 독일 영화들은 성공적이었다.

3)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희곡과 같은 몇몇 작품들은 대담하고 새로웠다. 바우하우스 디자인 학교(Bauhaus School of design)는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4) 바이마르 공화국은 프랑크푸르트 대학(Frankfurt University)같은 곳들을 통해 비판적 사고의 새로운 방법들을 장려했다.

5) 모든 이들이 이 문화적 변화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 일부의 사람들은 베를린에서의 카바레 문화를 비도덕적으로 받아들였다. 나치 하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문화도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없었다...


바이마르 – 소시지의 종류가 아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패전의 시기에 세워졌으므로, 시작부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많은 독일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시의 
평화합의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꼭 기억하자. 바이마르 공화국과 그 수립과정에 대해 간단히 써보자.

불안의 시기 1919-1923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몇 년 동안 모든 종류의 문제들과 대면하게 되었다.

곧 폭동과 반란이 일어났다.

1) 1919년, 스파르타쿠스 반란(Spartacist Revolt)이 일어났고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베를린 점거를 시도 하였으나, 프라이코어에 저지당했다.

2) 1920년 일부의 우익 프라이코어들은 볼프강 카프(Wolfgang Kapp)가 이끄는 가프 반란(Kapp Putsch: Putsch는 반란을 의미)에 참여했다. 그들은 신 정부를 세우기 위해 베를린을 점거하였으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였고, 카프는 이에 굴복했다. 많은 재판관들이 카프와 같은 사람들을 옹호하였기 때문에, 정부는 반란 자들을 처벌하지는 않았다.

3) 1922년 발터 라테나우(Walter Rathenau)가 살해되었다 – 그는 외무장관으로서 러시아와의 라팔로 조약(Rapallo Treaty)에 서명 하였으며 유대인이었다. 이제 많은 독일인들은 반유대주의자(anti-Semitic)가 되었다.

1923년 독일은 전쟁배상금을 지불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벨기에가 전쟁배상금을 대신하여 자원을 가져가고자 독일에서 가장 부유한 산업 지역이었던 루르지방(Ruhr)을 점령했다. 이것이 독일을 격분하게 만들었고, 루르지방의 노동자들은 일을 거부했다. 독일의 산업은 다시 파괴되었다, 경제는 곤두박질쳤으며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다.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생산량이 시장에 있는 화폐의 양을 따라가지 못할 때 나타나며, 이로 인해 화폐는 
     가치를 잃게 된다.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의한 세 가지의 중요한 결과들

1) 가격이 다시 상승하기 전에 임금은 하루에 두 번 지급되었다.

2) 은행예금이 쓸모 없어지자 중산층이 손해를 입게 되었다.

3) 독일의 마르크화는 가치를 잃었다.


하이퍼 인플레이션
경제상황이 악화되자 독일내의 불만이 점점 심각해져 갔다는 것을 기억하자 – 그러나 다른 요인들도 많다. 이제 책을 덮고 
기억나는 모든 것들을 써보자.

슈트레제만과 경제회복

1923년 8월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 수상이 되었고, 그는 점진적으로 독일의 회복을 견인했다.

슈트레제만은 국제협력을 원했다.

슈트레제만은 몇 개월간 수상 직을 맡았고, 그 후 외무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독일의 회복을 위한 절호의 기회는 다른 국가들과의 협력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1) 1923년 9월 그는 루르지방의 노동자들에게 일터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2) 1924년 도즈 안(Dawes Plan)을 수락하였으며, 통화안정을 위해 렌텐마르크(Rentenmark)라는 새로운 독일 마르크화를 발행했다.

3) 1925년 프랑스와 벨기에 군대는 루르지방을 떠났다.

4) 1925년 10월 그는 로카르노 조약(Locarno Treaty)에 합의하였고 독일의 서쪽 국경이 정해졌다(동쪽은 제외),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그는 노벨 평화상(Nobel Peace Prize)을 수상했다.

5) 1926년 독일은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에 합류하였고, 상임이사국 중 하나가 되었다.

6) 1928년 독일은 켈로그브리앙 조약(Kellogg-Brian Pact)에 참가한 65개국 중 하나였으며, 분쟁해결을 위한 무력 사용 금지를 약속했다.

7) 1929년 영 안(Young Plan)이 도즈 안을 대체했다 – 전쟁배상금이 3/4로 감액되고, 독일에게 59년의 상환기간이 주어졌다.

독일은 회복되기 시작하였지만 미국(US)의 돈에 의존하게 되었다.

슈트레제만의 업적 덕택으로 독일인들의 삶은 나아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월 스트리트 사태(Wall Street Crash) 직전인 1929년 10월 사망했다.

그가 합의했던 계획들은 미국이 충분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어 독일에 지속적으로 돈을 빌려줄 수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 그러나 이제 그것은 불가능해졌다. 갑자기 모든 것들이 다시 악화되고 있었다.


거의 모든 것이 나아졌다...
1920년대는 독일에게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슈트레제만이 문제들을 해결한 것으로 보였다. 슈트레제만의 업적(자국 내에서와 
해외에서의 정책)에 관하여 간단히 써 보자.

나치당의 근원

1920년대의 나치당은 작은 조직이었으나. 큰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나치의 지도자였다.

1) 1889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히틀러는 1912년 이후로 계속 독일에 살았다.

2)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용감한 군인으로서 서부전선에서의 전투에 참여하였고, 철 십자 훈장(Iron Cross)을 두 번이나 수여 받았다. 그는 독일의 패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3) 1919년 그는 안톤 드렉슬러(Anton Drexler)가 이끄는 독일 노동자당(German Worker’s Party)에 가입했다. 아주 작은 정당이었으며 히틀러는 55번째 회원이었다. 1920년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National Socialist German Worker’s Party: Nazis)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4) 히틀러는 카리스마 있는 연설가였으며 새로운 멤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당의 수장을 맡게 되었다.

5) 당은 나치 돌격대(SA: 나치 수뇌부를 보호하고 반대파를 괴롭히는 역할을 하는 갈색 셔츠의 돌격 대원들) 라고 불리는 자체 무장조직을 만들었다.

히틀러는 뮌헨 봉기(Munich Putsch)를 통해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

1) 1923년 바이마르 공화국에는 좋지 않은 상황이 계속되었고, 세력은 약화되었다.

2) 히틀러는 바이에른(Bavaria) 시 정부의 장악을 시작으로 하여, 바이마르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3) 히틀러의 군대는 뮌헨의 바이에른 시 지역 정부 대표들이 만나고 있던 맥주 홀을 점거했다. 그는 혁명이 시작되었다고 발표했다.

4) 다음날 히틀러는 돌격대와 함께 뮌헨을 향해 전진했다. 그러나 경찰이 반란세력들에 발포하면서 반란은 금방 끝이 났다.

히틀러는 수감 중 ‘나의 투쟁(Mein Kampf)’을 집필했다.

1) 히틀러는 뮌헨 봉기에서의 역할로 인해 구속되었다.

2) 그는 수감 중 그의 신념과 포부에 대한 책을 집필했다.


나치 – 압승을 거둘 준비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나치를 지지했다. 1925년까지는 30,000명도 되지 않는 인원이었다, 그리고 1928년 선거에서 
공산당 54석, 사회 민주당의 153석과 비교해 나치는 국회에서 12석만을 확보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하고 있었다……

나치의 발흥

대공황은 독일에 큰 타격을 주었다. 사람들은 바이마르 정부가 독일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였고, 결과적으로 나치당의 인기가 치솟게 되었다.

뮌헨 봉기 이후 히틀러의 전략에 변화가 있었다.

1) 뮌헨 봉기 이후 나치당은 금지되었다. 히틀러가 감옥에서 풀려난 후, 그는 스스로를 최고지도자로 하여 당을 새로이 일으켜 세웠다.

2) 1920년대 중반까지, 슈트레제만 하의 독일의 경제상황은 회복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나치에 대한 일반인들의 지지가 사라졌고 쿠데타를 통한 정부의 전복은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아 보였다.

3) 히틀러는 전략을 바꾸었다 – 그는 이제 민주적인 제도를 통해 권력을 얻고자 노력했다. 나치당은 지역정당으로 머무르지 않고 전국적인 네트워크로 확대되었으며, 정당의 신념을 알리기 위해 프로파간다를 이용했다.

대공황이 빈곤과 고난을 야기했다.

1) 대공황은 독일 내 대량실업을 야기했다. 1933년까지 6백만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었다.

2) 1931년 독일 최대 은행이 파산했다. 이것으로 전쟁 배상금의 지불은 더욱 어려워졌다.

3) 이 시기 바이마르 정부는 여러 번의 변화를 겪었지만, 그 누구도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4) 대공황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에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새로운 정부가 그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에 희망을 걸었다.

5) 나치당과 같은 극단주의자 단체들은 강력한 리더십을 내세워 더욱 인기를 얻었다.

공황 시기 나치당의 인기는 커져만 갔다.

1) 나치는 부유함을 약속하였고 독일을 다시 위대한 국가로 만들겠다고 했다. 이는 많은 실업자, 기업인, 청년들이 매력을 느끼게 했다.

2) 일부 사람들은 나치의 반공, 반 유대인 사고방식을 지지했다.

3) 1930년 나치 당원은 300,0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또 다른 암울한 페이지…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나치은 정치권 한 귀퉁이의 소규모 극단주의자 단체로 머물러야만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공황은 
그들에게 주류에 편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히틀러 정권 장악

나치: 통치 방법

나치 통치와 독일의 성장

젊은이와 여성들

나치에 대한 저항

나치의 만행

요약

시험 자료

연습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