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양국, 역사대화 어떻게 할 것인가? - 양국 정부간 역사대화의 회고와 전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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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양국, 역사대화 어떻게 할 것인가?
- 양국 정부간 역사대화의 회고와 전망 -
손승철(강원대학교)

1. 문제제기

한국과 일본은 서로의 역사에서 많은 부분이 중첩되어 있다. 그것은 상호간의 관계가 그만큼 밀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나온 역사과정을 돌이켜 보면, 상호간에 선린우호의 과정도 있었지만, 대립과 갈등, 침략과 약탈, 지배와 예속의 적대적인 관계도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호간의 중첩된 역사사실에 대한 異見이 생기게 되었다. 역사적 사실은 객관적이어야 하며,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반면 역사적 사실은 객관적이지만,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에는 다양한 방법이 용인된다. 그리고 이 다양한 해석과 방법에 의해 역사의 메시지를 제대로 들을 수 있다. 그런데 한일 간에는 역사적 사실 자체를 인정하는 데에도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으며, 또 함께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에서도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양국사이에 이러한 역사사실에 대한 인식의 차이 및 사실해석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역사분쟁이 진행되고 있다. 한일 간의 역사분쟁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황국사관 내지 식민사관 때문에 발생하였다. 그리고 20세기 후반에는 이들이 역사관을 계승한 군국주의적 · 극우적 역사관을 적용하는 역사관에 의해 더욱 가열되었다. 뿐만 아니라 21세기에 들어서 한일 간의 역사분쟁은 학자간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양국 정부 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되면서, 한일양국의 상호이해와 발전을 저해하고, 동아시아지역의 공동번영에도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그동안 한일 양국에서는 각종 학회 및 민간단체, 그리고 정부에서 역사 갈등 해소를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해왔다. 특히 2002년 이후, 민관합동기구인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발족시켜 2기에 걸쳐 활동을 하여, 나름대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하나 아직도 갈 길은 요원하기만 하다. 조광 · 손승철 편, 2010, 《한일역사의 쟁점》 발간사. 경인문화사. 현대송편, 2008,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 나남. 이신철, 2014, 〈일본 교과서문제와 동북아역사교과서대화〉, 《史林》 48, 참조.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한 · 일간에 일고 있는 역사분쟁의 발단과 과정,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노력과 전망 등에 관해, 특히 정부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개괄하려한다. 이 글이 향후 역사분쟁을 해소하는데 일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2. 역사갈등의 발단

1) 교과서 역사왜곡

한국과 일본의 역사갈등의 진원지는 역사교과서 기술에서 비롯된다. 일본에서는 1945년 패전 전에는 황국사관에 기초한 국정교과서를 통해, 천황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충량한 臣民을 양성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패전 후 군정을 통해 일본을 통치한 연합군최고사령부는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에서부터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를 모두 ‘일본의 침략’으로 기술하고, 미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만든 학습지도요령에 의거하여 민간인이 집필하고 채택하는 검인정교과서 제도를 따르도록 했다. 그러나 1955년 집권당인 자민당에서는 교육에 국가정책을 본격적으로 강화하는 방침을 세우고, 교과서의 국정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국정화가 용이하지 않게 되자, 교과서 검정을 강화함으로써 역사교육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조치를 한국에서는 ‘제1차 교과서 공격’이라고 한다. 손승철, 2011,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의 사적 전개와 대응〉《한일관계사연구》 40. 6-17쪽 참조. 그리하여 1957년에는 검정을 신청한 교과서를 1/3이나 탈락시키고, 1958년부터는 ‘학습지도요령’을 관보에 제시하여 법적 구속력을 갖도록 했다. 그 이유는 ‘과거의 사실로부터 반성을 촉구하려는 열의가 지나쳐, 학습을 통해 선조의 노력을 인식하고 일본인으로서의 자각을 높여 민족에 대한 풍부한 애정을 키운다는 일본사의 목표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역사교과서 검정에서도 통용되는 일본정부의 기본자세이다. 그리고 1961년에도 소학교 교과서의 82%를 제1차 검정에서 탈랐시켰는데, 그 이유는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여 조선인들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었다는 사실, 1937년 남경대학살 등 중국을 침략하여 중국인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 등, 일본이 일방적으로 나쁜 것처럼 서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을 은폐 · 옹호하고 황국사관을 조장하는 등 교과서에 대한 국가통제의 강화는 1965년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교수를 중심으로 소위 ‘이에나가 교과서 소송’을 야기시킨다. 재판은 1965년의 제1차 손해배상소송, 1967년의 제2차 검정처분의 취소소송, 1984년부터 1997년까지 13년간 진행된 제3차 손해배상소송 등 32년간 진행되었다. 특히 제2차 소송에 대해 1970년 7월 동경지방재판소의 스기모토(杉本) 판결은 이후역사교과서 서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왜냐하면 이에나가 측에서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재판과정에서 벌어진 논쟁으로 교육이론과 법이론에서 국민교육과 진리교육이 강조되고, 검정기준이 집필자의 사상까지 통제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74년도 판 고등학교 일본사교과서(自由書房)에서부터 남경대학살에 관한 언급이 다시 기술되었고, 1975년도판 중학교 역사교과서 2개 출판사의 교과서에서 이를 언급하였다. 중국에 대한 침략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려는 경향은 197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강화되었다. 나아가 조선에 대한 지배를 ‘식민지 정책’으로 기술했고, 일본의 지배에 대해 의병운동과 3·1운동을 통해 한국인이 저항했으며, 이를 일본이 무력을 앞세워 진압했다는 사실을 모든 출판사의 교과서에서 기술하였다. 그러자 위기감을 느낀 자민당과 일본 정부는 반격을 시작하였다. 1979년 11월 이시이(石井一朝)는 <새롭게 우려할만한 교과서 문제>라는 글에서 교과서 집필자 등을 실명 거론하며 공격하였고, 자민당은 《自由申報》에 1980년 1월부터 8월까지 19회에 걸쳐 <지금 교과서는 - 교육정상화 문제>라는 글을 연재하였다. 뿐만 아니라 1980년 7월 법무상인 오쿠노(奧野誠亮)는 “현재의 교과서는 대단히 나라를 사랑하는 것에 배치되는 등 큰 문제가 있다”고 발언하였고, 우익 정치인들의 망언도 잇따랐다. 이에 우익 언론과 경제계가 합세했고, 일본 정부와 자민당은 이 여세를 몰아갔다. 그리하여 자민당에서는 1980년 12월 자민당 내에 ‘교과서문제소위원회’를 설치하여 검정을 강화하고, 교과서 채택지구를 광역화하며, ‘교과서통제법’을 제정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교과서제도개혁초안>을 확정하였다. 일본 문부성은 이것을 받아 1981년 11월에 ‘교과서문제소위원회’를 설치하여 교과서제도를 전반적으로 수정하는 작업에 착수하였고, 이 제도에 따라 새로운 교과서가 검정통과 되었다. 내용은 8·15 광복을 “일본이 지배권을 상실했다”로 언급하였고, ‘침략’을 ‘출병’으로, ‘출병’을 ‘파견’으로, ‘수탈’을 ‘양도’로, ‘3·1운동’을 ‘데모와 폭동’으로, 강압적인 신사참배에 대해서는 ‘신사참배도 장려됐다’라는 식으로 문부성에서 검정 지도했다고 보도하였다. 1982년 당시 이러한 역사왜곡 행위를 ‘제2차 교과서 공격’이라고 한다. 이 내용은 1982년 6월 경부터 일본 언론을 통해, 국내에 전해졌고, 8월에 한국정부에서는 일본의 역사왜곡에 강력히 대응하기로 결정하고, ‘한국관시정사업’의 강화책을 제시하는 한편, 왜곡내용의 분석작업을 국사편찬위원회에 의뢰했다. 이때부터 ‘독립기념관’ 건립 모금운동이 추진되었고, 국민성금으로 세워진 독립기념관이 1987년 8월 15일에 개관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는 1983년도부터 사용될 예정으로 검정된 고등학교용 일본사(10종), 세계사(10종), 현대사회(2종) 등을 대상으로 ① 즉각 시정이 필요한 사항, ② 조기 시정이 필요한 사항, ③ 기타시정이 필요한 사항 등으로 나누어 분석을 진행한 결과, 24항목 167곳이 왜곡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 정부는 이후 9월 27일에 ‘즉시 시정’ 항목 19개를 포함하여 모두 45개 항목의 수정·검토사항을 일본 정부에 정식으로 제출하고 수정을 공식적으로 요구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1983, 《일본역사교과서의 한국사 왜곡내요의 분석》, 국사편찬위원회. 참조.

이에 대해 일본 정부에서는 역사교과서 왜곡 내용에 대한 시정을 약속하면서 1982년 9월 14일 문부대신 이름으로 ‘교과용 도서검정조사심의회 사회과부회’에 한국 정부의 항의 내용에 대한 자문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1982년 11월에는 “인근 아시아 제국과의 관계에 관한 근현대의 역사적 사실에는 국제이해와 국제협조의 견지에서 필요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근린제국조항’이 교과서 검정의 새로운 기준으로 설정되었다. 《동아일보》 1982년 11월 25일자. 《아시히신문》 1982년 11월 24일자.

그리하여 일본 정부는 이 새로운 검정기준에 의해서 1982년에 7개항, 1984년까지 8개항 합계 15개항이 수정되었다고 한국정부에 통보해 왔다. 일본 정부가 교과서의 시정을 약속한 것은 1955년도와 비교할 때 상당히 발전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정은 부분적 시정에 불과하였고 성실하게 수행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1986년의 교과서 개편에서 《신편 일본사》(原書房)의 내용이 다시 문제가 되었다. 이 교과서는 ‘일본을 지키는 국민의회’가 편찬한 책으로 일본의 아시아 침략 사실을 은폐하는 논지를 담고 있었다. 문부성은 주변국의 반발로 검정 합격 상태에 있던 이 교과서를 이례적으로 재심사하여 4차례에 걸쳐서 문제된 부분을 수정시켜 합격시켰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문부상 후지오 마사유키가 일본의 식민통치가 ‘병합된 한국에 대해 일본이 매우 악의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가령 기초적인 교육에 대해서도 일본은 많은 예산을 투여했던 만큼 … 반드시 나쁜 짓만을 한 것은 아니다.’라는 망언이 있었고, 나카소네 총리가 후지오를 사임시키고, 중의원 본회의에서 후지오 발언에 대한 유감의 뜻을 표함으로써 갈등 상황을 정리하였다. 결국 1986년 교과서 왜곡사건도 한국 측의 적극적인 대응에 일본이 일정 정도 응함으로써 일단락 될 수 있었다.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은 오부치(小淵惠三) 수상과 함께 ‘21세기 한일 파트너쉽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을 통해 한일은 “과거사에 대해 통절히 반성하고 자라나는 세대들의 역사인식을 심화시킴으로써 우호 협력의 미래를 열어가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선언과는 반대로 극우파세력들은 기존의 역사교과서가 ‘自虐史觀’ 1997년 1월 일본 동경대학의 후지오카 노부가쓰,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 등이 모여, 일본의 역사 교과서가 일본을 비하하고 부정적으로 기술하는 ‘자학사관’에 입각해서 쓰였음을 비판하며, ‘자유주의적 내셔널리즘’의 사관에 입각해서 ‘새역사교과서’의 교육을 주장하고,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결성했다. 이들은 기존의 일본 중학교의 교과서가 일본의 치부를 드러내므로, 앞으로는 국가와 민족에게 자긍심을 주는 ‘밝은 역사’를 가르쳐서 ‘건전한 민족주의’를 만들어 갈 것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간 일본이 저지른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 등에 대한 반성적 역사기술을 ‘자학사관’에 입각된 ‘어두운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른바 ‘자학사관’을 극복한 ‘건전한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서 편찬 한 교과서가 후소샤[扶桑社] 교과서이다. 에 의해 기술되었으므로 일본의 청소년들에게 ‘自由主義史觀’에 의해 국가와 민족의 자긍심을 키워주는 새로운 역사교육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그 표본으로 1999년에는 니시오 간지(西尾幹二)의 《국민의 역사》를 간행하였다. 그 후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편찬하여 2001년에는 후소샤(扶桑社)에서 간행한 《새로운 역사교과서》 (新しぃ歷史敎科書)가 검정에 통과되었다. 개정된 학습지도요령(교육과정)에 의해 개발된 ‘새역모’ 측 새 교과서의 내용은 황국사관에 의한 역사 서술과 한국사 인식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4세기 이후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고, 일본은 미화하고 한국은 폄하했으며, 임진왜란이나 강화도 사건 등 일본이 일으킨 사건의 책임을 상대국에 지우고 있다. 또한 일본이 끼친 피해를 축소 내지 은폐하고 있고,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이 잆으며, 군대위안부나 강제동원 사실을 은폐하였고, 이웃나라와의 평화 교류협력을 무시하고, 인종주의를 내세우며, 학계의 연구 성과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0년에는 “새역모”의 내분에 의해, 후쇼샤교과서 보다 더욱 개악된 새로운 교과서인 지유사(自由社)판 신편 《새로운 역사교과서》 (新しぃ歷史敎科書)가 검정 통과되었고, 2011년부터는 새로이 극우파 역사교과서인 이쿠호샤(育鵬社)의 《새로운 일본역사》 (新しぃ日本歷史)가 검정통과 되어 양국간의 갈등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이 일련의 상황을 ‘제3차 교과서 공격’이라고 한다. 또한 일본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역사왜곡 현황도 중학교 교과서와 별반 차이가 없다. 나아가 이러한 경향은 일본 역사서 전반에 걸쳐 만연되어 있으며, 역으로 이러한 경향이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손승철, 2008, 《일본역사서의 왜곡과 진실》, 제2부, <일본역사서(사전류와 개설서)의 왜곡과 진실> 한일관계사학회, 한국사연구회,참조.

더구나 2011년과 2012년부터는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왜곡에 가세하여, 모든 중·고교 공민(지리)교과서에 ‘독도를 일본 땅으로 표기’했고, “한국이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다”고 기술함으로써 교과서문제는 최악의 상황이 되었다.

2) 주요인사의 망언

한·일 간의 역사 갈등의 또하나의 진원지는 교과서 왜곡과 더불어 일본 주요 인사들의 역사사실에 대한 왜곡된 망언에서 비롯된다. 한국에서는 이들이 한일관계 및 역사에 대해 비뚤어진 언사를 늘어놓는 것을 ‘妄言’이라고 한다. 한국을 매도하기 위해 사실을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言說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망언의 계보는 19세기 후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조선유도론’‘탈아론’‘협박교육주의’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지음, 최혜주옮김, 2010, 《일본망언의 계보》, 18-19쪽, 한울.“…(조선을) 무력으로써 보호하고, 文으로써 이를 유도하여 신속히 우리(일본)의 예를 따라 근대문명으로 들어서도록 해야 한다. 부득이한 경우 무력으로써 그들의 진보를 협박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오늘의 일을 도모하는데 우리나라로서는 이웃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킬 여유가 없다. 오히려 대오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하고 지나·조선을 대하는 방법도 이웃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대우할 것이 아니라 서양인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야 한다.”“우리(일본)가 무력으로써 그들(조선)의 開進을 독촉했는데도 따르지 않으면 다음에는 채찍을 동원해 협박 교육주의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고 믿는다.” 물론 따지고 올라가자면, 19세기 征韓論이나 18세기 朝鮮蔑視論, 더 올라가 三韓征伐論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망언들은 1953년 한일회담 과정에서부터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1953년 제3차 회담에서 일본측 수석대표 구보다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가 행한 발언은 “일본의 조선에 철도나 항구를 만들고 농지를 조성하기도 했고, 대장성은 당시 많은 해는 2천만엔이나 부담하고 있었다. 이것들을 돌려달라고 주장해 한국측의 정치적 청구권과 상쇄해도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여, 36년간 식민통치가 한국민에게 유익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 구보다 망언은 1957년말에 취소되었고, 한일회담이 재개 되었지만, 1965년 한일회담의 최종단계에서도 일본측 수석대표 다카쓰기 신이치(高衫晉一)는 외무성 기자단과의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조선에 대한 과거 식민통치에 대해 일본이 사과하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일본으로서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은 분명히 조선을 지배했다. 그러나 일본은 좋은 일을 하려고, 조선을 조금 낫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 일본의 노력은 결국 전쟁으로 좌절되고 말았지만, 20년정도 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동아일보》, 1965년 10월 19일.


다카스끼의 발언은 한일양국정부에 의해 없었던 것으로 처리되었지만, 구보다망언에 이은 그의 망언은 일본정부의 조선관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같은 조선관에 의해 1965년 맺은 한일기본조약은 결국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의 책임을 애매한 채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일관계의 기본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지음, 최혜주옮김, 2010, 《일본망언의 계보》, 233쪽, 한울.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어 국교가 재개된 이후에도 망언은 계속되었다.

● “한일합병시대에 일본은 의무교육을 실시해서 지금까지 훌륭하게 지켜지고 있다.”(다나카 가꾸에이(田中角榮)총리, 1974.1) ● “일본은 한국을 침략한 적이 없다”(오쿠노 세이스케(娛野靖亮) 국토청장관, 1988.4) ● “한일합방은 원만히 맺어진 것으로서 무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와타나베 미치오(渡邊美智雄) 전 외무대신, 1995.6) ● “일한합병조약은 법적으로 유효하게 체결되었다.”(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총리, 1995.10) ● “한일병합에 대해 만일 첫째로 책임소재를 묻는다면, 그 당시 도장을 찍은 수상 이완용이다. 싫다면 거절했으면 그만이다.” ● “일본은 좋은 일도 하지 않았는가. 고등농림학교를 세웠다. 서울에는 제국대학을 세웠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수준을 높인 셈이다. 기존에는 교육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 으니까. 도로·철도 항만정비, 녹화사업도 했다.”(에토 다카미(江藤隆美) 총무청장관, 1995.10)

에토 장관은 이일로 인해 결국 그해 11월에 “국회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라는 명목으로 사임했다. 당시 《아사히신문》은 11월 14일 사설에 “이것으로 한일관계는 일단 회복세로 돌아설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겨진 깊은 상처를 생각하면 솔직히 뭔가 개운치 않다. 에토 씨의 사임만으로 끝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번일을 기회로 양국에서 역사를 공유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하지 않는다면 같은 일을 또 다시 반복할 따름일 것이다.”라고 썼다. 《아사히신문》의 사설대로 주요인사의 망언은 계속되었다.

● “종군위안부는 상행위였다”(오쿠노 세이스케(娛野靖亮), 전법무대신, 1996.6) ● “창씨개명은 조선인들이 일본의 성씨를 달라고 해서 이루어졌다.”(아소다로(麻生太廊) 자민당정조회장, 2003.5) ●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 지배하면서 반성할 점도 다수 있지만 현대의 기초가 된 좋은 일도 많이 했다.”(에토 다가미(江藤隆美) 총무청장관, 2003.7)

한국정부는 그때마다 일본정부에 항의의 뜻을 전했고, 언론은 비판의 날을 세웠다. 이러한 일본 주요인사의 망언은 한국인이 일본인의 역사관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같은 망언의 빈도와 농도가 약해지기는 했지만, 최근 아베총리는 총리자신이 과거사 부정 발언으로 서슴치 않고 있다.

● 2006.10. “(일본군위안부에 대해) 강제성 사실을 뒷받침할 증거가 나오지 않고 있 다.”(중의원 예산위원회) ● 2012.12. “(지난번) 총리 재임 시설 야스쿠니신사에 참배를 하지 못해 매우 한스럽 다.” ● 2013. 4. “침략의 정의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확실치 않다. 국가간 관계에서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참의원 예산위원회) ● 2013. 5.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를 생각해보라. (야스쿠니 참배는) 다른 국가 지도 자들이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미국 포린어페어스) ● 2013. 9. “일본은 올해 11년만에 방위비를 증액했고, 폭도 0.8%에 불과하다. 나를 ‘우익 군국주의자’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불러달라.”(미국 뉴욕 허드 슨연구소 강연) ● 2014. 1. “UN고문방지위원회가 ‘일본정부는 위안부에 대한 사실부정과 위안부 출 신여성 음해시도에 대해 반론하라’고 권고하자) 유엔권고는 사실오인에 의한 일방적인 것이다. 법적 구속력이 없다”(중의원 본회의) ● 2014. 4. “아시아는 상황이 다르다. 독일은 독일방식의 화해와 사죄를 따를 수 없 다.”(독일 현지언론 인터뷰) ● 2015. 2.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정치문제나 외교문제화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 다.”(참의원 본회의) 《조선일조》, 2015년 3월 28일.


아베총리의 과거사 부정발언은 특히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입장표면에서 노골화되었고, 과거 총리들과 다르게 자신이 직접 앞장서서 망언을 일삼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한·일 양국정부는 집권 3년차이지만, 아직도 정상회담을 못하고 있다.

3. 양국정부의 노력

1) 정상회담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시까지도 좁혀지지 않던 양국 정부의 역사인식은 1980년대 들어서면서 뚜렷하게 변화의 길로 들어섰다. 그 배경에는 양국의 국내외 정세가 크게 작용했다. 일본 국내에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자, 진보적인 지식인 들이 한국병합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좌파야당인 사회당이 이를 수용하려는 요구가 일자, 자민당에서도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경제대국의 위상에 걸맞게 활약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각국의 신뢰와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정부도 경제발전이 지속되고 민주주의의 열기가 고조됨에 따라 일본과의 역사문제를 재정립하자는 여론이 확산되었다. 정재정, 2014, 《한일의 역사갈등과 역사대화》, 32쪽.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미국의 레이건,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보수 반공의 공동전선을 구축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총리는 취임 후 첫 외국 방문국으로 한국을 택했다. 나카소네 총리는 방한 중 청와대 만찬사(1983.11)에서 “한일양국 사이에 과거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우리는 이것을 엄숙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전두환 대통령은 “불행했던 양국관계에 대해 겸허하게 서로 성찰하고 심기일전의 자세와 결의로써 새로운 차원의 관계가 구축되기를 염원한다.”고 화답했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이 국빈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도 나카소네 총리는 “일본이 한국과 한국국민에게 다대한 고난을 끼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되새기고, 장래에 이런 일이 없도록 굳게 결의 한다”고 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국권을 상실하여 입은 피해가 누구 때문이라고 탓할 생각은 없으며, 상호의존의 시대를 맞아 한일 두 나라는 평등과 존중의 정신으로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 및 번영을 함께 이룩해 나가자”고 응답했다. 나카소네 총리의 이러한 인식은 이후 자민당 출신의 역대총리에게 계승되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국빈으로 방일했을 때, 정상회담(1990.5.24.) 자리에서 가이후 토시키(海部俊樹) 총리는 “과거 한 시기에 한반도의 여러분이 일본의 행위로 견디기 어려운 고난과 슬픔을 체험한 것에 대해 반성하며 솔직히 사죄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노대통령은 “한일 양국이 진정한 대화를 나누면 역사속에서 짧고 불행했던 기간은 능히 극복할 수 있다”고 화답했다. 노대통령은 기자회견 석상에서 일본의 사죄를 받았으므로 사죄문제는 이제 매듭이 지어졌다고 까지 말했다. 너무 성급한 감상이었던 것일까. 1992년 1월 16일, 미와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총리는 방한 만찬사에서 “과거 한 시기에 한국 국민이 일본의 행위로 견디기 힘든 고통과 슬픔을 체험한 사실을 상기하고 반성과 사죄의 뜻을 전 한다”고 했고, 이에 대해 노태우 대통령은 “한국과 일본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겸허한 반성을 토대로 마음의 벽을 허물고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기 21세기를 향한 두 나라의 성숙한 동반자 관계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1993년 11월 6일, 비자민당 연립정권을 탄생시킨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총리는 방한 정상회담에서 “과거 일본이 식민지 지배로 한국 국민의 모국어 기회를 빼앗고, 타국어의 사용을 강요하고, 창씨개명이라는 이상한 일을 강제하고, 군대위안부·노동자의 강제연행 등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강요한 가해자로서 일본이 한일에 대해 깊이 반성하며,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죄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과 일본이 한때 불행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수천 년 교류사 중에서 극히 짧은 기간에 불과하고, 우리는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한다”고 화답했다. 호소가와 총리의 발언은 나카소네 총리이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표현이 훨씬 더 분명하고 진솔해진 방향으로 나아갔고, 역대 한국 대통령들도 일본 총리의 발언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며 과거에서 벗어나서 앞으로 나아가자고 했다. 일본 총리들의 역사인식은 패전 50주년이 되는 1995년을 전후하여 더욱 괄목할만한 변화를 보였다. 1994년 6월, 자민당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사회당을 주축으로 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연립정부가 탄생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 중의원은 1995년 6월 9일, ‘역사를 교훈으로 평화에의 결의를 새롭게 하는 결의(전후 50년 국회결의)’를 채택했다. 그러나 자민당의원들이 이에 반발하자, 결의안은 “세계의 근대사상 수많은 식민지지배와 침략적 행위를 생각하면서, 우리나라가 과거에 행한 이러한 행위와 타 국민, 특히 아시아의 여러국민에게 끼친 고통을 인식하고 깊은 반성의 뜻을 표한다”는 애매한 표현으로 수정되었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한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열강의 행위와 관련시켜 직접적인 비판을 피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하였다. 그러자 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연립정부는 ‘전후 50년 국회결의’를 보완하는 뜻에서 각의 결정을 통해 1995년 8월 15일, ‘전후 50주년 종전 기념일을 맞아서’라는 총리담화를 발표했다. 소위 ‘무라야마담화‘로 그 핵심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미래에 잘못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의심할 여지도 없는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서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 또 이 역사로 인한 내외의 모든 희생자 여러분께 깊은 애도의 뜻을 바칩니다.”

무라야마 담화는 각의결정을 거쳤다는 점, 근대에 일본이 근린제국을 침략하고 지배하여 손해와 고통을 준 사실을 분명히 인정한 점, 미래에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통절한 반성과 사죄의 뜻을 표명한 점, 모든 희생자에게 애도의 뜻을 바친 점에서 역대 총리의 소신표명보다는 내용과 형식에서 진일보 한 것 이었다. 앞의 책, 36쪽. 그러나 한국정부는 외무부 대변인의 성명을 통해, 일본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 사죄와 반성의 뜻을 표했으나, 앞으로 일본의 태도를 주목하면서 진정성여부를 가늠하겠다고 전면적인 지지는 유보했다. 아무튼 무라야마 총리의 담화문은 이후 지금까지 일본정부의 역사인식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98년 10월 8일,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의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선언’이 이루어졌다.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이 선언은,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 들이면서,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죄한다”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오부치 총리의 발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한국과 일본이 불행한 역사를 넘어 화해와 선린 우호의 길로 나아가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은 귀국 기자회견에서,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문서로 명백히 사죄한 점을 가장 큰 방일성과로 꼽고, 과거 일제에 의해 희생된 조상들도 이로써 편히 눈을 감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일파트너십은 무라야마 담화를 진일보 시킨 것으로,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을 보완하는 성격을 가졌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이 선언은 그 후 한일관계를 이끌어 가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2003년 6월 7일,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정상회담, 2008년 4월 21일, 이명박 대통령과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총리의 정상회담 등에서 발표된 공동성명은 모두 한일파트너십의 역사인식을 계승한다고 했다. 2010년 8월 10일, 한국병합 100년을 맞아 민주당의 간 나오토(菅直人)총리가 발표한 담화문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담화문에서 “3·1독립운동 등의 격렬한 저항에서도 나타났듯이 정치·군사적 배경 아래 당시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하여 이루어진 식민지 지배에 의해 국가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 말하고,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때한 손해와 아픔에 대해 재차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죄의 심정”을 표명했다. 그리고 사할린 잔류 한국인에 대한 계속적인 지원, 한반도 출신자 유골 봉환, 조선총독부가 반출한 조선왕조의궤 반환 등을 약속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2010년 8·15경축사에서 “한국 국민을 향해 한국 국민의 뜻에 반한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고 사죄”한 것으로 받아 들이고, 이것을 일본의 진일보한 노력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즈음 2008년 ‘중학교 학습지도요령“을 개편하고, 2010년부터는 초등학교, 2011년 중학교 교과서에서 독도를 일본영토로 기술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고, 민주당정권이 급격히 몰락하였다. 그 후 2012년 12월 자민당의 아베총리가 집권하고, 그 이듬해 2013년 2월,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한일관계는 모든 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듯 냉각상태가 되어 버렸다.

2)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① 제1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2001년 4월의 후소샤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비롯한 일본 중학교 교과서의 검정통과는 한 · 일간에 외교 갈등을 불러 일으켜, 드디어 그해 10월 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의 한일정상회담에서 ‘한일역사공동연구기구’를 설치할 것을 합의했다. 그리하여 2002년 3월 5일,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와 ‘한일역사공동연구지원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 위원회는 한일 양국 정부의 공식적인 지원 아래 역사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설치된 민관합동기구였다. 이 위원회는 ‘한일관계사에 대한 양국간의 학설 · 해석의 차이가 있다고 여겨지는 분야를 학자 · 전문가간에 논의하여, 학설 · 역사인식에 대해 공통점을 도출하도록 노력함과 동시에, 차이점은 차이점으로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상호 이해와 인식의 심화를 지향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연구의 활용에 관해서는 ‘연구성과를 적의 활용할 수 있도록 양국 정부 및 관련 기관, 국회의원, 대학 등을 포함한 연구기관, 각종 도서관, 교과서 작성자, 민간(각 언론사, 한일관계 및 역사관련 지식인 등) 등에 널리 배포시켜 주지시키며, 또한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개하여, 한일 양국민간의 상호이해가 확대되도록 하고, 장래에 역사교과서가 편수되는 과정에서 참고로 고려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을 합의하였다. 제1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양국에서 위원장 1인씩과 위원 10인씩(제1분과 고대사 3인, 제2분과 중근세사 3인, 제3분과 근현대사 4인으로 각국 11인씩 총 22인으로 구성하였다. 제1기 위원명단은 다음과 같다.

   한국측 : 조동걸(위원장), 조광(총간사), 김태식(제1분과 간사) 김현구, 노중국, 손승철(제2분과 간사),            정구복, 정재정(제3분과 간사), 이만열, 김도형, 김성보, 그외 김장권, 강창일, 유병용 위원            은 중간에 교체됨.
   일본측 : 三谷太一郞(위원장), 森山茂德(총간사 겸 제3분과 간사), 浜田耕策(제1분과 간사), 石井正             敏, 佐藤信, 吉田光男(제2분과 간사), 田代和生, 六反田豊, 小此木政夫, 原田環, 古田博司.  
한편 한일 양국은 ‘한일역사공동지원위원회’를 한일양국의 민간지식인 및 정부관계자 각 6명씩으로 구성하여, ‘한일양국간의 역사관련 사업을 유기적으로 연계시키고, 통일된 개념하에 추진함과 동시에, 한일 양국정부가 책임지고 개별사업이 원활히 실시되도록 지원하기로 하고, 양국이 각자의 사정에 따라 적절히 사무국을 설치하도록 했는데, 한국은 교육부가 지원하는 별도의 사무국을 설치했고, 일본은 일한문화교류기금에 사무국을 설치하였다.

제1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공동연구주제를 19개를 선정하여 제1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19개 공동연구주제는 다음과 같다.

   제1분과 : ①4세기 한일관계, ②5세기 한일관계, ③6세기 한일관계.
   제2분과 : ①위사, ②임진왜란, ③통신사.
   제3분과 : ①한일간의 제조약, ②동아시아 국제관계와 근대화, ③청일전쟁 – 러일전쟁기의 한일관계,             ④조선 주둔 일본군의 실태(1876-1945), ⑤일제의 식민통치정책과 한민족의 대응, ⑥식민             지기 문화와  사회의 변용, ⑦전시체제기 국가총동원체제와 그 실상, ⑧식민지개발론과              수탈론, ⑨한일회담과 한일조약, ⑩1945년 이후 조일관계, ⑪1945년 이후 한일간 경제관             계의 전개, ⑫근현대 한일간의 상호인식 ⑬근현대 한일관계 연구사.

, 2002년 5월부터 2005년 5월까지 3년간 활동하였는데, 전체회의(6개월 1회) 6회, 각분과회의(2개월 1회)를 1분과가 20회, 2분과가 11회, 3분과가 14회 실시하여,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전 6책을 발간하였다. 공동연구의 결과 주요쟁점은 다음과 같았다. 예를 들면 제1분과의 경우, 한국측은 4-6세기 일본의 한반도 남부 지배는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했고, 일본측은 공개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은 주장하지 않았으나, 광개토왕능비에 비추어 4세기 당시 왜가 강성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제2분과의 경우, 왜구의 주체에 대해 한국측은 그 주체가 일본인이며 성격은 해적집단이라는 점을 논증했던 반면, 일본측은 왜구를 일본인이나 조선인 혹은 혼혈의 잡거집단으로 해석하였다. 통신사의 경우, 한국측은 통신사는 막부의 간청을 받아들여 파견했다고 주장했으나, 일본은 室町시대에 가상의 조공사절로 간주했다. 임진왜란에 관련해서는 한국측은 임진왜란은 일본의 침략욕구로 일어났고, 조선의 승리였다고 주장했으나, 일본측은 침략이라는 용어 대신 출병, 파병의 용어를 쓰면서 피해상황을 축소했다. 제3분과에서는 개항기에 대해서, 한국 측은 일본의 한국강점은 국제법이나 절차에 비추어 불법적이고 부당한 것으로 규정했고, 일본측은 일본이 힘의 우위를 배경으로 조약을 맺었어도 그것은 근대 국제법이 안고 있는 모순임을 강조했다. 식민지기에 대해서는 일본측은 일본의 조선지배가 폭압 · 동화정책이었으며, 한국인은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했다. 반면 일본측은 조선민족의 저항을 한국내의 근대적 관료제의 이식과 국제화의 진전에 대한 반발로 간주했다. 해방이후기에 관해서, 한국 측은 한일협정이 식민지지재배에 대한 사과와 반성이 결여된 반면, 한·미·일 반공전선 구축에 기여하고, 한국경제의 대미 · 대일 결합을 강화시킨 것으로 이해했다. 반면, 일본 측은 한일관계의 강화와 경제발전은 양국 및 지역의 평화와 안전에 기여한 점을 지적했다. 이상의 공동연구서 6책의 발간외에도 한국 측에서는 공동연구주제를 지원하기 위한 세부연구주제(소주제) 83개와 특설과제 6개 등 총 89개의 과제를 별도로 연구하여, 《한일관계연구논집》 전10책, 《대일과거청산 소송자료집》 전10책, 《러일전쟁 전후 한국관련 러시아 신문기사자료집》(1900-1906), 《근현대 한일관계 년표》를 간행하였다.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는 당초 협약대로 400질을 발간하여 양국정부 및 관련기관, 연구기관, 국회, 대학, 도서관, 교과서 출판기관 등에 배부했으며, 인터넷(교육부, 한국학중앙연구원)을 통해 공개했다. 그 외의 성과물은 공동보고서와는 별도로 경인문화사에서 발간하였다.

이와 같이 ‘한일역가공동연구위원회’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양국 정부간의 공식기구를 통하여 양국간에 갈등을 빚고 있는 역사쟁점 주제에 대해 양국의 학자들 간에 공동연구가 이루어졌다는 점에 커다란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운영상에 여러 문제점이 있었다. 예를 들면 주제선정 및 운영방식에 대한 사전협의에 많은 기간을 소요했으며, 위원수에 비해 주제가 너무 많았고, 또 실질적인 공동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주제는 같았지만 내용이 다른 경우가 많았고, 연구의 진척사항을 비공개로 하며, 기록을 남기지 않아 위원회 활동이나 연구 성과를 널리 알리는데 한계가 있었다. 또한 역사쟁점에 관해서는 연구진척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교과서 문제’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쟁점에 관한 상호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었으며, 최종 연구성과물은 한일관계사 연구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

②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제1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활동이 끝난 2005년은 ‘한일우정의 해’였다. 2005년은 광복 60주년, 한일협정 40주년, 을사조약 100년이 되는 해로 굴절된 한일관계사를 잘 보여주는 해이다. 그런데 그해 초부터 일본 시마네현에서는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소위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했고, 5월에는 2006년도용 일본중학교 역사교과서 검정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6월에 한일정상회담이 열렸고, 그 자리에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제2기 구성을 합의했고, 이번에는 ‘교과서위원회’를 신설하여 양국교과서 편수과정에 참고하도록 명문화 했다. 제2기 위원회의 목적과 연구활용은 제1기 때와 같았고, 다만 교과서 위원회가 추가 설치되어, 제1기때와는 달리 교과서문제를 직접 다룰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북핵문제’, ‘독도’, ‘야스쿠니 신사참배’ 등으로 양국간에 긴장관계놔 일본의 정권교체 등의 문제로 출법에 난항을 겪다가 2007년 6월에야 비로소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발족하게 되었다.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양국에서 위원장 1인씩과 위원 16인씩(제1분과 고대사 3인, 제2분과 중근세사 3인, 제3분과 근현대사 4인, 교과서소위원회(교과서분과) 6인으로 각국 17인씩 총 34인으로 구성하였다. 제2기 위원명단은 다음과 같다.

   한국측 : 조광(위원장), 손승철(총간사 겸 제2분과 간사), 김태식(제1분과 간사) 노태돈, 조법종, 이계            황(제2분과), 한명기, 주진오(제3분과 간사), 하종문, 류승렬, 이석우, 이찬희(제4분과 간사),            정재정, 김도형, 정진성, 현명철, 신주백. 총간사가 정재정에서 손승철로 중간에 교체됨.
   일본측 : 鳥海靖(위원장), 原田環(총간사), 浜田耕策(제1분과 간사), 坂上康俊, 森公章, 須川英德(제2            분과 간사), 桑野榮治, 佐伯弘次, 有馬學(제3분과), 大西裕, 春木育美, 古田博司(제4분과             간사), 山內昌之, 重村智計, 永島廣紀, 木村幹, 山室建德.  
또한 제1기 때와 마찬가로 한일 양국은 ‘한일역사공동지원위원회’를 한일양국의 민간지식인 및 정부관계자 각 6명씩으로 구성였고, 한국은 교육인적자원부가 지원하는 별도의 사무국을 설치했고, 일본은 일한문화교류기금에 사무국을 설치하였다.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공동연구주제를 24개를 선정하여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12개의 공동연구주제는 다음과 같다.

   제1분과 : ①고대 한일관계의 성립, ②고대왕권의 성장과 한일관계, ③고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               편과 한일관계.
   제2분과 : ①14-15세기 동아시아 해역세계와 한일관계 –왜구의 구성문제를 포함하여-, ②동아시아               세계와 임진왜란- 국제관계와 원인문제를 포함하여-, ③17-8세기 동아시아세계와 한일               관계-통신사와 왜관의 의미를 포함하여-.
   제3분과 : 제1부 한일근대국가의 수립과정과 상호관계
              ①제1장, 주권과 독립, ②제2장 권력과 국민
            제2부 일제식민시기의 조선과 일본의 사회변동
              ③제1장, 지배체제와 이데올로기, ④제2장 근대화, ⑤제3장 전시체제,
            제3부 제2차 세계대전이후 한일관계의 형성과 변화 
              ⑥제1차 경제, ⑦제2장 외교, ⑧제3장 대중문화,
            제4부 여성과 사람의 이동
              ⑨제1장 여성의 사회진출의 한일상호비교
              ⑩,제2장 사람의 이동이 한일상호비교
  제4분과 : 교과서의 이념(2주제) - 교과서와 근대 · 근대성
           교과서의 편찬(2주제) - 교과서 편찬제도의 변천, 교과서문제의 사적전개
           교과서의 기술(4주제) - 교과서에 나타난 전쟁, 교과서에 나타난 근대법 질서와 국가
                                 교과서에 나타난 현대 · 현대사, 교과서에 나타난 민족 · 민족운동 

, 2007년 6월부터 2010년 3월까지 2년 9개월간 활동하였는데, 전체회의 5회, 각분과회의를 1분과가 18회, 2분과가 14회, 3분과가 15회 실시하여,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전 7책을 발간하였다. 공동연구서 7책의 발간 외에도 한국측에서는 공동연구주제를 지원하기 위한 세부연구주제(소주제) 66개와 특설과제 6개 등 총 72개의 과제를 별도로 연구하여, 《한일관계연구논집》 전11책, 《한일역사의 쟁점》 전2책, 《한일역사과 교육과정 비교연구》 등을 간행하였다.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성과를 분과별로 평가해 보면, 제1분과의 경우, 양국 연구자가 시기별로 개관하는 연구를 진행함으로써 역사 인식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자연스럽게 부각시켜, 역사교과서 집필자들에게 참고자료로 제공할 수 있는 기초 마련했다. 특히 일본의 벼농사와 금속문화는 한반도 남부에서 전래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며, 왜가 가야7국을 평정했다는 의미를 가진 ‘임나일본부’라는 용어의 사용은 적절하지 않다는 데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제2분과의 경우는, 학계 최초로 한일 양국의 고려시대 한일관계에 대한 연구사를 정리, 양국의 중․근세 한일관계 연구현황 파악과 내용 분석을 통해 한일 간 인식과 관점의 차이 확인했으며, 쟁점 주제였던 왜구의 주요 구성원(일본측, 전기 왜구에 조선인 포함)에 대해 壹岐, 對馬島, 松浦지역의 海民이라는 것에 양국 위원 간 의견 일치를 보았다. 또한 《중근세 한일관계 사료해제집》을 한일 양국 모두 처음으로 정리하여 정선된 학술 정보를 제공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제3분과의 경우는, 근 · 현대사의 10개 주제를 선정 · 연구하였으나 주제가 광범위하고 내용이 다양하여 쟁점 부각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과정에서 양국 학자간에 뚜렷한 역사관과 역사인식의 차이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제4분과는 정부차원에서 양국 교과서에 대해 공동연구를 처음 실시함으로써 제1기 위원회에 비해 진전되었다고 볼 수는 있지만, 일부 위원들의 편향된 자국 중심의 역사관에 의해 역사교과서 내용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저조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제2기 위원회는 제1기 위원회를 보완 · 발전시킨 한 단계 진전된 형태의 연구를 진행했으며, 교과서 집필자 및 연구자 등에게 책임 있는 자료 제공의 계기 마련했다. 그러나 제1기, 제2기 위원회 활동을 통해볼 때, 몇가지 한계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우선 운영상의 문제로, 양국 위원간에 위원회에 대한 기본인식의 차이점이 있었다. 예를 들면 한국측에서는 역사교과서 쟁점을 해소하기 위한 교육적 접근을 목적으로 한 반면, 일본측에서는 개인적인 연구에 치중하는 성향을 나타냈다. 따라서 한일간의 역사쟁점과 관련이 없는 주제를 선정하거나, 포괄적인 주제를 선정하여 위원회의 본래 취지가 약화되기도 했다. 또한 제3분과(근․현대사)에서는 위원의 숫자에 비해, 너무 많은 주제를 선정하여, 공동연구원 또는 연구협력자를 위촉하는 바람에 공동연구의 일체감과도 결여되었고, 또 주어진 기간 동안 연구를 진행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한편 교과서위원회(제4분과)가 설치되어 양국의 교과서 내용을 연구하고 토론한 것은 제1기에 비해 새로운 진전이었지만, 교과서 문제를 다루는 시각이 상이하여 상호이해와 역사화해를 향한 공동연구가 되지 못하고 자기 합리화, 상대방 비하 등의 태도가 나타나기도 했다. 또한 연구성과물과 관련해서는 위원회의 목적이 한일관계사 쟁점에 대해 공동연구함으로써 인식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도출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논문은 개별적 연구에 그친 측면이 있었다. 나아가 공동연구보고서가 비매품이고 한정판이기 때문에 연구성과를 전파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면, 이러한 공동연구는 한일 상호간에 역사인식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추출해 가는 과정으로 역사교과서 문제 해결을 위한 시발단계 수준으로 독-불, 독-폴 간 역사교과서 문제 해결 과정에서도 같은 양상을 드러냈었던 문제로 보여 진다. 곤도 다카히로지음, 박경희옮김, 2006, 《역사교과서의 대화》, 역사비평사. 참조 그런 의미에서 2기에 걸쳤던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활동은 양국정부와 학자들이 역사교과서 문제 내지 역사분쟁의 해소를 위한 공식적인 관심을 표명했고, 공동으로 노력을 시작했다는 점에 있어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재정, 2014, 앞의 책, 248쪽. 이신철, 2009, 〈한일 역사갈등 극복을 위한 국가산 역사대화의 성과와 한계-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활동을 중심으로-〉《동북아역사논총》 25. 407-410쪽 참조.


4.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일 역사 갈등의 늪은 그 진원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수렁속이다. 그러나 현재 빚어지고 있는 역사 갈등은 기본적으로는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진원지는 역사교과서와 주요 인사들의 망언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교과서집필자의 서술내용에 대한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해서 간행되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교과서의 문제점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은 교과서 검정의 최종 권한을 갖고 있는 교육행정 당국 내지 일본 정부가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동안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 대한 대응은 한국에서는 70년대에 개인학자의 노력에 의해 시작되다가, 80년대에 들어, 국사편찬위원회, 한일문화교류기금 등이, 90년대에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역사교육연구회, 한일관계사학회, 국제교과서연구소, 한국교육개발원 등이, 2000년대에는 한국사연구회 등 5개학회가 중심이 되어 일본학회 및 역사교육자협의회와 함께 교과서문제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또한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와 같은 시민단체에서도 일본 NGO등과 연대하였고, 한국과 일본의 학계에서는 공동역사교과서 형태의 업적들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한일양국은 역사교과서를 검정제도 아래서 간행하고 있으므로, 양국 정부가 나서지 않고는 수용되기가 어렵다. 또한 1953년 한일회담 석상에서부터 노골화 된 일본 주요인사 발언은 역사 갈등을 더욱 부축이고 있다. ‘일본은 한국을 강점한 것이 아니라 합의에 따라서 합법적으로 합방했다’, ‘일본은 한일합방 이후 한국의 발전과 한국인의 생활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따라서 침략이나 식민지지배, 수탈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진실과 어긋난다’ , ‘한일합병과 그 후 일본의 통치는 오늘날 한국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일본을 위해 귀중한 생명을 희생한 영령에게 존숭의 뜻을 표하기 위한 것이지, 한국과 중국 국민의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라는 것이 핵심논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양국 정부가 전혀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양국정상들은 1983년 이래, 전두환 - 나카소네 이후, 노태우 - 가이후, 김영삼 - 호소가와(무라야마), 김대중 – 오붙이, 노무현 – 고이즈미, 이명박 – 후쿠다 정상회담 등에서 발표된 공동성명에서 내용에 차이는 있지만 모두 한일파트너십의 역사인식을 계승한다고 했다. 이러한 역사인식들이 2002년 정상간의 합의에 의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설치와 2기에 걸친 공동연구위원회의 성과로 가시화되었다. 이 위원회는 양국 정부와 학자들에 의해 민관합동으로 역사교과서 문제 내지 역사분쟁의 해소를 위해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다는데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2010년, 제2기 활동을 끝으로 현재 중단된 상태이다. 역사교과서 왜곡과 일부 인사들의 망언에 의해 얼룩진 한일관계와 그것을 해소하려는 정부와 민간들의 노력을 회고해 본다면 더 이상 무의미하고 백해무익한 역사 갈등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 최근의 동아시아 국제상황을 보면, 한중일 삼국은 자신의 전략적 이익에 역행하면서 의도하지 않게 상대방을 도와주는 모순적 외교의 역설에 직면하고 있다. 《조선일보》, 오피니언, 2015, 5.25. 박철희,‘상대를 등돌리게 하는 한·중·일 외교의 역설’ 중국의 패권주의에 의한 공세적 전략에 위협감을 느낀 아베의 일본은 보통국가화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있다. 아베총리는 아시아외교의 정상화보다 일본의 보통국가화라는 목표를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 과거사의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어정쩡한 아베총리의 자세는 한국과 중국을 가깝게 만들었다. 중국과 맞서기 위해 전략적으로 한국을 끌어안아야 할 아베의 일본이 거꾸로 우호적인 한국을 중국 품으로 밀쳐내는 역설을 만들고 있다. 한국은 한일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자각은 있으면서도, 일본이 먼저 반성하지 않는 한 일본에 다가서려고 하지 않는다. 수없이 반복했던 반성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말로 만 반성하기보다는 오히려 실질적인 협력관계의 구축이 더 필요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돌이켜 보면, 한중일 삼국이 서로에게 적대감이 상충할 때, 삼국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조선시대 중국으로 朝天使와 燕行使가 가고, 일본으로 通信使가 왕래하면서 평화를 유지했던 역사를 돌이켜 보자. 절대적 국가관계를 우호관계로 발전시켜 나가는 데는 네 가지 변수가 필요하다. 역사, 제도, 국제상황, 리더십이라고 한다. 릴리 가드너 펠드만, 2009, 《역사대화로 열어가는 동아시아 역사화해》, 〈독일의 화해 외교정책에서 역사의 역할〉 동북아역사재단. 역사를 묻어버리면 수정된 상호작용의 구조를 만들어 갈 수 없다. 제도는 대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며, 국제상황은 다자적 또는 양자적 형태를 만들어 간다. 무엇보다 리더십은 비전을 지녀야 하며, 국내의 반대여론을 극복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 한 방법으로 역사문제는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같은 기구를 만들어 역사대화를 계속해가면서, 한편으로 한·중·일 삼국의 지도자 들은 삼각협력의 시대를 만들어 가면서 새로운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올해는 광복 70년, 한일수교 50년이 되는 해다. 삼국간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믿음이 쌓이면 가로막고 있는 문제들의 해결 실머리가 풀릴 수도 있을 것이다. 대립구도를 강화해가는 방법만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다. 삼국의 지도자들은 과감하게 리더십을 발휘하여 모두에게 의미 있는 출발의 해가 되가 되었으면 좋겠다(終).

발표문 목록

구분 제목
1 한일 양국, 역사대화 어떻게 할 것인가? - 양국 정부간 역사대화의 회고와 전망 -
2 日韓中歷史共同硏究における歷史地理学の手法(Historical Geographic Method in Joint Researches on Japanese-Korean-Chinese History)
한중일 역사공동연구에서 역사지리학의 수법
3 한일 민간교류에 관한 활동소개와 제안
4 한일관계의 키워드 - 문화교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