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 진영으로 나뉘었던 시대의 종결과 동블록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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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1987 새롭게 긴장이 고조되면서 동서 관계가 악화된다.


1985년 이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소비에트연방을 변화시킨다.


1989/1990 동블록의 변화: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루마니아, 동독에서 자유선거가 실시된다.


M1 세 사람이 세상을 바꾸다 좌측 사진은 소련 공산당(CPSU)의 사무총장(1985-1991)을 거쳐 소비에트연방의 대통령(1988-1991)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가운데 사진은 폴란드 출신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 우측 사진은 노조위원장이자 폴란드의 대통령(1990-1995)이었던 레흐 바웬사, 시위 중인 그단스크 소재 레닌-소전소의 노동자들과 함께 있는 모습


동서관계 새롭게 긴장하다 끊임없이 시도된 협상과 몇몇 조약 체결(p. 15 이하 참조)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연방과 미국의 경쟁적 무장이 다시 시작되었다. 1970년대 말, 소비에트 정부는 동유럽에 핵탄두 미사일을 배치하였다. 이 미사일의 사정거리는 서유럽 국가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과 NATO는 유사한 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정하였는데, 특히 독일과 영국에 배치하기로 하였다. 동서관계의 악화에는 아프카니스탄에 대한 소비에트연방의 군사개입도 영향을 미쳤다. 1979년 아프카니스탄에서는 내전이 일어났다. 새 정부는 아프카니스탄을 현대화시키고자 했고 사회주의에 입각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다시 말해 부동산의 재분배, 의료서비스의 보급, 여학생들에게 교육기회 제공, 남녀 성평등 등을 달성하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귀족들, 대토지 소유자, 이슬람 성직자(물라) 등이 이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것이다. 수도인 카불에 자리잡고 있던 아프카니스탄 정부는 소비에트연방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약 10만 명의 소비에튼연방 군인이 파병되었다. 미국은 반정부세력의 편에서 그들에게 자금, 현대적 무기, 군사 자문 등을 제공하였다. 아프카니스탄-전쟁은 10년이나 지속되었지만, 그 어떤 쪽도 명쾌하게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소비에트연방의 새 사무총장이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아프카니스탄에 대한 개입이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유발되고 많은 손실을 안겨줄 뿐이라고 판단하였다. 결국 1989년 소비에튼연방의 군인들을 아프카니스탄에서 철수하였다. 아프카니스탄 정부는 3년간 더 유지되었다. 그러나 3년 후 저항세력들이 권력을 잡았고, 그 후에는 내부 분쟁이 이어졌다.


p. 41 소비에트연방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소비에트연방에서는 심각한 위기의 징후들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군사 부문에 많은 재정이 투입되었고 그 대신 일상 생활에 필요한 소비제의 생산에는 충분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국과 다시 시작된 무장경쟁에서 소비에트연방은 경쟁자와 보조를 맞추기 어려워졌고 과부하 상태였다.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공산당의 사무총장이 되었고 3년 뒤 소비에트연방의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의 변화를 통해서만이 상황 개선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개방) 그리고 "페레스트로이카"(변화)를 구호로 내세웠다. "글라스노스트"의 실현을 위해 검열제도가 폐지되었다. 그 이전까지 금지되었던 서적과 영화를 읽고 관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실현은 정당과 경제부문에서 다소 어려웠다. 1918년 이래 국가 권력을 장악한 소련 공산당 내부에서는 최초로 비밀 선거가 실시되었다. 1989년에는 1917년 이래 처음으로 다시 의회 의원 선출을 위한 자유선거가 실시되었다. 의회의 권한도 강화되었다. 그러나 영향력이 큰 지도부 인사들은 자신의 입지를 잃게 될 것을 우려했다. 그들은 그래서 개혁을 막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 외의 사람들은 개혁이 너무 느리게 진행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정당에서 탈당하고 새로운 정치정당을 결성하였다. 순수한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를 탈피했고 서구의 시장경제체제의 요소들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산업과 농업 부문의 생산성, 국민 대상 생필품의 보급률은 오히려 더 떨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폐지할 수도 없었고, 이 변화의 바람은 소비에트연방 이외의 지역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동블록의 종말은 폴란드에서 시작되다 이미 1980년경 그단스크의 한 조선소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시위는 전국 노동자들로 번져나갔다. 노동자들이 일어난 직접적인 이유는 식료품 가격의 인상이었지만, 여기에 정치적 요구들이 하나 둘씩 더해졌다. 그들은 독립된 노동조합 설립, 시위 허용, 자유로운 의사표현의 자유, 정치범의 석방 등을 요구했다. 1978년 크라카우의 추기경 카롤 보이티야(Karol Wojtyla)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1983년 그는 요한 바오로 2세로서 교향을 방문하였다. 그는 대중을 향해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외치자, 대중은 그의 이 말을 자신들의 시위와 요구를 계속하라는 격려로 받아들였다.


M2 마법사 견습생 (호르스트 하이칭거(Horst Haitzinger)의 캐리커처, 1998년) 이 캐리커처는 괴테가 쓴 한 시를 모티브로 하였다. 마법사 견습생이 스승이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마법을 부리기 시작하는 내용이다. 스승이 돌아오자 제자는 스승에게 이렇게 말한다. "스승님, 도와주십시오. 제가 악령들을 불러 냈는데, 악령들이 떠나질 않습니다!"


p. 42 그리고 실질적으로 카톨릭 교회는 비밀리에 시위를 재정적으로 지원하였다. 정부는 독립 노동조합인 "솔리다노스크(Solidarność)"의 설립을 허용해주어야만 했다. 이 노동조합의 대표인 레흐 바웬사(Lech Walesa)가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에 출현하는 것까지도 허용해주어야만 했다. 이 노동조합은 결국 자유선거 실시까지 달성하여, 자유선거를 통해 레흐 바웬사(Lech Walesa)가 폴란드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폴란드에서 일어난 변화의 마지막 단계는 사실상 소비에트연방의 변화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었다. 특히 고르바초프는 위협받고 있는 폴란드 정부를 돕기 위해 소비에트연방의 정부가 더 이상 군사를 파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었다.

프라하: "부드러운 혁명"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무엇보다 작가, 예술가, 종교인들이 공산주의 정권에 저항하였다. 이들은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로부터 용기를 얻어 그들의 요구사항들을 정리하여 "77헌장"을 발표하였다. 그들의 대표적인 요구사항은 인권보호와 기본자유권의 보호였다. 그들은 박해를 받고, 직업활동을 금지 당하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추방을 당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의 봄 당시 소비에트연방은 자유의 확대를 요구하던 시민들을 무기와 폭력으로 제압했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던 일반 시민들은 저항세력들을 초기에 별로 지지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연방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시민들도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989년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11일동안 시위가 이어지고 짧게 총파업이 일어났는데, 그 결과 그 사이 무력화된 공산주의 정권이 스스로 권력을 포기하고 물러났고 야당의 대표들에게 순순히 주요 직책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서방세계로의 국경이 개방되었다. 국가명도 " 체코와 슬로바키아 연방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첫 번째 자유 의회선거가 1990년 6월에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체코에서는 "부드러운 혁명"의 주역인 국민포럼이 승리하였고, 슬로바키아에서는 이 단체의 자매기관인 "폭력에 맞서는 대중"이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하였다. 다른 동유럽 국가들에서도 시민들이 공산주의 정권을 무너뜨렸다. 여기저기에서 서방세계로의 국경이 개방되었다. 루마니아를 제외한 모든 국가에서 혁명은 평화롭게, 사상자가 유혈 사태 없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혁명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1991년에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가 해체되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동블록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Nordatlantischer Versammlung 북대서양 조약기구 M3 "잔인하게 파괴된 적" (호르스트 하이칭거(Horst Haitzinger)의 캐리커처)/


p. 43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이 두 러시아어 단어는 "개방"과 "개혁"을 뜻한다. 소비에트연방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1980년대 하반기에 이 두 개념을 목표로 설정하고 소비에트연방의 내정을 완전히 바꾸어놓겠다고 선언하였었다. "개방(글라스노스트)"의 목표는 경제체제의 변화였다. 구체적으로는 중앙 계획경제 체제를 완화시키고 각 지역의 상황에 적합한 계획경제를 도입하고, 경제적 결정에 대한 당의 개입을 줄이고 사기업의 설립 및 외국 기업과의 협력을 추진하는 것이 목표였다.

1989년 동블록의 변혁 폴란드(솔리다노스크) 내부의 변화와 소비에트연방의 변화(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에 힘을 얻은 다른 동블록의 국가들도 변화를 꾀하였다. 소비에트연방의 군대가 더 이상 사회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1953년 동독,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 개입 했듯이) 다른 나라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동블록 국가들의 독립운동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폴란드와 소비에트연방은 1989년 처음으로 자유 보편 선거를 통해 의회를 선출하였고, 그 뒤를 이어 1년 안에 알바니아를 제외한 모든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자유 선거가 실시되었다.


M4 미국의 대외정책 미국의 슐츠(Shultz) 외교장관은 1983년 미국정부의 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와 소비에트연방은 정치적, 도덕적 질서에 대해 서로 전혀 다른 목표와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 차이는 하루 아침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계대전 이후 취임한 모든 미국의 대통령들은 평화는 힘이 있을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다. 평화로운 세계질서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모스크바가 이 지구에서 핵시대를 맞아 공존을 가능케 하기 위해 스스로를 자재해야만 한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 자체의 목표들을 추진하고 동시에 소비에트연방이 던져주는 도전과제를 가능하다면 미리 해결하고 필요하다면 우리의 이해가 위협을 받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그들에게 맞서는 것이다. 출처: Ernst-Otto Czempiel, Carl-Christoph Schweitzer: Weltpolitik der USA nach 1945: Einführung und Dokumente, p. 396


M5 피해가 뒤따르는 생각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필한 "페레스트로이카" (1987) 중에서: 우리 사회는 원래 완전고용을 보장하고 기초적인 사회복지를 보장해주었다. 그러나 주택과 식료품에 대한 수요의 증가를 충족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최대 규모의 곡식생산업체가 소비에트연방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년 수백 만 톤의 사료용 곡식을 수입해야 하는 실정이다. 우리의 로켓들은 놀라울 정도의 정확함을 자랑하며 핼리혜성을 발견하거나 금성으로 향한다. 그러나 수 많은 소비에트연방의 일반 가정 내 가전제품들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 아첨과 아부에 가려 일상생활과 관련된 요구사항이나 의견들은 간과되었다. (…) 우리는 모든 것을 잘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질적으로 레닌이 경고했던 그러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차는 운전자가 생각하고 있는 목표와 전혀 다른 곳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 시간은 멈춰서 있지 않는다.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세계는 우리가 유리한 시점을 기다리도록 우리를 놔두지 않는다. 우리는 건설적이고 포괄적인 대화를 해야 한다. 당장. 우리는 다른 가치간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과도 소통해야 한다. (…) 우리는 국내외 정치적으로 봤을 때, "적"으로서의 미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긴장을 유지하고 큰 피해를 수반하며 예측 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대치상황을 원한다면 상상 속 적이든 실질적인 적이 필요할 것이다. Michail Gorbatschow: Perestroika, München 1989 (번역: Reiner Pfleiderder), Gabriele Burkhardt, Wolfram Stroele, p. 12, 22, 284 이하


M6 긴 적수 관계의 종결 1990년 11월 19일 파리에서 NATO 회원국들의 대표와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대표들이 한 조약에 서명하였다. 공동성명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p. 44 조약에 서명한 국가들은 도래한 새 시대에는 더 이상 적이 아닌 파트너로서 협력하고 호혜적 관계를 위해 적극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통합이나 한 국가의 정치적 독립을 저지하기 위한 폭력 위협이나 폭력 사용을 하지 않을 것이며, 기존의 국경을 폭력 위협이나 폭력 사용을 통해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다. 각국은 보유하고 있는 무기를 오직 자기 방어나 UN의 헌장에 근거해 타당성이 있을 때에만 사용할 것이다. 조약에 서명한 모든 국가는 전쟁을 예방하고 효과적 방어를 위해 불가피한 정도의 군사력만을 유지할 것이다. 우리는 조약에 서명한 모든 국가가 동맹을 맺거나 동맹에 가담하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출처: Chronik '90. Dortmunt 1990, p. 100


M7 새로운 질서로 향하는 길목에서 NATO와 바르샤바 조약 기국 회원국들이 개최한 회의 이후에 유럽안보협력회의(CSCE)가 3일간 32개 유럽 국가들과 소비에트연방, 미국, 캐나다가 참석한 가운데 특별 회담을 개최하였다. "Süddetusche Zeitung"은 이에 대해 1990년 11월 22일 다음과 같이 일면에 보도하였다.

CSCE 정상회담 종료 "새 유럽을 위한 헌장" 파리에서 서명 민주주의, 유일한 정권형태로서 인정 부시는 새로운 이라크-솔류션에 대해 구체적 지지를 얻지 못함

파리, 11월 21일 - "새 유럽을 위한 파리-헌장"에 서명함으로써 지난 수요일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는 3일간 개최되었던 유럽안보협력회의가 끝났다. 이 회의에는 32개 유럽 국가와, 미국, 캐나다가 참석하였었다. 이번에 서명된 헌장은 40년 넘게 지속된 냉전시대의 종식을 알리는 상징이며, 동서진영 모든 국가에게 인정되는 "유일한 정권형태"가 민주주의임을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에 대한 폭력사용을 공식 인정받기 위한 UN-결의에 대한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카르롤스 비드만(Carlos Widmann) 서구의 민주주의, 인권 및 기본적 자유권의 보호에 대한 공동의 동의 외에도 파리-헌장은 "경제적 자유"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경제적 자유는 사회적 정의와 환경에 대한 책임과 함께 "안녕을 위한 불가피한 전제"로 설명된다. 정치적 다원주의와 시장경제체제는 바로 경제적 자유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토대이다. 유럽에서 전통적인 무기의 "전례 없는 축소"는 비엔나에서 합의된 협약에 각국 대표가 서명함으로써 더욱 촉진될 것이다. 그 결과 "자유롭고 분단되지 않은 유럽" 내 안보에 대한 개념을 바뀌게 될 것이다.


질문과 심화 탐구 제안 (1) 동블록 해체를 야기시킨 요소들을 정리하라. (VT, M1, M5) (2) M2와 M3의 캐리커처를 M4와 M5와 연관 지어 설명하라. (3) NATO와 바르샤바 조약 기구 국가들 간의 조약과 파리-헌장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라. 바르샤바 조약 기구가 1991년 7월 1일 해체된 사실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제시하라. (M6, M7) (4) 서방세계에서는 고르바초프가 존경을 받으며 1990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가 소비에트연방에서는 금방 인지도를 잃은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