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헝가리 반소혁명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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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fellow wiki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6년 9월 1일 (목) 16:5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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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혁명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

올해는 헝가리혁명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1956년 10월 23일 공산당 독재에 항거해 학생, 노동자, 시민들에 의해 일어난 헝가리 혁명과 헝가리 혁명이 남북한에 미친 영향을 소개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한반도와 헝가리는 1892년에 우호통상항해조약을 체결하며 최초로 공식 외교관계를 맺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하자 미미하던 양국 간 교류는 단절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헝가리와 북한이 외교를 수립하였으나 본격적인 교류는 한국전쟁 중에 시작되었다. 헝가리는 다른 사회주의국가들처럼 전쟁 중인 북한을 다방면에서 지원하였다. 헝가리 노동자당 총비서의 이름을 딴 '라코시 마챠쉬 병원'을 북한에 설립, 운영하였고 북한 주민들을 위한 각종 구호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헝가리 정부는 북한의 전쟁고아들을 초청해 교육하였는데 이들을 위해 특별히 김일성 초등학교를 설립하였다.

스탈린주의 시대는 헝가리 역사에서 가장 큰 고난의 시기 중 하나였다. 라코시 마챠쉬 총비서는 김일성과 같은 우상화 정책을 표방하였다. 헝가리인들은 라코시 총비서와 후계자를 증오하였고, 이는 1956년 10월 23일에 발생한 헝가리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시민들은 시위 도중 스탈린동상을 끌어내렸다. 이튿날부터는 친소파 헝가리 당국과 소련군에 대한 항거가 시작되었다. 저자는 오랜 기간 동안 풍문으로만 간간이 전해져 오던 당시 부다페스트에 거주한 북한유학생들도 혁명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다양한 증거와 자료를 수집하였다. 북한 학생들 중 한국전쟁에 참전해 전쟁 경험이 있는 학생들은 무기사용법을 헝가리 시민들에게 가르쳐주었다. 당시 한국에서 헝가리혁명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은 헝가리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승만 정부는 동유럽의 여러 소련 위성국가에서처럼 북한 주민들에 의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였다. 혁명 초기 한국의 언론은 '봉기'와 헝가리혁명군을 '반란군'으로 보도하였다. 며칠 후 조선일보는 헝가리혁명을 '시민전쟁'으로 표현하였다. 10월 27일자에서는 수만명의 학생들이 부다페스트의 시위와 혁명을 주도하고 있고, 이튿날 28일자에는 부다페스트에서 반공인민투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당시 한국 언론자료들을 분석한 결과 이러한 헝가리혁명의 영향을 받아 10월 29일에 서울시청 앞에서 최초의 시위가 있었다.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가 조직한 북한동포궐기촉성대회의 슬로건은 '북한 동포 일어나라!'였다. 며칠 후 조선일보는 한국 국군이 북한에서 일어날 시위에 대한 대비계획을 마쳤다고 보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헝가리혁명 지원운동도 시작되었다. 연세대학교 학생 9명이 헝가리자유수호 학도의용군을 조직하였고, 훗날 국회의장을 역임한 정치외교학과 4학년 이만섭이 단장이었다. 국회의원과 국방위원장을 역임한 같은 학과 1학년 유재건도 함께 참여하였다. 한편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초등학교 6학년 때 헝가리의 자유를 지지하는 탄원서를 작성해 당시 다그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냈다.

헝가리 혁명은 한국문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1956년 12월에 발간된 반공시집 "헝가리비가"는 기억 속에서 잊혀졌으나 최근 부다페스트 엘떼대학교 한국학과에 파견교수로 재직 중인 장두식 교수에 의해 발굴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역시 헝가리혁명이 소재가 되었다.

헝가리혁명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헝가리 반공학생들을 경무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데레취케이 까로이 학생에게 전세계가 공산주의에 항거해 투쟁할 때가 왔으며, 한국은 동쪽으로부터, 헝가리는 서쪽으로부터 전진해 우랄산맥에서 만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잇따른 동유럽의 반공봉기와 혁명은 끝내 북한 주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봉기로 이어지지 않았다. 북한 노동신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