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과 유럽이 전쟁에 돌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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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과 유럽이 전쟁에 돌입하다

학습목표
- 어떻게 독일의 폴란드 침략이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이끌었는가?
- 서유럽에서 독일은 어떤 승리와 패배를 맛보았는가?
- 영국 땅에서의 전투가 영국에게 왜 중요한 승리였는가?

요점
1939년 전쟁이 시작된 후 독일은 손쉽게 폴란드, 프랑스와 여러 작은 나라들을 점령했지만 영국은 독일의 공습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핵심용어
- 블리츠크리크
- 협력정책
- 레지스탕스
- 연합국

학습주안점
- 사건의 전개를 알아내기: 이번 과를 학습하면서 개요를 작성하시오. 로마숫자로 2과의 주요 제목을 표시하고 대문자로 소제목을, 숫자로 세부사항을 표시하시오.
I. 폴란드 침공
A.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략하다.
B. 스탈린이 히틀러와 그들 사이에 있는 동유럽을 분할하기로 합의하다.
C. 독일의 블리츠크리크(전격작전)으로 3주간 폴란드를 압도적으로 공격하다.
II. 서부 전선의 전쟁


배경
네빌 챔벌레인이 1938년의 뮌헨 회담에서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이를 모든 사람이 반기지는 않았다. 영국 의회의 윈스턴 처칠의원은 평화를 유지하려고 체코슬로바키아 일부를 독일에 떼어준 것은 치명적 실수라고 믿었다. 이와 같은 선택에 대하여 그는 무서운 예측을 내놓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과 불명예 사이에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그들은 불명예를 택했고 이제 그들은 전쟁을 갖게 될 것이다.”
처칠은 히틀러가 그의 군대를 잡아매어둘 뜻이 전혀 없고 챔벌레인의 평화협정은 다만 몇 달의 평화를 벌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몇몇 의원들은 챔벌레인이 대 독일정책을 재고할 것을 촉구했다. 영국 해군장관 알프레드 더프 쿠퍼는(Alfred Duff Cooper) 유화정책을 받아들이는 대신 사임을 선택했다. 의회에서 사임 연설을 하면서 그는 영국이 힘으로 히틀러와 대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점에서 나는 총리각하와 깊은 이견을 갖고 있습니다. 총리께서는 달콤한 이성적 언어로 히틀러 선생과 말씀을 나누시고자 하는데 나는 그 사람에게는 단단한 주먹의 언어가 합당하다고 믿습니다.” - 알프레드 더프 쿠퍼 해군장관 1938년
히틀러는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수데텐란트 뿐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1939년 3월, 수데텐란트를 병합한지 단 6개월 만에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서쪽 반을 점령하고 그리고 나머지 영토를 그의 동맹국들이 분할하도록 했다. 대부분의 체코인들은 히틀러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독일에 점령당하는 것을 극렬히 반대했다. 그 다음 달 이탈리아군이 발칸반도의 그리스 북쪽 알바니아를 침공, 점령하였다. 총성이 울리지는 않았지만 중부 유럽의 평화는 급속히 깨지고 있었다.

  • 윈스턴 처칠이 네빌 쳄벌레인에 이어 1940년 5월 수상이 되었다.



폴란드 침공
독일이 3월에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함으로써 히틀러와 평화적으로 거래하려는 챔벌레인의 희망은 깨지고 말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대 독일 유화정책을 포기하고 전쟁준비에 나섰다.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자 영ㆍ불 지도자들은 독일이 더 이상 영토 확장에 나서면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1939년 3월 31일 양국은 공식적으로 폴란드가 히틀러의 침공을 받는 경우 원조에 나설 것을 합의하고 지원을 공약했다. 히틀러는 그러나 양국의 경고를 무시했다.
히틀러에게도 중대한 우려가 한 가지 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개시 때와 마찬가지로 독일은 동서 양면에서 동시에 전쟁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히틀러는 동쪽으로부터의 공격을 염려하지 않고 서쪽의 적 영ㆍ불을 상대하고자 했다.

히틀러와 스탈린간의 협약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 소련은 견원지간이었지만 히틀러와 스탈린은 자신들이 상호 협력하면 이득이 크다는 것을 인정했다. 스탈린은 히틀러의 장기계획에 소련 정복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덮어 두었다. 1939년 8월, 스탈린은 히틀러와 10년 불가침협정을 체결하여 동부로부터의 침공 위협을 제거해 주었다.
이 협정에 부속된 비밀문서에서 양국은 자기들 사이에 위치하는 독립국가들을 양분하기로 했다. 1주일 후 1941년 9월 1일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했고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전격작전
영국, 프랑스 그리고 폴란드는 문서상으로는 상당히 효과적인 동맹관계를 맺었다. 3국은 총 병력으로나 보병사단의 수에 있어서 독일보다 우세했다. 독일군 각 사단은 그러나 월등한 화력을 갖추고 있었다. 영국, 프랑스와 달리 독일은 탱크 부대를 따로 기갑사단으로 편성했다.
뿐만 아니라 독일군은 폴란드 침공에서 새로운 공격 형태를 선보였다. 블리츠크리크(Blitzkrieg), 즉 전격전 이라는 이름의 이 새로운 전술은 신속하고 집중적인 공중, 지상의 합동공격으로 적을 기습하는 것이었다. 독일군의 전격전은 슈트카 전폭기의 수직강하 폭격으로 시작되어 적의 방어선을 깨뜨리고 민간인 주민들을 공포에 빠뜨렸다. 뒤를 이어 기갑사단의 탱크와 이동식 야포들이 적진으로 진격하여 적을 포위, 무력화하고 마지막으로 보병부대가 진입하여 적의 패배를 마무리 짓고 지역을 점령하는 것이다.
이 블리츠크리크 전술로 독일군은 한 달도 안 걸려 폴란드를 완전 점령했다. 독일군은 점령지에 독일 법을 선포하고 유대인 민간인들을 투옥하고 살해했다. 홀로코스트라고 일컬어지는 이 유대인 박해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서술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적시에 폴란드를 돕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이를 방관 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9월 중순 소련군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가세하였고 히틀러와의 불가침조약의 비밀 조항에 의거하여 스탈린은 동부 폴란드를 점령했다.


서부 전선
독일의 폴란드 점령 후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영국과 프랑스는 큰 손실을 우려해 각기 병력을 뒤로 물렸다. 미국 언론은 전투 없는 이 전쟁을 “가짜 전쟁”이라고 불렀고 독일 사람들도 싸움이 없는 상황을 “지츠크리크(sitzkrieg)” 즉 앉은뱅이 전쟁이라고 이름 붙였다. 다음 수개월 동안 독일군은 대기상태에 머물러 있었고 프랑스군도 방어선을 지켰다.

  • 정치만평 해석하기: 나치 독일과 공산당 소련의 어울리지 않은 동맹이 서유럽 국가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 추론하기: 불가침조약에 대한 아래 설명문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이 방어 전략의 핵심은 마지노선이었는데 프랑스는 독일과의 국경선에 걸쳐 견고한 요새를 구축하였다. 신기술을 동원하여 막사를 짓고 휴식 시설과 심지어 냉난방장치까지 갖추었다. 지하 궤도로 주요 방어지점을 연결하고 두꺼운 콘크리트 장벽과 강력한 포대로 적의 침공에 대비했다. 그러나 마지노선에는 두 가지 중대한 문제점이 있었다. 이 방어선은 독일에 면한 국경만 보호했고 벨기에를 통한 우회공격에 대하여는 무력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강력한 포대는 모두 독일 방향으로 동쪽을 향해 배치되어서 독일군이 마지노선을 돌아서 오는 경우 아무 소용이 없게 되어 있었다.

독일의 공격
1940년 4월 9일, 히틀러가 성공적으로 덴마크와 노르웨이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가짜 전쟁”은 끝이 났다. 5월 10일 독일군은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에 블리츠크리크를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 군은 벨기에로 나아갔으나 이미 늦었다. 독일군은 룩셈부르크를 하루 만에, 네덜란드를 닷새 만에 그리고 벨기에를 3주도 안되어 점령했다. 한편 5월 중순, 벨기에에 위치한 독일군 기동사단들은 마지노선의 끝을 돌아 북부 프랑스로 돌입했다. 독일군은 여기서 도버해협 쪽으로 진격하면서 남쪽의 프랑스군 주력부대를 북프랑스와 벨기에에 위치한 영국군과 프랑스군 병력으로부터 떼어놓았다.

던커크
독일군이 영ㆍ불군을 둘로 가르면서 서쪽으로 진격하자 양국 군은 해안도시 던커크로 후퇴하였다. 이곳에서 5월말에서 6월초에 걸친 9일간 전쟁사상 최대 규모의 구출작전이 전개되었다. 일부 병력이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싸우는 동안 나머지 부대는 예인선, 요트 그리고 각종 민간 선박들로 철수 선단을 급조하였다. 무자비한 독일공군의 폭격을 무릅쓰고 약 900척의 배들이 34만 명의 병력을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수송했다. 던커크는 영국군에게 퇴각의 상징이 되었지만 이 눈부신 수상 철수작전으로 수많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독일군에 포로가 되는 운명을 벗어났다.

  • 독일의 공세, 1939-1941

1. 1939년 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다.
2. 1940년 4월 히틀러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성공적으로 공격하다.
3.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다.
4. 1940년 8월-1941년 6월 독일이 영국 땅에서의 전투에서 첫 번째 손실을 겪다.

  • 지도 읽기: 독일은 1940년 북유럽과 서유럽을 휩쓸고 1941년 봄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점령했고 1941년 6월 소련을 공격했다.

- 위치 이해: 이 지도는 1941년 연합국의 곤경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 1940년에 그려진 이 영국의 회화는 던커크의 후퇴를 둘러싼 어려운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프랑스 함락
히틀러의 대군은 남쪽으로 진격하여 프랑스 전국을 장악했다. 6월 10일 프랑스 정부는 파리를 포기했다. 프랑스의 패전이 확실시 되자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영국에 대하여 같은 날 선전포고를 했다. 6월 14일 독일군은 파리에 입성하고 6월 22일 프랑스와 150만이 넘는 프랑스군은 공식적으로 독일에 항복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스스로 휴전협상에 참가하고 파리에서 승리행진을 하기 위해 프랑스로 향했다. 영국과 프랑스 국민들은 독일의 신속한 프랑스 정복에 오직 경악할 따름이었다.
항복조건에 따라 독일은 프랑스 남부 5분의 3과 스페인에 이르는 전 해안지대를 점령하고 프랑스 정부는 휴양지 비쉬에 자리하여 독일군이 점령하지 않은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 지역을 비쉬 프랑스라고 불렀는데 앙리-필립 페뗑 장군을 수반으로 한 비쉬 프랑스는 협력정책(collaboration) 즉 독일과의 긴밀한 협조정책을 취했다.
런던에 자리한 자유 프랑스 망명정부는 영국과 중서부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를 근거로 독일 침략자들에 대항한 투쟁을 계속했다. 샬르 드골 장군의 영도하에 자유 프랑스는 프랑스 내에서의 지하 레지스탕스 (Resistance) 활동을 또한 지원했다. 레지스탕스는 점령지의 프랑스 시민들로 조직하여 독일을 반대하는 전단을 살포하고 독일 점령군의 작전을 방해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40년 여름까지 히틀러는 계속 성공을 거두어 서유럽의 거의 전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는 독일-이탈리아 추축국에 대항하는 연합국을 궤멸 직전으로 밀어 부쳤다. 결국 미국과 소련이 연합국 측에 가담하기까지 영국 홀로 전쟁을 수행했다.


영국 본토 항공전
프랑스가 항복한 후 히틀러는 프랑스 해안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의 다음 침략목표인 영국은 불과 20마일(32킬로)의 바다 건너에 있었다. 영국 총리가 된 윈스턴 처칠은 영국민은 전력을 다해 나라를 지킬 것을 맹세했다.
“우리는 해안에서 싸울 것이고, 우리는 상륙지점에서 싸울 것이고, 우리는 들판에서, 시가지에서 그리고 산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 윈스턴 처칠

무자비한 공격
영국의 강력한 해군이 히틀러의 침략으로부터 영국을 지켰다. 영국해군을 무력화하려면 독일군은 제공권을 장악해야만 했다. 히틀러는 공군(Luftwaffe)으로 하여금 영국의 방공망을 파괴하도록 하여 1940년 8월 사상 초유의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다. 영국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라고 불린 이 공격은 9월까지 계속되었는데 매일 1,000대의 전폭기들이 영국 땅에 폭탄을 퍼부었다.
1923년 헤이그에서 체결된 공중전쟁 규정은 민간에 대한 공격을 금한다. 처음엔 독일공군은 영국의 항만시설, 비행장, 레이다기지 같은 곳만 목표로 삼았다가 나중에는 항공기 제작공장과 유류저장소도 공격했다. 8월 말, 독일 폭격기 편대가 정해진 코스를 떠나 런던에 폭탄을 투하했다. 이틀 밤이 지난 후 아마도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군 항공기들이 베를린을 공습했다. 이리하여 더욱 처참한 공중의 전쟁이 새로이 전개 되었다.

  •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이 점령한 파리를 시찰하는 중 에펠탑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역사 속의 한 장면: 런던의 세인트폴 대성당은 주위의 다른 건물들이 무너지는 가운데 영국본토항공전을 견뎌내었다. 이 대성당은 영국인의 저항 정신의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9월초 히틀러는 영국민의 전쟁 의지를 꺾을 목적으로 런던과 다른 도시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명령했다. 이 공격에는 고열로 건물들을 태워버릴 수 있는 화학물질을 혼합한 소이탄도 사용되었다. 블리츠라고 불린 런던에 대한 공습은 단속적으로 1941년 5월까지 이어졌다. 인구 밀집지대에 대한 폭격은 쌍방 간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용감한 방어
영국의 공군(Royal Air Force, RAF)은 독일 공군에 비해 수적으로 많이 열세였지만 철저히 본토를 방어했다. 전형적인 공습의 경우 저속의 독일 폭격기들은 빠른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으며 15,000피트 고도로 해협을 건너 날아왔다. RAF의 스핏파이어 전투기와 허리케인기를 모는 전투조종사들은 독일 전투기들을 피해가며 폭격기들을 격추시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하루에 6,7차례나 출격하면서 이들은 공습 편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수백 명의 RAF 조종사들이 산화했지만 독일군의 손실은 더 컸다. “인류의 전쟁터에서 그처럼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큰 빚을 진적은 없었다”고 처칠은 RAF의 용감한 전공을 찬양했다.
영국 국민들도 이에 견줄만한 용감성을 발휘했다. 1940년 12월 독일 공군의 런던 공습으로 약 1,500건의 화재가 발생하여 이 역사적인 도시의 중심부를 불태웠다. 엄청난 피해를 입고도 국민들은 전쟁의 의지를 잃지 않았다. 1941년 말 독일 공습이 끝날 때까지 약 20,000명의 런던 시민이 목숨을 잃었고 70,0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용감한 공군 조종사들과 시민들 외에도 영국에는 또 다른 이점이 있었다. 1940년 2월 이전에 영국 과학자들은 독일이 최고급 비밀 통신에 사용하던 암호를 해독하였다. 암호로 된 통신문을 해독하여 영국군은 히틀러의 전쟁 계획의 대략을 알 수 있었다. 예컨대 영국군은 독일의 Luftwaffe가 완전히 제공권을 장악할 때까지 히틀러는 영국 본토를 침공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는데 독일 공군은 내내 제공권을 확보하지 못했다.

  • 심화학습: 일상생활

- 블리츠 속의 런던: 어떤 런던 시민들은 런던 지하철역을 야간 공습의 피난처로 삼았다. 정부는 안전문제 때문에 반대했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공습에 앞서 지하로 몰려들었다. 런던시 교통당국은 결국 민간인들이 선로와 승강장에서 밤을 보내는 것을 허락했고 커피와 간식을 제공하는 특별열차를 운행했다.

2과 평가
단원 이해도 평가
1. 뮌헨 회의와 폴란드 침공 사이에 영국과 독일의 관계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2. 독일이 폴란드를 한 달도 안되어 격파할 수 있었던 세 가지 이유는 무엇인가?
3.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협력정책은 무엇인가?
4. 영국에 대한 독일의 계획적 침공에서 공군은 왜 중요했는가?

비판적인 사고와 글쓰기
5. 대안을 찾아내기: (a) 영국과 프랑스는 1939년과 1940년에 왜 독일을 공격하지 않기로 선택했는가? (b) 독일을 공격하는데 특히 불리했던 점은 무엇이었는가?
6. 논리적 판단을 내리기: 도시들을 폭격하는 것이 정당한 전쟁 행위인지 설명하시오.
7. 연표를 작성하기: 1939년과 1940년 유럽의 주요 사건에 대한 연표를 작성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