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과 지도자와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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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과 지도자와 전략

학습목표
- 어떻게 초기 단체들이 민권운동의 기초를 놓았는가?
- 비폭력 철학은 무엇인가?
-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는 어떻게 민권운동에서 목소리를 내게 되었는가?

요점
1960년대의 민권운동은 여러 독립된 단체들과 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단체들이 사용한 방법론은 달랐지만 그들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평등한 권리를 보장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핵심용어
- 인종평등회의(Congress of Racial Equality, CORE)
-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mference, SCLC)
- 비폭력 저항
- 학생비폭력운동조정위원회(Student Nonviolent Coordinating Committee, SNCC)

학습주안점
- 핵심 사상을 찾아내기: 본 과를 학습하면서 1960년대의 주요 민권운동 당체들을 열거하고 그들의 목적과 특징을 약술하시오.


배경
“내가 열다섯 살 때 마틴 루터 킹 2세와 몽고메리 시 버스보이코트에 대해 들었던 것은 정말로 충격이었다. 흑인들은 좌석이 분리되어있는 버스를 타느니 차라리 1년 이상을 걸어 다녔다. 내게는 이것은 위대한 희망을 느끼게 해주는 어둠 속의 빛과 같은 것이었다. 다른 어떤 사건들보다도 이것이 내게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사건은 내게 탈출구를 보여주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내쉬빌(Nashville)의 아메리칸침례교신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그 학교를 다니면서 스터디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비폭력의 철학과 실천에 대해 공부했다. 간디의 삶과 그의 시대, 헨리 써로우(Henry Thoreau)의 작품들, 시민불복종의 철학 등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배운 것을 흑백분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용할 수 있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 존 루이스(John Lewis) 1960년대에 존 루이스 같은 많은 젊은이들은 민권을 위한 투쟁에 적극적이 되었다. 그들은 분리정책에 맞서 싸우고 민권을 얻어내기 위해서 조직과 강한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반을 다지기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민권운동은 미국에서 인종간의 불의를 끝내고자 결단한 평범한 시민들의 풀뿌리 운동이었다. 비록 이 운동을 지도하는 중앙 조직은 없었지만 몇 가지 주요 집단들이 형성되어 정보를 공유하고 민권운동의 활동을 위해 협력했다. 각각의 집단들은 자체의 우선순위, 전략, 운영방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든 시민들의 민권을 확고히 하는데 헌신된 수천 명의 미국인들의 에너지를 모으는데 모두 초점을 두고 있었다.

  • 사진: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의 포스터

역사 속의 한 장면: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지휘향상을 위해 설립된 여러 민권운동 단체 중 하나였다.
- 시각정보를 분석하기: (a) 이 포스터의 이미지들은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를 지지하도록 어떻게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는가? (b) 이 포스터는 당신에게 이 단체의 목적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의 뒤에는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NAACP)가 있었다. 이 단체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민권운동 조직들 중 하나였다. [705] 이 조직은 1909년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백인 미국인들 모두를 회원으로 두는 인종 간 조직으로 설립되었다.
저명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자인 W.E.B 듀보이스(Du Bois)는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다. 듀보이스는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첫 번째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다.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의 홍보 및 연구담당 이사로 봉직했고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 잡지인 “위기(Crisis)”를 편집했다. 듀보이스는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이 협회의 주요 목적은 유색인종들, 특히 흑인의 후손인 미국인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현대문화의 민주주의에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러한 참여에 대한 장애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고 또한 모든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세계 민주주의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 W.E.B 듀보이스
처음부터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시민으로서 그들의 완전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방해하는 법률에 도전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는 모든 미국인들이 완전한 법 앞에서의 평등을 보장하고 투표를 막는 장벽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사형(私刑, lynching)은 특히 남부에서 큰 위협이었다. 이런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는 1930년대에 하원에서 두 개의 사형반대법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했다. 상원의 남부 지도자들은 이 법안들이 법으로 통과 되는 것을 막았지만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는 계속해서 사형의 문제가 대중들의 관심사가 되도록 했다.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는 흑백분리법안에 도전하는 소송에서 더 성공적이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주거와 교육의 영역에서 여러 번 법정싸움에서 승리했다.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는 교육받은 중산층과 상류층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진보적인 백인 미국인들에게 주로 호소했다. 비판가들은 많은 더 가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경제적인 생존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들에 손대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전미도시연맹(National Urban League)
경제문제를 담당했던 조직은 전미도시연맹이었는데 이 단체는 1911년 창립되었다. 전미도시연맹은 미국의 대도시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돕고자 했다. 전미도시연맹은 남부로부터 이주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주거와 일자리를 얻고 일터에서 공정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장받도록 도왔다. 전미도시연맹의 활동가들은 이주민 가족들을 부두와 기차역에서 돌보았고 그들에게 안전하고 청결한 아파트를 찾아주었다. 그들은 또한 공장 소유주들과 노조지도자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동자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서 더 나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요구했다.

인종평등회의(Congress of Racial Equality, CORE)
1942년 평화주의자들에 의해 설립된 인종평등회의는 평화로운 대결을 통해 변화를 가져오도록 하는데 헌신했다. 이 조직도 인종 간 조직이어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백인 모두가 회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인종평등회의는 볼티모어, 시카고, 덴버, 디트로이트 등의 도시에서 흑백분리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에 인종평등회의의 지도자 제임스 파머(James Farmer)는 이 조직을 살리기 위해 보수를 받지 않고 일했다. 1950년대에 민권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자 새로운 후원기반이 갖추어져서 인종평등회의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고 이 조직은 이제 앞으로 다가올 대결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 심화학습: 문화

- “우리 승리하리라” 민권운동을 대표하는 이 노래는 노예시절부터 이어온 흑인영가와 찰스 앨버트 티들리 목사가 작곡한 나는 언젠가 승리하리라(I’ll Overcome Someday)에서 기원한 노래이다. 이 노래는 오랫동안 구전되어 오다가 1945년 담배농장의 파업에서 사용되었다. 후에 백인 포크 가수인 피트 시거와 가이 캐러완이 가사와 멜로디를 수정하여 부르기 시작하면서 제목을 “우리 승리하리라”로 바꾸었다. 사진: “우리 승리하리라”는 구호가 담긴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 마크


비폭력 철학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브라운 판결과 몽고메리 버스 보이코트운동에 의해 획득한 권리에 대한 점증하는 반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대한 폭력과 적대감의 증가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등장한 마틴 루터 킹 2세와 같은 지도자들은 비폭력 철학을 설파했다. 그들은 민권운동을 위한 싸움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두려움과 증오 때문에 폭력으로 보복하지 않도록 요구했다.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 SCLC)
1957년 마틴 루터 킹 2세와 다른 아프리카계 미국인 성직자들은 새롭고 중요한 민권운동 조직인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를 창설했다.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는 비폭력 저항의 실천을 옹호해서 억압적인 인종정책에 대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저항하였다. 비폭력 시위대는 적대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을 때에도 저항하지 않았다. 최초의 공식적인 선언문에서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는 이런 원칙을 제시했다.
“비폭력이 약함이나 비겁함의 상징이 아니며 예수께서 보여주셨듯이 비폭력저항은 약함을 강함으로 변화시키고 위협에 직면하여 용기를 낳는다는 것을 이해할 것.” -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 선언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는 민권운동의 초점을 남부로 전환했다. 이전의 조직들은 북부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제 남부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교회 지도자들이 평등한 권리를 위한 투쟁의 최선전에 나섰다. 그들 중에 마틴 루터 킹 2세가 전국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이 페이지의 미국인의 일생란을 보라)

킹 박사가 인도하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코트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마틴 루터 킹 2세는 젊은 침례교 설교자였다. 몇 년 안에 그는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으며 또한 가장 미움 받는 인물이 되었다. 킹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민권운동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비폭력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그가 점점 더 민권운동에 관여하게 되면서 킹은 모한다스 K. 간디(Mohandas K. Gandhi)의 신념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간디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내기 위한 인도의 오랜 투쟁의 지도자였고 그 노력은 마침내 1947년 성공을 거두었다. 간디는 비폭력 철학을 설파해서 더 강력한 대적들에 맞서 승리를 획득하는 유일한 길로 삼았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은 부당한 법에 평화적으로 저항해야 한다고 간디는 가르쳤다. 그들은 이렇게 평화로운 저항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폭력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것은 대단한 훈련과 용기가 필요한 전술이었다.
킹이 옹호했던 이 저항의 철학에는 다른 근원들도 있었다. 미국의 작가인 헨리 데이비드 써로우(Henry David Thoreau)는 1800년대 중반에 시민 불복종운동의 옹호자였다. 써로우는 1846년 멕시코와의 전쟁에 반대했기 때문에 세금을 내기를 거부해서 그 결과로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는 그 후에 이 경험과 그의 행동 뒤에 있는 원칙들을 바탕으로 그의 유명한 글인 “시민 불복종”을 저술했다.

  • 미국인의 일생

- 마틴 루터 킹 2세, 1929-1958 몽고메리 보이코트운동이 끝나고 보이코트를 했던 사람들이 이제 새롭게 좌석이 통합된 버스에 탈 준비를 하게 될 때 킹은 자원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앞으로 다가올 몇 달동안 겪게 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훈련을 시켰다 영화, 노래, 단막극을 통해 간디의 행동을 보여주고 인도에서 수동적인 저항이 거둔 성공을 보여주었다. 버스에 승차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남부지역을 여행하며 버스에 타게 될 때 맞부딪치게 되는 상황에 비폭력적으로 대응하는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17개의 규칙을 지키도록 권고를 받았다. 이 규칙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었다.“신의 인도를 받도록 기도하고 버스에 탈 때 말과 행동으로 완전한 비폭력을 실천할 수 있도록 헌신하라... 악을 흡수할 수 있을 만큼 사랑하고 적을 친구로 만들로 있을 만큼 이해하라. 저주를 받아도 저주를 돌려주지 말라. 떠밀려도 다시 떠밀지 말라. 맞아도 다시 때리지 말고 항상 사랑과 선의를 나타내라. 만일 다른 사람이 추행을 당해도 그를 방어하기 위해 나서지 말고 억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도덕적이고 영적인 힘을 사용해서 정의를 위한 투쟁을 수행하라.” - 도시 전체에 배부된 유인물몽고메리 보이코트 운동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의 결과로 킹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계속해서 대부분의 주요한 민권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의 노력의 대가로 196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학생들을 대변하는 새로운 목소리
비폭력 저항은 민권을 위한 투쟁의 실제적인 전략이었다. 또한 도덕 철학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부당한 체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체제에 협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억압받는 사람들은 억압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악하게 된다.” 이렇게 킹은 말했다. “악에 대해 협력하지 않은 것은 선과 협력하는 것과 같은 도덕적인 의무이다.”

학생비폭력운동조정위원회(Student Nonviolent Coordinating Committee, SNCC)
새로운 학생운동 단체가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조금 다른 접근방식을 취했다. SNCC라고 알려진(스닉이라고 발음한다)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는 1960년에 노스캐롤라이나주 랠리(Raleigh)의 한 모임에서 시작되었는데 비폭력 투쟁에 적극적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조직이었다.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의 대표 엘라 베이커(Ella Baker)는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와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가 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들에게 민권운동에서 더 큰 역할을 맡을 기회를 주기를 원했다.
학생비폭력운동조정위원회의 첫 번째 모임에는 거의 200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그들은 대부분 남부지역에서 왔지만 북부출신들도 일부 참석했다. 베이커가 개회 연설을 했다. “젊은 세대가 여러분과 제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참석한 성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우리의 게으름과 의심과 두려움을 잊고 진리에 대해 끝까지 헌신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2세는 그 다음으로 젊은 청중들에게 연설하면서 민권운동을 “흑인사회 성인들의 무감각하고 안일한 태도에 대한 반란”이라고 말했다. 모임의 끝에 참석자들은 임시로 조정위원회를 구성했다.
한 달 뒤에 학생지도자들은 베이커와 다른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와 인종간평등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모였고 다른 민권운동 집단들로부터 그들의 독립을 유지할지에 대해 표결을 하였다. 그해 말에 학생비폭력운동조정위원회는 상설의 독립된 조직이 되었다. 처음에는 인종간의 조직이었지만 몇 년 후에 바뀌게 되었다.

  • 사진: 흑인 학생이 체포되는 장면

역사 속의 한 장면: 경찰이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의 회원인 에디 브라운(Eddie Brown)을 1962년 조지아 주 알바니의 항의 집회 중에 체포했다.

  • 학습이해도 확인: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가 설립된 이유는 무엇인가?

학생비폭력운동조정위원회는 미국 민권운동의 비어있는 틈새를 채웠다. 민권운동의 핵심집단은 교회 지도자만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이제 젊은 활동가들에게도 우선순위와 전략을 결정할 기회를 주도록 변화되었다. 학생비폭력운동조정위원회는 더 직접적인 변화를 추구하며 더 오래된 대부분의 조직들이 옹호하는 점진적인 변화에 반대하였다.

로버트 모제스(Robert Moses)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은 로버트 모제스였는데 그는 하버드대학 졸업생이며 할렘(Harlem)에서 근무하는 수학교사였다. 민권운동이 발전함에 따라 그도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는 먼저 아틀란타 주의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에서 일했고 후에 미시시피주로 가서 농촌의 흑인들이 투표를 위해 등록하는 것을 돕기 위한 흑인과 백인 자원자들을 충원하는 일을 맡았다.
마틴 루터 킹 2세가 열변을 토하는 데 반해서 모제스는 더 조용히 말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생각을 모으는데 시간이 걸렀고 천천히 연설했다. 백인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토드 지틀린(Todd Gitlin)은 후에 모제스가 사랑받고 신뢰받은 이유가 "바로 그가 겸손하고 평범하며 사람들이 다가가기 쉬웠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지틀린은 모제스의 연설 스타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그의 요점을 손짓을 통해 표현하기를 좋아했는데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면서 시작해서 그의 손을 청중들을 향해 밖으로 내보여서 논점을 숨김없이 청중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내놓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말들은 그의 깊은 생각으로부터 어렵게 짜내는 것 같았다. 그가 말하는 것은 그가 노력해서 습득한 것이었다. 그가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그는 구석에 쭈그려 않거나 회의실의 뒤편에서 말을 했고 대중들의 소리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듣기를 원했다.” - 토드 지틀린
신선하고 새로운 사고와 밥 모제스 같은 강력한 지도자들과 함께 학생비폭력운동조정위원회는 민권운동에 참여하기 원하는 학생들을 위한 강력하고 생동감 있는 조직이 되었다. 투쟁이 격화되자 학생비폭력운동조정위원회는 강력한 힘이 되어서 많은 학생들이 그들의 신념을 위해 무엇이든지 감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사진 [로버트 모제스가 학생들과 이야기하는 모습]

역사 속의 한 장면: 로버트 모제스는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교육을 도왔다.
- 결론을 내리기: 왜 밥 모제스는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의 지도자가 되기에 적합했는가?


2과 평가
단원 이해도 평가
1. 전국도시연맹과 인종평등회의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기여한 역할은 무엇인가?
2. 킹 박사는 민권에 어떻게 접근했는가?
3.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는 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가?
4. 밥 모제스는 왜 영향력있는 지도자였나?

비판적인 사고와 글쓰기
5. 적절성을 결정하기: 사회변화를 가져오는 수단으로서 비폭력 저항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6. 명단을 작성하기: 1960년대의 학생으로서 당신은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 지역 지부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변화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회원들을 충원하는데 사용할 전술을 열거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