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과 대공황에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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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과 대공황을 이겨내기

학습목표
- 미국인들은 대공황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서로 협력했는가?
- 1930년대 초에 미국인들은 뭔가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무엇을 통해 알게 되었는가?

요점
미국인들은 대공황을 결연한 의지 뿐 아니라 유머를 통해 견뎌내었다. 그들은 서로 도왔고 해결책들을 찾았고 어려운 시기가 지나가기까지 인내하며 기다렸다.

핵심용어
- 페니경매(penny auction)
- 수정헌법 제21조

학습주안점
- 논지를 지지하는 세부사항을 확인하기: 이번 과를 학습하면서 큰 줄거리를 정리하시오. 로마숫자를 써서 대제목을 표시하고 대문자를 서서 소제목을 표시하고 논지를 지지하는 세부사항들은 숫자를 써서 표시하시오.
I. 미국인들이 서로 돕다.
A. 농부들이 함께 모이다.
1. 대공황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함께 일했다.
B. 젊은이들이 기차를 타다.
1. 젊은이들이 집을 떠나 더 나은 삶을 찾아나가다.


배경
대공황기를 살아갔던 사람들은 결코 그 시절을 잊을 수 없다. 경제가 다시 활성화된 지 오랜 후 이제는 매우 안락한 삶을 다시 회복한 사람들도 금방이라도 재정적인 위기가 닥칠 것처럼 동전 몇 푼까지 계속해서 아끼게 되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신용거래를 하는 것을 피하고 대신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해를 저축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모든 돈을 은행에 맡기기 보다는 매트리스 밑에 모아 두기까지 했다.


미국인들이 서로 협력하다
대공황기의 기억이 모두 부정적이고 낙심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다음 기사가 보여준다.
“미국인들 대부분은 아마도 우울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경제나 정부 정책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도 그들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정확하게 안다고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낙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패배했다는 생각이다.” - 언론인 제럴드 W. 존슨(Gerald W. Johnson), 1932년
전국적으로 사람들은 서로 돕기 위해 함께 협력했다. 이웃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들이 보기에 더 나쁜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도왔다. 한 여성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집 뒷문으로 찾아와서 배가 고프다고 말하는 많은 거지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돈을 주지 못했다. 나도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부엌으로 그들을 맞아들여서 먹을 것을 주었다.” - 대공황을 견뎌낸 키티 맥컬러크(Kitty McCulloch)
맥컬러크는 거지에게 그녀의 남편이 가진 정장 양복을 한 벌도 주었다. 그녀의 말이, 남편에게는 세벌이 더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 역사 속의 한 장면: 떠돌이 날품팔이 소년들(hobo)은 아래와 같은 상징들을 사용해서 각 지역에서 도움이 되는 정보를 서로 제공했다. 이 상징들은 보도나 울타리, 건물 등에 분필이나 석탄을 이용해서 쓰여 졌다.

- 추론하기: 이런 상징체계들은 떠돌이 날품팔이들과 노숙자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는가? 왜 그들이 서로 돕기를 원했다고 생각하는가?

농부들이 함께 모이다
농부들도 대공황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함께 일했다. 한 농부가 그의 농장을 담보로 한 대출금을 갚지 못하면 은행은 그의 재산을 차압해서 경매에 붙였다. 어떤 농촌에서 그 지역의 농부들은 몰래 함께 모여서 경매에서 낮은 가격에 낙찰되게 하도록 모의했다. 농부들의 이런 활동은 페니경매(penny auction)이라고 알려졌는데 농부들은 고통당하는 이웃들을 돕기 위해 은행이 경매에 붙인 공지와 농기계들에 입찰해서 단 몇 센트만을 써냈다. 낙찰 받은 사람들은 농장과 농기계를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줬다. 한 농부는 그의 마을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가 모인 이유는 순전히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대공황기에 모든 농부들은 그 사람을 더 오래 볼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들이 이기면 그들은 집과 생활수단을 (비록 일시적이지만) 되찾을 수가 있어서 그들이 안고 있는 부채를 갚을 수단을 얻게 되었다. 그들이 진다해도 그들은 더 나빠질 것이 없었다. 그들은 더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 해리 허글랜드(Harry Haugland)
1933년의 첫 두 달 동안 70차례의 농장에 대한 경매가 페니경매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농장에 대한 경매에서 페니경매 전략의 성공과 폭력의 위협 때문에 어떤 주 정부들은 농장에 대한 차압을 중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예를 들어 1933년 2월에 아이오와주의회는 “차압중지법(foreclosure moratorium law)를 통과시켜서 농부들이 부채를 상환할 시간을 더 얻도록 하였다.

젊은이들이 기차를 타다
대공황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많은 젊은이들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혹은 더 나은 삶을 추구하면서 그들의 집을 떠났다. 1930년대 중반에 대략 25만 명의 십대 청소년들이 길거리에서 살았고 불법적으로 화물기차를 타고 다녔다. 어떤 청소년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기차를 탔고 어떤 청소년들은 모험심으로 기차를 탔다. 16세에 집을 떠났던 클레런스 리(Clerane Lee)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나는 집에 머물러서 가족들과 함께 가난과 싸우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내가 떠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야 비로소 떠날 마음을 먹게 되었다. ‘나가서 자립해라. 나는 더 이상 너를 데리고 살 능력이 없구나.’” - 클레런스 리
짐 미첼(Jim Mitchell)도 16세에 집을 떠났다. 그는 떠나야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아버지가 직장을 잃고 가정을 부양할 수 없게 된 후 집안에 닥친 생활의 압박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가장 빠르고 손쉬운 길은 기차에 올라타서 어디론가 가는 것이었습니다.”
기차를 타게 된 젊은이들은 날마다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들은 기차와 관련된 부상을 입기 쉬웠고 경찰에 체포될 가능성을 안고 있었고 분노한 농부들의 총에 맞을 위험도 겪어야했다. 떠돌이 날품팔이들(hobo)이라고 불린 이들은 전국을 다니며 대공황의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기차를 탔던 많은 사람들은 그 때가 그들의 삶에서 가장 외로운 시기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대공황이 끝날 때까지 함께 도우며 그 시기를 견뎌냈다.

  • 심화학습: 문화

- 모노폴리(Monopoly): 대공황기간 동안 일상의 삶이 너무나 고달팠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의 문제를 잠시 잊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런 필요에 부응해서 펜실베니아주 저먼타운(Germantown)에서 살던 실업자인 찰스 B. 대로우(Charles B. Darrow)는 매우 흥미로운 보드 게임을 만들었다. 모노폴리라고 불린 이 게임은 사람들이 땅과 집과 호텔을 사고 같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에게 빌려주거나 사는 등의 환상적인 삶을 살아보게 해주었다. 대로우는 모노폴리를 보드게임 제작업계를 이끌던 회사인 파커 브라더스(Parker Brothers)의 중역에게 보여주고 그들이 제작할 의향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 회사는 대로우 게임의 설계가 52군데나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거부했다. 어떻게든지 이 게임을 성공시키기 위해 대로우는 오류들을 고치고 스스로 제작했다. 대로우는 금방 많은 게임세트를 판매할 수 있었기 때문에 파커 브라더스는 생각을 바꾸어서 제작에 동의했다. 이 게임은 1935년 출시되어 첫해에 바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때부터 약 5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 게임을 즐겼다.

  • 학습이해도 확인: 왜 수많은 젊은이들이 1930년대에 기차를 탔는가?


정치적인 해법을 찾음
상황은 이렇게 안 좋았지만 폭력적인 정치적인 변화를 요구한 미국인들은 거의 없었다. 유럽의 경우 경제적인 문제는 폭동과 정치적인 봉기를 가져왔지만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민주적인 절차를 신뢰했다. 한 작가는 다음과 같이 비꼬듯이 말했다.
“수천만의 실업자들이 여전히 법을 지켰다. 폭동도, 소요도 없었고 백만장자들을 해코지하는 일도 없었다. 이런 세상에.” - 윌리엄 사로얀(William Saroyan), 1936년
그러나 어떤 미국인들은 급진적인 개혁운동이 부가 더 공정하게 분배될 희망을 갖게 해서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해결책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공산당은 주로 지식인들과 노조원들로 이루어진 만4천명의 당원이 있었다. 1932년 선거에서 공산당 후보는 간신히 10만 표를 넘겼다. 혁명보다는 점진적인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요구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좀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1932년 선거에서 그들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만 토마스(Norman Thomas)는 881,951표를 얻어서 전체 투표자의 2.2퍼센트의 지지를 얻었다.
이러한 득표수와 당원의 숫자가 1930년대의 급진적인 개혁운동에 대한 주목할 만한 관심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이 시기에 서로 다른 집단에 속했던 미국인들, 학생들, 노동자들, 작가들, 예술인들, 모든 인종의 전문직 종사자들이 가장 긴밀하게 협력했었다고 기억한다. 그들은 스코츠버러 소년들의 사건과 같은 경우에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함께 일했다.

대공황기의 유머
미국인들은 대부분 이를 악물고 어려운 시기를 버텨내었다. 농담과 만화가 사람들의 이 고난의 시기를 견뎌내는 것을 도왔다. “후버빌”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농담이었다. 사람들 공원 벤치에서 웅크리고 낡은 신문지를 덮고 자면서 이것을 “후버 담요”라고 불렀다. 밖으로 끄집어내어진 빈 바지 주머니는 “후버 깃발”이라고 불렸다. 유명한 야구선수 베이브 루스(Babe Ruth)가 후버 대통령보다 더 많은 연봉 8만 달러를 요구해서 비난을 받자 그는 이렇게 농담을 했다. “저는 후버 대통령보다는 더 좋은 성과를 올렸거든요.”
사람들은 웃음으로 절망과 싸웠다. 1929년에 유머작가 윌 로저스(Will Rogers)는 이런 우스개 소리를 했다. “월 스트리트가 뒤흔들리니까 여러분들은 뛰어 내릴 창문을 찾기 위해 줄을 서야 했죠.” 두 사람이 창문 밖으로 서로 팔짱을 낀 채 뛰어 내리는 모습을 그린 한 만화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공동계좌를 가진 투자자들”


변화의 조짐
뒤돌아보면 미국이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던 때부터 대공황이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물론 대공황기를 고통스럽게 살아가던 미국인들은 언제 이 어려운 시기가 끝날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변화의 조짐들을 찾아보았고 1930년대에도 몇 가지 조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금주법이 철회되다
1933년 2월에 알코올성 음료의 판매를 금지한 수정헌법 18조가 통과된 지 15년 만에 의회는 금주법을 철회하는 수정헌법 21조를 통과시켰다. 이 조항은 그해 말에 비준되었다.
후버 대통령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금주법의 철회에 유감을 표시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한 사회적 실험을 끝내고 밀주로 이윤을 얻던 갱단들을 제재할 수 있게 되어서 이 법안을 환영했다. 알코올에 대한 통제권한은 각 주에 부여되었고 8개주는 계속해서 알코올성 음료의 판매를 금지했다.

  • 학습이해도 확인: 1930년대에 일부 미국인들은 어떤 정치적인 해결책을 추구했는가?
  • 정치만평 해석하기: 라이프(Life)지는 대공황기 유머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면서 1929년 송년호 만평에서 희망과 재앙을 이렇게 요약했다.

- 추론하기: 왜 미국인들은 절망과 싸우는데 유머를 사용했는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극적인 상징은 1930년 건축이 시작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었다. 이 새롭고 화려한 고층건물의 개발자인 존 J. 라스코브(John J. Raskob)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짓는 경쟁에서 승리했다. 2천5백에서 4천 명의 노동자들이 하루에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건축비용은 (토지 가격을 포함해서) 4천백만 달러였다. 대공황 때문에 예상 건축비용의 절반이 실제로 소요되었다
102층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1,250피트 높이로 하늘로 치솟아 있었고 꼭대기에는 비행선을 계류시킬 수 있는 기둥이 설치되어 있었다. 67개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1분에 1,000피트의 속도로 방문객들을 전망대까지 이동시켰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공식적으로 1931년 5월 1일 문을 열었는데 후버 대통령이 워싱턴 D.C.에서 단추를 눌러 빌딩의 조명을 켜서 뉴욕시의 스카이라인을 밝혔다. 개장한 첫 일요일에 4천명도 더 되는 사람들이 1달러씩 내고 꼭대기까지 올라가보았다.

한 시대의 종언
1930년대 중반에는 한시대가 끝나간다는 것이 분명하게 보였다. 1920년대의 상징들은 하나 둘 사라졌다. 1931년 갱단 두목인 알 카포네가 마침내 체포되어 탈세의 죄목으로 감옥에 갔다. 1920년대의 자유분방한 번영의 시대를 이끌었던 근면했던 전 대통령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가 1933년 1월 세상을 떠났다. 전설적인 야구선수 베이브 루스가 1935년 은퇴했다. 한때 효율성을 대표하며 존경받았던 자동차왕 헨리 포드는 대공황기의 노동정책 때문에 노동계의 가장 큰 적이 되었다.
1932년 항공계의 영웅이었던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와 앤 머로우 린드버그(Anne Morrow Lindbergh)의 어린 아들이 유괴되고 살해되어 전국을 경악하게 했다. 이 비극은 어떤 면에서 미국의 우울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1920년대에 최고조에 달했던 활력과 영웅주의의 종말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 역사 속의 한 장면: 위에 보이는 사람처럼 노동자들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완공하기 위해 일하면서 뉴욕시를 내려다보았다.

- 적절성에 대해 판단하기: 어떻게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희망의 상징이 되었는가?


3과 평가
단원 이해도 평가
1. 페니경매는 무엇이며 어떻게 사람들은 대공황기에 농부들이 고난을 극복하게 하기 위해 도왔는가?
2. 어떤 미국인들에게 금진적인 개혁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 이런 운동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참여는 당시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 일어났던 정치운동과 어떻게 달랐는가?
3. 왜 수정헌법 제21조가 통과되었는가? 왜 대공황기에 통과되었다고 생각하는가?

비판적인 사고와 글쓰기
4. 비교하기: 대공황기 미국인들이 보여준 정도의 협력과 인내를 찾아볼 수 있는 미국 역사상 세 가지 사건을 들어 보시오.
5. 의견을 제시하기: 위기의 시대에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 같은 고비용의 고층건물을 짓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이 건물에서 영감을 얻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건축을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