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과 워터게이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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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과 워터게이트 사건

학습목표
- 닉슨의 백악관은 정적들과 어떻게 싸웠는가?
- 재선위원회는 닉슨의 재선을 위한 선거운동에서 어떻게 활동했는가?
- 워터게이트 침입사건은 무엇이며 이 사건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 닉슨의 사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건들은 무엇이었는가?

요점
워터게이트 아파트 침입사건은 닉슨 대통령의 사임에 이르는 스캔들의 시작이었다.

핵심용어
- 도청
- 워터게이트 사건
- 특별검사
- 탄핵

학습주안점
- 세부사항을 찾아보기: 아래 웹형 도표를 옮겨 그리시오. 서너 개의 원을 그려 넣으시오. 본 과를 학습하면서 닉슨 대통령 시기에 미국이 중국과 소련과 맺은 관계에 대한 중요한 사실들로 각 원을 채워 넣으시오. 필요하면 더 많은 박스를 추가하시오.


배경
닉슨 대통령은 1972년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려고 마음먹었다. 압도적인 신임을 얻으면 그는 자신의 구상에 대한 의회의 동의를 얻어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열렬히 충성스러운 그의 참모들은 대통령의 재선을 보장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는데 몇 사람은 법을 위반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닉슨은 이들의 범법행위를 감추어 주려 함으로써 그 자신이 스캔들에 빠져들어 대통령직을 내놓게 되고 미국 정부의 기초를 흔들어 놓았다.
리처드 닉슨의 추락을 둘러싼 사건들을 세세히 기록하면서 저술가 시어도어 H. 화이트(Theodore H. White)는 아래와 같이 적었다.
“닉슨의 범죄는 단순한 것이었다. 그는 미국을 한데 묶는 신화를 깨뜨려 버렸고 그 때문에 그는 권력에서 쫓겨났다. 그가 깨뜨린 신화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미국 사회에서 최소 한 사람은 법질서를 준수하고 있고 그 사람은 대통령이라고 하는 것이다. 리처드 닉슨은 이 믿음을 져버렸다. 그는 자기에게 표를 주지 않은 사람들보다 자신을 지지했던 사람들을 더 배반했다.” - 시어도어 H. 화이트, ‘배신’에서


정치적 적들과의 싸움
닉슨의 의심 많고 비밀스러운 성격은 백악관이 마치 정적들로 둘러싸인 곳처럼 돌아가게 만들었다. 그의 참모들은 그의 정치적 입장을 약화시킬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어떠한 일도 서슴지 않았다.

  • 만평 [닉슨이 정적들의 명단을 추가하는 것을 풍자하는 만평]정치만평 해석하기: 이 1973년의 만평은 닉슨이 정적들의 명단을 만드는 것을 풍자하고 있다.

- 추론하기: 만평에 그려진 두 명단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가?

정적 명단
이러한 사고방식의 한 결과물이 ‘정적 명단’이라는 것이다. 백악관 변호사 찰스 W. 콜슨(Charls W. Colson)은 저명인사들 가운데 닉슨행정부에 우호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했다. 그 명단에는 에드워드 케네디(Edward Kennedy) 상원의원 등의 정치인들, 대니얼 숄(Daniel Shorr) 등의 기자들, 코미디언 딕 그레고리(Dick Gregory), 배우 제인 폰다(Jane Fonda)와 스티브 매퀸(Steve McQueen) 등의 연예계 인사들이 들어있었다. [839] 닉슨의 보좌관들은 이 정권의 적들을 어떻게 괴롭힐까를 연구했는데 그 한 방법은 이들에게 세무조사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도청
1968년에 닉슨은 법과 질서의 옹호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며 선거운동에 임했다. 그러나 그는 때때로 불법한 행위도 불사했다. 1969년에 누군가 국가안보위원회에 소속한 사람이 뉴욕 타임스에 기밀을 유출시킨 혐의가 포착되었다. 닉슨은 키신저에게 백악관 요원 몇 사람의 전화에 도청장치를 하도록 지시했다. 몇몇 기자들의 전화에도 도청장치를 했는데 국가안보를 이유로 이를 설치하는 것은 당시에는 합법적이었다. 그러나 이를 시초로 불법적인 도청을 하게 되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배관공
1971년 봄, 전직 국방부 직원인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가 베트남전쟁에 관한 장문의 국방부 비밀보고서를 뉴욕 타임스 신문에 제공했다. 1971년 6월 뉴욕 타임스는 이 자료를 가지고 기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소위 펜타곤 문서 사건이다. 이 문서는 과거의 미국 대통령들이 베트남의 실상에 관하여 의회와 미국 국민을 기만해왔음을 보여주었다.
닉슨은 엘스버그가 정부의 비밀정보를 유출하고도 아무 처벌을 받지 않음에 격분했다. 엘스버그 사건 이후에도 정부문서 유출이 계속되자 닉슨은 더욱 분노했다. 그때 그와 키신저는 한참 중국, 소련과 비밀회담을 진행 중이었는데 대통령은 이런 회담의 내용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닉슨은 정부문서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특별 백악관 팀을 구성하는 계획을 승인했다. ‘배관공들’이라는 별명을 얻은 이 그룹에는 스파이 소설가이며 전직 CIA 요원인 E. 하워드 헌트(E. Howard Hunt)와 전직 FBI 요원인 G. 고든 리디(G. Gordon Liddy)가 포함되었다. 1971년 9월 백악관 국내문제 수석보좌관인 존 얼리크만의 동의를 받아 이 비밀 그룹은 엘스버그의 심리치료사의 방에 침입했다. 이 배관공들은 엘스버그의 사생활에서 그에게 불리한 정보를 입수하여 이를 폭로해 유명해지기를 바랐다. 이들의 목적은 펜타곤 문서를 유출한 대가로 엘스버그를 벌하려는 것이었다.


닉슨의 재선 운동
1972년 닉슨의 재선 승리를 굳히기 위해 닉슨재선위원회(Committee to Reelect the President)는 유사하게 의심스러운 전술을 구사하였다. 선거운동을 지휘하기 위해 법무장관 직을 사임한 존 미첼을 우두머리로 삼아 재선위원회는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정치헌금의 수입보고를 의무화한 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위원회는 최대한 많은 금액을 모으고자 했는데 선거자금은 통상적인 선거 운동뿐만 아니라 국민 몰래 하는 부도덕한 행위에도 사용되었다.
재선위원회의 몇몇 사업은 좀 성가신 장난 수준에 머물렀으나 다른 것들은 꽤 심각한 것이었다. 1972년에 위원회 소속 몇 사람이 메인주 출신 민주당 상원의원이고 대통령 후보 중 한 사람이었던 에드먼드 머스키(Edmund Muskie)에 불리한 내용의 편지를 조작해서 이를 뉴햄프셔주의 보수계 신문에 유출시켰다.
이 편지는 머스키 의원이 뉴햄프셔에 거주하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고 비난하는 내용이었는데 그들은 편지가 뉴햄프셔에 예비선거가 있기 두 주전에 배달되도록 계획했다. 이 편지는 머스키의 부인이 알코올중독이라고도 주장했다. 보통 때 침착성을 잃지 않는 머스키는 편지내용이 보도된 후 TV에 나와 자제를 못하고 눈물을 흘려 결국 후보로서의 자격에 손상을 입었다.

  • 사진 [도청 장치 사진]이런 유형의 불법청취도구들은 후에 닉슨 행정부와 연관이 되었다.
  • 학습이해도 확인: 왜 언론의 정보유출이 닉슨을 분노하게 했는가?

이와 같이 닉슨의 정적에 피해를 입히는 비열한 공작으로는 민주당 선거운동 집회에 야유꾼들을 보내고 주요 상대의 선거운동본부에 첩자를 심는 등의 시도가 있었다.


워터게이트 침입사건
닉슨재선위원회 내에 첩보그룹이 있었다. ‘배관공’ 고든 리디와 하워드 헌트가 들어 있는 이 그룹은 몇 가지 별난 계획을 꾸몄다.
그 중 한 가지는 민주당 간부들의 전화를 도청하여 전당대회 대의원들에 관한 해로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재선위원회 위원장 미첼은 두 번이나 그와 같은 공작을 승인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것이 불법한 짓이어서가 아니고 너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결국 1972년 3월 그는 다른 계획을 승인했다. 그것은 고든 리디의 감독 하에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사무실의 전화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불법적인 장치를 하려는 첫 번째 침입 시도는 실패했다. 1972년 6월 17일 새벽의 두 번째 시도에서 다섯 사람이 체포되었다. 그 중 한 사람 제임스 매코드(James McCord)는 전 CIA 직원으로서 닉슨재선위의 보안요원으로 있는 사람으로 밝혀졌다. 그들이 지닌 돈은 재선위에서 나온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침입사건과 닉슨 선거운동의 직접적인 연계가 드러났다.
FBI가 워터게이트 침입자들의 자금 출처를 추적하자 닉슨은 CIA와 연락을 취했다. 그는 CIA로 하여금 이 사건이 ‘국가안보’에 관련되므로 FBI가 수사에서 손을 떼도록 설득할 것을 지시했다. 닉슨 대통령의 이 행동이 그를 결국 무너뜨리게 되었다. 그는 침입 계획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불법적인 은폐행위에 한 몫을 한 것이다. 침입사건과 은폐시도를 일컬어 ‘워터게이트 사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워터게이트 침입사건으로부터 몇 달 동안 대중들은 이에 대해 알지 못했다. 막후에서 백악관의 대통령 측근들은 사실을 감추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 사진[워터게이트 아파트 경비 프랭크 윌스의 모습]역사 속의 한 장면: 경비 프랭크 윌스(Frank Wills)가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아파트의 침입을 발견했다.

- 핵심주제를 찾아내기: 이 사건에 닉슨이 휘말리게 된 것은 무엇을 했기 때문인가?

  • 사진[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타임지 표지]1973년 5월의 한 타임지 표지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주모자들 몇 명을 보여주었다. 왼쪽으로부터 존 얼리크만, 존 W. 딘 3세, H. R. 홀드만, 제임스 맥코드 2세, E. 하워드 헌트, G. 고든 리디

1972년 여름 동안 닉슨 보좌관 H. R. 홀드만, 존 얼리크만, 존 미첼 등은 침입사건으로 형사피의자가 된 사람들을 돈으로 회유하려 애썼다. 그들은 수십만 달러를 쓰면서 그들이 입을 열지 않도록 노력했고 또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미첼과 다른 고위 측근들은 그들에게 법정에서 위증할 것을 코치했다.
선거에서 닉슨은 사우스다코타주 출신 상원의원 조지 맥거번(George McGovern)을 선거인단 수 520대 17이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누르고 승리했다. 맥거번은 민주당원들을 결집해 효과적인 선거운동을 할 수 없었고 많은 미국인들에게서 과도하게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닉슨은 그가 원한대로 권력을 유지하게 되었지만 공화당은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사건의 전개
닉슨이 선거에서 이겼으나 워터게이트 사건은 계속되었다. 워싱턴 포스트 같은 신문은 끈질기게 행정부 관리들의 연루를 파고들었다. 닉슨 대통령이 나서서 “백악관의 어떤 사람도, 행정부 내의 어떤 현직 관리도 이 매우 심각한 사건에 관련된 비가 없다”고 선언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워터게이트 재판
워터게이트 도적들에 대한 재판이 1973년 1월 존 J. 시리카(John J. Sirica) 판사 심리로 시작되었다. 피고인들이 모두 유죄를 시인하거나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 백악관과 대통령 자신이 점점 깊이 이 사건에 발을 들여놓았다. 1973년 3월 선고가 있기 직전 닉슨은 피고인 하워드 E. 헌트에게 “입막음 돈”을 주라고 허락했다.
선고할 시점이 되었으나 시리카 판사는 아직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판결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나는 아직도 미국 법원의 판사가 파악해야 할 사건의 내용이 만족스럽게 제시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나는 상원 위원회가 이 사건의 진실을 확인할 수 있도록 의회가 권한을 부여해 주기를 바랍니다.” - 존 J. 시리카 판사
침입자들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 시리카 판사는 최고 40년에 달하는 긴 형기를 선고하면서 이들이 상원 워터게이트 청문회에서 심문에 협조하면 형량을 감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 연표: 워터게이트 사건

1972년 6월 닉슨의 재선운동과 관련된 5명이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하려다 체포됨.
1973년 4월 닉슨이 침입에 대해 아는바 없다고 발표
5월 대통령선거운동에 관한 상원특별위원회가 청문회를 시작
6월 전 닉슨 보좌관인 존 딘이 닉슨이 은폐를 허락했다고 위원회에서 증언
7월 위원회는 닉슨이 1971년부터 대통령 집무실의 대화를 비밀리에 녹음해왔다는 것을 알고 닉슨에게 테입을 제출하라고 요구 닉슨은 거부함.
8월 특별검사 아치볼드 콕스가 테입 문제로 닉슨을 고소함.
10월 닉슨은 요약된 테입을 제출했으나 콕스가 거부함. 닉슨은 콕스를 해임하고 이후 토요일밤의 학살로 알려진 일련의 해임이 계속됨. 상원이 닉슨 탄핵의 절차를 시작함. 닉슨이 요청된 테입 중 2개를 제외하고 제출함.
11월 한 테입에서 19분 30초의 공백이 발견됨.
1974년 1월 닉슨이 행정부의 특권을 요청함.
4월 닉슨이 더 많은 테입과 관련 자료를 내놓으라는 명령을 받음. 닉슨은 1,254쪽의 편집된 녹취록을 제출. 특별검사 레온 자워르스키가 원본을 요구하며 닉슨을 고소함.
7월 대법원이 닉슨에게 테입과 자료를 내놓으라고 명령함. 하원 법사위원회가 탄핵을 건의함.
8월 닉슨이 그가 침입을 일찍이 6월 23일에 알았으며 은혜를 지시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녹취록을 제출. 닉슨이 8월 9일 사임함. 그의 사임연설이 텔레비전으로 방송됨.
- 연표를 해석하기: 조사가 진행되면서 닉슨이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 정보를 분석하기: 이 조사는 연방의 견제와 균형원리의 어떤 사례를 보여주는가?

우드워드와 번스틴
한편, 워싱턴 포스트지의 두 기자가 이 사건을 추적해 들어갔다. 젊고 열심인 밥 우드워드(Bob Woodward)와 칼 번스틴(Carl Bernstein)은 처음 재선위원회의 비밀자금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들은 정치적 간첩행위와 상대방에 대한 방해공작에 대해서 보도했다. 어떤 사람들이 관련 되었는지 알게 되자 이들은 존 미첼에게 확인을 요청했으나 그는 화를 내며 부인했다.

상원의 조사
그 앞서 1973년 2월 상원의 대통령선거운동 특별위원회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관한 조사를 시작했었다. 사건 피고 중 한 사람인 제임스 매코드는 자신에게 내려진 긴 형기에 반발하여 상원 위원회의 비공개 회의에 나가 증언했다. 그는 의원들이 사건의 전말에 관하여 희미하게나마 파악할 수 있게 하면서 닉슨 참모들의 관련을 암시했다. 우드워드와 번스틴의 기사들도 사건 수사에 일조했다. 위원회 소속 의원들의 제보로 두 기자와 다른 언론인들의 기사가 이어졌다.
백악관이 관련되었다는 소문이 난무하자 닉슨 대통령은 자신을 보호하고자 나섰다. 그는 1973년 4월 최 측근인 홀드만과 얼리크만을 사임시켰다. 전국 방영 TV에 나와 그는 “백악관은 어떤 사실도 감추지 않는다.”며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자신이 책임지겠노라고 선언했다.
조사는 계속 진행되어 1973년 5월 노스캐롤라이나주 출신 상원의원 샘 어빈(Sam Ervin)이 주재하는 상원 위원회는 TV 생중계 하에 워터게이트 청문회를 열었다. 수백만의 미국인들이 엽기소설 같은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을 보며 넋을 잃었다. 대통령의 개인 변호사인 존 딘(John Dean)은 처벌을 면하려고 닉슨이 사건은폐 공작을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다른 참모들도 백악관이 행한 불법활동들을 진술했다.

  • 사진 [워싱턴포스트 기자 칼 번스틴과 밥 우드워드의 사진]역사 속의 한 장면: 워싱턴포스트지 기자 칼 번스틴과 밥 우드워드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내막을 계속해서 추적했다.

- 원인과 결과를 인식하기: 그들의 기사는 공식적인 조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 1차 자료비교하기: 닉슨은 탄핵되어야 하는가?[[1974년 7월 하원 법사위원회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탄핵 문제로 토론했다.

- 탄핵에 대한지지: “헌법은 전적으로 완전한 것이며 축소되거나 파괴되어서는 안된다. 헌법의 기초자들은 의회에게 필요하다면 권력으로 부풀려져 전제적인 대통령을 제거할 권한을 맡겼다.” - 텍사스주 하원의원 바바라 조던(Barbara Jordan), 민주당
- 탄핵에 대한 반대“의회가 대통령을 제거하여 국민들의 자유를 지킬 신뢰를 받고 있으므로 의회는 이 신뢰가 남용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나는 대통령이 확실한 범죄행위를 했다고 믿을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미시간주 하원의원 에드워드 허치슨(Edward Hutchison), 공화당]

가장 극적인 순간은 전직 대통령 보좌관 알렉산더 버터필드(Alexander Butterfield)가 대통령 집무실의 모든 회의와 전화 통화를 기록하는 비밀 녹음장치가 있다는 사실을 증언했을 때였다. 이 장치는 닉슨 대통령 정부의 역사적 기록을 남기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제는 닉슨이 은폐공작에 관여 했는지 여부를 밝히는 증거물이 되었다.

‘토요일 밤의 대학살’
자신의 무고함을 내보이려고 1973년 5월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 특별검사 임명에 동의했다. 특별검사는 법무부에 소속되지만 정부관리의 비행에 관해 독자적으로 조사활동을 벌인다. 하버드대학교 법학교수인 아치볼드 콕스(Archibald Cox) 특별검사는 즉각 백악관의 녹음테이프 제출을 요구했다. 닉슨은 거부했고 그가 이를 고집하자 대통령은 1973년 10월 20일 토요일에 특별검사의 해임을 명했다. 이에 따라 연쇄적으로 파면과 사임이 이어졌으며 이를 가리켜 ‘토요일 밤의 대학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위험에 처한 행정부
닉슨은 이제 심각한 곤경에 빠졌다. 그의 신임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콕스의 해임 직후 타임지는 “대통령 사임 불가피”라고 선언했다.
콕스에 이어 특별검사를 맡은 텍사스 출신 레온 자워르스키(Leon Jaworski)도 테이프 제출을 요구했다. 닉슨은 자신의 무고함을 알리려고 백악관 대화 일부의 녹취록을 편집해서 공개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가장 불리한 부분을 삭제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 집무실 대화 일부의 편집된 발언내용을 읽으면서도 분노하고 환멸을 느꼈다.
한편 곤경에 빠진 백악관에 또 다른 이야기가 알려졌다.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이 소득세 탈세와 뇌물수수의 혐의를 받게 된 것이다. 1973년 10월 초, ‘토요일 밤의 대학살’ 불과 10일 전 그는 불명예 속에 사임했다. 애그뉴의 후임으로 닉슨은 하원 공화당 원내대표인 제럴드 포드를 임명했다. 상원이 포드 부통령을 인준하기까지 거의 두 달 동안 미국에는 대통령은 큰 곤경에 빠져있고 부통령은 없었다.

청문회가 시작되다
닉슨은 또 다른 행동을 취해야 했다. ‘토요일 밤의 대학살’ 이후 의회는 직무상의 비행으로 대통령을 탄핵할지를 결정하기 위한 청문회를 열고 있었다.
1974년 7월 민주당의원 21명과 공화당의원 17명으로 구성된 하원 법사위원회는 탄핵 요건 충족여부를 검토하기 위한 청문회를 시작했다. 이전의 청문회와 마찬가지로 이 논의도 전국 텔레비전이 생중계했다. 온 국민이 공화당 의원들마저 대통령에게서 떠나가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버지니아 출신 하원의원 M. 콜드웰 버틀러(M. Caldwell Butler)는 여러 의원들의 뜻을 대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미국인의 일생

- 바바라 조던: 1936-1996[바바라 조던은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태어나 격리된 공동체 안에서 살아왔다. 텍사스 서던대학교를 졸업하고 보스턴 대학에서 법학학위를 받았고 정계에 입문하여 여러차례 “최초”를 기록했다. 1966년 텍사스주 의회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상원의원이 되었고 1972년 텍사스주에서 선출된 첫 번째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하원의원이 되었다. 하원법사위원회 소속으로 워터게이트 청문회에 참여하였다. 1974년과 1976년 하원의원으로 재선된 후 1978년 정계를 은퇴하여 텍사스주립대학에서 정치윤리학을 가르쳤다. 조던은 1976년과 1992년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을 맡았다.]
“여러 해 동안 우리 공화당원들은 부정부패 반대운동을 벌여왔습니다. 그러나 워터게이트는 우리의 수치입니다. 우리 집 안에서 이 일이 벌어졌고 이제 이것을 청산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권력이 부패했습니다. 이는 미국 역사에 슬픈 대목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들은 바를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나는 이를 변명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고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 M. 콜드웰 버틀러 하원의원, 1974년
큰 표 차로 하원 법사위원회는 닉슨 대통령을 공무방해, 직권남용 그리고 의회의 녹음테이프 제출명령 위반으로 탄핵절차에 회부했다. 대통령을 해임하려면 하원 재적 과반수 찬성으로 탄핵재판을 결의하고 상원이 재판을 열어 재석 3분의 2의 동의로 유죄 판결해야 한다. 재판 결과는 자명했다.


닉슨 사임
1974년 8월 5일 약간의 지체가 있은 후 닉슨은 결국 대법원의 결정에 굴복해 테이프를 공개했다. 공개된 테이프에는 황당하게도 18분30초의 공백이 있었는데 이는 대화내용이 의문스럽게 지워진 것이었다. 하지만 테이프는 닉슨이 은폐공작에 관련된 분명한 증거가 되었다.
3일 후 닉슨은 TV에 출연해 다음날 대통령직을 떠나겠다고 고통스럽게 발표했다. 1974년 8월 9일 닉슨은 사임하여 미국 역사상 스스로 물러나는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바로 같은 날 헌법상의 승계절차에 따라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나라의 긴 악몽이 끝났다”고 그는 말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아직도 미국 정치사에 오점으로 남아있다. 정부의 관리들이 국민이 그들에게 부여한 권력을 남용했다. 대통령이 불명예스럽게 사임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자기네 정부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크게 상실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또한 나라의 헌법제도의 힘, 특히 권력 간의 균형을 입증했다. 행정부 요원들이 법을 집행하는 대신 위반했을 때 사법부와 입법부가 나서서 이들을 제지했다. 포드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헌법은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 우리의 위대한 공화국은 사람이 아니라 법이 다스리는 정부이다.”

  • 사진 [워싱턴을 떠나며 군중들에게 작별 인사하는 닉슨]역사 속의 한 장면: 이 유명한 사진에서 전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사임 후 워싱턴 D.C.를 떠나면서 군중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 결론을 내리기: 왜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사건인가?


3과 평가
단원 이해도 평가
1. 왜 닉슨은 정적명단을 관리했는가? 이 명단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2. 닉슨의 백악관 보좌관들이 도청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서술하시오.
3. 대중들은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닉슨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4. 워터게이트 사건 조사에서 특별검사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5. “토요일 밤의 학살”에 대해 서술하시오.
6. 탄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판적인 사고와 글쓰기
7. 문제를 제기하기: 당신이 탄핵청문회를 준비하는 하원법사위원회 위원이라면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묻고 싶은 세 가지 질문을 적어보시오.
8. 의견을 작성하기: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닉슨의 역할에 대해 평가하는 글의 개요를 작성하고 그가 사임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신의 의견을 진술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