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5.1.1. 자동차 산업의 구조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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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2차 오일쇼크와 세계 경기침체에 따른 수출부진, 10.26 사태로 인한 정치적 혼란 등으로 국내 경기가 어려워집니다. 여기에 국제금리의 상승으로 인해 중화학 공업화를 위해 조달했던 외채의 원리금 부담이 커지고 원유가 상승으로 외환보유액 유지가 힘들어지자 정부는 에너지 소비를 줄이기 위해 자가용 토.일요일 주유금지, 유가 인상 및 휘발유 특소세 인상, 자가용 차량에 대한 등록세 신설 및 자동차세 인상 등 자동차 수요 억제 조치들을 실시합니다. 이에 따라, 1976년 이후 자동차 수요 증가로 시설확장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던 자동차 업체들은 판매 급감에 따른 재고 누적과 가동율 저하에다 설비투자에 따른 금융비용까지 증가하면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되고 부품업체들이 도산하는 사태로 이어집니다. 1979년 20만대를 상회하던 완성차 생산은 1980년 12만대, 1981년 13만대로 급격하게 감소했고 가동율도 1980년에 완성차 업체 35%, 부품업체 40%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부품업계의 노동자 수도 1978년 8만 6,000여명에서 80년에 4만 1,000여명으로 반 이상이 감소하는 등 큰 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아래 표 4.1은 1979~81년 사이 자동차 산업의 수익율 감소가 국내 기계장비 산업이나 해외 자동차 업체들과 비교해서도 극심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표5.1. 1980년대 전후 완성차 업체의 수익성 지표 자료: 한국산업경제기술연구원 (1982, 175), 박이택 (2013)에서 재인용
구분 총자본 이익률 매출액 이익률
1979년 1980년 1981년 1979년 1980년 1981년
기아산업 3.3 -11.8 -13.1 3.3 -16.5 -16.9
새한자동차 3.5 -14.1 -13.9 2.9 -18.9 -19.6
현대자동차 4.4 -6.4 -4.7 4.3 -8.6 -5.5
아세아자동차 1.3 -4.1 -4.9 1.3 -5.5 -5
동아자동차 3.5 -8.2 -1.8 7.5 -15.8 -3.5
거화 8.2 1.1 18 5 1.5 13.6
평균 4.28 -10.38 -8.82 3.51 -13.0 -10.44
조립금속 제품 기계 및 장비 1.86 -2.94 -0.30 1.72 -3.11 -0.31
닛산 5.11 4.81 4.09 2.84 3.19 2.85
토요타 7.08 8.33 7.30 3.64 4.34 3.79
GM 8.98 -2.20 0.85 4.36 -1.32 0.53
Ford 4.97 -6.34 -4.60 2.69 -4.16 -2.77
대만 운송기기 업체 평균 4.50 3.60 4.20 3.7

1980년 8월 정부는 중화학공업의 중복 과잉투자 조정 시책의 일환으로 완성차 업체의 부실화와 부품업체의 도산을 방지하기 위한 8.20조치를 발표합니다. 이 조치는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협소한 내수시장에 비해 조립업체 수가 많아서 규모의 경제를 누릴 수 있는 경제생산단위 (30만대) 에 미치지 못해 국제 경쟁력이 낮고 수요에 비해 과잉생산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가동률이 낮다는 판단에서 완성차 업체들을 통폐합해서 차종별 전문 생산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골자로 합니다. 그 주요 내용은 1) 현대와 새한자동차의 통합으로 승용차 생산을 일원하하고 1~5톤급 상용차 생산은 금지하며. 2) 기아산업은 승용차 생산을 금지하는 대신 1~5톤급 상용차를 독점 생산하고 3) 5톤을 초과하는 트럭과 버스는 자유경쟁에 따라 모든 업체가 생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와 새한의 통합에 관해 새한 지분의 50%를 가지고 있던 GM이 현대와 동등한 투자지분과 경영권을 요구했고 통합 이후 발전 전략에 있어서도 현대와 GM이 이견을 보이면서 논란이 지속됩니다. 이에 정부는 81년 현대, 새한의 통합을 포기하는 대신 새로운 대안으로 승용차는 현대와 새한으로 2원화해서 경쟁체제를 유지하고 기아는 1~5톤급 트럭과 중소형 시장을 독점하고 또 기아와 동아자동차[1] 를 합병하고 기아의 모터사이클 부문은 대림산업에게 인계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2.28 합리화 조치를 발표합니다. 하지만 기아와 동아의 합병조치는 협상과정에서 국제환경의 변화로 82년 7월 백지화되고 특수특장차의 독점생산조치는 철회되어 경쟁체제가 됩니다. 결국, 1980년대 초의 합리화조치는 기아자동차가 1~5톤의 버스 및 트럭을 생산하는 대신 승용차 생산에서 배제되는 것으로 일단락 됩니다.

이런 합리화 조치는 업체의 경쟁을 크게 제약하는 한편 각 업체들의 발전형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합리화 조치에 의해 승용차 공급업체로 선정된 현대와 새한은 생산능력을 확충하고 해외 업체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등 중장기 발전계획에 착수하지만, 승용차 생산을 봉쇄당한 기아와 동아는 기존 설비가 유휴화되면서 막대한 경영 손실을 입게 됩니다. 이후 현대는 미쓰비시와 자본 합작을 맺고 기술 협력을 강화한 뒤 연간 30만대 규모의 공장 건설에 착수하고 1984년에는 마북리 연구소를 설립해서 독자 엔진 개발에 착수하고 새한의 한국 측 지분 50%를 인수한 대우는 1982년 GM으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하고 대우자동차(주)로 새출발 합니다. 1970년대 말까지 승용차 부문에서 업계 2위를 유지했던 기아는 승용차시장에서 탈락한 후, 1981년 기아기술연구소를 세우고 봉고를 출시해서 경영실적을 호전시킵니다. 이후 1983년부터 마쓰다와 수출전략형 승용차 개발에 참여 마쓰다와 이토추가 각각 8%, 2%의 자본참여를 하는 프라이드 생산공장을 1984년에 착공해서 향후 합리화 조치 해제에 대비한 승용차 생산을 준비합니다.

1982년부터 시행된 차종별 생산제한 조치는 1989년 자동차 산업에 대한 합리화 업종 지정조치가 해제되면서 철폐되고 기존 업체들의 생산차종이 확대되고 신규업체가 자동차 산업에 진출하는 등 구조재편이 다시 활발하게 이루어 집니다.

1980년대 초의 합리화 정책은 자동차 산업 내의 기업수와 경쟁을 제한해서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고자 하는 정책적 논리에 기반한 것으로 산업발전 초기부터 자동차 조립업체가 우후죽순처럼 난립해서 현재에도 12개의 자동차 업체가 있지만 대만과 한국보다 자동차 선진국이었지만 선진국의 직접투자업체, 합작업체, 독립기업 많은 업체가 난립해 오히려 발전정도가 낮아진 멕시코와 브라질의 경우를 반면교사로 삼은 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의도대로 자동차 산업이 일원화/독점화 되었다면 규모의 경제 효과보다는 독점의 폐단이 크게 노출될 수도 있었습니다. 전후 일본의 자동차 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가 다수의 기업이 경쟁을 통해 효율적인 생산체계를 설립하고 기술개발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1980년대 초의 합리화 조치는 결국 정부의 의도대로 합리화조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승용차 부문이 현대와 대우의 2원 경쟁체제로 유지되고, 승용차 생산에서 배제되었던 기아도 잠재적 생산업체로 승용차 생산을 준비하는 등 경쟁체제가 크게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잠재적 폐단이 감소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합리화조치가 논의되고 변경되는 과정에서 자동차 3사가 지불해야 했던 폐기시설의 규모는 엄청났고 기술도입 계약에 따라 생산하던 차종이 합리화에 묶여 생산이 중단되면서 계약불이행으로 기술도입업체로부터 신용을 잃게되는 등 많은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따라서, 1980년대 초의 합리화 조치는 규모의 경제라는 이름 하에 서열 2위의 승용차 생산업체를 승용차 부문에서 배제시키고 트럭과 버스생산을 독점화하는 과격한 국가개입 조치였습니다. 하지만, 서열 2위 업체가 자동차 기업간의 공정한 경쟁에서 도태된 것이 아닌 정부의 전격적인 결정으로 패자가 되고, 1위와 3위기업이 길지않은 기간이나마 시장을 양분하는 특혜를 누린 승자가 되면서 기업의 운명이 경제적 요인보다는 정치적 요인에 의해 좌우되는 나쁜 선례를 이어갔다는 점, 그리고 이로 인해 기업가들과 기업내 근로자들의 의욕이 크게 저하되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80년대 초의 시행부터 1989년의 정책폐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자동차 산업의 발전을 촉진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저해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1. 1954년 버스생산 전문업체인 하동환 자동차 제작소로 출발한 후 주로 버스와 트럭, 지프 등 비승용차 부문에서 활동한 자동차 회사로 1967년부터 신진자동차와 제휴해서 버스와 지프를 생산합니다. 이후 1981년 회사명이 거화, 동아로 바뀌고 쌍용그룹에 인수된 후 쌍용자동차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