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2.2 적산불하, 원조 그리고 농지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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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1960년까지 한국 경제의 세가지 축은 적산 (vested property)과 미국의 Food-for-Peace 원조 그리고 농지개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45년에서 1948년까지 한국을 통제했던 미군정과 이후 이승만 정권은 1957년까지 적산과 원조 모두를 분배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적산 불하

적산은 미군정이 남한 정부 수립 이후 ‘한미 재정 및 재산에 관한 협정’을 통해 한국 정부에 넘겨준 일제의 공공 및 민간 자산을 지칭합니다. 김기원(1990)에 따르면, 이 귀속재산은 은행, 토지, 임야, 주택, 선박 등 다양했는데, 그 가치는 1948년 기준으로 남한 정부 지출의 9배에 달했고, 귀속공장의 수는 전체 공장의 1/4, 그 생산액은 공업 총생산액의 1/3이나 되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자산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당연히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 밖에 없었고 1949년 말 이를 위해 제정된 ‘귀속재산 처리법’은 귀속재산의 민간 불하 방침을 고수했던 미군정과 국유화/공유화를 주장하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해서 주요 기업들은 국영, 공영화하고 나머지 기업과 자산들은 민가에 불하하는 방식으로 불하의 범위를 제한합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던 귀속재산 불하가 재개되고 1954년 헌법이 중요산업을 국유화한다는 원칙을 사유재산 보호와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개정되면서, 거의 모든 산업의 기업체들이 1962년까지 점진적으로 민간에 불하됩니다. 이들 기업과 자산들이 매각되는 과정에서 입찰과 수의계약이 병행되었는데, 매각 가격이 자산의 실질가치보다 30에서 90%까지 낮게 설정되는 경우도 있었고, 불하받은 기업가들은 매입대금을 이자없이 10-15년간 점진적으로 납부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은행으로부터 이 기업들을 복구하고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자본을 대부받을 수 있었고 장비와 원자재 수입에 필요한 외환 또한 낮은 환율로 제공받는 등 많은 지원을 받았습니다. 장시원(2006)에 따르면, 귀속재산을 불하받은 사람들의 대다수는 미군정기 귀속재산의 관리인이었거나 일제시대에 기업을 운영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업가들이 귀속재산을 이용해 생산을 시작하면 국내산업의 보호라는 명목하에 외국상품의 수입을 제한하였고 동시에 다양한 세금 면제가 제공되기도 했기 때문에, 적산을 불하받는 것은 이후의 성공적인 기업활동을 위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박병윤, 1982: 91). 1961년 상위 10대 재벌들 중 7개 재벌이 적산을 불하받았다는 사실은 적산이 해방 후 한국의 기업가들이 탄생하는 기폭제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적산불하 과정에서 정치인과 관료의 유착이 있었고 입찰과 수의계약이 진행되는 과정이 불공정하고 부패가 개입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부를 축적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커지면서 4.19 이후 이런 부패구조 청산과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처리가 사회적 과제로 대두되기도 합니다. (김일영,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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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서 귀국한 이승만 환영회(http://kjtyulo.egloos.com/m/1983702)

경제 원조

분단 직후 1945년부터 한국전쟁 이후까지 지속된 미국의 경제원조는 당시 한국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외화수입원이었습니다. 장상환(1999)에 따르면, 해방 이후 1961년까지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원조는 경제원조 31억 달러, 군사원조 18억 달러였는데, 한국전쟁 직후 1953년부터 58년까지 미국이 제공한 군사원조를 제외한 민간원조는 연평균 2억7천만달러로 일인당으로 환산하면 매년 인구 일인당 $12정도의 원조를 제공한 셈인데, 이는 당시 국민총생산(GNP)의 15%, 전체 해외교역량의 80%를 차지했고 (Cole and Lyman, 1971), 원조가 가장 작았던 1954년의 경우 국민총생산에서 원조가 차지하는 비중은 11%였으며 원조가 가장 많았던 1957년의 경우 23%를 차지하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최상오 2005, p.362) 당시 원조는 미국정부가 금액을 할당하면, 그 금액에 근거해서 한국정부가 직접 물자를 수입하는 방식으로 제공되었는데, 대부분이 인도적 차원에서 한국민들이 생존수준의 소비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식품과 비료, 의류, 연료와 같은 소비재와 기본 공산품 충당에 사용되었고, 10% 정도만이 고정자본 형성과 같은 목적에 쓰였습니다.(Cole, 1980: 3). 하지만, 원조의 성격과 사용처에 관해 미국정부와 한국 이승만 정부간의 이견이 있었고 이로 인한 갈등이 상당했습니다. 당시 한국정부는 원조자금을 이용해서 보다 많은 자본재를 구매해서 당장의 소비안정보다는 미래의 성장을 도모하고자 했지만, 당시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원조의 최우선 목표로 삼은 미국 정부와 마찰을 빚었고, 결국 원조 제공자인 미국의 의지가 관철되게 됩니다. (최상오, 2009) 나아가 미국은 원조를 매개로 해서 한국이 금융긴축과 물가안정을 기조로 하는 금융정책을 펼치도록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 원조를 일본제품을 구매하는데 사용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일본경제 재건을 촉진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한국민의 반일감정에 민감할 수 밖에 없던 이승만 정부는 이에 반발했지만, 이 또한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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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KRA관계자 구호물자 전달, 1959.
자료: 국가기록원

그리고, 원조도 적산과 마찬가지로 당시 이승만 정부와 민주당(the Korea Democratic Party: KDP)이 배분을 독점했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기부와 원조 (또는 원조배분권)을 교환하는 거래가 성행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농지개혁

적산불하와 더불어 이승만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공표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합니다. 해방 당시 농민의 절반이 경작지가 없는 순소작농이었고 자기 땅이 있어도 그 규모가 너무 적어서 소작을 겸해야 하는 자소작농도 3할이 넘었기 때문에, 지주를 보호해주던 일제가 본국으로 철수한 이후 지주제가 그대로 유지되기는 힘들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양우진, 2016 p.35) 따라서, 농지개혁은 일제강점기동안 몰락한 소농들을 회복하고 토지소유의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정책이자 동시에 분단 직후 북한에서 농지개혁[1] 이 실시됨으로써 높아진 남한 농민들의 토지개혁에 대한 기대감에 부응하기 위한 정책이기도 했습니다. 농지개혁의 방식으로는 ‘무상몰수, 무상분배’, ‘유상몰수, 무상분배’,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세가지가 논의되었는데, ‘무상몰수, 무상배분’이라는 급진적인 방식을 택했던 북한과는 달리, 1950년 농지개혁법 개정법률을 통해 가장 보수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유상몰수, 유상분배’방식이 채택되고 그해 4월부터 시행됩니다. 개혁의 구체적인 방식은 지주의 농지 소유 상한을 3정보(약 3만㎡)로 하고 그 상한을 초과하는 농지는 정부가 유상매입한 후 유상으로 불하하는 것으로, 유상매입가격은 지주에게 평년작의 150%를 지가증권으로 지급하는 것으로, 초과농지를 매입한 농민은 30%씩 5년간 분할대금을 상환하는 것이 주요한 내용입니다. (이헌창 1999, pp. 379~380) 농지개혁법은 한국전쟁 전까지 대상 농지의 70~80%를 재분배할 정도로 순조롭게 시행되었고 해방 직후 농지의 65%를 차지하던 소작지는 51년 8%까지 줄어든 반면 자작지는 1945년 말 전체 농지의 35%에서 51년말에는 92%까지 늘어나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농촌경제연구원, 1989) 이 농지개혁법은 농지소유 상한을 설정함과 동시에 소작, 위탁경영 금지를 명문화함으로써 무상몰수나 무상분배를 지지했던 보다 진보적인 인사들의 주장을 일부 반영했고 동시에 상당한 규모의 소득재분배를 초래함으로써 소득불평등도를 완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농지개혁이 비록 유상으로 이루어졌지만, 정부가 강제로 농지를 매수하는 과정에서 지주들이 손해를 본 경우가 많아서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유재산권의 원칙이 침해되는 경우가 많았고 농지소유 상한과 임대차 규제 조항은 농업경영구조를 영세화시켜 장기적으로는 농업의 생산성 발전을 저해한 측면도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학자들은 토지개혁을 통해 많은 소작농들이 처음으로 자신들의 땅을 경작하는 자작농이 되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 지주들의 부의 세습이 일정부분 단절되고 지주, 양반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지배층들이 경제적, 사회적 기회를 독점할 수 없게 하고 기회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공평하게 배분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농지개혁이 이후 남한의 경제발전과 사회구조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합니다. [2] 양우진 (2016)은 농지개혁으로 지주제가 해체되면서 일제시대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지주들의 경제력과 정치적 역량이 쇠퇴했고 이들이 이후 정부와 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을 제한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또, Amsden(1989)은 농지개혁이 농민들의 평균적인 소득을 높여서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기업들이 농업인구를 도시로 불러들이기 위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지불하게 하는 간접적인 효과가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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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앙일보 2008.08.27)

  1. 북한지역에서는 1946년 3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해서 한 가구당 최대 5정보의 토지를 배분했습니다.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해서는 박명림 (1996) 2권 4장을 참조했습니다.
  2. 농지개혁의 성과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쟁은 김일영(2006)을 참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