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2.3.3 금융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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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한국의 금융시장은 금융제도가 미비하고 사회의 전반적인 투명성이 낮고 위험수준이 높은 탓으로 인해 일반적인 금리가 매우 높았습니다. 그리고, 은행으로 대변되는 공적 금융시장과 비공식 금융시장(informal financial market)인 사채시장이 공존하고 사채시장 금리가 은행의 금리보다 월등하게 높은 전형적인 후진국형 금융시장이었습니다. 연구자들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당시 사채시장의 금리는 연리 48%~240%로 추정된 반면, 은행의 공금리는 법정 이자 상한선인 20%에 묶여 있었습니다. (이상철, 2014)

이에 더해 전쟁과 치안에 필요한 재정지출을 화폐발행으로 대체하는 정책으로 인해 물가상승율은 아래 표 1.4.에서 보듯이 해방 후 57년까지 최저가 23%에 달할 정도로 높았습니다.

표 1.4. 물가상승율 (단위: %) 자료: 한국은행, 한국의 금융 경제연표(2000)
1946 1947 1948 1949 1950 1951 1952 1953 1954 1955 1956 1957
생산자 물가 385.4 73.9 62.9 36.7 - - - 25.3 28.2 81.1 31.6 16.2
소비자 물가 280.4 78.9 58.4 24.9 167.5 390.5 86.6 52.5 37.1 68.3 23 23.1

따라서, 물가상승을 차감한 공적시장의 실질금리는 음의 수준인 상황, 다시말하면, 사람들이 저축을 위해 은행에 예금을 하면 예금금리가 물가상승율 보다 낮아서 나중에 돌려받은 돈의 실제 구매력이 저축하기 이전의 구매력보다 오히려 줄어드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국민들이 은행과 같은 공적 금융기관에 저축하기 보다는 계나 사채와 같은 비공식 금융시장을 주로 이용했고, 예금유치에 어려움을 겪은 시중 은행들은 대출수요를 예금으로 감당하지 못해서 중앙은행에 의존하는 만성적인 자금의 초과수요 상태가 지속됩니다.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를 제공하는 은행들에게서 자금을 빌리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높은 금리의 사채시장에 의존하면서 높은 금리부담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저금리 투자자금의 만성적인 부족과 그 원인이 된 비공식 금융시장 번성은 향후 한국 정부에게 큰 숙제가 됩니다.

이승만 정부는 재정부족과 시중은행의 자금부족을 화폐발행으로 충당하는 것이 물가상승의 주된 원인이고 한국에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와 같은 독립적인 중앙은행을 설립해서 이를 규제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지적에 따라 1950년 5월에 한국은행법과 은행법을 제정하고 같은 해에 한국은행을 설립합니다. 한국은행은 통화가치의 안정, 은행제도의 건전화를 도모한다는 포괄적인 목적으로 설립되어 자금에 대한 접근제한과 금리조정 등을 통해 은행과 여타 금융회사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게 됩니다. 또한 미국의 연방준비이사회를 모방하여 만들어진 금융통화위원회는 통화금융정책을 수행하는 최고 의사결정기구로서 한국은행 내에 설립됩니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통화정책과 관련한 완전한 독립성을 부여받지는 못하고 1961년 이후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 권한이 크게 축소되게 됩니다.

전쟁기간동안 발효되지 못하다가 1954년 시행된 은행법은 일반은행의 대출을 과도하게 규제함으로써 은행들이 제 역할을 하기 어렵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은행자본유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은행의 자본이 자산의 0.001%에도 미치지 못하는 등 여러가지 어려움을 유발하게 됩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시장체제를 보다 광범위하게 도입하고자 한 미국 정부 지원에 따라 1954년부터 은행들의 민영화 작업을 시작해서 1957년 일반은행을 순수 민간은행으로 새롭게 출발시킵니다. 하지만, 소수의 기업이 정부가 불하한 은행자산을 집중 매입해서 은행들의 지배주주가 됨으로써 은행을 자신들의 사금고화하는 문제를 야기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