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2.3 한국전쟁 이후의 경제정책 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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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휴전 성립 후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은 전시 비상경제체제를 평시 경제체제로 회복시키고, 생산과 소비 등 경제활동 수준을 적어도 한국전쟁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전쟁 중 만성화된 인플레이션과 경제혼란을 극복하고, 산업부문 간 균형을 통한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이룩하기 위한 전략과 수단들이 동원되었는데, 이처럼 전후 복구와 경제안정을 추구한 기저에는 한국경제를 민간 주도하의 시장경제체제로 정착시키려는 미국 및 미국 주도하의 UN한국재건단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미국정부의 입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미국 경제 컨설팅 기관 네이산(Nathan) 협회가 1954년 2월에 제출한 전후 한국경제 부흥계획 최종 보고서입니다. 이 보고서는 전후한국경제 운영과 관련된 정책전략과 구체적인 정책방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 표 1.3.과 같습니다.

표1.3. 네이산의 한국경제재건계획 주요 내용 자료: 한국개발연구원(1995), p.152.
계획기간(미국 회계연도 기준) 1953/54~1958/59(5개년)
계획수립방법(전략) 균형성장
당면과제 ① 기본자원 부족
② 수출부진
③ 인구급증에 따른 수요급증
④ 행정 및 경제 운영기술의 부족
⑤ 악성 인플레이션의 만연
계획의 중점사항 ① 경제안정 기조하의 자유경쟁체제 구축
② 수출입 균형
재건 목표설정의 전제조건 ① 최단기간 내 전쟁피해 복구
② 실현가능한 복구계획으로 원조제공국의 원조 필요성 설득
생산목표
(자립수준을 한국전쟁 이전인 1949~1950년 경제수준으로 봄)
① 총생산 40% 증가
② 농업 35% 증가
③ 광업 5배 이상 증가
④ 제조업과 건축업 85% 증가 (총생산의 14% 점유)
⑤ 전력 3배 증가
주요 정책기조와 수단 ① 종합적 안정계획 수립과 강력한 시행, 조세증수와 정부 지출 감축, 신용억제 등에 의한 경제안정화
② 인위적 가격통제 지양, 재정금융 신용정책 실시, 수출입 물가안정을 위한 환율 단일화, 각종 임금의 시장가격수준 조정, 현물 지급제도의 대폭 감축 등에 의한 가격 메커니즘의 회복
③ 정부관리 기업과 민간기업의 합리적 분담과 민간기업의 발전, 인플레 수습과 가격체계 정상화로 민간부문의 경영합리화와 정상적 운영
④ 국내 산업의 수입의존도 감축, 효율적 수입 대체산업 육성
총 소요재원 총 소요액(A): 115억8천만 달러
국민총생산(B): 103억4천만 달러
원조 소요액(A-B): 12억4천만 달러

한국경제 관련 최초의 중기 계획인 네이산보고서에서 특별히 강조된 것은 가격 메커니즘이 지배하는 시장경제체제를 구축하고, 민간기업 부문의 역할을 점진적으로 증대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고 단기적으로는 강력한 안정정책을 실시하고 국내산업의 수입의존도를 낮출 수 있는 수입대체산업을 육성해서 무역불균형을 줄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런 시장화 정책의 일환으로 미국 정부는 해방직후 국유화되었던 은행들을 민영화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1958년 일부 은행들이 대기업들에게 매각되기도 합니다. 자유주의적 시장개혁, 통화가치 안정을 추구하는 미국의 의도는 동아시아 경제의 중심축을 일본에 두고 한국과 대만이 그 주변부이자 시장으로 역할하기를 희망한 미국의 동아시아 발전 전략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산업부흥 5개년 계획(1949년)을 필두로 종합부흥계획(1954년), 경제부흥 5개년 계획 (1956년) 등을 수립해서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기간산업을 건설해서 궁극적으로는 자립경제를 건설하고자 희망했던 이승만 정부의 의도와 자주 충돌하게 됩니다. 두 정부의 시각차이가 표출된 지점 중 하나가 앞서 지적했던 원조물자의 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정부는 원조물자가 정부의 부흥계획에 입각해서 도입되는 계획원조 중심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국정부는 재정안정과 민생문제 해결을 위한 소비재 중심의 비계획원조를 지지했습니다. 박태균(2004)에 따르면, 당시 인도를 위시한 제 3세계 국가들사이에는 냉전적 대립구도를 이용한 민족주의적 비동맹운동과 제 3세계주의가 성행했는데, 미국은 한국이 민족주의적 자립화를 지향하는 이런 운동에 동참하는 것을 특히 경계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소비재 위주의 원조를 고집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