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3.2 금융통제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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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에서 언급했듯이, 1960년대까지 한국은 높은 물가상승율과 상대적으로 낮은 은행권의 예금금리로 인해 저축율이 낮았고 이로 인해 만성적인 투자자금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1950년대말 미국의 정책변화로 주요한 자금원이던 무상원조가 차관으로 조달방식이 변화하면서 원리금 상환에 필요한 외화자금의 확보 또한 어려운 과제로 부상하게 됩니다.

1961년 박정희 정부는 은행을 통한 자본의 공급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금융회사에 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하여 시중은행을 국유화하고 이와 동시에 한국은행의 화폐금융정책에대한 권한을 재무부로 귀속시키고 금융통화위원회도 화폐금융정책의 운영 및 관리에 관한 사항만을 담당하도록 격하시킵니다.

이와 동시에 정권 수립 직후인 1961년 10월 18일에 개최된 정부와 민간기업인 간담회에서 외자도입에 있어서 정부의 지불 보증이 꼭 필요하고 자기자금 부족분에 대해서도 정부가 융자할 것을 건의한 (서울 경제신문 1961/10/31) 기업가들의 요구를 1962년 공포된 ‘차관에 대한 지불보증에 관한 법률’로 현실화 되는데, 이 법률을 통해 외자도입 사업에 한해서는 차관에 의해 건설될 공장을 담보로 정부가 지불보증을 제공하는 소위 후취담보에 의한 지불보증제를 도입합니다. 이를 통해 정부는 국내자본과 외자의 도입과 배분에 독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정부는 당시 계나 사채 등 음성적으로 유통되던 자금을 양성화해서 투자재원으로 조달하기 위한 여러가지 정책들을 시도합니다. 그 첫번째 시도는 1962년 6월 화폐단위를 환화에서 원화로 바꾸고 10환=1원으로 하는 화폐의 명목가치 절하 (denomination)를 단행한 화폐개혁입니다. 이는 쿠테타 이후 불안심리로 장롱 속에 숨겨져 있던 자금을 은행권으로 유입시켜 경제개발자금으로 양성화하려는 급진적인 시도였지만, 예상과는 달리 퇴장된 자금의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았고 그 마저도 개인소유의 자금이 아니라 법인 소유의 자금들이었습니다. 오히려 환화로된 예금을 동결하는 예금동결(deposit freeze)정책으로 인해 자금이 유통되지 못하는 신용경색과 이로 인한 경기침체 우려가 커지면서 시행 한달만인 7월부터 각종 완화조치를 통해 예금동결을 전면해지하면서 화폐단위만 원화로 바꾼 실패한 개혁이 되고 맙니다. 비공식금융시장의 자금을 투자자금으로 전환하려는 다른 시도로 기존에 공식금융시장과 비공식 금융시장의 경계에 놓여있던 무진회사 – 오늘날의 상호신용금고와 비슷한 일종의 신용협동조합(credit union) –들을 양성화하고 흡수 합병해서 국민은행을 설립하고 1961년부터 1971년 사이에는 지역금융 활성화를 위한 지방은행들을 설립합니다.

박정희 정부는 은행들의 예금, 대출금리도 직간접적으로 통제했는데, 1965년까지는 기업들이 부담하는 높은 대출이자율 부담을 줄여주기위해 정부는 저금리 정책을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저금리로 인해 저축이 억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금이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은 사채시장으로 흘러가 공적투자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에 정부는 시중의 자금을 은행으로 돌리기 위해 1965년 단일변동환율제도 시행 직후에 예금금리를 최고 연15%에서 연30%로 대폭 인상하는 금리현실화 조치를 단행합니다. 동시에 금리현실화에 따른 기업들의 금리압박이 커지지 않도록 대출금리의 인상은 상대적으로 억제함으로써 기업의 금리부담은 높아지지 않고 저축과 투자가 크게 개선되는 효과를 보게 됩니다. 은행의 저축성 예금은 1965년말까지 3개월간 약 50% 증가하였고 그 후에도 1969년 말까지 매년 2배씩 증가해서 GDP 대비 저축성예금의 비율은 1964년 말 2%에서 1969년말 21%로 상승하고 총 예금의 비중도 6%에서 29%로 대폭 상승합니다. 금리현실화정책은 변동환율제도 실시와 맞물려 외자도입 확대에도 기여하게 됩니다.[1]

이런 정부의 일련의 금융정책들은 기본적으로 박정희 정부가 금융을 기업의 성장을 촉진시킴과 동시에 자금원을 장악함으로써 기업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강력하고도 손쉬운 도구로 이용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업의 성장과 수출 증대를 위해 금융산업의 올바른 성장과 발전은 무시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일례로 1965년 금리현실화 조치 이후 대출금리 상승은 억제되면서 은행들의 예대마진 (예금금리와 대출금리간의 격차)이 거의 없거나 심지어는 대출금리가 예금금리 보다 낮은 역전현상이 발생합니다. 돈을 비싸게 빌려서 싸게 빌려주게 된 은행들이 대출할 때마다 적자를 보게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인데, 이런 예대금리 역전현상은 정부가 은행을 자신들의 자금대출 창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

마지막으로, 사채시장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정부 개입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1972년 8.3 조치는 기업이 진 모든 사채를 3년 거치 후 5년 분할상환조건에 월 이자율 1.35퍼센트의 채권 채무관계로 재조정하는 것을 골자로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반적으로 월 3.5%를 상회하는 이자로 사채를 쓰던 기업들이 8.3조치 이후 모든 사채를 3년동안 무이자로 쓴 후 4년째부터 5년동안 월 1.35 퍼센트라는 월등히 낮은 이자율에 갚아도 된다고 정부가 명령을 한 것입니다.[3] 이는 사채의 높은 금리에 시달리던 기업들에게는 당연히 희소식이었고 이듬해인 1973년에는 제 1차 오일쇼크로 유가가 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율이 큰 폭으로 신장합니다. 정부는 8.3 조치로 크게 위축된 사금융을 제도금융권으로 흡수하기 위해 73년부터 대한, 동양, 중앙, 한국 등 일곱개 투자금융회사를 설립하도록 허용하고 이들이 기업의 단기자금 공급원으로 기능하도록 합니다.

퍼즐 형태의 로고
8.3 사채동결조치 시행 후 국세청 앞에 내걸린 표어
자료: 시공미디어, 경향신문 (http://wonheebok.khan.kr/179)에서 재인용

하지만, 8.3조치는 정부가 민간인들이 자발적이고 합법적으로 체결한 계약을 무효화시키고 한쪽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다른 계약을 일방적으로 강요한 것으로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쿠테타를 통해 집권한 군사정부에서나 가능한 초헌법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업이 자신들의 잘못된 투자나 자금운용의 결과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잘못된 투자나 과도한 차입경영으로 인한 비용을 분담하는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됩니다. 8.3 조치의 경우 사채를 많이 쓴 기업일수록 더욱 큰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기업들은 차입경영으로라도 기업의 크기를 불리면 기업이 위험할 때 정부가 도와줄 것이라는 ‘대마불사’의 선례가 되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한국경제 발전기 동안 한국의 은행에서는 은행 본연의 기능 즉,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로 예금을 유치하고 기업들과 투자프로젝트의 신용도를 평가해서 적정한 금리로 대출을 함으로써 예금자의 자금을 생산적인 곳에 배분하는 생산적 기능을 수행하는 경험을 은행과 종사자들이 습득하고 축적할 기회를 박탈당합니다. 정부가 은행의 역할을 대신하는 소위 ‘관치’는 이후 점진적인 금융자유화 과정에서도 경제관료들의 인적 지배를 통해 지속되며 재벌로 대표되는 산업부분에 비해 금융부분이 낙후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됩니다.


  1. 하지만, 이 시기 외자를 도입한 상당수 기업들은 외자를 이권으로 생각해서 무분별하게 도입했고 그 자본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부실화됩니다. 제조업의 부채비율 (=기업의 총부채/기업의 총자산)은 1960년대 중반까지 100% 내외였으나 65년 금리현실화 조치 이후부터 급격하게 증가해서 1970년에는 400% 가까이 까지 상승합니다. 이에 따라 1969년 3월부터 부실기업 정리가 시작되었고 1971년에는 부도업체의 수가 200개를 넘어서는 등 홍역을 치르게 됩니다. 이 과정을 거친 후 박정희 정부는 이후 중공업화 과정에서 외자 의존도를 줄이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이 부채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버릇은 이 시기에 생긴 것으로 보이며 이후 우리 경제의 큰 골치거리가 됩니다.
  2. 예대금리 역전으로 은행들의 수지가 크게 악화되면서 1968년부터 72년까지 정부는 총 4차에 걸쳐 단계적으로 예대금리 역전을 해소하기 위한 예금금리를 인하합니다.
  3. 83조치를 위한 사채신고 과정에서 드러난 재미있는 사실은 신고된 전체 사채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 기업주가 자기 소유의 기업에게 빌려준 사채라는 점입니다. 이 ‘위장사채’는 당시 상당수 기업인들이 사채라는 명목으로 회사의 공금을 유용하거나 회삿돈을 빼돌려서 사채놀이를 하는 악덕 기업인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이때 발각된 일부 기업인들은 1973년 ‘반사회적 기업’으로 지명되어 자신들의 기업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기업의 경영상태를 보다 투명하게 외부에 공개하도록 강제하는 ‘기업공개촉진법’이 1973년에 발효되는 계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