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3.4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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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독일 루르 탄광지대 함보른 광산회사를 방문해 파독 광부와 가족들을 만나는 박정희 대통령 부부.
출처: 경향신문

1960년대 초, 한국은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되고 있었고,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사회간접시설 및 국가 기간산업, 투자재원과 기술을 확보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1950년대 후반까지 한국은 전후 복구 및 경제발전에 필요한 투자재원의 대부분을 미국의 무상원조에 의존했는데, 미국의 국제수지의 악화와 달러의 해외유출 급증으로 무상원조가 유상으로 전환되기 시작하면서, 한국정부는 다방면으로 원조 공여자를 포함한 새로운 투자자금 출처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61년 3월 18일 서독과의 기술원조협정을 체결하여 협력방안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1961년 12월 13일에는 경제원조까지 포함한 한․독 정부간 경제 및 기술협조에 관한 협정을 체결합니다.

이 기술원조 협정에 의거해, 독일정부는 한국의 기술훈련생(또는 직업훈련생)을 받기 시작했고, 광부 파독은 이 기술원조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간호사의 파독은 1950년대 후반부터 독일과 한국의 민간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서독의 지속적인 간호사 부족으로 대규모의 간호사 수요가 발생하자 정부는 1966년부터 정부대행기관인 한국해외개발공사에 간호사 송출을 전담시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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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60년대 한복을 차려입고 독일의 한 공항에 내린 파독 간호사들.
출처: 조선일보

파독 광부․간호사의 총규모는 광부의 경우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936명, 간호요원의 경우 1960년부터 1976년까지 총 11,057명이었습니다.

파독 광부․간호사들이 한국인들의 뇌리에 기억된 주요한 계기는 당시 자금원이 부족했던 한국 정부가 파독 광부. 간호사들의 임금을 담보로 독일로부터 상업차관을 성사시켰고 결국 이들의 피와 땀을 담보로 한국이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사실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61년 독일의 대 한국 상업차관은 한독 정부 간 경제 및 기술협조 의정서 (1961. 12. 13.)에 의거한 원조의 일종이었습니다. 이 의정서에 따르면 독일이 한국에 제공할 재정개발원조는 총 1억5000만 마르크로 이 가운데 7500만 마르크는 장기개발차관의 형식이었고, 나머지 7500만 마르크는 장기수출거래로 발생하는 청구에 대해 보증을 하는 형식으로 공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상업차관은 대규모의 고액설비를 한국업체에 연불수출하는 독일업체에 제공한 장기수출 거래신용으로 사실은 독일의 Hermes 수출보험공사가 보증을 섰고 독일부흥금융공사(Kreditanstalt für Wiederaufbau: KfW)가 자금의 공여자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따라서, 상업차관이 광부, 간호사들의 임금을 담보로 성사되었다는 주장은 당시의 급박한 상황과 이후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강조함으로써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발생하고 유지된 일종의 Urban Legend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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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더 지적해야 할 것은 파독 광부․간호사들이 고국의 가족, 형제들에게 보낸 송금액(remittance)입니다. 1965년부터 1975년까지 이들이 송금한 총액은 101,530천 달러라는 당시로는 엄청나게 큰 금액입니다. 특히, 1965~1967년의 송금액의 경우 당시 우리나라 총수출액 대비 각각 1.6%, 1.9%, 1.8%를 차지하는 규모일 뿐만 아니라 이처럼 송금으로 유입된 돈들은 수출과는 달리 이후 비용으로 지출되는 부분이 전혀 없는, 가득률이 100%의 순유입금이란 것을 감안하면 이들의 송금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