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3.5 국교정상화와 베트남 전쟁의 경제적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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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 박정희 정부는 제 1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해 자본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국제 신용도가 없는 상태에서 한국에 상업차관을 선뜻 제시하려는 외국 정부나 금융기관은 많지 않았고 당시 정부 또한 이를 효과적으로 추진할만한 인적․제도적․정책적․정치적 능력을 구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62년 통화개혁 실패와 1963년 흉작으로 인한 쌀값 파동, 개발에 따른 통화팽창과 수입수요의 확대 등으로 경제개발은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부에게 투자재원의 확보의 계기가 된 두 사건이 한일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방 후 정치적 혼란과 전쟁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던 한국과 달리 일본은 빠른 속도로 전후 경제회복과 성장을 지속해서 1960년대에는 자본을 해외에 제공할 수 있을 정도의 발전을 이룬 상태였습니다. 여기에다, 미국은 일본을 중심으로 한 반공벨트를 동아시아에 구축한다는 구상에 따라 이승만 정부 때부터 일본과의 국교회복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해외 자금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박정희 정부에게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는 매력적인 카드였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일본의 식민지로 착취당했던 기억이 생생한 당시에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는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이전의 정부들도 이를 감히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62년과 1963년 통화개혁과 내자 조달계획이 난관에 부딪히고 외자조달이 절실해지면서 정부는 물밑에서 진행되어 오던 한일 국교정상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65년 6월 격렬한 반대운동을 힘으로 제압하면서 기본조약을 체결하고 8월에는 국회에서 비준함으로써 한일 양국간의 국교를 정상화 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10년간 3억달러를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 지급받고 이외에 공공 차관으로 2억달러 그리고 상업차관으로 3억달러를 받습니다.[1] 이후 점진적으로 이 자금들이 유입되고, 상업차관을 이용해서 한국 기업들이 일본의 자본재를 수입할 수 있게 되면서 한국의 투자 자금 부족문제가 부분적으로나 해소되고 이후 한국과 일본간의 경제교역 구조가 성립되는 계기가 됩니다.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과 미국 존슨 대통령의 만남에서 공식화된 한국의 베트남 파병은 그해 10월 ‘맹호부대’와 ‘청룡부대’가 중부 베트남 해안지역에서 작전을 시작하면서 본격화됩니다. 이후 추가파병을 요구한 미국과의 협상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은 한국군의 장비 현대화, 한국군 파병에 따른 경비의 전액 부담, 파병된 한국군에 대한 처우 개선, 전쟁으로 형성된 특수(特需)에 한국 기업들이 참여하는 것을 보장하는 14개 조항의 '브라운 각서'에 합의합니다. 그리고 이 협정에 따라, 1966년 4월 ‘백마부대’가 추가로 참전하면서 이후 1973년 3월에 최종 철군하기까지 약 8년동안 한국군은 매년 4만 5,000명 정도가 베트남에 주둔하며 독자적인 작전을 실시하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정부가 약속한 1억 5천만달러의 개발차관 외에도 세가지 측면에서 한국의 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 첫번째는 미국의 대규모 파병으로 베트남에 생긴 거대한 신흥시장에 한국 기업들이 진출해서 얻은 수익입니다. 對베트남 무역으로 발생한 한국의 경제적 이득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총 2억 8천 3백만 달러에 달했는데, 그 중 9천 4백만 3천 달러는 상업 수출로 인한 것이었으며 총 매출의 3분의 2는 전쟁관련 물자의 수출로 인한 것으로 집계됩니다.

두번째는 서비스․건설 등 분야의 한국 업체들이 미국으로부터 계약을 수주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한국 업체들은 주로 물품수송, 세탁소나 유흥업체 등의 서비스 업종과 군사기지와 군사 용도의 건물의 건축과 교량 등의 토목공사 등 건설, 토목업에 주력했는데, 1972년까지 이들 업체로부터 송금된 외화 총 수입은 2억 3천 8백만 달러에 달했습니다.

퍼즐 형태의 로고
1964년 제1차 베트남 파병 때 장병들을 환송하는 부산시민.
대한민국 정부기록 사진집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6884.html)

세번째는 참전한 한국군에게 지급된 임금 중 본국으로 송금된 자금과 전사자, 부상자에 대한 보상금입니다. 당시 참전 사령부는 직접 군인들의 월급을 관리, 송금해서 저축율과 외환보유고를 늘여갔는데, 1972년까지 약 2억달러 이상이 송금되었고 그 중 40%는 은행에 저축되었습니다. 전사자나 부상자에 대한 보상금 또한 총 6천 5백만달러가 지급되었습니다.

아래 표 2.1.은 베트남 특수를 통해 어느 부분에서 얼마만큼의 수익이 발생했는지를 보여주는데, 1965년부터 72년까지 경상수입과 무역외 수입을 합한 전체 수익이 10억 2천2백만 달러이고, 수익 중 군인 송금과 기술자 송금을 위시한 무역외 수입이 72%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65년 당시 한국의 총 외환보유고가 1억 3천 8백만 달러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베트남 특수가 당시 경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퍼즐 형태의 로고
1968년 꾸이년항에서 하역작업을 지휘하는 파월 기술자. 베트남전 기간동안 매년 1만명이 넘는 기술자들이 베트남에서 활동했다.
1969년 보도사진 연감 (http://www.hani.co.kr/arti/SERIES/546/664555.html)
표 3.1. 베트남 특수 경제활동 수익 구성 자료: 신승권, 한국의 베트남 개입의 정치 경제적 의미, 1992, p.62
구분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누 계 비중(%)
경상수입 17.7 23.8 23.2 38 47.1 70.1 35.7 27.5 283.1 27.7
수출 14.8 13.9 7.3 5.6 12.9 12.8 14.5 12.5 94.3 9.2
물품군납 2.8 9.9 15.9 32.4 34.2 57.3 21.2 15 188.8 18.5
무역외수입 1.8 37.3 128.1 130.6 153.3 134.5 97.6 55.7 738.9 72.3
용역군납 - 8.3 35.5 46.1 55.3 52.3 26.5 9.2 233.2 22.8
건설군납 - 3.3 14.5 10.3 6.4 7.4 8.3 3.1 53.3 5.2
군인송금 1.8 15.5 31.4 31.4 33.9 30.6 32.3 26.8 201.5 19.7
기술자송금 - 9.1 33.6 33.6 43.1 26.9 15.3 3.9 166.2 16.3
특별보상지원 - - 4.6 4.6 10.8 15.2 13.9 12 65.3 6.4
보 험 금 - 1.1 4.6 4.6 3.8 2.1 1.3 0.7 19.4 1.9
합 계 19.5 61.1 151.3 168.6 200.4 204.6 133.3 83.2 1022 100

베트남에서 축적된 한국기업들의 건설․토목 기술 경험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중동 등 해외건설 사업을 통한 외화획득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군인을 포함한 베트남 진출 인력의 송금을 통한 은행저축과 외환 보유고의 증가는 1966년에 시작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에 도움이 됩니다.

1960년대 한국 경제는 한일 국교정상화와 베트남 전쟁 참전을 통해 전기를 마련합니다. 아래 표 2.2. 에서 보듯이, 1960년대 한국경제를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어 보면 후반(1965~69년)의 연평균성장률이 11.8%로 1960년대 전반(1960~64년)의 실질성장률 5.5%의 두배가 넘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표 3.2. 1965 전후의 경제성장율 비교 자료: 한국은행 경제통계 연보 1971년 1978년.
구분 1960~69 1960~64 1965~69 1970~75
GNP 8.6 5.5 11.8 8.8
제조업 생산 16 9.4 22.5 18.3

1960년대 후반기에 한국이 이렇게 빠르게 성장한 것은 앞 절에서 자세히 기술했던 수출지원정책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경제개발 초기 투자재원과 외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정부에게 한일 국교정상화를 통한 자본 유입과 베트남 특수가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제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그런 금전적 성과가 한국이 국교정상화와 베트남전 참전으로 짊어져야 했던 인적, 물적 부담 –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발생한 국론의 분열과 베트남 참전으로 인한 인명 손실 (한국군 5천 명 사망, 1만6천 명 부상, 고엽제 등 장기적인 후유증) – 과 민간인을 포함한 베트남 인명 손실 등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부담의 대가로 충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 국교정상화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이슈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일본의 자금지원이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은 한일 수교과정에서 관철되지 못합니다. 이로 인해, 이 협상은 오랫동안 굴욕적인 졸속 협상이었다는 비난을 받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