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4.1 중화학 공업화 정책 선언과 그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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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대구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제 2회 소년체전에서 학생들이 수출 100억달러를 기원하는 매스게임을 하고 있는 모습. 자료: 매일신문 (http://photo.imaeil.com/04_special/index.php?start=10&years=3 )

1973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중화학 공업화 정책추진을 선언하는데, 정부는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공업화 정책을 주도한 바 있기 때문에 중화학공업화 정책이 새롭게 제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작성과 집행을 통해 개발 정책을 주도한 경제기획원은 제 1차 경제개발계획을 작성, 집행하면서 경공업 중심의 정책을 입안했고 1차 계획의 성공에 힘입어 제 2차 5개년 계획(1967-1971)에서는 산업의 기초 소재 산업인 종합 제철과 석유 화학산업의 건설을 추진하기로 하는 등 중화학공업을 육성할 방안을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철강공업과 관련해서는 대규모 종합제철공장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석유화학 등 다른 공업분야에서도 여러가지 법률들을 제정해서 이들 공업들을 육성하고자 했습니다. [1]

하지만, 1973년 1월에 있었던 정책선언은 중화학공업에 초점을 맞춘 공업화 정책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것으로, 공업에서 중화학 공업의 비중을 1972년의 35%에서 1981년에는 51%로 끌어올리는 공업구조 고도화를 이루고 동시에 중화학공업 제품이 수출제품의 72년의 27%에서 81년 65%로 증가시키는 수출상품 고도화를 달성해서 수출 100억 달러, 일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1981년까지 이루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습니다.

이는 중화학 공업을 기간재를 국내에서 생산하기 위한 일종의 수입대체 산업으로 본 기존 경제기획원의 입장과는 달리 중화학 공업을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것을 천명한 것으로 열악했던 당시의 국내 기술과 자본 수준을 감안하면 기존의 입장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시도이자 입장 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 정부가 이런 야심찬 계획을 1973년 새해 벽두에 발표한 배경에는 노동 집약적인 경공업 위주의 수출전략에서 중화학 공업화 정책으로 전환해서 성공을 거둔 일본의 전례를 따라 다른 아시아 저임 후발국들의 추격을 벗어나 보다 고도화된 산업을 모색하고자 한 것과 1968년 1월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사건, 11월 울진, 삼척 무장공비 사건 등 북한의 무력 도발에 대한 우려와 베트남 참전에 대한 반성으로 닉슨 대통령이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의 힘으로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높아진 주한미군의 철수 가능성 때문에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을 육성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진국들 특히 후발 선진국인 일본은 중화학공업들 중에서도 공해유발적이고 노동집약적인 철강과 조선업이 사양화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당시 세계분업구조상 개도국이 중화학공업화를 착수할 수 있는 시기였다는 판단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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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학공업화의 일부로 건설된 여수화학단지 내 금호석유화학 공장 전경 자료: 뉴스토마토 2013년 4월 11일자 (http://www.newstomato.com/realtime/RealTimeDetail.aspx?no=353100)

수출산업으로서의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이 공식적으로 문서화된 것은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에서 작성한 ‘중화학공업화 정책 선언에 따른 공업구조 개편론’입니다.[2] 이 계획은 중화학 공업을 수출 산업으로 육성해야 하는 주된 이유로 막대한 자본재 투자가 소요되는 중화학 공업은 그 기술적 특성상 일정규모까지는 생산량을 늘일수록 제품의 생산비용과 가격이 하락하는 ‘규모의 경제’가 존재하는데 반해 국내 시장은 협소한 규모와 낮은 소득으로 생산비용을 충분히 낮출 정도의 규모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화학 공업은 수입대체산업으로 육성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3]

이 계획은 중점적으로 육성해야 할 업종으로 철강, 비철 금속, 기계, 조선, 전자, 화학 산업의 6개 업종을 지목하고 각 업종별 세부적인 추진 목표와 계획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중화학 공업의 수출 산업화를 정책 기조로 표방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노동집약적인 조선과 전자산업은 우선적인 수출특화 산업으로 기초 소재를 공급하는 철강 및 비철금속 산업은 공업화에 따른 내수 수요를 충족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산업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술수준이 선진국에 비해 낮은 기계산업의 경우, 수출경쟁력이 미약하므로 단기적으로는 수입대체를 목적으로 육성하면서 조선, 전자 등 다른 업종에 소요되는 부품을 전략제품으로 지정해서 육성하는 차별화된 개발 전략을 계획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야심차게 시작한 중화학공업정책은 정부가 공장설립과 사업에 참여할 민간 기업들을 선정하고 세제, 금융 등 적절한 인센티브를 제공해서 구체적인 사업추진은 이들이 담당하도록 하는 방식을 통해 추진되는데 이는 공기업을 통해 직접 사업에 참여하거나 민간기업에게 계획의 수립과 자본조달까지 책임지게 했던 다른 개발도상국들과는 다른 독특한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은 여러가지 장점도 있지만, 중화학공업화의 경우 정부의 의중을 파악한 대기업들이 앞다투어 참여하면서 중복투자가 발생하는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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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옥포조선소 건설 이전의 옥포. 자료: 국가기록원, 사진 대한민국 조선산업의 부흥 (http://theme.archives.go.kr/next/photo/shipBuilding02List.do?page=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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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에 건설 중인 옥포 조선소. 자료: 국가기록원, 사진 대한민국 조선산업의 부흥 (http://theme.archives.go.kr/next/photo/shipBuilding02List.do?page=2 )



  1. 종합제철소와 석유화학 컴플렉스는 정부가 특히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인 사업이었는데, 이들 두 산업은 당시 한국의 열악한 기술 수준과 이들 공장 건설에 필요한 막대한 규모의 자본량으로 인해 거의 전적으로 외국의 기술과 자본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계획 수립 후에도 자본 조달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1970년과 69년에 이르러서야 착공될 수 있었습니다.
  2. 중화학공업 정책 수립과 추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오원철은 화공학을 전공한 전형적인 기술관료로 중화학 공업은 처음부터 규모의 경제를 활용할 수 있도록 수출 산업으로 육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서 이후 기술관료들이 경제정책 수립의 전면에 나서는 계기가 됩니다. 오원철은 자서전에서1972년 5월 장기적으로 수출을 증진하는 방안을 물은 박정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각하! 중화학 공업을 발진시킬 때가 왔다고 봅니다. 일본 정부는 제 2차 대전 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경제를 소생시키기 위한 첫단계로, 경공업 위주의 수출산업에 치중했습니다. 현재의 우리나라 사정과 같습니다. 그 후 일본의 수출액이 20억달러에 달할 때 중화학공업화 정책으로 전환했습니다. 이 때가 1957년도입니다. 그 후 10년이 지난 1967년에 일본은 100억달러의 수출을 하게 되었습니다.”(오원철 1999, pp. 457-458, 김성남 & 박기주 2013에서 재인용)
  3. 규모의 경제에 대한 정부의 집착은 이후 국내시장에서 기업들의 수와 경쟁을 제한하는 정책으로 귀결되고 결과적으로 국내시장에서 대기업들이 독과점 체제를 형성하는데 기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