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4.3.1. 포항제철(POSCO): 중화학공업화의 성공사례

Cefia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포항제철은 건설계획과 자금조달부터 건설과정, 그 이후 성장까지의 과정들이 1970년대 한국 경제가 직면했던 어려움과 그 극복과정을 응축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업의 쌀’이라고 불릴 정도로 공업화의 가장 기초적인 자재라고 할 수 있는 철강을 생산하는 일관제철 사업은 이승만 정부 때부터 한국 정부가 성취하고 싶어했던 핵심 산업이지만 제철소 건설과 운용에 필요한 기술이 전무한 상태였고 건설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을 마련할 방법 또한 마땅치가 않았기 때문에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집권한 후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설계 과정에서도 연산 31만톤 규모의 종합제철소 건설을 추진했지만 당시 차관제공을 담당하고 있던 AID측의 반대로 무산됩니다. AID가 종합제철소 건설을 반대하면서 제시한 이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한국은 철광석과 코크스탄등 자연자원이 빈약하므로 이를 수입해야 하는데, 이 때 필요한 외화 $3,500만 달러는 1961년 현재의 한국의 총 수출액 $4,200만 달러라는 점을 감안할 때, 감당하기 어렵다.
2)종합제철소가 건설된 후 생산능력이 50만톤에 이르게 되지만 현재 수요는 30만톤에 불과하다.
3)한국은 세계 철강시장에서 이웃나라 일본과 경쟁할 수 없다.
4)따라서 한국은 철강재를 생산하는 것보다 수입해서 사용하는 것이 유리하며 건설비 1억 5천만 달러는 한국에서 필요로 하는 다른 사업에 전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이에 따라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제철소 건설계획을 제외한 정부는 1967년에 다시 종합제철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연간 60만톤 규모의 제철소 건설을 추진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세계은행 연구팀이 AID와 같은 이유로 제철소 건설을 반대하면서 차관조달이 어렵게 되고 결국 백지화됩니다. 이처럼 난항을 거듭하던 계획에 돌파구가 마련된 것은 한일 국교 정상화 [1] 와 함께 일본이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으로 지급하기로 약속한 대일 청구권 자금을 종합제철소 건설에 사용하기로 합의하면서 부터입니다. 1969년 12월 한일 양국은 일본이 대일청구권 자금 7,370만 달러 (유상 4,290만 달러, 무상 3,080만 달러)를 3년에 걸쳐 공여하면서 5,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함께 제공해서 외자 1억 2,380만 달러, 내자 7,690만 달러 규모의 제철소 건설에 합의하고 1970년 연간 103만톤 규모의 제 1기 공장 건설을 시작해서 1973년 7월 준공, 포항제철 (POSCO: Pohang Iron and Steel Company)이 탄생합니다.

puzzle globe logo
모래가 날리던 포항 영일만 황무지에 건설중인 POSCO. 자료: 아시아경제 2012년 10월 22일.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102207364839769 )

공장의 규모가 67년 계획보다 오히려 늘어난 것은 일정정도까지는 생산량을 늘일수록 단위 생산비가 절감되는 규모의 경제라는 제철산업의 특성을 충분히 활용해서 생산단가를 경쟁력이 있는 수준까지 낮추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정부는 국내시장의 철강산업을 규제해서 포항제철이 국내시장을 거의 독점할 수 있도록 하고 대신 이 공장의 설립과 운영을 민간기업에 맡기지 않고 정부가 운영해서 가능한 낮은 가격에 철강을 다른 산업들에 제공하고자 했습니다. [2]

이후 포항제철은 제철과정의 공학적 지식과 공장의 운용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공장이 완공되기 이전에 597명의 대규모 연수인력을 공장의 매스터 플랜과 건설을 담당한 일본과 오스트리아에 보내 기술을 습득하게 함과 동시에 생산이 시작된 후 공장 내에서의 on the job training에도 집중하는데, 이후 이런 기술을 습득한 숙련공과 기술자들이 포항제철 운영의 핵심적인 인력이 됩니다. [3]

puzzle globe logo
1972년 10월3일 처음 생산된 열연코일에 고 박태준 포스코 초대 회장이 휘호하고 있다. 자료: 아시아경제 2012년 10월 22일.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102207364839769 )

1973년 생산을 시작한 포항제철은 당시 공장건설에 필요한 제반 시설마련부터, 세제 지원까지 아끼지 않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중화학공업 정책 추진으로 인해 빠르게 늘어난 국내 철강 수요 그리고 기술습득에 촛점을 맞추고 기술자와 숙련공들이 생산과정의 개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하는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정부의 예상을 뛰어넘는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POSCO의 빠른 성장에 주목한 미국의 금융 컨설팅 기업 페인 웨버(PaineWebber)는 POSCO에 관해 다음과 같은 리포트를 합니다.

Quite remarkable is the fact that POSCO has been profitable every year since it began production in 1973. In fact, in recent years, the company has had to resort to the use of accelerated depreciation and other accounting conventions to hold down reported profits….This profit record is all the more remarkable when considering,
- Major start-up and training costs has been incurred during this period.
- POSCO has provided steel at bargain price level to both its domestic and foreign customers (Amsden, 1989, p. 296)

이후 1977년에는 R&D 센터를 설립해서 품질개선을 위한 독자적인 연구개발을 시작하고, 1986년에는 캘리포니아 핏스버그(Pittsburg)에 있는 US Steel 공장의 현대화 사업에US Steel과 합작으로 UPI를 설립해서 미국에 최초의 해외법인을 낸 후, 2013년 현재에는 철강 생산량으로 세계 여섯번째, Fortune Global 500 리스트에서 전세계 177번째의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POSCO는 고품질 철강재 공급을 통해 조선ㆍ가전ㆍ자동차 등 국가 경제발전의 근간이 되는 주요 산업이 선진국 수준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특히 중화학공업에 투입되는 기초소재를 공급해 우리나라 경제구조가 1차 산업에서 2차 제조업 중심으로,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바뀌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뿐만 아니라 POSCO의 성장과정 – 정부의 적극적인 자본, 금융, 세제 지원과 자본재 수입 및 공장 설립과정에서의 기술 습득, 작업장에서 기술자와 숙련공들의 적극적인 개입, 이후 공격적인 R&D 투자를 통한 기술 개발 등 –은 중화학공업화를 통해 성장한 많은 한국 대기업들이 겪은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한.일 국교정상화는 동아시아에서 확대된 사회주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연합이 절실히 필요했던 미국, 5.16 쿠테타 이후 집권한 박정희 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과 경제개발을 위한 자본이 필요했던 한국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방위에 제 역할을 할 것을 요구받은 일본, 세나라의 이해가 맞물려서 1962년 기본적인 합의가 이루어집니다. 이후 2년간 비밀에 부쳐지다 1964년 발표되는데, 이에 반대해 야당은 즉각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전국을 순회하는 유세에 돌입한 데 이어, 대학생들도 3월 24일 서울대생들의‘한일회담의 즉각 중지’ 요구 집회, 5월 20일 서울 시내 대학생 연합의‘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등을 통해 거세게 반발합니다. 6월 3일에는 1만여 명의 시위대가 광화문까지 진출, 파출소가 방화되었으며, 구호도 굴욕외교 반대에서 정권퇴진 요구로까지 확대되는 등 박정희 정권 초기에 큰 정치적인 부담이 됩니다.
  2. 박정희는 이 기업의 운영을 같이 군에서 복무한 퇴역 장군이자 국영기업인 한국중석을 맡아 경영수완을 발휘한 박태준에게 맡기고 박태준은 이후 27년동안 포항제철을 맡아 기록적인 성장을 이루어낸 전설적인 경영인이 됩니다.
  3. 포항제철의 건설과정과 운용에서는 일본그룹 (Japan Group)으로 불린 일본 기술진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일본그룹은 포항제철 공장의 매스터 플랜 (master engineering plan)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각 공장의 공학적 구조와 기본적인 운용 매뉴얼도 제공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효율적인 제철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자본과 기술을 가져온 것은 포항제철로서는 건설과정에서 선진화된 제철과정을 도입할 수 있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