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4.3.2. 중화학 공업화의 사례 II: 자동차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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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현재, 한국은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국이고,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은 생산 댓수 기준으로 토요타, GM, 폭스바겐, 니산에 이어 세계 다섯번째 자동차 업체입니다. 자동차 부품업체로도 2012년 현재 현대 모비스 (8위), 현대 위아(38위), 만도 (48위) 등 다섯개 한국 기업들이 세계 100대 자동차 부품업체에 올라있을 정도로 자동차 산업은 한국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 한국 자동차 산업의 시작은 1962년 5월 자동차공업 보호법이 제정됨에 따라 외국의 자동차 및 부품 수입이 금지되고, 정부의 지원정책에 따라 경기도 부평에 현대식 승용차 제조공장인 '새나라 자동차공업(주)'가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회사의 이름을 딴 1,200cc급 엔진의 소형 승용차인 '새나라'가 생산되어 자동차 공학에 따라 제대로 만든 승용차가 등장했지만, 1963년 말 외환보유액이 바닥나 자동차 부품을 수입할 외화 부족으로 새나라 자동차공업은 신진공업 (한국GM의 전신)이 인수합니다. 1966년 신진공업은 신진자동차로 상호를 바꾸고, 1970년에는 일본 도요타 자동차와 기술제휴로 국산화율 20% 수준의 코로나, 크라운, 에이스, 퍼블리카, 랜드크루저 픽업을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1967년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에 의해 후발주자로 설립되어, 포드자동차와 기술협약을 맺고 1968년부터 코티나를 양산하고 있었고, 자전거 생산업체로 출발해서 1952년 기아산업으로 상호를 변경한 경성정공은 1962년부터 일본 마쓰다 자동차와 기술제휴를 통해 배기량 356CC의 3륜 화물차 K-360을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1965년 설립된 아시아자동차는 이탈리아의 피아트사와 제휴해서 피아트 124 모델을 1970년 3월에 처음으로 생산합니다.

1970년, 중화학공업화 추진을 준비하면서 기계공업 전반에 관한 조사를 수행한 정부의 보고서는 당시 한국의 자동차 공업 수준에 관해 아래와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한국의 자동차 제조회사는 삼륜차 메이커를 포함해서 4개 회사가 있었고 대부분의 주요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하는 조립 공장에 불과하였으면 이들 회사의 생산능력은 규모의 경제를 구현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는 못하였지만 수요에 비해서 생산량은 과다한 상태에 있었다. 또한 부품공업은 대부분 영세성을 띠어 자본 또는 생산면 (질과 양)에서 선진국과 비교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최영화 , 한국기계공업 육성방안 조사연구 보고서1970 pp. 214-215)”

이 보고서는 또 국내 자동차의 생산비용은 국내에서 생산된 자동차 부품의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오히려 동급차량의 국제 가격에 비해 매우 높았고 따라서 현상태대로 국산화가 진행되면 자동차산업의 가격 경쟁력은 더욱 나빠지므로 적극적인 국산화 정책을 시행하기에 앞서 자동차 부품 공장의 정비 강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규모의 경제를 누릴 수 있는 최적 양산규모를 서독 폭스바겐 공장을 모델로 해서 기계 가공 공장 기준 연간 50만대 수준이라고 보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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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포니가 생산되고 있다. 자료: 국가기록원 사진 대한민국 (http://theme.archives.go.kr/R/photo_contents/photo2012/gallery/9314000000/0014814131.JPG)

이 보고서의 지적에 기초해서 1973년 정부는 중화학 공업 선언에서 당시 2~3만대 수준이던 자동차 생산 규모를 1980년대 초에 50만대로 늘이고 동시에 1975년까지 자동자 부품을 완전 국산화하고 부품공업을 수출산업화 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합니다. 특히, 완성차 부문은 1975년까지 국산화율을 95%로 올리고 81년에는 7만 5,000대 규모의 수출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업체별로 2000달러 내외의 소형 승용차를 개발해서 5만대 이상 생산할 것을 업계에 요구합니다. 이 계획에서 정부는 채택된 업체를 국민차 생산업체로 지정하고 국민차 모델 1종에 대해 물품세의 ½, 자동차세의 1/3을 감면해 줌과 동시에 승용차 총 수요의 80%를 우선공급하게 해준다는 획기적인 지원대책을 제안했고 자동차 생산업체들은 이 국민차 양산시설 구축에 사활을 걸게 됩니다. 이를 위해, 포드와의 합작회사 설립이 무산된 현대는 자체 제작한 소형차를, 기아는 일본 동양공업(마쓰다), 신진은 독일 오펠사의 차형을 기본 모델로 생산할 계획으로 현대와 기아가 6,000만달러, 신진이 4,881만달러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해서 이 사업에 참여합니다.

기아자동차는 계획 참여 이전인 1970년부터 건설에 착수한 소하리 공장을 1973년에 완성하고 이 공장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마쓰다 엔진을 국산화 한 1,300cc 가솔린 엔진을 개발하고 1975년 마쓰다의 파밀리아에 기반한 소형차 브리사를 생산합니다. 현대는 기존 모델을 수입하는 대신 고유모델을 개발하기로 하고 이태리의 이탈 디자인에 의뢰해서 모델을 개발하고, 일본 미쓰비시와 차체 설계, 가솔린 엔진, 변속기 등에 대해 용역 및 기술제휴 협약을 맺은 후 1976년 울산 공장에서 1,200cc급 포니를 생산합니다. [1]

자체의 기술력이 없고 선진국과의 기술격차가 매우 큰 상태에서 고유모델을 개발하기로 한 결정은 큰 모험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고유모델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현대는 포니의 디자인 설계단계부터 국내 인력들이 참여함으로써 디자인 및 차량 세부설계기술을 경험할 수 있었고, 각종 생산에 관련된 기술도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설계작업은 주로 설계 전문회사에 위탁했지만 각 설계단계에서 현대의 기술자가 파견되어 공동작업을 수행했습니다. 일본 미쓰비시에 의뢰해서 건설한 현대의 울산공장은 자동차의 조립 단계에서 벗어나 엔진가공, 차체 제작 등 주요 부품의 자체제작과 함께, 단조, 프레스, 스탬핑 공장을 함께 거느리는 일관생산공장으로 건설되는데, 이 과정에서도 현대는 종합자동차 공장의 건설 및 가동을 위해 기술요원 200여명을 해외 기술제휴를 통해 기술연수를 받게 하는 한편 2000여명의 기능인력들이 단계별, 직종별로 생산과 관련한 기술훈련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이처럼 공장 건설과 자본재 수입 과정에서의 참여와 기술 연수를 통해 기술을 습득하는 방식은 앞 절에서 살펴보았던 포항제철의 기술습득 과정과 매우 유사한 한국 대기업들 특유의 기술 흡수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고, 이렇게 습득된 기술 및 기능은 이후 자동차 설계 및 생산을 독자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원천이 됩니다.

이로 인해, 한국 자동차 산업은 규모는 작지만 외국에서 생산된 자동차의 부품들을 가져와 단순 조립하거나 외국 자동차 회사의 하청공장이 되는 방식이 아닌 자체 고유모델을 일관 생산공정을 통해 생산하는 종합 자동차 공장의 외형을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고유모델을 개발하는 방식은 부품의 국산화율도 획기적으로 개선시키는데, 시제품을 출시할 때 이미 85%의 국산화율을 기록했던 포니는 본격적으로 생산이 시작된 1976년에는 국산화율이 90%에 도달합니다.

이후 정부의 각종 세제 감면과 경제성장에 따른 소득 증가로 자동차 수요가 급증하고 기아자동차의 브리사와 현대의 포니가 인기를 끌면서 자동차 생산량도 아래 표 3.9에서 보듯이 급증합니다. 포니는 1976년 중동, 남미 등에 1,019대가 수출된 것을 시작으로 해서 1978년에는 유럽을 포함한 42개국에 1만 8,317대가 수출되는 전략차종이 됩니다. 그리고 국내시장에서 현대는 시장점유율이 60%를 상회하는 주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2]

표 4.8. 1970년대 회사별 승용차 생산량 변화 추이 (단위: 대수, %) 자료: 오원철, 한국형 경제건설 제 4권, 기아경제연구소.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기아 & 아세아 489(3.83) 685(7.40) 10,202(55.45) 6,991(26.18) 10,548(23.98) 16,477(18.98) 22,140(19.50)
GM Korea 6,696(52.51) 1,565 (16.91) 2,559(13.91) 3,788(14.19) 4,270(9.71) 12,162(14.01) 18,430(16.23)
현대 5,426(42.55) 6,846(73.95) 4,722(25.67) 14,826(55.53) 27,466(62.45) 57,054(65.71) 71,744(63.17)
거화 140(1.10) 161(1.74) 915(4.97) 1,096(4.10) 1,697(3.86) 1,130(1.30) 1,250(1.10)
합계 12,751(100.00) 9,257(100.00) 18,398(100.00) 26,701(100.00) 43,981(100.00) 86,823(100.00) 113,564(100.00)


자동차 생산량이 급증하고 자동차 산업이 부흥하면서 정부와 자동차 기업들은 1981년도 생산목표를 100만대로 상향조정하고 생산시설을 확대하기 위한 대규모 추가 투자를 단행합니다. 하지만, 1979년 제 2차 오일쇼크가 발생하면서 유가가 폭등하고 정부가 부족한 에너지원 절약을 위해 자동차 수요 억제 정책을 펼치면서 자동차 수요가 곤두박질치면서 국내 자동차 생산업체들은 극심한 경영난을 겪게 됩니다. 이로 인해 자동차 산업은 80년 산업합리화 조치의 대상으로 지정되고 이후 산업의 구조적인 변화를 겪게 됩니다.


  1. 1972년 토요타가 한국시장을 떠나면서 신진자동차는 GM과 제휴, GM Korea가 됩니다. 하지만, GM Korea는 1973년 오일쇼크로 인한 판매부진으로 경영이 부실화되어 GM Korea의 신진자동차 지분을 산업은행이 인수하면서 회사명칭이 새한자동차로 바뀝니다.
  2. 당시 자동차 업체들의 국내 시판 가격은 정부가 제시했던 $2,000 가이드선의 거의 두배에 가까웠는데, 국산화에도 불구하고 국내 부품업체들과 완성차 업체의 생산성은 국제 수준에 비해서는 여전히 낮았고 해외 선진 메이커들과의 기술격차도 여전히 큰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시 현대 포니의 수출 가격은 국내 가격의 반정도로 낮은 가격으로 추진되었고, 수출 자체는 현대의 수익성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