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4.3 중화학 공업화의 성과와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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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이런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1970년대 전반에 걸쳐 중화학공업에 대한 투자는 급증해서 1979년에 누적 투자액 4.1조원을 기록했고 같은 해에 애초에 계획했던 생산 목표량을 달성하는 성과를 거둡니다. 투자 재원별 구성을 살펴보면 아래 표 3.3.에서 볼 수 있듯이 총 투자액 중 30.9%는 사업에 참여한 민간기업들의 자기자본으로 조달했고 외부 투자자금 중 61%를 국내자본으로 조달해서 외자의 비중을 애초의 계획보다 낮게 유지하는 성과도 거둡니다.


표 4.3. 중화학공업 투자실적 (1973~1979년) 자료: 김광모(1988, p.312)
구분 내자 (백만원) 외자(천달러) 합계(백만원) 자체자금(백만원) 자체자금 비율 (%)
시설투자 2,006,648 3,158,672 3,552,804 1,207,043 34.0
(철강) (601,319) (1,374,939) (1,268,164) (593,910) (46.8)
(비철금속) (113,634) (177,866) (199,447) (48,149) (24.1)
(기계) (150,067) (120,698) (208,605) (75,979) (36.4)
(조선) (492,750) (1,211,995) (1,095,357) (200,829) (18.3)
(전자) (452,394) (258,120) (577,521) (165,175) (28.6)
(화학) (196,484) (15,054) (203,710) (123,001) (60.4)
지원시설 200,737 200,737
기지조성 154,882 154,882 72,546 46.8
인력개발 71,214 56,395 98,565
연구개발 89,785 79,823 128,807
합계 2,523,266 3,294,890 4,135,795 1,279,589 30.9

중화학공업에의 집중적인 투자는 고용면에서도 효과를 발휘해서 1972~1979년의 기간 중 취업자 수는 연평균 4% 증가해서 1960년대에 비해 일자리가 더욱 빠른 속도로 증가합니다. 실업율은 1972년 4.5%에서 1978년 3.2%까지 하락했으며 이 기간 평균 3.9%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중동건설 붐과 함께 당시 지상과제로 제시되었던 수출 100억불을 1977년에 달성하고 처음으로 국제수지 흑자를 달성하기도 합니다. 아래 표 4.4.는 70년대의 경제성장과 고용 상황을 보여줍니다.

표 4.4. 1970년대 경제성장 및 고용 자료: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한국경제60년사편찬위원회 (2010)에서 재인용
GDP 성장률 GDP 수요부문별 성장율 고용
최종소비 고정투자 총수출 총수입 취업자 증가율 실업률 경제활동 참가율
1972 6.5 5.5 2.4 41.1 0.9 4.4 4.5 57.7
1973 14.8 7.7 26.3 55.4 36.7 5.4 3.9 58.4
1974 9.4 7.8 13.8 5.5 17.6 4.4 4.0 58.9
1975 7.3 5.8 9.5 20.0 2.9 2.4 4.1 58.3
1976 13.5 7.6 25.5 37.9 24.9 6.2 3.9 59.7
1977 11.8 5.7 32.6 20.2 20.7 3.2 3.8 59.4
1978 10.3 8.1 35.1 13.6 27.7 4.7 3.2 59.9
1979 8.4 8.1 9.6 1.2 12.1 1.4 3.8 59.5
1980 -1.9 1.2 -12 8.6 4.0 0.6 5.2 59.0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가장 큰 성과는 한국 경제가 노동집약적인 산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의 보다 선진화된 산업구조로 재편되었고 그 과정에서 국토의 여러 지역들이 특화되어 발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적자원의 구성과 그 관리방식 등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1970년 전체 수출의 10%를 조금 넘긴 중화학공업 제품의 비중이 1980년에는 40%로 늘어났고 이후에도 지속적인 증가세를 유지해서 2008년 현재에는 전체 수출의 90% 이상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림 각 부문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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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문별 노동자 수를 보면 농업에 종사하는 전체 피고용자의 비중은 1970년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라고 할 수 있는 50.4%에서 1980년 34%로 감소하고 중화학공업화가 지속된 1990년에는 그 비중이 17.9%로 떨어지는데 반해 2차산업 종사자들은 같은 시기에 17.2%에서 28.7%, 35%로 급격하게 증가합니다. 한국 산업구조의 이런 질적인 전환 속도가 얼마나 폭발적이었는지는 중공업화를 거친 다른 선진국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래 그림은 호프만 비율 (Hoffman ratio) 즉, 국가경제에서 경공업이 창출한 부가가치와 중화학공업이 창출한 부가가치의 비율을 계산한 것인데, 산업구조가 선진화되면서 호프만 비율은 자연적으로 하락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선진국들인 영국, 미국, 독일과 비교해보면 한국과 대만,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산업화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산업화 초기 호프만 비율이 한국과 유사했던 영국의 경우 그 비율이 1이하로 떨어지는데 거의 100여년이 필요했는데 유사한 변화가 일본의 경우 약 25년만에, 한국의 경우 60년대 중반부터 불과 15년만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림. 국가별 호프만 비율 추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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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집중 육성산업으로 지정되었던 조선, 철강, 화학 산업 등은 1980년 구조조정을 거친 후 지속적으로 발전해서 향후 한국의 기간산업이 되었고 공업화에 필요한 자본재를 도입하고 공장들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지식습득이 있었다는 점 등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괄목할만한 장단기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그 공과를 평가하기가 어려운 주제이고 아직도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정책이 아이러니하게도 반공을 국시로 한 박정희 정부가 시행한 가장 사회주의적인 – 계획경제와 유사한 방식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 정책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정책에 대한 비판도 정부가 정책금융과 세제 지원등으로 가격을 왜곡함으로써 자원의 배분을 왜곡했는지 그리고 은행의 역할 그리고 기업들이 해야 할 역할의 일부를 정부가 대체함으로써 유발된 장기적인 여파가 있지는 않았는지가 촛점이 되는데, 구체적으로는 주로 다음의 몇가지가 제기됩니다.

첫번째로 정부의 과도한 유인책과 세제, 금융지원으로 인해 대기업들의 과잉, 중복투자가 발생했다는 점입니다. 유정호(1991)는 1970년대 말까지 경공업에 비해 중공업의 자본 효율성이 훨씬 낮았으며 더 나아가 정부의 금융, 세제정책이 자원의 배분을 중공업 쪽으로 왜곡시켜 경공업의 투자재원을 잠식함으로써 제조업 전체의 투자 효율이 하락하는 부작용을 낳았다고 지적합니다. 현상적으로도 1975~80년 사이 기간동안 기계, 전기기기, 운동장비 등 업종의 가동율은 50% 정도에 머물렀는데, 이는 동기간 제조업 전체의 가동율이 70%를 넘었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낮은 것으로 당시 설비와 생산능력이 국내 및 수출 수요를 초과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 이런 낮은 가동율과 채산성으로 인해 중화학공업의 생산활동은 대체로 부진했고 결국 1980년에 중화학공업 투자조정과 산업합리화 조치가 취해지게 됩니다. 또 1970년대 후반 국내 물가가 빠르게 상승하면서 수출업체들이 비용상승으로 인해 수출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환율을 절하시킬 필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중화학공업화를 위해 들여온 외채의 원리금 상환부담과 중화학공업화에 필요한 원자재들의 가격상승을 우려해서 환율을 고정시키는데 이로 인해 1979년 수출경쟁력이 큰 타격을 입어 1960년 이후 처음으로 수출이 감소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두번째로 조윤제(1997)는 정부가 국민의 저축과 외자를 유치한 후 은행을 창구로 이용해서 관련 기업들을 지원하는 ‘관치’ 관행을 정착시켰고, 중공업계획에 참여한 기업들에게 시장보다 월등히 낮은 우대금리를 제공함으로써 1960년대에는 일시적이었던 예대금리 역전현상이 중화학공업지원금융에는 만성화되는 등 중화학공업을 위해 금융의 정상적인 발전을 희생시킨 금융억압(financial repression)이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중화학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전체 은행대출에서 정책금융이 차지하는 비중은 1966년의 13.4%에서 꾸준히 상승해서 1976년에는 전체 은행대출의 42.2%까지 올라가고 1981년까지도 31.7%라는 높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표 4.5. 예금은행 대출 중 정책금융 비중 추이 (단위: 억원, %) 자료: 한국은행, 경제통계연보. 각년도
1966 1971 1976 1981
총대출금 307 2,007 8,378 39,295
정책금융 41 568 3,532 12,437
일반금융 266 1,239 4,846 26,858
정책금융 비율 13.4 28.3 42.2 31.7

60년대부터 지속되어온 정부의 금융지배는 정부가 기업의 활동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규율할 수 있는 효과적이고 강력한 수단이었지만, 동시에 은행은 기업의 신용도와 위험을 평가하는 본연의 기능을 습득할 기회를 상실했고 이로 인해 지속된 금융산업은 후진성은 이후 한국 경제발전의 큰 장애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중화학공업정책은 재벌체제를 탄생시켰으며 이후 이들이 한국 경제를 지배하면서 여러가지 부작용을 낳았다는 점입니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중화학공업이 갖는 규모의 경제라는 특성상 중화학공업은 대기업에 유리했습니다. 박기주(2013)에 따르면 1970년대 제조업 투자의 75~80%가 중화학공업에 대한 투자였으며, 중화학공업 시설투자의 90% 이상이 대기업에 집중되었습니다. 이 기간동안 재벌기업들은 빠른 속도로 몸집을 불리는데, 1971년에서 1979년 사이 30대 재벌기업들은 202개는 새로 설립하고 135개의 기업을 인수함으로써 자회사 수를 303개나 늘입니다. 아래 표 4.6은 1974~78년 사이 재벌기업들이 얼마나 많은 중공업 관련 자회사들을 인수하거나 설립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표 4.6. Expansion of Chaebols during the HCI drive. Source: E.M. Kim(1987)
Chaebols Number of Affiliates Acquisitions in HCI
1974 1978
Hyundai 9 31 Automobile, machinery, iron and steel, shipbuilding, aluminum, oil refining, heavy electrical, heavy machinery
Samsung 24 33 Shipbuilding, general machinery, electric switching systems, petrochemicals
Daewoo 10 35 Machinery, automobile, shipbuilding
Lucky 17 43 Petrochemicals, oil refining, electronics
Hyosung 8 24 Heavy electrical, machinery, auto parts, petrochemicals
Kukje 7 22 Iron and steel, machinery
Sunkyung 8 23 Chemical, machinery
Samhwa 10 30 Electrical, machinery
Ssangyong 17 20 Cement, heavy machinery, shipbuilding, heavy electrical
Kumho 15 22 Iron and steel, petrochemicals
Kolon 6 22 Heavy electrical, petrochemicals

이 결과 아래 표 3.8에서 보듯이 경제의 집중도는 크게 상승해서 1981년 5대와 30대 재벌기업은 전체 제조업 매출의 23%과 41%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부는 중화학공업에 진출한 대기업 집단에 대해 재정, 금융을 포함한 다양한 특혜를 제공했습니다. 이런 특혜의 비용은 중화학공업화 정책에서 소외된 다른 기업들과 소비자들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대기업집단은 경공업, 중소기업 위주의 소외된 기업들과 소비자들의 희생 위에서 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표 4.7. 대기업 집단의 제조업 점유율 추이(단위:%) 자료: 이규억 이성순 (1985, p.97) 박기주 (2013)에서 재인용
1977 1978 1979 1980 1981 1982
5대재벌 15.7 15.9 16.3 16.9 21.5 22.6
10대 재벌 21.2 22.0 22.7 23.8 28.4 30.2
15대 재벌 25.6 26.2 27.1 28.1 32.6 33.9
20대 재벌 29.3 29.4 30.3 31.4 35.3 36.6
25대 재벌 31.9 31.9 33.0 33.9 37.7 38.8
30대 재벌 34.1 34.1 35.2 36.0 39.7 40.7

  1. 당시 과잉, 중복투자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그리고 낮은 가동율과 채산성이 중화학공업 정책의 실패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박영구 (2002)는 투자효율과 가동율이 낮은 것은 중화학공업의 특성상 나타나는 초기적 현상이며 당시 설비들은 수출을 목표로 한 규모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수출이 본격화되기 전인 초기 단계에서의 가동율은 상대적으로 낮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