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4.5 오일쇼크와 중동 건설 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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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가 급등해서 세계경제에 충격을 준 사건을 말하는 오일쇼크는 1973년과 1979년의 제 1차, 제 2차 오일쇼크가 있습니다. 제 1차 오일쇼크는 사우디 아라비아, 이란, 이라크 등 12개 중동 산유국들로 이루어진 OPEC (Organization of Arab Oil Exporting Countries) 국가들이 1973년에 있었던 아랍연합군과 이스라엘간의 10월 전쟁(October war or Yom Kipur War)에서 미국이 이스라엘에 무기를 지원한 것에 반발해서 석유생산량을 5% 감축하고 미국이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할 때가지 추가적으로 생산량을 5%씩 감축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발생합니다. 동시에 OPEC 국가들은 공급유가를 배럴당 $3에서 $5.11로 70% 인상하는데, 미국이 이들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1974년에는 초부터 유가가 배럴당 $12까지 치솟은 후 제 2차 오일쇼크까지 그 가격이 유지됩니다.

제 2차 오일쇼크는 1979년 호메이니가 이란의 회교 혁명을 성공시키면서 이란의 석유회사들을 국유화하고 석유 생산량을 하루 6백만 배럴에서 백오십만 배럴로 감축하면서 발생합니다. 이로 인해 배럴당 평균 $15선이던 세계 원유가격이 일년만에 $39.50까지 치솟게 됩니다.

오일쇼크는 석유가 원료인 화학산업과 자동차 산업 뿐만아니라 다른 관련 산업들의 비용을 증가시켜 물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예상치 못했던 물가상승으로 인해 금융시장이 크게 요동을 치면서 전세계 경제에 큰 충격을 줍니다. 오일쇼크로 인해 침체에 빠진 선진국들에서는 물가상승과 경기침체가 공존하는 현상을 일컫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오일쇼크는 석유 소비를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데, 특히 한국이 중화학공업화 드라이브를 추진하면서 과잉투자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발생한 2차 오일쇼크는 1979년 박정희의 암살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겹치면서 1957년 이후 처음으로 한국 경제를 불황에 빠트립니다.

하지만, 오일쇼크는 한국 경제에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는데, 60년대 이후 지속된 대규모 설비투자를 통해 경험을 축적한 한국의 건설업체들이 유가상승으로 부를 축적한 중동국가들에 진출함으로써 한국의 경기침체로 인한 충격을 부분적으로나마 흡수합니다. 중동 건설 붐은 1973년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면서 시작되어서 1975년부터 본격화되는데, 1차 오일쇼크로 외환보유고 유지에 어려움을 겪던 정부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중동건설 수주액은 1975년 7억5000만 달러에서 1980년 82억 달러까지 크게 늘어납니다. [1] 이 기간 중동건설 수주액 증가율은 동기간 GNP 증가율 7.2%와 수출증가율 25.0%를 훨씬 뛰어넘는 연평균 76.1%를 기록했는데, 1977년 당시 지상과제였던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하고 경상수지 흑자까지 기록한 것은 중동 건설 붐에 따른 달러 수입에 힘입은 바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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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진출의 효시가 된 삼환기업의 고속도로 건설 현장. 자료: cnews 2012년 9월 12일자 (http://www.cnews.co.kr/uhtml/read.jsp?idxno=201209121042034080481&section=S1N11)

실제로 76년과 77년 사이에 국내 투자율은 15%에서 27%로, 경제성장률은 각각 14%, 13%를 기록하면서 제 1차 오일쇼크로 인해 발생한 세계경제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견조한 성장세를 유지합니다. 중동건설 붐이 당시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은 노동시장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1970년대 중반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와 함께 중동 건설 붐으로 많은 건설노동력이 해외로 진출하면서 실업율은 1978년 3% 아래까지 떨어지고 노동자들의 임금이 크게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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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의 중동진출 신호탄이된 바레인 수리조선소. 자료: 한국경제신문 2008년 6월 12일자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805145737e)


중동 붐에 직접적인 건설부문은 노동자 부족으로 임금이 크게 상승해서 단위당 노동비용 – 특정 산업의 총 노동 관련 비용을 총 산출량으로 나눈 비율 –이 1975년에 40%, 1978년에 75%까지 폭등합니다. 아래 표는 당시 임금상승이 얼마나 빨랐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표 4.11. 물가 및 임금 상승률 (1972~1979년) (단위: %) 주: 노임단가 = 명목임금/취업자 1인당 부가가치
자료: 통계청, 국가통계포털. 명목임금은 노동부
소비자 물가 생산자 물가 명목임금(제조업) 노임단가(제조업)
1972 11.7 14.0 13.9 6.1
1973 3.2 6.9 18.0 11.5
1974 24.3 42.1 35.3 31.7
1975 25.2 26.5 27.0 24.3
1976 15.3 12.1 34.7 32.5
1977 10.1 9.0 33.8 21.3
1978 14.5 11.7 34.3 18.8
1979 18.3 18.7 28.6 21.2

중동 건설 붐은 단기간에 많은 외화와 일자리를 창출했지만, 1980년 이후 급격하게 그 수요가 감소했고 아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갑자기 유입된 외화와 임금 상승으로 물가 또한 크게 상승하면서 경제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높은 물가와 함께 불어닥친 부동산 투기 바람으로 주택가격이 급등하면서 상대적으로 빠른 소득 상승에도 불구하고 근로자들의 불만이 고조됩니다.



  1. 중동 특수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기업 중 하나가 현대입니다. 현대는 1975년 10월 바레인 아랍수리조선소 건설공사 수주를 시작으로 12월 사우디 해군기지 해상공사를 따냈고 76년에는 당시로서는 사상 최대의 건설 프로젝트였던 주베일산업항공사를 9억3000만 달러에 수주하는 개가를 올립니다. 1975년 중동 진출 이후 1979년까지 현대가 벌어들인 외화 수입은 6400만 달러에 달했으며 이는 회사 총 매출 수익 가운데 60%나 됐습니다. 이런 비약적 성장에 힘입어 현대는 1976년 미 경제전문지‘포천(Fortune)’이 뽑은 세계 500대 기업에 들어가고 79년엔 78위로까지 등재되는 기염을 토합니다. (동아일보 2013년 7월 30일자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의 그의 시대 기사 참조)
  2.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한 1977년에도 무역수지는 4억 7천만불 적자였지만, 중동 에서 벌어들인 외화가 대거 유입되면서 자본주지가 13억불 흑자를 기록한 것이 전체 경상수지를 흑자로 전환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