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4.7.1. 친기업, 반노조 정책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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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익의 대립 속에서 출범한 한국 정부는 노동 3권의 보호를 명시한 ‘헌법’을 제정하고 매우 진보적인 ‘노동 4법’ – 노동조합법, 노동쟁의 조정법, 노동위원회법 및 근로기준법 -을 6.25 전쟁 중에 통과시킵니다. 당시 정부가 서둘러 노동법을 통과시킨 것은 토지개혁과 마찬가지로 북한과의 체제 경쟁 속에서 노동자들의 이해를 반영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일제시대부터 내려오던 전근대적인, 강압적이고 추출적인 노사관계가 주를 이루었고 농업이 주를 이룬 농업중심 사회로 근대적인 작업장을 갖춘 기업군도 미처 생성되지 않은 상태여서 큰 의미를 가지기가 어려웠고, 노동관행을 규제할 수 있는 사법체계나 노동법이 제대로 지켜지는지를 관리, 감독할 수 있는 정부 조직 또한 미비된 상태였기 때문에 법은 법대로, 노동관행은 노동관행대로 따로따로 존재하는 후진적인 노사관계가 유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 체제를 표명한 북한과의 체제 경쟁과 6.25 전쟁이후 노골적으로 추진된 반공정책 등 한국의 특수한 상황은 노동운동의 자리찾기를 어렵게 하고 1960년 ‘한국 노동조합 총연맹(한국노총)’이 결성되지만 이 역시 뿌리깊은 파벌간의 대립으로 뚜렷한 조직적 성과를 내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립된 박정희 정부는 친기업, 반노조 정책을 명확히 하면서 포고령을 통해 노동관계법의 효력을 중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1962년 국민투표를 통해 공무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의 노동 3권을 제한합니다. 이후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 과정에서 노조를 통한 집단적 노사협상을 제한하는 대신 1961년과 63년의 법 개정을 통해 유급휴일제도, 퇴직금 제도, 노동시간 등에 관한 규제를 통해 직접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보호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섭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복수노조를 금지하고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금지 조항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사용자의 부당 노동행위에 대한 처벌 조항을 약화시키고 노동쟁의에 대한 사전 적법 여부 심사를 의무화시켜 합법적인 노동쟁의를 어렵게 하는 등 노조와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펼칩니다. 이런 정책의 결과로, 1960년대 이후 기업은 급성장하고 농업사회에서 산업화된 사회로 전환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빈곤에서 벗어나고 노동자들의 수도 크게 증가했지만, 노동관행과 노사관계는 여전히 전근대적이었고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특히, 섬유, 의류 산업, 가발제조 등 경공업부문의 가공산업 부문에서는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조건과 사용자들과 남성 중간관리자들의 인권유린 속에서 장시간의 노동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불만표시나 저항의 움직임에는 회사측과 권력기관으로부터 해고, 감시 등 보복이 가해졌습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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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이 일하던 1960년대 평화시장 내 한 공장의 모습. 좁은 공간에 작업대가 복층으로 꾸며져 ‘다락방’이라고 불렸다. 자료: 한국노동사회연구소 (http://www.klsi.org/content/40%EC%A3%BC%EA%B8%B0-%EC%82%AC%EC%97%85-%EC%86%8D%EC%97%90%EC%84%9C-%EB%8F%8C%EB%B3%B4%EB%8A%94-%EC%A0%84%ED%83%9C%EC%9D%BC%EC%9D%98-%EC%82%B6%EA%B3%BC-%EC%A0%95%EC%8B%A0

1970년 11월, 1일당 14시간의 노동시간을 10~12시간으로 줄이고 일요일에 격주가 아니라 매주 쉴 수 있게 할 것, 당시 70원에서 100원이던 시다공의 수당을 50%이상 인상할 것을 요구하며 청계피복노조 활동을 하던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안고 분신한 사건은 발전에 가려진 당시 한국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노동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급속도로 확산시켰고 노동문제에 대한 지식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노동운동에 대한 참여를 촉진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에 대응해, 정부는 1971년 12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곧이어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 조치법’을 공포해서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은 물론이고 단체교섭까지 주무관청의 조정을 받게 하고 1973년 ‘유신헌법’을 공포해서 노동 3권을 제한 또는 불인정할 수 있도록 합니다. 유신헌법 제정은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지식인, 학생들의 집단적인 반발과 함께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을 오히려 확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1973년 이후, 노조원은 해마다 증가하여 1978년에 100만명을 돌파하고, 유신체제 하에서 불법으로 규정된 노동쟁의 또한 매년 늘어서 1975~1979년간 연평균 109건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합법적 쟁의가 가능했던 1966~71년의 전체 파업건수인 66건의 7배를 훨씬 넘는 수준입니다. 이처럼 유신반대 운동에 나선 지식인들과 대학생들, 종교계와 연대하면서 진행되던 노동조합 운동은 1979년말 YH무역 사건[2] 으로 정치이슈화되고, 유신 종말의 도화선이 됩니다.

60년대부터 지속된 정부의 노조활동에 대한 탄압은 사용자와 노동자, 정부가 임노동관계와 관련된 여러가지 사회적 과제들을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경험을 쌓고 관련 제도들을 수립, 발전시킬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오히려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노동운동을 급진화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1960년대 말 청계천에서 재단사로 일을 하면서 보조일을 하는 어린 여공들의 낮은 월급과 긴 노동시간, 열악한 작업환경을 노동청과 동대문구청 등 행정관청에 진정했지만 묵살당한 후 전태일이 쓴 편지는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노동자들은) 1개월에 첫 주와 삼 주 2일을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썬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 버립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6년 전후의 경력자로써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한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권태억, 근현대 한국 탐사 (역사비평사, 2007) pp.398~400)
  2. 1979년 8월, 6~70년대 최대의 가발생산업체였던 YH 무역이 기업주가 회사의 공금을 유용한 후 폐업을 선언하자, 이에 반발한 여성 노동자 172명이 회사의 정상화를 요구하며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입니다. 이에 경찰이 치안상의 이유로 경찰 1천 2백여명을 신민당사에 투입해서 반발하는 야당국회의원들과 당원들의 저항을 뚫고 노동자들을 연행하고, 당시 신민당 당수였던 김영삼을 강제로 자택으로 연행, 구금합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 (당시 21세)씨가 사망하고 취재기자와 야당 당직자들이 부상을 당했고 이후 야당이 노동운동과 연계해서 반 유신투쟁을 벌이는 계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