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5.3.2. 정부와 재벌의 힘겨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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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금융시장 자유화가 점진적으로 추진되고 재벌들이 비은행 금융기관과 국내 및 해외 자본시장에서 자본조달이 가능해지면서, 은행을 통한 정부의 통제에서 자율권을 획득한 재벌과 정부의 힘겨루기가 시작됩니다. 정부는 1981년 시행된 ‘공정거래법’을 필두로 해서 1987년 출자규제제도와 여신한도관리제도에 이르기까지 여러차례의 법 개정을 통해 본격적인 재벌 규제를 시도합니다.

‘공정거래법’은 시장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가진 기업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남용하지 않도록 규제하고 부당한 공동행위나 내부거래를 제한해서 공정한 시장경쟁을 유도하기위해서 도입되었는데, 점진적으로 재벌에 의한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는 제도적 장치로 발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부가 시장을 대체하는 방식으로 성장했고, 1980년대에도 여전히 정부가 진입규제와 산업정책을 펼치는 우리 나라에 시장경쟁을 도입하는 것이 실제로 경제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고 따라서 공정거래법도 시장경제질서의 기본법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재벌의 경제력 집중에 대한 규제가 시작된 것은 1987년 출자규제제도와 여신한도관리제도의 도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신한도 관리제도란 재벌기업이 빌릴 수 있는 자금의 총한도를 정해서 지나치게 많은 돈이 재벌들에게 흘러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행된 제도이고 출자규제제도는 재벌 계열사들이 서로의 주식을 구매해서 투자를 하는 상호출자와 계열사들끼리 채무보증을 하는 상호채무보증을 모두 제한하는 제도로 재벌 총수와 그의 가족들이 소규모의 자본으로 많은 수의 계열사들을 통제하는 것을 제한하고 재벌들이 다른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계열사들을 부당한 방식으로 악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자규제조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재벌들의 독특한 출자구조를 보다 자세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재벌은 일반적으로 서로 무관한 여러개의 산업에 많은 계열사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계열사를 공고하게 연결하여 한 계열사가 경영이 실패했을 때 퇴출당하지 않는 구조를 구축해서 전체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계열사들을 연결하는 주된 방식이 한 계열사가 다른 계열사의 주식을 사들여서 자본을 대는 상호출자와 순환출자입니다.

공정거래법에 의해 규제를 받기 이전에는 재벌들은 둘 또는 여러개의 계열사들이 서로서로 다른 계열사들의 주식을 사들이는 상호출자로 계열사들간의 연결고리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두 기업이 서로 상호출자를 하면 재무제표상의 자본금은 늘어나지만 실제 두기업간에 돈을 주고받은 것에 불과하므로 이 때 늘어난 자본은 실제 자본이 아닌 일종의 가공의 자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공의 자본을 통해 계열사들의 자본금 규모를 부풀리면 부채비율을 실제보다 낮게 보이게 할 수 있고 따라서 재벌 계열사들 모두의 재무상태를 한꺼번에 나타내는 결합재무제표가 작성되기 전에는 재벌의 경영 상태를 파악하기 어렵게 됩니다. 상호출자는 이처럼 무한정 가공의 자본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1986년 공정거래법이 1차개정될 때부터 금지됩니다. [1]

순환출자는 재벌 가문이 실제 투자한 돈보다 훨씬 많은 기업에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기업을 통제하려면 그 기업 전체 주식의 50%를 조금 넘길 정도만 소유하면 해당 회사의 기계설비, 건물, 토지 등 물적 재산은 물론 경영이나 수익의 처분권까지 가질 수 있습니다. 순환출자는 이점을 이용하는데, 재벌 총수가 자신이 지배하는 기업의 자금으로 같은 재벌에 속한 다른 기업의 주식을 인수함으로써 다른 기업까지 함께 지배하는 방식입니다. 이해를 위해 상황을 극히 단순화해서 자본금 10억원인 기업 A, B, C, D, E사가 있다고 가정합시다(이 회사들에 부채가 없다고 가정하면 자본금=순자산). 재벌 총수는 먼저 5억원을 A사에 투자해 지배권을 획득합니다. 그 다음 A사가 B사에, B사는 C사에, C사는 D사에, D사는 E사에 각각 5억원을 출자하면 A사는 B사를, B사는 다시 C사를 지배하는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결과적으로 총수는 단지 5억원을 투자해 자본금이 50억원 상당인 다섯개의 기업들을 지배하게 되고 이에 더해 E사가 총수가 가진 5억원 상당의 A사 지분을 다시 사들이면(순환출자), 총수는 실제로 자신의 돈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다섯개 기업들 모두를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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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재벌의 순환출자 모형도
자료: 시사인live(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3901)


순환출자구조의 좋은 예가 바로 삼성그룹입니다. 삼성그룹 지배구조는 삼성에버랜드를 정점으로 해서 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 →삼성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입니다. 그룹 오너인 이건희 회장과 일가 지분이 극히 적은데, 주력사인 삼성전자의 경우 2007년 이 회장(1.91%)과 부인(0.74%), 장남(0.65%) 등 일가 지분을 모두 합쳐봐야 3%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 일가는 순환출자를 통해 삼성의 3대 주력 기업군이라고 할 수 있는 금융, 전자, 서비스 기업군 각각의 주력기업들인 삼성생명과 삼성전자 그리고 삼성카드, 삼성 에버랜드 모두를 통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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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삼성의 순환출자 구조
자료: 조선일보 (2007.05.18), “또다시 도마 위에 오른 삼성 지배구조”.

이런 순환출자는 모든 계열사가 연결되어 있어 한 주력 계열사가 도산하면 기업집단 전체에 경제적 위기가 닥칠 수 있는 위험도 있지만, 이를 통해 재벌 총수와 가족들은 기업을 통해 축적한 부 뿐만 아니라 경영권도 대를 이어서 이전하게 됩니다. 이렇게 국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재벌 기업들을 총수와 가족들이 별다른 견제장치 없이 독단적으로 운영하는 소위 ‘황제경영’을 함으로써 앞절에서 지적했던 여러가지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상호출자와 달리 순환출자는 명시적으로 금지되어 있지 않고, 총액출자제한제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규제하게 됩니다. 총액출자제도는 1986년 12월 31일 처음 도입되었는데 대규모기업집단 소속회사에 대해 당해 회사 순자산의 40%를 초과한 타회사 주식을 취득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순환출자의 고리를 약화시키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합니다. [2]

하지만 이런 정부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산업의 집중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고 금융자율화와 함께 재벌의 영향력은 점차 증대됩니다.

Koh (2012)에 따르면 정부가 재벌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정부가 재벌이 위험해지더라도 도와주지 않겠다는 점을 명확히 해서 재벌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고 동시에 이들 기업들이 경쟁의 압력과 퇴출의 위협, 그리고 인수합병의 위협에 노출되도록 하는 등 시장을 통해 재벌을 규율하는 방식과 자금조달, 채무보증, 소유지배구조 등을 직접적으로 규제해서 재벌을 통제하는 방식의 두가지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이 두가지 중에서 1980년대 중반 이후 정부가 택한 방식은 두번째였고, 이 방식이 정부가 원하던 효과를 거둘 수 없었던 것은 재벌이 파산할 경우 엄청난 경제적 비용이 발생할 것이고 정부가 이를 좌시하지도 않고 정치적으로 감당할 수도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강했기 때문에 다른 정책들의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실제로 외환위기 이전까지 재벌이 경제적인 이유로 파산한 적이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재벌들의 기본적인 행태가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1. 상호출자가 금지된 이후에도 재벌들의 상호 채무보증은 지속되었습니다. 상호 채무보증은 계열사 A가 은행에서 대부를 할 때 같은 재벌에 속한 주력계열사 B가 그 채무상환에 대한 보증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경우, 금융기관의 입장에서는 대출이 보다 안전해지고, 채무보증을 해주는 재벌의 주력 계열사에 대해 대출해 주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기 때문에 상호 채무보증을 통해 재벌계열사들은 상대적으로 손쉽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호 채무보증은 금융시장이 발달하지 못한 한국과 같은 상황에서 이 경우 A사와 경쟁관계에 있는 독립적인 기업이 있었다면, 그 기업은 계열사 B로 인해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 불공평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시장을 왜곡시킨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한국 재벌들의 경우, 재벌 계열사가 독립적으로 퇴출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A가 도산하는 경우는 재벌전체가 도산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고 이 때는 주력 계열사 B도 모두 도산되기 때문에 상호 채무보증은 올바른 채무보증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1992년부터 상호채무보증도 제한됩니다.
  2. 1995년 4월 1일에는 출자한도가 40%에서 25%로 축소되었다가, 1998년 2월 24일 외국인에 의한 적대적 M&A 허용과 이에 따른 국내기업의 경영권 방어 등을 이유로 폐지됩니다. 그러나 폐지 후 대규모기업집단의 계열사 간 출자가 증가하고 내부지분율이 크게 높아지는 등 폐해가 발생하자 불과 2년도 안 된 1999년 12월 재도입되어, 2001년 4월 1일 순자산 25%를 초과하는 다른 회사의 주식취득을 금지하는 내용으로 재도입됩니다. 하지만, 재도입된 후에도 축소, 완화와 재도입을 반복하다가 2009년 최종적으로 폐지됩니다. (자료: 서애경, 2012, 기업지배구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