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5.4.1. 금리자유화와 은행 민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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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자유화란 한 나라의 금리가 자금의 수요와 공급 즉 시장원리에 의해 결정되도록 한다는 것으로 은행들이 국유화되고 은행들의 금리가 시장의 자금수급 상황 보다는 정부의 여러가지 규제나 정책금융 등의 특혜금융으로 왜곡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80년대 이전까지 한국 정부는 기업들의 금융부담 상승을 우려해서 지속적으로 금리의 상승을 억제하고 그 부담을 금융기관이 지게하는 일종의 금융억압 정책을 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금리 정책은 여러가지 부작용을 초래했습니다. 자금의 공급이 제한된 상황에서 정책 우선순위가 높은 산업과 대기업들은 낮은 금리의 정책금융을 지원받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기업들과 일반 서민들은 사채시장에서 높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해야만 했습니다. 은행들도 예금금리와 대출금리 모두 규제된 상태에서는 새로운 금융상품 개발을 통해 예금금리를 높인다거나 대출기업에 대한 정보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해서 위험도에 따라 대출금리를 차등적용하는 등의 은행 본연의 기능을 등한시하게 되었고 은행들의 전반적인 경쟁력 또한 매우 열악한 상태에 머물렀습니다. [1]

1981년부터 지속된 긴축정책으로 인해 물가가 안정을 보이면서 금리 자유화 추진에 필요한 여건이 갖추어지자 정부는 그동안 금융기관들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낮게 유지했던 이자율을 자유화하기 위한 조치들을 추진하게 됩니다. 하지만, 기업들의 부채비율이 여전히 높은 상태에서 이자율이 상승할 경우 금융부담이 커진다는 우려 때문에 본격적인 금리 자유화는 쉽게 추진되지 못했고, 형식적인 금리 자유화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행정지도라는 명목으로 여전히 중앙부처에서 이자율을 관리하는 관행이 유지됩니다. 1988년 12월 정부가 대폭적이고 전면적인 금리 자유화 계획을 발표하지만, 1989년부터 물가가 불안해지면서 금리가 급격히 상승하자 다시 금리를 규제하면서 이 자유화 조치도 실효를 거두지 못합니다.

금리자유화에 비해 은행 민영화는 상대적으로 빨리 진행되어서, 1973년에 이미 민영화된 상업은행을 제외한 나머지 4개 시중은행들이 1981년 한일은행 정부보유 주식 매각을 시작으로 1982년 제일은행과 서울신탁은행, 1983년 조흥은행까지 모두 민영화되고 동시에, 은행의 자율성을 높이기 위해 내부경영에 대한 각종 규정과 통첩을 축소 또는 철폐됩니다. 민영화와 함께 은행의 공공성 확보정책도 동시에 추진되는데, 은행이 대기업의 사금고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982년 은행법을 개정해서 은행의 동일인 소유한도를 발행주식의 8% 이내로 제한했고 이 규정은 1994년부터 4%로 더욱 강화됩니다.

금융기관의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금융기관 진입장벽을 낮추어 새로운 시중은행들의 설립도 허용됩니다. 1982년 신한은행은 재일동포 기업인들의 출자로, 1983년 한미은행은 미국의 Bank of America와 국내 대기업의 합작으로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동남은행 (1989년), 대동은행 (1989년), 동화은행 (1989)이 설립되고 같은 해에 특수은행이었던 외환은행이 일반은행으로 전환됩니다. 이후 1990년대에 하나은행, 보람은행, 평화은행이 설립되고 국민은행이 일반은행으로 전환하면서 1990년대 중반에 시중은행의 숫자는 15개에 이르게 됩니다. 은행들의 업무영역도 확대되기 시작하는데, 은행들에게 신용카드 업무가 허용되고 이전에는 서울신탁은행이 독점하던 신탁업무가 1983년부터는 지방은행에게, 1984년부터는 시중은행에 허용되면서 은행들이 은행의 기존 예대업무 외에 다양한 신탁상품을 취급할 수 있게 되고 은행의 점포수도 1980년 556개에서 1990년에 1397개로 확대되는 등 외형적인 성장을 보입니다.

하지만, 민영화 이후에도 정부는 은행의 임원인사, 자산운용, 조직 등에 지속적으로 개입했고, 재벌들의 은행소유를 방지하기 위해 민영화된 은행의 소유가 분산됨으로써 은행의 주주들과 이사회도 정부의 영향력이 지대한 상황에서 은행 경영진의 경영실적을 감독하지 않는 등 민간 기업으로서의 장점을 살리지 못합니다.

외환위기 이후 초대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금융기관 구조조정을 지휘했던 이규성은 은행 민영화가 정부가 의도했던 결과를 얻지 못한 이유를 다음의 네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는 금융기관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시중은행은 민영화되고 이들이 공급하는 정책금융은 축소되었지만 이들이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이라는 인식보다 여전히 기업을 지원하는 공공적 사업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고성장의 신화가 풍미하고 있는 사회 분위기는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어렵게 하였다.

둘째로 정부는 금융자율화가 정착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려는 노력에 소홀하였다. 정부는 은행을 민영화하면서도 누적된 부실채권을 충실히 정리하지 못함으로써 민영화 이후의 은행 책임경영체제를 제대로 확립할 수 없었다. 민영화된 은행은 분산된 소유구조로 인하여 경영주체를 확립하지 못하고 은행장은 여전히 정부가 선임하였다. 또한 정책금융을 과감하게 재정으로 이관하지 못하여 정부의 관여와 보호의 관행이 지속되었다.

셋째로 기업경영의 투명성이 확보되지 못하고 차입경영이 지속됨으로써 신용평가에 의한 여신이 이루어지기 어려워 담보와 대마불사의 기준에 의한 신용공여가 시정되지 못하였다.

끝으로 금융자율화에 따라 건전성 감독이 강화되어야 하는데도 감독체계는 여전히 미흡하였으며 신용평가기관과 예금보험기구도 미비된 상태였다. 이에 따라 금융기관들은 영리기관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정부의 보호를 기대하면서 점포나 수신고 늘리기와 같은 외형성장을 추구하고 대기업 위주의 신용공여에 안주하고 있었다. (이규성, 2006, 한국외환위기 발생, 극복, 그 이후 pp.81-82)



  1. 1982년과 83년 한국 금융의 후진성을 여실히 보여준 두 사건이 ‘장영자, 이철희 어음사기사건’과 ‘명성그룹부도’입니다. ‘장영자, 이철희 사건’은 대통령의 인척이었던 장영자와 육사 출신으로 중앙정보부 차장과 국회의원이었던 이철희 부부가 자신들의 권력과 배경을 이용해 은행에서 거액의 편법 대출을 받아 그 돈을 자금 회전이 아쉬운 기업인들에게 빌려주면서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대출액의 2~9배에 이르는 거액의 어음을 담보로 받은 후, 자신들의 권력과 배경을 믿는 자산가들에게 이 어음들을 할인해 파는 수법으로 총 1천4백여 억원의 부당이득을 취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금융 사기 사건’으로 불렸는데, 사기 액수도 천문학적이거니와 부부의 사기 행각의 결과로 공영토건과 일신제강 같은 상장 기업 2개가 도산하고, 라이프주택, 삼익주택, 해태제과 등 일부 유명 기업들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또 이로 인해 이들 기업의 주거래 은행이었던 조흥은행과 상업은행의 행장들이 구속되는 등 금융권 역시 크게 흔들렸습니다. ‘명성그룹 사건’은 젊은 사업가 김철호씨가 5년 만에 21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으로 키워낸 명성그룹이 은행 직원을 통해 사채업자를 동원, 1000억원 이상의 자금을 불법 지원받은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112억원의 추징금을 부과받은 명성그룹은 사실상 와해됐고 김씨를 비롯한 관련자와 이들로부터 뇌물을 수수한 고위 공무원 16명이 구속됐으며 명성그룹의 주거래은행 4곳도 공동관리를 받게되면서 금융시장이 다시 한번 얼어붙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