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5.5.1. 노동조합운동의 중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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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12.12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부는 경제적으로는 점진적인 자율화 정책을 실시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박정희 정부의 권위주의적 독재체제를 유지했습니다. 쿠테타 직후 광주지역에서 일어난 소요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한 후, 노동정책도 70년대의 억압적인 정책을 지속합니다. 하지만, 70년대부터 지속된 중화학공업화로 대기업 소속의 대규모 공장들의 숙련공들을 중심으로 한 노조조직운동이 전개되는데, 특히 1980년 박정희 암살 직후 ‘서울의 봄’ 기간에 발생한 사북 동원탄좌, 동국제강, 인천제철 등의 분규는 지역점거, 경찰력과의 직접적인 대결, 공장파괴와 방화 등 1970년대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띱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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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
자료: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이는 1980년대 이후 노동운동의 중심이 1970년대 경공업의 여성노동자들로부터 중화학공업의 대기업 남성노동자들로 이동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초가 됩니다. 전두환 정권이 안정화 정책과 공안통치를 이어가면서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노동운동은 1980년 경제의 빠른 성장으로 인한 실업 감소와 몇몇 부문에서의 노동자 부족사태 등의 환경이 조성되고, 1987년 1월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사건[1] 으로 촉발된 국민들의 분노가 6.10 항쟁으로 폭발하면서 같은 해 7월부터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노조 조직을 시작으로 노동조합 결성운동과 이에 따른 노사분규(labor disputes)가 전국적으로 확산됩니다. 이 시기 노동자들의 요구는 크게 임금인상과 노동조합 활동 인정의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당시 강력했던 민주화 요구에 따라 정부가 경찰력을 투입하거나 노조 지도자들을 연행하는 것을 자제하면서 전국의 거의 모든 대규모 사업장에서 노조조직 운동이 발생하고 이에 부정적으로 대응한 기업가들과의 갈등으로 노사분규가 폭증합니다. 아래 그림은 연별 노사분규의 수를 보여주는데, 1975년에서 86년까지 연간 500건에도 미치지 않던 노사분규가 1987년 한해에만 3,800건을 넘어섭니다. 노동조합의 수도 1987년 6월에 2700개에서 1989년에 7,800개로 증가하고 노동조합 참여율(labor union participation rate)도 1986년의 12%에서 19%로 상승합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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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Number of Labor Disputes
Source: Korean Labor Institute (http://www.kli.re.kr)

노동자들의 임금도 빠른 속도로 상승합니다. 1987년 11.6% 상승한 임금은 88년에 19.6%, 89년에 25.1%까지 상승하고 이후 96년까지 지속적으로 두자릿수의 상승율을 유지합니다.[3]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기간동안에 제조업 생산직 노동자들의 임금이 가장 빠른 속도로 상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1981년 졸업정원제 실시로 대학의 정원이 2배로 늘어나면서 1980년대 중반 이후 대졸 노동력의 공급이 크게 증가한 반면 생산직 노동자들의 공급은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임금의 학력 프리미엄은 199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감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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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Wage by workers’ educational attainment
Source: National Statistics Office (http://www.kosis.kr)



  1.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학생 박종철은 1987년 1월 수사관 6명에 의해 연행된 훈 조사실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다가 숨지는데,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사인을 허위로 발표하지만, 부검의(剖檢醫)의 양심선언으로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 정부가 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한 사건입니다. 이후 이 사건을 조작하려했던 시도를 규탄하고 대통령의 민주적 선출을 요구하는 시위 과정에서 다시 연세대학교 재학생인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6월 10일부터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고 결국 전두환 정권은 6·29 선언을 발표,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하기에 됩니다. 1987년 6월 10일에 발생한 대규모 시위는 한국의 정치체제가 권위주의적 독재체제에서 형식적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전환점이 됩니다. (자료: 민주화운동 기념 사업회)
  2. 1987년 이전의 노동조합 조직율은 과대평가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상당수의 기업들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임의로 조직한 소위 ‘어용노조(company-controlled union)’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87년의 노동조합운동의 중요한 성과 중 하나는 이런 어용노조들이 많이 사라지고 노동자들에 의해 설립된 대표성을 가진 노조들이 설립되었다는 점입니다.
  3. 80년데 노동자들의 임금상승은 그동안 억눌려왔던 노동자들의 권리 확보라는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지만, 이후 90년대에도 지속된 두자릿수 임금상승율은 한국 기업들의 비용을 높이고 수익성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