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6.2.2. 수입자유화와 자본시장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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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개방은 수입자유화 조치와 자본시장 개방 두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수입자유화 조치는 1978년 처음 시도했다고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해 중단되었다가 1984년부터 점진적으로 다시 추진됩니다. 특히 1986년부터 경상수지가 흑자로 돌아서고 그 규모가 커지면서 우리나라는 1990년 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 and Trade) 11조국 즉, 국제수지를 이유로 수입제한을 할 수 없는 국가가 됩니다. 또 대미 무역흑자가 지속되면서 한미간 통상마찰이 심화되면서 정부는 1995년 관세율을 34.4%에서 9.8%로 대폭 인하하고 수입 수량규제도 점진적으로 풀어서 1995년에는 자유화율이 92%까지 상승합니다. (Koh, 2012) 이에 따라 상품에 대한 수입규제는 OECD수준으로 완화됩니다.

자본시장도 정부가 OECD가입을 추진하면서 1980년 후반부터 준비했던 외국인에 대한 국내 증권시장 개방은 대상과 범위가 단계적으로 확대됩니다. 주식부문에 있어서 1992년 1월 증권관리위원회는 외국인 주식매매거래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여 상장법인 중 일반법인에 대해서는 발행주식 총수의 10%, 공공법인에 대해서는 총 8%를 한도로 외국인이 국내 상장주식을 직접 취득할 수 있도록 합니다. 또 이 때부터 외국증권사의 한국내 지점 설립이 허용됩니다.

하지만, 정부가 자본의 유입과 유출로 인한 경제의 불안정을 우려해서 신중한 입장을 취하면서 자본시장의 개방은 상품시장의 개방보다 느린 속도로 진행됩니다.

정부가 이렇게 신중한 입장을 취한 것은 이전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자본시장을 개방한 후 금융위기를 맞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자본시장 개방이 금융위기로 이어지는 이유는 자본거래가 자유화되면서 상대적으로 금융비용이 낮은 해외자본이 대거 유입되고 이에 따라 국내 금융기관들의 대출경쟁이 촉발되어 기업들의 부채가 증가함과 동시에 주식시장이나 부동산 시장에 버블이 발생하고 결국 이 버블이 붕괴되고 부동산 대출과 기업대출이 부실화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위험 때문에 한국 정부는 보다 신중한 전략을 취하는데, Kim and Shin(2003)은 이 시기 정부가 취한 자본시장 개방 전략을 ‘은행 중심의 자유화(bank-centered liberalization)로 규정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정부는 국내 은행의 자본거래와 외환거래는 자유화하면서 여타 자본출입에 대해서는 자유화를 연기하거나 상당한 제약을 가했기 때문에 개인이나 기업에 비해 은행은 해외 채권발행과 외화차입에 더 자유로웠습니다. 실제로 1992년 주식 및 채권시장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 허용되면서 해외투자가 빠르게 유입되지만 여전히 은행을 통한 기타 투자의 순유입도 높은 수준을 유지했습니다. (표 참조)

정부는 이렇게 자신의 통제하에 있었던 은행을 중심으로 자유화를 추진함으로써 자본자유화가 낳을 수 있는 위험을 최소화하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은행을 이용하는 방식은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기와 1980년대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사용했던 방식으로, 정부는 1990년대 자본시장 자유화에서도 유사한 은행중심의 자유화를 통해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정부는 은행 및 비은행 금융기관들의 해외활동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합니다. 정부는 규제 완화를 통해 금융기관들의 국제경쟁력을 기르겠다는 의도였고 이런 규제 완화가 국내 경제의 안정성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해외활동 규제 완화와 동시에 24개의 투자금융회사들이 종합금융회사로 전환되면서 해외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국내 은행들 또한 28개의 해외지점을 개설하면서 이들이 조달한 해외부채가 급증하게 됩니다. 특히 이들 금융기관들은 단기 외화차입이 치중하는데, 단기외채가 급증한 이유는 한국 경제상황에 대한 정보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투자의 위험을 줄이고자 단기투자를 선호한 외국자본의 이해와 금융비용을 줄이고자 상대적으로 이율이 낮은 단기채를 선호한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1] 당시 외채의 GDP 대비 비중은 약 25퍼센트로 과거에 비추어 크게 높지는 않았지만, 단기외채의 비중이 지속적으로 높아져서 96년 외환위기 직전에는 단기외채의 비중이 전체 외채의 58%까지 올라갑니다. 아래 표는 1992년부터 97년까지 은행과 종금사들 그리고 기업들의 직접적인 외화차입이 얼마나 빠르게 증가했는지 그리고 차입된 외화 중 단기차입의 비중이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줍니다.

표 6.1. Foreign Capital Inflow in Korea (in 100 million U.S. dollars) Source: Bank of Korea, The Balance of Payment, various issues.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Capital 69.9 32.2 107.3 172.2 239.2 60.3
Net FDI -4.3 -7.5 -16.5 -17.8 -23.4 -19.5
Net Portfolio Investment 58 100.1 61.2 115.9 151.8 147.6
Other 16.2 -60.5 62.6 74.6 110.8 -67.9
Asset -33 -45.9 -73.7 -139.9 -134.9 -107.4
Liability 49.2 -14.6 136.3 214.5 245.7 39.5
Net Borrowing by Banks 24.3 12 89.8 134 141.5 -141.2
Long-term 12 0.8 19.5 16.1 15.3 7.2
Commercial 9 1.5 21.8 20.3 24.9 6.6
Development 0.8 -0.8 0.1 -3.5 -8.5 -0.1
Merchant 2.2 0.1 -2.4 -0.7 -1.1 0.7
Short-Term 12.3 11.2 70.3 117.9 126.2 -148.4
Commercial 7 3.9 53.8 85.2 71.9 -103.1
Development 5.9 5.6 7.8 15.6 22.4 -24.3
Merchant -0.6 1.7 8.7 17.1 31.9 -21
Non-banks (Firms) 24.9 -26.6 46.5 80.5 104.2 180.7

이렇게 단기 외채 비중이 높아지면, 비교적 적은 외적 충격에도 해외 대부자들이 채무갱신(debt rollover)를 거부하고 채무상환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경제가 외적 충격에 취약하게 됩니다. 실제로 위의 표에서 1995년에 $11.7 billion, 96년에 $12.6 billion 증가했던 은행의 단기외화차입이 1997년에는 $14.84 billion 감소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한국 은행들에게 돈을 빌려준 해외 금융기관들이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과 동아시아 금융위기에 대한 불안때문에 채무갱신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한국 은행들이 예상치 못했던 거액의 빚을 단기간에 갚아야 했고 이 과정에서 한국은행의 외환보유고가 바닥나고 상당수의 은행들이 파산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정부가 이렇게 일관되지 못하고 상충되기까지 한 정책을 펼친 이유에 대해 Koh(2012)는 자유화의 핵심인 규제개혁(regulatory reform)이 규제완화(deregulation)와 규제 개선(better regulation) 둘 다를 포함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규제개혁이 정부의 역할을 줄이는 규제완화로만 인식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또한 자본시장 개방을 통해 은행과 비은행금융기관들의 영업형태가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따라 야기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감독당국의 이해와 예측이 부족했던 점도 지적되어야 합니다.



  1. Shin and Hahm(1998)에 따르면 금융기관들이 장기가 아닌 단기 외화차입을 선호한 또다른 이유는 정부가 1993년에 외화대출의 용도에 대한 규제를 완화할 때 단기외화차입은 완화하면서 자본유출입 통제를 위해 장기외화차입에 대한 물량규제는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다 정부는 종합금융회사들이 대량으로 신설되면서 금융사들간의 대출경쟁이 격화되자 은행들이 종금사들과 경쟁할 수 있도록 은행에 대한 추가 규제완화를 실시하고 그 과정에서 장기부채의 최소비율을 60%에서 40%로 낮춤으로서 단기외화차입을 늘이는데 일조합니다. (Shin and Hahm, 1998, pp. 2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