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6.5.2. 한보그룹, A Poster Child of Poorly Managed Chaeb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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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보그룹을 설립한 정태수는 경남 진주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 교육으로는 초등학교 교육을 받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1951년부터 74년까지 말단 세무공무원으로 일했는데, 1960년대 초 서울로 전근한 그는 70년대 초 헐값에 사놓은 강원도 한 폐광에서 몰리브덴 광맥을 찾아내는 행운이 따르자 74년 한보상사를 설립한 후 1976년 삼아건설이라는 회사를 사들여 한보주택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아파트 사업에 뛰어듭니다. 1978년 강남 개발이 한창이던 시기, 한보주택은 대치동에 있는 나대지를 당시로는 거금인 20억여원을 주고 사들인 후 은마아파트를 지어 대성공을 거둡니다. 은마아파트의 성공으로 정씨는 수십억원대를 주무르는 ‘집장사’에서 수천억원대를 주무르는‘준 재벌’로 도약했고, 그는 이 돈을 바탕으로 1983년 효성그룹의 한인골프장 (현 태광CC) 인수하고 84년 금호철강을 인수해 한보철강으로 간판을 바꿔 답니다. 이후 한보철강은 한보그룹의 주력기업이 됩니다. 또, 86년에는 종로1가 신신백화점과 화신백화점, 강릉 간호전문대(현 영동대학) 도 인수하는 등 무차별적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합니다.

하지만, 정태수의 무분별한 사업확장은 1991년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는 토지구획상 아파트 건설이 불가능했던 수서지구의 땅을 사들인 후 관계 공무원들과 정치인들에대한 집중적인 로비를 통해 토지구획을 변경하는 서울시의 특별공급을 끌어내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이른바 ‘수서 비리’이 터지고 정태수는 관련된 9명의 국회의원들과 함께 구속됩니다.

하지만 곧바로 석방된 정태수 회장은 1996년 중견 건설사였던 유원건설을 인수하면서 건재를 과시하고, 한보그룹의 핵심기업이었던 한보철강은 당진에 제선, 열연제철소 건설에 착수하면서 업계 2위의 기업으로 부상합니다.

하지만, 한보철강은 1989년부터 건설부문의 손실로 부채비율 300% 초과했고 차입금 의존도도 50%를 초과한 상태였음에도, 정태수 회장은 1989년 임해철강공업단지, 1994년 제선(製銑), 열연 제철소 계획 등을 통해 한보철강의 크기를 불리는 공격적인 투자를 계속합니다. 한보는 지속적인 확장을 위한 재원 대부분을 외부차입금에 의존했기 때문에, 1993년 임해철강공업단지 건설을 위한 매립공사를 마치고 1995년 제1단계 제철소공사의 준공을 마친 1996년 11월에는 외부차입금이 약 5조원에 이르게 되고 부채대 자산의 비율이 1000%에 달하게 됩니다. 이에 주거래은행이었던 제일은행은 한보철강이 과다한 외부차입금과 그에 따른 금리부담으로 제철소 완공 후에도 적자경영이 불가피할 것으로 판단했고, 기존 대출금을 회수하게 되면서 1997년 1월 최종부도 처리됩니다.

97년 당시 재계의 자산순위 14위의 거대기업군이었지만, 동시에 4조2천억 원의 부채를 안고 있던 사상 최대 규모의 부실기업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순간 이였습니다.

이후 은행들은 대출시 자기자본 15%, 지급보증시 동일인 여신한도 30% 라는 규정까지 어겨가면서 한보에 막대한 대출을 했으며, 주거래 은행 중 하나인 제일은행은 한보철강에 자기자본의 94%에 해당하는 자금을 대출을 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후 한보비리 수사과정에서 한보그룹이 92년 대선과 96년 총선에서 정치권에 거액의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한 사실이 밝혀졌고 이는 이후 93년부터 96년까지 한보그룹에 대한 금융권의 특혜 대출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이 사건으로 당시 현직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씨와 안기부 차장이었던 김기섭씨가 구속되는 등 정치권에도 큰 파장을 일으킵니다. 물론 한보그룹도 공중분해됐고 정씨와 그의 아들 두 명은 총 2천4백억원이 넘는 세금을 내지 않은 상습고액체납자 명단의 맨 위에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한보그룹부도사태에 대에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지는 “한보철강 도산은…정부가 나서서 미심쩍은 사업프로젝트나 과중한 부채를 안고 있는 기업, 취약한 은행부문 등에 투자를 지원해 주고 있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결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경우”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신동아’지는 다음과 같이 논평합니다.

한국에 진출해 있는 외국 금융기관 관계자들은 『한보그룹도 문제지만 한보와 거래한 금융기관들은 더 큰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시카고제일은행 마이클 브라운 서울지점장의 말을 들어보자. “한국의 은행들은 스스로 「기업」이라는 사실을 너무 자주 잊는 것 같다. 정치적인 배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은행이 「상업적인 판단」을 기초로 경영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거래기업 하나에 은행의 납입자본금을 넘는 금액을 대출한다는 것은 자산 구성의 ABC를 무시한 것이다. 이런 사건은 은행장 선임과정과도 꽤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은행장이 「서열에 따라」, 기존 은행장이라는 「직책을 이용해」, 「누구의 친구이기 때문에」 선임되는 풍토에서는 정상적인 경영이 불가능할 것이다.” 관치금융, 더 본질적으로는 정치금융에 매여 있는 우리 은행의 관행을 꼬집는 말이다. 이번 한보사태는 우리 나라에서 금융개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다. (신동아, 1997년 3월호 “금융자율화 허울 쓰고 정치실세가 금융지배”)

자료: 국가기록원, ‘한보철강부도’ (http://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16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