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미국:The earth and its peoples :A global story. volume II, Since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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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차

    • 16장 해양혁명, 1550년까지
  • 5부 지구를 뒤덮은 인간의 발길, 1500-1750
    • 17장 유럽의 변화, 1500-1750
    • 18장 미국 식민지 사회의 다양성, 1530-1770
    • 19장 대서양 체제와 아프리카, 1550-1800
    • 20장 유럽과 중국 사이, 1500-1750
    • 21장 세계적 조망에서 본 동아시아
  • 6부 세계를 뒤바꾼 혁명, 1750-1870
    • 22장 초기 산업혁명, 1760-1851
    • 23장 대서양 세계의 혁명적 변화, 1750-1850
    • 24장 제국시대의 육상 제국, 1800-1870
    • 25장 아메리카대륙의 국가건설과 경제적 변화, 1800-1890
  • 7부 세계적 다양성과 지배, 1750-1945
    • 26장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의 제국주의 면모, 1750-1914
    • 27장 새로운 세력 균형, 1850-1900
    • 28장 제국 질서의 위기, 1900-1929
    • 29장 생활 혁명, 1900-1950
    • 30장 구질서의 붕괴, 1929-1949
  • 8부 지구공동체의 재앙과 희망, 1945-현재
    • 31장 냉전과 탈식민지화, 1945-1975
    • 32장 냉전의 종말과 경제개발 및 이민의 도전, 1975-2000
    • 33장 새천년의 새로운 도전

2. 한국 관련 내용

p.524 (삽화)
조선의 거북선 그림은 16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여러 차례 일본의 공격을 물리친 이순신 제독이 지휘하는 조선의 전함 함대를 보여준다. 이순신 제독은 거북선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데, 아마도 철판으로 덮었을 이 배의 갑판은 회색으로 그려져 있다.



p.525
East Asia in Global Perspective 그러나 (16)세기 말, 1592년부터 1598년까지 폭력 면에서 19세기나 20세기의 전쟁만이 능가할 수 있는 무력충돌인 임진왜란(Imjin War)이 조선, 일본, 중국 사이에 벌어졌다. 중국 정벌을 시도하던 일본은 결국 쇠약해진 명나라가 새로운 적수를 만나도록 내버려둔 후 그들의 섬으로 돌아갔다. 초토화된 전쟁터였던 조선은 여러 세기 동안 전쟁피해에서 회복되지 못하였다.

(15 및 16)세기는 동아시아에서 보다 큰 문화적 상업적 군사적 관계들이 이루어진 시기로, 근세초기(early modern)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해양 네트워크는 육상 실크로드 교역으로 대체되었다. 이를 통해 유럽인들이 더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중국, 조선, 일본에서 일부 사람들은 유럽인의 도래를 환영했으나, 조선과 일본의 통치자들은 점차 외국의 영향을 억제하고자 했다. 근세의 일본과 조선은 점차 상대적으로 평화를 누리게 되지만, 중국은 근세 초기와 말기에 대규모의 전쟁, 반란, 자연재해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각국은 그 전성기에 유럽의 성취에 맞먹는 상업적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다.



p.529
The Imjin War and Japanese Unification 동아시아 역사상 20세기 이전의 가장 큰 전쟁인 임진전쟁은 유럽인의 개입이 없었다. 임진년에 일어났기에 이처럼 한국어로 이름이 붙었지만, “조선전역”등 한문으로 된 이름도 여러 개 있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히데요시의 침공” (秀吉侵攻)이라고 부른다. 7년(1592-1598) 동안 이 전쟁은 조선에 장기잔 지속된 영향을 미쳤으며, 중국의 명왕조의 몰락을 재촉했고, 오늘에까지 지속되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악감정을 유발했다…

미천한 농민 출신이지만, 히데요시는 전사 계급을 거쳐 출세를 하여 마침내 전국을 통일했다. 그는 일본에 대한 통치를 다지는 중인데도 중국을 정복하기 위해 한국을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이 밖에도 그는 가신들을 멀리 필리핀의 스페인 총독과 고아(서부 인도)의 포르투갈 총독에게 보내 자기에게 복속하여 조공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1592년, 일본 통일의 진척에 고무된 히데요시는 지극히 자신 만만하게 16만의 침공군을 아시아 본토에 보냈다. (Diversity & Dominance: 조선 사신단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다 참조) 그가 침공을 결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국내의 정적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주요 다이묘들을 나라밖의 전쟁으로 바쁘게 만들어서 반란을 못 일으키도록 하기 위해서, 기독교도 다이묘(한국에 보낸 침공군의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는)들을 내쫓기 위해서, 동아시아 무역 네트워크를 장악하기 위해서 등등. 그러나 그의 목표는 중국이었다.

수세기에 걸친 평화와 궁중의 당파싸움으로 조선은 전투에 단련된 사무라이들이 이끄는 군대를 대적하기에는 준비가 허술했다. 그러나 조선이 대규모 총포 제작과 훈련에는 실패했지만, 전쟁이 터지자 정책이 바뀌어 대포를 갖게 되었다. 초기에는 크게 패했지만, 그 후 조선을 구해낸 것은 명나라 군대와 조선의 앞선 해군전략이었다.

조선에 보낸 다이묘들의 군대는 육전에는 능숙하지만 일본 해군은 본격적인 전투를 할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일본군 함대의 일부를 유격하기 위해 조선의 이순신 제독은 기동성이 높고 대형 대포를 갖추고 갑판을 완전히 덮은 “거북선”을 성공적으로 배치하였다. 이순신은 약 23차례의 잇단 해전에서 승리를 했다고 전해진다. 육지에서 조선은 중국에 도움을 청했다. 조선을 피보호국(client state)의 하나로 여기는 중국은 이에 응했다. 처음에 명나라는 수천 명의 병력만을 보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군사적 성공과 그의 군대가 실제로 중국으로 진격해 올 것을 우려한 중국 황제는 더 많은 군대를 보냈으며, 그 수는 점차 10만에 이르렀다.

1593년, 중국은 일본과 평화를 교섭했으나 얼마 후 히데요시는 평화의 조건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다. 그의 군대는 1597년 재침공을 하여 한반도를 북진하면서 잔인하고 보복적인 수단을 사용했다. 그러나 많은 다이묘들이 중국을 격파하겠다는 히데요시의 꿈에 흥미를 잃어갔고, 대신 조선 남부의 몇 개 지방을 확보하기를 희망했다. 건강이 나쁜 히데요시 역시 점점 전쟁에 지쳤다. 죽음을 맞은 병상에서 히데요시는 모든 군대를 조선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명령은 그가 죽은 후 1598년 집행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과 평화를 되 찾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렸다. 정식 관계는 1617년까지 재개되지 않았다.

이 침공은 조선을 초토화했다. 일본이 철수 한 후 조선의 지배층은 많은 징세 대상 토지의 소유권을 주장함으로써 왕실의 조세수입은 3분지2로 줄어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경작 가능한 땅의 약 80%가 황폐화되었으며, 인구의 20%가 죽거나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에 끌려간 사람 중에는 유학자와 장인들도 있었다. 이 전쟁을 때로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특히 조선의 도자기 기술이 매우 앞서 있어서 조선에서 이주한 장인들이 전후 일본의 도자기생산을 바꾸어 놓은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중국도 끔찍한 후유증을 겪었다. 조선에서의 전쟁은 황제가 북방 민족과 전투를 하는 시기에 명의 재정을 고갈시켰다. 재정을 회복하기 위해 황제가 새로운 세금을 매기자 지방에서 항의가 거세었다. 만주에서의 전투로 그곳에 있는 중국의 주둔군은 약화되었고, 만주의 세력은 공고화되었다. 만주 군대는 1620년 한국을 침공하여 마침내 한국을 조공국으로 만들었다. 1644년 만주는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을 장악하게 된다.



p.532
Environment + Technology: East Asia Porcelain 1400년대부터 중국, 조선, 일본은 모두 표면에 반짝이는 광택이 있는 고급 도자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p.533 Choson Korea
임진왜란 이후의 회복이 1630년대 후반까지 지속된 만주의 침입으로 방해를 받았다. 한국의 왕이 새로운 청 왕조에 복속한 뒤에도 관리들 사이에서 일어난 당파싸움이 격화되었다. 이는 조선 왕조 내내 부침을 거듭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왕조였다 (13장 참조). 한국문화는 오래 전부터 한국의 통치자들이 조공을 해 온 중국으로부터 지배적인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한국어와 일본어는 밀접한 관계에 있고, 한국은 1443년 독자적인 문자 제도를 개발하고 15세기 이후 활판인쇄를 널리 사용했지만, 대부분의 인쇄는 계속 한자를 사용했다.

여러 가지 점에서 조선왕조는 모범적인 유교국가였다. 정부는 같은 이름을 가진 중국의 제도를 본 딴 과거 시험 합격자로 구성되었다. 실제로는 아닐지라도 이론적으로 중국에서는 누구나 과거를 볼 수 있지만, 16세기 조선에서는 과거를 보고 정부에서 실권을 갖는 지위에서 일하려면 양반으로 태어나야만 했다. 글자대로라면 “두 개의 집단”을 뜻하는 양반은 세습적 지위를 가진 집단으로, 문관과 무관 시험을 독차지하고, 중앙과 지방의 거의 모든 관직을 차지했다. 평민들은 이례적으로만 사회적 이동이 가능하여 시험을 보아 무관이 되어 양반이 될 수 있었지만, 문관들은 이 지위를 늘 얕잡아 보았다. 문관들은 전쟁의 피폐 회복에 방해가 되는 역할을 하였다.

영향력이 커진 유교는 다른 동아시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선왕조 내내 여성에 대한 자세에 영향을 주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왕조 초기 여성들은 결혼을 하고도 남자 형제들과 함께 족보에 올랐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여성이 결혼을 하면 태어난 가족의 호적에서 제거되었다.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유교의 가르침은 과부의 재혼을 억제했다. 그러나 중국 일본과 마찬가지로 조선 여성들은 여성에 대한 유교의 교리와 타협을 했다. 여성은 무당 자리를 차지하고 영향력 있는 왕족이 되었으며, 때로 어떤 여성은 철학자가 되기도 했다. 다수를 이루는 평민과는 달리 양반은 호구세를 내지 않았고, (무반이 아닌 경우) 병역도 치르지 않았다. 조선시대 양반은 한 때 인구의 30%나 되었던 종의 대부분을 소유했다. 사적으로 소유한 종 외에도 지방 정부는 사무 일과 노역을 하는 종들을 두고 있었다. 심지어 불교 사찰에서도 종을 거느리고 있었다. 18세기에 와서 도망을 가는 종이 늘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대부분 양반들이 농사일에 가난한 평민을 고용하게 됨에 따라 종의 숫자는 인구의 약 10%까지 줄었다.



p.538
Diversity + Dominance: Korean Envoy Meet with Hideyoshi Toyotomi

조선의 사신들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다

유교교육을 받은 고위 관리 유성룡은 임진전쟁의 이야기를 집필했다. 전쟁 중 유성룡은 군을 개혁하고 이순신 제독이 해군을 지휘하도록 추천했다. 이 결정이 조선을 구했다. 유성룡은 또 조선의 국왕이 조선땅에서 도망을 가지 않도록 설득을 했다. 이러한 행동이 군인과 일반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유성룡의 회고록에서 발췌한 아래의 글은 히데요시가 중국 침략 의도를 밝힌 조선 사신 접견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또한 조선이 일본, 특히 히데요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두 나라의 외교 절차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묘년(1591년) 봄, 사신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승려 겐소가 사신들과 함께 왔다.

황윤길을 비롯한 사신단은 1590년 6월 부산포에서 대마도(조선과 일본 사이에 있는 일본의 섬)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들은 이키 섬으로 항해하기 전에 대마도에서 한 달 동안 머물렀으며, 마침내 8월21일 일본의 수도(쿄토)에 도착했다. 일본은 사신 행렬을 일부러 먼 길로 돌아 가도록 만들고 각 도착지 마다 체류날짜를 연장하여 수도에 도착하는데 몇 달이 걸리도록 만들었다.

대마도에 머물면서 요시토시(대마도 도주)는 한국의 사신단을 산에 있는 절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그러나 조선의 손님들이 가마를 타고 늦게 도착한 도주를 기다리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가마를 탄 채 그는 집안으로 들어와 마당의 댓돌 앞에 이르기까지 가마에서 내리지 않았다. 크게 모욕을 당한 김성일은 성난 목소리로 항의했다. “대마도는 한 때 우리 나라에 조공을 드렸다. 우리는 주상의 명으로 이곳에 왔다. 어떻게 우리를 모욕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연회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즉각 일어나 그 자리를 떠났고, 호성 등도 바로 그 뒤를 따랐다. 요시토시는 자기의 잘못을 그를 가마에 태워 온 사람들에게 전가하여 그들을 꾸짖고, 종복들의 목을 잘라 그들의 머리를 손님들에게 바쳤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일본인들은 김성일을 두려워하고 그를 더 공손히 대하려고 했다. 그들은 멀리서 김성일을 보기만 해도 예의를 표하기 위해 말에서 내렸다.

우리 사신단은 큰 사찰에 숙소를 정했다. 사신단이 처음 도착했을 때 그들은 바로 히데요시를 접견할 수 없었다. 그가 토산도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히데요시가 돌아올 때까지 몇 달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돌아와서도 그의 궁궐을 수리해야 해야한다는 구실을 붙여 우리의 국서를 받지 않았다. 그 결과 우리 사신단은 일본에 도착한지 5달 만에 히데요시를 만나 우리 국왕의 국서를 전할 수 있었다.

우리 사신단을 만났을 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사신단이 가마를 탄 채 궁궐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용했을 뿐 아니라 풍악에 맞춘 외교적 의례를 관람하는 단상에 마련된 그의 자리로 안내하게 했다.

보고에 의하면 히데요시의 풍채는 작고 볼품이 없었으며, 얼굴은 검었고, 날카롭고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 외에는 특이한 점이 없었다. 우리 사신단을 만나기 전 그는 자리를 세 줄로 정돈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신하 몇 명이 우리 사신단을 자리로 안내하고 그들도 검정 옷에 모자를 쓰고 마루 바닥에 남쪽을 향해 앉은 히데요시 주변에 둘러 앉았다.

방안의 분위기로 볼 때 우리 사신들을 잘 대접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일본인들은 앞쪽에 상을 하나 놓고 그 위에 떡 한 그릇만 올려 놓았다. 그들이 내놓은 술은 조잡했고, 유약을 안 입힌 도기 잔으로 대접했다. 그들의 의례 절차는 매우 단순했다. 술잔을 몇 순배 돌리는 것이 전부였다. 술잔을 교환하는 것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잔을 마시기 전에 서로 고개를 숙여 읍하는 것도 없었다.

잠시 후 히데요시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방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조용히 있었다. 잠시 후 좀 떨어진 곳에서 평복을 입은 한 남자가 팔에 아기를 안고 나타나 마루 위를 거닐고 있었다. 그 남자는 바로 히데요시였으며,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앞에서 부복을 했다. 마침내 히데요시는 조선의 악사들을 데려오도록 하여 각종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였다. 음악을 즐기는 중 히데요시가 안고 있던 아기가 오줌을 쌌고 그는 큰 소리로 웃으면서 뒤처리할 사람을 불렀다. 시녀 한 사람이 달려와 그가 안고 있던 아기를 받았고, 그는 옷을 갈아 입으러 다시 방을 나갔다. 이들은 극단적으로 오만하게 저들 좋을 대로 행동했다. 그들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듯이 행동했다.

조선의 사신들은 히데요시와 작별한 후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조선의 사신 두 사람에게 각각 4백 량의 은을 주었다…

우리 사신들은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바랐지만, 히데요시는 사신들에게 친서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 사신들에게 우선 출발을 하라고 했지만, 김성일이 말했다. “나는 조선 국왕의 국서를 가지고 온 사신으로 이곳에 왔다. 만일 내가 귀국의 답신이 없이 돌아간다면 내가 마치 국서를 버리고 온 것처럼 보일 것이다.” 상황을 조심스럽게 판단해 본 황윤길은 일본측이 그를 억류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김성일 보다 먼저 출발하여 사카이 시에서 편지를 기다렸다.

마침내 히데요시의 편지가 도착했지만, 그 내용이 너무 무례하여 김성일은 그대로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는 편지를 고쳐 쓸 것을 요구했고, 몇 차례 다시 쓴 후 그것을 수락했다. 그들이 귀로에 들어서서 여러 도읍을 지날 때 어떤 일본인은 한국 사신단에게 선물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김성일은 그들로부터 어떤 것도 받기를 거절했다.

그들이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황윤길은 서울에 보고서를 올려 장차 일본과 무력충돌이 일어날 것이 예상된다고 경고했다. 황과 김이 서울에 도착하여 주상전하를 알현했을 때 주상께서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물었으며, 황은 그가 앞서 보고를 낸 것과 비슷한 대답을 했다. 반면 김성일은 “황윤길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조정은 서로 상충되는 이 두 사람의 보고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어떤 사람은 황윤길의 보고를 지지했고, 다른 사람은 김성일의 보고를 지지했다. 그리하여 나는 김성일에게 말했다. “그대의 의견은 사신 황윤길의 의견과 정반대이다. 일본과 실제로 문제가 생긴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이에 대해 김성일이 대답했다. “제가 어떻게 일본은 결코 조선으로 쳐들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하고자 했던 것은 황의 언사가 방방곡곡의 모든 백성을 놀라게 하고 불안에 떨게 할 정도로 너무 극단적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분석을 위한 질문 1. 한국의 사신단에 대해 다른 일본인들은 어떻게 반응을 하였는가? 2. 한국이 사신단은 일본인들과의 교류에서 무엇이 중요하다고 여겼으며, 왜 그것이 문제가 되었는가? 3. 한국의 사신단은 일본인들에게 협박을 당한 것으로 보이는가?


p.542
근세의 동아시아는 3개의 엄격하게 구분된 나라로 구성되었으며, 각국의 주민들은 통상이나 전쟁에서 변함없이 그들의 모국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일는지 모른다. 임진전쟁 중 일부 일본인은 조선에서 싸우는 일에 지친 나머지 명나라 군대에 합류하기도 했으며, 중국인들은 이들을 높은 지위로 승진시켰다. 이와 비슷하게, 일부 중국인 병사들은 한국에 남아 현지 여성들과 결혼을 하여 조선인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18세기 후반, 중국과 일본의 취약성은 유럽인들에게 보다 확실해 졌고, 궁극적으로 이 두 나라는 서방의 침투에 허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화약의 최초 사용 등 중국은 한 때 세계의 군사혁신을 선도했었지만 중국의 군사력은 새 기술 보다는 계속 수적인 우세와 전술에서 성공을 거두려고 하였다. 총으로 무장한 보병은 활과 화살, 칼과 창으로 무장한 병사들과 나란히 군복무를 했다. 일본의 군사력은 부분적으로는 서양과의 접촉을 통해서 중국과 조선보다 더 혁신적 변화를 겪었으며, 16세기 통일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자체적으로 화약혁명을 이룩했디.

그러나 그 이후 일본은 세계의 가장 앞선 군사 기술의 대열에 머물 수단을 갖지 못하였다. 끝으로 중국과 일본은 모두 국토의 크기나 해안선에 상응하는 해군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조선은 임진전쟁 중 소규모지만 효과적인 해군을 보유했었지만, 힘으로나 규모로나 중국과 러시아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p.709
(전략) 일본은 위화단의 난 진압에 참여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그들의 군사력을 과시했다. 그러던 중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패배시켜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전쟁을 끝 낸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일본은 조선을 보호령(protectorate)으로 만들었다. 서양은 일본을 신참 동반자 역할에 국한하도록 하려 했지만, 일본은 그 영향력을 계속 늘려갔다. 일본은 남만주를 산업시설과 철도와 함께 손에 넣었으며, 1910년 마침내 한국을 병합하여 세계의 식민지 열강의 대열에 합류했다.


p.798
West Versus East in Europe and Korea 2차대전이 끝난 후 소련군은 한반도의 3.8선 이북을 관장하고 미군은 이남을 맡았다. 두 나라가 한국 전체를 아우르는 선거에 합의 하지 못하자 공산주의 북한과 비공산주의 남한은 1948년 독립국가로 등장했다. 2년 후 북한은 남한을 침략하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소련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침략을 규탄하고 회원국들에게 한국 방어에 나설 것을 호소했다. 1953년 까지 계속된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한국의 으뜸가는 군사적 동맹국이었다. 미군과 한국군은 승전을 거듭하여 북한군을 북으로 몰아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산주의 북한을 돕기 위해 참전하였다.

미국은 중국으로 공격해 들어가면 중국의 우방인 소련의 보복을 야기할지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에 충돌은 한반도 안에서 머물렀다. 교전 쌍방 군대가 3.8선 부근에서 교착상태에 들어가자 양측은 휴전에 합의했지만 평화조약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 결과 남북한 사이에 새로운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우려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pp.825-826
Asian Transformation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1970년대와 80년대 일본의 발전모델을 모방했다. 이 나라들은 외국의 경쟁으로부터 신 산업들을 보호하면서, 산업과 은행간의 긴밀한 동맹을 장려했다. 이들 중 가장 크고 성공적인 나라, 보통 남한이라고 부르는 대한민국은 값싼 노동력과 강력한 기술교육, 그리고 대규모 산업화 노력을 지원하기 위한 상당한 국내자본 보유를 결합하여 활용하였다. 철강과 조선, 그리고 자동차와 소비용 전자제품 등 소비산업에서 성공을 거둠으로써 한국은 세계적인 경제 강국이 되었다.


p.835
도표 32.1 연령구조 비교 이슬람 국가(파키스탄), 비이슬람 개발도상국(한국), 선진국(스웨덴), 2001 노령과 청소년 인구

인구학자들이 만든 인구 피라미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인구재생 패턴과 기대수명의 중요한 변화를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도표 32.1은 발전 단계가 상이한 세 나라, 파키스탄, 한국, 스웨덴의 2001년도 연령별 인구분포를 보여준다. 스웨덴은 성숙한 산업국가이며, 한국은 급속히 산업화하는 나라로서 산업생산이나 인당 부(富)에서 많은 유럽 국가들을 앞질렀다. 파키스탄은 빈곤한 전통 무슬림 국가로서 초보적인 산업화와 낮은 교육 수준의 나라이며 효과적인 가족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2001년 파키스탄의 인구는 거의 50%가 16세 이하이다. 그것이 경제에 가하는 압력은 막중하다. 매년 약 15만 명이 65세에 도달하며, 120만 명이 16세가 된다. 그러므로 파키스탄은 1년에 100만개 이상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내거나 아니면 실업증가와 임금저하를 감수해야 한다. 스웨덴은 다른 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스웨덴은 인구의 고령화로 사회복지 혜택의 수요는 늘어나는데 노동인구는 줄어들어 산업이 경쟁력을 잃고 생활수준이 떨어질 수 있다. 한국에서는 출산율이 낮아져서 성인과 아동의 비율이 극적으로 바뀌고 있어서 서유럽과 비슷한 연령분포를 보이고 있다.


p.852
Global Financial Crisis 2008년의 세계경제위기는 복잡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 10년 전 아시아 금융위기 때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 그리고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 유럽과 미국의 막대한 투자는 거대한 경제적 역동성이라는 환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1997년 투자 붐은 가라앉고 이 지역에 심각한 경제불황이 닥쳤다...

3. 간략 분석

중등학생 대상의 세계사 교과서로서 1500년까지를 다룬 1권에 이어 1500년부터 현재까지 세계사적 사건과 시대별 흐름을 다루고 있다. 총 17장으로 각 주제는 유럽의 변화, 미국 식민지 사회의 다양성, 대서양 체제와 아프리카, 유럽과 중국 사이, 세계적 조망에서 본 동아시아, 초기 산업혁명, 대서양 세계의 혁명적 변화, 제국시대의 육상 제국, 아메리카대륙의 국가건설과 경제적 변화, 아프리카‧인도‧동남아시아‧라틴 아메리카의 제국주의 면모, 새로운 세력 균형, 제국 질서의 위기, 생활 혁명, 구질서의 붕괴, 냉전과 탈 식민지화, 냉전의 종말과 경제개발 및 이민의 도전, 새천년의 새로운 도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관련 서술양은 매우 많은 편이며, 주로 ‘21장:세계적 조망에서 본 동아시아’부분에서 나타난다. 특히 임진왜란을 독립적으로 구성하여 거북선의 삽화와 함께 배경과 발발과정, 결과 등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음이 주목할 만하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히데요시의 침공” (秀吉侵攻)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은 초토화되었으며, 인구의 20%가 죽거나 일본으로 끌려갔고 이 가운데 유학자와 도자기 장인들도 포함되어 있어 이 전쟁을 때로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른다고 묘사하고 있다. 또한 같은 장에서는 ‘조선의 사신들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조선의 고위관료 유성룡의 회고록을 발췌하여 수록하고 있음이 특징적이다. 회고록과 더불어 회고록 분석을 위한 질문을 포함하여 학생들에게 조선이 일본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두 나라의 외교 절차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고 있다. 또한 한국관련 내용은 ‘31장: 냉전과 탈 식민지화, 1945-1975 ’에서 나타나며 한국전쟁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4. 검토 의견

페이지 한국 관련 기술 내용 검토 의견 개선 과제 코드
- 개선 과제 코드 -
개선 과제 유형
A: 동해·독도 표기 수정 필요 B: 단순표기 C: 내용 수정 필요 D: 내용 증·신설 필요 E: 기타
A1: 동해 표기 A2: 독도 표기 C1: 통계 C2: 과거 사실 C3: 객관적 기술 D1: 증설 필요 D2: 신설 필요

연계 정보

관계 대상 문서 설명
isRelatedTo 교육제도:미국 미국 교육과정, 2016년 조사 보고
isReviewOf 교과서 서지사항 분석대상 교과서 서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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